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해석! 배경! 성경 개요!

나쁜 성경 해석학

하나님아들 2020. 3. 10. 00:47

나쁜 성경 해석학


해석학은 성경해석의 과학적인 방법을 설명하는 신학자의 용어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의 임무는 성경의 의미를 올바로 분별하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2장 15절은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고 명령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성경을 정확히 분별할 줄 모른다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성경을 능숙하기 다루기 위해서는 부지런하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성경은 정확히 해석되어야 하며 이 일에 실패하는 사람들은 충분히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성경해석과 관련해서는 할 말이 너무 많기 때문에 여기에서 해석학 전체를 다 다룰 수는 없다. 나는 다른 교수들과 함께 신학대학원에서 성경해석학에 대한 강의를 일부 맡고 있는데, 여러분에게 대학원 수준의 강의를 전달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오늘날 해석의 문제와 관련하여 반드시 피해야 할, 그러나 흔히 행해지고 있는 세 가지 오류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로, 매우 단순하지만 중요한 원칙으로올바른 해석을 제쳐두고 자기 주장을 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성경본문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설교자가 “내 생각을 지지해주는 꼭 맞는 구절만 찾는다면 멋진 설교를 할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의 신학을 먼저 설정해놓고 성경을 거기에 꿰어 맞추지 말라."

 

나는 언젠가 위스콘신에서 열린 컨퍼런스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 널리 알려진 유명한 한 설교자와 내가 매일 저녁시간에 말씀을 전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 함께 점심을 먹다가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오늘 밤 무엇에 대해 설교할 예정인가요?” 그는 

교회의 휴거에 대해 설교하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래요? 교회의 휴거라, 멋지군요. 본문은 어느 말씀인가요?” 라고 물었다. 

“요한복음 11장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이요? 그 본문은 교회의 휴거에 대한 말씀이 아니잖아요.” 그는 

“오늘 밤 한번 잘 들어보세요”. 라고 말했다. 나는 

“좋아요, 기대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날 밤, 그는 요한복음 11장에서 휴거에 대해 설교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요한복음 11장은 나사로의 부활에 대한 내용인데 그는 그것을 우화적으로 해석하여 나사로는 교회, 마르다는 구약시대의 성도들, 마리아는 대환난 시대의 성도들을 의미한다고 설교했다. 

그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상당히 깊은 해석이네요”라는 반응을 보이며 듣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 어디에서도 그런 말씀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설교를 들으면서 그저 그 설교자가 자신들보다 훨씬 깊게 성경을 이해하고 있다고 감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교를 마치고 그는 나에게 

“요한복음 11장을 이런 관점으로 본 적이 있나요?" 라고 물었다.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아무도 요한복음 11장을 그런 식으로 보지는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는 내 말을 칭찬으로 알아들었다. 다음 날 저녁 그는 설교 도중에 

“존 맥아더가 나에게,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요한복음 11장을 이렇게 해석한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교회의 휴거에 관해 논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요한복음 11장은 교회의 휴거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만일 여러분이 요한복음 11장을 사용하여 휴거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휴거에 관해 사실이 아닌 바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접근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진리를 우리에게 일부러 숨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의미가 우리에게 항상 명확하게 즉시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진의를 파악하는 일은 매우 힘든 작업을 요구한다. 

디모데전서 5장 17절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교사들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성도들을 가르치게 하고 성실하고 끈기 있는 자세로 성경을 연구하게 하시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오늘날은 말씀을 연구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 오랜 세월을 보낸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신학자와 재능 있는 교사들의 힘든 사역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하다.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읽어가면서 즉흥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신학지식을 소유한 은사를 받은 숙련된 일꾼들이 말씀을 오랜 시간 힘들여 연구하고 분별하여 가르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나는 은사주의 계통에 속한 여자 목사의 라디오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설교를 준비를 어떻게 하느냐하는 사회자의 질문에 “나는 힘들여 준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메시지를 전달해주십니다.” 라고 대답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한번도 나에게 설교를 전달해 주신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설교를 저절로 얻은 적이 없다. 힘들여서 준비를 해야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은 육신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문맥과 상관없이 성경의 한 구절을 뚝 떼어다가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으니 설교자가 할 일은 강대상에 나아가 바로 그 순간 마음 속에 무슨 생각이 떠오르든지 그걸 그냥 전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강대상 앞에 나아가서야 비로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알기 때문에 나오는 대로 말하는 자신들만의 신학이론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이와 같은 애드 립 수준의 설교방식에 대해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올바른 해석방법을 제쳐두고 우리 생각대로 진리와 비 진리를 분별하지 말아야 하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리 자신을 성경보다 더 높은 최종적인 권위에 올려놓은 우를 범하는 것이다.


"둘째로성경 본문을 영해하거나 우화화해서는 안된다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르치기 원하는 내용을 근거로 삼기 위해 성경을 우화적으로 해석한다."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나는 제리 마이클이 우리교회 직원이었을 때, 한 젊은 커플이 그에게 결혼에 관한 상담을 청하러 왔던 것을 기억한다. 그가 그 젊은 커플과 대화를 시작하고 30분쯤 흘렀을 때, 그 남자는 자기가 결혼한 지 겨우 여섯 달밖에 안되었으며 벌써 이혼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지를 묻자 그 남자는 

“아, 그거요? 그건 우리 교회 목사님이 한 설교 때문이었어요.” 

“무슨 설교였는데요?” 

“음, 목사님은 여리고 성벽에 대해 설교했어요.” 

“여리고요? 그게 결혼과 무슨 상관이 있지요?” 

“글쎄요. 목사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성 주위를 일곱 번 돌았을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만일 여러분이 마음에 드는 어떤 여자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그 여자 주위를 일곱 번 돌면 그녀의 마음의 성벽이 무너져 내릴 거라고 했죠. 그래서 그대로 했고 우린 결혼에 골인했어요.” 


마이클은 

“설마 그럴 리가…. 혹시 농담하는거 아닌가요?”  라고 놀라서 물었다. 

“아니요, 정말이에요. 나뿐 아니라 그 설교를 듣고 결혼하게 된 커플이 여러 커플인데요.”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결혼이 이미 하늘에서 정해졌다고 믿는다. 바로 이것이 우화적인 해석방법의 부정적인 사례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교회시대 초기에 행해지던 해석방법인데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으며, 특히 은사주의 운동에서 남용이 심하다.

구약의 느헤미야서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은사주의 계통의 설교자는 느헤미야서 시리즈 설교를 오로지 은사주의 교리를 전하는데 사용했다. 훼파된 예루살렘 성벽은 인간성이 무너진 것을 상징하며, 느헤미야는 성령님을, 왕의 연못은 성령의 세례를, 벽돌 사이의 역청은 방언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느헤미야서의 교훈은 성령님이 성령의 세례와 방언의 은사를 통하여 우리의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우기 원하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 설교자를 만나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그러한 해석은 순전히 그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며, 신약성경부터 구약성경에 이르기까지 읽어보면 느헤미야의 의도는 전혀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나중에 그는 내 말에 동의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전하는 것은 약장수가 약 파는 격이다. 설교자라면 누구나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달하고자 본문을 영해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결론에 꿰어 맞추기 위해 본문을 마음대로 해석하여 정당화하려는 무모한 행동이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접근방법을 배우려면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서 설명해주셨던 것을 기억해 보기 바란다. 그분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의 글로 시작하여 제자들에게 성경에서 그분 자신에 대해 기록된 말씀들을 설명해주셨다. 성경이 성경을 설명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해석학의 기본이다. 그분은 구약성경을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해석학을 올바로 사용하신 것이다. 그분의 건전한 해석방법을 사용하신, 교사들의 모범이 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그리고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적인 교훈을 도출할 때, 우리는 심각한 실수들 첫째로, 건전한 해석방법을 도외시하면서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있지 않은지, 둘째로, 얼토당토않은 어떤 것을 지어내거나 영해하고 있지 않은지, 


셋째로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수박 겉 핥기식의 피상적인 공부를 하고 있지 않은지 확실하게 점검해 보아야 한다. 깊이 없는 얄팍한 공부 역시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줄이면서 혹시 여러분이 앞으로 이런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를 대비하여 여러분이 잘 아는 디모데후서 2장 15절 말씀을 상기시켜 주고 싶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특히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라는 권고를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는 올바른 해석학을 사용하여 성경이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지켜야 한다. ‘옳게 분별하여’ 라는 표현은 정확하게 자르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장막 기술자로서 장막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천 조각을 정확하게 잘라서 때로는 접기도 하고 때로는 꼬기도 했을 것이다. 

만약 그 과정 중에 정확히 자르지 못했다면, 여러 조각들을 한데 맞추기 어려웠을 것이다. 올바로 잘라야 정확히 서로 연결할 수 있다. 그는 이를 통해 말씀을 정확히 자르지 못할 때 신학의 전체 그림이 온전히 완성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 일에 실패한다면 성경을 마음대로 다루고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끊임없이 혼란을 야기시키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존 맥아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