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에 관한 신학적인 접근방법
악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전에
먼저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간다.
A. 하나님은 그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의 계획은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 결정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대로 결정하신다.
B. 영원한 계획
하나님의 계획은 시간과 공간속에서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속에서 결정하신 것이다.
C. 불변성
하나님의 계획은 변하지 않고 신실하게 이루어가신다.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해서 불변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비인격적인 부동체 같은 하나님이 아닌 신실하신 하나님을 나타낸다.
D. 주권적 계획
첫 번째 항목은 포괄적으로, 네 번째 항목은 구원에 관한 문제를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은 인간의 공로, 즉 인간의 신앙 상태, 인간의 업적 등 인간의 노력의 결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
알미니안주의의 예지와 예정의 관계는 예지 앞선다. 하지만 칼빈주의의 예지와 예정의 관계는 예정이 앞선다.
E. 인간의 인격성을 배제하지 않는 주권성
그렇다면 인간은 로봇과 같은가? 이것은 알미니안 주의가 칼빈주의에게 하는 질문이다.
칼빈주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성경에 근거하는 것이며, 인간의 인격적인 결정과 활동을 억압하는 것이
아닌 포함하는 주권이다.
실제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 논리적으로만 생각하면 이 둘은 충돌한다.
그런데 현실의 삶과 성경의 문맥에서 볼 때 이 두가지가 충돌하지 않고 함께 조화를 이룬다.
창45:5-8 쉬운 예로 요셉의 이야기가 그렇다.
되려 논리적인 사람은 오히려 이런 문제에 대해서 길을 잃기 쉽다.
연약한 인간의 논리를 들어서 말하자면
논리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나, 우리는 인간적인 사고에 의한 유한적인 논리성을 따져야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선된다.
신자는 성경이 말하는 논리를 따라가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부분에서는 논리를 추구하며 자신이 원하는 부분에는 논리를 제하며
마음대로 해석하면, 오히려 논리는 커녕 하나도 말이 되지 않는 오병이어는 인정하면서도, 삼위일체는 인정하면서도
성경의 예정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모순, 곧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F.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뜻하신 바대로 효과적으로 성취된다.
G. 예정의 목적
엡1:4-6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H. 전포괄적 성격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범주 바깥에 있는 것은 없다. 이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악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역사에서 발생하는 악의 문제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인가?
악에 대해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고 한계가 있으나
1. 먼저 가장 중요한 정통적인 신학에서는 "허용적 작정"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악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다.
허용적 작정이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악한 일을 원인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허용하신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악한 일을 행한 것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그 사람이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신 것에 불과하다.
2. 칼빈주의자 중에서 고든 클락은 이 해석을 동의하지 않는다.
고든 클락은 악의 문제도 하나님 주권 안에서 벌어진 것이며 주권을 약화시켜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주권의 일관성을 주장한다.
고든 클락은 하나님은 인간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라는 개념으로 접근한다. 즉 하나님은 창조주의 차원이고 인간은 피조물의 차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법의 제정자이시고, 집행자이시며 인간은 법이 집행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방식대로 하나님에게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둑질하지 말라는 법은 하나님에게 적용할 수 없다. 하나님은 법 위에 계신분이다.
1번은 죄의 원인자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한 의도와 해석이 들어있다.
2번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해도 하나님은 죄의 원인자가 아니시다는 의도와 해석이 들어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둘 다 부족한 점이 있다.
악에 대해 접근하는 방법으로 3가지를 다루어본다.
1. 하나님의 전능성을 거부함으로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한주의(이단)
2. 하나님의 선하심을 조정함으로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정통 견해에 속하나 한계존재)
3. 악이라는 것이 실제가 아니라는 환상이라는 접근(이단)
하나씩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1. 하나님의 전능성을 유한주의로 보는 것이다. 절대적 유신론이 아닌 유한한 하나님으로 본다.
악의 절대자와 선의 절대자가 있다. 마니교처럼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진다. *마니교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
악을 2종류로 나눈다.
무리수적인 악(끝끝내 악한 상태로 남아 있는 상태, 하나님도 통제 불가능한 악의 실제가 있다고 말한다.)
유리수적인 악(지금은 악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선이다. 말하자면 도구적인 악이다.
역사속에서 선한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도구.
평가 : 이 관점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거부한다. 전능성을 거부하며 악의 문제를 극복하려 한다.
악의 문제를 설명하고 있지만 결국 악을 극복하지는 못한다. 악의 절대자의 힘이 하나님의 통제 밖에 있다.
궁극적으로 선이 승리한다는 보장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지 선의 영역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결과적으로 선의 일을 했던 사람이 피해를 보게 된다.
그리고 만약에 무리수적인 악이 하나님의 본성 안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문제가 생긴다.
과연 그런 하나님이 선하냐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악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성경은 말하고 있다. 악에 대해 아예 말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으나
하나님이 악에 대해 승리한다는 것에 대해 놓치는 것도 비성경적이다.
a. 악의 존재를 설명할 뿐,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b. 하나님의 선하심에도 문제가 발생된다.
c.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배제하는 것도 문제다.
2. 하나님의 선하심을 새롭게 접근하는 것. 선하심을 조정한다. 고든클락의 관점.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고든클락의 관점과 연결된다.
전에도 이야기 했듯이 전통신학은 악의 문제를 빗겨가기 위해 허용적 의지를 이야기 했다.
교훈적 의지가 있지만, 작정적 의지 중에는 허용적 의지가 있다. 악의 문제에 있어서 그렇게 하셨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고든클락은 반박한다. 왜 거기서에서는 하나님이 한 발 빼시냐?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왜 강조되지 않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이 죄의 원인자라고 얘기 해야하지 않느냐? 죄를 야기시킨 하나님이 원인자가 되지 않느냐?
라는 질문에
고든클락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섭리하신 것도 맞고,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궁극적인 원인자가 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직접적인 원인자는 사람이라고 본다. 죄를 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죄를 범했다.
요셉의 형들, 애굽 상인에게 팔고 나쁜 일을 했다. 나쁜 일은 형이, 섭리는 하나님이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의 원인자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나쁜 일을 한 직접적인 원인자는 요셉의 형들이다.
클락의 주장을 조금 더 들어가보면 하나님은 다른 차원에 계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 자신이 의에 궁극적인 기준이다. 하나님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더 궁극적인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온 우주에서 유일하게 영원한 절대자가 되신다. 하나님이 그 율법 안에 계신 분이 아니다.(살인의 십자가 사건)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의로운 일이다.
인간과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 얘기 되어지는 거하고 하나님과 인간과 얘기 되어지는 방식은 다르다.
능력의 차원에서 다르다. 하나님은 온 만물의 창조자이기에 만물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계신분이다.
어느누구도 하나님을 처벌할 존재가 없다. 법의 적용의 측면에서도 얘기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부과하신 법, 즉 율법의 내용이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방식하고 하나님에게 적용하는 방식은 다르다.
달라야 한다. 하나님은 다른 차원 계신 절대자이기 때문에.
도적질 하지 말라는 게 있다. 인간은 도적질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에게는 도적질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그 개념이 적용이 안된다.
그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때, 율법이라든지 모든 내용들이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과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것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될 수 없다.
역대하 18장 20절 이하에 보면 선지자로 하여금 거짓말하게 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죄와 무관하다라고 하는 진술하고 조화할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거룩하신 분이라고 해야한다. 통치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클락의 논리를 3단 논법으로 정의해볼 수 있다.
1. 이 세상에 발생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발생한다.
2. 하나님에 의해 야기된 모든 것은 선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3. 발생하는 모든 것은 선한 것이다.
무리수적인 악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클락의 관점은 하나님의 주권을 일관되게 강조하려고 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성경적이긴 하지만... 클락의 주장에도 약간의 부족한 점이 있다.
평가
a. 하나님의 선하심의 개념이 모호해진다. - 명목론적 오류
b. 하나님의 의지가 임의적(arbitrary)이 될 수 있다.
c. 선과 악의 기준이 “해명할 의무”의 유무에 의해 결정된다는 인상을 준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개념이 모호해진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이 선한 것이다. 의로운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하나님은 도적질을 해도 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건데,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미가 무엇이냐?"
라고 질문할 수 있다.
클락의 주장을 일관성있게 밀어 붙인다고 하면, 그런 원리를 강조한다고 하면
도덕성의 개념이 애매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선한 것이냐?
하나님에게는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인데
그러면 실제적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선하다고 말할 때 의미가 뭐냐?
우리는 도적질 안하는게 선한건데 클락의 주장에 의하면 그 개념이 애매해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식에 관한 성격을 이야기할때 일의적관계, 다의적관계 얘기를 했다.
하나님의 지식과 우리의 지식이 유비적 관계이다.
하나님의 지식과 우리의 지식과 동일하다고 말하면 일의적 관계가 되고 범신론적인 오류에 떨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지식과 우리의 지식이 다의적 관계라고 말하면 불가지론에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클락의 주장의 허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관계에 대해, 다의적인 관계에서 이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가능성이 있게 된다.
불가지론에 떨어진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는 우리는 모르게 되는 것이다. (100%는)
선하심이 무엇이냐? 애매해진다. 하나님은 다르게 적용해야 되니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의 의미에 대해서 명목론적 오류를 범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포인트.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실체가 있다기 보다, 선하심이라고 이름 붙인것에 불과하다고 보게 된다.
선하심이 실제하는지에 대해서 모호해진다.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와 일치되는 것이, 임의로 얘기 될 수 있는건지
어떤때는 도적질해도 괜찮은건지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이 선하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가 선한 건데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냐? 라는 것을 질문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클락에 설명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는 ‘임의적’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의지적인 결정에 의해서 선하심은 왔다갔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객관적인 선하심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 명목론적인 설명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논란의 부분이 있긴 합니다만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의미를 명목론적으로 얘기할 것인가?
하나님의 선하심이 실제로 있다라고 말해야하는가?
만약에 하나님의 선하심의 원리가 실제로 영원한 실체로 있다라고 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구속하는 선하심의 영원한 원리에 의해서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님의 존재보다 더 궁극적인 원리로 선하심을 얘기하게 되는거에요. 그것도 문제가 된다.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의지 그 2가지 중 어느 것이 더 궁극적인 것인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로 선하심까지도 통제할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영원한 실제적인 원리가 있다 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속성의 단일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선하심은 2가지가 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존재 안에 있다라고 봐야 한다.
어느 하나가 더 궁극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선하심의 원리가 하나님을 통제해서도 안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가 선하심을 좌지우지 해도 안되고
그 2가지가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하나다. 이런 식의 설명을 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
마치 삼위일체를 얘기할 때처럼. 1과 3 둘 다 궁극적이 되는 것으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3. 악은 실체가 아니다. 악은 환상이다. 착각이라는 접근. 악의 실체를 부인하는 접근법이다.
범신론적 일원론이다. 이 세상이 하나의 실체라고 보는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 안에 피조된 모든 존재하는 세계도 선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 모든 우주 만물은 필연적인 유출의 결과(나무, 돌-신성이 있다고 주장)라고 보는 것이 범신론이다.
크리스찬 사이언스 이단는 이와 같은 관점으로 설명한다. 악은 실체가 아니고, 우리의 감각이 야기시킨 환상이다.
이 이론이 가장 빈약하고 비현실적이다. 악의 현실을 나름대로는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추방시키지 못한다.
악의 현실이 우리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 환상이라고 얘기할 뿐이다.
환상이라고 명명할지는 모르지만, 그렇다면 환상의 실체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줘야 한다.
그러나 너무나 빈약한 이론이다.
환상이 되던 실체가 되던 우리는 겪고 산다. 실제적인 삶과 맞지 않는다. 적용도 되지 않는다. 성경적인 근거도 없다.
크리스찬 사이언스를 비판하는 한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악이 환상이라고 말하는 이단자를 기차가 달려오는 철길에 세워 놓아보아라. 조금 지나서 고통이 실제 한다는 것을 고백할 것이다."
ㄱ. 범신론적 일원론 (monism)
ㄴ. 크리스챤 사이언스 이단
a. 관념론적 형이상학
b. 악은 실체가 아니고, 물질적 감각이 야기시킨 신념, 환상일 뿐이다.
평가
a. 악의 현실을 실제로 추방시키지 못한다.
b. 환상의 실체도 해명되어야 한다.
c. 현실과도 맞지 않는 이론이다.
결론
사실 각각의 이론이 문제를 가진다.
하나의 원리를 가지고 설명한다기보다도, 성경이 말하는 여러 가지 관점을 종합적으로 살펴 봐야한다.
함께 고려하는 이해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총체적.
그래도 2번째 설명이 성경과 근접하다고 볼 수는 있지만 그래도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종합적으로 봐야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인간의 창조의 내용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인간을 로봇처럼 창조했다하면 모르지만
하나님이 정말 참된 인간,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한다면, 인격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은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로봇이라고 하는 존재라면 죄를 안짓도록 만들었겠지만 인격적인 존재로 만들었기에 의지의 자유가 있다.
인간은 순종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거부할 수도 있다고 하면은 고지점에서 고통이 찾아오게 된다.
인간 창조의 필연적인 부산물로서의 악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선과 악에 대한 오해들이 있다.
일반적인 오해들이 뭐냐면, 오늘날의 현대 사상 속에 실용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이해가 있다.
내가 당장 지금 고통스럽고 힘들면 악이에요. 나를 좀 편하게 해주고 지금 당장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선이다.
실용주의, 개인주의적인 접근을 하는 경향이 많다.
성경에서 보면 시간의 차원을 고려 해야되고 하나님의 섭리의 차원을 고려해야한다.
성경에 근거한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1. 지금 당장은 고통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선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유리수적인 악과 같은 개념)
우리는 이런 관점으로 악의 문제를 이야기 해야하는 한계를 지닌 것은 어쩔 수 없다.
- 인간 창조의 필연적인 부산물로서의 악이다.
- 선과 악에 개념에 대한 재평가
a. 하나님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b. 시간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c. 나쁜 영향의 범위도 고려해야
2. 일반적인 죄에 관한 설명, 오늘날 인류가 겪는 많은 해악들은 고통들은 아담의 원죄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죄성의 결과다.
- 일반적인 해악들은 온 인류의 일반적인 죄성의 결과이다.
3. 일반적인 죄성의 결과 말고 오늘날 내가 잘못 살아서 겪는 고통과 괴로움의 부분이 있다.
음주운전하다가 교통사고 내가 다리가 부러졌는데, 하나님은 선하지가 않다라고 말해선 안된다.
어떤 구체적인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야기된 것이다.
- 특정의 구체적인 해악들은 특정한 죄의 결과들이다.
4.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악을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선의 승리로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예수이고 구속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안에서 궁극적으로 선의 승리로 인도하신다.
5. 억울한 일도 아무도 몰라주는 일도 당하지만 성경은 죽음 후에 하나님의 종말에 “완벽한 심판”이 있다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신다. 그냥 심판이 아니라 “완벽한 심판”
- 죽음 후에 완벽한 심판의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6. 현대복음주의자들은 지옥이 없다고도 하지만, 이 땅에 살 때에 "예수 믿어라" 전도하고 권면했는데
그들의 답변은 "그냥 내버려두라" 말했다. 결국 지옥이라는 것은 "그들이 요구했던 것을 들어주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그냥 살아가도록 했다" 라고 성경이 가르쳤다는 것이다.
- 지옥의 문제
[출처] 악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접근방법|작성자 G각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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