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에 대한 예화 모음
소망
유명한 피터 마샬 목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샬 목사님의 임종 시간이 가까와오자 부인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납시다”라고 말씀하시며 돌아가셨다 합니다. 부인은 여기서 믿음의 용기를 얻어 “나의 남편은 목사였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그녀는 계속 글을 써서 여러 권의 책을 내어 미국의 베스트 셀러 작가로 유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에 하늘 나라를 알게 되었고 거기서 받은 영감과 감격이 그녀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피터 마샬같은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도 그저 “갑니다. 또 만납시다”하며 잠깐의 이별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장례식이라고 말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히 끝났다고 생각하여 영결식이라고 말합니다.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남은 옷가지를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유해를 안장하는 예식일 뿐 영결식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갔다가 다시 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요 주께서 하신 약속입니다.
거지의소망
옛날에 어떤 부자가 돈은 많이 있었으나 자식도 없고 별로 웃어볼 만한 일이 없어 하루는 말을 타고 여행을 가는 도중에 앞을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옷은 남루하여 용문산에 안개 두른듯 했는데 즐거운듯이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그대는 무엇이 그렇게 기뻐서 춤을 추는가?`
한즉 이 거지가 대답하기를 첫째,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실 때 하등동물로 짓지 않고 사람으로 지은 것이요, 둘째 내가 다행히 한 다리만 절므로 동서남북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기때문이요, 세째 지금 나를 부러워 하는 사람 없으나 내가 죽으면 하나님 품에 안기울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좋아서 춤을 춘다고 했다.
진실로 우리의 소망은 하늘 보좌에 있는 것이다(롬12:12).
나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4)
지금은 반성해야 할 때다. 우리는 때때로 얼마나 변화되었는가를 점검해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하고 당신은 얼마나 변화되었는 지 적어보라.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나와 그리스도를 만난 후의 나와 또 소망하는 나를 적어보라. 내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는 항상 의기양양하게 변화한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머니의 소망
내 어머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이 세상의 아무것에서라도 나는 기쁨을 찾을 수 없다. 내가 이 땅에 무엇을 하며 무슨 목적으로 더 머물러야 하겠니? 내가 이 세상에서 바라던 소망은 다 이루었구나. 너도 아는 바와 같이 내가 이 땅 위에서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은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보고자 함이었다.
내 하나님께서는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이 소원을 훌륭히 이루어 주셨구나. 이제 나는 네가 이 세상에 속한 행복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내 눈으로 보았으니 이 땅에서 더 이상 더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니?"
명언<소망>
인명:익명
사람은 음식 없이는 약 40일을, 물 없이는 약 3일을, 공기 없이는 약 8분을, 그러나 희망이 없다면 단 일초도 살 수가 없다.
인명:A. 슈바이처 - 프랑스의 신학자
성공의 비결은 전생애를 통하여 희망을 잃지 않는데 있다.
인명:시바톨 - 미국의 성직자
희망은 믿음의 어버이다.
인명:S.존슨밀즈웰-영국의 사전 편집자
희망은 그 자체가 일종의 행복이며 이 세상이 베
풀어 주는 주된 행복이다.
딸의 소망
아주 돈이 많은 과부가 있었는데 이 과부는 시간이 남아 돌아서 사회활동을 많이하고 세계 여행을 많이 합니다. 집에 있는 때가 거의 없습니다. 그 과부에게는 16살 된소아마비에 걸린 딸이 하나 있는데 어머니를 무척 그리워 합니다. 어머니가 무척 잘해 줍니다. 여행을 다녀오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림책이니, 보석이니, 시계니, 향수니, 장난감이니, 안 사다 주는 것이 없습니다. 으례히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한 아름씩 선물을 안겨 줍니다. 그 과부는 외국에 가 있을 때 딸의 생일을 맞으면 자기의 전속 간호원에게 시켜서 화분을 딸에게 보냅니다. 돈은 많고 딸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전속 간호원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행 중에 간호원을 시켜서 딸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화분을 선물하고 자신이 돌아올 때는 더 좋은 선물을 사오겠다는 말을 전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 소아마비의 딸은 `엄마, 선물은
싫어요. 내게 필요한 것은 엄마예요. 엄마가 나하고 같이 있어 주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아요.`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 딸이 원하는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어머니의 돌봄, 어머니의 손길, 어머니가 같이 있어 주는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성령의 능력과 소망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의 일을 해야한다는 것을 아시고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
그는 40일 동안 광야에 계시며 사탄을 물리치셨다. 그는 천국 복음을 전파 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하셨다.
그는 돌아가신 후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후 세상에 여러날 머무시다가 승천하셨다.
그는 살아계시며 지금도 일을 하신다. 믿음을 가지고 살면 당신은 적극적인 사람이 되라.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영접했고 그 와 동행하고 있다면 당신은 절대로 마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주님! 이미 나의 일들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끝까지 나를 인도하소서. 감사합니다'
소원과 소망의 차이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성령의능력으로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욥 14:7.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시 71:5.
세상에는 소원을 품고 사는 사람과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핏보기에는 `소원'이나 `소망'이나 비슷한 말 같지만 본질은 엄연히 다릅니다.
소원은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생겨나지만 소망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생겨납니다. 또한 소원을 품은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쉽게 좌절하지만, 소망을 품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그 어려운 상황을 선하게 이끌어 가실지를 기대합니다. 소망을 품은 사람은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삽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의 삶에는 생기가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 안에서 참소망을 안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
소망을주는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 세계적인 문호가 된 동기가 있었다.
본래 글쓰기를 좋아하던 안데르센은 열한살 되던 해 처음으로 희곡 비슷한 것을 써서 여러 사람에 게 보여 주었으나 반응이 냉담했다.
어떤 아주머니는 "이걸 글이라고 썼니?"라면서 핀잔을 주었다.
안데르센이 크게 실망하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알렸을 때 어머니는 꽃밭으로 그를 데려가 "봐라.
이제 막 돋아난 잎새는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언젠가는 크게 자라 예쁜 꽃을 피울거야.
너도 마찬가지야"라고 말하며 용기를 주었던것이다.
소망
오영석이라는 소년은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게되자 <하나님 진학의 길을 열어 주십시요>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었다. 겉봉에 [하나님께]라고 적힌 이편지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우체국에서 생각끝에 어느교회로 보냈다. 그 교회 목사의 주선으로 이 소년은 대학에 진학하고 해외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한신대의 조직신학 교수가 되었다. 김삼환이라는 소년 역시 가난으로 공부의 길이막히자 14세부터 새벽기도회에 나가 종을
치며 "하나님 저를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호소하였다. 비가 올 때는 우산이없어서 어머니 치마를 덮고 가서 종을 치며 기도하였다. 이소년이 자라서 목사가 되었는데 그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 새벽기도회에만 3천명이 출석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경우도 꿈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버릴 수 없는 꿈이 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소망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상처 받은 자, 고독한 자, 병든 자, 그리고 죽어가는 자들을 보살펴야 한다. 나는 20여년간 병원을 방문하여 우는 자들과 함께 울었고, 공동묘지를 방문하여 우는 자들과 함께 울었다.
윌리엄 샤로이언은 최근 텔레비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슬픔이란 누구나의 머리 위에 머물고 있는 구름이다."
우리 주위에는 항상 고통을 당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위로하시고 보호해 주시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소망의 줄을 놓치지 않으면
신앙 후퇴자 -
크리스챤인 것을 나도 다른 사람도 강하게 확신하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그의 집에서 그 사람은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되었다. 이전에 그는 술을 마시는 등 비대해지는 부도덕한 생활에서 구출되었던 것이다. 회개한 후로는 훌륭한 크리스챤이 되어 놀랄 만큼 영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후에 무서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다시금 간음죄에 빠지고 또한 자기 부인으로부터 소지품도 강탈하는 참으로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비열한 태도로 행동했다.
많은 사람이 그는 전연 크리스챤이 아니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와같은 전말(顚末)이었지만 나는 '아니오, 이 사람은 지금도 크리스챤입니다. 신앙이 후퇴 한 것뿐입니다. 결코 그대로 생애를 마치지는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그는 점점 악에서 악으로 나아가자 사람들은 '자아, 저 사람이 크리스챤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겠지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역시 이렇게 주장했다. '아니오, 저 사람은 크리스챤입니다. 잠간 동안은 지옥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만 다시 돌아 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그는 확실히 되돌아와 다시 한번 신앙에 굳게 서서 지금도 기쁨 속에 살고 있다. 확실히 쓰러졌었으나 완전히 쓰러진 것은 아니었다.
인생의 소망은 어디에
데이빗 리빙스턴은 세기의 위대한 기독교인이요 선교사였다.
그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다가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아 그의 시신이 영국으로 옮겨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시키게 되었다. 그때에 수만은 군중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거리로 나왔다. 그러나 어떤 노인이 외로이 혼자서 군중들 후미에 홀로 서서 가슴을 조이며 슬피울고 있었다.
이 노인은 다름아닌 리빙스턴의 친구 윌리암이었다. 그는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러 가겠다고 나섰을 때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 장본인 이었다.
윌리암은 리빙스턴이 아프리카로 떠난 후 런던에서 큰 부자가 되었으며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다.
그런데 윌리암은 리빙스턴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이렇게 고백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고생하고 살았지만 많은 사람의 사랑을받고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명성을 떨치며 이 세상을 사라지는구나`며 `그러나 나는 비록 부자라고 말할 수 있으나 소망없는 세상을 위해서만 살았으니 얼마나 부끄러운가`라고 한탄한 것이다.
비록 리빙스턴은 가난하고 고생하며 선교지에서 보잘 것 없는 인생처럼 살았지만 하나님과 세상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윌리암은 부자요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이 살았지만 그는 소망없는 인생의 누린것이다.
우리 인생은 어디에 소망을 두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
` 너 자신을 누구에게 필요한 존재로 만들라 누구에게든 인생을 고되게 만들지 말라` (에머슨)
아리랑에 표출된 소망
아리랑은 여느 다른 노래와는 달리 원형대로 있지 않고 민중의 공감력이 형성될 때마다 노래말이 바뀌어져 왔다는 점에서 노래라기 보다 노래를 탄 민중의 공감사요 저항시랄수 있다. 무려 7백여 가지의 다른 각기 다른 노래말이 있다는 정선아리랑에서 그 변천을 더듬어 보면 이렇다. 고려가 망하고 두문신 일곱분이 정선에와 살았었다. 이 분들에 의해 촉발된 새 왕조에 대한 저항공감대가 `만수산 먹구름이 막 모여든다`는 정선아리랑을 탄생시키고 있다.
그후 임진왜란 때 낙오병 하나가 정선 북면을 지나가다가 그곳 과부와 정들어 눌러 살았다. 한동안 살다가 고향의 처자식 생각이나 먼 산만보고 있더니 어느 날 혼연히 산 넘어 떠나가 버렸다. 안타까운 이 과부의 처지를 공감하여 `줄봉숭아 아리랑`으로 변형된다. `오늘 갈지 내일 갈지 정수정망 없는데 맨드라미 봉숭아는 왜 심어 놓았나.` 개화기에 양복쟁이가 활개치자 이 양풍에 저항하여 `석새베치마를 둘렀을 망정 네 까찡 하이칼라는 눈밑에 둔다`는 개화 아리랑이, ` 정선군청 농업기수 양반이라 하더니 촌색시 호미조사에 손목만 쥔다`
는 항일 아리랑,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 세 쪽이 나는데 삼팔선이 깨어지면 덩어리로 뭉친다네`하는 통일아리랑으로 민중의 공감력을 결집시켜 내렸던 정선아리랑이다.
아무튼 아리랑은 고개너머에 있는 그리운 고향처럼 모든 민중이 공감하고 있는 절실한 소망을 표출하는 우리 한민족의 유구하고도 유일한 매체였다.
소망의 하나님
왈츠라고 하는 사람의 그림 가운데 <소망>이라는 그림이 있다. 둥근 지구위에 어떤 젊은 여인이 홀로 외롭게 앉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눈은 수건으로 싸맸는데 앞을 보지 못한다. 그 가슴에는 비파를 안고 있는데 그 비파의 줄이 거의 다 끊어지고 오직 한 줄만이 남아 있었다. 뒤에는 희미한 별
하나만 반짝이고 있었다. 이 여인은 우주에 외로이 혼자 앉아 보지 못하는 눈으로 오직 남은 한 줄의 비파를 가지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 줄은 소망의 줄이다. 그 별은 소망의 별이다. 이 그림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고 한다.
영생의 소망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존 애덤스는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그는 인생의 말년을 아주 낡고 허름한 집에서 보냈다.한번은 지인들이 애덤스를 찾아와 물었다.“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내신 분이 이렇게 초라한 곳에서 지내시다니요” 애덤스는 손으로 신체부위를 번갈아 가리키며 설명했다.
“집의 지붕과 같은 머리카락은 빠지고 집의 벽과 같은 늑골도 허물어졌어요.이제 겨우 지팡이에 의지해 살고 있답니다”
방문객들은 딱한 표정으로 애덤스를 바라보았다.그러자 그가 다시 말했다.“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지요.저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답니다.그곳은 정말 좋은 곳이지요” 그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영생의 소망.이것은 나이가 들어가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인생은 한없이 비참할 뿐이다.
소망이 있는 한 생명이 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을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몇 년 전 친구와 함께 인도의 캘커타에 있을 때 마더 테레사의 '죽어가는 자를 위한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마더 테레사는 캘커타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녀가 청결하게 청소해 둔 예배당에 데려다가 보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사람은 누구나 죽어갈 때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 집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은 지붕이 낮은데다 비좁았고 불빛도 희미했지만 그러나 사방은 청결했고 신선해 보였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한 간호원이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목사님 이곳에서는 매일 신비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우리는 다 죽어가는 사람들만 이곳에 수용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들이 이곳에 와서 그리 스도의 사랑을 배우게 되면 그들은 소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결국 살아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을 '소생의 집'으로 개조할 계획을 갖고 있어요.'
이곳이야말로 '소망이 있는 한 생명이 있다'는 진리를 입증하는 곳이었다.
소망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에 대한 소망의 힘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사25:8)
여러분은 미국의 '능력의 시간' 프로듀서의 딸 타라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타라는 뇌를 다쳐 귀머거리.벙어리 그리고 맹인이 되었다.그녀는 평생 식물 인간으로 보낼 것 같았으나, 사고를 당한 지 6년이 되는 오늘날 그녀가 보고, 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30초 동안 자기 힘으로 기억했습니다."
타라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녀가 그렇게 된 것은 미래에 대한 그녀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유대인들의 육아법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다. 어린 자녀가 차츰 자아의식을 형성해 가면 아이들과 신나게 놀던 아빠가 어느날 갑자기 그 아들을 홱 던져버리고 냉정하게 돌아선다.
꼬마는 평생 처음당하는 엄청난 쇼크에서 쉽게 헤어날 수가 없게 된다. 그들은 이런 경험을 통하여 인간에게는 까닭없는 배신이 있다는 것과 인간은 이렇게 변화무쌍한 존재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어린 아들로서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 절망과 배신을 딛고 또 다시 아빠품으로 돌아오면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던 아빠가 다시한번 호되게 밀쳐내 버린다.
어린 아들에게 아빠는 사랑의 대상이요 다정한 친구요 자신의 삶은 몽딴 송두리채 책임지고 있는 존재로서 이 아이에게만은 하나님방불한 실존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까닭없는 배신의 아픔은 어린이가 재대로 소화하기에 힘겨운 과제임이 분명하다.이럴 때 아빠는 자기 아들에게
[아들아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이 아빠가지도 너를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교훈한다. 그리고 인간이 영원히 믿을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3-5)
한눈에 매정해 보이는 유대인의 아비들은 이 진리를 아이들에게 바로 가르치기 위하여 애간장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참고 견디며 이런 방법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없이 온 세상을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면서도 2천 수백년 동안 자기들의 민족성을 굳게 지키고 오늘의 세계를 이끌어 가는 힘의 상당 부분은 이와같은 육아법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떠한가?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나만 굳게 믿어라 나는 너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단다 너는 아무 걱정 말고 편하게 살아라]라는 식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 않는지.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 주는 것,시집가는 딸에게 엄청난 혼수를 장만해 주는 것 등이 바로 그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뿐만이겠는가? 엄마는 아이들의 학교 성적까지 책임질 작정으로 맹렬한 치맛바람을 날리고 다니지 않는가?
이런 식의 육아법은 결국 자녀들로 하여금 남을 의지하는 졸장부로 만들고 또 지극히 무기력한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 사람들은 하늘같이 믿었던 인간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면 그 엄청난 충격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결과 적으로 파탄의 인생을 살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오직 하나님외에는 우리가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자가 없음을 가르쳐야 한다.
「높은 곳」을 바라보라-소망
어떤 소년이 항상 땅만 내려다보고 걷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결국 그 소년은 성인이 돼서도 넝마주의를 하다 인생을 마치게 됐다. 또 다른 한 소년은 길을 걸으면서 높은 하늘과 우뚝 솟은 빌딩을 쳐다보며 자랐다.
그는 훗날 수십층짜리 빌딩들을 소유한 대기업의 회장이 됐다. 사람은 무엇을 보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삶이 결정된다. 우리도 땅의 것에만 뜻을 두지 말고 보다 높은 곳에 있는 귀한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났던 일본의 관동 대 지진은 10여 만의 생명과 수 백만의 금화를 태워 버렸다. 그 때에 특히 피복매매 광장에서 된 일을 보면 3만명이나 한 자리에서 죽었는데 그렇게 불꽃 가운데서도 살겠다고 어떤 사람은 의복가방을 들고 오고, 어떤 사람은 돈뭉치를 가지고 오고 어떤 사람들은 과자봉지를 들고 나오고, 어떤 사람은 바이올린, 어떤 사람은 화장품을 가지고 광장 한복판에 모여 살겠다고 애를 쓰다가 불이 그렇게도 무심하게 그곳까지 붙어옴으로 하는 수 없이 최후엔 비명을 지르며, 하나님 혹은 부처님 하다가 다 죽고 말았다 한다. 그런즉 우리의 소망은 하늘 뿐이다(마16:26).
거지의 소망
옛날에 어떤 부자가 돈은 많이 있었으나 자식도 없고 별로 웃어볼 만한 일이 없어 하루는 말을 타고 여행을 가는 도중에 앞을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옷은 남루하여 용문산에 안개 두른듯 했는데 즐거운듯이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그대는 무엇이 그렇게 기뻐서 춤을 추는가?"
한즉 이 거지가 대답하기를
첫째,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실 때 하등동물로 짓지 않고 사람으로 지은 것이요,
둘째 내가 다행히 한 다리만 절므로 동서남북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기때문이요,
세째 지금 나를 부러워 하는 사람 없으나 내가 죽으면 하나님 품에 안기울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좋아서 춤을 춘다고 했다.
진실로 우리의 소망은 하늘 보좌에 있는 것이다(롬12:12).
헬렌켈러의 소망
"내가 한 번만 아름다운 무지개를 볼 수만 있다면, 단 한 번만 떨어지는 낙엽을 볼 수가 있다면, 단 한 번만 저 산속에 있는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 볼 수 있다면, 나에게 이 아름다운 가르침과 자상한 친절을 베푸시는 설리반 선생님을 단 한 번만 볼 수 있다면,내가 단 한 번만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저 오케스트라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나에게 이 귀한 설교의 감동을 주었던 필립 부륵스 목사님의 그 얼굴을 단 한 번만 볼 수가 있다면,그 멧세지가 이렇게 내 삶을 바꾸었던 이 성경을 내 눈으로 단 한 번만 바라볼 수 있다면, 지는 해 저 석양을 단 한번만 내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소망이신 예수님
영국의 런던에 에드워드 모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아와 같이 의지할 곳이라고는 아무데도 없었기에 어린 나이에 가구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을 끝마치고 나서도 그를 따뜻하게 반겨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런던 거리를 이리저리 쏘다니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트는 한 교회에 무심코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세상에 믿고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심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모트의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구 공장의 직공에서 사장까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에 뜨거운 감격이 솟구쳤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연필을 들고 적어내려 갔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부르고 또 부르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꾀를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소망
사도바울은 자신이 비천하고 배고프고 궁핍했을 때에도 열등의식이나 좌절감을 갖고 원망하거나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풍부하고 배부르고 환경이 좋다고 해서 음란하거나 방탕하며 교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위치에 처하든지간에 자신이 처한 생활에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기도 하고 산꼭대기로 올라가 기도합니다. 이렇듯 인생은 배고프고 추울 때가 있는가 하면 풍부하 고 배부를 때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께 전 생애를 맡긴 사람은 현재의 생활이 어렵고, 외로우며, 슬플수록 더욱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게 됩니다.
천국의 백성이 된 우리들은 천국을 소유한 기쁨을 가지고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은혜는 이 세상이 주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귀하고 값지고 풍성한 것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편4:7)
영원한 소망2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지리라는 기대는 우리에게 인생을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막 연한 기대, 혹은 [불안한 대상]을 향해 기대감을 가질순 없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의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 공의로우신
심판주인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37편9절은 [대저 행악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 로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은 어려운 일이 생겨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 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을 믿으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
주님께 대한 소망
존이라는 청년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공하여 잘 살고 있는 그리스도의 착실한 증거자인 한 의사의 자가용 운전사였다. 그 의사는 가끔 이 존과 그의 영혼, 그리스도 영접의 필요성, 그리고 내세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어느날 그는 주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귀한 소망에 관한 얘기를 존에게 하면서“여보게, 주님께서 오시면 자네가 내 차를 가지게나”하고 말하였다. 이에 존은 기뻐서 정중하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존, 자네 부인을 데리고 우리집에 와서 그땐 살도록 하게”하고 덧붙였다. 다시 한번 존은 열띤 목소리로 “감사합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게다가 그의 주인은 주 예수님께서 오시면 자기의 모든 토지와 재산을 다 가져도 좋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존은 너무 좋아하면서 집에 와 자기 부인에게 자기 주인이 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마음이 들떠서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존은 '하늘 나라가 얼마나 좋은 곳이면 의사 선생님이 이 좋은 집, 새 차, 그 많은 재산을 다 버리고 주님이 재림하시면 그곳으로 가겠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밤중에 그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자기 주인 집으로 달려가서 문을 탕탕 두드렸다. 이에 주인이 나오자 그는 “아, 선생님 그 자동차, 전 싫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당신의 그 집도, 당신의 그 돈도. 그리고 당신의 그 넓은 땅도 다 싫습니다.” “그럼, 자네 원하는 게 뭐란 말인가.”하자, 그는 “저는 구원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저도 당신처럼, 주님께서 오실 때를 준비하고 싶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슬픔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어떤 잘 믿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는데 언제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다니니 감사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한 번은 거리에 나가서 고기 한 근을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돌에 걸려 넘어져서 고기를 손에서 놓쳐버렸습니다. 때마 침 개 한 마리가 곁을 지나다가 고기를 물고 달아납니다. 할아버지는 물끄러미 보기만 하고 있습니다. 개는 사라졌습니다.
이때 할아버지는 `감사합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어떤 젊은이가 지나가다가 묻기를 무엇이 감사한 일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 하는 말이 `아 이 사람아, 고기는 잃어버렸으나 내 입의 입맛은 그냥 있네`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고기가 아무리 많아도 입맛이 없으면 별로 감사한 일이 못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캄캄한 밤에도 별을 보고 감사합니다. 검은 구름 위의 무지개를 보고 감사합니다. 슬픔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보고 감사합니다.
인간의 소망
어떤 사람이 딸만 있고 아들이 없자 아들을 얻고 싶은 욕심에 몰래 첩을 얻었는데 그 역시 딸을 낳았다.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이웃으로부터 손가락만 받게 되었다. 또 어떤 사람은 어렵게 어렵게 아들을 얻었으나 열 살도 채 안되어 죽어버렸다. 10년 동안 아이가
없던 한 부인이 아이를 가졌으나 그 기쁨이 사라지기도 전에 강도를 당해 그 충격으로 유산하고 말았다.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를 잘하였던 젊은이가 외국유학의 길에 올랐을 때 그들의 가족들은 그가 금의희환영하여 잘 살게 되기를 소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병으로 이국 땅에서 죽고 고국에 있는 가족들의 소망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인간의 소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딸의 소망
아주 돈이 많은 과부가 있었는데 이 과부는 시간이 남아 돌아서 사회활동을 많이하고 세계 여행을 많이 합니다. 집에 있는 때가 거의 없습니다. 그 과부에게는 16살된 소아마비에 걸린 딸이 하나 있는데 어머니를 무척 그리워 합니다. 어머니가 무척잘해 줍니다. 여행을 다녀오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림책이니, 보석이니, 시계니, 향수니, 장난감이니, 안 사다 주는 것이 없습니다. 으례히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한 아름씩 선물을 안겨 줍니다. 그 과부는 외국에 가 있을 때 딸의 생일을 맞으면 자기의 전속 간호원에게 시켜서 화분을 딸에게 보냅니다. 돈은 많고 딸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전속 간호원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행 중에 간호원을시켜서 딸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화분을 선물하고 자신이 돌아올 때는 더 좋은 선물을 사오겠다는 말을 전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 소아마비의 딸은 "엄마, 선물은싫어요. 내게 필요한 것은 엄마예요. 엄마가 나하고 같이 있어 주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요."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 딸이 원하는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어머니의 돌봄, 어머니의 손길, 어머니가 같이 있어주는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고난 중에 소망을
본문 : 시편 102장 1 절- 11 절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대저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 같이 탔나이다 내 가 음식 먹기도 잊었음으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쇠잔하였사오며 나의 탄식 소리를 인하여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나는 광 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며 나를 대하여 미칠듯이 날치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 는 눈물을 섞었사오니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오늘 저녁 읽은 시편은 다윗왕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 때 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혹은 다니엘이나 느헤미야, 그 밖의 선지자들이 바 벨론에서 포로되었을 때에 쓴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표제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시편의 저자를 분명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표제에 기록된 대로 어느 곤고한 자의 기록 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 시인은 무거운 영혼의 고 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을 읽을 때 곤고한 사 람이 자기 모습을 볼 수가 있으며, 따라서 위로가 되는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의 기도를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성령께 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도 기도하게 우리 입에 말씀 을 넣어 주십니다. 지금 이 시편 기자는 말할 수 없는 근심과 걱정 가운데서 그 의 심신이 아울러 곤고한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아주 절망하지 아니하고 소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 는 사람도 감당키 어려운 시련을 겪습니다. 그래서 지쳐 넘어 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주 자빠지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시편 37편 24절에 보면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 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이 세상에서는 마귀가 공중의 세력을 잡고 있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큰 고통을 받게 됩니다. 심지어 선한 사람들까 지도 고뇌하게 되며 곤고로 인해서 나약해지기 쉽습니다. 그러 므로 우리의 처지가 곤고하며 우리의 영혼이 어려움을 당할 때 는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 를 건지겠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환난 때에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우리의 권리입니다. 어려움에 직면한 어린 아이가 엄마 하고 부르는 것은 아이의 본능과도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어려우면 우리 입에서 자연히 하나님 , 주님 하고 찾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 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어려움을 당해도 찾을 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곤고한 날에 찾을 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황하게 되고 고민하게 되고, 결국 낙심하고 절망하 고 맙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공부 못한 사람도 아 니고, 돈 없는 사람도, 권세 없는 사람도 아닌, 영혼의 아버지 가 없는 영적 고아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 떻게 부르짖습니까? 본문 2절을 보세요.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 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 게 응답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곤고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은혜롭게 들으시고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기 도로 드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하나 님께 상달되도록 해야 하고 그의 귀에 들려지도록 힘써야 합니 다. 왜 우리가 기도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자기를 찾으라고 명령하셨고,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곤고한 날에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쓸데없이, 의미 없이 찾는 공 염불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에도 너희 중에 고난 당 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하면서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고 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나타나 시며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께 서 나를 빨리 자유하게 하지 않더라도 나로 하여금 주께서 나 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나를 향한 주의 손길의 역 사를 볼 수는 없다 하더라도 나를 향한 주님의 얼굴의 미소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는 것처럼 근심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번영하는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시면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시편 30편 7 절에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힘으로 감당키 어려운 지경에 계십니 까? 그러나 눈을 들어 하나님께 아뢸 때 주님의 얼굴이 나를 향하고 계신 것을 의식하십니까? 그러면 아무 염려할 것 없습 니다. 평안한 가운데 사시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얼굴이 나를 향하신 것을 의식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심 각한 문제입니다. 세상의 것이 아무리 번영한다 하더라도 하나 님의 얼굴을 돌이키면 이것은 비극입니다. 나를 위해 주께서 나타나소서. 내 기도를 들으실 뿐 아니라 응답도 하소서. 내가 부족하여 찾아 헤맬 때 구원을 허락하소 서. 내가 부르짖는 날에 내게 응답하소서. 근심이 우리를 혹독 하게 억누를 때 이와 같이 겸손과 인내로 기도 드리면 하나님 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사실 우리 사람은 다 연약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어야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 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지금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 까? 본문 3절에서부터 11절까지에 자신이 당하고 있는 형편을 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대저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 그의 몸은 야위고 쇠약해졌습니다. 너무 말라서 문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했습니다. 번영과 기쁨은 뼈가 강건하게 되고 뼈가 풀같이 번창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 다. 내 뼈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 에서 냉과리는 화로를 말하 는데, 화로에서 타는 것같이 뼈가 녹고 타버렸다고 하는 뜻입 니다. 구약 욥기 30장 30절에 보면, 욥이 세상에서 얻었던 10남매 의 훌륭한 자녀와 부자로 인정받을 정도로 많은 재산을 하루 아침에 다 잃어버리고 그 몸에 창질까지 나서 말할 수 없는 고 통 가운데서 말하기를 내 가죽은 검어져서 떨어졌고 내 뼈는 열기로 하여 탔구나 했습니다. 이 시인은 고통이 얼마나 심한 지 그의 생명은 연기같이 소멸되며, 그 몸을 유지하고 있는 뼈 도 타버린다고 말했습니다. 그 뿐입니까? 4절에 보니 내가 음 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같이 쇠잔하였사오며 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정말 괴로우면 음식 먹는 것도 잊고 사실 생리적으로도 먹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기쁘고 평안할 때 몸의 신진대사가 활발하고, 타액과 위액의 분비가 왕성해서 음식을 먹으면 소화도 잘되고 몸에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마음이 괴로우면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잘 되지 않습니 다. 사무엘상 1장 7절에 보면, 한나가 자식이 없어서 브닌나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너무 마음에 고통이 심해서 음식 먹기를 폐하 고 울었습니다. 억울하고 괴로울 때는 음식 먹기를 잊어버리게 됩니다.사무엘하 12장 7절에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다 음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마음 속에 죄가 걸려서 원통히 회개하며 자복하는 눈물을 흘리며 음식 먹는 것까지도 잊었다 고 했습니다. 내 마음이 풀같이 쇠잔하였나이다 이것은 주요기 관에도 영향을 끼치며, 몸의 기관이 다 연약해지는 것을 의미 합니다. 사람의 몸은 먹어야 되는데 먹지 못하니, 모든 기관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11절에도 내 날이 기 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라고 했습 니다. 육체가 풀과 같이 약하고 시든다는 것이 놀라울 것은 없 습니다. 병 때문에 그렇게도 되지만 마음이 괴로워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5절에는 나의 탄식 소리를 인하여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 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릴 때는 정신의 기쁨이 시듭니다. 그는 지나치게 압박을 당한 자와 같이 항상 탄식하 고 신음해서 그 기력이 소모되고 지쳐버렸습니다. 그는 서글픈 사람처럼 고독에 휩싸였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버리고 그 를 조롱합니다. 말하자면 친구들에게서도 소외당하였습니다. 나는 슬픈 소리를 지르는 광야의 당아새 같으며 황폐한 건물에 기거하기를 좋아하는 부엉이같이 되었다 고 말합니다. 광야의 당아새나 부엉이는 외로운 짐승입니다. 내가 밤을 지새우니 지 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와 같은 말입니다. 사람이 어 려움을 당하면 외로움을 느끼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 기 혼자만 이런 어려움을 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이 이런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을 의식할 때는 별로 문제되지 않습니다. 가령 요사이 어떤 분이 사업을 하다가 본의 아니게 실패를 해서 손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사업자금이 없어지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업시설도 다 없어졌고, 심지어는 살고 있던 집마저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값이 나가는 가구까지도 다 가져갔습니다. 실망한 나머지 자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그런데 6.25전쟁 때는 모든 재산을 다 버리고 빼앗기고 불타 버리고, 손에 든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 이 피난길에 올랐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생 그런 고생은 처 음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모든 재산이 다 없어졌다 고 낙심하고 절망해서 자살했다는 말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습 니다. 남이 같이 고생하면 그 고생이 덜합니다. 다른 사람이 같이 어려움을 당하면 상당히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이 어려 움이 나만이 당하는 고통이라고 생각될 때 고통이 더해지는 것 입니다. 뿐만 아니라 8절 이하에 보십시오.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며 나를 대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이 시인은 그의 적에게서 악평을 들었습니다. 그 의 친구들이 그에게서 떠났을 때 그의 적들이 그를 에워쌌습니 다. 나의 원수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나이다 사람이 자기를 훼방 하는 말을 들을 때 마음에 고민이 생깁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 들 앞에서 망신을 줍니다. 원수들은 이렇게 화살 같은 혹독한 말을 그에게 씁니다. 한 번이 아니라 종일 한다는 것은 계속한 다는 말입니다. 그의 원수들은 매우 난폭했습니다. 그들은 나 를 대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 라고 했습니다. 너무 완강하고 무자비한 자들입니다. 저희는 바울을 죽이려고 맹세한 유대인 들처럼 나를 가리켜 맹세한다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저 를 죽이기 전에는 물러서지도, 양보도 하지 않겠다. 는 악착스 러운 마음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악합니다. 왜 이렇게 원수들이 끈질기게 덤빕니까? 본문 9-11절에 있습 니다. 시인은 이 모든 곤고와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 으로 알았습니다. 나는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는 눈물을 섞었사오니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9-11절)이 시인은 밥을 먹는 대신에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먼지와 재 가운데 누워서 음료에 눈물을 섞었다고 합니다. 슬픔의 극치를 말하는 것이고 더할 나위 없 는 고통을 뜻합니다. 내가 마심으로 원기를 회복하려 할 때 오 히려 눈물을 마시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시인은 이것이 주 의 분과 노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에게 주어진 곤고 자체나 그 원수들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로 받아들 이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쫓기어 피난을 가 게 되었는데,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조롱을 하고 횡포를 부립니다. 오, 피흘린 자여, 도망가는구나. 그때 다윗이 당한 치욕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옆에 같이 따라가던 부하 가 분이 나서 다윗왕에게 대왕이시여, 저놈들을 그냥 둘 수 있 습니까? 그저 한칼에 없애버립시다. 어떻게 대왕에게 저렇게까 지 할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다윗은 그냥 두 게. 내 아들이 지금 반역해서 도망치는 신세인데 저 사람이 그 러는 거야 너무 당연하지. 그것 때문에 조금도 마음 상하게 생 각할 것 없어. 그냥 내버려 두게. 하나님이 다 시키신 거야. 그러면서 오히려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야보고서 5장에 보면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 는 기도할 것이요 혹시 죄를 범했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언제든지 고통 당하는 것이 우 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 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주의 율례를 배우 게 되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서 평안하고 형통할 때보다 고통을 통해서 위대한 진리를 배우 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애가서 3장 27절-29절에 사람이 젊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 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 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했습니다. 이것이 고난에 처한 성도의 자세라고 봅니다.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이것은 참으로 의미 있 는 표현입니다. 나를 드시는 것도 주께서 하십니다. 번영과 형 통, 영광을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조각 내려고 땅에 던지는 것과도 같이, 우리를 높이 드셨다가 던지실 때가 있습니다. 다 시 말하면 아예 없는 사람에겐 없어질 것도 없으니까 문제될 것이 없어지게 되고, 존귀와 영광을 누리던 사람이 땅에 떨어 지게 될 때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나를 영광과 기쁨과 비범한 번영 중에 나를 먼저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 추억은 비애를 더하게 하며 나를 더욱 애처롭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드셨다가 그 분에게 던짐받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들어올리고 내리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시기도 하시고 빼앗기도 하시는 하나님에게 그 이름이 복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실 때는 기뻐하 며 감사하기 쉬우나, 빼앗을 때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신앙 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더 큰 유익을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욥의 고백을 여러분께서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정말 천만 뜻밖에 귀한 자녀들과 모든 재산을 다 잃고 난 후에도 욥은 하 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찬양했습니다. 욥이 엎드려 경배하며 가 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 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 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 니라 (욥 1:21-22)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성숙했나 하는 것을 알아보려면 주어서는 잘 모르고, 빼앗아 보아야 압니다. 높이 들어서는 잘 모르고, 땅에 던져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평안할 때, 형통할 때는 잘 모르고, 어려움을 겪어 보아야 압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편 기자의 몸과 같이, 오히려 죽고 말라버린 뼈와 같이 시들고 말라버리기도 합니다. 교회가 때로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광야로 이끌려 나 가고 사라져 버린 것과 같이 되고,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들어 가는 때도 있습니다. 이런 때 교회는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새 로워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12절 이하의 말씀은 성도의 신념을 말씀했습니다. 이 시인이 이처럼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 또 외로운 처지에서, 그리고 쓰라린 고통 속에서 뿐 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멸시와 학대 속에서 낙심하고 절망했 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이처럼 어려운 가운데서 소망을 가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까? 1. 영원히 계신 하나님과 그 말씀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사람은 풀과 같고 그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 풀은 마르고 꽃 은 떨어질 때가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영 원토록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실망하 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12절에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주의 기 념 명칭 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 취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영원히 살아 계셔서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일시적이지만, 주는 영원하십니다. 우리의 친구 들은 죽지만, 하나님은 죽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 협하는 것이 우리를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재 가운데 쓰여지고 세상에서 잊혀질 것이지만,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를 것입니다. 세상이 다 변하고 없어지는 한이 있어 도 주의 말씀만은 일점 일획이라도 변함이 없습니다. 시간의 끝까지, 아니 영원까지 주님은 알려질 것이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슬픔과 죽음까지도 영원한 마음의 불변 하는 축복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받아들입니다. 13절에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했습니다. 2. 가난한 시온이 지금 곤고한 가운데 있지만 구원과 소생을 위한 때가 올 것입니다. 구원의 희망은 하나님의 선하심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주께서 시온을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시온은 하나님의 동정의 대상이 되었기 때 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때가 있으십니다. 언제까지 어려움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 다. 하나님은 때가 있으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말로 다할 수 없이 고 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저희의 우고 를 아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저희를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므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찰 때 그들을 다시 고국으 로 돌려보내셨습니다. 70년이 끝난 후 바벨론에서 구원됨으로 말미암아 시온이 기뻐할 시간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16절에 말씀한 대로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하나님의 성전 재건을 의미한 말씀입니 다. 시온의 건설은 저들이 갈망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에게나 큰 기쁨이 됩니다. 황폐된 상태에서 교회의 특권과 축복은 회 복과 재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도 원수들에 의해 서 짓밟힘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신실한 마음으로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우 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3.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 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시인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소망을 가지게 된 셋째 이유입니다. 여기 빈궁한 자라는 말은 고난 당한 성도, 혹은 억울함을 당한 성도를 가리킵니다. 성도가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을 꼭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때는 기도하기 좋은 기회 가 됩니
고난과 소망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난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땅에 계실 동안 사람으로 형언할 수 없는 많은 슬픔과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난이 얼마나 컸던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처참한 고난을 당하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걷는 우리를 구원하고 돌보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난과 슬픔 가운데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고난과 슬픔을 다 아십니다. 아실 뿐 아니라 여러분을 은총의 길로 이끌어 주기 원하십니다. 요셉의 고난과 승리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엄청난 고난에 휩싸일 때가 많습니다. 그때 해답은 보이지 않고 고통만이 엄습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그 뒤에 나타난 부활을 바라보고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선으로 바꿔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요, 주를 믿는 사람들이 받아 누릴 특권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은 고난을 당할 때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해를 갖다준 사람에 대해 원한을 갖거나 분노하지 마십시오. 고난을 양식으로 삼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소망과 믿음을 갖고 "온 세상이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난중에 있습니까? 병들었습니까? 타인으로 인해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까? 매우 궁핍한 중에 있습니까? 멸시를 받고 있습니까? 소외를 당했습니까? 가정에 위기를 당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해를 선으로 바꿔 주실 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영원토록 사랑해 주십니다.
소망을 주님께
오늘날 많은 인생들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있다. 살아가는 의미를 발견해 보겠다고 어떤 사람은 철학책 속에서 방황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시장 밑바닥 서민들의 숨결을 더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초상집의 강아지처럼 종교 집회를 헤매고 다니며 어떤 사람은 마음과 육신의 고향을 등지고 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인생의 의미는 ‘행복함’에 있다며 이 순간에도 행복을 찾아 산과 들로 헤매고 있다. 그러나 인생들은 진정한 행복을 모르고 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 한 덩어리가 최고의 행복이지만 배부른 사람에게 맨밥 덩어리는 하나의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행복이란 이처럼 변덕스러운 것이다. 찰스 스펄전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두 가지 이기주의가 있다. 하나는 허영심이고 또 하나는 교만이다. 어느 쪽이 더 큰 죄인가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쪽이 더 우스꽝스러운지 알고 있다. 교만한 사람은 다소 무게가 있다. 그러나 허영에 날뛰는 사람은 공기처럼 가볍고 아무에게도 신뢰감을 주지 못하니 참으로 우스운 것이다.”지나친 허영심으로 지나친 행복을 바라는 인생들은 그림자같이 다니는 우스운 자신의 모습을 만들게 된다. 오늘날 많은 인생들은 이처럼 그림자같이 다니는 것이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우리는 외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주께 소망을 두고 내일의 활기찬 인생을 설계하자!
소망의 씨앗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 39:7)
한 사람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지하 독방에 갇히게 되었다. 지하 독방 안에서 그는 고독과 절망에 몸을 떨었다. 그가 절망과 고독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자신이 그토록 사랑을 쏟았던 가족과 친구들도 모두 그를 외면해 버린 것이다. 그는 독방 벽에 글을 적어 놓고 세상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 " 신은 없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감방의 갈라진 틈새로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새싹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향해 강인한 생명력을 보이며 자라고 있어다.
그는 간수가 주는 물을 아껴서 매일매일 새싹에 물을 주었다. 며칠 후 새싹은 자라 꽃망울을 맺었고, 드디어 아름다운 파란 꽃을 피웠다. 억울한 죄수는 생명의 신비에 감동해 무릎을 꿇고 벽면에 적어놓은 글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곳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놓았다
. " 하늘이 준 생명의 신비, 이제 나는 외롭지 않다. 인생은 고독한 여행이다. 그러나 여행의 동반자를 만나면 행복하다.
나는 결코 고독하고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하늘의 소중한 선물이다." 소망의 씨앗이 그의 마음에 싹을 틔우고 아름다운 소망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거지의 소망
옛날에 어떤 부자가 돈은 많이 있었으나 자식도 없고 별로 웃어볼 만한 일이 없어 하루는 말을 타고 여행을 가는 도중에 앞을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옷은 남루하여 용문산에 안개 두른듯 했는데 즐거운듯이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그대는 무엇이 그렇게 기뻐서 춤을 추는가?"
한즉 이 거지가 대답하기를
첫째,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실 때 하등동물로 짓지 않고 사람으로 지은것이요,
둘째 내가 다행히 한 다리만 절므로 동서남북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기때문이요,
세째 지금 나를 부러워 하는 사람 없으나 내가 죽으면 하나님 품에 안기울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좋아서 춤을 춘다고 했다.
진실로 우리의 소망은 하늘 보좌에 있는 것이다(롬12:12).
영원한 소망2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다 음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지리라는 기대는 우리에 게 인 생을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막 연한 기대, 혹은 [불안한 대상]을 향해 기대감을 가질순 없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의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 공의로우신 심판주인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37편9절은 [대저 행악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 로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은 어려운 일이 생겨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 을 이루느 니라](롬 8:28)는 말씀을 믿으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 미국의 인생철학자 나폴레온 힐은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다가와도 그것 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그와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축복이 다가 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에 대한 기대도 없이 바람 부는대로, 물 결치는대로 될대로 되라는 식의 부평초 같은 인생을 살아 서는 안되겠습니 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도와주실 수 없으며 결국 버림받는 인생 이 되고 말 것입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
나치 독일의 처참한 유대인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많이 듣고 있습니다. 이 수용소에 대한 사실을 관찰하고 기록한 프랭클 박사는 그의 저서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에서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은 몸도 곧 쇠약해졌다. 그러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려운 처지에 상관없이 자신은 물론 절망에 허덕이는 다른 사람들까지 격려하여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해져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씨앗
성 구 "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 39:7)
한 사람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지하 독방에 갇히게 되었다. 지하 독방 안에서 그는 고독과 절망에 몸을 떨었다. 그가 절망과 고독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자신이 그토록 사랑을 쏟았던 가족과 친구들도 모두 그를 외면해 버린 것이다. 그는 독방 벽에 글을 적어 놓고 세상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 신은 없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감방의 갈라진 틈새로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새싹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향해 강인한 생명력을 보이며 자라고 있어다. 그는 간수가 주는 물을 아껴서 매일매일 새싹에 물을 주었다. 며칠 후 새싹은 자라 꽃망울을 맺었고, 드디어 아름다운 파란 꽃을 피웠다. 억울한 죄수는 생명의 신비에 감동해 무릎을 꿇고 벽면에 적어놓은 글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곳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놓았다. " 하늘이 준 생명의 신비, 이제 나는 외롭지 않다. 인생은 고독한 여행이다. 그러나 여행의 동반자를 만나면 행복하다. 나는 결코 고독하고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하늘의 소중한 선물이다." 소망의 씨앗이 그의 마음에 싹을 틔우고 아름다운 소망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축복 받은 소망
어니스트 색클톤 경이 남극을 탐험하였을 때 자신의 밑에 있었던 사람들을 불가피하게 코끼리 섬에 남겨 두어야만 하는 경우를 당하였다.
그는 곧 그들을 영국으로 데려갈 것을 약속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연기되어야만 하였다. 그가 그들에게 가려고 할 때는 공교롭게도 바다는 얼어붙어 자기 휘하에 거느린 사람들은 고립되어야만 하였다.
세 번이나 그들을 구조하려 하였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마침내 그는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하여 빙판에 구멍을 뚫으며 갔다. 조그만 배로 섬에 도착하자 그는 자기 휘하의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았을 뿐 아니라 배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매우 기뻤다.
그들은 곧 안전하게 집에 도착하였다. 모든 흥분이 가라앉자 어니스트 경운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승선할 수 있었는가를 물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 그들의 지도자가 잠을 깨우며 "항상 갈 준비를 해두시오. 오늘 주인이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라고 외쳤다고 말하였다.
이 세상에 다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색클톤 경이 코끼리 섬에 들어간 것보다 더욱 확실한 것이다. 구세주가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는 약속은 그분의 말씀과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축복 받은 희망" - 반드시 이루어질 희망"-인 것이다.
소원과 소망의 차이
세상에는 소원을 품고 사는 사람과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소원'이나 `소망'이나 비슷한 말 같지만 본질은 엄연히 다릅니다.
소원은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생겨나지만 소망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생겨납니다.
또한 소원을 품은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쉽게 좌절하지만, 소망을 품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그 어려운 상황을 선하게 이끌어 가실지를 기대합니다.
소망을 품은 사람은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삽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의 삶에는 생기가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 안에서 참소망을 안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 당신은 소원을 품고 사십니까, 소망을 품고 사십니까 ?
소망은 최선의 소유이다. 소망이 없는 사람만큼 완전히 처절하게
소망 잃음이 어찜이냐
한 소년이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간호사는 소년을 안정시킨 뒤 소년에게 우유를 한 잔 가져다 주었습니다.
소년은 그 우유가 무척 마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컵 가득히 들어 있는 우유를 마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망설였습니다.
소년은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때문에 우유 한 잔을 가지고 늘 동생들과 나누어 먹어야만 했습니다.
소년은 용기를 내어 간호사에게 물었습니다.
"저, 누나 이 우유 다 먹어도 돼요 ?"
그러자 간호사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또 많이 있으니까 더 먹고 싶으면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선물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용기없고 소망없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 지혜, 건강 등을 가지고 당신의 소망을 마음껏 펼쳐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주님, 저희로 주님께서 내려 주신 그 풍성하신 은혜를 충분히 누리게 하 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선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떠한 선물을 주셨는지 파악하라. 그리고 그 선물을 소망 가운데 선하고 즐겁게 누려라.
최악의 상태서도 간직 할 소망
탈무드에 이런 얘기가 있다. 랍비 아키바가 나귀와 개와 램프를 가지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해가 지자 한 채의 헛간에 들어가 잠을 자기로 한다. 아키바는 책을 읽으려고 램프를 켰는데 그것이 그만 바람에 꺼지고 말았다. 또한 그가 잠든 사이에 여우가 개를, 사자가 나귀를 잡아먹었다
아침이 되자 랍비는 램프만을 들고 가다가 어떤 마을에 도착했는데, 자세히보니 그 마을에는 도둑이 쳐들어와 사람들을 몰살시켜 버린 것임을 알았다. 만일 램프가 꺼지지 않았으면 랍비는 도둑에게 들켰을 것이며 개와 나귀가 살아 있었으면 짖는 소리에 또 도둑에게 발견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잃은 덕분에 자신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랍비는 `최악의 상태에서도 인간은 희망을 잃어서는 안된다. 나쁜 일이 좋은 일에 연결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함을 깨달았다.
영생의 소망
A.D 124경 헬라에 살았던 아리스테테스라는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기독교인의 죽음에 대해서 편지를 썼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죽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당시의 헬라나 로마 사람들은 모두가 죽음에 대해 무서웠다.
그는 기독교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스도인이 죽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마치 혼인하러 가는 사람을 배웅하듯 감사 찬송으로 죽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떠나 보낸다. 죽는 사람도 감사를 하고 다른 이들은 결혼식에서 에스코트를 하듯이 어디론가 호송해 주었다.`
어머니의소망
내 어머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이 세상의 아무것에서라도 나는 기쁨을 찾을 수 없다. 내가 이 땅에 무엇을 하며 무슨 목적으로 더 머물러야 하겠니? 내가 이 세상에서 바라던 소망은 다 이루었구나. 너도 아는 바와 같이 내가 이 땅 위에서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은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보고자 함이었다.
내 하나님께서는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이 소원을 훌륭히 이루어 주셨구나. 이제 나는 네가 이 세상에 속한 행복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내 눈으로 보았으니 이 땅에서 더 이상 더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니?`
소망 잃음이 어찜이냐?
한 소년이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간호사는 소년을 안정시킨 뒤 소년에게 우유를 한 잔 가져다 주었습니다. 소년은 그 우유가 무척 마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컵 가득히 들어 있는 우유를 마셔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망설였습니다. 소년은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때문에 우유 한 잔을 가지고 늘 동생들과 나누어 먹어야만 했습니다. 소년은 용기를 내어 간호사에게 물었습니다. "저, 누나 이 우유 다 먹어도 돼요 ?" 그러자 간호사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또 많이 있으니까 더 먹고 싶으면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선물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용기없고 소망없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 지혜, 건강 등을 가지고 당신의 소망을 마음껏 펼쳐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주님, 저희로 주님께서 내려 주신 그 풍성하신 은혜를 충분히 누리게 하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선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떠한 선물을 주셨는지 파악하라. 그리고 그 선물을 소망 가운데 선하고 즐겁게 누려라.
소망의 줄
영국 런던에 있는 케이 미술관에 가보면 프레드릭 왓츠라는 분이 그린 “소망”이란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 둥그런 지구 위에 어떤 약하게 보이는 한 여자가 앉아있습니다. 그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눈에 수건을 싸매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 여자의 손에는 조그마한 비파가 하나 있습니다. 그 비파의 줄은 본래 일곱 줄이었으나 여섯 줄은 다 끊어지고 한 줄만 남았습니다. 캄캄해서 앞을 보지 못하고 여섯 줄은 끊어졌지만 이 여자는 한 줄을 가지고 비파를 계속해서 탑니다.
그 줄은 소망의 줄이올시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믿던 모든 줄이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소망의 줄만 끊어지지 아니하면 우리 인간은 계속해서 모든 것을 이기고 나갈 수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끝까지 끊어지지 아니하는 소망의 줄이 어떤 줄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께 둔 소망의 줄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의 줄을 다 붙잡았읍니까? 이 소망은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그 믿음, 인간의 생명은 죽음의 최후가 아니고 영원히 살아있는 영생이라는 것을 믿는 그 믿음에서 이 불멸의 소망은 오는 것입니다.
부활은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죽음을 완성으로 이끄는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 역사적 사건이란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결국 인생의 목적도 의미도 없는 셈입니다. 언젠가 키에르케고르는 그와 같은 생각을 부드럽고 편편한 돌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편편한 돌을 연못의 수면 위로 던지게 되면 춤을 추듯 물 위를 미끄러져 나아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더니 물 속으로 쑥 가라앉아 버리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수면이 잔잔해집니다. 마치 이것은 사후의 소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극작가인 사무엘 베케트는 '호흡'이라는 희곡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막이 오르면 쓰레기가 잔뜩 어질러져 있는 무대가 등장합니다.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아기의 첫 울음 소리로 시작한 연극은 한 노인의 임종의 헐떡거림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막이 내려옵니다. 여기서 베케트가 말하고자 한 요지는 인생은 허무하고, 존재는 덧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벧전 1:3, 4). 이것은 한 마디로 소망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
중세 시대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절망을 ‘대죄’로 여겼다. 그러나 어리석은 낙관주의도 역시 치명적인 죄이며, 그것을 기독교적 소망으로 대치하려는 시도도 마찬가지 죄이다. 선천적으로 낙관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아침 일곱 시에 휘파람을 불어 자기 차에 합승하는 모든 사람들을 화나게 한다. 그러나 그들이든 우리든 단순한 낙관주의가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이라는 말의 의미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낙관주의는 “걱정하지마!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망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끝까지 사태를 다룰 수 있는 보다 훌륭한 능력을 갖게 될 것이야”라고 말한다. 낙관주의는 “기운 내”라고 말하고, 소망은 “하나님을 바라보라. 너의 구원이 다가오고 있다”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소망은 광야에서, 사막에서, 유랑생활 중에 선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백일몽’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현실을 대면해야 하는 미래를 향하여 분투하는 ‘소망을 동반한 믿음’이다. 기독교적 소망은 아브라함과 같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랄”수 있으며 고난 중에 인내하는데, 인내는 인격을 낳고 인격은 소망을 이룬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러한 소망의 묘지에서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하나의 중심적인 소망을 굳게 붙잡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고 바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 안에 집약된 소망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근거 위의 소망
하나님을 믿지않는 철학자 쟝 폴 사르트르(1905-1980)는 말년(1980)년 병상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절망이 나를 유혹하려 고 또 온다…나의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더럽고, 악하고, 소망이 없다. 이것이 절망 속에 죽어가는 이 노인의 절규이다. 그러나 나는 절망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나는 소망을 갖고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망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사르트르는 죽었습니다. 나는 그가 혹시 소망의 근거를 발견했는지 궁금합니다. 성경 말씀은 소망에 관한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의 빈 무덤과 부활하신 예수님(고전 15)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망에 관해 반석과 같은 확실한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절망 가운데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살전 4:13-14).
거룩함에 대한 소망
영국의 작가 톨키엔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양은 자기 목자를 닮아가는데, 다만 서서히 닮아간다고 한다." 속 사람이 새로워지는 일, 곧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은 한 순간이 아니라 일생이 걸립니다.
어거스틴 (354-430)은 이러한 과정이란 하나의 치명적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과도 같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창을 빼내는 것과 그 다음에 오랫동안 정성드려 치료하여 상처를 낫게 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치유란 우리의 옛 생각과 생활방식이 사라지고, 우리가 매일 새로와져서 점점 더 구주를 닮아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후 4:16).
이렇게 새로와지는 것은 자신의 노력뿐 아니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순종을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인격에다 두고 우리를 예수님 닮아가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다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을 확신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루하루 그날의 어려움이 있고 우리는 할 일을 안하거나, 안 할 일을 하고서 하루를 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바심을 내서는 안됩니다. 현재는 불완전하나 우리는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좌절하는 날도 있으나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의의 소망', 곧 완전해지는 날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갈 5:5). 어느날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이며 또한 주님과 같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신 주님처럼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요일 3:2).
소망 잃음이 어찜이냐 ?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 1:3.
한 소년이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간호사는 소년을 안정시킨 뒤 소년에게 우유를 한 잔 가져다 주었습니다. 소년은 그 우유가 무척 마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컵 가득히 들어 있는 우유를 마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망설였습니다. 소년은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때문에 우유 한 잔을 가지고 늘 동생들과 나누어 먹어야만 했습니다. 소년은 용기를 내어 간호사에게 물었습니다.
"저, 누나 이 우유 다 먹어도 돼요 ?"
그러자 간호사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또 많이 있으니까 더 먹고 싶으면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선물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용기없고 소망없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 지혜, 건강 등을 가지고 당신의 소망을 마음껏 펼쳐 보십시오.
영원한 소망
Milan의 대성당에는 들어가는 문이 셋이 있는데 첫째 문 아취에는 장미꽃과「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는 글이 새겨있고, 둘째 문에는 십자가요 「모든 고통도 잠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셋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자적한 글귀입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요,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에 영생의 문제는 해결하기 전에는 참 만족과 평안이 없습니다.「모든 육체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라」(벧전1:24∼25) 인간은 우리 죄를 대속하여 십지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영생을 얻고 천국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소망(2)
초록색 페인트를 칠한 막대기에 메뚜기 한마리가 먹을 것을 찾아 올라갑니다. 올라가도 올라가도 먹을 것이라곤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맨 꼭대기에 올라가서는 허망한 듯이 사방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람은 영적 존재요, 영원한 존재이므로 아무리 높은 벼슬을 하고 수천억의 돈을 벌어도 영의 문제와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참 만족과 평안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굶주린 군중에게 5병 2어의 기적으로 먹이신 후에도 육신을 살리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님을 역설했습니다. "내 아버지 의 뜻을 아들을 보고 믿는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6:4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47, 48)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3) 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당신의 영원한 운명은?
카잘스의 소망
세계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아흔다섯살이었을 때 기자가 물었다.“선생님께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로 손꼽히는 분입니다.그런 선생님께서 아직도 하루에 6시간씩 연습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카잘스는 활을 내려놓고 대답했다.“왜냐 하면 지금도 제가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75세에 순례의 길을 떠났다. 모세는 애굽에서 신음하고 있던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80세에 부름을 받았고 120세에는 자기 민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갈렙은 85세에 공격부대의 지휘관이 되었으며 욥은 노년에 새로운 가문을 이루었다.
나이나 환경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인이라도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기억하고 노력하는 자에게는 소망이 주어지게 된다. 소망의 사람은 숙명론을 극복한다. 그는 모든 것을 하늘이 주신 기회로 알고 활용하기에 환경이나 시대가 자기의 기회를 앗아가지 못하게 한다. 우리의 이 땅이 다시금 소망의 땅이 되기를 꿈꾸어본다.
소망, 꿈에 관한 금언
0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이마에 써 주신 글은 '소망'이다.(빅톨위고)
0 희망은 이를 추구하는 비참한 자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J. 플레처)
0 영웅의 참으로 위대한 점은 한 번도 절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존슨)
0 구름 뒤에는 별빛이 숨어 있고 소나기를 뚫고서 햇살을 비쳐 오나니, 모든 것
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위하여 소망을 남겨 두셨다.(존 그린리프 휘터)
0 희망은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는 지렛대이다. 희망이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이룰 수 없으며, 희망이 없이는 인간 생활이 영위될 수 없다.(헬렌 켈러)
0 낙심은 바보들의 종말이다.(디즈레일리)
0 야망은 모든 숭고한 생각을 성장시키고 열매맺게 하는 보석이다.(잉글리쉬)
0 모든 일에 절망하는 것보다 소망을 가지는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낫다. (괴테)
0 소망은 고난보다 강하다.
0 해도 해도 안될 때에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 보라. 하나님께서 판단하여 이뤄 주실 것이다.(빌리 그래함 목사)
0 희망 없는 일은 헛수고이고, 목적 없는 희망은 지속될 수 없다.(사무엘 코울리지)
0 희망을 가슴에 품었을 때 사람은 평안히 잘 수 있다.(발자크)
0 희망은 굳센 용기이며 새로운 의지이다.(루터)
0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자기 아집인 이 병은 영원히 죽는 것이며, 죽어
야 할 것이면서 죽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주는 일이다.(키에르케 고르)
0 가시나무를 심으면서 장미를 기대해서는 안된다.(필페이)
0 희망과 인내는 가장 믿음직한 자리요, 가장 부드러운 방석이다.(리챠드 E. 버튼)
0 위대한 희망은 위대한 인물을 만든다.(토마스 풀러)
0 눈물은 종종 하늘을 향해 멀리 볼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망원경이 된다.(헨리워드 비처)
0 세상 사람에게는 동,서,남,북의 4방향만 있지만 크리스천은 위로 향한 5방향이 있다.(完)
0 작은 영혼에 커다란 소망을 넣어 줄 수는 없느니라.(제킨 로이드 존스)
0 야망! 그것은 선과 악의 강력한 원천이다.(에드워드 영)
0 국가의 운명은 청년의 교육에 달려 있다.(아리스토텔레스)
0 희망은 믿음의 어버이이다.(바톨)
0 희망은 불행한 사람의 제2의 혼이다.
0 희망은 믿음의 어버이이다.(바톨)
0 야망! 그것은 선과 악의 강력한 원천이다.(에드워드 영)
0 야망은 모든 숭고한 생각을 성장시키고 열매맺게 하는 보석이다.(잉글리쉬)
0 인간이 소망과 투지를 잃어버리면 그 사람은 죽음의 선고를 받은 것이다. (장개석)
0 사닥다리는 한 계단씩 높아진다.(G. 허버트)
0 희망은 이를 추구하는 비참한 자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J. 플레처)
0 청소년은 저축 은행과 같아야 한다.
0 희망이 결여되어 있는 자는 살아 있는 가장 가련한 인간이다.
0 승리를 희망하지 않는 자는 이미 진 것이다.
0 절대절명의 피할 길 없는 불행은 극히 드물다. 아직 벗어날 구멍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스스로 절망해 버린다. 인생은 희망에 속느니 보다 훨씬 더 절망에 속고 있다.(동양의 격언)
0 우리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움직여 나
아 가고 있는 방향이 중요한 것이다.(홈름스)
0 너의 행동은 낮게 하고, 너의 희망은 높이 가지라.(G. 허버트)
0 희망이 없으면 노력이 없다.(S. 존슨)
0 인간의 최대의 행복은 희망이다.(L. 셰퍼)
0 희망은 사상의 아버지이다.(세익스피어)
0 생각하는 것이 인생의 소금이라면 희망과 꿈은 인생의 사탕이다. 꿈이 없다면
인생은 쓰다.(리튼)
0 희망은 모든 일을 부드럽게 하며, 사랑은 모든 일을 쉽게 한다.(라므레)
0 희망과 가난은 어머니와 딸이다. 사람은 이 딸과 수다를 떠는 통에 어머니 편을 잊기 쉽다.(J. 파울)
0 희망은 가난한 자의 빵(양식)이다.(탈레스)
0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어서의 각양의 심려를 위한 보상으로써, 우리에게 희망과 수면을 주셨다.(볼테르)
0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바 어떠한 사업, 또는 어떠한 목적에 대한 열정과 희망이 있다. 그 열정과 희망이 깨어졌을 때, 사람은 불행에 빠진다. 당신의 희망과 뜻을 파괴하는 망치가 바로 당신의 그릇된 세계관이나 인생관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릇된 도덕관, 그릇된 생활 습관에서 그 원인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0 희망은 애국심(愛國心)의 근원이다.(로이드 조지)
0 당신이 희망하는 일보다는, 원치 않는 일이, 더 자주 일어나는 법이다.(플라우 투스)
0 최선의 것을 희망하되, 최악의 경우에 대해서 준비하라.(영국 격언)
0 생명이 지속되는 한 희망이 있다.(세르반테스)
0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
0 희망은 영원한 기쁨이다.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와 같은 것이다. 해마다 수익이 오르며, 결코 써버릴 수 없는 확실한 재산이다.(R.L. 스티븐슨)
0 거대한 소망이 우리들을 인간으로 만든다.
0 소망 가운데서 기뻐하며 고난을 참고 항상 기도하십시오
0 소망은 태양과 같아서 그 소망을 향해서 걸어 나아가면 우리가 진 짐의 그림자는 뒤로 드리우게 된다.(사무엘 스마일즈)
0 희망이 조금도 없는 사람은 살수가 없다. 희망 없이 사는 것은 살기를 중지한 것이다. 단테는 지옥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들어가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린 자이다.(도스토예프스키)
0 자기의 소망을 피조물이나 인간에게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토마스 아켐피스)
0 세상 사람들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소망이 있다."라고 말하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산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내가 죽어도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로버트 라이튼)
0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5)
0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오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시71:5)
0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0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잠10:28)
0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31)
0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4-25)
0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0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행23:6)
0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히6:19)
0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0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은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6-7)
0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시78:7)
고통의 과거는 소망의 미래로
세계의 삼대 참회록에 꼽히는 것은 어거스틴의 참회록, 루소의 참회록, 톨스톨이의 참회록인데, 그것들은 한결같이 지난날의 어리석었던 생활을 돌이켜보면서 아파하고 새 인생으로 거듭난 변화된 생활에 대하여 노래한 작품들입니다. 우리는 가끔 과거에 너무 집착하여 현실에 더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과거가 아름답지 못했다고 해서 미래도 아름답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아내와 사별한 신학자 C. S. 루이스에게는 일기를 쓰는 것이 유일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슬픔 속에서 그의 영혼의 상태를 정돈하여 정신병자가 되지 않게 한 것은 기도와 간구였고 그 속에서 집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절망과 비탄 속에 시작한 그의 영의 세계는 폐허와 같은 절망의 심연을 넘어서서 신앙을 재발견하게 했으며 결국 「슬픔을 다하다」 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급강하하던 절망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면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시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요란한 소리는 기도와 간구의 소리입니다. 절망의 바닥에 추락하는 루이스의 처절한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던 것입니다. 거대한 곰과 사나운 사자가 내 몸과 살을 찢는 것같은 고통이라도 그것을 이겨내면 결국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당신이 절대 절명의 시간이요, 소망이 없는 절대 절명의 공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에게 절대 소망의 문입니다.
성숙을 향해 전진하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相合)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16.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2,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3,34.
예수님을 믿고 막 거듭난 사람은 갓난아이와도 같습니다. 때문에 영적인 갓난아이는 육적인 갓난아이와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육적인 갓난아이가 올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양식과 깨끗한 공기와 규칙적인 운동과 알맞은 휴식과 쾌적한 환경과 사랑어린 보살핌과 정기적인 진찰이 필요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갓난아이도 올바
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말씀이라는 양식과 기도라는 깨끗한 공기와 배운 말씀을 실천하는 규칙적인 운동과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휴식과 좋지 않은 친구나 습관을 멀리 하는 쾌적한 환경과 성도간의 교제를 통한 사랑 어린 보살핌, 그리고 영적 건강상태를 규칙적으로 점검하는 정기적인 진찰이 필요합니다. 만약 이와 같은 것들이 골고루 채워진다면 머지 않아 건장한 영적 거인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성숙을 향해 전진하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 고전 15:33,34.
예수님을 믿고 막 거듭난 사람은 갓난 아이와도 같습니다. 때문에 영적인 갓난 아이는 육적인 갓난 아이와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육적인 갓난 아이가 올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양식과 깨끗한 공기와 규칙적인 운동과 알맞은 휴식과 쾌적한 환경과 사랑어린 보살핌과 정기적인 진찰이 필요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갓난 아이도 올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말씀이라는 양식과 기도라는 깨끗한 공기와 배운 말씀을 실천하는 규칙적인 운동과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휴식과 좋지 않은 친구나 습관을 멀리 하는 쾌적한 환경과 성도 간의 교제를 통한 사랑어린 보살핌, 그리고 영적 건강
상태를 규칙적으로 점검하는 정기적인 진찰이 필요합니다. 만약 이와 같은 것들이 골고루 채워진다면 머지않아 건장한 영적 거인으로 성장 할 것입니다.
성숙을 향해 전진하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 으로 연락하고 상합(相合)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16.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 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2,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3,34. 예수님을 믿고 막 거듭난 사람은 갓난 아이와도 같습니다. 때문에 영적인 갓난 아이는 육적인 갓난 아이와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육적인 갓난 아이가 올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양식과 깨끗한 공 기와 규칙적인 운동과 알맞은 휴식과 쾌적한 환경과 사랑어린 보살핌과 정기적인 진찰이 필요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갓난 아이도 올바 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말씀이라는 양식과 기도라는 깨끗한 공기와 배운 말씀을 실천하는 규칙적인 운동과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휴식과 좋 지 않은 친구나 습관을 멀리 하는 쾌적한 환경과 성도 간의 교제를 통한 사랑어린 보살핌, 그리고 영적 건강상태를 규칙적으로 점검하는 정기적 인 진찰이 필요합니다. 만약 이와 같은 것들이 골고루 채워진다면 머지 않아 건장한 영적 거인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마땅히 치뤄야 할 수많은 훈련 들을 겁내지 말게 하시고, 또한 게으르지 않게 하시옵소서." 당신은 주님 안에서 성숙을 향해 열심히 전진하고 계십니까 ? 성숙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전진하는 신앙
본문: 히 12:1-3
리빙스턴이 선교사로 떠나게 될 때 다른 한 선교사가 찾아와서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이 리빙스턴이 대답하기를 "앞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아무 데로 가도 좋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앞으로 전진만 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고, 앞뒤만 재다가 해가 지는 그러한 인생이 결코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전진하는 용기가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신앙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전진하고 발전되는 것이 있어야지, 예수를 믿은지 일년이 지나가고 이년이 지나가고 아니 평생을 믿어도 제자리 걸음만 하는 상태라고 하면 그는 필경 생명이 없는 신자가 아니면 신앙에 깊은 병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가 제일 기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자의 신앙 상태가 자꾸 성장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를 믿은지 몇 년이 지나도록 도무지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것을 볼 때에는 마치 병들어 자라지 못하는 자식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부모의 심정과 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생활에는 변화가 있어야 하고 전진이 있어져야 정상적인 신앙인인 것입니다.
전진과 상승
비행기와 다른 수송 기관 사이에는 하나의 커다란 차이점이 있습니다. 자동차나 기관차 같은 것은 아무런 위험 없이 정지할 수도 있고 또 엔진을 가동시켜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또한 후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에는 후진 장치가 없습니다. 때문에 후퇴할 수가 없습니다. 쉽게 정지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비행기가 그 원동력과 추진력을 잃어버린다면 곧 떨어져 폭발하고 말 것입니다. 비행기를 위한 유일한 안전은 바로 ‘전진’과 ‘상승’입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성도의 삶이 정지한다면 그 순간 한없이 굴러 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올라감 같은 생활,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무거운 쇳덩어리임에도 불구하고 파란 하늘을 날렵하게 날아오르는 비행기처럼, 빠르고 힘찬 생활을 살고 싶을 때 우리가 취해야 할 단 하나의 방법은 전진뿐입니다. 그리고 상승입니다. 만약 멈추거나 비뚤어지고 처지기 시작하면, 그 순간 위험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요즘 나의 기도 생활은 전진하고 있는가? 요즘 나의 헌신 생활은 정상인가? 내가 주일 예배나 하나님의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는 자세는 바른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중단없는 전진
실패의 연속이 결국은 성공으로 바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832년에 그는 실직자가 되었습니다. 1833년에 사업을 시작했으나 실패했습니다.
1836년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도 그 해에 신경성 질환으로 고생했습니다. 1844년에는 국회 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습니다. 1849년에 토지 등기소 직원으로 취직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1856년에는 상원의원 선거에서도 낙선했습니다. 또 부통령 지명전에서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1860년, 그는 마침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는 시민전쟁으로 북군에게 배척받고 남군에게는 원망을 사는 가운데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혼자 모든 결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집무실에 따로 기도실을 만들어 놓고 기도했습니다. 대통령직은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그는 자객의 총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바로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공적인 대통령 중의 한 사람인 에이브러햄 링컨이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이 보장받을 수 없는 광야의 행진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야 합니다. 약속의 소망을 따라 게으르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끝없이, 중단 없는 전진을 해야 합니다.
전진과 중단
아무래도 어떤 결단을 내리기는 해야 겠는데, 그게 도무지 기분에 거슬리는 일
이 때로는 있다. 이런 경우에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다:
` 끝장이다! 만사 휴의다! 인젠 아무 해결책도 없다.!` 하는 경우가 그 하나
다. 이것은 마치 외국으로 이주한 사람이 고국의 옛 환경으로 되돌아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태도이다.
혹은 용기를 잃지 않고 베르그송과 더불어 이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다: `방법
은 오직 하나, 갈 수 있는 데 까지 가 보자. 내가 할 일은 모름지기 출발이며 전
진이다.`
전진하는 신앙
본문: 히 12:1-3
리빙스턴이 선교사로 떠나게 될 때 다른 한 선교사가 찾아와서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이 리빙스턴이 대답하기를 "앞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아무 데로 가도 좋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앞으로 전진만 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고, 앞뒤만 재다가 해가 지는 그러한 인생이 결코 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전진하는 용기가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신앙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전진하고 발전되는 것이 있어야지, 예수를 믿은지 일년이 지나가고 이년이 지나가고 아니 평생을 믿어도 제자리 걸음만 하는 상태라고 하면 그는 필경 생명이 없는 신자가 아니면 신앙에 깊은 병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가 제일 기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자의 신앙 상태가 자꾸 성장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를 믿은지 몇 년이 지나도록 도무지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것을 볼 때에는 마치 병들어 자라지 못하는 자식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부모의 심정과 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생활에는 변화가 있어야 하고 전진이 있어져야 정상적인 신앙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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