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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학1) 의 연구방법론 소고

하나님아들 2018. 1. 16. 23:55

영성학1) 의 연구방법론 소고
(A Study on Methodological Approach to Spirituality)


들어가는 말

영성이라는 용어가 그 동안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 영국성공회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만, 개신교인들2) 에게는 낯선 용어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성”이란 세상을 경멸하고, 역사를 도피하는 내면적 삶에 집착하는 나머지 열광주의와 신비주의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내면적인 삶에 대한 의미로 ‘영성’이라는 용어 대신에 개혁교회에서는 ‘경건’(piety)을, 웨슬리안 계통에서는 ‘완덕’(perfection)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그러나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교회일치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로마 가톨릭적인 이 용어가 점점 보편화 되기 시작했다.3) 개신교회에서는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적인 의미를 채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의미를 자신의 전통 안에서 포괄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4)
프린스턴 신학교의 훼어차일드(Roy W. Fairchild) 교수는 오늘 우리를 좌절케 하는 것은 개신교의 주류에서 영정적 경험과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전통과의 관계를 씨름하는 것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교회나 신학교에서 다양한 영적 경험의 표현들을 다루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를 다루어 주지 않음으로서 혼란과 불확실성을 야기한다. 오늘날 우리는 영혼의 내적인 양육을 목말라 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라고 웨어차일드는 지적한다.5) 이렇게 절실한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점점 빈번하게 사용하는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영성”이 무엇이냐에 대한 혼란은 여전하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만한 영성의 정의나 분석이나 분류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6) 그래서 영성에 대하여 보다 선명한 정의가 필요하며, 영성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나 그 연구방법론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1. 영성의 회자(膾炙)의 배경

1960년대 이래로 서구에서는 의식의 폭발이 일어나면서 영성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여기에 기여한 외부적인 요소들은 동양의 영적 스승들과 내적인 삶의 차원을 궁구하는 심층심리학이 기여한 바가 크다.7) 동양의 스승들을 중심으로 요가나 선수행을 통한 내적인 평화와 인간의 잠재성 개발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동시에 학문적인 영역에서는 동양의 사고나 고대의 종교사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교회는 자기 자신의 전통 안에서 영성을 새롭게 발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8) 서구교회 안에서는 이즈음 많은 질문이 터져나왔다. 기독교는 어떤 영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에게 어떤 수행방법이 있는가 특히 기독교적인 명상기법은 무엇인가? 영성적인 실천이나 훈련은 무엇이 있는가? 있다면 어디에서 그런 것들을 발견해야 하는가?9) 이 물음들을 탐구하는 동안 교회 안에서는 관상적인 체험에 대한 재발견과 카리스마적인 성령운동 등이 일어났고, 이러한 운동들이 영성에 대하여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를 했다.
뿐만 아니라 현대문명의 영향도 영성에의 관심을 고조시키는데 일조를 하였다. 첫째, 전통에 매여진 사회에 비할 때 다원주의적인 사회는 개인에게 거의 무한한 선택의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이 폐쇄된 사회문화적 공간으로부터 보다 열려진 사회문화적 공간으로 확대되면서 다른 세계의 전통을 쉽게 접하게 된다. 그러한 전통의 교류를 통하여 인간의 내면 세계에 대한 신비가 조금씩 벗겨지면서 더욱 더 내면세계에 대한 갈구가 더해지고 있다. 둘째, 극도의 개인주의와 소외감은 종교적 관심을 증가하게 한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 확립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으며, 보다 다양한 전통을 지닌 사람들과의 만남을 갈구하며, 그 세계와 우주적인 교통을 목말라하고 있다. 사람들은 형식적이며 기계적이며 피상적인 사람들과의 만남에 식상해 하며, 그러한 사회의 통제를 벗어나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려는 몸부림을 하고 있다. 그래서 마약이나 신비적 경험 등을 추구하기도 한다. 셋째, 우리의 고도의 기술문명에 대한 반발로서 영적인 경험을 요구하고 있다. 컴퓨터의 문화, 속도문화, 의미없는 반복성 등을 벗어나 보다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경험을 요구하고 있다.10) 이러한 움직임들이 더욱 더 영성과 영성적인 의미를 희구하게 한다.

2. 영성의 의미

“만약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기 원한다면(당신 자신과 모든 것을 뛰어넘어 초월적인 하나님의 빛에 다달으려면), 교육대신에 은총을 간구하라. 이해하려하기 보다는 열망하라. 부지런한 독서를 하기보다는 절규하는 기도를 하라...”11)
이 글에서 교육과 이해와 독서는 기독교적 신학에 해당하는 말이며, 은총과 열망과 기도는 기독교적 영성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 두 관계는 서로 상호보완적인 작용을 통하여 성숙한 단계로 안내되어야 하지만, 보나벤투라 당시 스콜라주의 시대에는 지성주의와 열광주의(반지성주의)라는 갈등적인 상황으로 두 영역이 대립되어 있었다. 그 이후 기독교 역사적으로 볼 때 신학과 체험적인 하나님의 지식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보다는 서로 갈등적인 관계를 유지해온 것이 사실이다. 전자는 지식과 사상과 이론의 길이요, 후자는 사랑과 기도와 삶의 길이다. 후자는 전자에 대해서 신뢰를 보내지 않고, 전자는 후자에 대해서 신뢰를 보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로너건은 신학과 영성의 통합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영성의 두 자기의 대원칙은 ‘자신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자신의 변화를 위하여 훈련에 투신’하는 것이라고 한다.12)
영성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정의로서는 단순히 독특한 “삶의 스타일”(life-style)이라고 묘사하는 예이다. 개인의 영성은 근본적인 가치에 따라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는 의미이다. 스위스의 신학자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는 “자신의 삶 전반을 걸쳐 객관적이고 궁극적인 통찰력과 결단에 따라서 습관적으로 행동하고 반응하는 방식”을 영성이라고 말한다.13) 그런데 이러한 정의는 거의 완벽하고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것도 분류하고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 주지 않기 때문에 그 정의를 영성학의 방법론의 틀로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다. 특징이 없는 정의는 분석할 수 있는 준거의 틀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14)
보다 분석적이고 영성학의 틀로서의 유용한 정의로서는 첫 번째, 영성은 하나님과 관계된 인간의 신비적 깊이를 다루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된 존재란 자기몰두에서 궁극적인 가치를 향한 자아초월적인 능력을 말하며, 하나님을 향한 자아초월적인 경험을 현실 세계 안에서 통합하려는 의식적인 투쟁의 과정을 말한다.15) 두 번째, 영성의 정의는 개인적인 성장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영성은 인간조건을 특징짓는 자아초월적인 경험이 현실적인 삶으로 통합되어지는 동안 겪는 내적인 자기성장의 과정이기도 하다. 영성적인 삶이란 영성적인 존재인 인간이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삶 속에서 부적합한 선택으로부터 적합한 선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끊임없는 몸부림 자체이다.16) 즉 “영성이란 부적합성(the inauthentic)으로부터 적합성(the authentic)으로의 변증법적인 개인적 성장의 표현이다. 변증법적이라는 말은 모든 영적인 성장은 동시적으로 한 쪽에 대해서 ”예“라고 한다면 다른 쪽에 대해서는 ”아니오“라고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적합한 것으로의 각 단계는 부적합한 것에 대한 상응적인 부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17) 인간에게 있어서 적합성이란 사랑 안에서의 완전한 자아초월을 의미하며, 반대의 경우인 전적인 부적합성이란 증오 안에서의 완전한 자기몰두와 자기중심주의이다.
루이 부이(Louis Bouyer)는 영성생활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위하여 이와 유사하게 사용되고 있는 영성생활(spiritual life), 내면생활(internal life), 종교생활(religious life)이라는 용어들을 제시하면서 보다 분명한 영성생활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18) 이 세 부류의 말들이 어떤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가? 영성생활을 곧바로 내적생활로 환원할 수 있는가? 혹은 영성생활을 곧바로 종교생활과 동의어로 사용할 수 있는가? 적어도 기독교적 영성생활에서는 구분되어져야 한다. 만약 영성생활과 내면생활을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시인이나 음악가나 기타 예술가나 그리고 철학가들을 일컬어 영성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내면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로서 충분하다. 거기에 ‘영성생활’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예술 활동이나 형이상학적인 작업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실존과 반드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영성생활을 종교생활과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경전을 읽고, 정기적인 예전에 참여하고, 종교의식에 꼬박 꼬박 잘 참여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영성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어색한 일이다. 내면적인 경험이나 내면적인 숙고나 결단이 없이도 예전적이고 의례적이고 문화적인 종교생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현실적으로 보아도 오늘 모든 종교인들이 영성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만 생각하여도 그들 모두가 영성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성생활은 반드시 의식적인 자아성찰과 심층적인 내면생활, 그리고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일정한 예배와 의식에 참여하고, 초월세계에 대한 갈망과 추구가 있어야만이 성립할 수 있는 용어이다.
이제 범위를 좁혀 기독교 영성적인 측면을 생각해 보자. 두 상반된 세계, 자연과 초자연, 현상과 신비, 시간과 영원을 통합시키는 능력이 우리의 영에게 있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여러조치가 영성생활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능력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지, 자발적으로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활동성은 아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자발성을 상실한 가능태적인 영성에 불과하므로 영성생활을 통하여 활동태적인 영성으로 회복시켜 가야한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영성생활을 단순하게 “영성의 회복과정”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성을 회복하게 하는 완전한 모델이 되신다. 동시에 그 자신이 이 모델을 이룰 수 있는 능력으로서 우리에게 임하신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이란 언제나 그리스도의 영(혹은 성령)이 우리 영(가능태적인 영성)에 침투됨으로서 이루어지며, 그것은 곧 온전한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새로운 인간성의 형성을 지향하는 것이 기독교 영성의 길이다. 성경은 그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새로운 인간성이란 죄로 인해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치유함을 받고, 타락한 인간이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대로 변모(transformation)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라고 되어 있다. 즉 기독교적인 영성이란 우리의 영이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형성을 이루고, 그러한 자아초월적인 경험을 현실적으로 실현해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자아초월적이 능력을 실현해 가는 환경이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생명을 주고 받는 관계를 맺게 해주는 성령의 실질적인 역사라고 할 때 더욱 더 선명한 기독교 영성이 된다.19) 이러한 영성경험은 매우 개별적이고 내면적인 것이기 때문에 독특하고 다양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경험을 평가하는 방법과 기준을 설정하는 일이 영성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이다.

3. 영성에 대한 평가방법

독특한 개인경험에 기초를 둔 영성을 평가하는 방법으로서 첫째는 교회가 책임을 지고 우리 앞에 직면한 영성이 건강하고 유익한 것인지에 대한 평가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세가지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 건강한 신학을 가지고 있느냐, 건강한 정서적 느낌을 주느냐, 건강한 결과들을 낳고 있느냐이다. 건강한 영성은 복음에 기초한 교회의 공동체로부터 흘러나온 건강한 신학에 기초를 둔다. 영성은 하나의 인간의 움직임이며, 건강한 영성은 인간조건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즉 건강한 정서적 느낌을 제공해야 한다. 끝으로 건강한 영성은 좋은 결과들을 낳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에 기초한 활동이며 경험이기 때문이다.20)
두 번째는 비교대조를 통해서 누적되어가며 발전적인 결과를 생산하면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현상들과 패턴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 패턴들을 기준으로 하여 독특하게 나타나는 특성들을 범주화하여 평가할 수 있다.21) 예를 들어 ?미지의 구름?이나 십자가 요한의 작품들을 생각해 보자. 이 두 작품에서 “구름”과 “밤”은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미지의 구름?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구름”과 십자가의 요한의 작품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밤”을 이해할 때의 비교대조를 시도해 볼 수 있다. 그 결과 이 두 작품은 영성을 추구하는데 공통적으로 부정의 길 혹은 무념의 길을 선택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렇게 비교연구를 시도할 때 어떤 특정한 영성이 어떤 우주관 아래에서 형성되었는가를 숙고해야 한다. 예를 들면 [사막의 안토니오]22) 는 매우 간단한 우주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을 세상의 꼭대기에 두고, 그 위에는 마귀가 거하는 공중이 있고, 하나님이 거하는 하늘이 있다. 세상 꼭대기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에게로 가기 위해서 세상을 떠나 공중을 통과해서 올라가야 한다. 이것은 곧 마귀들의 영역을 침입하는 마귀들과의 투쟁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영성적인 투쟁은 그러한 우주관의 관점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내면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부적합성(inauthenticity)으로부터 적합성(authenticity)이나 혹은 후퇴(regression)와 변모(transformation)라는 개념은 안토니의 “위와 아래”라는 공간적인 개념과 같은 수준의 의미이다.23)
이러한 우주관은 점점 세분화되어 간다. 그리스도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해서 각 시대와 그 시대 안에 있는 사람들에 따라 각각 다른 반응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일을 함께 도모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부르는 왕으로서, 어떤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왕으로서, 혹은 이 땅의 모든 것들을 버릴 때 만날 수 있는 분으로서 이해한다.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는 이 세상을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한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기 위해 세상을 잊어버리는 대신에 복음을 위해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세상이라는 상황 아래에서 당신 자신을 따르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분이다.24) 이렇게 독특한 우주관 안에서 경험된 영성을 매우 다른 역사 문화적 상황으로부터 나온 유사한 영성적 표현들과 비교대조 함으로서 그 특징들을 범주화 시킬 수 있다.25)
범주화가 이루어지면 다양한 영성들을 특정한 범주라는 우산아래로 분류 정리하여 이해할 수 있다. 그럴 때 서로 다른 영성은 배타적이기 보다는 상호보완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고 수용하게 된다. 영성이 세상과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초월적인 경험이라고 할 때, 그들의 독특한 경험은 그들이 처하고 있는 세계관과 역사관과 밀접한 관련성을 맺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상과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서 네가지의 영성의 길을 범주화 할 수 있다. 세상과 역사 둘 모두에 대해서 부정적이면 ‘무념적 영성’(apophatic spirituality)이라 하며, 둘 모두에 대해서 긍정적이면 ‘유념적 영성’(kataphatic spirituality) 혹은 ‘사도적 영성’(apostolic spirituality)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역사에 대해서 부정적이라면 ‘하나님 도성의 영성’(city of God spirituality)26) 이라 한다. 그리고 역사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세상에 대해서 부정적이라면 그것을 예언자적 영성 (prophetic spirituality)이라 한다.27)
첫째, 무념적 영성이란 [무지의 구름]의 작가28), 십자가의 성요한29), 토마스 머튼30) 이 지향하는 영성이다. 이 영성에 대해서 신빙성 있는 주요한 표현은 특별한 상에 대한 부정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지’와 ‘어두움’을 강조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장 적합한 수단이다. 이 영성은 부정을 통한 관상적 지혜를 강조하고 그 관상의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식이다.
둘째, 유념적 영성 혹은 사도적 영성은 세상과 역사가 자아를 변화시켜 가는 적합한 장소이다. 유념적 영성의 대표적인 영성가로서 로욜라의 이냐시오31)
는 믿음의 방패와 복음의 전파 그리고 영혼의 진보를 하나의 연장선으로 보고 있다. 이것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가 제시하는 조직적인 ‘영성수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관상함으로 그리스도의 실존을 내적으로 경험하고 내면화 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적으로 실현해 가고 통합해 가는 과정으로서 사도적인 활동이 나타난다. 그래서 이 범주의 영성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 땅에 전파하기 위하여 세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동안 우리의 존재 안에서 거룩함(경건함)을 형성해가는 특성을 지닌다.
세째, 하나님의 도성(A city of God)의 영성은 세상을 향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역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영성이다. 여기서 세상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인다고 하는 것은 공간적인 개념의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특정한 장소로서의 세상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반영한다.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와의 끊임없는 투쟁의 산물이다. 이런 투쟁을 긍정적이고 효과적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것은 수도원이며, 그 공간은 동시에 각 개인의 내면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이나 ?신의 도성?등이 그러한 영성관을 대변하고 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도 공간적인 세상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으로 피난할 때 거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영혼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32)
넷째, 예언적 영성(prophetic spirituality)은 역사 안에서 신뢰할만한 영성적 사건을 발견한다. 그러나 세상 안에서는 기대할 것이 없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세상에 대한 심판과 더불어 역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해 주고 있다. 아시시의 프란시스는 자신의 철저한 청빈의 삶을 통하여 당시의 세계를 심판하고 있다. 즉 십자군 전쟁 이래로 상업계급이 생겨나고, 도시중산층 계급이 나타나면서 물질적인 부가 정당한 삶의 모범으로 제시되고 있는 그 사회를 극도의 청빈의 삶으로 단호하게 심판한 것이 프란시스의 영성이다. 그것은 유물론적인 가치관에 의해서 제한 받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희망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기대를 .불러일으키려는 시도이다. 예언자적 영성은 종종 복음서의 극단적인 가치관으로 특징짓는다. 이 영성은 도전적인 차원을 포함하지만, 프란시스가 증언하는대로 그것은 결코 우울하고 비관론적인 영성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부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약속하는 새로운 희망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프란시스 영성의 뿌리이다. 예를 들자면 그는 물질의 개인적 소유를 철저히 부정함으로서 하나님께서 만물 위에 부어주신 자연의 풍요로움을 마음껏 맛보고자 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태양의 노래”33) 이다. 온 만물을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이며, 만물은 이용되어야 할 객체가 아니라 함께 공존하고 통교하는 또 다른 주체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모델들 중 어느 하나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위에서 보여준 모델들은 범주화된 예들에 불과하다. 역사 속에서 나타난 대부분의 영성들은 위에서 언급한 모델들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만나고 경험하는 다양한 영성들을 조심스럽게 비교 검증하여 그 차이점들과 유사점들을 명료화함으로서 위의 모델들을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십자가의 요한은 지리적 것, 문화적인 것 모두를 공유했던 16세기의 스페인 영성인들이다. 이렇게 유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 둘 사이에는 매우 다른 요소들이 있다. 이냐시오에게는 “영성적 위안”(consolation)이 우리의 기도생활에서 추구해야 할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반면에 십자가의 요한은 기도에서의 “영성적 위안”은 오히려 거부되어야 할 요소이다.34) 만약 어느 한 쪽의 전통에만 고집하거나 어느 한 쪽의 영성만이 유일한 길로서 집착한다면, 분명히 두 영성 중의 어느 하나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부적합한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제시한 다른 범주에 속한 두 종류의 영성의 모델들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느끼는 모순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
특별한 이미지들을 피하고 ‘어두운 밤’ 안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무념적 영성의 길에 서 있는 십자가의 요한은 그가 영성적 위안을 거부할 때 그의 모델 안에서 일관성을 지니게 된다. 반면에 특별한 선택을 통해서 세상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하는 사도적 영성의 길에 서있는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영성적 위안을 통하여, 자신의 선택들이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서 그 모델의 일관성을 유지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각각 다른 영성을 산출해 내고 있는 우주관이나 역사관을 고려할 때 상이점을 갈등적인 요소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연속성과 불연속성 그리고 상호보완점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 범주에 속한 영성이 가지고 있는 특성 중에서 다른 범주에 속한 영성이 다다를 수 없는 탁월한 측면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을 인정함으로 다른 영성을 갈등적인 요소로 보지 않고 보완적인 요소로 받아들임으로서 자신의 영성을 풍성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성학을 추구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각기 다른 영성에 직면할 때 우월성을 가늠하기 전에 먼저 범주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범주를 서로 다른 범주와의 비교대조를 통하여 건전성과 장단점, 보완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하나의 영성이 과거와 현재의 다른 영성들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알려질 때 향상된 영성경험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4. 학문의 영역으로서의 영성신학

우리는 단지 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 대하여 사고하고 반추한다. 그러므로 영성은 실존적인 삶일 뿐만 아니라, 영성은 그 실존적인 삶에 대한 사고와 반추와 연구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학문적인 영역으로서의 영성은 전적으로 이론적일 수 있다. 영성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는 영적인 전통을 가르치고, 적당한 영적인 실천들을 방법적으로 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왜 그러한 실천들이 작용을 하는지를 이해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방법론이 필요하며 학문간의 교류를 통하여 통합적인 이해가 필연적이다.35)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영성신학자 샌드라 슈나이더스(Sandra M. Schneiders)는 영성신학을 하는 태도로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를 제안하고 있다.36) 첫째, 규범적이고 가치 규정적이기 보다는 서술적이고 분석적으로 대해야 한다. 미리 어떤 특정한 가치를 규범으로 설정해 두고 다양한 영성을 구별해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양한 영성 그 자체를 객관적인 서술로 받아들인 후에 분류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성신학에서 가장 소중한 자료는 가치평가가 내려져 있지 않은 각 개인의 주관적이고 서술적인 영성적 경험을 담고있는 개인전기나 경건서적들이다. 둘째, 간학문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내적인 경험은 개인의 우주관과 역사관 가치관등이 복합적이고 상징적으로 얽혀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들을 분석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학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특히 심리학, 의학, 사회학, 인류학, 성서신학적인 물음을 던짐으로서 보다 객관적으로 명료한 이론을 제시해 줄 수 있다.
셋째, 영성은 불가피하게 각각 다른 종교나 사상이나 문화에 있어서 상호교류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여기서 상호교류란 두 가지 태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기독교 영성신학의 관점을 생각할 때 우선 기독교적인 중심신조나 사상, 가치관등을 축으로 하여 여타 다른 종교, 문화, 사상 등을 상대적이고, 포용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다른 방법으로는 모든 종교, 문화, 사상등을 수평적으로 동등한 가치관을 부여함으로서 보편적인 영성을 추구할 수 있다. 보편적인 영성신학적인 측면에서는 위의 두 태도가 모두 가능하지만, 기독교적 영성신학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면 후자 쪽의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중심축이 없기에 기독교라는 특정한 영성신학의 틀을 마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네째, 영성신학은 객관적이고 이론적이지만 그 이전에 개인의 참여적인 경험이 제일차적인 자료가 된다. 각 개인의 영성적인 경험은 매우 제한적이지만, 표현적인 차원에서 여러 종류의 다른 영성을 만날 수 있다. 만약 제한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개인의 참여적인 경험이라면, 표현적인 차원을 통하여 알려진 다른 전통의 영성을 얼마든지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표현적으로 드러나기 전에 개인적이면서 독특한 참여적인 영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즉 영성신학은 보편(universality)으로부터 개별적인 것(uniqueness)으로가 아니라,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것으로의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다섯째, 영성신학은 어떤 개인의 독특한 경험만을 연구자료로 삼지 않는다. 인간이 육체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것과는 무관한 순전히 내적인 존재만은 아니다. 인간이 역사적인 존재임을 전제한다면 그 독특한 내면적 경험은 언제나 현실적인 통합을 통하여 완성된다. 그러므로 영성신학은 인간의 삶과 경험의 모든 면을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영역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여섯째, 영성신학은 교리적인 면을 다루는 것이 아니며, 어떤 신학으로부터 구체적인 삶에로 적용할 원칙을 도출해 내는 것에 초점을 두어서도 안된다. 영성신학은 완전함과 초월에로 부르는 모든 것에 대하여 독특하고 개인적으로 반응하는 양상에 초점을 둔다.37) 영성은 리쾨르가 말한대로 “개별에 관한 학문”이다.38) 일곱 번째, 영성신학은 세가지 목적을 전제로 해야 한다. 첫째는 다양한 영성적 경험에서 축적된 지식을 얻기 위함이다. 두 번째는 연구자 자신이 개인적으로 영성적인 삶을 도움받기 위함이다. 세 번째는 다른 사람들의 영성을 진보케 하고 안내해 주기 위함이다.39)
5. 영성신학에서의 모델방법론

영국 성공회의 주교이며 옥스퍼드 대학의 기독교 종교철학 교수였던 이안 렘세이(Ian T. Ramsey)는 모델이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또 다른 상황에 도달할 수 있도록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다. 즉 모델 없이는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그러한 상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을 모델이라”고 말한다.40) 이 모델방법은 이미 자연과학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자연과학은 물질계의 다양한 면을 표현하기 위하여 다양한 모델들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빛은 ‘파동과 입자’라는 양면을 다 가지고 있다. 그 데이터가 꽤 복잡하기 때문에 그 빛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과학자들은 “입자설”이라는 모델과 “파동설”이라는 모델을 사용하고 있다. 이 모델들이 서로 상반되고, 서로 서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과학자들은 이 둘을 상호보완적인 모델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회과학이나 심리학에서도 모델의 개념을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모델 방법은 우연히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자라난다. 왜냐하면 모델 방법은 우리를 복잡한 세상을 향하여 눈을 열도록 해준다. 다차원적인 실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모델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공간과 시간이라는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모델이 태어난다. 그 방법은 개방되어 있고 매우 유동적이지만 동시에 상당한 정확성과 명료성이 요구된다.41)
최근 신학에서도 모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아이안 렘세이(Ian Ramsey)에 의하면 신학과 과학 모두는 감추어진 신비를 벗겨내는 것이 중요한 사명이다.42) 물리적 세계의 거대함과 복잡성과 깊이와 그리고 인간의 한계성 때문에 과학자들이 모델을 사용함으로서 용이하게 그 신비에 접근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학도 영성적 신비라는 궁극적인 차원에 관심이 있다. 영적 세계는 물리적 세계보다 더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신앙적 언어나 상징들은 하나의 모델로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과학적인 개념조차도 그것이 반영하고 있는 대상을 겨우 접근할 뿐인데, 영적인 세계야말로 적합한 모델적 언어를 찾아내지 않고 접근하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43) 신학에서의 모델방법은 진실로 한정된 언어의 세계 안에 무한을 포용할 수 있다는 우리의 환상을 깰 수 있다. 개념이나 상징들의 우상이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으며 모델방법이 과학에서 그랬던 것처럼 신학 안에서도 모델방법을 사용할 때 경험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게된다. 영성경험은 인간의 심연에 부딪히는 경험이다. 그것은 계시, 은혜, 하나님의 조명이라는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느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경험 속에서 우리는 영혼 안에 감추어진 심연을 발견하기도 하고, 진자아를 발견하기도 하고, 영혼의 근저를 만지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영성적 경험은 우리의 시야를 확장시키고 세상을 보는 방법을 열어주는 창조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44) 그 경험은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형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다양한 영성적 형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모델방법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렘세이의 모델방법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커즌스(Ewert Cousins)는 영성을 이론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모델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신학적인 개념 안에는 ‘경험적인 차원’과 ‘표현적인 차원’이라는 두 가지의 차원의 개념이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이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차원은 영성적 경험을 다루고 있는 “경험적 모델”이다. 이것에 의해서 우리는 영성적 경험의 다양한 구조들을 다루게 되는데, 그것은 주관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경험적”이라는 용어와 영성경험의 다양성들을 포함하는 “모델”이라는 용어의 합성어이다. 이 방법의 두 번째 차원은 말이나, 개념이나, 상징들에 의해서 영성적 경험의 표현을 다루는 영역이다. 예를 들면 성경적 이미지나 기독교 신조들, 신학적 체계등을 말한다. 이것을 우리는 “표현적 모델”의 차원이라고 한다. 즉 그것은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형식을 의미하는 “표현적”이라는 용어와 표현의 다양성을 포함하는“모델”이라는 용어의 합성어이다.45) 영성적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서 모델방법을 확장하는 것은 신학자로 하여금 영성경험의 다양성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놓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 그 모델방법은 하나님의 실존의 거대함과 불가해성과 인간과 인간상황의 복잡성을 극복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 모델방법을 통한 영성신학적인 예로서 안셀름과 어거스틴 그리고 보나벤투라를 예를 들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안셀름은 ‘만족’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미묘한 구원교리를 발전시켰다. 여기서 안셀름의 ‘만족설’이 나타난다. 안셀름은 구원교리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교묘한 이성적 논쟁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처하고 있던 봉건적 관습과 로마와 게르만에서 통용되고 있었던 법적인 개념을 중심모델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안셀름의 ‘만족설’을 연구하는 신학자는 그 당시에 통용되고 있었던 법적이고 사회 관습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던 표현모델들을 탐구해야만 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여기서 멈추게 될 때 안셀름의 ‘만족설’은 자칫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중세에 만연하고 있었던 ‘공적주의’의 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해 버릴 위험이 있다. 신학자는 그 표현모델 뒤에 숨겨진 영성경험을 반영하는 경험모델을 발견할 때까지 그 논제의 중심에 이르지 못한다. 안셀름은 단순한 법적개념을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기 위한 표현모델로서 ‘만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뿐이다. 그 뒤에 숨겨진 깊은 영성경험을 발견하는 것이 신학자의 사명이다.
루돌프 오토는 안셀름의 표현모델인 ‘만족’이란 용어는 그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났던 어떤 독특한 영성경험을 반영한 것인데, 특히 그를 압도하는 죄책감에 대한 깊은 내적 경험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46) 안셀름의 ‘만족설’은 죄책감에 대한 압도적인 부담감과 그것을 극복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그 부담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이라는 내적인 경험을 반영한 구원교리이다.47) 영성의 역사에서 볼 때, 악의 무한한 힘에 대한 내적경험을 반영하는 다양한 경험적 모델들이 있는데, 안셀름에게 있어서 특별한 경험적 모델은 죄악의 압도적인 짐을 반영하고 있다. 안셀름이 사용하고 있는 모델의 중심에는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죄악의 무한적인 차원이 심각하게 반영되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와 죄악의 무한한 차원에 대한 안셀름의 탐구와 죄악의 냉혹한 논리가 섬세한 표현적 차원을 형성하는데 기여하고 있다.48) 경험적 차원을 무시하고 전적으로 표현적 모델에만 집중되어 있는 신학이 있다면 그것은 생동성과 깊이를 결여하게 된다. 생명력이 없고, 추상적인 신학이 되고 만다. 그래서 신학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항상 경험적인 모델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하곤 했다. 여기서 경험적인 모델로 돌아간다는 말은 주로 성경에서 표현된 초기 기독교 경험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표현적인 모델이 바르게 이해될 때 낡은 듯한 경험적 모델이 새롭게 살아나서 순환적으로 새로운 경험을 형성하게 하기도 한다.49)
이제 보나벤투라의 영성신학을 돌아보자. 스콜라주의 시대에 토마스 아퀴나스와 더불어 파리대학의 교수였으며, 40세에 프란시스 수도회의 총장 역할을 했던 보나벤투라는 그의 생애 자체가 신학과 영성의 조화였다. 그의 저서는 영성신학의 대전이라고 할만큼 다양한 모델을 포함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위디오니시우스의 신비신학, 12세기의 관상적인 빅토리안 영성학파등에 의해서 자신의 영성신학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그의 다양한 표현적 모델 중에서 두드러진 것은 ‘중심이신 그리스도’(Christus medium)의 개념이다. 신학과 영성의 조화의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최종 저서인 [6일간의 강론](The Collations on the Hexamaeron)에서는 ‘그리스도는 모든 학문의 중심’(Christus medium omnius scientiarum)이라는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50) 그리스도는 형이상학의 중심이요, 물리학의 중심이요, 수학의 중심이요, 논리학의 중심이요, 윤리학의 중심이요, 정치학의 중심이요, 신학의 중심이다. 보나벤투라는 계속해서 그리스도는 거룩한 삶의 중심이요, 창조의 중심이요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도 그리스도는 중심자리를 차지한다.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말씀으로서 그는 삼위일체 중에서도 중심적인 위격이다. 표현된 말씀으로서 그리스도는 역동적인 창조의 중심이다. 왜냐하면 그를 통하여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51) 보나벤투라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라는 표현적 모델은 단순히 객관적이고,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넓이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실존적이고, 경험적인 깊이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매우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듯한 이 표현적 모델은 그의 삶의 여정속에서 형성된 경험적 모델이 깊게 숨겨져 있다. 그의 생애를 세시기로 나눈다면 첫 번째 시기는 파리대학에서의 수도원적 신학과 스콜라주의적 신학의 조화를 시도했던 시절이다. 이 시기에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거의 강조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생애 두 번째 시기로는 프란시스 수도회의 총장이 되었을 때이다. 혼란된 당시의 프란시스 수도회를 본래의 정신으로 회복시켜 놓기 위하여 그는 프란시스가 십자가의 성흔(stigmata)을 경험했던 기도의 산 베르나(La Verna)에 올라가 프란시스가 경험한 비젼을 명상하는 동안 그도 역시 바로 그 장소에서 영적으로 십자가의 성흔을 경험한다. 그것이 그의 생애의 전환점이 된다. 거기서 보나벤투라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형태인 여섯 날개 달린 스랍천사의 비젼을 경험한다. 그러한 십자가에 대한 비젼이 보나벤투라의 영성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작품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여행?(The Soul's Journey into God)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불타는 사랑을 통하지 않고는 다른 길이 전혀없다...이 사랑은 프란시스의 영혼에 너무 깊게 스며들어서 그가 죽기 전 2년 동안 고난의 성스러운 흔적을 그의 육체 안에 짊어지고 다님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이 그의 육체를 통하여 빛나고 있었다.”52) 보나벤투라가 영적으로 십자가의 성흔을 경험한 후에 보다 분명해진 영성의 길을 보여준 글이다. 이어서 곧 그는 ?생명의 나무?(The Tree of Life)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특히 수난을 강조하는 역사적인 그리스도를 묵상할 것을 권고하는 구체적인 수련서와 같은 성격을 띄고 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프란시스의 자서전을 기록하여, 고난 받으신 역사적인 예수를 가장 닮은 자로서 프란시스를 제시한다.
이러한 경험 후에 프란시스 생애의 세 번째 시기로서 보나벤투라는 ?6일간의 강론?이라는 책을 통하여 영성과 신학 즉 ‘경험적 모델’과 ‘표현적 모델’의 통합을 시도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영적 경험이 ‘중심이신 그리스도’(Christus medium)라는 표현적인 모델을 낳게 했다. 즉 보나벤투라의 표현적인 모델인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 체계는 그의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과 헌신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그리스도는 로고스이신 그리스도 혹은 우주적인 그리스도와 결코 분리할 수 없다.53) 이렇게 표현적인 모델인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그 이면에 숨겨진 경험적 모델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해할 때 교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면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향한 영성적 경험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더해줄 수 있다.

나오는 말

영성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일차적으로 그 영성의 정의를 보다 분명히 한정지을 필요가 있다. 그 의미를 너무 축소시켜 배타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나 포괄적이어서 상응하는 다른 언어와 구분할 수 없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특히 학문적인 영역 안에서 영성을 다룬다면 대체적인 언어이상의 독특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정의가 필요하다. 종교적 삶이나 내면적인 삶이나 영성적인 삶은 엄연히 각각 그 나름대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종교의 중심사상이나 신비적이고 내면적인 것을 곧바로 영성으로 대체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두 번째로서 영성은 어떤 원론적인 논제로부터 실천가능한 규범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인 어떤 규범으로 영성적 경험을 평가하기 이전에 서술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의 사실들에 대해서 경이로움으로 접근하면서 그것들을 영성사의 빛 아래에 조명하여 범주화를 꾀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전통으로부터 비롯된 영성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가장 적합한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범주 안에서 자신이 경험한 영성을 비교 대조함으로서 자신의 영성을 더욱 살찌울 수 있다.
셋째로는 영성학을 시도하는 것은 결코 지식의 축적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자신과 타인의 영적여정에 참여하려는 열망 가운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객관적인 탐구에 머물러 있을 때 주관적인 경험의 세계를 분석하는 것 이상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없다. 따라서 그 영성은 다시 단순한 이론신학으로 넘어가게 된다. 넷째로는 영성이 하나의 신학이 될 수 있다. 영성을 신학으로 다루는 신학자들은 이중적인 사명이 있다. 자기 자신의 전통을 풍요롭게 하고, 그 전통 안에서 다른 전통들에게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신학자는 문화를 뛰어넘어 심층적인 영성경험과 만나기 위해서 표현적인 모델의 심층 밑으로 파고 들어가 경험적인 모델을 발견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관적인 경험의 요소들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그 시대에 적합한 표현적인 모델을 찾아내는데 기여해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경험적인 모델 안에서 영성신학자는 자기 자신의 전통을 반영하는 경험적인 모델을 재발견함으로 자신의 전통을 더욱 다양화하고 풍요롭게 해야 한다.

1) ‘영성’(spiritualities), 혹은 ‘영성신학’(spiritual theology)이라고 하는 대신에 ‘영성학’(spirituality)이라고 명칭하는 것은 단순히 주관적인 차원을 강조하는 다양한 영성경험들 뿐만 아니라, 그 경험들을 객관적이고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측면을 강조하는 영성신학을 포함하기 위함이다.
2)16세기 종교개혁의 기준에 따라서 영국 성공회에도 이 범주에 들어가지만 ‘영성’의 의미에 관한한 영국성공회와 그 나머지 개신교회와는 어느정도 구분이 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영국성공회는 제외한 나머지 개신교인들을 말한다.
3)Ans van der Bent, The Concern for Spirituality: An Analytical and Bibliographical Survey of the Discussion within the WCC Constituency, The Ecumenical Review 38 (1986), 104-117쪽 참고: WCC(세계교회협의회)에서는 70년대 초 이래로 영성에 대한 관심이 점점 분명해졌다. 1971년에는 ‘교회의 영적생활’(The Churches' Spiritual Life)이라는 보고서가 WCC 중앙위원회에 제출되었다. 1974년에 베를린에서 열린 WCC 중앙위원회 회의에서는 이전 보다 예배와 영성의 문제들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신앙과 직제 위원회’(the Commission on Faith and Order)의 결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벵쿠버에서 열린 제 6 차 WCC 세계 대회는 주요한 쟁점들 중의 하나로서 “영성”을 선택했다.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1984년 12월 프랑스의 앙느시(Annecy)에서 개신교, 정교회, 로마 가톨릭, 오순절 교회들이 함께 모였다. 여기에서 조안 펄스(Joan Puls)가 쓴 “우리시대를 위한 영성”(A Spirituality for Our Times)이라는 보고서가 나왔다.
4) Sandra M. Schneiders, Theology and Spirituality: Strangers, Rivivals, or Partners? Horizons 13 (1986), 254-255쪽.
5) Roy W. Fairchild, Issues in Contemporary Spirituality, Princeton Seminary Bulletin, vol. 8, no. 1 (1987), 4쪽: 그는 17세기의 조나단 에드워드가 대각성 운동 시대에 부흥회에서 각성된 종교적 감정을 이해하고 평가해주는데 기여를 한 사람이다라고 지적하면서 이미 오늘의 영성의 문제에 통찰력을 전해준 사람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Jonathan Edwards, The Religious Affections, Carlisle, Pennsylvania, 1986 참고).
6) Sandra M. Schneiders, 위의 책, 253쪽.
7) Ewert H. Cousins, "Spirituality: A Resource For Theology," Proceedings. Catholic Theological Society of Proceedings, America 35 (1980), 124쪽.
8) Sandra M. Schneiders, 위의 책, 253쪽.
9) Ewert H. Cousins, Christ of the 21st Century (Rockport, Massachusetts: Element, 1992), 19쪽.
10) Roy W. Fairchild, 위의 책, 11-13쪽.
11) Bonaventure, The Soul's Journey into God, Ewert Cousins 번역 (New York: Paulist Press, 1978), ch. 7, no. 1, 115쪽.
12) Regina Bechtle, “Theological Trends: Convergences in Theology and Spirituality, The Way 25 308; Bernard Lonergan, Method in Theology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73) 참고.
13) Hans Urs von Balthasar, “The Gospel as Norm and Test of All Spirituality in the Church," from Spirituality in the Church, Christian Duquoc, editor, Concilium, vol. 9 (Paulist Press, 1965), 7쪽.
14) Edward Kinerk, Toward a Method for the Study of Spirituality, Review for Religious, vol. 40 (1981), 21-22쪽.
15) Sandra M. Schneiders, 위의 책, 264-265쪽.
16) Edward Kinerk, 위의 책, 21쪽.
17) 눅 6: 20-26절에서 이 변증법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8) Louis Bouyer, Introduction to Spirituality, (Collegeville, Minnesota: Liturgical Press, 1961), 1-4쪽.
19) Sandra M. Schneiders, 위의 책, 264-265쪽.
20) Edward Kinerk, 위의 책, p. 30.
21) Bernard Lonergan, `위의 책, 4쪽.
22) Athanasius, The Life of Antony, Robert C. Gregg 번역, (New York: Paulist Press, 1980) 참고.
23) Edward Kinerk, 위의 책, 26쪽.
24) Ignatius of Loyola, Spiritual Exercises [144].
25) Edward Kinerk, 위의 책, 25-27쪽.
26)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The City of God)이라는 저서에서 보여준 역사관을 반영한 것이다.
27) Edward Kinerk, 위의 책, 25-27쪽.
28) The Cloud of Unknowing, James Walsh 번역 (New York: Paulist Press, 1981) 참고: 이 책은 14세기의 시토회(Cistercian) 혹은 카르수스회(Carthusian)에 소속한 영국의 한 익명의 은둔자에 의해서 쓰여졌다.
29) 그의 저서 [깔멜의 산길](The Ascent of Mount Carmel), [어둔 밤](The Dark Night)등이 이 영성을 대표하고 있다.
30) 그의 저서 [칠층산](The Seven Story Mountain), [관상의 새 씨앗](New Seeds of Contemplation)등이 이 영성을 대표하고 있다.
31) 이 영성을 대표하는 그의 저서는 [영신수련](The Spiritual Exercises)이다.
32)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 2 권. 제 1 장.
33) 이 노래는 1225-6년에 걸쳐 완성된 것으로서 프란시스 자신이 직접 만든 작품이다; Francis and Clare: The Complete Works, "The Classics of Western Spirituality" (New York: Paulist Press, 1982), p. 37-39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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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 특히 태양형제를 인하여!
그를 통하여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하루의 빛을 주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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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달과 별 자매들을 인하여!
당신께서 지으신 그들은 하늘에서 밝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나이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바람 형제를 인하여!
또한 대기와 구름과 모든 날씨를 인하여!
이들에 의하여 당신께서는 피조물들에게 음식물을 주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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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과 축복을 돌릴지어다.
또한 거룩한 순종과 겸손으로 그를 섬길지어다.
34)십자가의 성요한, [깔멜의 산길], 제 2 권, 4, 7장.
35) Daniel A. Helminiak, The Human Core of Spirituality: Mind as Psyche and Spirit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6), 36-37쪽.
36) Sandra M. Schneiders, 위의 책, 267-269쪽.
37) Sandra Schneiders, 위의 책, 264쪽.
38) 위의 책, 269쪽을 Paul Ricoeur, Interpretation Theory: Discourse and the Surplus of Meaning (Fort Worth: Texas Christian University Press, 1976), 76쪽에서 인용함.
39) 위의 책, 269쪽; 영성을 연구하는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다루어 할 영성신학의 주요한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신비주의, 기도, 영성식별, 영성지도, 사회정의와 기도와의 관계, 영성의 학파들, 영성가들의 독특한 영성연구, 유비적인 영적현상들에 대한 관계성 연구, 고백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실천의 문제, 영적인 삶에 있어서의 육과 영의 변증법, 영적성장의 패턴과 역동성, 영적개발에 있어서의 문화와 믿음의 상호작용, 성화의 의미, 심리학적인 성숙과 영적인 발달의 관계, 성서적 영성, 예전적인 영성 등이다.
40) Robert Paul Hale, "Religious Symbols as Evocative of Insight: The Model Method of Ewert Cousins," Sacramentum 2, Symbolisme et Theologie (Rome: Editrice Anselmiana, 1974), 72쪽.
41) Ewert Cousins, "Models and The Future of Theology," Continuum VII (1969), 81쪽.
42) 위의 책, 82쪽; Ian Ramsey, Mosels and Mystery (London, 1964) 1-21쪽 참고.
43) 위의 책.
44) Ewert Cousins, 위의 책, 82쪽.
45) 위의 책, 83쪽.
46) 위의 책, 84쪽은 Rudolf Otto, The Idea of the Hol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8), 53쪽, 각주 1에서 인용함.
47) 안셀름의 영성적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또 다른 탁월한 신학적 논제중의 하나가 ‘신존재 증명’이다. 이 논제를 다루고 있는 그의 저서 ?제일원리?(Proslogium)의 제 1 장에서 하나님을 향한 그의 열렬한 기도경험을 말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그 경험의 결론을 맺는다. “나는 믿기 위해서 이해를 구하지 않고,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 그러므로 내가 믿지 않는다면, 당연히 이해할 수 없음도 나는 믿는다.”(St. Anselm Basic Writings, Proslogium, S. N. Deane 번역 (La Salle, IL: Open Court Publishing Co., 1988, 53쪽) 제 1 장, 53쪽). 이러한 경험 뒤에 나타난 것이 제 2 장 이후부터 시작되는 ‘신존재 증명’이라면 그의 영성적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 결코 안셀름의 신학적 논제의 중심에 이를 수 없다.
48) Ewert Cousins, 위의 책, 85쪽.
49) 위의 책.
50) Ewert H. Cousins, Christ of the 21st Century(Rockport, Massachusetts, 1992), 70쪽.
51) Ewert H. Cousins, "Mandala Symbolism in the Theology of Bonaventure," University of Toronto Quarterly, 40 (Spring, 1971), 187쪽.
52) Bonaventure, 위의 책, prologue, no. 3, 54-55쪽.
53) 위의 책,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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