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존재로 보는 로마서와 언약의 로마서

하나님아들 2020. 1. 16. 12:19

존재로 보는 로마서와 언약의 로마서

 

 

Ⅰ 서론

 

 

로마서를 '존재'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과 '언약'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

 

존재입장에서 로마서를 봐버리면, 로마서란 인간 위주의 종교적 해명이 되고 만다. 즉 '인간 구원'을 위하여 인간들에게 납득이 되는 인간의 지혜의 서신이 되고 만다. 신을 의식하고 종교적 성향을 지닌 모든 인간들에게는 상식과 지식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구원이 가능해져버린 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미 구원이 되기에 지옥이라든지 인간에 대한 저주의 영역을 설 자리가 없다.

 

 

반면에 언약입장에서 로마서를 봐버리면, 구약 이스라엘 민족이 갖는, 선택성이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즉 인간이 신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여서 그 선택된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기에 이것은 인간 편에서 철저하게 구원이 차단된 양상이다. 구원이란, 인간의 요구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와 약속을 자진해서 성취해 나가는 열매로서 제공 되어지는 것이다.

 

 

존재입장에서 보면 인류는 둘로 나누어질 여지가 전혀 없는 반면에, 언약 입장에서 보면, 애초부터 인간들은 두 영역으로 갈라지는 환경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하나님의 본질상 속성으로 인해 피조물은 인간은 두 세계로 영원히 운명이 굳혀지는 것이다. 로마서가 과연 어느 관점을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은 성경을 대하는 사람의 타고난 운명에 따라 결정될 문제이다.

 

 

Ⅱ 본론

 

 

1. 인간은 왜 자기 존재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가?

 

 

사람은 자기에게 감동하며 사는 자들이다. 사람이 가장 크게 기뻐하는 경우는 자기 존재의 가치를 새삼 인정하고 확인할 때이다. 그것은 사람들은 '은총'으로 감지한다. 즉 자기가 자신의 근원을 부인하지 못할 때, 사람은 자기 존재가 품고 있는 신비로움에 경외심을 갖게 마련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인간 앞에 놓여 있는 하나의 대상이 되기에 그 대상체를 분석하고 판단하고 그리고 결국에는 소유하려고 은근히 쏘아보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을 하나의 사물로 대할 수 없음을 안다. 왜냐하면 자기를 분석하려는 그 자기를 분석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것은 신비의 영역이다.

 

 

 

그런데 이 신비는 '내 안'에 있는 신비도 아니요 '내 앞'에 있는 신비도 아닌 이유는, 아예 '나'라는 지대조차 의미를 상실해 버리게 만드는 신비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나를 잠식하고, 나를 통제하고, 나를 점령하고, 나를 포함시켜 버리는 전부와 공동의 기반으로서 존재의 신비는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신을 생각하고, 이런 입장에서 구원과 내세와 바르게 함과 유익함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존재의 신비 속에서 따로 '나'를 정립하는 의식적 노력의 일환이다. 그런데 은밀하게 조장해 내는 '자아'는 그 자체로 절대성을 띠지 않을 수 없다. 즉 '절대적인 자아'가 되지 아니하면 '자아'와 존재와의 경계 자체가 흐물흐물하기 때문에, '자아 만들기'에 미흡하고 실패한 자아로 전락될 것이 뻔하다.

 

 

따라서 인간들은 존재의 신비 속에서 자아를 형성하는데 있어, 절대적이고 미흡함이 전혀 남아 있지 않는 바를 목적으로 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그 아이디어를 신의 세계에서 얻어낼 수밖에 없다.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을 자꾸만 염두에 두는 이유는, 존재자들의 공동의 존재 기반인 '인간 사회'에서 남들이 인정해주고 옹호해주는 신이 어떤 신이어야 하는 가를 계속 고려해야 하는 이유는, 그 신과 자신을 일치시켜 결국 자신을 '절대 자아'로 정립하기 위함이다.

 

 

예를 들면, 회사 직원들끼리의 회식 자리에서 술을 어느 정도까지 먹어야, 다른 직원들 눈에 경계와 존경이 조화를 이루는 중간지점일 수 있느냐를 생각해야만 한다. 술을 너무 많이 먹게 되면 술에 대해서 일시적으로 존경의 시선을 모을 수는 있지만 남보다 술에 너무 세다는 평을 받게 되면 남들로부터 시기의 대상이 되어 미움을 자초하는 일이다.

 

 

또한 술을 전혀 안 마시는 것은 대다수 다른 직원의 약간의 세속적 해이함을 심판하는 위치에 있다고 오해를 받아 따돌림 당하고 그것이 누적되면 회사 운영의 중요 정보통에서 배제가 되어 승진하는데 장애 요소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퇴직하고 나면 자기 존재의 품위를 지탱하는데 필요한 돈이 없이 노숙자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은 존재의 신비에서 오는 감동이나 기쁨보다는 존재의 허탈로 이어져 즐겁지 못하고 괴로운 자아가 된다. 슬픔을 자초하는 절대신은 없는 법, 따라서 자기라는 존재로부터 감동과 지속적인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존재의 신비와 계속해서 연계된 절대자아를 구축해야만 한다.

 

 

 

이 절대자아를 구축하기 위해, 존재 신비의 공동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회에는, 자아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즉 본인의 '자아 구축'이 타인이 벌리는 그 사람의 자아 구축 시도에 패배 당해서 '그 사람의 사람'으로 전락되어서는 아니 되고 (이렇게 되면 '똘마니'가 되니) 오히려 상대를 꺾어 버리는 승리하는 삶이어야 한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는 이러이러해서 홀로 승리자로 우뚝서야 만 하는 존재입니다”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 의()'이다. 즉 자신의 절대자아성을 존재의 공동기반인 이 사회에서 인정받으려면 타인들이 획득하고자 하는 바를 자신이 더욱더 확실하고 넉넉하게 소지하고 있으면 된다. 그것이 바로 '의로움'이다.

 

 

악한 자는 진작 죽어도 누구 하나 가슴 아파할 자가 없지만 만약 '의로운 자를 누가 미워하면 반드시 화를 입는다'는 묵시적 분위기가 이 인간사회에 이미 형성되어 있다. 악한 자는 용납하지 않고, 의로운 자를 존중해주는 분위기가 어디서 생겼는가?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7:11)

 

 

왜 존재의 신비가 의로움의 양()을 기초로 해서 형성되는가? 왜 의롭다는 이유가, 그러니까 계속 나는 존재해야만 한다는 타당성으로 이어지는가? 존재의 세계가 의로움을 기초로 하게 된 것은, 인간이 자기 영역을 벗어나 하나님만이 아시는 선악을 지식을 접촉되어 있기 때문이다.(3:22) 이것은 추방감이다. 비존재감이다. 그런데 왜 선악을 아는 것이 저주받을 이유가 되는지는 인간의 존재 신비로서는 풀리지 않는 문제로 남는다.

 

 

어쨌든 자기 존재의 의로움을 과시하기 위해 다양한 기능자로 변모하며 살아 가고 있다. 이 공동의 존재 기반 시회에서 불필요한 존재자가 아니라 필요한 존재자임을 역설할 필요가 있기에 자신을 '기능의 묶음'으로 이 인간 시장에 내다 팔기 시작한 것이다.

 

 

기능화된 세계에서는 자신의 출생과 사랑과 죽음마저도 돈으로 가치가 매겨진다. 돈이란 생산자의 입장과 소비자의 입장의 간격을 표시한 것이다. 따라서 당사자들은 늘 미흡을 느낄 뿐이다. 즉 인간이 본래 자기 존재에서 얻고자 하는 감동과 기쁨보다 돈으로 되돌아오는 가격과 가치는 늘 불만스럽기 짝이 없다.

 

 

충만을 모르고 그 대신 늘 허무와 허탈 속으로 떠밀려서 억지로 모자람에서 오는 괴로움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근원적 고통이다. 자기를 기능적으로 봐버리면, 문제 해결도 자기 쪽에서 개시해야 한다. 즉 원인과 결과 양 쪽 모두를 자신이 기획하고 자신이 그 결과에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학생이 노력하지 아니하면 성적이 떨어지고, 그 성적이 떨어졌기에 필연적으로 이 인간 시장에서 자기 존재 가격의 하락을 초래하게 되고, 이에 따라오는 비참하고 고달픈 인생살이는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 고졸 출신은 같은 초등학교 동창생이 대졸 출신으로서 직장 상사의 지위에 부임하게 되면 그의 지시를 따라야 하고 '그 사람의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그 직장마저 잃을 수가 있다.

 

 

따라서 이 사회에는 악한 존재가 아니라 의로운 존재, 즉 불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꼭 필요한 존재, 즉 남들은 죽더라도 애도할 필요가 없지만 내가 죽으면 너무 아까운 인재가 죽었다고 온 국민이 애도할 만큼의 의로운 존재로 부각되려면(박정희 대통령), 그 기능적 존재의 내용물은 본인이 원인이 되어서 늘 채워 넣어야 한다.

 

 

이로서 존재의 세계는 원인과 결과로 단단히 조여든 세계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이다. 과연 여기서 인간 자체도 이 원인과 결과의 늪 속에서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입장에서 서서 로마서를 보게 되면, 로마서는 여러 가지 해택을 제공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토록 원하는 의로움을 '믿음'이라는 행위로 얻을 수 있다고 느껴질 것이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주님의 창세 전 사랑도 획득했다고 잠시 기쁨에 잠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생각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악마의 의도에 불과하다.

 

 

로마서는 인간 존재의 함몰을 기정사실화 한다. 인간 존재의 신비는 실은, 저주의 바다 이야기다. 이런 해석만이 인간 세계 이야기가 곧 십자가 이야기임이 드러난다.

 

 

2. 언약적 입장

 

 

로마서는 다윗언약에 관한 이야기이다. 옛날 모세를 통해서 전달된 성막과 그리고 솔로몬 왕 때의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의 새 성전 사이에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성전을 지으라는 그 자체가 이미 백성을 죽은 자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죽은 자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하고 또 보여 주므로써 자신들의 죽음을 확인시키겠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야곱이 외쳤던 ??하나님의 전??은 특정한 건축물이 아니었고 따라서 야곱 자신의 행함이 전혀 포함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인간들의 손에 의해 지어지는 성막이나 성전은 그 짓는 행위자인 인간들을 죽게 만들기 위한 성전이었다. 블레셋 나라로 탈취 당했던 언약궤가 그 나라의 신전 안에서 그 나라의 신인 다곤 신상의 머리와 두 손을 부러지게 했다(삼상 5:4). 또 삼손이 자기 몸을 바쳐서 다곤 신전을 무너지게 한다(16:30). 이것은 약속에 의하지 않는 신전과 그 신전을 만든 인간을 부정하는 것이다.

 

 

 

거룩을 만들어 내지도 못하는 성전을 인간들 손에 짓게 만들어서 거기에 하나님의 거룩이 담겨 버리면 결국 인간은 그 거룩의 무게로 인해 짓눌려 버리게 되고 망할 수밖에 없고 또 화를 입어야 마땅한 존재로 드러난다(6:1-6). 즉 죄인으로 완전히 노출되는데 이 죄인이 그 동안 행한 그 모든 것, 심지어 성전을 지은 것조차도 이러한 참된 거룩 앞에서 죄악으로 드러나 결국 인간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조치가 드러나게 된다. 바로 이 점을 말씀해 주시기 위해 성전을 지으라고 하셨고 또 만들라고 하신 것이다.

 

 

신약에 와서 주어지는 모든 명령의 말씀도 구약의 이런 성전의 취지 안에서 설명될 수 있다. 거룩 되기를 요구하는 것 가운데 참된 거룩하신 분 앞에 세워서 자신들의 비거룩과 참된 거룩을 만나게 하고, 어설프고 패역한 자기 우상성적으로 흐르는 인간 행위와 참된 의인의 행위를 만나게 하므로써 인간의 근원적인 죄악을 폭로시키신다.

 

 

새 성전에서의 성신의 넘쳐 남은 곧 거룩의 넘쳐남이다. 따라서 이 거룩으로 인해 새 성전으로 만들어진 새 세상 안에서는 그 누구도 이 거룩됨 앞에서 자기 공로를 자랑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공통점은 신구약 성경 전체의 일관성 있는 맥으로 조성되어 이어져 간다.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행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게 만드신다.

 

 

백성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가고 심지어 왕마저 예루살렘 지역에 없이 그저 황량한 심판의 정경들만 보여지는 가운데서도 새 성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새 성전에서 핵으로 등장된 인물이라고는 오직 인자라고 불리는 에스겔뿐이다. 이 인자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주어진 성신의 권능에 사로잡혀 있다. 새 성전은 바로 이 인자로부터 시작되어 결국에서 한량없이 성신을 쏟아내는 성전이라는 점이 다르다.

 

 

이 성신으로 인해 새 성전 주변에는, 새로운 하나님의 군대(37:10)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살게 된다. 그런데 새 성전에서 끝없이 나오는 성신은 기존의 언약을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성전을 대체하기 위함이다.

 

 

완전한 성전은 왕 되시는 하늘의 영원한 보좌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다. 기존의 제한되고 폐쇄된 공간으로 거룩을 묘사한 그 성전의 범주는 이제 성신에 의해서 추방된다. 이것은 기존의 성전과 관련된 왕의 추방도 함께 의미한다.

 

 

생명을 공여해 줄 수 없는 자는 진정한 왕 언약에 의한 왕이 아니다. 새 왕 다윗은 새 성전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영원히 살리신다. 새 성전에서 나오는 물은 왕이 자기 백성에게 분배해 준 그 땅을 겨냥해서 충만하게 넘쳐난다.

 

 

 

성전에서 물이 흘려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에덴동산에서 지었던 죄를 이제는 용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전은 이제 용서의 중심지이다.

 

죄가 없기에 더 이상 에덴동산 같은 극락이 세상이 안 될 하등의 이유가 없이 된 것이다. 성전에서 흘러 넘치는 생수로 땅과 기업은 기름지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흘려 내린 4개의 강줄기를 끼고 있는 영토 같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에스겔 47:12). 이 본문을 통해서 볼 것 같으면, 전에 에덴동산을 소생시킨 모든 생명의 근원은 동산 가운데 서 있는 나무에서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2:9-10, 15-17).

 

 

하나님이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신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과 죽음의 근원에 대해서 사람들이 거기에 참여하여 그 원칙을 유지하도록 하자는 데 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직접 사람과 만물을 살려내고 있다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었던 세계였다. ??동산 한 가운데??로 지칭되는 지역에 서 있는 두 나무는 곧 창조의 근원으로서 인간의 존립과 관련되는 나무이다. 한 나무는 먹을 수 있으나 다른 나무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먹을 수 있는 나무는 에덴동산에 생명을 공급하는 모든 원천이다. 바로 이 ??한가운데??의 자리를 에스겔서에서는 생명 되시는 하나님이 차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하는 왕이라는 대표자와 더불어 그 한가운데서 계약 관계에 놓여 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이 심판 받고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은, 생명의 원천이 되는 언약들을 업신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영원히 변개되지 않는 새 언약이 성신을 통해서 성전으로부터 온 백성에게 주어진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11:19-20).

 

이들 이스라엘이 새 언약의 백성들이라면 그들에게 상속될 땅도 마치 옛날 에덴동산 ??한가운데??있었던 생명나무와 같은 기능을 보여주게 된다. ??선물??이라는 취지에서 땅을 공여받게 되는데 이는 왕적 권위를 근거로 해서 주어진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만일 한 아들에게 선물을 준즉 그의 기업이 되어 그 자손에게 속하나니 이는 그 기업을 이어 받음이어니와 왕이 만일 그 기업으로 한 종에게 선물로 준즉 그 종에게 속하여 희년까지 이르고 그 후에는 왕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왕의 기업은 그 아들이 이어 받을 것임이니라 왕은 백성의 기업을 취하여 그 산업에서 쫓아내지 못할지니 왕이 자기 아들에게 기업으로 줄 것은 자기 산업으로만 할 것임이니라 백성으로 각각 그 산업을 떠나 흩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46:16-18).

 

 

이 말씀은 왕의 소유로 인정된 땅은 영구히 유지된다는 이야기이다. 후대 왕까지 계속 세습이 정당화된다. 비록 타인에게(종에게) 주었을지라도 희년이 되면 다시 왕에게 귀속된다. 이와 같은 왕 소유의 기업의 원칙은 기존 백성들이 이미 가진 기업의 소유권 원칙에도 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소유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율례는 이스라엘 내에서 다윗 언약의 영원성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한 왕의 권리에 대한 보호책이다. 성전과 더불어 왕의 권위를 하나님이 보장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땅이 오직 성전이라는 하나님의 거주 지역을 유일한 중심으로 하여 유지된다는 사실과 또한 그 중심 지역은 왕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에 의해서 보장받고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이 지계대로 이스라엘 십이 지파에게 이 땅을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되 요셉에게는 두 분깃이니라 내가 옛적에 맹세하여 이 땅으로 너희 열조에게 주마 하였었나니 너희는 피차 없이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47:13-14)

 

 

그런데 12지파에 대한 땅 분배에 있어서도 옛 언약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 감추지 아니하고 그대로 드러난다. 야곱의 12 아들이 원조가 되어 줄기를 형성한 지파들은, 야곱과 12지파 원 족장 사이에는 언약적 관계만으로 연결되어 있다.

 

 

간편하게 분류하자면, 레아나 라헬처럼 정실 부인의 자녀들로 형성되는 한 부류가 있는 반면에 빌하나 실바의 자녀들로 형성된 종의 자녀들이 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있어, 하갈에서 태어난 종의 자식 이스마엘과 사라에서 태어난 이삭 사이에서 언약적으로 대립적 특성으로 서로 대치하는 것과 같다.

 

 

 

약속에 의해서 태어났고 출생부터 이미 약속이 함유된 채 희생적 죽음으로 가야 될 이삭의 의미를 상대적으로 부각하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소산이며 비약속적 인물로서 이스마엘이 아브라함 가정에서 필히 태어나야만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곱의 가정에서도 야곱의 두 처, 레아와 라헬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각자의 여종을 통해서라도 기어이 자식을 낳고야 말겠다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비약속적인 결과들을 도출하는데 이르고 마는데, 바로 이러한 인위적인 결과가 야곱의 위상으로 인해 다같이 약속의 지파라는 큰 무리 속에 흡수되고 만다. 따라서 야곱 가문, 즉 이스라엘 12지파 간에 레아; 라헬 라는 구조와 정실; 여종이라는 상호 대립되는 두 개의 갈등 구조를 형성, 유지하게 된다.

 

 

이 갈등 구조 안에서 이스라엘 국가가 지니고 있는 언약적 실체, 즉 희생 제물이 치러야 될 그 거룩한 죽음의 내용이 만개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 구조는, 하나의 혹은 한 분으로 집약되는 약속의 본 내용에 접근되도록 인도하는데 있어 다른 한편은 부정적으로 또 다른 한편은 긍정적으로(희생적으로) 역할을 분담 받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신명기 27장에 나오는데, 에발산과 축복 산으로 12지파가 양편으로 갈라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행사를 하게 되는데 여기에 갈리어진 기준이 정실의 자식과 여종의 자식이라는 기준에 대략 부합된다(르우벤과 잇사갈만 바뀔 뿐이다).

 

 

이렇듯 두 패로 나뉠 때에는??본 부인과 여종??이라는 구조로 쪼개지고 있지만 법궤를 이동시킬 때에 법궤 사방을 진쳐야 되는 지파별 위치를 보면 거기에도 라헬과 레아의 갈등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는 깃발을 들어야 되는 선두 지파가 따로 있는데, 동쪽과 서쪽에는 정실과 종의 비중은 약화가 되고 레아 소생과 라헬 소생이라는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동쪽에는 유다를 중심으로 하여 레아 소생의 지파가, 맞은 편 서쪽에는 에브라임 중심의 라헬 소생의 지파가 자리 잡는다. 그리고 북쪽에는 단이라는 종의 소생이 중심이 되어 종의 지파만 모여 있고 그리고 남편에는 르우벤 지파를 중심으로 나머지 종의 지파가 첨가가 된다.

 

 

광야에서의 법궤 이동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약속의 땅에 정착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보좌를 지향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에스겔의 새 성전에 있어 하늘의 보좌는 이미 다윗 언약 안에서 고정적으로 정착되어 버렸다. 따라서 새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에는 다윗 언약으로 창조되고 되살아난 새로운 이스라엘만 자리 잡는다. 이들은 모두 언약에 의해서만 영생이 가능한 지파들이다. 따라서 왕의 땅 분배 과정에서 이러한 언약적 속성을 필히 드러내게 된다.

 

 

이 원리에 따라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여종 소생의 지파들은 북쪽과 남쪽 끝에 땅을 분배받게 되는데 이는 성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다(, 아셀, 납달리, ). 거기에 비해 정실 부족들은 남쪽과 북쪽에 각각 넷씩 성전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새 성전이 장차 드러내 보여줄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그 인물은 오직 하늘의 아들에만 지칭함을 지향케 한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 성읍에는 사방으로 총 12개의 문이 있는데 그 문마다 지파의 이름이 붙는다. 그런데 그 이름이 붙여진 구조를 사방으로 살펴보면, ??라헬측과 레아측??이라는 큰 구조의 틀 아래서 세부적으로 각각 ??여주인과 종??이라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

 

 

즉 북쪽과 남쪽은 모두 레아 소생의 지파들만 구성되어 있는데 북쪽은 정실 소생으로 짜여져 있고 남쪽은 여종 소생이 주종을 이룬다. 반면에 동쪽과 서쪽은 라헬측이 대부분 차지하는데 동쪽은 모두 라헬이라는 본부인의 소생이 주종을 이루며 서쪽은 여종의 소생과 그리고 레아의 여종인 실바 소생의 지파 이름이 붙여져 있는 것이다.(48:30-34).

 

 

그리고 문 방향을 소개하면서도 일상적인 동쪽 문부터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민수기 2장에서는 동→남→서→북 형태가 되는데 이러한 방향 순서는 바로 정실 측부터 먼저 거론하고(북과 동) 그 다음에 여종 측(남과 서)을 제시하므로 서 여전히 정실: 여종의 대립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에스겔 37:15-22에 나와 있는 새 다윗 왕 중심의 국가라는 취지에 부합되는 언약이 주어진 결과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네 민족이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거든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너는 그 글 쓴 막대기들을 무리의 목전에서 손에 잡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간바 열국에서 취하며 그 사면에서 모아서 그 고토로 돌아가게 하고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37:16-22)

 

 

옛 왕들의 잘못을 새 다윗 왕이 보상하시면서 나라는 다시 새 왕 중심으로 한 나라가 되고, 거기에 복속된 지파들은 그들의 위상을 통해 새 왕의 언약적 위상을 증거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동산 가운데?? 있었던 그 생명나무는 이제 새 언약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성전으로 구체화되었다. 이스라엘 왕은 모든 백성을 대변하는 제사장 입장에서 하나님의 왕 되심과 언약의 영원성을 보장받는다. 가나안 이스라엘 영토 한가운데 있는 성읍의 이름이 무엇인가?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48:35).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는 이름의 성읍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움직이고, 그 그리스도의 모든 작업은 십자가만을 가지고 움직인다. 로마서는 바로 옛 언약 안에서 약속하신 모든 것이 어떻게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되었는가를 말해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1:1-4)

 

 

Ⅲ 결 론

 

 

나를 위한 하나님이란 우상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 우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이 자아를 포기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아를 포기 못한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의 저주 선언을 거부하고 얼굴 돌리는 악마적 행위를 표출하는 것이다.

 

저주가 사리진 십자가를 악마는 제시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 존재로 인하여 감동과 기쁨을 제공받기만 하면 그것이 어떤 신이 되었던 반길 마음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악마가 노리고 들어오는 인간들의 약점이다. .

 

로마서를 통해서 이 점이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왜 인간은 저주받아야 마땅한지를, 그리고 사도 바울은 왜 구약의 약속에 주목하는 지를….


글...(이근호).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