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
양승훈 교수 (호산나칼럼에서 편글)
1. 서론
하나님께서 세상을 생각하시고 창조하셨듯이 하나님의 본질의 연장인 인간도 생각하고 행동한다.
비록 그의 사고의 깊이의 심도와는 무관 하더라도. 그런데 인간의 사고활동은, 언제나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진 세계관에 근거하지 않고는 행해질 수 없다. 세계관이란 철학자나 심호한 사상가에 국한된 호사품이 아니라, 그가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뒷바침하고 있는 세계관이란 과연 무엇인가? 제임스 사이어는 "세계관이란 우리 세계(세상)의 기본적인 구성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견지하는 바 일련의 전제들 (혹은 가정들)이다." 라고 설명한다. 또한 세계관이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근본적 해답을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즉 (1) 참된 최고의 실재(reality)는 무엇인가? (2) 인간은 무엇인가? (3) 인간의 사후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4)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가? (5)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이 그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이와같은 질문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입각해서 이 세상과 인생과 문화전체를 인식하고, 그에 따라 삶의 자세를 확립하는 기독교적 안목을 말한다. 다음 장에서 왜 이러한 다소 난해해보이는 것들을 고찰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2. 기독교적 세계관을 견지해야 하는 이유
우리는 냉랭한 지식만의 기독교를 원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우리에게 있는 깊은 문제 - 우리들을 오류로 이끄는 몇가지를 살펴봄으로써 기독교적 세계관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먼저
(1)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함에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主님으로 인정하는데 있어서, 개인의 시간 및 재물사용, 앞길의 계획의뢰함 따위에만 국한시켜 왔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주(主)되심은 교회, 사회 심지어 우주 전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임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요 1:3, 골 1:20, 마 28:18, 행 2:36)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 신앙의 영역에만 국한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한편으로 우리가 "예수님은 나의 주인(主人) 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한국과 같은 비기독교적인 문화 사회 속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다운 행동과 생활 양식을 개발하여 좀 더 완벽히 융화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에 대한 답으로써 기독교 세계관은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2) 이원론(二元論)적 행습의 탈피를 위하여서이다.
우리 자신을 포함한 피조세계를 관찰, 인식함에 있어서 일관성 있는 사고의 틀의 부재 혹은 거부로 말미암아 사고가 이분되거나 그릇된(지나친 혹은 소홀한) 강조를 하거나 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되는 분열 증세를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이원론"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원론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심각한 분리를 야기시켜 신앙과 생활 모두에 해를 끼치게 되는데, 이제 우리 주변에서 그 구체적인 원인들을 살펴보자.
첫째로 동양종교(특히 불교)의 탈세속적 자세 및 유교의 형식주의와 민간 토속신앙의 귀신, 요행, 맹목적 열심 등에 의하여 우리의 종교심은 깊은 영향을 받아왔고 결과적으로 신앙과 초자연적인 것과의 결부로 인하여 신앙과 생활의 분리가 야기되었다.
둘째, 한국교회의 짧은 역사에 비해 숱한 고난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현재적 책임보다는 미래의 천국의 모습에 편중되는 모순을 낳았다.
세째로는 실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펼쳐나가기가 어려우므로 이 가운데 상존하는 긴장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원론적 경향이 스며들었다. 이것은 전임 사역자보다도 실생활의 많은 부분을 직장에서 보내야 하는 일반 신도들 사이에 명백히 드러난다.
이러한 긴장을 해소하는 대표적 패턴에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포기하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타협형, 갈등을 견디기 힘들어 이런 생활에서 도피하는 분리형, 그리고 이중적인 가치관,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이원론형이 있다. 특히 이원론형은 자기의 이중적인 면 때문에 갈등도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는 교회의 몰인식과 이원론을 지양하는 이런 방향에의 교육이 부재한데 기인한다. 기성교회의 다분히 공리적인 목회방침이나, 여러 복음주의 선교 단체들(특히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이 일반 전공과목에 대한 올바른 안목과 인간 및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지 않는 것들을 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2) 풍성한 삶으로 회복을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인은 너나 할것없이 모두다 풍성한 삶(요 10:10)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흔히들 이 풍성한 삶을 '영적생명', '중생', '새로운 피조물' 등등의 개념으로 혹은 현제적 축복(건강회복, 사업의 발전 등)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풍성한 삶이란 훨씬 넓은 창조의 전 영역과 창조의 본질적 성격, 인간에게 부여된 창조적 잠재력(성, 예술, 학문, 사회) 등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올바른 안목이 없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좁고 왜곡된 생각 속에서 자위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몇가지 이유를 들어 보았다. 이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위의 것들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제 기독교 세계관을 살펴봄으로써 과연 우리는 어떠한 안목을 가지는 것이 성경적인가를 고찰해 보기로 하자.
3. 기독교 유신론(唯神論) - 기독교 세계관
17세기 말까지 서양의 세계관을 지배해왔고, 그 뒤에 발전된 여러 세계관의 기본이 되는 기독교 유신론은 그 세계관의 기본명제가 하나님의 본질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본질에 근거한 명제들을 숙고함으로써 앞서 제시된 필요성에 근거한 명제들을 숙고함으로써 앞서 제시된 필요성에 어떤 해답을 줄 수 있는가를 알아 본다.
첫째 '하나님은 무한하고, (삼위의) 인격이시며, 초월하시고 내재하시며, 주권자이시며, 善하시다' 라는 명제에서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 - 자존(自存) - 과 그의 속성의 정수인 선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출 3:14)라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다른 모든 실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최고의 실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선은 거룩과 사랑이라는 두가지 방법으로 표현되고, 여기에서 우리는 의의 절대적 표준(하나님의 속성에서 발견되는, 요일 1:5)과 그래도 인간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사실(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요일 4:16)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또다른 명제, "윤리는 초월적이고, 그것은 선(거룩한 사랑)으로서의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고 있다."의 가르침을 통해서, 윤리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며, 도덕의 기준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그 표준이 되심을 알 수 있다.
세째 명제로는 "하나님은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개방체계(open system)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Uniformify)로 운행하도록 하셨다." 이 명제에서 하나님은 어떠한 "선재하는 물질"이 없는 상태 - 시간, 공간 물질까지도 - 에서 우주를 창조하셨고, 이 우주는 질서가 있으며, 또한 하나님과 사람의 재조정에 의하여 변경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미래의 우주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지 숙고하는 책임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네째 명제로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인격, 자기초월성, 지성,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 등을 지닌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창 1:26, 27) 지음을 받았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인격의 속성을 갖고 있으며, 참다운 창조를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인간창조라는 명제와 더불어 다음의 명제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은, 비록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훼손되었다. 한편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구속하시고 선을 회복시키는 과정을 시작하셨다.
물론 인간은 이 구속의 사실을 접하고도 그 구속을 거부하는 길은 택할 수도 있다' 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창조-타락-구속-영화"의 네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다른 모든 피조물과 같이 인간도 선하게 창조된 자로서 매일의 생활에서 그 성품을 드러내는 것에서 벗어난 존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 참여하므로써, 이제 원래의 창조된 의도대로 되는 영화(glorified)의 과정에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그 순간부터 개인의 삶은 천국으로의 연속 시간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의 명제 '역사는 직선적인 것이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섭취시켜가는 의미있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라는 것에 접근한다. 비록 인간의 행위가 혼란하게 보일지라도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으며, 그것은 창조-타락-구속-영화의 길을 가는 것이다.
여섯째 명제로는 '인간은 죽음은 하나님 및 그의 백성과 함께 누리는 생명의 문이든지, 인간의 갈망을 궁극적으로 채워주실 유일하신 분과 영원히 갈라서는 문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에서 영화된 존재로 변화된 자들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천국과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된 지옥이 있음을 분명히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교통하고 있다'는 명제에서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의 교통하심은 "계시"라고 표현되는 자연을 통한 일반계시와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한 특별계시로 이루어진다. 특별계시의 정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따라서 사람들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창조주이시자, 지지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자요 친구가 되신 우주의 주님이신 하나님은 바로 사람과 교통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들고 싶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할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과 순종과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된다.
----------------------------------------------------------------- 참고서적 : 1) 제임스 사이어 지음, 김헌수 옮김,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IVP. 1985. 2) 송인규, "죄많은 이세상으로 충분한가",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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