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용어 사전

[스크랩] 구약적 복의 개념과 신약적 복의 개념

하나님아들 2017. 12. 28. 20:15


구약적 복의 개념과 신약적 복의 개념


 


 


 

글정리자 : 카이로스



1.히브리어와 헬라어 대한 기초적 이해


가).성경상에 해석에 있어서 우리는 히브리어나 헬라어 상의 독특한 문법의 특성으로 인하여 부족한 성경 해석을 가지고 잘못된 견해로 성경의 어느 부분을 지적하며 해석이 틀렸다고 하는 바람에 다른이들에게 까지 매우 혼동스런은 일들이 심심치 않게 발생 되지만 일반 성도분들은 알길이 없습니다


①중요한것은 한국어나 영어는 문법이 단순하여 한문장으로 그의미를 해석 할수 밖에 없기에 (각나라 마다의 서로 다른 문법의 특성으로) 성경의 말씀의 의미를 한글로 완전하게 다 기록 할수 없는 한계에 이르게 됩니다 

 

②히브리어나 아람어나 헬라어의 특성 문법의 씌여진 성경을 자신의 나라에 맞춘 문법으로 번역함으로 성경의 말씀을 충분히 다 이해가 부족 할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③쉬운 예로 우리가 우리의 한글의 한 단어 조차 이해을 하지 못할때에는 한자을 통하여 그 뜻을 알게 되는 예와 마찬가지 입니다


④고대 히브리어 구약시대에는 조각으로 나누어진 두루마기의 필서는 22개 자음으로만 기록되여 있는것으로 (후날에 모음이 있는 히브리어을 사용) 그나마 히브리어 원문은 이미 소실 되여 사본을 찿아내어 수많은 사람들의 피나는 수고와 수고로 성경의 필서의 사본과 사본으로 무수한 노력으로 번역하여 오늘날 까지 이룩되여 와서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쉽게 편한히 볼수 있게 되였읍니다


⑤창세기의 우리의 한글의 성경에는 땅이 한가지로 표현되었으나 히브리어에서는 태초의 창세기 의 땅이 분류가

에덴땅과 사데땅과 아다마땅과 아빠사 땅과 에레츠 놋땅으로 분류에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성경은 모두 똑같은 땅입니다 )


⑥이와같이 히브리어나 헬라어 문법으로 된 성경과 우리의 글의 문법상에 표현법으로 해석된 성경과는 충분한 이해와 해석에서 차이가 난다는 사실입니다


⑦오늘 소개된 복이나 축복에 대한 히브리어나 헬라어어의 성경에서 복의 개념과 우리의 성경상의 복개념과 우리가 여태 생각하고 있는 복의 개념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수 있습니다


⑧이러한 한글의 문법상의 해석의 취약점은 한글뿐 아니라 영문에서도 그대로 적용 반영되여 복이란 개념에서

우리 같은 성경해석의 취약점이 들어나듯이 영문 역시 우리와 똑같은 해석에 취약점의 문장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⑨그러나 우리는 영문이 더 확실한줄알고 영문을 그대로 번역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⑩단 한가지 복이란 복의 개념에서 한글이나 영문이나 복이란 개념은 한단어의 의미로 볼수 없기에 성경상에 해석에서 히브리어나 헬라어상의 복의 의미를 충분히 알수 없게 됩니다 

 

⑪히브리어나 헬라어는 상당히 중요하지만 그대신에 히브리어나 헬라어 문장에 깊이 매달리다

보면 전체 적인 성경에 영적 시야가 좁아지는 페단도 있읍니다



나).히브리어나 헬라어(그리스어)는 문법상의 구조가 거의 비슷한 역사적 원인 

 

①고대 역사적으로 5000년전 (BC.3000년경)최초의 문명지 였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수메르와 아카디아에서 쐐기 문자와 이집트 문명의 상형문자의 두문명의 문자는 나란히 발전했읍니다 

 

②쐐기 문자와 상형문자가 문명의 관계속에 원시나이 문자로 발전하고 많은 민족들이 문자와 언어를 나름대로 발전시키며 사용했숩니다


③성경에 의한 바벨탑이 무너짐으로 같은 인종이 서로 다른 언어가 나누어짐으로 수많은 인종분류가 나누어 지듯


④수메르.아카디아 인의 쐐기 문자와 이집트 상형문자는 원시나이 문자로 발전되여 고대 알파벹의 문자로 발전되


⑤ 고대 페니키아어,고대 히브리어.고대 아람어,고대 아랍어, 헬라어(그리스어),라틴어. 고대유럽어 근대 유럽이 . 영문의 알파벧이 되기까지 한뿌리 고대 문명권에서 민족이 발원하여 시대와 지역이 나누어지듯 각나라마다 거듭하여 변형 변화되어 사용되어 왔으며


⑥이문자는 라틴어 로마로 이어져 유럽으로 이어지고 오늘날 영문의 알파벧의 기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한국어의 특성으로 비교하여 보면

①우리 한국어의 문법은 아주 선명하게 동사와 주어등 각 역할 완전히 각각 특색을 가지고 분리된 상태입니다

②예을 들어 주어을 아버지로 하고 그다음 동사로 이어집니다

즉 수식어을 사용하려면 아버지가 어떻다 는 동사가 개입한다

③아버지가 웃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가 손을 움직이셨다

이와같이 아버지라는 주어속에 행동하는 수식어가 붙게 된다

④명사와 동사가 된후에는 형용사나 부사가 붙으면 어떻게 행동하느냐

⑤과거로 행동했냐 지금 현제 로 행동했냐

⑥미래로 행동할것이냐 이렇게 동사가 붙게 되는데

⑦그러면 그 행동하는것이 무엇이 목적으로 하느냐 그래서 목적어가 붙게 되고

⑧그리고 명사의 주체가 어떤 행동을 할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주체가 일인층이나 이인층이 삼인층이냐 아니면

⑨또 다른 그들이냐 저들이냐 남자 여자냐 하며 나누어진 문장의 모아서 구성이 형성 됩니다



라).그러나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같은 역사적 특성상의 문자의 구조가 비슷하다

①히브리어나 헬라어는 그 한 단어 자체로서 인칭과 과 성격과 행동과

심지어 그 행동속에서 자의냐? 타의 냐 ? 스스로냐? 그 단어속에 함께 모두 포함되어 있다

②히브리어와 헬라어는 명사가 하나 있으면

③한 명사 앞에는 붙어 있는 문장을 어두라 하고 그 명사자체를 어감

④그다음 명사 뒤부분에 붙는 꼬리 부분을 어미라 한다

⑤즉 명사 하나 의 자체을 두고 어두와 어감과 어미가 되어 붙어 한문장이 되어 버립니다



라).한문장으로 겹쳐진 어두와 어감과 어미

①앞에 어두에는 행동과 활동과 어떤상태을 붙여 버리고

②뒤에 어미에는 인칭과 수하 어떤 대명사냐 명사냐 이것을 뒤에 붙여 가지고

③동사 하나 자체가 문장이 되어 버립니다


(예을 들어 한 명사을 가지고 )

①레쉬트 (히) 태초 라는 어감의 앞 부분 어미 자리에 베라는 전치사 가 달라 붙는 바람에 “시간안”에 들어간 상태가 되어 버린 베레쉬트 (히)태초 이다

②레쉬트라는 어감 뒤 부분 어미의 자리에는 빠라와 엘로힘을 연결시킴으로

베레쉬트(시간안에 태초) 안에 빠라(창조) 했고

③베레쉬트(시간안에 태초) 안에 빠라(창조)했는데 엘로힘(하나님)이 하셨다

④베레쉬트 빠라 엘로힘(히)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 하셨다라는 문장이 만들어 집니다



{1}.구약의 순종의 복(히) 바라크와 순종의 복(히)아솨르와

신약의 복(헬)마카리우스



가).구약 성경에서 '복'이란 뜻을 가진 히브리어 단어로는 '바라크'와 '아솨르'가 있습니다.

①구약의 히브리어에서는 같은 어휘로서

②베라 카 :명사로 씌어지고 축복 이란 명사

③바라크 :동사로 씌여지고 ,복주신다 축복한다;, '찬송한다'로서 번역되고,있습니다

④순종의 복(히)바라크과 순종의 복(히)아쉬레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을 지탱하는 두기둥이 되어야합니다.

⑤순종의 복(히)바라크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적 순종안에서 이루어집니다.

⑥또한 선하다(히)토브는 복(히)바라크을 의미합니다.

⑦같은 어휘의 복(히)아솨르는 거의 복수 연계형인 복(히)아쉬례이'로 사용되었습니다.



나).신약 성경에서 복이란 뜻을 가진 헬라어 단어로는 복(헬)마카리우스

①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그 의미는 '일상적인 염려와 걱정들로부터 놓여 자유하는' 것으로

겉은 어휘로 형용사-- 마카리오스(헬-이래 라는 의미)는 마카르(헬- 행복한라는 의미 )에서 유래되었다 합니다

② 복에대한 또다른 헬라어 어휘 문자에서는 명사--축복(헬) 율로기아

③동사 --복을 빈다 (헬)율로게오 있습니다



1.창조의 순종의 복(히) 바라크 (일방적으로 주시는)


1).창조의 복(히)바라크 “복을 주어”, “복을 주시며” , “복주사 , ”


가).창1:22.하나님이 그들(물고기및 모든 생물.새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나).창1:28.하나님이 그들(사람-남자와 여자)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다).창2:3.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1).복(히)바라크 -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 . 복을 주다 . 찬양하다 .송축하다 (동사)

①복(히)바라크 - ,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 .복을 주다 .찬양하다 .높이다, 인사하다,

②그러나 서로 상반된 저주하다, 신성모독하다 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③​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복(히)바라크는 영생, 시간, 거룩, 안식, 할례, 예수그리스도.이다



(2).복(히)바라크를 히브리어 (자음)으로 분석하자면

①히브리어 자음 세단어로 합성된 바라크

'베트'라는 단어에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진리의 그 집​뜻과

'레쉬'라는 단어에는-- 하나님께서 진리가 되게 하시는 그 머리, 시작하다,

카프'라는 단어에는-- 하나님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전환, 손바닥 이다.

②베트.레쉬.카프가 합성어가 바라크가 되었으며

③역시 그뜻도 합성되여 '하나님이 거하시며 다스리시는 성전을 우리에게 넘겨주심'​ 이다.

④복(히)바라크의 깊은 의미는 창조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세상 의미의 도구로서 복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자의 모습이며 저주받은 상태라는 의미가 바라크에 다 포함되었다 .


(3)순종의 복(히)바라크 개념

①태초 창조시 다섯째 날과 여섯째날 일곱째날에 주신 복으로 시작된 바라크 복은

②먼저 복(히)바라크는 오늘 본문 신명기를 비롯하여 파생어까지 포함하여 415회 정도 나옵니다.

③복(히)바라크라는 복에서 '바라크'는 '무릎을 꿇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복(福)의 기원을 말합니다.

④즉 모든 복은 위로부터 임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순종의 상태'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⑤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는 따로 특별히 복(福)을 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주어질 것임을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⑥복(히)바라크는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로 인간의 선행과 관계없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큰 긍휼과 자비를 인하여 인간의 산업과 후손과 육체에 내려주시는 복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⑦그리고 이 단어의 또 다른 특징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순종하는 성도에게는 성읍에서도...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네 짐승의...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광주리,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했습니다.

⑧복(히)바라크 라는 복은 하나님 자신이 참된 복의 근원이요, 복 그 자체란 뜻입니다

⑨창 15:1.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이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⑩요 15: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수 없음이라

⑪그래서 말씀에 대한 순종하는 언약 백성들에게 복이 따라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⑫곧 참된 복(히)바라크은 인간이 추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⑬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이것은 곧 순종에 기반을 둔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 성립'이라는

⑭원초적 원인관계가 복(히)바라크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3).성도에게 있어서 복(히)바라크 란 어떤 의미인가 ?

①고전 3:16.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②고전3: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③막 10:45.인자의 온것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④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성경의 태초 창조의 역사속에 순종의 복(히)바라크

가).다섯째 날 바라크(히)복----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

나).여섯째 날 바라크(히)복----생육 번성 충만 정복하고 다스리라

다).일곱째 날 바라크(히)복----거룩하고 안식하라



(1).창조의 다섯째 날의 물고기나 모든 생물과 모든새 에게 주시는 생육.번성 충만의 바라크(히)복

①창1:20.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②창1:21.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새를 그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③창1: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④창조의 다섯째 날. 물고기나 모든 생물과 모든새 에게도 하나님께서 창조의 복을 최초로 주셨다

⑤태초 창조와 함께 물고기와 움직이는 생물과 새들에게 바라크(히)복

⑥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바라크(히)복을 주셨다



(2).창조의 여섯째 날 사람에게 주시는 생육. 번성 충만하고 정복과 다스리라는 바라크(히)복

①태초 창조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람에게 주시는 정복과 다스리라는 바라크(히)복

②창1: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③창1: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④태초 창조의 하나님이 제일 먼저 하나님의 형상의 모양 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제일 먼저 사람에게 명하신것이 바라크(히)복은

⑤하나님의 형상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주시되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셨다

⑥태초 창조의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바라크(히)복이란 ?

⑦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⑧땅을 정복하라 !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⑨다스리라 하시니라 !



(3).태초 창조의 일곱째날 안식을 거룩하게 하시는 바라크(히)복

①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이를 때에 마치시고 복을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창조의 만드시던 모든일 을 마치시고 안식하셨음이라

②창2: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③창2:2.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④창2:3.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3).복(히)바라크로 드리는 네가지 예배


(1). 송축의 복(히)바라크 의 예배

①시 134:1.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②시134:2.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③시134:3.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히)바라크을 주실찌어다

④성경에서 송축하라 “복(히)바라크 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⑤창세전에 택함 받은 백성들의 영원한 축복(히)바라크의 찬송입니다

⑥사 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찬송의 복(히)바라크 의 예배)

①엡1: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히)바라크로 우리에게 복(히)바라크 주시되

②엡1: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③엡1: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④엡1: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⑤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는 영혼의 노래가 복(히)바라크 이고 마음의 찬송이 복(히)바라크이며 삶의 찬송 그 자체가 엄청난 복(히)바라크입니다.



(2) 감사의 복(히)바라크 의 예배

①단 4:34.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나라는 대대에 이르노라

②성경에서 감사하다 복(히)바라크는 “축복한다”는 의미입니다.

③감사 그 자체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엄청난 축복입니다. 감사할 수 있는 축복을 소중히 생각하여, 무조건 감사하고 끝없는 감사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



(3). 말씀의 복(히)바라크의 예배

①왕하 20:19.“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의 전한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②성경에서 선하다(히)토브는 복(히)바라크을 의미합니다.

③말씀을 통하여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말씀 그 자체가 복(히)바라크이기 때문입니다.

④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선이며 복(히)바라크입니다.

⑤계 1:3.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들이 복(히)바라크이 있습니다



(4).기도의 복(히)바라크의 예배

①시116:1.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가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 도다

②시116:2.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③성경에서 축복(히)바라크은 “하나님께 빈다”는 의미입니다.

④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자체가 복입니다



4).태초 창조의 일곱째날 거룩하게 하신 복(히)바라크와 안식 개념

가).창2: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나).창2:2.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다).창2:3.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1).하나님의 첫 창조와 일곱째 날의 안식과 복(히)바라크


①하나님의 첫 창조의 여섯째날에 이루심으로 마치시고 일곱째 날의 안식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게 될 이제 다시는 타락할 수없는 새 창조와 그 새 창조의 완성으로 오게 될 진짜 참 안식을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이었고,

②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과 그 이후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될 참된 안식의 땅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③따라서 안식일은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④우리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공히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일곱째날에 복(히)바라크 을 주심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안식 하셨습니다



(2).일곱째 날에 “복주사” 복(히)바라크 이란 ?

①하나님으로부터 피조물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②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곱째 날에 안식에 복을 주셨다는 말은

③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의 복을 주셨으나

④안식에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생기게 된 죄와 수고로움에서

⑤자유롭게 되어 우리가 누리게 될 진짜 안식 즉 ‘영생’이라는 씨앗을 심어 놓으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⑥다시 말씀드리면 안식일에는 앞으로 긴 세월 후에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게 될

‘구원, 영생’이라는 씨가 그 내용으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⑦그래서 안식일에 ‘복을 담아 두셨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3).일곱째 날을 위하여 다섯째날의 복(히)바라크 와 여섯째 날에 복(히)바라크을 주시고

①다섯째 날. 물고기나 모든 생물과 모든새 에게도 하나님께서 창조의 바라크(히)복을 최초로 주셨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복이였으며

②하나님은 여섯째 날 인간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생육 번성 충만하라는 복을 주시고 이어서

또한가지 다섯째날에 모든 생물과 육축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복을 더하여 주셨다

③ 물질 세계, 공간 세계, 감각 세계에 인간에게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복을 주셨다는 것은 지구상을이끌어 나가라는 명령이셨다

⑤일곱째 날의 안식은 미래의 이땅의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영생을 얻는 역사까지 의미하고 있다



(4). 일곱째 날에 복(히)바라크을 주셨다는 말은

①하나님께서 시간이라는 초월적인 영역에다가 복을 부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②시간을 볼수도 만질수도 없으며 실지 우리는 시간이 뭔지 잘 모릅니다

③세상의 물질과 공간에 대해서는 아주 익숙하고 능수 능란하고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또 내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아주 익숙합니다.

④그런데 시간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시간은 전혀 우리가 통제할 수가 없어요.

⑤공간과 물질은 우리가 마음대로 만들었다 부수었다 할 수 있지만 시간은 전혀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⑥어떻게 측정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⑦우리의 문명에 의해 연구에 의해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을 우리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⑧일곱째 날의 안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시간의 카이로스 시간과

인간의 흘러가는 역사속에 시간인 클로로스 시간으로 천지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알게 됩니다



(5).눈으로 볼수 없는 시간은 저녁과 아침으로만 알수 있을 뿐입니다

①1968년에 국제 도량형 위원회(CGPM)에서 세슘원자의 복사주기에 91억 9천만 배를 곱해서 1초로

정했습니다.

②그래서 전 세계가 그것을 1초라고 부르기로 한 것입니다.

③우리 인간은 그냥 막연히 그 시간이라는 것이 흘러가면 우리 인간이 늙고 병들고 약해져서 결국은

죽게 된다는 것 정도로 시간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시간을 두려워합니다.

④그 시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물질과 공간 속으로 숨어들게 됩니다.

우리는 시간 앞에서 그렇게 무력한 존재입니다.



(6).“일곱째 날을 ”복(히)바라크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①하나님께서는 일곱의 그 시간 중의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만드셨고 그 거룩한 시간에 복을 부어 놓으신 것입니다.

②거룩(히)카다쉬 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쓰인 곳이 바로 창세기 2장입니다.

③창2:3.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④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사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 여기서 처음 거룩(히)카다쉬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⑤그러니까 그 ‘거룩’은 공간과 물질세계에 처음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시간’에 처음으로 쓰였습니다.



(7).거룩한 시간

①하나님은 인간들이 물질과 공간, 감각 세계에 목숨을 걸 것을 아셨습니다.(즉 보이는 세계)

②그래서 안식일이라는 시간에 복(히)바라크 을 부으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고 물질과 공간, 감각 세계에서 눈을 돌려 ‘시간의 세계’를 바라보라고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③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개념아닌 비 물질계와 비 시간계입니다

④하나님 나라는 죄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하나님의 생명력, 즉 복이 회복되어 영원히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 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의 개념으로 즉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 시간적 개념으로 이해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⑤물론 영원은 시간계가 없습니다 물질계도 없습니다 (천지 창조시 만들어진 은하계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⑥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의 시간계는 역사속에 흘러가는 인간의 시간계인 클로로스 시간계입니다
⑦천국은 장소 적 공간적 개념이 아니기에 이 지구라는 공간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⑧헬라 철학은 이데아와 현실, 공간적 이원론이지만

⑨우리 기독교는 이 세상과 다가오는 세상의 시간적 이원론입니다.

⑩우리가 고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그 다가 올 비시간계이며 빗물질세계인 영원계 , 영적 세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⑪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그 안식일이라는 시간에다가 ‘영생’이라는 씨앗을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⑫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복을 주셨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⑬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안식일이라는 시간에다가 복을 부어 주셨다는 것은 그 안식일이 하나님의 참 복인 영생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교회에게 주지시키시기 위해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⑭출애굽기 3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언약의 표징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⑮출31: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⑯출31: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솨바트-안식일)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나파쉬-호흡하다)



(8).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주신 것은 ?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상징의 의미 )

①그 첫 번째가 할례입니다.

②그리고 두 번째가 이 안식일입니다.



(9).하나님께서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실체

①‘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②타락한 아담의 후손들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을 구원해 내시고,

③그들에게 영원한 천국 생명을 허락하시겠다는 것이 언약의 실체입니다.

④그 언약의 표징이

할례와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10).이스라엘의 할례을 언약의 표징으로

①이스라엘의 할례는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 선택 된 이스라엘 백성이다’라는 민족적 긍지의 표식이였습니다

②언약의 축복의 보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③그래서 모세가 아들의 할례를 행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죽이시려고 했던 장면이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④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니까요.



(11).이스라엘의 안식일도 그 언약의 표징

①그러면 그 언약의 밖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②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 사람들 이외의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사망이며 불못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③그래서 그 언약의 표징인 안식일을 범하면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엄명을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④그 언약의 밖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죽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⑤단지 그날, 토요일이 뭔가 범상치 않은 대단한 날이라서가 아니라 그 날이 갖고 있는, 그날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영생이요, 구원이기 때문에 그 날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죽은 것입니다.



(12).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상징의 의미

①그러니까 복음의 설명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②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할례를 받지 않거나 안식일을 어기면, 그 언약의 표징을 행하지 않으면

그 언약밖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상징이란 말입니다

③그러니까 그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

④그리고 그로 말미암게 될 진짜 참 안식과 영생을 상징하던 것이었습니다.

골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헬)크리노 -구별하다, 즉(마음으로 또 사법상으로 )결정하다, ...하지 못하게 하라

골2:17.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3).안식일의 실체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①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죽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자들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②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독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 안식이 무엇이기에 너희 율법이여

③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 세상의 죄와 수고와 질병과 고통, 갈등, 투쟁, 슬픔 이모든 것들이 전부 물러간 영생의 상태를 안식이라며 그래서 그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14).율법의 안식일을 지키는자들에게 안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라고 보여 주시는 것

①유대 사회의 그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심으로 예수께서 그 안식일을 완전하게 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②‘바로 이게 안식이다. 바로 이게 영생이다’

③안식일에 일을 한 사람을 죽여 버리신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④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스스로 성을 쌓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지켜내야 하는 그러한 나라가 아닙니다.

⑤참 안식이 이루어진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영원한 생명력, ‘복’을 받아 행복을 누리는 나라인 것입니다.

⑥안식일이 담고 있는 내용이 바로 그 온전한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자기를 위해 일을

하는 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⑦이렇게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⑧따라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15).안식(헬)카타파우시스

①히4:3.이미 믿는 우리들은 안식(헬)카타파우시스----휴식에 들어 가는도다

②카타파우오(헬).정착하다,그만두게하다,휴식하다 에서 유래하여 ----카타 파우시스 (헬)안식이 되다

③카타 (헬)~아래로,~에 대하여

파우오(헬)멈추다,단념하다,끝까지오다...

④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⑤지금도 계속해서 믿는 자들이 안식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⑥그런데 그렇게 안식에 들어간 자들은 자기의 일을 쉰다고 합니다.



(16).히4:10.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①카타파우오(헬) 여기서의 자기 일(헬)이디오스

②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쌓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③그들에게는 이제 하나님의 생명력, 복이 회복되어 부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④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⑤그 이야기가 바로 안식일 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인 것입니다.

⑥그렇게 안식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안식에 들어간 자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과 다른 선한 일이 그들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17).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①그래서 히브리서는 안식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너희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히4:11.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③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보고 너희 삶 속에도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나타나지 않거든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④그게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의 진의인 것입니다.

⑤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오게 된 사람들입니다.

⑥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은 절대 함부로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⑦내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예전과 다름이 없다면 내 안에 선한 일이 시작이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셔야 합니다.

⑧안식일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⑨그런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뿐 아니라 그 안식일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 지도 몰랐고 그 분이 하신 일이 어떠한 것을 상징하고 있는 지도 몰랐습니다



2.순종의 복 (히)아솨르

가). 복(히)아쉬레이

①아쉬레이 (헬) 행복, 복, 지복 --(명남) 또는 아솨르에서 유래했으며,

'행복 happiness, 복 blessedness, 지복 bliss'을 의미한다.

②복(히)아솨르는 거의 복수 연계형인 복(히)아쉬례이'로 사용되었습니다.

③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5회 나온다.

⑤시편에 26회,

잠언에 8회가 나오고,

⑥욥기서와 전도서에서는 각각 1회씩 나온다

욥5:17.볼찌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찌니라

전10:17왕은 귀족의 아들이요 대신들은 취하려 함이 아니라 기력을 보하려고 마땅한 때에 먹는 이나라여 복이 있도다



1).시편의 복(히)아쉬레이


가).시1:1.아쉬레이(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아쉬레이(히) 복” 있는사람은

①“복 있는”사람은 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매우 의미심장 합니다.

②“오, 그 놀라운 축복들!”이라고 감탄하면서 시작합니다.

③이는 은혜 받은 사람이 받을 놀라운 축복에 대한 즐거운 탄성 입니다.

④시편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은혜 받은 사람들이 삶의 행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⑤다윗은 은혜 받은 사람에 대해 소극적인 표현(1절)과 적극적인 표현(2절)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극적인 표현 시1:1.)

(2) 시1:1.“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①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함으로 불경건한 행동으로부터 멀어지고

②내적으로 은혜를 풍성하게 받았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행위에 대하여 복이 준비되었다는 것이며

③은혜 받은 사람은 경건의 길을 걸어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평안과 즐거움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④경건의 길이란?

⑤하나님의 말씀의 지시를 받으며, 육욕적인 사람들의 교활하고 악한 계략을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⑥이 길은 우리의 외적인 삶이 변화되었다는 증거입니다.


(3) 시1:1“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①이 말은 은혜 받기 전에는 죄짓는 사람들과 어울릴 때 즐거웠는데

②이제는 선별된 사람들과 더불어 동행할 때 즐거움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③비록 우리가 자신이 죄인이긴 하지만, 이제는 보혈로 씻음을 받은 죄인이며, 성령에 의해 소생함을 받았고, ④또한 그 심령이 새로워졌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⑤그래서 이제는 악을 행하는 무리들과 감히 어울리려 하지 않는 행위를 말합니다.

⑥여기에 대하여 결코 손해 보도록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시1:1.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①오만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복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②오만한 자의 자리는 매우 높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지옥의 문에 아주 가깝다는 증거입니다

③오만한자들의 특징은 죄와 영생, 지옥과 천국,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 에 대하여 비웃습니다.

④하지만 은혜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까닭에 그분의 이름이 모독 받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적극적인 표현)

나).시편1: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1).“여호와의 율법”

①“여호와의 율법”은 진실한 신자에게 매일의 양식입니다.

②은혜 받은 사람은 나는 저주와 정죄의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③율법 ‘안’에 저주에서 해방 된 사람이다 라는 분명한 의식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④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기준이다 라고 하며 그것을 묵상하기를 즐거워하는 삶을 말합니다.

⑤지금 우리는 우리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66권을 모두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⑥은혜 받은 우리는 악한 자의 길로 걷지 않고 있다는 식의 소극적 차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에 더 즐거워야한다는 것입니다.

⑦“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최고의 동반자로, 그리고 훌륭한 안내자로 삼고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축복은 여러분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순종의 복(히)아쉬레이)

다).시1:3.저는 시냇가 삼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1).시1:3.“저는 시냇가 심은 나무가.”

①이 말은 은혜 받은 사람은 그냥 야생 나무가 아니라 “심은 나무”라는 것입니다.

②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된 나무요 하나님의 소유물로 간주 된 나무이므로

③하나님에 의하여 재배된 나무라는 것입니다.

④즉 이 나무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 라는 것입니다.

(2).시1:3.“시냇가”의 복수형. 히브리어 원문에 복수형


①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시냇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문에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②이 의미는 만일 한 시내가 마르면, 다른 시내가 물을 공급한다는 것입니다.

③용서의 시냇가.

은혜의 시냇가.

약속의 시냇가.

④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시냇가 등 결코 마르지 않고 물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3).시1:3.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①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뻐하는 자는 그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②고난의 때에 인내하고, 시련의 날에 믿음을 굳게 잡으며, 또한 번영의 시기에 거룩한 기쁨을 나타내게 해 준다는것입니다.

(4).“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①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푼 자그마한 사랑도 역시 기억 되게 만드시며

②즉 열매만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잎사귀 역시 그러할 것이다라는 말인데

③은혜받은 자의 아름다움이나 풍성함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5).시1:3.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①은혜받은 자의 아름다움이나 풍성함의 지속함으로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복의 의미를 말씀합니다


(6).결론

①이 기본안에서 우리가 아쉬레이. 아쉬레(복 있는 사람)가 결정 됩니다.

②복(히)아쉬레이 있는 사람은 행위로 증명해야합니다.

③욥은 “복 있는 사람”(하나님이 인정)이였다는 사실입니다.

④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⑤그래서 결국, 욥기서 마지막에 가보면, 욥은 이전 보다 갑절의 복을, 받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⑥이와 같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안에서 약속을 지닌 사람은 복(히)아쉬레이 있다는 것입니다.


2).순종의 복(히)아솨르와 복(히)아쉬레이

(1).네게 명하는 그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복(히)아쉬레이 네게 임하며

①신28:1.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②신28:2.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2).시편 84편 복 (히)아쉬레이

① 아쉬레이(히) 행복, 복, 지복 (명남) ---- 아솨르에서 유래했으며,

'행복 happiness, 복 blessedness, 지복 bliss'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5회 나온다.


②이 명사는 언제나 남성 복수 연계형 아쉬레로 나오며,

③-는 복되도다, 복이 있도다. 또는 '복되도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④복되도다'는 축하(아쉬레)를 받기 위해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해야 한다.


⑤'복 있는 사람', 곧 복된 사람은 동사 아샤르가 지적하는 것처럼 '똑바로 가거나 걷는 것' 말하자면 올바로 행하는 사람이다.

⑥예를들어 '복된' 사람은 분명히 말해서, 하나님을 신뢰(의지)하는 사람이다

(시 2:12, 시 34:8, 시 40:4, 시 84:5, 시 84:12, 시 146:5, 잠 16:20).

⑦복된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의 권세, 즉 그의 율법(시 119:1, 시 1:2, 잠 29:18).

⑧그의 말씀(잠 16:20),

⑨그의 길(시 128:1, 잠 8:32) 아래에 들어온 사람이다.

⑩복된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을 베푼다(시 41:1, 잠 14:21).

(3).복 (히)아쉬레이----- 행복자로다 . 복있는. 복이 있음이여 . 복이 있나이다

①신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②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③시 41:1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④시 65: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⑤시 84:4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⑥시 84: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⑦시 84: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⑧잠 16: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⑨시 119: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⑩잠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⑪시 128: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⑫잠 8:32.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⑬잠 14:21.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4).순종의 복(히)아쉬레이)

①하나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을 지극히 사랑하셨듯이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언약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②그리고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 사랑의 관계가 지속되기를 원하십니다.

③그 지속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외적인 의무와 형식을 통해서 3가지 의무를 실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의무)

①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율법을 주셨습니다.

②그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③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율법을 자신도 지키고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지켜야하는 의무를 요구하셨습니다,.

(둘째 성별 되게 살아야 할 의무)


①성소에서 제사와 같은 의식을 통해서 비 언약 백성과 다르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식을 요구하셨습니다.

②그리고 안식일과 같은 날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켜지기를 원하셨습니다.

③물질도 성별되기를 원하심으로 십일조를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별하라' 이것이 선민의 의무인 것입니다.

(셋째 절기를 지키는 의무)

①절기 중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이 해방 즉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고,

②다음은 수장절인데 광야생활을 기억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을에 결실하고 나서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였습니다.

③그리고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맥추절입니다. "맥추절을 지켜라" 하십니다.

선민이기에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지켜야할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광야에서 40년동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①하나님이 위에서 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 생활했습니다.

②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자신들 스스로 심고 거둠을 통해서 열매를 거두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③광야에서 양식은 만나였습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할 존재들임을 확인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④그러나 이제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수고하여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맥추절을 지켜야 합니다.

⑤이 맥추절의 정신은 하나님 우선,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⑥하나님은 유월절이나 맥추절 같은 절기가 행사나 프로그램이 목적이 아닙니다.

⑦이런 형식을 통해서 그 믿음과 정신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⑧맥추절을 지킬 때마다 만나 대신 수고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삶을 지속 시켜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제일로 섬기고 사랑한다는 정신적 회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⑨이러한 신앙인으로서 행위에 대하여 성경은 복을 준비 시켜 놓았습니다.

⑩구약성경에는 히브리어 바라크(순종)라는 아쉬레이 (순종)의 복이 있습니다.

3.신약의 복(헬)마카리오스와 복(헬)율로기아와 복(헬)율로게오

1).신약의 복(헬)마카리오스

가).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복(헬) 마카리오스

①신약성경에서 50회 나오며,

②마태복음에 13회,

③누가복음에 15회, 바울

④서신에 7회,

⑤요한복음, 베드로전서, 야고보서에 각각 2회,

⑥요한계시록에 7회 사용되었다.

⑦신약성경에서 특별한 특징은 이 단어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를 통해 오는 독특한 즐거움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는 것이다.

⑧누가복음에서 복은 종말론적 위로로 보다 많이 이루어진다.

⑨특별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 즉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미움받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을 약속받는다.

⑩마태복음에서는 그들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행위의 요소가 보다 두드러지며 옳은 행실과 하늘의 보상 간의 관계가 강조된다.

(1).복(헬)마카리오스

①신약에서 복에 대한 헬라어는 복의 상태를 말하는 ‘마카리오스’와 영적이고

②마카리오스는 최상의 복과 영원하고 영적인 행복한 상태를 말한다.

③즉, 우리가 땅에서 받아누리는 복은 천국, 부활, 영생,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 보시기에 순전하고 ‘마카리오스’의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2).마카리오스(헬)복에 대한 신약에서 의미는 무엇인가 ?

①마카리오스 는 복(영)Blessed으로 번역

②마카리오스(헬)복 은 신약에서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영적인 복에 대하여 씌어져 있습니다

③마태복음에서는 그들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행위의 요소가 보다 두드러지며 옳은 행실과 하늘의 보상 간의 관계가 강조됩니다


(3).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복의 개념을 많이 이어 받는다.


(처음의 구약과 나중이신 곧 신약의 축복의 개념은 종말론적 개념으로 복(헬)마카리오스 )

①창 14:19 이하,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는 구약의 근거로

히 7:1--히7:28.멜기세덱에 관한 말씀으로 율법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히 7:6 이하.이로부터 그의 높은 지위나 우월성을 추론하는데, 더 큰 자가 더 작은 자를 축복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②히 11:20 이하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였고(창 27:28 이하,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였으며(창 48:15 이하, 그들이 믿음으로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③신약성경 기자들은 조상으로부터 후손으로의 축복의 전수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위대한 약속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확신을 가지고 축복하는 자는 그가 축복한 자를 하나님의 보호 안으로 밀어 넣는다.

④히브리서가 이 예들을 말하는 목적은 히 6:12에 언급되어 있다. 곧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때때로 이런 구절 들에는 "축복을 기업으로 받다"히 12:17. 벧전 3:9.와 "약속을 기업으로 받다"

⑤참조: 히 6:12; 히 6:15와 같은 공식 문구가 실리기도 한다.

⑥축복과 약속이 병행되어 있다는 점을 통해서 볼 때 이곳에서 축복은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

참조: 마 25:34과 사 65:23. 종말론적 복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⑦히 11:21. 에서는 악하게도 장자권을 경시했기 때문에 비록 축복을 구하긴 했지만 거부 당한다


(4).마리아는 이미 이런 축복의 범위 내에 속함 (메시야의 구속과 연관된 축복 )

①마리아는 이미 이 범위 내에 속해 있었다. 만약에 이스라엘의 모든 아내가 그의 아기에 대한 축복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면 메시야의 어머니는 특별히 "여자들 중에 복된" 자인 것입니다

② 눅 1:28; 눅 1:42,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③눅 1:42, "여인 중에서 네가 복이 있도다."

④이 문구에 대해서는 유딧 13:18; 유딧 15:12; 신 28:3 이하; 삿 5:24을 참조

⑤그러나 가장 복된 자는 메시야 자신입니다

⑥백성들은 메시야의 시온 입성을 환성을 지르며 환영하였다(막 11:9 이하; 마 21:9; 눅 19:38; 요 12:13).

⑦요한복음에서는 율로게오만 나온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오시는 그 분과 그의 나라는 그들이 속하는 하나님에 의해 축복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들에게 복종하는 백성들에게 환영받으며

⑧환영(영접)의 형식은 시 118:26에서 유래하며, 메시야의 구속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⑨ 마 23:39; 눅 13:35에서 예수님은 이 동일한 시편을 그의 재림의 날에 적용 됩니다

(이땅의 복을 바라는 복의 개념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습니다 )


(5).신약성경은 또한 하나님을 찬미할 축복 (영)bless 인간의 의무를 인식(기름 부음 받은자 아기 예수의 축복)

①눅 1:64에서 사가랴는 그가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즉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깨닫고 찬양을 돌린 참된 이스라엘인입니다

②눅 2:28에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팔에 안았을 때 구주를 보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습니다

③눅 2:34.그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흘러 나오는 복된 나라에 들어간 것을 알게 되므로 . 따라서 그 늙은 시몬은 아기 예수의 양친을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6).산상설교 . 천국의 복(헬)마카리오스 . AD.28년경)

①마5:3.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②마5:4. 애통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③마5:5. .온유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④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⑤마5:7, 긍휼히 여기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을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⑥마5:8. 마음이 청결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것임이요

⑦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⑧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⑧마5:11.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7).죄의 사함을 받은 복(헬)마카리오스 (주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

①롬4:7,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②4:8, 주께서 그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8).시련에 있어서의 가치 창조의 복(헬)마카리오스

①약1: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 관을 얻을것임이니라

②벧전3:14,그러나 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말며 소동치 말고


(9).요한 계시록 7가지 영적의 복(헬)마카리오스

(주님 오시는 주 재림시에 복)

①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자와 듣는 자들과 그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②계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 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③계16:15,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④계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천년 왕국을 누리는 복 )

①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새하늘과 새땅을 맞이 하는 복)

①계22:7,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②계22:14.그 두루마기를 빼는 자는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2).복(헬)율로기아 와 복(헬)율로게오

(1).신약성경에서

①동사 율로게오는 41회,

②명사 율로기아 16회 나온다. 여기서 이 두 단어를 함께 설명한다.

(2).복(헬)율로기아--명사

① 신약성경에서 명사 율로기아는 16회 나온다.

물질적인 은택을 말하는 ‘율로기아’이다.

②결과적으로 ‘율로기아’인 영적인 은택이 필수적으로 따라오며 부수적으로 물질적인 은택도 함께 한다는 뜻이 된다.

③롬15:29.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④고전10:16.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을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⑤히12:17.너희는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바 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가 씌어져 있고, 동사


(3).율로게오 (헬)칭찬하다, 찬양하다, 축복하다. ---동사

신약성경에서 동사 율로게오는 41회,

①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율로게오는 유(좋게,- 잘)와 로고스(말--- 진술)에서 유래했으며,

②-에 대해 좋게 말하다. 즉 “훌륭하게 말하다”

③ 어떤 사람에 대해 '좋게 말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④칭찬하다, 찬양하다'를 의미한다.(요한복음은 율로게오로 되어있습니다)

⑤이 단어는 신들이 사람을 칭찬하는 것에도 사용되지만

사람이 신들을 찬양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⑥단 한번 신들이 율로게인의 주어로 나온다.

⑦신들은 사람들을 그들의 선한 행위로 고찰한다.

⑧이것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재능을 부여하는 신들의 역할을 반영한다.

⑨이 역할은 헬라 종교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⑩그러나 우리는 축복이라고 하는 특별한 활동이 헬라 신들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⑪율로게오는 70인역본에서 처음으로 '축복하다' 영bless라는 의미로 나온다.

⑫동사 율로게오는 70인역본에서 40회 나오며, 몇 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라크(1288: 무릎을 꿇다, 찬양하다, 복주다, 축복하다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이 다른 이유 (엡1:3 )

옥한흠 목사



▲ 구약에 약속된 복

신명기 28장으로 대표되는 복.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무병장수, 부귀영화, 만사형통, 자손번창, 머리 되고 꼬리 되지 않는 등의 여러 복들을 주신다.

▲ 신약에 약속된 복

구약성경에 나타났던 엄청난 복들은, 신약성경에 잘 보이지 않는다. 신약성경 어디를 뒤져봐도, 만사형통, 무병장수를 찾기 어렵다. 대신에, 부자 되려고 하지 말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천국은 가난한 자의 것이라서, 가난한 자가 복되다고 하신다.

(신약에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만 나오네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 오래 살 생각 말고, 주를 위해 언제든지 생명 바칠 각오 하라! 세상에서 환난, 핍박당해도 그것이 복이니까 기뻐하라.... 어떻게 된 영문인지, 구약의 복이 신약에 와서 그 의미가 돌변했다. 그래서 혼란을 일으킨다.

▲복을 보는 기준이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한 마디로 답하면 → 하나님의 나라 때문이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팔레스틴에 지상천국을 이루고 온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세상적 왕국은 꿈꾸었지만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 없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먼저 가르치신 것은 회개하라 천국(하나님의 나라)이 가까이 왔느니라! 였다. 그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복음서에 ‘하나님의 나라’가 110회 이상 반복되어 나온다. 이유는, 우리는 지상메시야왕국을 꿈꾸는 구약시대에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로 인해 복을 보는 기준이 바뀌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무병장수가 무슨 절대적인 복이 되겠는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만사형통이 그렇게 대단한 의미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귀영화 누린들, 세상 부귀가 그리 중요한가? 물론 무병장수, 만사형통, 부귀영화 이런 것들이 좋긴 좋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그런 것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도리어 우리 신앙을 해치는 도구가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한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자칫 못 들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않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다.(롬 14:17)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먹고, 마시고, 즐기고, 쌓아놓고 살고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받는 것이 본질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백성들에게 진짜 복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는 축복, 마음의 평강,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 이런 것들이 진짜 복이다.



▲구약적 복은, 안 믿는 사람도 잘 받아 누리더라.

무병장수하는 사람들을 보라. 안 믿는 사람들도 많이 무병장수한다. (어쩌면 믿는 사람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무병장수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받는 복일수도 있다는 뜻. 부자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안 믿는 사람도 부자 많이 된다. 하나님과 관계없이도 얼마든지 부자 될 수 있다.



▲믿음 좋은 사람도, 구약적 복을 못 받을 수 있다.

그 복 주면, 아마 득보다 해가 더 많다고 판단하셔서 안 주시나 보다. 대표적으로 바울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했지만

구약적 복을 많이 못 받아 누린 것이 사실이다. 그는 헐벗고 굶주렸고 병들었다.(고전 4:11) 칼빈은 세계를 바꾼 십대 인물에 속할 정도로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의 신학이 워낙 탁월하고 성경적이어서 칼빈주의 계보가 생겼다. 그의 개혁신학은 장로교 및 미국 청교도 신앙과 사상의 뿌리가 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the 신학자'였다. 더욱이 가톨릭의 탄압에 목숨을 걸고 헌신했던 인물이라면 하나님이 구약적 복을 듬뿍 부어주셔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의 전기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31세에 결혼했는데, 조건으로 오직 ‘믿음 좋은 여자’만 찾다보니 자식을 7명이나 둔 과부와 결혼했다. (부인 복 없었다) 그녀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몇 년 못 살고 죽었다.(자식 복도) 부인도 결혼 후 9년 만에 자식 7을 남긴 채, 먼저 소천했다. 그 후 그는 15년 동안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두통, 천식, 소화불량, 열병, 담석증 등 여러 질병에 시달렸다. 약 십년 동안 그는 위가 안 좋아서 하루 한 끼만 먹고 살았다.

(건강 복도 못 받았다) 그러다가 54세로 소천했는데, 생전에 그는 수 백 명 사람들이 수 백 년 동안 못 했던 일을 자기 혼자서 해냈다. 죽는 순간까지 그는 참 신앙인의 유언을 남겼다; 내 무덤에는 묘비를 세우지 말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으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런 위대한 신앙인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구약적 복을 안 주셨다. 명예의 복은 주셨지만, (그것도 주로 죽은 뒤에) 건강의 복, 장수의 복, 가정의 복, 물질의 복- 아무 것도 안 주셨다. 그렇다면 칼빈을 보고, 우리는 복을 못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겠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장수의 복을 못 받은 사람, 배우자를 먼저 사별하는 슬픔을 겪은 사람, 아무리 노력해도 재물의 복이 없는 사람들이여 “나는 신앙이 형편없어서 그런지 복을 못 받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 그런 복은 절대복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그런 차원의 복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없다고 ‘나는 복을 못 받았다’고 말하지 말라.

< 수고의 대가를 주시는 복: 본문 중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얻는 복은 세 가지다.

제가 오랜 목회 생활을 하면서 깨닫는 것은 또한 오랫동안 성경을 읽으면서 깨닫는 것은 또한 인생을 오늘까지 살면서 경험을 통해 깨닫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을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얻는 복이다.

▲ 1.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엡 1:3)

다른 말로, 구원의 복, 영생의 복이다. 흠 없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우리 죄를 다 씻어 주시는 구속의 복, 성령으로 우리를 인 치셔서 하나님의 소유로 만들어주시는 복. 이것은 엄~청난 복이다.

이 모든 복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졌다.상의 복, 영원한 복, 절대적 복이요, 반드시 받아야 되는 복이다.

이 세상행복과 바꿀 수 없고,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는 복이다. 이 세상 명예와도 바꿀 수 없다.(찬송가 102장)

구약의 모든 복을 다 끌어와서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복이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예수님 때문에 받게 된 영생과 모든 영광은 세상 만사형통으로, 대법원장 자리로...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북한 성도들은 처절한 핍박가운데서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다.

아스팔트를 닦는 롤러 차 밑에 밀어 넣어 가루로 만들어 죽여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 이것을 놓치면, 아무 소용없으므로

그들은 담대히 핍박을 이기고 순교를 자청하는 것이다.



▲ 2. 자족하는 복

자기 형편을 놓고 팔자 타령하지 않고 만족하고 감사하는 복이다. 온 세상을 다 얻어도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행복하지 않다.

평범한 아파트에 살아도, 만족하고 자족하며 살면 행복자이다. 아무리 화려한 명예를 가지고도 불만족스럽게 사는 사람보다는

무명한 자기 존재를 놓고 감사하며 살면, 훨씬 복 받은 사람이다. 교회 안에도 보니까,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자족하는 복을 많이 주신 것을 깨달았다. 만사형통, 부귀영화, 무병장수 잘 안 주셔도, 이 복은 주셨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감사하고 만족하는 복이다.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배고플 때도, 배부를 때도 인기가 있을 때도, 인기가 떨어졌을 때도 몸이 건강할 때도, 몸이 약할 때도 어떤 형편에서도 스스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복이다. 이것이 보통 사람은 불가능하지만, 예수님 은혜로 가능하다. ▲ 3. 수고의 대가를 주시는 복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 126:5) 이것은 하나님의 자연법칙이다. 자연법칙에는 무임승차가 없다.

가을은 뿌린 자에게만 축복이 된다. 열매는 고생한 자들만 거둔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되,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서 살아야 한다. 자족하는 복이 남용되어, 노력 없는 삶에 변명이 되어선 안 된다. 노력도 하지 않고, 경쟁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해서는 안 된다.

자기 한계를 뛰어 넘는, 열심을 다하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훌륭한 정치인, 과학자, 경제인, 예술가, 목회자가 배출되야...

그런 위인이 되려면 남다른 노력 없이는 절대로 안 된다.

(자연법칙도 무시말아야...)

그런데 우리가 노력한다고 노력대로 다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수고의 대가를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누릴 수 없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시 127) 여호와는 죽이기도/살리기도, 가난하게도/부하게도 높이기도/낯추시기도 하시기 때문이다.(삼상 2:6~7) 우리에게는, 우리가 수고한대로 30배, 60배, 100배로 쏟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큰 복이다.



▲결론 :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오벳에돔은 정성을 다해 법궤를 자기 집에 모신 결과 3개월 만에 큰 복을 받았다. 성경에 오벳 에돔 이름 뒤에는 종종 ‘복’字가 따라 다닌다. 그래서 주님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서 석 달 동안 머물렀는데, 그 때에 주님께서 오벳에돔과 그의 온 집안에 복을 내려 주셨다(삼하 6:11) (그 외 삼하 6:12, 대상 13:14, 대상 26:5)

그러나 앞서 아비나답은 20년간 법궤를 자기 집에 모셨지만 전혀 복을 받지 못했다. 신약시대 우리 성도들은 우리 영에, 우리 가정에 법궤보다 더 생생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 우리는 아비나답의 가정인가? 오벳에돔의 가정인가? 하나님을 ‘귀찮은 뒷방 영감’ 정도로 여기면서 억지로 가정예배를 드린다면... 아비나답처럼 아무런 복을 받지 못할 것이다. 텔레비전보다 못한 하나님을 섬기면서 복 받기를 기대하겠는가? 우리는 오벳 에돔처럼 하나님을 기뻐하며 섬겨야겠다. 그러면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을!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 37:


신약에 나타난 복의 개념

 

 

 

                                                                                 글쓴이: 회복의교회 김민호 목사

 

 

신약에서 말하는 복관(福觀)은 구약의 복관과 그 일관성에서 어떤 흐트러짐도 없다.

 

굳이 신약과 구약의 차이라고 한다면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 또는 예표라는 정도이다.

 

구약에서는 민족적 이스라엘이 선민이지만, 신약에서는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는 교회가 바로 선민이다(롬9:6-8).

 

아브라함은 비록 육적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지만, 영적으로는 믿음의 조상(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의 조상)으로 선언된다.

 

이렇게 해서 구약과 신약은 오묘한 지속성과 단절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구약의 복관(福觀)이 신약의 복관(福觀)과 어떻게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구약의 족장 언약은 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특정한 사람과 민족을 선택하시고 복을 주신 것이라고 했다.

 

즉 특정한 대상에게 복을 주시는 목적은 그가 복(복의 근원)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이란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앞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이러한 구약의 메시지는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이해되어진다.

 

 

 

 

 

여기에는 물질적인 풍요와 병고침, 성공과 행복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이런 것들은 오로지 복의 결과로만 여겨진다).

 

도리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를 받고, 재산과 명예와 행복을 잃는 것이 복이라고 언급한다(마5:101-11).

 

그렇다. 신약의 복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이해 된다.


그리고 신약의 교회는 복의 근원되신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의 모임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이렇게 복을 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복 받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의 빛, 소금, 의의 병기, 진리의 기둥과 터로 살아가도록 요구된다.

 

 





 

 

바울 사도 자신도 로마서 1장 14절을 보면 자신의 구원(복/은혜)를 받은 것은 

 

이방인과 헬라인의 구원(복)을 위해 빚진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디도서 2장 14절의 말씀은 이런 사실은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다. 신약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복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구약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이 땅에 또 다시 노아의 대홍수나 바벨탑 사건이나, 소돔과 고모라

 

사건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타락하면 창세기의 3대 재앙은 그대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 재앙의 원인은 세상의 악함 때문이라기 보다는 복이 되어야 할 교회가 복의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전도는 단순히 지옥 백성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한 숫자놀음이 아니다.

 

전도는 교회가 세상에 복의 역할을 하는 실제적인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도를 통해서 불신자들이 복을 받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세상은 더 많은 복의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복(하나님)을 받은 사람은 구약의 백성들처럼 성결과 거룩을 추구하게 된다.

 

왜냐하면 거룩과 성결만이 복으로 가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점검하는 방식으로 이전과는 다른 삶, 즉 복의 근원된 삶의 여부(열매)로 묻는다(눅6:44).

 

그렇다면 이제 구약의 진멸 전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생각해보자.

 

구약의 진멸전쟁은 신약에서 거짓과 악한 영과 죄악과 육체의 소욕과의 싸우는 영적 전쟁을 바라보게 하는 그림자다.

 

이 구약의 그림자는 신약의 성도가 어떻게 세상에서 복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거짓과 싸우고, 죄악과 싸우고, 육체의 욕망과 싸움을 통해서만이 복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죄와 불법과 악한 영들과 싸우지 않는 교회는 아무리 고아원을 운영하고, 사회 사업을 많이 한다고 해도 참된 교회일 수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세상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만이 세상에 유일하게 복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죄와 싸우는 공동체라는 점이다.

 

교회만이 죄와 싸울 수 있다.

 

교회만이 원수된 세상과 복의 근원된 하나님을 연결시켜 줄 수 있다.

 

교회만이 절대적인 진리를 알고 지켜낼 수 있다.

 

신약의 교회는 이렇게 함으로서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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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에 나타난 복의 이해 

 

                                                                                     글쓴이: 회복의교회 김민호 목사


 
[성경]구약에 나타난 복관(福觀)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인간 타락의 문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핵심적인 전제다.

 

왜 우리는 ‘복’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 타락의 문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인류로 하여금 복을 반드시 추구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태초의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창1:27).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과 하나의 유기적 연대를 이룬 관계를 말한다.

 

이 상태가 복으로 가득한 상태이다. 고로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상태로서의 인간에게 아쉬울 것은 전혀 없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낙원을 경작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에덴(기쁨)을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타락 이전의 인류는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피조물들을 보존하고 돌보는 일을 했다. 타락 이전의 인류의 삶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을 양산하고 복의 원천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뱀(사탄)의 유혹을 받고 타락함으로써 인류에게 비극이 찾아왔다. 아니 인류에게만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 전체에 비극이 찾아온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기쁨의 동산, 에덴으로부터 추방되었고 온 세상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도록 저주를 받고 말았던 것이다. 복을 양산하고 복의 원천으로 살아가야 할 인간의 타락은 피조세계 전체를 저주로 가득하게 만든 것이다.

 


 

창세기는 이렇게 인류의 타락을 다룬 후에 심각한 몇 가지 사건을 소개한다.

 

우리는 창세기의 심각한 몇 가지 사건을 다루기 전에 타락한 공동체의 등장을 먼저 관찰해야 한다.

 

타락한 인류는 이제 더 이상 복의 원천으로 살아가는 일(경작)을 멈춘다. 타락한 인류는 스스로의 힘으로 복을 추구하고, 자기의 복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공동체로 변질된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을 일명 가인 공동체라고 한다.

 

창세기 4장은 이 타락한 공동체(가인 공동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해 준다. 그들은 성을 쌓고는 공동체로 나타난다. 이는 하나님 없는 안전을 추구하는 공동체를 보여준다. 또 짐승을 자기 울타리에 가두어서 피조물들을 재산 축적의 도구로 삼게 되었다. 이는 타락 이전의 인류가 모든 피조물들을 축적해야 할 재산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고 돌봐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태도와 대조를 이룬다. 그 밖에도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 없는 즐거움을 위해서 악기를 만들고, 연장과 무기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가 스스로 복을 추구하려 했던 노력은 결코 복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도리어 노아의 대 홍수사건과 바벨탑 사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사건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것이 인류 타락을 통해 나타난 3대 재앙이다. 이 3대 재앙은 복을 상실한 인류가 스스로 복을 추구하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입증한다. 복의 원천(源泉)의 삶이 아닌 이기적인 복을 위해 몸부림치는 인류는 점점 잔인해지고, 불행해지며, 혼란스러워 질뿐이었다. 모든 것이 파괴될 뿐이었다.

 

창세기 6장 5절의 말씀은 이러한 인류의 상태를 한 구절로 잘 말해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것이 타락한 인류의 자화상이었다.

 

이러한 비극적 인류 심판 사건을 배경으로 하면서 하나님은 은밀하면서도 놀라운 계획을 시작하셨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의 ‘족장언약’의 출현이다. 창세기의 족장이라고 한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말한다. 이 족장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복’을 약속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이 족장에게 먼저 찾아오시고 복을 약속하셨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모습은 타 종교나 무속신앙과는 근본적인 구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약속은 선택과 은혜의 교리를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가인 공동체가 스스로(인위적으로) 복을 추구하려 했던 모습과도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이 복의 약속은 신약의 ‘복음’의 그림자가 된다.

 

 


우리가 족장언약을 살펴보기 전에 무엇보다도 최초의 족장이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사건을 먼저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일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주신 ‘복’을 이해하는데 열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1장 후반부에 최초로 등장한다. 창세기 11장이라고 한다면 노아의 대홍수 사건 후에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경건에 힘쓰기보다는 도리어 스스로의 힘으로 심판을 피하기 위해 바벨탑을 만들다가 언어의 혼돈을 맞이하게 됐던 사건 직후이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이런 배경을 등에 업고 있다.

 

이런 배경 속에 부름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독특한 선언을 듣게 된다.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는 것이다. 이 간단한 선언 속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택의 성격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온 세상의 저주와 불행과 고통의 근원이 된 인류와는 대조적으로 온 세상의 ‘복(福)’ 또는 ‘복의 원천(源泉)’이 되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타락 이전의 인류에게 요구하셨던 삶의 성격을 다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인류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었던 옛 아담의 삶을 다시 시작하라고 명령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받은 이런 놀라운 언약은 이 후에 나타나게 될 복의 성격을 한 마디로 규정해 준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은 복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타인에게 ‘복의 원천(源泉)’이 되도록 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저주로 말미암아 온 땅에 가사와 엉겅퀴로 가득한 세상이 그(그와 그의 후손들)를 통해서 다시 에덴처럼 회복되길 기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성격이다.
 
  아브라함에게 ‘복’이 되라고 선언하신 하나님은 창세기의 세 족장에게 공통된 언약을 주신다. 그 언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 된다.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복을 주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너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여기서 족장들이 받은 복은 두 가지로 규정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목적으로서 선택은 특정한 대상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복의 내용과 기능으로서 복을 받은 사람은 이제 ‘복의 원천’으로 살도록 ‘새로운 기능’이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복에 대한 약속은 결국 하나님의 선택의 의도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을 선택하신 것은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복의 근원)이 되도록 하기위해 기능(Function)을 바꾸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민들이 받은 ‘복’이다.
 

이런 하나님의 행위는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것과 짝을 이룬다. 신약성경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과 복을 주심에 대하여 “새로운 창조(new creature)”라고 정의한다. 하나님의 선택은 단순히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나누는 행위 이전에 ‘새로운 경작자’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타락한 인류는 모든 피조물들을 파괴하고 서로를 죽이고 저주를 몰고 왔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필두로 하여 하나님께서 두 족장과 맺은 언약은 복과 에덴의 회복(하나님 나라 건설)을 몰고 오는 새로운 인류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세 심판사건, 즉 노아의 대홍수 사건과 바벨탑 사건,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염두에 둔 하나님의 행위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족장 언약에서 복 받음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수단이요, 기능의 변화다. 창세기의 족장들은 복의 대상이 되기 위해 선택받은 것이 아니다. 저주로 가득한 세상에 복의 ‘원천’, 또는 복을 양산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선택받고 복을 받은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율법을 생각해 본다면 이해가 쉬워진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율법은 언약 백성의 의무로 주어진 것이다. 율법은 지키면 구원을 얻고, 거역하면 하나님의 심판(저주)을 받는다는 두 가지 원리로 이해된다.

 

그러나 근원적인 차원으로 볼 때 율법은 저주 받은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족장이 받은 언약의 계승자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신 것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출애굽 한 후에 받았다는 점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렇다면 율법의 기능이 무엇이라는 것인가? 율법은 모든 족속에게 복(복의 원천)으로 살도록 부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복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원리라는 말이다. 계명대로 사는 것이 복의 원천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계명을 어기면 어디를 가든지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저주의 원천으로 살게 된다.
 

이 원리는 크게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구분된다. 그래서 율법을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고 한다. 사랑의 이중 계명은 이 땅에서 복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성도의 대전제이다. 즉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대신 계명 對神 誡命)만이 이웃에게 참으로 복(대인 계명 對人 誡命)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양대 계명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對神 誡命)에 둘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 복의 원천으로 인증(認證)되지 않은 사람이 이웃에게 복의 원천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기 방식대로 이웃에게 사랑을 하려는 행위는 결코 올바른 사랑(올바른 복)이 불가능하다. 이런 행위는 결국 이웃을 파괴하는 왜곡된 사랑으로 가게 될 뿐이다.

 

오늘날 나타나는 휴머니즘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휴머니즘은 어찌하든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자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우선순위로 두지 않음으로 심각한 인간성 파괴와 환경오염, 모든 질서의 붕괴로 나타난다.
 

 

 

 


 

 

그러면 이제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표면적으로 볼 때, 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고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나안 땅이 복이 아니다. ‘하나님 자체’가 ‘복’이다. 인류 타락이 궁극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던 삶을 잃게 된 것이다. 거기서 인류의 저주와 죽음과 불행이 시작됐다. 에덴동산이 기쁨의 동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환경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풍요로울지라도 관계가 깨지면 그 가정이 지옥이 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간혹 사람들은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의 기업(유산)이라고 언급된 것으로 인해 이해의 어려움을 겪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기업(유산)은 ‘여호와 하나님’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는 영역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로 이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본다면 가나안 땅은 기업이 되기도 한다.


 

 


 

 

가나안 땅보다는 하나님 자체가 ‘복’이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하나님과 관계가 깨지면 참혹한 기근과 전쟁과 재앙이 가득한 곳이 된다. 급기야는 그 땅에서 토해지기까지 한다. 비록 가나안 땅에 있더라도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면 그 땅은 복이 없다. 저주와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할 뿐이다.

 

왜 그런가? 가나안 땅 자체가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이기 때문이다. 고로 구약에서 말하는 ‘복’은 결국 물질적인 것도, 정신적인 것도 아니다. 영적인 것이다. 가나안 땅은 단지 하나님 자체를 ‘복’으로 삼는 자에게만 복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의 땅, 저주의 땅, 전쟁과 고통이 가득한 참혹한 땅이 되고 만다.

 

이제 구약의 지혜서를 보자. 구약의 대표적인 지혜서는 잠언이다. 잠언에서 하나님은 ‘지혜’로 묘사된다. 잠언은 ‘지혜’를 소유하는 것이 복이요, 생명나무라고 표현했다(잠3:13; 3:18 4:7). 이것은 하나님을 소유함으로 주어지는 결과와 일치한다. 물론 성경에서 재물과 건강과 성공과 전쟁의 승리, 그리고 행복을 복이라고 말하는 부분도 종종 발견된다. 그러나 이 모든 표현은 하나님을 소유한 것으로 파생된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구약에서 하나님을 떠난 물리적인 풍요와 안락함은 저주요, 하나님의 유기로 간주된다(잠30:7-9).
 
  그러면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선민이 어떻게 세상에서 복의 근원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임마누엘 עמנואל’이라 한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선민이 타락과 저주와 재앙으로 가득한 세상에 ‘복’이 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임재(도래)를 이루는 방식이다. 하나님이 바로 원래(Original) ‘복’이시므로 하나님이 임재하셔야 복이 되고, 복의 근원으로 살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임마누엘)’는 말은 다른 말로 ‘복’과 함께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복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복 된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가인 공동체가 잘 보여준다. 임마누엘 없는 복에 대한 추구는 결국 3대 재앙을 양산할 뿐 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주의 명령(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가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가 복된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류가 타락한 후엔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데 있다.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해도 주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에 빠질 때가 다반사다. 죄에 빠지면 임마누엘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임마누엘을 지속하시기 위해 ‘성막’을 건조하도록 하셨다(후에 솔로몬 시대에 성막은 성전이 된다). 성막, 또는 성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 가운데 계속적으로 함께 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주어진 것이다. 고로 성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제사를 통해서 죄를 제거함으로써 하나님의 함께 하심(임마누엘)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선민들은 복 가운데 있을 뿐 아니라, 복의 근원으로 살 수 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가 복을 받도록 하시는(임마누엘) 방식이면서, 동시에 복의 근원된 삶이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이런 차원에서 성전과 성전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 ‘예수’라는 이름은 저희를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이름인 ‘임마누엘’은 신약의 성도들이 더 이상 ‘제사’라는 제도 없이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이 부분은 신약에 나타난 복의 이해에서 더 다루게 된다).

 

그러나 성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도 자주 복으로 살아가지 못했다. 그 원인은 최초의 인류가 타락하게 된 원리와 같다. 즉 죄와 위선된 성전 제사 때문이었다. 그들이 복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더 이상 복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현상은 종종 가나안 땅에서 전쟁의 패배와 극심한 궁핍, 그리고 평화(샬롬)의 붕괴로 나타났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은 복이 아니라 재앙의 대상이 되고, 이웃 나라의 침략과 노략거리가 되었다. 그 원인은 분명했다. 그들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이상 복으로 살아가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타락한 인류처럼 이기적인 복만을 위해서 살게 됨으로써 그들에겐 더 이상 복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복의 역할도 기대할 수 없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에 빠졌다고 지적하는 것은 결국 그들이 복의 근원이길 포기하고 가인 공동체처럼 자기의 이기적인 복만을 추구하는데 열심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구약의 복을 이 정도 언급하게 될 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흔히 나오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가나안 전쟁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것은 분명히 만민들에게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창세기의 세 족장들의 언약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끔찍한 전쟁을 수행하라고 명령하셨다. 그것도 그냥 전쟁이 아니다. ‘헤렘 전쟁’을 명령하셨다. ‘헤렘 전쟁’이 무엇인가? 진멸전쟁이다.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하찮아 보이는 짐승들까지도 남김없이 다 죽이는 전쟁이다. 씨를 말리는 전쟁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런 끔찍하고 잔인한 전쟁을 명령하셨던 것이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일삼도록 하셨는가. 이것이 어찌하여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신약에 나타난 복의 개념을 살펴보게 될 때 비로소 쉽게 풀릴 것이다.

            

복을 바로 알면 성경이 보인다
 
 

                                                                                                                     글쓴이: 김민호 목사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많이 왜곡된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복'이라는 용어에 대한 이해이다.
 
기독교에서 언제부터인가 '복'이란 용어는 깨어있다는 교회나 목회자들에겐 가장 혐오스런 용어로 이해될 정도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복'이란 용어의 왜곡된 남용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더 이상 돌이키기 힘든 치명상을 입었고,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까지 상실할 지경에 놓였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타종교나, 미신과 아무런 구분을 규정하기 힘든 지경까지 놓이게 되었다.



 


 
작금의 실태로 말미암아 개혁교회에 속한 어떤 유명한 목사는 설교 가운데 농담조로 ‘내 앞에서 복 얘기하면 죽어!’라고

 

말할 정도로 복은 혐오의 대상처럼 되었다.
 
그러면 이제 개혁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모토인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솔라 스크립투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성경은 과연 ‘복’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가?
 
아니면 성경은 복에 대하여 ‘무관심’한가?

 

 

 


 
흥미롭게도 성경은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온통 복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복은 성경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복이 성경의 핵심 주제이기 때문에 복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말을 바꾸어서 생각해 본다면, 복에 대한 왜곡된 이해는 성경 전체를 오해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이런 차원에서 복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돕기 위해 연속적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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