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스크랩] 개관

하나님아들 2018. 5. 25. 23:59
 

1.영지주의(Gnosticism)

알렉산더 대왕의 동서양 통합 이후로 혼합주의가 -페르시아의 이원론과 마술,바벨론의 점성술,동양의 각종 신비주의 종교,헬라의 철학,기독교의 구원론 등이 기독교의 구원론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헬라의 철학을 논리적 근간으로 하면서 혼합된 형태 - 새로운 형태의 사상으로 일어났다.

이런 이유로 영지주의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불러 일으키며 기독교의 철학화를 더욱 가속화 시켰다.

영지주의는 영적 지식 (그노시스)을 통한 구원을 강조 하였는데,영지주의의 영지는 희랍어에서 유래된 말로 영적,신비적,초자연적 지식을 의미한다.

영지주의의 중심은 구원론에 있어서 예수를 영적인 존재로만 인식하고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부인하는 가현설에 있다.이런 사상들은 그들이 영은 거룩하고 육은 더럽고 속된 것으로만 인식하는 이원론적 사고에 근거하고 있다.

(1)팔레스타인과 아시아 지역의 영지주의자들

교부들의 글에 의하면 영지주의의 가장 오래된 모습은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시몬(Simon)이다.그는 자신의 마술과 기독교의 복음을 혼합시켜 많은 추종자들을 모으고 사람들을 현혹하고 그의 제자 메난더(Menander)도 마술을 부리며 자신을 구세주이자 하늘에서 보낸 진리의 사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상체계를 가지고 기독교를 가장 크게 위협했던 것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분한 케린더스(Cerinthus)이다.예수는 요셉의 아들로 인간이며 그리스도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때 하늘에서 내려온 신적인 존재로 이러한 신.인이 결합 인간을 위한 구원 사역을 완성하고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갔으며 예수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2)알렉산드리아 지역의 영지주의자들

사토닐루스(Saturninus)는 이세상을 일곱천사가 창조하고 그 중 하나가 유대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인간들에게 영혼의 본질을 부어주었으나 인간이 물적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그리스도를 보내 구원해 주셨는데 이는 성욕의 자제를 통해 완성된다고 보았다.

카르포크라테스(Carpocrates)는 신플라톤의 흐름에 기독교의 구원론을 결함시켰는데 출생 이전의 혼은 선재적 상태로 복귀함으로 구원을 얻든다고 주장하며 구원받은 자의 구원을 강조 초대교회의 윤리적인 면을 흐리게 하였다.

바실리데우스(Basilides)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천사에 불과하며 불완전하다고 보았다.인간의 몸에 감금된 영혼을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를 보냈는데 그는 인간처럼 보였을 뿐이고 십자가에서 고난 당한 사람은 구레네 시몬 이었다는 것이다.

(3)로마에서 활동한 영지주의자들

대표적인 사람은 발렌티누스(Valentinus)로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가 세례를 받을때 내려와서 존재하면서 인간 속에 갇혀 있는 영의 씨앗들에게 신비한 지식(gnosis)를 전하다가 인간예수가 십자가에 달릴때 육체를 벗어나 에원의 본래의 세계로 돌아갔으며,구원은 그리스도의 신비한 지식을 받은 사람들이 영혼의 자유를 얻고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영지주의의 터무니 없는 사실들이 당시 교회에서 번창할 수 있었던것은 그들의 공동체적 열심과 비밀스러운 모임과 전승이었다.

그들의 사상적 특징들을 요약해 보면

1)성경에 대한 우의적인 해석과 숫자풀이술이다.

2)이세상을 악한 물질로 보고 따라서 창조자도 악한 데미우르지라고 함으로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구약성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3)그리스도와 예수를 이분하고 가현설을 주장함으로 신론과 기독론에서 기독교의 근본에 대항 하였다.

4)구원이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있다기보다는 잠상술적인 영지를 획득함에 있다고 보았다.

5)이원론에 입각 영혼의 구원만을 강조함으로 육체의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았다.

6)기성교회를 육체적인 자들로 규정하고 교회의 조직과 체제를 부인하였다.

 2.순교자 저스틴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황제 숭배를 반대하고 군대 출정과 공직 봉사를 거부함으로 반체제 혁명 단체로 오해되고 사회적으로는 남녀의 음란 집단으로 간주되며 유아살해잡단으로 오해 받고 이론적으로도 성육신과 부활등 반 지성적이며 당시의 철학적 분위기에 반하여 혹세무민의 종교로 낙인되어 수없는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순교,배교,도피와 변증 신학의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순교자의 피를 씨앗으로 교회는 성장하게 된다.당시에 기독교의 순교는 이교도들에게는 부정할수 없는 인간적인 용기였으며 당시 널리 퍼져있던 죽음에 대한 동경을 훌륭하게 풀어내는 출구였으며 결과적으로 제국과 기독교가 마주친 상황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하는 유리한 결과들로 작용되었다.

또 다른 면으로 기독교의 지성인들은 로마의 통치자들과 지성인들에게 그들이 이해할수있는 철학적인 기독교를 소개할 필요를 인식하게 되었고 여기에 최초의 조직신학자라 할 수 있는 변증 신학자로서의 저스틴이 등장하게 된다.

주후 165년에 순교한 저스틴은 [제 1 변증서] 및 [제 2 변증서],[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등의 저서를 남김.

그는 예수를 율법의 완성자요 새언약의 담당자로 보고 있다.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뿐만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참 이스라엘로서의 교회까지도 구약에 들어있다고 본다.

진리는 모두 궁극적으로 한나님으로 부터 나온다는 것 이것은 헬라의 철학과 윤리학으로도 찬동하는 것이었다.

@저스틴의 하나님과 예수와 인간에 대한 이해

-사상의 배경 : 중기 플라톤 철학과 스토아 철학을 배경으로 신론과 구원론을 전개.

1)하나님에 대한 이해 : 초월적,관념적,선재적이며 초월,불변,잘대적 완성의 총체적 소유자.

2)아들에 대한 이해 : 하나님과 인간의중재자이며 말씀이신 로고스이다.따라서 내재적,가변적,상대적인 부분성을 소유.

3)인간에 대한 이해 :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로고스의 씨앗을 가지며 인간 모두는 불완전한 지식과 도덕을 소유하였으나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되고 구원으로 이르게 된다.

@저스틴의 사상을 살펴보면

1)아들 예수를 하나님보다는 저급한 신으로 판단 아들 종속론에 빠졌으며

2)하나님과 아들이 다같은 신이라고 판단 이신(二神)사상으로 흘렀다.

3)하나님의 로고스가 이방 철학자나 시안에게도 계시되었다고 전제해 성육신의 유일성을 약화 시켰다.

4)그리스도의 대속에의한 구원 보다는 율법적이고 도덕적인 구원을 말함으로 하나님의 은총보다는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경향으로 흘렀다.

5)로고스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면 구원을 얻을 수 잇다고 함으로 현대에 등장한 문화신학의 선구적인 역활을 하였다.


3.서방교부

우선 교부(敎父)라함은 A.D 1세기부터 5세기까지의 초대교회 신학자들 다른 말로 신앙의 지도자들을 말한다.이들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서 희랍교부와 라틴교부로 나뉘며 초대교회를 교부 시대(Patristic Age) 라고도 부른다.

서방신학파는 처음에는 로마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내려옴으로 헬라어를 학문적인 언어로 사용했다.이들은 교회론과 성례론을 강조하였으며,목회를 실천적 방향에서 신학을 발전 시켰다고 할 수 있다.서방의 신학자들은 거의가 목회자로 이단들과 부딪치는 각종 문제 해결을 위해 신학을 발전시켰다.

3대 신학자로는 터툴리안,카푸리안,그리고 어거스틴을 꼽고 있다.   

1)터툴리안 : 이단을 물리치기 위한 변증신학으로 영지주의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취득시효”이론을 체계화하였고 군주신론 주의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삼위일체 이론과 기독론을 확립했다.

2)키프리안 : 분파주의를 물리치기 위해 노력했으며 발레리안 황제의 박해때 참수형을 당했다.

그러나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때 배교했다가 재입교 하는 문제로 교회가 분열했을때 그의 교회론을 전개하였다.

3)어거스틴 : 그의 사상은 아주 방대한 분량의 원고로 정리되었으며 그는 초대교회의 교부로 영향력은 중세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4.동방교부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로 나뉘고 서방의 신학에 비해 사변적이고 이론적 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이 강조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는 기독론 논쟁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엇다.

1)알렉산드리아 학파 : 판타이누스,클레멘트,오리겐으로 대표되어지고 오리겐때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오리겐은 성경해석 방법론,창조론,삼위일체론을 강조하였는데 또다른 많은 문제들을 남겨둠으로 후세에 많은 과제를 남겼다.

2)안디옥 학파 : 안디옥을 중심으로 한 성직자들의 성경해석학적 흐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학파는 루키안을 창설자라고 할 수 있으나 진정한 의미로는 디오도루스,옵수에스티아의 테오데루스라 할 수 있다.그 후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 정죄 이후로 점차적으로 힘을 잃고서 회교도들의 발흥과 함께 회교도들의 발흥과 함께 자취를 할 수 있다.


5.니케아 종교회의

서방교회는 박해로 인한 교인들의 재입교문제로 인해서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교황 선출 문제로 교회가 분열되어 가고 있었으며,동방교회는 심각한 신학적 견해 차이로 인해서 교회의 통일성과 더불어 제국의 통일성까지 깨트릴 위험에 처해 있었다.

여기에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적 입장의 차이는 정치적인 문제까지 덧붙여 짐으로 더욱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이런 한지역에서의 교권 다툼이 급기야 제국 전체내의 교권 다툼으로 확대됨으로 가까스로 제국을 통일시킨 콘스탄티누스의 꿈은 무너질 위기에 있었다.

여기에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통일을 위한 교회의 통일이라는 대원칙 아래 비투니아의 호반도시 니케아에서 318명의 감독을 초청해 회의를 개최 하였다.

여기서는 아리우스의 유사본질론이 패배하고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의 동일 본질론이 승리해 동일본질이라는 단어를 신조에 삽입하게 되었다.제2회 787년에 모여 마지막 논쟁 종결을 시도하고 그리스도의 상만이 아니라 마리아,천사,성인의 상까지도 인정하고 화상의 숭배가 회복되고 화상파괴론자들이 이단으로 정죄받게 되었다.니케아 회의장에서 황제는 신조에 서명하지 않는 사람은 교직을 박탈하고 추방시키도록 명령함으로 교회의 통일과 평화를 유지하려는 본래의 의도보다는 결정적으로 다음에 이어지는 종교회의들 속에서 상대를 정치적으로 몰아내는 선례를 보여주었으며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많은 회의들속에서 여러 사건들이 실제적으로 나타나지게 되었다.


6.가이사랴 우세비우스

4세기 어용신학의 창시자로 콘스탄틴이 황제로 등극하기전에 감독으로 선출되어 팔레스타인의 카이사리아 팔레스티니아 지방에서 활동한 주교이자 해석가 이며 역사가.

아리우스 논쟁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주장하였다.교회의 평화와 안녕을 가져다준 제국의 통치자에 대하여 예찬의 글들을 보내기도 하였고,그의 저서 교회사(Chuch History)는 그리스도교 역사 기록의 이정표가 되었다.신플라톤 철학의 주석 방법은 메시아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였다.니케아에서 열린 제 7회 에큐메니컬 공의회는 유세비우스가 모든 면에서 이중성과 비일관성을 보여준 사실을 지적하고 그를 단죄하였다.

     


7.네스토리오스

콘스탄티노플이스의 대주교로 마리아가 로고스를 낳은것이 아니라 신성과 연합하여 예수를 낳았음을 주장하고 마리아를 예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반대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신,인 양성을 엄격히 구분 곧 두 본성을 지닌 뒤인격임을 강조 반대에 부딪쳤다.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열린 에베소 총회에 의해 국외로 추방되어 이집트에서 사망함.


8.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원죄를 부인하고 선과 악을 일일이 선택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감으로 하나님과의 조화된 상태에 이른다고 주장 다시말하면 선택할 수 있는 힘,형식의 자유를 말하였다.이 신.인협조설과 함께 예정에 의한 인간의 구원을 주장하였으며 유아세례의 부당함을 꼬집어 말하였다.

어거스틴은 아담의 원죄가 인간에게 유전하고 구원받을 자는 예정되었음을 강조 이는 불가항력적인 은총으로 강조하였다.하나님의 은총이 있은 후에 믿음은 여기에 대한 결과물로 나타나지며 ㅇ;로써 의롭다함을 얻은 후에 구원의 완성에 인간은 선행과 공로 사상으로 의지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9.유티게와 단성론

예수 그리스도아느이 신성의 우월성을 강조 한 유티케스주의의 창시자로 그리스도가 성육신 이전에는 신.인 양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나 성육신 이후 신성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단성론을 펼침.

A.D 448년 콘스탄티노플 지방대회에서 정죄 499년에 에페소스의 “강도회의”에서 복원 되었으나 다시 451년 컬케톤 회의에서 정죄됨.


10.서임권 논쟁

중세의 로마 교황청은 유럽을 교구로 나누고 각 교구마다 주교를 임명했으며,주교청에는 서기가 배치되어 각종 호적업무와 교회의 헌금을 계수하고 로마에 송부하는 일들을 하게 되엇다.결국 누가 주교를 임명하느냐가 곧바로 돈의 향방을 가름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황과 주교는 서로 자신의 심복을 주교로 임명하려고 대결하게 되었고 이것이 평신도의 서임권 논쟁이다.

이러한 상황은 웜스 협약으로 중재되어진다.

이것은 1122년에 웜스 회의에서 헨리 4세가 내놓은 중재안으로 요지는

1)성직 수여자는 성직자 회의에서 선출하되 황제가 보는 앞에서 수여한다.

2)성직 수여시는 황제는 반지난 막대기를 주는 대신에 황제의 홀을 만지는 것으로 한다.


11.아비뇽 교황청

중세때 아비뇽에 있었던 교황청.로마에서의 파벌주의에 시달리던 필립 4세에의해 프랑스로 오도록 권유를 받았던 교황 클레맨스 5세가 교황청을 아비뇬으로 옮김.이시기의 교황들은 모두가 프랑스인들로 주위의 정치적 압력에 상당히 민감할 수 밖에 없었고 1309년부터 1377년까지의 이 시기를 “제 2의 바벨론 유배”또는 “아비뇽 유배”라고 부른다.이것은 이 기간동안 교회가 프랑스 왕권의 강력한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12.성상논쟁

725년 - 843년 비잔티 교회에서성상을 사용하는 것을 놓고 벌어진 분쟁으로 성상 파괴론자들은 구약성서의 십계명에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을 금지 하였다는 것과 우상숭뱌로 발전할 가능성을 들어 성상 숭배에 반대 하였다.이에반해 성상 숭배론자들은 성상의 상징적인 성격과 피조물들의 존엄성들을 강조 하였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상을 만들고 숭배하는행위를 반대하였는데도 성상을 사용하는것은 로마의 동부지역에서 상당히 인기를 얻었으며 급기야는 6세기에서 7세기에는 교회가 성상을 공식적으로 권장하는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이런 성상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미신적 요소까지도 내포하게 되었다.이런 사실들은 소아시아교회의 거센 반발들을 일으키고 말았다.

성상 논쟁을 시기적으로 정리해보면

1)황제 레오 3세 : 종교적 성화 숭배로 부터 교회를 정화시키려는 운동을 감행하고 이 운동을 통해 제국의 통일을 가져오려고 함.

2)교황 그레고리 3세 하에 731년 로마 감둑들의 회의 : 성화 반대자들을 출교.

3)황제 콘스탄틴 5세 : 745년 콘스탄티노플 회의 소집 - 성화 숭배자 정죄

4)황제 콘스탄틴 6세 : 787년 제 7차 에큐메니칼 회의를 니케아에서 소집 - 화상,십자가,복음서에 대해 적절한 예의를 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듯 하지는 말라.

결국 최종적으로 성상 숭배의 정당성이 인정됨.   


13.안셀무스

중세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스콜라 철학의 창시자이다.근세에는 존재론적 신증명과 속죄 또는 구원에 관한 보속론의 고안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저서 [하나님은 왜 인간을 만드셨나.]에서 객관적 속죄론에 근거한 이론을 전개하였고,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을 만족 시킬 수 있다는 만족설을 주장하였다.믿음과 이성의 관계에서는 이성을 통해 믿음이 신학의 출발점임을 강조했다.

1060년 베네딕츠 수도원으로 들어가 1078년 베크의 대수도원장이 되었다.1093년 켄터베리의 대주교로 부임하였고 서임논쟁에서 주요인물이 되었다. 1098년 그리스 교회에 맞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하나인 필리오케에 관한 교리조항을 옹호하는등 공의회의 적극적인 역활을 하였다.


14.토마스 아퀴나스

이탈리아의 커톨릭 신학자로 오미니크 교단의 수사 알베르투스 아그누스의 제자.1323년에 성인의 열에 들었다.그의 사상적 특징은 아리스토 텔레스 철학의 유물론을 뺀 관념론의 요소인 부동의 동자, 제 1 원리로서의 신학이라는 관념을 취하여 기독교에 적용시킨 점이다.

자연 현상과 창조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으려는 인간적인 사변을 중요시 하고,이성의 추구와 선행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이르려는 신학적 구조를 추구했다.


15.신비주의

종교적 색체로 채색된 관념론적 세계관으로 초월적인 실재를 전재하고 이것을 개인의 특별한 내적 체험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비합리주의적인 견해.

다시 말하면 예배,기도,금욕적인 훈련을 통해서 궁극적인 실재와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이러한 사상들은 각 수도원 운도의 초기 단계에서 하나님의현존에 대한 느낌은 배양하는 신비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에크하르트는 신비주의의 대표자로써 그리스도의 중재가 필요없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시 되는 범신론적인 경향에 이르게 되었음.

14세기에는 신비주의가 교회뿐 아니라 많은 이단 종파들 안에서도 번성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그 뒤 여러시대의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일반적으로 개신교 신비주의자들은 신적인 빛 또는 불꽃이 보편적인 원칙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인정하는데,이것은 카톨릭의 가르침에 함축되어 있다.


16.후스

체코 사람으로 종교 개혁가이며 찰스대학의 총장이며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았다.신앙의 기준을 성서에 기초로 하였으며 교회의 권위는 성서만이 최고의 권위로 예배에서 설교를 중요한 위치로 강조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On the chucher]에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몸이고 교회의 머리이다.결국 인간에게는 죄사함의 능력이 없다.그러므로 교황이나 추기경이라 하더라도 성서에 위배되는 말을 할 수 없다.그는 계속해서 성상예배를 반대하고 거짓 기적이나 미신적 순례 행위를 배격하고 면죄부 판매를 거부했다.

1415년 콘스탄스 회의에 출두하여 변명하라는 출두장을 받고도 출두하지 않고 체포되어 화형당함.그가 죽은 후에 보헤미안들이 분개하여 일어나 개혁당이 결성되었다.


17.위클리프

1330년 잉글랜드의 요크셔에서 탄생한 영국의 신학자이며 철학자요 종교개혁자이다.최초로 영어 성경의 완역을 추진했으며 종교개혁의 선구적인 역활들을 해냈다.

그는 독자적인 정치 이론을 가지고 교회는 죄를 지은 상태에 있으므로 재산을 포기하고 복음의 정신을 따라 가난해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1378년 위클리프는 교회의 신앙과 의식에 대하여 체계적인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렇듯 교회에 대하려 과감한 비판을 할 수 있었던것은 보이는 교회보다는 선택받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교회를 믿을 수 있게 해준 예정설 때문이었다.

그가 주로 비판한 대상은 주로 화체설이었다.그는 그것을 우상 숭배요 비성서적이라고 비판하였다.1382년5월 런던 블랙 파이어스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많은 저서가 정적 당하고 옥스포드에서는 그의 추종자들이 굴복하고 말았다.


18.에라스무스

1469년 네델란드 태생으로 인문주의자이며 북유럽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신약성서를 최초로 재편집하였다.그는 교육에 관한 저술로 형식에 치우친 과거의 교육과정들을 지양하고 인간성을 중시하는 고전문학을 새로운 방향으로 강조해 나가는데 이바지 했다.

그는 교회의 악폐를 비판하고 먼옜날의 좋앗던 시절을 강조한으로 개혁에대한 의지들을 부추겼다.그는 종교개혁의 시대에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태도를 유지함으로 신앙의  정통성보다 자유를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부러 일으켰다.

참된 종교의 개혁을 인류의 도덕적 혁신으로 보았으므로 교회의 부도덕성과 스콜라 신학의 허위성,저속한 신앙의 형태들을 지식인들이 풍자와 기지로써 개혁될 수 있으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의 저서 우신예찬을 통해 중세의 교황에서 일반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순전히 바보들이라고 비웃으며,그들의 악덕과 현세적인 야망폭로,또한 교회의 축제,순례와 면죄부,유물에 대한 어리석은 신뢰를 폭로 했다.


19.이신칭의 

루터의 사상중 핵심이 되는 사실로 오직 의인은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로 은헤로운 하나님을 만나는 데는 아무런 조건이 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믿음의 선물로 이루어짐을 말하는것이다.구원과 하나님의 사귐을 확실히 강조하여 구원과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보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인간은 단지 이러한 하나님의 신적 역사를 감사와 순종으로 수락할뿐이며 이것이 신앙이고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태도이다.이 사상은 바울 - 어거스틴 - 루터를 거치며 신학적으로 표면화되었으며 롬3:28을 읽으며 영적인 깨달음을 얻어 종교개혁을 시도하였고 종교개혁의 주표어가 되었다.


20.칼빈의 [기독교 강요]

프로테스탄트의 조직적 신학서로서 최초는 1536년 라틴어 초판을 스위스 바젤에서 처음 발행했다.그뒤여러차례의 수정을 거쳐 1559년 결정판이 나왔다.칼빈이 처음 집필했을때는 로마서 강해의 성격이 강했으며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들이 들어있다.요약해 보면

1)율법 : 인간의 가슴에 불안감을 심어주지만 그리스도에게 이끌어 주는 선생 역활을 함.인간이 영적인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2)신앙 : 하나니므이약속과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선물이다.통회,감사를 통해 영적 교만 없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의 가슴에 성령께서 믿음을 심어 주시는 것이 곧 신앙이다.

3)성찬 : 성찬과 세례만을 주님께서 인정하신 성례로 인식함.성려의 임재를 주장.

4)교직 : 칼톨릭이 교직은 비성서적이고 감독 장로로 불리우는 신약교회의 설교자,지도자들은 기독교 성도들의 동의아래 성직을 담당해야 한다.

5)하나님의 섭리 : 하나님은 모든 실재를 공용하시고 자연계 ,영계의 모든것을 감독 하신다.하나님앞에서의 인간은 무력한 존재이고 피조자 인간은 창조자 하나님을 측량하지 못한다.

6)예정 :이중 예정을 주장.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로 예정함.이선택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다.

7)교회 : 단순한 기관이나 개개신자의 집단이 아니다.역사의 전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들을 위해서 나타나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도 주님의 성례가 집행되는 곳에 교회가 있다.


21.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포로]

마틴 루터의 3대 개혁 논문중의 하나이다.

카톨릭 교회의 타락과 폐해를 개혁하기위해 일어선 루터는 1519년 라이프치히 토론후에 교회측의 대화에 응하는 자세가 협력을 바랄 수 없음을 알고 ,교회의 신앙및 제도,의식,예전의 근본적 비판과 개혁의 불가피 함을 인식하여 1520년에 들어서면서 활발한 문서 활동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바벨론 포로에 관한 서설이란 책에서 교회의7가지 주요 비적을 바벨론 포로기의 곤고패잔한 70년에 비유해서 신의 말씀의 표시가 상실되었음을 통렬히 비판한 것이다.그는 성찬례와 세례예식만을 성경에 근거를 두었다는 이유로 승인하였는데 이것도 신의 말씀의 표시로서의의미이다.

그는 비적이라는 개념자체를 부인하고 그럼으로 전례종교로서의 가톨릭 자체를 배격한다.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1)7성례를 파기하고 성경에 근거한 세례,성찬,두가지만의 허용을 주장

2)공제설을 주장하고,일종성찬은 악습이라고 주장

3)평신도들도 떡과 포도주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

4)미사의 모순지적,오직 한번 드리신 그리스도의 희생제로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

5)참회제도를 비난하며 고해성사도 제외시킴.


22.아우그스 부르크 평화 조약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열린 회의로 독일에서 카톨릭 뿐만 아니라 루터교도 존속할 수 있도록 한 최초의 항구적인 법률적 기초.동년 9월 25일 신성로마제국 의회가 공포 하였다.

루터파는 카톨릭과 나란히 공인되었으나 종파의 선택권은 제후들만 갖게 디었고그것과 다른 종파의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에게는 그 지역을 떠나는 자유가 인정되었을 뿐이다.

대주교나 주교들의 종교 제후가 루터파로 개종하고자 할땐 그 지위를 잃고 그소령은 카톨릭측에 유보되기도 하였다.


23.위그노 전쟁

위그노란 카톨릭이 칼빈파 신도들을 격멸하여 부르는 호칭이다.1562년 바시의 사건을 계기로 1598년까지 8차에 이르는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었다.

30년이 넘게 걸린 이 전쟁은 한 때 위그노의 지도자였던 앙리 4세가 커톨릭으로 개종하여 즉위한 후 낭뜨칙령을 발표함으로  마감되었다.

아우구스 부르크 회의나 낭뜨 칙령이나 모두 신앙의 자유를 원칙으로 하면서 근세사회의 기본적인 틀을 마련하였으나 프랑스에서는 왕권이 강화됨으로 프랑스가 중앙 집권적인 민족국가가 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24.베스트 팔렌 조약

교황의 위치가정치적으로 끝났음을 아리는 강화 조약으로 신교와 구교가 한 지역안에 함께 공존할 수있게 되었다.독일의 30년 전쟁과 스페안과 네델란드의 80년 전쟁을 마감한 이 조약은 영토에 대한 주권 보장,종교문제 타결,교회에 대한 토지 소유권 문제 그리고 독일 제국의 체제에 관한 문제들이 해결 되었다.

이 조약은 독일의 기본법이 되었으며 1806년 신성 로마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모든 조약의 근거가 되었다.


25.종교개혁 급진파

종교개혁에는 우파(루터파,개혁 교회파,영국 국교회)와 좌파(재세례파,신령주의파,반삼위일체파)로 나뉘는데 여기서 좌파로 분류되는 개혁 세력이 바로 급진적인 종교개혁 세력이다.

이들을 급진파라고 하는 것은 이들이 우파의 종교개혁 자체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 지지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성서와도 어긋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1)재세례파 ; 이들의 기본적인 핵심은 초대교회를 이 땅에 다시 회복하는 것이었다.

2)신령주의자 :성경 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재를 통해얻는 영감을 더욱 권위 있는 것으로 보면서 기록되어진 성서의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3)반-삼위일체파 : 기독교의 가장 핵심인 삼위일체를 부인하면서 아들 예수는 뛰어난 도덕적 스승으로 모범을 보였기 때문에 신적인 능력을 부여 받았다고 주장함.


26.이신론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종교를 이해하고 종교의 보편성을 인정하며 성서의 특수계시를 무시한 17세기 영국에서 발달한 사상.신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우주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17 - 18세기 서구의 지식인들에게 가장 우세한 종교적 태도이기도 했던 이 사상은 하나님이 역사를 창조하신 후에 역사에는 전혀 개입이 없었다고 주장함으로 이들을 자연 신교라고도 한다.

자연은 신의 완전한 계시 이므로 특별계시는 필요없고 다만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좆아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애드워드 하버트,둘란스,콜린스등이 있다.


27.계몽주의

17-18세기 신,인간,이성,자연 등의 개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통합한 사상운동으로써 ,이성 중심으로 이성의 힘에 의해 인간은 우주를 이해하고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으며 지식,자유,행복을 인간의 합리적인 목표로 보았다.다시말하면 이성의 힘과 인류의 진보를 확신하며 현존의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문화 운동이었다.

계몽주의는 인간중심의 운동인 르네상스 운동과 더불어 중세 교회의 신중심의 우주관에서 인간중심의 우주관으로 변화를 추구하고 심리학과 윤리학이라는 근대적 이론을 턴생 시켰을 뿐 아니라근대혁명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이신론과 낭만주의를 형성케 했다.


28.경건주의

17-18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기독교의 규율쇄신 운동으로 기성교회가 속화되고 풍속이 문란하고 영적은혜의 설교가 사라지고 체험적 신앙이 소흘히여겨지는 데 대해 성령과 내적 생명을 존중하는 움직으로 일어난 것이다.

우드레흐트 대학교수인 네델란드 교수인 사람부에투스가 시작 했고 프랑크프르트의 원목인 슈페너가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이들이 주장한 것은 예수님의 중생 체험을 강조하고 평신도의 활동을 중시함과동시에 칼빈주의적 청교도적인 금욕주의 생활을 강조했다.

이들이 끼친 영향들을 살펴보면

1)타락한 루터교회에 새로운 생명을 줌

2)교직자들의 영적 수단이 높아짐

3)설교가 은혜스럽고 청소년들의 교육이 강조됨

4)평신도의 활동이 강화됨

5)성서연구를 보편화 시킴

6)해외 선교사를 파견하는등 선교활동을 강화 시킴

7)최초의 인도 선교사 슈발츠는 인도 선교의 불멸의 공적을 세움


29.낭만주의 

18-19세기 중엽까지 서구문명에서 문학작품,그림,음악,건축,비평,문학등에서 축성을 이룬 정신적 자세나 지식동향으로 18세기말 신고전주의,계몽주의<합리주의,물질적 유물론등에 대한 반발로 이성보다는 감성에,지식보다는 감갖에 우위를 두고 개성,주과느상상력,감성,초월성등을 강조했다.

부자와 빈자,종과 주인의 대립으로 나타나지는 현대사회의 타락성등을 지적하며 자연으로의 복귀를 구원으로 인식함으로 결과적으로 자연계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제도와 교리의 종교를 부인 했다.다양한 종교간의 대화를 시도했으며 하나님의 선에 복종하는 종교를 구현하려고 함.


30.자유주의 

집단에 의한 통제 보다는 인간 개인의 자유를 보편적 가치로 인삭하여 개인의 자발성을 우선시하며 이것을 기초로 국가와 사회제도는 존재한다는 철학적 사조로 근대 유럽의 국가와 사회의 지도 원리로 또는 근대사회의 구성원리로 형성 되었다.

19세기 독일의 신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이 사상은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교리를 부정하고 인간의 윤리적이고 이성적인 능력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성경의 합리적인 해석,천국의 내재성,역사적인 예수를 강조하고구원관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으며 계시신학 보다는 자연신학을 강조했다.   


31.슐라이어 마허

독일의 신학자,설교가,문헌학자로 근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기초를 이룬 중요한 인물주요 저서로는 [그리스도인 신앙],[종교에 관해서],[독백집],[기독교 신앙 종교 비판서]등이 있다.그는 종교란 단순히 우주에 대한 느낌이나 직관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인 우리들속에 사라아 있으며 일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사상은 19-20세기 초반 까지의 신학에 영향을 미쳤다.,계시보다는 인간의 하나님 인식에 강조점을 두며 역사상으로 살아있는 예수는 우리의 모범이며 원형이라고 믿었다.

그는 그러나 케리그마 신학의 추종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인들을 복음에서 끌어내어 인간문화에 근거한 종교로 인도했다는 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32.헤겔

독일의 철학자.역사를 하나님의섭리사관에서 세속화해서 절대적 신의 자기실현이라고 풀었고역사는 완전한 자유실현을 위하여 진보한다고 봄.이 역사의 정신적 자유운동을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풀이하려고 한 그에게 진리란 역사 자체였다.

헤겔의 절대정신의 진보는 다윈의 진화론과 막스르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낳았다.그의 저서로는 [역사철학],[철학강요]등이 있다.


33.트뢸치

독일의 학자로 그는 교회는 지금까지의 절대진리를 재고 해야한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젊은 신학자들에게 상당히 신선한 영향들을 주었다.

그의 일관된 과제는 그리스도교적인 이념의 자명성 붕괴에 따르는 가치의 에너키에 직면하여 새로운가치 진리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 이었다.종교들을 고찰하는데 엄청난 비판적,역사학적 절차와 윤리학적 자각의쌍방이 요구된다.여기에소박한 문화의 절대성들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교오 서양 문화의 일체성을 바탕으로하여 종합적으로 문화에 대한 타당성의 입장이 인격적,내면적,결단을 전재로 하여 제창되어진다고 봄.

역사주의에 매료되기도 하고 그것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무엇이나 어느시간이나 장소에서 평가,취급인식,성취되는 것은 그 장소와 시간과 요구조건과 연관이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34.윌리엄 케리

영국 출신의 구두 제작 견습공 이었던 그는 1779년 회심을 경험하고 침례교인이 되엇다.

1783년 노팅햄의 목회자 회합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해드려라.”라는 위대한 설교를 해냄으로 ‘침례교 선교회’를 탄생 시켰다.

1809년 뱅갈어로 성서를 완역한 이후 24개 구어로 성격을 부분적으로나 완전히 번역해 냈다.

세포람 대학을 설립 하고 포트 윌리암 대학에서 언어학 교수직을 담당하기도한 그는 인도 문화와 종교에 대한 각종 연구물 들을 내어 놓았으며 특히 고대인도에서 행해지던 장례예식중고인과 함께 미망인을 화장하던 수티제도를 폐지하도록 했다.


35. W.M.C 와 W.C.C

1)W.M.C : 세계 선교대회(World Missionry Conference)

  - 현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전도를 논한 세계회의로 1921년 국제 선교 협의회가 결성 되었고       1961년세계선교 협의 회가 세계 교회 협의회의에 합병되었다.  

2)W.C.C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ches)

  - 전세계 그리스도 교회에 의해 설립된 협의체로써 1910년 에딘버러 세계 선교회의를 계기로       세계 교파간의 활발한 협력과 활동을유도해 내고 있다.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창립 총회가       열렸으며 3개의 조직을 통합 44개국 147개 교단의 대의원들이 모여 결성하였다.


36.칼 바르트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프로테스탄트 사고에 있어서 급진적인 변화를 주도 했다.그는 인간의 이성과 그의 내적인 종교적 도덕적 양심과는 거리가 먼 입장을 취했던 19세기의 인간 중심의 신학의 저술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발달 시켰다.신학과 교회의 진정한 과제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의 결과로 1919년 [로마서 주석]을 출판해 당시 자만심에 차 있었던 신학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의 [교회교의학],[로마석 주석] 등에 나타난 신학적 독특성은 선교,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신학이라 할 수 있다.그는 교회와 신학의 거리감을 극복하고 교회의 문제에 살아있는 해석을 하는 신학이 되려고 했고 성경과 오늘의 역사 현실이 만나는 신학을 하려고 했다.그리고 그는 사회적으로도 관심을 가지고  부패한 히틀러 정권에대해 발멘 선언문을 작성 하기도 했다.바르트에게 있어서의 신학은 특별히 아름다운 학문 이었으며 기쁨을 주는 과업이었다.


37.사회복음주의 운동

근대적 삶의 집단적 측면과 구조악에 대항해 사회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이운동의 지도자는 글래든과 라우센 부쉬이다.

이 사회복음주의 운동은 이 땅위에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운동으로 산업사회와 자본주의체제에서 구조악으로 발생하는 노동자와 가난한 자들의 구체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 운동에 참여한 교회들은 장로교,침례교,북부 감리교,회중교회,감독교회등이다.


38.옥스포드 운동

키블이 옥스퍼드에서 “국민적 배교”라고 설교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세기전반 옥스퍼드 대학과 관계 있는 국교회의 성직자들이 주도한 국교회 재건 운동이다.

1833-1841년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 운동을 일명 소책자 운동(트랙 운동)이라고 부른다.이 운동의 목적은 종교침체를 구출하고 순수 견실한 교회육성,도덕 재무장,교리 규칙 준수그리고 전승계승등 이었다.이 운동의 결과로 영국 교회에 경건성 회복의 기류가 환기되고 문화적인 분야에서 종교적 정서들이 고취되었다.이 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고대 교회사와 17세기 국교회 신학자들의 저서들이 편집되기도 했느데 1845년 뉴먼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분열이 시작 되었다.


39.현대 신학의 조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종교 개혁적 전통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난 운동으로 18세기 철학 사상인 영국의 이신론과 프랑스의 자연주의,독일의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에 도전하는 두 흐름의 신학이 나왔는데 두 신학이 바로 신정통주의 신학과 근본주의 신학이다.

1)신정통주의 신학

  - 주로 유럽에서 일어난 자유주의 운동에 대한 도전으로 1918년 칼 바르트가 로마서 주석을 쓰      면서 일어난 이 조류는 1,2차 세계대전을 격으면서 인류의 위기의식을근거로 시작된 신학운      동이기에 “위기의 신학”이라고도 하고 “변증법적 신학” 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의 초월성 강조,인간의 타락 인간은ㅇ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없는 전적인 죄인     이고 약자임.

 @기도 중심의 신학을 강조

 @말씀의 신학을강조하고 주도적인 학자는 칼바르트와 폴 티릴히이다.

   - 칼 바르트 : 교회와 선교를 위해 봉사하는 신학,화해의신학

   - 폴 틸리히 : 신학 방법은 상관 관계에 의한 방법이며,문화의 신학 이기도 함.

2)근본주의 신학

  - 미국에서 일어난 자유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19C말과20C초에시작되었으며1895년 나이아가라      성서 연구회에서 근본주의 5대장을 채택함.

  @성서의 축자 영감설,예수그리스도의 신성,처녀 탄생설 대속의 속죄설,몸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


40.포스트 모더니즘과 종교 다원주의

@포스터 모더니즘@

  -1960년대에 들어 미국과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의 한 조류

 1)모더니즘 ; 전통적인 가치와 그 가치가 전달되는 수사법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개인으로서의

           인간이 강조되었고 의식 보다는 무의식이 더욱 강조 되었다.

           근본적으로 반지성적이고 인간의이성과 도덕심보다는 정열과 의지를 더 중요시한다.

 2)포스트 모더니즘 ;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모더니즘의질서에 대항해 극도로 파편화된 세계에 도                         전하는작품내용,현상학적 비평이론등이 대두되면서 기운이 일기 시작 했다.20                       세기 초엽에 대두된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 또는 미래파를 포함한 아방가르                      드 예술운동을 포하하여 문학과 예술의 특징.         

 3)공통점 ; 전통과의 단절,불확정성,파편화,반리얼리즘,전위적 실험성,바역사성과 비정치성

 4)구분되는 특징 : 자아와 주관에 대한 새로운 입장,패러디와 패스티스,행위와 참여,임의성과 우                     연성,주변적인 것의 부상,탈 장르화,자기 반영설등을 들 수 있다.

@종교 다원주의@

종교다원주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나타나지는 것으로 각종교의 개체성들을 인정하자는 상대적 종교관의 대두라고 볼 수있는 현상들이다.획일화 되고 서열화되어 있는 닫힌 신앙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상대방 종교의 입장을 존중히 여기는 상호 참여적인 활동들은 정치적 독재와도 연결 가능한 종교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벗겨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북구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이 허락하신 예수를 통한 유일한 구원의 길을 믿고 있는 기독교에는 다른 종교의 구원을 인정함으로 스스로의 모순들을 만들어 낼 위험성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아직 한국 내에서 기독교 장로회를 제외한 어느교단에서도 타 종교에 대해 인정한 바가 없으며 아직은 보수나 진보의 이름으로 이를 수용하는 것보다는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상당히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철학적으로 볼때도 이 다원주의는 전세계의 종교가 서로 다양한 개념과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는 상대적이다.

결과적으로 타종교의가치들을 인정하면서 우리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기독교 복음의 발전을 도모하는 신학을 하는 것이 바람직 하리라고 본다. 

출처 : 중국,연변,대성 도피성 교회
글쓴이 : 사랑의 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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