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호칭에 관한 근본적인 이해 : ‘복’과 ‘축복’
“복과 축복”은 아주 좋은 말이다. 그래서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특히 중국 사람들은 복 받기를 좋아하는 민족이다. 춘절이면 ‘福’자를 현관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여기저기에 더덕더덕 부친다. 춘절이 지나면 ‘福’자를 떼어 낼 것도 같은데, 대부분이 다음해 춘절이 올 때까지 일 년 동안 그대로 두는 가정이 많다. 다음 춘절이 오면 새로운 것으로 다시 교환하여 붙인다.
어떤 집은 ‘福’자를 거꾸로 부치기도 한다. 처음 본 사람은 ‘福’자를 거꾸로 잘못 부친 것으로 착각하여 복은 고사하고 오던 복도 다라날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이 ‘福’자를 거꾸로 붙이는 이유를 알면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중국 사람들이 ‘福’자를 거꾸로 붙이는 것은 한 번 들어온 복은 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지역마다 그 의미는 상이하다. 이 정도면 중국 사람들이 얼마나 복 받기를 좋아하는 민족인가를 알 수 있다.
“복과 축복”의 대해 근본적으로 이해를 하려면 먼저 성경적인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복과 축복”은 창조주 하나님과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은 사랑 다음으로 많이 사용된 단어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자치하고 있는 중요성도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과 축복”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 속성(屬性)을 바르게 알아야 성경적인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으며, 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
첫째는 단어(사전)적 의미이다. 사전은 “복과 축복”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명사적 의미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단어를 해설하고 있는 사전적 뜻이 중요한 요건이다. 그래서 “복과 축복”을 근본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단어적 의미를 아는 것이 첫 번째 요건인 것이다.
둘째는 성경의 기록이다. 성경은 복과 축복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성경적인 “복과 축복”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서 사용한 실례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복과 축복”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실례를 아는 것이 두 번째 요건이다.
셋째는 “복과 축복”에 대한 호칭의 문제이다. “복과 축복”에 호칭의 문제는 첫 번째 요건과 두 번째 요건과 함께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복과 축복”에 호칭의 문제는 이 문제에 대한 전체적인 문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복과 축복” 중요한 요건이 된다.
복과 축복의 관한 강의를 끝까지 듣거나 본서를 다 읽었을 때 이 세 가지 부분을 바르게 이해하며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복과 축복”에 대해 무심코 사용해 왔으며, 그리고 얼마나 잘못 사용했는가도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은 “복과 축복”에 대해서도 우리가 흔히 소홀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까지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다음 단락부터는 세 가지 요건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복과 축복”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一) 단어의 의미 : 명사적, 낱말의 의미
명사적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전에서 해석해 놓은 뜻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복과 축복”에 대해 사전(중국자전, 국어사전)은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가? 물론 성경을 해석하는데 사전적 의미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필자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과 축복”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알려면 우선 낱말 의미를 아는 것이 첫 번째 요건이다.
1. 사전의 해석들 : 국어사전을 중심으로
‘복(福)’ [명]: 평안하고 만족한 상태와 그의 따른 기쁨, 좋은 운수, 행복.
‘복(福)’ [명]: 생활에서 누리게 되는 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 또는 거기에서 얻는
기쁨과 즐거움.
‘복(福)’ [명]: ① 행복, 아주 좋은 운수, 복조(福祚, 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
② <기독>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상태
‘축복(祝福)’ [명]: (남을 위하여) 행복을 빎, 또는 비는 일
‘축복(祝福)’ [명]: 남 또는 남의 일이나 미래가 행복하기를 빌거나 그것을 기뻐하여 축하함.
2. 낱말의 해석들 : 성경 낱말사전
‘복(福)’ [히] (berakah), [영] bless, blessing [명]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특별용어의 하나. 성서에서 말하는 축복이란 사람들에게 번영, 행복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호의, 또는 은혜를 말하고 있다.
‘복(福)’ [영] Beafituds, [히] ‘이쉬레’, [헬] ‘마카리오스’ 성경은 모범적인 경건한 사람에게 축복을 선포할 때 ‘복 있는 자’, 또는 ‘복이 있을지어다.’
한국의 국어사전들은 ‘복’과 ‘축복’을 각각 구분하여 달리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낱말사전은 ‘복’과 ‘축복’을 구분하지 않고 동시에 해설하고 있다. 특히 아가페 낱말사전에서는 명사로서 ‘복’은 해설하고 있으나 ‘축복’은 아예 해설을 하지 않고 있다. 대신에 ‘축복하다.’는 동사만 해설하고 있다. 그리고 교학사 국어사전은 ‘복(福)’을 두 가지로 해설하고 있는 것은 아주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二) 복과 축복의 성경의 기록 :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
성경에는 “복과 축복”이 자주 나오는데 서로 교호(交互)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어떤 때는 ‘복’으로 어떤 때는 ‘축복’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 교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복과 축복”에 대해 혼동해서는 안 된다.
1. “복과 축복”에 대한 성경의 기록
성경에서 ‘복’은 약 327회(구약 276회, 신약 51회) 정도 나온다. 반면에 ‘축복’은 93회(구약 77회, 신약 16회) 정도 나온다. 그렇다면 신구약 성경에 “복과 축복”은 약 420회가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호와이나 이스라엘 이름이나 지역을 제외한 명사로서는 ‘사랑’ 다음으로 “복과 축복”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 만큼 “복과 축복”은 사람에게 중요하며 비중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복과 축복”은 하나님과 그 만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복과 관련하여 더 좋은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주시기를 좋아 하실 뿐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복 주시기를 작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복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창조 사역에서부터 육적인 복과 영적인 복을 동시에 주셨다.
1.1 “복과 축복”이 신구약 성경에 처음으로 사용된 용례
구약 성경에 처음으로 ‘복’이 사용된 곳은 공중의 새들과 물속에 사는 고기들을 창조한 넷째 날이다. 이것은 어쩌면 충격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사람보다 먼저 다른 피조물에게 먼저 복을 주셨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복의 개념하고는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복은 사람보다 다른 피조물에게 먼저 사용되었으나 유일하게 단 한 번만 사용되었다. 이것은 성경에서 사용된 ‘복’의 사례 중에서 첫 번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을 사람 외에 다른 피조물에게 먼저 사용한 것은 사람보다 먼저 창조했기 때문이며, 다른 피조물에게 유일하게 단 번만 사용한 것은 다른 피조물은 복 받을 대상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은 복된 창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복이 사용된 곳은 사람을 창조한 때이다. 이후에 복과 축복은 사람에게만 적용되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복과 축복은 하나님과 사람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축복’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소명 때 가장 먼저 사용되었으며, 또한 가장 의미 있게 사용 되었다(창12:3).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영육간의 복으로서, 이 세상 사람들이 앞으로 받을 복의 근원, 곧 모델이다. 두 번째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할 때 역시 축복을 사용하였다(창14:19).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를 하시면서 처음으로 ‘복’을 사용하셨다. 산상 설교에서 연속적으로 무려 아홉 번을 사용하셨다(마5:3-11). ‘축복’도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사용하셨다. 오천 명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면서 축복(축사)하셨다. 성경에서 “복과 축복”은 교호적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1.2 “복과 축복”이 성경에 단어적으로 사용한 용례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창27:36)
“이제 주께서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두시기를 기뻐하시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복’을 주셨사오니 이 ‘복’을 영원히 누리리이다 하니라.” (대상17:27)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창14:19)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 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취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창28:6) |
성경에는 “복과 축복”이 교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과 축복”은 각각 다르게 사용하고 있으며 완전히 구별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곳은 한 구절에 ‘복’이 두 번, 세 번 사용되었으며, “축복”도 한 구절에 두 번 사용되었다. 그리고 한 구절에 “복과 축복”이 동시에 사용된 곳도 여러 곳이 있다. 이러한 용례들은 성경에는 “복과 축복”이 아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27장에는 “복과 축복”이 23회가 나온다. 그래서 창세기 27장과 신명기 28장과 더불어 시편 1편 등을 “축복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세기 27장은 야곱과 에서의 축복권 쟁탈전이 벌어진 장면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야곱이 생각하는 축복과 에서가 생각하는 축복은 서로 다른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오는 축복, 즉 혈통적인(육신적인)축복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 즉 하늘로부터 오는 영적인 복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축복권 쟁탈은 야곱이 자처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 리브가의 주도아래 참여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리브가는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계시적으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창25:23). 그래서 남편 이삭이 큰 아들 에서에게 축복해 주겠다는 말을 듣자마자 야곱에게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만약 리브가에게 이러한 계시적인 것이 없었다면 장자 에서의 축복권을 차자 야곱에게 주려는 일을 감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어 | 구약성경 | 신약성경 |
복 | 창1:22; 출20:11; 레25:21; 민6:24; 신1:11;수17:14 삿13:24; 룻2:4 삼상23:21; 대상13:14; 대하31:10 욥22:21; 시1:1, 2:12; 잠3:13; 전4:27; 사19:25 렘4:2; 겔34:26; 단12:12; 욜2:14; 암9:4; 미1:12 학2:19; 말3:10,12,15 등등 (276회) | 마5:3-11,13:16;눅6:20;요13:17 행3:25; 롬4:7; 고전7:40 갈3:9, 14; 엡1:3; 딤전1:11 히6:7,14, 7:1,6,7; 약1:12,25 벧전3:14, 4:14; 계1:3 등등(51회) |
축복 | 창27:4, 28:1; 출12:32; 레9:22; 민6:23; 신10:8 수8:34; 삼상2:20, 삼하6:18, 8:10; 왕상1:47;대상16:2 대하6:3; 욥29:11; 시62:4; 슥8:13 등등(77회) | 마26:26; 막8:7; 눅2:34; 롬12:14 고전4:12; 히11:20, 21, 12:17 벧전3:9 등등(16회) |
복과축복 | 창12:3; 14;19; 민6:27; 시109:17, 시118:26(10회) | |
복과복 | 창17:16, 49:25(5회); 민22:6; 신26:15; 삿5:24; 삼하7:29 대상4:10, 17:27; 시115:12(3회), 사19:25; 렘33:9 겔34:26(3회); (20회) | 눅6:21; 히6:14; 벧전3:9 (3회) |
축복과 축복 | 창27:41, 28:6, 49:26(3회) (3회) | 롬12:14; 고전10:16 (2회) |
기타 | 민6:27; 신10:8, 21:5; 삼하6:18; 대상16:2 23:13; 시129:8 (7회) |
2. “복과 축복”의 기록의 대조
한 구절에 대부분이 “복”과 “축복”이 각각 사용되었으나, 어떤 구절은 한 구절에 “복”과 “축복”이 함께 사용되었다. 그리고 어떤 구절은 “복”과 “축복”이 각각 두 번씩 사용되었다. 심지어는 한 구절에 “복”이 세 번 혹은 다섯 번까지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복”과 “축복”이 사용된 실례는 참으로 다양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복”과 “축복”은 하나의 원리(공식)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다음 단락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三) 복과 축복에 호칭의 문제 : 성경적 이해
“복과 축복”에 문제는 서론과 본론에서 누차 말한 것처럼 본 주제의 핵심 연구사항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결론부분에 해당된다. 그래서 여기서 다룰 소주제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이번 단락에 해당되는 서론으로서 “복과 축복”에 대한 호칭의 문제점을 제기할 것이며, 둘째는 문제해결을 위한 본론 부분으로서 “복과 축복”에 대한 성경적인 고찰을 할 것이며, 셋째는 단어적인 고찰을 할 것이다. 이 세 가지가 동시에 다루어질 때 호칭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1. “복과 축복”에 호칭의 대한 문제점 제기
“복과 축복”에 호칭의 문제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누차 지적해 온 것처럼 “복과 축복”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심코(잘못)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경은 무심코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복과 축복”을 무심코 사용한 사례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어떤 공식을 적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여기 ‘공식’이라는 말은 변할 수 없는 ‘진리’와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복과 축복”에 호칭은 문제점으로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 낱말 사전의 잘못된 해설이나 비록 일부이지만 각종 주석도 나름대로 “복과 축복”에 호칭의 문제에 한 몫을 해 왔다고 본다. 왜냐하면 성경 낱말 사전이나 성경 주석은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로 활용하고 있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2. “복과 축복”의 대한 성경적 고찰
강사가 지금까지 “복과 축복”의 관한 것을 논하면서 가장 두드러지게 강조한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에서 “복과 축복”을 사용할 때는 ‘진리’와 같은 어떤 ‘공식’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성경은 한 번도 이 공식을 잘못 사용한 사례나 벗어난 일도 없다는 것이다.
“복과 축복”의 대한 성경적 고찰은 성경의 기록, 즉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에서 일차적으로 언급되었다. 몇 가지 실례를 들어 살펴보려고 한다.
2.1 첫 번째 실례 : 복
첫 번째는 한 구절에 복만 사용한 실례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8)
하나님께서 창조 현장에서 복을 주시는 장면이다. 여기 ‘그들’은 당시 아담과 하와를 지칭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으로 확대해석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아담은 사람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복은 주시는 분으로(공급자), 아담(사람)은 복을 받은 자(수혜자)이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20:11)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복되게 하시는 장면이다. 여기 ‘안식일’에 복 받을 대상자(수혜자) 역시 사람이다. 안식일에도 하나님은 복은 주시는 분으로(공급자), 안식일 지켜서 복을 받아야 하는 수혜자는 사람이다. 본 절도 복과 축복의 공식이 적용되고 있다.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신1:1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공급하시는 장면이다. 여기 ‘너희’은 이스라엘 백성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은 주시는 분으로(공급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을 받은 자(수혜자)이다. 본 절도 복과 축복의 공식을 적용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잠10:22)
잠언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지혜서이다. 지혜서인 잠언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복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이 가장 좋은 복이다. 잠언서 기자는 하나님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복은 주시는 분으로(공급자),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자(수혜자)이다. 본 절도 복과 축복의 공식을 적용하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16:17)
본 절은 그 유명한 베드로가 신앙고백 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복은 주시는 분으로(공급자), 반면에 베드로는 복을 받은 자(수혜자)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20:29)
본 절은 예수님은 믿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하나님의 복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복은 주시는 분으로(공급자), 믿는 모든 사람은 복을 받은 자(수혜자)이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계22:14)
창세기 1:28절은 복의 관한 첫 번째 기록이라면 계시록 22:14절은 마지막 기록이다. 여기 ‘두루마기’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리키고 있다. 사도 요한은 말씀을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비유하고 있다(요1:1-4). 사도 요한은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영원한 복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계시록을 마치고 있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복은 주시는 분으로(공급자),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한 복을 받은 자(수혜자)이다. 본 절도 복과 축복의 공식을 적용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분이다.”
설문지 두 번째에 들어 있는 항목이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이 항목은 누구나 맞는 것으로 체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을 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복을 주시는 분(공급자)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으로 호칭되어야 한다.
2.2 두 번째 실례 : 축복
두 번째는 한 구절에 축복만 사용한 실례이다.
“나(1-1)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1-2)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1-3)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2-1)게 ‘축복’하게 하라.” (창27:4)
본 절은 아버지 이삭이 장자 에서에게 축복하기 위해 부자간에 나눈 대화이다. 여기에 축복을 하는 자와 축복을 받을 자(수혜자)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다. 물론 이름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 대신에 사람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로 되어 있다. 제일 인칭은 세 번 나오며, 제이 인칭은 한 번 나온다. 여기 제일 인칭 ‘나, 내’는 축복하는 자로서 아버지 이삭을 말하며, 제이 인칭 ‘네’는 축복을 받을 자로서 아들 에서를 말한다. 그러므로 축복하는 자나 축복 받을 수혜자는 모두 사람인 것이다. 본 절은 복과 축복의 공식이 적용되고 있다.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레9:22)
아론은 동생 모세를 잘 보필(협력)하여 그 후손들이 제사장 직분을 받은 영예를 얻게 되었다. 레위기 8장은 아론의 아들과 그 자식들이 소개되고 있으며, 9장은 처음으로 아론이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본 절은 아론이 제사장 직무를 수행한 이후에 백성들에게 축복을 하고 있다. 여기서 축복을 하는 자는 아론(사람)이며, 축복을 받을 수혜자는 이스라엘 백성(사람)이다. 본 절에도 축복하는 자나 축복받은 수혜자는 모두 사람이다. 본 절도 복과 축복의 공식을 적용하고 있다.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수14:13)
여호수아는 갈렙과는 아주 특별한 관계이다. 애굽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중에 두 사람만이 가나안에 입성했다. 가나안 정복에 성공한 지도자 여호수아는 땅 분배를 해야만 했다. 본 절은 지도자 여호수아가 갈렙에게 땅을 분배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축복 하는 자는 여호수아(사람)이며, 축복을 받는 수혜자는 갈렙(사람)이다. 그러므로 본 절에서도 축복을 하는 자나 축복 받는 수혜자는 모두 사람이다. 본 절도 복과 축복의 공식을 적용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롬15:29)
여기서도 축복을 하는 자와 축복을 받은 자(수혜자) 모두 이름 대신에 인칭 대명사로 나온다. 여기 ‘내가’는 사도 바울을 말하며, 너희는 로마교회(성도들을)를 말한다. 사도 바울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로마교회를 방문하게 된다면 충만하게 축복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여기 축복권자는 바울이며, 축복을 받을 수혜자는 로마교회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축복하는 자나 축복 받을 수혜자는 모두 사람인 것이다. 본 절 역시 복과 축복의 공식을 적용하고 있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고전10:16)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우상 숭배하는 일을 하지 말 것을 권면하면서 예수님이 붙잡히기 전날 밤에 직접 집례하셨던 성찬을 상기시키고 있다(고전10:14-17). 사도 바울의 의도는 진정한 축복은 고난의 잔과 연관시키기 위해서 축복을 두 번 언급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고난의 잔, 곧 보혈의 피를 생각하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 숭배하는 일을 멀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 ‘우리’는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하고 있는 일행을 말한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의 고난의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축복할 자들을 말한다. 여기 축복하는 자는 바울 일행이며, 축복을 받은 수혜자는 고린도교회 신자들, 고난의 참여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다. 본 절도 축복하는 자나 축복받을 자(수혜자) 는 모두 사람이다. 본 절도 복과 축복의 공식을 적용하고 있다.
“하나님, 2013년 우리 가정을 축복해 주세요.”
설문지 아홉 번째에 들어 있는 항목이다. 여기서 설문지를 보고 자기가 체크한 것과 어떻게 다른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기 바란다. 이 물음은 맞는 것인가? 틀린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분이다.” 이 항목도 누구나 맞는 것으로 체크했을 것이다. 그러나 축복의 주체, 즉 축복을 하는 자나 축복받은 자는 모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복과 축복을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사용하게 되고(과거),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며(현재), 앞으로도 그렇게 사용할 것이다(미래).
복의 실례에서 복을 주시는 분, 즉 공급자는 하나님이시며, 복을 받는 수혜자는 사람이다. 반면에 축복의 실례에서는 ‘축복’의 주체는 사람이다. 축복을 하는 자나 축복을 받는 수혜자 모두 사람이다. 여기서 많은 목회자들이 혼동하고 있다. 다음 단락인 “복과 축복”의 단어적 고찰에서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복과 축복”은 언어적으로 그 의미가 각각 다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성경적으로도 각각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복과 마찬 가지로 신구약 성경에 ‘축복’이 100회 이상 기록되었지만, 이 원칙이 한 번도 벗어난 일이 없다. 그래서 필자는 이 사실을 “진리와 같은 공식”이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다.
2.3 세 번째 실례 : 복과 축복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 살펴볼 것은 ‘복과 축복’의 실례이다. 세 번째 실례는 한 구절 안에 복과 축복이 동시에 사용된 경우이다. 이것은 ‘복과 축복’에 대해 더 확실하게 대조가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12:3)
본 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으로서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에게까지 복을 주시겠다는 언약적인 약속의 말씀인 것이다.
본 절도 축복하는 자나 축복받을 자의 이름 대신에 인칭 대명사로 되어 있다. 여기 ‘너’라는 두 번의 제이 인칭 대명사는 복을 받을 수혜자 아브라함을 말하고 있으며, ‘내’라는 제일 인칭 대명사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자’라는 두 번의 제삼 인칭 대명사는 아브라함을 축복(저주)하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며(공급자), 복을 받을 수혜자는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한 구절 안에서도 복을 주시는 분과(하나님), 축복하는 자(사람)와 복을 받을 수혜자(사람이)가 확실하게 대조되고 있다. 본 절에서도 축복하는 자나 축복받을 수혜자는 모두 사람이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창14:19)
본 절은 십일조를 한 아브라함에게 멜기세덱이 축복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주체시며, 멜기세덱은 축복하는 사람이며. 그리고 아브라함은 복을 받을 수혜자이다. 한 구절에서도 복과 축복의 공식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 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창27:27)
본 절은 아버지 이삭이 차자인 야곱에게 축복하는 장면이다. 이삭은 야곱에게 가까이 가서 입을 맞추고 축복하고 있다. 이삭은 아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을 축복하고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삭은 축복하는 자이며,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삭은 자기가 복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삭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축복으로 하나님께 요청한 것이다. 본 절도 복과 축복의 공식이 적용되고 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4:10)
본 절은 그 유명한 야베스의 기도로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다. 야베스는 지금 ‘복에 복’을 더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여기도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공급자이시며, 야베스는 복을 받은 수혜자이다. 야베스는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복에 복을 더 해달라고 간구했던 것이다. 야베스는 결코 축복을 요청한 것이 아니다. 본 절에서도 하나님은 복 주시는 공급자이시다. 야베스도 확실하게 이 공식을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시115:12)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창49:26)
전자는 복을 세 번 언급하고 있으며, 후자는 축복을 세 번 언급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복을 주시는 주체(공급자)가 하나님이심을 선명하게 노래하고 있다. 여기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복 받을 수혜자들을 말한다.
창세기 49장은 야곱의 장엄한 유언장이다. 본 절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에게 축복하는 장면이다. 여기 야곱이 하고 있는 축복의 실상은 축복의 근원은 자기 조상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 ‘부여조’는 할아버지(아버지)등 자기선조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기 두 구절에서 복을 세 번이나 언급한 시편 기자는 복의 근원을 하나님과 연관시키고 있다. 반면에 축복을 세 번 언급하고 있는 야곱은 축복을 자기 조상들과 연관시키고 있다. 본 절에서도 하나님은 ‘복’과 사람은 ‘축복’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가지 실례에서 첫 번째는 한 구절에 ‘복’만 기록하고 있는 용례이며, 두 번째는 ‘축복’만 기록한 것이며, 세 번째는 ‘복과 축복’이 동시에 기록되어 있는 용례이다.
첫 번째 실례에서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복의 수혜자는 사람이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사람이 ‘복’을 공급하는 사례는 한 번도 없다. 사람은 항상 복의 수혜자였지 공급자가 아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신구약 성경에 ‘복’이 300회 이상 기록되었지만, 이 원칙이 한 번도 벗어난 일이 없다. 그래서 필자는 “진리와 같은 공식”이라고 강조한 하고 있는 것이다.
3. “복과 축복”의 대한 언어적 고찰
명사적(낱말적)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사전의 뜻을 알아야 한다. “복과 축복”의 호칭의 문제는 성경적인 고찰에서뿐만 아니라 언어적 고찰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 부분은 단어적(명사적, 낱말적)의미에서 언급되었다. 그래서 본 단락에서는 핵심적인 것만 간략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한국의 다양한 국어사전들은 ‘복’에 대해 약간 다르게 해설하고 있으나 주된 해석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생활면에서 평안하고 만족한 상태와 그의 따른 기쁨과 좋은 운수와 행복”이다 둘째는 “일상생활에서 누리게 되는 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감”이다. 반면에 ‘축복’은 “남을 위해서 미래가 행복하기를 빌거나 그것을 기뻐하여 축하하는 것”이다.
두 단어는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복’은 평안, 만족, 행운, 기쁨, 행복이 임한 상태, 즉 비록 작은 복의 형태라도 임하여 누리는 것이라면, 축복은 남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비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복의 중심적인 뜻은 ‘평안’이나 ‘행복’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으며, 축복의 중심적인 뜻은 남을 위해 ‘비’는 것, 즉 남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비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언어적으로 “복과 축복”은 분명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 낱말이다. 그렇다면 두 낱말은 그 뜻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하여 “복과 축복”의 호칭은 더욱 그래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복과 축복”의 의미(뜻)에 따라 더 명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복과 축복”은 무심코 사용하는 말이 아니다.
복(福)과 축복(祝福)에 관한고찰
<들어가는 말>
빛과 소금, 소금과 빛
복과 축복, 축복과 복
이 두 말은 기독교의 전문용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독교에서 실제적으로 많이 쓰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소금이나 복과 축복을 무심코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목회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편적으로 목회자의 영향을 받아 무심코 사용하고 있다.
빛과 소금, 소금과 빛은 단어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순서적 의미도 단어적 의미만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무심코 사용하고 있다. “복과 축복”은 순서적 의미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단어적 의미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심코 사용하고 있다.
“복과 축복”은 단어적 의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강사가 신학교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하는 말이다. “복과 축복을 사용함에 있어서 단어적 의미만이 아니라 신론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게 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신학적 문제를 갖게 된다.”
‘복과 축복’은 신론에까지 문제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심코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이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강의가 끝날 즘에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처음으로 들은 신학도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일 것이다. 그래서 즉각적인 반응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학생들이 충격을 받은 일과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제자들이 원장의 강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복과 축복”이 도대체 무슨 의미이기에 신론에까지 문제가 야기될 수 있는가?
이제 이글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첫 번째 반응은 강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충격적인 반응은 없겠지만 그러나 두 번째 반응은 혹시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복과 축복은 아무렇게나 쓰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사용해서는 더더욱 안 되는 말이다. 그래서 복과 축복에 관한 성경적인 고찰이 요구되는 것이다.
“복과 축복”
여러분은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무심코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사용하고 있습니까? 강의 전에 “복과 축복”에 관한 설문지를 먼저 작성하는 것이 유익이 될 것입니다.
서론에서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경에서 “복과 축복”이 사용될 때는 어떤 ‘공식’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여기 ‘공식’은 ‘원리(진리)’와 같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다.
“복과 축복”에 관한 설문조서
(12문항)
순번 | 설문항목(주제) | 강의 전 체크 | 강의 후 체크 |
1 |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축복해 주신분이다. | ||
2 |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분이다. | ||
3 | 하나님은 이 시간 여러분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 ||
4 | 하나님은 복 받을 자에게 축복해 주신다. | ||
5 | 하나님은 남을 위해 진실로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신다. | ||
6 | 사람은 사람에게 축복할 수 있다. | ||
7 | 사람은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있다. | ||
8 | 축복은 목회자나 평신도 누구나 할 수 있다. | ||
9 | 하나님 2013년에 우리 가정을 축복해 주세요. | ||
10 | 여호와(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
11 | 나는 그동안 복과 축복을 무심코 사용했다. | ||
12 | 나는 그 의미를 알고 심중하게 사용했다. |
(본 설문지는 강의나 자료를 보기 전에 한 번 해보는 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결코 정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체크 방법은 'O, X'로 한다. 자기 생각이 맞거나 그동안 사용해 왔으면 'O'로 표기하고 아니면 'X’자로 표기하면 된다.)
“복과 축복”의 관한 열 두 개의 설문을 스스로 체크하면서 어떤 마음으로 했는가? 그리고 어떤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갔는가? 정답을 요구하는 설문은 아니라고 하지만 체크하는데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복과 축복”은 단어적 의미를 넘어서 신론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가 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복과 축복”의 관한 설문지는 여러분이 그동안 “복과 축복”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가름해 줄 것이다. 그리고 “복과 축복”에 관한 설문지는 강의 다 마친 후에 다시 체크해 보면 본 강의의 의미, 설문지를 사전에 작성한 의미.“복과 축복”에 관해 그동안 사용했던 의미, 그동안 무심코 사용한 의미, 진정한 의미에 대해 동시에 알게 될 것이다.
<본 론>
“복과 축복”이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흔하게 쓰고 있는 말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이 말이 신론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그리고 그 진실은 어디까지일까? 이 의문점을 시작으로 “복과 축복”에 관한 고찰을 구체적으로 하려고 한다.
一. 복의 일반적인 이해 : 유형, 순서, 호칭
우리는 먼저 ‘복’에 관한 일반적인 이해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복에 대해 바르게 알 수가 없다. 복의 유형, 순서, 호칭 이 세 가지는 복을 이해하는데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일반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강사는 이 세 가지 요소를 ‘복의 삼박자’라고 말한다.
1. 복의 유형(종류)
복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영적(하늘)인 복이며, 다른 하나는 육적(세상)인 복이다.
1.1 육적인 복.
이 세상에서 누릴 복으로서 물질, 건강, 부모와 자녀, 명예로부터 얻는 복을 총체적으로 말한다. 육적인 복은 여기서 열거한 것 외에도 아주 다양하다. 육적인 복이라고 해서 영적인 복, 즉 신앙과 별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질적인 복이 영적인 복과 다르다고 해서 하나님과 전혀 연관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적인 복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이 진정한 복이다. 그러므로 육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는 영적인 삶이 중요하다.
한국의 가나안 농군학교의 설립자이신 고 김용기 장로는 “누구나 복 받기 위해서는 복 받을 짓을 해야 진정으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장로님께서 말씀하신 ‘복 받을 짓’이란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하면서 경건하게 사는 자기 삶을 말한다.
1.2 영적인 복.
이 세상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까지 받을 복을 말한 것으로서 신앙, 은사, 능력, 예배, 경건, 사랑, 죄의 문제 등 신앙생활로부터 얻는 복을 말한다. 영적인 복도 육적인 복만큼 매우 다양하다. 영적인 복 역시 육적인 복과 무관 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영(혼)은 육이라는 그릇 안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육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는 영적인 삶이 중요하듯, 영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도 육적인 삶이 중요하다.
영적인 복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 깊은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성경에서 ‘의롭다’는 말과 ‘경건하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와 ‘깊은 관계’를 뜻하는 말이다. 여기 ‘의롭다’는 말은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으로써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경건하다’는 말은 정직한 마음과 믿음을 대변한 것으로써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육적인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이 가장 복된 복이며, 좋은 복이다. 아브라함의 복이 세상에서 근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 복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영적인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이 가장 복된 복이며, 좋은 복이다.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와 ‘깊은 관계’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인격적인 삶, 곧 거듭난 삶을 말한다(고후5:17).
2. 복의 순서(중요성과 필요성)
다음은 복의 순서이다. 육적인 복이 우선인가? 영적인 복이 우선인가? 양자 중에 보편적으로 육적인 복보다 영적인 복을 우선적으로 말한다. 예수님도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 중에서 영적인 것을 우선시 하라고 말씀하셨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인 것을 먼저 추구하면 육적인 것은 필요에 따라 자연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 받는 원리로서 영적인 복을 먼저 받으면 육적인 복은 후에 덤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돈을 달라면 즉석에 돈을 주며, 명에를 달라고 한다고 해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밀쳐내고 그 자리를 준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조금이라도 오해해서는 안 된다.
복의 순서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복의 순서에 있어서 복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 있다. 복의 순서에는 복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함께 내재(內在) 되어 있는 개념이다. 복의 순서에는 반드시 복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대비(對比)되어 있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복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바르게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두 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간략하게 핵심 부분만 다루려고 한다.
2.1 복의 중요성.
복의 중요성은 앞에서 언급한 것 같이 복의 순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육적인 복보다 영적인 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복의 순서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중요성에 있어서도 육적인 복과 영적인 복은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육적인 복은 이 세상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제한적이다. 육적인 복은 죽음 이후에는 어떤 것도 누릴 수 없으며, 작은 것 하나라도 다음 세상(무덤)으로 가지고 갈 수 없다. 한국의 현대그룹의 창시자였던 고 정주영 회장은 작고했을 때, 현대 자동차에서 좋고 값비싼 차를 많이 생산하고 있었지만 자동차 한 대도 가지고 가지 못했다. 심지어는 살아계실 때 자기 고향인 북한이 못 살기 때문에 황소를 지원하면서, 황소 천 마리를 실고 갔던 화물차 수 십대를 모두 북한에 주고 왔다. 그러나 진작 자기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좋은 차는 고사하고 당시 가장 싸고 흔한 자동차 한 대도 가지고 가지 못했다. 빈몸으로 갔다. 이것은 육적인 복은 이 세상에서만 누릴 수 있는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을 단면(斷面)적으로 보여준 좋은 실례이다.
반면에 영적인 복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까지 지속되기 때문에 영원하다. 그래서 육적인 복보다 영적인 복이 우선일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권면하고 있는 말씀을 한 번 상기해 보기 바란다(롬2:16). 여기 ‘그 날은’ 종말론적인 의미로서 새 예루살렘이 임하는 구원의 날이다. ‘그 날에’ 상급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그리고 여기 ‘상’은 하늘에서 받을 상급으로서 영적인 복, 영원한 복을 말한다.
2.2 복의 필요성.
그러나 복의 필요성은 복의 순서 중에서 중요성과는 약간 다른 개념이다. 육적인 복과 영적인 복은 양자가 모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양자의 복은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면서 추구해야 한다. 만약에 육적인 복만 필요하여 추구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누릴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반대 현상이 있게 될 것이다. 반면에 영적인 복만 추구한다면 이 세상에서 너무 힘들게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양자의 복은 균형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물질이 없다면 가정생활, 자녀교육, 신앙생활, 문화생활 등을 누리기는커녕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고통 그 자체일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물질과 땅(토지가)이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고 경제적인 지표(指標)라고 할 수 있는 돈(물질)은 생활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더 중요하게 필요한 것이다. 결코 가난하게 사는 것이 경건의 삶이 아니다. 앞 단락에서 언급하였듯이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순결하게 사는 삶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사는 것이 진정한 경건의 삶이지 가난하게 사는 것이 경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의 복의 필요성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물질의 복, 세상적인 복을 받아야 한다. 구약의 족장들이 받은 물질의 복의 의미도 되새겨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영적인 복과 물질의 복을 함께 주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영적인 선물이며, 복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다른 피조물에게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에게만 주셨기 때문이다. 이 보다 큰 영적인 복은 없다. 인간의 구속의 문제도 이러한 영적인 복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구속의 섭리는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죄로 물들어 있는 인간의 구속은 영적인 복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시고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며, 다스리며, 민족을 번성하여 가정을 이루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누릴 육적인 복을 말한다. 여기 ‘다스리라’는 말씀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통치 개념이다. 많은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가장 으뜸(머리)이라는 말이다. 우주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통치의 복은 이 세상에서는 가장 으뜸이 되는 복이며 가장 좋은 복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통치는 야망적이며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적인 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세계를 의식한 자연섭리적인 정직한 통치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을 사람이 통치한다는 것은 복 중에 복이다.
다른 하나는 여기서 말하는 통치는 이 세상에서만 누릴 수 있는 제한성이 들어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육적인 복은 이 세상이라는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 앞으로 더 좋은 통치의 복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육적인 복은 이 세상에서 끝이 난다. 결코 천국에서 가서도 사람이 통치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목회자들이지만 육적인 복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물질 만능주의자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데는 물질이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물질(돈)을 만능으로 취급해서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현대는 돈이면 모든 것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기업인은 물론이며, 정치인들도 보편화되어 있으며, 군사 무기도 뇌물로 오가고 있으며, 교육계도 돈으로 성적이 좌우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가장 공의로야 할 재판장에서도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이러헌 현상들은 돈 앞에 자유하면서 누리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증거이다. 이 역시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이런 시대를 예언적으로 예고하고 있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딤전3:3).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6:10).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3:2)
사도 바울은 이 세 구절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고자 한 것은 사람들은 돈을 너무 사랑한다는 것이다. 여기 ‘사람들이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면서 돈을 사랑하지 말 것을 거듭거듭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심중하게 받아드려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도 돈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사도 바울과 같은 개념으로 히브리서 기자도 돈을 사랑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13:5)
여기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는 말은 세 가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부덕하게 돈을 소유하지 말 것을 권면하는 것이며, 둘째는 돈을 부도덕하게 사용하지 말 것을 권면한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며 살라는 권면이다.
물질의 복으로 상징되는 돈은 이 세상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부를 위해 축적해서는 안 되며,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서는 더욱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돈을 너무 사랑하여 일만 악의 뿌리로 사용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는 더더욱 안 되는 일이다.
물질의 복, 세상적인 복은 긍정적인 좋은 면과 부정적인 나쁜 면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면은 말씀으로 지켜나가야 하며 부정적인 면은 기도로 물리쳐야 한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말씀과 기도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복의 필요성은 중요성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지만 양자는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여기 ‘균형’이라는 말은 복의 필요성 때문에 복의 중요성을 망각해서는 안 되며, 반면에 복의 중요성 때문에 필요성에 너무 지나치게 매달려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복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필요성의 너무 매달리게 되면 돈의 부정적인 요소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쉽게 부각될 수 있다. 그러면 돈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 교만해 지며,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은 자명(自鳴)해 질 것이다.
3. 복과 축복의 호칭
복의 유형과 복의 순서에 대해서는 보편적으로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복과 축복”의 호칭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실상은 혼동하거나 아예 모르고 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혼동하고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복과 축복”에 대해 모르고 무심코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복의 호칭은 본 주제의 핵심이다. “복과 축복”은 단어적 의미를 넘어서 신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바로 복의 호칭의 문제를 염두하며 나온 말이다. 복의 호칭은 일반적으로 ‘복’과 ‘축복’(혹은 ‘축복’과 ‘복’) 두 가지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떨 때 ‘복’을 사용하고 어떨 때 ‘축복’을 사용하는 것일까? 이것은 “복과 축복”의 호칭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가장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떨까? 이 물음이 전제되지 않는 한 ‘복’과 ‘축복’에 대해 바르게 알 수 없다. 성경은 어떨 때는 ‘복’으로, 어떨 때는 ‘축복’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사용하고 있다. 성경의 기자들은 “복과 축복”을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심코 사용하지 않고 어떤 공식을 적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은 “복과 축복”에 대해 바르게 알 수 있는 두 번째 전제이다.
축복의 호칭에 관한 특별한 사항
“축복”의 호칭은 특별한 사항, 즉 특별한 경우가 있는데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문제이며, 둘째는 예수님이 호칭했던 축복의 문제이다.
1.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문제
축복은 단어적으로 “남을 위해 비는 행위”이며,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예수님)이 아니라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축복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만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이름으로도 축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이 문제에 직면하여 성경에 있는 실례들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성경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도 축복하는 사례가 몇 군데 나오고 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신10:8)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올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 (신21:5)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삼하6:18)
“아므람의 아들들은 아론과 모세니 아론은 그 자손들과 함께 구별되어 몸을 성결케 하여 영원토록 지극히 거룩한 자가 되어 여호와 앞에 분향하며 섬기며 영원토록 그 이름을 받들어 축복하게 되었으며” (대상23:13)
“지나가는 자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시129:8)
이 구절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있는 구절들이다. 대제사장 급 아론과 레위 지파에 속한 보편적인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왕인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여기서 두 가지 아주 특징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축복의 주체로서 모두 사람들이 축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축복의 공식이 전혀 벗어나지 않고 있다. 다른 하나는 축복하는 사람들의 신분이 평민이 아니라 모두 기름을 부은 자 직분자이다. 물론 시편 129편은 무명의 시(诗)이기 때문에 ‘우리’라는 복수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시편 129편 전체의 문맥으로 보아 고통 받은 공동체,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변할 수 있는 기름 부음을 받은 지도자급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람은 왕, 선지자, 제사장 순이다.
구약사적으로 볼 때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은 기름 부음을 받은 지도자급이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사도 베드로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은(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인 제사장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누구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유의할 것은 목회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기도는 할 수 있지만 축복권을 소유한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축복을 남용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특히 목회자가 축복권을 남용하게 되면 신자들은 잘못된 기복주의 신앙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잘못된 축복권 남용은 금물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듯 이웃을 위해 여호와(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 기도를 하면 되는 것이다.
2. 예수님이 호칭했던 축복의 문제
예수님도 ‘축복’이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하셨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마26:26)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 (막8:7)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막10:16)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6:28)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눅24:50)
예수님은 ‘축복’을 다섯 번 사용하셨다. 앞 단락에서 언급한 것처럼 축복은 사람에게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지 하나님(예수님)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성만찬 석상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서, 어린 아이들 앞에서, 저주하는 자들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축복’을 하셨다.
우리는 사람과 관련되어 있는 축복을 예수님이 사용한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예수님은 하늘의 능력을 가지고 계셔서 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인데 축복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라는 의문을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 두 인격을 가지고 계신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두 인격에 대해 가장 심오하게 밝히고 있다(빌2:6-8).
사도 바울이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이며 하나님이 되신다. 예수님이 축복한 것은 신성 곧 하나님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인성, 즉 사람으로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주거나 기적을 나타내려고 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축복을 빌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중대한 일을 앞두고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께 간구했으며,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에게는 축복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복과 축복’의 공식(진리를)을 그대로 작용하셨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미명 새벽 시간에 기도하는 모습 속에서, 감람산에서 철야하는 기도 속에서, 대제사장적 기도 앞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신성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에 능력을 스스로 소유하고 있으며, 그리고 능력을 언제든지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께 항상 간구하는 기도를 했으며, 하나님의 복 받을 자에게는 축복을 하셨다. 이것은 인자(성부)로서 성부 하나님과 구별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도이며, 사역의 겸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때로는 축복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이다.
<결 론>
빛과 소금, 소금과 빛
복과 축복, 축복과 복
양자는 아무 생각 없이 임의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전자는 각각 그 의미의 중요성도 있지만 순서의 의미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후자는 순서의 의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각각 그 의미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성경에 사용된 “복과 축복”에 대한 용례를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복과 축복”은 서로 교호적 사용되었다.
(2) ‘복’은 사람보다 다른 피조물에게 먼저 사용하셨다.
(3) “복과 축복”은 사랑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이 기록되었다.
(4) “복과 축복”은 공식(원리)에 의해 의도적으로 사용하였다.
(5) ‘복’은 하나님이 공급자이시며, 사람은 복을 받는 수혜자이다.
(6) ‘축복’은 사람에게만 연관되었지 다른 피조물에게는 관련되어 있지 않는다.
(7) “복과 축복”은 한 구절에 한 번에서 다섯까지 동시에 최고로 많이 기록되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필자는 ‘복과 축복’의 호칭의 문제를 다루면서 거듭거듭 강조한 것들이 있었다. 첫째는 ‘복과 축복’을 무심코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며, 둘째는 ‘복과 축복’은 어떤 공식(진리)에 의해 기록 또는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며, 셋째는 ‘복’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으며, ‘축복’은 사람과 관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복과 축복’의 호칭의 문제는 신론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첫 번째부터 셋 번째까지는 본론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략하게 부연 설명만 하려고 한다. 그러나 마지막 네 번째는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다루고 마무리를 하려고 한다.
첫째로 ‘복과 축복’을 무심코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은 지금 현재 사용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이 부분은 단어적(명사적, 낱말적)의미와 성경의 기록(사용된 용례)된 호칭의 문제(성경적 이해)에서 다루었다. ‘복과 축복’은 무심코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 의미와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둘째로 ‘복과 축복’은 어떤 공식(진리)에 의해 기록 또는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은 세 번째로 다루고 있는 ‘복’은 하나님에게만 관련되어 있으며, ‘축복’은 사람에게만 관련되어 있는 공식을 말한다. 예컨대, “하나님 저를 축복해 주세요.”는 틀린 말이며, “하나님 저에게 복을 주세요.”가 맞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의 복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 분이다.”는 맞는 말이지만, “하나님은 우리 가정의 축복해 주시는 분이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네 번째로 ‘복과 축복’의 호칭의 문제는 신론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동안 구체적으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말은 쉽게 자주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 진상을 밝힐 때가 왔다. 그래서 그 핵심적인 것을 말하려고 한다.
여기서 ‘복과 축복’의 단어적인 뜻과 성경에 사용한 용례를 먼저 상기해 보아야 한다. 복은 하나님만 줄 수 있는 것이며(공급자), 반면에 축복은 ‘남을 위하여 행복을 빎, 또는 비는 일’로서 복을 받을 수혜자를 말한다. 예컨대, “하나님 저를 축복해 주세요.” 여기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 되는가?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더 큰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신에게 빈 다음에 복을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도 누군가에게 축복해야 만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복과 축복’의 호칭의 문제는 신론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한 것이다.
성경은 ‘복과 축복’을 300회 이상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을 축복하시는 분으로 말씀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무심코 하나님을 축복하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축복하시는 분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 3장에서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하듯 우리도 무심코 성경 말씀을 변경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누차 말했던 것처럼 ‘복과 축복’의 원리를 성경은 한 번도 벗어나거나 무시하거나 잘못 사용한 용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심코 너무 쉽게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복과 축복의 호칭의 문제는 신론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복과 축복’의 호칭의 문제를 흑백 논리나 신학적으로 따지며 문제 삼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따져 본 사실도 없다. 예배 시간에 기도자가 “하나님 축복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면, 저도 ‘아멘’을 한다. 이것은 흑백의 논리로 ‘복과 축복을 따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강사가 ‘복과 축복’의 호칭을 가지고 신론에까지 문제를 거론하며 강조한 것은 강의 외에는 별로 거론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학생(지도자)들에게 ‘복과 축복’에 대한 바르게 가르쳐야 바르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배울 때 심각하게 들어야 오래 기억하며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복과 축복’에 대한 호칭을 신론의 문제로까지 거론하고 있을 뿐이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욥1:10)
본 절은 욥의 시험 때문에 하나님과 사단이 나눈 대화의 내용이다. 욥은 우스 땅에서 당대 가장 부자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가장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욥이 엄청난 부자가 된 것은 까닭 없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원인은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에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 당시 사단의 생각이다.
본 논제에 있어서 핵심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심지어는 사단도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사단도 하나님은 결코 축복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단도 하나님은 최고의 신으로서 하나님보다 능력 있는 신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하나님은 복의 공급자이시며, 사람은 복을 받는 수혜자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축복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사람으로부터 축복을 요청 받았을 때 복을 주시는 분이다. 그리고 사람은 이웃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축복 기도하는 것이지 복을 주거나 축복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웃이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비는 행위, 즉 축복의 간구를 여호와(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 논제의 결론이다. 그러므로 복과 축복의 호칭을 바르게 알고 사용해야지 무심코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결론 중에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시115:12-13)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
하였도다.”
(시1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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