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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앙에 대하여 - [제 3 장]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1)

하나님아들 2012. 9. 28. 17:17

제 3 장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1)

 

[민 21:4-9, 요 3:14]

 

 

서언

 

오늘 아침에는 우리가 신앙의 자태라 혹은 신앙의 상태라 하는 것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신앙이라는 말이 원래 추상명사인 까닭에, 신앙의 자태라고 하더라도 눈에 보여질 수 있는 것은 아니올시다만 오늘은 그 자태를 한번 그려보기로 합니다.우리는 주를 믿노라 하고 신앙을 가졌다고 하지만 그 신앙의 모양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서도 다 같이, “우리는 정통이다. 우리는 구원받았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도 일찍이 광야에서 항상 모든 그릇된 악을 행하고 또 주께 대한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면서도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시편 기자가 “입으로 주께 아첨하며 혀로 주께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다”(시 78:36,37)하고 말씀한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오늘날 교회 안에도 많이 있는 까닭에 우리의 신앙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항상 잘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타매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상태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렘 7:8) -아닌 것을 그런 것으로 생각한다 그 말입니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사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7:9-11).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이 눈앞에 차츰차츰 가까이 이르렀는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여호와의 전에 나와서 경배를 드리고 성회로 모이면서 “우리는 다 구원함을 받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올시다”고 한 것을 선지자 예레미야가 타매한 말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 왕국을 건설하고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들이 그곳에 자리잡고 살던 나머지 이제, 주전 약 600년경, 멀지 않아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이 와서 그 나라를 치고 도륙을 해서 마침내 멸망하게 될 운명에 처해 있으면서도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허위의 종교와 거짓된 신앙 상태를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나타나서 그들의 거짓된 종교를 타매했어도 그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상태가 가장 고도적으로 올라갔다고 할 만한 시대를 생각하면 그것은 히스기야왕의 시대입니다. 주전 700년경, 그 때 히스기야왕이 일어나 철저한 개혁을 시도해서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왕하 18:5-6)고 성경이 보증할 만큼 철저히 하나님을 붙좇아 행하려 하면서 일대의 종교개혁을 이룩했습니다. 그래서 후세의 유대 학자들 중의 어떤 사람, 그 가운데도 주후 3세기경에 났던 유명한 유대의 대 지도자 아모라, 힐렐이라는 사람은, “우리는 메시야 왕국의 시대를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히스기야왕 때에 우리는 이미 메시야 왕국을 다 경험했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만큼 위대했던 시대요, 종교개혁이 한참 성했을 그 시대의 중기에 이사야가 일어나서 그들의 종교는 내부에 실질이 없고 참된 거룩함이 없이 형식만을 꾸며낸다는 사실을 타매했습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0-15).

 

이 이사야의 타매는, 종교적으로 하나의 고도적인 위치에 도달했었을 때의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상태를 보고 경고했던 참예언자의 명확한 통찰과 바른 판단의 중요한 한 예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우들이 여러번 배워서 익히 하는 바입니다.

 

책망을 받으나 더욱 악화된 그들의 신앙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종교적으로나 혹은 도덕적으로 부패했던 대표적인 시대, 곧 예레미야 시대와 같은 때에도 선지자들은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타매했고, 또 종교적으로 가장 고도적이라고 하던 히스기야왕의 시대와 같은 때에도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또한 그 내실이 없는 것을 타매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늘 그릇된 방향으로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이 이 사실을 웅변으로 충분하게 늘 가르치고, 또 성경이 그 역사를 자세히 기록하고 말씀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큰 그릇된 사실을 대관하지 못하고 항상 종교의 형식과 형성에 주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동안에 하나님이 참고 계시면서 은혜로 주시는 그 시대를 자기네가 당연히 향유할 수 있는 평안인줄로 착각하고 그릇 되이 나갔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그릇 되이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꾸짖으시고 경고하시고 깨닫게 하시다가 마침내 저들의 우매와 저들의 완고가 극에 달할 때, 곧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그 죄가 극에 달할 때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하신 그대로 일정한 기간이 지나서 심판하셨습니다. 당신이 아끼시사 위대한 사명을 주었던 이스라엘 백성일지라도 땅 위에서 그 존재의 가치를 도말 하시고 그들을 오히려 이방의 압제와 쇠사슬의 손에 넘겨주시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자태를 항상 바르게 반성하고 분별해야 하고, “나는 구원을 받았나이다. 주여,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입으로 아첨을 하며, 그릇된 생각으로 자기는 된 것 같이 생각하는 것이 큰 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민수기의 명칭

 

오늘 아까 낭독한 말씀은 민수기 가운데서도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게 물려서 고통 하던 장면입니다. 일찍이 우리 교회에서는 히스기야왕 때에 모세가 만든 이 놋뱀을 두들겨 부숴서 그것을 “느후스탄”, 곧 “놋조각”이라고 불렀다는 장면을 공부한 일이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문제가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의 자태는 어떠했는가 하는 그것입니다.

 

“민수기”라는 이름은 백성의 수를 계산했다는 뜻으로 민수기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넘버스 라틴어로는 누메리, 또 70인 역경에서는 아리스모이라고 썼습니다. 모두 다 계수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민수기 전체의 기록을 우리가 볼 때 사실상 그 중요한 내용은 백성의 수를 계산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의 수를 계산했다는 것은 두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민 1-4장, 26장). 민수기의 이야기의 시작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 밑에서 율법을 받고 성막을 지은 다음부터 시작합니다.

 

출애굽 직후의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상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온 후, 한달 동안에, 홍해를 건너고 마라에서 쓴 물을 달게 하고 엘림에서 유하였으며 그 다음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만났습니다. 그 후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전쟁을 하고 애굽을 나온지 3개월이 되는 때에 시내산 밑에 당도하였습니다. 여기서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율법과 거룩한 계시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가 산에서 그것을 받는 그 동안을 못 참고 다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애굽적인 요소가 발휘되어서 애굽의 신 가운데 “아피스”라는 신상, 즉 금송아지 신상을 자기네의 패물을 드려서 아론을 시켜 만들어 놓았습니다(출 32:1-6).

 

그런데 그 신상의 형식은 “아피스”의 형식이나, 그 신의 개념만은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내신 신이라” 이렇게 부여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적인 신을 만들되 그들이 배우고 듣고 본 바가 애굽적인 우상 종교였던 까닭에 그 우상종교의 상을 그대로 가지고, 곧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이 지은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고 그것을 자기네 신으로 섬겼습니다(롬 1:23). 이것은 그들이 애굽의 신을 섬기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아피스를 그대로 섬기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애굽에서 가장 존중히 여기는 아피스라는 신의 모양을 본떠서 자기네의 신, 홍해를 건너 자기네의 신으로 삼고 이스라엘 종교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훼파되었습니다(출 32:1-20). 본래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을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 세우셨습니다. 그 신성한 목적이라는 것은 출애굽기 19장에 이미 나타난 대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5-6)하신 것입니다. 즉,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요,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나라”라는 존재 가치와 사명의 내용을 가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친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다 받았습니다. 이것을 그들이 다 받았지만, 그들은 이것을 해석하기를 “애굽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그 신을 우리가 섬기고 살아야 하겠다.”하면서, 아피스의 상을 가지고‘자기네의 종교’를 가지겠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개념을 부여해 가면서도, 사실상은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자기네식 종교를 형성해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위험이 늘따라 다닙니다. 만일 하나님 나라의 그 깊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네식으로 교회를 꾸미고 교회를 이루어 나가려고 한다면,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 사상이나 지식이나 개념이 전통적으로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배운 그것밖에 없는 까닭에 금송아지를 만든 것과 같이, 그들도 자기네가 보고 듣고 배운 그 정도 안에서 교회를 이루어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네가 모르는 중에 이교적인 요소를 항상 포함하기 쉽습니다. 이교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하고 하나님 앞에 아첨하기가 쉽습니다.

 

공리적인 종교 사상

 

이런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인 상태였다는 것을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제도와 계시를 율법이라는 형식으로 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은 받은 바 율법과 제도를 어떻게 해석하고 무슨 의미를 가졌는가를 깨달으면서 제도를 세우고 율법을 준행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어떻게 준행하느냐 하는 문제는 율법에 대한 해석에 달려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율법에 대해 어떠한 관념을 가지고 어떠한 형태를 가지고 그것을 해석해야 할 것인가가 그 때 남아있던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아피스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신을 표시하려 했던 이 사람들, 즉 애굽적인 종교의 관념과 지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율법에 대한 해석과,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로서의 성막과, 성막을 중심으로한 사회법의 모든 실행이라는 것이 “아피스는 곧 이스라엘의 신이다”라는 그 종교 관념의 테두리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 여러가지 요소 가운데 중요한 것은 공리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이 공리사상이라는 것은 불신자에게 있어서는 불가결한 것이요, 신자의 초입문에 있어서도 대개 가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하는 사람들은 공리사상에 맞춰서 전도해서는 안됩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이 공리사상에 맞춰서 전도를 할 때에는 전도를 받는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관념의 기초적인 것부터가 아피스적인, 애굽적인 것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찾을 때에는, 죄로 인하여 마음에 고심이 있고 죄의 형벌로 인한 두려움이 있고, 이상향을 찾아서 가고 싶은 요구가 있으며 평안과 기쁨을 얻고 싶은 요구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환란과 괴로움과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사람의 힘이 와서 이것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러한 까닭에, 그 사람들이 종교를 찾아 나올 때 전도자가 나와서 “당신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써 다 용서함을 주신 까닭에 당신은 용서함을 받고 지옥의 형벌을 면하고 그 대신 천당복락을 바랄 것이올시다” 즉 마음에 있는 괴로움을 덜고, 그리고 새로운 행복과 희망을 준다는 두 가지의 공리적인 제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전도자의 제시가 그것으로 끝나게 되면 그 사람들의 종교는 언제든지 거기에서 맴돌고 그 이상 더 발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다시 자기의 과거에 가지고 있던 동기에 너무도 인간적인 것과 공리적인 것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즉 그 거대한 새로운 변혁이 마음에 생기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며 그 때까지는 공리주의적인 종교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작자가 그러한 상태 안에서 기독교를 건설해 나가고 있는 동안에는 교회가 아무리 크고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그 전체가 그러한 종교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적인 신상에 이스라엘적인 신개념을 부여한 그러한 종교 상태도 한두 사람이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60만 이상의 장정들이 다 그런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민수기에 수를 계산한 것을 보면 603,550명(민 2:32)입니다. 이것은 레위 사람은 뺀 숫자입니다. 원래 레위 사람들에게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나와서 얻어야 할 가나안 땅에서의 분깃을 주지 않은 까닭에 603,550명이라는 숫자에는 그들이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레위 사람은 어린아이와 어른을 다 세면 남자만 약 22,000명쯤 될 것입니다. 레위사람의 수는 나중에 모압 평지에서 또 한번 계수할 때에도 그 수가 줄지 않고 비슷한 수가 나왔습니다.(민 3:39, 26:62). 여하튼 이만한 수의 그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어떤 일정한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민수기의 개략

 

그들은 애굽에서 나오는 그 날을 정월 초하루로 정하여 새로운 성력을 만들었습니다(출 12:2). 그리고 애굽 땅에서 나온 때로부터 제 삼월에 시내 광야에 이르렀고 거기서 새로운 제도를 받고 이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제도로서의 성막을 세운 때가 제 2년 정월 초하루입니다.(출 40:17). 제 2년 정월 초하루에 성막을 세웠다는 것은,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발행해서 허락하신 새 땅을 향해서 나갈 수 있는 필요한 조건들을 내려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필요한 조건으로써 이제 준비를 시작한 때가 2월 초하루 부터입니다(민 1:1). 2월 초하루부터 시작하는 이야기가 이 민수기의 처음 기록입니다.

 

☞제 1 부 : 여행을 위한 준비

 

민수기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 1부는 1장부터 대개 9장까지인데 2월 초하루에서 2월 20일까지 대개 20일간의 이야기입니다.(민 1:1, 10:11) 이 기간에는 이제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준비를 하는 것인데 이 준비를 위해서 먼저 백성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를 계산하고 그 백성을 정돈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1장부터 4장까지의 이야기인데 백성의 수를 해어본 결과 603,550명이었고 그 외에 레위인이 더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회중을 정결케 하고 축복을 한 다음 회중의 두령들이 하나님 앞에 봉헌할 예물을 거룩히 구별해서 제단에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전에 제 2의 유월절을 지킨 것이 나타나고(민 9:1-5). 그 다음에는 행진에 필요한 거룩한 지시로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낮과 밤을 통해서 언제든지 이 성막 위에 머물다가 그것이 일어나면 따라갈 것이고 그것이 머물러 있으면, 백성들도 머물 것이며 그 시간은 하루가 되든지 한달이 되든지 혹은 일년이 되든지 그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정해주는 대로 따라서 행할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대오를 정비해서 차례차례 각 지파가 앞뒤에 서서 정렬해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나팔을 준 일, 나팔 소리를 신호로 회중이 해 나갈 일들, 이런 것들이 씌어 있습니다.

 

제 2 부 : 저급한 욕구에 이끌린 이스라엘 백성

 

제 2부에 들어가면 민수기 10장부터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을 출발해서 가데스 바네아라고 하는 저쪽 바란 광야 혹은 진 광야의 변경, 에돔의 국경지대까지 이르렀습니다. 이거리는 10일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 거리를 가는 도중 다베라에서는 악한 말로 여호와를 원망하여(민 11:1-3)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른 일이 있었으며, 또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 즉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묻어서 나온 다른 부족이 탐욕을 품어서 무얼 먹고 싶다 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기에 그만 끌려 들어가서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민 11:4-6)고 하며 원망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상태가 다시 나타납니다. 그들은 어떤 상태에 있었던 백성이었는가 하면 애굽에서 값 없이 생선과 외, 수박,부추,파,마늘 이런 것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는 백성이었습니다. “애굽에서는 입맛에 맞게, 그리고 값 없이 먹었다.....”그러나 그들은 노예로서의 노역의 대가로 그것을 먹었다는 것은 생각지 않았습니다. 죽을 지경으로 종노릇을 해 주고, 담부지역으로 고생을 해가면서 그것을 얻어 먹은 것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애굽인들은 그들을 노예로 부려 먹으니까 그 노예들에게 먹을 것을 주되 애굽식의 음식물들, 생선도 외도 수박도 준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짐승을 부려 먹으면서 먹을 것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들이 중요한 음식도 아닙니다. 사치스런 음식입니다.

 

우리도 다 정상적인 식사로서 외나 수박과 같은 과실을 먹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그들의 불평하는 말 가운데에는 식사의 중요성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생선도 반낯에 불과하고 외와 수박도 부식이며 파.마늘.부추 이런 것들도 다 부식 혹은 양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생각난다 그것입니다. 요구하는 것들이 본질적인 것들이기보다는 항상 입맛을 강하게 자극했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먹던 것이 생각이 나는데 여기에는 이 만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에겐 정력이 없다 그것입니다. 정력이 파.마늘을 먹음으로써 생긴다 하는 것도 사실은 자기네 짐작뿐이겠지만, 좌우간 이렇게 되어서 애굽의 입맛에서 못 떠나겠다 그 말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안은 세상의 그것과 같지 않음

 

여러분,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생활을 할 때 그것이 담백하기가 만나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나”라 하니까 우리말로는 맛있다는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런 뜻은 아닙니다. 물론 맛이 전연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백성이 두로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맛 같았더라”(민 11:7-8)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식이요, 또한 주식입니다. 먹어 영양을 섭취하고 충분히 칼로리를 보유하여 건강을 유지하고 살아갈 것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에 비해 부추나 파나 마늘에서는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지도 못하고 주식이 주는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때때로 자극성 있는 것을 요구하되 자신이 생에 아무 중요한 것을 주지도 못하는 것들에 연연 불망해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등지고 나오면 단번에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것이 우리에게 다 주어지기는 하지만, 이때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나 하나님 나라의 평안 또는 하나님 나라의 은혜의 내용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나 평안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평안은 한참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고 고심하다가, “이제는 괜찮다”고 하니까, “휴우 이제는 안심이다.”하고 몸을 탁 풀어 버리고 쉴 수 있는 그런 식의 평안이 아닙니다.

 

또 그 기쁨도 세상이 주는 기쁨처럼 그만 어쩔줄 모르고 히득거리고 정신없이 날뛰는 그런 기쁨이 아닙니다. 기쁨 가운데에서도 능히 슬픔을 충분히 보존할 수 있는 그런 기쁨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거기에 가서 그 영원한 기쁨을 늘 누리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나라이지만, 거기에서도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과 같을진대 세상에 있는 자가 식구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슬퍼하시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슬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슬픔을 가질 수 있는 기쁨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을 수 있는 그런 기쁨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주는 기쁨과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 하나님의 것으로 기쁨과 평안 얻어야 함

 

그런데 그리스도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주는 기쁨, 마치 마늘을 먹었을 때 톡 쏘는 맛과 같이 자극성이 강하고 그리고 감정을 압도해 버리는 그런 것을 주지 않는다 해서 연연 불망해 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길을 걸어가면서 항상 애굽의 외나 수박이나 부추나 마늘이나 파에 연연 불망해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의 거룩한 교제는 세상에서 계나 해서 모이는 그런 교제가 아닙니다. 담담하지만 영속이 있고, 영속성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은 실질상으로 능력이 되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의 이 거룩한 교통, 곧 코이노니아를, 자칫 세상 사람들이 자별하게 자기 혈통끼리 모여서 어쩔줄 몰라하며 입에 있는 것도 서로내 불만한 그런 정리로 생각할 때는, 교회에서 그런 것을 안 준다고 불평을 하거나 혹은 교회라고 쓸쓸하여 맛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인간의 감정과 향락에다 근거를 두고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을 만들어 내기 시작할 때 교회는 타락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늘 하나님의 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평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서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적을지라도 그것이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고 그것이 아직 자라나지 않았으니까 얼른 다른 것으로 대충해야 하겠다 하고 행하는 것이 뭐냐하면 파나 마늘이나 부추나 외나 수박으로 대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 상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늘 있었다는 사실을 여기서 보는 것입니다.

 

광야의 생활 - 경과적 상태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나 평안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씨와 같이 우리에게 들어오지만 우리의 거룩한 생활과 성장이 더해 감에 따라 착실하고 튼튼하며 풍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희미하고 무력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은혜가 만나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만나는 광야를 지나가는 동안에 필요한 식료였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이 들어갈 땅에 가서도 먹고 살 것은 아닙니다. 들어갈 곳에 들어간즉 풍성한 것으로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항상 마늘.파.부추에 해당하는 자극성을 요구한다면 결국 인간적인 향락과 자극을 별다른 방법으로 대충하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래 그것을 일단은 무시하도록 하시고 만나라는 것으로 훈련을 시키셔서 나중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채워주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의할 것은 광야에서는 만나나 메추라기가 그들에게 주식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이 광야 생활이 우리의 신앙 생활의 전체의 표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가나안 땅에 건설되었을 때 그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의 중요한 표본인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나라를 건설하고, 가나안에 있는 선주 민족들의 문화를 차례차례 파괴해 가면서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세우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광야를 지나가는 것은 경과적인 상태입니다. 역려과객의 생활이 우리의 신앙 생활의 전부를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또한 오해하기 쉽습니다. 광야의 생활이라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확고한 사명 의식과 또한 그 목적을 가진 생활에 확실하고 명확하게 들어가기까지의 경과적인 상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사명은 광야를 지나가는 그것이 아닙니다. 광야는 그들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지나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들어갈 가나안에서 첫째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 둘째는 제사장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것입니다(출 19:5-6, 신 7:6, 레 20:26, 벧전 2:5). 또 하나님의 보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신 26:18). 여기에 그들이 어떻게 되어 있어야 할 것과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다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 1 세대의 반역

 

이 백성들은 그러한 빈약한 신앙 상태를 가지고 나가다가 다시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에 이르러 성막을 치고 자기네가 들어갈 땅으로 염탐꾼을 들여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한 것은 비관적인 소리였습니다.“우리가 두로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도저히 거기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갈렙은 이 말을 절대 부정했을지라도 대부분의 정탐꾼들은 그런 소리를 했습니다. 회중들은 이 말을 듣고 그만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도라”(민 14:1). 그러면 이와 같이 밤새도록 곡을 했으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정성이 가상하다고 하실 만한 곡을 했습니까? 오히려 밤새도록 반역하는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가면서 소리지른 것이 “하나님을 신용할 수 없다”는 그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이들이 가지고 있던 패역의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민 14:2-3). 하나님이 우리를 그 땅에 인도해서 칼에 망하게 하려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애굽에서 구속함을 받고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입니다.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3). 그리고 또 어떻게 했는가?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민 14:4). 두령 하나를 내서 그의 인도함을 받아서 애굽으로 돌아가자 - 이제는 철저하게 반역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이렇게 해서 비로소 이들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은 가장 정점에 달하여 결정적인 악행을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무어라고 하셨는가? “이 백성은 내가 큰손과 편 팔로 건져냈지만 이 하는 꼴을 보니 이대로는 저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인도해서 들어가게 할만한 능력이 없으셔서 그러신 것이 아님을 다 아실 것입니다. 왜 이 백성이 저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이런 꼴로 열번도 더 변역하고 반항하던 이들에게는, 도저히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물려 받아, 그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여호와께서는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골짜기에 거하나니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로 하여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20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40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민 14:22-34)고 하셨습니다.

 

광야에서의 신진대사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기서부터 근 40년, 만수로 37년 이상을 가데스 바네아를 중심으로 사방의 골짜기를 빙빙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에다 텐트를 치고 광야의 생활을 했습니다. 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갈렙과 여호수아를 빼 놓고는 애굽에서 나올 때 20세 이상으로 계수된 60만명이라는 장정들이 하나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 죽는 기한이 37년간 하나씩 하나씩 다쓰러져 없어지고 그 대신 애굽에서 나올 때 직접 책임을 지지아니하고 무엇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따라 나오던 20세 미만의 사람들과, 그리고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다시 큰 무리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다시 무리를 만들어 가지고 애굽에서 나온지 제 40년 초에 이번에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저 아래 에돔 곁으로 돌아서 홍해의 아래로 내려 갔다가, 즉 엘랏이라는 곳으로 내려 갔다가 에시온 게벨에서부터 다시 아라바 길을 통하여 북쪽으로 올라가서 모압의 평원에, 여리고의 맞은 편에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거기에서 다시 백성의 수를 계수해 보니 전과 대차가 없었습니다. 먼저는 603,550명이었는데 다시 모압평지 앞에서 계수하니 601,730이었습니다.(민 26:51). 60만이 넘는 수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 수는, 60만이 넘는 수가 광야에서 쓰러지고 신진대사를 해서 광야에서 다시 태어난 수와, 애굽에서 나온 20세 미만의 수를 합한 것입니다. 그러니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60세 정도일 것입니다. 처음에 20세가 안되어 계수되지 아니한 사람이 광야 생활 37년을 했다해도 60세를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60만명의 장정들이 이제 가나안 백성의 땅을 쳐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홍해의 엘랏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아라바길로 해서 모압 평지까지 가는 기간은 약 10개월이 걸렸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미리암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죽었고 또 호르산에서 이번에는 아론이 죽었으며 최후에 모압 평원의 느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불려 가심을 받아 죽었고 그 대신 여호수아가 그의 후계자가 되어 그들을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입니다.

 

제 2 세대의 원망

 

그러면 오늘 본 성경 말씀, 구리뱀의 이야기는 모압에 들어가면서부터의 이야기입니다. 즉, 아라바 길을 가다가 만난 일입니다. 백성들이 아라바 길을 가다가 원망한 때문에 불뱀을 본이야기입니다. 백성이 아론이 죽었던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즉 엘랏 혹은 엘라나 쪽으로 갔다가 거기서부터 에돔 땅을 둘러 -에돔 땅을 서쪽에서부터 남쪽으로 해서 동쪽으로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였습니다(민 21:4).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민 21:5)

 

여러분, 여기 이 백성들의 이 원망의 상태를 우리가 다시 한번 보십시다. 이 백성들의 원망의 상태도 먼저 번에 원망하던 상태와 비슷합니다. “어째서 우리를 애굽에서 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식물도 없고 물도 없지 않으냐? 이 박한 식물, 이것만 우리가 먹어야 하느냐?” 똑같은 원망입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은 누구냐 하면 사실상 애굽에서 나온 그 사람들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거의 다 광야에서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제 이 불뱀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 가운데 몃 사람이나 애굽에서 참말로 나온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애굽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나온 사람치고는 20세 이상은 광야에서 벌써 다 죽었을 터이니까 20세 미만의 사람들만 몇 사람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애굽에서 우리를 왜 인도해 냈느냐?”고 하는 것은 역시 애굽에서 20세 미만으로 홍해를 경험한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불평하는 소리일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광야에서 난 사람들이니까 애굽에서 왜 인도해 냈느냐 마느냐 하고 원망할 까닭이 없습니다. 주동자들, 말하자면 40세 이상 60세 미만의 제일 어른들이 이제 그런 소리를 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니까 박한 식물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길에 물도 없다. 먹을 것도 시원치 않다.”-항상 먹고 입고 사는 문제를 가지고 원망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길이 멀고 멀어서 목적지에는 언제나 독착할는지 알 수 없다 하는 것입니다. 밤낮 빙빙 돌아다니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남쪽으로 갔다가 목적지를 향해 올라가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원망을 했습니다.

 

원망 불신에서 비롯

 

그러면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원망의 상태를 볼 때,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이런 것을 배웠는가? 그러나 배운 것 없이 죄는 짓는 것이니까 마음 가운데 있는 본성대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다만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불신의 상태는 자기네의 선대에게 배웠습니다. 지금 거의 60만이나 되는 이 대군은 제 2세대입니다. 제 1세대는 다 죽어 넘어지고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2세대를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의 선주 민족을 쳐서 그 땅을 차지하게 하고, 그것을 다만 파괴만 할 뿐 아니라 거기에다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건설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담당해야 할 역군이 되는 이 백성이 또 이렇게 원망을 하고 무신의 상태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들이 이러한 신앙 상태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즉 과연 가나안의 선주 민족들의 강렬한 -특별히 헷 사람들의 제국이 거기서 가장 큰 문화적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 위대한 이교문화를 극복하고 파괴하면서 성막을 중심으로 거룩한 문화와 하나님 나라의 자태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울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본은 신앙이라는 은혜의 방도입니다. 하나님을 절대로 의지하고야 파괴도 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야 우상을 소멸하고 소탕할 수 있으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고야 그 훌륭한 전각과 훌륭한 건물들과 문화 시설을 아깝게 생각지 아니하고 다 쓸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적당히 이용하면 되겠다.”고 하면서 적당히 이용할 것이 아니라 파괴하고 쓸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신앙이 있었느냐 하면 그 신앙이 없었다 그것입니다. 그 신앙이 없었기에 하나님께 대해서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냈느냐?”하고 다시 이런 무지한 소리를 한 것입니다.

 

불뱀 사건 - 하나님이 보이시는 분기점

 

이러한 상태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어떻게 하겠느냐?”하는 한개의 최후의 위기를 갖다 주셨습니다. “둘중에 하나를 취해라. 믿음으로 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이 땅에서 죽어버리든지 해라.”- 이것이 불뱀입니다. 불뱀이 나와서 무니까 이제는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든지 할 것입니다. 불뱀의 중요한 큰 사실은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능히 담당할 수 있게 되겠는가 아닌가를 구별해 내는 최후의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켜서 이 백성에게 긴 교훈을 하셨습니다. 모세는 평원에 백성들을 모아 놓고 자신은 산에 서서 적어도 세시간 반이나 네시간 동안 이 교훈을 했습니다. 그 교훈의 가장 큰 내용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니까 이 한 분 하나님을 떠나지 말아라. 그 한 분만을 섬겨라. 다른 짓을 하지 말아라.”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과거 광야 40년간에 때때로 가르쳤던 법을 종합해서 주욱 정돈하여 권고하며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의 내용입니다.

 

구원받을 믿음

 

그러나 그 사람들이 그런 교훈, 즉 율법이나 거룩한 제도에 대한 해석을 주석과 같이 받기 전에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기본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사명을 받기 전에 먼저 믿음의 자태가 바로 서있어야 했습니다. 자기네는 믿음이 있는 줄알고 갔지만 일단 믿음의 시련에 부닥칠 때 항상 그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따라서 가나안의 선주 민족의 문화를 파괴하고 그 위에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문화를 건설할 수 있는 큰 사명을 질 수 있는 사람들인가 아닌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한 믿음의 형태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믿음이라는 것은 “천당간다.”는 생각만 하고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천당간 다고 말로만 하고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믿음이라는 것은 가나안과 같은 이땅, 바벨론과 같은 이 땅에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이 땅의 유혹과 자극을 맹렬하게 물리치고 파괴할 수 있는 자각, 그리고 그보다 강렬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문화를 건설할 수 있는 자각이 생기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그러한 사명에 대한 자각이 없는 믿음이면 구원받았다 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래 큰 사명과 영광을 주신 1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상태로서는 그 사명과 영광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 다 쓰러져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광야에서 쓰러져 죽을 수 밖에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처음 그 사람들이 애굽에서 구원함을 받았을 때에는 하나님을 얼마나 찬송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홍해를 건너갈 때, 홍해의 그 위대한 기적을 보았을 때 하나님께 대해서 감사하며 환희 작약했습니다. 미리암은 일어나 소고를 들고 춤을 추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일단 그 신에 대해서 어떤 종교적 형태를 취하려고 할 때에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아피스의 상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이 그릇된 인식 가운데서 발생한 이들의 신앙은 한 때 환희에 차서 감사를 했지만 그 신앙의 정도는 결국에는 광야에서 죽기에 알맞은 믿음에 불과했습니다.

 

열매, 구원에 대한 감사만으로는 맺지 못함

 

오늘날 우리도, 우리의 신앙이 고작 광야에서 죽기에 알맞은 신앙이면서도 때때로 “받은 은혜 때문에 감사합니다.”하며 환희, 작약하는 그것으로 도호하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지금은 기뻐하고 하나님이 은혜 주신 것을 감사하지만 감사한 그것이 믿음의 정도를 높이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한 그것으로 우리의 믿음이 결국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엘림에서나 혹은 마라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보았을 때 하나님 앞에 또한 감사하고 찬송했지만, 그것이 그들의 믿음이 광야를 능히 벗어날 수 있음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내산에서 그들은 법을 받고 거룩한 제도를 받고 또 사명을 받아 어떠한 백성이 되어야 하겠다 하는 목적을 갖게 됐지만, 그 목적을 가졌다는 그것만으로는 광야에서 넘어져 버리는 상태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거룩한 제도를 받고, 브사렐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그 제도에 맞춰서 훌륭하게 성막을 만들었지만(출 31:1-5), 그렇게 제도를 가지고 성막을 만들고 새로운 백성으로 조직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이 광야를 벗어날 수 있다는 보증은 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훌륭히 짓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많아서 거룩한 제도를 세웠으니까, “이만하면 됐다. 이만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하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제 1세대의 이스라엘 백성 중 갈렙, 여호수아 외에는 다 광야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믿음은 광야에서 쓰러지는 믿음입니다. 어디까지 가는 믿음이냐? 광야까지만 가고 마는 믿음입니다. 허락하신 그 땅에는 못 들어가는 믿음입니다. 현세에서 끝나고 마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과거의 세대로부터 대를 이어나온 제 2세대의 백성도 그러한 믿음의 상태를 못 벗어난 것입니다. 여전히 광야에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불뱀, 믿음 일으키기 위함

 

그러한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태의 그들에게 믿음을 일으키기 위하여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자, 너희가 불뱀에 물려 당장 죽어 가는데도 살 길을 찾지 않겠느냐? 살 길을 찾아 가든지 불뱀에게 물려 죽든지 둘 중에 하나다.”이는 무서운 죄악은 그 불뱀의 독과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속에 있는 자아라는 것, 속에 있는 아상이라는 것, 인간이라는것, 인간의 공리주의라는 것, 이러한 종교가 불뱀의 독과 같이 그들을 집어 삼키고 있는 동안에, “자, 이제 그런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내신 것을 절대로 그냥 신뢰하고 살아나겠느냐, 아니면 그 독으로 이 땅에서, 이 광야에서 죽고 말겠느냐?”나는 것입니다.

 

바란 광야에서 안 죽었을지언정 모압 평원에서 죽어라 그것입니다. 결국 모압 평원에까지 와서 죽은 것입니다. 모압 평원에서 죽은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많이 죽었을 것으로 성경에는 쓰여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구별을 해서 쓰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백성이 거기서 죽었다고 만 했습니다. 사람들이 죽이니 “큰 일 났다 !”하고서 그 때에서야 막 허둥지둥하며 “살려주십시오!”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살려줄 터이다. 그러나 너희의 몸뚱이만 살려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니 여기서 죽든지 믿음을 보이든지 해라.”하시면서 구리로 뱀을 만들어 떠억 달아 놓게 하셨습니다.

 

“이것 쳐다보면 산다.”하고-.

 

그러면 이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세상에, 살리려면 거저 살리지 뭐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해서 살린다는 말이냐?”하고 비웃는 그런 합리주의자도 있었을 것이고, 처음에는 안 믿고 완고하게 나갔으나 하다하다 못해서 거의 죽게 되니까 “에이 밑져야 본전이다.”하고 쳐다본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아예 처음부터 “아이쿠 이제는 죽겠으니, 뭐 하라는 대로 해야지. 그걸 말한 이가 우리가 지금까지 다 신뢰하고 따라오던 모세이니까 그가 하라는 대로 해야지.”하고 쳐다보고서 산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결어

 

거기에 어떤 상태가 있었을 것인가, 또 결국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생각하기로 하십시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이러한 믿음의 상태를 주의해서 바라볼 때, 오늘날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상태가 구원의 큰 은혜를 찬송하면서도 광야에서 쓰러지고 말 그런 상태인 것을 스스로 반성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홍해를 막 건너와 구원의 은혜를 찬송하던 미리암과 60만의 장정들이 다 가나안에 들어갈 사람들이었는가? 그 때 찬송하고 감사하며 가장 경건하게 하나님을 생각하던 그 사람들은 광야에서 쓰러져 죽었습니다. 광야에서 쓰러졌다는 이 사실이 무서운 사실입니다. 다 같이 기도하십시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우리의 구원의 믿음에 대한 확증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환희와 작약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기이한 사실을 보고 거기에 승순 함에 있지 아니하며, 또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제도를 우리가 그 계시에 따라 조성했다고 하는 데 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고 용기를 가지고 광야의 길을 지나며, 광야의 길을 지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에 대해서 의심하지 아니하고 사사에 주님만을 전부로 삼아 의지하고 마침내 우리의 사명의 길에 확연히 들어가서 그 각성을 가지고 전진하는 데 있음을 깨달았나이다.

 

주여, 자신들의 사명에 대한 확신이 없고, 땅 위에 있어서 자신들에게 주신 크신 경륜의 내용이 무엇인지 늘 생각지 못하며 항상 평안한 것과 기쁜 것과 행복한 것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자들은 마침내 광야에서 다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들에게 불행한 사실이 오고, 저들에게 곤란이 오고 괴로움이 올 때마다 항상 원망을 하고 이런 것을 얻으려고 여기까지 나왔느냐고 하던 이러한 상태가 공리주의적인 종교 가운데에는 당연히 있을 상태로서, 이러한 신앙을 만일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버리지 못하고 그냥 가지고 지속한다면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넘어질 수밖에 없음을 아옵나이다.

 

저희 교우들이 다 같이, 항상 우리 신앙의 현실 상태를 반성해서 자기 이해의 문제에 거룩한 교회의 사실을 붙여서 생각하는 그릇됨 가운데 빠져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 나라요,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이 되든지 영광스럽게 쓰인다는 확실한 각성이 있게 하여 주옵시고, 이리하여 인생의 목표가 명확하게 하여 주옵소서. 인생의 목표가 흐리고, 다만 개인의 복락과 안정과 천상의 쾌락만을 추구해 나가는 공리주의 가운데에서 못 벗어났을 때는 우리는 스스로 반성하고 주의해야 할 것임을 아나이다. 주요, 우리에게 사명에 대한 확연한 각성을 주시며 그 각성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매일 전진케 하시고, 전진해 나가는 도중에서 무엇이 어쨌든지 그 일에 대해서 주를 의심하지 않고 의지하며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출처:  http://www.moksa.net/main.php?&oxid=8&key=note&val

출처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글쓴이 : 무익한 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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