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시대의 천년왕국운동
- 타보르파 운동과 토마스 뮌처의 난 -
박양식
(서강대 박사 학위논문 요약)
I. 서언
반란과 혁명에 관한 연구의 경향은 대체로 종교적 요인을 경시하고 주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요인을 중시하는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그 이유는 종교가 주로 사회의 안정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는 관점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산업사회는 물론이고 산업사회에서도 종교를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 많은 혁명적 사건들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반란 혹은 혁명에서의 종교의 역할에 주목하는 연구들이 나왔다. 이 연구들을 통해서 종교가 기존 사회에 저항하는 반란과 혁명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한다는 점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이로써 반란과 혁명에서 종교가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점이 크게 부각되었다.
서양에서 반란 내지 혁명에 관련된 종교의 주제는 1956년과 1960년 사이 Mancester, Paris, Chicago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다루어졌고, 이란 혁명이 있은 후 1981년 Minnesota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또 다시 다루어졌다.1) 이들의 논의는 학제간 연구로 이루어졌고, 역사적 논의는 사례 연구 중심으로 다루어졌다. 그동안 ‘종교와 반란’의 문제를 다루는 연구에서 가장 부각된 것은 천년왕국운동이었다. 천년왕국운동은 천년왕국신앙에 의해 고무받은 대중들이 기존질서를 전면 거부하고 새 시대의 새 세계를 희망하는 일종의 민중운동 내지 사회운동으로 이해되었다.
반란 혹은 혁명에서 종교는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라고 묻는 것은 사상은 역사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라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고 할 때 공정한 세계 질서를 추구하는 종교인들의 신앙 내지 사상이 특히 근대 이전의 혁명적 소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밝히는 것이 중요한 연구 과제로 떠오른다. 이런 관점에서 본고는 천년왕국신앙이 15, 16세기에 혁명적 대중운동을 일으킨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천년왕국신앙은 그리스도의 재림 時 새로 건립되어 천년 간 유지될 지상낙원을 향한 종교적 열망 내지 의지이다. 그리스도가 통치할 이 천년왕국은 평화와 정의, 풍요와 행복이 넘치는 곳이기 때문에 고난의 시기에 좌절과 고통을 겪는 신자들에게 커다란 호소력을 갖는다. 일단 천년왕국신앙을 받아들이면 신자들은 자신들이 천년왕국에 들어갈 유일한 자격자라고 믿고, 천년왕국을 지상에 실현시키기 위한 모든 행동을 취한다. 이 같은 그들의 행동은 세계의 종말에 이어 도래할 새 세계에 대한 극단적인 희망의 표출로서 기존의 사회질서와 체제를 부정하는 반란 내지 혁명을 지향하게 된다.
그러면 천년왕국신앙이 대중들의 반란 내지 혁명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이 문제에 집중하여 두 역사적 사건을 살펴 보기로 한다. 첫째는 보헤미아의 타보르파 천년왕국운동이다. 천년왕국운동은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특정집단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특정집단은 경제적 빈곤, 정치적 억압, 사회적 고립이라는 박탈된 상태에 이르거나, 반복되는 재앙으로 사회적 폐해가 만연되거나, 또는 시대적 전환에 따른 위기 상황이 고조되는 현실 조건에서 천년왕국운동을 일으킨다. 현실 조건이 열악하다고 해서 모두 천년왕국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특정집단은 천년왕국신앙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정립함과 동시에 새로운 삶의 목표와 행동 지침을 발견하고 그에 따른 구체적인 실천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타보르파는 정치‧사회적 압박 속에서 천년왕국신앙을 통해 혁명적 천년왕국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새로운 삶의 돌파구를 찾았다.
둘째는 토마스 뮌처가 이끌었던 독일 농민의 난이다. 뮌처는 천년왕국의 도래를 위한 실천의 문제에 집중하여 선민들을 찾아내 각성시키는 예언자 역할을 감당하였다. 천년왕국운동에서 예언자는 신비주의자들과는 달리 새 의식을 가르치고 새 도덕을 설파함으로써 추종자들을 이끈다. 그들은 신과 인간을 중개하는 인물로서 구원을 가져오는 상징적 존재로서 대중을 각성시키고 결속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나 예언자없이 천년왕국운동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고, 모든 천년왕국운동에서 예언자들의 역할이 일정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의 역할은 그 사례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 여기서는 살펴볼 뮌처는 천년왕국을 소개하는 일 보다는 천년왕국의 실현을 위한 실천에 몰두했던 천년왕국주의적 예언자 중 하나였다.
II. 타보르파의 천년왕국운동
타보르파(the Taborite)의 혁명적 천년왕국운동은 민족적 유대감에 힘입어 성공적인 종교개혁을 추진한 후스파 운동(the Hussite Movement)의 전개 과정에서 분지되어 나왔다. 후스파 운동은 Constance 종교회의에서 Jan Hus를 처형한 데 대해 후스파들이 민족적으로 단결, 항의함으로써 출발하였다. 그리고 보헤미아의 귀족과 평민들은 Wenceslas 왕의 묵인 하에 로마 카톨릭를 민족교회로 대체하는 대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들의 종교개혁의 핵심은 평신도에게도 성직자와 마찬가지로 빵 뿐 아니라 포도주로 성만찬을 행해야 한다는 兩種配餐主義(utraquism)였다. 이러한 후스파들의 개혁은 보헤미아 전역에 급속히 확산되어 갔다.
그러나 1419년 왕이 신성로마 황제 Sigismund와 교황 Martin V의 압력에 굴복하여 카톨릭 복고정책을 취하고 후스파에 대한 억압정책을 폈다. 이에 격분하여 일단의 후스파들은 같은 해 7월 30일 市 청사를 습격하여 청사 안에 있던 일부 인사를 창 밖으로 내던지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카톨릭을 등에 업고 부와 권력을 누리던 독일인 세력에 대한 민족적 항쟁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보헤미아에서 실질적 정치적 권한을 확보하게 된 후스파는 그 여세를 몰아 후스파 개혁을 더욱 확대해 갔다.
후스파 개혁은 종교적‧민족적 측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민족교회 체제의 확립과 독일인 세력의 축출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후 후스파 개혁이 사회적 영역으로 확대되자 각계 각층의 사회적 욕구가 분출되었다. 각 계층 간의 이해관계가 서로 얽히면서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후스파 안의 내부적 갈등 요소들이 표면화되었다. Wenceslas 왕이 7월 봉기의 충격으로 사망하자 양자 간의 대립은 첨예하게 되었다. 우선 카톨릭과의 관계에서 보수파는 양종배찬주의의 허락이란 조건 하에서 카톨릭과 제휴하려고 했으나 급진파는 로마 카톨릭과의 완전한 단절을 고수하였다. 그리고 보헤미아의 왕위계승권 문제에서 보수파는 신성로마 황제 Sigismund를 기꺼이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반면에 급진파는 Sigismund를 적으로 간주하였다. 이로 인해 후스파는 보수파와 급진파로 갈라져 대립하는 것이 불가피하였다.
보수파는 대체로 온건한 대학 교수들, 부유한 시민, 귀족들이 중심이 되었고, 聖杯派(the Utraquist 혹은 the Calixtines)로 불리웠다. 이와는 반대로 급진파는 소수의 職人과 하급 귀족들도 소속되어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도시하층민2)과 농민들이었다. 이 급진파들은 보헤미아 남부 지역에 있는 Luznica 강변의 Bechyne 근처 언덕을 예수가 재림할 타보르(Tabor) 산이라 명명하고 그 곳을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타보르파라는 명칭을 얻었다.
타보르파는 자신들의 노선과 다른 성배파와 완전 결별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택함으로써 타보르 공동체를 탄생시켰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이 가까왔다고 느끼고 타보르라고 명명된 도시들로 집결하여 호전적 태도로 새로운 신의 왕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거기서 그들이 세운 사회질서는 기존의 봉건질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타보르파 사회는 신분의 차별없이 모두가 똑같은 형제 자매로 불리는 평등주의 사회이자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는 공유제 사회였던 것이다. 하나의 사회체제에서 다른 체제로 갑작스러운 교체가 일어난 것을 혁명이라고 할 때 타보르 사회는 유럽 최초의 혁명적 사회로 평가된다.
이처럼 타보르파가 혁명적 사회를 건설하게 된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천년왕국신앙에 따른 종교적 실천의 결과였다.
타보르파가 천년왕국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은 경제적 곤란과 함께 국내외적으로 받는 정치적 탄압의 상황에서 선택한 생존을 위한 방편이었다. 우선 타보르파 구성원들은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었다. 14세기에 농민들은 借地 세습권, 이주의 자유, 영주결정에 대한 상소권 등을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5세기에 들어서서 전통적인 농민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증가된 세금과 부역에 고통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농촌 지역의 무산자들은 프라하 등지의 도시로 이주하였다. 이런 이주자들은 도시에 와서 빈민층을 형성하였다. 도시빈민들은 날품팔이로 하루의 생계를 간신히 유지하였다. 그러나 은광 개발과 인구 증가로 인해 물가가 상승하자 그들의 생계는 더욱 곤란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상류층과 함께 적극적으로 후스파 개혁 운동에 참여하여 로마 카톨릭에 성공적으로 대항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당연히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의 개선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하층민들의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상류층은 과격해진 하층민들의 행동을 우려하며 자신들의 권위가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하며 대부분 하층민인 타보르파를 멸절시키기 위한 정략적 방책을 강구하였다. 그들은 카톨릭교도와 함께 왕당파를 결성하고 타보르파를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유능한 John Zizka의 지휘 하 에 있는 타보르파에 밀려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왕당파는 협약 체결을 유도하여 전세를 뒤집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왕당파는 타보르파에게 양종배찬주의와 신법의 자유로운 전파를 보장한다는 내용을 제시하였고 타보르파는 그런 왕당파의 제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단 타보르파들이 협약의 내용 만을 믿고 자신들의 지방 근거지로 흩어지자 곧바로 결집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를 이용하여 왕당파는 타보르파에게 각종 벌을 가하고 그들을 광산으로 보내서 비인간적인 강제 노역을 시키는 등의 정치적 탄압을 가하였다. 결국 협약은 열세를 뒤집기 위한 왕당파의 정치적 음모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민족운동 안에 자신들을 편입시켜 줄 수 있는 아무런 정치적 통로를 갖고 있지 않았던 타보르파로서는 왕당파의 탄압에 속수무책이었다.
국내적으로 정치적 탄압을 받을 뿐 아니라 타보르파는 대외적으로도 진압의 표적이 되었다. 1420년 초에 이단 근절이란 명분 하에 Martin V가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고, 이에 보헤미아 왕위계승을 노리는 Sigismund 황제가 합세한 것이다. 이로써 타보르파는 국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과 위기감은 한층 고조되었다. 그들에게는 죽음 이외의 다른 선택의 길이 없는 듯하였다.
이 때 타보르파에게 새로운 삶의 돌파구를 열어준 것은 카톨릭 교회 체제에서 소외된 성직자들이었다.3) 이 성직자들은 할 일도 없는 궁핍한 생활하는 가운데 예수재림사상과 천년왕국신앙을 소개하며 타보르파에게 활력을 되찾아 주었다. 그들의 설교는 타보르파에게 받아들여졌고 그들은 타보르파의 성직자로서 활동하였다.
이렇게 등장한 타보르파 성직자들은 처음에 예수재림에 관한 설교를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재림을 말하면서 산으로 피하라고 명령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산상집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지붕에 있는 자는 내려오지 말며 믿음없이 집을 돌아 본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설교를 들으면서 타보르파는 순례형식의 산상집회를 갖던 관례에서 벗어 산으로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 산은 나중에 적을 방어하는 데 용이한 요새 도시로 바뀌어 소개되었다. 타보르파 성직자는 Tabor, Zatec, Louny, Slany, Klatovy 같은 다섯 도시를 지정하며 그 도시로 피난한 자들 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동안 자기들을 구원해 줄 세력이나 집단을 찾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재산을 처분하여 피난도시로 이주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길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이주는 기존의 사회체제로부터 탈출이라는 일종의 반란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타보르파는 예수재림을 단순히 기다리는 수동적‧평화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천년왕국신앙이 소개되면서 타보르파의 태도는 적극적‧혁명적으로 바뀌었다. 그 직접적 계기는 대파국의 시대가 1420년 2월 중에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이 빗나간 것에 있었다. 예언된 당일에 아무 사건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예언이 빗나갔다고 해서 운동이 소멸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운동의 정당성이 더욱 강화되어 나타난다. 타보르파의 경우 예언이 빗나가면서 성직자들은 천년왕국의 도래를 적극적 태도로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서 反타보르파인 John Pribram 교수는 지적하기를, 타보르파 성직자들은 예언대로 일이 되어지지 않자 또 다른 거짓말로 사람들을 위로하였고 일종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천년왕국을 소개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로써 기존의 사회체제로부터 탈출해 나온 타보르파는 이제 천년왕국의 도래를 위해 그리스도의 적들을 향해 분노와 고통을 발하는 敎會戰士의 일원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제 타보르파는 하나의 조직적 형태를 갖추어 본격인 혁명적 활동에 들어갔다.
천년왕국주의적 성직자들은 지금은 대환란의 시대이며 조만간 세상이 종말을 고할 것이고 천년왕국의 도래가 임박했다고 설교하였다. 그 내용은 Pribram가 전하는 바를 일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죄인과 악인들은 완전히 멸망당하고 지상에는 신의 선민 - 산으로 도피한 사람들 - 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말하기를, 신의 선민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可視的이고 觸覺的으로 세계를 다스릴 것이다. 또 그들은 설교하기를, 산으로 도피한 신의 선민은 파멸당한 악한 자들의 모든 물품들을 소유할 것이고 그들의 모든 영지들과 마을들을 자유로이 통치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당신들은 모든 것들이 풍성하여서 은, 금, 돈들은 귀찮은 것이 될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그들은 ‘이제 당신들은 더 이상 당신들의 영주에게 지대를 지불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들에게 예속되지도 않으며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이 그들의 마을, 양어장, 목초지, 숲, 그리고 모든 소유지를 소유할 것이다’라고 설교하였다.
이것을 강력한 타보르파 지도자인 Martin Huska의 말로로 요약하자면, 지상에 성도들의 새 왕국이 세워질 것이고 선민은 더 이상 고통받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천년왕국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것으로 타보르파는 받아들였다. 이 확신은 당시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시대적 징표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새 희망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무리에게서 적그리스도 세력의 유혹을 느꼈고, 교황과 황제가 일으킨 십자군과의 전쟁에서 천년왕국의 도래에 앞서 있을 최후의 전투를 생각해 내었다. 이러한 시대적 징표를 읽어낸 타보르파는 지금이 바로 신의 분노 내지 징벌이 나타나는 대파국의 시기임을 확신하고 악인에 대한 분노와 복수 행위를 감행하였다. 이 과정을 적그리스도와의 최후의 투쟁으로 인식한 그들은 교회전사를 자처하며 잔인한 폭력행위도 주저하지 않았다. John Capek같은 인물은 천년왕국의 건설에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과감하게 제거할 것을 요구하며 죄인들을 살육하고 불의한 현 세계를 파괴하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이렇듯 마지막 시대에서 교회전사로 활약한다는 의식을 통해 타보르파는 상대적이긴 하지만 혁명운동의 필수요건인 조직의 결속력과 과감한 실천력을 갖추었다.
이 같은 타보르파의 투쟁은 외면상 봉건체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혁명적 공격이었으며 하층민의 상류층에 대한 계급투쟁의 양상을 띠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계급적 동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새 시대를 열기위한 일종의 종교적 정화작업이었다. 바꾸어 말해서 그것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조직적 투쟁이라기 보다는 악의 세력에 대한 방어적 싸움이었다.
타보르파는 평등주의적 공유제 질서를 도입하여 실천하는 데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오래 지속시키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천년왕국신앙이 세속적 현실과 부딪히면서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한계는 제도의 부활과 폭력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공동체 유지를 위해 공동기금을 관리하고 군사조직을 운영하며 설교와 교회업무을 관장할 주교제가 부활되어 Nicholas of Pelhrimov를 주교로 선출되었다. 또한 공유제 강조로 생산노동의 필요성이 등한시되자 생활 유지를 위해 약탈과 노략을 공공연히 자행함으로써 폭력화로 치달았고, 이로써 획득된 것들은 일부 사람들의 사치를 위해 쓰였다. 이렇듯 한계에 부딪침으로써 타보르파의 혁명적 사회는 1419년 말과 1420년 초의 겨울동안 일시적 성공을 거둔 것에 그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종교를 통한 혁명적 성취를 확인케 해 주는 역사적 증거이다.
III. 토마스 뮌처와 농민 난
토마스 뮌처는 천년왕국운동의 예언자로서 독일 농민들과 함께 세계를 그리스도교화함으로써 도달할 ‘新使徒敎會’(the New Apostle Church)의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지상에 그 같은 신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선민들에 의해서 신의 정의가 실현되는 신의 왕국을 추구함에 있어 뮌처는 그에 관해 묘사하는 일에 치중하기 보다는 그것의 실현을 위해 실천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뮌처가 구상했을 천년왕국에 관한 윤곽은 고문당하며 진술한 다음 기록 외에는 다른 구체적인 언급이 별로 없다.
6. 그가 소요를 일으킨 목표는 모든 기독교인을 평등하게 하는 것과 복음을 거부하는 군주 및 지주들을 죽여 없애는 것이었다.
......
8. 그들이[Allstedt] 언약의 주된 지지자들] 주장하고 실천에 옮기려고 했던 항목들: 모든 것들이 공유되고, 분배는 쓸 일이 생긴 사람에게 그 필요에 따라 주어진다. 이렇게 하기를 거부하는 군주, 공작, 지주들은 처음에는 경고를 받고, 그 다음에는 참수되어 걸리게 된다.
위의 사실로부터 몇가지 사실들을 정리할 수 있다. 뮌처의 천년왕국은 첫째, 평등사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주민은 불신자는 절대로 배제된 채 그리스도인들 만으로 구성되는 데 그들 모두는 평등한 지위를 누린다. 둘째, 그것은 공유제 사회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공유되고, 그것들은 필요에 따라 각 개인에게 분배된다. 셋째, 그것은 법적 규제 조치가 취해지는 사회였다. 그 법적 근거는 복음에 위배되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모든 행위는 신의 정의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그 주민의 구성원은 현세의 어떤 특정 계층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참여 의사가 자발적이냐 아니면 강제적이냐 하는 것은 확정할 수 없지만 어쨋든 뮌처의 천년왕국에는 현세의 여러 계층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하겠다.
지상에 건설될 신의 왕국에 관한 뮌처의 묘사는 별로 없지만 천년왕국의 세계를 실현시키기 위한 뮌처의 노력은 그의 신학사상과 생애를 통해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는 신비적 성령주의 신학을 정립하고 천년왕국주의적 실천을 감행함으로써 철저한 사회변혁을 추구하였다.
세계를 그리스도교화시키려는 뮌처의 시도는 신비적 성령주의 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사회변혁의 당위성을 주창하는 것부터 출발하였다. 뮌처는 루터파로 출발하여 개혁자의 면모를 드러내었지만 루터와는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짐으로써 독자적인 신학을 정립하였다. 그는 1520년과 1521년에 Zwickau에서 Prague를 거치면서 신비적 성령주의 신학을 형성하여 혁명신학의 골격을 갖추었다. 이러한 그의 신학은 중세적 신비적 전통을 이어받고 자신의 시대적 문제와 연관지어짐으로써 형성되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는 신을 만나는 과정으로서 내적으로 겪어야 할 고난을 강조하는 Tauler의 용어를 사용함과 동시에 Zwickau의 특수한 상황에서 환상과 꿈을 통한 직접 계시를 주장한 Storch의 입장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뮌처가 우선시한 것은 참 믿음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뮌처는 루터를 비롯한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같았다. 그러나 무엇이 참 믿음인가 하는 것에서는 뮌처는 루터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했다. 뮌처는 루터가 강조하는 성서를 통해서만 확인되는 믿음을 ‘고안된 믿음’(gedichteten Glauben)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하면서 ‘경험된 믿음’(erfahren Glauben)을 역설하였다. 뮌처에 의하면, 경험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영혼의 심연이라 할 수 있는 마음을 통해 살아있는 신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의 마음은 신의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는 데 왜냐하면 인간은 그 신의 두려움을 통해 고통을 감수할 수 있고 신은 그러한 자에게 말씀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참 믿음이란 성령의 확인을 통해 마음으로 경험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직접적인 임재를 체험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태도에서 무엇보다 뮌처가 강조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뮌처는 루터와 그의 무리들처럼 ‘달콤한 그리스도’(the Sweet Christ)를 따르지 말고 ‘쓰디쓴 그리스도’(the Bitter Christ)를 따라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십자가 고난에 대한 자발적인 참여는 순수한 종교적 결단이었지만 현실 속에서는 새로운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곧, 현실적 어려움을 오히려 참 신자가 추구해야 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고난은 뮌처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두려워 피해야 할 짐이 아니라 적대자들과의 투쟁에서 불굴의 의지를 세워나갈 수 있는 원천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뮌처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를 근거로 하여 기존 체제에 대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겪게 되는 어려움을 잘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런데 경험된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은 영혼의 심연에 성령을 받으려는 열망을 갖게 된다. 이 때 신과 인간 간의 관계가 회복되는 데, 이렇듯 모든 피조물이 신과 본질적으로 맺고 있어야 할 관계를 뮌처는 ‘내적 질서’라 일컬었다. 여기서 뮌처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내적 질서를 세속적 사회와 정부의 구조로서 이해되는 ‘외적 질서’의 변화를 일으킬 전제 조건으로 보았던 것이다. 내적 질서의 변화가 있다면 당연히 외적 질서의 변화도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경험된 믿음에 도달한 참 신자가 있다면 그들이 구성한 사회 내지 세계도 당연히 그 같은 참 믿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로써 뮌처는 세계를 완전히 그리스도교화시켜야 한다는 혁명적 발상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뮌처가 풀어야 할 신학적 과제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성령의 내적 경험을 어떻게 인간 존재의 외적이고 죄로 가득찬 현실세계를 전환시키느냐는 것이다. 이 과제에 직면하여 뮌처는 처음부터 과격한 천년왕국주의적 행동을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성급한 행동을 자제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1523년 7월 18일에 자신의 고향 Stolberg에서 소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불필요한 소동을 피하라고 충고하였다는 사실에서 뒷받침된다. 그는 세상의 종말에 관한 근시안적 기대를 갖지 말 것을 경고하며 신비주의적인 고난의 길을 택할 것을 권하였다.
뮌처 자신은 1522년 Allstedt의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먼저 한 일은 예배의식의 개혁이었다. 이 예배의식의 개혁에서 중요한 것은 종말론적 관점이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뮌처는 신자들로 하여금 예배를 통해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선민으로서의 체험을 갖게 함으로써 불신의 무리에 대한 신의 전투에 가담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신비적 체험을 더 중시한 뮌처가 정치적 의미에서의 종말론적 전투를 의도하게 된 것은 Mansfeld 백작이 종교개혁운동을 억압하려는 조치를 취하고 Mallerbach 성당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 등의 일련의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이다. 이후 뮌처는 점차 과격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자신과 신자들을 연루시켜 박해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시대가 종말선상에 있다고 느꼈다. 그동안 겪은 사건들 속에서 그는 적그리스도가 활동한다는 시대적 징표를 감지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고난 만을 기꺼이 받으려는 태도에서 천년왕국주의적 전투를 벌이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이제 시대의 종말이 눈 앞에 있는 현실에서 그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새 시대를 도래하기 위해 선택된 자로서 활약하는 것이었다.
먼저 그는 성서적 종말론의 관점을 파악하여 자기 시대에 적용하였다. 그는 Joachim of Fiore의 영향을 받아 제3시대라는 묵시의 역할에 관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뮌처는 다니엘서 2장에 나오는 신상의 꿈에 관한 해석에서 보듯이 세계의 5왕국을 종식시키는 사역이 한창 진행 중임을 확신하였다. 그는 세상의 종말과 함께 펼쳐질 새 시대는 성령의 조명으로 은사가 넘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사도들의 제자들이 죽은 이후의 세대에서 닫히게 되었지만 이제 그 가로막혔던 성령의 사역이 다시 활기차게 이루어질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이 뮌처의 생각이었다.
뮌처가 관심을 가진 종말은 역사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 내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목표한 것은 단순한 초대교회의 회복이 아니라 지상의 삶을 천상의 삶으로 역전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시대의 사회를 완전히 변화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의 계획은 뮌처가 때때로 ‘미래교회’라고도 부른 신사도교회의 건설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교회의 확장이 아니라 천년왕국이라는 새 세계의 건설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면 세계의 그리스도교화라는 신사도교회의 건설은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뮌처의 현실적 대안은 선민동맹의 창설로 나타났다. 그에게 세계의 묵시적 변화를 위한 도구로서 선민동맹은 하나의 비밀 군사결사조직이었다. 이 동맹의 참여는 성령의 부름을 인지한 사람들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지상에 신의 왕국을 세우려는 강한 욕망을 가졌던 그는 개인의 노력으로 선이 실현되고 구원을 성취할 수 있는 인간 의지의 능력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선민동맹의 모든 가담자들은 불신자들에 대해 무력으로 진압하고 악의 세계를 일소할 과업에 기꺼이 참여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믿었다.
여기에서 뮌처는 칼의 사용을 정당화하였다. 그에게 칼은 폭군에게 저항하고 불신자를 근절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칼의 사용을 정당화하였다.
나의 좋은 동역자들이여. 커다란 돌이 그리스도가 마태복음 10장에서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한 근거에 대한 합리화된 생각을 곧 산산히 부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칼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확히 이것입니다. 복음을 가로막는 악한 사람들을 一掃하는 것입니다!
이제 뮌처의 최대 관심사는 세계의 그리스도교화를 이루어갈 신의 선민을 찾아 각성시키는 일이다. 왜나하면 선민의 각성은 자연히 신사도교회의 건설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뮌처는 먼저 군주에게서 자신의 사명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미 세속적 권세를 갖고 있는 군주이야말로 종말의 시기에 올바로 칼을 사용하여 신의 뜻을 이룰 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군주들을 향해서 자신이 할 일은 궁정에서 왕에게 신의 뜻을 제대로 가르쳤던 다니엘처럼 행동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는 거짓 성직자들을 대신할 ‘새 다니엘’(the New Daniel)이란 의식을 가지고 군주들 앞에 섰다. 1524년 7월 ꡔ군주들 앞에서 행한 설교ꡕ에서 종말론적 신앙을 간결하게 표현하며 세상 종말에 따른 선민으로서의 행동을 보이라고 촉구하였다. 곧, 칼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몰아낼 것을 권고하면서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칼은 다른 선민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경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군주들은 뮌처의 지속적인 기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뮌처의 편에 서지 않았다. 군주들은 뮌처가 그렇게 반대한 날조된 신앙에 의지하는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의 말에 따랐다.
군주에게 실망을 느낀 뮌처는 그들에게서 완전히 돌아서서 평민(gemeiner Mann)에게 기대를 걸었다. 뮌처는 새 세계의 문을 열 사명을 맡은 자로서 평민을 가난한 농민(das arme dürftige volck)으로 보았다. 이들은 탐욕과 사치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최소한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한 무관심과 참 믿음에 도달할 기회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부요하고 권세있는 자들은 마지막 추수 때에 가라지처럼 베임을 당할 것이지만 평민들은 하나의 진실한 교회로서 등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평민들이 약속된 영광에 들어가기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에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짓 믿음에 빠져 있는 성직자들 때문에 올바른 믿음에 도달할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뮌처는 궁정에서 군주를 일깨우는 다니엘이 아니라 광야에서 신의 백성에게 불신자의 주장을 폭로하고 무효화시키는 세례요한이기를 원하였다. 그는 ‘새 세례요한’(the New John)으로서 거짓 신앙을 폭로하고 백성들을 종말론적 싸움으로 끌어내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뮌처를 조심하라는 루터의 경고는 뮌처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도교계를 공포에 떨게 하려는 최후의 절망적인 시도에 불과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뮌처는 농민들을 이끌고 직접 전투에 가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Allstedt에 있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편지하여 봉기할 것을 부추겼다.
당신들 가운데 신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고 그의 이름과 영광 만을 추구하는 세 명의 사람 만 있어도 당신들은 수십만의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을 향해, 저들을 향해, 저들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때가 왔습니다. 저 악행자들은 상처난 개들처럼 달리고 있습니다! 아. 형제들이여. ‧‧‧‧‧‧ 때가 너무도 절박합니다.
이러한 뮌처의 호소에 2,000명 정도 규모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교회에 대한 신의 언약을 상징하는 무지개를 그려넣은 깃발을 앞세우고 진군하였다.
뮌처가 이끄는 전투는 전적으로 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농민전쟁의 전투들과 달랐다. 물론 모든 농민들의 요구들 속에서 언제나 종교적 삶의 새로운 질서를 언급하는 조항들이 발견된다. 그들의 법적‧정치적 요구 조항들도 대부분 성서적 근거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확실히 종교개혁의 새로운 권리 주장의 틀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들의 관철과 함께 관청을 제거함으로써 신의 왕국의 도래를 성취하려는 종말론적 영역은 뮌처에게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이러한 뮌처를 따르는 Mühlhausen의 동맹군도 다른 농민군과는 달리 스스로를 신의 왕국을 이 땅에 세울 신의 군대라는 의식이 강하였다. 그들 사이에는 신이 역사 속에 직접 개입하시며 시대적 전환기가 왔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여기서 뮌처의 역할이 어떠한 것이었는가 묻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Günter Franz는 Thuringia에서의 치열한 전투들은 “토마스 뮌처 한 사람의 작업이었으며 그 땅에서 유일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Manfred Bensing은 Thuringia에서 일어난 많은 봉기들이 뮌처와는 무관하게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대립된 견해 속에서 농민전쟁에서의 뮌처의 역할이 과장되어서는 안된다는 쪽이 우세하다. 이런 판단의 근거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찾는다.
이에 관한 많지 않은 자료 가운데 뮌처의 적수인 Zeiß가 그의 사촌 형제에게 보낸 편지는 뮌처의 역할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그 편지에서 Zeiß는 뮌처의 역할에 대해 과대평가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뮌처가 두드러진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로는 주변 지역의 봉기군들이 뮌처에게 편지로 자문을 구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뮌처는 그들을 위해 중요한 자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일상적인 삶과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뮌처에게 자문과 도움을 구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뮌처의 자문 역할이 곧바로 그들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또한 뮌처가 Frankenhausen으로 출정할 때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도 그가 모든 반란군을 주도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자발적이든 아니면 강제적이든지 간에 뮌처의 동맹군에 함께 하였던 사람들이 모호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 예를 들자면, 뮌처의 지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Günther von Schwarzburg 공은 정중히 거절했으며 다른 몇 몇 공동체들도 마찬가지로 뮌처와 합류하지 않았다. 더욱이 뮌처가 크게 기대를 걸었던 광부들 조차도 한 달 전에 루터를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뮌처의 징집 요구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거절하였다. 이처럼 뮌처는 자기 주변에서 사람들이 떨어져 나감으로 해서 외로운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농민의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한 뮌처가 농민전쟁을 주도하였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지원 요청이 거절당하는 상황에서 뮌처는 더욱 불리한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그동안 농민들의 봉기가 관청에 대한 신의 경고라고 생각하여 소극적인 행동을 취하던 선제후 Friderick이 죽자 그 뒤를 이은 요한 공은 Hesse의 Philip을 비롯한 다른 군주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이에 맞서 농민들이 무장하여 대치하고 있었으나 사실 그들은 병력과 화기 등의 전력 면에서 군주들의 연합군에 비교될 수 없었다. 필립은 무조건 항복하고 지휘관들을 인질로 보낸다면 당국에 건의해서 자비를 베풀겠다고 제안하였다. 일부 시민은 그 제안에 응하고자 하였으나 뮌처는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세상의 종말을 고하게 하는 최후의 전투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뮌처는 Frankenhausen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전투 전에 뮌처가 설교하였을 때 무지개가 나타나자 그것을 신의 언약이라 믿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실제 전투에 임한 농민군은 대포가 쏱아지는 그 순간에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성령이여 오소서’라는 찬송만을 불렀다. 대포를 피해 달아나는 자들은 기병들에게 학살되었다. 이렇게 하여 군주들의 군대는 불과 6명의 전사가가 나는 정도였으나 농민군은 5,000명 가량 죽었다.
살육현장에 살아남은 뮌처는 어느 집으로 숨어 병자처럼 위장하였으나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뮌처는 자신의 계획이 좌절되었음을 인정하였다. 그는 실패의 원인을 대다수 봉기군들이 이 전투의 신학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익 만을 구한 것에서 찾았다.
IV. 결어
지금까지 천년왕국운동을 통해 종교가 반란과 혁명에 적극적인 요소로 작용한 사실을 검토해 보았다. 천년왕국신앙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반란 혹은 혁명과 연결된다. 첫째,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전에 있을 대파국의 시대에 대한 천년왕국주의자들의 인식이다. 이런 인식 속에서 천년왕국주의자들은 시대의 종말선상에서 재앙과 최후의 전투에 적극 대처한다. 재앙을 직면해서 그들은 사회적‧정치적 질서의 안정성을 깨뜨리는 일을 당연시한다. 악의 세력과의 大決戰에서 그들은 타협이나 관용의 여지를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 투쟁의 강도를 더욱 높인다. 이로써 그들은 단순한 개선이나 개혁이 아닌 근본적인 변혁을 초래시킨다. 이러한 결과는 천년왕국운동의 특성상 완전한 구원을 약속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최상의 노력을 하게 만들고, 단기간에 소정의 성과를 거두게 하는 데 따른 것이다. 이 같은 성과는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란 점에서 혁명성을 띤다.
둘째,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는 천년왕국신앙의 기능이다. 천년왕국주의자들이 지닌 특징 중 하나가 현 세계의 멸망이 임박해 있고 이어서 새 시대, 새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망은 가난과 억압의 현실에서 고통받는 하층민들을 결속시켜 기존의 사회질서와 체제를 부정하게 만들고 그와 동시에 새로운 혁명적 사회의 건설에 참여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천년왕국신앙은 합리적 이데올로기가 없던 전 산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였음이 밝혀진다.
이처럼 천년왕국운동이 반란과 혁명을 일으키는 원천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지닌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근대 혁명운동과 비교할 때 분명해 진다. 舊 사회가 新 사회로 대체되는 것에 촛점을 맞추어 생각해보면, 근대 혁명운동에서 구 지배층은 자신의 지위를 내어놓고 몰락하고 반대로 혁명집단은 그 지위를 이어받아 대변혁을 위한 많은 일들을 수행한다. 이 때 혁명 지도자들의 조직적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며 조직의 원칙이나 전략전술 등도 더욱 가다듬어진다.
이에 비해 천년왕국운동은 천년왕국의 실현을 신의 섭리에 의에 주어지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근대 혁명운동에서 발견되는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다. 따라서 천년왕국운동에서 대중의 혁명적 활동이란 천년왕국의 도래를 위한 준비이거나 현 세계를 벗어나 새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정화작업에 불과하다. 이들의 조직은 그 형태와 결속력에 있어 근대 이전의 그 어떤 반란의 조직 보다 뛰어났다 할지라도 그것은 근대 혁명조직처럼 각성된 의식과 체계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런 까닭에 대부분의 천년왕국운동은 단명에 그치고 만다.
천년왕국운동의 가치에 관해서 상반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사회 주변부의 쇠락한 집단에 의해 받아들여져서 운동의 정형성을 갖추지 못한 채 비현실적 목표 만을 추구하며 지속적인 사회적 결과도 이룩해 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별로 가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근대적 정치의식과 조직의 선구였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긍정적인 면도 많다. 비록 그것이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지만 새로이 부상하는 집단에 의해 주도되어서 실제적 변화를 일으키며 나아가 전체 사회에 일정한 영향을 남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근대는 물론 그 이전의 유럽사회에서 일어난 민족해방운동과 사회해방운동에서 천년왕국주의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처럼 관점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 있는 천년왕국운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천년왕국운동 그 자체가 지닌 독특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천년왕국운동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독특한 역사적 현상으로 고래로부터 존속해 왔다는 사실이 적절히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천년왕국운동을 그리스도교의 변형된 종말론이라는 교리적 관점에서만 평가한다든지 혹은 전 정치적인 원초적 반란의 원형이라는 비교적 관점에서만 평가한다면 그것은 그 운동이 지닌 개별적 역사성을 적당하게 다루었다고 볼 수 없다. 그동안 다른 종교운동과의 관계나 비종교적인 근대 혁명운동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서 비교분석적 접근이 많이 이루어졌으나 이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천년왕국운동의 개별성과 독자성을 파악하기 위한 역사적 접근이 매우 절실히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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