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본질로써의 하나님의 나라
김종수
<제목 차례>
I.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II. 연구방법
Ⅰ. 탈서구화 탈합리주의 신학
A. 오늘날의 신학은 모두 서구적이다.
B. 서구적 신학방법
C. 합리적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
Ⅱ. 신앙의 본질
A.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이다
1. 천지 창조에 나타난 신앙의 본질
2. 모세와 백성에게 말씀하신 신앙의 본질
3. 구약에서 신앙의 본질로 나아가는 법
4. 율법과 제사는 신앙의 본질을 담는 그릇(형식)이다.
5. 본질이 있을 때만 형식이 의미가 있다
6.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새로운 길
7. 하나님이 최고로 존귀한 분이심을 인정
8.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기준에 달려있다
a. 하나님의 기준이란
b. 하나님의 기준에 대한 착각
c. 하나님의 기준은 성령의 비추심이 있어야 한다
d. 하나님의 기준에 대한 역사적인 순환
e. 하나님의 기준을 발견하는 것은 회개로 이어진다
9.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
10. 하나님의 관계를 최우선 순위로 여겨야 한다
B. 첫 번째 영역 - 하나님 그분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사랑’의 관계
1.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
a. 세상에서 잘되는 것
b. 은사를 많이 받는 것
c. 의식을 잘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3.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것이다.
4. 우상숭배
C. 두 번째 영역 -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
1.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문제
a.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오해
c.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이다
2.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신다.
a. 현현(Theophanies)과 현시(Epiphanies)
b. 천사
c. 하나님의 얼굴
d. 하나님의 영광
e. 말씀.
f. 계시의 결과 계약하시는 하나님
3. 하나님의 이름
4. 하나님 같은 신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야웨 같으신 신이 누구신가)
a. 구원의 하나님
b. 창조의 하나님
c. 거룩하신 하나님
d. 사랑의 하나님
e. 진노의 하나님
f. 공의의 하나님
g. 구원의 하나님
h. 축복의 하나님
5.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D. 세 번째 영역 -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
1. 자신의 백성을 세우시는 이유
2.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원하신다
3. 하나님의 질투
a. 카나(aN:q') - ‘하나님의 질투(jealousy)’로 번역
b. 카나(aN:q') - ‘하나님의 열심(성)(zeal)’으로 번역
c. 하나님의 “카나(aN:q')”를, 인간의 마음에 품는다
4. 비전
a. 비전은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시고, 인간을 초청하신다
b. 거짓 비전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c.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이루기 위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있다. 그러나 막연하게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없다
5.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자세
a.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b.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는 것이다
c. 자신의 삶을 조정하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은 “나를 떠났다”, “부정하다”또는 “더러워졌다”고 취급하신다
E. 신앙의 본질을 지칭하는 단어 - 하나님의 ‘길’
1. 길의 중요성
2. 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의 한계
3. 일반적인 길의 의미
4. 특별한 지칭의 길의 의미
5. 영적인 목적의 길의 의미
Ⅲ. 예수님의 신앙의 본질
A.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사역의 중심이었다.
B. 예수님 시대에는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을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C.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외치신 말씀은, “회개하고 천국(The kingdom of heave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었다.
D. 하나님 나라는 지금 이곳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이다.
E. 하나님의 나라는 구약의 신앙의 본질을 예수님 시대에 설명한 신앙의 실제이다.
Ⅳ. 구약의 신앙의 본질이, 예수님 시대에 임재방식의 변화가 왔다.
A. 예수님은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사람이다.
1. 예수님의 증언.
2. 예수님과 권위(권세)
a. 신성모독 갈등
b. 예수님의 권위는 새로운 임재방식이었다.
c. 귄위를 제자들에게 부여하신다.
3. 요한복음 1장 1절의 카이(kai)의 용법 문제
4. 예수님과 하나님의 차이점
B. 임재방식의 변화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 계시.
1. 태초부터 계셨던 예수
2. 동정녀 탄생
3. 죄의 용서
4. 새로운 삶의 변화
5. 과거의 인물과 비교
6. 예수님의 말씀
7. 율법과 안식일
8. 귀신을 심판
9. 기적과 치유
10. 천사
11. 인간의 운명
C. 임재방식의 변화에 대한 다른 증언
1. 침례(세례)요한의 설교
2. 제자를 부르심
3. 경배(proskunevw)
4. 예수님의 호칭
a. 하나님의 아들
b. 메시아(그리스도)
c. 인자
5. 죄가 없으신 예수
6. 십자가의 예수
7. 인간으로서의 예수
D. 또 한 번의 임재 방식의 변화
1. 또 한 번의 임재방식의 변화에 따른 죄 사함과 구원의 방식의 변화
2. 임재방식의 또 다른 변화를 인식한 제자들
3. 예수님이 친히 약속하셨다.
4. 보혜사를 보냄
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6. '생명'
7. ‘은혜’
8. 그리스도와의 연합
E. 하나님 나라 개념에서 복음으로 변화
1. 예수님에 대한 몇 가지 이론이 복음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다.
2. 주님을 알기 힘써야 한다.
a. 복음은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을 통한 인격적인 만남이다.
b. 복음은 평생 동안 알아 가는 것이다.
c. 복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한다.
3. 전도자 빌립은 변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전하였다.
4. 로마의 바울도 변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전하였다.
Ⅴ. ‘회개’는 하나님 나라의 조건
A. 회개에 대한 잘못된 이해
1.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2. 얼마든지 회개하지 않고서도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있다
3. 교육, 법, 가혹한 억제를 통해서 타락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4. 회개는 한순간이 아니고, 계속 일어나는 과정이다
5. 후회와 회개는 다르다
6. 습관적인 회개의 문제점
7. 행동의 변화보다 깊은 마음 속의 죄를 제거해야 회개이다
B. 회개에 대한 잘못된 신학적 적용
1. 하나님의 ‘공의와 의’를 외치기보다, 사랑의 하나님을 외치기 쉬운 시대
2. 회개를 외치기보다 회개에 대해서 외치는 시대
3. 신학적 요약이 준 피해 - 십자가는 죄를 사해 주신 것인가? 죄에 대한 책임을 사해 주심으로 결론적으로 죄를 사해 주신 것인가
3. 칭의와 성화 두 가지 개념이 준 피해
4. ‘영접하라’와 ‘회개하라’의 용어 사용
5. 회개와 자백에 대한 오해(회개는 한번만 하는 것이고, 자백은 계속 해야 된다는 잘못된 진리)
a. 회심과 회개
b. 회개와 자백
C. 회개는 신앙과 사역의 출발점이다
D. 구약에서 회개의 문자적 의미
E. 신약에서 회개의 문자적 의미
F. 회개의 과정
1. 자기 처지를 인식하는 것
2. 회개는 선하신 하나님을 선명하게 인식하고, 자신을 볼 때마다 지옥을 경험하는 것이다
3. 회개는 마음 아픈 과정이 있다
4. 회개는 임재와 연관이 있고, 죄에 대하여 민감해진다
5. 회개는 압도적인 권세에 밀려 영혼의 고뇌에 빠진다
6. 회개의 목적은 “하나님(예수 그리스도)과 나와의 관계를 빼놓고서는 그 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 하는 것이다
7.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행동을 유발한다
8. 회개는 자신의 회개에 대한 대가를 생각하게 만들지 않는다
9. 역대하 7:14
a. 스스로 겸비하는 것
b. 기도하는 것
c. 나(하나님)를 찾는 것
d.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
G.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은 단계적으로 신앙의 성숙함으로 보아지기도 하지만 단번에 보는 것이 더 좋다
a. 바울이 점진적으로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은 아니다
b. 점진적으로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보는 것보다, 단번에 보는 것이 좋다
H. 회개는 언제까지 해야 하나
I. 성경적인 회개는 잃어 버릴 수 있다
Ⅵ.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 나라
A. 씨 뿌리는 비유 ( 마 13:3-8, 막 4:1-9, 눅 8:4-8 )
B. 곡식과 가라지 비유 ( 마 13:24-30 )
C. 겨자씨와 누룩 비유( 마 13:31-33, 막 4:30-32, 눅 13:18-21 )
D. 감추인 보화와 귀한 진주의 비유 ( 마 13:44-46 )
E. 그물 비유 ( 마 13:47-48 )
F. 자비롭지 못한 신하의 비유 ( 마 18:23 )
G. 혼인 잔치의 비유 ( 마 22:2; 눅 14:15 )
H. 열 처녀의 비유 ( 마 25:1-13 )
I. 달란트의 비유 ( 마 25:14, 눅 19:11 )
J. 양과 염소의 비유 (마 25:31-46)
K. 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 ( 막 4:26-29 )
L. 무화과나무의 비유 ( 눅 21:31 )
Ⅷ. 예수님의 교훈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 나라
A. 침례(세례) 요한의 선포(마 3:2 ), 예수의 선포 ( 마 4:1-7, 막 1:15, 눅 4:43 ), 파송된 자들의 선포 ( 마 10:7 )와 ‘하나님 나라’
B. 어린아이와 ‘하나님 나라’ ( 마 19:14, 막 10:14, 눅 18:16 )
C. 침례(세례) 요한과 ‘하나님 나라’ ( 마 11:11, 눅 7:28 )
D. 바리새인의 물음과 ‘하나님 나라’ ( 눅 17:20 )
E. 세상의 일과 ‘하나님 나라’ ( 눅 9:60 - 62 )
F. 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 마 26:26, 막 14:23, 눅 22:16,18, 요 13:29 )
결론
참고도서
I.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성경의 대 주제가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약의 소망도 하나님의 나라였고 구약의 모형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관점을 하나님의 나라의 신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마치 모든 것을 해방으로 해석하는 해방신학, 민중을 중심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민중신학, 여성을 주제로 삼아 성서를 연구하는 여성신학, 모든 것을 십자가로 푸는 십자가 신학과 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나라로 푸는 신학적 사조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본인은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연구하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여 신앙의 본질을 연구하기 위한 도구로써 하나님 나라를 연구하고자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에 이성과 과학이라는 계몽과 합리적인 사고가, 신학을 사고하기 위한 생각의 사고 패턴에 깊게 뿌리 박혀 있어서, 성경을 합리적인 사고로 해석하고 있다. 신학을 하기 이전에 깊은 영향을 준 합리적 사고는 더 이상 성경이 성경을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 대부분의 신학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놓치고 있다. 자신이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에 깊이 물들어 있는 상태인지 깨닫지 못한다. 신학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는 합리주의를 지적은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깊이 빠져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를 연구함에 있어서 합리적인 사고에 의해 성경을 해석함으로 모호하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하나님 나라가 도출되지 않고 온갖 다양한 주장들로 가득하다. 본인은 이성과 과학이라는 합리주의 사고가 주는 피해를 최대한 배제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연구하고자 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은 역사적으로 종말론을 중심으로 많이 논의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철저적 종말론(konsequenle eschalologie)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Albrecht Ritchl(1822-1889)와 Adolf Von Harnack(1851-1930),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Johannes Weiss(1863-1914)와 Albert Schweitzer(1875-1966), 실현된 종말론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주장한 Charles Harold Dodd(1884-1973), 실존적 종말론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주장한 K. L. Schmidt와 Rudolf Bultmann,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를 주장한 R. H. Fuller, W.G.Kummel, T.W. Manson, J. Jeremias 등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제시됐다. 오늘날에도 다양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해석들이 차고 넘치고 있다.1) 본인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의미와 같은 해석을 한 그 본질을 중심으로, 오늘날 부흥이 시작될 것이라 생각한다. 진정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날 선포되면, 반드시 우리의 신앙이 회복되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이 부흥으로 번질 것이다. 본인이 연구한 하나님 나라가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 세대에 신앙이 회복되고 부흥이 이것에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한 가지 이론적인 학문적인 성과일 뿐이며, 신앙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학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본인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는 이론일 것이다.
II. 연구방법
하나님 나라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가 있다. 두 번째는 학문하는 방법으로써 신앙의 본질을 찾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사용되는 하나님 나라가 있다. 신앙의 본질을 찾기 위한 하나님 나라는, 신앙의 본질을 찾고 우리 시대에 이해될 수 있는 용어로 설명되어지는 것을 연구한다. 이것은 지금 시대에 유행하고 있는 신앙의 본질을 연구하는 방법론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시대에서는 가장 적합한 신앙의 본질을 연구하는 방법론이다.
본인은 신앙의 본질을 찾기 위한 하나님 나라의 방법론을 구약의 신앙의 본질과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 그리고 복음. 이 3가지를 통하여 신앙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한다.
Ⅰ. 탈서구화 탈합리주의 신학
A. 오늘날의 신학은 모두 서구적이다.
서구의 선교사역을 통하여 많은 복음주의 신학교들이 동양에 세워졌다. 이 동양의 신학교에서는 습관적으로 서구에서 배운 그대로 동일한 교과 과정에 번역된 교과서와 노트를 사용한 강의가 이루어진다. 서구적 사고의 패턴 그대로 동양에 전수한다. 한국도 별반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수많은 신학교에서 가르쳐지는 내용은 미국에서 공부하며 배워온 강의 노트를 한국말로 번역한 것들이다. 한국의 신학은 미국적이고 서구적이고 영어가 들어가야 대접받는 문화이다. 동양적 교육과 사고방식으로 쓰인 성경은 현장의 이야기, 예화, 가치, 사고방식 및 표현 형식들을 사용하였는데, 서양적 교육방법과 합리적인 사고의 영향으로 교리적이고 분석적이며 이성과 합리성을 내세운 방법으로 가르쳐진다. 신학뿐만이 아니라, 교회까지 서구의 모교회와 교단을 복제해서 동일한 교리, 동일한 정치구조, 동일한 예배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서구 교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단지 말만 다른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다.
이것은 한국이 선교지에서 행하는 모든 사역도 마찬가지로 서구의 복제 선교사역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한국에 기독교가 일부 한국적인 모습으로 토착 되면서 발전한 한국의 교단신학, 교회형태, 찬양과 예배형태, 교회운영과 구조까지 선교지에서 한국의 복제판을 세우는데, 특히 각 교단 해외선교부가 가장 앞장서서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서구적 교회가 한국에 정착시킨 그대로의 모습을 선교지에도 한국 교회를 그대로 복제하고 있다. 그래서 서구의 신학은 성서의 고향인 동양 땅에서도 동양인에 의해 서구화된 신학과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Daniel von Allmen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교사들이 자기 자신의 신학이 얼마나 문화적인 조건을 갖는지 이해하는데 실패함으로서 일종의 서구신학적 제국주의를 만들어 내었고 현장의 교회들이 자신들의 문화내에서 신학화를 이루고자 하는 숨통을 막음으로서 제3세계의 교회들을 황폐화 시키고 있다.”2)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한국 교회는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치려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한국 개신교의 주류는 미국의 근본주의(Fundamentalism)에 의해 선교된 나라이다. 그래서 한국의 개신교 주류는 미국의 근본주의를 모델로 생각하고 따라간다. 한국 개신교 주류는 미국의 근본주의가 1900년대 부흥의 주역이었던 모습과 다른 지금의 모습3)이, 1900년대 근본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이라 생각하며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한국이 이렇게 된 것은 한국인의 반성이 있어야 하지만, 미국 근본주의에게 첫 번째로 책임이 있다.
심지어 일부에서 미국의 복음주의의 과반수인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를 미국의 이단이라 정죄할 뿐만 아니라, 미국 개신교 주요 리더와 교회들이 변절하였다고 정죄한다.4) 이것은 토착화된 한국적인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라, 미국 근본주의로부터 선교된 한국의 보수주의 노선이 미국 근본주의가 아니면 위험하다는 생각으로 미국 개신교를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한국 개신교 주류가 보수적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개신교는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는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를 적합한 방법으로 설명되고 또한 찾기 위하여, 신학은 서구적인 학문방법론과 종속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B. 서구적 신학방법
Mark Harlan은 제5회 한국 선교지도자 포럼을 통해 “탈서구화 정책과 선교에 적절한 신학의 개발(DE-WESTERNIZING DOCTRINE AND DEVELOPING APPROPRIATE THEOLOGY IN MISSION)”이란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서구 신학방법이 비서구 지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을 5가지로 나누었다.5)
첫째로, 헬라식 교회는 그리스 문화의 관점과 용어로 성경적 진리를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철학적인 용어들과 관점 그리고 추상적, 기술적인 신학 체계를 구성하는 법칙을 사용하였다. 서구의 신학은 그러한 그리스 철학과 상호작용함으로써 형성되었다. 비서구 신학자 멜바 마가이(Melba Maggay)는 “서구의 신학 양식이 지배함으로 말미암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사는 크리스천들은 주후 4세기에 헬라 소피스트들에 의하여 제기된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하는지를 배워서 자신이 사는 곳의 사람들에게 말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었다.”6)고 하였다.
헬라의 영향은 데카르트의 회의론에 반응하여 지속하였고 그 이후 개화기의 이성의 지배로 이어졌다. 결국 신학은 무신론과 영지주의에 대응하기 위하여 지적인 확고한 체계를 추구하였다. 윌리암 다인네스(William Dyrness)는 “우리가 얻은 것이 무언가 확실한 것 같이 생각되지만, 종종 직접적인 관계와 감정적인 깊이를 잃어버렸다. 즉, 우리가 얻어낸 신학적인 지식은 자주 일상생활과 거리가 있는 것이 되었다.”7)고 하였다. 이점이 비서구권 세계의 실생활 가운데에 신학적인 반영이 그토록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두 번째, 로빈 보이드(Robin Boyd)가 개신교 신학의 “라틴 포로”라고 부르는 것으로, 가톨릭이 전수한 것들이 개신교의 신학적, 교회론적 용어, 성경 번역, 신학에 접근하는 방법, 교회 구조 그리고 의례에 대한 형식 가운데에 명백하게 들어 있는 것이다.8)
셋째로, 성경을 상대론적, 존재론적, 혹은 기계적 과학 세계관이라는 렌즈를 통하여 해석하는 비복음주의적 유럽 신학자들 가운데 나타나는 서구 문화의 영향력이다.9) 이는 마찬가지로 복음주의적인 성경 이해라고 할지라도 서구의 문화적 영향을 받을 가능성에 대하여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것이다.
넷째로, 노르만 크라우스(C. Norman Krauss)가 아시아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통하여 발견한 바와 같이, 전통적인 서구 신학은 제자도에 있어서 교회의 생활과 사역을 지지하는 데에 부적합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서구 신학이 이루어진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요소들 때문이다.
지난 300여 년 동안 서구 신학은 이성적인 형이상학에서 경험주의로 변화하는 큰 철학적 소용돌이 가운데에 이루어져 왔다. 그것은 폭풍 속을 지나오는 것과 같았다. 신학적 논의 가운데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급진적 발견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 (그 자체로도 충분히 어려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이외에도 신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이성적 방법론을 따르는 중요한 이슈들에 너무나 몰두하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만하며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 결과로 신학은 대부분이 논증학이나 변증학으로 이루어져 대학의 학습주제가 되어버렸다.10)
다섯째, 서구 신학 전통에 칭의, 언약, 성령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같은 다른 합리적 주안점들이 출현한 것이다. 그 각각은 서구 신학의 지엽들 가운데에 독특한 역사적 상황화를 증거하는 것이다.11)
이러한 몇 가지의 예를 통하여 서구 신학 자체가 믿음에 대한 일련의 역사적인 상황화인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서구의 상황화된 신학이 진리인 것처럼 들어와 그것과 반대되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을 비루하게 취급하거나 거부당한다. 특히 한국은 서구적인 신학사상이 대접받기 때문에 더욱 현실적으로 힘들다. 서구 신학자들과 서구 신학을 추구하는 동양의 신학자들에게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자신들의 신학이 우주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다니엘 폰 알멘(Daniel von Allmen)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어리석어서는 안 된다. 서구 신학은 우주적인 신학이 아니다. 서구 신학에 있어서 우주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시대와 장소를 통틀어서 고백되는 신앙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서구신학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적합한 항목들 내에서 그만큼 정확히 타당하고 “우주적”이 되도록 신앙을 표현할 가능성을 갖도록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12)
그러므로 아시아 특유의 정서와 사상의 상황에 적합한 신선한 신학화가 필요하며 시급한 현실이다.
C. 합리적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수많은 연구가 구약의 왕정사상과 예언서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왕 되심, 다윗왕국에 대한 것과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될 종말론과 항상 연결하여 연구하였다. 이렇게 연구한 이유는 ‘나라’라는 단어 때문에 항상 그렇게 연관되어 연구하였다. 이러한 사고의 경향은 합리적인 사고의 영향 때문에, 항상 단어와의 연관성을 추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구약의 왕정과 구원의 완성과 관련된 중요한 개념과도 관련이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오랫동안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내려온 하나님의 임재와 신앙의 본질과 관련된 것이다. 즉, 우리 시대에 약160여 년 전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해석해오고 정립해오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립이 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성과 과학이라는 합리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영향으로, 신앙의 본질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혹은 하나님과의 화목과 관련되어서는 접근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의 종말론과 관련하여 하나님 나라의 해석이 이제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신앙의 본질로 발전하지 않고 표류하고 있다. 전통적인 방법인 합리적인 사고 방법인 단어 연구를 벗어나 히브리적 사고에서 나오는 동양적 개념으로 연구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합리적인 사고로부터 시작된 신학을 반성하는 새로운 물결들이 조금씩 우리 주위에 생겨나고 있다. 본인도 이 부류 중에 한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합리주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너무나 깊게 우리의 사고하는 방법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문제만 인식한 상태이지,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능력이 미약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Ⅱ. 신앙의 본질
신앙의 본질을 한 단어로 이야기하면, 인간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Relationship)’이다. 신앙의 본질은 3가지 영역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한 분 되신 하나님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사랑’의 관계이다. 둘째는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이다. 셋째는 인간과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신앙의 본질을 “길”이라는 단어로 이야기하였다.
구약의 신앙의 본질을 신학용어로 ‘구약의 중심’으로 정의하며, 그것이 무엇인지 찾는 작업을 약 200여 년 동안 계속해 왔다.13) 이러한 변천사를 게하르드 하젤이 정리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4)
아이크롯트(Eichrodt)과 델홀은 “언약개념”15)이라 하였고, 젤린(E. Sellin)은 “하나님의 성결(holiness of God)”16)이라 하였고, 쾰러(L. Koehler)는 “주인이신 하나님(God as the Lord)”17)이라 하였고, 빌트버거(H, Wildberger)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선택”18)이라 하였고, 세바스(H. Seebass)는 “하나님의 통치권(rulership of God)”19)이라 하였고, 클라인(G. Klein)은 “하나님 나라”20)라 하였고, 포러(G. Fohrer)는 “하나님의 통치(Rule)와 신인 사이의 교통(communion)”21)이라 하였고, 프리젠(Vriezen)은 “하나님이 중심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람,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22)라 하였고, 스멘드(R. Smend)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 야웨의 백성 이스라엘”23)이라 하였고, 폰 라드는 구약에는 주제가 없지만“야웨가 구약의 중심이며 관계이다”24)고 하였고, 헤르만(S. Herrmann)은 폰 라드의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신명기서가 그 자체를 성경신학의 중심25)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오늘날까지 학자들 간에 일치점을 찾을 수 없지만, 신약이 그리스도 가 중심인 것처럼 구약은 하나님(야웨)이 중심이라는 것에는 학자들 대부분 동의한다.26) 하나님을 통합적인 중심으로 인정하는 것은 구약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다.27) 특히 복음주의는 이러한 가치관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신약으로 넘어와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신앙의 본질은 구약과 신약이 다르게 말하고 있지 않는다. 동일하며, 구약의 연장선 안에서 신약이 펼쳐진다.
이와 같이 본인이 제시한 신앙의 본질은 우리 시대에 신학적인 연구를 우리 시대에 적합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설명 방법이다.
A.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이다
하나님은 추상적, 관념적이 아닌 실제 인격체이시다. 그러기에 실제적 관계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너무나 추상적이며, 관념적이며, 교리적이다. 하나님에 관해서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하나님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라 하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호해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 시대 가장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1. 천지 창조에 나타난 신앙의 본질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엿새 동안 창조하셨다.28) 마지막 날 하나님은 땅 위에 살 모든 동물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특별하게 창조하였다. 그분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였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 지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우리를 창조하시는 그 목적에는 특히 이 땅의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이 만물을 통치할 대리인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다. 이것은 인간과의 관계를 갖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29)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통치하는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였으며,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존재”였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고 계신 분이며 지금 이 순간도 우리와 소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또한, 지구의 자연환경에 대한 보호나 개선을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하며 적극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명령을 따르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신뢰 관계의 단절이었다. 그리고 창조계 전체의 대재난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30) 죄가 인간뿐만 아니라, 이 세상 피조 세계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켰고,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왜곡을 가져 왔다. 지상의 모든 문제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즉, 인간의 타락에서 파생한 것이다. 그래서 "……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31) 피조물도 인간처럼 고통을 당하고 있다.32) 그래서 타락이란?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33)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성서는 타락이라 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연합되어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양식을 먹으며 살아야 한다.34)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이 하나님을 잃을 때 불안, 고독, 시기 질투, 이기심, 공격적 본능과 투쟁, 피 흘림, 증오와 갈등의 모든 것이 발생한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다. 사랑을 알지 못한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공격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잃어버린 인간은 너무 추하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하나님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알아야 한다.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35)고 하였다.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열심은, 구약 역사 가운데 진행되어 오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극적인 꽃을 피웠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원하신다.
우리가 회복과 관련하여 알아야 할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십자가를 통해 개인적인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파생된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게 있고, 하나님의 회복 대상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여야 한다.
2. 모세와 백성에게 말씀하신 신앙의 본질
구약신앙의 중심은 출애굽기에서 발견한다. 물론 창세기를 통하여 발견되어 질 수 있지만, 출애굽기만큼 정확하고 확고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구약의 신앙의 본질은 출애굽기 19장 4절에 잘 나와 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출 19:4)
애굽에서 자신의 백성을 건져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 자신에게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다. 하나님 그분이 자신의 삶의 유일한 모든 것 되어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유일한 삶의 목적과 목표가 되는 것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 ~ 6)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는 것을 율법이라 해석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바로 앞 절의 자신에게 인도하신다는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율법과 규례를 명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친밀한 관계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율법은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이 언약 다음에 나온다. 하나님이 백성과 언약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전 존재이시고, 유일한 모든 것이 되는 친밀한 관계를 언약한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과 자신의 백성이 이 언약을 기반으로 하나님께 인도하는 ‘하나님의 길’이다.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는 의미는 바로 한 분 되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다. 모세는 신명기를 통하여 그들이 잡아야 할 유일한 한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신앙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명기에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T;b]h'a;w)하라.” (신 6:5)
호세아는 호세아 6:6에서 이 말씀의 의미를 “하나님을 사랑(yTix]p'j; ds,j, yKi )”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yhil|a> t['d'w_)”이라 정의하였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새번역. 호 6:6)
구약의 신앙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격체 되신 하나님 그분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로 인도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만이 유일한 나의 모든 것 되고, 나의 목표와 목적이 된다는 의미이다.
3. 구약에서 신앙의 본질로 나아가는 법
출애굽기 19장에 신앙의 본질을 말씀하시고 그 이후부터 율법과 제사법들을 말씀하셨다. 율법과 제사는 하나님과 자신의 백성이 이 언약을 기반으로 하나님께 인도하는 하나님의 길이었다.
율법은 율법을 통해 무엇이 죄인지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구별함을 통하여 항상 거룩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과 제사를 통하여 바른 예배로 인도하였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다.36) 예수님은 율법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한 마디 말로 줄여서 말씀하셨다.37) 바울은 율법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38) 바울은 율법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냉혹하게 비판하였지만, 율법의 완성은 사랑의 결과39)라고 선언한다.40)
4. 율법과 제사는 신앙의 본질을 담는 그릇(형식)이다.
호세아 6장 6절에는 “나는 인애(사랑)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하였다. 주님이 원하는 두 가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은 번제와 제사, 즉 예배와 속죄의식이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두 가지는 번제와 제사인데, 번제와 제사는 원래 하나님이 드리라고 하셨다. 레위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그것을 정하셨다. 심지어 하나님은 그것들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그것들을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어떤 때는 제사를 좋아하셨다가, 다른 때는 그것을 싫어하시는 분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우리에게 우리 신앙의 본질(reality)과 의식(ritual)의 관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제사와 번제를 포함한 모든 종교적인 행위와 의식은 그 본질을 상징하고 표현하는 것이다.41) 즉, 본질을 담는 그릇이다. 윌리엄 다이어네스는 율법과 예배를 다음과 같이 저술하였다.
율법은 하나님이 백성에게 어떤 행동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물로서의 그들의 위치에 적합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언약과 함께 율법을 주신 것은 일종은 계시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율법에서 하나님이 예배를 가르치신 목적이 있다. 그들은 예배드리기에 적합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 율법은 정결케함과 희생, 즉 한마디로 말해서 구속을 준비하는 역할이 그 사명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이미 단절된 교제와 우정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길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42)
우리 신앙에서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과 의식들은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그 속에 본질이 담겨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만약 그 속에 본질이 담겨 있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한 의식이나 많은 희생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5. 본질이 있을 때만 형식이 의미가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있어서, 의식을 잘 하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행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위한 수단 즉, 그릇과 같은 것이지 신앙생활 자체가 아니다. 즉 신앙생활이 본질이요, 의식은 그 본질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이사야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왜곡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아무리 말씀하셔도, 자신들은 그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43) 이사야의 말이 너무 귀에 거친 말들이었다. 그래서 이사야를 톱으로 켜 죽였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이사야 1:10-15)
여기에서 소돔의 통치자들과 고모라의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부르고 계신다. 그들은 참으로 많은 희생과 제사를 드렸다. 그들은 모든 절기를 철저하게 지켰다. 안식일은 말할 것도 없고 월삭(매월 첫날)을 지켰고 모든 대회와 절기를 지켰다. 오늘날로 말하면 맥추감사절, 대강절, 사순절, 오순절 등과 같은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절기까지 그들은 빼놓지 않고 철저하게 지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 절기마다 수많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숫양, 수송아지, 어린 양, 숫염소 등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또한 많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사야 58장에 의하면, 그들은 정기적으로 온 백성이 금식하며 기도했다.44)
그런데 그들의 예배(절기)와 헌금(희생)과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 모든 예배와 헌금에 신물이 났다고 말씀하셨으며, 심지어 그것들을 증오하신다고까지 말씀하셨다. 또한, 그 모든 모임들과 예배들은 하나님의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것과 같은 헛된 예배에 불과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의식 속에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삶 속에 신앙의 형식은 차고 넘치지만,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도 없고, 자신의 인생의 유일한 모든 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신다. 의식이 아무리 많아도 상관이 없다. 그 모든 의식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45)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마저 들여다보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이 행동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의 깊은 곳까지 모두 아신다. 우리의 동기가 어떤 동기로 시작되었는지, 나 자신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잘 아신다. 그러므로 나의 거짓된 동기로 말미암은 외적인 의식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리 화려한 의식이나 많은 희생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기준이다.
6.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새로운 길
구약에서는 5제사와 7절기 그리고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러한 하나님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만드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과 부활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담대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십자가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하여 더 이상 죄의 정죄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 아래 있도록 한다. 십자가는 유대인을 향하여서는 율법의 완성이지만, 이방인에게 있어서는 율법을 필요 없게 만든 것이다. 십자가는, 신앙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지만, 신앙의 본질로 나아가는 방법에 변화를 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의 기준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십자가를 통하여 그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맺는 실제를 말씀하셨다.
7. 하나님이 최고로 존귀한 분이심을 인정
예배는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돌려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한한 가치가 있는 분이심을 인정하는 행위와 태도들과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배는 한마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흔히 예배라 주장하기도 한다.46) 예배라고 주장하게 되면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배가 타락하고 껍데기만 남은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이도 우리 시대에는 거짓 임재를 만들어내는데 많은 재능들을 가지고 있다. 나도 한 때 이러한 가짜 임재를 잘 만들어 내는 목사 중에 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처럼 만들어진 분위기가 진짜 임재인 것처럼 만들어 낼 수 있다. 없는 거룩함을 만들기 위해 목소리에 힘을 주고 거룩한 목소리를 만들 수 있다. 임재가 없는데 어떻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중세시대에 얼마나 그것이 심하였으면, 칼빈은 교회에 음악을 없애버려서 약300여 년 간 교회에 음악이 없는 시대도 있었다. 역사적으로 예배가 타락하지 않은 시대보다 타락한 시대가 훨씬 길고 많았다. 예배의 타락은 임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하나님이 임재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어떤 신령한 분위나 감정을 가지고 임재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 수 있고, 흉내낼 수 있는 방법으로 임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누구나 임재하심을 느끼도록 임재하신다. 임재하심의 기준은 분위기도 아니고 호화로운 프로그램도 아니다. 인간의 기준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과 그분의 의중이 기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예배를 통해 가장 크게 나타나지만, 예배가 워낙 타락하기 쉽기 때문에 예배라 단정짓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예배라는 그릇을 통하여 가장 크게 나타난다.
하나님은 최고로 존귀하신 분이시다. 그분과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그분 앞에 엎드리게 한다. 스티븐 호돈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순종(복종)하여 경배해야 한다. 그저 자신이 최고라는 이유 때문에 자신에게 예배를 드리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그리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그런 하나님이라면 흠모할 만하지도 않은 분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또 하나님이 찬양받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마치 하나님이 자아상이 좋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려 애쓴다 해서 마치 하나님이 경쟁하는 다른 신들에게 위협을 느끼는 까다로운 부족신인 듯이 말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은 위협을 받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람들이 거짓된 것으로 예배할 때 무한히 슬퍼하신다.
참된 예배란 사람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유롭게 하나님께 다가가 개인적으로 감사를 드리고, 날마다 충성을 바치는 것. 그것이 예배라 하였다. 예배는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고 상호 작용을 하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께는 결코 선물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은 드리는 자들을 원하신다.47)
예배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예배는 또한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을 성취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나머지, 그저 그들이 위대하게 되도록 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영예를 누리게 하고 싶어 하신다.48)
8.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기준에 달려있다
a. 하나님의 기준이란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의 기준이라 함은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신 하나님의 의중이다. 많은 경우 자신을 생각을 성경에서 인용하였지만, 하나님의 기준과 전혀 관계없이 자신의 입장을 성경을 통해 입증하는 것을 하나님의 기준이라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고, 하나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기준이다. 분별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좋다.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이다.
주께서 나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 주셨다. 다림줄을 드리우고 쌓은 성벽 곁에 주께서 서 계시는데 손에 다림줄이 들려 있었다. 주께서 나에게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고 물으시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다림줄입니다" 하니, 주께서 선언하신다.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 다림줄을 드리워 놓겠다. 내가 이스라엘을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 (표준 새번역 암 7:7-8)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환상 가운데 다림줄을 가지고 계신 것을 보여주셨다. 다림줄은 건축업자가 건물을 세울 때, 건물이나 담이 지상으로부터 바로 직각으로 세워져야 하는데, 비뚤게 세워지지 않도록 정확한 각도를 지속적으로 체크하는 기구이다. 하나님이 그 다림줄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정확하게 건물이 지어졌는지 점검 하신다. 그리고는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다림줄에서 벗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건물을 세웠다는 것을 보여주며,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다림줄 앞에 우리가 제대로 잘 서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다림줄을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이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를 때가 아주 많다.
b. 하나님의 기준에 대한 착각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의 선한 삶을 요구한다. 본인이 선한 삶이라는 윤리적인 부분을 분리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신앙과 윤리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윤리라는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49) 신앙과 윤리를 분리한 적이 없다. 즉, 신앙과 우리가 생각하는 윤리 개념은 통합되어 있으며 분리되어 있지 않고 모두 신앙으로 다룬다. 신학적으로는 성경이 윤리를 다룬 적이 없고, 윤리체계를 다룬다고 말한다. 나는 왜 신앙과 윤리를 떨어뜨려서 생각하는 풍조가 생겨났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아마 철학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정확하게 왜 윤리와 신앙이 떨어져서 신앙과 신앙에 걸맞은 윤리 개념이 생겨났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모든 사고는 두 가지를 분리해서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모든 책과 설교와 주석까지도 그렇게 분리하고 있는데, 성경을 다시 보면 성경은 한 번도 분리한 적이 없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에 맞는 윤리 개념 자체가 바로 신앙인 것이다.
하나님은 땅과 노예 그리고 공중 위생과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시고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윤리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신앙으로 인식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화해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윤리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신앙을 말씀 하신 것이다. 정직을 말씀하셨는데 윤리가 아니고 신앙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어떤 의식과 행위를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생각의 패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사고 패턴과 다른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계시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항상 자기가 편하고 유리한 쪽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우리가 잘못 인식하고 있는 신앙의 윤리 부분과 우리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 모두가 신앙이라는 통합된 개념으로 생각해야한다.
단적으로 이것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기준과 멀리 떨어져서 우리 위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c. 하나님의 기준은 성령의 비추심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기준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의중을 성경에 쓰여 있는 그대로 우리가 믿고 그 기준에 우리를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기준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성령의 비추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령이 비춰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발견하고, 또 우리 삶 가운데 실제가 되게 적용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워지면, 절대 올바른 신앙은 불가능하며, 절대 회복이 안 된다. 부흥의 역사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교회와 사회를 회복하실 때 가장 먼저 회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다림줄)이셨다. 교회 회복, 영적 회복을 원한다면, 하나님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2000년 동안 교회를 회복시키셨던 모든 과정의 첫 번째 단계인, 하나님의 기준이 바르게 회복되어야 한다.
d. 하나님의 기준에 대한 역사적인 순환
역사는 하나님의 기준이 보이면,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볼 수 있는 수많은 예들이 있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 자신이 천리만리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보고, 통곡하고 애통해하며, 심지어 기절하고 떨기까지 하였다. 자신을 벌해 달라고 경찰서마다 사람들이 달려가 울며 회개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죽어 마땅하다며, 교인들에게 자신의 모든 죄를 드러내서 고백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기준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와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덮으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
반대로 하나님의 기준을 보지 못하면 일어난 일이 성경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반복되어 나타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마태복음 23:29-31)
북왕국 이스라엘 말기 때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사야가 와서 이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백성이 이사야를 죽였다.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관점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옳고 이사야가 틀린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 약 600년이 흘렀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조상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틀린 것을 잘 알았다. 바리새인들은 조상들의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자기의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새로 단장하고 비석을 꾸미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조상 때에 살았었다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는데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50) 라고 말하였다. 자기들은 자기들의 조상들이 잘못한 것을 알았다. 그런데 자기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못 보았다. 자신들의 조상은 문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자기들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고,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리적으로도 바르기 때문에 문제없다고 생각하였다. 바리새인들은 호세아 시대의 백성이 틀린 것을 알았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들은 그렇게 성경을 믿었다. 그들은 이사야가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였고, 다른 선지자들도 진실이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았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활동하였던 시대에 심판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들이 바로 자신들의 선조와 같은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 시대에는, 그 시대에 쓰여진 자기들에 대해 기록한 성경이 없었다. 그래서 자기들은 자기 나름대로 신앙 생활을 철저히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화 있을진저…….”51) 하면서 “너희가 그 조상의 그 자손임을 스스로 증거한다.”52)고 하셨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이해가 안 되었을 것이다. 지금 비석을 새롭게 꾸미고 다시는 자신들의 조상과 같이 우둔해지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자신들을 가짜라 말하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서 문제는,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 조상들과 똑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들은 조상들과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못 보았다. 자기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자기 조상들은 이사야를 죽였지만 자기들은 이사야보다 훨씬 크고 엄청난 하나님의 아들이 왔는데 죽였다. 이것이 보여야 한다. 자기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 시대 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께 버림당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00년이 지났다. 우리 입장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있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있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 지금 시대에 기록된 성경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 우리가 맞는지 우리는 모를 수 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과 똑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
오늘날 문제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다 성경을 믿기 때문에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있다. 수없이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다.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의 기준 앞에 멀어져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과거 성경을 통해 이야기한 것을 알고 있지만, 현재 자신이 그 속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이것이 무서운 것이다.
구약시대 제사장부터 종교 지도자들 모두가 잃어버린 것이 있었다. 또한 예수님 시대에 종교 지도자들 모두가 잃어버린 것이 있었다. 틀린 신학이 심판을 부른 것이 아니다. 신학은 바른 신학이었다. 성경도 바르게 가르쳤다. 문제는 하나님의 기준이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e. 하나님의 기준을 발견하는 것은 회개로 이어진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준을 본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하나님 나라의 첫 번째 관문인 회개로 이어진다. 역사적으로 항상 부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9.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
하나님은 관념 속에 거하거나, 추상적인 분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볼 수 있게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며, 그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다른 보혜사를 보내셔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서 우리를 도우시는데, 바로 성령이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며 유일한 주님이며 생명 되신 그분과의 교제 관계로의 발전하였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로써,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이 땅에 임재하시고,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가졌다.
여전히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신앙의 본질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자로써 하나님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며, 하나님의 임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와의 임재의 변화를 선포하시고, 신앙의 본질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자신의 삶을 통하여 친히 보여주셨다.
이제 더욱 실제적이고 친밀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길이 열렸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함이 열렸다.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더 이상 제사와 희생이 없이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말씀이 그의 삶 전체를 통해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것을 복음이라 부른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듯이 우리 또한 성령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10. 하나님의 관계를 최우선 순위로 여겨야 한다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의 의지로 결단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결단도 하나님의 인도가 있어야 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는 그 사람과 더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방해 요소가 있겠지만 사랑하는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에 우선순위를 두어야한다. 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도록 하는 것은 중요하다.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의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 즉, 주님의 임재가 충만한 가운데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게 된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계획 이상의 것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B. 첫 번째 영역 - 하나님 그분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사랑’의 관계
신앙이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것은 첫 번째 하나님 그분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사랑의 관계를 의미한다. 신명기 6장을 흔히 쉐마 선언이라고 한다. 쉐마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하나님의 가장 큰 계명이다. 5절에는 우리가 어떻게 유일신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히브리적 사고에서의 마음은 생각과 의지, 감정과 생명 모두가 공존하는 인간의 전부로 표현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말씀은 생명까지 내놓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뜻은, 자기의 영혼과 인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힘은,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 또는 차고 넘치는 에너지나 노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급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세 가지 표현을 중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의 태도와 정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1.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하나님은 한분이시다’53)는 고백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이심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가장 중심되고 신앙을 지배하는 내용이다.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한분으로 생각하고 주장할 수 있지만, 문자적으로 숫자를 강조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54) 성경에서 하나님이 유일한 분이라는 배경과 의미는, 하나님 그 분만이 자신의 모든 삶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신앙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신은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이다.55)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의미는 이사야40장에서 55장까지에서 여호와만이 하나님이고 인간들이 추구하는 다른 신들은 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사람들이 말하는 신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비해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유일신 개념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56) 그리고 구약과 신약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유대교의 ‘쉐마(shema)’라는 신앙고백에까지, 모든 시기에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하나님은 유일한 신이기 때문에 그분을 우리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삼아야 한다.57)
신명기 6장 4절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이렇게 유일하신 하나님은 십계명의 제1, 2계명에 우상을 금지하고 이방잡신을 금지하는 계명58)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삼을 것을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12장 28절에서 34절59)은 구약의 신앙의 본질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알려주는 본문이다.
한 서기관이 가장 첫째 되는 계명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신명기 6장 4절의 유대교 전통적인 신앙고백으로 답변하신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60)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에 대하여 유대교 서기관들이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61)라고 예수님의 답변에 대하여 동의한다. 서기관의 동의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시 그의 이해가 정확하였음을 확증하며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구약의 신앙의 본질과 하나님 나라를 결부시키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구약에서 내려오는 유대전통의 신앙의 본질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이 구약과 다른 신앙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의 신앙의 본질을 말씀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을 알 수 있다.
유일하신 하나님 개념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핵심이다. 유일하신 하나님 한분만이 자신의 삶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삶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선재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 분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으로 넘어갔는데,62) 그것이 복음이다.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주저 없이 일치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계시자(revealer)이기 때문이다.63)
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
a. 세상에서 잘되는 것
세상에서 잘 되면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해서 주어지는 복으로 생각을 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복은 하나님이 복이시다. 물질이 주어진다고 복 받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라오디아 교회가 제일 축복 받은 교회가 되어야한다.
예수님은 부자들의 교회였던 라오디아 교회에게, 가난하고 가련하고 눈멀고 헐벗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주님을 문 밖에 세워놓았다.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으로 채워야지 세상의 것으로는 채울 수 없다.
그러므로 복은 하나님 그분이 복이다. 그분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친밀한 관계가 될 때, 하나님은 성경에 복으로 소개하신 수많은 것들을, 그분의 주권으로 우리에게 기쁘게 나누어 주신다. 우리는 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복의 주인이신 하나님 그분을 추구해야 한다.
b. 은사를 많이 받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은사가 나타나서 귀신을 쫓고 예언을 한다면서 사람들의 문제를 족집게처럼 잘 알아맞힌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은사를 무슨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는 영성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은사 중심의 신앙으로 빠지면 은사가 영적 계급으로 생각하고, 신앙 수준이 높은 사람만이 받는 어떤 것으로 착각한다.
은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높은 수준의 영성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 후회 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많은 은사를 받은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는 공식은 잘못된 편견이다. 그래서 은사에는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에 바울은 사랑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러한 은사가 나타나면 도리어 그것은 화가 된다. 귀신을 쫓고 예언을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고 말씀을 하셨다.
c. 의식을 잘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이고 의식 즉, 예배나 봉사와 같은 것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였다. 의식을 아무리 많이 잘 하고 정성을 들였다 하더라고, 그 속에 본질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다.
30년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주일성수 하였더라도, 주일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분과의 친밀한 만남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는 친밀한 교제가 없었다면, 주일성수 한 것이 아니다. 예배시간에 교회에 나아가 앉아 있었더라도,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것을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하시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그분의 의중이 곧 법이고, 그분의 생각이 곧 진리이다. 우리는 그분의 법과 진리 안에 있을 때에 그 분 앞에서 옳다 인정받을 수 있다.
신약시대 바리새인은 1주일에 2번 금식하며 하나님을 끔찍이 많이 섬겼다. 그러나 예수님께 버림을 받았다. 종교적인 모양은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표현들이었다. 지금 우리 시대에 바리새인이 있었다면, 그 어느 누구보다 열정적인 모습으로 인상 깊은 신앙생활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즉, 바리새인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동기와 생각을 주님은 보셨다.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예수님의 평가는 아주 잔인하게 들릴 정도로 혹독한 말씀들을 바리새인들에게 하셨다.
그러므로 외적으로 표현되는 종교적인 모습이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그 외적 표현을 잘 하는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외적으로 종교적인 ‘깊은 정성’으로 사랑을 대체할 줄 안다. ‘율법주의’ 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교묘하게 대체할 줄 안다. 그러므로 외적 표현은 본질을 담는 그릇으로써 아주 중요하지만, 쉽게 타락할 수 있다.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말장난 같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그리고 동기를 중요하게 여기신다.
3.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려면 인격체이신 주님이 비춰져야 하고, 그 분과 만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우리 시대에 가장 오해되는 것이 이 부분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주님이 나의 유일한 모든 것 되시는 신앙을 말한다. 인격체 되신 하나님이 나의 삶의 목표요 목적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막12:29)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일한’이라는 단어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서 유일한 주님이 아니면 그분은 우리의 주인이 아니다. 주님만 사랑해야지 주님도 사랑하고 다른 것도 사랑하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아내도 사랑하고 옆집에 있는 아줌마도 사랑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니면 한 달 중 29일은 아내를 사랑하고 하루만 다른 여자를 사랑하면 이것은 간음이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군대를 조직하고 그를 추적한다. 다윗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자신의 힘이요, 방패요, 요새임을 믿었다. 다윗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64)라고 고백하였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 이러한 신앙의 고백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우리도 당연히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라고 고백을 한다. 그러나 다윗은 이 고백을 단순히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만이 유일한 힘이라 고백이었다.
헨리 블렉가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그 자체는 어렵지 않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유일한 주님을 향해 존재를 다 걸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주님만을 사랑한다면서 우리는 주님도 사랑하고 세상에서의 성공도 사랑한다. 주님도 사랑하고 목회 성공과 성장을 사랑한다. 이러한 비유가 틀렸다고 하기보다 마음의 자세 문제를 가지고 비유한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듯한 외적으로 나타나는 수많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이 있지만, 우리 생각의 마음을 보시고 동기를 살피시는 하나님의 기준 앞에, 진실한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우리 속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한다. 예수님은 둘째 계명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65). 사도 바울은 이웃을 향하여 자신이 종 된 삶을 살았다.66)
우리는 우리 이웃을 사랑함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이웃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게 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나는 하나님이 한분이시라는 의미를 현대적인 용어로써 “하나님 그 분만이 나의 삶의 유일한 모든 것”으로 실제적인 용어로 정의하고 나서,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모든 것 되심으로 인해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나는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모든 것 되신 사실 때문에, 수많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 되는 것은 쉽지만, 유일한 모든 것 되는 것이 무척 힘들고, 그것을 위해서 내 마음 속의 얼마나 많은 쓰레기들을 치워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주님이 유일한 모든 것 되는 것의 실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4. 우상숭배
십계명에 나오는 처음 네 계명을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우상숭배를 미워하시는지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유일한 모든 것 되시는 사랑의 관계를 원하신다. 이러한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성경에서의 우상숭배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잔인하게 진멸하도록 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 때문이며,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그들과 똑같이 하면 동일하게 진멸하겠다는 의지가 있다.67)
두 번째는 하나님 그분이 유일한 모든 것 되지 않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것도 섬기는 일을 하였다. 나누어진 마음의 문제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유일한 모든 것 되지 않은 이유는 경제적인 부분과 개인적인 야망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 될 수 있지만, 유일한 모든 것 되는 것은 어렵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기 원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유일한’이라는 단어이다.
세 번째, 인격적인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다. 출애굽 광야시절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이 진멸당할 뻔하였다. 이유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전통과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식하였지만,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직접적인 만남의 교제가 없는 대체되는 모든 것을 우상으로 인식하신다. 하나님이라는 어떤 대체되는 형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격이 들어갈 곳에 전통과 교리와 성경 지식이 대체해버린다면 이미 하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격적인 하나님 그 분을 추구해야 한다.
C. 두 번째 영역 -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것은 두 번째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다. 자신을 계시하심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적인 지식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안다’ 라는 단어의 “야다([d'y:)”는 우리나라 말에 없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경험으로 인한 친숙성’으로써 우리가 사람을 “안다” 라고 말할 때 “안다”는 의미이다. 아담이 하와를 “안다”라고 성경은 말하는데, 성경에는 ‘안다’라는 단어를 ‘동침한다.’라고 번역을 하였다. 그만큼 지식을 넘어서서 가깝고 친숙한 관계를 가지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아는 것은 인식과 이해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이고 체험적인 영역에까지 연장된다.68) 즉, 하나님의 인격과 나의 인격이 접촉하여,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아는 것을 말한다.
베드로가 예수님 안에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69)인 것을 발견했던 것처럼,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그분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안다”라는 의미가 신학적으로 그리고 지식적으로 어떠한지 글을 통해 소개하였다. 수많은 서적들은 이러한 지식적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어떤 것인가를 소개하고 있지만, 인격적이고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제에 있어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그 자체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고 싶다. 이론적으로는 모두 안다. 문제는 실제이다.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1.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문제
a.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오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면 이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을 한다. 문제는 주님을 아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짜 신앙에서도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을 다른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전도를 배운다. 그러면 우리는 이론적으로 배운 것을 가지고, 자신이 전도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배운 것을 가지고 실제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순종하여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전도이다. 이러한 사역을 반복적으로 함으로 비로소 전도가 무엇인지를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도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것이지 전도가 아니다.
주님을 아는 것도 우리가 성경공부라든지 설교를 통해서 배움으로 실제로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율법주의 사고에서는 주님을 안다는 것을 주님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아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성경을 이론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면, 자기는 하나님을 더 잘 알고, 하나님의 뜻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 박사들인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70)라고 말씀하셨다. 즉, 한 마디로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신학적인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은 삶의 변화를 주지 못한다.
b. 하나님을 아는 것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을 아는 것은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다르다.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자서전을 통해 그 저자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아는 것이라면, 인격적인 주님을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 실제로 아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자서전을 읽고, 그 저자에 관해 아무리 상세하게 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을 아는 것은 그와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서, 그는 경험된 하나님을 이름을 지어 불렀다. 지식으로 하나님 그분을 안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자신이 알게 된 하나님의 이름들을 불렀다.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주님에 관해 아무리 많은 것을 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주님을 아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기록인 반면,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유일하신 신이며, 살아 계신 인격체이시다. 주님을 아는 것은 그 분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주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하다. 인격적인 주님을 알게 될 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준다.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연구와 교육을 통해서 습득되는 반면, 주님을 아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만, 우리는 주님을 알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 1:17)
이 기도는 믿음과 사랑에서 뛰어난 에베소 교회를 위한 사도 바울의 기도이다.71) 여기에서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말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고 믿게 해달라는 말이 아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더 알게 해달라는 말이다. 즉,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은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라고 번역해야 더 옳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스러운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주셔서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하시고” (공동번역 개정판, 엡 1:17)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하다.
c.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의 본질인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이다.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 즉 바른 신학이나 바른 교리는 매우 중요하다. 만약 우리의 신학이 왜곡되거나 잘못되어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없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데 방해를 받고 있다. 심지어 어떤 성도들은 자신들의 체험만을 신뢰하며, 그 체험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고자 하는 배우는 자세나 지도자들의 조언을 듣고자 하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들은 반드시 미혹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 4:6)
주님에 관한 바른 지식이나 신학은 주님을 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매우 훌륭한 성경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하나님을 모를 수 있다. 하나님의 길이나 마음을 전혀 모를 수 있다. 이론적인 지식 그 자체에는 어떠한 생명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변화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또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아무리 많이 전해도 그 자체가 절대로 사람들을 살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이다.
2.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신다.
a. 현현(Theophanies)과 현시(Epiphanies)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실 때, 현현과 현시를 통해 나타내 보이신다. 아담과 하와는 날이 서늘할 때 하나님이 동산에서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72)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나타나셨다.73)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가시덤불에 나타나셨다.74) 이사야와 에스겔의 부르심 가운데서도 나타나셨다.75)
b. 천사
하나님은 주의 천사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천사는 하나님의 대표자일 때도 있다. 즉, 천사를 본 것을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76) 또한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일 때도 있었다.77) 천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가운데 나타나고 존재한다.78)
c.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은 하나님의 얼굴을 통해서 자신을 보이신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감정의 표현은 얼굴을 통해 집중되어 있다.79) 하나님의 분노는 ‘얼굴을 돌린다.’와 ‘얼굴을 감춘다.’로 표현되고, 하나님의 기쁨은 인간이 가지는 얼굴 표현을 모두 사용한다. 또한 “그의 얼굴의 때”80)와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하는 브니엘이라는 이름과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난 것을 말하는 모세는,81)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시는 때를 의미한다.
얼굴은 하나님 자신82)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인격83) 을 가리키는 대용어로도 쓰인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은 직접적으로 볼 수 없다.84)
d.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지만, 그의 피조물들도 그분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85) 이 영광은 하나님이 독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분의 신적인 권능을 구성하는 특질들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는 거룩함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가시적인 연장물이다. 영광은 ‘드러난 거룩함(die aufgedeckte Heiligkeit)’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백열등처럼 빛나는 영체”이다.86) 하나님의 영광을 구름이라는 단어로 더 자주 사용되고,87) 구름을 뚫고 나타나는 영광으로도 묘사되었다.88) 영광은 하나님의 현현의 구체적인 형태, 하나님의 임재로 인식한다.89)
e. 말씀.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표현은, “여호와의 말씀이 ~에게 임하니라”90)이다. 이렇게 계신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선지자이었다.
f. 계시의 결과 계약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여 어떤 분이신지 나타내 보일 뿐만 아니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을 계약하시기까지 하신다.91)
3.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하신다. “야웨(hy:/hy)”라는 이름은 구약에 6,500번 이상 나오고, “엘로힘(!yhiloa>)”이라는 단어는 2,500번 이상 나온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며 구약의 중심이다.92)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말씀과 현현과 선지자를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계시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자신이 임재할 것을 말씀하셨으며,93)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장소를 성별케 하시기까지 하셨다(출 20:24).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비밀에 붙여두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전해주셨다.94)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오용하는 것에 대하여 혹독한 징벌을 가할 것이라 경고함으로써95)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야 함을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은 친히 인간과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하나님의 활동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96)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가치 있게 여기시고 우리에게 계시해주신다. 스티븐 호돈은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은 3가지로 구분하였다.
첫째, 이름표 이름으로써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이름들이다……. 둘째로, 하나님 자신을 정확하게 드러내시기 위하여 이름을 계시 하신다……. 셋째로,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공적인 명성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의 평판을 나타내는 것이다.97)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98) 하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식적으로 아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경험한 하나님을 친밀하게 부르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더욱 친근하고 친밀감을 형성하는 단어인 ‘아바(Αββα)’라는 단어로 불렀다. 아람어로 ‘아바’는 아빠라는 단어로써, 구약에서 한번, 외경에서 5번밖에 언급 안 될 정도로 사용을 하지 않는 단어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 불렀다. 아빠라는 말을 헬라어로 ‘파테르(πατήρ)’로 번역하여 우리 성경에 ‘아버지’ 라는 단어로 많이 등장한다.99) 그리고 이 전통은 초대교부와 지금까지 내려온다.
하나님의 이름은 항상 뜬금없이 갑자기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하나님의 일하심과 함께 이름을 계시하신다. 또한 하나님의 일하심 즉, 사역 이후에 경험된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였다. 아브라함은 항상 하나님의 일하심의 사역과 관련하여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갔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이름을 고백하였다.
나는 전도사 시절부터 목사가 되어서까지 교회의 큰 행사나 주일예배가 끝난 다음에 오는 허전함을 때때로 경험하였다. 그 허전함 때문에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하였지만, 사역 뒤에 오는 허전함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어떤 목사님은 주일 저녁이 되면 그 허전함 때문에 사역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나의 사역의 자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사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다. 나의 허전함은 바로 나의 잘못된 사역의 자세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역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을 경험하고 알아지지 않았다면 나는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 없는 사역을 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사역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고 발견한다.
4. 하나님 같은 신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야웨 같으신 신이 누구신가)
성경은 하나님과 비할 바 없는 신이라 단언하는 표현을 “야웨 같으신 신이 누구인가?”100)라고 한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출 15:11)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수많은 표현들 가운데 한 가지일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다루고 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지식을 기초로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을 통해 우리의 신앙 생활 가운데 경험하여야 한다.
a. 구원의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하나님을 경험한 것은 구원자였다.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101) 하나님은 이스라엘 개개인들과 나라의 원수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성경 기자들은 “구원은 주께 속한 것이니”102)라고 고백한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과 관련하여 죄로부터의 구원을 먼저 전제한다. 신약 성경의 3분의 2가 죄로부터의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성경 전체를 통하여서는 민족의 패배, 기근, 가난, 두려움, 질병, 귀신들림, 육신의 죽음과 같은 재난에서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신약성경의 3분의 1이 이러한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구원이란 인간이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의식에 도달하는 것이다.103) 그것이 죄이든 다른 총체적인 문제이든 모두 동일하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104) 하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인식하는 것은 신앙의 출발점이며 처음 만나는 하나님에 대한 인상이다.
우리의 신앙의 출발은 이렇게 구원하시는 하나님, 구원하시는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인식하는 것이다. 단순히 구원에 대한 교리를 이해시키고 영접기도하게 하여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핵심이 아니다. 구원은 인격체이시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의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에 대한 핵심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b. 창조의 하나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먼저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창조의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는데, 6일 동안 창조하셨다. 이사야 40장에서 66장까지와 잠언 8장에서는 창조의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실 뿐 아니라, 그분은 지혜로운 분이시며 세상을 운영하시는 주권자이시다.105) 창조의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가 피조물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 창조자가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수많은 자기중심주의가 난무하고 있다. 동양적 사고 방식에서는 창조자에 대한 인식에서 신의 존재 증명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지는 반면, 서양적 사고 방식으로는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부터 필요하고 철학적인 접근이 필요했었던 이유이다. 성경은 동양적 사고방식으로써, 신의 존재 증명이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시며, 창조주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다.
c.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본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가장 많이 강조되고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106)
첫째, 거룩이 하나님에게 사용될 때, 거룩은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들로부터 구별시키는 창조주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신적인 존재의 속성의 신비로 해석할 수 있다. 거룩은 어떤 활동이 아니라 존재를 가장 가깝게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피조된 세계와 분리하고 구별시키는 창조자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107)
둘째, 거룩이 백성에게 사용될 때, 거룩은 백성이 순수하고 깨끗하며 의롭고 긍휼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과 같이 백성도 거룩 하라는 하나님의 요구와 부르심을 가리킨다.108)
d. 사랑의 하나님
사랑이라는 단어는‘아하브(bh'a 또는 bhea;)’로써 인간의 사랑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109) 솔로몬과 고레스와 신명기에는 주께서 나그네를 사랑하시고,110) 예루살렘을 사랑하시고,111) 의를 사랑하시고, 의롭게 행하는 자들을 사랑하시고,112) 조상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의 자손을 선택113)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남편으로 사랑하였고,114) 아버지로서 사랑하셨고115) 이스라엘은 하나님 눈에 보시기에 소중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구속하시고 새롭게 하셨다.116)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얼마나 깊냐 하면, “내가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117)고 하시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지면 하나님은 “내가 저희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118)고 말하신다.
사랑과 관련된 또 다른 단어인 ‘헤세드(dseje)’는 번역이 까다롭고 광범위한 단어이다. 칠십인역에서 은혜로 번역하지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힘, 성실, 꾸준함이라는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인자, 연민, 긍휼, 은혜라는 개념이다. 사랑의 다른 단어인 하눈과 라함, 라하밈 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개념 이상 되는 크고 놀라운 사랑의 크기를 표현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의 개념을 가지고 계시다. 우리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측량하지 못하는 사랑의 크기를 가지고 계시다.
e. 진노의 하나님
하나님의 진노는 질투와 복수라는 단어와 연관이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죄 때문이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119) 피를 흘리는 것,120) 간음,121) 사회적인 불의들122)이다. 비극적인 일, 민족적인 재난들,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죽는 것들은 사람들에게 수수께끼가 되었다. 그래서 고통과 재앙은 흔히 하나님의 징벌로 보아졌다.123)
하나님의 진노는 진멸을 의미하였다.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리라”124)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진노는 완전한 도말이 의도되어 있어서 무시무시하고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진노를 억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과 동일시되지 않고 불과 같이 중립적인 것이다.
우리 시대 가장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진노하시는 하나님인 것 같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할수록, 부흥과 회개는 가까울 것이다. 부흥 때마다 회복되어 지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유명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은 부흥의 시작 메시지이었다.
f. 공의의 하나님
시편 기자는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125)라고 말하였다. 이사야는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은 개인들126)과 가족들127) 열방들128)과 자기의 백성129)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집단을 심판할 수 있다.
이렇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3가지를 가지고 계시다. 권세와 주권, 의롭고 공정한 결정들, 모든 증거들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130)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항상 의롭고 공평하다.131)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뚫어 보시고 동기들과 진정한 성품을 알고 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132)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판단은 항상 바르고 정확하고 그것이 바로 법이고 정의이다.
g. 구원의 하나님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이다. 우리는 모두 범죄 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133) 죄 사함과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다.134) 하나님은 죄 사함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셨고 지금도 하신다. 성경은 죄 사함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적이고 정신적인 정화와 치유로 간주하였다.135)
죄 사함과 구원 그리고 회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회복이 목적이다. 죄 사함을 통해 천국을 약속받는 것에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또한 회개를 통해 바른 생활로의 전환에 초점을 두어서도 안 된다. 그것들은 부산물이다. 죄 사함과 회개는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h. 축복의 하나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4-27)
성경에서 축복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안식이다. 사람은 쉬고 충전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그것을 축복하셨다. 그리고 인류 전체와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136)는 축복과 물과 공중과 땅을 채우라137)는 축복과 음식의 축복138)을 주셨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저주가 있다. 또한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축복은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안전케 하시며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끊임없이 돌보시는 것이다.139) 축복과 함께 “은혜로우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베푸시는 것을 의미한다.140)
제사장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언한다. 이것이 유대 회당 예배에서 축복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은 오늘날 목회자로부터 예배 마지막에 축복하는 기원이 된다. 이것은 제사장의 능력을 통해서 주술적으로 능력과 건강 또는 부를 수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고 공급해 주실 것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기도이다.141)
5.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영광은 모든 사람이 마음 속에 흠모하고 보고 싶어 하고 경험하고 싶어 하는 관계적인 아름다움이다. 히브리어 ‘카보드’(דובכ, d/bok;)의 기본 의미는 ‘무겁다’인데, 문자적 의미로는 드물게 사용되고 오히려 비유적인 용법으로 더 많이 사용된다. ‘명예로운, 존경스러운, 영광스러운, 미화된’등이 일반적인 번역이다. 어떤 사람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은, 그의 고유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것이며, 공개적으로 그 특징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말이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는 것은 주로 하나님의 존재나, 성품을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나타나는 현상을 가리킬 때에 사용되었다.
하나님에 대해 사용될 때 이 단어는 하나님에 대한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 단어는 그의 자기 현시를 지칭하며 임재를 말한다.142) 출애굽시대에 구름이 회막을 덮고 하나님의 영광이 회막의 내부를 가득 채웠으며,143)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인적인 환상들을 보았다.144)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이름과도 결부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다른 신에게 주기를 거부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은 소망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145) 이 점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구원 행위와 관련된다.146) 이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실 것이고,147)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에 속하게 될 것이다.148)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에 대한 반응은 예배이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앞에,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인해 찬양해야 한다. 149)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는 말에서 영광이라는 말은, 이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사용된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찬송과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은 가볍게 또는 소홀히 대해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을 "무겁게", 즉 "존귀하게" 여기고 그에 합당한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가치 있는 분"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마땅히 찬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지존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가치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150)
D. 세 번째 영역 -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것은 세 번째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시고,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항상 일하시는 분이시다. 모세와 아론이 애굽의 바로에게 갔을 때, 바로는 비웃으며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151)고 하였다. 열 가지 재앙들이 애굽을 덮쳤고 그 결과 애굽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152) 애굽이 믿고 의지하였던 신들과 비교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신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누구든 하나님 안에 거하고자 원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백성으로 속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계획하시고 이끌어 가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그 일을 이끌어 가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1. 자신의 백성을 세우시는 이유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s WrPes'y_ ytiL;hiT] yli yTir_x'y: WzA![' ”(사 43:21).
이 구절에서 ‘찬송’에 해당하는 ‘테힐라(hL;hiT)’는‘할랄(ll'h)’(자랑하다, 칭찬하다)의 명사형으로서, ‘세다, 계산하다, 하나하나 열거하다, 선포하다’라는 뜻이다.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의 자랑거리들을 생각하며 나열하고 선포하게 하려 함이니라”는 뜻이 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세우고 유일신 하나님이 되시는 이유는 자신의 백성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지식을 통해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직접적이고 경험을 통하여 알기 원하신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유일한 모든 것 삼고,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면, 하나님을 자랑하고 찬양하고 그 위대하심을 높이는 것을 쉬지 않게 된다. 또한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성품에 매료되어 그 성품을 본받게 된다. 하나님이 원하는 신앙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신의 것 삼으신 이유가 이것이고, 시대마다 주도적으로 일하시고 이끄시어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신앙이고 사역이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말씀하고 계신 이것이 비춰져야, 신앙이 변하고 사역이 변할 수 있다.
2.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원하신다
시편 67편에는 하나님이 전 세계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며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망과 비전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복 주시기 원하신다. 그리고 모든 민족으로부터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삼으시고 구속하시기 원하신다.
3. 하나님의 질투
하나님의 질투라는 것은, 성서적인 원리로는 “하나님께 속한 소중한 것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으로 정의한다. 히브리어 ‘카나(aN:q')’는 하나의 단어인데, 한글 성경에는‘질투’와 ‘열심’으로 다르게 번역되어 있다. 영어 성경도 마찬가지로 ‘jealousy’ 와 ‘zeal’로 다른 두 단어로 번역되어 있다. 왜 히브리어의 단어를 번역을 하면서 두 가지의 단어로 번역했느냐하면, 히브리어의 ‘카나’라는 단어를 우리나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 자체가 없기 때문에 문맥에 따라서 ‘질투’라는 단어로 번역되기도 하고, ‘열심’이라는 단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하나님의 질투’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그것은 인간적인 질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 ‘하나님의 질투’가 나오면,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해해야 하고, 또한 ‘하나님의 열심’이 나오면, ‘하나님의 질투’로 이해해야한다.
a. 카나(aN:q') - ‘하나님의 질투(jealousy)’로 번역
1) 하나님의 이름이 질투이다
“너희는 다른 신에게 절을 하여서는 안 된다. 나 주는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새번역, 출 34:14) “for the LORD, whose name is Jealous, is a jealous God.”
하나님의 이름은 많이 있다. 여호와 닛시, 여호와 샬롬, 여호와 라파 등등 많이 있다. 많고 많은 하나님의 이름 중의 하나가‘질투’이다. ‘질투라 이름 하는’하나님의 이름이 ‘질투’이다.
2) 하나님의 성품이 질투이다
구약의 모든 율법을 가장 압축하면 십계명인데, 그 십계명의 처음 두 계명이, ‘질투의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새번역, 출 20:3-5)
‘질투’는 그만큼 하나님의 우선적이면서, 중요한 성품이다.153) 하나님은 이름이 ‘질투’일뿐만 아니라, 성품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이시듯, 동시에 ‘질투의 하나님’이다.
3) 하나님은,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모든 것 되기 원한다. 하나님이 유일한 전부가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그 마음을 “카나(질투)”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유일한 모든 것 되지 않는 우상숭배에 하나님은 질투를 발하시며 진노하신다.154)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새번역, 신 5:9)
b. 카나(aN:q') - ‘하나님의 열심(성)(zeal)’으로 번역
1) 하나님의 이루시고자 하시는 열심히 얼마나 간절하신지, 하나님이 그 일을 반드시 성취하신다
“살아 남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오고, 환난을 피한 사람들이 시온 산에서부터 나올 것이다. 나 주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룰 것이다.'”(새번역, 왕하 19:31)
하나님의 질투가 얼마나 크고 간절한지, 하나님은 그것을 반드시 이루시고 성취시키신다. 사실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된다. 하나님의 질투가 얼마나 큰지 이사야에 나타나 있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새번역, 사 9:6~7)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이 예언을 주실 때, 이사야는 예언의 성취를 보지 못했다. 하나님이 이 예언을 주시며 반드시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일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c. 하나님의 “카나(aN:q')”를, 인간의 마음에 품는다
성경에는 ‘카나’의 마음을 품은 수많은 하나님의 질투(열심)가 구약과 신약성경 본문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질투가 왜 중요한가하면, 그러한 하나님의 질투(열심)를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그 질투를 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새번역, 고후11:2)
바울은 하나님의 질투(열심)가 그 속에 있었다. 그 질투의 마음을 가지고 사역을 하였다. 신앙에 있어서 실제적인 하나님의 질투를 인간이 품는 다는 의미는, 한 마디로 하나님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을 인간이 동일하게 가지는 것이다. 인간이 아버지 마음의 극히 일부분을 경험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게 되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열망의 일부분을 가슴에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질투를 가졌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가슴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사역의 원동력은 이것에서 나온다. 지치지 않고 실망하지 않는 원동력이 흔히 비전이라 말한다. 그런데 세상적인 비전의 원리와 다르게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이 비전의 원동력이라 말한다. 리더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열정이다. 이 열정이 바로 하나님의 질투에서 나오는 것이다.
4. 비전
a. 비전은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시고, 인간을 초청하신다
비전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을 가지고 세우신 계획이다. 그 뜻과 의중을 그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주신다.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 그것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비전은 우리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세우시고 인간을 초청하신다. 이것이 비전이다.
노아 시대에 주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은, 죄로 가득한 세상을 멸하시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한 가족을 통해 믿음의 유업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 뜻과 의중을 이루시기 위하여 한 사람을 선택하시는데, 그 사람은 노아였다. 노아는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알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120년 동안 산 위에 방주를 만들고 기다렸다. 누가 먼저 이 비전을 세우셨느냐 하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가지신 뜻과 의중을 안 노아는,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의 뜻과 의중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의 비전으로 삼았고, 자신의 삶을 조정하였다.
아브라함 시대의 하나님의 뜻과 의중은, 믿음의 조상을 만드는 것이 주님의 뜻과 의중이었다. 그분은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택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알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는 비전을 소유하였고, 자신의 삶을 조정하였다.155)
모세 시대에 주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삼는, 자신의 백성 만드시는 것이었다. 그분은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모세를 택하였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께로 인도하고,156) 그 부산물로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되시는 것이 그의 비전이었다.
다윗 시대에 주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은, 이스라엘에 주님 마음에 합당한 왕을 세우고, 그의 후손을 통해 메시야를 약속하시는 것이었다. 그 분은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다윗을 선택하였다. 다윗은 하나님 그분이 인생의 모든 것이 되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 그의 비전이었고, 자신의 삶을 조정하였다.
예수님 시대에 주님이 가지시고 계신 뜻과 의중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고, 선포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었다. 그 분은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가지셨던 비전은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이었다.
성경은 누구 하나 하나님을 위해 자기가 이루고 싶은 것을 비전 삼은 사람이 없었다. 누구 하나 자기가 하나님께 이루어 드리고 싶은 것을 비전 삼은 사람도 없었다. 누구 하나 자기의 재능을 감안하여 그것에 맞추어서 비전을 삼은 사람이 없었다. 누구 하나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의 맞추어진 계획을 가지고 나가 그것을 이룬 사람이 없었다. 누구하나 자기 처지를 생각하여 분수에 맞게 자기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비전을 삼은 사람도 없었다.
모든 주도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다. 그분이 주권자이시다. 계획도 그분이 세우시고, 어떻게 그 비전을 이루어 갈지도 주님이 세우신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거대한 비전을 세우시고 인간에게 초청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이것이 비전이다.
히브리어는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을, 시제를 과거로 표현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그 시점에 이미 이룬 것으로 간주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과거형으로 사용한다. 요엘 1장에 보면, 하나님이 내 땅에 올라온 한 이족을 메뚜기로 표현하였는데 모두 과거형이다. 그런데 이 일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었다. 이러한 용법은 다윗 시대부터 초대교회 시대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157) 이렇게 히브리인은 하나님의 비전을,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그들의 언어, 문법을 거스르는 용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말씀 하신 그 때, 사건이 일어난 과거가 된다. 이것은 히브리어의 습관이기 보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미래에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 성취되기 때문에, 미래의 일을 항상 과거형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b. 거짓 비전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성경의 원리를 따르자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가지고 계신 비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이 시대에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주님을 위해 무언가 주님이 기뻐하실만한 비전을 세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비전이 성경적으로 입증하기 위하여, 성경의 옳은 말씀들을 모두 끌어들여, 그 비전을 합리화시킨다.
구약성경에 엘리 제사장이 나온다. 그는 외세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는 사사이며 제사장이었다. 그는 그 시대에 하나님이 가지신 뜻과 의중을 전혀 몰랐다. 성경을 탁월하게 잘 알았기 때문에, 전쟁에서 전승한 언약궤가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통할 것을 확신하였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는 모든 성경 구절을 동원하여 성경적인 설교를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터에 언약궤를 내어오자, 이스라엘 진이 진동할 정도로 사가가 충천하였다. 얼마나 큰 함성을 질렀던지 땅이 울릴 정도였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언약궤 앞에서 요단 강물이 서고,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과 같은 성경의 역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기대와 반대로, 더 많은 이스라엘 전사들이 죽고, 언약궤마저 빼앗겼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기에,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이 적군을 향해 싸우셔야 했다. 모든 성경은 엘리 제사장의 편으로 보였을 것이다. 또 성서적으로 그래야 했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엘리 제사장은 그 시대에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몰랐다. 대신 사무엘은 알고 있었고, 엘리 제사장은 그것을 무시 하였다.
이와 같이 거짓 비전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이 성경적인 것이라는 모든 성경 구절로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다. 자신의 비전을 하나님의 비전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기도 하다.
c.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이루기 위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있다. 그러나 막연하게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없다
누구든지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다. 그래서 신앙도 하나님 중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이든 무의적이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늘 자신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보는 것이 아주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사람을 위해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펼치시지 않는다(신앙의 본질로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개개인에게 있지만).
「하나님의 경험하는 삶」 책 속에는 다음과 같이 이것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고자 할 때 이런 질문을 한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나의 신학교 교수시던 게인스 도빈스 박사님은 “잘못된 질문을 하면 잘못된 답을 얻는다.”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는 종종 모든 질문은 타당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답을 찾으려는 데 항상 틀린 답만 나올 때 우리는 뭐가 잘못되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답을 찾기 전에 당신이 과연 올바른 질문을 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기 바란다.158)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라고 하는 것은 올바른 질문이 아다. 바른 질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이다.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먼저 알고, 그 하나님의 뜻과 의중에 나의 인생을 맞추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지금 내가 처한 곳에서 하나님이 목적하고 계신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일단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알게 되면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초점이 ‘내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춰져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가지신 뜻과 의중을 사람에게 보이시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한 인간을 향한 뜻을 가지고 계시다. 미묘한 차이 같아 보이지만, 절대적으로 중요한 차이이다. 자기 중심적인 신앙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뜻은 항상 자기 중심에서 시작된다. 하나님 중심에서 시작된 신앙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막연하게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이루기 위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있다.
5.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자세
a.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159)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것이 사역의 출발점이었다. 직분 때문에 그리고 체면 때문에 또 목사님의 칭찬과 교회 성도들의 칭찬 때문에 사역하는 것이 아니다. 칭찬은 힘을 얻게 하지만, 칭찬은 언제나 아부가 될 수 있고, 야망이 속에서 꿈틀거리게 하고 잘못된 동기의 사역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스스로 계획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노력해서 무엇인가 주를 위해 이루는 것이 사역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요 5:17, 19-20)
이 본문을 헨리 블렉가비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아버지께서 오늘 일하신다.
2. 나도 일한다.
3.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4. 나는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주시하여 본다.
5. 나는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본 것을 행한다.
6.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아버지의 행하시는 모든 것을 보이신다.160)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았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 일에 동참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그 일을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서 행하셨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0-11).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사역하지 않고, 자신이 주님께 해 드리고 싶은 일을, 하나님의 동이 없이, 자신이 성경 속에 마음에 와 닫는 적합한 성경구절로 합리화하여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것은 개인의 야망이다. 아무리 수많은 희생과 충성과 봉사를 하였더라도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이 가지신 뜻과 의중,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의 동기를 보시기 때문이다.
b.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이 선명하게 자신에게 비춰져 왔다. 그러면 자신의 삶을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선명하게 비춰주신 이유가 초청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의중이 비춰지면, 자신을 조정하지 않고 안주하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변화된 삶을 살려면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누가복음 18장에 부자청년은 영생에 대하여 주님께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러나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눅 18:22)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이 부자 청년은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는 부자였기 때문에 믿음의 갈등을 하였다. 결국 그는 슬그머니 그냥 돌아갔다. 그는 분명히 영생을 얻기를 원하기는 했지만 예수님에게로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는 일은 실패한 것이다.
어느 날 엘리사는 밭에서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그 길을 지나가던 엘리야 선지자가 그에게 겉옷을 던지며, 자기를 따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일, 예언사역에 동참하도록 그를 부른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엘리사는 그때, 과감하게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로 조정하였다.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자신의 농기구를 불살랐고, 한 겨릿소를 잡아 요리해 온 동네사람을 먹였다. 그가 그렇게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하고, 엘리야를 따랐는데, 그 결과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 구약에 기록된 것 중 가장 위대한 기사와 이적을 행하게 하셨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가 있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우리의 삶을 조정해야 한다.
c. 자신의 삶을 조정하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은 “나를 떠났다”, “부정하다”또는 “더러워졌다”고 취급하신다
자신의 삶을 조정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있고, 조정하지 않고 안주하여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떠났다.”, “부정하다”또는 “더러워졌다”고 말씀하신다. 학개에게 하나님이 임하셨다. 성전을 짓는 것이 그 시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모든 백성이 그것을 알고 있었고, 제사장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이 지금 이 시대에 하시고자 하시는 그 일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이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제사장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라 하셨다.
“학개가 또 다시 시체에 닿아서 더러워진 사람이, 이 모든 것 가운데서 어느 것에라도 닿으면, 그것이 더러워지는지를 물어 보니, 제사장들이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학개가 외쳤다. "이 백성은 정말 더러워졌다. 이 민족은 내 앞에서 정말 그렇다. 나 주의 말이다. 그들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이 그렇고, 그들이 제단에 바치는 것도 모두 더러워졌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최근에 일어난 일들을 돌이켜 보아라. 주의 성전을 아직 짓지 않았을 때에, 너희 형편이 어떠하였느냐? 스무 섬이 나는 밭에서는 겨우 열 섬밖에 못 거두었고, 쉰 동이가 나는 포도주 틀에서는 겨우 스무 동이밖에 얻지 못하였다.”(학 2:13-16)
그 시대에 하나님이 무엇을 계획하셨고, 무엇을 이룩하실 것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동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이루시고자 하시는 그 일에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여 기꺼이 그 일을 이룩하는 것이 자신의 소망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전이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지금이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을 때란 말이냐?”라고 질책하신다.
많은 경우 학개서는 교회 건물을 짓는데 활용된 건축헌금 본문으로 이용되었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그 중심에 흐르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성전 건축이 아니라, 그 시대에 이룩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라는 메시지이다. 정말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시고, 목적이고 목표라면, 어떻게 지금 그분이 가지고 계신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지 않을 수 있는가?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조정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 그분이 자신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는가? 자신이 당할 대가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지 않을 수 있는가? 주기도문을 아무리 외우고 기도하더라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주기도문을 기도할 자격조차 없다. 그러한 상태에 있는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은 ‘부정하다’ 또는 ‘더러워졌다’, ‘나를 떠났다’고 하였다.
E. 신앙의 본질을 지칭하는 단어 - 하나님의 ‘길’
성경에 신앙의 본질을 나타내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길(히브리어로 데리크(&r,D,), 헬라어로 호도스(oJdov"))’이다. 그런데 나는 이 길에 대하여 연구한 논문이나 책을 접해본 적이 없다. 적어도 한국 기독교는 관심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신앙의 본질을 ‘길’로 구약과 신약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라도에 ‘거시기’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참으로 많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지닌 단어가 성경에 ‘길’이라는 단어이다.
1. 길의 중요성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이 세 가지 단어는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이다. 이것은 성경이 바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과 의중에 대한 자기 계시의 책’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 자신이 어떤 분인지 자신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성경에서 4번째로 가장 많이 반복된 단어가 ‘길’이다.
초대교회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것은 안디옥 교회에서 비꼬며 비난하는 의미로 그렇게 불린 예수쟁이라는 별명이다. 초대교회는 내적으로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공동체이었기 때문에, 지역의 교회들마다 다른 자신들의 정체성의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을 '유대인 (Jews)', '그 길 (도)을 좇는 자들 (The Followers of the Way)', '형제들 (brethren)', '제자들 (Disciples)', '신실한 자들 (the Faithful)', '택함을 받은 자들 (Elect)', '성도들 (Saints)', 신자들 (Believers)', 그리고 '하나님의 가정 (the household of God)'이라고 지칭하였지만, 불신자들은 '나사렛 사람들 (Nazarenes)', '갈릴리 사람들 (Galileans)', 혹은 '예수쟁이 (Jessacans,)'라고 불렀다. 여기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을 ‘ 도 (길)를 좇는 자’라고 지칭한 구절이 많이 있다. 그리고 “도 (길)를 전했다, 예수님이 도(길)를 말씀하셨다”라고 까지 표현하였다. 한국말에는 정확하게 번역할 단어가 존재하지 않아서 ‘길’로 번역하기도 하고 ‘도’로 번역 하였다.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에 대해서 히브리 기자는 말하고 있다.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 도다 하였고” (히3:9-10)
이것은 구약과 신약 모두 계속 되는 하나님의 지적이다. 잃어버린 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회복의 길이 필요하다. 우리 마음대로 회복의 길로 갈 수 없다. 하나님이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셔야 한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출 33:13)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백성에게 회복의 길을 하나님께 구하였다.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을 구한 것이다. 신앙의 본질로의 회복의 방법을 구한 것이다. 2000년 기독교 역사 동안 하나님은 부흥을 통하여 이러한 회복의 길을 늘 인도하셨다. 이 시대가 바로 이러한 회복의 길이 필요한 시대이다. 잃어버린 길 즉, 잃어버린 신앙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는 회복의 길을 알아야 한다.
2. 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의 한계
성경에 나와 있는 길의 의미는 한 가지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일렀다. 가던 길을 멈추어서 살펴보고, 옛길이 어딘지, 가장 좋은 길이 어딘지 물어 보고, 그 길로 가라고 하였다.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평안히 쉴 곳을 찾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너희는 여전히 그 길로는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새번역, 렘 6:16)
여기서 말하는 첫 번째 길의 의미는 거짓 신앙,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삶을 의미한다. 두 번째 옛길과 가장 좋은 길 그 길의 의미는 회복, 구약의 신앙의 본질, 인격체이신 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기준, 그 시대에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뜻과 의중, 그때그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길”에 대한 의미는 한가지만을 의지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본문의 문맥을 통해 가장 근접한 의미를 정리한 것이다. 더 많은 의미가 나올 수 있다.
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의 한계는 원어를 가지고 모두 연구하지 못하고, 새번역 성경에 나온 ‘길’과 ‘도’를 가지고 연구하였다.
3. 일반적인 길의 의미
a. 길 - 일반적인 도로를 말한다.161)
b. 길 - 인생의 여정162)
c. 길 - 방법163)
d. 길 - 자신의 생활과 사업과 신앙과 하려고 하는 모든 일164)
4. 특별한 지칭의 길의 의미
a. 길 - 죽음 이후의 세계165)
b. 길 - 시온 (=거룩한 길)166)
c. 길 - 구원167)
d. 길 - 새로운 일168)
e. 길 - 회복169)
f. 길 - 창조의 원리170)
g. 길 - 배신171)
h. 길 -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궁지172)
i. 길 - 선택173)
j. 길 - 과거의 회상과 추억174)
5. 영적인 목적의 길의 의미
‘길’은 많은 뜻이 있지만, 성경에서 가장 많은 의미를 가진 것이 영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신앙의 본질과 관련된 것이다. 모두 신앙의 본질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a. 길 - 거짓 신앙175)
b. 길 - 하나님 없이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삶 혹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삶176)
c. 길 - 하나님의 심판177)
d. 길 - 하나님의 기준 즉, 하나님의 다림줄178)
e. 길 -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미리 준비하는 사역179)
f. 길 - 하나님이 그때그때마다 최선의 방법으로 이끄시는 것 혹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속해 있는 것180)
g. 길 - 하나님의 다루심 = 하나님 자신에게 이르도록 신앙이 성숙하고 성장하도록 인도하시는 여정181)
h. 길 - 하나님이 힘이 되어 주시겠다.182)
i. 길 - 인간과 다른 차원의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해183)
j. 길 - 하나님 자신184)
k. 길 - 구약성경에서의 신앙의 본질185)
l. 길 - 하나님 나라186)
m. 길 - 십자가187)
n. 길 - 복음 (=예수 그리스도)188)
o. 길 - 그 시대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뜻과 의중189)
p. 길 - 회복190)
6. 길을 다시 찾는 길 - 영적 회복의 길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출 33:13)
모세는 백성의 죄악의 결과 진노하시는 하나님께, 영적인 회복의 길을 구하였다. 진노 앞에 놓여 있는 백성을,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책에 쓰여 있는 자신의 이름까지 희생해가며, 백성을 회복의 길로 인도하고 싶었다. 하나님은 모세가 이러한 열망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기 전부터 회복의 길을 인도하고 계셨다. 그 길은 하나님의 기준을 세우시고, 회개케 하시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임재를 부으시고, 한 사람 즉 남은 자를 통하여 일하시며, 하나님의 질투를 보이신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회복의 길이며 부흥의 길이다.
a. 하나님의 기준을 세우심
하나님은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를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 하나님 자신에게 백성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기준을 말씀하신다.
“모세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 가니,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가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 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출 19:3,4)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서 요구하시는 신앙의 핵심은, 자신의 백성을 자기에게로 인도하시는 것이었다. 주님에게로 인도한다는 뜻은, 인격적이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뜻하는 것이다. 친한 친구를 만나듯, 또한 잉꼬부부가 서로를 알 듯, 하나님은 그 이상의 만남의 교제를 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간절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신 것은 ‘친밀한 교제’이다. 가나안과 수많은 약속들을 하신 것은 그것에 대한 부산물 이었다. 하나님은 목적은 백성과 직접적인 친밀한 관계가 목적이셨다. 그리고 백성 가운데 임재해 계셨다.
하나님은 이러한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한 방법으로 율법과 지켜야 할 도리를 말씀하신다. 무조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나아간다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이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출애굽기 20장 에서 23장까지 하나님은 십계명과 법들을 명하시고 24장에서 언약서를 가져다가 낭독하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이 바로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고 하나님 그분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주님이 가지신 선명한 하나님의 가치관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우리의 가치관이 얼마나 소용없고 무익한지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중심의 시각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b. 회개
하나님과의 언약 후 백성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행동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191) 이스라엘 백성이 만든 금송아지는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우상이라 하였다. 이것은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배교를 하거나 잡신을 믿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들의 옛 전통과 습관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는데, 그것이 우상이 된 것이다.
그 당시 백성의 사고 방식 가운데는 하나님께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금을 부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그 앞에 기쁨을 감출 수 없는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만족해 했다.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방법을 명령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마음에,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그 당시 백성의 사고 방식 가운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어야 되는데,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복신앙이 판을 치고, 율법주의와 인본주의가 진리인양 둔갑하는 시대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좀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가장 정성을 드려 귀한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서 눈에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송아지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표증으로 삼았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신 것이 이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출 32:7-10)
인격적인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대체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우상이라 말씀하신다. 그들이 다른 신을 섬긴 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지,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 한 사람을 통해 큰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백성을 죽이겠다는 말씀이다. 얼마나 놀라고 무서운 말씀인가? 백성이 배교하여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바로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 간주하신다. 모세는 하나님의 화를 주의 백성에게 내리지 말아 달라며 하나님께 울부짖는다. 그리고 백성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지 백성에게 보여준다.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6-29)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백성이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얼굴을 자신의 백성에게 돌리시고 사하실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이튿날이 되자 모세는 그것으로도 부족한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진노의 수위가 얼마나 큰지 모세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기도한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출 32: 31-35)
모세는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 쓰여 있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자신의 지금과 내세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싶었다. 그만큼 하나님은 진노를 감당할 수 없었다. 모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용서와 자비를 구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차선의 방법을 제시하신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출 33:1-3)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신 가나안을 주시기로 하신다. 백성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모든 준비를 하겠다고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임재가 백성에게서 떠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산물로 가나안은 주겠지만, 하나님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시고 중요하게 여기시는 자신의 백성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백성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친밀한 교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임재하여 백성 가운데 계셨다가는 하나님이 어느 순간 분노하여 자신들의 백성을 모두 죽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 말씀을 들은 백성은 죽은 것보다 못한 영적인 죽음을 맛본다. 이 말씀 속에는 섬뜩함과 무서움이 포함되어 있다. 더 이상 죄인 된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죽음보다 더 큰 절망이고, 바로 지금, 지옥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한다. 회개는 바로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고개를 돌리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는 자신을 보는 것이다.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출 33:4)
하나님은 백성의 장신구를 달지 못하도록 명하신다. 또 다시 이러한 우상에 빠질만한 근원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심각한 것이, 이 세상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신 것처럼, 성경의 모든 약속을 다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적이고 목표가 되어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않는 너희들을, 약속한 것을 다 주기만 할뿐, 나는 너희에게 임재하지도 않고 교제하지도 않고 함께 하지도 않겠다고 하신다.
모세는 인격체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그 분이 자신의 모든 것 되었다. 자신에게 부귀영화와 사람들의 인정, 명예가 주어지지 않아도, 하나님 그분 한분을 잃어버리는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이었다. 백성의 슬픔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모든 장신구를 떼어내어 버린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모든 부귀영화와 면류관과 자랑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보다도 더 가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회개는 인격체이신 하나님의 진노를 보는 것이 회개이다. 하나님의 분노에 자신이 몸서리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시고 계신 것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그분만이 유일한 나의 소망이기에 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중요하게 여기시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이다.
c.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이스라엘 백성이 심각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몸서리 치고 있다. 백성은 자신들이 보아도 이것이 이렇게 나쁘거든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어떠한지 인식하고 괴로워하였다. 그들이 죄를 범한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심각한 죄인지 인식하고 깨닫고 그것을 미워했으며 혐오했으며, 철저하게 자신들을 정죄하였다.
그래도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임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졌기에 하나님이 더 이상 백성과 함께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곳을 찾는데,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없는 진 밖이었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 33:7-11)
죄 아래 놓여있는 진 중에서는, 하나님이 모세까지 외면하셨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세조차도 하나님은 임재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더 이상 이스라엘 진 중에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자, 모세는 이스라엘 진 밖에 회막(성막이 아니다)을 세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구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진 밖에 있는 회막에 임재하신 것을 백성이 목격한다. 진 밖 회막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추구하자 하나님이 친구와 이야기하듯 모세와 그 친밀함을 회복하신다.
백성도 자신들이 거주하는 곳에 더 이상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서 아무리 예배하고 찬양하고 주님을 섬겨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몰려들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항상 이러한 일을 하셨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는 교회와 도시를 떠나라 하셨다. 부흥이 시작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렇게 하나님이 인도하셨다. 루터와 칼빈이 그랬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랬고, 영국 웨일즈의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항상 하나님은 그렇게 구별되게 하나님이 사용하실 사람들을 산으로 혹은 한적한 곳으로 인도하셨다. 더 이상 기독교의 중심에는 임재가 없기에 따로 그들 가운데 임재하셨다. 그렇게 부흥은 항상 변방에서 시작되었다.
모세는 이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사건은 백성의 영적 회복의 깃털이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한다.
“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출 33:15-18)
더 큰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성품과 속성들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에게 보여주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이 그것도 들어주신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18-23)
하나님이 자신의 인격과 성품과 속성들을 인간에게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보여주신다. 성경을 묵상하고, 삶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과 같이 다양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인간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라는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영적 회복이 일어나는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항상 하나님은 자신이 사용하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영광의 임재를 통해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다. 마틴 루터,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드, 에반 로버츠, 죤 웨슬리, 데이비드 몰간, 하웰 해리슨, 다니엘 로렌드, 존 리빙스턴, 그리고 한국의 길선주 장로 등등……. 부흥은 항상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부흥 때마다 이러한 영광의 임재는 교회와 도시와 나라에 부어졌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이끌려서 교회로 몰려들게 만들었다.
천국을 미리 맞보는 이 가장 영광스러운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조나단 에드워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1737년 어느 날, 내 건강을 위해서 숲 속으로 말을 타고 달려가다가 말에서 내려 늘 하던 대로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걸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정말 특이하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놀랍고 위대하며 충만하고 순결하며 달콤한 은혜와 사랑, 온유하고 겸손한 낮아지심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 그처럼 고요하고 달콤하게 나타났던 이 은혜는 하늘보다 크게 보였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말로 다할 수 없이 탁월하여 모든 생각과 관념을 다 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탁월하게 보였는데, 내가 판단하기로는 거의 한 시간 가량 그러한 일이 계속 되었다. 그래서 그 시간 내내 거의 대부분을 나는 눈물의 홍수에 빠져 큰 소리로 울었다. 나는 나 자신이 텅 빈 채로 쓰러져, 먼지 속에 누워 오직 그리스도로만 충만해지고, 거룩하고 순전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싶은 강한 영혼의 열망을 느꼈다. 나는 그것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를 신뢰하고 바라보며, 섬기고 따르며, 완전히 성화되고, 하늘에 속한 거룩한 순결함으로 깨끗해지기를 갈망하게 되었다. 나는 다른 때도 여러 번 그러한 광경을 보았고, 그럴 때마다 그것은 똑같은 효과를 발하였다.
때로는 한 단어만 언급해도 내 마음이 뜨거워진다. 또는 그리스도의 이름이나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이름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내게 영광스럽게 나타나셨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높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내가 체험한 것 중에서 가장 큰 기쁨과 즐거움은, 나 자신의 성공과 유익에 대한 소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광스러운 것들을 직접 보는 데서 우러나온 것이다. 이러한 달콤함을 누릴 때 그것은 마치 나 자신의 성공에 대한 생각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고 나를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때로는 내가 나의 밖에서 보는 그 영광스럽고 즐거운 대상에서 눈을 떼어, 나 자신과 나 자신의 유익에 관심을 갖는 것이 정말 큰 손해처럼 여겨져 참을 수가 없다”192)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다르다. 많은 책과 논문들이 혼돈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성서는 분명히 다르게 말하였다. 하나님은 영적인 회복을 위해 두 가지를 회복하시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시고, 둘째는 영광의 임재를 부어주신다.
d.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남은자)
이러한 모든 일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도록 하셨다. 역사 가운데 길을 잃은 수많은 시대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시작으로 혹은 남은 자193)를 시작으로 자신의 백성의 회복을 시작하였다.
모세는 이제 하나님께 모든 약속을 받았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 가시겠다는 확답을 듣는다. 하나님이 모세를 신뢰하고 그를 기뻐하신다. 모세의 이름으로도 모세가 어떠한 사람인줄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백성을 위해 간구하는데, 하나님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세 때문에, 백성의 영적인 회복을 승낙하신다.
“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출 33:13-17)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만으로도 모세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모세의 중심을 모세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이 알고 계셨다. 그래서 모세를 기뻐하셨던 하나님이, 모세의 요청에 모두 승낙하신다.
부흥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한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진노를 그치고 회복을 시작하신다. 종교개혁시대에 가장 볼품없고 권력조차도 없고 연약하였던 마틴 루터를 통해, 부흥이 시작되었다. 그 부흥의 열매가 종교개혁이 되었다. 시골 한적한 곳에서 몸이 약하여 오래 걷지 못했던 병약한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 한 사람을 통해, 미국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시골마을에서 하나님은 부흥을 시작하셨고, 미국 전체를 뒤흔드는 부흥으로 인도하였다. 용서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한 사람 모세를 통해 하나님은 회복으로 바꾸셨다. 1907년 1월 6일 주일 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장로 한 사람의 회개와 간구를 통해 하나님은 평양의 영적 회복을 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의 회복하시기 위해, 항상 남은 자를 남기신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은 회복하신다.
e. 하나님의 질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돌리신 고개를 돌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모세는 두 번째 돌판을 가지고 산꼭대기에 가져간다. 그리고 하나님은 백성과 다시 언약을 세우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출 34:10-11)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 앞에 백성과 다시 언약을 세우신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들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나아가야 하는지 이르신다.
그런데 가나안을 이야기하시면서 가나안 사람 모두를 ?아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제단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어 버리라.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194) 하셨다.
구약성서 당시의 종교는 자신의 경제와 물질과 야망이 연결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시면서 “ 여화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임이니라”195) 하셨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하면, 그러한 하나님의 질투(열심)를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그 질투를 가지라는 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 그분을 대체하는 모든 것을 우상으로 정의하고, 대체하는 모든 가짜신앙과 불신앙을 제거하고, 하나님 그분과의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가, 자신의 유일한 삶의 목적과 목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흥을 시작하실 때 이러한 질투를 가진 사람들과 기도를 통하여 부흥을 시작하였다.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의 열정이 부어지고, 하나님의 열심히 부어지면,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께 밤낮 없이 부르짖는 기도를 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땅에서 회복을 원하는 길이다.
Ⅲ. 예수님의 신앙의 본질
A.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사역의 중심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이었다. 침례(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회개를 선포하였는데, 회개를 선포한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라고 하신 말씀이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4-15).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한 마디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이었다.
B. 예수님 시대에는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을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의 입을 다물게 할 정도로 박식하게 말씀하신 소문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모였다.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한다. 예수님이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시험하여 묻는다.19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197) 바리새인은 또 다른 질문을 마친 뒤 반응을 하였는데,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지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198)였다.
바리새인은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지식적으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정말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시험하고자 질문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변론에서 그의 이단성을 반박할 수 없었다. 신학적으로도 그 당시 가지고 있었던 신학에서 예수님은 전혀 문제가 없으셨다.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서 자신들이 추구하고 있는 신앙과 다른 것을 가르치는지 알기 위하여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교리적으로 자신들과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었고, 오직 제자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지 않는 것 즉, 손을 씻지 않는 것을 지적했을 뿐이다.199) 또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지적하였을 뿐이다.200)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정의를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론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구약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가르치실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을 시험하러 온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신앙에 대하여 예수님을 시험하였지만, 예수님을 넘어뜨릴 수 없는 이론적이고 실제적인 확고함을 가지고 계셨다. 즉, 바리새인도 인정하고 사두개인도 인정하고 믿고 있는 신앙의 본질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단으로 내몰 수가 없었다.
예수님 시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학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른 신앙의 문제였다. 바른 교리와 성서적인 설교를 바리새인들이 하였다는 것을 예수님은 간접적으로 인정하시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마 23:3).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신학적으로나 성서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음을 이야기하시며, 문제는 그들의 신앙의 실제가 문제임을 지적하였다.
예수님은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이 우리의 삶 가운데 실제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라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의 본질에 대한 지식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의 본질이라고 말하면 무엇인지 이론적으로 그들은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신학적으로는 정통이었다. 문제는 실제가 문제였다.
예수님 시대에는 바른 교리와 바른 성서적인 가르침 자체가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시대였다. 흡사 오늘날과 비슷하다. 예수님은 바른 신앙의 본질과 우리의 삶 가운데 실제가 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을 예수님 시대에 실제가 되도록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C.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외치신 말씀은, “회개하고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이 가까이 왔느니라.”201) 이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전파하신 주님의 의도를 우리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제자들이 외친 메시지는 ‘회개하라(Metanoei'te).’(막 6:12)와 ‘천국이 가까이 왔다(h[ggiken ga;r hJ basileiva tw'n oujranw'n).’(마 10:7) 이었다.
마태복음은 천국이라 번역하였는데, 새번역에서는 원어 그대로 ‘하늘 나라’라고 번역하였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다.
에두아르트 로제는 ‘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언급하려고 할 때 하늘을 언급한 사실이, 유대교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기 때문이라 하였다.202)
폴리갑(Polycarp, A.D 70 ∼ 155(?))의 친구이며 사도요한의 제자인 파피아스(Papias, A. D 2세기경)는 “마태가 말씀들을 히브리어로 정리하고 그것들을 각각 그의 역량껏 번역하였다.”고 하였다.203) 뿐만 아니라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 A.D 35(?) ∼ 117)는 A. D 115년에 본서를 ‘마태복음’이란 이름으로 로마에 가져갔고, 로마의 지방 회의는 120년에 본서를 마태의 책으로 결정하였다.204)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태복음은 히브리어로 먼저 쓰여졌고 후에 헬라어로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역량껏 번역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히브리어의 ‘하나님 나라’는 오늘날 어떤 단어를 사용하셨는지 몇 가지 유추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헬라어로 ‘하나님 나라’ 또는 유대인을 위하여 ‘하늘 나라’라고 번역하였고, 요한복음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인 ‘생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파피아스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역량껏 사람들이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를 헬라인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번역을 시도하였는데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문화와 환경과 언어 속에서 신앙의 본질이 이해될 수 있는 적합한 단어들을 사용한 것이다. 이미 적합한 상황화 사역이 초대교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있었다.
우리시대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가 어떤 의미였는지는, 유대인을 위하여 ‘하늘나라’라고 번역한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유대인의 하늘에 대한 개념 속에는 3가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첫 번째 하늘 - 우리가 살고 있는 하늘(공간)
두 번째 하늘 - 우주
세 번째 하늘 - 하나님이 계신 천국
마태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저술한 마태복음의 ‘하늘나라(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basileiva tw'n oujranw'n)를 단수로 사용하였다. 그 당시 하늘은 복수형(oujranov")으로 사용되었는데, 히브리적 개념을 헬라어로 담아서 ‘하늘(oujranw'n)’이라 하며 단수로 적었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하늘의 개념 중에 첫 번째 하늘을 말하는 것이었다. 유대인 개념으로 이것은 지금 내 곁에 계신 하나님의 의미이다. 그 당시 유대인이 인식한 바로는 우리가 사는 공간, 즉 우리 주변에 임재해 계신 하나님으로 인식하였다. ‘하나님 나라’라고 하지 않고 헬라어로 하늘이라 한 것은, ‘하늘 나라’ 개념이 헬라인이 아닌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마태복음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인 이유에 있다. 그 시대 유대인은 그렇게 이해했지만, 2000년이 지난 오늘은 이것을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달라스 월라드는 이러한 천국에 대한 이상한 번역을 연구하면서, 마태복음에만 ‘천국’이 32번 등장하고 신약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였다.205) 마태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는 5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마태복음은 ‘하늘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마태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몰라서 ‘하늘나라’라고 한 것이 아니라, 헬라인들의 삶의 정황 가운데 설명하기 위한‘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보다, 유대인들의 삶의 정황에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하늘나라’라는 단어를 가지고 설명한 것이다.
달라스 월라드는 “‘하늘 나라’라는 말을 천국으로 번역함으로 오늘날 하늘을 머나먼 곳, 외부 공간, 반대편 공간 등으로 혼동하는 현실이 그리스도와 그의 현재적 통치에 대한 우리의 실제적 믿음에 미치는 폐해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거기에도 계신다. 그러나 하늘과 하나님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대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늘과 하나님을 저 멀리 딴 곳에, 여기도 아니고 지금도 아닌, 그것도 훨씬 나중에나 만날 대상으로 늘 생각하며 살고 있다.”206)고 하였다.
그리스도, 천사, 기타 특이한 현상이 주변 공간 혹은 공중, 즉 성경 세계의 “첫째 하늘”에서 체험되어 진다.207) C. H. 다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과 마태복음 특유의 천국이라는 말은 동의어이며 ‘하늘’이란 유대 전통에서 흔히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경이의 완곡어로 사용된 말이다.”208)라고 하였다. 달라스 윌라드는 “단어적으로 하늘이 하나님 그분을 지칭한 경우는 종종 있지만, 단어적으로는 모두 하나님 그분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은 우리와 관계 맺으시는 방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단어이다. 하늘이란 인간 세계와 관계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를 정확히 일러 주는 말이다. 반면, ‘하나님 나라’라고만 말할 때는 그런 의미가 없어진다.”209)고 하였다.
‘하늘 나라’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공간이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스스로 나타내 보이시기 원하시는 공간이며, 인간과 관계 맺기 간절히 원하시는 공간이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개념인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의 실마리를 우리 옆에 항상 계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이 실제가 되는 삶을 복음서를 살펴봄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D. 하나님 나라는 지금 이곳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이다.
바실레이아(basileia)의 히브리어에 해당하는 말쿠스(tWkl]m')의 중심적인 의미는 영역이라는 구상적인 개념보다는 다스림, 지배, 통치라는 추상적 개념이라고 생각해 왔다. 또한, 바실레이아를 ‘왕의 능력’ 또는 ‘권세’란 개념이 더 기본적인 생각으로 발전하였다.210)
예레미아스는 “동양인들이 느끼는 나라(malkuta) 라는 단어의 의미는 서양인들의 왕국의 의미가 아니다. 구약에서 malkuta가 공간적인 의미에서 영역 즉 영토를 의미하는 곳은 아주 적다. 이 말은 거의 언제나 정부, 권위, 왕의 권세를 나타낸다.”211)고 하였다. 합리적인 사고 방식에서의 진전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인식하고 있다.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최대한 배제한 상태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신앙의 개념으로는 하나님의 임재의 개념이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사용된 용어들만 보더라도 그렇다. ‘온다.’ 또는 ‘당도한다.’212)와, 그것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다.’213)이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인간이 하는 행위는 주로 ‘들어간다.’214)와 ‘받다.’215)로 표시되어 있다. 반면에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또는 ‘확장한다.’등의 동사는 일체 쓰이지 않았다. 이러한 언어의 두드러진 사실은 인간의 노력보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는 영역이다. 즉,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말 그대로 가까이 있는 것이다. 먼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 있다는 의미이다. 임재를 나타내는 아주 좋은 말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임재하셔서, 인간의 삶 가운데 주인이 되어서 그 사람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것. 즉, 신앙의 본질로 인도하는 임재이며 동시에 신앙의 본질로 나아가는 실제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의 의미는 신앙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가까이에 임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와 관계 맺으시는 우리가 사는 이 공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임재하여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E. 하나님의 나라는 구약의 신앙의 본질을 예수님 시대에 설명한 신앙의 실제이다.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다스리도록 자신을 내어드리고 주님이 자신을 이끄시도록 자신의 삶을 조정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216)라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이 각자의 삶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요청하는 기도요, 그분의 왕적인 주권과 권세가 개인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해 달라는 기도요, 그분의 의로운 통치로 악들이 다시는 나를 지배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여기서 문제는, 주님의 통치를 우리 삶에 실제가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이다. 그 친밀한 관계에 있으면, 주님을 경험하고 알게 되면서 그분의 성품을 닮아간다. 이것이 제자의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우리 가운데 자연스럽게 배우고 알아져서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진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질문이 바로 이런 개념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님을 갈망하고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목표로 하면, 그분이 임재하셔서 우리가 그분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인도해 주신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포도나무 비유에서의 표현처럼, 주님을 실제의 삶 가운데 인식하며 동행하는 삶을 사는데, 모든 생각과 행동과 말과 뜻의 주도권이 이제는 내가 아니라 주님에게 있는, 실제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기 때문에, 내가 겸손해야지 하는 노력을 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겸손해질 수 있다. 마음이 높아지지 않는다. 그분의 존전 앞에 머물면, 그분의 통치와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Ⅳ. 구약의 신앙의 본질이, 예수님 시대에 임재방식의 변화가 왔다.
하나님 나라는, 근본적으로 구약의 신앙의 본질이 변한 것은 없지만,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임재방식이 바뀌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한 성육신이 바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즉, “임마누엘”이 가장 완벽하게 나타난 사건이다.217) 하나님의 임재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재로 변화되었다. 동시에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는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있으시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통하여 도래하였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임재방식의 변화와 함께 권세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218)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권위(권세)를 부여하셨는데 그 권위가 임재방식의 전환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계속해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신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219)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220)고 말씀하심으로써 응답하신다.
신학적으로 ‘기독론’에서, 예수님의 독특성을 설명한다. 기독론이라는 오늘날의 신학적 설명 방식으로 보지 않고, 신앙의 본질에 있어서 임재의 변화라는 관점으로 보면 훨씬 더 쉽고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설명하기에 쉬워진다. 심지어 기독론에 있어서 고등 기독론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초대교회 시대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예수님도 자신이 하나님이라 단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인데,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 가운데 서양신학방법으로 이 문제를 가지고 만족스런 설명을 하지 못하였다. 대부분 삼위일체를 소개하면서 감정적인 부분에 호소하는 글들이지, 누구나 인식할 수 있을 만한 대답을 못하고 있다. 삼위일체는 서양 사람들의 사고 틀에서 나온 설명방식이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완전하게 설명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계시자로서 인식하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A. 예수님은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사람이다.
1. 예수님의 증언.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한 것에서 더욱 발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높여 서술하였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도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분이 곧 생명이며 참 빛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 (요 1:2-4, 9-11)
참 빛으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육신을 입고 거하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계시자(the revealer,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사람)가 되신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5-18)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독생자 이다.221)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듯,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과 관계를 갖게 하는 특권이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진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러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222)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았다. 자신이 안식일에 일하는 근거는 하나님도 역시 안식일에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 놓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 5:18)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예수님의 정체는 바로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계시자’ 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의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아버지를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223)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모두’ 아들에게 ‘보이시기’ 때문이다.224)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주장하셨다.225) 그리고 예수님을 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 하였다.226) 이제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예수님은 더욱 발전하여 ‘생명 수여자’ (life-giver)와 ‘심판자 예수’로 발전하며, 예수님은 ‘공경받으실 분’이 된다.227)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최고의 권위를 지니신 분이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완전한 계시자이며, 심판에 관해서는 전권(全權)을 부여받은 분이다.
2. 예수님과 권위(권세)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성경에서 사용된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설명하려고한 시도가 있었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다르게 떨어뜨려서 설명하지 않고, 섞어서 사용하였기 때문에, 권위(권세, ejxousiva)로 통합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a. 신성모독 갈등
예수님의 권위는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갈등 중에 가장 심각한 갈등은 ‘신성모독’ 갈등이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마 21:23).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막 11:28).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눅 20:2).
이 질문은 예수님의 사역기간 중 종교 지도자들이, 그 당시 가지고 있던 교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향하여 던진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신성모독으로 생각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던진 질문이었다.
b. 예수님의 권위는 새로운 임재방식이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중풍병자를 향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자, 친구들에게 이끌려 나왔던 중풍병자는 병을 고침 받았다(막 2:5). 중풍병자의 고침으로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228)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229)고 하였다.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귀신을 축출하는 사역을 보고서,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230)고 하였다.
예수님 그분이 권위(권세)이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8)
이러한 권위(권세)는 아버지께서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231)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은 주로 “권위”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던 하나님 대리자로서의 권위를, 예수님이 선언하였고 사역의 현장에서 또 성전이라는 그 권위의 장소를 예수가 점령한 것으로 받아들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침입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그들은 예수를 죽음으로 몰게 된다. 이처럼 예수님와 종교지도자들의 갈등은 예수의 권위에 대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로써 드러나는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 권세의 소유자”로서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다.232)
c. 귄위를 제자들에게 부여하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권위를 제자들에게 주신다. “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눅 9:1)
지금까지 세상이 창조되고 그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사람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권세) 그 자체이었다. 그 권위를 제자들에게 사역을 위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이다.
3. 요한복음 1장 1절의 카이(kai)의 용법 문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kai; qeo;" h\n oJ lovgo".)”(요 1:1).
헬라어의 카이(kai, 곧)라는 글자는, 예수님 시대에 사용되던 용법과 성경이 정경으로 확립되었던 4세기 이후의 사용법이 조금 달랐다. 카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그리고’라는 말로 많이 번역한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절과 여러 군데에서는 ‘곧’이라는 의미로 번역한다. 문장의 앞뒤 문맥을 보고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다. 문제는 헬라어의 카이가 ‘곧’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 하나님이 바로 예수와 동일하게 일치되는 의미를 가졌느냐? 아니면 원본과 다르지만 원본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느냐이다.
여기서 초대교회 시대에 쓰여진 성경 이외에 다른 헬라어 저작물들을 살펴보면, ‘카이’가 사용된 용법이 원본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었고, 또한 원본은 아니지만 같은 성질의 것을 가지고 있는 다른 것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도 변하게 된다. ‘카이’라는 단어가 초대교회 시절과 다르게 ‘곧’이라는 의미가 사라지고 ‘그리고’라는 의미만이 남게 된다. 그리고 성경이 정경으로 정립되고, 이집트의 아타나시우스(300-373)에 의해 삼위일체 개념의 기초가 만들어지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카이’라는 단어가 원본과 일치하느냐, 아니면 원본과 동일한 성질을 나타내는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느냐를 성경을 통해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삼위일체 개념의 가장 중요한 핵심구절 중에 하나인 요한복음 1장 1절이, 말씀과 하나님이 동일한 인물로 말하고 있느냐? 아니면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느냐를 분석해 보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삼위일체 개념을 모두 지우고 성경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다시 읽어보아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고정관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친숙하고 편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전통을 깨기 싫어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정관념이라는 편견을 없애고 공정하게 다시 연구해 보아야 한다.
이렇게 중립적인 입장에서 연구를 하면 두 가지 모두로 설명하는 것이 틀리지 않고 모두 설명이 되어 진다. 그러나 말씀과 하나님이 일치하는 것보다, 말씀이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는 다른 존재로 보는 것이 삼일위체를 부정하는 모든 질문들에 대하여 훨씬 더 만족한 대답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성서적으로도 훨신 더 설득력 있다.
성경에서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는 해석이 나오는 곳 이외에, 하나님이 예수라고 말하는 곳은 없다. 고정관념을 벗어 버리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곧 예수 라는 공식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계시자라는 것이 훨신 더 성서의 수많은 것을 적절하게 잘 설명해준다.
4. 예수님과 하나님의 차이점
이렇게 하나님의 모든 전권을 가지셨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다른 것이 있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거하시지 않으면 그 어떤 사역도 하지 않았다. 즉,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아야 했고, 하나님의 의중과 뜻을 벗어난 것을 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다.233)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십자가를 지기 전에 예수님의 고뇌는,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모든 뜻과 의를 행하는 것이었다.234)
둘째, 마지막 날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235) 고 하였다.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 조차도 미래에 일어날 마지막 때에 대하여는 알았지만, 마지막 시기는 알지 못하고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 있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비교하여 한계를 가지신 분이었다.
셋째,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 다음 가는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보좌에 오르신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236) 예수님이 스스로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다.237)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238)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기 위하여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었다.239)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된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셨지만, 하나님 그분 자신이 아니었다. 본체와 계시자는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라고 단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태초부터 계셨던 예수님이, 하나님과 분명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계시자 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한국 기독교가 잘 하는 것 중에 하나가, 교리적으로 조금만 다르면 이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없는 증거를 조작해 만들고, 인터넷을 통하여 강력하게 여론몰이로 일관한다. 정말 복음에서 벗어난 것들을 지적한 적도 있지만, 애매하게 칼빈과 다른 사상과 성령론을 가졌다는 이유로 이단논쟁에 고초를 당하는 교회와 사람이 있다. 이러한 일은, 조금만 교회가 급성장하고 유명하게 되면 기존의 교회와 목사들 누구나 한번 이상씩 경험하는 한국 기독교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나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맞도록 다르게 설명하는 것 뿐이다.
B. 임재방식의 변화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 계시.
1. 태초부터 계셨던 예수
하나님의 계시자로써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다.240)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241)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242)고 하시면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있는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태초부터 함께 일하고 있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계신다. 즉, 하나님은 이 땅에서 임재하셔서 인간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계시하고 일을 이루어 나가셨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사역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임재하신다.
2. 동정녀 탄생
어떤 사람은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담의 부패와 죄를 물려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 모친의 죄악을 물려 받지 않았기 때문에 죄로부터 보호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원론에서 나왔지, 성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243) 즉, 성경 구절을 끌어들여 자신의 이원론을 증명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서 자체는 그것에 대하여 말 할 의도가 아니었다. 이원론적인 전제조건을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되면 그러한 논리가 성립이 될 수 있다.
누가는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했고, 그 모든 것을 통하여 그녀를 압도했다고 말 할 뿐이다. 성령의 보호를 통해서 마리아에게 날 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 될 것며,244) 하나님의 아들은 언제나 존재하였고245), 언제나 존재할 것이고,246)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육신으로 보낸 방법이 바로 동정녀수태였다. 나는 동정녀 탄생을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느냐에 대한 대답이라 생각한다.
예수님이 독특하게 탄생하도록 하나님이 배려하신 것은, 그분의 탄생부터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일반적인 인간과 차별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3. 죄의 용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용서가 가장 첫 번째 필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으셨다.
예수님이 한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그를 향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247)라고 선언하시면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248)고 말씀하셨다. 심지어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249) 이 말씀은 주변 사람들을 경악하게 하였을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이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대제사장도 제사를 통하여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는 대리자의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죄를 사해주는 죄 사함을 선언할 수 있는 지위는 아니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레위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비난하자,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신다.250)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사람의 신분 귀천 없이 모든 죄인들을 불러 함께하시며 그들의 죄를 사해주셨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많은 죄를 지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눈물로 적시며 머리털로 닦으며 회개하였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51)고 말씀하셨다.
임재의 방식이 바뀜과 동시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죄 사함의 방식도 바뀌게 되었다. 죄 사함의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 그분과 함께 있으며,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반해 유대지도자들은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여 정결법에 따라서 죄인이나 더러운 자들과는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4. 새로운 삶의 변화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은,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고 바리새인과 그 제자들도 마찬가지인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지 않다며, 예수님께 잘못을 지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예상과 다른 말씀을 하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252)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새로운 임재 방식으로 하나님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이제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임재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혼인집 잔치로 비유하시며, 함께하는 그 즐거움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이라 하였다.253)
그리고 비유하시며 말씀하신 것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254) 이제 새로운 임재 가운데 사는 삶의 변화를 새포도주와 낡은 포도주로 비유하여 말씀하였다. 낡은 포도주는 과거의 옛 임재방식이고, 새포도주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한 임재로 인하여 새로운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5. 과거의 인물과 비교
예수님은 여러 차례 과거의 여러 인물들과 자신을 비교하신다. 예수님은 요한이나 솔로몬보다 더 큰 인물로 말씀하셨다.255)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256)라는 질문에 각 복음서 기자들은“그렇다. 예수님은 독특한 인물이며 다른 모든 사람보다 크다”고 대답할 것을 예상하는 문장으로 서술하였다.257) 그분은 야곱보다 크다.258) 예수님은 심지어 성전 자체보다 더 큰 분으로 말씀하셨다.259)
임재의 변화는 과거의 그 어떤 신앙의 위대한자들보다 더 크고 위엄 있는 분으로 예수님을 말하고 있다.
6.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루노니”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260)는 “너희가 나의 말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261) 이 표현은 예수님 시대까지 없었던 표현이다. 그 당시 자신의 스승이나 구약성경 그리고 랍비적 전승을 인용할 때, 앞에 이름이나 출처를 넣어 말하는 관습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것을 따르지 않고 자신이 말한다며 시작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셨다. 이렇게 서두를 시작한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차원이 다른 말씀을 전하셨다. 성경은 그것을 권위(권세)가 있었다고 한다. 즉, 예수님은 말씀에 대한 권위가 있으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면서 권위 있는 새교훈에 사람들이 놀란다.262)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이 배고픈 것을 잊은 채 말씀에 깊이 빠졌다.263)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씀 그 자체로 그 시대 그 무엇보다도 권위있고 확신있는 말씀을 전하였다. 그리고 수 많은 사람이 그 말씀에 빠져들었다. 이것은 임재하신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계시자로써, 예수님의 말씀은 자체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7. 율법과 안식일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른 것을 보고서,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예수님은 다윗이 율법의 규정을 위반하였지만 용납되었던 사례를 이야기하시면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셨다.264) 이것은 율법 위에 예수의 권위가 있으심을 선언하신 것이다. 율법조차도 예수님의 권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265) 당시에는 율법의 가장 세시한 부분이라도 위배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저주 받을 일로 간주되었지만,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 그것을 개정하셨고 심지어 여러 측면을 무효로 선언하셨다.266)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전통이나 논리로 정당화 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나 나는 …… 라고 말한다.”는 말로 간단하게 정당화 하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고발할 증거를 찾기 위해 안식일에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267)고 하시며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었다.
이러한 사건들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갈등을 겪으며 죽임 당하실 빌미를 제공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안식일이나 율법 위에 사람을 두는 사람중심의 사역이었으며, 율법 위에 예수님이 계셨다. 율법과 그에 따른 규정들과 당시의 전통적인 유전들 위에 예수님이 서 계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계셔서 율법의 주인이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고 꾸중하였다. 이 사건 이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268)고 질문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침례(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하시며 다시 반문하시자, 그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질문은 예수님 자신의 권위와 사역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며,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와 사역의 근원이 하늘에서 온 것임을 우회적으로 주장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포도원 농부의 비유로 그들을 공격하신다. 포도원 주인이 소출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그들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고 상하게 하고 내어 쫓았다. 최종적으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지만, 그들은 상속자를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다. 포도원 주인은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눅 20:9-18).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적대하고 죽일 빌미를 주게 된 것이 바로 ‘권위’와 관련한 사실들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방식의 변화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는 율법보다도 더 위에 계셨다.
8. 귀신을 심판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침례(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로 선언 받았다.269) 그리고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되 성령을 따라 행동하시는 분으로써 근본적으로 사탄과 대결하시는 분이시며 그 대결에서 승리하시는 분이시다.270) 그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본 적이 없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271)
사탄의 조종 아래에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귀신이나 귀신들린 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본다. 그리고 외친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272)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273) 외친다. 거라사인의 지방의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께 경배하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274)라고 외친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불분명하였는데, 귀신들은 예수님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예수님을 항상 ‘하나님의 아들’, ‘지극히 높으신 자’,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고백하였다.
또한, 예수님의 사역 중에 한 가지는 귀신(또는 귀신들린 사람)을 멸하시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만난 귀신은 자신을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기까지 하였다.275) 즉, 예수님의 권세는 한계는 귀신을 무저갱으로 보낼 수 있는 권위가 있으셨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위이셨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사탄의 통치와 맞서는 사역들을 하셨으며, 그들을 제어하고 심판하는 권위를 가지셨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보아도 하나님은 절대 하나님의 임재가 사탄과 공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임재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이루어짐으로 인해, 사탄과 공존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로 사탄을 물리치셨다.276)
또한, 예수님은 이 권능을 자신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제자들에게도 주셨다.277)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것을 예수님이 가지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시기까지 하신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9. 기적과 치유
예수님은 많은 종류의 질병 치유 기적을 일으키셨다.278) 예수님은 병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 즉 사랑과 긍휼의 감정 때문에 심장이 움직이는 감정으로279) 고쳐주셨다. 또한, 자연에 대한 기적280)과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281) 모두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기적들이었다. 또한,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죽을 자를 살리고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이러한 기적은 예수님의 정체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표적이었다.282) 예수님의 기적 때문에 바람과 바다를 제어하는 그는 대체 누구인가?283) 불치의 병을 고치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 앞에 세상이 시작된 이래 그런 기적이 없었다고 말한다.284)
기적과 치유는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의 변화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인간이 창조된 창조 원형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임재의 변화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은 바로 제자들에게로 옮겨 갔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는 능력만 준 것이 아니라,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285)
10. 천사
성경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눅 12:8-9)
그들은 ‘하나님의 천사들’로 불렸다.286) 그런데 하나님의 천사를 예수님이 자신이 부리고 있는 것을 말씀하셨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마 13:41)
예수님은 하나님의 천사까지도 부릴 수 있는 권세가 있었다. 이 본문에서 ‘그 나라’는 하나님 나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신앙의 본질을 소유하신 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신앙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성취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의 계시자로써 예수님은 천사조차 부릴 수 있었다.
11. 인간의 운명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의 관심은 의식과 율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의 미래가 달린 결정적인 문제가 바로 예수님 자신에 대한 반응에 의해 결정된다고 선언하셨다.287) 예수님은 사람들의 미래의 행복, 천국이냐 지옥이냐, 축복이냐 저주냐 하는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님을 받아 들이냐 거부하느냐에 의해서 결정되었다.288)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2)
예수님은 오직 자신을 사랑 하라고 요구하셨다. 부모, 아내 혹은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한 사랑을 요구하셨다.289)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의 대상자를 바꾸셨다. 바로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계시자로써 예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다.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할 때,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양과 염소를 구별하며, 모든 세상을 심판하고 영원한 생명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290) 하였다.
또한 예수님은 신성한 지혜의 계시자였다. 예수님은 과거에 지혜를 가르쳤던 교사의 방식을 이용하여, 잠언, 수수께끼, 시, 역설, 비유 등을 들어서 가르치셨다.291)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하나님과의 관계292)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은 끔찍한 심판을 초래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거부하는 행위였다.293)
C. 임재방식의 변화에 대한 다른 증언
1. 침례(세례)요한의 설교
침례 요한는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과 메시아의 출현이 동시에 발생한다고 하였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294)
이 설교는 침례 요한 뒤에 오시는 이가,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는 것이다. 성서에서는 침례 요한이 하나님께 어떠한 계시를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침례 요한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와 같은 메시지였다는 것은 확실하며, 그 메시지 속에는 오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사상을 초월하는 더 큰 능력인데, 실제로 침례 요한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엄청난 권능으로 오셨다. 그리고 침례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은 하나님의 기준을 세우되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295) 하였다.
사실상 침례 요한이 인식한 것 보다 더 엄청난 임재방식의 변화에 그는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이가 맞는지 확인할 정도였다(눅 9:17).
2. 제자를 부르심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이 직접 선택하였다. 자신이 제자가 되고 따르고 싶어도 허락하는 사람만이 따를 수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를 선택하실 때 회개하는 자를 선택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죽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어찌나 자신의 전적인 타락을 경험하였는지 예수님을 가까이하지도 못하고 자신을 떠나도록 간구하였다.296) 이러한 회개를 경험한 베드로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제자로 받아 들이셨다.297)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막 3:14-15)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첫 번째 목적은, 자기와 함께 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전도하고 권능을 주시는 것은 그 다음의 목적이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계시자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임재방식의 전환이, 제자를 부르시고 함께 하시는 첫 번째 이유가 되었다.
3. 경배(proskunevw)
성경에서 경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다. 그런데 성경의 많은 부분은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는 경배를 예수님께 드리고 있다.
거라사인의 지방의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께 절하였다.298) 영적 존재들은 이미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한다.299) 나병환자가 예수께 나아와 경배하였다.300) 한 관리가 예수님께 나아와 경배하였다.301)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앞에 제자들이 경배하였다.302) 가나안 여자가 예수께 경배하였다.303) 병 고침을 받은 맹인이 예수님께 경배하였다.304)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경배하였다.305)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온 여자들이 예수님 앞에 경배하였다.306)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시하신 산에서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하였다.307)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에게 경배한다.308)
기적을 일으키신 것과 청탁의 목적 때문에 경배한 것을 제외하더라도, 경배가 한 인간이 받을 모든 경지를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특히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경험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경배의 대상이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자로 이 땅에서 사셨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이시며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에 경배 받으셨다.
4. 예수님의 호칭
예수님에 대한 호칭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었다.309) 마태와 누가는 자기들이 기록한 족보에서 예수님을 다윗 왕가의 약속된 계승자이자 완성자로 보았다.310) 예수님은 이 호칭을 인정하시면서 그렇게 지칭되는 것을 회피하실 때도 있었다. 이러한 호칭을 공개적으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사용하였다. 이러한 이유는 사람들의 오해가 가장 큰 이유였다.
예수님은 ‘선지자’라는 호칭을 더 많이 받으셨다.311)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엘리아라고 인식하기 돠였고, 혹은 예레미아라312)하며, 이전 선지자가 예언했던 것을 가져오는 ‘그’선지자로313) 인식하였다.314)
예수님은 또,‘주’로 불리셨다. 한국 말에서는 주인이라는 뜻이지만, 원어에서는 존경의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 단어이다. 하나님과 함께 사용될 때는 고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315)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더욱 고귀한 의미로 사용되었다.316)
예수님을 지칭한 가장 큰 호칭은 3가지를 분류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그리스도)’, ‘인자’이다.
a.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은 구약과317) 신구약 중간기 문헌들318) 가운데 나타나는데, 메시아의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는 신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였다.319)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과 독특하고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갖고 계심을 말씀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5-27)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써 진한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320)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갖고 계신 하나님께 입양된다.321)
b. 메시아(그리스도)
‘메시아(마쉬아흐, aj;yvim)’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크리스토스, Cristov")’는 헬라어로서, “기름부음은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를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사용하고자 하지 않으셨다.322) 이유는 로마와의 즉각적인 충돌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은밀한 자리에서 자신이 약속된 메시야 임을 인정하셨다.323)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호칭과 연관된 오해 때문에 자신이 메시아 신분을 쉽게 인정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계셨다.324) 예수님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셨다.325) 십자가의 명패에도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메시야는 선지자와 왕과 제사장이라는 삼중 직무 모두를 나타내는 말이다.326)
c. 인자
인자(oJ uiJo;" tou' ajnqrwvpou)는 ‘그 사람의 아들’이란 뜻으로써, 성경에 빈번하게 등장한다.327) 인자에 대해서는 일정한 주장보다, 다양한 주장들이 지금까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신학자마다 조금씩 다르고 신학 노선에 따라 정말 다양하다.
로버트 스타인은, 인자에 대하여 독특한 주장을 하였다.
“예수님 시대에는 인자라는 단어가 메시아와 관련하여 사용된 호칭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지칭하기 위해 이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복음서에서 이 말이 호칭으로 사용된 것은 예수님이 이 말을 자신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예수님이 인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신 이유는 ‘다윗의 자손’ 혹은 ‘메시아’라는 잘 알려진 메시아적 호칭을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였다. 즉 가깝고 내부적인 사람에게는 메시아로 인식되었지만,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상황 가운데는 인자로 호칭함으로 일반적인 지칭으로 예수님이 사용하셨다. 328)
김세윤 교수는 인자에 대하여 연구하고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그‘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로 예수는 자신이 종말에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하나님의 자녀)을 창조하여 그들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며 그의 사랑과 부요함을 덕입어 살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은근히 나타내려 한 것이다.“329)
사실 성경에서 인자의 의미에 대한 연구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님이 ‘인자’로 말씀하신 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 되었다는 것 밖에 없다.
이와 같이 예수님에 대한 호칭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전후로 더욱 고귀하게 여겨졌으며, 부활 이후 공개적이고 과감하게 예수님의 이름들을 제자들 사용하였다. 이러한 이름으로 하나님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계시자로써 전혀 손색없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5. 죄가 없으신 예수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알지도 못하고,330)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331) 의인이시며,332) 그에게는 죄가 없다고333) 성경은 명백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흠 없는 제물로 묘사하였다.334) 그분의 별명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이335)었다. 유월절 양으336)로도 불려 졌고, 하나님의 향기로운 제물로도 불려 졌다.337) 밧모섬에서 요한은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죽임당한 후 승리하신 어린 양이338)라 하였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분으로써, 예수님이 죄가 없으셨던 것을 성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성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음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좀 더 확대하여 생각하면, 하나님의 임재의 변화인 예수 그리스도가 죄가 없으신 의인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의로 죄를 사해주시는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이 당연히 죄가 없으신 분이었다는 것은 자명한 자실이다.
6. 십자가의 예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시고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의 약속의 기간을 ‘말세’라 한다. 이렇게 예수님과의 약속의 기간인 말세가 약 2000여년이나 지났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그분의 사역 또한 완성되지 않았다. 그분이 다시 오셔서 잔치에 참여하는 그의 백성과 만나야 끝날 것이다(막 14:25).
예수님의 부활승천 이후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와 함께하는 임재방식은 이제 보혜사 성령이다. 우리와의 친밀한 관계를 지금도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맺고 계시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계시자가 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 15:26)
마지막 날 그분의 기쁨의 재회를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간과의 관계회복을 위한 계시자로써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완성될 것이다. 다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다시 우리는 더욱 가까이에서 그분의 임재가운데 성대한 잔치를 기쁨으로 즐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약의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율례의 완성을 이루셨다. 단번에 이루신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의 죄책 뿐만이 아니라,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7. 인간으로서의 예수
예수님의 잉태는 특별하였지만, 예수님의 탄생의 순간은 인간의 분만이었다. 예수님은 인간과 같이 전형적인 족보를 가지고 계셨다. 자라는 동안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가339)셨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동일한 육체적 한계를 가지셨다. 금식하였을 때 배고픔을 체험하였고,340) 갈증도 체험하셨고,341) 여행 중에 피로함을 느끼기도 342)하였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깨어서 기도하고자 하였던 예수님의 기대를 저버린, 잠들어버린 제자들을 향하여 실망하였다. 마침내 모든 사람과 같이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셨고, 죽으셨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지만, 하나님 그분의 계시자로 인간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이었다.
D. 또 한 번의 임재 방식의 변화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이 예수님 시대에 임재방식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친히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임재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부황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여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할 때 까지 또 다른 임재방식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으신다. 그것은 성령이다.
1. 또 한 번의 임재방식의 변화에 따른 죄 사함과 구원의 방식의 변화
죄 사함에 대한 권세를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그분께 오는 자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해주셨다. 그것이 그분이 오신 목적이었다. 이제 예수님은 영원한 죄 사함에 대한 일을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로 나아가신다. 그것은 또 다른 임재의 변화에 대한 죄 사함의 방식의 변화이다. 우리를 구원할 뿐만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 십자가 대속의 사건은 우리를 죄 사함의 길로 인도한다. 복음서 내용의 과반수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십자가 사건이 임재방식의 변화에 핵심 사건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장 53절에서 56절까지는 이러한 십자가 사건이 과거와 현제와 미래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첫 번째,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것이 영생을 얻게 됨과 동시에 미래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ei\pen ou\n aujtoi'" oJ !Ihsou'", !Amh;n ajmh;n levgw uJmi'n, eja;n mh; favghte th;n savrka tou' uiJou' tou' ajnqrwvpou kai; pivhte aujtou' to; ai|ma, oujk e[cete zwh;n ejn eJautoi'".”(요 6:53)
위의 본문에서 인자의 살을 먹는다(favghte)와 마신다(pivhte)는 ‘가정법 현제’로써 현제시제를 말하고 있다. 생명이 없다(oujk e[cete)는 현제형이다. 즉, 과거로부터 현제와 미래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사건의 경험이 없으면 지금 현제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oJ trwvgwn mou th;n savrka kai; pivnwn mou to; ai|ma e[cei zwh;n aijwvnion, kajgw; ajnasthvsw aujto;n th'/ ejscavth/ hJmevra/.” (요 6:54)
“내 살을 먹고(trwvgwn) 내 피를 마신다(pivnwn)”의 시제는 모두 현제형이다. 또,“영생을 가졌다(e[cei)”는 현제형이다. 이것은 지금 십자가를 영접하는 사람에게는 영접과 동시에 영생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과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과거에 영접함과 동시에 영생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다시 살리다(ajnasthvsw)”는 미래형으로써, 십자가 사건의 경험으로 인해 미래에 다시 살릴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 십자가에서의 구원을 염두에 두신 것 같다. 죄인 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그의 대속과 부활을 시인하고,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약속을 지칭한다. 이것은 과거든 현제이든 미래에 한번 일어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을 지칭하는 것이다.
두 번째,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것이 현제 계속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의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oJ trwvgwn mou th;n savrka kai; pivnwn mou to; ai|ma ejn ejmoi; mevnei kajgw; ejn aujtw'/. ”(요 6:56)
내 살을 먹고(trwvgwn), 내 피를 마신다(pivnwn)는 주님의 말씀의 시제는 현재형이다. 이것은 과거에도 십자가를 경험하였고, 현재도 십자가를 경험하고 있고, 미래에도 역시 십자가를 경험하고 있는, 늘 십자가를 경험하고 있는 현제의 의미이다. 매일매일마다, 시간시간마다, 순간순간마다 십자가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우리 일상의 임재생활의 중요한 핵심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하여 과거에 일어난 죄 사함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즉, 그리스도의 임재가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에 대한 해결책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임재의 변화는 십자가 사건을 기초로 한다.
2. 임재방식의 또 다른 변화를 인식한 제자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마지막 시험을 치신다. 종합시험 문제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343)는 질문이다. 베드로는 확실하게 임재방식의 변화를 알게 되었고, “주는 그리스도(Su; ei\ oJ Cristo;")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oJ uiJo;" tou' qeou' tou' zw'nto").”라344)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자’로 앞에서 설명하였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히브리 개념에서의 ‘메시아’는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신 자이며, 헬라적 개념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 신적인 능력을 가지는 존재를 의미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히브리적 개념으로 ‘왕’을 의미345)할 수도 있고, 죄를 사하는 ‘제사장’346)을 의미할 수도 있었지만 쿰란 공동체의 개념으로 ‘하나님의 아들’은 메시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347) 그러나 쿰란 공동체의 개념으로 해석해도 무방하지만, 헬라적 개념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성경 본문에서 베드로가 ‘메시아’라고만 고백하여야 맞는데, ‘하나님의 아들’까지 언급한 것은 무언가 더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히브리어로 만들어진 마태복음이 헬라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헬라어로 번역이 되었고, 헬라 문화에 적합하게 히브리 언어들과 개념들이 헬라적 언어와 개념으로 상황화 된 마태복음의 특성과 헬라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개념을 생각할 때, 더욱 강력하게 가능성을 주고 있다.
단순히 히브리인의 ‘메시아’ 이심을 강조하기 위한 문구라기보다, 히브리적 개념과 헬라적 개념 모두를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는 히브리인의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헬라적 개념의 ‘하나님의 아들’ 즉, 신적인 능력을 가진 자를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348)
이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최고의 칭찬을 베드로에게 하였다.
이 말씀을 나눈 이후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임 당하실 것을 말씀하심으로 또 다른 임재방식의 변화를 예고하셨다.349)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이제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온 여자들이 예수님 앞에 경배하였다.350)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시하신 산에서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하였다.351)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에게 경배한다.352)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께 경배한다.
3. 예수님이 친히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하늘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이 내게 주셨다고 하시면서, ‘대 위임’을 하시고,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다.353)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하지만, 친히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이제 임재방식에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지금까지는 지상에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였다. 그런데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항상 우리와 함께 하는 임재로 변하였다. 방법은 성령이다. 이제는 세상의 끝 날까지 이러한 임재방식에 변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전권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사람들과 항상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 되셨다.
4. 보혜사를 보냄
예수님은 부활 승천 이후에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다.354) 보혜사(paravklhto")의 의미는 ‘대변자, 중재자, 돕는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영원토록 함께 있게 하겠다” 355)하셨다. 즉, 지금 보혜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신데, 다른 보혜사는 부활 승천 이후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을 성령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성령은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할 뿐만 아니라,356)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증언하실 것이다.357)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시면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358)보내겠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성령이 임함과 동시에 예수님의 권능을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신다.359) 예수님이 지상에서 그와 함께하는 임재 가운데 권능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 같이,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혜사인 함께 하는 성령을 통하여 그 권능을 주시는 것이다.
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요한복음은 주님과 우리의 연합을 ‘그리스도 안에서(ejn Cristw'/ !Ihsou')’ 360)라고 하였다. “그 날(성령께서 임하신 오순절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361)새로운 임재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임재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임재 가운데 사귐이 있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연합 때문이다.362) 포도나무 비유를 드시며 예수님은 농부인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로, 우리는 그 가지로서 열매를 맺기 원하신다.363)
그리고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은 계속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라364)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바울의 구속의 이해의 근간을 이루는 ‘그리스도 안에서’도 바로 이 임재를 두고 하는 말이다.365)
열매를 맺는 데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임재이다. 임재 가운데 사귐이 있고 순종이 있다. 임재 가운데 거하면 주님의 말씀의 기준들이 풍성히 임하고 우리의 의지를 다스리시고 우리의 감정과 습관들을 교정하시며 죄에 민감하게 하여 날마다 십자가를 의지하게 한다. 또한, 끊임없이 하나님 그분을 갈망하고 찾도록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온전하고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삶으로 인도된다.
6. '생명'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보다 ‘생명’이라는 용어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였다. 배재욱 교수는 “‘생명’ 개념이 공관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다”366)고 말하였다367). 배재욱 교수는 연결되었다고 생각하였지만, 사실 하나님 나라와 요한의 생명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요한복음 내용을 서신으로 받은 공동체에 ‘생명’이라는 단어로 신앙의 본질을 설명한 것이다. 생명은 신앙의 본질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이며 구원이다.
김문경 교수는 “생명은 예수님 그분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368)고 하였다. 요한복음에 생명이란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공관복음서보다 생명에 대한 강조가 분명하고 많이 등장한다.369) “생명은 하나님 자신과 관계된 생명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받아 소유하는 생명이370)다.”371) 성경은“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372)라고 하면서 생명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 자체이373)다. 예수님은 ‘생명의 물’이374)고 ‘생명의 샘’이375)다. 예수님의 말씀이 곧 생명이다.376) 요한은 생명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377)예수님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에서 누리는 생명을 그리스도인에게 선물하시는 분이시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나타나는 생명”이다.378)
바울도 같은 입장으로 생명을 사용하였다. 바울의 생명 사상은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인이시고 그 안에서 성도로 부름을 받게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가진 자는 생명의 주인임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세상 속에서 빛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379)
요한일서에서는 ‘생명’을 임재로 말하고 있다.380)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381),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7. ‘은혜’
제리 브릿지즈는 은혜를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손을 뻗치시는 것이다.”383)고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의 은혜와 함께 삶의 은혜까지 포함하고 있다.
은혜는 율법으로 죽은 우리를 구원하는 은혜의 복음이384)라 불리며, 바울이 자기가 받은 구원이385)나 소명이386) 하나님의 은혜였고, 바울은 모태에서부터 자신을 택정하고 부르신 소명이 은혜라387) 하였다. 자신의 소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모든 것과388)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한 것도 은혜이389)고, 자신의 의지조차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주님을 닮아가는 과정조차도 은혜라390)고 하였다. 은혜는 죄인을 회개케 하고, 거룩한 삶으로 유도하여, 결국 죄로 인해 이룰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에391)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392)
그러므로 은혜는 구원과 하나님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하시는 일이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바를 우리로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임재이다.”393)
8.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주님이 우리 속에서 사신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삶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삶이 아니다. 에베소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이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놀랍게 부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엡 3:17).
이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에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에 대한 의미이다. 주님이 내주하시는 삶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삶이라면,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를 위하여 그들이 이 삶을 살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삶은, 순간순간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가능하다. 십자가를 의지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믿음으로 설 때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삶 즉, 임재를 말한다. 임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을 주도해 가시는 삶을 말한다. 그분이 우리를 통해서 사시고 나타나시며,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삶을 말한다. 이것은 주님이 주도권을 가지시지만, 우리의 연습을 요구한다.
E. 하나님 나라 개념에서 복음으로 변화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십자가’와 ‘복음’이라는 단어는 알지만, 자신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처음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 다 습득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매일매일 그리고 순간순간 경험하고 살라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이 십자가 복음이 우리 삶 가운데 매일매일 그리고 순간순간 실제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 시대에 잃어버린 중요한 신앙의 실제이다.
1. 예수님에 대한 몇 가지 이론이 복음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다.
복음에 대한 정의가 우리 시대에 많이 오해되고 있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성과 과학이라는 합리적인 사고가 서구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쳤는데, 신학에도 영향을 지대하게 많이 끼쳤다. 그래서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인데, 이성과 과학의 합리적인 사고에 맞게 설명한 것이 바로 지금 흔히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틴 로이드존스는 교리가 인격을 대체한 것을 강하게 지적한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가 인격을 대체해버린 것이다.
복음을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이론적인 사실이 복음이 아니다.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된 하나님이 죄 사함을 위해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영접하고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으로 복음을 설명한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복음의 전부가 아니다. 복음의 일부분이다. 복음의 핵심이지만 그것 자체로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인격체 되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3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이 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리고 그분의 뜻과 의중에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주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그분 중심으로 변한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2. 주님을 알기 힘써야 한다.
사람은 인격체 되신 예수님을 만날 때 놀라운 삶의 변화가 일어난다. 예수님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듣는 것은 사람들에게 별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사실을 성령의 조명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삶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기 힘써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아는 만큼 그분을 전할 수 있다. 만약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그분에 대한 몇 가지 이론적인 사실만을 전한다면, 아무런 생명이 없는 말밖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삶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하는 이론일 뿐이다.
a. 복음은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을 통한 인격적인 만남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헬라적 의미의 ‘안다’는 뜻은 ‘지식적으로 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히브리적인 ‘안다’의 의미는 항상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자신이 직접 경험하여 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지식을 아는 것이 복음이 아니다. 인격적인 만남으로 통하여 경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14:8-11)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 적극적으로 알고 사랑하는 길이 열렸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자이시다.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이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하나님의 길로 사신 그 모든 삶,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 부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기신 그분이 가지고 계신 비전, 그 모두가 복음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삶 전부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모범을 배울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의 진정한 뜻인 “기쁜 소식”인 것이다. 더 이상 나의 죄 때문에 제사가 필요 없어졌다. 십자가에서 달리신 주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의지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길로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이 땅에 이룰 수 있는지 모든 모범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있다.
요한은 복음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1-3)
복음이 인격체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이 구절은, 그가 들었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았고, 주목하여 보았고, 또 손으로 만져본 것이었다. 요한이 전한 복음이 예수님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이었다면, 그는 단순히 그것을 들었다고 써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은 모두 똑같은 것으로서, 그가 들었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예수님 자신이었다.
십자가 사건은 복음의 핵심이며 가장 기초이다. 그래서 복음서의 기자들은 복음서를 저술할 때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예수님 그분의 모든 것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이론이 아니라, 바로 인격체 되시고 지금도 살아계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것이다.
b. 복음은 평생 동안 알아 가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평생 동안 복음을 알기 원했다. 또한 그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동참하고 본받기 원했다. 단순히 이론이라면 그는 이론적으로 알고 있었다. 로마서에는 그러한 복음의 모든 핵심 기초가 잘 정리되어 있다. 그것은 복음의 핵심이다. 복음은 그 핵심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자신의 평생 동안 알기 원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새번역. 빌 3:10-11)
바울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기 위해 자신의 최고의 초점으로 두었다. 복음은 한평생 우리가 추구하고 알아가야 할 신앙의 본질이다. 단순히 몇 가지 죄 사함을 시인하고 받아들이고 하는 몇 가지 이론을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 그분을 알고 자신의 인생의 유일한 모든 것 삼는 것이었다.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고 자신의 인생의 유일한 모든 것 삼는 것이 바로 기쁜소식인 복음이다.
바울은 자신이 인생을 통해 경험하고 알게 된 복음을 고린도전서를 통해 말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 1:30)
이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 전서를 쓸 때까지, 자신이 깨닫고 경험하였던 복음을 말한 것이다. 바울은 한평생 예수 그리스도(복음)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전부였다. 그런 그가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예수님을 경험을 통해 만난 복음을 고린도 교회에 전한 것이다.
복음은 한평생 알아가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한 평생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인생의 유일한 모든 것 삼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c. 복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주인공이고 신앙의 중심이다. 위에서 요한복음 6장 53절에서 56절까지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였듯이, 십자가 사건을 동의하고 시인하고 받아들이며, 인격적인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 십자가 사건은 구원 이후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임재에 있어서 우리의 순간순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준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십자가에서 죄를 사하신 그 사건을 믿음으로 의지하고 담대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실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를 통하여 신앙의 실제를 알아가기로 하자.
3. 전도자 빌립은 변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전하였다.
전도자 빌립 집사는 유대에서 박해를 당하자, 유대 반경을 벗어나서 사마리아 성에서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행 8:12)하였다. 여기서 유심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왜 하나님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했느냐이다.
하나님 나라가 바로 '신앙의 본질'임과 동시에 '임재'394)이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모세를 추종하고 있었다.395) 사마리아인에게 신앙의 본질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즉, 그분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하신 모든 일을 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로의 변화를 전한 것이다.
4. 로마의 바울도 변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전하였다.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에, 로마에 있던 바울도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행 28:23) 권하였다. 또,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거침없이 가르쳤다.“(행 28:31).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로 떼어내서 바울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임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로 변화된 것을 가르쳤다.396)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2) 하신, 유대나라(개개인 유대인이 아님을 강조)에 대한 예수의 예언은 이렇게 성취되었다. 그 열매 맺는 백성은 바로 “예수”의 이름을 믿는 백성이었다.397)
Ⅴ. ‘회개’는 하나님 나라의 조건
침례(세계) 요한의 등장은 유대 민족을 크게 흥분시켰다. 그의 복장과 전파한 말의 내용이 엘리야 같았기 때문이다(왕하 1:8).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엘리야의 역할을 완수할 것으로 이해하셨다(막 9:11). 그리고 그의 강력한 메시지는 구약의 선지자와 유사한 회개와 심판에 대한 것이었다.
“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침례(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7-10)
마가와 누가 역시 침례 요한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398) 전파하였다고 하였다. 회개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관문이며 침례(세례)는 그의 증표의 의식으로 행해졌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첫 번째 조건은 ‘회개’이다. 예수님이 전하신 첫 번째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회개’였다.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선지자 침례(세례) 요한의 첫 번째 선포는 ‘회개’이었다.
회개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앙의 회복의 첫 번째 단계는 ‘회개’이다.
A. 회개에 대한 잘못된 이해
1.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기독교를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회개와 별개의 것이다.399) 많은 죄를 지었으므로 헌금을 바침을 통해 또는 교회 봉사를 통해 죄를 사함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예배 참석하고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임을 통해 죄를 사함 받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외형적인 것들은 신앙의 표현이지, 본질이 아니다.
2. 얼마든지 회개하지 않고서도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있다
지식적으로 복음에 대한 모든 것을 동의하고 그것을 자신이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침례(세례)까지 받았다.400) 그러나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다. 이것은 회개와 상관없이 그렇게 고백할 수 있다. 그리고 전도하는 사람의 잘못된 이해 때문에, 전도 문구에 따라 기도하고, 회개를 전도하는 사람을 따라 기도함을 통해 자신이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전달받게 된다. 이것이 회개로 이어질 수 있지만, 회개 기도를 따라 하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회개가 아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단순히 교리를 동의하고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이 아니다. 사탄도 우리가 진리로 믿는 교리를 진리로 동의하고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401)
3. 교육, 법, 가혹한 억제를 통해서 타락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그것은 죄를 못 짓게 강제로 막는 것이지 회개가 아니다.402)
4. 회개는 한순간이 아니고, 계속 일어나는 과정이다
한 번 복음에 대해서 듣고 깨달았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죄책감도 느끼고, 제 나름대로 피상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삶의 개혁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회개한 것이 아니다.403)
회개는 과정이다. 회개는 어느 한 순간이 아니고 과정이다. 내가 어느 한 순간에 회개를 경험하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함 받고 나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완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버리는 그런 일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회개는 우리가 그 즉시로 결단하고 내리는 선택과 어떤 행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속해서 일어나는 과정이며, 근본적으로 인간 마음의 변화와 개혁이다.
5. 후회와 회개는 다르다
후회한 것을 회개한 것이라 착각할 수 있다.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울부짖으면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였다. 많이 볼 수 있는 광경은 교회의 어떤 집회 때일 것 같다. 설교 말씀이 끝나고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받자 자신의 잘못이 생각이 난다. 심각성을 인식하고 울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회개라 생각한다. 또 많은 목사들이 성도들의 이런 모습을 보며 회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회개로 이어질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자신의 죄를 후회하여 울고 있는 것이다. 회개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회개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이 오랫동안 속아 오고 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닐 수 있다. 많은 경우 후회하며 울며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경우이다. 서양 사람들보다 동양 사람이 이것을 더 잘한다. 강대상에서 인도하는 대로, 그 당시의 분위에 맞추어서 하라는 대로 모두 반응하지만, 그때 뿐일 때가 많다.
후회하게 되면 조금의 변화가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 찰스 피니는 이것을 거짓 회개라 하였다.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404)
6. 습관적인 회개의 문제점
회개의 한 가지 큰 오류가 있다. 그것은 계속해서 같은 죄를 지으면서 회개하기만 하면 항상 용서받는다는 생각이다. 이런 사람들은 죄를 반복하면서도 습관적으로 회개를 하고, 별로 가책을 받지 않는다.
흔히 그들은 자신들이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반복해서 짓게 된다고 말하면서 계속 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은 주님의 구원의 능력과 하나님의 죄 사하심의 능력과 성령의 성결케 하시는 능력을 교리로 굳게 믿고 있다. 그가 내세우고 있는 이론에서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다르다.
죄를 짓고 회개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자는 아직 회개하지 않은 것이다. 후회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후회한 것을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해 죄 사함으로 간주한 것이다. 회개는 자신의 처지를 보고 몸서리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을 가꾸어 가시는 것이다. 회개에 대한 바른 교리는 중요하지만, 회개 교리에 대한 확신 자체가, 우리를 회개케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올바른 이론을 자신이 동의하고 있는 자체로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다. 신앙은 실제이다. 이론이 아니다.
7. 행동의 변화보다 깊은 마음 속의 죄를 제거해야 회개이다
우리 시대 가장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회개가 있다. 이것은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것이다. 잘못된 회개에 대한 인식 때문에 정말 회개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에 대한 글을 쓰고 설교를 한다. 또한 자신이 진정한 회개를 하였다고 착각한다.
회개는 행동으로 더 이상 범죄를 짓지 않는다고 회개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다. 자신이 사회와 이웃에 해를 끼칠만한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죄 없다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죄 지은 것을 후회하고 다시는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행동으로 죄를 다시 범하지 않는 것을 회개라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 가운데 동일한 죄를 짓지 않는 행동 자체가 회개라면서, 수많은 회개에 대한 설교와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성경에 그것이 회개라 한 적이 없는데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준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죄의 기준과 차원이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간음한 여인이 끌려왔을 때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리 치라면서, 인간의 마음 속의 죄에 대한 반성을 일으키셨다. 행위보다 인간의 내면의 동기와 죄성을 중요하게 여기셨다.405) 또한 간음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마음 속에 음란한 마음을 가진 것 자체가 간음한 것이라 말씀하셨다.406)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지만, 마음 속의 생각 자체가 바로 죄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마음 속의 죄에 대한 기준을 행동으로 국한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 죄를 짓고 싶어 하는 마음 속의 충동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 속은 죄악으로 가득하지만, 행동으로 그것을 옮기지 않은 것을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고 방식 자체가 틀린 것이다.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잘못된 죄악을 다시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것을 가지고 회개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은 마음 속에 수많은 죄악 된 모습을 가지고서 행동적으로는 선하게 살 수 있다. 근본적으로 자신의 마음 속의 근원지를 뿌리 뽑지 않은 이상, 자신과 이웃에게 자신의 행동으로 변화된 것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자신의 죄의 근원지인 마음 속의 죄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하다. 우리 힘으로는 절대 우리 마음 속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죄의 근원지를 불태울 수 없다. 회개는 죄의 근원인 마음을 불태우는 것이다.
B. 회개에 대한 잘못된 신학적 적용
본인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는 정확하게 맞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잘못되어서 잘못된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대의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을 지적하려 한다.
1. 하나님의 ‘공의와 의’를 외치기보다, 사랑의 하나님을 외치기 쉬운 시대
1830년대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성경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있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것보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았다는 식의 태도이다. 오늘날 더욱 심각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인 교리가, 하나님 그분 자신을 인격으로 대하고 실제적인 신앙의 모습을 대체한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의 하나님과 공의의 하나님의 대칭되는 하나님의 모습이 가려진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사랑이시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진노를 삭제해버렸다. ‘공의와 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것을 삭제해버렸다. 특히 설교는 더 심각하다. 하나님의 사랑과 복과 성공과 그리고 치유에 초점이 맞추어진 설교는, 하나님의 공의와 의를 드러내지 않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성도들이 좋아하고 관심 있어 하는 설교에 집중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설교가 틀린 것이 아니고, 우리 가운데 적절하게 필요한 것이지만,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균형을 무너뜨리고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를 외치면 자유주의 신학이거나 사회복음을 외치는 자라고 오해받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2. 회개를 외치기보다 회개에 대해서 외치는 시대
나는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성공과 복을 외치는 설교를 비판하는 글을 읽으면서, 그 글들 속에도 글을 쓴 사람에 대한 티를 보곤 한다. 그렇게 비판하면서 교리와 신앙노선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른 교리는 중요하다. 잘못된 신앙에서 돌이키는 것은 바른 교리와 신앙노선을 강조한다고 잘못된 신앙에서 돌아서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신앙노선만이 올바른 길이라는 결론이 많다. 모든 신앙을 교리적으로 설명한다.
한국 땅에 칼빈주의 신학 개념 하나를 가지고 모든 신앙을 설명하고, 책들을 펴내는 것에 대하여, 나는 틀렸다기보다는 실제보다 이론이 앞서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칼빈을 숭배하는 것 같은 이미지까지 준다. 또한 절대 섞일 수 없는 온건한 합리주의 신학인 세대주의를 칼빈주의로 포장하였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신앙노선이 하나의 방향이며 길이지 우주적인 진리는 아니다. ‘교리와 신앙이 나아가야할 이상’이 ‘실제’를 대체한 모습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정말 진리이고 신앙의 정통이고 바른길이라면, 예수님이 진짜 신앙에서 나타나는 것을 3가지 말씀하셨는데, 그중에 두 번째인 “하나님의 형용을 보는 것”,407) 즉,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신앙의 노선과 신앙 자체를 반박하는 것이 아니다. 이론이 실제를 대체해버린 상태에서 아무리 맞는 이론을 가지고 있어도, 바리새인과 같이 예수님께 버림 받게 된다.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바른 신앙의 실제의 문제이다.
우리 시대에 회개를 외치지만, 회개에 대한 성경적인 이론을 외친다. 회개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기 때문이라 생각하였다. 천둥과 번개를 활자에 담을 수 없듯이, 회개를 활자에 담는 것은 지극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즉, 회개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다.
3. 신학적 요약이 준 피해 - 십자가는 죄를 사해 주신 것인가? 죄에 대한 책임을 사해 주심으로 결론적으로 죄를 사해 주신 것인가
하나님은 자비와 인애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죄를 용납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용서하실 때는 의로운 방식으로 용서 하시는데, 우리의 죄의 책임에 대한 방법을 마련하였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의 중대한 핵심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가 당할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예수 그리스도께 담당 시키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벌하셨다.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을 물으셨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을 믿고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자에게는, 자신이 받을 죄에 대한 책임이 그리스도에게 옮겨질 것이고, 하나님은 그 죄책을 벗은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자비롭고 은혜롭게 대하신다. 그래서 죄책에서 벗어난 우리는 죄를 사함 받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죄 자체를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하지 않았다. 죄에 대한 책임을 전가함으로 결론적으로 죄를 사하셨다. 이것은 우리시대에 중요하다. 사소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주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고 믿고 있다.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신앙생활에 대한 성경공부 책의 대다수가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다. 교리적으로 죄를 사하신 것이 아니라, 죄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킴으로 죄를 사하셨다는 정확한 교리를 설명하는 목사님들이 극히 일부밖에 없는 것 같다.
죄 사함에 대한 성경에서의 정확한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문제뿐만이 아니라,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정확한 진리가 우리의 삶에 실제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전가했다는 교리로 그쳐버리면, 그 뒤에 심각한 신앙의 왜곡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이 시대에 가장 심각한 것 중에 하나는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타락하였는지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막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러한 죄에 대한 교리 자체가 미묘하게 변질함으로 자신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죄를 전가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교리는 우리를 더 이상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경향으로 인도하고 있다. 성경은 죄를 전가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책임을 전가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죄를 예수님께 전가하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심각한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서, 우리 신앙을 병들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보지 못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자신에게 선한 것이 없되 하나도 없는 것을 볼 수 없다.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사하여 주었다는 요약된 교리는, 미묘하지만 우리 삶 가운데 죄책감이 밀려오는 것에서 자유를 주고 해방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즉, 원래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에 대하여 볼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처절하게 심각한 상황임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 미묘한 차이가 지속적으로 매일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교리적으로 자신이 그렇게 단정해버렸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고 있는 십자가의 삶을 살지 못하게 방해한다.
죄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였다는 것에는, 자신이 지은 죄책감도 수반된다. 죽을 것만 같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된 것을 믿지만, 죄책감은 그대로 있어서 자신이 죽어지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는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인간의 회개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요약된 교리 자체가 미묘한 차이지만, 우리를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더 이상 죄의 심각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하도록 인도하고 있는 요인 중에 한 가지이다.
3. 칭의와 성화 두 가지 개념이 준 피해
회개의 결과, 우리는 죄책감과 속박으로부터 해방된다. 서양 사람들의 설명 방식에 따라 칭의를 한번 살펴보자. 칭의는 법적용어로서 칼빈의 종교개혁의 핵심진리 중의 하나이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의 죄책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선하고 의롭다고 칭해 주셨을지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는 정죄 받지 않을 견고한 마음의 안식을 준다. 칭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될 수 있는 출발점을 제공해 준다.408) 의롭게 된 사람은 죄책감, 노예상태, 소외의 문제를 모두 제거하거나 해결한, 완전히 변화된 사람은 아니다. 칭의 이후에 추구해야할 목표는 성화이다. 칭의가 멋진 출발이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안주해서는 안 된다. 구원에 대한 단순한 진리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만남과 함께 그분의 기준 앞에 서야한다.
나는 서양 사람들의 논리로는 칭의와 성화라는 두 가지 명제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분리시켜서 말하고 있지 않다. 칭의와 성화는 성경에서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 사고 방식에 따라 발전된 개념에 맞추어서 설명하다 보니 두 가지를 엄격히 구분하였지만, 성서는 그렇게 명백하게 구분한 적이 없다.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다.
오늘날 목회 현장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각각 나누어서 강조하지만, 회개의 결과로 나타나는 성화는 이상하게 사람들의 마음에서 뒷전으로 항상 취급되어져 버린다. 신학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좋지만, 우리 시대의 목회 현장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큰 피해를 주는 것이라 하겠다. 나는 칭의와 성화와 관련된 통합된 설명 방법이 개발되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강조해도 성도들은 두 가지를 따로 떼어서 생각하려고 한다.
4. ‘영접하라’와 ‘회개하라’의 용어 사용
토저(A. W. Tozer)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 사용을 가지고 회개와 결부시켜 중요한 일침을 놓았다.
토저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을 설명하기 위하여 ‘영접한다(aceept)’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치러야 할 모든 대가를 뒤로한 채 지금 보이는 열매를 위하여, 십자가 사건과 주님의 죄의 용서만을 외치고, 우리가 회개하고 대가를 치러야 할 모든 것을 생략해버리는 것을 통탄하였다.
오늘날에는 믿음의 초기 행위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다. 어느 특정한 순간에 그리스도를 향한 ‘결단’이 이루어지고, 그런 뒤에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 회심자를 만들어내려는 열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단 한 번에 걸친 믿음의 행위를 통하여 전반적인 책임을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도록 내버려둔다. 이것은 다소 모호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공로를 돌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게 한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그러한 자세는 그리스도를 진리의 성경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괴상하고도 쓸모없는 체계를 만든 분으로 전락시킨다.409)
이렇게 외친 토저가 죽은 지 반세기 이상 지나버린 지금, 우리시대는 여전히 허울 좋은 영접 개념을 지속적으로 외치고 있다. 이렇게 외침으로 교회가 성장한 것도 아니다. 또한 이러한 여파로 인하여 목회자로부터 성도들에게까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들과, 여전히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로 가득하게 할 뿐이다.
5. 회개와 자백에 대한 오해(회개는 한번만 하는 것이고, 자백은 계속 해야 된다는 잘못된 진리)
a. 회심과 회개
국어에는 회심(會心)과 회개(悔改) 두 단어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회심은 ‘마음을 돌이켜 먹는다’는 의미로써 기독교에서는 ‘과거의 생활을 뉘우쳐 고치고 신앙에 눈을 뜬다.’410)는 뜻이다. 회개는 ‘죄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는다’는 의미로써 기독교에서는 ‘과거의 생활을 뉘우쳐 고치고 신앙에 눈을 뜬다.’411)는 뜻으로 설명하지만, 두 단어는 같은 의미이다.
이 단어를 가지고 기독교에서 회심은 처음 신앙을 시작할 때 과거의 생활에서 뉘우치는 것이고, 회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회심’과 ‘회개’ 이 두 단어는 불신자이든 기존 신자이든 모두가 해당된다. 언어 사용에 있어서 회심과 회개는 모두 동일한 언어이고, 나누어져서 따로 사용하지 않는다. 한국말로는 다른 표현이지만, 성경은 분리된 단어가 아니고 같은 의미이다.
b. 회개와 자백
신약성경이든 구약성경이든 성경의 대상이 대부분 믿는 자들이었다. 특별히 신약성경은 서신들이 성경으로 정립되었는데, 편지의 독자가 모두 기존의 교회 공동체들이었다. 즉,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대상이었던 것을 보았을 때, 회개라는 단어의 사용도 모두 이미 믿고 있는 성도와 믿지 않았던 사람들 모두 해당되는 말씀이다.
일부 회개와 자백의 의미를 예를 들면서 잘못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회개는 불신자가 혹은 완전히 회개를 하지 않은 자가 해야 할 것이고, 자백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 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회개는 일생에 있어서 단 한번 있는 것이라 가르친다.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본다. 그래서 사람의 중심은 하나님만 아시겠지만 어쨌든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목숨을 바친 것이 되기 때문에 회개는 단 한번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양쪽에 죄수 두 명이 형틀에 매여 있었다. 왼쪽 강도는 예수님을 저주 했고 오른쪽 강도는 주여 주님 나라가 가실 때 저를 기억해 달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오른쪽 강도는 회개를 한 것이고 자백할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단 한번의 회개로 예수님과 함께 간 것이라 설명한다.
그리고 자백은 말 그대로 죄를 자백하는 것으로,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처음 구원의 교리를 받아 들이 때 한번만 회개한다는 것은 성경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진리가 아니고,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회개에 대한 표현법에 착안한 자기의 논리를 가지고, 성경의 구절을 끌어들여 설명한 것이다. 성경은 회개를 불신자 혹은 완전히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향해 한번만 하는 것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회개의 대상자를 불신자와 성도 모두 동일하게 사용한다.
C. 회개는 신앙과 사역의 출발점이다
자기 중심의 생활 양식에서 돌이켜 하나님 중심으로의 생활 양식으로, 삶의 전환이 회개이다. 자기 중심의 사고 체계에서 하나님 중심의 사고 체계로의 삶의 전환이 회개이다. 자기 중심의 목적과 목표에서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가 삶의 목적과 목표로 전환하는 것이 회개이다.
책을 통해 알게 된 신앙의 위인들과 2000년 기독교 역사가운데 부흥 때마다 일어났던 공통점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몇 개월에서 10년 이상, 자신이 진정으로 회개치 못하는 것 때문에 지옥을 경험하였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정상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첫 번째 단계이다. 자신의 죄에 대한 고뇌 때문에 죽어지는 경험은 처음 회심할 때 잠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명령에서 침례(세례)를 주라 하셨다.412) 침례는 예수님을 따르는데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회개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우리는 회심자와 제자를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구분하지 않았다.
나는 자신이 회개치 않고 아직도 죄악 가운데 있는 것 때문에 몸서리치는 반응을 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참 모습이다. 자신을 보지 않고는 절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없다. 위의 내용들이 자신에게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도 죄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수많은 연단과 고난 속에 내버려 두어서 정신 차릴 때까지 기다리실 것이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구원에 대한 소망만 가진 상태로 더 이상 신앙의 진보가 일어나지 않는 신앙의 어린아이 모습으로 한평생 살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치 않고 주님을 위해 수많은 사역을 할 수 있고, 놀라운 성과도 만들 수 있고, 교회를 성장시키고, 유명한 목회자로 이름을 날릴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는 아무런 상관없고, 하나님이 명하지도 않은, 자기가 하나님께 해 드리고 싶은 사역을 할 뿐이다.
회개가 신앙과 사역의 출발점이다. 무조건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헌신을 통해 무언가 열심히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신앙도 아니고 사역도 아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길을 알고 그 길로 가야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길을 알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무언가 주님을 위해 주님이 기뻐하실만한 것을 찾아서 무작정 시작하고 본다. 우리 시대 가장 큰 죄가 바로 하나님의 길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주님을 위해 성경에서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것들을 찾아내어서 자기 길을 만들어서 시작하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고개를 돌리시게 하는 원인인줄 모른다.
복음주의자들은 흔히 회심과 사역에로의 부르심을 명확히 구분한다. 그러나 공관복음에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한 사역에로 부르심은 원래 회심을 향한 부르심, 또는 경험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413)
D. 구약에서 회개의 문자적 의미
구약에서 ‘회개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나함(!j'n:)이나 슈브(bWv)가 많이 사용되었다. 히브리어 슈브(bWv)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로 그 기본적인 의미는 원래 있었던 곳으로 움직이는 것,, 즉 ‘돌아오다’, ‘되돌아오다’이며 이것이 발전하여 신학적 성서 용어 해설로는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것’, 즉 회개를 의미한다. 특별히 니함은 주로 니팔 형태로 사용되면서 감정의 변화를 의미한다.414)
예언서에서 회개의 목적은 원래 상태를 다시 회복하는 것, 즉 하나님과의 원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돌아감은 단순히 옛날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원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415)
슈브가 의미하는 회개의 신학적인 개념에 있어서 기본적인 전제는 방향의 전환이다. 이러한 방향 전환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회개의 과정은 예레미야 3장 22절에서 4장 2절에 명확히 묘사되는데 그것은 회개의 참된 예, 즉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416),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417), ‘제(저희)가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말로 자백하는 것418), 부끄러움을 인정하는 것419), 새로운 행동을 하기로 맹세하고 지키는 것420)이다.
구약성경은 슈브를 통해 기본적으로 ‘돌아오다’ 를 의미하며 돌아오기 전에 했던 악행, 폭력, 우상숭배 및 죄 등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서고 돌아가는 것이다.421)
이처럼 구약에서의 회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전부인 삶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전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삶으로의 전환이 회개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이 내 인생의 유일한 전부인 그런 삶으로의 전환을 구약에서는 회개라 하였다.
E. 신약에서 회개의 문자적 의미
회개라는 단어는 에피스트레포(ἐπιστρέφω)로 쓰이면서, 메타멜레이아(μεταμελεια)와 메타노이아(μετανοια)라는 단어가 신약에 많이 쓰인다.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외친 단어는 메타노이아이다(Metanoei'te). 이 단어는 ‘생각이나 태도의 변화’ 혹은 ‘다른 관점을 취하다.’ 를 뜻한다. 이러한 변화는 느낌이나 감정, 혹은 의지나 생각에 영향을 끼치며 단순히 이지적인 사유의 결과에 따른 생각의 변화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422) 하지만 코이네 헬라어에서 이 말은 주로 단순히 ‘생각의 변화’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423)
신약에 사용된 회개의 문자적 의미보다, 구약의 회개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하여 헬라어에서 사용되고 있는 회개의 단어를 차용하여 사용한 것이 신약의 회개라는 단어이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었다.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실제가 되도록 설명하셨는데, 회개는 헬라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넘어서서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회개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들에 대해 헌신을 요구한다.424) 따라서 회개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선포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425) 즉 예수님이 선포한 회개는, 소극적인 ‘돌아섬’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하고 있는 ‘구원’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무엇보다 누가에게 있어서 회개는 죄의 용서426) 혹은 침례(세례) 및 구원(혹은 성령)427)을 받아들이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누가에 따르면 회개는 용서의 전제이자 구원을 받아들이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바울 서신에서는 유대 전통을 따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내하심이 인간을 metanv oia(metanoevw)에 이르게 하지만428), 반대로 ‘회개하지 않는 마음’(ajmetanovhto" kardiav)은429)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고 언급하였다. 고린도후서 7장 9절 이하와 12장 21절에서는 metanv oia (metanoevw)가 ‘마음의 변화’라는 다소 약화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회개를 통해 요구되는 삶은 주로 ‘믿음’이라는 개념에 복속되어 있기 때문에, ‘회개’가 명시적으로 부각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바울이 회개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외의 다른 서신들에서 metavnoia는 올바른 가르침과 행실로 돌아섬430), 죽은 행실로부터 돌아섬431), 신성모독으로부터 돌아섬432) 등의 의미로 사용되며, 특히 베드로후서에서는 회개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경건한 삶의 실현과 연결되어 있다.433)
실제로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용례들에 기초하여 생각할 때 이 용어는 어원적이거나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전인이 무엇인가로부터 돌아서서 새로운 삶이나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신약성경은 이 말을 단순히 ‘회개’(repent)라는 뜻으로만 사용하지 않고 그 의미를 심화시켜 하나님을 향한 영적이고 윤리적인 태도의 온전한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약성경의 회개는 순수하게 외적인 돌아섬이나 단순한 내적인 생각의 변화가 아니라 양자 모두를 포괄하는 ‘진정으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회개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사용은, 모두 인격적인 하나님 그분으로의 삶의 전환을 이야기하고 있다. 구약과 하나님 나라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만이 인생의 유일한 전부인 삶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그리고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으로 전환하는 것을 회개라 하였다. 신약의 복음의 개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고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유일한 목표이며 목적이 되는 삶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하였다. 그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그분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으로 전환하는 것이 회개이다.
F. 회개의 과정
1. 자기 처지를 인식하는 것
회개에서 자기 처지를 인식하는 것만큼 중요한 출발점은 없는 것 같다.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출발점이기도 한 이것을, 지금 시대에는 교리가 대체해 버리고 말았다. 신앙의 실제가 서야 할 자리에 이론이 실제인 양 자리매김하고 있다.434)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자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안다고 착각하고 산다. 하나님을 경험함을 통해 직접 체험하고 영광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회개와 전적인 타락에 관한 온갖 이론으로 가득한 학설들을 많이 아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이 대단히 높다고 생각한다. 바른 교리가 중요하지만, 교리가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과연 바리새인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이단으로 규정하신 적이 없을 정도로 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바리새인이 하는 말은 모두 순종하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시며, 그들의 신학이 문제가 없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하셨다(마 23:3). 바른 교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알게 하는 안내서이다. 중요한 것은 실제이다. 문제는 실제가 무엇인지 감도 못 잡고 있다. 신앙은 실제이다. 이론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이론과 실제를 강조하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론을 실제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자신은 이해하였다고 말하고 자신이 경험한 극적인 일부분을 부풀려서 이야기 한다. 신앙의 실제에서는 그것과 아무 상관없이 살며,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는데도 말이다. 신앙의 실제에 있어서 자기 처지를 인식하면 절대 바리새인과 같은 태도를 갖지 않는다.
성경이든, 예수님의 부활 이후 2000년 역사 동안 동방정교회, 로마가톨릭, 개신교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동일한 방식으로 신앙을 회복시키신다. 마틴 로이드존스는 부흥이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오는데, 첫 번째가 자기 처지를 인식하는 것이라 하며, 교회사에 일어난 어떤 위대한 영적 운동에 대한 기록이든지 다 읽어보라고 그의 책 ‘부흥’을 통해 촉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책을 읽어보았다.435)
첫 번째 과정은 항상 자기 처지를 인식하는 것이었다. 2000년 동안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그래서 다 읽어보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436)
하나님은 회개로 인도하실 때 항상 자기 자신의 처지가 어떠한지 여실히 보게 하신다. 많은 사람이 교회가 현실 가운데 처해 있는 무기력함에 분통하며, 그것이 회개의 처음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생각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자기 자신이 천리만리 하나님 앞에 떨어져 있는 상태인 것을 보는 것이다. 자신이 너무나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어서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못할 것만 같은 상황에 부닥친 것을 인식하고 애통해한다. 사실상 자신의 처지를 보게 되면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자기 코가 석 자인데 다른 사람이 보이지도 않고, 교회의 상황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지옥에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실 앞에 애통해한다.
자신의 처지를 보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기준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 앞에 자신을 올려놓고 자신의 처지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자신의 관점이 바뀌면서, 하나님의 법에 나 자신이 바른지, 지금 내가 하나님을 떠났는지,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 앞에 직접 서서 하나님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을 보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이끄신다. 절대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기준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기준을 지식적으로는 동의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기준 앞에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는 것은 성령의 임재가 없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2. 회개는 선하신 하나님을 선명하게 인식하고, 자신을 볼 때마다 지옥을 경험하는 것이다
고든 스미스(Gorden T. Smith)는 회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하였다.437)
회개는 어떤 진리나 원리나 영적인 법칙과의 만남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아니라, 다만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 진다. ...... 예수님과의 만남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회개를 제대로 성찰할 수 없다.438)
우리시대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인격적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만남과 교제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많이 알고 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리적으로나 이론적인 지식을 알고 있는 것으로 자신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종교적인 예배나 봉사와 사역을 하고 있고, 경건의 시간과 전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한번도 외적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행위 자체가 하나님과의 교제라 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담는 그릇일 뿐, 하나님과의 교제 자체는 아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 그릇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릇은 그릇일 뿐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직접적이고 사실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인격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이 가지고 계신 기준을 보게 되면, 일시적으로 공황상태와 유사한 현상이 일어난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고,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오직 자신이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것만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공황상태와 다른 차원이다. 공황상태도 똑같은 증상을 보이지만, 그것은 병으로 그런 것이다.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공황상태는 어느 순간 갑자기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발생하는 법칙도 없다. 그러나 회개는 다르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자기 처지를 인식할 때마다, 그리고 하나님 기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을 깨달을 때마다, 지옥에 떨어지는 자신을 보게 된다. 공황상태와 다르게 선하신 하나님을 선명하게 인식하고, 자신의 모습을 볼 때마다 지옥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멀리 떨어져 있는지 정도에 따라 강도는 다르게 느껴진다.
또한, 이러한 부흥 때마다 일어나는 회개 현상을 ‘군중히스테리’로 설명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카이슨(Carson)박사는 반대되는 증거들을 제시하였다.439)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보고, 하나님의 성품과 선하심을 보았다. 그리고 첫 번째 한 말이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440) 이었다.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죄인인지 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말을 하였다는 설명을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보게 된다. 이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그 메시지를 듣고, 제자를 예수님이 선택하시는 장면이 성경에 나온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베드로는 자신이 천리만리 하나님을 떠나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할지 아무것도 판단이 안 된다. 마음의 혼돈도 혼란도 없다. 오직 자신이 지옥에 가까이 있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예수님이 제자로 자신을 사용하겠다고 하여도, 자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베드로는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역사적으로 항상 이러한 회개의 과정을 통해 회복되어져 왔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회개의 메시지에 반응하였고, 자기 처지를 인식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반응과 같이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죄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고뇌하는 자를, 자신의 제자로 받아 들이셨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자신의 제자를 선택하신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자기 처지를 인식한 사람이었다. 신앙이 회복되는 가장 기초가 되는 처음 출발은 자기 처지를 인식하는 것 즉,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보는 것이다.
3. 회개는 마음 아픈 과정이 있다
회개를 결단이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회개는 결단 이상의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 회개는 변화된 삶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하는데, 회개를 통해 변화되는 삶에도 회개의 과정이 있다. 이 회개의 과정이 없다면 십자가가 지금 우리의 삶에 의미가 하나도 없다. 단지 교리 상으로 동의하고 부르짖는 십자가 “지금 우리에게 생명이요 능력이라” 말만 멋지게 하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람이 후회한 것을 회개한 것으로 착각한다.441)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후회하며 마음 아파하고 울며 기도하는 것은 후회이다. 물론 회개도 똑같은 과정을 가지지만, 후회와 회개는 근본적으로 다른 상태에 있다. 중요한 것은 모두 하나님이 다루실 때, 삶의 모습과 환경은 다르지만, 회개는 후회보다 더 깊은 의미가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바울은 후회와 회개의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나는 말을 하였다.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잠시나마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을 알고서 후회하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픔을 당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하였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응징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잘못이 없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새번역, 고후 7:8-11)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단호한 편지를 세 번째 보낸 것이 고린도후서이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쓴 첫 번째와 지금 전해지지 않는 두 번째 쓴 편지를, 모두 함께 읽고는 심각한 자신들의 처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에 아픔을 당하였다. 가슴이 아프고 애통하고 자신들의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 과정을 통하여 신앙의 수많은 변화를 경험하였다. 사도 바울은 마음 아파하는 과정을 통해 회개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이 중요하다. “마음 아파하는 과정” 이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회개에 이르렀다 말하였다. 즉, 죄의 심각성을 알고 그 죄 때문에 죽어지는 경험을 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인도하였다.
8절, 9절, 10절, 11절에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마음아픔”이라는 단어이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상심, 근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모두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는 가슴에 몰려오는 죄의 심각성 앞에 괴로워하고 애통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죄의 심각성을 갖게 되므로 고린도교인들은 열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게 되었고, 의분이 생겼고,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하나님께 헌신하려는 마음이 생겼고, 악을 징벌할 줄 알게 되었다.442)
이것이 회개에 대한 완벽한 정의라고 마틴 로이드존스는 말하고 있다. 회개는 단순히 순리대로 되지 않은 것 혹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것의 섬뜩함을 인식한다. 잘못된 것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다.443) 고린도 교회는 그 문제를 스스로 질책하였으며, 그리고 자신들을 미워하였고 자신들에 대하여 복수를 하였다. 이것이 회개의 진수이다.444)
출애굽기시대 하나님 앞에 우상을 부어 만든 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또한 이와 같았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그것을 섬겼고, 자신들이 만든 여호와라 이름 하는 우상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들은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인지, 뼛속 깊이 경험한다. 모세로부터 전해 듣는 참담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통곡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 기쁨을 줄 만한 것을 제거한다. 장식품을 모두 제거한다.445) 그리고 하나님 그분만이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사랑의 마음이 나누어져서는 안 되는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446) 백성들은 자신들이 보아도 이것이 이렇게 나쁘거든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어떠한지 인식하고 괴로워하였다. 그들이 죄를 범한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심각한 죄인지 인식하였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을 미워했으며 혐오했으며, 철저하게 자신들을 정죄하였다. 이것이 회개이다.
지금 우리 시대는 죄를 지어도 그리고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여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죄의 민감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교리적으로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사하신 교리를 재빨리 잡아버리기 때문이다. 마음아픔의 과정이 생략되어 버렸다. 이 마음아픔의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를 경험하지 못하고, 십자가의 삶도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전환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였듯이, 눈을 들어 인격적인 하나님을 처다 보지 못하는 과정이 바로 마음아픔의 과정이다. 예수님은 세리의 이러한 기도에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하였다.447)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랬던 것처럼 회개에는 감정이 중요하다.448) 또한 요한 웨슬도 감정에 우선순위를 두었다.449) 감정이 배제된 회개는 회개가 아니다. 가슴 아픈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4. 회개는 임재와 연관이 있고, 죄에 대하여 민감해진다
하나님이 회개의 마음을 주시고 인도하시면, 전체적으로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만드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연관이 있다. 고든 스미스는 회개는 임재이며,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경험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맛보는 경험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또 다른 이 실체는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재이다……. 이것은 절대로 기적적인 경험이 아니다. 그와는 전혀 반대다.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요소들이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경이로운 은혜를 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다.450)
주님이 임재하시고 주도하시면, 지금까지 별 의미 없이 지나쳤던 일들이 마음속에 지속해서 하나님의 의중을 묻게 된다. 성경은 다른 표현으로 성령이 하신 것이라 하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꾸만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졌는지 점검한다.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견딜 수 없게 된다. 성경에 나와 있는 죄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시작한다. 마음 속에 미움을 가졌던 사람과 마음 속에 서운한 마음을 가졌던 모든 사건 가운데,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 자신이 견딜 수 없어서 마태복음 5장 21절에서 26절처럼, 마음에 걸리는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만나지 못하는 처지에 있으면 눈물로 편지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 얼른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은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어서, 그가 너를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 (새번역, 마 5:21-26)
용기만으로 자신이 가졌던 미움의 대상에게 찾아가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 고백하고 자신이 미워했던 사실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미워하였던 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 옳고, 자신이 틀렸다고 인식하게 될까 봐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순종을 두려워한다. 말씀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지만, 순종의 마음만으로 자신이 모든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지 못한다. 오직 성령이 일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특별히 부흥시기에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메시지에 회개로 나아갔던 수많은 군중들이 모두 동일한 모습이었다. 하나님이 회개로 이끄시면,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있고 진노 아래 놓여 있는지 인식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다. 회개는 우리 삶 가운데 죄에 대하여 민감함을 준다. 임재가 깊을수록 회개는 진하게 일어난다. 우리의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다.
5. 회개는 압도적인 권세에 밀려 영혼의 고뇌에 빠진다
부흥을 경험한 청교도들의 회개를 Jerald C. Brauer는 다음과 같이 연구하였다.
청교도들의 회심 간증은 일반적으로 깊은 내면의 혼란과 씨름 후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지향하였다. 한 걸음씩, 점차적으로, 한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 앞에서 개인적인 죄악의 공포와 맞닥뜨렸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과 거룩이라는 명령에 깊은 좌절감을 맛보았다. 이 때문에 결국 그 사람은 모든 것을 포괄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깊이 깨달을 수밖에 없으며,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방향 전환을 통하여 삶과 죽음을 모두 경험한다.451)
회개는 단순히 죄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해 고뇌함으로 죄를 깨닫는 것이다. 단순히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인지 깨닫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압도적인 권세에 밀려 심지어 육신적으로 아픔을 당하게 된다. 이것을 “영혼의 고뇌”라고 한다. 특히 부흥시기의 기록들에서는 일상과 같이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님이 신앙을 회복하시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실 때 동일하게 사용하신 하나님의 다루심이다.
존 번연은 자신의 책 “넘치는 은총 Grace Abounding"에서, 18개월 동안 어찌나 죄의식의 고뇌 속에 사로잡혀 있었던지, 들에서 먹이를 찾고 있던 기러기가 부럽기까지 했었다고 토로한다. 차라리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을 뻔했다고 생각했다. 이 고뇌, 이 무시무시한 죄책감, 부흥이 일어날 때 이러한 의식을 가질 수 있다. 사람들이 영혼의 고뇌를 하며 애통해한다. 그들은 울부짖고 흐느끼며 다른 이들에게 들릴 정도(통성기도를 뜻합니다)로 고뇌한다.
그러나 언제나 거기에만 머물다 마는 것이 아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어찌나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성령의 권능을 어찌나 강하게 느꼈던지 기절하여 땅바닥에 쓰러질 정도였다. 때로는 경련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어떤 사람들은 무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고, 일종의 실신 상태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러 시간 동안 그와 같은 상태로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452)
이처럼 영혼의 고뇌는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어떤 사람은 오랜 고뇌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둘째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를 이기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사건은 사람들이 산출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신앙을 회복시키는 회개의 차원은 인간이 산출할 수 없고 또 산출했었던 적도 없다.453)
회개는 자신의 죄를 너무 날카롭게 느낀 나머지 자신의 육체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고뇌를 한다. 육체적인 어떤 현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의 죄됨을 인식한 나머지 육신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나타나는 현상이 발생한다.
6. 회개의 목적은 “하나님(예수 그리스도)과 나와의 관계를 빼놓고서는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로 인도하신 사건이 출애굽기에 나타난다. 출애굽기 32장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백성들이 부패한 것을 알리시고 진노하신다. 모세는 회막에서 삼천 명을 죽인다. 이튿날 모세는 하나님께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지 않으시면, 주님이 기록하신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한다. 모세는 지금 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었다. 모세는 지금 지옥에 떨어져 있는 백성들의 참담한 모습을 보고 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신 것이 바로 지옥인 것을 그는 알았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그 땅으로 가라고 하신다. 그리고 사자를 앞서 보내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 백성들과 친히 함께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454)
회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 사실에 당황한다. 그리고 깜짝 놀라고 그토록 슬퍼한다. 더 이상 하나님이 죄인인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통곡하고 삶의 의욕을 모두 상실하고 만다. 그토록 처절하게 고뇌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너희는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으로 들어가거라. 너희는 고집이 센 백성이기 때문에 동행하다가는 내가 도중에 너희를 없애버릴지도 모르니,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는 않겠다." (공동번역 개정판. 출 33:3)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껴지게 만드는 내용이다. 지금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를 인식한 나머지, 더 이상 죄인 된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죽음보다 더 큰 절망이고, 바로 지금 지옥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회개는 바로 이것이다. 내가 지금 고개를 돌리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자신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심각한 것이, 이 세상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약속한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신 것처럼 성경의 모든 약속을 다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적이고 목표가 아닌 너희들을, 약속한 것을 다 주기만 할 뿐, 나는 너희에게 임재하지도 않고 교제하지도 않고 함께 하지도 않겠다고 하신다. 더 이상 너희에게 임재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모세는 인격체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이 자신의 모든 것 되었다. 자신에게 부귀영화와 사람들로부터 얻는 명성을 주지 않아도, 하나님 그분 한 분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이었다. 백성들의 슬픔도 마찬가지이었다. 그래서 모든 장신구를 떼어내어 버린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모든 부귀영화와 면류관과 자랑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보다도 더 가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이것이 회개이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개인이 그리고 교회가 번창할 수 있다. 교회가 두드러지게 성공을 거두고 많은 재정과 훌륭한 건물을 가지고 수많은 회심자를 얻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과연 우리가 그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임재를 지금 경험하고 있는가? 진실로 하나님의 임재가 개인과 교회에게 부어져 있다면 이러한 회개의 진수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흔히 보고 경험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모세와 백성들의 회개는 가나안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젖과 꿀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관심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만 원한다. 당신이 나의 삶의 모든 것 되시고, 당신만이 나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고 목표라 고백하였다.
바울은 성공적인 복음 전도자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사도였다. 그런데 그는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455)라고 하였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서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삶의 모든 것 되는 삶을 살았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 더 이상 하나님이 없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존재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아무리 외적으로 번영하고 유익한 성공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시면 내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456)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뿐만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의 삶 속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실감하게 된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나와 함께 계신 것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더 이상 형식적인 종교의 모습을 버린다. 회개의 목적이며 회개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오!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만이 유일한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후회와 회개의 절대적인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후회는 잠깐 지나가는 감정이다. 그러나 회개는 너무나 심오하여 사람의 의지와 세계관과 삶의 목적과 목표에까지 영향을 주는, 삶의 근본적인 변화이다. 이러한 회개는 하나님을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삼겠다는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7.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행동을 유발한다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을 실행하기 까지는 결코 회개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어떠한지 실감하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심각한 죄를 깨닫고 그들이 취한 행동은 자신의 몸에 있는 단장품을 떼어내는 것이었다.
이렇듯 가슴 아픈 말씀을 듣고 온 백성은 통곡하였다. 패물로 몸을 단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전하여라. '너희 고집이 센 백성아,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와 같이 올라가다가는 너희를 멸종시킬 것이다. 그러니 이제 너희는 모든 패물을 몸에서 떼어버려라. 그러면 내가 무엇이든지 알아서 해주리라.'” 호렙 산을 떠난 다음, 이스라엘 백성은 몸에 패물을 두 번 다시 붙이지 않았다.(공동번역개정판. 출 33:4-6)
회개는 우리의 죄악성, 특히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죄악성이 어떠한가를 이처럼 심오하게 인식하고서,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것을 힘껏 최선을 다해 행하고 싶어 하는 열망을 찾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죄를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사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단장품을 제하였다. 그렇게 자신들의 변화된 삶을 하나님께 보여주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단장품들이 그들의 함정이 되었다. 그 단장품을 가지고 금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두 번 다시 그것을 생각하지 않게 하였다. 자신을 멋지게 꾸밀 수 있는 단장품을 다시는 몸에 걸치지 않는 회개의 변화된 모습을 갖게 되었다.
8. 회개는 자신의 회개에 대한 대가를 생각하게 만들지 않는다
이러한 회개는 세상적으로 큰 대가를 요구한다. 회개는 그 대가를 기꺼이 치를 준비가 된 사람만이 회개할 수 있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 자체가 자신의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큰 대가를 지불하였다. 선교지에서 극심한 핍박이 있는 지역을 제외하고 많은 지구상의 나라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회개의 사건 때문에 일어나는 대가가 초대교회만큼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한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진정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회개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은, 제3자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진정한 회개를 하면 대가가 두렵지 않는다. 변화된 나 자신이 하나님의 기준 앞에 바로 서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대가가 두렵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대가가 생각나고 두려워진다는 것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이야기이다.
누가복음 5장 27절에서 28절까지 레위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려두’는 결단을 스스로 하였다. 한 청년은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네가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457)고 하셨다. 회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진정으로 회개한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자진하여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향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하였다. 회개는 대가가 있다. 회개는 반드시 필요하며,458) 긴급한 일이고,459) 자기를 포기해야 하며,460) 뒤를 돌아보지 않고,461) 자기 부인이 뒤따르는462)일이다.463)
그런데 진정한 회개는 대가를 치루는 것이 하나도 겁나지 않고 두렵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기쁨이고 감사의 표현이다.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주님이 엄청나게 나의 죄를 다루실 때, 선교사 모임에서 나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나의 개인 신상을 소개할 수 없었다. 20분 동안 나의 수많은 죄를 고백하고 나의 선함이 하나도 없는 나 자신을 소개하고, 눈물을 머금고 내려온 적이 있었다. 한국의 후원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설교하는 시간에 나의 죄를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며 나를 비하하고 정죄한 적도 있었다. 개인적인 만남에서는 더욱 많은 대화의 내용이 나의 선함이 없는 고백들이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나의 선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나의 앞에서도 나의 뒤에서도 나를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나를 더 사랑하고 나를 다루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였다. 내가 자주 나의 죄들을 고백하니 성도들도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고백한 죄에서 자신이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들을 보았고, 하나님 앞에 지옥을 경험하는 것 같아 보였다. 내가 한 행동들은 일반적이지 않는 독특한 행동들이었지만, 하나님이 부흥 때마다 일으킨 행동의 유형이었다. 결과는 예상 밖으로 놀라운 결과가 일어났다. 대가를 생각하였다면 절대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9. 역대하 7:14
회개에 대한 주옥같은 성경구절이 하나 더 있다. 역대하 7:14절이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이 스스로 겸손해져서, 기도하며 나를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며, 그 땅을 다시 번영시켜 주겠다.”(새번역, 대하7:14)
본문이 회개에 대한 차례를 설명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회개에 대한 바람직한 모습을 설명하였다. 회개는 스스로 겸비(겸손)하는 것, 기도하는 것, 나를 찾는 것, 그리고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 네 가지를 포함해야 한다.
a. 스스로 겸비하는 것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겸비 혹은 겸손은 다른 번역본에서는 ‘스스로 낮춘다.’ 또는 ‘머리를 숙인다.’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이 말은 남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나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것이나 자신에 대해 늘 비하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유교 문화 가운데 있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겸손의 의미이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겸손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첫째, 나의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올려드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칼빈은 다른 마음을 전혀 품지 않는 것 이라 하였다. 둘째, 같은 의미이지만 실제적인 표현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하게 동의하고, 그 말씀 앞에 엎드리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심각한 것은 명백한 죄를 짓고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을 정당화시키기까지 한다. 여러 가지 핑계들을 대기에 바쁘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적당한 선에서 넘어간다. 자기들의 죄를 직면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죄를 심각하게 다루는 메시지를 원치 않는다. 자기들이 듣기 좋아하는 메시지를 만을 듣는다.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서는 절대 회개가 일어날 수 없다. 성경의 인물들과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엎드렸다. 그리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대면하고 회개하며 나아갔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기준만이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기준이다. 그러기에 정직하게 말씀을 대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기준과 그 기준 앞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옷을 찢으며 하나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동의하고 엎드리는 것이다.
b. 기도하는 것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비춰주신 그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c. 나(하나님)를 찾는 것
하나님의 임재(Presence of God)란 신구약 성경에서는 ‘그의 얼굴’, ‘영광’, ‘장막’ 등과 같은 개념들과 ‘하나님 앞에’ (문자적으로는 ‘그의 면전’, ‘그의 얼굴에 대하여’), ‘그 가운데’, ‘그와 함께’ 등의 전치사적인 표현들로 용어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464)
히브리어에서는 인격, 성품, 속성을 뜻하는 의미의 단어를 ‘얼굴’이라는 단어와 ‘이름’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나를 찾는다.”는 의미와 성경에서 “얼굴을 구한다.”는 표현은 같은 의미인데,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성품과 속성 등과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 자체를 알기 위한다는 의미로 ‘임재’를 뜻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과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알아 가는 것을 말한다. 부부가 서로 안다고 하는 것 같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삶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d.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은 그동안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을 대체하였던 모든 우상을 철저하게 버리는 것이다. 물질주의, 돈을 사랑하고 중시하는 것, 형식적인 예배, 자기 자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의지하는 것, 전통적인 신앙, 성경 지식을 전달하고 신앙의 본질이 없는 성경공부와 같은 모든 것을 철저하게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를 의지하기보다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교회를 세우려고 했던 모든 것,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추구하기보다 화려하고 감동적인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던 모든 것. 그리고 소위 교회 성장을 위해 행하였던 모든 그릇된 마음 자세와 행동,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보다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사람들을 대할 때 진정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 교회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모든 노력, 하나님께서 교회의 필요를 채워 주시도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다리기보다 사람들을 교묘하게 조정하여 헌금하게 하는 것,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 그리고 직분을 이용하여 봉사시키시고 예배 출석시키기 위해 직분을 남발한 것,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일꾼을 분별하여 세우려고 힘쓰기보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을 일꾼으로 세우는 것, 직분을 섬기는 직무로 이해하기보다 계급적인 신분으로 이해한 것, 하나님의 직분을 세상의 사업을 위해 이용한 것 등 이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버리고, 그러한 죄악들로부터 돌이키는 것이다. 회개는 자신과 교회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포함한다. 가치관, 삶의 목표와 목적과 형태, 사역에 대한 이해와 태도, 예배에 대한 이해와 자세와 형태 등 모든 면에서 인위적인 방법론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준 앞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G.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은 단계적으로 신앙의 성숙함으로 보아지기도 하지만, 단번에 보는 것이 더 좋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건한 성도라면 자신의 그러한 모습을 보기를 원한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은, 단번에 보이기도 하지만, 신앙의 성숙함으로 통하여 점점 확실하게 보여 질 수 있다. 오랜 다루심의 기간이 필요하며, 지극히 나이 들어서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된다.
a. 바울이 점진적으로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은 아니다
잘못된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바울에 관한 모든 성경의 내용들을 추적하면서, 바울의 인생의 여정에 따라 나오는 바울이 자신을 묘사한 내용을 근거로 설명한다.
바울은 처음에는 자신이 여러 사도 중의 한 사람이라 하였다. 그리고 차츰 신앙이 성숙하자 사도 중에 맨 마중이라 자신을 겸허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신앙이 성숙하면서 자신은 모태에서 10달도 못 채우고 나온 사람이라 소개할 뿐만 아니라, 선한 것이 없되 하나도 없는 자신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신앙이 더욱 성숙해지자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임을 보았다고 고백하였다.
이것은 바울의 회심 이후 다루심의 기간을 지난 뒤, 안디옥에서 사역을 시작하기부터 순교하기 전까지 수십 년 동안의 삶 가운데, 바울이 쓴 글을 중심으로 발견해낸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 성숙해감을 통해 점차적으로 자신의 전적인 타락을 발견해나가는 성숙의 과정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성경의 파편들을 정확하게 뽑아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논리(이론)이다.
이것이 맞느냐 틀리냐를 성경에서 찾는 것은 어렵다. 성경에서 이것을 입증할만한 한 개인의 신앙 성숙 여정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였느냐를 찾아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부흥 때마다 사용하신 사람들과 부흥 때 하나님께 반응하고 회개의 자리로 나왔던 사람들은 단번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옥을 경험하였다.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부흥을 주도하였던 조나단 에드워드는 그가 죽기 직전에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지 않았다. 그는 부흥이 시작하기 전에 죄로 인한 지옥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로,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도록 청중들에게 설교하였다. 찰스 피니, 무디 등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 말기에 죄인 중에 괴수를 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람들 모두가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회개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고, 부흥이 시작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부흥 시대 때 쓰임 받은 인물들은, 신앙의 성숙함을 통하여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을 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심으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부흥을 통해 하나님이 회복하시고자 하시는 신앙의 모습으로 회복하실 때, 단번에 하나님이 역사 하셔셔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자신이 죄인인지 보게 하셨다.
프란시스의 전기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그를 만지셨을 때 그는 지옥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전 인생 가운데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죽을 때까지 확인하며 살았다. 그것이 더욱 십자가를 붙들고 의지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커져 갔다.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의 삶을 보면, 그들은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그것에서부터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신앙의 성숙을 통해 죽을 때까지 전적인 타락을 점진적으로 본 것이 아니다. 평생 그들은 그것을 확인하고 십자가를 붙잡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고백하며 살았다.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주도한 죠나단 에드워드는, 그가 첫 번째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였고, 또 두 번째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할 때, 그는 회개의 진수를 깨달았고 직접 체험하였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점진적으로 죽을 때까지 더 심오하게 자신의 처지를 확실하게 알아간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죽을 때까지 확인하고 살았다.
부흥 때마다 변화된 수많은 역사 속의 성도들이 있다.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이며,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본 이후, 죽을 때까지 그것을 확인하고 살았다. 자신의 상태가 너무나 심각하였기에 십자가가 삶의 실제가 되었다.
b. 점진적으로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보는 것보다, 단번에 보는 것이 좋다
우리의 신앙의 역사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점진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단번에 보는 것이 나는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의 모습을 단번에 보고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보게 되면, 십자가가 더욱 크게 보인다. 그 은혜와 사랑에 더욱 깊은 체험과 경험을 더 크게 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반론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부흥은 ‘하나님의 특별한 때’이기 때문에, 단번에 자기 자신의 처지를 인식할 수 있었지, 부흥의 때가 아닐 때는 신앙이 성숙되어 감을 통하여 자신의 처지를 인식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부흥의 때이든 부흥의 때가 아니든,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 서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지, 어떤 특별한 때에만 나타나는 신앙의 현상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부흥의 때이든 부흥의 때가 아니든, 하나님의 기준에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회개의 길로 가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러한 일이 부흥의 때가 지나고 수십 년 동안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 시대에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각 시대마다 그 시대에 적절하게 설명되어지는 하나님의 기준과 신앙의 본질 혹은 핵심이 선포되었다. 칼빈이 선포한 말씀을 가지고 우리 시대에 아무리 선포해도 아무런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것을 뒷받침하셔야 하지만, 칼빈 시대는 그 말씀이 가장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조나단 에드워드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시대에 적합한 말씀들이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게 하시는 것은 주님의 주권에 속한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가 되는 것은 어떤 법칙도 없고 어떠한 방법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적인 주님의 주권이다. 인간을 너무나 잘 알고 사랑하시고 자신에게 이끄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로 인간을 인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질투)이다.
나는 지극히 나이가 들고 신앙이 성숙하여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는 것보다, 단번에 하나님의 인도로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을 소망한다. 내 힘으로 가능하지 않지만, 주님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분이시다.
H. 회개는 언제까지 해야 하나
어떤 사람들은 회개에 대하여 언제까지 회개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나의 죄 때문에 죽어지는 경험을 어느 때까지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우리가 주님을 닮을 때까지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일 것 같다.
회개는 하나님이 시작하신다.465) 자신이 회개하려고 해도 성경적인 회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반응하지 않으면 또 성경적인 회개로 인도되지 않는다.466) 자신이 성경적인 회개를 하겠다면, 자신의 힘으로 회개 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467)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우리가 반응함으로 함께 이루어가는 합작품이다. 이러한 회개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해산의 고통을 치르시면 얻어낸 열매이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견디신 고통은 이 세상에서 아이를 낳은 그 어떤 어머니의 고통보다 더 크다.468)
죠나단 에드워드는 회개는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변화로 이끄는데 성숙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언제나 진정한 회개는 어떤 사람이든지 성숙을 향하도록 방향을 정해준다고 하였다.469) 즉, 회개는 시작일 뿐이며, 그 열매는 한 사람으로 하여금 성숙의 길로 나아가게 방향을 정해주는 것이다.
I. 성경적인 회개는 잃어 버릴 수 있다
한번 성경적인 회개의 길로 들어서서 수많은 하나님의 다루심 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회개하는 모습을 잃어 버릴 수 있다.
자신의 연약한 병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원인은 하나님을 찾지 않아서이다. 주님의 사역과 일에 너무 바빠서 주님 그분을 찾지 않고 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주변에 일어나는 분주함 때문에 자신이 주님을 잊어버린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어느 날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돌아서야 되는데, 자신 속에 있는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찾고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하나님이 자신 속에서 역사하지 않는다.
사람은 그냥 놔두면 하나님을 떠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신앙을 버렸다는 말이 아니다. 여전히 신앙 가운데 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영적인 자극과 주님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Ⅵ.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 나라
공관복음 안에서 ‘나라(βασιλεια)’의 의미를 모두 연구하는 것은 방대하기에 본 연구를 통하여서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성경에서 직접 ‘하나님 나라’나 ‘하늘나라’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부분들을 뽑아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뜻밖에 간단하고 쉽고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다. 특히 비유는 더욱 그렇다. 학문적인 어려운 표현들이 더욱 하나님 나라를 표류하게 할 뿐만 아니라, 더욱 모호하게 한다. 예수님은 절대 그렇게 가르치시는 분이 아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쉽고 단순하게 우리에게 설명하였다. 진리는 단순한 것이다.
A. 씨 뿌리는 비유 ( 마 13:3-8, 막 4:1-9, 눅 8:4-8 )
이 비유는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 비유이다. 또한, 이 비유가 가지는 중요성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면 능히 다른 비유도 깨달을 수 없는 가장 기초적인 비유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가 기록된 뒤에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묻는 제자들에게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사람만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윌더(Amos N. Wilder)는 “비유는 사람들에게 주목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을 생동력 있게 하고, 그들을 어떤 것에 직면하게 한다. 비유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경험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 일을 하게 한다. 우리는 예수의 비유에서 기쁨의 순간을 맞이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이 역사하고 미래의 약속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는 비유에서 이 확신을 증거 하여 우리에게 결단과 헌신을 요구한다. 이 결단은 때때로 인내와 고통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였다.470)
씨 뿌리는 비유를 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듣는 사람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471)이었다. 마치 오늘날과 같다.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여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싶어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 싶어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472)라고 말씀하시며 비유를 해설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는데, 돌짝밭과 가시덤불 그리고 길가에 뿌려진 사람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이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서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셨다. 그 열매는 기본이 백배이고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하셨다.
이 본문은, 본문에서 명확하게 설명한 것과 같이, 하나님 나라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 나라를 이해한 사람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열매는, “가진 사람은 더 받아서 차고 남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473)는 부익부 빈익빈의 결과를 가진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B. 곡식과 가라지 비유 ( 마 13:24-30 )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서, 자기 밭에다 좋은 곡식(밀)을 뿌렸는데,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주인은 밀이 다치지 않게 하려고 추수 때까지 기다렸다가 추수 때에 먼저 가라지를 뽑아서 불살라 버리고, 밀은 곳간에 거두어 들이라 말씀하셨다.
마태복음의 수신의 대상자들은 유대인이며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였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본문의 대상자들도 모두 유대인이었다. 즉, 하나님을 알고 있고, 신학도 전혀 문제가 없는 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문제는 신앙에 대한 실제가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진 가짜 신앙이었다. 진짜와 가짜는 밀과 가라지와 같이 종교적인 형식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똑같은 모습이다. 예배, 헌금, 봉사, 섬김과 같이 모두가 하나같이 모양은 똑같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밀과 가라지를 모두 알고 계시는데, 예수님은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신다. 즉 가짜들도 진짜들 사이에 내버려 두었다가 추수 때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외적으로 바르게 예배드리고 섬기고 봉사한 것을 가지고 우리는 의를 삼고 있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마음의 동기를 보시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종교적인 열심과 열정을 가졌더라도,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유일한 모든 것이 되지 않는 종교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 자신의 힘과 방법과 목적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며, 자신의 필요를 위하여 하나님이 수단이 된 기복신앙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이 바로 가라지이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하여 진짜 신앙이 있고 가짜 신앙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외형적이고 형식적으로는 동일하게 보인다. 신학도 성경도 모두 이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정통이다. 마치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기 힘든 것처럼 교리적으로 이단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가짜가 있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것을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인격과 관계 맺기보다 인격에 관해서 관심을 두는 것이라 하였다. 교리적으로 정통이지만 죽어있을 수 있는 무서운 사실이다.474) 또한, 진리를 믿는 것을 아는 것으로 생각한다. 교리적으로는 정통이지만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가 없다.475) 과연 바리새인과 다를 것이 무엇인 있단 말인가?
C. 겨자씨와 누룩 비유( 마 13:31-33, 막 4:30-32, 눅 13:18-21 )
하나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다른 씨들보다 크기가 작은 겨자씨를 자기 밭에 심었는데, 나중에 다른 풀보다도 더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가지에 깃들인다. 가루 서 말에 누룩을 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오른 것과 같다.
이 본문은 헤겔의 진화론적인 발달로 보아서도 안 되며, 점진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종말론적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임재는 처음 회개와 함께 시작되어476) 하나님의 임재가 커지고 살아계시고 인격체 되신 하나님이 자신을 통치하시고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영역이 켜져서 마침내 자신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이 주도권을 가지시는 삶으로 가득 차는 것을 말하고 있다. 처음 출발은 미비하고 작게 시작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열매가 가득하여져서 하나님이 충만한 임재가운데 풍성한 삶을 누릴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D. 감추인 보화와 귀한 진주의 비유 ( 마 13:44-46 )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을 구입하여 보물을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 또한, 좋은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것을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사들였다.
하나님 그분이 자신의 인생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삶에 대한 비유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중요하게 여기고 귀중하게 여길 것을 말하고 있다. 자신의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소유해야 하는 가장 귀중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 그분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삶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하나님도 모든 것 되고, 목회와 성도도 모든 것 되는 경우가 우상인지를 모른다. 하나님도 모든 것 되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려는 생각으로 세상에서의 성공을 원하는 것이 우상인지를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만이 오직 유일한 모든 것 되기를 원하신다.
E. 그물 비유 ( 마 13:47-48 )
바다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았는데,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누는 것과 같이, 세상의 끝에는 천사들이 의인과 악인을 가려낼 것이다.
감추인 보화와 귀한 진주의 비유 이후 그물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있어서 유일한 모든 것 된 사람들과 그렇지 않고 가짜신앙에 빠진 사람들을 구별하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상자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 아니었고, 모두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기고 있는 유대인이 그 대상이었다. 즉 종교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가짜와 진짜가 존재하고 있는데, 형식적으로는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같음을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F. 자비롭지 못한 신하의 비유 ( 마 18:23 )
만 달란트 빚진 종이 왕 앞에 끌려 왔지만, 왕은 그 사람을 용서해주고 모든 빚을 탕감해주었다. 그렇게 풀려나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보자 멱살을 잡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넣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만 달란트 빚진 종을 잡아다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이 말씀을 하신 이유를 예수님은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477)
하나님 나라는 용서받고 용서하는 자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것은 엄청난데,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지 못하는 이기적인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사람의 모든 용서를 취소하고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신다는 말씀이다. 반대로 자신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동일하게 용서하신다.
G. 혼인 잔치의 비유 ( 마 22:2; 눅 14:15 )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이 잔치를 크게 열고는,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이 초대를 거절하고 자신의 일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종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임금은 큰길가에서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모두 잔치에 초대하였는데, 모두 혼인예복을 입고 있었다. 혼인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은 내어 쫓김을 당하였다. 그리고 부름 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다는 말씀을 하셨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비유의 핵심은 변하지 않았다. 비유는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주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두 비유는 동일한 교훈을 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삼고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종교적인 열정적인 모습만 보이던 그 당시 신앙인과 고위층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등을 돌리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말씀이다. 그 당시 부유하고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초대에 부름을 받았지만, 그들은 그것 스스로 거부하였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거짓 신앙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자신들은 열심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달랐다. 아무리 신앙의 본질이 실제가 되는 것을 초청을 해도 그들은 자기 기준의 신앙에 빠져서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고, 심지어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 팽배하였던 거짓신앙을 지적한 말씀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당시 경건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믿고 있는 고위층과 종교지도자들이 아닌, 소외되고 가난하고 멸시받는 일반적인 대중이 오히려 하나님의 신앙의 본질 위에 세워지고 있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H. 열 처녀의 비유 ( 마 25:1-13 )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중 다섯 명의 슬기로운 처녀가 있었다. 그래서 신랑이 오기까지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다섯 명의 미련한 처녀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름이 모자라 기름을 사러 간 사이, 신랑이 도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슬기로운 다섯 명의 처녀는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되었다. 늦게 도착한 미련한 다섯 처녀에 대한 신랑의 반응은 냉정하게 “나는 너희를 알지 못 한다”고 하였다. 그러시면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에서는 준비하지 못한 미련함과 준비하는 슬기로움을 대조시키면서 이것이 결국 혼인잔치에 참여함과 참여치 못함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비유는 구원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조정하여 하나님 그분만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삼고, 하나님이 기쁘신 뜻을 따라 삶을 시작한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온전히 하나님 그분만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의 여러 가지 핑계를 이유로 그것 중지하고 다시 옛 생활을 겸하거나 돌아가는 것은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이 안일한 삶으로 빠지는 것을 경고한 것이다.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삶은 지속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을 추구하며, 하나님 한 분만을 추구하는 신앙이다. 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모든 것 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이 모든 것 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만 유일한 모든 것 되기 원하신다. 하나님과 다른 것을 겸하여 모든 것 된 삶을 미련한 다섯 처녀로 취급하신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그분만 유일한 모든 것 되기 원하신다. 그래서 나누어진 마음을 가진 다섯 처녀에게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냉정한 판결을 하신다.
깨어 있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마음이 나뉘어 있는 동안에 주님이 오시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주님 그분에게 거는 것이 필요하다.
I. 달란트의 비유 ( 마 25:14, 눅 19:11 )
이 비유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나오는 동일한 비유인데 비유가 조금 다른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비유의 핵심은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각기 능력에 따라 다섯 달란트와 두 달 란트와 한 달란트를 각각 주고 떠나갔다. 다시 돌아와서 종들에게 얼마나 이윤이 있었는지 셈을 할 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는 2배의 이윤을 남겼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이윤을 남기지 않고 땅을 파서 돈을 숨겼다가 돌려주었다. 그러자 주인은 한 달란트를 다른 종에게 주고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을 내어 쫓았다. 그러면서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 비유를 드신 이유에 대하여 누가복음에는 “이 비유를 드신 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데다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나라’라는 개념을 지역적인 것으로 해석해 왔기 때문에 그것을 미래에 있을 종말론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이 나라가 지역개념이 아니라, 임재개념이면 이 비유의 핵심은 달라진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유일한 모든 것 삼았다고 바로 임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다루심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다루실 때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섯 달란트 크기만큼 다루시고 하나님이 다루심의 열매와 변화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이루실 일들에 사용하시는 사람이 있다. 또 능력에 따라 두 달란트 크기만큼 다루시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이 있다. 또 능력에 따라 한 달란트 크기만큼 다루시고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주님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크기만큼 다루시고 일을 맡기신 사람을 향해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고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우리를 다루시고 사용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즉시 사용하지 않으시고, 다듬으시고 훈련하시고 성숙시키시어 숙성시키시는 이유가 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함이었지만, 방법은 ‘떠나라.’, ‘가라.’는 말뿐이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매일 주님을 신뢰함을 통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모세는 자신이 히브리인을 위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 것을 안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는 광야에서 40년을 지냈으며, 가시떨기 나무에서 부르심을 받고서도 1 ∼ 2년 정도 하나님의 다루심이 있었다. 요셉은 그가 청소년 시기에 부름을 받았지만, 그가 30살 되어 총리가 될 때까지 다루심의 기간이었다. 다윗도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왕이 되기까지 그는 다루심의 기간이 필요하였다. 사도 바울도 소명을 받고 그가 사도로 사역을 하게 될 때까지 10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루심의 기간이 필요하며 그 과정을 통하여 성숙하고 열매 맺으며, 그 시대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중을 다루심을 통과한 그 사람에게 맡기신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다루심을 회피한다. 자신에게 나타난 신앙의 이론이 자신의 삶 가운데 실제가 되지 못한다. 그저 들은 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자신을 실제 가운데로 이끌지 않는다. 말씀을 듣고 지식적으로 아는 것으로 만족해버린다. 정면으로 신앙을 자신의 삶 가운데 실제가 되어 경험하는 것을 회피해버린다. 한 달란트 받은 이 사람은 주님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는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478)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론으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시험을 쳤다면 이론적으로는 100점이지만, 신앙의 실제에는 심판을 받을 사람이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이론으로 동의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 가운데 실제가 되지 않으면 주님께 버림을 받는다. 하나님은 반드시 능력에 따라서 다루시고 그 다루심 후에 열매를 맺어 삶의 변화가 있을 것을 기대하신다. 하나님의 다루심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J. 양과 염소의 비유 (마 25:31-46)
이 말씀은 마태복음 25장의 하늘나라 비유 가운데 마지막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지막 심판에서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이 나라를 차지할 아버지께 복을 받을 사람들과 영원한 불에 들어갈 저주받은 자를 가르신다. 그러면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479)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나라는 온전한 하나님 나라이다.
마지막 심판이 있고 그에 관한 결과로 얻는 것은 온전한 하나님과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고 영원하신 그의 광명의 얼굴을 또렷이 직접 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심판을 하실 때는 임재를 가지고 하신다. 그것은 임재 가운데 주인이 되셔서 이끄신 일인데,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480)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시면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481)라고 말씀하셨다. 임재 가운데 있을 때는, 주님 의식 가운데 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이 자신을 이끄시는 삶을 살게 된다. 즉, 주님이 나 자신의 주인이 되어주셔서 나를 이끄시는 삶이다. 이러한 온전한 삶을 살게 될 때 나타나지는 신앙의 실제적인 현상이다.
K. 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 ( 막 4:26-29 )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렸는데, 씨가 자라고 열매를 맺어 추수할 때가 되어 낫을 댈 때까지 자라는데, 어떻게 씨가 그렇게 자라는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유일한 모든 것 삼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고 신앙생활 하게 되면, 자신에게 임재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자신이 알지 못함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신의 유일한 목적과 목표가 되면 자신 안에 있는 거짓신앙들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자신 속에 들어있는 괴물과의 싸움을 통해 자신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고482), 심지어 자신이 죄인 중에 우두머리인 것을 보게 된다.483) 자신은 자신이 얼마나 성장하고 크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러한 과정 가운데 하나님은 영적으로 성장시키고 계시고 임재의 충만함으로 그와 함께하신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자신의 산적한 죄와 자신의 전적인 무능함을 보기 때문에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임재가 충만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자신은 여전히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항상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 사람은 영적으로 충만하게 성장하고 있는 사람이다.
L. 무화과나무의 비유 ( 눅 21:31 )
항상 나라를 지역적인 의미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이 비유를 전통적으로 미래에 있을 종말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임재의 개념에서는 앞으로 일어날 징조를 예언한 사실이 실제로 일어나거든, 예수님이 말씀하신 신앙의 본질의 실제와 하나님의 임재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마지막 날에 어떠한 일들이 이 세상 가운데 일어날 것인가를 말씀하신 후에 무화과나무가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듯이, 예수님의 예언이 적중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의 삶이 진짜임을 인식하고 그렇게 살라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로 알아라.”라는 말에서 ‘가까이 왔다.’는 하나님이 우리가 살고 있는 같은 공간에 임재해 있음을 인식하고 살라는 말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도 이 문맥 가운데 나타난다. 하나님의 임재를 시인하고 받아들이고 다루심 앞에 서는 것을 미루거나 거부하였던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서 예수님의 말씀을 선택하라는 말씀이다.
Ⅷ. 예수님의 교훈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그 당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는 대조적으로 권위가 있는 가르침이었다. 심지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자신의 배고픔을 잊어버릴 정도이었다. 그러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이었다. 여기서는 공관복음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어휘가 직접 사용되고 있는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A. 침례(세례) 요한의 선포(마 3:2 ), 예수의 선포 ( 마 4:1-7, 막 1:15, 눅 4:43 ), 파송된 자들의 선포 ( 마 10:7 )와 ‘하나님 나라’
침례 요한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시는 신앙의 본질임과 동시에 예수님이 가지신 하나님의 권세와 관련된 변화이었다. 그는 구약의 선지자로 인정을 받은 사람이다.
또한,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은 항상 하나님 나라였다. 그의 제자들이 각지에 파송되어 선포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 이었다.
B. 어린아이와 ‘하나님 나라’ ( 마 19:14, 막 10:14, 눅 18:16 )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허락하고 하늘나라는 어린아이들의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본문은 공관복음서 모두에 나타난다.
이 본문은 하나님 나라는 단순하게 진리에 반응하는 삶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복잡하게 생각하고 복잡한 계획들을 끊임없이 자신의 삶 가운데 세우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오직 하나님 그분만이 자신의 삶의 유일한 모든 것 삼으면 그러한 복잡한 생각은 없어진다. 어린아이같이 단순하게 진리에 반응하면 되면, 하나님이 임재하실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이끌려 사는 삶을 살게 된다. 우리는 어린아이같이 단순하게 하나님께 반응하면 되는 것이다.
뒤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하나님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라는 말에 근심하게 된 것이다. 부자 청년은 어린아이 같은 단순하게 진리에 반응하는 삶을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근심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뒤에 나오는 부자청년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C. 침례(세례) 요한과 ‘하나님 나라’ ( 마 11:11, 눅 7:28 )
침례 요한은 오실 분이 당신인지 확인하러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질문하였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등 기존의 사고방식을 깨는 예수님의 사역에 의문점이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사역을 본 그대로 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침례 요한을 일컬어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침례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484)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침례 요한을 예언자 중에서도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요한보다도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곧 하나님의 임재로 변한 변화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 변화된 임재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는 더욱 깊은 임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 그분과 함께 있는 임재방식의 변화를 통하여 더욱 큰 임재를 경험하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D. 바리새인의 물음과 ‘하나님 나라’ ( 눅 17:20 )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의 나라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그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고,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485)고 하셨다. 이 땅에서 임재하신 하나님의 임재인 예수님이, 먼저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고 이 세대에게 버림을 받아야 한다 하셨는데, 그것은 십자가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땅의 나라가 아닌 것을 확실하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바로 우리 마음 가운데 있기 때문에 보여줄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그분의 통치와 임재가 우리 삶의 구석구석 퍼져서, 주님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 이끌어 가시는 삶이다.
E. 세상의 일과 ‘하나님 나라’ ( 눅 9:60 - 62 )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버지의 장사(葬事)를 지낸 후에 따르기를 원하였으나 예수님은 단호히 이를 거절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가족과의 작별을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말씀하신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은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며, 세상의 여러 가지 일과 함께 그 중의 하나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는 그 어떤 일보다 귀중하고 긴박한 일인 것을 예수님은 가르치고 있다.
F. 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 마 26:26, 막 14:23, 눅 22:16,18, 요 13:29 )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기념하셨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을 마실 그날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지금까지와 조금 다른 모습의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이 땅에 계셨는데, 이제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승천을 통해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로 전환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전환이 이루어질 때까지 주님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고, 실제로 예수님은 끝까지 그것을 지키셨다.
결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임재임과 동시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이다. 히브리적 개념의 문자적 의미로 하나님의 임재는 어떠한 형태와 목적으로서든지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상태이다.486) 하나님의 임재는 실제의 현현과 꿈과 환상 혹은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계시를 통해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가장 큰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거주하심”이다.
구약에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과 동시에 백성들과 함께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예배 가운데 임재해 주셨는데, 신약에서는 인격체이신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탄생과 침례, 전도와 이적, 교훈과 수난과 부활 등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영광을 보여 주었다. 성령의 감림을 통하여 이제는 우리에게 임재하시며, 일시적인 하나님의 방문이나 혹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계시는 무소부재의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한다.
‘하나님 나라’는 또한 신앙의 본질의 실제이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이다. 이것은 3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하나님 그분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것이다. 성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였다. 또한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과 의중에 자신의 삶을 조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본질을 담는 형식(그릇)이 바로 율법이었고, 그 율법을 완성하고 그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법이 이제는 신앙의 본질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예수님은 구약의 신앙의 본질을 설명하지 않으신 이유는 이미 예수님 시대에 모든 유대인이 신앙의 본질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의 실제를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신앙의 본질로 인도하는 신앙의 실제를 ‘하나님 나라’로 설명하였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직! 하나님 및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삶의 실제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는 “예수 그리스도 의식으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통하여 이제는 하나님이 임재하신다. 항상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임재 가운데 이끌려 은혜로 사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는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487) 임재를 유지하고 회복하도록 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 위에 서는 것이다. 또한, 임재는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만남과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시기 원하신다.488) 이러한 임재의 결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는 참다운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성서는 다양한 저자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여러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다. 오늘날 성서시대의 다양한 독자들이 이해하였던 다양한 신학용어들이 모두 다른 신학 사상이 되어 연구되어진다. 서로 다른 삶의 정황 가운데 있는 독자들을 향하여 편지로 쓰여진 서신들이 성경의 정경으로 선정된 이후 성경의 저자들이 사용하고 독자들이 이해한 신학용어들이 다양할지라도 그들이 말하고자 하였던 내용은 많은 경우 동일하였다. 단지 서신의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여 신앙의 본질을 설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진리는 단순한 것이다. 복잡할수록 진리가 아닐 수 있다.
.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 5:37)
이 본문에서 형상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은 ‘영광의 임재’를 뜻한다. 예수님은 정말 구약의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면, 신앙가운데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가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이 진짜였고, 구약의 신앙의 본질이 실제가 되어 있었다면, 영광의 임재를 경험했어야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증표 중에 하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이다. 하나님 한 분만이 힘이시고 능력이시며, 유일한 만족으로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가 자신의 삶에 실제가 된다면, 이러한 영광의 임재를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이다. 우리시대 이러한 신앙의 회복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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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llmen Daniel von. "he Birth of Theology.”In Readings in Dynamic Indigeneity. Charles H. Kraft and Tom N.Wisely, eds. p. 25.
3) 가장 큰 변화 중에 하나는 1900년대 근본주의는 부흥과 함께 항상 따라오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와 은사와 거룩한 감정들이 동반되었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에 의해 이러한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개신교의 변방에서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근본주의는 이성과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많은 경우 은사는 초대교회시대 이후로 끝났다고 한다.
4) 한국의 포털사이트에서 신복음주의를 검색하게 되면, Google.com에서 약 329,000개의 검색 결과 중 웹문서와 동영상 그리고 블로그 글들의 약 90%이상 한국에서 문제있는 이단이나 단체를 신복음주의와 연결하여 가장 주의해야 할 이단 혹은 위험사상으로 보고 있다. 한국인이 많이 찾고 있는 Naver.com과 Daum.net에서도 마찬가지로 90% 이상 주의해야할 이단 혹은 위험사상으로 보고 있다. 인터넷에서 신복음주의에 대한 글들만으로도 미국의 신복음주의는 한국에서 이단 혹은 변질, 바이러스, 타협, 다른 복음 등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이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 내에서의 실제적인 상황과는 다른 모습이라는 것에 한국에서 목회하는 대부분의 목회자가 공감하지만, 인터넷 글들만으로 본다면 한국에서 신복음주의는 심각한 위험사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2012년12월17일 검색.
5) Harlan Mark, 탈서구화 정책과 선교에 적절한 신학의 개발(DE-WESTERNIZING DOCTRINE AND DEVELOPING APPROPRIATE THEOLOGY IN MISSION). 강화도 성산예수마을. 2005년 11월 16-18일.
6) Kraft Charles, “ontextualizing Communication.”In Thy Word Among Us: Contextualizing Theology for Mission Today. Dean Gilliland, ed. Pp. 121-138. Dallas, TX: Word Books. 1989. pp. 55-57.
7) Dryness William, Invitation to Cross-Cultural Theology: Case Studies in Vernacular Theologie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1992. p. 22.
8) Boyd Robin H. S , “estern Origins of Theological Formulations.”In Readings in Dynamic Indigeneity. Charles H. Kraft and Tom N. Wisely, eds. Pp. 349-371. Pasadena, CA: William Carey. 1979. pp. 358-369.
9) Nicholls Bruce J , Contextualization: A Theology of Gospel and Cultur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79. p. 42.
10) Krauss C. Norman , Jesus Christ Our Lord. Revised edition. Scottdale, PA: Herald Press. 1990. p. 15.
11) Nicholls Bruce J , Contextualization: A Theology of Gospel and Cultur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79. pp. 54-55.
12) Allmen Daniel von. op. cit., p. 341. Harlan Mark, 탈서구화 정책과 선교에 적절한 신학의 개발(DE-WESTERNIZING DOCTRINE AND DEVELOPING APPROPRIATE THEOLOGY IN MISSION)에서 재인용.
13) 이 주제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 참조. R. Smend, Die Mitte des AT, (Zurich, 1970), 7, pp. 27-33.
14) 게하르드 하젤, 구약신학: 「현대 논쟁의 기본 이슈들」 김정우 옮김, (서울: 엠마오, 1994), pp. 169-206.
15) W. Eichrodt,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2vole; Philadelphia, 1961, 1967), p. 13.
16) E. Selin, Theologie des AT (2nd ed. ; Leipzig, 1936), p. 19.
17) A. S. Todd, Old Testament Theology, (Philadelphia, 1957), p. 30.
18) Wildberger H, “auf dem Wege zu einer biblischen Theologie,” Evt, 19 (1959), p. 77.
19) Seebass H, “Der Beitrage des AT zum Entwurf einer biblischen Thelolgie,” Wud, 8 (1965), p. 34-42.
20) Klein G, “‘Reich Gottes’ als biblischer Zentralbegriff,” Evt, 30 (1970), pp. 642-670.
21) Thelolgische Zeitschrift, 24 (1968), p. 163.
22) Evanglishe Theologie, 30 (1970), p. 295.
23) Die Mitte des AT, 49, p. 55
24) G. von Rad,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5th ed; Munich, 1966), p. 128.
25) S. Hermann, “Die Konstruktuve Restauration, Das Deuteronomium als Mitte biblischer Theologie,” in Probleme biblischer Thwlolgie, pp. 155-170
26) Edmond Jacob, Grundfragen alttestamentlicher Theololgie, Stuttgart, (1970), p. 18.
27) 게하르드 하젤, op. cit., pp. 201-206.
28) 창 1:1-31.
29) 빌 아놀드 & 브라이언 베이어, 「구약의 역사적 신학적 개론」 류근상 & 강대흥 역, 서울:크리스챤출판사 2000, p. 104. “아담과 하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대표하는 창조물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이란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 창조되었음을 함축한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은 많은 피조물 중 인간만이 갖는 특권 중의 하나이며 창조물 가운데 특별한 위치에 인간이 놓여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다.”
30) 롬 5:12; 8:22.
31) 창 3:17.
32) 롬 8:19-22.
33) 롬 1:28.
34) 마 4:4.
35) 요일 4:10.
36) 홍인규, 「바울의 율법과 복음」,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6. pp. 208-236.
37) 마 22:34-40; 막 12:28-34; 눅 10:25-28.
38) 갈 5:14, 6:2.
39) 홍인규, op. cit., p. 240.
40) 갈 5:14, 6:2; 롬 13:8.
41) 찰스 크레프트는 기독교가 종교인가, 신앙이가? 에 대한 질문으로, 종교가 아닌 신앙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을 서술하였습니다. 신앙을 형성하고 있는 외형적인 부분을 종교로 보았고, 신앙을 본질로 보았다. 찰스 크레프트, 「말씀과 문화에 적합한 기독교」 김요한 & Peter kang Chrisina Kang & 백신종 역, 서울:생명의말씀사, 2007. pp. 143-166.
42) 윌리엄 다이어네스, 「주제별로 본 구약신학」 김지찬 역, 서울:생명의 말씀사. 2006. pp. 148, 167-168.
43) 렙 7:13.
44) 사 58:1-14.
45) 호세아 4:1-6.
46) 시편 67편을 성경적인 근거로 인용하여.
47) 스티븐 호돈 & 랄프 윈터, 「Mission Perspectives」 정옥배 역, 서울:예수전도단, 2000. p. 51.
48) 스티븐 호돈 & 랄프 윈터, op. cit., p. 52.
49) Lofthouse, W. F, “Biblical Ethics” A Companion to the Bible, edited by T. W. Manson. Edinburgh:T. and t. Clark, 1942. p. 350.
50) 마 23:30.
51) 마 23:13, 15, 16, 23, 25.
52) 마 23:31.
53) 신 6:4.
54) 랠프 스미스, 「구약 신학」 박문재역, 서울: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5, p. 271.
55) 신 4:35, 39; 삼하 7:22; 왕상 8:60; 왕하 19:15; 시 86:10; 사 43:10-13; 44:6-8; 45:5-6, 21-22; 욜 2:27; 사 41:4; 48:12; 64:4.
56) 렘 2:11; 10:7; 16:20; 사 41:29; 43:10; 44:8; 45:5, 6, 14, 21, 46:9.
57) 마우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는 바로 유일하신 분으로서 이스라엘의 온전한 헌신을 요구한다고 하였다. U. Mauser, Εἴs θεὀs und Mouos θεὀs in Biblischer Theologie, in:Einheit und Vidlfalt Biblischer Theologie (JBTh Bd. 1), p. 74.
58) 출20:2-4, 신5:6-8.
59) 마 22:34-40, 눅 10: 25-28. 마가복음과 다르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인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이미 기정사실화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이미 기정사실화되었기 때문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누락 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김재진, 한 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 속에 있는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신학논단 제21집, 서울:연세대학교 신과대학 1993, pp. 357-399. 복음서는 조금 다르게 이러한 최고 되는 계명에 대한 질문을 다르게 서술하였다. 산상수훈이 한번 가르쳐진 내용이 아니라, 여러 번 가르쳐진 내용인 것과 같이, 이것은 한번 질문을 받은 것이라기보다, 여러 번 질문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복음서들이 다른 관점에서 쓰여 졌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어지나. 성경은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60) 막 12:29.
61) 막 12:32.
62) H Strathmann, Das Evangelium nach Johannes (NTD 4), 4. Aufl., 1959. 참고.
63) M. Dibelius, Die Christianiserung einer hellenistischen Formel, in: Ders, Botschaft und Geschichte Ⅱ, Tubingen 1956, S, 14-29: E. Norden, Agnostos Theos, Untersuchengen zur Formengeschichte religioser Rede, Leipzig/Berlin 1913, S, 240-250. 참고.
64) 시 18:1.
65) 마 22:39.
66) 고전 9:19.
67) 신 7:6-7.
68) E. A. 마튼즈,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김지찬 역, 서울:생명의 말씀사, 1990. p. 105.
69) 마 16:16.
70) 요 5:37-38.
71) 엡 1:15.
72) 창 3:8.
73) 창 15:1-21; 17:1-21; 18:33; 26:2-5, 24; 28:12-16; 32:24-32.
74) 출 3장.
75) 사 6장, 겔 1장.
76) 창 16:13; 삿 6:22; 13:22.
77) 민 22장, 천사가 벌하기 위해 온 구절이 있다. 삼하 24:16; 대상 21:16.
78) 에드몽 자콥, 「구약신학」 박문재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9, p. 87.
79) Ibid.,
80) 시 21:10.
81) 출 33:1, 민 12:8; 14:14.
82) 사 63:9.
83) 신 4:37.
84) 출 33:20-23; 왕상 19:13.
85) 시 29:1; 수 7:19; 사42;8; 48:11.
86) Paul Humbert, “Les prophetes d’Israĕl ou les tragiques de la Bible”, RthPh, 1926, p. 229.
87) 출 16:10, 40:36-38.
88) 출 14:4-17.
89) 에드몽 자콥, op. cit., p. 90.
90) 창 15:1; 삼하 7:4; 왕상 6:11; 17:2; 예언서들.
91) 랠프 스미스, op. cit., pp. 142-192. 학계에서는 이러한 표현을 “계약 공식(Covenant Formula)”라고 불러왔다. 성경에는 이와 유사한 공식이 약 25번 사용되었다. 창세기 17장 7절에 선언하신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공식이 명확하게 처음 쓰인 곳이 바로 출애굽기 5장 22에서 6장 8절까지 이다. E. A. 마튼즈, op. cit., pp. 82-90. 참조.
92) 랠프 스미스, 「구약신학 그 역사, 방법론, 메시지」 박문재 역, 서울: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5. p. 195.
93) 출 33:19; 34:5.
94) 출 3:13.
95) 출 20:7.
96) 발터 아이히로트, 「구약성서 신학」 박문재 역, 서울: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3. pp. 221-222.
97) 스티븐 호돈, op. cit., p. 49.
98) 시 3:1; 6:1; 7:1; 12:1.
99) 마 11:25-27; 26:42; 막 14:36; 눅 10:21-22; 23:34, 36; 요 11:41; 17:1.
100) 출 15:11; 시 77:13-15; 시 89:6; 미 7:18.
101) 호 13:4.
102) 시 3:8; 욘 2:9.
103) Baab Otto, “Old Testament Theology: Its Possibility and Methodology.” The Study of the Bible Today and Tomorrow, edited by H. R. Willoughby. Chicago: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43. p. 119.
104) 시 3:8; 욘 2:9.
105) 욥 38:2-39:30; 시 104:27-30.
106) 이렇게 많이 언급된 거룩을 구약의 주제라 생각한 사람이 있는데, 요하네스 하넬(Johannes Handel)이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107) 랠프 스미스, op. cit., p. 228.
108) 랠프 스미스, op. cit., p. 229
109) 신 7:-9; 13:23; 23:5; 왕상 10:9.
110) 삼하 12:24; 사 48:14; 신 10:18.
111) 시 78:68; 87:2.
112) 시 11:7; 37:28; 45:7; 99:4; 잠 3:12; 15:9; 사 61:8; 말 2:11.
113) 신 4:37; 10:15.
114) 겔 16:8; 호 3:1.
115) 호 11:1.
116) 사 43:4; 63:9; 습 3:17.
117) 렘 31:3.
118) 호 9:15.
119) 출 32; 민 25; 신 2:15; 4:25-26; 9:19; 삿 2:14; 왕상 11:9-10; 14:9, 15; 왕하 17:17-18.
120) 겔 16:38; 24:7-8.
121) 겔 16:38; 23:25.
122) 출 22:21-24.
123) 왕하 23:26-30; 대하 35:20-25; 욥 2:10; 시 44:8-22.
124) 출 32:10. 민 16:21; 신 7:4.
125) 시 50:6.
126) 창 16:5; 31:53; 삼상 24:12, 15.
127) 삼상 3:13.
128) 창 15:14; 사 2:4.
129) 시 50:4; 67:4; 사 3:13; 33:22; 겔 36:19.
130) 랠프 스미스, op. cit., p. 2257.
131) 창 18:25; 시 9:4, 8; 67:4; 72:2; 75:2; 96:10.
132) 삼상 16:7.
133) 사 53:6.
134) 사 53:4-5; 시 51:3-4; 130:3-4; 막 2:7; 눅 5:21; 7:49.
135) 랠프 스미스, op. cit., p. 268.
136) 창 1:22, 28.
137) 창 1:22, 28.
138) 창 1:29-30.
139) Westermann Claus, Blessing in the Bible and the Life of the Chruch, Philadelphia:Forteress, 1978. p. 50.
140) 랠프 스미스, op. cit., p. 206.
141) 랠프 스미스, op. cit., pp. 206-207.
142) 출 14:4; 29:43.
143) 출 40:34.
144) 겔 1:4.
145) 시 72:19; 57:5; 57:11; 사 66:18-19.
146) 사 40:3.
147) 슥 2:8-9.
148) 사 43:7.
149) 대상 16:10, 28; 시 29:1. C3tv 온라인성경 사전검색, http://bible.c3tv.com/bible/dic
/dic_view.asp?Page=592&Word01=&Word02=&OrAnd=&GWord=&MenuCd=4&BiDicCd=6591 (2013. 2. 24 검색)
150) http://biblenara.org/q&a/Q177.htm (2013. 2. 24 검색)
151) 출 5:2.
152) 출 7:5, 17; 8:10, 22; 9:14-16, 29; 10:2; 11:7; 12:31-32; 14::4, 18, 30.
153) 신 4:24; 수 24:19.
154) 신 32:16; 신 6:15; 신 29:20; 신 32:16; 겔 8:3; 겔 8:5; 겔 16:42; 겔 23:25; 겔 36:5-6; 겔 38:19; 나 1:2; 습 1:18; 습 3:8. 부족하지만 새번역 성경으로 찾아야 찾을 수 있다. 개역개정에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지 않다.
155) 창 12:1-3.
156) 출 19:4.
157)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이 본문은 바울이 로마서 10장 18절에서 인용한 시편 19편 4절로써 히브리 원어에서는 온땅에 퍼졌고,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가 과거형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때 이루어진 일이며, 앞으로 일어날 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시편기자가 시편을 저술할 때, 하나님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을 시편기자를 통하여 선포하신 것이 과거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때 이미 이루었다고 믿었다. 이 본문을 70인역 헬라어로 번역할 때 동일하게 과거형으로 번역하였다. 바울은 이 본문을 그대로 과거형으로 로마서에서 인용하였는데, 과거용법인 시편 19편 4절의 말씀이 자신의 시대에 실현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시대부터 초대교회시대까지 이 용법이 이스라엘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58) 헨리 블렉가비,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여주봉 역, 서울:요단출판사, 2001. pp. 21-22.
159) 요 4:34.
160) 헨리 블렉가비, op. cit., p. 22.
161) 잠 9:15; 전 10:3.
162) 창 47:9; 신 1:31; 수 5:4; 수 5:5; 삼상 24:19.
163) 삼상 1:15; 삼하 15:34; 욥 13:16; 욥 24:22; 욥 29:25; 욥 36:26; 잠 19:5; 전 6:7; 렘 8:18; 애 3:20; 애 3:51; 나 3:19; 눅 5:19; 눅 7:42; 요 15:22; 히 12:25.
164) 창 28:20; 출 23:20; 33:3; 신 28:29; 수1:5; 1:8; 삼상 26:25; 욥 13:27; 19:8; 22:28; 30:12; 31:16; 시 2:12; 18:32; 139:3; 잠 2:8; 3:6; 3:23; 5:21; 11:5,20; 12:26, 28; 13:6; 16:9; 18:16; 20:24; 21:8; 22:5; 31:3; 사 26:7; 45:13; 8:15; 렘 2:17; 23:12; 렘 32:39; 암 2:7.
165) 수 23:14; 욥 16:22; 왕상 2:2.
166) 사 사 35:8, 9.
167) 사 42:16.
168) 사 43:19.
169) 렘 50:5.
170) 욥 28:26; 38:25; 사 43:16.
171) 옵 1:14.
172) 시 4:1.
173) 겔 21:19-21.
174) 신 17:16; 28:68.
175) 렘 50:6.
176) 민 24:25; 왕상 1:49; 9:6; 22:43; 22:52; 왕하 13:2; 13:6; 13:11; 16:3; 17:13; 19:28; 19:28; 19:33; 왕하 21:21; 21:22; 22:2; 대하 7:14; 21:6; 21:11; 21:13; 22:3; 28:2; 느 9:35; 욥 22:15; 31:7; 34:27; 36:21; 시 1:1; 1:6; 14:3; 35:6; 36:4; 37:7; 53:3; 58:3; 106:6; 119:67; 119:101; 119:104; 125:5; 131:1; 146:9; 잠 1:15, 19; 2:15; 4:14, 15, 18, 19; 5:6, 8; 7:25, 27; 13:15; 15:9; 16:29; 11:9; 사 8:11; 19:13; 47:10; 55:7; 57:17; 59:7; 59:8; 65:2; 렘 8:6; 15:7; 18:11; 21:8; 23:13, 26:22; 32; 35:15; 36:3, 7; 겔 3:18, 19; 13:22; 18:23; 20:43; 20:44; 23:13; 33:8, 9, 11; 44:10, 15; 48:11; 단 9:13; 호 2:6; 4:12; 암 2:4; 욘 3:8, 10; 슥 1:4; 마 10:5; 행 13:10; 롬 2:19; 3:12, 16; 딤전 5:15; 딛 3:11; 히 2:1; 3:10; 히 5:2; 약 5:19, 20; 5:19; 유 1:11; 1:13.
177) 시 78:50; 시 80:12; 잠 2:18; 렘 4:7; 호 13:7; 계 16:12; 계 15:3.
178) 출 18:20; 신 30:16; 32:4; 삼상 8:3; 8:5; 삼하 22:22; 왕상 11:33; 욥 23:11; 시 23:3; 25:8; 37:14; 39:1; 44:18; 50:23; 51:13; 95:10; 101:2; 107:7; 119:3; 119:5; 119:9; 119:15; 119:26; 119:27; 119:29; 119:30; 119:32; 119:33; 119:35; 119:37; 119:105; 119:168; 119:176; 139:24; 143:10; 잠 2:5; 2:9; 2:13; 2:20; 3:32; 4:11; 4:27; 5:23; 6:22, 23; 8:20, 32; 9:6; 10:17; 11:3; 14:2, 8, 12, 22; 15:10, 19, 21; 16:17, 25, 31; 21:16; 22:6; 23:26; 28:6, 10; 전 12:10; 사 2:3; 3:12; 30:21; 42:24; 48:17; 53:6; 55:6; 57:2; 사 58:2; 렘 6:16; 7:23; 26:3; 겔 3:20; 단 9:13; 호 14:9; 미 4:2; 말 2:6, 8; 마 22:16; 막 12:14; 벧후 2:15; 히 3:10; 엡 2:1-3.
179) 마 3:3; 막 1:3; 1:2, 수 2:16; 사 40:3; 사 62:10; 말 3:1.
180) 창 24:40; 출 13:18; 13:21; 신 1:22; 1:33; 19:9; 28:25; 수 3:4; 삿 18:5; 18:6; 삼상 9:6; 9:8; 왕하 3:8; 느 9:12; 9:19; 시 5:8; 25:4; 32:8; 37:5; 37:23; 142:3; 143:8; 잠 14:32; 19:3; 렘 42:3; 롬 1:10; 고전 10:13; 고후 2:12; 살전 3:11.
181) 신 8:2; 24:9; 신 25:17; 욥 28:23; 38:20; 시 25:8; 43:3; 86:11; 138:7; 25:12.
182) 사 57:14; 렘 31:9.
183) 사 55:8, 9.
184) 시 77:13; 77:19; 84:5; 85:13; 잠 3:17; 렘 3:21; 21:8; 겔 14:11; 호 7:13; 합 3:6.
185) 출 32:8; 신 8:6; 28:9; 31:29; 삿 2:17; 2:22; 왕상 2:3; 2:4; 8:25; 대하 6:16; 6:31; 17:3; 21:12; 27:6; 34:2; 욥 4:6; 24:13; 28:7; 시 1:6; 16:11; 17:5; 18:21; 23:3; 81:13; 잠 2:19; 사 63:17; 렘 4:18; 5:4, 5; 렘 18:15; 렘 31:21; 애 3:40; 겔 13:22; 미 4:2.
186) 마7:13-14; 마 21:32; 막 2:2; 눅 1:79; 눅 20:21; 행 18:25.
187) 행 2:28; 요 14:4.
188) 요 14:4-6; 행 2:28; 16:17; 히 9:8; 10:20; 행 9:2; 24:14; 24:24; 롬 3:17; 히 10:20; 벧후 2:2; 2:21.
189) 왕상 8:58; 사 11:16; 눅 13:33; 행 20:24; 히 11:25; 딤후 4:7.
190) 출 33:13; 왕상 8:36; 대하 6:27.
191) 출 32:4.
192) 마틴 로이드존스, op. cit., p. pp. 324-325.
193) 구약에서는 남은자에 대한 다양한 사상들이 있다.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선자자가 말한 것 같이, 여기서는 하나님의 선택, 완전히 멸하지 않고 남겨 놓은자, 회복시킬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194) 출 34:13,14.
195) 출 34:14.
196) 마 22:34-46.
197) 마 22:36-38.
198) 마 22:46.
199) 마 15:2.
200) 눅 14:3.
201)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202) 에두아르트 로제, 「신약성서신학」 박두환 역, (서울:한국신학연구소, 2002) p. 42.
203) 강병도, QA시스템 성서연구 시리즈, (서울: 기독지혜사, 2001) p. 26.
204) Ibid.,
205) 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윤종석 역, 서울:복있는사람, 2007. pp. 130.
206) 달라스 윌라드, op. cit., pp. 126-127.
207) 달라스 윌라드, op. cit., p. 129.
208) C. H. Dood, The Parable of the Kingdom, New York:Charles Scribner's Sons, 1958. p. 34.
209) 달라스 윌라드, op. cit., p. 131.
210) G. E Ladd, "하나님 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 신성종역, 서울:성광문화사, 1982. p. 84.
211) Joachim jeremias, "신약신학", 정광욱 역 (서울:엠마오, 1977), p. 148.
212) e[rcomai- 마 6:10, 눅 11:2, 막 9:1, 눅 17:20, 눅 22:18; εττιξειν - 막 1:15, 마 5:17, 마 10:7, 눅 10:9, 11, 눅 21:31; φθανειν - 마 12:28, 눅 11:20, 눅 19:11.
213) divdwmi - 눅 12:32, 눅 22:29, 막 4:11.
214) εισερχεσθαι
215) eijsevrcomai - 막 10:15; 눅 18:17, klhronomevw - 마 25:34.
216) 마 6:10.
217) 달라스 윌라드, op. cit., p. 125.
218) 1996년도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권종선 교수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임재방식의 변화와 권세에 대하여 언급하며,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구절들을 소개한 바 있다. 본인은 권종선 교수의 연구 중이었던 가르침을 지금, 본 연구 논문을 통해 완성하게 되었다.
219) 요 10:24.
220) 요 10:30.
221) 요 1:18.
222) 요 5:17.
223) 요 1:19.
224) 요 1:20.
225) 요 10:30.
226) 요 14:7-8.
227) 요 1:21-30.
228) 막 2:10.
229) 눅 4:32.
230) 막 1:27.
231) 요 17:2.
232) 권종선 교수, 침례신학대학원 신약개론 강의중.
233) 요 5:17, 19-20.
234) 마 26:36; 막 14:32-42; 눅 22:39-46.
235) 막 13:32.
236) 막 16:19.
237) 행 2:36.
238) 행 3:13.
239) 요 17:2.
240) 요 8:58.
241) 요 3:13.
242) 요 14:23.
243) 로버트 스타인, 「메시아 예수」 황영철 역, (서울 : IVP, 2001) p. 89.
244) 눅 1:35.
245) 눅 3:23-38에 나오는 모든 족보 이전에 그리고 창세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있었다.
246) 눅 1:31-35.
247) 막 2:5, 마 9:1, 눅 5:21-23.
248) 막 2:10, 눅 5:24.
249) 마 9:13, 막 2:17, 눅 5:32.
250) 눅 5:27-32. 막 5:17.
251) 눅 7:48.
252) 눅 5:34-35.
253) 막 2:19.
254) 눅 5:38-39.
255) 마 12:38-42.
256) 요 8:53.
257) 로버트 스타인, op. cit., p. 169.
258) 요 4:12.
259) 마 12:6.
260) 마 6:5.
261) Ibid.,
262) 막 1:27. 눅 4:36.
263) 마 15:32-39, 마 16:5-12, 막 8:1-10, 막 8:14-21.
264) 막 2:28, 마 12:8, 눅 6:5.
265) 마 5:31-32, 38-39; 막 10:2-12.
266) 막 7:1-23.
267) 눅 6:9.
268) 눅 20:2, 마 21:23, 막 21:27.
269) 마 3:13-17, 막 1:9-11, 눅 3:21-22.
270) 마 4:1-11, 막 1:12-13, 눅 4:1-13.
271) 마 9:33.
272) 막 1:24.
273) 막 3:11.
274) 막 5:7.
275) 눅 8:31.
276) 눅 10:18.
277) 마 10:1.
278) 베드로 장모의 치유(막 1:23-28; 눅 4:31-37, 중풍환자(마 9:1-8; 막 2:1-12:5; 5:17-26), 손마른자(마 12:9-14; 막 3:1-6; 눅 6:6-11), 혈루병여인(마 9:20; 막 10:46-52; 눅 18:35-43), 여리고 두소경(마 20:29-34; 막 10:46-52; 눅 18:35-43), 백부장 여인(마 8:5-13; 눅 7:1-10), 두소경(마 9:27-31).
279) R. C. Lenski, "마가복음 주성상", 배영철 역, 서울: 백합출판사, 1976. p. 83.
280) 풍랑을 잠잠케 한 것(마8:23-27; 막 4:35-41; 눅 8:22-25), 물위를 걸음(마 14:22-23; 막 6:45-52), 무화과 나무저주(마 21:12-22; 막 11:12-25; 눅 19:45-46).
281) 마 9:18-26; 막 5:22-24, 35-43; 눅 8:41-42, 49-56.
282) 요 2:11.
283) 막 4:35-41.
284) 요 9:32.
285) 마 10:1.
286) 눅 15:10.
287) 로버트 스타인, op. cit., p. 170.
288) 마 11:6; 막 8:34-38; 9:37.
289) 눅 14:26.
290) 마 25:31-46.
291) 마 5:42에 예수님은 가르침을 통해 집회서 4:4-6을 인용하였고, 막 4:25에서는 제2 에스드라 7:25을 인용하였다.
292) 마 11:25-27.
293) 마 23:29-39.
294) 막 1:8. 눅 3:16.
295) 마 3:12. 눅 3:17.
296) 눅 5:8.
297) 눅 5:10-11.
298) 막 5:6.
299) 마 2:2, 8, 11.
300) 마 8:2.
301) 마 9:18.
302) 마 14:33.
303) 마 15:25.
304) 요 9: 38.
305) 마 20:20.
306) 마 28:9.
307) 마 28:17.
308) 눅 24:52.
309) 마 9:27; 15:22; 막 10:47-48; 눅 7:39; 24:19.
310) 마 1:1,6; 눅 3:31.
311) 마 21:11, 46; 막 6:4, 14-15; 8:27-28; 눅 7:39; 24:19.
312) 마 16:14.
313) 신 18:15.
314) 로버트 스타인, op. cit., p. 171.
315) 마 7:21-23; 눅 6:46.
316) 게할더스 보스, 「예수의 자기계시」 이승구 역, (서울:엠마오 1986) pp. 132-157.
317) 시 2:7; 삼하 7:14.
318) 제2 에스드라서 7:28; 13:32, 37, 52; 14:9; 에녹서 105:2.
319) 롬 8:14; 갈 3:26; 4:5-6.
320) 막 12:6; 요 3:16.
321) 갈 4:7.
322) 로버트 스타인, op. cit., p. 173.
323) 요 4:25-26. 막 8:27-30. 막 15:2.
324) 로버트 스타인, op. cit., p. 174.
325) 마 26:63-64.
326) 게할더스 보스, op. cit., p. 131.
327) 공관복음에 69회, 요한복음에 13회.
328) 로버트 스타인, op. cit., p. 176.
329) 김세윤, 「그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홍성희 & 정태엽 역. (서울:엠마오. 1992) p. 172.
330) 고후 5:21.
331) 벧전 2:21-25.
332) 벧전 3:18; 요일3:7.
333) 요일 3:5.
334) 벧전 1:19.
335) 요 1:29, 36; 계 5:6-6:5; 12:11; 14:1.
336) 고전 5:7.
337) 엡 5:2.
338) 계 5:6.
339) 눅 5:52.
340) 마 4:2.
341) 요 19:28.
342) 요 4:6.
343) 마 16:15.
344) 마 16:16.
345) 삼하 7:12-16.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는데, 왕을 하나님의 합법적인 아들로 선언하신다.
346) 말 1:16. 이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은 제사장을 의미한다.
347) R. H. Fuller, The Foindations of New Testament Christology, New Yark: Charles Scribner's Sons, 1965. p. 32. 쿰란 문서와 관계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연구는 D.G. Chen, God as Father in Luke-Acts, 제2장 2절 참고.
348) 그리스 문학에서는 아레탈로지(aretalogy)라는 문학형태로 훌륭한 사람의 뛰어난 생애와 경력을 표현한 문학형태가 있다. 기적적인 탄생과 조상이 신인점, 초자연적인 재능과 기적, 훌륭한 가르침, 순교적인 죽음이 특징이다. 헬레니즘에서는 신의 아들이라는 개념이었고 인간을 신으로 믿었던 경우도 있다. J.Z. Smith, "Good News Is No News: Aretalogy and Gospel", in J. Neusner, Christianity, Judaism and othe Greco-Roman Cults: Studies for Morton Smith at Sicty vol. Ⅰ (Leiden: Brill, 1975), 21; M. Hades, M. Smith, Heroes and Gods, p. 405. 참조.
349) 마 16:21.
350) 마 28:9.
351) 마 28:17.
352) 눅 24:52.
353) 마 28:18-20.
354) 요 16:7.
355) 요 14:16.
356) 요 14:26.
357) 요 15:26.
358) 요 16:17.
359) 행 1:8.
360) 요 16:33.
361) 요 14:20.
362) 요 17:23.
363) 요 15:4-7.
364) 롬 5:11.
365) 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p, 427; 재인용 form Albert Sch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William Montgomery (New York: Henry Holt, 1931), 8장 ,pp. 160-176은 지금도 아주 소중한 것이다. 특히 164-170쪽을 보라. 다음 책도 참고 James Stewart, A Man in Christ(New York: Harper & Brothers, 1935).
366) 배재욱, “바울의 생명 사상 Ⅱ: 예수의 생명이해”, 기독교 사상 578(2007년2월호), pp. 204-205.
367) 막 9:43-47절에서 ‘생명’과 ‘하나님 나라’는 평행을 이루고, 눅 18:29-30절에서 ‘생명’과 ‘하나님 나라’는 서로 연결된다. 요 3:3-5절에 ‘하나님 나라’란 말이 나오지만, 요한복음에서 영생이 하나님 나라와 평행이 된다. 막 10:17-31은 ‘생명과 구원’이 평행되고 있다. 막 10:17에서 ‘영생’을, 10:23-25절에서 ‘하나님 나라’, 그리고 10:26에서 ‘구원’이 평행을 이루며 한 가지 목표를 지향하는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다. 배재욱, "신약성경의 생명 사상에 대한 고찰", 선교와 신학 제22집,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2008. pp.45-82.
368) 요 1:25, 14:6; 계 1:18. 김문경, 요한신학, 서울:한국성서학연구소, 2004. p. 173.
369) 요한복음에서 생명이라는 단어를 19번 사용하였고, 영생이라는 표현을 20번 사용하였다.
370) 요 5:26; 6:57.
371) 배재욱,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고”, 선교와신학 제14집(2004), p. 217.
372) 요 17:3.
373) 요 11:25.
374) 요 4:10.
375) 요 7:38.
376) 요 6:63.
377) 요 14:6; 3:16; 5:24; 20:31.
378) 배재욱,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고”. op. cit., p. 212.
379) 배재욱, "신약성경의 생명 사상에 대한 고찰", op. cit., p. 61.
380) 달라스 윌라드, op. cit., p, 427.
381) 요일 1:1.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신인동형동성(Anthropomorthpism)적으로 표현하였다.
382) 요일 1:12.
383) 제리 브릿지즈, 「넘치는 은혜 변화되는 삶」, 조성동 역, 서울:네비게이토 출판사, 1994. p. 21.
384) 행 20:24.
385) 롬 3:23-24.
386) 엡 3:7-8.
387) 갈 1:15.
388) 고후 1:12.
389) 고전 15:10.
390) 고후 12:9.
391) 롬 3:23.
392) 박민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교의적 연구”, 광신대 신학대학원, 2011. p. 13.
393) 여주봉, 「십자가의 복음Ⅱ」, 서울:요단출판사, 2011. p. 26.
394) 달라스 윌라드. op. cit., p. 429.
395) Alfred Edersheim, Life and Times of Jesus the Messiah. Grand Rapids: Eerdmans, 1971. p. 396. 참조.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선정하고 다른 구약의 모든 성경은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의 우월성을 주장하였다. 타헤브(Taheb: 스승)가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 오는데 그것은 그리심 산에서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396) 달라스 윌라드, op. cit., p. 429.
397) Ibid.,
398) 마 3:11; 눅 3:3.
399) 조셉 얼라인, 「돌이켜 회개하라」, 이용복 옮김, (서울:규장) pp. 19-20
400) 조셉 얼라인, op. cit., pp. 20-23.
401) 약 2:19.
402) 조셉 얼라인, op. cit., pp. 24-25.
403) 조셉 얼라인, op. cit., pp. 25-26.
404) 찰스 G. 피니, 「구원에 이르는 회개」, 엄성옥 역, 서울:은성출판사, 1991. pp.16-17.
405) 요 8:7.
406) 마 5:28.
407) 요 5:37.
408) 고든 스미스, 「온전한 회심 그 7가지 얼굴」 임종원, (서울: 도서출판 CUP), p. 44.
409) 토저, “신앙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이다”(Faith Is a Joumey, Not a Destination), (The Alliance Weekkly 92), 45호(1975):2. 고든 스미스, op. cit.,에서 재인용.
410) 다음 국어사전, http://dic.daum.net/word/view.do?wordid=kkw000298632&q=%ED%9A%8C%EC%8B%AC (접속시간: 2012.10.23.)
411) 다음 국어사전, http://dic.daum.net/word/view.do?wordid=kkw000298289&q=%ED%9A%8C%EA%B0%9C (접속시간: 2012.10.23.)
412) 마 28:19-20.
413) 고든 스미스, op. cit., pp. 207-208.
414) Francis Brown, The Brown-Driver-Briggs Gevrew and English Lexicon (Peabody, Massachusetts: Hendrickson Publishers, Inc., 2003 reprint), p. 637.
415) 조용현, 구약의 회개 구약의 회개 -슈브(bWv)를 중심으로, 2012.08.02, http://blog.daum.net/jesussheep/469. (접속시간: 2012.10.23.)
416) 렘 3:22.
417) 렘 3:23.
418) 렘 3:25.
419) 렘 3:25.
420) 렘 4:1-2.
421) 존 콜쿤, 참된 회개 홍상은 역, (서울:지평서원.2007). pp. 58-65.
422) Ibid., pp. 41-42.
423) J. Goetzmann, "μετάνοια," The New Interm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Vol, Ⅰ, p. 357.
424) 눅 10:13, 11:32.
425) 막 1:15.
426) 행 2:38, 3:19, 5:31, 8:22.
427) 행 2:38, 11:18.
428) 롬 2:4.
429) 롬 2:5.
430) 딤후 2:25.
431) 히 6:1.
432) 벧후 3:3 이하 단락.
433) 장성민, 신약의 회개-메타노이아(metanv oia)를 중심으로, 2012.08.02, http://blog.daum.net/
jesussheep/469. (접속시간: 2012.10.23.)
434) 마틴 로이드존스. 「부흥」, 서문강 역. 서울:생명의말씀사, 2009. p. 85.
435) 마틴 로이드존스, op. cit., p. pp. 224-227.
436) Ibid.,
437) 고든 스미스, op. cit., pp. 36-40.
438) Ibid.,
439) 마틴 로이드존스, op. cit., pp. 204-205을 참조.
440) 사 6:5.
441) 마틴 로이든존스, op. cit., p. 227.
442) 고후7:11.
443) 마틴 로이드존스, op. cit., p. 228.
444) Ibid.,
445) 출 33:4.
446) 출 34:14.
447) 눅 18:9-14.
448) 조나단 에드워즈, 「영적 감정을 분별하라」 김창영 역, 서울:생명의말씀사. 2001.
449) 고든 스미스, op. cit., p. 166-172.
450) Ibid., pp. 60-61.
451) C. Brauer Jerald, Conversion:From Puritan to Revivalism, Joumal of Religion 58. 1978, p. 233.
452) 마틴 로이드존스. op. cit., p. 162.
453) Ibid.,
454) 출 33:3.
455) 공동번역 개정판, 빌 3:10-11.
456) 마 16:27.
457) 눅 18:18-22.
458) 눅 13:3-5.
459) 눅 13:6-9.
460) 눅 14:33.
461) 눅 9:62.
462) 눅 9:23.
463) 고든 스미스, op. cit., p. 207.
464) 성서백과대사전편찬위원회, “성서백과대사전”, 12월 (서울:성서교제간행사, 1982), p. 157.
465) 부흥을 경험한 조나단 에드워드와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앞서서 일하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살아갈 때에만 회개가 일어났었다. 모두 경험에서 나온 것이며 성서적으로 증명 가능한 것들이다. 회개는 극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이라기보다 사람이 분별하는 어떤 것이라 하였다. 회개는 흔히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임재하셔서 일하시는 아주 미묘한 방법을 인식하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다. 고든 스미스, op. cit., pp. 164-165. 나는 회개를 경험한 자만이 조나단 에드워드와 청교도들이 회개에 대하여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것을 경험하였으면 좋겠다.
466) 고든 스미스, op. cit., pp. 187-195.
467) 조셉 얼라인, op. cit., p. 32.
468) Ibid., 34.
469) 고든 스미스, op. cit., p. 161.
470) Amos N. Wilder, Jesus' Parables and the War of Myths, Philadelphia: Fortless Press, 1982. pp. 63-87.
471) 마 13:13.
472) 마 13:17.
473) 마 13:12.
474) 마틴로이드 존스, op. cit., p. 85.
475) Ibid., pp. 100-116.
476)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웠다’는 말씀에 기초하여 임재의 시작은 회개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다.
477) 마 20:35.
478) 마 25:24-25.
479) 마 25:34.
480) 마 25:35-36.
481) 마 25:40.
482) 롬 7:18.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483) 딤전 1: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484) 마 11:28.
485) 눅 17:20-21.
486) 보(כוא)는 ‘들어가다’, ‘오다’라는 뜻으로 ‘자기 백성에게 오다’와 관련 있다. 야라드(דלי)는 ‘내려가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것’, 샤켄 (נכש)은 거주하는 하나님으로 ‘백성들 사이에 거하신다’는 의미이다.
487) C. F. Keil and F. Delitzsch, Commentery on the Old Testament, vol Ⅱ, Exodus, 김득중 역, “구약주석-출애굽기②” (서울:기독교문화사, 1987). pp. 344-355.
488) 출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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