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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비주의와 영지주의

하나님아들 2018. 9. 2. 23:33
신비주의와 영지주의

 

 

 

1. 신비주의(Mysticism)

mysticism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어근은 'mu-'로서 폐쇄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부터 mystikon, mysterion, mystes 등 그리스의 신비 종교들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일련의 단어들이 생겼다. 이것은 플라톤에게 발견되며, 그 기원은 파르메니데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이 단어가 기독교에서 사용된 것을 찾기 위해서는, 기독교 어휘에서 신비(mysterion)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 교부들은 mystikos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것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비(mysterion)란 비밀을 의미하지만. 신약 성서에서는 특별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이 사랑의 비밀을 언급한다. 그것은 선포되고 알려져야 하는 것임에도 비밀로 간직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비밀이다. 기독교에서 mystikos라는 단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비와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성경의 신비 한 의미에 대한 언급.

2. 기독교 성례전의 신비 한 의의에 대한 언급.

3. 신비 신학.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알고, 신비한 교제에 속하며(엡 3:9), 세례 안에서 우리와 통합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성례전적인 생활과 성장으로 인해 우리 안에서 결실을 맺는 신비의 생활화이다.


교부들의 저술에서 "신비"는 대체로 성경의 감추어진 영적 의미를 언급한다. 감추어진 영적 의미란 자의적이고 풍유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파악하는 성경 이해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교부들이 추종하는 오리겐*은 성경의 신비한 의미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사랑하면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갈망하면서 성경에 접근하는 사람에게 밝혀지는 것이라고 본다. 교부들은 성경을 이해하는 것을 단순한 학문적인 일로 여기지 않았다. 성경 이해는 기도와 정화, 겸손과 사랑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었다. 성경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아들과 일치하며, 그럼으로써 아버지를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교부들의 신비주의이다.


따라서, 성경에 대한 "영적 해석"과 "신비주의"나 "신비 신학" 사이를 분리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또 성례전들과의 관계에서, 그것들의 "신비한" 의미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곧 성례전이 우리로 하여금 참여할 수 있게 해 주는 실체-그리스도의 신비. 그의 복음과 부활의 신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또 개인과의 관계에서, "신비한"생명이란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진 생명(골 3:3), 세례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연합이 우리 안에 심겨진 생명,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며 그의 부활의 생명의 표식들을 보여 주는 생명 안에 나타남에 따라 결실을 맺는 생명이다.


아레오파고의 디오니시우스*는 이모든 것을 요약했다. 그의 저술에는 교부들의 신비한 유산들이 수집되어 있으며.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mystikos라는 단어의 의미에는 세 가지 범위가 있다고 여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의 신비를 계시하시는 성경의 심오한 의미, 신자들이 이 신비에 참여하는 통로가 되는 성례전의 중요성, 그리고 수단보다는 영혼이 하나님께 복종하며 사랑의 신비를 파악하기 위해 사용하는 상징들과 개념들의 의미 속으로 들어가며. 스스로 그 사랑 안에서 파악되고 그 사랑으로 변화되는 곳을 지향하는 신비 신학. 우리도 디오니시우스처럼 정화, 조명, 연합이라는 세 가지 방법이 규칙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발견한다. 이 삼중 구조의 기원은 그리스의 신비 종교에 있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세 가지 단계를 언급한다: 최초의 타락의 결과로서 초래된 인간의 운명인 죄와 무지로부터의 정화의 단계, 인간이 은혜의 생명으로 회복되는 조명의 단계, 그리고 인간이 낙원의 생활을 되찾는 연합의 단계. 낙원의 회복을 미리 맛보는 것이라는 신비 생활의 개념은 그와 관련된 몇 가지 현상을 타당하게 해 준다: 짐승들과의 교제, 사람들의 생각을 파악하는 능력, 신비주의와 관련된 육체적인 현상.


서양에서 디오니시우스의 영향력은 부분적이었으며, 그것은 아빌라의 테레사*에서 절정에 달한 중세 신비주의에서 발견되는 강조점의 변화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교부들에게서 발견되는 주관적인 현상에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객관적으로 참여하는 것에서부터, 신비가의 영역인 주관적인 신비체험에 대한 관심으로의 변화이다. 그러한 변화는 서방에서의 개인 및 개인의 개성이 분명하게 표현되는 개인적인 감정에 대한 관심을 향한 전반적 인문화적 변화의 일부인 듯이 보일 수도 있다.


서방에서 12세기 이후 디오니시우스의 영향력이 증가한 것은 특히 영혼이 상징들과 개념들을 초월하여 사랑의 엑스타시 안에서 하나님이 알려지는 어두움 속으로 이동한다는 내용으로 이해되는 그의 신비 신학의 영향력 때문이다.

이러한 강조점의 변화에서 중요한 인물들은 클레르보의 버나드*와 성 빅톨 수도원의 수도사들이며, 그러한 내적이고 개인적인 경건 체험의 양상들과 내면성과 관련하여 분명히 나타난다(종종 성례전과 교회의 생활을 배제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종종 반-지성주의가 나타나며. 따라서 신학과 영성 사이의 분열의 초기 현상이 나타난다.


또 감정적 신비주의, 특히 스웨덴의 브리짓(Bhdget), 시에나의 캐더린* 노리지의 줄리안* 등의 여성 신비가들의 저술은 환상적인 경험에 대해 무척 개방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줄리안의 Showings에서 명시된 그리스도의 죽음과 승리의 신비에 참여한다는 특성은 이것들을 "비 신비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강조점의 변화의 원인이 되는 것을 아빌라의 테레사의 저술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녀의 저술에서 각 단계의 정신적인 특성을 언급함으로써 여러 단계의 기도-침잠의 기도, 침묵 기도. 연합의 기도-를 구분하려는 시도를 발견한다. 교부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것들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무질서한 욕망과 정념의 상태에서부터 무정념(apatheia)*과 사랑*의 상태-이 상태에서 영혼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며, 순수한 기도 안에서 자유로이 하나님과 교제하게 된다-로 진보한 분량에 따라서 평가된 영혼의 여러 가지 상태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것은 주관적인 경험보다는 객관적인 상태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한 분석에서 주된 관심은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행위에 굴복하는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을 추적하는 데 있다. 테레사는 이것을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행위의 결과들과 심리적으로 정의된 특정 상태들을 동일시함으로써 혼동을 초래했다.


십자가의 요한*은, 어두운 밤*의 두 단계-감각의 밤과 영의 밤-안에서 영혼이 자신을 정화하고(적극적인 정화) 하나님의 정화하시는 행위에 복종함으로써(수동적인 정화) 하나님께 응답하는 방법을 엄격하게 정의한다. 요한의 분석은 영혼이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시는 행위의 소유자이신 하나님-과의 연합에 대해 자신을 개방할 때에 겪는 일에 대한 신학적 이해 의 지배를 받는다.


성 테레사는 신비 생활의 핵심-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연합-에 관심을 갖지만, 여러 상태의 기도가 지닌 정신적인 특징에 따라서 기도의 상태를 분석하는 개념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녀 자신도 인정하기 어려운 결과를 초래했다.


신비주의를 일종의 정신적인 상태로 생각하게 되면, 신비주의는 종교적동물인 인간에 대한 연구의 일부가 되며, 많은 신비가들의 저술의 매력 때문에 대단히 기분 좋은 연구가 된다. 계몽주의 및 그 이후의 사상에서 경험의 가치 입증을 점차 강조하게 되면서, 신비 체험 연구는 종교적인 주장을 확립하거나 평가하는 방법이 되었다.


그 밖에 또 하나의 요인이 등장했다: 만일 신비 체험이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믿음의 신비에 의해 정의되지 않고 현상학적으로 관찰된 정신적인 상태들에 의해 정의된다면, 여러 가지 믿음을 가진 신비가들과 믿음을 갖지 않은 신비가들 사이의 교차 문화적인 비교가 가능하다. 이와 아울러, 20세기에 "신비주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특정의 교의적인 구조를 고려하지 않는 종교의 가상 본질, 또는 신-의식에 대한 연구. 따라서 에블린 언더힐*은 "모든 인류와 신조를 신봉하는 신비가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교의적 표현을 초월하는‥‥ 절대자의 열렬한 사"에 대해 말했다. 그러한 주장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재너(R. C. Zaehner)도 "다양한 종교들이 배출한 신비적 저술들을 비교하는 것은 비슷한 것들끼리의 비교이골'라고 말했다. 보다 최근의 저술들은 그러한 가정에 대해 의심을 제기하며, 각각의 신비가들의 교의적인 구조와 그들이 주장하는 경험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한 그러한 연구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것은 "신비주의"라는 용어의 기원인 교부들의 객관적인 "신비 신학"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것이 동일한 주제인지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2. 신앙의 척도(Reguta Fidei)

 

Reeutafidei는 이레내우스가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그와 터툴리안*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그 개념은 다른 용어로도 표현될 수 있다. Reeutafidei는 기독교인의 규범적인 믿음, 그리고 기독교인의 신앙에 대한 간결한 진술을 의미한다. Reeulafidei는 항상 원래의 것을 언급한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선포되고 성경에 기록된 교회의 가르침. Regutafidei와 Reguta veritatis가 동의어라는 사실이 이 점을 분명히 해 준다: 진리의 척도는 있을 수 없다; 진리 자체가 표준이다. 이 런 의미에서, Regutafidei는 케리그마와 동일하다. 이레내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우리는 진리를 하나의 척도로서 소유한다‥ 그리고 "우리는 진리의 척도인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다" (Adversus haereses2,28,1; 4,35,4). 초대 시대의 작가들은 신앙의 척도에는 교리뿐만 아니라 도덕적 원리들, 의식들, 그리고 관습들이 포함된다고 가정한다(cf. Eusebius, Ecctesiasticat History, 5,24,6).


신앙의 척도는 후대(3세기 중반)에 발달된 세례의 신조들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신조들과는 달리, 신앙의 척도는 언어적으로 고정된 형식을 취하지 않았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이 당면한 필요나 의도에 따라서 그것을 개작했다. 또 신앙의 척도는 성경과 어긋나서는 안 되지만 성경과 동일한 것은 아니며, 성경 해석의 지침이 된다. 이레내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은 신앙의 척도를 소유하지 않으며 비유들을 해석하기 위해 애매한 표현들을 사용한다고 기록한다(Adv.haer. 1,9, 4:2,27, 1:3,12, 6:3,15,1).


척도(reguta)라는 단어의 원 의미는 "전통"-즉 교회 안에서 처음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I Ctement 7, 2를 보라). 역사적으로 보면, 신앙의 척도가 신약 정경 형성을 유도했다.


이레내우스는 Adv. haer. 1, 22, 1에서 그 척도에 대해 상세하게 진술하면서, 만물의 창조주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유일하신 하나님을 강조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그 척도에 대해 삼위일체적으로 요약한다(Adv. haer. 1,10,1:,3,4, 2:4,33,7; Proof of the Apostotoc Preaching 3).


터툴리안은 신앙의 척도가 지닌 규범적이고 구속력이 있는 특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구원하는 교리의 유일한 규범이다 De praescriptione haere-ticorum 13-14는 그 척도에 대한 그의 가장 분명한 진술이다: 창조주이신 한분 하나님: 그의 아들이신 말씀. 족장들이 보았고 예언자들이 들었고, 마리아의 자궁 안에서 육신이 되신 분; 새로운 법 과 새로운 약속을 선포하신 분: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분; 장차 부활 때에 심판주로서 다시 오실 분. 터툴리안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 척도에 반대되는 것은 알지 않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Aeversus Praxean 2와 De virtinibus vetandis 1에도 신앙의 척도에 대한 진술이 있다. De Prae.haer. 35-47; De spectacuUs 4; Co기◎amarcionem 4,5를 참고하라.


신약성서 정경의 중요성과 선언적신조의 중요성이 증가하면서,신앙의척도라는 개념의 명확성은 감소되었다.

 



3. 영지주의(Gnosticism)


 

영지주의란 2세기에 특히 활발했으며 유아기의 교회를 크게 위협한 다양한 운동들에게 주어진 명칭이다. 영지주의에 대한 전거들 중에는 교부들(특히, 이레내우스, 힙폴리투스, 터툴리안)과 셀수스와 플로티누스와 같은 이교 철학자들의 논박, 그리고 1945년에 낙 함마디(Nag Hammadi)에서 발견된 콥트어로 된 5세기 영지주의 문서들이 포함된다. Corpus Hermiticum의 글들도 영지주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명사는 genosis(지식)라는 그리스어에서 파생되었으며, 악한 우주로부터 도망칠 수 있으며,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참 하나님의 세계를 되찾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비밀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언급한다. 따라서 영지주의의 특징은 우주와 하나님 사이의 근본적인 이원론이다. 그것은 우주의 창조자를 무지하거나 악하거나 열등한 신으로 간주함으로써 표현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통. 그리고 헬레니즘의주요 철학 체계에서는 이 신을 하나님으로 간주한다.


영지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중동 지방의 거의 모든 종교적 · 철학적 운동이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주장

할 수 있다. 이 다양한 전통들은 모두 천상의 존재들의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체계들 및 한층 더 혼란스러운 그들의 관계에 기여한다. 그러나 영지주의적 지식의 본질은 은밀한 것이며 공공연하게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해석을 위한 자료임이 분명하다.


기독교와의 관계에서, 영지주의는 그 초기의 신앙을 유대교적인 근원으로부터 분리하여 순수한 구속의 종교로 제시하려 했고, 우주와 관련된 헬레니즘의 근본적인 낙관주의에 도전했다. 이 이중 공격의 최종 결과는 이미 교회와 헬레니즘 철학적 문화 사이에 형성된 관계를 더욱 깊게 한 것이었다. 악의 문제에 대한 민감성 때문에 영지주의는 항상 공격성을 지녔다. 교회사에서 그것은 마니교* 카타리 파* 등으로 출현한다. 그러나 비밀 전승에 의해 중재된 고등한 지식을 소유한다는 영지주의적 주장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을 통해서 기독교전통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오리겐을 찬양한 에바그리우스의 영향을 받은 수덕적 문헌에서enosticos라는 용어는 관상의 높은 비상(飛翔)을 아는 사람을 지칭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전통 안에서 영지주의자들의 비밀 전통에 영속적인 영향을 미친 노련한 사람의 개인적인 주도를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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