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갱신과 설교의 회복
-설교 행위에 있어서의 성령의 능력의 회복-
김남준 목사(열린교회)1)
들어가는 말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참으로 엄청나게 많은 문제에 직면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고 있다. 기독교는 과거 어느 때 보다도 널리 퍼져 있으나, 더욱 피상적인 신앙이 만연해 있다. 세속적이고,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며, 술 취하고, 파괴되어버린 가정이 늘어나며, 죄악은 해마다 그 횟수와 죄질에 있어서 증가일로에 있다. 범법행위, 부도덕, 사기, 알코올중독, 마약중독, 이혼율의 급증, 청소년들의 범죄, 사회의 불균등을 심화시키는 각종 경제적인 범법행위 등 우리 사회의 병적 상황을 보여 주는 상황들이 산재해 있다.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가히 윤리의 실종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밖의 사람들이 흔히 하는 질문은 사회가 이러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기여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이 같은 어려운 현실 상황 속에 자리하고 있는 교회의 영적인 무기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라 아니할 수 없다.2)
오늘날 부흥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이다. 특히 조국을 일깨웠던 평양 대부흥이 있은 지 100년을 한 해 앞둔 시점에서 더욱 부흥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3) 이 같은 교회적이고 사회적인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관심은 단순한 사회의 개혁이 아니라, “교회를 통한 복음으로 말미암는 사회의 개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강력한 영혼의 변화를 경험하고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돌아가게 되는 일은 복음의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 같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세상의 변화는 교회 자신이 영적인 무력함에서 깨어나는 일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아니할 것이다. 이런 변화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강단에서 조짐이 보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명하게 선포되는 곳에서 즐겨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교단은 바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곳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카알라일(T. Carlyle)이 ‘세상 역사의 뱃머리가 교회의 강단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내일의 세상이 어떠할지는 오늘의 설교가 알려준다고 보았던 것이다.4)
I. 교회의 갱신과 설교의 중요성
교회가 영적인 무력감에서 깨어나고, 사회가 새로운 수준의 윤리를 붙잡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단이 교회와 세상을 깨우는 외침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강단에서 다시금 복음이 선포되며, 증거의 천둥소리가 울리고 능력의 번개가 번쩍일 때 사회는 소망스러운 변화에 가까이 와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설교자들은 이 같은 자신의 직분의 중요성과 특권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프린스턴신학교의 교수를 지냈던 제임스 알렉산더(J. A. Alexander)의 지적은 이 같은 점에서 좋은 충고가 된다고 할 수 있다.5)
“우리 가운데 아무도 설교자의 직무의 중요성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오늘날 젊은 설교자들은 설교에 임할 때, 큰 전투를 앞에 둔 자의 각오로 임하지를 않는다. 그들은 가장 강력한 열정의 원천을 찾아 인간 감정의 대양 깊은 곳까지 충격을 주어야 하는 사람으로서 설교를 준비하지 않는다. 이 일에 대한 이러한 판단이 만연하는 곳에서는 미숙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조차 설교를 하게 된다. 그러나 설교는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은혜의 수단으로 남을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 자신의 방법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개혁자들은 위대한 설교가들 이었다.”
이 설교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은 영향력 있는 강단의 능력을 회복하는 출발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회중들에게 영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단지 설교의 내용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와 설교는 서로 떼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이다. 설교자의 사람됨이 신중하면 설교 또한 그러하고, 설교자의 성격이 열정적이면 설교 또한 열정적이며, 그의 성품이 사랑으로 충만해 있으면 또한 설교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우리는 설교의 내용이 아주 훌륭하지 않음에도 하나님께서 그 설교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신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온전한 설교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시대의 교회의 강단이 하나님의 축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설교의 실용성이 아니라, 설교의 바른 원리의 관점에서 판단의 기준을 구해야 한다고 본다.
II. 능력 있는 강단
설교자는 마치 하나님께서 교회와 세상에 말씀의 물을 쏟아 보내시는 관(管)과 같으므로 설교의 내용이 회중들에게 주는 영향력은 설교하는 사람인 설교자에게 매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설교의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원리적인 문제에만 국한시켜서 이 문제를 논의한다 하더라도 많은 것을 다루면서 설교자의 갱신을 말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설교학에 관한 책들은 이 같은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교회의 갱신 그 자체에 제기되는 것만큼의 문제가 설교자의 갱신을 위해 제기될 것이다. 이에 본 논문은 설교자의 갱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설교 행위에 있어서 능력의 회복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A. 설교자를 만든 성령 강림
신약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성령은 설교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유일한 사역이 설교자의 직분을 세우는 데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등장 하게 되는 데는 필수적으로 성령의 강한 능력 주심이 앞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실로 이것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설교사를 살펴봄에 있어서 필수적인 관점이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사건은 베드로를 설교자로 만들어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케뤼그마로 선포하게 하였다(행 2:4, 2:14-36). 스데반은 이 같은 성령의 경험이 있는 자였다(행 6:3, 10). 그는 교회의 구제를 위해 피택된 집사였으나, 성령은 그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꿰뚫는 장쾌한 한편의 설교를 하게 함으로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설교자가 되게 하셨다(행 7:1-60). 기독교의 복음은 로마제국에 전파하는 데 앞장섰던 사도 바울의 경우도 이 같은 사실이 어김없이 적용된다(행 9:17, 19).6)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도 물론이지만, 설교 행위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은 정말 필수적이다. 성령이 함께 함으로 능력을 주시지 않는 설교 행위는 단지 이름뿐인 설교일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가 주의 아름다운 구원의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하여 택하여 부르신 제사장이기 때문에(벧전 2:9), 설교자에게 평신도보다 뛰어난 제사장의 직임이 있는 것처럼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와 세상에 선포한다는 의미에서, 선지자들과 신약시대 설교로 부르심을 받았던 하나님의 종들의 후계자이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말씀을 선포하며, 죄악에 빠진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를 외치며, 회개하는 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하심의 은혜를 전해 주던 하나님의 증거자들의 후예이다. 이들에게 함께 하시던 하나님의 영의 능력이 설교자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면, 그들의 검은 설교복은 속이는 옷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설교자가 설교 내용을 준비할 때 성령은 감동을 주시고, 또 설교가 끝난 후에 설교를 들은 회중들의 삶 속에서 그 설교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도 성령의 지속적인 도우심이 필요하다. 여기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설교 행위에 있어서 특별한 성령의 능력 부으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B. 선지자와 성령의 능력
이 같은 사실은 말씀의 선포를 위해 부르신 구약의 선지자들의 소명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들의 소명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영에 의한 영향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소명을 받음에 있어 하나님의 영에 의한 묵시가 임하거나(암 1:1, 미 1:1, 나 1:1, 합 1:1, 습 1:1, 학 1:1, 슥 1:1),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거나 말씀이 임하거나(렘 1:2, 호 1:2, 욜 1:1, 욘 1:1), 이상을 보여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거나(사 1:1),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권능이 임하시는(겔 1:3) 영적인 영향력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특별히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세례 요한이 선포 사역을 위해서 부름을 받는 장면들은 이 같은 관점을 잘 설명해 준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나실인의 서원을 따라 살 것을 예고했고(눅 1:15, 신 6:3), 그는 아주 어린 아기 시절에 광야로 보내졌다.7) 그는 아버지가 제사장이었고(눅 1:5),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고 태어난 자였으므로(눅 1:16), 광야에서의 그의 대부분의 삶은 구약의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일로 이어졌을 것이다. 성경은 그를 “큰 자가 될 것이라”(눅 3:15)고 예언했으나, 그의 성장과정에 대해 성경은 눅 1:80을 제외하고는 언급이 없다.8) 신약학자들은 대체로 그의 선포 사역의 시작을 주후 27년으로 보고 있는데,9) 이 때 있었던 세례 요한의 공적 사역에의 등장을 누가는 기록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2)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눅 1:15과 함께, 눅 1:17의 예언의 성취이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는 설교 사역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그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눅 1:17) 사역에 서게 될 것을 가르치셨다.
C. 선포와 성령
하나님께로부터 설교자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선포 사역을 효능 있게 하는 일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구약의 이 같은 흐름을 타고 신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야 선교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은 이 같은 사실을 반영한다. 교회는 오순절 사건 이후에 비로소 선포 사역을 효능 있게 감당할 수 있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는 교회가 성령이 오심으로 전에 확실히 알지 못하던 복음의 의미를 (행 1:6-7) 구속의10) 역사라는 견지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세상을 향한 케뤼그마를 가지게 된 것과 둘째로는 그것들이 선포되는 설교 행위에 있어서 특별한 신적인 영향력이 나타남으로 교회와 세상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행 2:37-47).
설교에 있어서 이 같은 원리는 설교 역사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교회 역사에 위력 있는 강단의 선포로 교회의 개혁과 죄인들의 대대적인 회심을 가져왔던 설교가들은 한결같이 성령의 사람이었고, 설교 행위에 있어서 그의 능력 주심을 신앙하고 의지하며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어거스틴과 사보나롤라(Savonarola)와 루터, 웨슬레, 휫필드(G. Whitefield)와 피니, 무디와 부룩스(P. Brooks)와 같은 이들이 바로 이러한 일의 증인들이다. 이들의 설교자로서의 삶은 바로 성령께서 설교자들에게 능력을 부어 주심으로 그의 선포를 효능 있게 하신다는 사실의 증인들이다.11)
우리는 설교 행위에 있어서 설교자가 양극단에 치우치는 위험을 주의해야 한다고 믿는다. 설교 내용의 준비에만 몰두하고는 더 이상을 바라지 않거나, 설교 내용을 준비하는 일을 하찮게 여기면서 설교 행위의 능력만을 구하는 경우이다. 이 둘은 항상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요 15:26-27, 행 5:32). 설교자는 최상의 준비를 하여야 하며, 설교 행위에 있어서는 최대의 관심사가 성령의 능력 있는 역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설교가 위로의 내용을 지닌 설교든지, 동정의 말씀이든지, 회개의 촉구하는 말씀이든지 복음을 설교하는 것에 대해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설교 행위 위에 하늘로 보내신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12)
III. 영적인 긴박감이 사라진 설교단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강단이 직면하고 있는 중대한 어려움은 설교자들이 영적인 싸움에 관한 긴박한 위기의식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강단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설교의 제목들 중 하나가 사탄이라는 사실에도 드러난다. “사탄”, “악령”, “마귀”, “귀신”, “그들과의 싸움”은 이제 조국교회의 강단에서 제법 낯선 설교의 제목들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합리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현대인들의 지성을 거스리고 싶지 않은 목회적인 배려일 수도 있으나, 설교자 자신이 이 같은 영적인 도전의식이 긴박하지 못한 데, 더 큰 원인이 있다. 복음의 내용에 대한 피상적인 접근은 항상 피상적인 설교를 낳고, 피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그 밑에서 생겨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본질적으로 싸움 아래 있음을 말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하고 여전히 불신자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기독교 진리에 대한 이해심의 부족이나, 무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4:4)고 말한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의 오신 목적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고 하지 않았는가?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내어 쫓는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의 설교와 얼마나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지는 복음서를 한 번 읽어 보는 것으로도 족할 정도이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 속에서 위대한 부흥을 이루실 때마다, 그 도구로 사용하시던 사람들은 시대와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고 있는 영적인 싸움터를 꿰뚫어 보는 영적인 긴박감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시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불행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일에 종사하던 사탄의 세력들은 이러한 설교자들을 두려워하였다. 사도행전 19:14은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의 이름을 지옥의 마귀들까지 익히 알고 있었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13)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의 이름을 지옥에까지 알려지게 하였을까? 지옥의 마귀들조차 그 이름들을 기억해 두며 경계해야 했던 큰 두려움의 원인을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어디서도 설명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선포 사역의 시작 직전에,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눅 4:13)라는 언급 후에 “이때부터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공생애 선포 사역의 시작이 소개되는 것은 위와 같은 맥락이다.
설교를 영적인 싸움이 수반된 긴박한 “영의 일”로 생각하지 않는 설교자들은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이 능력을 부어 주셔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그다지 절박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래티머(H. Latimer)는 그 당시 설교자들에게 영적인 싸움의 긴박감이 없는 것을 그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피력하였다.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생소한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영국 전역에서 자기의 맡겨진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다른 모든 사람을 능가하는 가장 부지런한 주교이자 높은 성직자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를 잘 알기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지요. 그는 바로 사탄입니다. 그는 다른 모든 설교자들보다 훨씬 더 부지런한 자입니다. 그는 결코 자기에게 맡겨진 교구를 떠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못할 적이 있어도, 그는 결코 그의 직무를 이탈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그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할 때 그를 부르면 그는 언제든지 집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영역에서 가장 부지런한 설교자입니다. 그는 늘 경작을 합니다. 그는 빈둥거리거나 거드름을 피움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태만하게 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는 늘 자신의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사탄이 거주하면서 계속 경작을 하는 곳에서는 책들이 치워지고, 대신에 촛불이 세워지며, 성경이 치워지는 대신에 염주알이 세워지며, 복음의 빛이 사라지고 대신에 촛불의 빛이 밝혀집니다. 그것도 한낮에 그런 일이 생깁니다...하나님의 전통들과 법들은 세워 집니다....사탄이 잡초와 독보리를 뿌리는 것처럼 우리의 높은 성직자들이 좋은 교리의 씨앗을 부지런히 뿌릴 수 있는 데까지 뿌렸으면 좋을텐데...영국에는 사탄만큼 부지런한 그런 설교자가 결코 없습니다.”
IV. 교회의 화석화 현상
금세기 말 조국교회에 찾아들고 있는 두려운 현상은 정통적인 신앙을 고수하는 소위 보수적인 교회들의 화석화현상이다. “죽은 정통”이라고 불리는 교회의 이 같은 병적 현상은 아직 뚜렷한 해결책이 없이 부심하는 정통적인 교리를 가진 보수교회에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20세기 조국교회의 ‘에이즈’(AIDS)라고 할 수 있는 이 화석화현상은 교회의 생명력의 뚜렷한 감퇴를 특징으로 한다.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하고, 이에 따른 영적인 영향력의 퇴조와 교회의 공동화 현상, 교인들의 감소, 신앙의 형식화, 생명이 없는 율법주의 , 전도능력의 상실, 회심의 급격한 감소, 형식적인 예배, 이에 따른 윤리적 부작용, 현실에 민감한 젊은 세대의 교회생활에 대한 회의 등을 주요한 증상으로 하는 이 기독교적인 병폐는 전염병처럼 만연되어 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같은 기독교회의 화석화 현상은 교회가 성경의 진리를 떠난 자유스러운 신학을 받아들이는 것과 앞서고 뒤서면서 일어났다.
이 점에 있어서 19세기 독일 교회사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많다. 루터시대에 종교개혁의 횃불을 치켜든 본거지로서 빛나던 황금시기가 20세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빛을 잃고 희미해졌다. 독일에서 19세기 초반은 소위 “괴테의 시대”(the age of Goethe)라고 불린다. 괴테는 독일어 사용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이다. 그는 카톨릭 신자가 아님에도 카톨릭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한편, 당시의 합리주의적 정신에 부응하는 많은 작품들을 씀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범람하게 된 불신앙의 사조는 학교와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교회에까지 흘러들어 왔다. 신학교에서는 기존의 모든 기독교진리를, 합리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뜯어 고치거나 제거해 버렸다. 철학은 신학을 대신하였으며, 성경은 신학에 있어서 초보적인 책으로 취급되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은 모두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부인되거나 재해석되었다. 성경의 예언들은 불신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이 부인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서 복음적인 의미는 모두 제거되고, 예수의 죽으심은 한 평화주의자의 죽음이 되어버렸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재성은 부인되고 부활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후대 종교가들의 설화로 규정되었다. 이때 출간된 스트라우스(G. F. Strauss)는 당시 신학자들이 얼마나 철저히 복음을 떠났는가를 보여준다.14)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점점 당시의 합리주의적이고 분석적인 시대정신에 장단을 맞췄고, 교회의 강단에서는 대체로 윤리적인 설교가 주종을 이루게 되었으며, 교회는 화석화되어 가는 시기를 맞게 되었다. 더욱이 율리우스 벨하우젠(J. Wellhausen)은 성경의 영감, 통일성, 기자들에 대한 정통적인 견해들을 맹공격함으로써 유명해 지게 되었다. 성경의 신적 권위는 무시되었으니, 이는 당시 문헌 비평적 연구방식으로 말미암아 많은 학자들을 문서설 추종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에, 오늘날까지도 성경에 대한 이 같은 회의주의가 교회와 신학자들 사이에서 조차 회복되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견해가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는데 얼마나 크게 공헌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15)
교회가 성경의 진리에 대한 신앙을 져버리고 자유스러운 신학을 받아들임으로써 교회에 하나님의 축복이 사라지고 기독교 공동체가 복음에 대한 삶과 증거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 사실을 독일의 교회 역사를 통해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복음 진리를 떠날 때 하나님의 심판은 이 같은 교회의 화석화 현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금세기 조국교회에 찾아들고 있는 화석화현상에서도 이 같은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조국교회에서도 교회의 생명력이 뚜렷이 감퇴하고, 강단의 선포가 감화력을 잃어버리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증거의 공동체가 되는 대신 차가운 계급적 질서를 따르는 종교 조직체로 변하게 되는 교회의 화석화현상은 합리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채 교리적으로 자유로운 입장에 서 있던 교회들이 먼저 경험했다. 강단은 복음을 선포할 도전을 상실하고, 극단적인 사회 참여를 주장하는 목소리들을 높임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을 사회개혁의 한 행동매체로 바꾸거나, 윤리적 설교로 회중들의 심령을 어루만지는 쪽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통적인 교리를 따르고 있는 소위 보수적인 교회들은 합리주의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노선을 따르는 교회들의 화석화현상에 대해 생각하기를, 교리에 대한 자유스럽고 인본주의적인 태도가 교회를 그처럼 무력화시켰다고 흔히들 생각하였다. 그러나 금세기 말에 와서는 이 같은 교회의 화석화현상이 합리주의적인 입장에선 자유주의 교회를 비판하며 개혁신학의 교리를 고수하던 보수적인 정통교회에서도 일반화되게 되었다.
V. 교리와 교리에 대한 체험
교회의 화석화현상이 교리적으로 진리에서 이탈할 때 찾아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이 같은 가공할 기독교회의 전염병의 유일한 원인은 아님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분명히 확인을 하고 지나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 있어서 교리란 무엇인가? 교리는 교회의 생명을 어디까지 보장해 주는가?
기독교에 있어서 이 교리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교회가 믿는 교리는 회중이 믿는 신앙의 내용들을 구성하고, 그 신앙의 내용에 따라서 공동체가 성경의 토대 위에 서있는 여부가 결정되고, 심하면 이단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교리는 성도들이 성경을 보는 시각까지 결정해 준다. 교리는 성경에서 나왔으나, 성경은 그 교리의 거울을 통해서 신자들의 마음에 받아들여지므로 교리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믿는 교리가 바르고 정통적일 때 그 교회는 정통적이며, 이러한 교리들이나 전통적인 관습들을 경솔히 바꾸지 않고, 옛 것을 지키려고 할 때 그 교회는 보수적인 교회이다.
교리는 교회가 성경적으로 서는 데 필수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는 교리를 위하여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가 교리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게 된다면 또 다시 피비린내 나는 종교재판이 재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교리는 교회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교리란 교회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성경을 기초로 해서 세워놓은 다리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만약 이 다리가 잘못 놓여 있거나, 바르지 못한 방식으로 만들어 졌다면 우리는 그 교리를 통해 인격적인 참 하나님께로 온전히 나아가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교리의 정통성 유무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교회가 신앙하는 교리의 효용은 사람들이 그 교리를 통해서 인격이신 하나님과 올바로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아무리 공들여 만든 훌륭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교리라는 다리를 통해서 죄인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생명의 역사가 없다면, 화려하고 크긴 하지만 인적이 끊긴 채 버려진 다리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성경적인 교리가 설교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람들 가운데 경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역사의 경험이 말해주는 것은 이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위대한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이루실 적마다 예외 없이 정통적인 교리들이 선포되도록 역사하셨고, 또 이 정통적인 성경진리의 선포가 강단을 축복스런 능력에로 회복되게 하였지만, 교회가 정통교리를 듣고 있다는 그 자체로써 위대한 영적 부흥이나 말씀에 의한 대각성이 저절로 오게 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강단을 섬기는 설교자들은 이 점을 매일 고민하면서 단상을 오르내려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화석화현상에 대해 올바른 대처 방안은 교회가 생명을 회복하는 문제와 직결된 것이고, 따라서 설교의 수위성을 믿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교회의 병든 영적 현상을 극복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VI. 설교의 능력과 설교자의 성령
이 문제는 성령에 관한 논의로 이어지게 되어있다. 지금 조국의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교회의 화석화현상에 대한 해결방안을 논의함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와야 할 것은 바로 이 성령에 대한 문제이다. 교회가 어떻게 성령의 생명력 있는 사역이 교회 속에서 지속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시대의 교회의 갱신을 위해서는 설교의 내용과 함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의 능력이 회복되어져야 한다.16)
설교의 능력은 곧 설교자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선포에 있어서 커다란 성령의 능력이 회복되고, 능력이 회복된 설교에 의해 영혼들이 심대한 말씀의 영향을 받고, 복음을 따라 사는 삶의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 설교자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는 일 없이는 이 같은 설교의 능력을 기대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17) 바클레이(W. Barcley)는 이 점에 관해 지적하기를 “설교자는 학자일 수도 있고, 목사일 수도 있고, 교회행정가일 수도 있고, 또는 재치가 번뜩이는 연설가일 수도 있고 사회 개혁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18)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이 정신훈화를 위한 연단 수준으로 떨어질 때, 그것은 설교행위에 있어서 뒤에 계신 권능의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설교에 있어서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능력은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능력 주시는 사람에 의해서 역사되는 것이다.
설교내용과 설교행위에 관한 바울의 언급은 이 점에 있어서 좋은 참고가 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2:1~5사이에서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말한 내용이 설교내용(sermon)을 지시하는 말이라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라는 고백은 설교행위(preaching)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는 말만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으로 설교하기를 원했고, 지혜의 권하는 말로써 사람들의 지적인 동의만을 구하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선포의 내용이 그들의 영혼 속에 역사하게 됨을 믿었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성경을 깨닫고 설교의 내용을 준비함에 있어서도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하지만, 특별히 준비된 설교내용을 선포함에 있어서 능력 있는 성령의 역사를 동반한 설교행위가 되도록 구하여야 한다.19)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특별히 강조한 바운즈(E. M. Bounds)목사는 설교행위에 있어서 능력의 원천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는 성령에 힘입는 것에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바르게 지적하였다.20)
“성령의 기름부으심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은 오늘날의 강단이 꼭 필요로 하는 것이며, 또 강단의 설교자가 반드시 지녀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적 기름부으심은 친히 하나님의 섭리로운 손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 부음 받는 대상을 온전히 유화시키며 세척하여 정결한 사람이 되게 한다. 그의 마음, 머리, 영혼, 곧 인간을 온전히 세속과 이 땅 위의 이기적인 동기와 목표로부터 격리시켜, 순전하며 신선한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부터 따로 구별지어 주는 것이다. 수많은 집회에서 회중을 격동시키고, 마음에 거룩한 고민을 불러일으키는 설교는 이러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의해서만 기대되는 것이다. 설교행위에 있어서 이 같은 성령의 능력주심이 없다면 설교내용상의 동일한 진리가 문자 그대로 정확하게 전달될지는 모르나, 아무런 감동도 회개를 위한 고통의 느낌도 일어나지 아니할 것이다. 설교는 해도 모든 것은 그저 죽음의 광장처럼 고요한 침묵만이 흐르는 예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설교는 그렇지 아니하니, 곧 신비한 영향력을 지닌 것으로써 이는 말씀의 문자 하나하나가 단지 차가운 문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외쳐질 때 성혈의 깃듦이 전해지고 거룩한 능력의 움직임을 느끼게 해 준다. 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통해 설교는 회중의 양심을 찌르고 영혼에 호소하며, 마음을 사로잡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설교행위에 있어서 이것 없는 설교는 죽은 설교요, 메마른 설교요, 차디찬 의문의 설교이다.”
VII. “보다 나은 세상”은 가능한가?
교회가 갱신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사역의 갱신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들은 교회의 윤리적 타락과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세속화현상에 많은 관심들을 기울이며 염려스러워 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지 못한 것을 문제의 근원으로 보기도 하고, 이러한 문제는 신학이 이 땅의 상황에 부적응하고 있는 증세의 반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축이 되어서 새로운 윤리운동을 펴나감으로써 실종된 조국의 윤리의식을 회복하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필자는 그러한 주장들이 모두 타당성을 가진 것들이라고 보며, 또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협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일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노력하면서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일들로써 교회가 영적으로 갱신되고, 조국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됨에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구상에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금세기만큼 평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고, 인류의 공존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생겨난 적이 어디 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두 번의 처참한 대전을 경험했고, 지금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조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금세기 말처럼 국민정신을 바르게 계도하기 위한 구호가 무수히 나붙고, 윤리적인 생활이 강조된 적이 또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정신은 말할 수 없이 황폐화 되어가고, 물질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병적 현상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해마다 흉악한 범죄가 급증하고, 마약 주사기가 서울시내 미션계 여중고교학교에서 수없이 발견되며, 백주대낮에 강간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하는 세상이 되었고 국회에서는 간통죄를 폐지해야한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대두되고, 경제정의를 부르짖지만 지금도 엄청난 빈부의 차이를 가져오는 부정한 토지거래행위가 자행되고 있다. 사람들은 마치 소비와 쾌락을 위해서 사는 것처럼 온 도시가 흥청거리며 범죄에 빠져있다.
기독교는 이러한 문제를 결코 도외시하거나, 현실도피적인 경향을 정당시 하지 않는다. 교회는 마땅히 이 같은 조국의 현실 상황 속에서 불의를 지적하고, 그릇된 사회현상들을 회중들의 삶 속에서 바로 잡아가도록 지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같은 일에 특별한 소명의식을 느끼며 활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야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기독교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종교라고 가르쳐 준다. 겉으로 드러난 인간의 단점이나, 사회 속에 모습을 드러낸 모순과 부조화와 불의보다도 인간의 영혼을 변화시키고, 심령의 깊은 곳을 개조함으로써 변화된 사람들을 통해 변화된 교회를 만들어 가고 변화된 교회를 향해 부패한 세상을 도덕적인 사회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VIII. 영혼을 고치는 능력은 어디서 오는가?
A. 본질을 고치는 기독교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법은 범죄 하려는 인간의 동기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이미 이루어진 범죄행위가 이웃에 끼친 손해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 인간의 심령이 변화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 어떠한 범죄에 대한 억압도 사회의 평화와 안녕을 위한 궁극적인 해결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와 성경은 드러난 인간의 범법행위 보다는 하나님을 등지고 죄 가운데 살아가려는 인간의 뿌리 깊은 죄의 경향성에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대항하며 살아가려는 인간의 내적 경향의 뿌리는 사람의 영혼에 내려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혼의 변화가 없이는 그 모든 수고들이 항상 피상적인 성과에 그치게 되는 한계를 인정해야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악과 고통은 단지 죄라는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라는 질병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나타난 증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은 죄와 그 죄로 말미암는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이다. 타고난 죄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그들을 불러 주실 때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영혼을 변화시켜서, 그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의 윤리의식을 심고, 천국의 윤리를 따라 살아가게 하시는 가장 수위적인 방법으로써 설교를 택하셨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마땅히 자신이 복음을 선포하고, 설교하려는 대상들의 영적상태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규정하고 있는지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B. 사도 파송과 성령의 권능
필자는 이 점에 관하여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 9:35~10:1 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이 본문을 통해 나타난 진리를 드러내 봄으로써, 설교행위에 있어서 설교자는 성령의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논의를 정리하고자 한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Ίδὼν)민망히 여기시니 (έσπλαγχνίσθη)21)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έσκυλμένοι) 유리함이라(έρριμμένοι).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έξουσία)을 주시니라“(마10:1),”...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하고....“(마10:7).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시는 사건을 앞부분에 기록하고 있다. 9장까지는 예수님 가까이서 훈련을 받는 제자의 모습이 강조되었으나 이 부분부터 제자들은 이른바 사도로 변모하게 된다. 예수님 자신과 세례요한의 첫 선포의 제목이었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라는 메세지가 세상으로 나가는 제자들에게 주어졌다(마10:7).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잃은 양들을 향해 설교할 메세지를 주시면서 그가 하신 일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시는 일이었다. 이것은 설교의 내용이 선포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적인 능력이 필요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 이후에 나타난 설교의 역사를 조명할 때 입각해야하는 관점과 동일한 관점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같은 예는 설교자로서의 세례요한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그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러 유대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3:1) 이 선포를 시작하기 전에 성경은 그가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사건(눅3:2)외에 그가 빈들에서 ”심령이 강하여지는“(눅1:80)일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경우도 꼭 같은 원리를 순서를 따라가고 있다. 마태복음 4:17에서 “이때에 예수께서 비로소(ἤρσατο)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한 기사는 예수님의 공중선포의 첫 설교임을 강조하고 있어 우리의 눈길을 끈다. 그런데 이 의미 깊은 첫 선포의 시점은 바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당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성령의 권능(έξουσία)으로 갈릴리에 돌아오신이후의 일이었다.
마태복음 10:1의 바로 앞부분에서는 제자들이 파송 받아 나아가는 세상의 영혼들이 어떤 상태인지를 예수님의 시각을 빌어 언급하고 있다. 제자들의 가슴에 복음을 담아 세상에 보내시는 예수님의 파송 동기는 바로 영혼의 그러한 상태를 민망히 여기시는 연민과 긍휼의 정이었다. 설교자들에게 있어서도 마땅히 이러한 열정적인 설교의 동기가 있어야한다.
마태복음 9:35절 이하에서는 설교를 들어야 할 영혼들의 상태에 대해 “고생하며”(έσκυλμένοι)와 “유리하며”(έρριμμένοι)로 보도하는데, “έσκυλμένοι”는 “괴롭히다, 고통을 주다 괴롬을 주다, 고통스럽게 하다, 귀찮게 하다”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동사 “σκύλλω”의 완료 수동태 분사형이다. 또한 뒤에 나오는 “έρριμμένοι”는 “내던지다, 팽개치다”의 뜻을 가진 동사 “ῤίπτω”의 완료 수동태 분사형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영혼의 운명은 괴롬을 당하고, 내던져진 것임을 가르쳐 준다. 이것이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은 우리에게 적잖은 암시를 준다. 즉 인간의 영혼을 이처럼 엎어뜨림을 당하고, 내던져진 존재로 만든 것은 단순히 인간 스스로의 일만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고 도전해 오는 영적인 배후 세력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사탄과 그에 딸린 세력들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그들은 양들로 하여금 엎드려지게 하였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채 버려지게 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양떼들의 형편이 권능을 동반한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회복될 수 있음을 마태복음이 보여주는 것이다. 유리하며 고생하는 양떼들의 이 같은 형편은 결코 심리적인 소외감이나 좌절감, 혹은 환경적인 패배감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세력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는 영적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다.
강의는 지성에 대해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성이 저항하지 않는 논리의 정연함만 있으면 청중들은 연사의 말하는 내용을 대체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설교는 그들의 영혼에 호소하는 것이고 설교자는 그들이 영혼의 변화를 통해서 전인격으로 응답하기를 기대하며 설교한다. 연사는 결과를 기대함 없이 어떤 지식을 나누어 줌으로써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설교자는 십자가를 통한 화평과 회개를 선포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 일이 회중들의 영혼과 삶 속에서 나타나기를 열망해야한다. 강의를 하는 것과 듣는 일 사이에는 특별히 영적인 간섭을 느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설교를 하는 설교행위와 그 설교자를 통해 말씀을 듣는 일 사이에는 영적인 간섭과 예리한 싸움을 동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행위에 있어서 그 설교내용을 통해서 열매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성령의 능력 부으심 아래 있을 것이 요구된다.
이 시대 속에서 교회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많은 어려움에 둘러 싸여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헤쳐 싸워 갈 만한 힘과 용기가 넘쳐흐르는 교회들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사회는 점점 타락을 향해 치닫고, 복음은 보다 노골적으로 거절된다. 이 같은 시대 상황에서 교회의 갱신을 가져오고, 부패한 사회에 영적인 각성을 가져오는 일들을 설교의 강단이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 설교단을 오르내리는 설교자들은 특별히 강한 사람들이 되지 아니하면 안 된다. 거룩한 강인함(holy toughness)이 그 자신과 설교 속에 깃들여져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를 이처럼 가난하게 만들고, 이 시대로 하여금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등을 돌리도록 부여잡고 있는 세력들이 힘 있는 세력들이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마땅히 이러한 영적인 싸움에 있어서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사람이 되어야하며, 이 싸움에서 항상 승리하는 설교자로 남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람, 성령의 설교가 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IX. 맺는 말
참으로 감화력 있고 영력에 넘치는 청교도적인 설교가 그리워지는 때에 우리는 생명의 능력과 증거의 열정을 상실해가고 있는 교회 앞에 서 있다. 설교는 결코 교회 예배 중 한 순서이거나, 인간의 지적인 욕구충족을 위한 신학강의거나, 기본적인 욕망을 부채질해 주는 번영의 도구일 수 없다. 그릇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잘못된 열정주의여서도 안 되고,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는 것도 성경이 가르치는 설교가 아니다. 현대인의 지성에 야합하기 위해서 합리주의적인 과학정신 아래서 윤리를 가르치는 것도 결코 이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설교일 수 없다.
어거스틴(A. Augustine)은 말하기를 “설교자들은 증거의 구름들이다”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강단에서 천둥소리를 내기 위해 애쓰지만, 번개와 낙뢰를 떨어지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힘을 다해 설교의 내용들을 준비해야하며, 그것이 과연 성경적인 원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면밀히 검토해야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결코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 준비된 설교가 기도의 눈물로 적시어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기름 부어질 때 우리는 강단이 이 시대의 교회와 세상을 인도하는 뱃머리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며, 세상도 이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선포한 대로 살아가는 설교자의 삶을 회중들이 쉽게 볼 수 있다면 보다 많은 열매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맺히게 될 것이다. 오 하나님! 복음을 외치는 충성스러운 강단에 번갯불을 보내사 그들의 선포가 밤하늘의 섬광처럼 어두운 불신앙의 시대에 번뜩이게 하옵시며, 이윽고 그 설교들이 구름과 비를 몰고 와서 메마른 이 시대의 조국교회를 두루 적시는 영광이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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