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선교 예화들

하나님아들 2020. 10. 24. 22:11

선교 예화들

 

 

 

1. 예화 - 선교사가 된 동기

 

한 사람이 저드슨에게 선교사가 된 동기를 물었다.

“당신은 왜 선교사가 되었습니까?”

“저는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드슨은 이렇게 대답한 후 한참 있다가 다시 말했다.

선교사가 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2. 예화 - 선교 허가권

초대 선교사 펜윅(Malcom C. Fenwick)이 어느 날 조선총독부의 호출을 받고 출두하였다.

 

그들은 펜윅에게 “더 이상 이곳에서 선교하지 말고 본국으로 귀국하시오.”라고 하면서

“누구의 허락을 받고 한국에서 선교하느냐?”는 질문을 하였다.

 

이 때 펜윅은 대뜸 대답하기를

“나는 오래 전에 벌써 허가를 받았고 명령도 받아 선교하고 있는 것이오.”라고 하면서

사도행전 1장 8절을 펼쳐 보였다.

 

조선총독부는 펜윅의 이 같은 당당한 태도에 눌려 그를 책잡지 못했다.

 

 

 

 

 

3. 예화 - 존 겟디의 기념비

 

John Geddie (1815-1872). Canadian Missionary to the New Hebrides (Vanuatu)

 

존 겟디라는 캐나다의 한 청년이 뉴 헤브리디즈라는 섬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 존 겟디는 그 섬에 도착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섬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존 겟디의 열심은 그 식인종들의 사랑과 신뢰를 얻게 되었고, 존 겟디는 그들의 언어를 연구하여 신약과 몇 편의 유명한 찬송가를 그들의 언어로 번역하여 주었다. 점차 그 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그들은 그들의 식인풍습을 버리게 되었다.

 

존 겟디가 죽자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한 기념비가 세워졌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존 겟디가 1848년 이곳에 상륙하였을 때는 기독교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1972년 그가 죽을 때에는 이교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4. 예화 - 선교하며 성장하는 교회

 

교회성장학의 세계적인 권위자 피터 와그너 박사의 말에 의하면, 미국 사회 속에서 5,000-10,000명 이상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는 교회를 살펴보고 얻은 결론은,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와 성령의 능력이 차고 넘치는 교회, 그리고 전력을 기울여 선교하는 교회들이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것이었다.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피플스 교회 같은 경우는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치고는 건물이 너무 낡은 교회이다. 그러나 그 교회는 해외에 15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그 교회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현관 바닥 중앙에 다음과 같은 표어를 새겨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제일 먼저 세계 선교(World mission first)’라는 글귀이다. 이 교회는 세계 선교를 교회의 제일 과업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5. 예화 - 선교사는 죽어서도 말한다

 

서울 합정동에는 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이 있다. 이 땅을 ‘복음의 땅 끝’으로 알고 찾아왔다가 숨진 10개국 395명의 선교사들이 묻힌 곳이다. 양화진에 자리한 기념관은 지금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은혜 보답의 차원에서 이곳에 외국인교회를 설립했다. 선교사들의 묘비는 생명력 넘치는 메시지가 되어 방문객들의 영혼을 두드린다. 풍상에 씻겨 흔적을 알아보기 힘든 빛 바랜 묘비들에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들이 적혀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A. K. 젠슨).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을 위해 바치리라”(R. 캔드릭).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A. R. 아펜젤러).

 

 

 

6. 예화 - 선교사의 자격

 

 

리빙스턴(David Livingston 1813-1873) 박사는 아프리카에서 일하고 있을 때 몇몇 친구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우리는 자네에게 사람을 몇 명 더 보내고 싶네.

자네가 있는 지역으로 가는 좋은 길을 알아봐 주길 바라네.”

이에 리빙스턴은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이 곳까지 오는 데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나는 길이 없어도 오겠다는 사람을 원하네.”

 

 

 

7. 예화 - 선교사로서의 마음가짐

 

어떤 교회 장로님의 딸이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연애를 해서 믿지 않는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후 남편 집안의 우상숭배와 시어머니의 핍박에 견딜 수가 없어 목사님께 상담하기를 이제는 이혼을 하고 예수님만 열심히 믿고 살겠다고 말했다.

 

목사님은 이 분에게 말했다. “이혼하는 것은 자유지만 한 달만 더 참고 살아보십시오.”

“한 달쯤이야 더 살아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그 한 달 동안은 부인께서 그 집에 보내진 선교사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보십시오. 밉든 곱든, 좋건 나쁘건 그래도 십 년 세월 동안이나 봉사하던 가정인데, 그 사람들이 다 지옥에 가도록 내버려 둘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목사님은 못살겠다는 아내를 이제 그 가정에 선교사로 파송한 셈이다.

부인은 각오를 단단히 하고 돌아갔다.

부인은 그 한 달 동안 시어머니의 잔소리가 있어도, ‘나는 며느리가 아니다. 선교사다. 저 할머니도 구원해야 한다.’하고 생각했으며, 남편이 못마땅해도 선교사의 마음으로 인내했다.

‘저 남자도 내가 구원해야 될 사람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내에게 남편이 사람이 달라졌다며 무슨 일이냐고 묻자 부인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당신의 아내가 아니라 선교사입니다.”

 

이 작전(?)은 마침내 성공을 거두어 그 분의 시어머니와 남편은 마침내 신자가 되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선교의 대상이다. 내가 속해 있는 가정도, 직장도 선교의 장소인 것이다.

 

 

8. 예화 - 저드슨과 선교

 

버어마에서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선교하고 투옥되면서 보냈던 아도니램 저드슨이 보스톤으로 돌아왔다. 일만여 명의 군중들이 저드슨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몰려왔다. 그는 엄청난 고난으로 말미암아 허약해져서 혼자 힘으로 연단에 오를 수도 없었고, 서 있을 기력이 없어 의자에 앉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은 볼 수 있었어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연설 중 청중들이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고, 그 날 21명의 청년들이 앞으로 나와, “버어마로 가겠다. 저드슨을 대신하여 우리가 전도하자!”라고 외치며 선교에 헌신했다.

 

태국의 개신교 역사는 실질상 1816년 버마 선교사인 아도니람 저드슨 선교사의 부인인 안 저드슨 여사에게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 버마에는 태국인들이 많이 잡혀왔고 선교사로 일하던 저드슨 부부가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특히 안 저드슨 여사는 이들에게서 태국말을 배우고 요리문답을 태국말로 번역하고 편지를 써서 태국으로 보내곤 했다. 그러나 태국에 간 적이 없기 때문에 태국의 첫 선교사를 말할 때는 칼 구츨라프와 동행한 제이콥 롬린을 공식적인 개신교 첫 선교사로 간주한다.

그들이 태국에 도착한 연도는 1828년으로 이 때를 개신교 선교의 원년으로 간주한다. 이후에 계속적으로 선교사들이 들어오고 선교부가 조직되기는 하였으나 크게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9. 예화 - 코 없는 선교사

 

한 정글 지역에 있는 기독교 학교에 아주 보기 흉한 소녀가 찾아왔다. 흉한 몰골의 그 소녀는 코가 없는 기형아였으며 저능아였다. 하지만 그 학교의 교감은 그를 환대하고 학교에서 지낼 수 있도록 했다. 학교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래 몇 마디를 배우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이 코 없는 소녀가 가진 유일한 소질이었다. 몇 달이 되지 않아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의 반대로 더 이상 소녀를 가르칠 수 없었고 교감은 그 소녀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슬퍼하며 다시 정글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소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졌다.

 

2 년 후, 한 선교회에 정글 지방의, 마을로부터 복음을 전해 달라는 간절한 호소의 편지가 왔다. 선교회는 그 마을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교사를 파송했다. 선교사가 그 곳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언덕에 모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오자 몇몇 사람들이 그를 맞이하여 주민 가운데로 인도했다. 선교사는 먼저 찬양을 하나 가르치기로 하고 간단한 합창을 하나 소개했다. 그러자 300여명의 원주민들은 “우리도 아는데요.”라고 말하며 찬양을 함께 불렀다. 선교사는 너무나 놀라 다른 찬양을 불렀는데 역시 그 찬양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어디서 배우셨나요? 내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는 한 사람도 없었는데 말이예요.” 선교사는 놀란 듯이 그들을 쳐다보았고, 그들은 한 사람을 손으로 가리켰다. 바로 학교에서 쫓겨난 후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진 그 소녀였다. 그녀는 저능아였지만 온 마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에게 찬양을 가르치면서 그들을 준비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비록 특출한 재능은 없었으나 온 마을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귀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주 미약한 자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10. 예화 - 영국의 리빙스톤

 

그는 스코들랜드의 불란타이어에서 1813년 3월 19일 낮은 신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고 매우 가난했다.

그는 디크의 '종교철학과 미래국가의 철학'이란 책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됐다.

데이빗 리빙스턴은 일반인들에게 지리학자요 탐험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선교에 헌신한 선교사였고,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학과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내 봉사를 받으셨다면 내 인생은 나의 사역이 끝나는 날까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 하에 있게 될 것이다.”

선교사로서 그가 주로 한 일은 아프리카의 길을 연 것이다.

 

남 아프리카 현지인들에게 그가 믿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라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리빙스턴은 머리를 낮추고 기도했는데, 이것을 본 그들은 그의 신이 땅속에 있다고 생각해서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1873년 5월 1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개척자적인 삶은 지금의 아프리카에 위대한 복음의 업적을 이루게 되는 결과를 낳게 한 위대한 인물로서 평가되고 있다. 이후, 그가 만든 지도를 따라 많은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소식이 끊겨 모두들 그가 죽은 줄로 알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한참 후에 소식을 전해올 때마다 그는 빅토리아 폭포 등 아프리카에 대한 중요한 사실들을 보고해왔습니다.

1855년 11월 15일, 리빙스턴이 "빅토리아 폭포"를 처음 발견한 사람으로 기록,

 

사실 그의 오른 팔은 사자의 공격으로 불구가 되어 있었다. 연설을 마치자,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일어섰다.

"선생님! 선생님은 아프리카 생활을 잘 이겨내도록 한 비결이있었다면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리빙스톤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열었다. "내게 있어 비결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십자가가 나를 끝까지 붙들어 주었을 뿐입니다."

 

 

11. 예화 - 리빙스톤의 소명

 

어느 날 영국의 한 시골에서 아프리카인을 위한 선교와 의료사업을 위해 헌금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다 헌금 그릇에 헌금을 하는데, 헌금 그릇이 한 소년 앞에 이르자 이 소년이 대뜸 그 그릇 위에 올라앉는 것이다. 헌금을 집행하던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이냐며 놀라서 묻자 그 소년은 말했다. “저는 돈이 없으니 제 몸을 바치겠습니다.” 그가 바로 최초의 아프리카 선교사가 된 리빙스톤이다.

 

 

12. 예화 - 리빙스턴 형제 이야기

 

David Livingston은 1813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0살 부터 공장에서 일하지 안으면 안되었다. 그는 이렇게 일하면서도 책을 사서 읽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어느 종교서적을 통하여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의 의무요, 가장 고귀한 특권이라는 것을 깨닫고 구원함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자신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미지의 아프리카에 건너가 그곳에서 33년 동안 복음을 전하며 의술을 가르쳤고, 초라한 한 오두막집에서 조용히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반면 그의 형은 캐나다로 건너가서 사업에 크게 성공하여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형이 죽고 난 후 그의 무덤 비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아프리카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 형의 무덤.’

 

 

13. 예화 - 선교사 다섯 명의 순교

 

 

 

미국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헌신했다. 다섯 명의 선교사들은 아내들을 후방에 남겨둔 채 경비행기를 타고 단한 명의 기독교인도 없는 에콰도르의 아우카 인디언 마을로 떠났다. 1956년 1월 2일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피트 선교사는 아내에게 긴급무선을 쳤다.

 

그가 “흥분한 인디언들이 몰려오고 있다. 기도해 달라.”라고 말한 뒤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이튿날 구조대원과 가족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다섯 명의 선교사들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있었다. 복음을 거부한 인디언들에게 순교를 당한 것이다.

 

20대의 선교사 부인들은 울부짖으며 다같이 다짐을 했다. “남편들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우리가 완수하자!” 그리고 그녀들은 아우카 마을로 이사해 복음을 전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마을은 ‘복음의 땅’으로 변해있다. 선교사를 살해한 다섯 명의 인디언들 중 네 명이 목사가 됐고 일천 명의 주민들은 모두 신자가 되었다.

 

피트 선교사 부인 라이펠트 여사는 선교사들의 용기 있는 활동을 담은 「아우카 선교이야기」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50여 년 전 뿌려진 순교의 씨앗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은 소중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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