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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계시록을 어떻게 解釋하고, 說敎할 것인가? | - 계시록 해석

하나님아들 2017. 6. 10. 00:55
계시록을 어떻게 解釋하고, 說敎할 것인가?
계시록 접근과 해석에 관한 提言

최갑종 교수


I. 서론

신약성경의 제일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은 전통적으로 요한복음서와
요한 1,2,3서의 저자로 알려진 사도 요한이 로마 황제 도미티안(Domitian) 시절(AD 81-96)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자신의 목회 대상이었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곧 에베소, 서
머나, 버거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낸 일종의 회람 편지로 알려
지고 있다. 계시록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교할 것인가? 아마도 신구약성경중에서 지금까지
요한계시록만큼 해석하기 어렵고, 그리고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책은 없
을 것이다. 종교개혁자 칼빈(John Calvin)선생이 신구약성경중에서 유일하게 계시록에 관
한 주석을 쓰지 않은 이유도 아마도 이런 문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계
시록에 관한 한 그 누구도 자신이 감히 계시록 해석의 권위자나 왕으로 자처할 수 없을 것
이다. 계시록에 관한 한 우리는 항상 조심하고 또한 겸손하여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시록은 닫혀져서는 안되고, 열려져야하며, 읽혀져야 하고,
해석되어져야하고, 또한 교회에서 설교되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계시록 자체가 서문에서 계
시록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예언의 말씀"
임을 주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계시록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1:1-3)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록이 하나님의 말
씀인 성경의 한 부분이라는 이 단순한 사실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오늘 우리 시대와 교회가
계시록에서 울러 퍼지고 있는 중심적인 메시지를 절실히 필요로 하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는 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그리고 자신 있게 설교할 것인가? 계시록의 핵심적
인 메시지는 무엇이며, 우리는 그 핵심적인 메시지를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이제 계시록
해석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제안을 하고자 한다.

II. 계시록의 역사적 특성에 유념하라.
.
우리는 계시록을 포함하여 모든 신구약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모든 시대
의 사람들에게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믿는다. 동시에 우리는, 마치 하나님의 아들 예
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의 역사세계에 오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모든 성
경은 인간 저자를 통하여, 인간의 언어와 역사와 문화와 종교와 사상의 세계를 수단으로 하
여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따라서 모든 성경은 超역사 혹은 無역사적, 無문화적, 無
인간적이지 않고, 오히려 각각 고유한 역사적, 문화적 특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요한계시록은, 마치 창세기와 이사야서가 각각 다른 시대의 저자와 독자와 배경과 문학적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마태복음서와는 각각 다른 저자와 독자 및 시대적, 문화적 배경
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한편으로 모든 성경이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
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한다하더라도, 또 다른 한편으로 모든 성경은 일차 적으로 특수한 시
대의 저자를 통하여 특수한 시대의 사람들에게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쓰여졌었다는 사실을
약화시켜서는 아니 된다.

계시록은 분명히 특정한 시대에 살았던 특정한 저자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특정한
시대상황에서 특정한 문제들에 직면해있던 사람들을 위해 썼다. 이미 계시록 자체가, 계시
록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로 불리어지는 섬에 유배되어있
던 역사적인 인물인 요한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밧모섬 인근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당대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보낸 역사적인 편지임을 강하게 증언하고 있다(계 1:1-9; 22:21). 만
일,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계시록이 AD 81-96년까지 로
마 황제로 재임하였던 도미티안(Domitian)에 의해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사도 요한이, 당시
한편으로 로마 황제 숭배 사상으로 인하여, 또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에 적대적인 유대교인
들에 의하여(2:8-11) 극심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경제적인 핍박과 어려움에 빠져있던 소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냈던 역사적인 편지라고 한다면, 우리는 계시록을 당시 저자와
독자들이 처해있었던 역사적, 종교적, 사회적 정황을 떠나서, 초역사적으로나 혹은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접근하거나 해석하려고 시도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계시록이해가 계시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역사적 특성에 관한 우리의 이
해와 비례한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계시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역사적 특성에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설사 우리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여야한다는 개혁주의 성
경해석학의 원리를 인정한다하더라도,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서를 위시하여 그 어떤 특수한
성경을 계시록해석의 잣대로 사용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은 각
각 그 자체 독자적인 역사적 상황과 삶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요한 계시록도 그러
하다. 그럼으로 계시록은 일차적으로 계시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되어
야한다.

III. 계시록의 문학적 특성에 유념하라.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계시록은 밧모섬에 유배되어있던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일
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의 형태로 주어졌다(1:1-3; 22:6절 이하). 계시록이 편지의 형태로 주어
졌다는 것은 계시록은 필연적으로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나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의 역사적
정황과 관련하여 이해되거나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여 준다. 즉 계시록은 일차적
으로 저자나 독자들의 필요성이나 현안의 문제와 관련하여 쓰여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
한의 계시록은, 마치 바울서신이 사도 바울자신의 대신하는 권위를 가지고 바울자신의 교회
에게 읽혀졌었던 것처럼,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안에서 사도요한을 대신하는 권위 있는
편지로 읽혀졌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계시록은 처음부터 신학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쓰여진 어려운 연구논문의 형태로서가 아니라, 교회 회중들 앞에서 구두로 읽혀지도록, 그리
고 듣는 청중들이 낭독되는 편지를 듣고 그 핵심적인 메시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쓰여
졌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계시록을 접근할 때 계시록이 편지이다라는 점
을 염두에 두고 접근하여야 한다.

물론 이 편지의 내용은 사도 요한 자신의 사적인 창작물은 아니다. 오히려 요한은 편지
의 서두에서 이 편지의 내용과 관련하여,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19; 4:1)로, "하
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1:2)로, 그리고 "예언의 말씀"(1:3)으로 부르고 있다.
즉 이 편지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이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서 성령을 통하여 요한에게 속히 되어질 일들을 보여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계시록이 미래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음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즉 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셨고(과거), 이루고 있는(현재), 그리고 이루실 것(미래)을 말하
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상 계시록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요한이 종종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일인칭으로 사
용하고 있는 점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
다"(2:7,11,17,29; 3:6,13,22)라는 어귀를 자주 사용하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여 준다.

그러나 문제는 요한이,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이들을, 이미 구약의 선지자시대부터
유대사회에서 활용되어졌던 묵시문학적인 형태를 사용하여, 즉 용, 바벨론, 짐승, 사자 등과
같은 특수한 상징적 언어와 문학적인 표현들을 통하여 전달하고 있는 점이다. 마치 어떤
詩人이 자신이 경험하고 느낀 바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저자와 독자들이 함께 만
날 수 있는 특수한 시적인 문학형태를 활용하고 있는 것처럼,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
령을 통하여 그에게 보여주신 내용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저자와 독자들
에게 다같이 알려져 있던 묵시문학적 형태를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계시록을 올
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계시록 저자와 독자들이 서로 만나는 그 문학적 세계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한편의 詩가 신문의 사회면이나 정치면의 한 기
사처럼 이해될 수 없고 오히려 그 詩가 의도하고 있는 문학적 형태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
처럼, 계시록은 역사적 사실보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계시록의 문학적 장르 면에서
접근되고 해석되어야한다.

최근의 적지 않은 신약학자들은 계시록의 문학형태가 주전 4세기이후부터 주후 2세기
까지 강대국 세력과 박해아래 있었던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역사에 나타날 "하
나님의 구원과 심판," 즉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에 개입하셔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압제자들
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들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반면에 하나님과 그의 백성
들을 대적한자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을 내리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널리 발달되었
던 "묵시록"(Apocalypse)에 속한다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였다. 이미 잘 알려져있는대로,
묵시록은, 어떤 초월자가 인간 受納者를 통해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일종의 계시적 문학의
형태로써, 이것이 인간을 포함하여 全地上世界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역
사적이며 예언적인 특성을, 그리고 인간과 全地上世界의 문제는 동시에 超越者와 天上世界
의 문제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신적이며 종말론적인 특성을 각각 지니고 있다.
이 점을 요한 계시록과 직접 관련시켜 다시 말한다면, 천상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 그
의 사자들과, 그리고 용과 짐승으로 표현되는 적-그리스도와 그의 사자들과의 싸움이, 지상
에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 성도들과 성도들을 핍박하는 로마 제국의 모습을 통해서 각
각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계시록의 특성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계시록에 나
타나 있는 천상의 세계에 관한 묘사에서 지상의 세계를, 지상의 세계에 관한 묘사에서 천상
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할 것이다. 묵시적 문학형태로써 계시록이 지니고 있는 이와
같은 두 특성은, 우리로 하여금 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수많은 상징적인 언어형태를 마치 역
사적이고 과학적인 사실보도로 간주하고 해석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IV. 계시록의 핵심적인 메시지에 유념하라.

우리는 계시록을, 마치 우리가 복음서의 비유를 그 비유가 묘사하고있는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알레고리적 관점이 아닌 하나의 중심적인 주제나 핵심적
인 메시지를 찾으려는 관점에서 접근하여야하는 것처럼, 계시록의 모든 내용으로 부터 오늘
우리 시대나 세계역사와의 관련 점을 찾으려는 현학적인 자세가 아닌, 핵심적인 주제나
중심적인 메시지를 들으려는 자세에서 접근하여야한다. 계시록이 어떤 특정한 시대의 저자
가, 어떤 특정한 시대의 상황에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 당대의 저자와 독자들에게 다같이 익
숙한 편지의 형식과 묵시문학적인 양식을 통하여 주어졌다는 사실과, 그리고 독자들이 그것
을 읽거나 들을 때, 저자가 자신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쉽게 포착할 수 있었을 것
이라는 점은, 계시록은 나무의 관점에서보다 오히려 숲의 관점에서 먼저 접근되어야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그렇다고 한다면, 계시록을 통해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제시하고자하는 핵심적인 메시
지가 무엇인가? 계시록 1:9절의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
하는 자라"라는 구절을 통하여, 우리는 당시 계시록 저자나 독자들이 신앙 때문에 핍박과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만일 당시 요한과 그의 독자들이 한편으로는 스스로 자신을 신격화시켜 제사를 요
구한 로마 황제 도미티안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인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유대교회
당에서 크리스챤들을 추방하였던 유대교로부터 오는 핍박과 고난가운데 처해 있었다고 한다
면, 우리는 그들이 다음과 같은 절실한 문제들에 직면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인
간과 전세계역사를 통치하시는 분은 과연 누구인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로마 황제인가? 부
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무엇을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주님께서
살아 역사하신다고 한다면, 왜 구원받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이 지상의 나라에서 고
난과 핍박과 심지어 죽음까지 당하여야만 하는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이교도 로마황제
와 그의 세력들의 진정한 정체(Identity)는 무엇인가?"

계시록저자와 독자들은 다같이, 자신들이 믿는 신앙과, 그리고 그들이 살고있는 現世上
에서 당하는 감당하기 어려운 죽음의 위기와 핍박사이에서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었음이 분
명하다. 계시록은 분명히 요한의 당대 독자들이 당하고 있는 절실한 현안의 문제들에 부응
하기 위하여, 즉 일차적으로 牧會的인 관점에서 쓰여졌음이 분명하다. 이점은 계시록의 첫
부분(1-3장)이 소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는 일곱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직접 다루고 있는
점에서 분명하여 진다. 계시록저자는 로마제국아래 살고있던 당대 독자들이 네로 황제 이
후 도미티안황제에 이르기까지 당하고 있는 모든 지상의 핍박과 고난을 천상의 관점, 곧 보
좌에 앉으신 어린양과 그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사탄과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계시록저자에
따르면, 역사의 진정한 주관자이신 하나님과 어린양이 일곱인(6:1-8:5), 일곱 나팔(8:6-11:19),
일곱 대접(15-16)등의 병행적인 심판을 통하여 그들을 대적하는 사탄의 무리인 용과 짐승을
격파하고 승리하는 것은, 마치 일찍이 하나님께서 에집트에 대한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이
스라엘백성을 바로와 그의 백성들로부터 구원하여내신 것처럼, 지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탄과 짐승을 대변하는 로마제국의 세력으로부터 당하는 고난과 박해로부터의 궁극적인 승
리와 그 확실성을 강조해주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적그리스도(사탄, 짐승과 바벨론)에 대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세상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여준
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심판은 물론 온 세상을 주관
하시는 어린양은, 이미 이 땅에 오셔서 그의 백성들을 위한 구원과 심판 위해 죽임을 당했
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시며, 그리고 장차 재림하실 분이시다. 어린양의 죽음과 부활은 그
의 백성들의 신분과 삶의 여정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기독교 신자들은, 종말론적인 구원
과 심판을 여전히 기다리고있는 유대교 신자들과는 달리, 한편으로 이미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구속사건을 통하여,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백성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죄와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왕적인 신분과 제사장의 신분을 누리게 되었다(계 1:5-5; 5:9-11).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아직 로마제국의 왕권이 미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궁
극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장차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로 바뀌어지겠지만,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대립관계에 있다. 따라서 한
편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또 다른 한편으로 이 세상의 나라에 살고있는 신자에게 있어서, 고
난과 긴장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계시록에서 강조되고있는 이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
이, "아직"만이 자리잡고있는 유대교 묵시문학의 종말론과는 대조를 이루는 독특한 것이다.

계시록저자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 환난
을 당한다 할찌라도,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갈 수 있는 궁극적인 구원과 승리가 보장
되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파멸과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계시록저자는 효과적인 문학양식과 상징과 구성을 통하여, 충성스럽게 그리스도를 따
르는 신자들에게는, 보장된 승리와 구원으로부터 오는 놀라운 위로와 용기를, 반면에 그리스
도를 배반하거나 대적하는 모든 불신자들과 사탄의 세력에게는 심판의 경고와 아울러 회개
를, 각각 촉구하고 있다. 말하자면 계시록의 수많은 상징과 병행법을 통해 제시되고있는
구원사적이고 종말론적인 긴장과 싸움에서 울려 퍼지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백성들은 어떤 자들이며(신분), 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삶)를
보여주는데 있다.

만일 우리가 제안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하나님의 백
성들의 신분과 삶이 계시록의 중심적인 메시지이라면, 계시록은 마땅히 모든 시대를 초월하
여 모든 시대의 크리스챤들과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설교되어져야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계시록의 중심주제는 복음서에 나타나있는 예수님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물론, 신구약성경
전체의 중심 주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늘 우리 시대의 크리스챤들은, 비록 주후 1세기
말엽의 크리스챤들과 정확하게 동일한 역사적 정황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직면했던
유사한 문제들을 경험하고 있다. 오늘 우리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돈, 물질, 性, 정치세력, 이
데오로기, 과학 등의 절대화와 우상화는, 1세기 말엽의 크리스챤들이 직면했던 로마황제의
신격화 못지 않게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띄고 크리스챤들을 위협해오고 있다. 사실상 오늘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역사의 진정한 주관자는 누구이며,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
이며, 이 세상에서 다방면에 걸쳐서 일어나고 있는 우상화의 진정한 정체성은 무엇이며, 이
세상에서 구현되어져야할 크리스챤들의 진정한 신분과 삶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계시록은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일찍이 일세기말엽의 크리스챤들에게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또한 오늘 우리에게도, 역사의 진정한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며, 역사의 구원과 심판
을 수행하시는 분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역사와 신자의 정체
성에 대한 파라다임과 열쇠가 되며, 이 세상의 나라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의해 정복되어
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우리가 계시록을 열고, 계시록을 읽고, 가르치고,
그리고 설교하여야하는 이유도 바로 이점에 있다고 하겠다.




[부록]
계시록 20:1-6절과 천년왕국문제

1.들어가는 말

신구약 성경 중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렵고, 그리고 가장 논란이 많은 성경 본문중의 하
나가 계시록 20:1-6절이다. 심지어 같은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고 있는 신학자, 목회자들
사이에도 이 구절의 해석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소위 "前千年說
主義者"(premillennialist)와 "無千年說主義者"(amillennialist)로 나누어지고 있다. 계시
록 20:1-6절의 해석 문제는 금세기에 처음으로 대두된 문제가 아니고 이미 기독교 초창기
시절의 교부들 시대에 대두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Papias(Eusebius, HE 3.39), Justin Martyr(Dial. Trypho 80-81), Irenaeus(Adv. haer.
5.30-33), Turtullian(Ag. Marcion 3.25) 등과 그들의 뒤를 이은 전천년설주장자들은 계시록
20:1-6절에 나타나는 "천년"(ta; civlia e[th, 2,3,4,5,6,7)이란 말을 문자적(文字的)으로 해석
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을 가져오기 천년 전에 재림하셔서, 먼저
사탄을 천년 동안 가두고, 그 다음 부활한 성도들을 포함하여 지상의 살아있던 모든 성도들
과 함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지상(地上)에 자신의 천년왕국을 건설하여 세상을 통치한다고
본다. 천년이 지났을 때, 주님은 사탄의 세력과 마지막 전쟁을 벌려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멸하고, 그 다음 죽은 불신자들이 부활하게 되고, 그들에 대한 마지막 대심판을 통해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처하고, 그런 다음 영원한 新天新地가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반면에 Origen(De Principiis 2.11.2-5), Augustine(De Civitatis Dei, 20.7), 칼빈(J. Calvin),
카이퍼(A. Kuyper), 바빙크(H. Bavinck), 보스(G. Vos), 벨코프(L. Berkhof) 등의 뒤를 이은
무천년설주장자들은, 이 본문에 나타나는 "천년"(ta; civlia e[th)을 예수님의 初臨으로부
터 再臨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일종의 象徵的이고 靈的인 숫자로 해석하여, 천년왕국을 예
수님의 재림 후에 이 땅에 펼쳐질 지상적인 왕국으로 보기보다, 오히려 예수님의 초림, 십자
가와 부활, 승천 등을 통하여 죄와 사탄의 세력을 근본적으로 멸하시고, 萬有의 "主"로서 높
아지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와 온 세상을 다스리는 구속사적이며 영적인 하나님
의 나라로 본다. 그리고 장차 예수님이 재림할 때 사탄의 세력이 완전히 격파를 당하고, 신
자와 불신자의 시간적 간격없이 그 때 모든 죽은 자들이 일시에 부활하게되며, 이어 이들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을 결정하고 그런 다음 영원한 신천신지가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
다.

따라서 계시록 20:1-6절에 대한 文字的인 해석을 선호하는 전천년설주장자들에 따르면,
신약의 성도들은 앞으로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지상의 천년왕국과 함께 영원한 신천신
지를 이중적으로 기다리고 있지만, 반면에 계시록 20:1-6절에 대한 상징적 혹은 영적인 해석
을 선호하는 무천년설주장자들에 따르면, 신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이땅에
서 이루어져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면서, 또한 장차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영
원한 신천신지를 아직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의 결정적인 차
이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누가 천년왕국을 인정하는가 인정하지 않는가 하는 것보다도, 누
가 천년왕국을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 1000년 동안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왕국으로
보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초림 이후 재림 전에 이미 지상과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구속
사적이며 영적인 나라로 보느냐에 있으며, 둘째는, 누가 역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예수님의
초림을 통한 십자가의 죽으심 및 부활사건에 두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재림 사건에 두는가
에 있다.

계시록의 이해와 해석에 있어서, 한국 교회 안에서조차 통일을 보지 못하고 목회자와
신학자들 사이에 서로 날카롭게 대립되고 있는 이 두 가지 입장 중에서 어느 입장이 성경에
충실한 입장이라고 절대적인 단안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 모두는 다시 한번 우리의 지식의 한계를 절감하고 겸손해야 한다.
하지만 필자는 예수님 당대의 유대교와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종말론을 연구해오면서, 그
리고 신학도들에게 요한문헌을 가르치면서, 적어도 무천년설이 전천년설보다는 요한 계시록
과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더 충실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제 계시록을 중심으로 하여, 왜 무천년설이 전천년설보다 더 신약성경에 충실한가를 살펴보
고자 한다. 우리의 첫 번째, 그리고 결정적인 출발점은 계시록 20:1-6절의 본문이다. 과연 이
본문이 전천년설의 주장처럼 예수님의 재림 후 지상에 건설될 천년왕국을 지지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 본문은 무천년설의 주장처럼 예수님의 재림전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영적인 그
리고 구속사적인 천년 왕국을 지지하고 있는가?

2. 계시록 20:1-6절의 본문, 번역, 그리고 분석

(1) 헬라어 성경 본문

Kai; ei\don a[ggelon
katabaivnonta ejk tou` oujranou`
e[conta th;n klei`n th`" ajbuvssou kai; a{lusin megavlhn ejpi; th;n cei`ra
aujtou`.
2kai; ejkravthsen to;n dravkonta,
oJ o[fi" oJ ajrcai`o", o{" ejstin Diavbolo" kai; oJ Satana`",
kai; e[dhsen aujto;n civlia e[th
3kai; e[balen aujto;n eij" th;n a[busson
kai; e[kleisen kai; ejsfravgisen ejpavnw aujtou`,
i{na mh; planhvsh/ e[ti ta; e[qnh a[cri telesqh`/ ta; civlia e[th.
meta; tau`ta dei` luqh`nai aujto;n mikro;n crovnon.
4Kai; ei\don qrovnou"
kai; ejkavqisan ejp' aujtou;"
kai; krivma ejdovqh aujtoi`",
kai; ta;" yuca;" tw`n pepelekismevnwn dia; th;n marturivan jIhsou`
kai; dia; to;n lovgon tou` qeou`
kai; oi{tine" ouj prosekuvnhsan to; qhrivon
oujde; th;n eijkovna aujtou`
kai; oujk e[labon to; cavragma ejpi; to; mevtwpon kai; ejpi; th;n cei`ra
aujtw`n.
kai; e[zhsan kai; ejbasivleusan meta; tou` Cristou` civlia e[th.
5oiJ loipoi; tw`n nekrw`n oujk e[zhsan a[cri telesqh`/ ta; civlia e[th.
Au{th hJ ajnavstasi" hJ prwvth.
6makavrio" kai; a{gio" oJ e[cwn mevro" ejn th`/ ajnastavsei th`/ prwvth/:
ejpi; touvtwn oJ deuvtero" qavnato" oujk e[cei ejxousivan,
ajll' e[sontai iJerei`" tou` qeou` kai; tou` Cristou`
kai; basileuvsousin met' aujtou` ta; civlia e[th.


(2) 우리말 번역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한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있는 것과,
A-│그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사슬을 그의 손에 들과 있는 것과(1),
│그리고 그가 그 용, 곧 마귀이며 사탄인 옛 뱀을 천년동안 결박한 것과(2),
│그리고 그 용을 무저갱으로 던진 것과,
└무저갱을 닫고, 인봉하여 그 용을 제어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천년이 채워질 때까지
B-│그 용이 더 이상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 이후에만 잠시동안 용이 풀려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3).

┌그리고 나는 보았습니다.
│보좌들과,
│그리고 보좌들 위에 그들이 앉아 있는 것과,
│그들에게 심판할 권세가 주어진 것과,
│그리고 예수에 대한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A'-│목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그리고 그들이 그 짐승과 그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들의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않았다는 것과,
│그리고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다스린 것과(4),
└그 나머지 죽은 사람들은 천년이 채워질 때까지 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5).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되고 거룩합니다.
B'-│이들에게는 그 둘째 사망이 어떠한 권세도 부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될 것이며
└천년동안 그와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6).

(3) 본문의 구조 분석

위의 본문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계시록 20:1-6절은 1절에 4절에 각각 나오는
Kai; ei\don를 중심으로 두 부분으로, 즉 1-3절의 AB와, 4-6절의 A'B'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은 요한이 다른 두 개의 비젼을 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자는 1절에서 천사가 용을
잡기 위해 하늘부터 내려왔다고 말하고 있는 점과, 12:9절에서 이미 "큰 용, 곧 그 옛 뱀이
땅으로 내어 쫒겼다"고 말하고 있는 점을 보아 20:1-3절의 장면은 지상을 무대로 하여 일어
난 비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대조되는 A'B'의 비젼은 지상에서 이루어진 비젼이
라고 보기 어렵다. 곧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20:4절에서 요한이 본 자들이 보좌에 앉
아 있는 자들이며, 요한이 계시록에서 일반적으로 보좌를 지상이 아닌 하늘에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점을 보아, 20:4-6절의 비젼은 지상과 대조되는 천상에서 일어난 비젼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A(1-3절 상반절)와 A'(4-5절 하반절)은 요한이 본 비젼
자체를 말하고 있는 반면에, B(3절 하반절)와 B'(5절 하반절-6절)은 요한이 그가 본 비젼의
의미를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즉 B를 통해 요한은 자신이 본
비젼 A의 의미를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용, 곧 사단의 세력은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근본적으로 제어당하였기 때문에, 요한의 독자들은 사단의 세력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A'는 요한의 독자들이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실 중의 하나인 순교자
들에 대한 비젼을 보여준다. 이 비젼을 통해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에 대한 증
거 때문에 자기 당대에 순교한 신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다. 즉 그들은 목베임
을 당해 육체적으로 죽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이 완전히 실패하고 소멸되어 버린 것
처럼 보였겠지만, 오히려 지금 그들의 영혼은 살아서 영광스러운 주님의 보좌에 앉아 그리
스도와 함께 다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B'에서 요한은 A'에 근거를 두고 자신의
독자들에게 생생한 교훈과 소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바로 요한이 본 순교자들의 모습이
첫째 부활이라는 것과, 그리고 독자들에게 이 복되고 거룩한 첫째 부활에 그들도 동참할 것
을 권면하고 있다. 그들도 순교자들처럼 여하한 핍박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킨다면 바로 그들
에게도 순교자들에게 주어진 동일한 승리와 영광스러운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요한
이 비젼 자체인 AA'을 표현할 때는 한결같이 과거시제를, 반면에 독자들에게 그 비젼의 의
미와 목적을 말하는 BB'의 경우에는 현재나 미래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 이와 같은 우
리의 분석을 정당화 시켜준다.

3. "천년"(ta; civlia e[th)은 연대적인 실제적 숫자인가? 아니면 상징적인
실제 숫자인가?

천년왕국 문제와 관련하여 본문으로부터 제기되는 첫 번째 질문은, 이 본문에 여러 번
나타나고 있는 "천년"(ta; civlia e[th)이란 말을 문자적인 연대적 숫자로 해석하여야 하
는가 아니면 상징적인 실제 숫자로 해석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본문에 보면, 하늘로
부터 내려온 천사가 마귀와 사단을 가리키는 용을 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 속으로 던졌
으며(20:1), 따라서 그 용은 천년 동안 만국을 미혹할 수 없었다(20:2). 보좌에 앉은 자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다스렸으며(20:4), 반면에 나머지 죽은 사람들은 천년동안
살지 못한 상태에 있었으며(20:5),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은 천년동안 하나님과 그리스도
의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린다(20:6).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전천년설주의자들
은 본문에 나오는 이 "천년"이란 말을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연수를 가리키는 것으
로 보고, 그리스도가 지상에 재림하여 마귀를 천년동안 결박하며, 그리고 죽은 신자들은 부
활하여 신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더불어 지상에서 1,000년 동안 왕노릇한다고 보고 있다.
반면에 무천년설주의자들은 "천년"이란 말을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재림할 때까지 신자들이
(죽은 신자들이든, 살은 신자들이든)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는 상징적인 실제 숫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천년"의 해석 문제를 둘러싸고 제기되는 전천년설과 무천년
설의 초점은 누가 천년을 인정하느냐, 않하느냐는 문제이라기보다도, 이 "천년"이 그리스도
의 재림 이후의 역사와 관련되느냐,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재림까지의 역사와 관련되느
냐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결국 요한이 쓴 계시록의 문학양식을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 즉 계
시록을 역사세계 일어날 모든 사건들에 관한 예언으로 보고, 계시록에 나타나있는 모든 언
어들이 직접적으로 역사적 사건들 및 연대와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시 한번 불러일으킨다. 계시록의 문학적 장르와 관련하여, 우리는 그 어떤 성경저
자보다 유독히 계시록의 저자가 은유, 상징, 대귀법 등의 문학적 양식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는 점을 유념해야한다. 따라서 우리는 계시록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일곱," "십사만 사
천," "이십 사," "열 두," "육백 육십 육," "열"등의 숫자들과, 그리고 "바벨론," "짐승," "어
린 양," "대접," "용," "나팔," "인"등의 용어들이, 비록 요한이 환상 중에 본 실제 숫자나
대상들을 가리킨다고 할찌라도, 그들이 모두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요한이 실제로 본 "일곱 대접이나 일곱 대접의 나팔은 적-그
리스도의 세력들에 대한 완전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고 있으며, "십사만 사천"은 구원받
은 모든 성도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고 있으며, "용"이나 "짐승"등은 적-그리스도
(Antichrist)인 사탄이나 그 추종 세력을 상징하고 있으며,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
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적으로 계시록 20:1-6절의 본문에 나오는 천사와 마귀는 다
같이 우리의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어떤 물질적인 것으로 묶어 놓을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
다. 본문에서 용이 실제적으로 마귀 자체는 아니고 용은 다만 마귀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
을 뿐이다. 따라서 마귀를 가리키는 용과 관련된 천년이란 숫자도 일종의 상징적인 숫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처럼 계시록 저자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천년"이란 숫자를 상징적
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면, "천년"이란 용어자체를 文字的으로 해석하고 그리고 본
문에도 나타나지 않는 "왕국"이란 말을 덧붙여 지상의 천년왕국을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
다. 오히려 "천년"이란 말이 이미 예수님 당대 이전부터 유대교 묵시문학에서 "도래할
메시야 왕국"("새 세계" 혹은 "오는 세상")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고 하는
점은, 문학 장르상으로 볼 때 묵시문학 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계시록에서, "천년"이란
말이 문자적인 의미로 보다 오히려 "새로운 시대," "메시야 시대" 혹은 "새로운 시기"등을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한다. 더구나 신구약 성경전체
를 통하여 "천년"이란 말이 실제로 요한 계시록에만 나타나고 있는 점도 천년이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할 것을 시사해준다. 만일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천년왕국이 실제로 지상에서
이루어질 사건이라고 한다면, 신약의 다른 저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문제를 언급할 때 이렇
게 중요한 사건을 생략할 수 없었을 것이다.

4. 마귀의 결박이 예수님의 초림 때 이루어진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가, 아니
면 예수님의 재림 때 이루어질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가?

본문으로부터 두 번째 제기되는 질문은, 20:1-3절에 나타나 있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
도록 하기 위해 천사가 사단을 결박하여 천년동안 무저갱에 던져 인봉한 사건이, 예수님의
초림 때의 사역과 관련된 사건인가, 아니면 재림과 관련된 사건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바와 같이, 무천년설주장자들은 복음서가 예수님의 인격과 그의 사역, 특별히 그
의 하나님의 나라 선포사역을 통한 사탄의 정복을 이미 말하고 있는 점에 근거하여(마
12:29; 눅 10:17-18; 요 12:31-32),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사탄의 결박을 예수님의 초림 때의
사역과 관련시키고 있는 반면에, 전천년설주장자들은 계시록 20:1-3절의 사탄의 결박을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사역과 관련시킨다. 이 문제는 결국 20:1-6절의 사건을 연
대적으로 계시록 19:11절 이하에 나타나 있는 마지막 대심판의 사건에 이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야할 것인가, 아니면 서로 분리시켜 19:11절 이전의 사건과 연결된 것으로 보아야할 것
인가 하는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전천년설주장자들은 한결같이 계시록 20:1-6절을 연대적으
로 19:11절 이하의 사건과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건으로 본다. 그러나 20:1-6절을
19:11절 이하와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에는 여러 가지 난점이 있다. 예를 들어
19:15절 이하에 따르면, 이미 재림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만국"(ta; e[qnh)이 정복을 당했다
고 하였는데, 20:3절에 따르면 아직 사탄의 미혹을 당할 수 있는 "만국"(ta; e[qnh)이 다시
등장하고 있으며, 19:19-21절에 따르면, 사단과 그를 추종하는 모든 세력이 완전히 멸절되었
는데, 20:7절 이하에 보면 아직도 사단과 그의 추종세력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은 난점은
적어도 20:1-6절의 사건이 연대적으로 계시록 19:11-21절의 사건에 연결되어있지 않다는 가
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오히려 계시록 19:11-20절의 내용이 계시록 20:7-10절에서 다시 반복
되고 있다고 볼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계시록의 진행과정이 인류역사의 전진과정
을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정확한 청사진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한다. 우리는 계시록이 정
확한 연대기적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다 오히려 요한이 본 환상의 순서에 따라 서술되
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계시록은 실제적으로 동일한 사건이 다른 전망아래 중복되
는 경우가 많다. 실례를 들면 우리는, 이미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계시록에
나타나는 일곱 인의 심판(5-8:5), 일곱 나팔의 심판(8:6-11:19), 일곱 대접의 심판 (15-16:21)을
각각 다른 심판으로 보기보다 오히려 인류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본 것을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6:12-17절의 최종적인
전쟁은 16:12-21절에서, 19:11-21절에서, 그리고 다시 20:7-15절에서 중복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아래의 도식처럼 예수님의 재림 때의 사건을 언급하는 19:11-21절은 20:1-6절과 연결
되기보다 오히려 동일한 사건을 언급하는 20:7-15절과 연결되며, 반면에 20:1-6절은 예수님의
초림 때의 사역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18:1-19:10절과 연결된다고 보고 싶다. 한
편으로 18:1절(A)과 20:1절(A')이 다같이 하나님의 사자(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
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 다른 한편으로 19:11-21절(B)과 20:7-15절(B')이 동일하게
구약 에스겔 39장을 참조하여(예, "곡과 마곡") 마지막 대심판을 묘사하고 있는 점은, 이 부
분이 서로 병행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18:1-19:10----------예수님의 초림 이후의 사역--A
19: 11-21----------예수님의 재림 이후의 사역--B

20: 1-6-----------예수님의 초림 이후의 사역--A'
20: 7-15----------예수님의 재림 이후의 사역--B'

4. 누가, 어디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 하는가?

본문으로부터 제기되는 세 번째 제기되는 질문은 누가, 어디서, 천년동안 왕노릇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흔히 전천년설주장자들은 20:4절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모든 죽
은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여(첫째 부활) 당시 살아 있던 성도들과 함께 지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하며, 불신자들은 천년이 지난 후에 부활하여(둘째 부활) 심판을 받는
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4절 본문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본문에는 천년왕국이 지
상에 건설된다는 말도, 모든 성도들이 이 지상의 천년왕국에 참예한다는 말도, 신자의 부활
과 불신자들의 부활 사이에 천년이란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는 말도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
다. 20:4절 이하의 본문에 보면, 요한이 본 대상들은 다음과 같다:

① "보좌들"(qrovnou") (20:4a)
② "보좌에 앉아있으며, 심판의 권세를 받은 사람들"(kai; ejkavqisan ejp' aujtou;"
kai; krivma ejdovqh aujtoi`") (20:4b)
③ "예수에 대한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 "(ta;"
yuca;" tw`n pepelekismevnwn dia; th;n marturivan jIhsou` kai; dia; to;n
lovgon touqeou`) (20:4c)
④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게 절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도 않은사
람들"(oi{tine" ouj prosekuvnhsan to; qhrivon oujde; th;n eijkovna aujtou`
kai; oujk e[labon to; cavragma ejpi; to; mevtwpon kai; ejpi; th;n cei`ra
aujtw`n.) (20:4d)
⑤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다스리는 사람들"(e[zhsan kai; ejbasivleusan
meta tou` Cristou` civlia e[th. (20:4e).

20:4절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요한이 본 것은 "보좌들"이며, 그리고 위의 ②, ③,
④, ⑤항에 언급되어 있는 익명의 사람들이다. 문제는 ②③④⑤항에 언급되어 있는 이 익명
의 사람들이 동일한 사람들인가, 아니면 각각 다른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다. 문법적으로 살
펴보면, ②항의 보좌에 앉아 있는 자들은 주격으로 되어 있고, ③항의 "예수의 증거와 하나
님의 말씀 때문에 목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은 목적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③항의
"영혼들"은 보좌에 읹아 있는 사람들의 영혼들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④항과 ⑤
항에 있는 네 동사 prosekuvnhsan, e[labon, e[zhsan, ejbasivleusan의 사실상의 주어는
주격 관계 대명사 oi{tine"이다. 이것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사람들과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다스리는 사람들이 다름 사람들이 아닌 동일한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kai로 연결되고 있는 관계 대명사는 별도의 선행사를 가지고 있지 않는 점을 보아 ②항에
있는 보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문법적 설
명은 계시록 20:4절에 언급되어 있는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다른 사람이 아닌 동일한 사람
들임을 지적해준다. 즉 요한이 본 사람들은 일찍이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순교자들이다. 요한은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다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20:4절에 언급되어 있는 이들은 계시록 6:9절에 언급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저들이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ta;"
yuca;" tw`n ejsfagmevnwn dia; to;n lovgon tou` qeou` kai; dia; th;n marturivan
h}n ei\con) 및 13:15절에 언급되어 있는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아 죽임을 당한 자
들"(mh; proskunhvswsin th`/ eijkovni tou` qhrivou ajpoktanqw`sin)과 동일한 인물이
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이들이 순교한 자들을 가리킨다고 한다면, 이들이 어디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하고 있는가? 전천년설주장자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부활한 신자들과 살아있던 신자들
이 함께 지상에서 천년동안 왕노릇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본문 20: 4절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다스리는 자들이 보좌에 앉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
다. 그런데 계시록에서 47번 나타나는 "보좌"라는 말은 사탄의 보좌(2:13)와 짐승의 보좌
(13:2; 16: 10)를 제외하고는 모두 하늘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20:4절의 요
한이 본 보좌도 하늘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
리는 순교자들이 그리스도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하는 곳도 지상이 아닌 하늘로 보아야한
다. 물론 우리는 이들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재림 때까지의 모든 성도들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계시록 20:4-6절의 본문 자체는 죽은 성도들을
제외한 그 밖의 살아있는 성도들에 관하여는 어떠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5. 본문의 "그들이 살았다"(e[zhsan)라는 말과 "첫째 부활"(hJ ajnavstasi"
hJ prwvth)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첫째 부활"이 육체적 부활을
가리키고 있는가? 아니면 영적인 부활을 가리키고 있는가?

본문에 보면, 보좌에 앉은 자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하고 있는
반면에,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였다. 그리고 본문 20:5절은 보좌에
앉아 있는 자들이 살아 있는 것을 가리켜 "첫째 부활"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이들은 5절
의 "죽은 자들"과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본문은 죽은 성도들의 영혼은
살아서(첫째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서 천년동안 왕노릇 하는 반면에, 그 밖의 죽
은 자들은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20:5절). 이리하여 이 구절은 얼핏
보기에 전천년설주장처럼, 죽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 때 육체적으로 부활하여 다시 사는
것을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참조 계 2:8; 13:3). 그러나 보다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면, 단
순과거형 "살아서"는 그 뒤에 나오는 동일한 단순과거형 동사 "왕노릇하다"(ejbasivleusan)
라는 단어와 함께,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는 행동의 변이(變移)를 가리키기보다, 오히려
한때 죽었던 자들이 이미 살아 난 상태에서 왕노릇하고 있는 자들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
즉 요한은 죽은 자들이 살아나게 되는 과정을 본 것이 아니고 죽었다고 생각한 순교한 자들
이 이미 살아나 있는 상태를 본 것이다.

그리고 이 "첫째 부활"이 6절의 "둘째 사망"과 서로 대조 병행을 이루고 있는데, 같은
문맥인 20:14절에서 "둘째 사망"이 육체적 죽음을 뜻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뜻
하고 있는 점을 볼 때(역시 21:8절), 우리는 첫째 부활도 본문에서 육체적 부활로 보기보다
오히려 죽은 신자의 영혼들이(4절) 하나님의 보좌에서 이미 살아서 왕노릇하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첫째 부활"은 그 다음에 있을 "둘째 부
활"을 전제하고 있으며, 반면에 "둘째 사망"은 그 전에 있었던 "첫째 사망"(20:5)을 전제하
고 있다. 만일 "둘째 사망"이 그리스도의 재림 후 죽은 자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할 때 주어
질 영원한 심판을 가리킨다면, "첫째 사망"은 자연히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있었던 그들의
자연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이리하여 구조적으로 볼 때 아래의 표와 같이, 둘째 사망과 대칭
을 이루는 둘째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주어질 육체적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첫째
부활은 육체적으로 죽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영적인 부활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첫째 사망]--육체적인 죽음 ─ A
둘째 사망--영적인 죽음 ─ B
첫째 부활--영적인 부활 ─ B'
[둘째 부활]--육체적인 부활 ─ A'

사실상 본문 뒤에 나오는 후 문맥도 이를 지지하고 있다. 전천년설주장자들에 따르면
계시록 20:4-6절의 천년왕국이 시작할 때 죽은 성도들은 이미 부활하였으며, 남은 사람들은
천년왕국 후 영원한 심판이 있게 될 때 주어지는 불신자들의 육체적 부활뿐이다. 그런데 계
시록 20:12-15절은 죽은 자들이 보좌 앞에서 각각 심판의 책과 생명의 책에 따라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죽은 자들은 죽은 악인들만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생명책에 기록된 죽은 자들은 악인들을 가리키기보다는 신자로 보아야 하
기 때문이다. 이처럼 20:12절의 죽은 자들이 신자와 불신자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면,
20:4-6절의 본문과 관련하여 신자들은 이미 부활하였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계시록 저자 요한이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계시록 6:9-11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음을 당한 영혼들이" 이미 살아있는 것으로 제시되어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계시록 20:4
절의 "살아서"와 "첫째 부활"이란 말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아있는 순교자들의
특수한 신분과 모습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할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그 밖의 죽은 자들을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보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20:5a;
엡 2:2,5). 더구나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두 부활이론을 말하는 곳이 없으며, 오히려 신약성
경은 단 한번의 예수님 재림과 모든 자들의 일시적인 부활과 영원한 심판과 그리고 영원한
신천신지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예를 들면, 마 25:31절 이하; 막 13:27; 14:62; 눅 9:26; 요
5:29; 6:40; 행 2:20,21; 고전 1:8; 3:13; 5:5; 빌 3:21; 살후 1:7-9; 딤후 1:18; 4:8; 히 9:27,28; 벧
전 5:4; 벧후 3:10-13), 본문의 첫째 부활을 예수님의 재림 때 주어질 육체적 부활로 보기
는 어렵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해주고 있다. 요한 계시록에서 "살아서"라는 말이 일반적
으로 육체적 부활을 뜻하기보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는 점도
(4:9-10; 7:2; 10:6; 15:7) 이를 뒷바침하여 주고 있다.

6. 그들은 언제 "왕"과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하는가? 그
리스도의 재림 전인가, 재림 이후인가?

전천년설주창자들은 성도들이 지상에서 왕과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
게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이 재림하실 때 성취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무천년설
주장자들은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에 이미 시작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완성된
다고 본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계시록의 저자는 다른 곳에서(특히 계시록 1:5,
5:9,10) 이미 성도들이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왕과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사실상 전천년설은 근본적으로 현세대를 메시야 왕국이나 혹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
어가고 있는 시대로 보기보다, 오히려 성도들이 고난과 핍박가운데서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는 천년왕국을 기다려야하는 고난의 시대로 간주한다. 그래서 전천년설주장자
들은 신자들에게 현재의 고난시대에서 장차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찬란한 천년왕
국을 기대하면서,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 영광스러운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축복이 주
어진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전천년설의 근저(根抵)에는 현세상은
근본적으로 사탄의 세력이 다스리며, 예수 그리스도는 현세상을 다스리는 현재의 왕이시라
기보다 오히려 오실 미래의 왕이라는 사상이 더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리하여 전천년설
주장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예수님의 메시야적 초림과 그의 십자가
에서의 죽으심과 부활 등의 구속사건에 두기보다, 오히려 지상의 천년왕국을 세우기 위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사건에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전천년설과 예수님 당대의
유대교 종말론의 핵심을 차지하였던 메시야왕국설 사이에는 부정할 수 없는 유사성이 있다
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대 유대인들도 그들의 나라가 강대국의 지배아래 있
는 현세대를 사탄의 세력 아래 있는 시대로 생각하였으며, 장차 메시야왕국이 도래하면 이
스라엘을 괴롭힌 모든 이방의 강대국 세력들이 오시는 메시야에 의해 격파를 당하고, 예루
살렘을 중심으로 찬란한 메시야왕국이 건설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시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편으로 장차 심
판의 주님으로 오셔서 모든 사탄의 세력을 격멸하실 분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찌라도, 또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은 이미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과 꼭같이(7:10; 11:15; 14:7,14ff; 15:4; 16:4ff; 19:6), 신자들도 한편으로 이 세상에서 장차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영원한 나라에서 왕적인 신분이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고 할찌라
도(계 22:5), 또 다른 한편으로 이미 이 세상에서 왕적인 신분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점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 바로 계시록 1:5-6절과
5:9-10절이다.

계시록 1:5절의 상반절에 보면, 요한은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미 예수 그리
스도를 "땅위의 왕들의 지배자"(oJ a[rcwn tw`n basilevwn th`" gh`")로 소개하고 있다(참조
19:16). 그리고 5절 하반절과 6절 상반절에서, 그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현재시제), 자
신의 피로써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으며"(단순과거시제), 그리고 "우리를 자신
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위하여 이미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ejpoivhsen hJma`"
basileivan, iJerei`" tw`/ qew)`/ (단순과거 시제)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은 의심할 여
지없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현재 모든 지상의 임금들을 통
치하시는 만왕의 왕이다는 사실과,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을 통해
신자들도 이미 이 지상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하나님의 "왕적인 나라"와 "제사
장"이 되었다는 점을 가르쳐주고 있다.

똑같은 사상이 계시록 5:9절과 10절에서 반복되고 있다. 5:9절 하반절에서 요한은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다(과거시제)"라고 말한 다음, 바로 이어 10절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들을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며(과거시
제), 그래서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고 있도다'" (ejpoivhsa" aujtou;" tw`/ qew`/ hJmw`n
basileivan kai iJerei`" kai; basileuvsousin ejpi; th`" gh`")라고 말하고 있다. 5:10
절의 과거형 시제가 말해주고 있듯이, 신자들은 예수님의 결정적인 십자가의 구속사건에 의
해 저들이 이미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으며, 그 결과 신자들은 현재 계속해서 이 땅에서 왕
적인 신분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구약 출애굽기 19:6절에 보면, 일찌기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너희는 나를
위하여 제사장의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며(미래)"(uJmei`" de; iJerei`" kurivou
klhqhvsesqe, leitourgoi; qeou`, ijscu;n ejqnw`n, LXX)라고 예언되어지고 있으며, 그리고
이 예언은 이사야 61:6절의 "너희는 주의 제사장으로 불리어 질 것이다(미래)"(uJmei`" de;
iJerei`" kurivou klhqhvsesqe, LXX)에서 반복되고 있다. 예수님자신이 그의 첫 사역에서
이사야 61:1절을 읽으신 다음, 그 예언이 자신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점
을 감안해 볼 때(눅 4:16-21), 우리는 계시록 저자가 1:5절과 5:10절에서 단순과거형을 사용하
여 강조하고자하는 것은, 일찌기 출애굽기 19:6절과 이사야 61:6절에서 예언되었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신약의 성도들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베드로전서 저자도 2:5,9절에서 신약의 성도들을 가리켜, "거룩한 제사장,"(iJeravteuma
a{gion), "택함을 받은 민족"(gevno" ejklektovn), "왕의 제사장"(basivleion iJeravteuma)
이란 말을 사용하여, 그리고 바울 사도는 로마서 5:17절에서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
은 자들이 한분 예수 그리스돌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basileuvsousin)"라
고 선언하므로써, 출애굽기 19:6절과 이사야 61:6절의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약의 성도
들을 통하여 이미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만일 사도 바울과 베드로전서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계시록의 저자도, 예수 그리스도안
에서 신약의 성도들이 이미 "왕"과 "제사장"이 되어 왕노릇하고 있다고 본다면, 신약의 성
도들은, 비록 그들이 한편으로 아직도 주님의 재림과 함께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여 완
전한 왕과 제사장의 신분을 입을 영원한 천국을 기다리고 있다고 할찌라도, 그들은 다른 한
편으로 이미 이 땅에서 왕과 제사장의 신분이 된 성취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보았음이 분명
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땅에 왕으로 오셨으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결정적인
구속사건을 통하여 높아지신 주님으로서(행 2:36; 빌 2:11; 골 1:18-23), 이 땅을 다스리고 있
다고 한다면, 십자가와 부활의 이 결정적인 구속사건과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신약의 성도들이 이미 왕의 신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너
무나 당연하다. 이처럼 계시록 저자가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사건을 통하여 이미 예수님
이 만왕의 왕이 되셨으며(계 5:13; 12:10; 15:3), 그리고 신약의 성도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서 이미 성취의 시대, 이미 실현되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안에 참예하고 있는 왕과 제사
장의 신분임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가 구태여 유대교의 묵시 문학적 배경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지상에 이루어질 부분적인 천년왕국을 말할 필요성은
사실상 없게 된다. 오직 남아 있게되는 것은 주님의 재림과 함께 사탄의 세력의 완전한
정복과 성도들이 영원히 다스리게될 新天新地일 뿐이다(계 22:5).

그런데 바로 이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
왕의 왕으로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으며, 현 세상을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의 과정으
로, 그리고 신약의 성도들을 하나님의 왕국에 참예한 자로 간주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사탄의 세력이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여전히 신자들이 죄
와 사탄의 유혹을 받고 있으며, 여전히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
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요한의 공동체가 여전히 로마 황제의 핍박 아래 있었으며, 초
대교회 신자들이 로마 황제가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는 당시의 상황
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왕이시며, 신자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이미 왕과
제사장의 신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필자는 여기
서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메시지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는 것처럼, 예수님
의 오심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의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당대 유대인들이 기대한
것과 같은 물질적이고,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영적이며, 구속사적인
나라라는 점이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 묵시 문학에서 발달된 그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중심적이며,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메시야가 아님을 누누이 암시하신 것과 같
이(눅 17:20; 요 18:36절 참조), 또한 자신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도 당대 유대인들의 기
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나라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예를 들면, 예수님 당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정치적 회복, 메시야에 의한 이방나라의 정복,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 흩어
졌던 이스라엘 민족의 귀환 등을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의 구체적인 징표로 생각하였지
만, 예수님은 자신에 의해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음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며"(마 11:5; 눅
4:16-21),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일"(마 12:28; 눅 11:20)을 자신이 일찌기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사 35:5-6; 61:1) 메시야 됨과 하나님의 나라 도래의 징표가 된다는 사실을
선언하셨으며, 아직도 가시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못하리니 하
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눅 17:20-21)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은 유대인들이 기대한 가시적인 징표에서보다 오히려
더 근본적으로 예수님 자신이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야이며, 그리고 그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성령의 오심 등의 종말론적인 구속사건에 기인하고 있다. 바
로 이것이 복음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기도하다. 따라서 참으로 우리가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이며, 구약의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와 부활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속사적인 통치를 회복하시는 인류역사의 결정적인 종말론적
인 사건이며, 성령의 오심이 종말론적인 약속의 성취이며, 높아지신 주님께서 이 세상을 통
치하시며, 예수님과 성령에 의해 신자들은 이미 구원받아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통치의 영역
아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다고 한다면(골 1:13; 빌 2:9-11), 우리는 또한 현재
이 땅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되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는 부활전의 낮아지신 상태의 예수님과 부활후의 높아지신 예수님의 신분사이에
분명히 구별이 있는 것처럼(롬 1:3-4; 빌 2:5-11), 그리스도의 재림전 신자가 이 땅에서 누리
게되는 신분과 그리스도의 재림 후 부활하여 누리게 되는 신분사이에 분명히 구별이 있다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이 땅에 오셨을 때 왕으로, 메시야의 신분으로 오셨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온갖 마귀의 유혹과 슬픔과 아픔과 시련을 당했
다. 하지만 이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단 한번도 자신의 왕적인 신분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며,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자신의 메시야
됨과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켰다. 동시에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과 함께
자신이 인자의 영광을 가지고 회복시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기대하시고 또한 이
를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왕이셨지만 또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구속사건을
통하여 영원히 높아지실 자신의 영광스러운 왕적인 신분을 내다보셨다. 이와 같은 "이미"와
"아직"의 두 요소가 예수님의 승리적 생애와 사역을 이끌어 가셨다. 특별히 사도 요한은 그
의 복음서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습을, 십자가 사건을 이미 영광으
로 제시하고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예수님의 삶이 또한 그분의 제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
의 삶의 모델이 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예수님 안에서 "이미" 왕의 신분이 되었다고
할찌라도,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왕의 신분
을 계속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사도 바울도 한편으로 신자를 가리켜 이
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이 된 자"(고후 5:17), "예수와 함께 살아서 하늘의
보좌에 앉게 된자"(엡 2:6), "아버지께서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워진 자"(골 1:13)로 말하고 있으면서, 또다른 한편으로 "아직"도 "하나님의 영
광의 자리에 참여할 소망을 가진 자"(롬 5:2; 8:18), "예수와 같은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을 기다리고 있는 자"(빌 3:21; 고후 5:1-2)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비
록 예수님의 구속사적 사건과 그의 왕되심 안에서 왕의 신분이 되었다고 할찌라도, 또한 부
활전의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 사탄의 유혹과 고난과 핍박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히 우리의 왕되신 예수님 안에 있고, 우리 안에 그분의 임재이신 성령께서 내주
하여 있기 때문에 우리 또한 이 세상에서 왕적인 승리의 삶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 다음
장차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우리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영원히 왕노릇 하게 될 것이다.

7. 전천년설의 계시록 20:4-6절 해석이 고린도전서 15:23-26절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가?

종종 전천년설주장자들은 고린도전서 15:23-26절을 예를 들면서, 바울 사도도 계시록의
저자처럼 성도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 사이에 지상적 천년 왕국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
다. 과연 고린도전서 15:23-26절에서 바울 사도가 성도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을 서로 분
리하고 그 사이에 지상적 천년 왕국을 암시하고 있는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
이,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고린도교인들 중에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을 논박하
고 있다(15:12절 하반절,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바울의 반박의 결정적인 근거는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육체적 부활과 신자들과의
관계이다. 여기서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를 자세하게 분석하고 모든 부분에 걸쳐서 세밀하게
살펴볼 수는 없지만, 우리가 고린도전서 15장을 생각할 때마다 간과하지 않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불신자들의 부활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의 핵심
적인 주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인류 전체의 부활(불신자들을 포함하여)보다 오히려 그리스
도의 부활과 모든 신자들과의 관계이다라는 점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20절에서 "그
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
는 대 전제를 통해, 그리스도는 불신자들을 포함하여 전 인류에게 혜택을 주는 전 인류를
위한 "첫 열매"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모든 신자들(18-19절 참조)의 육
체적 부활을 보증해 주는 "첫 열매"라는 사실을 분명히 전제로 삼고 있다.

이점은 15:23절 이하의 본문 앞에 있는 22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
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w{sper ga;r ejn tw`/ jAda;m pavnte"
ajpoqnhv/skousin, ou{tw" kai; ejn tw`/ Cristw`/ pavnte" zw/opoihqhvsontai.)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왜냐하면 여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불신자들을 포함하여 인류 전체
로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들이 "삶을 얻게 된다"(zw/opoihqhvsontai)고 말해지고 있기 때
문이다. 말하자면 고린도전서 15:45절과 로마서 8:11절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신자들은 그
리스도의 영인 성령에 의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은 전제와 함께
바울은 15:23-26절에서, 비록 그리스도가 모든 신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지만, 그리스
도와 신자들 사이에는 그 "순서"(tavgma)가 있다는 것과 그리고 언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처럼 신령한 부활의 몸이 주어지는가를 밝혀 주고 있다.

전천년설 주장자들은 23절에 있는 부활의 "순서"를 3중적으로 적용시켜, 이를테면, 먼
저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 신자들, 그리고 천년 왕국 이
후 그리스도께서 모든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 불신자들의 부활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
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우선 세 가지 난점을 불러일으킨다. 첫째는 23절의 생략된 동사는
사실상 22절의 동사 zw/opoihqhvsontai로 볼 수 있는데 불신자를 신자의 부활과 관련된 동
사에 포함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둘째는 우리말 개역판 성경에 "나중이니"라고 번역
되어 있는 24절 초두의 단어 "텔로스"(to; tevlo")라는 말로부터 과연 "불신자들"이란 의미
를 끄집어내는 것이 가능하느냐 하는 것과, 셋째는 "순서"의 대상이 되고 있는 23절의 주어
"각각"(Ekasto")이란 말이 24절의 to; tevlo"까지를 포함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 문제와 관련하여, 만일 우리가 전천년설의 주장처럼 to; tevlo"가 불신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면, 불신자도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게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
다. 왜냐하면 to; tevlo"의 사실상의 동사는 22절의 zw/opoihqhvsontai이 되기 때문이다. 따
라서 23절이 말하는 부활의 순서는 불신자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
리스도와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문제와 관련하여, 천년설 주장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최소한도 "토 텔로스"(to; tevlo")라
는 말로부터 계시록 20:5절의 oiJ loipoi라는 단어처럼 "그 나머지 사람"이란 의미를 이끌
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몇몇 학자들 가운데 고린도전서 15:24절의 to; tevlo"라는 말
로부터 불신자를 가리키는 "그 나머지 사람"이란 의미를 찾아보려고 시도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문헌 조사를 해보면 실제적으로 신약 성경을 포함하여 그 어떤 고대 문헌에
서도 to; tevlo"가 정확하게 "그 나머지 사람"(oiJ loipoi)이란 의미로 사용된 실례를 찾아
볼 수 없다. 이것은 이미 최근의 신약 학계에서 널리 공인된 사실 중의 하나이다.
백번 양보해서 전천년설주장자들의 추론처럼 만일 바울이 고린도전서 15:24절의 to;
tevlo"라는 말을 계시록의 20:5절의 경우에서처럼 "그 나머지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사용하
고자 하였다면, 바울은 당연히 계시록 저자처럼 oiJ loipoi라는 말을 사용하든지,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도 신자들의 경우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란 복수를 사용한 것과 똑같
이, 불신자들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tevloi라는 복수를 사용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진작 바
울은 tevlo"라는 단수를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말 뒤에 시간을 가리키는 두 o{tan
부사절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 "그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
와 능력을 멸할 때")을 사용하여, 자신이 tevlo"라는 말을 "나머지 사람"을 가리키는 명사
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을 가리키는 명사로 사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
고 있다. 그래서 우리말 개역판 성경은 tevlo"를 "나중이니"라는 말로, NIV 영어 성경은
"the end"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다.

세 번째 문제와 관련하여, 바울 당대에 군대의 "질서"나 "순서 혹은 차례"등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던 "타그마타"(tavgmat )라는 말을 24절의 tevlo"까지 포함시킬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이미 첫 번째 문제를 논하면서 사실상 밝혀졌다. 왜냐하면 만일 tevlo"가 "그 나머
지 사람들"이란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시간적인 의미인 "끝", "나중"이란 의미로 사용된 것
이 확실하다면, 사람을 가리키는 tavgmat 가 시간적인 의미를 가리키는 24절의 tevlo"를 포
함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만 더 부연하도록 하겠다. 만일
23절의 신자들의 부활과 24절의 불신자들의 부활 사이에 지상적 천년왕국이란 시간적인 간
격을 둘 수 있다고 한다면, 26절의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라는 본문을
이해하기가 힘들게 된다. 왜냐하면 26절은 23절이 아닌 24절과 연결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렇게될 경우 신자들의 부활은 26절의 사망의 정복과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정복 없이 어떻게 신자의 육체적인 부활이 가능한가? 그리스도
의 재림과 함께 죽은 신자들이 부활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미 동시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사망
을 정복하였다는 말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는 문법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혹은 주제의 흐름 면에서 보더라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신자의 육체적인 부활이 이루어지며,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사망
을 포함하여 모든 원수들을 멸하고 자기의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는 세상의 "끝"
(tevlo")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25절의 "저
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ei` ga;r aujto;n
basileuvein a[cri ou| qh`/ pavnta" tou;" ejcqrou;" uJpo; tou;" povda" aujtou)의 말처
럼, 그리스도와 그의 왕권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가서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등과 함께 시작되고 있으며, 그런 다음 그의 재림 때에 마지막 원수
인 사망을 정복함으로써 (고전 15:54) 종국적으로 완성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마 28:18-20;
빌 3:21; 엡 1:20-23; 2:5; 벧전 3:22; 골 2:12-15절 참조). 고린도전서 15:23-26절에 관한 우
리의 해석은 계시록 20장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도 잘 조화를 이룬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장
처럼 계시록 저자도 사망에 대한 최종적인 정복을 계시록 20:1-6절에서 말하지 않고, 계시록
20:7-15절의 인류의 최종적인 심판 때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계 20:14절 참조). 그러므로 고
전 15:23-26절의 본문으로부터 천년왕국설을 끄집어내는 것은, 리덜보스(H. Ridderbos)가 잘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본문 자체의 가르침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문이 말하
자 않는 것을 본문 안으로 끌어드린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8. 끝맺는 말

우리는 이 글에서 계시록해석에 있어서 결정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고있는 천년왕국설
문제와 관련하여 소위 한국 보수교회 안에 뿌리를 내리고있는 전천년설과 무천년설 중 어느
설이 계시록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살펴보았다. 필자가 최종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전천년설이 아닌 무천년설이 계시록의 지지를 더 강하게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았지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종말론이나 바울의 종말
론을 살펴보면, 전천년설이 얼마나 신약의 종말론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가
있다. 필자가 계시록해석문제와 관련하여, 전천년설을 반대하는 근본 이유는 두가지이다.
첫째, 전천년설이 신약성경 그 자체의 확고한 지지를 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님
의 재림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구속사의 결정적인 종말론적 사건인 예수님의
성육(成肉)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사건과 성령의 오심의 의미와, 그리고 그 결정적인 구
속사건에 근거를 둔 신자의 이 세상에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누리는 새로운
존재와 신분과 삶의 의미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야할 신자의 도덕적, 윤
리적, 사회-경제학적 책임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둘째, 전천년설은 성경의 문자적해석에
지나치게 집착하므로써, 계시록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문학적 특성을 약화시키거나 외면하
고, 그렇게 함으로써, 계시록해석에 있어서 계시록 본문 자체의 우위성이 훼손되고 있기 때
문이다.

우리는, 비록 예수님의 재림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최종적인 목적과 완성으로써 아무
리 중요하다고 할찌라도, 재림 때문에 예수님의 성육,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성령의 오심
의 의미를 약화시켜서는 아니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사건에
서 예수님의 성육과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사건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반대
로 예수님이 이미 오셨기 때문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게 되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이미 종말론적인 심판과 부활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자도 종말론적인 죽음과 부활을 맛보게 되었고, 그리고 앞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이
루어질 영원한 심판과 몸의 부활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동안 한국교회를
떠들석하게 한 시한부종말론도 전통적인 한국교회의 전천년설에 입각한 지나친 내세지향적
종말론의 부산물로 간주하고 싶다. 만일 우리가 계시록과 신약전체가 가르치고 있는 예수님
의 종말론적인 성육,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사건, 성령의 오심으로 인한 "이미"의 천국과, 예
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어질 "아직"의 천국사이의 균형있는 종말론을 강조할 수만 있다면,
오늘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삶이 이 세상의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를 바꾸게 하는 하나
님의 방편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할찌라도, 특수한 성경 본문자체는
일반적인 성경해석의 원리보다 더 중요하고 선행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필자는 우리의
일반적인 성경해석의 원리가 특수한 성경 본문을 좌우하기보다, 오히려 특수한 성경 본문이
우리의 해석원리를 좌우해야한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가 계시록을 접근할 때는, 계시록 자체
가 지니고있는 특수한 역사적-문학적 특성에 따라 접근하여야할 것이다. 우리의 해석학적
원리가 아닌, 계시록 본문자체가 우리의 진정한 왕이 될 때, 계시록의 보고(寶庫)를 볼 수
있는 문이 열려지기 때문이다.
출처 : 하나님 내가 누구죠?
글쓴이 : 隸僕 (예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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