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성경해석학이란 무엇인가?/임태우 교수
I. 개혁주의 성경해석학이란 무엇인가? “나는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성경 66권을 바르게 깨닫고, 사명감을 가지고 가르치며,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 위하여 성경해석학을 연구하고자 한다.” 필자는 어느 개혁주의 신학자의 위와 같은 신앙고백을 성경해석학 연구의 목표로 서두에 제시하면서 본서를 시작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곡해와 오해는 현대 종교계와 신학계에서 이미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성경 원리의 적용에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으며, 더욱 경계해야 할 사실은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진영까지도 부지불식간에 이러한 혼란의 물결에 뒤덮여버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오늘날 성경 연구에 있어서 올바른 해석 원리의 사용과 적용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으며,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개혁주의 성경해석학”을 정립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경해석학은 중요한 과목이다. 왜냐하면 이 과목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본문을 해석하는 원리를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성경해석학은 성경 본문 해석을 위해 필요한 성경 해석 원리를 다루는 분야였다. 그런데 오늘날 유행하는 성경해석학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찾는 데는 별 관심이 없고 성경 본문을 신학적인 방법론의 한 표본으로 삼으려는데 그 노력을 집중시킨다. 이는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 되는 객관적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고 성경을 자신의 신학 작업을 위한 하나의 보조물로 전락시키는 결과이다. 그렇지만 본서는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전제하고 쓴 “개혁주의 성경해석학”에 관한 개론서이다. 따라서 본서는 성경의 내용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써진 책이다. 성경해석학의 중요한 요소는 (1) 성경 본문, (2) 해석자, (3) 해석 원리이다. 올바른 성경 해석을 위해서는 이 세 가지 요소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적 증거’인 성경 본문이다. 성경 본문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면서도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신적이면서도 인적인 신비한 책이다. 즉 하나님의 작품인 동시에 인간의 작품인 것이다. 성경이 인간의 작품이란 뜻은 인간이 성경 저자로 사용되어졌고 인간의 언어가 성경의 언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성경 저자들은 누구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의식 없이 자연스런 방법으로 성경을 기록했다. 그러므로 성경은 완전한 인간의 작품인 것이다. 성경의 궁극적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성경의 전체적인 의미를 결정하신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 말씀의 의미도 인간 상황과 연계하여 결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미를 이해하는 출발점은 항상 인간 저자의 정황에 의해 결정된 의미를 복원하려는 시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저자들을 영감 시켜서 성경을 기록하게 함으로써 성경 저자들이 기록한 내용이 바로 성령 하나님께서 기록하기를 원하시는 내용이 되도록 인도하셨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방법이다. 따라서 성경은 완전한 신적 작품이다. 그리고 성경이 언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 속에 언어적인 특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터득할 때 우리는 바른 성경 해석을 할 수 있다. 성경해석학에서는 항상 ‘주관적인 해석자’인 인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해석자는 항상 주관적이 되려고 한다. 현대 신학자들의 방법이 바로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를 근거로 신학 작업을 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해석자의 주관성에 의존하지 말고 객관적인 성경 본문에 의존해야 한다. 해석자는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기 때문에 같은 원리를 사용해도 해석자의 차이에 따라 성경 해석의 결과가 달라짐을 인식하고 항상 겸손한 태도로 중용의 미덕을 살려야 한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영감된 기록이기 때문에 해석자는 항상 기도하는 자세로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해석학의 해석 원리는 일반원리와 특수원리가 있다. 일반원리나 특수원리 모두 성경이 기록될 때 성경 속에 내재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원리들이다. 일반원리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간의 언어를 유기적으로 사용하셨다는 사실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고, 특수원리는 언어의 구체적인 표현방법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원리는 성경 속에 이미 그 원리들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해석학은 이처럼 성경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이런 원리들을 찾아서 종합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성경해석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신학의 한 분야이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성경 저자들의 전제와 일치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부수적인 전제들 역시 검토되어야 한다. 비록 이 작업이 매우 어려운 과정이기는 해도, 우리의 전제들을 파악해 보고 그것이 과연 성경의 전제들과 조화를 이루는지 그리고 성경의 전제들과 얼마만큼 조화를 이루는지를 평가하는 시도는 일생동안 계속되어야 할 작업이다. 사실 성경을 해석하는 열쇠는 성경이 우리의 전제들을 변화시켜 성경과 일치하는 해석의 틀이 되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본서를 통하여 독자들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의 내용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해석된 성경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그 말씀대로 사는 방법 이외에 더 좋은 길이 없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A. 해석학의 의미 성경 해석학을 다루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해석학이 무엇인지 고찰해 보아야 한다. 그 후에 성경해석에 관한 용어의 정의를 살피고, 성경해석학과 다른 학문들과의 관계를 숙고해보는 것이 올바른 연구의 순서일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해석학과 석의의 관계를 핵심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해석학은 성경의 올바른 이해를 획득하는 일에 필요한 지침과 방법론을 제공한다. 임의적이고 잘못된 해석을 피하려면, 또한 개인의 일시적 생각에만 단순히 적용되는 해석을 피하려면, 해석자에게는 안내를 위한 규칙이나 원리들이 필요하다. 사리에 맞고 합의된 원리들을 기초로 해서 해석하려는 의도적인 시도는 정확한 해석에 대한 최상의 보장이 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이러한 원리들을 발견하고 사용하려는 일에 착수하게 될 때, 우리는 해석학을 조사하게 된다. 1. 헬메뉴오의 기본적 의미 ‘해석학’을 영어로는 “허-머뉴-틱스”(Hermeneutics)라고 한다. 이 단어는 헬라어 ‘헬메뉴오’(ἑρμηνεύω)에서 유래된 것이다. ‘헬메뉴오’는 동사로서 “해석한다”(to interpret) 혹은 “설명한다”(to explain)라는 뜻이며, ‘해석’이라는 명사는 ‘헬메네이아’(ἑρμηνεία)이다. 신약 성경에서 ‘헬메뉴오’와 같은 뜻으로 사용될 수 있는 유사한 단어들로는 ‘디엘메뉴오’(διερμηνεύω)와 ‘메델메뉴오’(μεθερμηνεύω)가 있다. ‘헬메뉴오’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용법들은 서로 연관성이 있으며, 번역이나 언어 자체도 해석학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을 가르쳐 준다. ‘헬메뉴오’의 가장 넓은 의미는 “해석하다,” “설명하다” 혹은 “분명히 말하다.”라는 의미이다. 월터 바우어(Walter Bauer)는 ‘헬메뉴오’의 뜻을 “해석[해설, 통역]하다”(explain, interpret), “선포하다”(proclaim) 그리고 “번역하다”(translate)로 설명했다. 해석되어지는 대상이 신적인 것이나 인간적인 것을 막론하고 그것을 설명한다고 할 때 ‘헬메뉴오’를 사용한 것이다. 특히 누가복음 24장에 나타난 ‘디엘메뉴오’(διερμηνεύω)는 “해석한다, 설명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오경과 선지자의 글을 자신의 인격과 사역에 비추어 해석하셨다. 누가복음 24:27의 “자세히 설명하다”는 32절의 “성경을 풀어주실 때”(opening the Scripture)와 같은 뜻이다. 즉 구약에 약속된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풀어서 해석해주신 것이다. 2. 주제, 사상, 언어의 표현에 사용된 헬메뉴오 ‘헬메뉴오’의 다른 용도는 주제나 사상을 언어로 표현할 때도 사용하는 것이다. ‘디엘메뉴오’가 방언을 해석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고전 12:10, 30; 14:5, 13, 26-28). 여기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방언은 언어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며 방언을 통역한다는 뜻은 언어 이전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헬메뉴오’의 용법이 언어학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건들의 비언어적인 상태(non-linguistic states of affairs)도 해석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지적해주고 있는 것이다. 3. 헬메뉴오의 번역적 의미 ‘헬메뉴오’의 또 다른 용도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메델메뉴오’를 “번역하면”(마 1:23; 막 15:22; 요 1:41)의 뜻으로 사용한다. B. 성경 해석에 관한 용어의 정의 1. 해석학의 정의 벌코프는 해석학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해석학이란 해석의 원리와 법칙과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학문이다.” 성경해석학을 흔히 ‘학문’(science)과 ‘예술’(art)로 정의한다. 성경해석학이 학문이라는 의미는 성경해석학이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이 법칙들을 질서 있게 체계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해석학이 예술로 생각되는 이유는 법칙 적용에 융통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해석자는 해석 법칙을 익숙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법칙들을 적용하는 예술을 배워야 한다. 성경해석학은 석의(exegesis)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이유는 두 분야 모두 같은 본문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마치 규칙집이 놀이(game)와 관계되는 것과 같이 해석학은 주석(exegesis)에 관계되어 있다. 규칙집은 반영과 분석과 경험에 의하여 기록된다. 놀이는 법칙들의 구체적인 실현을 통해 운영된다. 법칙들은 놀이가 아니다. 그리고 놀이는 법칙들이 없으면 무의미하게 된다. 성경해석학은 주석이 아니다. 그러나 주석은 성경해석학의 인도가 없으면 과녁을 맞힐 수 없게 된다. 해석학을 학문이라고 한다면 석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고, 해석학이 이론이라면 석의는 실제라고 할 수 있다. 성경해석학은 성경의 뜻을 찾아내는 데 필요한 성경 해석 원리들을 성경을 기초로 찾아내어 확립하는 학문이다. 2. 주석의 정의 주석의 영어 표현은 ‘엑써지씨스’(exegesis) 혹은 ‘카먼테리’(commentary)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엑써지씨스’는 주석을 하는 행위를 뜻하고, ‘카먼테리’는 주석책을 가리키는데 사용한다. ‘엑써지씨스’는 헬라어 ‘엑세게시스’(ἐξήγησις)로부터 왔다. 그리고 이 단어는 “설명하다,” “이끌어내다,” “인도해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동사형인 ‘엑세게오마이’(ἐξηγέομαι)는 “자세한 정보를 조직적인 방법으로 제공하는 것, 즉 알리는 것, 전달하는 것, 충분히 설명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주석이란 “성경 본문을 연구하여 저자가 본래 수신자에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확히 찾아내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주석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수신자가 받게 되는 내용에 강조를 두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주석은 과거 중심적이고 과거지향적인 해석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3. 주해의 정의 주해는 주석과 같은 의미로 사용될 경우도 있고, 강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될 경우도 있다. 그래서 ‘주해’라는 영어 표현은 없지만 ‘엑써지씨스’(exegesis)와 ‘엑스퍼지션’(exposition)의 합성으로 만든 ‘엑써지션’(exegesion)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해는 주석처럼 한 단어나 한 구절만을 설명하지 않고 문단 전체의 내용을 설명하되 본래 저자가 본래 수신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찾는 데 강조를 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주해는 주석과 유사함을 볼 수 있다. 반면 주해를 할 경우, 한 단어나 한 구절을 해석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고 문단 전체를 설명하는데 관심을 더 둔다. 이 경우는 주해가 강해 쪽의 특성을 활용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주해는 내용적인 면에서는 주석의 특성을 살리고,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강해의 특성을 활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4. 강해의 정의 강해는 영어로 ‘엑스퍼지션’(exposi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강해 설교는 ‘익스파지토리 프리이췽’(expository preaching)이라고 부른다. 강해는 성경을 연구하여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말을 무슨 말씀을 하시기 원하는지 찾아내는 것이다. 강해는 성경 본문의 뜻을 왜곡시키지 않으면서 성경 본문의 뜻을 현시대에 적절하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즉 강해의 초점은 “성경의 내용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는데 더 강조를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주석이 ‘성경이 무엇을 말했는지를(said) 찾는 작업’이라고 말한다면, 강해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says) 찾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C. 성경 해석학과 다른 성경 학문과의 관계 성경해석학은 고립된 학문이 아니다. 성경해석학은 성경을 연구하는 다른 학문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성경을 기초로 하는 학문 가운데 성경해석학 이전에 다루어져야 할 학문 분야가 있고, 성경해석학 이후에 다루어져야 할 학문 분야가 있다. 1. 정경론(Canonicity) 정경론이야말로 성경 연구 분야 가운데 가장 먼저 다루어져야 할 분야이다. 정경이 결정되지 않으면 성경 해석도 본문 비평도 할 수 없다. 정경론이란 “어느 책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인지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정경화의 과정은 역사적인 것이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를 인도하여 영감된 책들을 정경으로 수납하도록 만드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정경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교회가 순종한 결과물로 보아야지, 교회가 정경을 결정했기에 교회가 성경보다 더 권위 있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2. 본문 비평(Textual Criticism) 본문 비평은 정경이 결정된 뒤에 따라오는 학문 분야이다. 본문 비평은 비평적인 전제를 가지고 성경 본문을 파괴하려는 소위 고등 비평(Higher Criticism)과는 다르다. 본문 비평은 우리 손에 영감으로 기록된 원본이 없고 사본들만 있기 때문에, 여러 사본들을 연구하여 원본을 찾는 연구 분야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사본들만 있고 원본이 없다는 사실이 성경의 무오성을 파괴시키지 못한다. 신약신학자인 브루스(F. F. Bruce)는 이렇게 말하였다. “신약 본문 비평가들 사이에 아직 의심스럽게 남아 있는 여러 가지 독법들(readings)은 결코 역사적 사실이나 기독교 신앙과 실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3. 총론적 분야(Introduction) 총론적 분야가 그 다음에 따라오는 분야로 해석학 이전에 시행되어야 할 분야이다. 성경 각 권의 저자가 누구이며 언제 기록 되었는지, 성경이 기록된 역사적 배경은 어떠했는지에 관해 연구하는 분야가 총론적 분야이다. 성경이 일반 역사책은 아니지만 역사적인 책이기 때문에 어떠한 역사적 형편 가운데서 기록 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성경 해석에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또한 성경이 유기적으로 영감 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저자에 관한 연구, 수신자에 관한 연구, 역사적 형편 등 역사적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성경 본문의 역사적 형편을 알지 못하고는 성경의 본뜻을 터득하기 어렵다. 4.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 우리가 제대로 성경 해석을 하려면 먼저 정경론, 본문 비평, 역사적 연구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해석학은 해석학의 원리를 적용하여 본문의 바른 뜻을 찾아내는 것이다. 성경 해석 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본문의 의미’를 찾아내야지 본문에 자신의 사상을 첨가시켜 그것이 마치 성경 본문의 뜻인 양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5.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 성경해석학 이후의 학문 분야는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이 있다. 성경신학이나 조직신학 모두 성경주석을 근거로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성경주석은 성경신학의 조종을 받으면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성경신학은 성경주석을 근거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성경주석과 성경신학은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6.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조직신학도 역시 성경주석을 통해 얻은 내용으로 신학의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 조직신학이 사변적으로 흐르게 되면 성경의 본뜻과 멀어질 가능성이 있다. 성경신학이나 조직신학 모두 성경계시의 유기적인 전체 조직을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신학은 계시의 역사성에 관심을 더 두는 반면, 조직신학은 주제별 연구에 관심을 둔다.” D. 해석학과 석의의 관계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볼 때 해석학이 있기 전에 주석이 있었다. 즉 성경 해석에 대한 학문이 있기 전에 이미 성경 해석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는 마치 동물학이 있기 전에 동물이 생육하고 성장하는 사실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원리는 해석학이 주석가를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증명해 준다. 그렇다면 해석학은 무용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해석학은 자연적인 은사를 훈련시키고 발전시키게 하며 어떤 법칙과 방법을 더 양심적이고 정확하게 해석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해석자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1. 해석학과 석의의 연관성 해석학은 성경 해석의 원리를 형성하는데 관심이 있지만, 석의는 해석학의 인도를 받아 성경 본문을 실제적으로 이해하는 행위이다. 즉 석의는 원리를 본문에 적용시키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해석학은 원리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석의를 구체적으로 돕고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석의는 구체적인 문장이나 구절 혹은 문맥의 뜻을 찾아내는 행위이며, 해석학은 이와 같은 구체적인 뜻을 찾아내는데 원리적인 면에서 전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학과 석의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쪽이 다른 쪽을 임의로 규제하고 관장할 수가 없다. 따라서 “어떤 성경 해석의 원리도 기계적인 법칙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석의를 응용해석학(Applied Hermeneutics)으로 생각하여 해석학이 석의를 주권적으로 관장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해석학과 석의는 서로 종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또 자체의 특별한 영역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해석학과 석의의 관계는 해석자에 의해 연관되어진다. 즉 해석학은 해석자를 인도하여 본문을 석의하게 한다. 그러나 해석학은 해석자의 손에 있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어진다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해석학은 해석자의 인격을 통하여 석의에 연관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석학이 좋은 원리를 해석자에게 제공해주어도 해석자의 인격이 완숙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2. 해석학과 성경 해석 우리는 성경 해석의 성격이 유동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경 해석은 마치 어떤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도 유사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악기의 연주는 원리에 따라서 해야 하며 또한 연주자가 악보(the text)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연주자는 원리에 따라 악보에 의존하여 연주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좋은 성경 해석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해석자가 본문을 익숙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본문을 익숙하게 이해하는 단계가 이미 이룩되어 있어야 능률적인 성경 해석을 할 수 있다. 성경 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금물이다. 지나친 경건주의적인 해석이나 통찰력과 공상에만 의존하는 성경 해석은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기보다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성경 해석 원리는 본문과 관계없이 규정되어지기 때문에 그런 원리로 성경을 해석하면 결국 곡해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지나친 문자주의도 금물이다. 어떤 이는 본문의 우월성을 높이기 위해 본문을 철저하게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 그러나 언어는 반드시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야 바른 뜻이 나타난다고 생각할 수 없다. 우리들의 일상용어가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해석학적인 중용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중용의 길을 택한다는 뜻은 타협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중용의 길은 본문에 우월권을 부여하면서 본문과 해석자 간의 상호 유동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석자가 본문(text)을 대할 때 해석자의 태도는 자유스러워져야한다. 해석자의 과거의 경험이나 신조가 성경 해석의 표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해석자의 신조나 과거의 지식이 성경 해석에 참조는 될 수 있지만 성경 해석을 관장하는 표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해석자는 자유스러워져야 하지만 해석자의 자유는 결코 방종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해석자는 모든 외적인 제한과 방해로부터는 자유스러워져야 하지만 성경 내의 고유한 법칙으로부터는 자유스러워질 수 없는 것이다. 해석자가 해석을 함에 있어서 자신의 생각을 성경 저자들의 뜻인 양 첨가시켜서는 안 된다. 해석자의 자유는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규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text)과 해석자와의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해석자는 항상 본문에 우월권을 부여해야 한다. 그러나 흔히 해석자의 태도는 습관이나 전통에 의해 세워진 어떤 사상적 패턴에 우월성을 두고 성경 진리가 그와는 다르게 증거 할지라도 성경 진리를 그대로 받으려 하지 않을 경우가 있는 것이다. 본문의 우월권 문제는 어떤 본문을 다룰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성경을 본문으로 할 때는 철저하게 적용되어져야 한다. 해석의 의미는 해석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요, 본문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이 최종적인 말을 할 수가 있다. 만약 이 원리를 따르지 않으면 해석자 자신의 어떤 전제하에 주관적인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다. 해석자와 본문과의 사이에 뗄 수 없는 관계는 우리들에게 한 가지 교훈을 준다. 그것은 해석법을 배우는 첩경이 좋은 해석자를 관찰하여 그의 해석법을 배우는 것이다. 모본이 될 수 있는 좋은 주석가는 해석의 방법론을 계속적으로 설명해 준다. 훌륭한 주석가는 그가 해석하는 내용을 왜 그렇게 해석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우리들이 훌륭한 해석자를 본받을 때 교회는 해석학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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