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하나님의 은혜
(롬 3:1-31)
(로마서 3:1-31)
3:1 그러면 유대 사람의 특권은 무엇이며, 할례의 이로움은 무엇입니까?
3:2 모든 면에서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3:3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얼마가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납니까? 그들이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없어지겠습니까?
3:4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이지만,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성경에 기록한 바 1)"주님께서는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인정을 받으시고 재판을 받으실 때에 주님께서 이기시려는 것입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시 51:4(칠십인역)
3:5 그런데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내가 말해 본 것입니다.)
3:6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3:7 다음과 같이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의 거짓됨 때문에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왜 나도 역시 여전히 죄인으로 판정을 받습니까?"
3:8 더욱이 "좋은 일이 생기게 하기 위하여, 악한 일을 하자"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고 비방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3:9 그러면 무엇을 말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보다 낫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3: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시 14:1-3(칠십인역); 53:1-3(칠십인역); 전 7:20
3: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3: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3:13 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4)"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시 5:9(칠십인역),시 140:3(칠십인역)
3:14 5)"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시 10:7(칠십인역)
3:15 6)"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사 59:7; 8
3:16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다.
3: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3:18 7)"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시 36:1
3:19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3: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3:22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3: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8)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그, '속량'
3:25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3:26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다가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3:27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의롭게 됩니까? 행위의 법으로 됩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으로 됩니다.
3:28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3:29 하나님은 유대 사람만의 하나님이십니까?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3:30 참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3:31 그러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을 폐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1 유대인과 할례의 유익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이 지닌 특별한 의미에 관한 설명을 하고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어떤 민족들과도 분명히 구별된다. 세상에 있는 모든 민족들은 자연발생적 개념을 지니고 있다. 이세상의 모든 종족과 민족들은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없어지기도 하며 ,상호 합해지거나 약한 종족이 강한 민족에 흡수 통합되기도 한다.
인간의 역사는 이렇듯이 다양한 민족들의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며 이어져 왔다. 이처럼 민족이란 역사적 필연성과 더불어 지역 및 정치적 상황에 따라 생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다양한 민족들의 생성과 소멸은 인위적이고 의도적인 경향성을 띠고 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상황과 지역적 특성에 따라 부침(浮沈)을 되풀이해 왔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해 왔던 모든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은 결코 비교될 수 없는 유일한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이 아닐뿐더러 정치나 군사적 목적과 결과에 따라 세워진 것이 아니다. 그 민족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이룩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직접 조성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셋으로부터 시작하여 노아와 셈을 통해 이어지는 구속사적 혈통 가운데서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특별히 부르셨다(창12:1,2),하나님께서 갈대아우르에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악한 세상과 대치하는 개념을 지닌 이스라엘 민족을 조성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그 민족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한 신령한 도구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1,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악한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원래 살고 있던 생활에 익숙한 갈대아 우르를 떠나도록 명령하셨다. 대신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지역 곧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도록 요구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그를 통해 자신을위한 ‘큰 민족’을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상실했던 진정한 ‘복의 근원’ 이 되게 하기를 원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복’ 은 이 세상에서 만족을 누리는 복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한 본질적인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후 범죄하기 전의 아담에게 복을 약속하셨다(창 1: 28), 이는 하나님과의 흠 없는 완벽한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
그 복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연관되며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시게 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본문 가운데서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과 상이한 특별한 이유를 할례와 더불어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요청에 의해 할례를 받은 것은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의미를 지니고 았다. 즉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특별한 민족과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세상의 다른 민족들 사이에 할례를 통해 분명히 구별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할례는 단순한 육체적 시술(施術)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방 민족과 이방 종교들 가운데 존재하는 관습에 의한 할례와도 다르다. 유대인들의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언약적 할례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구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 3:1,2)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한 민족으로 조성해 저들에게 자신의 거룩한 말씀을 맡기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창 12:2)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역사상 이 세상에 존재해 온 숱한 종족과 민족들 가운데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언약적 민족은 유일하게 이스라엘 민족 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기술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 민족을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음을 말한다. 물론 그 가운데는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를 포함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진 가장 중요한 유익은 바로 그 점이라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또한 신약시대의 교회와 직접 연관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은성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교회는 곧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의 말씀을 맡은 하나님의 신령한 공동체이다.
2.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
하나님은 원천적으로 의로우신 분이다. 그의 의로운 성품은 결코 상대적이지 않으며 절대적이다. 그 성품은 다른 피조물들의 상태와 반응여하에 따라 달리 변하거나 가감되지 않는다. 나아가 인간들이 가지는 종교적 태도와 반응 역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고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이 더해지거나 악한 인간틀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이 훼손되는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와 연관하여 ‘주님의 말씀에는 항상 의가 드러나고 심판의 때에 승리하게 되리라’ (롬 3: 4)고 증언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들은 사탄의 지배아래 들어감으로써 본성적으로 거짓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는 어떠한 의로움도 남아 있지 않다. 인간들의 이성과 경험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영화롭게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의 정도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설령 인간들이 전혀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스스로 완벽하게 영화로운 분이시다.
스스로 선한 것으로 간주하는 윤리적인 행동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절대적인 선으로 볼수없다.
하지만 악한 인간들의 불의로 인해 하나님의 의가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롬 3 :5). 그것은 의로우선 하나님의 본질적 성품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의와 불의에 대한 비교적 성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분명히 드러나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의 좋은 역할이라 할 수는 없다.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낼 수 있는 긍정적이며 훌륭한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 주는 자신에게 진노를 내리시며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부당하다고 말할 것인가! 우리는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본성적으로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불의에 가득찬 악한 죄인들을 용납하시지 않고 필히 심판하시게 된다.
타락한 인간들 가운데는 자신의 거짓됨으로 인해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도리어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 아니냐며 고집스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인간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에 빠져 살아가는 것을 당연시하게 된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죄인취급 받는것을 부당한것으로 여긴다. 이는마치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 (롬 3:8)고 주장하는 이율배반적인 태도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교회를 훼방하는 자들은 ‘인간의 죄’ 와 하나님의 의’ 에 대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런 식으로 펌하하며 악한 선전을 하고 있다. 그런 인간들은 저들의 죄로 인해 마땅히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자기를 합리화 하기 위해 어설픈 철학적 논리를 내세우는 사악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인간들의 죄와 상관없는 절대적인 의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3. 인간의 불의
아담 이래 타락한 모든 인간틀은 본성적으로 불의한 존재이다. 즉 인간이 나쁜 생각을 하고 악한 행위를 하기 때문에 불의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불의한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어떤 예외적인 인물도 있을수 없다. 연령이 너무 어려서 악한 것에 대한 아무런 사고능력과 행위능력이 없다고 해도 여전히 불의한 인간이다. 심지어는 아직 세상을 보지 못한 태중에 있는 아이조차도 불의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종종 어린아이들을 죄 없이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린아이들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서 더럽고 악한 죄인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민족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헬라인들을 비롯한 모든 이방 종족들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정해 세우신 유대인들 역시 전적으로 불의한 인간들이다. 다양한 종족에 속한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는 결단코 빠져나올 수 없는 무서운 죄 아래 갇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또한 이에 대한 기록을 하면서 매우 중요한 언급을 하고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본성적 인간으로서는 여전히 불의한 존재임을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롬 3:9). 인간으로 존재하는 모든 자들은 예외 없이 다 죄 아래 놓여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존재이다. 이에 대해서는 구약성경이 이미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그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있다.
“기록한 바,’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펑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1-18)
우리는 이 말씀을 매우 주의깊게 상고해야 한다. 이는 윤리와 도덕적으로 악하다고 판단되는 특별한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연간들에게 해당되는 보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이에 대해서 제외될만한 예외적인 인간은 아무도 없다.
위의 본문은 ‘인간론’ 에 대한 총론이라 할 만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인간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죄에 빠져 타락한 인간은 항상 자신을 오해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들 가운데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상당한 의인이라 생각하는 자가 있는가하면, 진지한 노력에 따라 어느 정도 의인이 될 수 있을 듯이 착각하는자들도 많이 있다. 즉 인간의 삶에 대한 태도 여하에 따라 어느 정도 불의를 털어버릴 수 있는 양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배신한 자신의 불의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인간의 또 다른 죄악된 본성 가운데 하나는 결코 참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스스로 진정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다.15) 종교적으로 그렇게 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죄된인간의 욕구와 자신의 판단에 의한 종교적 추구일 뿐 참 하나님을 찾는것과 그 성격이 다르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동반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고 행위는 자기 세계 속에서 ‘조작된 하나님 만들기’ 16)에 집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인간들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부르심을 입은 성도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을 창조하기에 여념이 없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벗어나 인간적인 상상과 경험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어가는 과정일 따름이다. 죄악된 인간은 항상 성경이 말하는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신을 만들어가기에 급급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아가 인간은 본성적으로 참된 선(善)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선을 행하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음을 밝히고있다(롬 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기의 이성과 경험에 의한 판단에 따라 나름대로 윤리적인 선한 행위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선이 아니라 불의한 인간의 ‘욕망 추구’ 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판단하는 선행을 행하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을통해 삶의 위안을 받기를 즐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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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종교들이 있어 왔다. 불교, 힌두교, 유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의 구도자들은 나름대로 진리를 찾기 위해 진지한 수행을 한다. 그리고 참된 신을 찾아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고자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죄에 빠진 인간들은 결코 스스로 진리를 발견할 수 없으며 참된 하나님을 찾으려고하는 마음조차 가질 수 없다.
16) 죄에 빠진 인간들은 항상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취향에 맞는 종교적인 신을 찾는다. 그것이 여의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다음 단계로 기존에 존재하는 관념상의 신을 끊임없이 조작하기 시작한다 결코 그러지 말아야 할 기독교인들 조차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자신의 구미에 맞는 신으로 조작하기를 쉬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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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들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라고해서 인간적인 판단과 능력으로써 어떤 선을 행할 수 없다. 단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실 때 성령 하나님에 의해 진정한 선이 발생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인간의 개인적인 공로나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진정한 선을 알지 못하는 어떤 유대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영생에 관한 질문을 했다. 그는 예수님이 그에 대해 무언가 답변해 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 으로 불렀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선’ 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셨다.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걷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녹 18:18,19)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와 질문을 하는 그의 신앙을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책망하며 꾸짖으셨다. 이는 그가 영생을 얻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을 뿐 진정한 복음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죄악에 가득찬 인간은 그 자체로서 욕망의 덩어리이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목구멍을 ‘열린 무덤’ (open grave)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덤은 죽은 자의 시체를 놓아두는 특별한 공간이다. 열린 무덤이란 죽은 시체를 받아들이는 장소를 의미한다. 이땅에 살아있는 사람이 무덤에 들어가게 될리는 만무하다.
바울이 인간의 목구멍을 열린 무덤이라고 묘사한 것은 그 목구멍을 통해 죽은 시체들이 한 없이 들어간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 즉 더러운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죽은 시제와 같은 세상의 부패하고 썩은 것들을 끊임없이 흡수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들의 추악한 욕망은 끝이 없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인간의 사악한 욕망을 통해 저들의 삶 속에 들어가는 것은 썩은 시체와 같이 더러운 것들 밖에 없다. 죄에 빠진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는 채 더러운 욕망을 추구하기에 급급하다. 나아가 욕망을 충족하는 정도에 따라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감을 느끼며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적극적으로 죽음의 길을 재촉하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타락한 인간들은 끊임없이 남을 속이며 자기를 위해 모든 변명을 아끼지 않는 존재이다. 인간의 입술은 사람을 죽이는 독사의 독을 머금고있다. 저들의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 여기서 말하는 저주와 악독이란 단순한 윤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벗어난 인간의 본성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들끼리 하나님의 말씀없이 ’서로간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가는 것’ 가운데도 실상은 무서운 독이 들어 있는것이다.
그런 사악한 본성을 지닌 인간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따라서 바울은 죄된 인간들의 발은 피흘리는 데 빠르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롬 3:15). 이는 자기의 목적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무자비하게 남을 짓밟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이것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악한 습성을 일걷는 것이 아니라,타락한 모든 인간들의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삶이 예외 없이 그렇다는 것이다.
악한 인간들의 이러한 습성의 결과는 영원한 파멸과 비참한 심판을 초래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고 계시는 참된 평강의 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그러므로 저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자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이러한 모습은 죄로 인해 타락한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본성에 따른 것이다.
4. 율법과 죄
이스라엘 왕국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특별한 율법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들의 합의에 의해 제정된 것이 아니며 최고통치자인 왕이 단독으로 제정한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신령한 법이다.
그러므로 그 율법은 단순히 시민들의 질서유지를 위한 것이 아니며 국가를 지탱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었다. 물론 그런 성격을 어느정도 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가기 위한 방편으로 주어진 것이다.
구약성경의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의 일상적인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적용하도록 주어졌다.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한다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뜻에 조화되는 삶을 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 율법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실제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순간순간마다 확인되고 적용되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 자체로서 완벽하다. 따라서 죄악에 가득 찬 인간이 그 법을 온전히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법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법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그것을 온전히 지커지 못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에 대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 뿐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아래 놓여있음을 깨닫게 하고자 하셨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과 모든 왕국에 대해 실제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다. 이방인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보아 죄의 본질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이 주어진 것이 인간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는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인간은 결코 자신의 종교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아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율법을 어떻게 저들의 삶에 적용하기를 원하셨는가? 우리가 본질적으로 깨달아야 할 바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로워지고자 노력하는 존재가 아니다. 도리어 악한 인간으로서는 그 법을 도저히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크신 은혜를 기다려야 했다.
그 은혜는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구체적으로 언약하신 메시아 곧 ‘여자의 후손’ (창 3: 15)과 직접 연관된다. 죄된 인간들은 스스로도저히 지킬 수 없는 율법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점을 분명히 깨달아야만 했다.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 없이는 아무도 죄를 진정으로 깨달을 수 없다. 율법 없이 깨닫는 죄에 연관된 것들은 윤리적 의미를 지니게 될 뿐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율법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되는 죄는 하나님께 저항하는 인간 본성의 죄를 알게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바로 그 죄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 율법으로 말미암는 무서운 정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 의 의’ (the righteousness of God)가 나타났음을 말하고 있다(롬 3:21).
그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구속사 가운데 끊임없이 증거되어 왔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 ‘의’ 는 인간들의 외모와 형편에 따라 차별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뜻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교회 역시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법 테두리 안에 존재해야 한다.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인위적인 종교적 욕망을 추구하려 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항상 계시된 말씀의 테두리 안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따름이다.
5.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한 의를 추구하거나 쟁취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이 의로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요구한다. 즉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가 없이는 결코 불의한 인간이 의로워질 수 없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점이다.
죄에 빠진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떠났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인간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 놓여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인간의 경험상 이해하는 영광과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3)
타락한 모든 인간들에게는 저주와 심판으로 인한 처참한 상태가 남아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택하신 자기 자녀들을 영원한 멸망 가운데 방치하지 않으신다. 그는 택한 자녀들로 하여금 자신의 무궁한 영광에 이르도록 은혜를 베푸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땅에 약속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셨다. 범죄한 인간에 대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한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저주가 있을 뿐 결코 영원한 구원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 존재하는 자기 자녀들을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불러 의로운 자로 인정해 주셨다.
여기에는 우리가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값없이 베푸신 은혜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에게 값없는 은혜가 허락된 것은 단순한 언어적 선포에 근거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값을 대신 치렀기 때문이다.
사망에 빠져 허덕이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를 대신 죽게 하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셨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거룩한 어린양 이 되시기 위해서였다. 이는 구약성경에서 그림자로서 행해진 성전 제사를 통해 지속되었던 상징적 사역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세례자 요한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 29)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신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 하나님을 위한 화목제물(離物)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제물이 되어 성전에 바쳐지게 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가시면류관을 쓰고 날카로운창에 찔려 고통 중에 돌아가셨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으나 그의 뼈는 부러뜨려지지 않았다(요 19:34-36; 시 22 : 17; 34:2). 이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 하나님을 위한 화목제물이 되어 바쳐졌다는 사실이다. 그것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풀리게 되어 자기 자녀들을 용납하시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완벽한 희생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받으시고 범죄한 자기 자녀들과 화해의 은혜를 베푸셨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범죄한 인간들의 종교적 제사행위와 윤리적인 선행으로인해 하나님께서 진노를 푸신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죄에 물든 인간의 어떠한 종교적인 노력도 하나님의 진노를 풀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작정과 섭리에 따라 영원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받으심으로써 타락한 자기 자녀들을 용서하고 저들과 회목을 이룩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회목제물을 받으시고 자기 백성들의 그전에 지은 모든죄들을 간과하시게 되었다. 거기에는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담겨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받아들여 자기 자녀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가 구원에 참여하게 될 성도들의 의를 인정하는 필연적 과정이 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운 존재로 인정받아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이 의롭게 된 사실에 대해 스스로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했기 때문이 아니며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종교적인 선행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신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값없이 선물로 받은 믿음으로 인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펀지 가운데서 그와 연관된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8)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로운 자로 인정된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의 행위란 인간으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선행들을 포함한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는 결코 죄인이 의롭다고 하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그것이 신체적 행위뿐 아니라 정신적 행위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과 그의 모든 것을 믿어야겠다고 하는 종교적인 의지가 인간을 의롭게 하지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인간들의 판단력에 의한 종교적 결단으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서의 믿음을 의미하고 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이방인들보다 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 지역 가운데 살고있는 백성들을 포함한 선택된 모든 자녀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례와 무할례의 차이가 있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선물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로 인정받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이 무용(無用)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믿음이 구약의 율법을 폐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율법의 의미를 더욱 굳게 세우게 된다(롬 3:3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진리의 말씀을 교회의 절대적인 표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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