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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복음주의(evangelicalism)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권위 있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영국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베빙턴(David Bebbington)이 정리한 “베빙턴의 사각형”이다. 그는 역사적/신학적/사회적으로 기독교 복음주의를, ‘오직 성경’이라고 종교개혁에서 강조한 성경주의, 18-19세기 영미 복음주의에서 시작된 회심주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강조한 십자가 중심주의, 사회정의를 위해 참여하는 행동주의라는, 네 개의 꼭짓점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각형처럼 그려냈다. 베빙턴의 사각형은 본질적으로 배타적일까? 아니면 포용적일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한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의 속죄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배제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복음을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속죄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포용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복음주의가 배제적인 것인지 포용적인 것인지를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복음의 본질 그 자체를 깊이 탐사해 볼 필요가 있다.
복음(福音)은 글자 그대로 기쁜 소식이다. 그리스어 ‘유앙겔리온’(euan-gelion)은 좋은 소식을 뜻한다. 영어로는 Good News! ‘선한 소식’이라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 뉴스에는 알리는 주체가 있고 듣는 객체가 있다. 그렇다면 좋은 소식은 누가 보내는가? 선하신 하나님이다. 누가복음 6장 43-44절에 보면 예수님은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안다”고 하시며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다”고 하셨다. 그렇기에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하신 분”이 없다고 하셨다. 그 선하신 하늘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소식이니 그 소식은 좋은 소식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복음이다. 기쁜 소식이다. 또한 그 소식은 좋으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소식이다. 그러한 복음이 과연 본질적으로 배타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최근 한국에 소개된 영국 신학자 마이클 리브스(Michael Reeves)의 『선하신 하나님』(The Good God)을 보면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드러난다. 요한1서 4장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언한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유대교나 이슬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결코 단독자로서의 유일신이 되실 수는 없다. 사랑이란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대상을 전제로 한다. 단일한 창조주가 이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을 사랑한다 해도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영원하지 않기에 하나님도 영원히 사랑으로 존재할 수 없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정 사랑이시려면 그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 이것은 인간의 추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계시다. 하나님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원히 자기를 내어주시면서 사랑과 응답을 나누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이렇게 삼위일체로 하나 된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향해서도 자기를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그분의 생명과 선하심을 아낌없이 내보내신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로 시작된다. 독생자를 주시는 사건과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좋은 소식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주신”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중요하다. 믿음 이전에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리를 아는 것이 복음의 본질인 것 같지만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사랑이 복음의 기원이다. 그래서 종교개혁가 칼뱅을 키워낸 스승인 마르틴 부서(Martin Bucer)는 제자 칼뱅이 “진리에 기초한 사랑”을 주장한 데 반해 “사랑에 기초한 진리”를 강조했다. 필자는 부서의 “사랑에 기초한 진리”가 “진리에 기초한 사랑”보다 복음의 핵심에 더 가까이 가 있다고 본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었기에 진리를 아는 “믿음”이 가능했음을 계시하고 있다. 종교개혁가 칼뱅은 『기독교강요』의 서두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장 두드러진 신적 속성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인간의 자기사랑과 대립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의 원천이자 풍부한 출처로 묘사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이 모든 사랑과 선함의 근원이다. 리브스는 성부가 성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유는 “성자를 향한 성부의 영원한 사랑이 성자를 믿는 자들에게도 있게 하고, 성부께서 성자를 즐거워하신 것처럼 우리도 성자를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그분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아버지이시지 결코 이슬람에서처럼 책을 한 권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오히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목적이고 영생의 내용이다. 서아프리카 잠비아에서 독실한 이슬람교도로 태어나고 자랐던 라민 산네(Lamin Sanneh)는 자신이 코란을 버리고 성경을 택한 계기가 인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시는 하나님과 조우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지금은 예일 대학의 종신 교수가 되어 서아프리카 기독교와 이슬람 선교의 최고 권위자로 활동하는 그를 기독교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회복된 교제”로 초대하는 복음이었다. 이처럼 복음은 그 기원과 과정과 목적 모두에 걸쳐서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언제나 활발하게 역사하는 것이다. 이 복음 속에는 우리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 되었을 때에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이 계신다. 종교개혁가 루터의 선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교환”(wondrous exchange)을 통해 인간의 나쁜 것을 가져가시고 대신 그분의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복음은 본질적으로 배타적일 수 없다. 배제하는 방식으로 흘러갈 수 없다. 복음은 생래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서 나온 것이다. “사랑을 통해 진리를 세워가는” 포용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실로 하나님은 복음의 과실을 사랑의 쟁반에 담아 주시는 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산타클로스처럼 인간의 삶의 방식과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선물을 뿌리는 분은 아니다.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베풂과 용서』(Free of Charge)에서 이 점을 명확히 했다. 오히려 복음의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도록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게 하셨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과 똑같이 행하며 살도록 계획하셨다. 따라서 좋은 소식을 베풀어주시고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처럼 교회도 좋은 소식을 나누며 선물을 나누어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서 아낌없이 선물을 베푸는 선한 자가 되도록 인간의 형상을 빚으셨다. 이제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복음을 받은 교회가 그 복음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선하게 베푸는 그리스도의 몸을 취하게 하신다. 은혜의 신학을 회복하면서 공식적인 정체성으로서의 복음주의가 시작될 수 있게 했던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선물로 여긴다. 그 선물의 수여자(giver)이신 하나님은 선의 원천이시다. 그분의 선은 인간에게 베풀어지고, 인간은 수령자(receiver)로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음의 선물을 받는다. 여기서 복음은 선물의 내용이다. 이 복음은 하나님에게서 교회에게로 다시 세상으로 퍼져가는 동심원(同心圓)을 그린다. 그 파장을 타고 인간은 이웃과 더불어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계속 나누며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고 확장한다. 시카고 대학과 예일 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캐더린 태너(Kathryn Tanner)는 복음의 ‘선물수여’(gift-giving)는 신적인 삼위일체를 ‘반영’(reflection)한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교계와 신학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용어가 “복음주의”라는 엄연한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복음, 곧 기쁜 소식을 강조하면서 중심에 두는 신앙유형이자 사조인 복음주의(evangelicalism)는 본질적으로 사랑에 기초한 진리의 고백이자 실천이어야 한다. 복음이 본질적으로 배제적인 것이 아니라 포용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선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속성과 위격과 활동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이제는 현대 복음주의의 흐름을 조망해보자.
총체적, 전 세계적, 전 교회적 복음주의 신앙고백서로 잘 알려진 1974년 1차 로잔 대회의 로잔 언약, 1989년 2차 로잔 대회의 마닐라 선언, 2010년 3차 로잔 대회의 케이프타운 서약은 현대 복음주의가 배제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포용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이정표와 같다. 잘 알려진 대로 1974년의 로잔 언약은 미국의 복음전도자 빌리 그래함과 영국의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가 주도했다. 로잔 언약에는 서구권과 다수세계를 포괄하면서 보수적인 구원신학과 진보적인 정치신학의 조화와 균형을 꾀하는 시도가 담겨 있다. 당시 나온 핵심 주제가 ‘심층’ 전도였다. 복음 전도는 개인의 영혼만이 아니라 그 개인을 둘러싼 사회의 다양한 측면과 구조를 고려하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는 개인의 영혼만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를 억누르고 왜곡하고 있다고 보았다.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의 저자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가 성경 말씀이 ‘경제적 코이노니아’의 회복과 함께 전해져야 복음이 온전해진다고 강조했던 1977년은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잘 반영한 시기였다. 기독교 복음에서 강조하는 회심의 ‘총체성’과 ‘사회적 제자도’를 직시한 짐 윌리스(Jim Willis)의 목소리도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다. 만약 기독교 복음을 예전처럼 개인구원의 차원에서만 본다면, 복음주의는 제한적 속죄에 걸려 배타적이 될 위험성이 농후해졌다. 반면 복음을 사회구원의 차원까지 확장하면 복음주의는 십자가의 독특성과 유일성을 보존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린 포용적인 태도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존 스토트 중심의 입안자들은 복음전도를 여전히 우선하는 입장에 서면서도, 사회참여가 전도의 한 영역으로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형태로 로잔 언약을 구성했다. 이것은 진리와 사랑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하는 방식이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의 두 날개와 같다. 로잔 언약은 우리의 구세주가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 분이시며 복음도 오직 하나임을 천명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복음 전도 ‘방법’의 다양성을 인정한 것이다. 즉 “상대방을 이해하려면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대화도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치러야 하는 ‘제자도의 대가’를 말해준다. 로잔 선언은 “사람과의 화해가 곧바로 하나님과의 화해”라고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의 울타리를 헐고 비그리스도인 사회에 스며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것은 주목할 사실이다. 1989년 마닐라 선언에서 복음주의는 1974년 1차 대회에 이어 계속해서 종교다원주의, 상대주의, 혼합주의와는 멀찍이 거리를 두었다. 로잔 전통의 복음주의는 종교다원주의와 상대주의와 혼합주의적 태도는 교회가 전해야 할 복음, 즉 구원의 진리 자체가 심각하게 흔들렸거나 대부분 상실되었기에 그 어떤 사랑의 마음이 있다 해도 정작 전해 줄 선물이 남아 있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복음주의는 사랑을 우선하지만 진리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삼위일체 하나님 신학과 유일한 구원의 토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신앙 고백은 복음주의가 전하고자 하는 선물의 내용이다. 선물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이기에 전하는 방식도 은혜와 진리여야 한다. 그래서 십자군 운동이든 혼합주의든 관계없이 그러한 태도는 복음을 전하는 옳은 방식이 될 수 없다. 둘 다 그 안에 은혜도 진리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닐라 선언은 “과거 우리가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무지, 거만, 무례 혹은 대적의 태도를 취하는 잘못을 범해 왔다. 우리는 이에 회개한다”라며 잘못을 깊이 시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여기서는 이슬람 등에게 “힘으로 전도하려던 기독교의 태도가 성령을 근심하게 했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반면에 마닐라 선언은 “이슬람 국가들이 복음에 대해 좀더 개방적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또한 복음을 공개적으로 정직하게 전하겠다고 하면서 “그것을 듣는 이가 전적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단하게 하겠다”고 서약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마닐라 선언은 “우리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민감하고자 하며, 그들의 회심을 강요하는 어떤 방법도 거부한다”고 했다. 복음 전도의 획기적/인격적 전환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 선언은 기독교를 믿는 신앙에 대한 자유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각자 종교의 자유를 갖기를 간절히 바라는” 열망을 담아냈다. 2차 로잔 대회의 마닐라 선언 뿐 아니라 2010년에 남아공에서 열린 3차 로잔 대회의 케이프타운 서약 또한 모두 세계인권선언에 기초하고 있다. 특히 이 두 선언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 신앙의 고백과 신앙의 실천과 신앙의 전도의 자유를 “상호 인정할 수 있는 권리”로 만들어 가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슬림과 친구가 되지 못한 것을 회개”한다. 본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통한 영생을 전도하기에 앞서 그들의 삶을 통해 그 믿음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반영’(reflection)함이 옳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빠뜨리거나 건너뛰면 안 된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그렇게 하지 못한 과오에 대한 뼈저린 자기성찰이다. 이제 복음주의는 “진리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타 종교에 관한 거짓과 왜곡을 조장하는 행위를 거부하고 대중매체와 정치적 수사를 통해 인종차별적 편견과 증오와 공포를 일으키는 것을 고발하고 이에 저항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또한 “타 종교인들과의 대화가 의미 있는 활동임을 확언”하고, “이러한 대화는 기독교 선교의 일부로서 타당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타인에 대한 경청의 태도와 결합된 모습”이라고 표명했다. 하나님의 선교를 지향하는 복음주의 헌장인 로잔 언약, 마닐라 선언, 케이프타운 서약은 이렇듯 근본주의로도 자유주의로도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존 스토트(John Stott)가 적절하게 평가한 것처럼, 개인구원과 사회참여를 “가위의 양날, 또는 새의 양 날개”로 삼아 지난 40년을 달려왔다. 최근에 뜨거운 논쟁을 한국교회에 불러일으키고 있는 미로슬라브 볼프의 『알라』는 사회적 공공선을 위해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학적 대화와 공적 현안을 담아냈다. 이것은 반세기에 걸친 복음주의 로잔 운동의 거대한 물결을 타고 항해하는 건강한 복음주의 정치신학의 최선봉으로 무난히 평가받을 수 있다.
사실 기독교 선교 역사를 보아도 복음은 빵과 함께 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복음에는 구원의 특별은총(special grace)만이 담겨 있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실상 복음은 창조의 일반은총(common grace)도 함께 담는 것이다. 칼뱅은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중적/복합적 인식을 단 한순간도 분리한 적이 없다. 그는 구원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정의한다. 예수님과 하나 되며 우리는 구원받는 그분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서 하나님께 이중적 은총(duplex gratia)을 선물로 받는다. 그것이 바로 칭의의 선물(justifying grace)과 성화의 선물(sanctifying grace)이며 특별은총의 구체적 내용이다. 구원의 특별은총은 창조의 일반은총과 구별되나 분리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중적 은총이다. 그래서 칼뱅은 은혜는 보이지 않는 원리요 선물은 보이는 작용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복음은 보이지 않는 은혜를 보이는 선물로 나누는 이중적 구조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복음은 필연적으로 진리를 사랑으로 전해야 한다. 일반은총을 통해 특별은총을 베푸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칼뱅도 제네바의 개혁을 교회의 강단에서만 아니라 길거리에서 조우하는 사회적 약자와 난민들의 삶을 보듬으며 수행했다. 한국교회 선교의 초기역사를 보면 선교사들이 이 땅에 처음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교육, 구제, 의료 사업을 동반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나라를 잃고 독립을 갈망하는 백성들과 함께 했던 교회였기에 복음은 꾸준히 토착화될 수 있었다. 네덜란드의 개혁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일반은총 리스트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한 바 있다. “시민의 덕목, 가정적인 느낌, 자연스러운 사랑, 인간적인 덕목의 실천, 공공 의식의 개선, 진실성, 사람들 사이의 상호 신뢰, 그리고 경건히 누룩으로서 사는 삶을 찾아 살피는 일”이다. 이 목록은 『광장에 선 기독교』와 『알라』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함께 추구하기를 바라는 사회적 공동선에 관해 볼프가 제시하는 내용과 상당 부분 중첩된다. 볼프가 『알라』에서 기독교와 이슬람 양쪽에 대해 바라는 것은 진실과 관용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믿음과 사랑과 정확히 일치한다. 복음이라는 바구니에는 진실과 관용이라는 두 개의 열매가 함께 담겨 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 배타적/폭력적/강제적/일방적 자세를 취하게 되면 그 비관용적 태도로 인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복음의 진실은 전해질 도리가 없다. 문화비평가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라는 표현은 복음의 메시지에도 적용될 수 있다. 미디어에 사랑이 없는데 사랑의 메시지가 어떻게 전해질 수 있겠는가? 미디어가 왜곡된 만큼 메시지도 왜곡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포용적 메시지는 미디어에 반영되어야 한다. 복음주의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일 수가 없고, 상대를 배려하는 가운데 감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카이퍼는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는 시간”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얻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침내 드러나겠지만 아직 온전히 드러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오래 참는 사랑의 덕목을 키워가야 한다. 기독교 복음과 복음주의는 “신과 장차 올 세상에 관한 것”에 집중하느라 “신과 지금 세상에 관한 것”에 실패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 살고 있다. 장차 올 세상을 위해 지금 세상에 배타적이 되는 함정에 빠져서는 곤란하다. 기독교 복음과 복음주의는 볼프 식으로 말하면, 사회적인 차원에서 의미가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루는 과정을 통해, 비신자들을 구원에 관련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인도하는 방식을 지속적이고 구체적으로 모색하고 실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이슬람 선교와 관련해서 복음주의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고심하던 중, 정승현 박사의 “이슬람을 향한 사도, 사무엘 즈웨머”에 관한 최근 연구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보수적인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 19세기 후반 학생자원운동의 승리주의와 낙관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사무엘 즈웨머(Samuel Zwemer, 1867-1952)는 1890년 아랍 베이루트에서 이슬람 선교를 시작할 때에는 이슬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이슬람 현장에서 26년을 무슬림들과 깊이 교제한 후, 그는 강렬한 복음의 열정과 함께 이슬람에 대한 건설적, 포용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리스도 중심적이면서도 문화인류학적으로도 접근한 것이다. 이슬람의 가르침에 진실과 오류가 공존함을 지적했다. 처음에는 언어로 메시지를 전했지만 나중에는 삶으로 십자가를 전했다. 무슬림을 적으로 대하지 않았고 점점 친구로 대하면서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는 것이 복음이라 주장했다. “나는 무슬림의 마음에 다가가는 가장 가까운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 즉 십자가임을 확신합니다.” “선교사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선교사의 방법과 선교사의 열정이 십자가 안에서 발견됩니다.” “그들을 절대로 우리의 적들로 간주하지 마십시다. 대신 그들에게 기독교의 신조가 아니고 십자가와 그 영광의 권능이 가득한 삶으로 우리가 그들의 친구임을 증명하십시다.” 즈웨머는 그리스도인 안에 십자가의 영이 존재하다면, 그것은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을 통해 무슬림들에게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가 탁상에서 내린 신학적 결론이 아니라 현장에서 내린 영성적 결론이다. 기독교 복음과 복음주의는 결국 교회와 선교단체 같이 눈에 보이는 기관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 비신자들에게로 선하신 삼위일체의 사랑의 교제가 흘러나오게 해야 한다. 즈웨머는 “만약 기독교가 이슬람을 이겨낸다면 그것은 힘이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고백한다. 즈웨머는 60대가 되어 프린스턴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로 초빙받았다. 신학생들은 그에게 무슬림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절대로 이슬람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결정입니다! 그 대신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긍정적으로 전하고 그분을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도록 무슬림들을 다정하게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슬람 선교 현장에서 사랑하는 어린 두 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고, 친동생의 죽음까지 겪었고 끝내 막내딸까지도 무슬림 선교에 헌신했던, 하나님의 한 위대한 종의 고백이었다. 즈웨머는 처음엔 진리를 위해 선교지로 향했다. 그러나 점차 사랑으로 그 땅을 포용해 갔다. 그것이 진리이신 주님을 전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즈웨머가 걸었던 길은 훗날 라민 산네가 하버드 강좌에서 행한 고백 속에서도 발견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 희생적으로, 사랑을 담아, 확실하고, 열렬하게 -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 가지는 것뿐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13
송용원 | 목사는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BA),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미국 예일대학교(STM), 영국 에든버러대학교(PhD)에서 조직신학과 칼뱅을 공부했다. 온누리교회, 뉴저지초대교회, 새문안교회에서 부목사로 대학 · 청년사역을 했으며, 미국 유학시절에는 보스턴 온누리교회와 뉴욕 맨하튼 뉴프론티어교회를 개척했다. 현재는 서울에서 은혜와선물교회를 개척하여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초빙교수로 있으면서 기독경영연구원 연구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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