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아들임마누엘타임선교회

<성경읽기의 즐거움>

하나님아들 2020. 1. 9. 23:35

<성경읽기의 즐거움>

1. 경전과의 만남은 하나님을 즐기는 것.

독서를 통해서든지 혹은 다른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지 경전과의 만남, 그 만남에서 응답이 표출되는 과정은 경전과 사람의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은 경전과 독자 사이의 의사소통과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경전이 말하고 독자가 듣고, 독자가 응답하고 경전이 또 다른 차원의 말을 걸어오고, 이런 과정이 반복하는 가운데 이러한 만남과 상호작용이 독자에게서 기쁨의 눈물로 표현되는 것은 결코 드믄 예가 아니다. 아주 고전적인 예가 느헤미야 8장에 있다.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가서 오랫동안(587-538) 그곳에 머물러 살거나 거기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자기 나라로 돌아온 귀환자들이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학자 에스라에게, 히브리어로 쓴 모세의 율법 책 토라를 당시 자기들이 바빌로니아에서 쓰던 통용어, 곧 아람어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했다. 귀환자들은 바빌로니아에 사로잡혀 사는 동안 자기들의 모국어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고 정복국가의 언어인 아람어를 사용하다가 그들의 일상어가 되고, 거기 유배지에서 태어난 자녀들에게는 모어가 되었다. 포로 생활하는 동안 회당에서 토라를 낭독할 때는 그 원어인 히브리어로 낭독했을 것이고 포로 1세대들은 그것을 이해했겠지만 거기에서 태어난 세대들에게는 외국어나 다름없었다. 히브리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서 돌아온 포로들은 에스라 제사장에게 히브리어로 쓰인 토라를 자기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아람어로 통역해달라고 요청했다. 에스라 제사장은 율법 책을 가지고 와 수문 앞 광장에서 남자든 여자든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들에게 새벽부터 정오까지, 큰 소리로 낭독하면서 히브리 본문을 아람어로 통역하여 백성들에게 들려주었다. 백성을 모두 율법 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로 청경이다.
율법 책이 낭독될 때, 에스라 제사장 옆에 서 있던 레위사람들이 번갈아가며 아람어로 통역하고 뜻을 밝혀 설명하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때 그 청경에 참여했던 이들이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모두 울었다>는 고 한다. 이것이 수문 앞 광장에서 경전 낭독에 귀를 기울이던 청중의 일차적 집단반응이다. 경전을 읽고 듣고 그 내용을 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듣기는 들어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던 이들이 자기들이 사용하는 말로 경전이 통역되고 자기들이 쓰던 말로 듣게 될 때에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회당에서 토라가 히브리어로 낭독될 때에는 건성으로 듣기만 했는데 자신들의 언어인 아람어로 통역할 때 비로소 경전을 즐기는 체험이 가능해졌다.
느헤미야 총독과 에스라 자사장과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울고 있던 청중을 달랬다. 경전의 내용과 만난 그 날은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니까 슬퍼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라고, 각기 마을로 돌아가서 먹고 마시며, 없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며 크게 기뻐하라고, 말씀을 만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는 것이고, 이러한 기쁨이 바로 우리의 힘이라고 타일렀다(느8:10). 경전을 만난 성도가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고 하나님을 즐기고 낭독하는 경전을 귀로 듣는 청자가 그러한 만남에서 힘을 얻는다. 이것이 청경에서 얻는 희망이며 구원이다.

2. <성경이 어디 나 같은 아녀자가 다 알 수 있는 거랍니까?>

경전 일기를 즐긴다는 것과 경정의 내용을 학문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오래전에 78세로 고인이 된 필자의 모친은 가사를 며느리에게 맡기고, 집안일을 놓고 나서부터는 취미라고는 성경을 읽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젊을 때부터 성경을 즐겨 읽었지만 노년에는 독경을 탐닉하는 편이었다. 성서학을 전공한 아들이 하루는 자기보다 성경을 자주 읽고 더 많이 읽는 어머l에게 물었다.
<어머니, 시편 23편 있지요. 제가 어릴 때부터 저더러 암송하라고 일러주시던 성경 구절 중 하나지요.>
<그런데 왜 묻소?>
<잘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 있어요.>
<잘 이해가 안 되다니요? 구약을 전공한 성서학자에게도 모를 것이 있고, 또 학자도 모른 것을 이 어미가 알 거라고 생각해서 뭘 불어보겠다는 겁니까?>
<저는 지금 성서학자로서 어머니께 여쭙는 게 아니고, 어릴 때부터 저더러 이 구절을 암송하라 하신 그 아이의 어머니께 여쭙는 것입니다.>
<들어나 봅시다.>
<여기 5절에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뜻을 모르겠어요, 기름을 머리에 바른다는 것과 잔이 넘친다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요.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요?>
<듣고 보니 물을 만하군요. 다만 이 어미는 시편 23편의 내용이 은혜로워 평생 암송하며 큰 위로를 받는데, 그 구절만 똑 따서 뜻을 물으니 이 어미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민 교수님께서 알아가지고 이 어미에게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어디 배움도 천박한 나 같은 아녀자가 다 알 수 있는 거랍니까? 우리 같은 이들이 읽어서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무슨 성경이겠소? 이 어미가 뭐 성경 내용 다 알아서 이렇게 꿀맛 같게 성경을 읽는 줄 아시오? 읽으면 그냥 기쁘니까, 좋으니까, 은혜를 받으니까, 밤낮 이렇게 쭈그리고 앉아서 이 말씀 읽고, 그 중에 머리를 떠나지 않고 박히는 말씀 있으면 줄곧 명상하면서 기쁘게 사는 거 아니겠소! 모르는 게 더 많지, 아니 성경을 내 어찌 다 안다고 하겠소? 아는 것만 고맙게 읽어도 그것이 얼마나 많은데. 이 어미는 성경 읽다가 모르는 구절에 매달려 고민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몰라서 물으시는 그 구절을 내가 어찌 알겠소?>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지도로 성경을 암송하던 그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는 늙어서 다시 한 번 자기 어머니에게서 또 한 수를 배웠다. 어머니들은 성경 읽는 것을 즐긴다. 읽다가 들려오는 말씀은 명상을 하고, 모르고 흘리는 말씀은 그대로 흘려버려도, 그래도 기쁨이 되는 바로 독경을 즐기는 것이다. 지식을 축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 속에서 전개되는 황홀하고 신비한 세계를 탐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즐기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머니를 노년까지 떠받쳐준 힘이다. 희망이고 구원이다. 자식들에게 줄 말씀을 발견하면 그 구절을 메모지에 베껴두었다가 읽어주곤 하면서 자식들을 평생 말씀을 양육하는 것이다.


3. <성경, 평생 옆구리에 끼고만 다녔습니다.>

은퇴하신 어느 장로님 한 분이, 성경 공부 반을 인도하던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목사님께 성경 배우면서 많은 것 새롭게 깨닫습니다. 평생 교회 다녔고 장로까지 했던 사람이 성경을 몰라도 너무나도 몰랐었구나 하는 후회가 막심합니다. 목사님, 저 이것 보세요. 이 성경 이렇게 헤어졌지요. 누가 보면 아마 제가 성경 많이 읽어서 그런 줄 알 것입니다. 저 성경 별로 못 읽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목사님 설교하실 때 성경 펴서 설교 본문 읽은 것이 고작입니다. 성경 책 이렇게 낡은 건요. 제가 열심히 읽어서가 아니라 평생 이 한 권만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이렇게 낡아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평생 성경책을 만지기만 하고 교회 갈 때는 옆구리에 끼고만 다닌 셈이네요. 지금 좀 읽어보려고 하면 눈이 침침해서 못 읽겠어요.>
<장로님, 대단하십니다!>
<뭐가요?>
<평생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교회 다니셨다니까요.>
<그게 뭐 그리 대단합니까?>
<대단하지요. 그런 사람 별로 없습니다. 보세요. 지금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 어디 성경이나 찬송가 가지고 옵니까? 교회에 비치된 것을 보더니, 요즘에는 아예 그것도 안보고, 예배당 안 대형 스크린에 올라오는 찬송가 가사보고 찬송 부르고, 거기에 투영된 성경 본문 읽고, 거기에 비친 교독문 함께 교독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장로님께도 그 작은 활자 성경보다는 스크린에 비친 큰 글자가 더 읽기 쉬울 겁니다. 그런데도 장로님은 아직도 그 성경 옆구리에 끼고 다니시네요!>
<그렇군요. 그러나 저는 아직도 날라리 교인 못 면한 것 같습니다.>
<장로님, 저 지금 장로님 비난하고 있는 것 아닙니다. 장로님은 평생 말씀을 모시고 사셨습니다. 가지고 다니셨어요. 듣기는 교회에 와서 들으시고, 장로님은 말씀이 간직된 그 성경책 소중히 간직하시고, 그것도 옆구리에! 말씀을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하셨으니 장로님은 언제나 말씀에 순종하실 자세가 되어 있으셨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계셨고, 그 정신 가지고 평생 교회 섬기고 목사님 보좌하시고 교인들 권면하시면서 살아오셨습니다. 말씀과 함께 살아오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성경 공부 반을 인도하면서 교우들과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이 성경, 하나님께서 우리 공부하라고 주신 것 아닙니다. 읽고, 듣고, 깨닫고, 기뻐하고, 즐기고, 그렇게 살라고 주신 말씀인데, 장로님 훌륭하게 살아오시지 않았습니까!>

4. <만지는 것도 읽는 것이다.>

1994년 가을, 몽골이 막 문호를 개방하고 여행객을 맞아들이기 시작할 무렵 울란바토르에 들렸을 때였다. 시내에 있는 라마교 사찰을 방문했다. 공산 치하에서도 버젓이 견디어 온 사찰이었다. 라마교는 티베트와 몽고에 집중해 있다. 사원에는 중년 이후의 여신도들이 많았다. 사원 경내로 들어섰는데, 건물 입구 오른 쪽으로 원기둥들이 한 줄로 쭉 서 있었다. 손바닥을 원통에 데고 돌리면 쉽게 돌아가는 원통이었다. 안내하는 이에게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라마교 신자들이 이 사찰에 와서 저 원통을 돌리면 저기에 쓰인 경전의 내용을 다 읽은 것 같은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경전을 읽기는 읽어야 하는데 문맹이어서 읽을 수 없다든가, 노동에 시달리는 고달픈 삶에서 읽을 시간이 없다든가 그럴 때에 여기에 와서 저 경전 통을 손으로 돌리기만 하면 그 경전을 읽은 것이 된다는 것이다. 경전에 손을 대는 것으로 그것을 읽은 것이 되는 것이다.
손을 댄다. 그러면 안다. 그것도 경전이 기록된 원통의 중심에 손을 댄다. 기막힌 착상이다. 대단히 성적인 착상이다. 상대의 몸을 만져서 상대를 안다는 것과 상통한다. 경전과의 스킨쉽이다! 사랑은 접촉하는 것, 그런데 경전과의 접촉이다. 이것을 촉경이라고 불러본다. 경전에 접촉하여 경전을 느낀다. 안다. 즐긴다! 성경과 독자의 상호작용은 성경공부나 연구를 초월하는 경험이다.

<민영진 교수의 글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