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언
신약성경을 개요함에 있어서 먼저 신약성경 전체를 한눈으로 볼 수 있도록 그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이는 마치 우리들이 어떤 지역의 구석구석을 구체적으로 조사하기 전에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그 지역의 전체 지형을 살핌으로써 대략적인 지식을 확보하는 것과 같다.
제 1 장 신약에 비추어 본 구약
신약과 구약의 관계의 중요성은 여기서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구약 없이는 신약을, 신약없이는 구약을 올바로 이해할수 없다. 구약과 신약은 한 권의 책과 같은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 신약이 구약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간단 명료하게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신약은 구약성경을 영감된 것으로 취급한다.
구약성경을 쓴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벧후 1:21)로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히1:1). 그들의 기록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딤후3:16) 것이었다. 다윗은 시편을 쓸 때 성령의 감동함을 받아 썼으며(마22:43; 행1:16;4:25), 성령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다(행28:25).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인간 저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성령이 저자인 것처럼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구약이 성령의 감동을 입어 기록된 것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히3:7;9:8;10:15). 이처럼 신약은 구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증거한다.
(2) 신약은 구약성경을 권위 있는 책으로 취급한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사단의 시험에 대해 구약을 인용하여 물리침으로써 구약성경에 최종 권위를 부여하셨다(마4:4,7,10).
또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실 때도 구약에 최종 권위를 부여하여 그들이 구약 말씀의 참뜻대로 행하지 않는다고 꾸짖으셨다.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의 예언을 권위 있는 것으로 인용하며(행2:16-19,25-28; 롬11:26-27), 구약의 교리를 권위 있는 것으로 인용(롬3:10-18; 9:25-33;10:18-21), 구약의 말씀이 실패됨 없이 응하였다고 증거한다(행1:16,20; 15:14-18;딤전5:18;딤후2:19). 신약은 직접, 간접적으로 구약이 권위 있는 책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3) 신약은 구약성경을 역사적인 책으로 취급한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신약에 인용하면서, 그 인물들과 사건들의 역사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인용하셨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사건(마19:4), 대홍수(마24:37-38), 소돔의 멸망(눅17:28-30), 할례의 관습(요7:22-23), 율법을 주신 사건(요7:19), 놋뱀의 사건(요3:14), 요나와 큰 물고기 사건(마12:38-40), 니느웨 성의 회개(마12:4), 스바 여왕의 방문(마12:42)등 구약의 사건을 전혀 의심치 않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정, 이를 인용하고 있다. 또한 신약의 저자들은 멜기세덱(히7:1-9), 욥(약5:11), 엘리야(약5:17), 바로(롬9:17), 기생 라합(약2:25) 등의 인물들과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사건(고전10:1)등의 사건들을 역사적인 것으로 믿고 그대로 인용한다.
(4) 신약은 구약성경을 메시야 예언적인 책으로 취급한다.
그리스도는 확증하기를 “모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다”(요5:45-47)라고 하셨으며, 또 그의 제자들에게 “모든 성경(구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셨다(눅24:27,44-47).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구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마1:23;2:5;3:3; 4:14-16;11:10;12:18-21;13:14-15,35; 21:4-5,42).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밑에서 예수의 옷을 제비 뽑은 사건도 구약의 성취이며(요19:24,28), 구약 예언에 나타난 대로 군병들은 그리스도의 뼈를 꺾지 않았다(요19:33-37).
(5) 신약은 구약성경을 은혜 시대에 관해 예언한 책으로 취급한다.
신약은 구약이 은혜 시대에 관해 예언한 것으로 설명한다.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르켜 말하였느니라”(행3:24)의 “이 때”는 은혜 시대를 가리키고 있다. 바울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행26:22)만 증거했다고 확언한다. 이는 바울의 구원에 대한 메시지가 구약이 예언한 것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신약 시대가 은혜 시대요 구원의 날이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이사야의 예언(49:8)의 성취를 선포하면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참조. 히3:13)라고 했다. 구약의 예언이 현재 은혜 시대에 큰 관심을 두었다는 것은 신약에 나타난 명백한 교훈이다.
(6) 신약은 구약성경을 복음 진술의 책으로 취급한다.
복음은 아브라함에게 전해졌으며(갈3:8),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전해졌다(히4:2,6).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고, 다윗 역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롬4:5-9;히11:17).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받았다(히11장). 구약의 성도들은 신약의 성도들과 함께 구원 받은 자의 수를 완전하게 채운다(히11:40). 구원의 본질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다. 구원은 단 한 가지 방법으로만 가능하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한 것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구약의 성도들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 받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받았다면, 오실 메시야인 그리스도를 선포한 구약은 복음을 진술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8) 신약은 구약성경을 준비적인 책으로 취급한다.
신약은 구약을 은혜 시대의 도래를 준비하는 책으로 본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에 이르러 회당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사61:1-2)을 읽으신 후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하셨다(눅4:17-21). 이는 이사야서의 내용대로 “주의 은혜의 해”가 임했다는 뜻이다. 이처럼 구약은 신약의 은혜 시대에 대한 준비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히브리서는 구약(율법)이 은혜 시대에 있을 “좋은 일의 그림자”(히10:1)요, 신약시대는 구약에서 약속된 “더 좋은 언약”이 성취된 시대라고 말한다(히8:6-13;렘31:31-34).
(9) 신약은 구약성경을 기독교인에게 영적으로 유익한 책으로 취급한다.
구약에 기록된 사건들이 우리들의 교훈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1,12). 아브라함이 의로 여김을 받았다는 사건은(창15:6;롬4:3)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은 자니라”(롬4:23,24). 이처럼 신약은 구약이 기독교인에게 유익한 책이라고 말한다. 구약의 권면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히12:5,6;13:6)
(10) 신약은 구약 성경이 흔히 문자 이상의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취급한다.
엘리야를 보낸다는 말라기의 예언은(말4:5,6) 신약에서 세례 요한을 통해 성취되었다(마17:10-13;눅1:17). 하나님이 한 왕을 일으켜 다윗의 위에 오르게 하시겠다는 구약의 예언은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된 것으로 설명한다(눅1:31-33;행2:29-36;렘23:5,6;겔34:23,24). 이처럼 구약에 나타난 어떤 사건이나 인물들이 문자 이상의 뜻으로 신약에서 설명되곤 한다(갈4:21-31).
지금까지의 내용을 통해서 볼 때, 신약은 구약성경의 이해를 위한 최종적 인도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신약 없이 구약을 완전히 이해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을 터득하는 데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구약의 참다운 뜻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신약 계시에 의해 밝아져야 하는 것이다(눅24:32,45).
제 2 장 내 용 에 따 라 분 류
신약성경 27권을 그 주요 내용과 강조에 따라 분류를 해 보는 것이 유익되리라 생각한다. 신약성경은 역사에 강조를 둔 책들, 교리에 강조를 둔 책들, 예언에 강조를 둔 책들 등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이 분류는 그 내용에 있어서 서로 배타적이 아니며 오히려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즉, 역사에 강조를 둔 책에는 교리가 없다거나 예언에 강조를 둔 책에는 역사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다.
(1) 역사에 강조를 둔 책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우리에게 알려 주는 책은 4복음서들이다. 4복음서에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족보,탄생,생애,교훈,이적,죽음,부활 그리고 승천등의 역사적인 사실을 찾을 수 있다. 비록 이런 사건들을 기술함에 있어서 각 복음서는 각각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예수님의 지상 생활을 확증하는 공동의 큰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역사를 강조하는 또 다른 책은 사도행전이다.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누가에 의해 기록된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편으로 기록되었는데,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지상 사역을 시작하신 때부터 승천하신 날까지가 기록되어 있다(행1:1-3). 이 사도행전에는 교회의 기원에 대해, 교회와 유대인들의 충돌에 대해, 베드로와 바울에 의한 천국의 확장에 대하여, 그리고 세번에 걸친 바울의 위대한 선교 여행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 서신의 보충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행한 사람이었고 바울과 가장 가까운 동역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2) 교리에 강조를 둔 책
신약 27권 가운데서 서신들이 이에 속한다. 바울의 13서신과 공동서신 그리고 히브리서가 있다. 바울의 13서신을 분류하면 교회에 보내는 일반적인 서신과 특별한 대상에게 보내는 서신들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인 서신들로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등이 있으며, 이 중 제일 먼저 씌어진 서신이 데살로니가전후서이다. 바울이 옥중에서 기록한 서신으로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및 빌레몬서가 있는데, 흔히 이 서신들을 가리켜 옥중서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울 서신 중 특별한 대상에게 보낸 서신들 가운데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는 일반적으로 목회서신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서신들은 교회에 보내진 것이 아니요 개인에게 보내진 서신이다. 그리고 바울 서신 중에서 개인에게 보낸 또 하나의 서신으로서 빌레몬서가 있는데, 빌레몬이라는 개인에게 보내졌다는 점에서 목회서신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 내용의 개인적인 성격 때문에 따로 취급한다.
공동서신들도 이 분류에 속하는데,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이삼서, 유다서를 말한다. 공동서신이라 할 때의 “공동”(catholic)이라는 말은, 이들 서신들의 범위가 어떤 한 교회나 개인에게 국한되지 않고 전체 교회에 보내졌기 때문에 사용된 것이다. 이들 서신을 “일반서신”이라고도 부른다. 히브리서도 교리에 강조를 둔 책으로 분류되는데, 히브리서의 저자나 수신자에 대해서 학자들간에 의견이 각각 다르다. 히브리서는 신약성경의 어느 책보다도 더 탁월하게 예수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라는 교리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3) 예언에 강조를 둔 책
신약에서 예언에 강조를 둔 책은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이다.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계1:1), 하나님 계시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 사도가 밧모라는 섬에서 받은 계시로, 학자들간에 그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현재의 은혜 시대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완성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거의 모든 해석자들이, 계시록의 마지막 두 장이 재림 이후의 영원한 세상에 관해 설명한 것이라는 해석에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제 3 장 신약시대의 종교, 정치, 역사적 배경
신약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신약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은 역사 안에서 기록되었고 역사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이 기록될 당시의 역사적인 형편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신약의 메시지와 직결되어 있는 몇 가지의 요소를 중점적으로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종교적 배경
신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이 기록될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형편을 이해해야 한다. 유대인들의 종교적 당파나 그들의 메시야 대망 사상은 신약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1) 유대인의 종교적 당파
1) 바리새인(The Pharisees)
예수님의 지상 사역 시에 많은 질책과 비난을 받은 유대인의 종교적 당파가 바리새파이다. 바리새인들은 신약 시대에 가장 큰 세력을 소유하고 영향력을 발휘했던 당파로서, 그들의 이름은 “Pharash”(분리하다)라는 동사에서부터 기인됐다. 그들은 분리자였는데 좋은 말로 표현한다면 유대주의를 철저히 지키기 위해 노력한 열심분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카비 시대 (The Maccabees:167-63B.C) 직후에 분리주의의 한 당파로 시작을 했으며, 주전 135년경에는 유대주의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린 단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구약 전체를 정경으로 받았고 풍유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구약을 해석했다. 그들은 외적인 관습을 철저하게 지켰는데(마23:23;눅18:11), 규정된 대로 철저하게 금식을 지켰으며(눅5:33;18:12), 기도를 하는 데도 철저하게 금식을 지켰으며(눅5:33;18:12), 기도를 하는 데도 내면적 충실보다 외적인 전시 효과를 더 노렸다(눅18:9-14). 그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었고(행26:5;빌3:5), 유전과 전통을 철저히 지켰고(막7:3,5-8), 탐욕이 많았으며(눅16:14), 잔인한 핍박자들이었다(행9:1-2;빌3:5-6). 그들은 외적인 관습을 철저하게 지킨 나머지, 안식일 준수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거나(요5:9,14;9:13,16), 이삭을 잘라 길가에서 먹는 것까지 안식일을 범하는 죄로 규정하게 되었다(마12:1,2;눅6:1-11).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은 사실을 안식일을 범하는 네 가지 죄로 생각했다. 첫째,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을 추수하는 죄요, 둘째, 이삭을 손으로 비빈 것은 타작하는 죄요, 세째, 껍질을 불어 날린 것은 키질하는 죄요, 네째, 먹기 위한 이 모든 행위는 음식을 장만하는 죄를 범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외에도 바리새인들은 천사와 영들의 존재를 믿었고 영혼의 불멸과 죽은 몸의 부활을 믿었다(행23:6-10).
바리새인들의 결점은 지나치게 외적인 의를 강조한 반면(눅7:36-50), 영적인 실재를 깨닫지 못했다(요3:1-10)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을 의식적으로 지키는 데 강조를 두었고(마15:1-9), 구약의 본 뜻을 왜곡하여 적용했다(마15:1,9). 또한, 그리스도를 믿으려 하는 사람을 방해하는 잘못을 범했고(요9:16,22),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 된 메시야로 영접지 아니했다(마12:24-33).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 당시에 예수님을 괴롭히고 핍박한 중심 인물들로서, 결국은 그들의 핍박과 연결되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다.
바리새인들 중에는 자신을 의롭다 하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은 위선자들이 많았지만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추종했으며(요3:1-8; 7:50-52; 19:39-40), 바리새인으로서 회개 후 가장 위대한 기독교의 복음 전도자가 된 바울의 예(例)도 있다(행 9장; 빌3장). 또한 바리새인들이 도덕적, 영적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 의롭다 함으로써 많은 위선자를 낳았지만, 그들의 도덕적 수준이 당시의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높았던 점은 사실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유대 주의의 모든 분파 중 바리새인주의만 계속 명맥을 유지하게 되어 오늘날의 정통 유대주의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콜러(Kaufmann Kohler, “Pharishees”, Jewish Encyclopedia, IX, pp.661-666)는 바리새인들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1.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기 위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니는 바리새인(“shouder” pharisee)
2. 자신이 선한 일을 행할 동안 다른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바리새인 (“wait-a- little” pharisee)
3. 여자를 보면 음욕을 품을까 하여 눈을 감고 다니다 벽에 부딪쳐 자신을 상하게 하는 바리새인(“blind” pharisee)
4. 유혹물들을 보지 않기 위해 머리를 위로 치켜들고 다니는 바리새인(“pestle” pharisee)
5. 항상 자신의 선행을 계산하고 있는 바리새인(“ever-reckoning” pharisee)
6.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바리새인(“God-fearing” pharisee)
7.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바리새인(“God-loving” pharisee)
2) 사두개인(The Saducess)
사두개파는 부자들의 당파로, 특히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지주들의 당파였다. 전통에 의하면 그들의 이름의 기원은 다윗왕과 솔로몬왕 시대에 대제사장이었던 “사독”(Zadok)으로부터라고 전해진다. 사독의 아들들은 포로 시대에도 제사장 직분을 맡았다(왕상 1:32ff: 대하31:10; 겔40:46;44:15;48:11). 사두개인들은 그리스도 당시에도 성전을 중심한 하나의 당파로 활약했다. 바리새인들보다는 수자적으로 열세였으나, 그들은 정치적으로 기회를 작 포착한 기회주의자들로서 언제나 집권층의 편에 서서 그들의 정치적 이권과 영향력을 유지했다. 그들의 정치적 성향은 보수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 당시에 부와 권력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회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사두개인들의 신학은 합리주의적인 신학이었고 초자연적인 요소를 배격하는 입장을 취했다. 오늘날의 양상으로 표현한다면 그들은 자유주의적인 신학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천사들이나 영들의 존재를 믿지 못했고 육체의 부활도 믿지 못했다(행23:8). 그들은 또한 영혼 불멸을 믿지 못했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파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고(행23:6-9), 때로 예수님의 사역을 반대하기도 했다(마16;1,6,12;22:23).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반대에 비하면 대단치 않은 것이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과 충돌한 가장 두드러진 사건은 몸의 부활에 관한 예수님과의 논쟁이었다(눅20:27-33). 그들은 모세 오경(Torah)에만 최종 권위를 부여했고 구약의 다른 부분의 책들은 모세 오경보다 권위가 낮은 것으로 부여했고 구약의 다른 부분의 책들은 모세 오경보다 권위가 낮은 것으로 취급하였으며 메시야 대망 사상에도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사두개인들은 헬라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바리새파와는 달리 예루살렘 멸망 이후 살아 남을 수 없게 되었다. 제사장 제도의 종식과 로마의 적대심 때문에 사두개파는 단체로서의 존재에 종지부를 찍고 다시 살아날 수 없게 되었다.
3) 서기관(The Scribes)
서기관의 기원은 제사장 겸 학사(서기관)였던 에스라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느8:9). 그들은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공회의 일원들이었다(마16:21;26:3). 그들은 기록된 율법을 보존하며 구전으로 내려오는 법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구전으로 전해 오는 법을 기록된 율법보다 더 우월하게 생각했다(막7:5-13). 그들은 교사로서 성전에서 가르쳤으며(눅 2:46;참고.요18:20), 율법사로 알려졌다(마22:35). 서기관들은 그 당시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합세하여 예수님을 처형하게 했다(막14:43, 53; 눅22:66).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마7:28-19).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서기관들에게도 진노를 퍼부으셨다(마23:2,13-15, 23,25,27,29). 그들은 사회 계층의 높은 위치를 좋아했고(마23:6f. 막12:38f;눅11:43;20:46), 그들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그 당시 상류층 사람들이 입고 다녔던 통으로 짠 옷을 걸치고 다녔다. 서기관들 중 어떤이는 그리스도를 신뢰했지만(마8:19) 대부분은 그리스도를 배척했다(마21:15).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핍박하는 것과(행4:5)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동참하였다(행6:12).
비록 서기관들이 율법을 맡은 율법사들로서 율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고 문자적인 율법에만 급급한 나머지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었지만, 그들의 노력으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알고자 원하게 된 것은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4) 에세네파(The Essenes)
신약성경에 에세네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1947년 쿰란에서 사해 사본이 발굴된 이래 쿰란 공동체와 에세네파를 동일시하는 시도가 있어 왔다. 더 나아가 세례 요한이 에세네파의 일원이었고, 예수님까지도 에세네파에 의해 수련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에세네파에 대해 잠시 다루고자 한다.
요세부스(Josepnus)와 플리니(Pliny)는 약4,000명으로 추산되는 에세네파가 사해 서쪽 지역에 거주했다고 증거한다(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Chap.I,vs.5). 에세네파는 영혼 불멸의 교리를 가르쳤고 감정적 표현을 자제했으며, 향락 자체를 위한 향락을 금했으며 모든 재산을 공동의 소유로 사용했다(Josephus, Antiquities, BK. 18, Chap.I, vs. 5). 이 종파는 독신 생활을 생활 원리로 삼았다. 그들은 하인들을 두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다. 독신 생활을 권한 것을 집안 싸움을 피하기 위한 것이요. 하인들을 두지 않은 것은 불의하게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Josephus, Antiquities, BK. 18, Chap I, sv.5). 이 종파는 일상적인 일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흰옷을 입고 다녔으며(Bo Reicke, The New Testament Era, p.169), 식사 전에는 손을 씻었다. 그런데 에세네파는 유대인의 명절 때 예루살렘에 올라가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았던 듯하다. 그 이유는 그들 스스로의 결례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이 에세네파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광야와 같은 장소에서 수도원적인 은둔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제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세네파는 예수님 당시의 사회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 것이다. 신학적으로 에세네파는 사두개파보다 바리새파에 더 가깝다. 그 이유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초자연적인 것을 믿는데 있어서 에세네파와 바리새파가 더 유사하기 때문이다. 에세네파는 사람의 영혼이란 멸망될 몸에 갇혀 있는 불멸 존재로, 그 몸이 죽을때 선한 사람들의 영혼은 밝고 시원한 장소로 옮겨지나 악한 사람들의 영혼은 어둠과 폭풍우가 많은 장소로 옮겨져 계속 고통을 받게 된다고 가르친다(Merrill C. Tenney, New Testament Survey, p.113).
에세네파의 수도원적인 은둔 생활이 쿰란 공동체의 생활과 유사하며, 쿰란 공동체의 정착지였던 사해 서쪽 지역에 에세네파가 거주했다는 요세부스와 플리니의 증거 때문에, 두 공동체를 동일시하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밀러 버로우스(Millar Burrows, The Dead Sea Scroll, pp.279-298)는 조심스럽게 두 공동체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에세네파와 쿰란 공동체의 정착지가 사해 서쪽으로 비슷하며, 재산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도덕적인 수준이 높고 공동체가 함게 예배를 드렸다는 점은 같지만, 두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상이하다. 쿰란 공동체는 여자들을 포함했으나 에세네파는 여자를 포함하지 않았다. 에세네파의 어떤 그룹은 자녀 생산을 위해 결혼을 허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세부스는 에세네파가 결혼을 금한 것으로 전한다. 이 사실은 에세네파의 여러 그룹이 떨어져 살았으며 어떤 그룹은 더 철저한 독신 생활을 하고 다른 그룹은 그렇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도한 쿰란 공동체는 짐승으로 드리는 희생 제사를 금하지 않은 반면, 에세네파는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바치지 않았다. 이처럼 쿰란 공동체와 에세네파 사이에 유사점도 있지만 두 공동체간의 차이가 명백하기 때문에, 두 공동체를 전적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가능한 결론은 쿰란 공동체가 에세네파의 여러 그룹 중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에세네파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비록 세례 요한의 외모나 생활상이 에세네파의 생활 습관과 비슷하긴 했지만,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예수님이 에세네파에 의해 수련을 받았다는 주장이 근거 없는 주장이라는 것도, 예수님의 적들이 예수님을 공격한 말로써 알 수 있다 :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며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눅7:33-34).
이제 쿰란에서 발굴된 문서들의 내용을 간략이 언급함으써 쿰란 공동체의 생활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① 공동체의 규율서(The Manual of Discipline)
② 다메섹 문서(The Damascus or Zadokite Document)
③ 하박국 주석(The Commentary on Habakkuk)
④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간의 전쟁(The War of the Sons of Light and the Sons of Darkness)
⑤ 감사의 시편(The Thanksgiving Psalms)
5) 열심당(The Zealots)
열심당을 영어의 음을 따라 셀롯당이라고도 한다. 신약성경에 열심당에 관한 언급은 예수님의 제자 중 “셀롯이라는 시몬”(눅6:15;행1:13)이 있었기 대문에 나타난다. 열심당은 바래사파나 사두개파와 같은 종교적 당파라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열심당은 열성적인 민족주의자들의 집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열심당은 마카비(Maccabees)의 진정한 정신적 후예들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기원은 사실상 로마 이전 기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파이퍼(Pfeiffer)는 “바리새인들이 하시딤(Hasidim)의 후예들인 것처럼 셀롯당은 마카비의 후예들이다”(R.H.Pfeiffer, History of New Testament Times with an Intorduction to the Apocrypha, p.36)라고 말했다. 이처럼 열심당의 기원을 마카비 시대로 잡을 수 있지만, 신약 내에서는 주후 6년에 이스라엘이 이방 황제에게 세금을 낼 수 없다고 항거한 갈릴리 유다의 사건이 열심당과 연루된 최초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참고. 행5:37).
요세부스(Josephus)는 열심당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열심당을 “강도들”, 혹은 “산적”으로 불렀다. 그 이유는 열심당이 “맹렬한 반로마주의자들이면서도 그들은 거의 다 로마인에게와 마찬가지로 유대 체계에 대해서, 즉 성직자 계급 제도와 부유한 귀족 계급들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었기”(F.F.burce, 신약사, 나용화역, P.128) 때문이다. 브루스는 셀롯당에 대한 그의 (요세부스)원한이 매우 날카로운 이유는 그들의 정책과 활동이 그와 그의 동료 귀족들이 중히 여기는 모든 특권들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것임을 그가 알았기 대문이었다”(Bruce, 상게서, p.128)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열심당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강도들이 될 수도 있고 애국자 집단이 될 수도 있다. 열심당들은 아무에게나 “주”라고 부르지 않고 외국 왕에게 세금내는 것을 거절했다. 그들은 토라(Torah)에 대해 열렬한 헌신을 했으며 토라를 위해서라면 생명까지 바쳐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친척의 고통이나 친구의 고난도 문제시하지 않을 만큼 열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명칭 “열심당”이 그 집단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2)유대인의 회당(Synagogue)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자주 가르치셨다(마4:23; 9:35; 13:54; 막1:21; 3:1; 눅4:15,16; 6:6; 13:10).
바울 사도 역시 전도 여행중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했다(행14:1; 17:1-3,17; 18:4,19,26; 24:12). 회당은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각 도시에 설립하여 유지하고 운영하였다. 예수님 당시엔 예수살렘과 갈릴리 지방에 많은 회당이 있었다고 전한다(I마카비5:21-23). 회당은 그 도시에 사는 유대인들의 사교 장소였으며 율법을 가르치고 조상의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수시키는 교육적인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회당은 성전의 대행 역할을 했는데 특히 성전과의 거리가 먼 지역에서는 회당을 지어 성전을 대신하여 이용한 것이다. 회당에서는 희생 제물 대신 율법을 연구했고 제사장 대신 율법학자(Rabbi)가 봉사했다.
각 회당마다 회당장이 있어(막5:22) 회당의 모든 순서를 진행시키며 어떤 문제가 있을 때는 회당장이 지도자 역할을 하고(눅13:13), 회당에 새로온 사람을 소개하는 일도 회당장이 맡았다(행13:15). 회당에서 건물과 기물을 관리하는 관리인이 있었는데, 그의 임무 중의 하나는 안식일의 시작과 종료를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 당시 산재해 있었던 회당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복음 전파의 장소로 사용되었고 바울 사도 역시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유대인들과 토론도 하였던 것이다(행13:5,15-43; 19:8). 이런 긴밀한 접촉으로 말미암아 회당에서 행해진 의식이 초대 교회의 예배 의식에 자연히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기독교의 예배가 처음에는 회당에서 행해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야고보 서신은 기독교회를 위해서 기록된 서신이다. 그런데 약 2:1-2은 기독교회가 회당에서 모인 것으로 암시하고 있다.
회당과 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설교를 한다는 점에서 서로 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유대인들이 기독교회의 복음을 계속적으로 용납지 않았기 대문에 교회와 회당은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은 서로 다른 궤도를 걷게 된 것이다.
결국 회당은 하나님의 섭리하에 교회의 시작을 도운 것뿐이다.
(3)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 사상
그들은 구약의 예언대로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갈릴리로부터 오시지 않고 베들레헴으로부터 오실 것을 알고 있었다(마2:5-12;요7:41-42). 그들은 메시야가 유대인의 왕이 될 것을 알고 있었으며(마2:2), 그가 이적을 행할 것도 알고 있었다(요7:31).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야가 예언자일 것과 (요4:29) 그가 신비스럽게 나타나실 것도 알고 있었다(요7:27). 그리고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계통에서 태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마9:27).
유대인들이 이처럼 구약에 나타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근본적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메시야 대망 사상은 왜곡되어 있었다. 유대9인들의 왜곡된 메시야 대망 사상은 다음과 같다.
ⅰ) 시간적인 왕을 대망함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수난의 종 대신에 일시적인 왕을 대망했다. 바울의 초기 생애 가운데서 읽을 수 있듯이(빌3장), 유대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죄에 대해 무감각했고 그들이 죄에서부터 구속함을 2받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들의 거침돌이 되었다(고전1:23;벧전2:8). 그들은 메시야가 수난의 종으로 오실 것을 생각지 못하고 오히려 일시적인 왕으로 오실 것을 대망하고 있었다. 수제자 베드로까지도 왜 그리스도가 죽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마16:21-25).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뜻을 이해할 수 있기까지는 삼년이란 세월이 걸린 것이다(요2:22). 따라서 그 당시 유대주의를 배운 대중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요12:32-34). 오늘 날도 그리스도와 유대인들을 분리시키고 있는 큰 원인은 십자가이며, 바로 이 십자가가 복음적 기독교와 현대 자유주의를 갈라 놓은 분기점이 되기도 한다.
ⅱ) 초월적인 능력의 사람을 대망함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성육신하실 것을 대망하지 못하고 초월적인 능력의 소유자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유일신 개념 때문에(참조. 신6:4), 그리스도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 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이같은 주장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중한 죄라고 생각했다(마26:63;막14:62-64;요5:17-18;10:32-36).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구속을 위해 지상으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지상에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점에서, 현대 유대주의와 자유주의 신학 사이에 비슷한 주장을 찾아 볼수 있다.
ⅲ) 국가적인 소망을 성취할 자를 대망함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심판을 선포할 사람을 대망하기보다 그들의 나라에 다윗왕과 솔로몬왕 시대같은 번영을 회복시킬 자를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은 물론 부활 이후에도 이같은 생각이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기까지는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올바른 뜻을 제자들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라고 질문한 제자들의 마음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스데반 그리고 바울 사도를 비난하면서 예수님과 그의 추종자들이 유대 백성과 유대인의 율법과 유대인의 성전을 반대한다고 주장했다(마26:61; 행6:13-14;21:28;25:8). 이와 같은 잘못된 견해는 유대인들이 구약의 선지자들의 글을 해석함에 있어서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들에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성전만이 타당한 예배의 처소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가르치셨다(요4:20-24;마27:51).
그리고 성전이 파괴될 것을 가르치셨다(마24:1-2). 예수님은 유대 백성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하므로 다른 백성이 그들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마21:43;참조.롬11:1-12), 유대인들이 율법의 의식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치셨다(막7:19;눅11:41).
ⅳ)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시킬 자를 대망함
유대인들은 영적인 구속주를 기다리기보다 그들을 로마의 통치에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 혁명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였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임금으로 세우려고 했다(요6:15). 예수님이 그들의 육체적인 필요을 채워 주시기 위해 이적을 행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들이 대망하고 있는 메시야가 바로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가졌던 잘못된 왕국 개념을 철저하게 배격 했으며(참조.행1:6),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에게 올바른 왕국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고(요3:1-12, 빌라도에게도 그의 왕국의 참다운 본질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다(요18:36).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이 지상에 오신 목적이 지상에서 그의 왕국을 설립하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지 않다(참조. 롬14:17). 이스라엘을 로마의 통치에서부터 해방시켜서 지역적인 왕국을 세우리라는 유대인들의 메시야관과 진정한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가르친 메시야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ⅴ) 유대인만을 위한 왕국 설립자를 대망함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설립할 왕국이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사상은 복음서 전반에 걸쳐서 찾아볼 수 있다. 세례 요한이 그가 세례 베푸는 곳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오는 것을 보고 꾸짖어 가로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7-9)고 했다. 세례요한이 이렇게 말한 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동적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다. 그들은 자기들이 참다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하셨다(요8:44). 예수님은 사역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유대인들이 그를 배척할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 대신에 이방인을 부르실 것이라고 천명하셨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그들의 메시야요 주님이신 예수님을 배척했을 때, 복음은 땅 위의 모든 백성들에게 전파되었다. 예수님께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은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8:11-12)하신 것은 바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될것을 뜻한다. 같은 뜻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21:43)하셨다.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은 그를 영접지 아니하였고,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1-12). 예수님의 오심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3:16). 그는 우리속의 양뿐만 아니라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을”(요10:16) 소유하고 계신다.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된다(마24:14). 그리스도는 승천하시기 전, 바로 이 사명을 교회에 주신 것이다(마28:18-20; 눅24:44-49;행1:8). 이처럼 그리스도는 유대인만을 위해 메시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구주로 오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구속 역사 가운데서 그들의 몫을 오해했기 때문에 메시야의 사명 역시 오해하게 되었다. 메시야는 유대인들이 상상한 것처럼 지상 왕국을 설립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신 것이 아니요,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4) 신약에 언급된 헤롯
신약성경을 읽어 본 사람은 누구나 헤롯이라는 이름을 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헤롯이라는 이름은 예수님의 사역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헤롯 왕이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헤롯이 어느 기사와 연관되었는지를 세부적으로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ⅰ) 헤롯 대왕( Herod the Great, 37-4 B.C.)
신약성경에 헤롯 대왕을 언급한 곳은 마2장과 눅1장뿐이다. 이 헤롯 대왕은 “유대인의 왕”이 나심을 조사하기 위해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과 관련되는데(마2:1-3),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로부터 그리스도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시리란 예언을 들은 그는, 그 지경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인 잔인한 왕이다(마2:13-18). 헤롯 대왕은 B.C. 4년에 죽었다(마2:19). 이 사실은 예수님의 탄생 연대를 비교적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왜냐하면 헤롯 대왕이 사망한 해는 B.C.4년이요, 헤롯의 사망 시기와 헤롯이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사건 사이에는 약간의 시간이 경과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참조.마2:14-15). 결국 예수님의 탄생 연대를 B.C.5년, 혹은 B.C.4년으로 정하게 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 연대는 로마의 통치자들의 연대를 기준으로 추정한 연대와 일치한다(참조. 눅2:1-7)
이상의 자료들은 예수님이 헤롯 대왕의 통치 시대에 탄생하신 것을 증거해 주는 것들이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그의 통치는 그의 아들들에 의해 분할 되었다.
ⅱ) 헤롯 아켈라오(Herod Archelaua, 4 B.C. - A.D. 6)
헤롯 아켈라오는 헤롯 대왕과 사마리아 여자 말다스(Malthace)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로서, 헤롯 대왕이 죽자 유대 지방의 분봉왕(ethnarch of Judaea) 으로 통치케 되었다. 신약성경에 그에 대해 언급된 곳은 예수님이 헤롯 대왕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올 때였다.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니라”(마2:21-22).
마태의 언급으로 미루어보아, 아켈라오 역시 그의 부친 헤롯 대왕처럼 성격이 포악한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ⅲ) 헤롯 빌립(Herod Philip, 4 B.C. - A.D.34)
헤롯 빌립은 헤롯 대왕과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나, 헤롯 대왕이 사망한 후 팔레스틴 동북쪽에 있는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통치했다. 헤롯 빌립은 다른 헤롯과는 달리 의롭고 위엄이 있는 사람이었다. 신약성경에 그의 이름에 직접 언급된 곳은 없지만, 마16:13의 “가이사랴 빌립보”를 헤롯 빌립이 설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헤롯 빌립은 막6:17에 기술된 헤로디아의 전 남편 빌립과는 다른 사람이다(참조. 마14:3). 헤로디아의 남편이었던 빌립은 헤롯 대왕과 마리암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ⅳ)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 B.C. 4 - A.D. 39)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헤롯이 바로 헤롯 안디바이다. 이 안디바는 헤롯 대왕과 사마리아 여자 말다스(Malthace)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헤롯 아켈라오의 동생이다. 이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Perea) 지방의 분봉왕으로, 예수님의 사역중 많은 충돌을 일으켰던 헤롯이다(눅3:1).
헤롯 안디바는 미신적인 사람이었고(마14:1-2), 여우처럼 간교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저 여우에게 이르라”고 말씀하셨다(눅13:32). 이 헤롯이 자기의 이복 형제 빌립(마14:3)의 아내 헤로디아를 가로챈 사람으로서, 이러한 부도덕을 세례 요한이 책망하자 그를 옥에 가두고 결국은 목베어 죽인 사람이다(마14:3-12). 요세부스(Josephys)는 “이제 유대인 중에 어떤 사람들은 헤롯 군대의 멸망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인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세례자(The Baptist)로 불리는 요한에게 행한 악한 일에 대한 심판으로 아주 타당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헤롯은 ‘유대인들에게 서로 의를 행하고, 하나님께 경건을 나타내는 덕을 행하며, 나와서 세례를 받도록 하라’고 명령한, 좋은 사람인 요한을 살해했기 때문이다”(Antiquities of the Jews, Bk.18,c.5,sec.2)라고 말했다. 예수님을 심문하는 데 관여한 헤롯이 바로 안디바였다. 그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 줄 착각하여 헤롯의 소관으로 여겨 예수님을 그에게 보냈다. 헤롯 안디바는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했다. 누가는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이 일로써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기술한다(눅23:1-12).
A.D.37년 로마 황제 가리굴라(Caesar Caligula)가 즉위하여 안디바의 원수인 헤롯 아그립바 Ⅰ세를 왕으로 세움으로써, 안디바는 그의 통치 시대의 막을 내렸다(참조.P.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Book 2, chap. 4.)
ⅴ) 헤롯 아그립바 Ⅰ세(Herod Agrippa I, A.D. 37-44)
헤롯 아그립바 Ⅰ세는 아리스토부러스와 버니스(Bernice)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로마에서 그라우디오(행11:28)와 같이 교육을 받았으며 또한 갈리굴라와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는 한때, 차기 로마 황제는 갈리굴라가 되어야한다는 말을 한 까닭에 당시 로마 황제였던 디베료에 의해 옥에 갇히었다. 그러나 디베료가 곧 죽고 갈리굴라가 황제위에 오르자, 그는 풀려나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받았다.
갈리굴라가 A.D.41년에 살해되자 아그립바Ⅰ세는 글라우디오의 황제 옹립을 적극 지원했고, 위(位)에 오른 글라우디오는 아그립바Ⅰ세에게 이미 통치하고 있던 지역외에 유대와 사라리아를 그의 관할로 줌으로써, 헤롯 대왕이 통치했던 모든 영역이 아그립바Ⅰ세 때에 다시 통합되었다.
헤롯 아그립바Ⅰ세에 대해 신약성경에 나타난 기록은 행 12장에서 찾아볼수 있다. 그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으며(행12:2), 베드로를 옥에 가두고 죽이려 했으나, 주의 사자가 막으셨으므로 그 일을 성취하지 못했다(행12:3-17). 이 사건으로 인해 옥졸들이 헤롯 아그립바Ⅰ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아그립바는 이 처럼 기독교를 심히 핍박한 왕이었으나, 그의 종말의 비참함은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행12:23)라는 누가의 기록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ⅵ) 헤롯 아그립바Ⅱ세 (Herod Agrippa Ⅱ, A.D. 48-100)
헤롯 아그립바Ⅱ세는 헤롯 아그립바Ⅰ세와 키프로스(Cypros)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헤롯 아그립바 Ⅰ세가 죽을 당시 그는 나이가 너무 어렸었기 때문에,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는 즉시 왕위을 그에게 계승시키지 않고 그의 삼촌으로 대리 통치하게 하다가 그의 삼촌(King of Chalcis)이 죽자 헤롯 아그립바Ⅱ세를 왕으로 임명했다.
헤롯 아그립바Ⅱ세에 대해 성경에 나타난 기록은 행25-26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울 사도는 그를 “왕”라고 불렀으며 그가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안다고 말했다(행26:2-3). 이에 대해 헤롯 아그립바 Ⅱ세 앞에서, 자신이 전한 죽은 자의 부활은 너무도 명백한 것인데 그 이유는 자기가 핍박한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자기에게 직접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증거했다(행26:4-23). 이에 대해 헤롯 아그립바 Ⅱ세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26:28)하면서, 바울이 무죄라는 사실을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다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행26:32)라는 말로 증거했다.
이상 여섯 사람의 헤롯 왕 중 헤롯 대왕(마2:1-3;눅1:5), 헤롯 아켈라오(마2:21-22), 헤롯 안디바(눅3:1;13:32;23:1-12;마14:1-2,3-12), 헤롯 아그립바Ⅰ세(행12:2,3-17,23), 헤롯 아그립바Ⅱ세(행25장,26:2-3,4-23,28)등은 신약성경에 직접 언급되어 있으나, 헤롯 빌립만은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이들의 통치중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헤롯 대왕 당시 예수님이 탄생하셨으며, 갓난 어린이들의 학살이 있었으며(마2:13-18), 헤롯 안디바 통치하에서는 세례 요한이 목베임을 당했고 예수님이 심판 받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 그리고 헤롯 아그립바Ⅰ세의 통치하에서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당했으며(행12:2), 베드로가 옥에 갇힘을 당했다(행12:3-17). 헤롯 아그립바Ⅱ세의 통치하에서는 바울 사도가 심문을 받고(행26:2-23) 비록 로마에서 순교하긴 했지만 헤롯 아그립바 통치 기간이 A.D.100년까지인 것으로 보아 바울과 베드로의 순교도 헤롯 아그립바Ⅱ세가 권좌에 있을 때 일어난 것이다.
<< 복음서를 읽을때 유의해야 할 사항 >>
첫째, 각 복음서의 특징에 유의해야 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복음서에는 서로 공통되는 특징과 다른 특징들이 있다. 네 복음서중 가장 현저한 특징을 나타내는 복음서가 요한복음이다. 나머지 세복음서들은 사건들이 거의 같은 전망에서 보았다고 생각하여 공관복음이라고 부른다.
둘째, 각 복음서의 기록 목적에 유의해야 한다.
어떤 복음서는 기록 목적을 분명히 기술하는 반면, 다른 복음서는 함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나사렛 예수임을 증거하기 위해 기록된 것으로, 그 기록 목적이 복음서 안에 함축적으로 나타난다. 누가는 그의 저술 목적을 눅1:1-4에 명백하게 기록했고, 요한은 요20:31에 기록하였다.
세째, 각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전기(傳記)가 아니라는 점
에유의해야 한다.
저자들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자신들의 앞에 있는 모든 자료를 선별적으로 사용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성육신부터 공생애에 이르는 동안까지의 기록은 전혀 없다. 이 기간 동안에 있었던 사건으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기록은 오직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행 뿐이다. (눅2:41-50)
네째, 복음서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강조해서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각 복음서들은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요한복음은 12장-21장까지, 거의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할애하여 예수님의 수난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다섯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누차
말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공생애 시작부터 십자가를 향한 사역임을 분명히 아셨다. 공생애 초기에 사단이 예수님을 방문한 사실 역시 예수님의 사역이 어떠한 사역인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다(마16:21-23;17:22-23;20:17-19).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때에 관해 자주 언급하셨는데, 바로 십자가 사건을 예견(豫見)하신 말씀이다. 이런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음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다.
여섯째, 각 복음서에 나타난 차이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차이점을 조화시키면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더 명백히 알 수 있다. 세대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지상의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오셨는데, 마11:28-29에 가서 그의 목적을 변경시켜 새로운 메시지를 선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잘못된 개념은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가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와 다르다는 전제하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하늘나라와 하나님나라를 교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두 단어에는 의미상의 차이가 전혀 없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의식하고 기록했기 때문에 “하나님나라”보다는 “하늘나라”를 더 많이 사용하였는데, 다른 복음서는 개념이 더 명백한 “하나님나라”를 더 많이 사용하였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마태가 “하나님나라”대신 “하늘나라”를 더 많이 사용한 이유는,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가리킬 때 “야웨”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 이름을 감히 사용할 수 없어 “아도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처럼 각 복음서의 치이점을 서로 조화시키면 예수님의 생애는 물론, 예수님의 교훈의 깊은 의미를 더 명백히 알 수 있다.
일곱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전과 이후의 차이에 유의해
야 한다.
(1)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전에는 모세의 의식적인 율법이 준수되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후에는 모세의 의식적인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더 이상 그것을 준수할 필요가 없어졌다. 세례 요한은 할례를 받았으며(눅1:59), 예수님도 할례를 받았다(눅2:21-24). 그리스도는 백성들이 특정한 모세의 의식을 지킬 수 있도록 그들을 제사장에게 보냈었다(눅5:14;17:14). 이는 그리스도가 율법 아래 태어났기 때문이었다(갈4:4).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후에는 의식적인 율법을 포함한 구약의 모든 율법이 성취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실 때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사건이 이를 증명한다(마27:51).
(2)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전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그가 받을 십자가 고난과 그후에 있을 부활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마16:21). 그래서 베드로는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약속처럼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가르친 모든 것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요15:26;16:13).
<< 4복음서의 이해를 돕기 위한 지침 >>
1. 마태복음
1. 예언 성취에 대한 강조
마태복음에는 구약 인용 구절이 130여 가량 수록되었다. 이렇게 마태복음에 구약의 인용이 많은 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리스도 당시 사건을 통해 특별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와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등의 표현은, 구약의 예언이 신약시대에 성취된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동정녀에 의해 탄생한 사실이나, 애굽으로 피난한 일이나, 나사렛에서 거하신 일, 갈릴리에서 전도하신 일, 고난당하신 일, 십자가에 달리신 일등은,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의 생애에서 성취된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마태복음은 나사렛 예수가 오래 전부터 약속된 메시야 인것을 천명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스라엘을 위한 것임을 강조
(1) 그리스도의 오심은 구약 예언의 성취로 인한 것이다(마1:23;2:6).
(2) 그리스도의 오심이 특별한 때에 이루어졌다(마2:1;3:1).
(3) 다윗의 위(位)에 오를 수 있는 바른 계보(系譜)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나셨다(마1:1-7;참조.눅1:32-33).
(4)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다윗의 주가 되신다(마22:41-46).
(5) 마태복음에는 팔레스틴의 지리에 관한 설명이 없다. 왜냐하면, 마태는 독자들이 팔레스틴 지역의 지리를 잘 알고 있을 것을 전제하고 기록했기 때문이다(마15:1,2).같은 공관복음이라도 마가는 팔레스틴의 지리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막7:3,4). 이같은 사실도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의식하고 기록된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6)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 보내심을 받으셨다(마15:24).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는 구절은 마태복음에서만 찾을 수 있는 내용이다.
(7) 그리스도가 다읫의 자손(the Son of David)임을 강조함.
(8)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의식하고 기록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마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 대신 “천국”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3. 교회에 대한 강조
네 복음서중 특별히 마태복음에서만 ‘교회’라는 명칭이 언급된다. 교회라는 명칭이 이스라엘을 강조한 마태복음에 유일하게 언급되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생각될 수있지만, 마태복음엔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리라는 전망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복음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 보편적으로 전파될 것이 명백히 나타난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를 위해 사용될 교회의 명칭이 유대인을 강조한 마태복음에 언급되었어도 하등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설립하실 의도를 가지고 제자들을 모으고 사역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는 귀중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4. 복음의 보편성에 대한 강조
(1) 유대인들이 복음을 배척함
(2) 이방인을 부르심
5. 마태복음 기록의 조직적인 면
(1) 메시야로서 예수님께서 오심(마1-2장)
(2) 메시야의 사역(마3-25장)
1> 서술체:갈릴리에서 사역의 시작(3:1-4:25)
담화체:산상보훈(5:1-7:29)
2> 서술체:예수님의 사역의 권위(8:1-9:35)
담화체:열 두 제자를 파송함(9:36-10:42)
3> 서술체:왕국과 왕국의 오심(11:1-12:50)
담화체:왕국의 비유(13:1-52)
4> 서술체:새로운 공동체의 생활(13:53-17:27)
담화체:큰자와 책임감(18:1-35)
5> 서술체:충돌과 완성(19:1-24:3)
담화체:마지막 때의 계시(24:4-25:46)
(3) 메시야의 수난과 승귀(마26-28장)
2.마가복음
1. 마가복음의 특징
(1) 베드로의 성급한 성격이 언급된다. 이것은 베드로와 마가의 사이가 친밀하였으므로 가능한 결과이다.
(2) 사건이 급하게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급하게 전환된
다. “즉시로”라는 단어가 43회 나타난다. 이 수자는 마가복음을 제외한 신약전체에서 사용된 수자보다 많은 것이다.
(3) 마가복음은 세부적인 것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더 자세하게 장면을 소개한다. 예를 들면, 오병이어의 이적에 대해 기술할때, 마태는 “무리를 명하여 잔디위에 앉히시고”(마14:29)라고 그 정황을 설명했지만, 마가는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막6:39)라고 잔디의 푸르름을 더 상세히 묘사한다. 잔디가 어떤 잔디였는지는 마가복음을 읽을 때에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세 번 부인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도 마태복음에는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26:34,75;눅22:34참조)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마가복음에는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막14:30)고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는 태도도 다른 복음서들보다 마가복음이 더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다른 복음서에는 “당돌히”라는 말이 없으나, 마가복음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당돌히’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막15:43)라고 기술하고 있다.
(4)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에 주안점을 두고 그것을 기술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행동들에 주의를 집중시켜 묘사한다. 이와는 달리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다룬다.
2. 마가복음에서 강조된 신학적 요소
(1) 예수님의 인성이 강조되어 있다.
(2) 제자가 되는 길의 희생이 강조되어 있다.
(3) 예수님의 메시야직이 감추어져 있다.
3. 마가복음 내용 개관
(1) 첫째부분(막1:2-13)은 서론적인 부분이다. 이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역의 준비적인 기사들이 기록되어 있다.마가는 예수님의 이 기간의 생애를 마태나 누가보다 훨씬 더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세례요한의 선포나 예수님의 시험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의 신분이 강조되어 있다.
(2) 둘째 부분(막1:14-5:43)은 예수님의 권위에 강조를 두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람의 아들임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3) 세째 부분(막6:1-8:26)에서는 예수님의 교훈과 이적 행하심이 계속되고, 예수님의 무리들에 대한 연민,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 어려운 질문들에 지혜롭게 대답하시는 일 등이 무리들의 무분별하고 탐욕스런 태도와 잘 대조를 이루고 있다.
(4) 네째 부분(막8:27-10:31)은 예수님의 가이사랴 빌립보 사역으로 시작된다. 마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마찬가지로(마16:13이하), 이 시점을 예수님의 사역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취급한다.
(5) 다섯째 부분(막10:32-13:37)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여정과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기술한다.
(6) 여섯째 부분(막14:1-15:47)은 예수님이 당하신 수난의 여정을 기록한다. 이 기간 동안의 기록은 다른 기간의 생애에 관한 기록보다 더 생생하고 더 순서적이다.
(7) 마지막 부분(막16:1-20)은 예수님의 부활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그리고 전도 명령을 주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3. 누가복음
1. 누가복음의 특징
(1) 누가복음의 처음 네 절에 나타난 바 대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고자 하였다. 누가는 다른 사람의 글도 인정했지만, 자기 자신은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눅1:3)후에 기록한다고 말한다.
(2) 누가는 예수를 따르는 일이 사생 결단을 요하는 문제가 되는 시대에 자신이 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3) 누가는 기독교 진리가 신빙성 있는 사건에 의존할 때에만 계속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역사적 사건을 정확히 서술하였다. 복음서의 기록은 시공간의 영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의 기록이다. 사실상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의 몸이 인간의 몸이 아니요 유령과 같았으며, 따라서 예수는 수난을 경험할 수 없었다는 거짓된 교훈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것이었다. 누가복음 서두에 나타난 누가의 의도는 교회의 선포가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음을 확실하게 규명하는 것이다(눅1:1-4).
(4) 누가는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 요한의 탄생 기사를 상세히 다루며,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5)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능하고, 세상의 주권적인 구주이심을 묘사하고 있다.
2. 누가복음의 내용 개관
누가복음의 내용은 마태복음,마가복음과 거의 비슷하므로 생략한다.
4. 요한복음
1. 사도 요한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후, 요한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봉사하게 된다. 그는 예수를 따르기 전에 세례 요한을 따랐다. 야고보의 동생이며, 감정이 속히 고조되는 사람들이어서 “우뢰의 아들들”이라고 불렸다.
초대 교회 문헌의 증거에 따르면, 요한은 에베소로 가서 몇 해를 살다가 도미티안 통치때(A.D.81-96), 밧모섬으로 추방되었으며, 네르바(Nerva)때에 에베소로 돌아오도록 허용되었다. 그리고 트랴얀(Trajan)통치때 나이 많아 사망한 것 같다.
2. 요한복음의 특징
(1)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과 말씀에 대한 기록이 많다. 전체 기록 중 약 90%가 다른 복음서엔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5,000명을 먹이신 일과 바다 위로 걸으신 사건(요6:1-21)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의 심판, 십자가 처형,부활(18-22장)에 이르기 까지 공통된 기록이 거의 없다. 나사로의 부활(요11장)은 요한복음에 의해서만 알려진 사건 기록의 대표적인 예이다.
(2) 요한복음은 예수님 생애의 연대를 공관복음보다 더 구체적으로 제공한다. 요한복음은 공생애 동안에 그리스도가 적어도 세 번의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참석하신 것으로 기록한다. (2:13;6:4;11:55) 요5:1의 “유대인의 명절”이 유월절인지, 혹은 다른 유대절기인지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을 제외하고라도, 예수님이 유월절 참석차 예루살렘에 세 번 올라가신 것이 확실하다. 유월절 참석을 위한 마지막 여행은 죽음을 앞두고 이루어졌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참석한 유월절만 기록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 기간을 공관복음보다 더 길게 묘사하고 있다.
(3) 4복음서중 요한복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가장 많이 강조한다. 요12장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록한 이후, 요한복음은 계속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바로 이전의 사건들과 부활 후의 사건들을 기록한다(요12-22장). 요한복음의 약 절반 정도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계된 약3주간 동안의 일들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4) 요한복음은 이적을 “표적”이라고 부른다. 이 사실은 이적에 영적인 의미가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3즉, 5,000명을 먹이신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요6장)임을 가르친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바리새인이 영적인 소경임을 가르친다(요9:39-41). 나사로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임을 가르친다(요11:25). 요한은 사람들에게(20:31) 예수가 메시야임을 믿게 하기 위해 이러한 표적들을 기록했다고 말한다.
(5) 요한복음은 그리스도 사역의 예정론적인 면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특정한 시간을 향해서 행하셨다.
(6) 요한복음은 성령에 관한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록한다. 요14장-16장에서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죽음과 성령을 보내시는 사건을 직결시켜 설명한다.
(7) 요한복음은 특별한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빛(light), 생명(life), 어두움(darkness), 심판(judgment), 때(hour), 믿는다(believe)등이 계속 나타난다 공관복음서나 신약의 다른 곳에서 많이 나타나는 믿음(faith)이란 명사가 요한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 믿는다(believe)라는 동사가 요한복음에 90회이상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복음에 깊은 영적, 신학적 배경이 있음을 알려 준다.
(8)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영적 속성을 묘사하는 표현을 쓴다.
[I am]구절, 그리스도는 「문(door)」,「선한 목자(good shepherd)」, 「부활과 생명」, 「참 포도나무」, 「길, 진리, 생명」, 「생명의 떡」 이런 용어들이 그리스도의 영적 속성을 나타내 준다.
(9)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처음부터 인간 구원에 목적을 두고 있음을 보여 준다.
(10) 예수님의 탄생 기사, 세례, 시험, 변화산 기사., 비유 교훈, 성만찬 제정 등이 요한복음에 나타나지 않는다.
(11) 요한은 예수님의 유대 지방에서의 사역을 설명한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기록을 통해 공관복음서를 더 잘 이해 하게 된다. 예수님이 왜 갈릴리에 가셔서 사역했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대답도 요한의 기록을 통해 나타나는데, 요한은 유대 사역중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3. 왕 자신을 강조한 요한복음
(1) 공관복음은 왕국에 관해 강조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왕자신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2) 요한복음은 서두에서부터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강조한다. 그리고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서 일하신 것을 묘사한다. 요한복음은 또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영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3) 요한복음은 그리스도(말씀)의 선재의 영광을 묘사한다.(요1:1-14)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신약신학! 신약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신약에 나타난 기독론, 구원론, 성령론, 종말론 (0) | 2017.04.27 |
---|---|
[스크랩] 30분 만에 끝나는 고속 - 성경개요 (0) | 2017.04.15 |
[스크랩] 신약성경 주요 내용정리 (0) | 2017.01.22 |
[스크랩] 신양성경 총정리 (0) | 2016.09.26 |
[스크랩] 에스라성경강좌150회(요약) (0) | 2016.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