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 치유!!! 신유!!!

[스크랩]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치유사역

하나님아들 2018. 8. 28. 22:30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치유사역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그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행위'를 통해 나타났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말씀이 당시의 종교선생들처럼 단지 사변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상성으로 침몰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예수의 '행위'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로 예수의 행위가 당시의 행동주의자나 마술적인 기적행위자와 구별되는 이유 또한 그의 행위와 함께 나타난 종말론적인 특성을 지닌 그의 '말씀선포'에 있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곧 예수의 인격인 그의 말씀과 몸으로 산 그의 삶의 행위에서 비롯된 살아있는 하나님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의 기적행위였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적 세계관을 가진 현대인들이 성서를 대할 때, 예수의 기적들이란 결코 쉽게 접근해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당혹스러운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다. 증명과 반복의 가능성을 요청하는 오늘의 세계관이 기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목회적인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기적행위는 첨예화된 중요사안임에는 분명하나 이를 목회현장에 접목시키는 데는 적지않은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능하면 목회자의 입장에서도 이를 기피하려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신학자들에게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범주가 영과 육의 이분법적인 구분이나, 단지 미래적인 영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삶의 구원으로 이해한다고 하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예수의 기적사화를 새롭게 논의의 중심으로 부각시키지 않을 수 없는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예수의 기적사화는 복음서의 예수전승에 있어서 양적으로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도 중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비평적인 신약학자들이 지닌 기적에 대한 역사적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은 예수의 기적사화를 그에 대한 이해의 중심적인 자리에 놓지 못하도록 만들고 말았다. 더우기 케리그마에 의해 채색된 그리스도상이 복음서를 휘감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약학자들의 해석은 예수의 선포와 교훈에 관해서는 엄청난 관심을 기울이도록 했으나, 그 반면에 예수의 삶과 행동양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보다 저조한 관심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경향성은 독일에서 출간된 '예수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R.Bultmann, Jesus, 1958; G.Bornkamm, Jesus von Nazaerth, 19605, H.Braun, Jesus, 19692, M.Dibelius, Jesus, 19492 등). 그것은 어쩌면 더 이상 진정한 의미에서 '지상적 예수'를 찿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만들어낸 결과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불트만 이후 지속된 지상적인 예수에로의 관심전환은 상황변화를 일으켜 왔다. 즉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의 논쟁은 단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극복되어야 할 통전적인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J.Roloff, Das Kerygma und der historische Jesus, 1970; P.Stuhlmacher, Jesus von Nazareth - Christus des Glaubens, 1988; Biblische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Band I, 1992). 따라서 최근에 다시 예수의 삶과 사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다. 이는 여러가지로 의미있는 변화라 할 수있다(G.Theissen, Der Schatten des Galil ers. Historische Jesusforschung in erz hlender Form, 1984; J.Gnilka, Jesus von Nau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1990; R.Schnackenburg, Die Person Jesu Christi im Spiegel der vier Evangelien, 1993). 특히 지상적 예수의 모습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관심은 말씀 선포와 교훈하는 사람으로서의 예수상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몸으로 산 그의 행동양식과 삶에로의 관심의 전이를 가능하게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어떻든 예수가 당시에 있어서 실제로 치유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신학자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떤 의미에서 예수가 치유자였는가 하는 것과, 기적으로서의 치유에 대해 역사적 진정성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그리고 치유의 신학적인 해석과 더불어 목회적인 적응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이 제시되고 있다. 또한 치유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물음은 성서해석의 방법론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의 초점은 이미 정경으로 쓰여진 복음서가 증거하는 본문의 틀에서 예수의 기적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가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자 한다. 즉 치유기적사화에 대한 문학적인 구조분석과 편집사적인 맥락에서의 이해를 전제하면서 예수의 치유기적에 대한 신학적인 해명에 그 강조점을 두고자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의 구체적인 목회현장에서 예수의 치유를 신약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에 그 관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있어서 예수의 치유는 어떤 근거에 기초하고 있으며, 또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 명제식으로 서술하며 본 논문을 이끌어 나가고자 한다.



1) 예수의 치유기적은 양식사적으로 보면 '기적사화'의 양식에 속해 있다. 이는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에 대한 설명적인 전승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에 속한다.

1. 복음서기자들은 예수의 기적사역을 예수의 말씀과 밀접히 관련시키고 있다. 마 5-7장의 산상설교와 마 8-9장의 기적사화, 막 1,15: 1,22의 말씀내용과 막 1,23-28; 1,29-34의 병치유와 축사, 그리고 눅 6,17.18; 10,9에서도 병자를 치유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와의 관계가 그러하다. 또한 요한복음(5.6.9.11장)의 치유사건도 그것과 더불어 나타나는 그 표징의 의미가 깊이 관련되고 있다.

2. 기적사화의 틀은 광의의 범주에서는 ① 배경적인 설명, ② 치유의 과정 제시, ③ 결론적인 증명이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R.Bultmann,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 236-241 참조). 이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의 틀을 지닌 것이 발견된다(H.Van Der Loos, The Miracles of Jesus, 120-133 참조. G.Theissen, Wundergeschichte, 57-89에서 치유사건의 대한 33개의 다양한 모티브를 제시한다).

① 질병의 상태의 심각성 제시(막 5,3-5; 9,18-22; 질병들린 햇수명시: 막 9,21; 마 9,20; 눅 13,11; 요 5,5)

② 공식적인 의료행위의 실패(막 5,26)

③ 치유자에 대한 회중의 조소(막 5,40)

④ 치료의 어려움(치유과정의 복잡성 제시 막 7,33; 8,23).

⑤ 치유자와 치유대상자와의 만남(눅 4,39; 눅 7,11)

⑥ 치유처방(만짐/말씀:마 9,2; 9,22/침바름등)

⑦ 병치유받은 증거(막 1,31: 시중듬; 막 1,44; 2,12; 눅 5,25; 요 5,9; 막 5,43).

⑧ '곧'이라는 상황전이 부사가 등장

⑨ 귀신들의 간청과 반격(막 1,24; 5,7.12).

⑩ 회중들의 반응(막 6,51.52; 눅 6,11; 요 2,11).

3. 기적사화는 지상적 예수의 행위에 의거하여 치유받은 사람들과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어떠한 새로운 이해를 지니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들에게 예수의 기적사화는 아마도 원시기독교회의 선교적인 목적을 위해 전승 보존되었던 것 같다. 이 기적사화에서 예수는 우주적인 투쟁의 승리자로서 부각된다. 즉 마귀들의 세력보다 더 큰 분이 예수라고 하는 것이 그들이 이해하는 기적사화의 초점이다.



2) 갈릴리에서 활동한 나사렛 예수는 그의 공생애 사역기간에 실제로 질병들린 자들을 위해 치유사역을 행하고 귀신을 내쫒았다. 치유사역, 곧 귀신축출과 병치유는 예수의 사역을 결정적으로 특징짓는 것으로서 예수의 진정한 지상적인 행위(ipsissima facta)였다(O.Betz, art. Heilung, in TRE 14).

1. 기적사화가 고정된 문학양식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것이 예수의 치유보고를 부활절 이후에 생긴 경건한 환타지로 해석 해야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즉 기적사화를 통해서는 지상적 예수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없고, 다만 원시기독교회의 신앙에 대한 정보만을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은 결코 적절하지 못하다. 부활절 신앙이 예수의 치유사건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치유사역이 부활절 신앙과 결합되어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의 근거로 서술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옳다고 할 수 있다(참조 K.Seybold und U.M ller, Krankheit und Heilung, 95 이하). 따라서 원시기독교회의 부활신앙이 예수를 통한 새로운 치유기사를 만들어 낸 근거로서 확대, 과장되었다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2. 나사렛 예수의 공생애가 불과 2-3년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듯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얻게된 것은 아마도 이 기적사건들, 곧 예수의 치유사역 때문이었을 것이다(막 1,28). 예수의 말씀과 더불어 그의 축사와 병치유행위는 당시 갈릴리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색인되었고 그러한 예수의 지상생애의 치유활동과 관련한 예수의 기적전승이 그들에게 잘 기억되고 보존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 예수의 기적에 대한 적대자들의 비난은 당시 그의 기적사역(귀신축출과 병치유)이 지닌 진정성을 분명하게 증거해 준다(J.Gnilka, Jesus von Nazaret, 126). 특히 예수가 안식일에 행한 치유에 대한 논쟁(막 1,23-28; 3,1-6; 눅 13,10-17)과 그의 축사가 마귀와 결탁하여 이루어진다는 비난(막 3,22-27; 마 9,34; 12,24; 눅 11,17-19)등은 그 사건이 실제적이었음을 잘 말해준다. 예수의 적대자들조차 예수가 치유기적과 귀신축출의 역사를 행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를 죽이려고 한 이유 역시 예수의 축사행위와 병치유(눅 13,32)로 인한 예수의 대중적 인기에 대한 위협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4.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에서도 마태(11,2-6)와 누가(7,18-23)는 예수의 치유행위가 '오실 자'의 사역의 중심부분임을 말해준다. 특히 누가는 마태와는 달리 예수의 대답이 있기 이전에 예수의 치유행위를 하나의 사건 보도로 삽입시키므로써 이 사실을 예수의 대답과 연결시킨다. 이러한 보고는 곧 예수의 치유사건이 그의 구체적인 삶에서 일어난 것임을 보여준다(A.Suhl, Die Wunder Jesu. Ereignis und berlieferung, in Der Wunderbegriff im Neuen Testament, 487 이하 참조).

5. 복음서에 나타난 개체적인 보고와 포괄적인 요약보고는 모두 예수의 치유를 말하고 있다. 마태(4,24; 8,16; 12,15;14,14; 14,34 이하; 15,30이하; 19,2), 마가(1,32-34; 3,10; 6,53이하), 그리고 누가(4,40; 5,17; 6,19; 7,21; 행 8,6 이하)는 특히 예수의 지상활동('예수께서 그에게 나아오는 자를 고치셨다')을 요약보고 형식을 통해서 예수의 치유사역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가를 증거해 준다. 곧 복음서 본문에 나타난 구체적인 치유의 과정이나, 회중들의 반응등은 그 기적사화들이 현실적이고 구체적 사건이었음을 보여주는 전승들인 것이다.

6. 예수의 저주말씀(마 11,20-24; 눅 10,13-15)에서도 이러한 예수의 능력은 전제된다: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 )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7. 원시기독교회의 설교문으로 알려진 사도행전의 케리그마 또한 예수의 치유사역이 그의 지상생애를 가리키는 중심내용임을 말해준다(행 2,22;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이는 분명히 누가이전의 전승으로 보인다: R.Pesch, Die Apostelgeschichte, 343)



3) 질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을 죽음에로 몰고가며 억압하는 사탄적인 세력이다. 이 세력은 하나님과의 창조적인 샬롬을 파괴하며, 인간에게서 자기의 고유한 정체성을 박탈하는 반신적인 인격으로 등장한다. 질병은 한 인간에게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가 속해 있어야 할 가정안에서의 교제를 상실케 하고, 사회의 공동체안에서 누려야 할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1. 질병은 사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질병을 언제나 귀신들림에 의한 것으로 볼 수는 없으나, 귀신과 병들림의 상관관계를 명백하게 보이는 귀절들도 공관복음서에서 여러번 나타난다. 예를 들면, 막 5,1이하(거라사 귀신들린 사람), 마 9,32(귀신들려 벙어리된 사람), 눅 11,14(벙어리 귀신을 쫒아내니 벙어리가 말하다), 눅 13,11(18년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 등을 펴지 못하는 여인: 사탄이 이 여인을 18년 동안 얽매어 놓았다;13,16), 막 7,24 이하 병행귀(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 막 9,17 병행귀(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 등이다. 예를 들면 귀신이 한 인간의 자기됨을 상실하게 하고 그 안에 거하면서 대답하고 있는 모습이다. 곧 귀신들린 자의 행위가 인간에 의해 조정되지 않고 귀신에 의해 억압받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막 9,14-29).

예수는 질병을 통해 나타난 인격화된 사탄의 세력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모든 질병이 다 귀신들림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모든 질병을 귀신축출을 통해서 치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으로 하여금 질병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그 자신의 사명임을 알고 있었던 예수에게 있어서 질병 치유란 죄와 죽음이 만연된 이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탄과의 투쟁을 의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예수는 인간을 위하여 이 세계 속에서 사탄과 대항한다. 그러기에 그 투쟁은 우주적 성격을 띈다. 귀신들은 이러한 예수를 향해 격렬하게 질문한다: '왜 우리를 없애려고 하는가?'(막 1,24). 예수는 바로 귀신축출을 치유로 이해했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샬롬이 회복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2. 그러면 질병은 질병들린 개인의 죄악된 행위의 결과인가?

① 구약에 나타난 질병과 죽음은 개인 또는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이해됐다(창 3,16; 38,7.10; 민 11,33 이하; 25,8 이하; 신 28,21.22.27.28.59.60; 삼하 24,15 이하; 왕하 1,6 이하; 5,27; 15,5; 대하 26,16 이하; 시 32,3 이하; 38,2 이하; 51,10 이하; 88; 107,17-22 등). 예를들면 욥기의 엘리바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생각해 보라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4,7). 그러나 욥기의 결말에서는 이러한 질병과 징계와의 상응하는 동일화과정이 극복되고 있다.

② 이러한 인과응보적인 죄와 질병과의 관계는 유대 랍비주의에서 더 짙어진다. 질병은 모두 다 구체적인 죄로 인한 결과로 간주되었다(Billerbeck,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aus Talmud und Midrasch II, 193ff; 527ff).

③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구약적인 사상의 맥락을 띈 유대주의적인 인과응보의 교의적 이해를 거절한다(눅 13,1-5; 요 9,2-5). 인재(人災)와 자연재앙으로 말미암은 희생자들이 그 밖의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기 때문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예수는 분명히 '아니오'라고 말씀한다. 곧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자기 자신이나 부모의 죄때문에(출 20,5; 민 14,18; 신 5,9; 렘 31,29; 겔 18,2 등 참조) 발생한 징벌이라는 유대주의적인 단선적 인과응보적 사상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특히 질병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인과응보적 도식으로 축소 내지 집약시키는 것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 인과응보의 엄격한 구조를 지닌 생각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의 심판에로 향하게 함으로써 회개의 자리로 초청한다. 따라서 인간이 겪고 있는 고난은 하나님의 능력을 베푸시고 영광을 보여주는 은혜의 자리가 될 수도(요 9,3; 11,4) 있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서주로서의 종말적인 위기의 자리가 될 수도 있다(눅 14,5)는 것이다.

④ 죄와 질병, 그리고 용서와 치유와의 관계는 구약에서 보면 하나의 순환적인 고리로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진노하심으로 질병과 재앙을 보내시고, 반면에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에게는 죄용서와 치유를 허락하신다. 기도하는 자를 들으시고, 죄용서와 더불어 병치유를 허락하시는 것이다(창 20,17; 시 30,2; 41,4; 사 19,2; 38,1-8; 렘 3,22; 17,14; 대하 7,14; 시 103,3; 사 19,22; 38,17; 57,18.19/ 렘 3,22; 6,14; 8,11; 33,6; 호 7,1; 11,3; 14,4).

예수에게 있어서도 죄용서와 질병치유의 관계(막 2,1-12 참조)는 매우 밀접하다(C.-H.Sung, Vergebung der S nden, 288-321 참조). 예수는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보는 데서 일으켜 세움으로 그가 하나님만이 소유한 죄용서의 권한(Billerbeck, I, 495f)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특별히 죄용서라는 내적인 치유와 병치유라는 외적인 치유가 결합돼 있음을 말해준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죄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자리가 곧 그의 육체적인 치유를 경험하는 자리임을 가르쳐준다. 그 때 비로서 한 인간의 전인적인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문제가 언급되지 않은 예수의 병치유의 사건에서도 죄용서가 이미 병치유 사건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죄용서나 병치유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수행된 것(ex opere operato)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덧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단지 병치유만을 하는 경우에도 '믿음'과 '구원'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유대주의의 종교사회적인 틀에서 파악할 때 질병은 곧 한 인간의 종교적이며 사회적 자리까지 위협하고 파괴시키는 세력이었다.

질병이란 언제나 반종교적이며 반가정적이고, 또한 반사회적인 특징을 지녔다. 종교적으로는 삶의 근간이 되는 율법에 의해 정죄되었고, 가정과 사회적 맥락에서는 가정과 사회로부터의 분리와 소외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질병들린 자는 유대주의적 판단에 의하면 그들이 자랑하는 거룩한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는 불결한 인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문둥병(참조 Josephus, Bell.Jud, 6.426f.; Billerbeck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aus Talmud und Midrasch I, 520)은 하나님에 의한 저주의 병으로 간주되어(민 12,12; 레 12,45-46) 유월절 축제를 함께 나눌 특권이 없는 것은 물론 그 종교, 사회로부터 완전히 제거되었다. 귀신들린 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가정에서 부터 떠나 무덤과 산에서 방황하도록 버려졌다(막 5,1 이하; 그런 의미에서 '집으로 돌아가라'(5,19)는 명령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소경 또한 그러한 종교 사회적인 삶의 구조에서는 만년 가난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구걸로 생계를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막 10,46; 요 9,8).



4) 예수의 치유사역이란 하나님 나라의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성취를 위한 구체적인 증거가 예수의 치유사역이다. 바로 나사렛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지금 역사의 자리에 뚫고 들어왔다는 표지다.

1.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에 대해 예수가 선포했다는 것은 그 선포하는 자리에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를 거부하는 거대한 반신적인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란 먼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세력들에 대한 멸절 선언이라는 부정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시작됐다. 따라서 인간의 자기 존엄성을 파괴시키고 자기 정체성을 망가뜨리는 질병을 예수는 적대적인 마귀의 세력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쫒아내야 할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마귀는 죄와 질병과 사망이라는 불순종의 유산을 이용해 인간을 위협하고 억압하고 파멸시키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사탄과의 투쟁이었고, 그 구체적인 사역이 귀신추방과 병치유로 나타났던 것이다(마 12,28; 눅 9,2).

2.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예수의 귀신축출과 병치유를 통해서 현재화되었다.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눅 10,18)라는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그의 주권을 펼치고 계신다는 예수의 확신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악의 근원자로서의 사탄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 준비하신 그 일을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이 세상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귀신이 쫒겨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으로 보았다. 인간과 세계를 지배하던 마귀는 패배를 당하고, 이제 그의 세력을 지녔던 시기는 종말을 고했다: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성령으로 귀신을 쫒아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눅 11,20; 마 12,28; 비교 막 3,27; 6,7.13; 눅 10,18; 하나님의 손가락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출 6,19; 신 9,10; 출 31,16; 시 6,3을 참조하라.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손'이나 '하나님의 영'은 상응개념이다). 유대주의에서 미래에 올 것으로 기대됐던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현존에 의해서 사탄과 그 능력은 끝나고(모세의 승천기, 10,1) 이미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Qumran 공동체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알고 있었으나 중재하는 인격과 관계된 것으로 보지는 않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다스리신다는 종말론적인 구원의 출현을 보여주는 지상적인 표지였다. 예수의 귀신축출은 말하자면 사탄, 곧 강한 자의 집을 쳐부수고 그 억압을 푸는 하나님의 사건이다(막 3,27). 병치유와 귀신축출은 따라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찿기 위한 예수의 사역의 핵심이었던 것이다(마 10,6-8; 눅 9,2). 그러한 예수의 사역은 현재를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메시야적인 기대를 충족시켰던 것이다(H.D.Betz, Jesus als g ttlicher Mensch, in Der Wunderbegriff im Neuen Testament, 423).



마태에 의하면 산상설교가 메시야의 가르침인 것처럼 예수의 치유사역은 바로 메시야적인 행위들이었다(마 11,2이하). 예수의 병치유는 곧 종말론적인 메시야 왕국의 선취적 사건들이었던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말하자면 인격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구체적인 현현이었다. 그의 나타남 자체가 사탄과 귀신들의 세력들로 둘러싸인 세상을 향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이 세계는 그들로 말미암아 죄와 질병으로 비틀어지고, 악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치유하는 능력을 갖고 이 억압된 세계를 하나님의 기뻐하는 세계로 회복시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결정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시작하신 표징이 예수의 치유행위였다. 이로써 미래에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던 우주적인 구원의 기다림이 예수의 기적 치유를 통해 현재적으로 그 실체가 현현된 것이다.

3. 그러나 이러한 예수의 말씀과 사역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은 예수의 낮아진 삶, 곧 그의 비천성과 민중성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다. 예수는 병치유를 통해서 고난당하는 민중과 만났다. 치유는 긍휼히 여기는 예수와 그를 향해 간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따라서 예수의 귀신축출과 병치유의 기적행위는 은폐성을 띄고 있다. 마 11,6의 '나를 인하여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가 복되다'고 말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감추어진 계시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계시의 은폐성이란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가 지닌 종말론적인 구원과 심판이 종말론적인 예언자로서의 예수의 삶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예수의 인격 곧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 대한 인간의 태도 여하에 따라 인간이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서 견딜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가 판명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치유사역은 단순히 일반 의사의 치유활동과는 유비 될 수 없다.



5) 예수의 치유는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연속선에 놓여있다. 예수의 치유는 긍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1. 예수의 병치유는 구약과의 밀접한 관계를 지닌 행위였다. 첫째는 복음서가 예수의 병치유를 구약에서 예언한 말씀의 성취요 완성(마 11,5; 사 29,18; 35,5; 61,1 이하)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둘째는 예수의 치유사역을 말해주는 중요한 본문인 눅 4,17 이하와 마 11,4이하(눅 7,21이하)가 근본적으로 구약말씀의 인용인 것을 통해 알 수 있다(참조 사 61,1; 29,18; 32,3 이하; 35,5.6). 특히 예수의 치유는 이사야의 하나님의 종과 상응하는 사역으로서(마 8,16.17; 사 53,4/ 마 12,15-21; 사 42,1-4) 구약의 약속의 말씀이 성취된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부각되고 있다. 셋째로 예수가 행한 구체적인 치유기적 서술 또한 구약적인 문학적 틀의 영향을 받고 있다(막 5,35-43; 요 4,46-54; 참조 왕상 17,17-24; 왕하 5,1-14).

2.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위대한 치유자였다(창 20,17; 신 28,27.35; 왕하 5 장; 20,1-11; 출 15,26; 시 6,2; 103,3). 인간이 질병의 고통중에서 궁극적인 도움을 청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치유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셨다. 예수는 이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은 자(눅 4,18.19; 사 61,1.2), 능력을 지닌 인자(막 2,10.11; 참조 시 103,3; 단 7,13.14)로 오셔서 연약하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며 용납하신 것이다.

3. 예수의 병치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다.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는 긍휼이다(눅 1,68; 7,16; 출 4,31; 룻 1,6). 예수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긍휼이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막 5,19:; 마 9,13).



6) 하나님의 긍휼에 기초한 예수의 치유는 전인적인 인간회복운동이었다. 예수는 인간을 전인적으로 이해하고 전인적인 인간구원의 구체적인 표지로서 질병치유를 행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구체적인 신체성(身體性)이라 할 수 있다. 육체적인 억압으로 이해되는 질병은 인간을 영적인 억압에로 나아가게 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관계에서도 이루어져야 했던 것이다. 이는 말하자면 창조신학적이며, 동시에 구속신학적인 창조와 구원의 회복운동을 의미한다(명제 11 참조).

1. 예수의 병치유란 하나님이 인간을 살리는 구원의 신체성(身體性)이라(E.Kaesemann, Wunder im NT, RGG3, 1835-1837 참조) 할 수 있다. 구원이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체성을 띈 전인적인 것임을 알리는 증거다. 예수의 치유는 인간을 전인적인 의미에서 자유롭게 한다. 그런 점에서 복음서에서 치유라는 용어와 구원이라는 용어는 서로 교환(막 5,23; 마 9,21; 눅 7,50)되고 있다. (막 5,23.28; 6,56; 마 9,21.22; 눅 8,36.50)은 치유를 의미하며 동시에 인간의 전체적인 구원을 지향한다. 예수의 치유란 의사들이 행하는 단순히 육체적인 질병으로부터의 회복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병자에게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로의 구원초대를 의미한다.

2. 병치유와 죄용서가 예수의 치유사역에서 결합될 수 있는 이유는 기독교적 구원의 전인적인 모습이라는 점에서 이해된다(앞 3) 2.④ 참조). 이는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인간의 온전한 회복을 가능하게 함으로 다시 삶의 일상성에로 돌아오게 하기 때문이다(막 2,1 이하).

3. 예수가 육체로 오심은 고난당하는 인간의 육체의 고귀함을 가르치고 그 육체에 건강(온전)함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성육신의 사건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천하의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기에(막 2,27) 예수는 사탄의 세력을 정지시키고 창조질서를 보존하며 회복시키기 위하여 치유를 행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난 당하는 인간을 위한 예수의 치유란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 얽매인 율법/안식일법보다 언제나 우선한다(막 2,27). 법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질병을 개인과 사회, 그리고 종교적인 죄를 묻는 근거요 내용으로 삼고, 병자를 사회로부터 소외시킨 제자들이나 유대인들과는 달리 예수는 고난 당하는 병자의 삶의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연대한다(요 9,1 이하). 이것이 예수의 진정한 사회성이요 통전성이라 할 수 있다.



7) 예수의 기적사화에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절망과 고난이,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색인되어 있다. 예수는 인간의 고난에 대해 결코 수동적인 수용이나 도피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고통을 제거하며 극복하고 있다.

1. 예수의 병치유 기적사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절망 속에 신음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애절한 간청이다. 거기엔 질병들린 자들의 기대와 부르짖음과 더불어 종종 이웃(친구)의 정성스런 간구도(막 2,3이하 병행; 막 5,21 이하 병행; 마 8,5 이하 병행 등) 나타난다.

2.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서 예수는 두가지 태도를 보여준다. 인간을 억압하며 괴롭히는 질병과 귀신 그리고 자연 환경의 위협에 대해서는 분노(막 1,43; 요 11,33)이며, 다른 한편으로 고통받으며 신음하는 사람에 대한 긍휼과 불쌍히 여김이다(막 1,41; 마 14,14; 참조 막 6,34 병행; 9,22; 눅 7,13; 10,33). 전자는 인간이 지닌 존엄성과 특권을 위협하고 상실케 하는 적대적 세력에 대한 예수의 태도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귀신과 질병, 그리고 자연의 위협을 향해서 통분히 여기며 꾸짖는다(눅 4,38-39; 막 1,25; 막 4,39). 그러나 이와 반대로 귀신들린 자, 병자, 고난의 자리에 든 자를 향해서는 사랑과 긍휼히 여김을 보여준다(개인에 대한 불쌍히 여김: 막 1,41; 마 20,34; 눅 7,13/ 공동체에 대한 불쌍히 여김: 막 6,34; 8,2; 마 9,36; 14,14/ 외부인의 예수에 대해 긍휼을 요청: 막 7,32; 8,22;9,22 등). 예수의 이러한 불쌍히 여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어휘인 는 동정과 연민의 정서를 표현하는 말이다. 한 사람의 존재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긍휼함이다(탕자를 맞는 아버지의 긍휼: 눅 15,20; 강도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선한 사마리아인: 눅 10,30이하; N.Walter, in EWNT 참조). 이는 단순히 인도주의적인 동정과 같은 개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다. 그런 점에서 이 말은 예수의 진정한 목자됨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막 6,34; 마 9,36; 요 10,11; 참조 민 27,17; 겔 34,4.5.23; 렘 23,4).

3. 분노와 긍휼을 동반한 복합적인 예수의 이 모습은 곧 탄식과(막 7,34; 8,12) 통분히 여김(요 11,33.38)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 상황에 대한 '어찌하여'라는 물음의 표시로서, 한편으로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에 대한 예언자적인 비판과(R.Pesch, Das Markusevangelium I, 408(HThK II)), 또한 나사로의 죽음앞에서 통곡하는 사람들의 불신앙에 대한 통분(R.Bultmann, Das Evangelium des Johannes, 310), 그리고 인간에게 슬픔을 야기시킨 저 죽음의 세력에 대한 통분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이러한 영적인 격앙이 나타날 때마다 치유와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음을 복음서 기자들은 언급하고 있다.



8) 예수의 치유는 전시효과를 노리는 기적과는 상관이 없다.

1.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가 행한 기적을 나타내는 어휘로 (놀랄만한 것)나 (기사)를 사용치 않고 그대신 (능력: 마 11,20-23; 13,54.58; 막 6,2.5; 눅 10,13; 19,37)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예수에게 주의 능력( )이 함께 있었다(눅 5,17), 이 능력( )이 예수에게서 나와 모든 사람을 치유했다(눅 6,19)고 기록하고 있다. 혈루병앓는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도, 예수는 자기 안에서 능력( )이 나간 것을 아셨다(막 5,30; 눅 8,46)고 기록해 준다. 는 오히려 적그리스도가 행하는 이상한 일을 의미할 때 사용된다(막 13,22; 마 24,24).



출처 : 한국방송신문
글쓴이 : 예수중앙관리위원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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