지적설계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
지적설계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
근래에 들어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지적설계운동(Intelligent Design Movement)은 초월적인 원인에 의한 생명체의 설계에 대해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일련의 움직임이다. 우리 모두 지적설계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을 알고 있듯이 이 운동은 종교적인 운동보다는 과학적인 운동으로 그 입장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표면적인 입장을 취한다 하더라도 그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 상, 설계자에 대한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고 이것은 곧 유신론에 대한 관심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 지적설계운동은 과거 아퀴나스에 의해, 18세기 에는 팔레이의 시계공 논증으로, 최근에는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 운동에 의해 기독교 내에서 줄기차게 주장되어졌던 가장 기본적인 유신론적 논증의 연장선 상에 있다.
현재 우리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생명체의 복잡성이 계속해서 과학적으로 밝혀지면서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이 생명체의 설계를 인식할 수 있을 때가 곧 올 것 같지만, 몇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는 생명체의 복잡성을 보인 연구결과가 그리 많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책은 마이클 베히의 "Darwin's Black Box"외에는 없다. 설계 논증에 대한 자료는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의 지적설계운동의 과학적 자료가 풍부한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우려는 지적설계의 목표 그리고 운동의 방향성이다. 무엇을 위해서 움직이는가? 좁게는 올바른 과학의 성취인가? 기독교 학문의 실현인가? 선교적 수단인가? 아니면 그 무엇인가? 지적설계운동이 반드시 기독교인(개신교인과 카톨릭교인)만이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적설계의 본질적인 의미로 보나, 참여하는 이들을 고려할 때 기 독교적인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진다. 셋째로는 지적설계운동을 하기 위한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있어야 하지 않나하는 것이다. 철학적·신학적 배경지식 없이 과학 지식만을 가지고서 주장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라면 신앙의 선배들이 쌓아놓은 지식을 버려 두지는 않을 것 같다.
본 글은 크게 지적설계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
지적설계는 일반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접촉점 또는 지식의 방법론이 될 수 있는가?
-
지적설계운동은 일종의 자연신학인가? 그것은 과연 성경적인 입장인가?
-
지적설계운동은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시도인가? 그것은 가능한가?
-
지적설계를 둘러싼 기독교 지성운동은 어떤 철학적·신학적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어떤 이에게는 재미있는 주제로 보이겠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이 글의 내용이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적 얘기로 보일 수도 있으며, 필자로서도 그와 같은 점들이 다소 걱정된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야만 했던 유럽의 종교개혁은 이와 같은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에 의해 일어났으며, 이 땅 전역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진화론의 등장이 가능했으며, 우리 문화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이 유발되었음을 아는 이들에게는 단지 학문적인 고리타분한 주제로 보이지는 않으리라 믿어본다. 이 글의 주된 목적은 지적설계와 연관된 질문들에 대한 철학적·신학적 배경지식을 제공하는 데 있다. 물론 개인적인 결론은 내리겠지만, 그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 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다양한 신학적 입장을 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장하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 속에서 실패와 성공을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1. 접촉점
우리가 지적설계를 바라보면서 가지게 되는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창조주에 의한 지적설계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인가?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공통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공통 영역"으로 받아들여지는가? 두 번째 질문은 지적설계이론은 그와 같은 "공통 영역"으로서의 지적설계라는 사실을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알려줄 수 있으며, 또한 지적설계가 사실임을 사람들이 어떠한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가? 와 같은 것이다. 또한 만약 그와 같은 공통 영역이 존재 한다면, 소위 지적설계이론이 사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비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이 방법론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지적설계를 받아들이게 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인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얻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입장들의 차이점을 분석해 보려고 한다.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있어서, 기본적으로 파악해야 할 요소가 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에 대한 것이며, 두 번째로는 그 계시를 받아들이는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이 두 가지 대상에 대한 관점을 정립하는 것은 모든 유신론적 논증과 논의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이며,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가장 일차적인 준비임에 틀림없다. 이 두 가지 관점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신학자들마다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문제는 앞글에서 지적설계와 지적설계이론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본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인정할 수 있는 "공통 영역"이란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과 그와 같은 것을 인식시킬 수 있는 방법론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에 있어서 다양한 입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크게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고 다시 개신교 내에서 칼빈주의와 비칼빈주의 입장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리스도를 변증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공통된 영역의 존재 유·무에 대한 입장은 접촉점(point of contact)에 대한 입장으로 다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과연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접촉점은 무엇인가? 이 접촉점에 대한 견해는 기본적인 인간론과 자연신학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시키며, 세부적으로는 과학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의 다양성을 유발시킨다. 이에 대한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의 신학자 반틸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의 마음은 그것이 얻게 되는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자신의 것을 덧붙이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만일 신자와 불신자가 인간이 어떠한 성격을 가진 존재인지에 대해 일치할 수가 없다면, 그 둘 사이에서 지 식에 대한 어떤 공통적인 영역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사실 상 그와 같은 의견일치는 존재하지 않는다."1,2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의 접촉점에 대한 입장
그러면 이제부터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가 바라보는 접촉점에 대한 입장차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를 위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입장 차이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로마 카톨릭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개신교와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그의 조직 신학 책에서 다음과 같이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창조하셨는데, 인간의 본성을 이루고 있는 이 두 가지 요소는 본질적으로 서로 상충되었으며, 두 요소의 조화와 영에 대한 육의 적합한 복종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본래적 의라는 초자연적인 은혜를 인간에게 주셨다. 인간의 타락은 이 은혜를 상실한 것을 의미한다."3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카톨릭의 입장으로 볼 때 인간의 지성과 의지 라는 본성은 손상되지 않았다. 인간의 타락은 조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던 은혜의 소멸을 의미할 뿐, 인간은 창조 당시 부여받은 지성과 의지를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올바른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얻어진 결과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그 기원을 따라가다 보면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본성에서 발견되는 혼란은 인간의 부분적인 비이성적 요소에 의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본질적으로 그 책임은 인간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입장은 이와 다르다.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지음을 받았을 때에 인간의 본성에는 대혼란의 소지가 전혀 없었으며, 그 대혼란은 죄의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범죄함으로써 타락한 인간의 모든 기능은 비정상적으로 움직인다"4라고 보았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개신교에서는 본래적 의는 창조와 더불어 동시에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며 또한 자연적인 것임을 주장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카톨릭에서는 그것이 초자연적으로 주어졌다는 의미이다. 이 둘의 차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에 대한 기본적인 견해차이에 서 비롯된다. 로마 카톨릭은 인간의 이성이 가치 있는 것이며, 인간의 타락과는 전적으로 무관하여, 지금도 유용한 것이므로 인간의 이성을 통해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다고 바라보았다. 이와 같은 입장은 이후 자연신학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뒷부분에서 다룰 하나님의 존재 증명은 이와 같은 전제하에서 이루어진 작업들이었다. 그러면 개신교는 어떤가? 칼빈이 말한 것처럼 개신교에서는 인간의 이성은 죄로 인해 타락하였고 손상되었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인간의 이성에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밀쳐내고 인간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으려고 하는 죄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칼빈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철학자들은 유기적인 활동들과 영혼의 이성적 부분 사이에는 상당한 상충이 있다라고 말 한다. 이성의 조언이 때로는 적대적인 군대들처럼 서로 싸우지만 이성은 이성 자신이나 이성이 제시하는 여러 조언들과 전혀 마찰이 없다는 듯이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혼란은 본성의 타락과 부패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비록 이성의 기능이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조화 있게 일치되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두 개의 영혼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추론이다."5
그런데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입장 차이가 무슨 문제가 되는가라고 의문시하는 이 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내용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우리가 관심 있는 접촉점에 대한 답을 찾는데 이 점이 중요한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의 신학은 인간의 지성, 이성은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 또는 그 어떤 것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공통적인 영역, 접촉점이 존재하며 인간은 이성을 통해 이것을 발견하여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다는 설명을 하게 된다. 이것이 실제 로마 카톨릭의 자연신학에 있어서 기본적인 전제인 것이다.6
그렇다면 개신교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공통된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인가? 만약 인간의 이성이 타락하여 완전하지 않다면, (순수한 이성을 통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함께 인정할 수 있는 공통된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7 만약 그런 영역이 있다면 인간은 스스로 공통된 영역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필요치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입장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였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을 해석함에 있어서 궁극적인 열쇠를 쥔 궁극적 참조점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문제이다. 개신교의 원리에 따르면 이와 같은 사물 해석의 궁극적인 참조점이 완전한 존재론적 삼위일체 안에서 발견된다.... 인간이 타락하여 죄인이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대신 자기 자신을 궁극적인 또는 최종적인 참조점의 위치에 세워 놓았다."8
그러나 이제 더 나아가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없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냐는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카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말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칼빈이 말한 것처럼 인간 안에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씨앗"이 있으며, 인간의 이성은 인간이 지닌 피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신의식(sense of deity)이 있으 며, 이를 전제로 한 이성 내에서 모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계시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냐에 대한 문제는 자연신학에 대해서 논할 때 살펴볼 것이다. 반틸은 로마 카톨릭의 입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인간이 사물을 해석하는 모든 서술에 있어서 궁극적인 참조점이라는 자신에 관한 이 근본적인 전제를 뒤집어엎거나 바꾸려 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인은 소위 '유신론적 논증들'을 틀림없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자연인 자신이 이러한 논증들을 제시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많은 자연인이 유신론적 논증을 제시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자연에 의해서 그들 스스로에게 이러한 방법을 통해 존재가 입증된 신들이란 한결같이 성경이 말하는 완전한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닌 어떤 신들이었다. 로마 카톨릭의 변증학자들은 성경이 보여주는 완벽한 존재론적 삼위일체 하나님을 입증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자율성을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대로 남겨둘 수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길 원했다."9
칼빈주의 대 비칼빈주의
개신교 내에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을 믿는 보편론적(universalistic) 입장과 특수한 사람들만 이 구원을 받는다는 특수주의적(particularistic) 개념이 그것이다. 벤자민 워필드는 이 두가지 입장의 핵심은 최종적인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인가 아니면 사람의 선택에 의해서인가 라는 의견 차이에 있다고 말한다.10
필자가 이해하기에는 칼빈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 같다. 만약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우리는 현실적으로 구원받지 못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위의 가정이 맞다면 구원은 마치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 다시 말해 최종적인 결정은 사람에게 있다는 결론으로 빠지게 된다. 이것은 마치 로마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칼빈주의자들은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활동을 보편주의적인 구원으로 보려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인간이 자율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면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11 이것은 더 나아가서 로마 카톨릭처럼 하나님에 대한 의식작용을 고려하지 않고도 인간이 스스로 행동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의미 있고 가능하다고 보는 것으로 확장될 위험이 있다. 이런 애매한 입장은 문제의 여지가 많고, 로마 카톨릭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되 절대 주권적인 하나님의 존재에는 관심이 없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본다. 이와 같은 우려는 실제 유추론(Analogy)을 쓴 버틀러의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기만 하면 자연 만물의 형성 본질과 그것이 나아가는 과정 모두를 바르게 알고, 또 해석할 수가 있다. 더 나아가서 만일 자연인이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와 그의 하신 일에 대해서 말하는 모든 사실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 기만 한다면 자연인은 거의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12
그렇다면 접촉점은 없다는 것인가?
우리가 지금까지 논한 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올바른 복음에 대한 변증에 있어서 인간 모두의 공통적인 접촉점으로 온전한 이성을 가정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인간론에 기초하여 증명된 하나님은 하나의 실체로서의 하나님일 뿐, 창조와 섭리의 성경적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세속 철학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잃어버리고 구별됨이 없게 되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13 그러므로 자연계시나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오는 특별계시에 대해서 인간의 본성에 의지하여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적 방법론 일반을 그대로 추종하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인이 그의 이성을 평범하게 사용함으로써 그의 주변에 널려있는 자연계시를 바로 보고 바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인이 자연계시에 국한된 범위 내에서만큼은 바른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만일 자연인이 조금도 틀림없이 자연계시를 해석할 수 있고 또 그가 실제로 바로 해석하고 있다면, 그가 기독교를 바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14
인간은 진리를 완전히 파악하고 습득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롬 1:19-20).15 다만 로마서 1장 21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을 뿐이다. 즉 올바른 개혁주의 입장은 인간이 스스로를 아는 자의식이 하나님을 아는 신의식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전제를 받아들일 때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영역이 있으며, 접촉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이나 일부 개신교는 이와 같은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자율성 또는 궁극성의 가정을 죄의 결과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 스스로가 생각해 낸 인간에 대한 정의16와 성경이 말한 인간에 대한 정의17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 일반계시와 자연신학
이제 우리는 지적설계와 관련된 두 번째 질문을 하려고 한다. 지적설계운동은 자연신학의 일종인가? 그리고 생물의 복잡성을 일반계시로서 받아들일 때 어느 정도까지 기대할 수 있는가? 그와 같은 기대는 성경적인가?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들을 살피기 위해 계시와 자연 신학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
자연신학을 논함에 있어서 계시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하는 것이 올바른 글의 순서라고 생각된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주시는 것을 일반적으로 의미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 정통주의에서는 일반적으로 자연계시(일반계시)와 초자연계시(특별계시) 이렇게 두 가지로 크게 계시를 분류한다.
일반계시18는 창조에 근거하여 자연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의 역사와 자연법칙 등에 의해 나타난다. 이 계시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며 또한 인간의 정신과 종교적인 본성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명확히 알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죄가 일반 계시의 증거를 파괴해 버렸기 때문이다.(창 3:17-19, 로마서 8:18-25, 고후 4:4) 따라서 일반 계시는 인간은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고 변명할 수 없게 하는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19 그러나 일반 계시에는 여러 가지 가치가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일반계시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알 수 있게 해주며,20 양심을 통해 율법을 수행하고,21 하나님을 탐구할 수 있게 해준다.22
특별계시는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의미하며, 하나님이 특정한 때, 특정한 사람에게 자신에 대한 특별한 것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특별계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를 의미하며,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다른 계시가 이해된다. 그리스도는 이전의 모든 계시의 목표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의 결론이다.23,24
자연신학이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을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이라고 부른다. 자연신학은 자연계의 사실들로부터나 특별계시에 의해 도움을 받지 않은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25 자연신학은 자연, 역사 그리고 인간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며, 그것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단지 이성에 기초하여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에 이르 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자연 신학의 핵심이다. 성경 혹은 계시와 관계없이 인간의 직관, 도덕적 통찰 및 이성적 추론에 근거하여 신학을 하는 것이다.26 결론적으로 자연신학은 초자연적인 계시와 특별한 어떤 것에 호소하지 않고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27
자연신학은 몇 가지 중요한 신념 위에 기초하고 있다.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일반적인 계시가 있다는 것, 인간은 자연 세계로부터 지각하고 배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 정신과 하나님의 창조물 사이에는 일치점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 자신을 알리며, 인간은 자연적인 제한과 죄와 타락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물 사이에는 일치점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 자신을 알리며, 인간은 자연적인 제한과 죄와 타락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물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고, 인간 정신의 질서는 기본적으로 우주의 질서와 동일하다는 것이 자연 신학의 전제이다.28
자연신학은 수 세기동안 철학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다양한 입장이 나타나게 되었다. 크게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입장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29
-
자연 신학의 한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의 존재는 이성에 의해서 증명되어질 수 있다. 개 신교와 카톨릭의 스콜라주의적인 신학들에 의하여 공유된 이 견해는 1870년 바티칸 제 1 공의회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
자연신학에 대한 좀 더 최근의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엄밀한 증거는 불가능하며,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규범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의 경험에는 중요한 종교적인 차원과 그리고 모든 종교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이 있다.30
-
세 번째 견해에 따르면, 자연신학을 형식화하는 노력들은 예전 것이나 새로운 것이나 모두 잘못되었다. 그것들은 기독교의 신학과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의 최고의 규범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독특성을 언제나 흐리게 한다.31
바르트와 부루너의 자연신학 논쟁
과거 로마 카톨릭적인 입장의 자연신학은 우리의 고려대상은 아니다. 이성을 통한 직접적인 하나님에 대한 증명은 개신교 내에서는 이미 포기되어진 입장이다. 문제는 개신교 내에서 자연신학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개선해 나가느냐 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한 최근의 논쟁은 신정통주의 신학 내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이것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 입장차이를 알아보 자. 18세기말부터 영향을 미치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대가 20세기초에 나타나기 시작했 는데 대표적인 신학 사조로 우리는 신정통주의를 들 수 있다. 신정통주의는 위기의 신학, 변증법적 신학,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신학사조의 대표적인 신학 자로 우리는 칼 바르트와 에밀 부루너를 들 수 있다. 이 두 신학자는 공통된 입장을 가지 고 있다가 갈등을 겪게 되는 데, 그 주된 이유는 일반계시와 자연신학에 대한 입장차이에 있었다.
바르트 신학의 본질은 절대적인 그리스도 중심주의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여 예 수 그리스도로 끝난다. 그는 계시, 특히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신학의 토대를 두고 있다. 부루너 역시 바르트처럼 하나님은 오직 계시에 의해 알려지며, 계시는 예 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강조했다. 계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낸 것 을 의미하며, 이것이 신학의 규범과 내용이 된다.32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느냐는 것이 바르트와 부루너의 논쟁점이었다. 바르트는 완전히 부정적이며, 부루너는 긍정적이다. 이 말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부루너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도 없으며 참 하나님도 알 수 없음을 주장하기 때문에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이 논쟁점은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접촉점의 문제였는데 인간의 본성과 타락에 대한 해석 그리고 종교개혁의 정통주의와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인해 갈등이 생겨났다. 이 갈등은 1934년 부루너가 "자연과 은총(Nature and Grace)"33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시작 되었고, 바르트가 1934년 "아니오(No)!"라는 이름으로 부루너에 반대하는 책을 출판하면서 가속화되었다.34 이들 책에서 각각 언급되어진 부루너가 본 바르트의 입장35과 부루너의 주장36은 주석을 참조하기 바란다.37,38
인간의 형상과 접촉점
부루너와 바르트의 논쟁의 핵심적인 사항은 인간의 형상에 대한 부분이다. 크게 바르트와 부루너는 6가지 주장에 대해서 서로 반론을 거듭하고 있는데 주된 내용은 인간의 형상에 대 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부루너는 바르트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할 능력과 자유의지를 소유했었는데 이것이 죄로 인해 상실되었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부루 너는 인간의 타락의 결과의 영향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형식적(formal)39인 면과 물질적(material)40인 면,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하자고 제안한다. 물 질적 형상은 죄로 인해 완전히 상실되었으나, 형식적 형상은 소멸되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바르트는 인간이 주체로서 이성적이며 책임을 갖고 있으며,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전제를 인정 하지만, 부루너가 물질적 형상이 파괴되었는데도 인간이 계시에 대한 수용 능력을 가진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한다.41
부루너는 하나님의 창조자체가 계시이며, 인간이 이를 인식하는 것은 죄의 영향이 있긴 하 지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물론 자연계시를 통해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런 계시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부루너는 구속 은총에 대한 접촉점을 논하면서 인간은 계시를 인식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앞에서 말 한 대로 인간에게 형식적인 형상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부루너가 계시 의 수용성(receptivity)에 대해서 말한 것은 물질적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가진 수용능력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가 아닌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형식적인 가능성을 뜻할 뿐이다. 죄인 이라도 이것을 가지고 있으므로, 죄에 대한 개념을 알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42 그러나 바르트는 인간에게 형식적 형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과 접촉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접촉의 가능성까지도 준비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부루너의 주장은 은총과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개혁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부루너의 태도는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는 데에 도움을 필 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하나님의 계시 행위를 위해 다소간은 인간이 협력해 주고 있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43 그러나 "자연과 은총"이란 책에서 거듭 부루너가 말하는 것은 이것은 오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의 접촉점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이것을 잘못 이해해 서 부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말씀의 수용능력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인간은 결코 그것을 잃지 않았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믿도록 만 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오직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듣도 록 만든다. 이처럼 접촉점이 있다는 주장으로 인해 오직 은혜라는 교리가 손상되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44
부루너의 주장은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일반계시에 대한 입장과 거의 같은 의미이며, 바르 트에 비해서 성경적인 면이 있고 칼빈의 교리에 더 근거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 다. 그러나 바르트의 반론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부루너의 자연신학은 자연신학 자 체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 때문에 충분한 주의가 필요하다.45 부루너가 말한 인간의 형식적 형상과 계시의 수용 가능성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부루너는 인간의 형식적 형상을 통한 접촉점에 대해서 말한 후에 이어 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에는 좁은 의미에서는 인간성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모든 지식을 포함한다."라는 식으로 확장을 시도하고 있음에 주의 해야 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부루너의 이런 부분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46
3.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들
세 번째 질문은 지적설계는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시도인가? 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지적설계를 통한 논증과 함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과거의 논의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 다. 우리는 크게 4가지의 논증에 대해서 살펴볼텐데, 안셀름의 존재론적 논증, 토마스 아퀴나스와 리처드 테일러의 우주론적 논증, 설계 논증이 그것이다.
안셀름의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
안셀름은 1033년에 이탈리아 피드몽의 아오스타라는 곳에서 태어났으며 켄터베리 대주교가 된 사람이다. 그는 "제2의 어거스틴"이라고 불려질 만큼 신학적으로는 어거스틴을 따랐던 인물이다. 일반적인 안셀름의 입장은 "Credo, ut intelligam(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는 그의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앙 우선주의를 나타낸다. 안셀름이 추구한 입장은 인간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이성은 하나님의 진리를 증명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앙은 맹목성을 띈 것이 아니라, 신앙적 이성의 증명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47
안셀름의 존재론적 논증은 그의 책 프로슬로기온(Proslogian, 1079)이라는 책에 처음 등장하는데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라는 개념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책은 논리적 논증을 하는 책은 아니었으며, 고백형식의 책이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하나의 논증으로 본 것이다. 안셀름의 존재론적 논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완전한 존재에 대 해서 생각하고 있는데, 만약 그런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단순한 마음속의 개념이라면 그것은 완전 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안셀름의 논증은 후대에 긍정적인 평가48와 부정적인 평가49가 함께 이루어졌다. 동시대에 살았던 가우닐로라는 수도사는 이에 대해 "바보를 위한 답변"이 라는 책에서 "완전한 섬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완전한 섬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안셀름의 논증을 반박했다. 일반적인 비판은 "어떤 개념을 정의하 는 것과 그 존재가 존재하는 것이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일 수 있냐는 것 이며,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관찰을 통한 확인이 없는 한 아무 것도 주장할 수 없다고 비판 한다. 통상적인 안셀름에 대한 해석은 그가 자연신학에 몰두했다는 것인데, 신앙에 의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바르트는 이에 대해 서 다른 설명을 한다. 그는 안셀름의 작품을 다룬 책에서 안셀름이 경험과 계시에 호소하지 않은 채 오직 이성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안셀 름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완전한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기만 하면, 하나님을 이성적 으로 부인할 수 없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Credo, ut intelligam(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라는 그의 신조로 볼 때 안셀름의 존재론적 논증에 대한 올바른 이해인 것으로 생각된다.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
우주론적 논증이란 우주의 존재나 우주에 관한 몇 가지 일반적인 사실들로부터 첫째 운동자 (a first mover), 첫 원인(a first cause), 또는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즉,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에로 논증하여 가는 논의를 말한다.50 초기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주어졌으며, 대표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5가지 방식51이 있다. 아퀴나스의 5가지 방식은 대부분 비슷하게 보이는 데, 인과관계를 통해 추론하다보 면 모든 것의 근원적인 존재인 하나님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논증은 호기심을 끌고, 단순한 신앙이나 기독교적인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객관적인 증명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52 그러나 아퀴나스의 논증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비판53을 받았다, 총신대 문석호 교수는 아퀴나스에 대해 다 음과 같은 평가를 한다.
"아퀴나스의 입장은 한편으로는 안셀름적인 사고 방식으로 신앙과 철학이 함께 동반자적 인 자세로 가는 듯 하면서도, 철학과 신학이라는 이층구조가 형성됨으로 신학과 철학이 라는 제각기의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물론 이것이 후일에는 비록 아퀴나스가 원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이성의 신뢰라는 비기독교적 사상이 그 여파로 나오게 되었고, 이것이 중세 에 대한 탈출구로 이용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54
아퀴나스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알리스트 맥그라스와 같은 이들은 이와 같은 평가는 철학 자나 신학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하기도 있다. 아퀴나스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간단하게 여기서 정리하고, 우주론적 논증에 대해서는 최근에 나온 철학자 리처드 테일러의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정리를 해보도록 하자.55
우주론적 논증에서 중요한 질문은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느냐?" 라는 질문 이다. 우주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는 무엇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테일러 가 주장하는 것은 유신논증들은 "모든 긍정적 사실이나 진리에는 왜 그런 사실이 있는지, 또는 왜 그 진술이 참된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와 원인이 있다"라고 보는 충분 이유의 원리 (a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를 전제한다고 말한다.56 이것을 전제하면서 테일러가 주장하는 것은 "충분 이유의 원리"로부터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존재만이 아니라, 세상 자 체에 대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우주는 다른 진리에 의존하므 로 우주에 대한 설명은 우주 밖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테일러가 보기에 세상이 존재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세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에 의존하고 또 그것은 또 다른 것에 의존하고 이렇게 의존하는 것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이 다. 둘째는 세상은 영원하고 멸할 수 없는 창조자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설명은 충분한 이유를 계속적으로 거부하므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어서 두 번째 설명을 채택한다. 그러나 이 논증에 대한 비판 중 가장 큰 주장은 충분 이유의 원리를 가정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우주의 각 부분들이 의존적이라 해서 전체 우주가 의존적인가? 테일러의 설명은 부분이 의존적이므로 우주 전체가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기계의 각 부분이 작다고 해서 그 기계 전체가 작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57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우주론적 논증은 충분 이유의 원 리를 어느 선까지 적용하느냐에 달려있다. 유신론자들은 이것을 우주 전체에까지 적용하 여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것이며, 무신론자들은 부분에만 적용할 뿐 우주 전체에 대해서 는 적용하지 않을 것이다.58 그러므로 이 논증은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전통적인 자연신학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다.
우주론적 논증의 큰 문제중의 하나는 이 논증이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통해 나온 최초의 부동자가 성경의 인격적인 하나님을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테일러와 아퀴나스 가 단지 증명을 통해 하나님을 보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이 논증에 큰 의미를 부 여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59
설계 논증
설계논증으로 가장 알려진 사람은 윌리엄 팔레이(william paley)일 것이다. 물론 아퀴나스의 5가지 방식에도 설계 논증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설계논증을 얘기할 때는 팔레이를 떠올리므로 그의 설계 논증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팔레이는 18세기 인물로 케임브리지의 연구원이면서 유명한 수학 강사였으며 부주교를 지내기도 했다. 팔레이가 설 계 논증으로 유명한 것은 그의 마지막 책이었던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자연 현상으로 부터 수집된 신의 실존과 속성에 대한 증거들)"이라는 책 때문이다.
설계논증은 칸트가 말한 것처럼 가장 오래되고, 가장 분명하며, 인류의 공통적 이성과 가장 잘 조화되는 논증으로 평가받는다. 이 논증이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세상은 설 계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설계의 흔적은 설계자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다. 따라서 이 세상은 설계자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팔레이가 "자연신학"이란 책에서 시계공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했던 것도 이 내용이다.60
팔레이가 시계공의 예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주도 이처럼 제작자가 있다는 사실이었 다. 설계 논증은 데이비드 흄의 "자연 종교에 대한 대화들" 이라는 책을 통해 가장 잘 비판 되어졌다. 흄이 보기에 이 논증이 우주에 적용될 때 우리들 모두는 우주의 기원과 존재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추측에 의한 근거만이 있다고 보았다. 팔레이의 책 본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시계의) 이런 구성(mechanism)을 관찰하고 나면 (이것을 위해서는 그 도구를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주제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일단 그것이 관찰되고 이해되면), 그 시계는 마땅히 어떤 시계 제작자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했다는 추론이 불가피하다."
만약 시계에 대한 경험이 없는 이는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시계공에 대해서 생각 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전지식이 필요한 데, 우주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경험한 것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흄은 다음과 같이 5가지로 비판을 한다.
-
우주가 유한하므로 그 원인이 유한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
자연 속의 악을 볼 때 설계자가 완전하다고 믿을 이유가 없다.
-
세상이 완전하다고 해서, 설계자가 완전하다는 볼 이유는 없다.
-
설계자가 오직 한 명이라고 증명할 수가 없다.
-
시계공 논증은 우리가 신인동형주의자가 되는 길을 막을 수 없다. 시계공 논증의 유비 를 사용하면 하나님이 손과 귀, 몸을 가졌다고 믿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61
팔레이는 설계의 흔적으로 생물학적 특징들 예를 들어 낙타의 혹이나 날개의 특징, 인체의 정교한 조직 등을 제시한다. 또한 눈의 정교함에 대해서 제시하면서 우연의 가능성을 배제 한다. 자연주의적 설명은 이 놀라움을 설명하기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찰스 다윈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우리는 그의 자서전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찰스 다윈이 설계 논증을 받아들이다가 진화론적 입장으로 빠져나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가 보기에 생명이 생존하기 위한 투쟁과 죽음 등이 있는 것으로 봐서 세상이 설계되어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무로 성장하지 않는 수많은 도토리들, 결코 수정되지 않는 꽃가루들이 그러하며, 침을 통해 애벌레 속에 알을 낳는 말벌을 보면 유충이 안에서 애벌레를 파먹고 사는 것도 그러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윈에게 놀라움이었다.
세상에는 설계된 것 같은 흔적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흔적들도 많은 것이다. 이 문제는 "세상에 어떻게 악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62 설계 논증에서 가장 의문시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설계 논증도 모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으므로 전통적인 자연신학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뒤에서 다루겠지만 지적설계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설계논증을 반복하려는 것은 아니다.
4. 결론 : 지적설계와 자연신학
자연과학에 대한 칼빈의 입장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흔적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은 "과학자 창조(Science and Creation)"라는 책을 통해서 세계의 질서에 대해서 감탄하며,63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글을 쓰곤 했다.64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것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신학적 고찰에 있어서 종교개혁자 칼빈의 입장이 중요한 주춧돌 역 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이 자연과학에 부정적이었다는 일반적인 평가는 왜곡된 면이 있으며, 오히려 칼빈은 자연과학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65 그의 인 간에 대한 신학적 입장은 자연과학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기준을 주고 있다. 칼 빈에 대한 오해의 시작은 칼빈의 "인간의 전적인 타락" 주장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 같다. 사람들은 칼빈의 주장은 곧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연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과 동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은 오해에 불과하다. 오히려 칼 빈은 자연질서와 역사,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 기 때문이다. 칼빈의 그와 같은 생각의 배경은 우리가 앞에서 사용했던 칼빈의 용어 "신의식", "종교의 씨앗" 등의 용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이 보기에 인간에게는 종교에 대 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고, 양심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모두가 복음의 선포에 있어서 접촉점이 된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는 피조세계의 질서를 경험함으로 써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자연신학의 의의
정통적인 자연신학에 대한 부정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바르트주의자들을 제외한 개 신교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자연신학은 나름대로의 의의가 있다. 자연신학을 거부하는 것은 바르트의 경우처럼 과학과 신앙의 분리로 이어지고, 탐구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제시하게 된다. 부루너가 지적한 것처럼 신학의 내용에만 관심을 가지고, 방법에는 무관심한 것은 복 음을 들어야 할 비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생명체의 설계를 주장하 면서 생명체의 설계 흔적을 찾고자 하지 않는 것은 악하고 게으른 종의 모습과 동일하다. 비록 그런 설계 흔적을 찾는 노력의 결과가 모든 이들에게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이런 노력을 필요한 것이다.
과거 잘못된 전제하에서 시작된 왜곡된 자연신학이 있었음도 사실이며, 그 부정적인 영향이 있었음도 사실이지만, 과거 신앙의 선배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사실이 올바른 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계몽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증거에 입각한 평가로 볼 때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합리성 의 전제를 기초로 다시 자연신학을 시도 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잘못된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갈 올바른 길은 새로운 합리성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길을 걸어갈 때에 극단적인 칼빈주의로 빠져서 인간의 어떠한 참여도 부정하는 오류에 빠지지 말 아야 하며, 극단적인 알미니안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 중간 어디쯤인가 우리가 걸어갈 길이 보일 것이다.
증거주의를 넘어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들을 보면서, 그 모든 논증들이 모든 사람들 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전제가 되지 못함을 보았으며, 증거의 부족에 대한 비판을 면치 못한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인이 자연과학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새로 운 목표라는 것이 "새로운 증거를 더욱 찾아내어서 이 논증을 완성해야 하는 그것"인가? 그 와 같은 생각은 다시 로마 카톨릭의 정통적인 자연신학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닌가?
앞에서 살펴본 유신논증들은 무의미 한 것은 아니다. 이 논증들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이들 에게는 하나님의 존재를 더 명확하게 인정하게 해준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전적으로 부 정하는 이들에게는 설득력을 잃고 만다. 다시 말해서 이 논증들은 사람에 의존적이어서,66 그 설득력이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만족하는 증명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으며, 과학사회에서도 그리 많지 않으며, 무엇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만 한다는 이유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모든 인간이 하 나님에 대한 신의식을 전제하지 않고도 온전한 증명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은 결코 종교개혁적인 입장도 아니다. 어떤 이들은(예를 들어 복음주의적 증거론자들) 명확한 합리적 증거를 대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앙 지상주의에 의거한 힘없는 그리고 무책임한 논증 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은 결국 우리들을 회의주의자로 이끌고 갈지도 모른다. 최근 미국 노틀담 대학교의 알빈 플란팅가(alvin Plantinga), 예일 대학교의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Nicholas Wolterstorff), 시라큐스의 윌리엄 알스톤(Willim Alston)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 인식론"이 주장하는 것은 참된 이성으로의 회복이다. 이들은 기존의 증거주의의 문제점 을 지적하면서 사람 의존적인 증명에 대한 논증과 함께 새로운 합리성을 정의하려고 한다. 코넬리우스 반틸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면서 전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적설계운동 에 있어서 이와 같은 입장은 긍정적이라 생각되어진다. 세속적인 합리주의에 의거하여 하나 님을 보일 수도 없으며, 보인다는 것은 허울좋은 선포이며, 보인다 해도 성경적인 하나님은 아니다. 성경 저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지적설계의 증거를 제시하면서도 전제에 대한 기본적인 구별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과학
계몽주의적 증거주의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사람에 의존적인 증명을 강조하고, 합리성에 대 한 새로운 정의를 시도하는 것은 모든 증명에 사람의 신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 미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것은 이어서 세계관의 문제로 이어진다. 세계관이 다르면 고 학도 다르다는 것인가? 3명의 유명한 칼빈주의 개혁자를 꼽으라 한다면, 벤자민 워필드와 헤르만 바빙크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를 둘 수 있다. 이 중 카이퍼와 워필드는 과학에 대 한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카이퍼는 인류를 위한 하나의 단일한 과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는 개종한 자들과 개종하지 않은 자들이라는 두 유형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과학에도 두 두형이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두 유형의 과학의 차이는 측정하고 무게를 다는 것과 같은 단순한 기술적 분석을 통하여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과학이 이론적인 학문인 한에 있어서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은 중요한 몇 가지 점에 있어서 각기 다른 결론들에 이 를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두 유형의 과학이 모두 동일하게 과학적이지만, 각기 다른 출 발점들과 전제들의 체계 위에서 작업을 전재한다. 그러므로 카이퍼에 의하면 기독교과학 사상가와 비기독교과학사상가는 같은 건물의 다른 부분에서 일하는 자들이 아니라 각기 다른 건물들 안에서 일하는 자들이다."67
그러나 워필드가 보기에 과학은 객관적이며 통일적인 것이었다. 카이퍼의 입장은 그가 보기 에 비겁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보였다.
"기독교인이 자신의 입장을 건실하게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을 있을 수 없다. 기독교의 세계 관이 단지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든지, 순수이성의 영역 안에서는 입증이 불가능하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실로 "모든 지성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조 명을 덜 받은 자가 조명을 더 받은 자의 결의에 대하여 항구적으로 항거하거나 논박한다 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거듭난 자의 이성은 "궁극적으로 온 인류를 정복할 수 있다." 이 와 같은 변증적인 승리에 대한 전망을 가진 워필드에 있어서, 과학 또는 합리성이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 있어서 각기 다른 체계 안에서 작용한다는 카이퍼의 입장은 비겁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과학이 온 인류의 공동작업인 한에 있어서, "결국은 더 나은 과학이 승리를 거둘 수밖에 없다.... 논쟁을 피한다면, 어떻게 승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68
과학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이제 둘로 구분되어지는 데, 비그리스도인들과 동일한 방법론과 동일한 바탕 위에다 신학적 원리들을 첨가하여 과학을 한다고 생각하는 워필드파와 전제에 대한 강조를 통해 구분을 강조하는 카이퍼파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워 필드가 있었던 시기와는 다르다. 미국을 비롯한 모든 나라에서 모든 학문에서 그와 같은 통 일된 그 무엇을 이루기란 불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부분적인 이론에서는 일치할지 모르 지만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서로 다른 결론을 얻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기원을 바라보며, 창 조 진화의 서로 다른 입장이 가능한 것을 보면서, 과연 과학이 서로 다른 전제 속에서도 동 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워필드의 입장은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겠다는 복음주의 증거론자들의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설명의 힘으로서의 하나님을 배제한 전제들로부터 출발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에 대한 믿 음을 전제로 삼고 출발하는 사람들은 모두 동일하게 합리적이며, 기술과학적 작업에 있어 서는 함께 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부 핵심적인 이론적인 문제들에 있어서는 그들이 전 개하는 최선의 논증이 각기 상반되는 결론으로 나아갈 뿐이다. 두 개 이상의 과학이 존재한다. 합리성만으로는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논쟁을 해결할 수 없다."69
지적설계에 대한 철학적·신학적 위치
지금까지 모든 내용은 글의 서두에서 제시했던 4가지 질문들에 대한 철학적·신학적 위치를 알기 위한 준비들이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Q. 지적설계는 일반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접촉점 또는 지식의 방법론이 될 수 있는가?
A. 전제에 따라 다르다. 만약 세속적인 입장과 동일하게 인간 이성의 완전성을 전제로 해서 본다면 지적설계에 대한 증거는 "접촉점"의 역할을 할 수가 없으며, 지적설계이론이 모 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방법론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신의식을 전제로 한 이성이 라면 "접촉점"이 될 수 있다.
Q. 지적설계운동은 일종의 자연신학인가? 그것은 과연 성경적인 입장인가?
A. 그것은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명확하게 얘기할 수는 없다. 필자의 입장이라면 지적설계운동은 전통적인 의미의 자연신학은 아니다. 지적설계운동은 개혁주의 개신교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Q. 지적설계운동은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시도인가? 그것은 가능한가?
A. 지적설계운동은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시도보다는 단지 생명체의 복잡성을 통해 설계라 는 논증을 증명해 보이려는 시도다. 또한 초월적인 원인에 대한 학문적 배제를 극복하려 는 움직이다. 그러나 좀 더 엄밀한 의미에서 지적 설계는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보이려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지적설계의 결과가 연장되어 설계자의 존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인격적인 하나님을 의미한다는 근거는 없기 때문에 기 독교적 하나님에 대한 증명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Q. 지적설계를 둘러싼 기독교 지성운동은 어떤 철학적·신학적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A. 지적설계에 대한 과학적 입장은 이 글에서 다룰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설계 를 논하기 전에 전제에 대한 엄격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적설계를 기독교 에 제한된 운동으로 볼 필요는 없기 때문에 전체적인 입장표명이 필요한 것은 아닐지라 도 최소한 개신교 내에서의 참여자들에게는 전제에 대한 입장 표명이 필요하다. 그 전제 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정의와 세계관의 중요성, 사람 의존적인 증명을 통한 새로운 합 리성의 정의와 같은 것이다. 또한 정통적인 자연신학의 오류를 넘어서야 하며 이를 위해 서는 증거론에 입각한 세속주의자들과 일부 기독교인들의 입장에 대해서 반박할 수 있어 야 한다. 지적 설계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알빈 플란팅가와 윌리엄 알스톤과 같은 이들의 작업을 지켜보는 것도 우리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무리
부루너의 외침처럼 현재와 같은 과학시대에 올바른 자연신학을 회복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다. 그러나 잘못된 우리 모두 자연신학으로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지적설계운동은 먼 훗날 실패한 운동으로 평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실패를 한다해도 그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올바르다면 실패를 한다해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다. 잘 못된 영향이 혹 남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다음 세대가 짊어지고 가야할, 우리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일들이다. "실패해도 즐거운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세대가 꿈꾸는 일이 다. 끝으로 부족한 글을 읽어준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여러 서적을 통해 자신들의 고민 을 나누어준 여러 신앙의 선배들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전하고 싶다. 끝으로 책을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이안 바버(Ian G. Barbour)의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다.
"우리에게 전통적인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은 필요하지도 않고, 절실하게 요구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신학(theology of nature)은 매우 중요하다." 70
참고문헌
-
기독교문서선교회, 변증학, 코넬리우스 반틸, p.96
-
이 말은 반대로 만일 신자와 불신자가 인간이 어떠한 성격을 가진 존재인지에 대해 일치할 수가 있다면, 그 둘 사이에서 지식에 대한 어떤 공통적인 영역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한다는 얘기로 이해될 수 있다.
-
Systematic Theology II, Charles Hodge, p.103
-
기독교문서선교회, 변증학, 코넬리우스 반틸, p.104
-
기독교문서선교회, 변증학, 코넬리우스 반틸, p.103
-
이 부분에서 한가지 말하고 넘어갈 점이 있다. 자연신학에 대해 에밀 부루너와 논쟁을 벌였던 칼바르트는 그의 책 "아니오!"에서 개신교 신학자들이 로마 카톨릭의 입장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로마 카톨릭의 자연 개념과 자연신학의 중요성은 안타깝게도 왜곡된 것이며, 아퀴나스나 바티칸 칙령의 형성에 대해 알고 있 는 카톨릭 신학자와 함께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면 다음과 같이 "로마 카톨릭 교리에 따르자면 왜곡되지 않은 자연 신학이 있고, 그래서 계시 신학과 별개로 굳건한 토대를 가진, 자기 충족적인 이성적 체계를 가진 자연신 학 속에서 죄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카톨릭 신학은 이성과 자 연을 통해서 참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자비롭고 예비하는 은혜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것이며, 자 연과 은혜를 구분 짓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은혜가 자연을 전제로 하듯, 자연도 은혜와 초자연적 계시를 그와 관계된 신학적 지식과 진술의 영역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에 따르면 은혜가 배제된 이성이란 것은 중병에 걸려 어떤 진지한 신학작업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만약 바르트의 해석 이 맞다면 필자가 써 놓은 로마 카톨릭의 입장은 현재의 상황에는 맞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필자가 카톨릭 교에 대해서 접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점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점은 앞에서 지적한 로마 카톨릭의 문제점은 현재는 아닐지라도 과거 카톨릭에서 일어났다는 것이고, 개신교 안 에서도 앞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며 이 점은 강조되어야만 한다. 카톨릭은 제1바티칸 공의회(1870)에서 하 나님의 존재가 설명되어질 수 있고, 특수계시에 의존함이 없이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하나님에 관한 것들에 대 하여 알 수 있다고 했다. 대부분의 개신교 신학자들의 책에서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 하다.
-
로마 카톨릭이나 세속 철학자들이 가정하는 인간의 이성의 자율성에 기초해서는 이와 같은 공통된 영역은 존재 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뒤에서 살펴볼 내용처럼 인간의 자의식 뒤에 하나님에 대한 신의식이 존재한다는 전제하에서는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문제는 지식을 분석함에 있어서 그 궁극적인 참조점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
기독교문서선교회, 변증학, 코넬리우스 반틸, p.108
-
기독교문서선교회, 변증학, 코넬리우스 반틸, p.109
-
The Plan of Salvation, B.B.warfield, p.24,
-
이런 모습에 대해 반틸이 제시하는 재미있는 예화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금을 어떤 은행 에 예치시키신 후에 그것을 여러 일간지들에 광고하시기를 누구나 와서 그들이 필요한 만큼 찾아가라고 제안 하셨다. 이것은 결국 사람이 이 은행에 맡겨져 있는 후한 선물을 가져다 그것에 의존하여 사는 사람이 되어 그 런 사람들과 함께 지냈느냐, 아니면 그 일을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전적으로 개개인에게 달려있다는 말이 된 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접근하시되 보편의 방법을 통하여 그러하신다는 것이다." 반틸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입장은 참으로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필자가 따르고자 하는 것이 칼빈주의이기는 하지 만 궁극적으로 이 부분에서 비판하고 있는 소위 알미니안주의적 태도가 완전히 비성경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 하다. 다만 이 글에서 지적한 면에 국한되서는 칼빈주의가 더 엄밀한 의미에서 성경적이라고 생 각 되어진다.
-
기독교문서선교회, 변증학, 코넬리우스 반틸, p.110
-
세속 철학의 기본 가정은 인간의 이성의 완전하며 자율적이라는 데 있다. 만약 카톨릭적인 입장을 가지게 된다 면 세속 철학의 근본적인 인간 우상화의 문제점을 어떻게 비판할 수 있냐는 말이다.
-
기독교문서선교회, 변증학, 코넬리우스 반틸, p.122
-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 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 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로마서 1장 19절, 20절)
-
자율적이며, 완전하게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
-
하나님에 대한 신의식을 전제로 진리에 접근하며, 인간의 이성의 자율성을 부정하고, 하나님께 의존하는 경우 에만 진리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인간
-
일반계시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창세기 1:16, 시편 19편, 욥기 12:7-15, 사도행전 17:27, 로마서 1:19-20 등 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세계에서 하나님의 증거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
현대신학논쟁, 두란노, 목창균, p.160
-
로마서 1장 19절, 20절, 앞 주석 참조
-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 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 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로마서 2장 14절, 15절)
-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 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사도행전 17장 26절, 27절)
-
현대신학논쟁, 두란노, 목창균, p.159-160
-
특별계시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요한복음 1:14-18, 14:8-9, 사도행전 4:11-12, 로마서 3:21-26, 5:12-21. 갈라디 아서 2:15-21 등이다.
-
이성에로의 복귀, 여수룬, 켈리 제임스 클락, p.29
-
현대신학논쟁, 두란노, 목창균, p.161
-
켈리 제임스 클락의 "이성에로의 복귀"라는 책에는 지적 설계 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알빈 플란팅가가 자연 신 학에 대해 말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소개 되어있다. "자연 신학자가 하려고 하는 것은 유신론의 몇가지 핵심적 인 신념들이 거의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분명히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명제들(예를 들자면, "어 떤 것들은 움직인다"는 명제)과 자명하고 필연적으로 참된 명제들로부터 연역적으로나 귀납적으로 따라 나온 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연 신학자는 몇가지 중요한 종교적 신념들을-특히 하나 님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합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
현대신학논쟁, 두란노, 목창균, p.161 Christian Theology vol 1, Grand Rapids : Baker Book House, Millard J. Erickson, p.156
-
조직신학입문, 나단, 다니엘 L. 미글리오리, p.380
-
에큐메니칼 신학자들중에는 우리의 이성만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성 경적인 계시에만 제한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사람들 예를 들어 인본주의자들이나 무신론자, 마르크스주의자들 그리고 대부분의 종교인들과의 논의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이 입장은 주로 칼바르트의 입장을 염두해 두고 하는 말이다. 초기의 바르트의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빛임을 주장하는 것이었지만 말년에는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수많은 작은 빛과 좋은 말씀을 포함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런 입장을 기존의 자연신학과는 구별하고자 했다.
-
현대신학논쟁, 두란노, 목창균, p.156-157
-
부루너는 우리 신학 세대의 과제는 정당한 자연신학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한국장로교출판사에서 나온 "자연신학"(김동건 역)이라는 책은 에밀부루너의 "Nature and Grace" 와 칼 바르 트의 "No!" 라는 영문 번역판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다. 이 후의 부루너와 바르트의 자연신학 논쟁은 논 쟁의 원문인 이 책에서 주로 살펴볼 것이다.
-
부루너가 정리한 바르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a) 창조 당시의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인해 인간에게서 완전히 사라졌다.
(b) 자연이나 양심이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주장하려는 시도는 철저히 배척한다. 일반계시와 특별 계시라는 두 가지 종류의 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만이 있다.
(c) 창조당시부터 유지되어오는 창조와 보존의 은혜는 없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은총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 도의 은총만이 있을 뿐이다.
(d) 피조물의 보존에 관한 하나님의 법칙이 따로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되고 우리 행동의 기준이 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다고 볼 수 없다.
(e)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접촉점이 있다는 말은 부당한 것이다. (f) 새로운 창조는 옛 것을 다시 만들어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옛 것을 철저히 파괴함으로써 새것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
브루너는 바르트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a) 인간 안에는 형식적(formal) 형상과 물질적(material)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물질적 형상은 타락 이후에 소멸되었지만 형식적 형상은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본문을 참조 바란다.
(b) 인간은 자연 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물론 참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리 스도는 자연을 통한 일반계시를 명확히 알게 해준다.
(c) 하나님의 보존 은총(preserving grace)이 있다.
(d) 보존을 위한 제도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창조의 질서인 결혼제도와 보존의 질서인 국가를 들 수 있다.
(e) 인간에게는 구속 은총과 관련된 접촉점이 있다.
(f) 새 창조는 옛 창조의 완성이다. -
자연신학, 한국장로교출판사, 에밀부루너·칼바르트, p.27
-
바르트의 입장에 대한 부루너의 정리에 대해 바르트는 수긍하지 않는 것 같다. 그의 책 "아니오!"에서 바르트 자신은 이 주제에 관해서 조직적으로 설명하거나 방어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주장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오히려 그와 같이 자연신학을 반대하는 데 있어서 조직신학적 입장 을 취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반문했다. "아니오!"에서 밝히고 있듯이 바르트의 생각으로는 자연신학은 독립 된 주제로서 반박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며 진정한 신학자라면 오히려 피해가야 할 주제라고 말한다. 오히려 반응을 하는 것은 왜곡된 결과만을 가져다주며, 그것은 신학을 중심에 둔 관심이 되지 않는다고 밝힌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가 부루너의 글을 반박하는 글을 쓴 이유는 부루너가 자신과 가까운 칼빈주의자이며 변증법 적 신학자로 불리기 때문이며, 이와 같이 비슷함은 더욱 신학적으로 위험스럽다고 봤기 때문이다.
-
형식적이라는 말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됨을 의미한다. 창조의 중심으로서의 인간의 역할 또는 소명은 죄 때문에 사라지지 않으며 인간은 여전히 주체이며 책임성을 가진다. 이 책임성은 인간이 말씀을 수용할 수 있음과 연관되어 있다. 형식적 형상은 죄를 범하거나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의 전제다. 여기서 부루너 가 말한 말씀의 수용능력은 인간이 계시에 대해 조정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계시가 주어질 때 계시를 들을 수 있는 수동적인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용어상의 오해가 바르트와 부루너 사이에 있 었다고 한다.
-
소멸된 물질적 형상이란 것은 인격에 대한 것이다. 진정한 인격은 사랑과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것인데 인간 에게는 이것이 소멸되어 인격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스스로 할 수 없 다. 인격의 내용은 죄 때문에 사라졌지만 인격의 형식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가진 인간성을 이룬다고 부 루너는 말한다.
-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바르트가 부루너의 "말씀의 수용능력"이라는 말을 인간이 계시를 능동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고 오해한데서 비롯되었다. 부루너는 수동적인 능력을 의미했기 때문에 바르트의 반박은 그 의미 가 별로 없는 듯하다. 다른 면으로 부루너는 창조의 질서와 제도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바르트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이런 질서와 제도를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다면, 계시에 대한 능력이 단지 인간의 형 식적 요소만 의미하냐고 반문하면서 형식적 형상과 물질적 형상은 구별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자연신학, 한국장로교출판사, 에밀부루너·칼바르트, p.37
-
역사속의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알리스트 맥그라스, p.256
-
자연신학, 한국장로교출판사, 에밀부루너·칼바르트, p.38
-
바르트는 "아니오!"에서 다음과 같은 반론을 편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고, 종교성을 가지는 것이라면) 우상숭배라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한 단계로서 어느 정도 불완전하고 예비적인 단계라는 것이 부루너의 입장인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계시 안에서 우리를 한 단계 한 단계 이끌어 가는 역할뿐이란 말인가? 더구나 부루너는 참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이,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또 하나님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은 무슨 뜻인가?), 어떻게 구원을 가져올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
알리스트 맥그라스는 이 둘의 갈등에 대해 색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바르트와 부루너의 논쟁은 1934년에 발생 했다. 이 해는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해이다. 자연과 본성에 대한 부루너의 호소의 기초가 된 것은 '창조의 질서'로 알려진 사상이었다. 이것은 루터에게 소급될 수 있는 개념이다.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은 피조 물이 혼돈으로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섭리적으로 피조물 안에 특정한 '질서'를 확립하셨다. 이 질서는 가족, 교회, 국가를 포함한다.(독일 루터교 사상에서 교회와 국가의 밀접한 연합은 이 개념을 반영하고 있다.)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 개신교는 이 개념을 흡수했고, 국가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등 독일 문화에 중요한 의미를 부 여하는 신학을 발전시켰다. 바르트의 관심은, 부분적으로는 부루너가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그랬겠지만, 국가가 하나님을 위해 하나의 모델이 되는 것을 허용하는 신학적 토대 위에 서 있었다는 데에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가 하나님의 모델이 되는 것을 누가 원했겠는가?"
-
철학 : 이해의 지평과 그 한계, 총신대학교출판부, 문석호, p.158
-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쯔는 이 논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이 논증을 부정적으로 보는 대표적인 인물은 칸트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란 책에서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은 오직 관념일 뿐, 그 존재성을 의미하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하고 있다.
-
이성에로의 복귀, 여수룬, 켈리 제임스 클락, p.33
-
아퀴나스의 하나님에 대한 존재에 5가지 방법은 아래와 같다.
(a)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모든 운동에는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 역시 원인 을 가지고 있다. 이를 생각하다보면 그 움직임의 시초에는 한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 모든 운 동에는 근원적인 원인의 존재가 있을 것이다. 이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b) 모든 사건의 결과는 다른 원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결과는 하나의 원인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c) 세계는 필연적인 존재가 아닌 인간과 같은 우연적인 존재를 포함한다. 인간이 존재하게 된 것은 어떤 필연 적인 존재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이며, 그와 같은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다.
(d) 본질적으로 참되고 선한 것이 분명히 존재하는 데 그 개념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e) 세상에는 자연이 설계되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있다. 세상은 모두 목적을 가지고 있게 설계되었으며 이 설계자가 바로 하나님이다. -
철학과 기독교신앙, 기독교문서선교회, 콜린 브라운, p.41
-
비판은 다음과 같다.
(a) 원인이 왜 무한히 계속될 수 없는가? 원인을 찾는 행진이 멈춘다는 것을 보여야 타당한 주장이 될 것이다. 또한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최고의 움직이지 않는 운동자"를 입증해야만 한다.
(b) 궁극적인 원인인 "최고의 움직이지 않는 운동자"가 오직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또힌 다른 표 현으로 만든 자와 설계자가 반드시 동일하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c) 이 논증은 하나님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보일 수 없다. 옥캄은 아퀴나스의 논증이 하나님이 한때는 존재 했을지라도 지금 반드시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인도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철학 : 이해의 지평과 그 한계, 총신대학교출판부, 문석호, p.177
-
리처드 테일러의 논증에 대해서는 켈리 제임스 클락의 "이성에로의 복귀"에서 다루고 있으며 이 내용을 간단 히 정리한 것이다.
-
이성에로의 복귀, 여수룬, 켈리 제임스 클락, p.33
-
이성에로의 복귀, 여수룬, 켈리 제임스 클락, p.39
-
무신론자의 대표자인 버트란트 럿셀은 "우주가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우주는 그저 있을 뿐이다. 그것으 로 전부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충분이유의 원리"를 우주에 적용하길 원하지 않는다.
-
알리스트 맥그라스는 아퀴나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이성은 각 개인을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인 도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에 합리적인 이유를 들 수 있다....일 부 철학자들은 아퀴나스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분명 사실이 아 니다. 지금 내 앞에는 아퀴나스의 표준판 "신학대전"의 복사본이 한 권 놓여 있다. 자그마치 4천 페이지가 넘 는데도, 하나님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두 페이지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라는 표현은 아퀴나스 자신의 논의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후대의 저술가들이 그의 사상으로 돌린 것일 뿐이다....그가 하나 님의 존재를 믿게 된 일차적인 근거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있다. 아퀴나스는 그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앙을 공유하기를 기대한 것이지, 그의 신앙을 먼저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
팔레이가 설명한 시계공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그의 책 1장을 보면 다음 내용이 나와 있다. (번역글은 클락의 책에서 인용했다.) "황야를 건너가면서 내가 발로 돌을 차게 되었다고 하자. 그 돌이 어떻게 그 곳에 있게 되었는가를 묻고서 그 것이 언제나 그곳에 놓여져 있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대답의 부조리함을 드러내기란 그리 쉽 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땅에서 시계를 주워서 이 시계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를 물을 때는 이 전에 했던 대답과 같은 대답-즉, 그 시계가 그곳에 항상 있었다고 대답하려는 생각을 하기란 어렵다. 왜 이 대 답이 이전에 돌에 대해서와 같이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음 같 은 이유 때문이다. 즉, 우리가 그 시계를 조사해 볼 때 (우리가 돌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 즉) 그 몇몇 부분 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잘 틀 지워져 조립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그 시계는 각 부분이 어떤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구성되고 조립되어 있고, 그 움직임은 하루의 시간을 지시할 수 있게 규제되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에 각 부분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형성되고, 그 크기가 다르며, 다 른 방식으로 조립되거나 지금과는 다른 순서로 놓여지게 되면, 그 시계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 되든지, 아 니면 지금 쓰이는 것과는 다른 것이 될 것이다... 이런 구성(mechanism)을 관찰하고 나면 (이것을 위해서는 그 도구를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주제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일단 그것이 관찰되고 이해되면), 그 시계는 마땅히 어떤 시계 제작자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했다는 추론이 불가피하다. 즉, 언젠가 어느 장소에 우리가 발견한 그 목적을 위해 그 시계를 만들고, 구성을 이해하며, 그 용법을 계획한 제작자나 기술자들이 있어야만 하는 것 이다."
-
이성에로의 복귀, 여수룬, 켈리 제임스 클락, p.53
-
신정론(Thdodicy) 또는 신의론(神義論)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답하고자 하는 신학적 노력이다.
-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익숙해 있어서 흔히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과학 덕 분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식으로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주는 질서 정연하지 않고 무질서한 혼 돈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우주는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합리성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 과 우주 사이에는, 내부에서 체험되는 합리성과 외부에서 관찰되는 합리성 사이에는, 상응하는 관계가 있다." (역사속의 신학, p.251)
-
"하늘의 헤아릴 수 없는 넓이와 높이 등에서 나타나는, 가시적 세계의 한없는 광대함은 영적인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 광대함과 높이와 영광의 한 유형일 분이다. 세상 안에서 이루어진 것과 일어나고 있는 것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거룩하심과 사랑에 대한 가장 파악할 수 없는 표현이요, 세상과 이 세상의 광대함과 하늘의 드높음에 전달되어야 할 탁월하게 위대한 도덕적이고 자연적인 선, 빛, 지식, 거룩함과 행복에 대한 탁월한 위대성이기도 하다."(역사속의 신학, p.252)
-
기존의 자연과학에 대한 칼빈의 입장 평가가 부정적인 것에 반해 실제로는 칼빈은 자연과학의 평가와 발전에 두 가지 주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간주 될 수 있다. 첫째 그는 자연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적극 격려했고, 둘 째 자연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한 장애물을 제거했다. 첫 번째 그의 기여는 피로물의 정연한 질서를 그 가 유독 강조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물질 세계와 인간의 몸은 모두 하나님의 지혜와 성품을 증거한다. 칼빈이 천문학과 의학의 연구를 모두 추천한 것은 이 때문이다....칼빈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에 새로운 종 교적 동기를 부여했다. 두 번째로 칼빈은 자연과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현저한 장애물, 오늘날에도 여전히 근본 주의 서클 안에서 영향력 있는 "성서의 문자적 무오설"을 제거한 것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성서의 모든 진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성서의 진술들은 그 청중들의 능력에 맞추어 '적응'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속의 신학, p.227-228)
-
사람 의존적인 증명이란 증명의 설득력이 C. S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사람의 신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의 미한다. 전제가 다른 사람을 증거를 통해 설득하는 것은 쉽지도 않으며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에 대한 증명을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하고자 하려면 무신론자들의 철학에 입각하여 그들의 방법 으로 그들의 존재 정의에 따라 보여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복음주의 증거론자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부정적이다.
-
미국의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이해, 성광문화사, 조지 마스덴, p.148
-
미국의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이해, 성광문화사, 조지 마스덴, p.149
-
미국의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이해, 성광문화사, 조지 마스덴, p.178
-
Religion in an Age of Science, Barbour, p.183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이슈! 난제! 중요한 문제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정통주의는 칼 바르트 (0) | 2021.05.15 |
---|---|
잇따른 목사 안수증 허위 논란…목사 되는 과정은? (0) | 2021.01.29 |
조엘오스틴 목사님에 대해서 분별 하셨으면 합니다. (0) | 2021.01.08 |
주례자 없는 결혼예식 (0) | 2020.12.22 |
구원의 방법과 구원이후 (0) | 2020.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