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으라고만 하지말고 믿을 내용의 설교를 주라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것을 한 마디로 하자면 어떻게 될까? 여러 가지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적당한 말은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하신 모든 일이 나를 위함인 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가 오기 전과 후의 모든 성경 내용은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신자는 그리스도가 하신 일 덕분에 사는 존재들이다.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승천까지 모든 과정이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의미를 잘 알아서 대가를 누릴 수 있어야 구원받은 삶은 실제적인 경험으로 나타나게 된다. 설교자라면 이 분야에서 전문가이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복을 받아 가지겠다는 생각은 단지 종교심이다. 만약 기도이건 선행이건 그것을 함으로 그 수고로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자.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선물이 아니라 대가이다.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 열심히 하는 만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상 대개 설교자들이 이렇게 가르친다. 이것은 순수하게 율법적인 믿음이다. 그리고 일단 신앙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계속 더 열심히 더 열심히 하는 방법 밖에 없기 때문이다.
율법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잘못이 없다. 단지 인간이 율법의 용도가 무엇인지 모르고 따르기에 율법적인 믿음에 빠진다. 이 믿음대로 하면 온통 보상심리에 잡혀서 살게 된다. 기도했으니 봉사했으니 바쳤으니 주십시오. 그러자니 그리스도의 공로는 의미가 퇴색된다. 그의 공로로만 구원을 얻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개신교 신앙원리의 가장 중요한 면에 들어간다. 성경 전체가 말씀하는 내용은 곧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오직 믿음"이란 구호가 명백해 지는 것이다. 복 받으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거저 받으라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일, 죄의 사함과 성화의 권능을 받는 일, 매일의 삶 속에서 승리와 능력을 경험하는 일, 그 모두가 다 그리스도가 해주셨다고 믿어야만 내 것으로 경험이 되기 시작한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나머지는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모두 그리스도가 해주신 것이다.
누구나 믿음 믿음 하지만 정작 무엇을 믿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무조건 될 줄 믿습니다." "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외치는데 여기에는 보장이 없다. 제 맘대로 믿기 때문이다. 믿음에는 믿을 내용이 따른다. 설교자는 믿을 내용을 주어야 한다. 믿음은 지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게 해 주신 일들에 관한 지식"에서 출발한다.(기독교강요 3.2.6) 그 지식이 없이는 믿을 내용도 없다. 그 지식을 많이 알고 믿는다면 엄청난 능력이 수반된다.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 일들을 안다면 내가 어떤 존재로 바뀌었는지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과 행위를 따로 떼어놓고 둘 다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행위가 곧 믿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주위에서 믿음 좋은 사람이 누구인가? 열심히 교회 나오고 봉사 잘하고 기도 많이 하고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이 믿음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니 행위가 좋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다.
그러므로 믿음 이야기를 할 때는 언제나 행동하라는 말을 강조하게 된다. "열심히 하십시오. 봉사 잘하십시오. 기도 많이 하십시오. 성령 충만 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고 그저 하라는 설교만 계속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식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인용해도 율법적인 설교이다.
행위만을 보고서는 절대로 믿음을 판단할 수 없다. 행위가 곧 믿음이라고 한다면 간디나 공자 같은 분들은 구원을 받았어야 한다. 실제로 그렇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이해가 아니다. 인간의 눈에 행위가 아무리 완전해도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를 받지 않으신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 나타나는 차원 높은 윤리를 자신의 힘으로는 행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선행을 원해도 힘이 없다고 탄식한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인데 아무리 선행하라고 해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본성부터 수준 이하이다. 이성을 향해서 간음을 안하고 살인을 안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성을 참으로 자매처럼 형제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가? 내 원수를 향해 순수한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가? 이 수준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그러나 사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럴 수 있었다.
인간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의 원인은 바로 이러한 죄성이다. 모두 악하기에 그리고 하나님을 떠났기에 괴로운 것이다. 세상에 올바로 되어 복받을 인간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선포한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런 상황에 있는 인간들이 어떻게 선행을 통해서 자기 힘으로 구원이나 복을 받겠는가!
그래서 복음이 필요한 것이다. 복된 소식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그 수준의 의를 행해 주었으니 그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을 모셔들여서 한 몸을 이루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공로가 다 내 것이 되고 그의 능력이 다 내 힘이 된다는 기가막힌 소식이 아닌가!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믿으라고 하지만 말고 믿을 내용을 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 믿음이 곧 행동으로 나타난다. 누가 멋진 의복을 두고 누더기를 입을 것인가? 누가 아름다운 음식을 두고 쓰레기통을 뒤지겠는가? 믿을 내용을 주자. 그러면 믿는다. 그것도 없이 믿으라고 외치는 것도 율법적인 설교이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말하라. "주께서 내 속에 계심을 믿으십시오." "그 분의 능력이 내 능력임을 믿으십시오." "그 분이 항상 돌보시는 것을 믿으십시오." "내 몸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요 내가 작은 그리스도임을 믿으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니 내 속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재미있게 잘 설명해 주는 것이 설교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복음의 내용이 자리 잡아서 생각이 바뀌게 하라.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자꾸 복음적인 말씀을 받으면 예수나 바울처럼 믿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러려면 설교자부터 의식구조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설교하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설득시키라. 그러면 확신이 선다. 그리고 복음의 경험이 일어난다. 그 경험을 예화로 말하게 된다.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은 확신이다. 복음적 확신의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하늘의 재산이다.
복음을 설교하라
"복음을 설교하라" 말하기는 쉽다. 누구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천은 쉬운 게 아니다. 설교자의 사명이 무엇인가? 예배시간에 신자들이 재미있게 듣고 감동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복음을 깨닫게 해야 한다. 듣고 중생해서 그 내용대로 살게 만드는 엄청난 책임을 가진다.
그렇게만 한다면 삶의 모든 분야는 변화를 볼 것이다.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오히려 힘이 없게 보일지 모른다. 율법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훨씬 쉽고 강력할지 모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복음의 능력은 근본을 변화시킨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랑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힘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인간은 죄 속에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한 번 더 태어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가 사해지고 그로 인한 모든 저주가 그쳤음과,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과 능력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설명해야 한다. 이 둘은 날마다 시간마다 확인되어야 한다.
이 복음의 능력이 개인의 삶에서부터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의식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분명히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하나님 자녀의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작은 예수의 삶이 된다.
복음의 요소
복음의 요소를 한 번 더 살펴 보자. 이미 여러 번 앞에서 말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을 말한다. 그 내용이 곧 복음이다. 그것을 들은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대로 받아들여야겠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게 된다. 그러면 그 내용이 모두 자기 것이 된다.
설교자는 그 내용을 늘 생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삶 속에서 사용하고 적용해 보아야 한다. 구원받은 뒤에 성화는 자기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힘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사랑도 희생도 당당한 삶도 아름다운 삶도 오직 내 안에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을 때 나온다.
칼빈은 구원을 세 요소로 나누었다. 택하심과 사죄, 그리고 회개이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고 죄의 대가를 지불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회개를 통해 성령으로 중생하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선택되었음을 믿음으로 구원은 반석 위에 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택함 받았다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힘있게 부르짖는다. 유대인은 외형적인 선민의식 하나로 수천 년 동안 민족적 동일성을 유지했다. 선택의 교리는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더욱 큰 힘을 공급한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죄 속에 그냥 두지 않으시고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래서 그의 보혈로 구속하신 것이다.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죄를 얻게 되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죄로 인해 심판과 저주를 면할 수 없게 되었었는데!
선택의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 신자라 하더라도 회개와 중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한 평생 살면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에 영원히 지옥에 떨어진다면 이처럼 무서운 일이 어디 있는가! 무엇보다도 급한 것은 심판을 면하는 일이요 세상에서도 죄의식을 극복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풍조가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이 점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신자들도 자칫 세상일만 크게 보고 하나님께 관련된 이 구원의 일을 중히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과거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깨끗이 용서받았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를 그의 음성으로 부르시고 부르신 자에게 그리스도의 공로를 입혀 실제로 그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죄를 사해주심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녀 삼으심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 둘은 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로 삼으심은 더 높은 차원의 축복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기 위해 예수의 보혈로 죄를 속해주셨다. 그래서 우리의 수치를 덮고 저주를 제거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다시 낳아주셔서 본성을 바꾸신다. 옛사람이 죽고 회개한 새사람이 다시 나서 하나님이 주신 새 삶의 능력을 조금씩 맛보며 자라가게 하신다.
복음은 이 일을 하나님이 다 이루어주시고 우리 속에서 일어나도록 돕고 계심을 알려준다. 신자의 삶은 자기 힘으로 살 때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택함은 물론, 속죄함도 그렇다. 하나님이 다 행해 주신 것이다. 그러면 신자로서의 권능의 삶은 어떤가?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서 도우신다.
설교자는 하나님이 주신 복된 소식의 내용을 전하는 사람이다. 이 소식을 듣고 깨달은 사람은 돌이킬 수밖에 없다. 너무도 비참한 자신에게 너무도 좋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듣지 않기 때문에 설교자는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재미있게 만든다. 하지만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는 게 의무이다.
이 엄청난 구원사업의 핵심을 설교자가 맡은 것이다. 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례의 사역을 바른
교회의 특성으로 설파했다. 그리고 권징 곧 훈련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도록 만든다. 목사의 직책은 이 일의 중심에 서서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온 교회는 목사의 이 일을 도와야 한다.
말씀 사역은 복음의 이 모든 내용을 하나님의 힘으로 이행하게 만든다. 그저 예배에서 설교 잘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된다. 말씀 사역은 교회의 전체 방향, 신자의 훈련을 포함한다. 교회 생활 전체를 복음의 힘으로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적인 말씀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복음적 설교 논지 훈련
설교를 작성하다 보면 하나님의 복음보다는 다른 것들을 논지로 삼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말씀, 그것도 복된 소식을 기준으로 삼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이 회개, 개혁, 선교, 사회 정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신자라면 정치, 경제, 사회 등 삶의 제 분야가 다 하나님의 복음을 기준으로 삼아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들의 논지를 보자.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자." "어려울 때일수록 힘을 내자." "가난한 이웃을 돕자." "기도해서 능력을 받자." "삶의 목표를 바로 세우자." 얼마든지 복음과는 거리가 먼 논지를 볼 수 있다. 아무리 고상한 말을 해도 예수가 해 주신 일을 힘입지 않으면 자기 힘으로 행해야 할 것이다.
다시 여기 몇 개의 학생들의 논지를 살펴 보자. "예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자." "치료자이신 예수 믿고 건강하게 살자."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은 우리를 이기게 하신다." 이 정도라도 논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대단히 훌륭한 편이다. 앞에 것들보다 복음에 많이 접근한 것도 사실이다.
모두가 긍정적이고 신앙적인 논지이다. 예수의 이름도 들어가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내용이 삶에 적용되려면 그 사이에 들어갈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다. 그것이 없이 그냥 막연히 하나님 또는 예수님이 도와주시니 된다는 식으로 할 수 있을까?
그러면 하나님이나 예수 대신 부처님이나 조상신의 이름을 넣어 보라. "부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자." "치료자이신 부처님을 믿고 건강하게 살자." "부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자." "부처님은 우리를 이기게 하신다." 절에서 이 설교를 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기독교의 설교인가?
절에서 이 설교를 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수양과 덕과 노력에 의해서 얻으라는 말이다. 자신의 힘으로 하는 데에는 부처나 예수나 아무 차이가 없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과 힘으로 복을 누리려면 절대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이미 완성하신 일들을 선물로 받아야 된다.
예수 안에 있는 안식, 치료, 능력 등은 반드시 예수가 이미 행하셨음을 알고 믿음으로 얻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반드시 복된 소식을 아는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믿음이란 그 내용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원동력이 된다면 정말로 믿음의 사람이 된다. 그것으로 앞의 논지를 손질해 보자.
"평안 자체이신 그리스도가 자기 속에 계심을 아는 자는 항상 안식한다." "예수께서 채찍을 맞아 병을 담당했으니 병의 억압에서 자유롭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는 그의 능력도 받은 자다."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도 누리자." 여기 그리스도가 하신 일과 우리의 할 일이 나타난다. 믿고 일어나는 것이다.
얼핏 보면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힘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계속 그렇게 듣게 된다면 점점 주의 힘으로 살고 자기 자랑은 줄어 들어갈 것이다. 앞의 학생들의 논지들이 잘못된 게 아니다. 좀 더 명확하게 하여 그리스도가 해주신 일을 누리게 만들자는 것이다.
설교할때 비언어적 요소를 활용하라
많은 설교자들은 주로 내용에만 집중한다. 특히 한국 설교자들은 음성이나 표정, 제스츄어등에 대해 거의 훈련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청중의 감정과 잘 맞아지지 않으면 전달은 반드시 실패한다. 비언어적 요소가 설교의 이해를 열 배 이상 강화시켜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설교하는 이라면 누구나 청중이 많이 모이는 큰 교회 설교자들을 연구해 보았을 것이다. 대체로 그 소감이 무엇인가? 명성에 비해 내용이 너무 없다고 말한다. 복음적이지도 않고 뭐하나 새로운 것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교 내용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의 비언어적인 요소를 보게 된다. 비언어라 하면 말을 제외한 모든 것이다. 표정이나 음성, 손발의 움직임, 당시 상황, 분위기 심지어는 중단하고 있을 동안의 고요함 등이다. 대설교가들은 누구나 다 이 분야에 굉장한 실력자들이다. 그러지 않고는 절대로 감동적인 설교자가 될 수 없다.
1. 비언어적 전달법의 우월성
자 설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해 보라. 원고를 기가 막히게 감동적으로 잘 준비한다. 강대상에 올라가서는 청중을 보지 말고, 아무런 동작도 하지 말고, 감정도 가능하면 자제한다. 그리고는 원고만 정확하게 또박또박 읽는다. 여기서 최대로 신경을 쓸 것은 내용의 전달이다. 물론 내용은 재미있고 좋은 것이어야 한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를 살펴본 사람의 말이다. "옆과 이야기하는 사람, 몸을 뒤척이는 사람, 두리번거리는 사람, 화장실에 갔다오는 사람, 주보를 뒤적이는 사람, 핸드백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로 거의가 청취에 관심을 갖지 못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제대로 청취가 되지 않았다.
연구한 사람들의 결론은 이것이다. "설교하는 사람의 비언어적 요소가 줄어들수록 청중의 비언어적 요소는 늘어난다." 무슨 뜻인가? 그냥 말로만 설교하면 듣는 사람들은 흥미를 잃는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모두 딴 짓을 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설교란 언어적인 방법으로만은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이 분명해진다.
버드휘스템은 인간을 "다감각적 존재"(multisensorial being)로 보았다. 인간은 언어에 의해서만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중이 다 감각적임을 느끼고 있는 설교자는 그 모든 감각이 한꺼번에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분위기를 만들 것이다. 사람들을 끄는 설교자는 이것이 몸에 배있다.
버드휘스템이 한 연구에 의하면 보통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 말을 통해서는 35%이하 밖에 의사가 전달되지 않는다. 나머지 65%는 비언어적인 형태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언어전달의 거의 두 배 정도나 된다. 일대 일 대화가 아닌 여러 사람을 상대로 할 때는 비언어적인 요소가 힘을 더 쓰게 된다.
한 사람이 보통 하루에 말하는 시간은 합쳐봐야 10분에서 11분 정도라고 한다. 한 문장 말하는데 2초반 밖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언어 외에도 외모, 복장, 몸짓, 음성, 돌연한 행동과 그 결과 등에 의사소통을 더 의존하고 있다. 즉 감각, 무의식, 직관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언어보다는 비언어적 요소들을 사람들은 더 믿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들뜬 음성과 불안한 얼굴로 "여러분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확실하게 돌보십니다" 한다면 어떨까? 분명히 말한 내용은 진리이지만 사람들은 말한 사람의 음성과 표정을 믿어 버린다.
심리학자 알버트 메라비안 (Albert Mehrabian)은 언어적 요소와 비언어적 요소의 의사소통의 효과를 공식으로 만들었다. 전체 커뮤니케이션의 7퍼센트만이 연사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38퍼센트는 음성, 55퍼센트는 표정에 의해서 된다. 그러니 아무리 해도 말만으로는 십분의 일의 효과도 내지 못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설교자는 비언어적인 요소를 개발시켜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청중의 감정이 열리도록 분위기를 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마음이 열리게 만들면 무슨 말이든 경청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감정이 열렸을 때 설교자는 결단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안 그러면 속이는 자다.
똑같은 음악회라도 애인과 함께 들으면 환상적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인사치례로 갔다면 빨리 끝나기만 기다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설교도 설교자의 전체를 재미있게 받아들여 듣는다면 내용보다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다. 물론 존경과 기대 그리고 분위기까지 가미된다면 내용이 좀 약해도 감동은 클 것이다.
비언어적 요소를 활용하라
2. 가장 많이 사용되는 비언어의 요소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비언어적인 요소들은 음성, 몸동작, 물건, 분위기등이다. 설교자는 설교하는 동안 이것들을 사용한다. 천재적인 설교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비언어적인 요소를 잘 조합해서 감동을 이끌어 낸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 요소들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항상 연구한다.
음성은 언어적인 요소이면서 동시에 비언어적인 요소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좋은 음성으로 듣는 것과 듣기 괴로운 음성으로 듣는 것은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준다. 본래 타고난 음성이 그런걸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스스로 조금만 훈련을 하면 훨씬 아름다운 음성으로 말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이들은 쉬고 상한 소리에, 소위 뱀장수 소리에, 더 감동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이 목소리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목소리보다는 부드럽고 청아한 음성을 더 좋아한다. 아무리 들어도 피곤하지 않고 음악소리처럼 들리는 목소리는 청취하는데 큰 기쁨을 주기도 한다.
음성을 좀 더 분류한다면, 음질(音質), 음색(音色), 어조(語調), 음절(音節)로 나눌 수 있다. 음질은 음성의 높낮이, 굵기, 기름짐, 크기, 리듬 등을 포함한다. 음색은 웃음, 울음, 하품, 흉내내는 소리 같은 요소들이다. 정확한 단어를 찾지 못해 음색이라고 해 보았다. 어조란 단어나 문장이 말해지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지옥이란 단어는 무겁게 조용히 말하는 게 좋다.
마지막으로 음절은 말을 하는 동안 리듬을 주는 요소들이다. 예를 들자면 "어-", "에-"같은 것, 그리고 잠시 침묵하고 있는 것등 말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것들을 의미한다. 특별히 침묵은 대단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용법을 잘 훈련해야 한다. 유능한 설교자는 한 문단이 끝나면 잠시 머물어 감동을 더해준다.
인간의 목소리는 수 만 가지의 묘한 감정을 담을 수 있다. 사람들은 단어의 의미보다는 단어가 전달되는 방법, 즉 분위기로 뜻을 이해한다. 처녀가 "아니예요"하고 한 마디 할 때 과연 아니란 말인가? 그건 순전히 그때 상황에 따라서 듣는 사람이 이해하기 마련이다. 설교자의 단어도 청중은 분위기로 듣는다.
몸동작은 눈과 입을 포함한 얼굴 표정에서 시작해서 손, 머리, 몸등을 포함한다. 인간의 몸은 여러 가지를 표현할 수 있다. 느낌이나 생각등을 아주 강렬하게 나타내는 도구이다. 판토마임은 말 한 마디도 없이 동작으로만 강한 메세지를 전한다. 마찬가지로 설교자는 몸동작을 강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앞에 말한 메라비안의 공식을 다시 생각해 보자. 무엇을 말하면서 표정은 다르게 나타나면 어떨까? 청중은 절대로 말을 믿지 않고 표정을 믿는다. 만약 강단에 올라가는 사람이 힘없이 또는 억지로 올라간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자신이 없는 또는 약한 표정으로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누가 그의 말을 믿겠는가!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기가 말하려는 내용을 참으로 신중하고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얼굴에 그것이 표현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마음을 얼굴에 표현하지 않는 게 생활화되어 있다. 하지만 생활이 나아짐에 따라서 조금씩 표정도 다양해져가고 있다. 설교자는 온 몸으로 말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신체언어 (영어로 바디 랭귀지)는 커뮤니케이션의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설교중의 몸짓은 내용에 어울려야 한다. 안 그러면 설교자의 말보다는 제스츄어의 인상만이 기억에 남게 된다.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땅을 가르치고 마귀를 설명하면서 하늘을 가르친다고 생각해 보라. 정 반대의 이해를 사람들은 받게 된다.
동작 않고 잠시 머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동작이다. 앞에 말한 대로 한 대지를 말하고 다음 대지로 갈 때, 또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을 말했거나 말하려고 할 때, 유능한 설교자들은 잠시 침묵한다. 이 시간 동안 동작도 중단되어야 한다. 손을 들었거나 눈을 크게 떴거나 그 상태에서 몇초 동안 멎어 있어야 한다.
눈맞춤(eye-contact)은 의사 소통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자기의 눈을 상대방에게 주지 않는다면 상대방 역시 눈을 주지 않는다. 사람의 눈길은 마주 보는 사람들을 동료의식으로 연결하는 힘이 있다. 연구에 의하면 눈길을 받을 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눈길을 못받을 때는 반대의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설교자가 청중을 하나하나 바라보면서 설교한다면 금새 청취력이 높아졌음을 알게 된다. 실제로 눈이 가서 머물면서 말을 해야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은 눈맞춤이 아니다. 청중은 설교자가 자기를 보고 있는지 그리고 자기에게 말하는지를 느낀다. 만약 설교자가 원고나 천장만 본다면 그만큼 직접적인 느낌이 준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순수한 그러나 열정적인 눈으로 청중을 보면서 말해야 한다. 미안한 눈, 불안한 눈, 수줍은 눈은 눈맞춤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증오와 악의 눈도 마찬가지이다. 눈이 복음의 열정으로 불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눈을 맞춘다면 그 열정이 전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모와 치장도 청취의 중요한 요소이다. 무엇보다도 설교자의 인상은 강력한 영향을 준다. 덧붙여 체격, 복장 등도 그러하다. 표정의 중요성은 이미 말했다. 뚱뚱한 설교자가 절제의 삶을 말한다면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 마르고 약한 설교자가 하나님이 주시는 건강을 설파한다면 별 감동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기의 외모도 열심히 관리해야 한다.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에게 설교하면서 최신 유행의 양복과 머리 스타일로 나선다면 별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잘 사는 사람들 앞에 가서 꾀죄죄한 모습으로 선 다면 그들은 어디 화성이나 달동네에서 온 이상한 인물로 생각이 들 수 있다.
가운을 입고 하는 것과 양복을 입는 것도 각각의 장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설교자는 한복을 입기도 하고 심지어 잠바를 걸치고 대예배 설교하는 분도 있다. 치장과 외모에 덧붙여 화장품의 사용 등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 모든 것들은 어떤 확정된 틀보다는 청중의 분위기에 맞출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환경 역시 중요한 비언어매체이다. 시간과 공간, 건물의 특징도 신경을 써야 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교회당 내부의 인상, 장식, 청중들의 모습, 좌석배치등도 영향을 준다. 건물이 성당처럼 높으면 경건한 느낌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에는 좀 거리감이 생길 수도 있다.
설교 도중에 시끄러운 일이 생긴다면 청취가 방해를 받는다. 늦게 온 사람이 문을 삐걱댄다든지 맨 앞자리로 두리번거리면서 간다든지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아이들이 운다든지 장난을 쳐도 그렇다. 밖에서 소리가 들려도 마찬가지이다. 환경이 잘 만들어진다면 청취는 크게 향상될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부흥회를 위해서는 사람들을 촘촘히 앉힌다. 넓은 장소에 드문드문 떨어져 앉으면 열기가 잘 오르지 않게 된다. 무릎이나 어깨가 맞다을 정도로 모여 앉아야 청중은 감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찬송이나 통성기도등도 분위기 형성에 막대한 영향이 있다. 부흥사들은 설교 전이나 설교 중에 분위기에 항상 신경을 쓴다.
어떤 교회에서는 전문적인 복음송 찬양인도자와 밴드를 사용해서 분위기를 집중시키기도 한다. 너무 인위적이라고 비난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마음이 깨지지 않는 정도에서 한다면 문제가 없지 않을까. 동시에 점잖게 예배하던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에서 감동받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비언어적 요소를 활용하라
3. 온전한 의사소통을 위한 비언어적 요소의 사용과 개발
설교도 커뮤니케이션이므로 언어적인 방법과 비언어적인 방법이 상호 보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둘이 합쳐서 한 가지의 목표를 향해 일한다. 그렇게 될 때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스스로가 둘이 서로 협조해서 최대한의 효과가 일어나도록 연구해야 한다.
비언어적 방법이 언어만을 통한 의사소통보다 여러 배 강력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에는 언어적인 방법이 기본이다. 비언어적 방법이 아무리 강해도 언어적 방법의 보조로 사용되어야 한다. 말씀을 통한 복음의 내용이 설교에서는 가장 중요함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비언어적 요소가 설교의 내용과 모순되는 경우가 있다. 처음 설교를 하는 사람이 창백하고 굳은 얼굴로 심지어는 손을 덜덜 떨면서 말한다. "저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습니다." 음성까지도 부자연스러웠다. 그렇다면 청중이 그의 말을 믿을까? 그렇지 않다. 모순될 때는 비언어적 요소를 믿는다.
그렇다고 비언어적 요소를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다. 제스츄어를 쓰지 않아도 얼굴표정이나 음성이 이미 비언어적 요소를 발산하고 있다. 아무 것도 안 해도 상황이나 분위기가 역시 비언어적 요소이다. 비언어적 요소는 절대로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처해서 말씀을 잘 증거해야 한다.
비언어적 요소는 설교의 내용을 반복하거나 강조해 준다. 음성으로 들은 내용에 첨가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신자는 지옥으로 떨어지고 맙니다"하면서 강하게 아래를 가르킨다면 의미의 반복이다. 신자들의 뜨뜨미지근한 신앙을 책망하는 동안 얼굴과 몸동작을 무섭게 한다면 강조하는 것이다.
동시에 비언어적 요소는 대치와 보충도 해 준다. 어떤 부분은 말을 안하고 표정이나 행동으로 대신할 수 있다. "안됩니다"라는 말 대신 고개를 흔드는 것이 더 강한 전달이 될 수 있다. 쑥스러운 내용을 말할 때 머뭇거리거나 머리를 긁거나 더듬거리면 자기의 입장을 보충해주는 결과를 준다. 필요한 때가 있다.
비언어적인 요소는 설교자뿐 아니라 청중에게도 적용된다. 잘 듣고 있는지 감동을 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두리번거린다. 몸을 뒤튼다. 다른 곳을 멍청하니 보고 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빨려 들듯이 집중하고 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모두 이것을 바라지 않는가? 자세히 살피라. 비언어적 요소를 읽으라.
비언어적 방법은 설교자 스스로가 개발해 나가야 한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보면서 설교해 보라. 청중의 입장에서 살펴 보라. 인상에서부터 치장과 태도를 살펴 보라. 표정을 만들어 보고 몸동작을 해 보라. 그것들이 자신과 어울리는가? 그것들이 자연스러운가? 그것들이 설교를 강화시켜 주는가?
가수나 배우들은 비언어적 요소를 개발하려고 엄청난 시간을 투자한다. 그래서 저절로 분위기가 맞아떨어지게 만든다. 설교자들은 가수나 배우 이상의 연기를 해야 한다. 이 말은 속과 겉이 다르게 위선하라는 게 아니다. 자기가 표현하려는 내용을 200퍼센트 전달하려는 것이다. 200퍼센트란 감동이 더해진 것이다.
옷 입는 것이나 자세도 신경을 써야 한다. 허리와 가슴을 똑바로 펴고 서있고 걷고 행동하는 것이 몸에 배게 하라. 옷도 항상 깨끗하고 감각이 있게 하라. 무엇보다도 목회자는 운동을 계속해서 바른 자세와 몸의 균형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또한 나이가 들어도 몸의 모양이 무너지지 않고 힘이 넘쳐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설교자 자신이 자기가 말하려는 내용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자기가 확신이 있으면 그것이 표현되기 마련이다. 자신이 없으면 또 그것이 나타난다. 아무리 가장을 하려고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자기가 주려는 내용에 대한 믿음이 무엇보다도 앞서야 한다.
자기 설교에 스스로 감동하라. 그리고 열정을 다해 전달하라. 하지만 여전히 비언어적인 요소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 위력은 놀라운 것이다. 이성에만 대고 말하면 약한 커뮤니케이션이 된다. 하지만 감정을 흔들 수 있다면 그리고 열린 마음에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복음을 쏟아 넣는다면 엄청난 변화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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