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빛을 발하라!
성경: 이사야60:1-9절
그릇이 금이 가거나 깨어질 때가 있습니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깨지고 또 깨어졌습니다. 야곱도 부서지고 또 부서졌습니다.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깨지고 부서지고 또 부서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빼앗기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서 70년이라는 세월동안 깨어지고, 그곳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릇은 깨어지면 끝이지만 사람은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일어나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쿠미”라는 말인데 “너는 일어나라.” 라는 말입니다. 지금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들은 절망 속에서 깊은 실의와 낙심의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였고, 나라를 빼앗겼으며, 바벨론에서 소망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또 스스로 발할 수 있는 빛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이 임하셨다.” 그러므로 “너는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 여러분 회복은 얼마나 기다리는 것입니까?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아파 보세요, 회복만큼 소중한 것이 없어요, 사람이 서로 마음이 갈라져 보세요,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회복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회복할 할 것인가. 그것이 일어나라는 말속에 담겨있습니다.
1.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그들은 맥을 잃었습니다. 한마디로 쓰러진 나라와 함께 자신들도, 쓰러지고 죽어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된 것은, 곁으로 보면 국가의 힘이 약한 것이 원인이지만, 그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께 죄를 짓고, 반역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일이 벌어지고 포로가 되어서 이방 땅에 끌려온 후에야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현실을 변화 시킬 힘이 없었습니다. 한탄과 후회 그리고 슬픔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심했습니다. 내 조국 내 땅 예루살렘에 돌아갈 때까지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그들의 회개의 표시였습니다. 그들은 거문고는 나무에 걸어 두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 갈 때까지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원수의 땅에서 어떻게 잘 먹을 수가 있으며, 즐거운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잘못과 죄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이제 나라를 망하게 한 그 죄를 용서하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말씀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절망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말을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현실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70년 동안 이 반역하고 타락한 백성을 바벨론에게 맡겼습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때리는 몽둥이 이었습니다. 마치 패역한 자식을 경찰에 신고한 부모 같은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제 과거를 죄를 용서 하겠다, 것입니다. 이것은 회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호니라고 하는 한 영국 사람이 집 청소를 하다가 벽에 늘 걸려 있던 그림 한 장을 떼어냈습니다. 이 그림은 조상 때부터 전해 내려오던 장식용 그림인데 세월이 오래되어서 먼지가 쌓이고 더러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게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미술품 가게에서 그 그림을 닦아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18세기 유명한 미술가 토마스 가인스버그가 그린 “블루보이(blue boy)”라는 그림의 원판이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호니는 깜작 놀랐습니다. 이 사람은 이 그림 한 장으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보물을 땅에 묻혀 있을 때 아무 가치가 없듯이, 엄청난 가치를 지닌 그림이지만 먼지로 덮여 있을 때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때를 닦고 먼지를 털어 그 원래 모습이 드러날 때 그 가치를 회복하게 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부패하고, 더러워지면서, 먼지에 쌓인 그림같이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깨끗이 씻고 닦아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날 때 고귀한 존재가 됩니다. 이런 모습을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오셔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렸습니다. 그분의 보혈은 죄를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야곱의 고백과 같이 벌레만도 못하던 존재가 “천하보다 귀한 존재”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은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용서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복역의 때가 끝났으니, 죄 짐을 내려놓아라. 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용서로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을 용서를 하실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1:1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절)
많은 사람들은 큰 병에 대한 기억을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병이 다 낫고 치료가 된 후에도, 자신이 약하다는 생각에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은 몸이 충분하게 회복되었지만,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서 용기를 내지 못하고 환자처럼 행동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과거를 잊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이제 다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죄에 붙잡혀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 어두움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죄와 실패가 사라진 빈 공간에는 성령님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그를 바라보며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이게 일어나는 것이요.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2.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제 떠날 준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지금 이방나라 바벨론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주권은 이제 페르사를 세운 고레스 왕에게(B.C 546-529)에게 넘어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자기나라로 돌아가도 좋다는 귀환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돌아온 그들은 무너진 성전을 새롭게 건축합니다. 이것이 제2성전으로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주신 것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손짓하며 는,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한 마디로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준비는 지금까지 살았던 바벨론을 떠날 준비입니다. 이제 이 자리를 떠날 수 있는 그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야를 나그네로 사는 우리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떠나야 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정착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정착하면 생각과 시각이 좁아집니다. 그리고 전통을 만들고, 제도를 만듭니다. 하나님은 우리는 가볍고 자유롭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란 시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는 사람, 빛을 발할 수 있는 사람, 현실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 이 땅에 살지만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벨론은 모든 것이 있는 곳이지만 그들에게는 언젠가는 떠날 나라입니다. 그것을 알아라. 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사는 이곳이 그렇습니다. 여기서 얼마나 더 사실 것 같으십니까?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연약한 존재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명이 하나입니다. 두 개 세 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딱 살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일생(一生)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시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것을 알고 언제든지 바벨론 같은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곳은 바벨론이며, 지나가는 곳이요, 영원히 머물 수 없는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⑴ 불확실의 삶
바벨론이나, 광야는 불확실한 곳입니다. 모든 것이 확실하다면 하나님이 필요 없어집니다. 불확실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미래를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용한 점쟁이나, 도사도 10분 후의 삶을 모릅니다. 알기는 어떻게 압니까. 불확실한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는 열쇠가 됩니다. 내일 일을 모르는 인간이라는 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인도 하시는 분이 필요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며, 그런 우리에게 기대와 긴장이 있습니다. 내일 어떤 일이 있을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어디로 인도할 것인가. 무엇을 주실 것인가. 하는 것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까.
⑵ 단순한 삶
광야의 삶은 단순합니다. 집은 누구나 천막입니다. 음식은 만나입니다. 여기는 메뉴가 없습니다. 내가 선택할 권한이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주어진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스트레스는 복잡하기 때문에 옵니다. 스트레스 해결은 단순함을 통해서 풀 수 있습니다. 단순함이 축복입니다. 단순함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며, 자신의 욕심을 포기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내어 보내면서 두벌 옷을 갖지 말라. 돈주머니를 갖지 말라. 하십니다. 우리는 책임지지도 못하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읽지도 못하는 책을 많이 쌓아 두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책 몇 권만이라도 다 읽어 내 것으로 삼는 것이 어떻습니까? 한사람이라도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광야는 단순한 곳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 간 후 복잡해집니다. 여기서 문제는 발생합니다.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광야 입니까. 바벨론입니까?
3. 변화입니다.
한때 세계 시장의 제왕같이 군림했던 I. B. M은 야생오리를 그 상징물로 삼았습니다. 길들여 지지 않았으나, 질서가 있고, 작은 몸뚱이나 강한 생명력을 가졌고, 한가롭게 놀고 있는 것 같으나 가장 뛰어나게 변화에 대처 나가는 야생오리 같이 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입니다.
야생오리가 수천 킬로를 여행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가끔 쉬어가는 곳에 옥수수에 맛을 들이면 힘겨운 긴 여정으로 포기하고 그곳에 안주하는 오리가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그들은 꼼짝없이 얼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야생오리가 싱싱한 생명력을 유지 할 할 수 있는 원리는 오늘 급변하는 이 시대에 성도들이 취해야 할 자세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오늘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소용돌이는 성도들의 신앙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일어난다는 것은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빛을 받는 존재에서, 빛을 비추는 존재로 변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선교사로 파송 받아서 남인도에서 세계교회 협의회 지도자로 사역하였던 ‘레슬리 뉴비긴’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인도 35년 사역을 마치고 그의 고국 영국에 돌아 왔을 때 자기를 파송해 주었던 뜨겁고 활기 넘치던 교회는 어디로 가버리고 차갑고 텅 빈 교회를 대하게 됩니다. 65세의 이 선교사에게 고향 교회가 선교지와 같은 곳이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는 복음에 대한 반대보다도 더 차갑고 마주 대하기 힘든 복음에 대한 냉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서구 사회를 선교사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그 사회를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서구 사회가 힌두교나 무슬림이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 같이 느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는 사회의 변화가 교회를 침몰 시키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서구 사회가 선교지(mission feld)가 되어야 함을 주장합니다. 그는 서구 문화와 그것에 대항하기 위하여 교회가 변화 되어야 하며, 그 교회의 변화는 교인의 변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하지 않으면 어느 날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누워있는 사람이 일어나는 사람으로, 정체된 사람이 움직이는 사람으로, 느슨한 생활에서 긴장과 위기를 대면하는 사람으로, 받고 살던 사람에서 주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일어나라는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두운 산길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지는 중에 간신히 절벽에 있는 나뭇가지를 붙잡았습니다.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고, 팔의 힘은 점점 빠져갑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소리쳤습니다.“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그 때 음성이 들렸습니다.“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아라.” “하나님, 이것이 제 생명줄인데, 어떻게 놓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살고 싶으면 놓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이 사람이 매달려 있는 곳 바로 밑이 길이었습니다. 손만 놓으면 사는 것입니다. 그것도도 모르고, 이 사람은 버티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는 이렇게 소리치는 것입니다. “거기 하나님 말고, 다른 사람은 없소?” 이것은 자기애입니다. 자기 고집이나 자기 생각입니다. 이것을 버리지 않으면 신앙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는 길이나 변화는 죽을 것 같지만 믿음으로 손을 놓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4. 어떻게 가능 합니까?
그들의 처지와 상황은 자신도 책임질 수 없는 형편입니다.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여러분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다에 고기가 올라오고, 땅에 풍년이 오는 것을 사람의 노력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같은 땅인데 북쪽은 왜 그렇게 농사가 안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 그곳에서는 풀이 자라지 않아서 퇴비를 만들 수 없습니다. 산에 나무가 없고, 들판에 풀이 없으며, 집에는 불이 꺼져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탈출 하고 도망을 하려고 합니다. 살 수 없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해방 후 북한이 우리보다 살기가 나았습니다. 압록강의 수풍의 전기를 남한이 받아다 썼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까? 하나님이 북한을 외면하신 것입니다. 6.25는 북의 남침으로 일어난 전쟁입니다. 3일 만에 서울은 점령되었고, 남한의 사망자 230만여 명, 북한은 292만여 명, 유엔군은 15만, 중국군은 90만, 10만 명의 고아와 20만 명의 미망인, 북한의 3,000개 교회는 파괴되었습니다. 지금도 6개 수용소에 15만 명에서 20여만 명이 갇혀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들을 꼬리 없는 짐승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 많은 기독인들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하십니다. 빛을 발하려면 자원이 있어야 하고, 또 거기에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전구는 콘센트에 연결 되어 있어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빛을 발하려면 그 근본이신 하나님께 접속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근본 에너지이십니다. 우리가 접속만 하면 무한한 빛을 제한 없이 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지도 못하는 독창적인 사고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나의 의지로는 사랑이 안 되지만, 하나님의 힘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주변을 채워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생활, 그 바벨론의 패망과 페르사의 등장 같은 역사적인 사건은 세상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프랑스 무신론 혁명 당시 주일 예배를 막기 위해 한 주간을 10일로 바꾼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산업의 생산량이 40% 감소했습니다. 러시아 혁명 때 레닌이 한 주간을 8일로 늘려 생산량이 30% 감소해 일주일을 6일로 줄였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생산량 30% 감소돼 레닌 역시 일주일을 다시 7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일주일의 ‘7일’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었다’는 창세기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결론
프랑스가 낳은 빅토르위고는 1841년까지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도 그의 모든 활동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떠난 자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 주변과 가정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왔지만 그는 그걸 몰랐습니다. 드디어 사랑하는 딸 레오가 센 강에 몸을 던져서 스스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유서를 남겼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 품안으로 속히 돌아오십시오. 언제까지 그렇게 사시겠습니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자녀에게 고통을 주고, 주변 사람에게 불행을 주는 것을 이 빅토르위고는 몰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파리의 생활을 다 정리하였습니다. 시골로 갔습니다. 그는 작품도 버리고, 인기도 버리고, 명예도 버렸습니다. 권력도 다 버렸습니다. 그 후 회개한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작품을 썼는데 그 작품이 ‘레미제라블’ ‘노틀 담의 꼽추’ ‘지불라’ ‘노틀담 파리’ ‘빛과 그림자’ 같은 작품들입니다.
세계적인 작품이 나왔습니다. 여기는 딸과 관계가 되는 것이 많습니다. 자기의 과거의 삶을 비추어 주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는 위대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전 국민의 존경과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도 행복했습니다. 그가 이 땅을 떠났을 때는 프랑스가 국장을 해 주었습니다. 그는 귀중한 말을 한마디 남겼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순간 그 사랑의 품에 안긴 순간 내 인생의 저주는 사라졌다’ 고 말입니다. 누구나 다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면 저주는 떠나가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은 벗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슬픔과 고통은 끝나는 것입니다
어떤 호스피스 일을 하시는 목사님이 임종만 1400명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임종을 맞이할 때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는데 대체로 손을 막 흔든답니다. 그러면 그 방에 있던 간호원도, 아내도 피한답니다. 뛰쳐나온답니다. 자기를 잡고 가는 줄 알고, 자녀들도 모두 다 나온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랍니다. 마지막 순간에 잡을 것이 없어서 그런답니다. 그때 꼭 양손을 꼭 잡아주고 기도해주며, 요한복음 11장25-26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시편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같은 말씀을 읽어주고 꽉 붙잡아 줘야 된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가만히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손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잡았던 분의 권력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돈을 잡았던 재벌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잡을 이가 없습니다. 마지막에 흔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잡을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내 생명이 다 되도록 나를 잡아 줄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을 떠날 때 나를 천국으로 붙잡고 이끌어 갈 이가 어디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조영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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