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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가치
17-18세기 유럽의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두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플랑드르 출신의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와 네덜란드 출신의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를 들 수 있습니다. 궁정화가로서 외교사절까지 맡았던 루벤스는 많은 부와 명예, 그리고 수많은 제자를 거느린 화가였습니다. 반면 렘브란트는 가난하고 불쌍한 삶을 살았던 화가입니다.
렘브란트는 당대에 살고 있던 주변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을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초상화와 자화상을 잘 그리기로 유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초창기 렘브란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부유한 귀족의 부탁으로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는 한 때 상당한 부를 누리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초상화를 부탁하면서 정면에서 그려주기를 원했고, 자기의 본래 얼굴보다는 더 멋진 모습으로 그려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렘브람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얼굴을 정면에서 그린다는 것이 구도상 부자연스럽고 무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의 요구대로 실제 얼굴과 다르게 그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렘브란트는 부자들의 요구대로 하지 않고 그림으로서 훌륭하게, 그리고 인물의 모습 그대로 그렸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의 초상화보다는 움직이다가 사진을 찍는 듯한 모습을 즐겨 그렸기 때문에, 화가 나 있으면 화가 난 모습으로 그렸고, 얼굴이 일그러져 있으면 일그러진 모습 그대로 그렸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실제의 모습보다도 더 못난 모습으로 그리지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초상화 부탁이 점점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습니다. 결국 레브란트는 가난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가 죽을 때에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옷 몇 벌과 그림 도구들뿐이었다고 합니다.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그림을 그림답게 그리겠다는 그 신념을 위해서 그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가는 가난과 궁핍이었습니다.
우리가 종종 우리 앞에서 손짓하는 유혹의 손짓을 거부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거부함으로서 내게 주어질 불이익 때문입니다. 정직함이 바른 삶의 모습임은 초등학교 ‘윤리’나 ‘바른생활’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직하지 못한 선택을 하고, 정직하게 못한 삶을 살게 되는 이유는 정직함으로 인해 당하는 불이익 때문입니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 그의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갈파했듯이,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사람들도 사회내의 어느 집단에 속하면 집단적 이기주의자로 변하고 맙니다. 비도덕적 사회가 인간을 도덕적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비도덕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여전히 도덕과 윤리를 지키며 살려고 몸부림친다는 것이 얼마나 처절하고 힘든 것인가를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럼에도 신앙인은 그 처절한 삶을 고집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이 삶의 기준으로 삼는 신앙이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가치기준은 신앙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부정한 방법이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 손에 쥐어질 이익을 위해서 부정한 방법이라도 개의치 말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을 위해서 박해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고, 세상에서 왕따를 당하더라도 거짓에 물들어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과 세속적인 욕구를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세상의 명예와 칭찬과 박수가 있는 넓고 쉬운 길을 가지 말고, 좁고 협착한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가르침과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갈수록 우리 시대는 우리에게 ‘적당히’ 살라고 요구합니다. 신앙의 가치를 위해서 고집스럽게 사는 것을 ‘어리석고 고리타분하다’고 말합니다. 그게 세상의 가치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의 가치가 우리를 세뇌시키려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신앙의 가치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이데올로기나 현실적 욕구보다 힘을 잃어가고 있는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는 더욱 신앙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신앙의 가치가 우리의 삶에 분명한 기준으로 자리매김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인답게 살 수 있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기필코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난 것은 모두 그리워만 진다.’ 푸슈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 1799-1837)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도입부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삶은 우리를 결코 속이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의 거짓된 가치가 우리를 속일 뿐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을 속이지 않습니다. 신앙은 오늘의 현실보다도 더 큰 세상을 바라보며 살게 합니다. 비록 오늘은 힘들더라도.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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