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엘로힘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스크랩]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아들 2012. 9. 6. 23:47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


Ⅰ.하나님의 이름들의 의의1)

현대 서구문화에 있어서 개인의 이름은 사람들을 서로 구분 지어 주는 표시들에 불구하다. 가끔 발견되는 바 특정한 가족명을 소유하거나 또는 부여하는 것과 관련된 자부심, 그리고 특징 있는 별명들의 공통적 사용은 개인의 이름이 보다 깊은 의의를 지녔던 초기의 역사시대, 특히 성서시대에 대한 단순한 반영에 불과 하다.

개인 이름의 중요성은 이름을 부여하거나 또는 바꾸는 것에 관한 구약의 이야기들 가운데 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이름은 전인격을 나타냈다. 이름이 곧 그 인격이라는 얘기가 성립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한 개인의 성격, 운명 또는 지위에 있어서의 변화는 이름의 변화에 의하여 특정 지어졌다. 예를 들면 아브람이 아브라함(창17:4 이하), 야곱이 이스라엘(32:28)로 그 이름이 변경되는 경우가 그러한 것이다. 시몬이 베드로라 바뀐 것 도 상맥한다. 이름들은 예언적으로 부여되고 또한 신학적 의미가 가정될 수 있었다.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은 명(generic title)인 엘로힘 이외에 6000번 이상 쓰이고 있는 고유명 야훼(yhwh)가 있다. 출애굽기 3장14절에서 이 이름을 독특하게 해석하고 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과 그 의미를 밝힌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 I an Who I am)니라”. “스스로 있는 자”는 히브리어 동사 “존재하다.”라는 말과 연결되며 따라서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으로 묘사된다. 더욱이 같은 말을 가지고 같은 말을 설명하는 것 (idem per idem)은 하나님이 다른 범주로는 정의할 수 없는 독립된 존재의 범주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존재하다”라는 동사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는 있지만 출애굽기에 나타난 해석이 하나님의 이름의 최초의 형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동안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단지 가설 수준의 설명밖에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하나님을 그 이름으로 불렀고 출애굽에 관한 독특한 전승을 통해서 그 이름이 새로운 내용을 가지게 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그 이름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원학적으로는 엘로힘이라는 호칭은 엘이라는 이름과 연결된다. 엘은 가나안 종교에서 으뜸가는 두 신 가운데 하나로 나타나며 그의 이름은 일루(ilu)라는 형태를 통해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종교들의 최고신과도 연결된다. 엘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의 야훼와 동일시되는데 특히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섬겼던 신들과 야훼가 동일시되면서 엘=야훼의 등식이 성립된다. 조상들의 하나님은 엘-엘리온(El-Elyon, 창 14:18 참조), 엘-로이(El-Roi, 창 22:14), 엘-솨다이(El-Shaddai,창 17:1) 등의 이름을 가지는데 이들은 이스라엘의 성립 이전에 가나안 땅에서 섬김을 받던 엘 신이 각 지방에서 불리던 이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구약은 조상들이 섬기던 이 신들이 야훼 하나님과 동일시한다는 점을 크게 강조한다.(출 3:13,16 참조), 구약은 또한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고향이 메소포타미아라는 점을 증언하고 있는데 그들이 섬기던 엘 신들의 본성이 정확히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히기 어렵다.

가나안의 종교 전통 가운데 엘 신앙 못지 않은, 아니 어떤 면에서는 훨씬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바알 종교에 대한 구약의 부정적 태도와 뚜렷이 대조된다. 비록 야훼와 바알을 동일시하려 했던 시도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지만(삼하 5:20과 이스바알/이스보셋, 므리바알/므비보셋 등의 이름, 삼하 2:10 ,9:6이하 참조) 그런 시도는 구약 전승이 발전함에 따라 제거되었다. 바알 신앙의 여러 양상들은 야훼 신앙에 너무 해로운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야훼와 바알을 동일시할 수 있게 하는 연상물이나 바알의 이름은 배쳑당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가 유일한 하나님이며 모든 종교 전들이 다 야훼와  동일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강한 의식이 구약 안에 있음을 본다. 그러나 동시에 이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배타주의가 꼭 우리가 기대하는 강도만큼 적용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의 종교사의 다른 몇 가지 면들과 마찬가지로 엘로힘 호칭의 사용이 바로 그 사실의 증거이다.  

이스라엘과 그 인접 국가들, 그리고 고대 근동의 다른 강대국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을 구약에 나타난 야훼의 독특한 개념 형성의 주요 요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아야 한다. 필요한 경우 구약의 기자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조상의 여백을 메우기 위해서 고대 근동의 폭넓은 종교 전통의 요소들을 빌어 쓰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들은 여러 가지 전승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개념의 연구를 위한 주요 “자료”로 간주할 수 없게 되었다.2)  

Ⅱ. 구약에서의 이름3)

1) 이름과 존재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유한 개인적 이름들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나 물건의 존재와 본질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인 다 그 이름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름을 짓는다는 것을 주권과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여겼다. 별들에 이름을 부여하는 자로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창조자이시며 주님이시다. (시147:4) 또한 그는 같은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이름을 부르시고 그들을 자기의 소유로 만드셨다. (사43:1, 63:19)

2)하나님의 이름의 중요성

여호와의 이름은 이스라엘을 신용하여 그들에게 맡긴 것이다. 출애굽 사건에 의하면 야웨 이름은 이스라엘에게만 은밀하게 주어졌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야웨를 알 수 없었으며(시79:6), 이스라엘은 그 이름을 거룩케 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것은 예배의식, 희생제사, 기도, 축복과 저주 또한 거룩한 전쟁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여호와를 섬기되 그 만을 섬기며 그의 계명에 복종함으로써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신의 예배의식에 참예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힘을 뜻한다. (레19:21) 야웨는 이름으로 예루살렘에 거하시며(왕상 11:36), 바로 그 성전이 그의 이름을 위해 건축되고(대하20:8, 시74:7), 영원토록 그 성전에 이름으로 거 하신다.

Ⅲ. 구약의 이름들

1)일반적 이름들

①엘: 신을 가리키는 이 기본적인 용어는 고대 셈계 언들 전체를 통하여 다양한 형태로 발견된다. 그 어원에 관하여 다양한 의견들이 주장되고 있지만 그것은 아마도[능력] 또는 [탁월함]을 의미하는 어근으로부터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엘이란 용어는 또한 가나안 만신전의 최고신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 “인간들의 아버지”, “신들 중의 신”으로 높이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호칭은 특히 욥기에 시편에 많이 나타난다. (창33:20, 46:3, 31:13, 욥8:3, 시18:31,33,48,68, 50:1 단11:36)

②엘 엘욘: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이 용어는 [가장 높으신 자], [지존한 자]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③엘 올람: 야웨는 브엘세바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이 칭호 아래서 불리어진다. (창21:33)이 칭호가 이러한 형태로는 다시 발견되지 않는다.

④엘 로이:이 표현은 오로지 창 16:13에서만 나타난다. 그런데 이 본문은  하갈이 어떻게 사막에서 크엘라헤로이 셈을 발견하여 생명의 보호와 유지를 얻게 되었는가를 말해준다. 그녀는 야웨를 이러한 칭호로 칭하였다. 그 의미는 “보시는 하나님”또는 “나를 보시는 하나님”일 가능성이 크다.

⑤엘 벧엘: 이 표현은 창 31:13, 35:7에서 나타난다. 전자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야곱에게 알리셨고 후자에서 야곱은 벧엘에서의 자신의 소기의 경험을 기념해 그곳에 제단을 세웠다.

⑥엘로힘: 단수 의미 강화의 위엄의 복수형으로서 아주 강하고 능력 있는 속성을 나타내 주는 이름으로서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한 분 하나님 가운데 집중되어 있음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능, 창조, 능력을 나타내실 때마다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

⑦엘 쉬다이 : 백성의 축복과 위안의 근원이 되시면서 자연세력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준다.(창17:1-20)

⑧엘 브리트: 우리와 연약하신 하나님의 불변성을 보여준다. (창14:13)

⑨엘 엘로헤 이스라엘 :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으로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창33:20)

⑩엘욘: 높고 높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 주는 이름으로서 숭배와 예배의 대상이 되심을 보여주는 속성이다. (창14:19, 민24:16, 사14:14, 단7:22,25)

⑪아도나이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심을 드러내는 이름으로서 위엄과 지배라는 의미가 나타나는데 최초의 용법은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역할을 암시했으나 후에는 백성사이의 보다 가깝고 개인적인 관계를 나타내었다. (창18:27, 삿13:8, 스10:3, 느1:11)

2)야웨: 히브리인들에게 가장 존귀하고 지고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주는 이름으로서 7040회나 사용된 이 이름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언약의 신실성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실제적으로 역사적인 정황 속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모습에서 밝히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내가 축복하겠다.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실 때는 언제나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

①야웨 이레 :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필요를 준비해 주고 계심을 보여준다.(창22:14)

②야웨 닛시: 깃발 되신 하나님으로서 언제나 우리를 승리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출17:8-16)

③야웨 샬롬: 평화의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우리 가운데 평화를 도모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삿6:24)

④야웨 처바오트 : 만군의 하나님으로서 전능한 왕으로 좌정하시고 모든 자연과 세계를 지배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사6:5, 24:23)

⑤야웨 메카디쉬켐 : 거룩하신 하나님으로서 주의 날을 거룩하게 여기는 자들을 정결케 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 (출31:13)

⑥야웨 로이 :목자 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23:1)

⑦야웨 삼마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가 있는 곳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

⑧야웨 마케 : 훈계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 언제나 훈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겔7:9)

⑨야웨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자들의 영, 육간의 질병을 치로해 주시기를 원하시고 또한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준다.

3)아돈, 아도나이 : 이 용어는 그 기원이  불확실하다. 그러나 히브리어에 있어서 그 기본적 의미는  [주, 주인, 님]이다. 그리하여 이 용어는 인간 군주, 남편(창18:12), 노예의 주인(출 21:5) 그리고 기타 권위를 지닌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된다. 이 용어가 하나님께 적용되는 경우에는 분명히 위엄, 지배라는 의미가 암시된다.

Ⅳ. 신약에 계시된 이름들4)

신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들은 한결같이 신자 개개인의 보다 친절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있다.

1)하나님: 구약의 국가적인 종교관념이 신약에 와서는 개인적으로 바뀌어져 감을 감안할 때 이 칭호가 의미하는 바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개인적인 하나님이 되신다것을 잘 드러내어 주고 있다. 구약의 엘, 엘로힘, 엘욘이  이 칭호로 번역되었다.

2)주: 70인 역에서는 야웨 대신에 아도나이를 사용했고, 그 것을 주라고 번역하였다. 이 이름은 아주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만물의 소유주요 특별히 그의 백성의 소유주이시며 지배자이신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3)아버지 : 이 칭호는 하나님께서 창조자와 통치자가 되심은 물론 영의 아버지, 인류의 아버지, 예수의  아버지, 신자의 아버지 되심을 나타내 주는 이름이다. 이 칭호는 다른 칭호들 보다 더욱 개인적인 칭호로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인 모든 신자들의 아버지 되심을 잘 나타내 주는 이름이다.

구약의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장 대표적으로 표현된 것은 ‘엘로힘’과 ‘야웨’, 두 가지를 들 수 있다.엘호힘은 ‘엘’이라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최고신의 이름과도 연관된다. 성서에도 ‘엘’은 여러 가지 파생된 이름(엘+속성. 지명, 인명)으로 불린다. 이러한 흔적은 이스라엘 성립이전에 가나안 땅에서 섬김을 받던 엘 신이 가나안 각 지방에서 불리던 이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서는 수천년이 지난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설명하고 있는 유일신 하나님을 처음부터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성이 혈연적인 것이기보다는 신앙을 중심으로 한 제의 공도에적 성격이 더욱 짙음을 알고 있다. 이스라엘을 이루고 있는 세력에는 출애굽을 가능케 한 야웨를 신으로 모시는 하비루세력과 풍요와 비교적 다양하게 분화된 기능을 가진 ‘엘’을 섬기는 토착 농민세력이 있었다. 이 후 출애굽의 경험을 모든 세력(지파)의 신앙고백으로 삼으면서 이 고백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성립되자 차차로 엘 신앙은 야웨신앙으로 흡수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근동의 여러 신들의 기능을 받아들여 풍요와 다산 등, 다양한 역할을 야웨가 행할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즉, 출애굽을 가능케 한 구원자 야웨는 전쟁의 신만이 아니라 모든 생산을 주관하고 우주의 창조까지도 행했던 신으로 고백되어진다. 즉 야훼는 여러 신의 역할과 기능을 포용하는 신으로 야웨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엘신앙에서 과도기적 형태인 엘로힘, 그리고 야웨라는 하나님 이름의 변화흐름을 통해 처음부터 고대 이스라엘이 유일신 신앙을 가졌다고 보기 힘들며 특별히 가나안 정착하면서 독특하게 신앙을 전승, 유지시킨 토착화의 훌륭한 모범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의 기자들은 고대 근동의 여러 전승들을 자신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야웨신앙의 큰 흐름에 잘 맞추어진 토착화된 형태를 갖추었다.

사실 구약에는 하나님을 인지할 수 있게 하는 단순 명료한 정의나 문구가 하나도 없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가 가장 가까운 문구일 것이다. 그 때문에 십계명의 서두를 이루는 자기 소개 적인 문구가 구약에서 하나님의 고유한 정체성을 알려주는 가장 폭넓고 기본적인 전술로 간주 될 만하다. 하나님의 존재를 말할 때 강조되는 것은 그 특성이 ‘인격’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격적 본성’을 강조함에 따라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는 부자, 부부관계로 비유되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의 인격성은 도덕성의 인식으로 이어져 구약성서의 3대 약자인 고아, 과부, 나그네 등의 사회의 약한 자와 눌린 자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며, 깊은 종교적 윤리화가 있었음을 보여주게 된다. 하나님의 특성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유일성’이다. 이 유일성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어떤 형상이라도 만들거나 그것을 예배하지 말라는 금지조항을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모든 나라들과 역사를 지배하신다는 예언자들의 주장과 이스라엘 하나님 이해가 지니는 도덕적 강조의 요인으로 그 한계를 극복하면서 결국 모든 민족의 하나님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출애굽기 20장 2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유의 하나님이며, 눌린 자의 수호신이며, 가난한 자의 보호자이고, 부당하게 취급받는 자를 대신하여 복수하시는 하나님 개념은 독특한 도덕적 통찰과 관심을 내포하는 개념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구약은 그릇자체가 고대근동의 background, 토양, 난제 등을 담고 있다. 즉 더욱더 이해를 잘 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고대 근동과 구약의 하나님의 가장 큰 차이는 ‘상의 유무’다. 실질적으로 고대 근동의 신들에게는 이름이 그리 필요가 없다. 또 고대근동은 다시 개념이었고, 이스라엘에게는 유일신이다. 고대 근동의 개념에 젖어있는 사람에게 하나님 다신교에서 행하는 역학을 혼자 다 하신다. 즉 이름으로 그 행위를 하신다. 형상을 대신하는 것은 성전시대에는 법궤, 없어진 뒤 이름이 수행하게 된다.

Elohim이 왜 복수로 쓰였을까? 왜냐하면 ‘plural of extension’ 확장의 복수개념으로 여러 신들의 역할을 다했을 거라 사료한다. 또 ‘plural of majesty’ 위엄의 복수개념으로 복수 칭호로서 존재의 이유성, 극존칭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야웨라는 이름에는 고유성이 있지만, 엘(El)이라는 명칭은 가나안 지역에서 쓰는 것을 돌려쓴다. 어느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의 이름으로 붙이는데 성공했지만 Baal은 그렇지 못했다. 야웨 하나님 신앙이 확립하면서 Baal 신이 없어지게 된다. 처음에는 야웨 하나님과 Baal을 같이 모셨으나 신앙의 단계가 완성되면서 부족종교가 쇠퇴된다5). 처음부터 유일신 사상이 나왔던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부연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초기부터 강조해 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명기 이후, ‘성전은 하나님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부각이 된다. 

‘구약전승의 맥락’에서 본 하나님의 이름

1. 생명철학

구약 속에 뛰어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 알게 된 하나님을 만나보면 그분은 야웨도 아니고 또 유일하신 분도 아니라는 것이다. 야웨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며 더구나 종교사학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유일신 사상을 본격적으로 논할 수 있는 것은 포로기의 제 2이사야 시대라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히브리 사람들도 사람의 이름이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그의 혼인 "네페쉬“와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이름은 그 사람의 독특성을 나타내며 그의 성품과 인품을 보여 주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이름을 없애버린다는 것은 그 사림의 존재를 없앤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름이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나 물건의 존재와 본질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 이름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성품의 변화를 뜻하기도 한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밤새껏 씨름을 한 다음 그의 이름이 바뀌어졌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그 이름이 바뀐 것이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2.가시덤불 속의 하나님

구체적으로 야웨의 이름이 처음 히브리인에게 계시된 출애굽기 3장의 모세와 가시덤불 이야기를 살펴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그 음성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 뵈올 때도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 등 자연현상 가운데 계시지 않고 세미한 소리 가운데 계셨다(왕상 19:9- 18).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 같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는 구약성서 전체를 통해 뚜렷이 나타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이름이 그 가시덤불 속의 말씀을 통해 계시되었다는 것이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가시덤불 속의 하나님 현현은 가시적인 놀라운 자연현상보다는 대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신과 인간의 대화, 질문과 응답, 반대와 권고, 다툼과 긴장들이 신 현현 연설의 성격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구해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이다. 이때 모세에게 계시한 하나님은 “나는 네 선도들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가시덤불 속의 하나님은 족장들의 하나님과 동일화가 된 것이다.

3. 족장들의 하나님

세상초기부터 야웨 하나님이 알려졌다는 야웨신학자의 해석은 야웨종교가 국가 종교로 수립된 이후 남왕국 유다의 신학적인 해석이고, 종교사적으로 볼 때는 주전 13세기 출애굽사건과 관련해 처음 이스라엘에 도입된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출애굽 이전 이스라엘 족장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은 무엇이며 그 신과 야웨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냐는 문제는 제기가 된다.

야웨와 엘의 동화과정이 얼마의 시간이 걸렸으며 언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출애굽 사건 이후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야웨 신이 언제부터 유일신으로 부각되었느냐와도 상관이 있는 것이다. 출애굽을 시켜주신 야웨 하나님이 절대적인 유일무이하신 신인가?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은 그 야에는 유일신인가? 브라이트(Bright)는 “잠정적인 유일신(inti-pient monotheism)"이라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십계명에서 다른 신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 비해 제2이사야의 경우는 분명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야웨만이 세상에 유일한 신임을 천명하고 있다(사46:1-2). 랑(Lang)은 이스라엘 제의 는 기본적으로 다신교적이었으며 그럼에도 소수 예언자를 중심한 ”야웨만을 섬기는 운동(Yahwh- alone movement)단체가 있었는데 주전 586년 유다가 망하는 사상적인 위기를 통해 포로기에 야웨 경배가 새로운 유일신 사상으로 꽃피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랑의 설명이 그렇듯 하기는 하지만 포로기에 앞서 히스기야-요시야 종교개혁이 용광로와 같은 역할을 하여 야웨종교의 순수성을 되찾았을 것이라고 본다. 

4.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

야웨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면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야웨라는 애매모호한 이름은 하나님 자신의 일부를 가리우신다는 (Deus absconditus)면이 있고, 또 하나는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한다는(Deus revelatus)측면이 있다. 노트(M. noth)는 구약성서가 제시하는 하나님 이름의 뜻은 애매모호한 부정확한 것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데 있다고 본다. 이것은 다시 말해 야웨 하나님을 분명하게 규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그의 일부를 가리우신 것이다. 테리엔은 야웨가 자기의 이름을 “야웨”라고 밝힌 것은 신으 ldlfma이 무엇이냐고 물은 모세의 요구에 대한 대답인 동시에 또 거부가 된다고 본다. 모세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은 “나는 나다.”라고 하는 애매한 답변으로서 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간접적인 답변만 준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은 그 자신의 일부를 우리 인간에게 감추신 것이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며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창32:29)”라고 간청했으나 그는 끝내 그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또 야웨라는 이름이 하나님의 일부를 인간에게 계시하신다는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야웨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고유명사로서 그 하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침멀리는 예언 전승을 연구하는 그의 논문에서, 예언자들이 야웨라는 이름에 다른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야웨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엣겔은 이같이 선언한다. “너를 가엾게 여기지도 아니하고 불쌍히 보지도 아니 하리라 네 가운데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발칙한 짓들로 인하여 내가 너에게 벌을 내리고야 말리라.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웨임을 알 것이다.(겔7:4)” 그 이름을 통해서 야웨가 누구인가가 드러난 것이다. 침멀리는 이 이름이 심판으로다가 오시는 분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본다.

4. 성명 신학

  이스라엘 왕국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내셨다. 신명기 법전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야웨가 당신의 이름을 붙이시고 당신께서 계시는 곳(신12:5)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기 위해 지어진 곳이며 (삼하7:13),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기로 정하신 곳이다(왕상 11:36). 신명기 신학자에 의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곧 하나님 임재의 표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성전이 파괴된 다음 하나님 실체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신명기 신학자의 성명신학에 대한 이론이 제시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처는 하늘이지만 그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은 지상에 거하신다는 논리이다(왕상8:27-30).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내면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도 하는 것이다.

미스코테(Miskotte)는 고대 근동의 다른 신들은 모두 침묵을 지키지만 야웨만이 역사의 현장 안에 그의 말씀을 선포한다고 말한다. 스스로 있게 하신다는 그 분의 이름은 곧 세상의 창조와 역사의 진행을 전제하는 것이다. 야웨의 이름이 선포되는 곳에 그의 백성이 고통 가운데서 해방되며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야웨의 이름은 그러므로 단지 신의 성품을 계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공동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개방된 미래를 향해 과감히 나서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이름 넉자 그래서 주(主)라고만 불렀던  그 이름이 구약 공동체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나오면서

나의 인생관이라 하기까지는 뭐하지만 ‘이렇게 살아야지’하고 되네이는 것이 있다. "Que  sera sera", '강처럼 살자 산처럼 살자‘이다. 어떤 허무주의 적인 견지에서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있는 데로 흐르는 물과 같이 살아가자는 것이다. 중국의 어느 각인은 상선악수(上善惡水)라 말을 했다. 최고의 선은 물이라는 얘기다. 어떠한 제도나 법제를 만들어 더욱더 인간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준비하고 우리네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이를 생각하며 그냥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다. 본인이 이 말을 적는 이유는 교회공동체 내에서의 인위로 제작된(?) 많은 교리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데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기실 그 분을 하나님이라고 한들 하느님이라고 한들 둘님이라고 한들 실체는 변화되지 않는데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이 그렇게 말한 자에게 철퇴를 가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지난주 본인 출석하는 교회에서 이런일이 있었다. 청년회원중 교단 내 다른 신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있는데, 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야, 사실 하나님이라는 말은 문법적으로 틀린 거야 조금더 정확하게 표현 하려면 하느님이 맞어.” 했더니 그 친구는 정색을 하며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바꿀 수가 있느냐며 성을 내었다. 내 역시 조리있게 설득하며 얘기를 했지만 열을 내면서 “ 말이 안 통해서 얘기를 못하겠네요”라며 혼자 화를 내며 자리를 일어났다.  기실 내가 하느님이라고 부른들 그분이 “야 임마, 나 느님이 아니고 나님이야 이제부터 똑바로 불러 알겠어?” 이러지는 않는다. 자신들이 뭐 성녀인 자신만이 프랑스를 지킨다는 잔다르크인냥 행동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본다. 김병현는 불펜에서는 그저 몸만 풀고 마운드에 올라가서 전력투구를 하지만 야구를 잘 못하거나 잘 모르는 이는 감독이나 코치의 눈에 띄게 하기 위해 불펜에서 전력을 투구한다. 정작 올라가면 바로 강판이 된다.

우리의 삶도 어떤 인위나 작위를 가한 삶은 또 새장에 갇혀 있는 새처럼 하나님을 인간의 인위속으로 가둬 들이는 일을 초래한다.

참고문헌

안영원, ‘하나님의 이름과 거룩성’ 안영원/1990 고신대 석사논문

곽철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고찰’ 곽철운/1991 서울신대 석사논문

기독교 대백과 사전 15 [기독교문사 pp1408-1421]

스탠다드 주제별 성경사전 12 [제자원 pp229-246]

로날드 E. 클레멘츠 지음, 김찬국 옮김, 구약신학/ 대한기독교서회(1989)

출처..창골산 봉서방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 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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