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공부를 위한 서론 과정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 주제를 누르면 각 항목으로 즉시 이동할 수 있습니다.
1. 마카비 전 시대(페르시아,헬라,애굽,시리아 지배 시대) 1) 메디아 페르시아의 유대 지배 기간(주전 536년-331년)
* 알렉산더 사후 * 알렉산더의 헬라화 정책
b. 유대인 박해 정책 * 성전 제단에 제우스 신전을 세우고, 제단에 돼지를 제물로 드리게 함 * 애굽과의 1, 2차 전쟁(주전 169, 168년)에서 패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을 약탈함. 그러나 로마 장군인 포필리우스가 철수를 지시하였다. 그는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유대에 헬라화를 강요하였으며, 자신을 "에피파네스"(현저한 자)라 불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를 조롱하여 "에피마네스"(미친 자)라고 불렀다. <헬라 제국의 왕과 이스라엘의 역사>
1) 제사장 맛다디아의 봉기 2) 유다 마카베오(166-160년) 3) 요나단 마카베오(주전 160-142년) 4) 시몬 마카베오(주전 142-134년)
3. 하스모니안 왕국 1) 요한 힐카누스 1세(134-104) 2) 아리스토 불루스 1세(주전 104-103년) 3) 알렉산더 얀네우스(주전 103-76년) 4) 알렉산드라 살로메(주전 76-67년) 5) 아리스토 블루스 2세(주전 67-63년) 하 스 몬 <하스모네안 왕가>
4. 로마 지배하의 팔레스타인 1) 힐카누스 2세(주전 63-40년)-로마의 속국이 됨 그 후에 폼페이는 또 다시 줄리어스 시이저와 정권을 다투게 되었는데, 이때에 힐카누스 2세와 헤롯의 부친이었던 안티파텔이 시이저를 지지하였다. 결국 이 전쟁은 시이저의 승리로 끝이 났다. 시이저는 자기를 지지해 준 힐카누스 2세를 유다의 분봉왕으로 삼았으며, 안티파텔을 유다의 태수로 임명했다. 그리고 안티파텔은 자기의 두 아들 중 파사엘에게는 예루살렘을, 헤롯에게는 갈릴리를 통치하게 하였다. 시이저는 주전 44년에 암살을 당했다. 그리고 힐카누스 가의 잔을 맡은 자가 주전 43년에 동료인 안티파텔을 독살함으로 힐카누스 가문과 안티파텔 가문 사이가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힐카누스 2세가 자신의 손녀 마리암네를 헤롯과 결혼을 시킴으로 이 두 가문은 사돈간이 되었다. 2) 안티고누스 2세(주전 40-37년) <로마 제국과 이스라엘 역사>
3) 헤롯 대왕(주전 37-4년) 가. 통치 초기 나. 통치 중기-건축 사업- 다. 통치 말기 라. 헤롯의 아들과 손자들 가) 아켈라오(남쪽-폭정으로 폐위되고 총독이 통치하게 됨) 나) 빌립(북동쪽 지역) 다) 안디바(갈릴리와 베뢰아) 자기 딸이 강제 이혼 당한 것에 분노를 느낀 아레스터 왕은 기회를 보다가 36년에 베뢰아 를 침공하여 안디바의 군대를 쳤다. 이에 39년에 안디바는 로마에 청원하여 더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로마로 갔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아그립바 1세(헤롯 1세가 죽인 아리스토 불루스의 아들)가 먼저 안디바의 부정을 로마에 고발하였고, 이로 인해 로마 황제는 안디바를 분봉왕 자리에서 내쫓았으며, 그 대신 아그립바 1세를 그 자리에 앉혔다. 라) 아그립바 1세와 아그립바 2세 <헤롯 가의 족보>
1) 유대 전쟁(66-73년) 유대인들은 곧 닥쳐올 로마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젊은 사제인 요세푸스를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파견하여 전열을 정비하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네로 황제는 가장 용맹한 베스파시안(Vespasian)을 지휘관으로 파견하였고, 그는 그의 아들인 티투스(Titus)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건너왔다. 베스파시안은 안디옥에서, 그리고 티투스는 이집트로부터 군대를 이끌고 왔다. 그들의 첫번째 공격 지역은 젊은 사제 요세푸스가 있었던 북부 지방인 갈릴리였다.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47일간 항쟁하다가 마침내 무너지게 되었으며, 젊은 사제인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이 장차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여 구원을 받았다. 그는 로마 사령부에 머물면서 "유대 전쟁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혁명 당원(열심당)의 지도자인 요한네스는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고, 67년에 갈릴리 전체는 로마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는 요한네스와 기오라가 유대인의 군대를 이끌었으며, 전쟁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요단에 있는 페트라로 도망하였다. 69년에는 베스파시안이 황제로 추대되어 로마로 돌아갔으며, 그의 아들인 티투스만 남아 전쟁을 지휘하였다. 마침내 티투스는 70년에 4개 군단과 강력한 지원군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였다. 성전은 불에 타서 약탈을 당하였으며, 지도자인 요한네스와 기오라는 로마로 압송되었다. 끝까지 마사다에서 죽기로 항전하던 전사들도 마침내 73년(또는 74년 초)에 점령당하게 되었다. 전쟁 후에 황제 베스파시안은 유대를 사마리아에서 분리시켜 황제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따라서 로마 총독이 다시 가이사랴에서 집무하게 되었고, 이 곳에는 로마의 제 10군단이 상주하였다. 성전이 무너지게 되자, 이제는 제사장을 비롯한 사두개인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율법학자를 중심으로 한 회당이 유대인의 종교와 삶의 중심이 되었다. 그후 로마는 회당을 보호해 주었다. 얌니아에서는 사제와 장로들은 회원이 되지 못하였고, 율법 학자들로 구성된 산헤드린이 유대인의 모든 정책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로마군의 공격에 유대인들은 서서히 무너져 갔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아키바를 메시야로 보던 백성들은 점차 실망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로마군이 그들을 점령하였다. 이로 인해 성전에는 다시 쥬피터 신전이 세워졌고, 예루살렘에는 이방인들이 거주하고 유대인들의 출입이 중지되었다. 그들은 4세기에 이르러서 아브월(7-8월) 9일에 성전 가운데 남아있는 한 쪽 벽에서 통곡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폭동을 지지하던 수많은 율법학자들은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며, 아키바는 처참하게 처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들의 장엄한 죽음은 유대인들을 다시 율법을 중심으로 뭉치게 만들었으며, 선조들의 신앙을 고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1) 아우구스투스(주전 2-주후 14년; 눅 2:1) 2) 티베리우스(14-27년; 눅 3:1) 3) 칼리굴라(37-41) 4) 클라우디우스(41-54년; 행 11:28; 행 18:2) 6) 베스파시안(68-79년; 예루살렘성 멸망) 7) 티투스(79-81년): 8) 도미티안(81-96년)-황제숭배 시작- 9) 네르바(97-98년) 10) 트라얀(98-117년) 11) 하드리안(118-138년; 132-135년 바르 코흐바의 폭동) 12) 안토니우스 피우스(138-161년), 13) 아우렐리우스(161-180년)
그러나 이러한 황제 숭배가 아시아 지역에 파급되면서 유일신을 섬기는 교회와 충돌이 일어났다. 기독교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숭배와 황제를 주로 부르는 일을 거절하였다.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하게 되자 로마 당국은 기독교인들을 불충한 백성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교회는 황제들에게 대대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으며, 이러한 순교자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당시의 교회는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으나, 아직 로마의 질풍과 같은 대 박해를 견디기에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 당시 교회들 중에 일부 교회들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교회들은 세속화와 사치와 타락에 빠져서 영적인 힘을 완전히 상실하고 무능력한 교회가 되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한쪽으로는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면서도 또 다른 한 쪽으로는 세상과 거짓 종교와 타협하고 주님께 대한 사랑을 잃고 영적, 윤리적으로 타락해가고 있었다. 요한 계시록은 바로 이렇게 대 박해 앞에서 신앙을 지켜가던 1세기의 아시아 교회들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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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 시대의 세계는 여러 가지 다양한 문화의 집성체였다. 여러 갈래의 강들이 모여 지중해로 흘러가듯이 로마의 피정복 민족들은 저마다의 문화를 로마에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의 정치적인 지배 아래서의 다양한 사회적, 종교적 결합은 기독교 탄생을 위한 독특한 문화적인 배경을 산출하였다. 당시 세계는 유대교와 헬레니즘과 로마 제국주의 등 세 가지의 큰 문화 형태가 지배하고 있었다. 유대교는 기독교의 뿌리를 마련해 주었고, 헬레니즘은 기독교가 성장한 지적인 토양이었으며, 로마 제국주의는 기독교가 잘 성장하도록 도와주었다. 반대로 이들은 기독교의 무서운 적이기도 했다. 유대교는 기독교를 유해한 이단으로 보았으며, 헬라인들은 기독교를 어리석은 종교로 보았고, 로마인들은 실용성 없는 나약한 종교로 생각했다. 이러한 기독교의 문화적 배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교이다.
1)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의 기본 요소 가. 유일신 신앙 유대인들은 포로 시대 이후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존하려고 했다. 그들은 주전 3세기부터 성경을 낭독할 때에 "야훼"라는 이름을 읽지 못하게 하고 "아도나이(주님)"란 말로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에는 "야훼"를 "큐리오스"(주님)로 번역하였으며, 아람어로 번역할 때에는(탈굼) "야훼"를 "메므라"(말씀)로 번역하였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신들 중에 하나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따라서 대제사장은 제사를 드릴 때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얼버무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였다. 일부는 이러한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세키나"(구름)나, 그의 "독사"(영광)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신이나 음성을 통해서 자신의 택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고 한다. 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지식의 근본으로 삼았으며(잠 1:7),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항상 가르쳤다(신 6:4-9). 나. 민족주의 그리스도 당시에는 두 개의 유명한 학파가 있었다. 하나는 샴마이 학파로서 율법의 모든 주제를 엄격하며 좁은 의미로 해석하며 가르쳤다. 샴마이는 헤롯 대왕 시절에 살았던 인물로 이교도들과 이방인들을 원수로 여겼다. 그의 학파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선민으로 생각하고 다른 모든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저주받은 민족으로 생각하는 극도의 민족주의 정신을 함양시켰다. 또 다른 학파는 힐렐 학파인데 힐렐은 바벨론 태생으로 이교도의 나라에서 살았다. 그는 뒤늦게 예루살렘에 왔는데 그의 정신에는 다소 이교도적인 요소들이 담겨져 있기도 했으며, 일반 율법사들에 비해 다소 온건한 입장을 지녔다. 그는 이방인들이 죄를 짓는 것은 그들이 죄를 짓기 원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풍습을 따른 것뿐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들은 메시야 시대에는 많은 이방인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교도들과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한 선교 활동을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속하려면 유대교로 귀화해야 하며,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 힐렐에 따르면 악인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12달 동안만 고통을 받다가 그 후에는 완전히 파괴되어 없어진다고 한다. 그는 그 당시 허락된 여러 이유들로 아내와 이혼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을 하였다(당시에는 아내가 음식을 태웠다는 이유만으로도 이혼할 수 있었다). 힐렐은 사도행전 시대의 유명한 율법 선생이었던 가말리엘의 할아버지였다. 다. 율 법 * 구전의 발생과 발전 < 미드라쉬 > < 미쉬나 > < 탈무드 >
또한 이들은 기록된 토라, 즉 모세 오경과 마찬가지로 구전 토라, 즉 미쉬나(2세기경 랍비 유다 하나시가 편집함)도 똑같은 권위를 부여했다. 바리새파 안에는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샴마이 학파와 좀 더 부드럽게 해석하는 힐렐 학파가 있었다. 따라서 복음서 가운데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한 손가락도 짐에 대지 않는(눅 11:46) 율법사들은 샴마이 추종자로 보인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뒤에 국민생활의 재건을 위해 주도적역할을 한 것은 힐렐 학파의 요하난 벤 자카이였다. 나. 사두개파(자연주의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교리 비교>
1) 제사장 1) 유일신(여호와께서 세계의 통치자이시며 모든 선의 근원이라고 믿음)신앙 라. 열심당
가. 성전 예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통하여 1년에 3번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절기룰 지키도록 명령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고 회상시키기 위해 유월절을 지키게 하셨고,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진 날을 기념하기 위해 오순절을 지키게 하셨으며, 광야 생활과 민족의 형성을 회상시켜 주시기 위해 장막절을 지키게 하셨다(물론 이 절기들은 농경적인 의미들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뿐 아니라 에피파네스 4세로부터 주전 165년에 성전을 회복하고 청결케 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수전절을 지켰으며(하누카-빚의 절기), 하만에 대한 에스더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부림절을 지켰다. 신년 축제일은 하나님의 창조를 회상시켜 주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심판하시는 날이었다. 이스라엘을 이 날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비로 대해주시도록 기도하였다. 속죄일은 금식과 죄의 고백과 희생 제사가 드려졌다. 이러한 신년 축제일과 속죄일은 모두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용서의 필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시작되었다. 나. 회당 활동 경건한 유대인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끝냈다. 그들은 일어나고, 잠자리에 들며, 출타하였다가 귀가하거나 손을 닦고 음식을 먹을 때, 또는 출생과 할례, 약혼, 결혼, 질병, 죽음, 장례와 같은 때에도 이에 수반되는 기도를 하였다. 그들은 세상을 죄악된 것으로 생각하여 자신을 세상과 단절시키고, 세상과 사회에 대하여 등을 돌리는 금욕주의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이며 따라서 이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언약 백성의 표시로서 할례를 받았으며 이를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혼합된 옷감으로 된 옷을 입지 않았으며, 겉 옷 단에는 옷술을 달았고, 집 문기둥에는 메주자(성구가 기록된 양피지를 담은 용기)를 달았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율법을 준수할 필요를 깨닫게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준수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증거하였고,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였다. 이 날에는 노동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일들이 금지되었으며, 특별한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었으며,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축제의 분위기로 지냈다. 그들은 인간의 시체를 만지는 일이나, 문둥병자들이나 부정한 짐승들과의 접촉과 같이 율법에서 부정한 것으로 규정된 일들은 자신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이 이러한 일들을 했을 때에는 율법에 따라 정결 예식을 행했다. 그들은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식사법이 준수되었고, 짐승들을 도살하는 데에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으며, 피는 식용이 금지되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을 부정한 일로 생각하였으며, 따라서 이방에 사는 것보다 이스라엘에 사는 것을 더 좋게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 율법을 알아야 했고 이를 위해 율법을 연구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율법에 무지한 자는 깊은 신앙심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땅에 속한 백성"이나, "율법이 없는 열등한 종족들"이라는 경멸적인 용어들까지 나오게 되었다.
나. 70인역 성경 라. 알렉산드라의 필로
가. 정경(Canon) 나. 외경(Apocrypha) * 외경의 목록 * 위경의 내용 * 위경의 책들 라. 묵시문학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이 바로 이러한 묵시 문헌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책들을 통해서 이방 민족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는 자신의 백성이나 교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다. 다니엘서나 요한 계시록은 일시적으로 성도들과 교회가 악한 세력들에 의해 고난을 받지만, 결국에는 메시야를 통해 악한 세력들이 심판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악의 세력이 멸망하고 영원한 평화의 세계가 임할 것이라는 소망을 제시해 주고 있다. 묵시 문학의 특징 중의 하나는 다양한 상징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있는 다니엘이나 밧모섬에 있는 요한에게 다양한 상징들을 통해서 계시를 전해 주셨다. 다니엘이나 계시록에는 행동과 직접적인 말씀 뿐 아니라, 극적인 형태나 여러 가지 상징과 그림들을 통해서 전달된 계시들로 가득 차 있다.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그림이나 드라마, 그리고 영상 등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에 익숙해졌다. 이러한 그림이나 드라마, 또는 영상을 통한 상징들은 저자의 의도를 전달하는데 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는 다니엘이나 계시록에서 바로 이러한 형상과 상징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전달해 주셨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다니엘이나 계시록의 언어는 현대인들에게 더 익숙한 언어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형상과 상징들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때에 계시록을 보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될 것이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교회를 대적하는 세력들을 짐승이나 뿔 등과 같은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짐승들은 그 당시 통치자들을 상징하고 있다. 요한이 이러한 상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박해로 인해 그 당시의 통치자들의 멸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초기의 계시록 독자들은 계시록에서 사용된 어휘나 상징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계시록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저자는 이 책에 언급된 내용들에 대하여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독자가 아닌 그 이후의 세대에 태어나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 책에 사용된 상징에 익숙하지 못해서 계시록을 대할 때에 당황할 수 있다. 그러나 다니엘이나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과 분명한 차이들이 있다. 묵시 문학은 주로 저자들의 이름을 숨기고 과거의 유명한 사람들(에녹이나 에스라와 같은)이 이름을 빌려서 기록하였다. 그러나 다니엘이나 요한계시록은 분명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묵시 문학은 사변적인데 관심이 있으며, 세상의 종말의 때와 징조, 그리고 최후에 대해서 밝히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다니엘이나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호기심을 채워주기보다는, 당시의 대 박해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다니엘이나 요한은 메시야께서 오셔서 이 세상을 바로 잡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다니엘이나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헌들과는 달리 사변적인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독자들이 이 책을 읽거나 듣고, 이 예언에 순종해야 윤리적인 요청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요한계시록을 묵시문헌과 동일시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2. 헬레니즘 1) 희랍과 로마의 신들 2) 민속 신앙과 운명 사상 3) 통속 철학 이 세상은 무엇인가?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의 창조는 빛의 세계인 신의 세계에서 한 조각이 하층 세계로 떨어져 나와 물질과 결합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세상은 신의 작품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떨어진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하나님은 악한 물질과 더불어 역사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으로부터 점차로 멀어지는 일련의 "아이온(αιων)" 또는 "파생신들"(emanations)을 창조하셨다. 각 이이온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만큼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다. 그리고 가장 멀리 떨어진 아이온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할 뿐 아니라, 그에게 적대적이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아이온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혼은 무엇인가 ? 영혼은 세상의 존재가 아니며 신의 세계에 속한다. 그러므로 영혼은 세상을 벗어나서 신의 세계로 복귀해야 한다(예) 도마 행전의 진주송-이집트에 진주를 찾으러 왔다가 사명을 잃은 왕자 이야기). 영지주의자들은 파생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인간의 몸에 들어갔고, 그들이 인간의 몸 안에 갇히게 되었다고 가르쳤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 영들은 그들의 사로잡힌 상태에 대하여 무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만일 영들이 이 지식을 깨닫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 영은 바른 지식을 가져야만 하고, 바른 판단이나 비밀의 지식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야만 한다. 참으로 지적인 영만이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우주는 신의 불꽃이 타오르지 못하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주는 사람들이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도록 한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금욕생활을 해야 한다. 이러한 생활은 세상을 체념하고 올바른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일에 도움을 준다. 구원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구원자는 우주의 파수병들에게 걸리지 않고 이러한 소식을 인간들에게 전하는 일을 한다. 그는 예수님처럼 인간이 되지도 않았고,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지도 않았다. 그는 신적인 존재일 분이다. 그는 단지 구원의 소식을 우주의 보초 몰래 인간들에게 전할 뿐이다. 영지주의는 역사적인 일이나 종말에 이루어질 일을 다루지 않고 언제나 보편적인 진리 문제를 추구하고 있다. 나) 영지주의의 위험 다) 영지주의에 대한 바울과 요한의 공격 가. 영지주의는 예수님의 인성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을 부인한다.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다(2:18-28, 4:1-6, 13-15, 5:6-12). 나. 영지주의자들은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함으로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의 범죄를 선언하시고(1;8,10), 자신의 아들을 "세상 죄를 위한 속죄물"(2:2)로 주신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영지주의자들은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진지하게 받 아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들의 죄보다 그들의 지식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는 잘난 체하는 정신이 지배적이었다. 그들은 이웃을 섬기는데 자신을 드릴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그 들은 세상에 속하였고 그들이 말하는 것도 세속적인 것이었다. 세상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하지만 형제 사랑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부인하는 것이다(2:7-17, 3:11-24, 4:7,12,16-21, 5:1,2). 요한의 메시지는 이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나선형으로 계속 반복된다. 이 주제들은 기독교인이 자신의 신앙과 생활의 진실성을 결정하기 위하여 필요한 메시지를 제시해 준다,. * 바울은 영지주의자들에 대하여 주로 이원론적인 사고와 금욕적인 방식을 지적하였다. 헬레니즘 가운데 기독교에 끼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신약 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헬라어는 시대에 따라 크게 1) 고전 헬라어(주전 300년 이전), 2) 헬라 시대(주전 300-주후 550년), 3) 비잔틴 헬라어(550-1453년), 4) 현대 헬라어(1453년 이후)의 넷으로 분류된다. 헬라 시대 헬라어도 문어체 헬라어와 코이네(일반 헬라어)가 있었다.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으로 인해 고전 헬라어 시대가 사라지고 코이네 헬라어 시대가 도래했다. 이 헬라어는 고도로 복잡한 복합 문법의 구조를 생략하여 단순한 문장으로 대신하였으며, 많은 접속사와 계사를 사용하는 대신 몇 개의 연속만을 지어서 모든 관계를 설명하였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이러한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즉 일반 시민들이 대화할 때에 사용하는 헬라어로 기록된 것이다. 그래서 성서 헬라어는 활기 있고 신선하고 살아 움직이는 맛이 있는 것이다. |
3. 신약시대의 상황 (헬라문화의 옷을 입고, 로마모자를 쓴 채 율법을 손에 들고 방황하는 유대인) 1) 정치적 상황: 대 제국인 로마의 통치하에 어느 정도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2) 사회적 상황: 정복당한 지역으로서 복잡한 인적 구성을 가진 혼란한 사회였다. 3) 문화, 사상적 상황: 전통적인 유대주의가 헬라 사상에 의해 위협받고 있었다. < 히브리적 사고 > < 헬라적 사고 > 이러한 두개의 전혀 다른 문화와 사상이 서로 부딪히는 가운데, 지중해 연안의 각 민족들의 세력까지 가세해서 큰 혼돈이 일어나고 있었다. 헬라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고, 구역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됨으로 인해(70인경) 사도 바울은 헬라어와 70인경을 사용해서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4) 영적인 상황: 종교적 형식주의가 굳어져 가는 한편 영적 갈망이 커져가고 있었다. |
4. 신약이 기록된 과정: 신약이 기록된 시기는 크게 셋으로 나누어진다. 2) 구전의 시기(30-50년) |
5. 신약 성경의 구분(27권) |
1) 바다와 강 (지도 보기) 2) 각 지역과 주요 도시의 명칭 (지도 보기) 3) 사도 행전의 지역과 주요도시 (사도 행전의 성경 지도 보기) |
1. 마카비 전 시대(페르시아,헬라,애굽,시리아 지배 시대) 1) 메디아 페르시아의 유대 지배 기간(주전 536년-331년)
* 알렉산더 사후 * 알렉산더의 헬라화 정책
b. 유대인 박해 정책 * 성전 제단에 제우스 신전을 세우고, 제단에 돼지를 제물로 드리게 함 * 애굽과의 1, 2차 전쟁(주전 169, 168년)에서 패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을 약탈함. 그러나 로마 장군인 포필리우스가 철수를 지시하였다. 그는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유대에 헬라화를 강요하였으며, 자신을 "에피파네스"(현저한 자)라 불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를 조롱하여 "에피마네스"(미친 자)라고 불렀다. <헬라 제국의 왕과 이스라엘의 역사>
1) 제사장 맛다디아의 봉기 2) 유다 마카베오(166-160년) 3) 요나단 마카베오(주전 160-142년) 4) 시몬 마카베오(주전 142-134년)
3. 하스모니안 왕국 1) 요한 힐카누스 1세(134-104) 2) 아리스토 불루스 1세(주전 104-103년) 3) 알렉산더 얀네우스(주전 103-76년) 4) 알렉산드라 살로메(주전 76-67년) 5) 아리스토 블루스 2세(주전 67-63년) 하 스 몬 <하스모네안 왕가>
4. 로마 지배하의 팔레스타인 1) 힐카누스 2세(주전 63-40년)-로마의 속국이 됨 그 후에 폼페이는 또 다시 줄리어스 시이저와 정권을 다투게 되었는데, 이때에 힐카누스 2세와 헤롯의 부친이었던 안티파텔이 시이저를 지지하였다. 결국 이 전쟁은 시이저의 승리로 끝이 났다. 시이저는 자기를 지지해 준 힐카누스 2세를 유다의 분봉왕으로 삼았으며, 안티파텔을 유다의 태수로 임명했다. 그리고 안티파텔은 자기의 두 아들 중 파사엘에게는 예루살렘을, 헤롯에게는 갈릴리를 통치하게 하였다. 시이저는 주전 44년에 암살을 당했다. 그리고 힐카누스 가의 잔을 맡은 자가 주전 43년에 동료인 안티파텔을 독살함으로 힐카누스 가문과 안티파텔 가문 사이가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힐카누스 2세가 자신의 손녀 마리암네를 헤롯과 결혼을 시킴으로 이 두 가문은 사돈간이 되었다. 2) 안티고누스 2세(주전 40-37년) <로마 제국과 이스라엘 역사>
3) 헤롯 대왕(주전 37-4년) 가. 통치 초기 나. 통치 중기-건축 사업- 다. 통치 말기 라. 헤롯의 아들과 손자들 가) 아켈라오(남쪽-폭정으로 폐위되고 총독이 통치하게 됨) 나) 빌립(북동쪽 지역) 다) 안디바(갈릴리와 베뢰아) 자기 딸이 강제 이혼 당한 것에 분노를 느낀 아레스터 왕은 기회를 보다가 36년에 베뢰아 를 침공하여 안디바의 군대를 쳤다. 이에 39년에 안디바는 로마에 청원하여 더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로마로 갔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아그립바 1세(헤롯 1세가 죽인 아리스토 불루스의 아들)가 먼저 안디바의 부정을 로마에 고발하였고, 이로 인해 로마 황제는 안디바를 분봉왕 자리에서 내쫓았으며, 그 대신 아그립바 1세를 그 자리에 앉혔다. 라) 아그립바 1세와 아그립바 2세 <헤롯 가의 족보>
1) 유대 전쟁(66-73년) 유대인들은 곧 닥쳐올 로마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젊은 사제인 요세푸스를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파견하여 전열을 정비하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네로 황제는 가장 용맹한 베스파시안(Vespasian)을 지휘관으로 파견하였고, 그는 그의 아들인 티투스(Titus)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건너왔다. 베스파시안은 안디옥에서, 그리고 티투스는 이집트로부터 군대를 이끌고 왔다. 그들의 첫번째 공격 지역은 젊은 사제 요세푸스가 있었던 북부 지방인 갈릴리였다.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47일간 항쟁하다가 마침내 무너지게 되었으며, 젊은 사제인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이 장차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여 구원을 받았다. 그는 로마 사령부에 머물면서 "유대 전쟁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혁명 당원(열심당)의 지도자인 요한네스는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고, 67년에 갈릴리 전체는 로마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는 요한네스와 기오라가 유대인의 군대를 이끌었으며, 전쟁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요단에 있는 페트라로 도망하였다. 69년에는 베스파시안이 황제로 추대되어 로마로 돌아갔으며, 그의 아들인 티투스만 남아 전쟁을 지휘하였다. 마침내 티투스는 70년에 4개 군단과 강력한 지원군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였다. 성전은 불에 타서 약탈을 당하였으며, 지도자인 요한네스와 기오라는 로마로 압송되었다. 끝까지 마사다에서 죽기로 항전하던 전사들도 마침내 73년(또는 74년 초)에 점령당하게 되었다. 전쟁 후에 황제 베스파시안은 유대를 사마리아에서 분리시켜 황제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따라서 로마 총독이 다시 가이사랴에서 집무하게 되었고, 이 곳에는 로마의 제 10군단이 상주하였다. 성전이 무너지게 되자, 이제는 제사장을 비롯한 사두개인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율법학자를 중심으로 한 회당이 유대인의 종교와 삶의 중심이 되었다. 그후 로마는 회당을 보호해 주었다. 얌니아에서는 사제와 장로들은 회원이 되지 못하였고, 율법 학자들로 구성된 산헤드린이 유대인의 모든 정책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로마군의 공격에 유대인들은 서서히 무너져 갔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아키바를 메시야로 보던 백성들은 점차 실망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로마군이 그들을 점령하였다. 이로 인해 성전에는 다시 쥬피터 신전이 세워졌고, 예루살렘에는 이방인들이 거주하고 유대인들의 출입이 중지되었다. 그들은 4세기에 이르러서 아브월(7-8월) 9일에 성전 가운데 남아있는 한 쪽 벽에서 통곡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폭동을 지지하던 수많은 율법학자들은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며, 아키바는 처참하게 처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들의 장엄한 죽음은 유대인들을 다시 율법을 중심으로 뭉치게 만들었으며, 선조들의 신앙을 고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1) 아우구스투스(주전 2-주후 14년; 눅 2:1) 2) 티베리우스(14-27년; 눅 3:1) 3) 칼리굴라(37-41) 4) 클라우디우스(41-54년; 행 11:28; 행 18:2) 6) 베스파시안(68-79년; 예루살렘성 멸망) 7) 티투스(79-81년): 8) 도미티안(81-96년)-황제숭배 시작- 9) 네르바(97-98년) 10) 트라얀(98-117년) 11) 하드리안(118-138년; 132-135년 바르 코흐바의 폭동) 12) 안토니우스 피우스(138-161년), 13) 아우렐리우스(161-180년)
그러나 이러한 황제 숭배가 아시아 지역에 파급되면서 유일신을 섬기는 교회와 충돌이 일어났다. 기독교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숭배와 황제를 주로 부르는 일을 거절하였다.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하게 되자 로마 당국은 기독교인들을 불충한 백성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교회는 황제들에게 대대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으며, 이러한 순교자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당시의 교회는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으나, 아직 로마의 질풍과 같은 대 박해를 견디기에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 당시 교회들 중에 일부 교회들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교회들은 세속화와 사치와 타락에 빠져서 영적인 힘을 완전히 상실하고 무능력한 교회가 되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한쪽으로는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면서도 또 다른 한 쪽으로는 세상과 거짓 종교와 타협하고 주님께 대한 사랑을 잃고 영적, 윤리적으로 타락해가고 있었다. 요한 계시록은 바로 이렇게 대 박해 앞에서 신앙을 지켜가던 1세기의 아시아 교회들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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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 시대의 세계는 여러 가지 다양한 문화의 집성체였다. 여러 갈래의 강들이 모여 지중해로 흘러가듯이 로마의 피정복 민족들은 저마다의 문화를 로마에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의 정치적인 지배 아래서의 다양한 사회적, 종교적 결합은 기독교 탄생을 위한 독특한 문화적인 배경을 산출하였다. 당시 세계는 유대교와 헬레니즘과 로마 제국주의 등 세 가지의 큰 문화 형태가 지배하고 있었다. 유대교는 기독교의 뿌리를 마련해 주었고, 헬레니즘은 기독교가 성장한 지적인 토양이었으며, 로마 제국주의는 기독교가 잘 성장하도록 도와주었다. 반대로 이들은 기독교의 무서운 적이기도 했다. 유대교는 기독교를 유해한 이단으로 보았으며, 헬라인들은 기독교를 어리석은 종교로 보았고, 로마인들은 실용성 없는 나약한 종교로 생각했다. 이러한 기독교의 문화적 배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교이다.
1)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의 기본 요소 가. 유일신 신앙 유대인들은 포로 시대 이후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존하려고 했다. 그들은 주전 3세기부터 성경을 낭독할 때에 "야훼"라는 이름을 읽지 못하게 하고 "아도나이(주님)"란 말로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에는 "야훼"를 "큐리오스"(주님)로 번역하였으며, 아람어로 번역할 때에는(탈굼) "야훼"를 "메므라"(말씀)로 번역하였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신들 중에 하나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따라서 대제사장은 제사를 드릴 때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얼버무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였다. 일부는 이러한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세키나"(구름)나, 그의 "독사"(영광)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신이나 음성을 통해서 자신의 택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고 한다. 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지식의 근본으로 삼았으며(잠 1:7),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항상 가르쳤다(신 6:4-9). 나. 민족주의 그리스도 당시에는 두 개의 유명한 학파가 있었다. 하나는 샴마이 학파로서 율법의 모든 주제를 엄격하며 좁은 의미로 해석하며 가르쳤다. 샴마이는 헤롯 대왕 시절에 살았던 인물로 이교도들과 이방인들을 원수로 여겼다. 그의 학파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선민으로 생각하고 다른 모든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저주받은 민족으로 생각하는 극도의 민족주의 정신을 함양시켰다. 또 다른 학파는 힐렐 학파인데 힐렐은 바벨론 태생으로 이교도의 나라에서 살았다. 그는 뒤늦게 예루살렘에 왔는데 그의 정신에는 다소 이교도적인 요소들이 담겨져 있기도 했으며, 일반 율법사들에 비해 다소 온건한 입장을 지녔다. 그는 이방인들이 죄를 짓는 것은 그들이 죄를 짓기 원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풍습을 따른 것뿐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들은 메시야 시대에는 많은 이방인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교도들과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한 선교 활동을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속하려면 유대교로 귀화해야 하며,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 힐렐에 따르면 악인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12달 동안만 고통을 받다가 그 후에는 완전히 파괴되어 없어진다고 한다. 그는 그 당시 허락된 여러 이유들로 아내와 이혼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을 하였다(당시에는 아내가 음식을 태웠다는 이유만으로도 이혼할 수 있었다). 힐렐은 사도행전 시대의 유명한 율법 선생이었던 가말리엘의 할아버지였다. 다. 율 법 * 구전의 발생과 발전 < 미드라쉬 > < 미쉬나 > < 탈무드 >
또한 이들은 기록된 토라, 즉 모세 오경과 마찬가지로 구전 토라, 즉 미쉬나(2세기경 랍비 유다 하나시가 편집함)도 똑같은 권위를 부여했다. 바리새파 안에는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샴마이 학파와 좀 더 부드럽게 해석하는 힐렐 학파가 있었다. 따라서 복음서 가운데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한 손가락도 짐에 대지 않는(눅 11:46) 율법사들은 샴마이 추종자로 보인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뒤에 국민생활의 재건을 위해 주도적역할을 한 것은 힐렐 학파의 요하난 벤 자카이였다. 나. 사두개파(자연주의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교리 비교>
1) 제사장 1) 유일신(여호와께서 세계의 통치자이시며 모든 선의 근원이라고 믿음)신앙 라. 열심당
가. 성전 예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통하여 1년에 3번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절기룰 지키도록 명령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고 회상시키기 위해 유월절을 지키게 하셨고,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진 날을 기념하기 위해 오순절을 지키게 하셨으며, 광야 생활과 민족의 형성을 회상시켜 주시기 위해 장막절을 지키게 하셨다(물론 이 절기들은 농경적인 의미들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뿐 아니라 에피파네스 4세로부터 주전 165년에 성전을 회복하고 청결케 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수전절을 지켰으며(하누카-빚의 절기), 하만에 대한 에스더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부림절을 지켰다. 신년 축제일은 하나님의 창조를 회상시켜 주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심판하시는 날이었다. 이스라엘을 이 날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비로 대해주시도록 기도하였다. 속죄일은 금식과 죄의 고백과 희생 제사가 드려졌다. 이러한 신년 축제일과 속죄일은 모두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용서의 필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시작되었다. 나. 회당 활동 경건한 유대인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끝냈다. 그들은 일어나고, 잠자리에 들며, 출타하였다가 귀가하거나 손을 닦고 음식을 먹을 때, 또는 출생과 할례, 약혼, 결혼, 질병, 죽음, 장례와 같은 때에도 이에 수반되는 기도를 하였다. 그들은 세상을 죄악된 것으로 생각하여 자신을 세상과 단절시키고, 세상과 사회에 대하여 등을 돌리는 금욕주의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이며 따라서 이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언약 백성의 표시로서 할례를 받았으며 이를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혼합된 옷감으로 된 옷을 입지 않았으며, 겉 옷 단에는 옷술을 달았고, 집 문기둥에는 메주자(성구가 기록된 양피지를 담은 용기)를 달았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율법을 준수할 필요를 깨닫게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준수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증거하였고,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였다. 이 날에는 노동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일들이 금지되었으며, 특별한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었으며,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축제의 분위기로 지냈다. 그들은 인간의 시체를 만지는 일이나, 문둥병자들이나 부정한 짐승들과의 접촉과 같이 율법에서 부정한 것으로 규정된 일들은 자신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이 이러한 일들을 했을 때에는 율법에 따라 정결 예식을 행했다. 그들은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식사법이 준수되었고, 짐승들을 도살하는 데에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으며, 피는 식용이 금지되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을 부정한 일로 생각하였으며, 따라서 이방에 사는 것보다 이스라엘에 사는 것을 더 좋게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 율법을 알아야 했고 이를 위해 율법을 연구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율법에 무지한 자는 깊은 신앙심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땅에 속한 백성"이나, "율법이 없는 열등한 종족들"이라는 경멸적인 용어들까지 나오게 되었다.
나. 70인역 성경 라. 알렉산드라의 필로
가. 정경(Canon) 나. 외경(Apocrypha) * 외경의 목록 * 위경의 내용 * 위경의 책들 라. 묵시문학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이 바로 이러한 묵시 문헌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책들을 통해서 이방 민족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는 자신의 백성이나 교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다. 다니엘서나 요한 계시록은 일시적으로 성도들과 교회가 악한 세력들에 의해 고난을 받지만, 결국에는 메시야를 통해 악한 세력들이 심판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악의 세력이 멸망하고 영원한 평화의 세계가 임할 것이라는 소망을 제시해 주고 있다. 묵시 문학의 특징 중의 하나는 다양한 상징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있는 다니엘이나 밧모섬에 있는 요한에게 다양한 상징들을 통해서 계시를 전해 주셨다. 다니엘이나 계시록에는 행동과 직접적인 말씀 뿐 아니라, 극적인 형태나 여러 가지 상징과 그림들을 통해서 전달된 계시들로 가득 차 있다.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그림이나 드라마, 그리고 영상 등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에 익숙해졌다. 이러한 그림이나 드라마, 또는 영상을 통한 상징들은 저자의 의도를 전달하는데 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는 다니엘이나 계시록에서 바로 이러한 형상과 상징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전달해 주셨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다니엘이나 계시록의 언어는 현대인들에게 더 익숙한 언어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형상과 상징들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때에 계시록을 보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될 것이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교회를 대적하는 세력들을 짐승이나 뿔 등과 같은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짐승들은 그 당시 통치자들을 상징하고 있다. 요한이 이러한 상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박해로 인해 그 당시의 통치자들의 멸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초기의 계시록 독자들은 계시록에서 사용된 어휘나 상징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계시록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저자는 이 책에 언급된 내용들에 대하여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독자가 아닌 그 이후의 세대에 태어나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 책에 사용된 상징에 익숙하지 못해서 계시록을 대할 때에 당황할 수 있다. 그러나 다니엘이나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과 분명한 차이들이 있다. 묵시 문학은 주로 저자들의 이름을 숨기고 과거의 유명한 사람들(에녹이나 에스라와 같은)이 이름을 빌려서 기록하였다. 그러나 다니엘이나 요한계시록은 분명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묵시 문학은 사변적인데 관심이 있으며, 세상의 종말의 때와 징조, 그리고 최후에 대해서 밝히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다니엘이나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호기심을 채워주기보다는, 당시의 대 박해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다니엘이나 요한은 메시야께서 오셔서 이 세상을 바로 잡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다니엘이나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헌들과는 달리 사변적인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독자들이 이 책을 읽거나 듣고, 이 예언에 순종해야 윤리적인 요청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요한계시록을 묵시문헌과 동일시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2. 헬레니즘 1) 희랍과 로마의 신들 2) 민속 신앙과 운명 사상 3) 통속 철학 이 세상은 무엇인가?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의 창조는 빛의 세계인 신의 세계에서 한 조각이 하층 세계로 떨어져 나와 물질과 결합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세상은 신의 작품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떨어진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하나님은 악한 물질과 더불어 역사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으로부터 점차로 멀어지는 일련의 "아이온(αιων)" 또는 "파생신들"(emanations)을 창조하셨다. 각 이이온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만큼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다. 그리고 가장 멀리 떨어진 아이온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할 뿐 아니라, 그에게 적대적이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아이온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혼은 무엇인가 ? 영혼은 세상의 존재가 아니며 신의 세계에 속한다. 그러므로 영혼은 세상을 벗어나서 신의 세계로 복귀해야 한다(예) 도마 행전의 진주송-이집트에 진주를 찾으러 왔다가 사명을 잃은 왕자 이야기). 영지주의자들은 파생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인간의 몸에 들어갔고, 그들이 인간의 몸 안에 갇히게 되었다고 가르쳤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 영들은 그들의 사로잡힌 상태에 대하여 무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만일 영들이 이 지식을 깨닫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 영은 바른 지식을 가져야만 하고, 바른 판단이나 비밀의 지식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야만 한다. 참으로 지적인 영만이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우주는 신의 불꽃이 타오르지 못하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주는 사람들이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도록 한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금욕생활을 해야 한다. 이러한 생활은 세상을 체념하고 올바른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일에 도움을 준다. 구원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구원자는 우주의 파수병들에게 걸리지 않고 이러한 소식을 인간들에게 전하는 일을 한다. 그는 예수님처럼 인간이 되지도 않았고,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지도 않았다. 그는 신적인 존재일 분이다. 그는 단지 구원의 소식을 우주의 보초 몰래 인간들에게 전할 뿐이다. 영지주의는 역사적인 일이나 종말에 이루어질 일을 다루지 않고 언제나 보편적인 진리 문제를 추구하고 있다. 나) 영지주의의 위험 다) 영지주의에 대한 바울과 요한의 공격 가. 영지주의는 예수님의 인성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을 부인한다.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다(2:18-28, 4:1-6, 13-15, 5:6-12). 나. 영지주의자들은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함으로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의 범죄를 선언하시고(1;8,10), 자신의 아들을 "세상 죄를 위한 속죄물"(2:2)로 주신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영지주의자들은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진지하게 받 아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들의 죄보다 그들의 지식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는 잘난 체하는 정신이 지배적이었다. 그들은 이웃을 섬기는데 자신을 드릴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그 들은 세상에 속하였고 그들이 말하는 것도 세속적인 것이었다. 세상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하지만 형제 사랑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부인하는 것이다(2:7-17, 3:11-24, 4:7,12,16-21, 5:1,2). 요한의 메시지는 이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나선형으로 계속 반복된다. 이 주제들은 기독교인이 자신의 신앙과 생활의 진실성을 결정하기 위하여 필요한 메시지를 제시해 준다,. * 바울은 영지주의자들에 대하여 주로 이원론적인 사고와 금욕적인 방식을 지적하였다. 헬레니즘 가운데 기독교에 끼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신약 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헬라어는 시대에 따라 크게 1) 고전 헬라어(주전 300년 이전), 2) 헬라 시대(주전 300-주후 550년), 3) 비잔틴 헬라어(550-1453년), 4) 현대 헬라어(1453년 이후)의 넷으로 분류된다. 헬라 시대 헬라어도 문어체 헬라어와 코이네(일반 헬라어)가 있었다.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으로 인해 고전 헬라어 시대가 사라지고 코이네 헬라어 시대가 도래했다. 이 헬라어는 고도로 복잡한 복합 문법의 구조를 생략하여 단순한 문장으로 대신하였으며, 많은 접속사와 계사를 사용하는 대신 몇 개의 연속만을 지어서 모든 관계를 설명하였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이러한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즉 일반 시민들이 대화할 때에 사용하는 헬라어로 기록된 것이다. 그래서 성서 헬라어는 활기 있고 신선하고 살아 움직이는 맛이 있는 것이다. |
3. 신약시대의 상황 (헬라문화의 옷을 입고, 로마모자를 쓴 채 율법을 손에 들고 방황하는 유대인) 1) 정치적 상황: 대 제국인 로마의 통치하에 어느 정도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2) 사회적 상황: 정복당한 지역으로서 복잡한 인적 구성을 가진 혼란한 사회였다. 3) 문화, 사상적 상황: 전통적인 유대주의가 헬라 사상에 의해 위협받고 있었다. < 히브리적 사고 > < 헬라적 사고 > 이러한 두개의 전혀 다른 문화와 사상이 서로 부딪히는 가운데, 지중해 연안의 각 민족들의 세력까지 가세해서 큰 혼돈이 일어나고 있었다. 헬라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고, 구역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됨으로 인해(70인경) 사도 바울은 헬라어와 70인경을 사용해서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4) 영적인 상황: 종교적 형식주의가 굳어져 가는 한편 영적 갈망이 커져가고 있었다. |
4. 신약이 기록된 과정: 신약이 기록된 시기는 크게 셋으로 나누어진다. 2) 구전의 시기(30-50년) |
5. 신약 성경의 구분(27권) |
1) 바다와 강 (지도 보기) 2) 각 지역과 주요 도시의 명칭 (지도 보기) 3) 사도 행전의 지역과 주요도시 (사도 행전의 성경 지도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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