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예배가 답이다

하나님아들 2018. 1. 27. 00:32

                                                    예배가 답이다(시 95편)

 

에릭 리들

1942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한 영국 육상 대표 선수 리들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유명한 영화 ‘불의 전차’의 실제 주인공입니다. 그는 100m의 확실한 우승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신앙 양심에 따라 주일에 열리는 결승전에 기권합니다.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매국노라는 비난을 들었습니다. 결국 100m에는 그가 제외되고 그의 동료 헤럴드 아브라함이 출전해서 우승합니다. 에릭의 재능을 아까워한 영국 올림픽 위원회에서는 그의 주 종목이 아닌 금요일날 벌어지는 400m에 출전시킵니다. 그는 뜻밖에도 47.6의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합니다. 그는 동료와 함께 두 개의 금메달을 따서 조국에 보답했습니다. 처음에는 비난을 들었으나 마지막에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주일날 경기에 출전하지 않은 시간에 무엇을 했을까요? 그는 올림픽 촌 예배실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자신을 대신해서 출전한 친구 헤럴드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또 400m에서 우승하자 그 자리에 엎드리어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는 파리 올림픽을 끝낸 일주일 후 에딘버러 대학을 졸업합니다. 축하식장에서 졸업 소감을 묻는 질문에 그는 다시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나는 중국에 가서 생애의 남은 부분을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바치고자 합니다.

 

그는 당시 아편전쟁 및 의화단 사건으로 혼란하던 중국으로 건너가 청년 전도에 헌신합니다. 때마침 일본의 침략으로 전쟁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히지만 복음을 전해서 지옥같은 수용소를 거대한 예배당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다가 자신은 영양실조, 과로, 뇌종양으로 불과 43세에 쓰러집니다. 종전을 불과 반년 앞둔 1945, 2, 21일 그는 손을 들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다가 “나의 주님께 완전한 순종을, 순종을...” 외치며 눈을 감았습니다. 같은 수용소에 있다가 후일 대학교수가 된 랭던 칼키는 에릭 리들에 대해 이런 증언을 남겼습니다.

 

세상에서 성자를 만나볼 행운을 갖기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그런 행운이 슬며시 다가왔습니다. 그 성자의 이름은 에릭 리들입니다.

 

엎드리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든, 씨를 뿌리는 농부든, 선교사든 인생의 중심에 예배가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 신앙, 아니 삶 전체의 중심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예배라는 단어는 ‘엎어져 경의를 표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창18:8). 예배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이 역사하신 일의 영광을 깨닫고 살아 계신 그분 앞에 마음과 행동으로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경박하고 의무적인, 심지어 의무감에서조차 자유로운 예배 태도가 누룩처럼 퍼져 있습니다. 등록 교인의 수에 비해 비참할 정도로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예배에 참석합니다. 이러다가는 얼마 후에 텅 빈 교회당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정말 하나님께 예배하기조차 바쁘십니까? 예배 시간을 아끼며 살면서 그 시간으로 세상의 무엇을 얻으려고 하십니까?

 

예배의 이유

성경은 아주 단순하게 예배를 명령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안 드리고는 내 선택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이 늘 깊이 가슴에 새긴 단어는 ‘의무’라는 단어였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백성들로서 거룩한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명심했습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고, 환경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 배교적인 무 율법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1. 누구를 예배해야 합니까?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시 95:6-7).

 

왜 하필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로부터 경배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화가는 그림을 통해서 영광을 받습니다. 작곡가는 노래를 통해서 명성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으므로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 방법이 바로 예배입니다. 계시록이 이 사실을 재확인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예배는 창조자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입니다. 우주의 전 생명체가 자기 존재의 기원이시며, 유지자이시며, 목적이신 하나님을 자기 나름대로 예배합니다. 어거스틴은 나뭇잎조차도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할렐루야’하면서 주님을 찬양한다고 했습니다. 예배는 근본적으로 존재론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에는 예배가 없습니다. 그들의 가장 가까운 조상은 원숭이입니다. 원숭이를 경배할 수 있습니까? 공산주의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물질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물질과 이데올로기 숭배는 있을지 몰라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없습니다.

 

출애굽과 신 출애굽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구원의 목적이 예배입니다. 우리도 새 출애굽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죄의 세력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가 됐습니다. 이렇게 존귀한 존재가 된 목적이 무엇입니까?

 

...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십자가 중심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흠 없는 어린 양을 죽였습니다. 그 양의 피를 집의 문에 발랐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써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 어린양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를 예표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죄의 짐을 지신 어린양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드리는 것은 구원받은 자로서 마땅한 도리입니다. 한 교회가 드리는 예배의 깊이는 그들이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식하고 느끼는 정도에 비례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없는 곳에서는 성령 안에서 예배드리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십자가의 구속 사건에 감격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좋은 교훈을 주었고, 석가는 수행의 방법을 알려 주었으며, 레닌은 사상을 창시했지만 그들이 나를 위해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만이 예배 받으실 수 있습니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2).

 

가치가 있는 분

예배는 영어로 ‘worship’입니다. 이 말은 ‘가치’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예배는 가치 있는 분에게 우리의 전 가치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가치 있는 존귀한 분이십니다.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25)

 

주의 은혜를 입고서

문둥병자는 병이 낫고 난 다음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마리아는 옥합을 깨트려 주님을 예배했습니다. 내 자신이 과거에 죄의 나병환자가 아니었단 말입니까? 마귀의 종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치명적인 영적 질병과 마귀의 사슬에서 풀려났다면 그분을 경배해야 합당하지 않습니까?

 

만입이 내게 있어도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크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찬송가 23장).

 

2. 어떻게 예배드려야 합니까?

역사적으로 다양한 예배의 방법이 있어 왔습니다. 천주교와 기독교, 기독교 안에서도 여러 교파에 따라서 예배의 형태가 약간씩 다릅니다. 그러나 예배의 기본 틀은 확고합니다.

 

신령으로

예수님은 예배의 바른 방법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신령이라는 말은 ‘영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도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몸만 오면 안 됩니다. 속마음, 영혼이 와서 드려져야 합니다. 바울은 예배를 ‘심령으로 섬기는 것’(롬 1:9)라고 합니다. 다윗은 예배를 ‘심령의 제사’(시 51:15-17)라고 합니다. 심령으로 오십시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시 103:1).

 

성령께 사로잡힘

영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성령께 사로잡혀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셔서 마음을 자극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우리 마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복 돋우지 않으면 예배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죽은 자들의 모임과 방불한 집회를 뒤흔들고 격동시키는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은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찬양에 영감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기도가 향기로운 것으로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도우십니다. 예배자들의 모든 인간적인 배경과 차이를 융화시켜 하나 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주관자는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에 순종해야 하며 충만해야 합니다.

 

온 맘 다해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사오니’(시 57:7-11). 이런 마음이 없으면 예배는 쇼에 불과합니다. 스티븐 차르녹가 말했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예배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무대에서 하는 연극과 같다. 그것은 위선이다.” 우리에게 진지함이 없다면 예배를 드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예배를 드릴 수는 있지만 진지하지 못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또 우리는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근거해서 예배를 드려야 하며, 우리의 예배는 성경을 배우는 것이어야 하며, 성경에 반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배는 감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진리에 근거합니다.

 

만남의 다리

예배는 단지 손을 모아 쥐고 몸을 앞뒤로 흔드는 것이 아닙니다. 황홀경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가르침이 중요합니다. 초대 교인들은 예배에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행 2:42).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흘러넘치는 것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열정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빛도 필요합니다. 진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다리입니다. 오늘날의 예배는 ‘깨닫게 하는 요소’외에 ‘느끼게 하는 요소’와 ‘즐기는 요소’를 과도하게 도입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토마스 굳 윈(Thomas Goodwin)은 예배 중에 설교가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을 회심하도록 깨우는 말씀은 문자로서의 성경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영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설교 시간이 가장 중요한 시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골 3:16)는 예배를 사모하십시오.

 

조화

극단으로 가면 안 됩니다. 신령만 강조하면 감정적인 예배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진리만 강조하면 건조한 예배가 되어 버립니다. 두 가지를 다 추구해야 합니다. 영으로 충만한 축제의 예배와 동시에 말씀으로 진리를 깨닫는 참 자유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은 불로 타오르고, 머리는 하나님의 칼 같은 말씀으로 명료해져야 합니다. 이단교회에서 하는 예배가 왜 참된 예배가 아닙니까? 진리 가운데서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십자가가 무엇인지 모르고 박수를 치고 열광합니다. 반대로 어떤 교회의 예배는 너무 딱딱하고 죽어 있습니다. 거의 강연 수준입니다. 극단을 피하고 조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실제적인 지침

바른 예배를 위한 몇 가지 실제적인 지침을 드립니다.

 

1. 준비하고 오십시오(기도, 단정한 몸, 인간간계의 용서, 예물 등).

2. 공 예배에 빠지지 마십시오. 공 예배에 빠지고 싶은 사람은 다음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공 예배에서 죽은 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듣는 자들을 살아난다. 성자께서는 병 든 영혼들을 말씀으로 고치신다. 그 예배에서 성자께서는 사단을 쫓아내신다. 물론 하 나님께서 공적인 예배에서만 이 일을 행하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공적인 예배는 주 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행하시는 유일한 정상적인 수단이다(David Clarkson)

3. 바른 태도로 예배를 드리십시오(다리 꼬는 것, 조는 것, 잡념 금지).

4. 예배를 보지 말고 드리십시오(찬양, 기도등에 적극적 참여).

5. 집에 돌아가서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3. 예배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예배는 의무입니다. 의무를 다한다고 해서 상을 주지 않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다했다고 해서 취직 시험에 가산점을 줍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예배자에게 풍성한 복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

시편 50:23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예배를 통해 나아갈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 삶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죄용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기꺼이 포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거기에는 깨끗하게 되려는 불타는 열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시 139:23-24). 참된 예배가 있는 곳에서는 죄의 씻음이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세움을 맏는다

초대 교회가 예배를 드렸을 때 교회가 부흥되었고 세상이 변화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눈을 끌었고 역동적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강해지며 변화되어 갑니다. 예배를 드린 후에도 변화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햇빛에 노출되면 피부가 그슬리지 않고 배길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배가 끝났을 때 당신이 순종하려는 위대한 헌신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가 거룩한 기대로 시작하는 것처럼 예배는 거룩한 기대로 끝맺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배가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높아지고 인간이 존재의미를 찾습니다.

 

예배를 꿈꾸다

우리가 꿈꾸는 예배,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에 압도되는 예배, 성령의 영감으로 넘치는 예배 아니겠습니까? 죄인이 와서 ‘내가 어찌할꼬’하면서 회개하는 예배, 십자가 앞에 죄 씻음 받아 기뻐 뛰노는 축제의 예배, 이혼 위기의 가정이 회복되는 예배, 탕자 같은 자녀가 돌아오는 예배, 귀신이 항복하는 예배, 주의 치료의 광선이 나와서 치료받은 ‘여호와 라파의 예배,’ 주님 내길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예배,’ 실패하던 자가 승리하는 ‘여호와 닛시’의 예배, 넘어진 자가 일어나고, 깨진 자가 낫게되며, 불안한 영혼이 평강을 얻으며, 방황하던 영혼이 소망의 항구로 인도되는 예배, 이 땅에 사는 유한한 영혼들이 천국의 열린 문을 통해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힘을 얻는 예배, 그런 예배 아니겠습니까?

 

보물 찾기

예배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줍니다. 결혼 생활의 꿈, 사업의 미래, 자녀의 축복, 신실한 믿음, 깨어진 인간관계, 살아가야 할 이유, 영생의 소망. 그 모든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

이용규 선교사가 쓴 ‘내려놓음’이라는 책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내 몽고에는 소가 매우 소중한 재산입니다. 

보물 찾기

예배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줍니다. 결혼 생활의 꿈, 사업의 미래, 자녀의 축복, 신실한 믿음, 깨어진 인간관계, 살아가야 할 이유, 영생의 소망. 그 모든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

이용규 선교사가 쓴 ‘내려놓음’이라는 책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2005년 봄, 몽골 이레 교회에서 개척한 베르흐 지역의 예배 처소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리던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벌러르라는 자매가 예배 시간에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교회에 들어 왔습니다. 그녀는 몇 달 전 선교사 팀의 기도를 통해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자매였습니다.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 버려서 소를 찾으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를 버려두고 말씀을 들으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 왔다는 것입니다. 내 몽고에서는 소가 유일한, 가장 큰 재산입니다. 선교사는 그녀가 소가 아닌 예배를 선택한 그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지 않게 해달라고, 다시 소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배를 마치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잃었던 소가 마구간이 아닌 예배 처소를 찾아 온 것입니다. 소가 아닌 예배를 선택한 그녀는 예배와 소, 두 가지를 함께 얻었습니다. 예배의 능력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예배의 능력을 믿습니까? 당신도 소 대신 예배를 선택하시렵니까?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토록 헤매도 찾지 못했던 인생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찾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예배로써 헌신하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 헌신하십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위해 일하시게 하십시오.

 

출처 : 연길파예수님의제자
글쓴이 : dreamdream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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