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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 귀용과 프랑소아 페넬롱

하나님아들 2020. 4. 8. 09:30

잔느 귀용과 프랑소아 페넬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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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소아 페넬롱-그는 누구인가?

 

1651년도 프랑스 남부 샤르롯 페리고르에 위치한 페넬롱 성에서 태어난 프랑소아 페넬롱은 어린 시절부터 신앙의 길에 열심을 냈으며, 12세에 카오르대학에 그리고 이어 파리 플래시스 대학에 들어가 15세에 첫 번째 설교를 하고 성 쉴피스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675년도 24세의 나이로 예수회의 사제가 된 페넬롱은 3년간 성 쉴피스 본당에서 사목하며 성도들의 사랑을 받았다. 루이 14세 왕으로부터 프와투에서 사역하도록 허락을 받는 중 페넬롱은 잔느 귀용에 대해 소문을 듣는다.

 

그가 들은 잔느 귀용은“스위스와 사보이, 프랑스에서 자발적으로 사역을 하는 미망인으로 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페넬롱은 잔느 귀용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포기할 수 없게 된다.

 

1688년 37세의 페넬롱은 프와투에서 3 년간의 임무 수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귀용 부인의 고향인 몽타르지를 지나오게 되었고, 가능한 한 조심스럽게 귀용 부인에 대해 알아본다.

 

샬로스트의 공작부인을 통해 귀용 부인과 페넬롱 신부의 접촉이 처음으로 벤느의 공작부인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호기심 많은 신부 페넬롱은 귀용 부인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낯설지 않았다. 그녀의 독특한 영적 체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복종에 대해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이 두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공통된 점이 있었다. 둘 다 극도로 부유한 상류층 출신이며, 고위계층에 속해 왕정에 잘 알려져 있으며, 두 사람 모두 이해력이 뛰어나고 지성적일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을 알고 그 뜻을 행하고 싶은 열망이 모두 매우 강했다는 사실이다.

 

친절한 언행방식과 예민한 심성 매력적인 정열로 쟁쟁한 미래를 지닌 페넬롱 신부는 키가 크고 균형이 잘 잡힌 체구에 코가 크고 깊은 눈을 한 사람이었다.

 

귀용 부인과 페넬롱 신부와의 만남이 비극적인 종말을 품은 채 그 관계가 시작되리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다. 후에 많은 무죄한 그리스도인들이 귀용 부인과 만났다는 이유로 투옥되고 몇 년씩이나 박해를 견디어야 하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첫 만남부터 두 사람은 성경에 대해 토론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내적 체험, 정결한 사랑, 성령의 역사, 기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페넬롱 신부는 귀용 부인이 지닌 성경적 지식과 영적인 통찰력에 감명을 받고 다음날 다시 만났다.

 

페넬롱 신부는 귀용 부인의 견해가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였고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면서 자신이 그토록 목말라하던 깊은 영적생명의 체험을 하기 시작하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맡기면서 그의 전 생애는 갑자기 변한다. 세상적인 욕망이나 개인적인 야망이 즉시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과 목적에 사로잡혀 버린다.

 

이제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믿음을 지키기로 결심한 페넬롱 신부는 더 이상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규정한 교황의 교리가 자신의 믿음의 원리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귀용 부인을 처음 만난 날부터 페넬롱 신부는 자아(혼)의 죽음에 대한 지식의 제1인자가 된다.

 

페넬롱 신부와 귀용 부인은 2년 동안 딸과 사위, 보의 공작 니콜라스 푸케의 새 집에 자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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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2년 44세의 귀용 부인은 푸케가를 떠나 파리에서 조촐한 집을 한 채 빌렸고 이로 인해 루이 14세 왕정의 부인들과 우정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며 왕정의 공식석상에서 페넬롱 신부를 여러 번 만난다.

 

귀용 부인이 만난 사람 중 한 사람은 맹트농 부인인데 그녀는 1683년 왕의 부인인 마리아 테레사가 죽은 후 비밀리에 루이 14세와 결혼하였고 프랑스의 절대군주인 그를 왕좌 뒤에서 사로잡아 실세를 갖고 있었지만 왕의 총애와 돈 권력에도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맹트농 부인은 귀용 부인과의 만남을 갖고 베르사이유의 궁전으로 초대를 받아 구세주의 사랑과 죄의 용서, 타락한 본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 여러 성경의 진리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으로 자신의 혼에 죄 사함의 지식을 나누어받은 맹트농 부인의 내면에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싹이 튼다.

 

1686년 맹트농 부인은 국가공무원이나 사상자의 딸들에게 교육 원조를 하기 위해 성시리스 수도원 학교를 설립하고 25세 미만의 250명가량 되는 소녀들이 이 학교 기숙사에 수용되었고 귀용 부인은 이곳에서 영적인 문제에 대해 소녀들과 상담을 하는 일을 주로 맡았으며 그 결과 대 부흥의 역사가 성 시리스 수도원에서 일어난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맹세한 소녀들은 다른 사람에게 주님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자기들의 생활이 갑자기 보다 낫게 변했는지 간증을 했다.

 

이제 이 부흥에 대해 다른 지역에도 그 소식이 전해진다. 사람들은 제스나 토넌, 그르노블에서처럼 귀용 부인에게 찾아왔고 그녀는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 귀용 부인은 건강이 나빴지만 영적 지도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함께 기도하는 일에 전념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의사가 불치의 병이라 선언한 것을 기적적으로 딛고 건강하게 된다. 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내적인 평화를 얻은 사람들도 있었고 영적 부흥의 역사는 계속 일어난다.

 

하나님의 축복의 넘침 뒤에 귀용 부인의 적들이 나타나 거짓말과 나쁜 소문, 거짓된 비난을 빠른 속도로 퍼뜨리고 이미 행해진 선행들을 뒤엎으려고 애썼다. 그 결과 주교는 그녀에게 성 시리스 수도원 학교에서 일을 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귀용 부인의 책 <짧고 쉽게 기도하는 법>이 신앙적 부흥을 일으켰고 이교도적 특성이 발생한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 사제와 신학 교수들은 가능한 한 빨리 이교도적 요소를 없애려고 애썼고 그 책을 300권 쯤 수집하여 대중 앞에서 불을 지른다.

 

그러한 조처도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도록 많은 혼들을 돕고 싶은 귀용 부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그녀가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은 그녀를 만나러 모여들었다. 여기저기서 영적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녀의 의붓오빠와 제네바의 다랑톤 주교 등이 그녀에 대해 계략을 꾸몄고 예수회 신부들은 그녀의 일거일동을 당국에 보고하면서 그녀의 이교도적인 행위와 영향을 조사할 것을 주장한다.

 

고소를 당한 귀용 부인은 로마 카톨릭 믿음의 가장 열성적인 수호자인 모(Meaux)의 주교인 자크 베니뉴 보쉬에의 책상 앞에 서게 된다.

 

1693년 9월 보쉬에 주교는 45세의 귀용 부인을 방문하고, 1694년 1월 두 번째 만난다. 1694년 8월 귀용 부인을 진단할 위원회가 조사를 시작하였고 맹트농 부인과 다른 영향력 있는 친구들이 루이 14세 왕에게 그녀를 위한 탄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한다.

 

귀용 부인은 이 탄원서를 읽고 말한다. “이 서류를 쓴 여러분들의 친절함에 감사하지만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저는 인간의 무기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가 두렵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지혜로 제게 적합하게 부과하신 멍에를 너무 쉽게 벗어버리는 것이 아닌지 두렵습니다.”

 

귀용 부인은 그들에게 이 문제에 있어 자기를 위해서 간섭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의 손 안에 자기의 운명을 맡기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의 견해가 교회가 승인한 작가들의 의견과 일치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녀는 자기의 견해와 비슷한 사람들의 인용문을 열심히 수집하면서 50일을 지낸다. 긴 제목의 논문“귀용 부인의 교리의 정당성”(Justifications of the Doctrine of Madame Guyon)은 그리스와 라틴의 교부들, 성 디오니시우스, 성 베르나르, 요한 클리마쿠스, 제노아의 카트린느, 십자가의 요한, 성녀 테레사, 앙리 수소, 토마스 아 켐피스, 제르슨, 뤼스부르크, 타울레, S 삼슨의 요한, 아르피우스, 블로시움, 뤼 드 몽토야로부터 인용한 것이었다. 만일 보쉬에 주교가 다른 위원들이 이 논문을 읽도록 허락했다면 틀림없이 저울은 그녀 쪽으로 기울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보쉬에 주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1695년 3월 10일 위원회의 임무는 완수됐다. 그들은 그녀의 30개의 명제를 들어 분명히 교리적으로 오류라고 정죄하였다. 그녀의 작품은 교회에 받아들여질 수 없고 바로 이교도에 가깝다고 선언되었다.

 

약 한 달 후에 귀용 부인은 철회할 것에 사인했다. 하지만 오류를 인정하는 사인은 거부했다.

 

귀용부인과 그녀의 하녀는 1695년 12월 31일부터 정치적인 죄수로서의 인생을 공식적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파리 근처 빈센느 밀림에 위치한 군용 국립감옥 빈센느 성에 갇힌다.

 

하지만 감옥의 끊임없는 감시 하에서도 귀용 부인과 하녀, 이 두 여인들의 생명 속에 있는 빛나는 구원의 기쁨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들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냈고 하녀 라 고티에르 양은 귀용 부인이 작곡한 노래를 아주 빠르게 암기하곤 했다.

 

“우리는 둘 다 당신의 찬미가를 부릅니다. 오 나의 하나님! 이 감옥의 돌들이 제 눈에는 루비처럼 보입니다. 저는 이 돌들이 공허한 세상의 모든 보석보다도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가슴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가장 무거운 십자가 가운데서 또한 당신이 주신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1696년 8월 28일 파리 근교의 작은 도시의 다른 감옥을 비밀리에 호송된 귀용 부인은 이곳에서 필기할 종이와 나무 펜, 매연을 물과 섞어 만든 잉크를 지닐 수 있게 된다. 귀용 부인은 긴 편지도 쓰고 성경주석을 손볼 수 있게 되며 왕의 영적 지도자였던 라 쉐즈 신부를 비롯한 고위층 사람과 서신연락을 취하게 된다.

 

귀용 부인은 성령의 능력으로 수녀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영적 교제를 통해 보다 커다란 만족을 찾게 하는 영감을 주기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파리의 대주교가 귀용부인이 그곳에서 얼마나 수녀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하나님께서 감옥 안에서 일하고 거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셨는지 소식을 듣자마자 귀용 부인의 활동을 즉시 멈추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조급해했고, 1696년에서 1697년간 귀용 부인은 모든 활동에 제재를 받게 되며 영적지도자의 허락서를 받지 않고서는 방문도 허락되지 않게 되며 귀용 부인의 책은 대중적으로 불태우도록 명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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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귀용 부인과 오랫동안 우정을 나눠오고 그녀의 가장 경건한 친구 중의 하나이며 최근 대주교로 임명된 캉브라이의 프랑스와 페넬롱 대주교가 “귀용 부인같이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처 입은 사람에게 그렇게 격렬한 공격을 할 수 없지 않느냐”며 귀용 부인을 변호하기 위해 일어선다.

 

보쉬에 주교와 페넬롱 대주교는 웅변술과 강력한 연설자로 쌍벽을 이루는 설교단의 거장들이었다. 귀용 부인의 작품이 내포한 ‘변칙적인 교리’를 공격하는 보쉬에 주교는 그를 통해 교황의 총애를 받으려고 발버둥치는 루이 14세 왕의 총애를 자신이 받으리라 확신했다. 이 두 거장들은 논쟁을 벌였고 국론은 둘로 갈라졌다.

 

보쉬에 주교는 귀용 부인의 <짧고 쉽게 기도하는 법>을 정죄하고 실추시키고자 <기도상태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연구서를 쓰고 페넬롱 대주교의 동의를 얻으려 했다.

 

페넬롱 대주교는 귀용 부인에 대해 중상모략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책을 동의하는 것이 양심에 꺼려진다고 분명히 밝힌다. 또한 페넬롱 대주교는 귀용 부인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자신의 저서 <성인들의 금언>에서 내적인 체험에 대한 견해가 로마 카톨리시즘에 전혀 낯선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십자가의 요한이나 성 프란시스, 알바레즈 신부, 토마스 아퀴나스, 성 베르나르 등을 포함한 가장 영적인 거장들 역시 귀용 부인이 믿은대로 <자아의 십자가에 못 박힘과, 정결한 사랑, 성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내적인 생명>을 믿고 또 가르쳤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논문이 출판되자 모두 놀라 시선이 이 뛰어난 대주교에게 향해진다. 언쟁이 진전되자 정치적인 입장이 개입되어 페넬롱 대주교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어난다.

 

왕에게 보낸 보쉬에 주교의 편지가 6일 후에 교황 인노센트 12세의 손 안에 들어갔고 페넬롱 대주교는 왕정에서의 직위를 잃는다. 그는 베르사이유의 궁정을 즉시 떠나 자기의 교구지역인 캉브라이 안에만 머물라는 명령을 받고 명령이 떨어진지 24시간 안에 길을 떠난다. 이 사건으로 페넬롱 주교는 궁정을 떠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다.

 

1697년 12월 46세의 페넬롱 대주교는 샹트락 원장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는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기만 하면 다시 왕정으로 되돌아갈 수 있지만 그렇게 머리를 굽히고 싶지 않다고 밝힌다.

 

52번이 넘는 회의를 거친 후 오랜 숙고 결과 1699년 3월 12일 <성도들의 금언> 중 23 개의 명제가 유죄성이 있는 것으로 선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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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8년 9월 50세가 된 귀용 부인과 하녀 라 고티에르 양은 비밀리에 바스티유 감옥으로 옮겨진다.

 

바스티유는 거의 12내지 13피트(3.5m에서 4m) 두께의 돌담으로 연결된 80피트(24m, 약 10층 건물 높이)의 탑과 4층의 높은 건물들로 되어 있었고, 각각의 탑 밑에는 지하 감옥이 있었다. 이 지하 감옥은 거의 깜깜하였고 겨우 작은 창문 하나뿐이어서 통풍도 잘 안되었다.

 

3인치나 되는 두꺼운 문은 두 겹의 오우크 판자로 만들어졌고, 자물쇠와 두꺼운 쇠살을 채워놓았다. 바닥은 거친 돌이 깔려 있고, 각 방마다 밀짚 침대보다 더 작은 침대 하나, 담요 한 장, 나무로 된 테이블, 의자 혹은 걸상, 세면대, 흙으로 빚어진 주전자, 변기단지, 촛대, 밀짚 빗자루...잔혹한 파리의 겨울에도 난로나 화로 없이 부싯깃 통만 있었다. 싸늘한 냉기가 사람의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

 

귀용 부인이 한때 익숙하게 지냈던 우아함과는 너무나 다른 환경이었다. 약하고 병들고 지친 그녀는 어둠 속에서 밀짚 위에 몸을 누인 채 잠을 청했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불쾌한 냄새, 빈대와 이, 거미와 쥐만이 유일한 친구였다.

 

앞뜰의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부패한 연못과 하수구에서는 썩은 위치가 올라왔다. 아무런 위생시설도 없고 통풍도 안되므로 물은 부패하고 썩었으며 음식도 상해서 갖가지 질병, 열병이나 메스꺼움, 설사, 벌레물림, 뾰루지, 종기 등으로 고통을 겪는 것은 당연했다. 음식은 보통 곰팡내가 나는 빵과 야채, 얼은 고기 조각이었다. 음식을 먹으려면 손가락을 버켓에 집어넣어야 했고 무엇이든 음식이 남으면 저장소에 도로 넣고 다음시간까지 보관을 했다. 무기력함과 권태 불경건함 등 그곳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은 그런 적과 싸워야 했다.

 

귀용 부인은 계속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데 마음을 쏟았고, 사도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했던 것처럼 찬미와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또 자기 원수들의 혼을 위해서 그리고 한 번도 만날 기회가 없는 다른 죄수들의 혼을 위해 기도하면서 여러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고난을 견디지 못한 하녀 라 고티에르 양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귀용 부인과 함께 머물라고 명하셨다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라 고티에르 양은 이 하나님의 여인 귀용 부인을 만난 것이 축복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귀용 부인의 극한 고난과 어려움까지 함께 나눌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국가 당국이 극한 위협까지 하고 교회 담당자들도 귀용 부인을 반대하는 말만 하면 절대적인 보장을 해주겠다고 아무리 설득을 해도 라 고티에르 양은 귀용 부인을 마음으로라도 배반해 본적이 없었다.

 

라 고티에르 양은 한 번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귀용 부인은 ‘자아의 부인’과 ‘옛 자아의 죽음’,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에 관한 위대한 가르침을 내게 주었어. 나는 부인이 보여주었던 그 참을성 있는 근면함과 신앙, 내게 부어주었던 그 거룩한 사랑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야...귀용 부인이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부인을 사랑해. 그 사랑은 실제적이고 살아서 역사한단다.”

 

자물쇠로 잠긴 방문과 쇠창살의 창문, 추운 지하 감옥의 담벽, 감옥에서 귀용 부인이 겪은 모든 불편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사그라지지 않은 기쁨과 측량할 수 없는 영적 자유가 이 여인의 영과 혼 안에서 하늘의 왕국을 향해 용솟음쳤기에 저절로 찬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용 부인은 자기의 감금 생활에 대해서 짧은 시도 지었다. 하지만 그 육중한 탑 안에서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귀용부인은 1702년 재심의에 들어갔다. 건강을 잃어버린 때문에 귀용 부인은 바로 죽음의 문턱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당국은 그녀를 석방하여 블루아 근처의 디지에에서 아들과 함께 남은 여생을 보내도록 결정했다.

 

54세의 귀용 부인은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빈혈로 얼굴은 창백했고 말랐으며 머리는 하얗게 세었다. 4년의 유폐가 귀용 부인의 몸을 완전히 쇠약하게 만들었다. 재발되는 열과 감기, 동상, 실신, 피로, 종창, 팔과 다리의 마비증상, 급성폐렴과 류머티스 관절염, 결핵에도 그녀는 전혀 불평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귀용 부인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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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용 부인이 블루아 근교의 아들 집에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또다시 전처럼 영적인 도움과 충고 기도를 청하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성직자나 수녀들을 포함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문제와 성경에 대한 질문을 품고 귀용 부인을 찾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부인이 필요했다. 또한 그녀는 프랑스와 독일, 네덜란드, 영국의 그리스도인들과 서신 연락을 주고 받았다.

 

물론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귀용 부인의 개인적인 적처럼 귀용 부인의 거처를 여전히 감시했다. 하지만 교회는 불루아의 부인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도록 강력한 조처를 취하지는 못했다.

 

1704년 로마 카톨릭 믿음의 강력한 수호자, 자크 베니뉴 보쉬에 주교가 죽고, 루이 14세 왕의 건강이 나빠져 이제 더 이상 이 문제에 정치적인 위협이나 관심을 쏟지 못했기 때문이다.

 

귀용 부인은 말년 동안 자서전을 출판하는 등 정리의 기간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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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귀용 부인의 충실한 벗이자 변호자였던 프랑스와 페넬롱 대주교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블루아에 들려온다. 끝내 그는 회복되지 못하고 1715년 6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들의 우정은 페넬롱 신부가 이 지상에서 원했던 거의 모든 것을 지불하고서 얻은 것이었다. 그들의 우정은 그가 가장 필요로 했던 모든 것-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개인적 유대를 맺게 해준 깨달음-을 그에게 제공하였다.

 

귀용 부인의 유일한 안타까움은 자기와 친밀한 유대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로 너무도 많은 친구들과 무죄한 사람들이 박해를 당하고 심지어 그리스도의 순교자가 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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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약 2년 5개월 후인 1717년 6월 9일, 바스티유에서 풀려난 지 15년 후, 69세의 나이로 잔느 귀용 자매는 마침내 본향으로 돌아간다. 하늘 왕국의 신랑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채 보다 나은 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귀용 부인은 프랑스 블루아에 있는 코르들리에 교회의 어느 조촐한 무덤에 묻혔다.

 

“저는 몸과 혼을 포기하고 전부 당신에게, 당신의 뜻에 온전하게 맡깁니다. 당신 없이는 벌거벗은 비참한 저를 당신은 아십니다. 하늘 왕국에도 지상에도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당신 뿐 다른 아무 것도 없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오 하나님, 저의 구원을 저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당신의 긍휼과 은혜, 저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의지하면서 당신의 손 안에 저의 혼을 맡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