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제1장. 서론. 해석의 필요성.
성경은 평범한 사람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데, 오히려 설교자들이나 교사들 때문에 성경을 이해하는 것을 어렵고, 모호하게 만들 때도 있다. 물론 성경은 모호한 책이 아니다. 성경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성경에 나타나는 수많은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이다. 그것은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또 좋은 해석의 목표는 독특함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만함이나 신령함에 대한 잘못된 이해나, 편향적인 관심사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특한 해석들은 잘못된 것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른 해석이 지향하는 목표는 '본문의 명확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이와 함께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상식이다.
그러나 명확한 의미를 얻는 것이 해석의 전부라면, 어째서 해석을 하려고 하는가?
단지 읽기만 하면 안되는가? 이 질문은 독자의 본질과 성경의 본질이라는 두 가지 문제 때문에 현실성이 없는 것이다.
독자도 해석 자이다.
①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배워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싫든 좋든 모든 독자는 동시에 해석 자가 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 읽은 것을 당연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이해한 것이 성경의 저자의 의도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선입관 등 때문에 - 물론 고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 우리는 엉뚱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예)십자가 - †가 아니라 'T'자 형이었을 것이다.
예)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 육신이라는 말은 '육체적인 욕망'을 의미하지 않고, 죄악된 본성을 지칭한다.
또 성경을 읽는 독자는 이미 해석에 동참한다는 사실이다. 번역 그 자체가 해석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번역자들은 언어상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점을 충분히 고려한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모든 '명확한 의미'가 모두에게 똑같이 명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전14:34-35을 근거로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동일한 문맥에서 나오는 방언과 예언은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고전11:2-16에 근거하여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기도하고 예언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여자들이 기도하고 예언할 때에는 반드시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간에 인정할 수 있는 이런 견해들 외에도 온갖 이상한 이론들이 성행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요한삼서 1장 2절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의 명확한 뜻이 '금전적이며, 물질적인 번영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실제적인 의미와 전혀 반대되는 내용을 명확한 의미라고 하고, 더구나 그 해석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도대체 명확한 의미를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석이 필요없이 그냥 읽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역시 무리이다.
그러므로 상식적인 지침에 근거한 건전한 해석을 해야만 한다.
이 책은 각 장르에 본래적으로 있는 특정한 문제들에 대해 독자들이 감각을 높여 주며, 또한 어째서 다른 견해들이 나타나는지, 상식적인 판단은 어떻게 하는지를 알게 하며, 특별히 건전한 해석과 불건전한 해석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며, 어떤 해석을 건전하게 혹은 불건전하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려는 것일 뿐이다.
성경의 본질.
해석이 필요한 의미 심장한 이유는 바로 성경 자체의 본질에 있다. 성경은 인간적인 동시에 신적인 것이다. 성경의 이러한 이중적인 성격 때문에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영원한 타당성을 지닌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또한 순종해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은 역사 속의 인간의 말을 통해서 자신의 말씀을 하기로 하셨기에, 성경의 각 책들은 또한 역사적 특수성을 갖는다. 즉 각 책들은 그것이 본래 기록된 어어와 시간과 문화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 이처럼 성경의 영원한 타당성과 그 역사적 특수성이 서로 '긴장'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하나님이 인간의 실제적인 역사의 맥락 속에서 말씀하시기로 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바로 그 동일한 말씀이 교회의 전역사를 통해서 해 온 것처럼 우리들 자신의 '실제적인'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성경에 인간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동시에, 우리에게 도전을 주며, 또한 해석을 해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2가지 사항을 주지해야 한다.
1)근 1500년에 걸쳐서 여러 다양한 상황에 처했던 실존 인물들을 통해서 말씀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사람들의 어휘나 사고방식을 통해서 표현되며, 또 그 시대의 문화와 당시의 상황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려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통해서나 사건을 통해서 주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시대적으로, 사상적으로도 그들과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실이 성경을 해석하기를 배워야 하는 주된 이유다.
이렇게 해서 독자들은 두가지 점에서 해석의 과제에 연루된다.
첫째. 과거에 그들이 들었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둘째. 그 동일한 말씀을 지금 여기에서 듣기를 배워야 한다.
2)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모든 인간적인 상황들에 맞게 전달하기 위해 모든 가능한 전달 방법을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적절히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모든 말씀에 적용되는 일반 법칙을 알아야 하고, 각각의 문학양식(쟝르)에 적용되는 특별 법칙도 배워 두어야 한다.
첫 번째 과제 : 석의.
해석자의 첫 번째 과제는 석의라고 불리운다. 석의란 본래의 의도된 의미를 찾는 신중하고도 조직적인 성경 연구 방법이다. 이 과제는 기본적으로 역사적인 과제이다.
하나님 말씀을 그 말씀의 본래 처음 들었던 자들이 들은 바대로 듣고, 그리하여 성경 말씀의 본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밝히는 일이다.
1. 모든 사람들이 때때로 석의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고, 또한 그런 석의가 아주 건전한 것일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경 본문과 현대의 문화적 상황 사이에 확실한 괴리가 있을 경우에만, 석의적 방법을 사용하는 경향이 짙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석의는 모든 본문을 읽을 때에 첫 번째로 거처야 할 단계이다. 석의적으로 사고하게 하게되면, 본문에 대한 이해력이 풍부해지고, 따라서 굳이 성경연구까지는 언급하지 않아도 성경 읽기에 있어서만이라도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첫단계에 불과하다.
살전 5:22(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은 예언에 관해서 하는 말이다. 즉 예언을 시험해 보아서 그것이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면, 그 예언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그 본문을 통해 의도하시는 바와 전혀 다른 의미를 그 본문에 부여하는 행위는 그 본문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문을 악용하고 있다.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석의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즉 모든 분문에 있어서 과거 그 당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서 생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2) 처음부터 '전문가'에게 의뢰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필요한 경우 더 나은 자료를 참조하고 사용해야 한다.
석의의 방법.
어떻게 하면 오류를 범하지 않고, 건전한 석의를 할 수 있는가?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이 없더라도, 우리는 건전한 석의를 할 수 있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첫째,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야 하고, 둘째, 다른 사람들의 자료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건전한 석의의 비결은, 본문을 주의 깊게 읽는 것과 본문에 대한 바른 질문을 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모든 성경 구절에서 반드시 해야 할 질문에는 기본적으로 2가지가 있다.
즉 문맥에 대한 질문과 내용에 대한 질문이다. 다시 문맥에 대한 질문에는 역사적인 질문과 문학적인 질문 두가지가 있다.
역사적 문맥.
역사적 문맥은 책마다 달라지는 것으로 여러 가지 요인과 관련을 맺는다. 저자와 당대 독자들의 시대와 문화와 배경 등이다. 이런 모든 문제가 그 본문을 이해하는 데 특별히 중요하다.
역사적 문맥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성경의 각 책과, 그 책들의 각 부분들의 배경과 목적을 파악하는 일이다. 이스라엘 혹은 교회 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그러한 책이 나오게 되었는가? 또 저자가 어떤 상황에 있었기에 그런 책을 기록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 등은 중요한 탐구 영역이다.
문학적 문맥.
문학적 문맥이란 본질적으로 단어는 문장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성경의 문장의 경우, 대부분이 앞 뒤 문장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모든 문장과 단락에 대해 우리가 늘 묻고, 또한 반복해서 계속 물어야 할 문맥상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로 '주제가 무엇이냐?'이다.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왜 여기서 그 말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언제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석의의 목표는 원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과제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운문과 단락을 잘 알아볼 수 있는 번역 성경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용의 문제.
내용은 단어들의 의미와 문장의 문법적인 관계, 그리고 사본에 따라 진술하는 바가 다를 경우, 원본을 택하는 문제 등과 관련을 맺는다. 고후5:16에서 바울은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라는 말씀을 하였는데, 여기서 '육체대로'란 누구를 꾸미는 말인가? 그리스도인가?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인가?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더 이상 그리스도를 '세상적인 안목으로' 알지 않는다는 말이다.
석의를 위한 참고서들.
두 번째 과제 : 해석학.
해석학이란 보통 석의를 포함해서 해석의 전 분야를 통틀어 지칭하는 것이지만, 고대의 본문에 대한 현대적 타당성을 찾는 것을 뜻하는 좁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우리가 성경을 접하게 되는 것은 결국 우리들이 처한 '지금 여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이 우리의 경건한 묵상을 올바로 이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절한 '해석학'은 반드시 든든한 '석의'와 함께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 연구에서 '지금 여기'의 문제부터 출발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해석학이 성경 본문 자체의 본래의 의미에 의해서 철저하게 통제를 받는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어디까지나 본문의 '명확한 의미'이다. 주관적인 해석이 아니라, 객관적인 해석의 원리에 따라 본문의 의미가 결정되어야 한다.
또 우리를 향한 성경 본문의 참된 의미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처음 말씀하셨을 때에 본래 의도하셨던 바의 의미와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출발점이다.
제2장. 기본 참고서 - 좋은 번역 성경.
성경 66권은 원래 2가지 언어로 기록된 것이다. 히브리어(구약의 대부분)와 아람어(히브리어와 동족어로서 다니엘서의 절반과 에스라서 몇 장에서 사용됨), 그리고 헬라어(신약 전체)이다.
번역본으로 읽는다는 것은 곧 그 독자가 이미 해석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번역본으로 읽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피할 수 없는 일일 뿐이다. 그런데 번역본이 올바른 것일 수도 있지만, 그릇된 것일 수도 있다.
첫째, 정말로 좋은 번역 성경이라면, 그 번역 성경 하나를 주로 사용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성경을 연구하고자 할 때에는 적어도 서너가지의 역본들을 잘 선택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역본들을 선택하며, 또 선택해 놓은 서너가지 역본들 중에 어떤 역본을 중심으로 연구해야 할까?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이렇다, 저렇다 확실히 답변해 줄 수가 없다.
정말로 좋은 역본을 신중하기 잘 택하기 위해서는 먼저 번역학을 알아야 한다.
번역학에 관하여.
번역자는 번역할 때 반드시 두가지 문제에 대해 취사 선택을 하여야만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다. 그것은 원문에 관한 문제와 언어에 관한 문제이다.
원문에 관한 문제란 원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과 관련된 문제이고, 언어에 관한 문제란 곧 번역자의 번역 이론과 관련된 문제이다.
원문의 문제.
1) 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2) 현존하는 것은 다만 수천 가지의 사본들로서 모두 손으로 쓴 것이며 또한 대략 1400년에 걸쳐서 계속적으로 손으로 베껴 쓴 것이다.
3) 필사본들은 대부분이 서로 매우 흡사하지만, 후기의 필사본들은 초기의 사본 및 역본들과 적잖이 다르다.
사실 신약에 대한 헬라어 필사본은 5천 가지 이상이나 있는데, 그 중에 어느 하나도 다른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용 가능한 자료들을 골라내어서 필사본들끼리 서로 다른 부분들을 비교하여 과연 어느 문장이 실수를 한 것이고, 또 어느 문장이 원문을 잘 반영한 것인지를 결정지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본문 비평이다. 여기서는 본문 비평에 대한 몇가지 기초사항만 아는 것이 좋을 것 같고, 또 성경 난외주에 종종 나타나는 '다른 고대의 문헌에는 ... 이 추가되어 있다' 또 '어떤 필사본에는 ... 없다' 등의 문구의 의미를 좀더 잘 이해하도록 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이 장의 목적상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다음 3가지이다.
1. 본문 비평은 매우 신중하게 행해지는 학문이다. 번역자는 원문을 결정할 때 반드시 두가지 증거를 고려한다. 외적 증거(필사본의 성격과 질에 관한 증거)와 내적 증거(필사자가 범한 실수의 종류에 관한 증거)이다.
강한 외적 증거와 강한 내적 증거가 함께 나타나면 대부분의 경우, 원문을 쉽게 결정할 수 있다는데 동의한다.
2. 본문 비평은 하나의 학문이지만, 정확한 학문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변수들을 너무도 많이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요지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3. 흠정역(KJV)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역본일 뿐 아니라, 영어권의 고전에 속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약의 경우, 1611년 KJV 번역자들은 천여년에 걸친 필사의 과정에서 생긴 오류들을 집성해 놓은 후대의 헬라어 사본들을 근거로 번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용 가능한 사본이라고는 그런 것들밖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오류들 가운데 교리적인 차이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특정한 본문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차이를 가져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연구를 위해서라면 흠정역보다는 기타의 다른 현대의 번역들을 사용해야 한다.
언어의 문제.
번역이란 곧 단어들과 관념들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이다.
원어 : 번역의 대상이 되는 언어로서 우리의 경우에는 히브리어, 아람어 또는 헬라어가 여기에 해당된다.
수용 언어 : 번역하고자 하는 언어, 즉 번역의 결과로서 만들어지는 작품의 언어로서 우리의 경우에는 한국어나 영어가 이에 해당한다.
역사적 간격 : 원어와 수용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지칭. 여기에는 문화와 역사의 차이는 물론 단어나 문법, 숙어 등의 차이도 포함된다.
번역 이론 : 두 언어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 번역자가 추구하는 변형의 정도에 관한 것이다.
문자적 번역 : 원어의 단어나 어구를 가능한 한 그대로 지키면서 번역하되 수용 언어에서도 의미를 잃지 않도록 하는 번역, 문자적인 번역은 모든 면에서 역사적인 간격을 고스란히 그대로 남겨 둔다.
자유 번역 : 원어의 단어를 그대로 나타내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덜 기울인다. 가능하한 역사적 간격을 없애고자 한다.
역동적 대응 번역 : 원어의 단어나 숙어, 문법적 구문들을 수용 언어의 정확한 대응어로 번역하고자 하는 시도, 이 번역은 역사적인 문제와 대부분의 사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적 간격을 그대로 남겨두되, 언어나 문법 또는 문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현대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가장 좋은 번역 이론은 역시 역동적 대응 번역이다.
제3장. 서신서 - 문맥에 따른 사고.
서신서는 비교적 해석이 용이하다. 그러나 해석이 용이하다는 점이 오히려 큰 함정이 될 수도 있다. 특히 해석학의 문제에서 더욱 그러하다. 고전 5장에서 악한 자를 내어 쫓으라는 바울의 말씀을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가?
이처럼 서신서는 기독교 신앙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면서도 아주 중요한 해석학적인 문제들을 수없이 야기시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신서에 대한 논의를 가장 먼저 해 둠으로써 이 책 전체를 통해서 제기할 석의와 해석학의 문제들에 대한 하나의 모델로 삼고자 한다.
서신서의 본질.
서선서 전체에 해당되는 일반적인 사항을 몇가지 이야기해보자.
1)서신서 자체는 도무 동질의 것이 아니다. 아돌프 다이스만은 편지와 서신을 구분하였다. 편지는 수신할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만을 위해 씌어졌다. 반면 서신은 예술적인 문학의 한 형태로 일반 회중을 대상으로 한다.
이런 구분은 타당하다. 로마서와 빌레몬서는 내용 뿐 아니라, 대상에 있어서도 서로 판이하게 다르다.
이런 구분의 타당성은 고대 편지들의 형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신약 편지들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①발신인의 이름(예컨대, 바울)
②수신인의 이름(예컨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
③인사(예컨대,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④기도와 감사(내가 항상 ... 감사하노니 등).
⑤본문
⑥끝인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있을지어다 등)
이 형식 가운데 가변적인 것은 4번 기도와 감사의 부분이다.
야고보서와 베드로후서는 모두 편지 형식으로 씌어졌지만, 모두 마지막 인사가 없으며, 또한 특정한 수신인에 대한 언급과 저자의 개인적인 소재도 없다. 수신인이 언급되지만 매우 추상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이것이야 말로, 신약의 서신서들 가운데 가장 '서신' - 전교회를 대상으로 쓴 회람용 글 - 에 가깝다. 그러나 벧후의 경우, 사적인 편지의 경우처럼 씌어진 동기가 있다(3:1-7).
이처럼 서신서들의 성격이 각양 각색이지만, 서신의 전체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곧 서신서는 모두 특정한 일 때문에 씌어졌고, 또한 그 일을 염두에 두고 기록된 문서라는 사실과, 또한 A.D. 1세기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서신들의 특정한 일을 배경으로 한 면(occasional nature)은 아주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서신들은 독자편의 상황이든, 저자편의 상황이든,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 그것을 근거로 씌어졌다. 신약의 서신서는 대부분은 독자들의 상황에서 기록되어졌다. 보통 그 상황이란 시정해 주어야 할 어떤 행위가 있었다든지, 교리적인 실수가 있었다든지, 좀더 깊은 가르침을 요할 만큼 잘못된 인식이 있었다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또 한가지, 서신서는 신학적인 논리 전개를 주목적으로 기록된 신학적인 논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신학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신학은 언제나 '과제 신학'이다. 즉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혹은 그러한 과제 때문에 기록되고 있는 그러한 신학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고자 계속해서 서신서를 찾는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서신들의 목적이 기독교 신학을 진술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서신서의 신학은 특정한 필요의 충족을 위해 생긴 것이다.
중요한 예비적 상황을 알았으므로, 서신서에 대한 석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린도전서를 본보기로 살펴보자.
역사적 문맥.
서신서를 대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상황을 가상적으로, 그러면서도 근거 있게 재구성하는 것이다.
고린도에 어떤 상황이 있었기에 바울이 고전을 기록하게 되었을까?
이런 유의 질문을 해결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 성경 사전이나 주석의 서론 부분에서 고린도라는 도시와 그 주민들에 대한 사항들을 가능한 많이 찾아내는 것이다.
둘째. 특별히 연구를 위해서는 서신 전체를 단번에 완독하는 습관을 기를 필요가 있다.
읽으면서 각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먼저 필요한 것은 거시적인 안목이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똑바로 뜨고서 읽고 또 읽으라.
서신 전체를 통독하는 동안 간단한 참고 사항을 메모해 두면 아주 도움이 된다.
그러면 어떤 것을 메모해야 할까?
①수신자들에 대해 눈에 띄는 내용. 예컨대, 그들이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등.
②바울의 태도에 대한 언급.
③편지의 배경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것.
④편지 속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논리적인 내용 구분.
배경을 이루는 것에 대한 피상적인 것에서 이제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의 상황들의 정확한 성격을 알아보아야 한다.
서신서의 소단락들을 연구할 때에도 지금까지 해온 방식을 대체로 반복하는 것이 좋다.
매 과목마다 독자들이 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고린도전서를 최소한 2회 통독하라(읽을 때마다 다른 번역본을 사용하면 더욱 좋다).이 때 고전의 대강의 줄거리, 전체적인 주제에 대한 '대상'을 잡으라.
②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수신자와 그들이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으면 모두 기록하라.
③바울의 회신의 주제를 암시해 주는 주요 낱말이나 반복되는 문구들도 기록해 놓으라.
문학적인 문맥.
다음 단계는 바울의 논증을 앞에서 가상적으로 세운 문제점들에 대한 해답으로 생각하고서 그것을 추적해 나가는 일이다.
문단을 단순히 사상 전개상 자연스럽게 나뉘어지는 하나의 단위로서가 아니라, 전체의 줄거리를 이해하는 절대적인 필수 요소로서 인식하고서 그 문단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점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계속 해 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두가지 사항에 착안점을 두는 것이 좋다.
①각 문단의 내용을 간단히 진술하고서 거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물어본다.
②바울이 왜 바로 거기서 그 말씀을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한 두 문장으로 설명해 보자. 그리고, 그 문단이 전체의 내용의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다음 사항을 주의하자. ⓐ요점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을 떠나서는 안된다. ⓑ줄거리에 맞지 않는 내용은 본문에 없다. ⓒ이 모든 사실은 모든 책에 그대로 적용된다.
문제 구절들.
1)본문들이 어렵게 보이는 것은 그 본문이 직접 우리들을 위해 씌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라는 바울의 말이나 "저로 하여금 .....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라는 말씀을 대할 때에(살후2:5-6),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만족하기를 배울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반드시 알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둘 수는 있지만, 그것이 확실하지 않으므로 그것에 대한 독단은 피해야 한다.
2)그러나 어떤 세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완전한 이해를 할 수 없을 경우에도, 그 전체의 구절의 요점은 여전히 파악할 수가 있다.
3)어떤 정확한 세부 사실에 대해서 분명치 않은 것이 있을 때에도, 우리는 그 본문에 대해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확실치 않아도 가능한 해석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를 배워야 한다.
고전15:29을 예로 들어보자.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여기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일부는 실제로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고 있었다. 더욱이 바울은 그들의 행위를 책망하지도 용인하지도 않았다. 단순히 그 사실을 언급하기만 하였다.
이는 그런 행위 자체를 문제 삼기 위해서 그것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행한 사람이 누군지, 누구를 위해 그 일을 행했는지, 무슨 이유로 그렇게 했는지는 결코, 영원히 알 수 없다.
4)그런 구절에 대해서는 좋은 주석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좋은 주석이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구절을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5)학자들이라도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완벽하게 주지 못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살핀 여러 본문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살펴보자.
제 4 장. 서신서-해석학적인 문제.
해석학적 문제는 과연 이 본문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더 어렵다. 석의적인 문제는 비록 어떤 특정한 점들에 대해 의견들이 일치되지 않는 면이 있지만, 최소한 본문의 의미를 결정 짓는 요인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러나 해석학의 경우,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결정 요인들이 존재하는 것 같지가 않다. 모든 사람이 다 해석학을 시행하고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제기되는 주요 논제는 문화적 상대성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어떤 것이 문화적인 문제여서 1세기 사람들에게만 해당되고, 어떤 것이 문화를 초월하는 문제여서 시대를 넘어 서서 온 인류에게 해당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통상적인 해석학.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언제나 해석학에 연루되어 있다.
즉 좀 개화된 우리의 상식을 본문에 접목시켜서 그것을 할 수 있는대로 우리의 상황에 적용시킨다. 그리고, 적용할 수 없을 듯이 보이는 것은 그저 A.D.1세기에 해당되는 말씀으로 간주해 버린다.
예를 들어, 딤후4:13에서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명령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들 중에서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서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하여 드로아까지 가야 한다고 느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환난에 처할 때에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는 똑같은 서신에 있는 말씀(딤후2:3)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본문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그 본문을 그대로 지켜야 하느냐 아니면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나게하여 서로서로를 일깨우느냐'(벧후1:13) 하는 것이 더욱 문제가 된다.
즉 난제는 위의 두 본문들의 중간에 해당되는 그런 유의 본문들이다. 이런 본문에 대해서는 일관성이 없고, 따라서 특정한 본문들만을 선호하거나, 혹은 '회피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관성있는 해석학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지침들이 필요한가?
기본 법칙.
어떤 본문은 그 본문의 저자나 그의 첫독자들에게 의미하지 않는 바를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석의가 우선이 된다. 이 법칙은 본문이 의미할 수 없는 바를 규정하는 한계를 설정하는 데에는 반드시 도움을 준다.
예)고전13:10절(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온전한 것이 신약 성경이라는 형태로 이미 왔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하던 것(예언과 방언)은 교회에서 그 기능이 이미 정지된 것이라는 해석.
그러나 이 해석은 본문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런 의미로 그 말씀을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의 첫 독자들은 신약성경이라는 것이 생겨날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바울로 하여금 그 독자들이 전혀 깨달을 수 없는 그런 내용을 쓰도록 허락하셨을 리는 더더욱 없다.
두 번째 법칙.
우리의 처지(즉 삶의 정황)가 1세기의 정황과 유사할 때에는 언제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1세기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모두 지금까지 불변하는 진리이다.
확대 적용의 문제.
오늘날의 교회에 유사한 정황이나 비슷한 사정이 있을 경우, 본문의 적용을 오늘날의 다른 사정에로 확대하는 것이 합당한가? 아니면 본문을 1세기의 정황과 전혀 다른 오늘날의 사정에 곧바로 적용시키는 것이 합당한가?
여기에는 명백한 석의가 따라야 한다.
..(정리 곤란)
..
유사성이 없는 특수 상황의 문제.
20세기에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1세기만의 문제를 다루는 본문과, 또한 어쩌면 20세기에도 일어날 수 있으나, 그럴 가능성이 희박한 그런 문제를 다루는 본문이 그것이다.
그런 본문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기에서 적절한 해석학은 다음과 같은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 특별히 조심스럽게 석의를 함으로써 그들(A.D.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면, 대개 확실한 하나의 원리가 도출되는데, 그 원리는 역사적 특수성을 초월하게 될 것이다.
둘째, 그 원리는 아직 어떠한 상황에라도 아무렇게나 내키는 대로 마구 적용할 수 있을 만큼 무시간적인 것이 되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반드시 참으로 유사한 상황에 적용해야만 한다.
예1) 바울은 '거치는 것'의 원리를 근거로 우상 축제에 참예하여 먹고 마시는 것을 금한다. 그러나 여기의 '거치는 것'이 단순히 다른 신자들을 실족케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거치는 것'의 원리란 한 신자가 자신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능히 행할 수 있다고 느끼는 그 무엇에 대해서 자신의 행동으로나 말로 하는 부추김으로, 선한 양심으로 그런 일을 도무지 행할 수 없는 다른 신자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만드는 그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원리는 참으로 유사한 상황에만 적용시킬 수 있다.
예2)바울은 우상의 축제에 참예하여 먹고 마시는 일을 절대적으로 금하고 있다. 그것은 곧 귀신에 참예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형태의 심령술, 사술, 점성술 등을 금하게 하는 하나의 규범적인 금령인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사도가 없지만,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9:14)는 원리가 오늘날의 교역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원리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확실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는 이처럼 무시해 버릴 문제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문제를 어떻게 서로 구별하느냐 하는 것이다.
곧 문화에 따라서 변하고, 기독교 집단들에 따라서 달라지는 그런 것을 어떻게 찾아내야 하는가? 과연 무시해 버릴 문제는 어떤 것들인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제시할 수 있다.
①서신서에서 확실하게 무시할 문제로 말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취급해야 한다. 곧, 먹는 것, 마시는 것, 날을 지키는 것 등이 이에 속한다.
②무시할 문제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다 - 종교적인 문화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러므로 문화에 따라서 변하는 경향이 있는 문제들은 보통 무시할 문제로 여길 수 있다.
③서신서에 기록된 죄의 목록들에는 위에 열거한 내용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무시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제시한 사항에 대해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의 자유를 과시해서는 안되며, 그런 문제에 대해 개인적으로 확신을 갖고서 행하는 사람 역시 그 문제로 남을 비방해서는 안된다.
문화적인 상대성의 문제.
①서신서들은 특별한 사정을 배경으로 한 A.D. 1세기의 문서로서 1세기 교회의 특정한 상황에 대해 말하는 것이므로, 1세기의 언어와 문화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다.
②서신서에 나타나는 많은 특정한 상황들은 1세기의 정황에 철저하게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개별적으로 현대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용되는 일이 거의 또는 전혀 없음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③그 밖의 본문들 역시 1세기의 정황에 철저하게 제한을 받으나, 그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운 그러나 유사한 정황에로 옮아갈 수도 있다.
④그러므로, 또 다른 본문들 역시 1세기의 정황에 의해 제한을 받으면서 새로운 정황에로 옮아가거나 그냥 그대로 1세기의 정황 속에 남아있거나 하는 일은 가능하다.
문화들은 사실상 서로 다른 것이다. 비단 1세기와 20세기의 문화만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20세기 문화 자체 안에서도 상당히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문화적 상대성을 배경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그 점을 인정하는 것이 정당한 해석학적 과정이며,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서신서의 성격을 보아서도 불가피한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동시에, 해석학이 정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인정할 만한 지침 이내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문화적으로 상대적인 사항과 그 본래의 정황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규범이 되는 사항을 구별하는 지침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1)먼저 성경의 중심이 되는 핵심적인 메시지와 그것에 종속되거나 그 주변에 해당되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따라서 인류의 타락성, 그리스도의 죽음이나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활동인 구속,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그 구속 사역의 완성 등은 분명히 핵심에 속하는 내용이다.
2)신약성경 자체가 본래적으로 도덕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항과 그렇지 않은 사항을 구별하여야 한다. 본래적으로 도덕적인 사항들은 절대적이며, 모든 문화에 다 해당된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도덕적이지 않은 사항들은 문화적인 표현에 속하며, 문화에 따라서 변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죄에 대한 바울의 목록에는 결코 문화적인 사항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발 씻는 문제, 거룩한 입맞춤을 나누는 것, 시장터의 우상 제물을 먹는 일, 여자가 기도나 예언할 때에 머리에 쓰는 일, 바울이 개인적으로 독신을 선호한 사실, 또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 등은 본래적으로 도덕적인 문제는 아니다. 이 문제들은 다만 그 특정한 정황 가운데서 행하거나 악용되어서(불순종이나, 사랑의 결핍에 오는 것을 경우) 도덕적인 문제로 등장하게 된 것 뿐이다.
3)신약 성경 자체가 시종 일관성 있는 증거를 하는 사항과 좀 다르게 증거하는 사항을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신약성경이 통일된 증거를 보여주는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처신으로서의 사랑, 보복하지 않는 개인 윤리, 싸움, 증오, 모든 종류의 성적 부도덕 등의 그릇됨.
반면, 다음과 같은 사항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은 일관성 있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교회에서의 여자의 사역(롬16:1-2, 롬16:7, 롬16:3, 고전14;34-35, 딤전2:12). 로마에 대한 정치적인 평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 등.
4)신약성경 내에서 원리와 특정적인 적용 내용을 서로 분간하는 문제도 매우 중요하다. 신약성경 기자에게는 어떤 절대적인 원리로써 어떤 상대적인 적용 내용을 뒷받침하며, 그러면서도 그 적용 내용을 절대화시키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5)할 수 있는 대로, 성경 기자들이 선택한 문화적 상황을 신중하게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단 하나밖에는 선택할 여지가 없는 그런 문화적 상황에 대해 신약성경 기자가 동의하는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런 입장이 문화적으로 상대적인 것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예를 들면, 동성애에 대해 신약성경은 반대라는 하나의 입장만을 취한다.
노예 제도나 여자의 지위나 역할에 대해서 고대의 저작자들 어느 누구도 노예제도를 악한 것으로 보거나, 여자가 근본적으로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신약성경 기자들 역시 노예제도를 악한 것으로 비난하지 않았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자기들이 당시의 주도적인 문화적 태도를 반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주위 세계의 유일한 문화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6)1세기와 20세기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20세기 교회에서의 여자의 역할에 대해서 결정하자면, 1세기에는 여자들이 교육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울이 롬13:1-7에서 논하는 국가도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악법이 고쳐지고, 악한 관리가 축출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이다.
7)마지막으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다운 관용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차이점들을 인정하고 서로서로 의사를 소통하여야 하며, 어떤 원리를 규정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견해를 달리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당면 과제 중심의 신학의 문제.
당시의 정황을 근거로하고 있는 서신서의 성격 때문에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유의 사항들을 제시하자.
1)서신서가 당시의 정황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신학적인 이해에 몇가지 제약이 생기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경우도 있다.
예)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두 형제가 재판을 받기 위하여 이방인의 법정에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세상과 천사를 판단하게 되리라고 말씀한다(고전6:2-3). 본문에는 이 이상의 설명이 없다.
그래서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그 일이 어떻게 실행될지 전혀 모른다.
고전10:16-17절. 거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자신의 주의 만찬에 참예하였음을 근거로, 그들이 우상의 집에서 음식 먹는 일에 참예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변론한다.
그렇다면 '참예'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로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들 모두는 알고 싶어하지만, 우리들의 지식은 그 진술이 당시의 정황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본문 그 자체가 드러내는 바를 넘어서는 해석이 확실한 석의를 근거한 해석과 동등한 성경적 또는 해석학적 가치를 지닐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 속에 주셨지만, 반드싱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따름이다.
2)서신서의 본분들은 정황을 근거로 한 것이어서 오로지 당시의 사람들의 문제에만 답변해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들에게 특수한 문제를 그 본문들에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때로 그 본문이 답변해 줄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우리들의 문제(예, 낙태, 재혼, 유아 세례 등)는 그 당시에는 제기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곧 창조의 타락, 구속, 그리고 마지막 완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포함한 전체적인 성경적 신학을 근거로 하는 것뿐이다.
즉 일종의 성경적인 세계관을 그 문제에 적용시켜 보는 일이다.
제5장 구약의 설화들 - 그 적절한 사용.
성경에는 설화(이야기, 역사 서술)들이 많다. 구약의 40%가 설화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이 성경 전체 부피의 3/4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성경 전체에서 가장 흔한 문학 형태가 바로 설화라고 해서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는 성령께서는 성경의 그렇게 많은 부분을 설화의 형태로 영감하셨을 때에 분명히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으리라는 사실을 전제로 삼는다. 설화체가 하나님의 계시의 목적에 잘 어울린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여겨진다.
설화의 본질.
설화란 무엇인가?
설화는 곧 이야기이다. 그런데도 설화라는 낱말이 더 좋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지어낸 어떤 것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고, 또 이야기는 등장 인물도 구성도 단순한 단 하나의 이야기를 뜻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야기라 불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사실이며, 절대적으로 중요하며, 가끔 복잡한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 형태의 이 위대한 신적 이야기의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의미에서 설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경의 설화는 일어난 사실을 다루지만, 일어난 모든 사실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설화들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 세계에서, 또 그의 백성들 가운데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고자 하는 데 있다. 설화들은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우리로 하여금 그를 깨닫고 인식하도록 도와주며, 또한 그의 섭리와 보호하심의 면면을 보게 해 준다.
설화의 세가지 차원.
구약의 설화는 세가지 차원에서 씌어지고 있다.
고급 설화 - 창조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전우주적인 계획을 다룬다. 주요 구성들은 창조 자체, 인간의 타락, 죄의 능력과 편재, 구속의 필요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희생이다.
중급 설화 - 주로 이스라엘에 관심을 둔다.
하급 설화 - 수백가지의 개별적인 설화. 이것들이 모여서 다른 두 종류의 설화(고급과 중급)를 구성한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했다는 설화 등이 이에 속한다.
예수님은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7-39)라고 가르치셨다. 이때 그는 구약 성경의 개개의 모든 구절을 다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메시야적이거나 아니면 달리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으로 인정된 그러한 개개의 구절들 - 설화까지 포함해서 - 은 구약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체 계시의 아주 적은 분량만을 차지한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바로 궁극적인 고급의 설화를 염두에 두고 그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 설화는 곧 예수의 속죄가 중심 활동이 되며, 절정을 이룬다. 이렇게 해서 주께서는 성경이 전체적으로 자신을 증거하며, 그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되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개별 설화를 모두 그 자체로서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가장 완전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지막으로 그 개별 설화 하나하나를 보다 큰 문맥 속에서 보는 일이 수반되어야 한다.
설화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
1.구약의 설화를 단순히 구약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만 생각함. 그러나 구약의 설화는 하나님이 그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보여주는 첫 이야기들이며, 가장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성경은 신적인 설화들로 구성되어있다.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설화에서 '최고의 주인공'이시오, 결정적인 인물이 되신다.
2.구약의 설화들을 숨은 의미가 가득한 풍유나 이야기로 생각함. 잘못된 생각이다. 설화는 어떤 주어진 문제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을 모두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다.
설화는 그 초점이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일의 전체적인 면모 중 단지 한 부분만을 보여 줄 따름이다. 그러므로 호기심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 찾을 수 있고, 의미를 부과하여 읽게 되고, 결국은 역사적인 기술에 불과한 내용을 풍유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3.구약의 설화는 반드시 직접적으로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관념.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설화는 율법적인 부분이나 교리적인 부분들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본성과 계시를 강조해 준다.
설화는 우리로 하여금 사건과 경험들을 통하여 대신 살아보도록 해 준다. 구약의 설화의 진행을 따라가노라면, 그 설화 속의 인물이 아무리 독자들과 거리가 멀고, 또한 그들의 처한 환경이 아무리 다르다 할지라도, 이야기를 읽을 때에 늘 그렇게 되듯이 그 속에 대신 자동적으로 빠져들게 된다.
책의 독자가 그리스도인인 이상, 구약성경은 여러분의 영적 역사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부르심은 곧 여러분을 향한 역사적 약속과 부르심이다.
구약의 설화는 직접적으로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다른 곳에서 직접적으로 또한 단언적으로 교훈한 내용을 실제적인 예로써 설명하기도 한다. 이는 일종의 암시적인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했다는 설화에는 '다윗이 간음의 잘못을 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설화는 간음이 다윗 왕 개인의 삶과 그의 통치력에 얼마나 해악을 끼쳤는지를 실례를 보여 줄 따름이다.
다윗의 간음은 하나의 특정한 경우에 발생한 간음의 효과를 보여주는 한가지 사례이다. 이런 사례를 통해 독자들의 마음에 단단히 새겨질 수 있는 아주 강한 메시지를 준다.
4.각각의 개별 설화나 에피소드가 전부 그 나름대로의 교훈을 담고 있다는 관념. 그러나 마치 모든 사건과 묘사가 독자들에게 각각 특별한 메시지를 주는 것으로 설화를 분산시켜서 해석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긴 설화에서조차도 그 설화의 모든 부분 부분들이 함께 협력하여 독자들에게 한 가지 주요 사항에 대해 인상을 심어 줄 수가 있다.
설화 속에 나타난 자료 하나하나에서, 또는 매 사건에서 어떤 의의를 찾으려는 시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설화를 하나하나 해부하지 말고, 하나의 전체적인 통일체로서 평가해야 한다.
설화의 해석을 위한 원리들.
설화들을 석의하고자 할 때마다 명백한 해석상의 오류를 피하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10가지 원리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①구약의 설화는 직접적으로 어떤 교의(교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②구약의 설화는 다른 곳에서 명시적으로 교훈한 어떤 교의나 교의들을 실례들로써 제시하는 것이 보통이다.
③설화는 일어난 일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일어났어야 할 일을, 또는 어느 때든 일어나야만 하는 일을 반드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모든 설화가 거기에서 진술하는 사건들과 동일한 것을 교훈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④설화 속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행동이 반드시 우리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경우도 많다.
⑤구약의 설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며, 그들의 행동 또한 그러하다.
⑥설화의 끝머리에 가서 그 설화에서 되어진 일이 선하든지 악하든지 하는 언급이 반드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들 스스로 하나님이 이미 성경에서 직설적으로 단언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을 근거로 그것을 판단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⑦설화는 모두가 다 선별적이며, 불완전한 것이다. 필요한 구체적인 내용이 반드시 모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설화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영감된 저자가 우리에게 알려진 만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 것들이다.
⑧설화는 우리의 모든 신학적인 문제들에 대해 답변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다. 설화는 제각기 특정한 구체적인 제한된 목적을 갖고서 특정한 문제들을 다룬다. 그밖의 문제들을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지도록 내버려 둔다.
⑨설화는 명시적으로(무엇을 분명히 진술함으로써) 가르칠 수도 있고, 또는 암시적으로(실제로 진술하지는 않으면서도 분명히 무엇을 암시해 주는 식, 이야기 속에 분명히 내재하고 있으면서도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은 그런 가르침) 가르칠 수도 있다.
⑩마지막으로, 성경의 모든 설화의 주인공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설화 해석의 예.
요셉 설화.
요셉의 설화에서 주인공이 누구이며, 이 이야기의 교훈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39: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하나님이 바로 주인공이시요,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셨다는 것이 교훈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요셉의 됨됨이나 그가 행한 어떤 것을 찾아내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요셉처럼 복을 받기 위해서는 그런 것을 그대로 모방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을 갖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 설화는 그런 것을 교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설화의 내용은 하나님이 도저히 격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사람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행하셨는가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요셉 설화 전체를 구성하는 작은 설화들의 여러 가지 상세한 내용들은 사실상 요셉이 날 때부터 지닌 어떤 것을 나타내는 것도, 그의 행동에서 모범이 될 만한 어떤 것을 지적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 자체가 제시하는 한 가지 교훈,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이외의 다른 어떤 교훈을 찾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심지어 형제들이 요셉에게 품었던 악의조차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었다.
요셉의 삶의 양식이나, 그의 인격이나 그의 행동 등은 일반적인 도덕적 원리들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어떤 것을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니다.
요셉 자신도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요셉 설화의 모든 사람들을 보다 큰 목적을 위하여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
초점은 하나님께 있다. 그는 자신이 뜻하시는 바를 성취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그의 가족과 바로 등 전혀 격에 어울리지 않는 매개체를 이용하사 많은 백성들을 보존하시고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나의 특별한 백성을 창조하기 시작하신다.
룻의 설화.
룻의 설화에서는 암시적인 내용들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1)룻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믿음으로 회심하였음을 보여준다.
룻이 회심하였다고 말하지 않지만, '(룻1:16) .....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룻의 고백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2)룻 설화는 보아스는 많은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모세의 율법을 지켰던 의로운 이스라엘 사람이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2:3-13, 3:10-12, 4:9-10.
보아스는 레위기 19:9-10에서 명한 대로 이삭을 남겨두라는 율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그리고 레위기 25:23-24에서 명한 대로 기업을 무르는 일에 대한 율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는 사실.
3)이 설화는 이 이야기가 다윗 왕의 혈통의 배경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롯은 다윗의 증조 할머니이고 예수님의 조상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닌가! 이 점은 룻 설화 전체의 교훈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4)룻 설화는 베들레헴이 그 거민들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사사시대에 아주 예외적인 성읍이었음을 암시적으로 말해준다. 그 증거는 2:22을 빼고 모든 구절에 다 나타난다.
2;22은 이삭을 남겨두라는 율법을 모든 베들레헴 사람들이 다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 아님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큰 환란을 당할 때나, 기쁜 일이 있을 때나, 그녀는 여호와의 뜻을 깨달으며 그 뜻에 순종한다. 또 보아스는 여호와를 섬기며 그를 따르는 자다운 그의 말과, 그 말을 확증시켜 주는 행동들을 보여 줌으로써 자신의 참다운 면모를 시종일관 드러내고 있다.
5)저자가 영감을 받아 중요한 사건들을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으로 돌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1:6, 4:13).
설화는 실제로 그 어느 곳에서도 '베들레헴은 그 때에 그 경건함이 뛰어난 성읍이었다'고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설화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것(베들레헴은 그 때에 그 경건함이 뛰어난 성읍이었다)는 것이다.
경고.
암시적인 것이 비밀스러운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암시적이란 비록 여러 말로 진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거기 진술된 내용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설화가 실제로 말해주는 직, 간접적인 내용 전부를 우리 것으로 하는 것이다.
몇가지 주의 사항.
사람들이 성경 설화 속에서 거기에 있지도 않은 것들을 찾아내는 일이 - 하나님께서 알려 주고자 하시는 것을 성경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의 관념을 가지고 성경을 파헤쳐 들어가는 일이 - 그렇게도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주된 이유는 3가지이다.
1)그들은 어떤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2)참을성이 없다는 것이다.
3)성경의 모든 내용이 그들 자신의 개별적인 삶에 대한 교훈으로 곧바로 적용된다는 그릇된 기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하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답변들이 언제나 그 책에 다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경 전체에서 찾지를 않기 때문에 실수를 범하게 된다.
여기에 보통 범하기 쉬운 6가지의 해석상의 오류를 열거하고자 한다.
①풍유화 : 명확한 의미에 관심을 두지 않고 본문을 단순히 그 본문을 넘어서는 또 다른 의미를 반영하는 것으로만 취급해 버리는 것. 성경의 풍유들이 단순히 설화 형태로만 되어 있는 경우는 없다.
②탈문맥화 : 전체적인 역사적 문학적 문맥을 때로는 개별 설화까지도 무시하고, 작은 부분들에만 주의를 집중시켜서 결국 해석의 실마리들을 놓치는 것.
③선별성 : 탈문맥화와 유사한 것으로서, 특정한 단어나 어구를 취사 선택하여 그것들에 대해서만 주의를 집중시키고 다른 것들을 무시하며, 또 전체적인 흐름도 무시하는 것이다.
④잘못된 연결 : 구절 자체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결된 것에서 어떤 내용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⑤재정의 : 본문의 확실한 의미를 다시 새롭게 정의하여 무언가 다른 의미를 가진 것처럼 만들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한다.
⑥정경 이외의 권위에 의존함 : 성경에 대해서 어떤 특별한 외적인 자료를 사용함으로써 성경의 비밀을 풀 수 있다고 여기는 경우. 성경을 특별한 지식이 있어야 풀 수 있는 일종의 수수께끼의 집합과 유사한 것으로 취급.
설화를 읽고 교훈을 얻는 문제에 대해서 가장 유용한 한가지 충고가 있다면, '본대로 무엇이나 그대로 따라 하는 원숭이와 같은 성경 독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의 설화는 직접 우리들에 대해서 다루는 설화가 아니다. 설화로부터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지만, 하나님이 성경의 인물들이 행한 일들을 여러분이 그대로 행하기를 기대하신다거나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똑같이 여러분에게 일어날 것을 생각하신다거나 하는 식의 생각은 결코 가져서는 안된다.
독자가 할 일은 성경에서 행해진 모든 일을 그대로 행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관한 설화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이다.
설화가 우리에게 귀중한 것은 그것들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관여하심을 그렇게 생생하게 증거해 주며, 또한 하나님의 원리들과 명령을 그렇게도 뚜렷이 실례로써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화는 개인의 윤리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제시한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직접적인 가르침을 주는 것은 아니다.
제6장. 사도행전 - 역사적 선례의 문제.
구약의 설화들을 읽을 때 우리는 도덕적인 교훈을 얻거나 풍유화시키거나 또는 본문 이면에 숨겨진 뜻을 알려고 하는 등등의 경향이 있다.
또 구약의 설화들이 우리들 자신의 삶을 위한 하나의 성경적인 선례가 된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읽을 때에는 거의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하나의 성경적 선례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게 된다.
즉 행전은 단순히 초대교회의 역사를 말씀하는 것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들에 대하여 규범적인 모델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본다.
바로 이 점이 행전이 안고 있는 해석학적 난점이다.
대개의 복음주의자들은 행전의 교회를 회복해야 할 표준으로, 이상으로 가르친다.
사실, 교회 안에서 수많은 분파가 생기게 된 것도 행전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해석학적인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방언을 동반한 성령 세례, 재판을 팔아 모든 물건을 공유하는 행위, 등이 행전을 근거로하여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온 것이다.
사도행전의 석의.
사도행전은 읽기에는 좋은 책이지만, 그룹 성경 공부를 하기에는 힘든 책이다. 이유는 사람들이 사도행전을 대하고 공부를 하게 되는 이유가 저마다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대한 특별한 저마다의 관심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 책을 읽고 공부할 때에 그 내용들을 상당히 취사 선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독자들이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읽고 공부하도록 도와주고, 누가의 관심사를 통해서 그 책을 보도록 도와 주며, 또한 여러분이 읽어가면서 갖게 될 몇가지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고자 한다.
역사로서의 사도행전.
헬라의 역사는 단순히 기록을 보존하거나 혹은 과거의 연대를 기록해 두기 위해서만 기록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역사는 사기를 진작시키고 즐기려는(즉, 좋은 독서감이 되게 하려는) 목적을 위해서, 또한 사실을 알리고 교훈을 주고, 때로는 변증을 하기 위해서도 기록되었다.
누가의 두 권의 책(누가복음과 사도행전)도 이런 유의 역사와 잘 부합된다. 그 책들은 특별히 읽기에 좋다.
그러나 행전의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와 같은 순전히 역사적인 문제만 석의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는 과연 어떤 목적으로 그 자료를 이런 식으로 선별하고 구성해 놓았는가와 같은 신학적인 문제도 포함된다.
누가가 어떤 의도를 가졌는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그 문제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해석학에 결정적인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가 모든 시대의 교회를 위하여 하나의 패턴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갖고서 행전을 기록했다면, 그 패턴은 반드시 규범성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학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누가의 의도나 목적은 해석학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행전을 읽고 석의를 해 나갈 때에 언제나 이 문제를 염두에 두는 것이 특별히 중요하다.
첫단계.
책 전체를 한 번에 통독해 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읽어가면서 관찰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법을 습득하라.
⑴한 번 또는 두 번 사도행전을 통독하라. ⑵읽으면서 주요 인물과 장소, 계속 반복되는 주제(누가가 참으로 관심 둔 것이 무엇인지?), 그 책의 자연스러운 구분 등에 대해 주목하라. ⑶이제 다시 처음부터 대충 읽으면서 앞에서 관찰한 사항들을 간략하게 메모하여 참고하도록 하라. ⑷누가가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라.
사도행전의 개관.
먼저 행전의 자연스러운 구분들을 살펴보자. 행전은 베드로(1-12장)와 바울(13-28장)으로 나누거나 복음의 지리적인 확장(1-7장, 예루살렘;8-10장, 사마리아와 유다;11-28장, 땅끝)으로 구분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행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누가 자신이 제시한 또 하나의 해결방법이 있다.
그것이 전체 내용을 더 잘 연결시켜 주는 것 같다.
①(행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②(행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③(행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④(행16:4)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행16: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⑤(행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야기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될 때마다 이런 요약적인 진술들을 하고 있다. 이런 실마리를 근거로 해서 살펴보면, 행전은 6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①1:1-6:7. 예루살렘의 초대교회에 대한 묘사로, 초기의 복음 전파와 일상적인 삶의 모습, 교회의 확장과 그에 대한 최초의 반대 등을 그리고 있다. 이 부분이 얼마나 유대적인지를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신자와 아람어를 사용하는 신자들간의 분열이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②6:8-9:31. 헬라파 사람들(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또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짐. 최초의 복음의 지리적인 확장에 대하여 묘사한다. 바울의 회심을 말하는데, 그는 ⑴헬라파 사람이었고 ⑵유대인 반대자였고 ⑶특별히 이방에 대한 복음과 확장을 담당한 사람이었다.
스데반의 순교가 이 최초 복음 확장에 열쇠가 된다.
③9:32-12:24. 최초로 이방인에게 복음이 확장된 사실에 대한 묘사. 열쇠는 고넬료의 회심. 고넬료 회심의 의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인정받는 지도자였던 베드로를 통하여 이루어진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였다는 점. 안디옥 교회의 이야기가 포함, 거기서는 이방인의 회심이 이제는 의도적으로 헬라파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④12:25-16:5. 바울이 지도적 위치를 담당한다. 복음이 이방인들까지 포용하게 되었으므로 유대인들이 복음을 공공연히 배척하게 된다.
⑤16:6-19:20. 복음이 서방의 이방 세계로 확장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 복음이 유럽으로까지 확장된다.
⑥19:21-28:30. 바울과 복음을 로마로 가게 하는 사건들에 대한 묘사로, 특별히 바울의 재판 과정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는데, 그 재판에서 바울은 3번이나 무죄한 것으로 선포된다.
여기에 결정적인 요인이 빠졌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매 주요 전환점마다 매 주요 인물마다 성령께서 절대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누가에 의하면, 이런 진행은 모두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뜻을 두셨고, 성령께서 그 뜻을 이루셨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누가의 목적.
1.사도행전을 이해하는 열쇠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처음 유대교에 근거한 예루살렘 중심의 상황으로부터 이방인을 중심한 전세계적인 확장에로 진행해 나간다는 사실에 대해 누가가 관심을 가졌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2.누가는 복음의 진행에 관심이 있었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사람의 생애, 즉 사도들의 전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야고보의 최후에 대해서만 기록하였다. 이방으로 복음이 퍼자게 되면 베드로로 전면에서 사라져버린다.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 사도들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다. 바울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만, 이는 다분히 이방 선교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 누가는 교회의 조직이나 형태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관심이 없다. 행6장의 일곱 사람에 대해서도 집사라고 부르지 않으며, 더욱이 그들이 곧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교회들이 어떤 형태로, 누구의 지도를 받아 어떻게 조직되었는지에 대해 그저 '장로들을 택했다'(14:23)는 말만 할 뿐, 그 이상의 언급은 전혀 하지 않는다.
셋째.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의 한 방면 외에는 다른 지리적인 확장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레데, 본도, 갑바도기아, 비두니아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으며, 동쪽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남쪽으로 애굽으로 교회가 확장된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이 없다. 이는 누가의 사도행전 기록 목적이 단순히 교회 역사 자체를 기록하는 데 있었던 것이 전혀 아님을 말해준다.
3.누가는 어떤 일들을 규격화시키는 일, 즉 모든 일을 획일화시키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개별적인 회심 사건들을 다룰 때, 보통 두가지 요소를 첨가시키곤 하였다. 곧 물 세례와 성령의 강림이다. 그러나 이 두 요소의 순서가 때로는 바뀌기도 하고, 방언에 대한 언급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회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점도 나타나기도 한다.
또 누가는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행했던 것과 유사한 공동체적인 생활을 그대로 따랐는지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고, 암시도 하지 않는다.
이같은 다양성은 어떤 특정한 초대교회의 실례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나 교회 생활에 규범적인 모델이 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누가는 그의 첫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하는 것이다.
4. 그럼에도 우리는 사도행전의 많은 부분들이 누가에 의해서 하나의 모델로 제시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모델은 어떤 특정한 사항들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면모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이 누가를 통하여 행전을 기록하게 하신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활기있게, 승리를 거두면서 앞으로 뻗어 나감으로써 사람이 변화되고 지역 사회가 변화되는 사실이 곧 그 이후 계속 이어지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바로 이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어떠한 것, 즉 산헤드린이나 회당, 편협한 마음, 감옥도 음모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초대교회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는 것이다.
석의의 한 가지 실례.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부분을 읽어서 그 직접적인 전후의 문맥을 살피는 것이다. 서신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문맥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설화 또는 설교의 주제는 무엇인가?
-이 부분은 사도행전의 설화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누가가 이 부분을 설화에 포함시킨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는 것들이다.
그러면 먼저 6:1-7을 살펴보자.
이 단락은 전체적인 흐름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이에 대해 2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이 단락은 사도행전의 첫부분(1:1-6:7)을 결론 짓는 역할을 한다.
둘째. 이 단락은 둘째 부분(6:8-9:31)으로 옮아가는 하나의 전환의 역할을 한다.
또 이 부분은 공동체 내의 첫 갈등에 대해서도 암시를 주고 있다.
당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1)헬라파 유대인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 즉 디아스포라에서 돌아와서 현재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이다.
2)그런 헬라파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만년에 시온산에서 죽어 거기에 묻히고 싶어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토박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죽게 되면 그 미망인들은 삶을 영위할 수단이 끊어지게 되어 있었다.
3)이 과부들은 매일매일 구호품을 받아 생활했는데, 그 구호품을 주는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경제가 아주 압박을 받게 되었다.
4)6:9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의 헬라어를 사용하는 회당을 갖고 있었고, 그 회당에 스데반과 다소(헬라어를 사용하는 길리기아에 위치함, 9절)에서 온 사울이 소속되어 있었음이 분명히 나타난다.
5)초대교회가 이 회당 내로 상당히 잠식해 들어가 있었음이 6장에 나타난다. 자기의 과부들이라고 하는 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택된 7사람의 이름이 모두 헬라어식이라는 사실과 디아스포라 회당에서 강한 반대가 나왔다는 사실.
6)7사람을 집사라고 부른 적은 없다. 그들은 그저 '일곱 사람'(21:8, 개역에는 '집사'로 되어 있지만, 다른 역에는 '사람'으로 되어있다)이라고만 불리워지며, 헬라어를 사용하는 과부들을 위한 매일매일의 구호사업을 감독하는 직무를 맡는 자들이었고, 동시에 말씀의 사역자들(스데반, 빌립)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6:8-8:1에 보면, 그 일곱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예루살렘 밖으로 복음을 확장시키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부각시키고 있다.
누가는 스데반의 순교가 그런 복음의 확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8:1-4).
그러므로 행6:1-7의 설화는 우리들에게 초대교회가 어떻게 성직자와 평신도 집사들을 조직하게 되었는지를 알리려는 데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이 구절은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하였던 교회의 첫 확장의 계기가 된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8:5-25.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첫 번 파급으로 알려진 실제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여기서 설화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간파하기 위해서는 설화를 여러분 자신의 말로 기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음은 우리가 관찰한 것을 요약한 것이다.
8:5-25의 이야기는 차서있게 진행된다.
*여기서 빌립의 최초 사마리아 사역에 대한 보고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 들린 자들을 낫게 하는 기사가 부수적으로 실려있다(8:5-7).
*사마리아인들이 믿고 세례를 받은 것을 보면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런 기이한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하게 되었고, 그때에 비로소 사마리아인들은 성령을 받게 되었다(8:14-17).
여기서 누가의 관심은 2가지이다.
-사마리아인들의 회심과 시몬 사건이다.
사마리아의 회심에 대해 두가지 사실들이 그에게는 의미심장한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복음의 첫 번째 지역적 확장인 사마리아 선교가 사도들의 계획이나 프로그램과 상관없이 헬라파 중 한 사람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점과 (2)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의 독자들이 사마리아 선교가 신적 승인과 사도적 승인을 모두 받은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을 위해 누가는 성령 강림을 사도들이 안수할 때까지 보류해 두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사실은 비록 그것이 교회 성장에 대한 사도의 회의를 거치지 않고 일어난 것이긴 해도, 헬라인들의 선교 사역은 사도의 승인을 받지 않은 이단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누가의 전체 의도와 일치한다.
이런 해석을 하는 이유는 3가지이다.
①베드로와 요한이 당도하기 전에 사마리아인들에 대하여 설명된 모든 것들이 사도행전 다른 속에서 초신자들의 경험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도 실은 기독교인의 생활을 시작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②사도행전의 다른 곳에서도 여기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임재가 기독교인 생활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다. 그렇다면, 이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없이 그들이 과연 어떻게 기독교인의 삶을 시작할 수가 있었을까?
③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성령의 임재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1:8, 6:8, 10:38). 그 임재는 종종 어떤 가시적 증거로 명시된다. 그러므로, 누가가 성령의 '임함', 또는 성령을 '받음' 등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 성령 임재의 이러한 능력적, 가시적 현시가 사마리아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 설화에서 시몬의 역할이 복잡하다. 시몬이 초대교회의 박해자로 널리 알려졌다는 증거는 경외전에서 풍부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누가는 시몬과 기독교 공동체간의 미묘한 관계를 설명하여, 그의 독자들에게 시몬은 신적인 또한 사도적 승인도 받지 않은 인물임을 알리기 위하여 이 자료를 포함시켰음 직하다.
누가의 전체 설화는 시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베드로의 말은 누가가 시몬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에 내린 판단을 반영한다. 그것은 잘못되었다.
우리는 누가의 설화를 석의함에 있어, 그 내용이 무엇이며, 무슨 까닭에 이것을 기록하였는지를 탐구한다는 것이 경건적인 면에 흥미를 가지고 성경을 읽는 분들에게는 불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작업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적절히 경청하기 위해 마땅히 내딛어야 할 첫걸음인 것을 알아야 한다.
사도행전 해석.
행전은 초대교회를 묘사해 줄 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친 교회에 규범을 제시하는 말씀도 포함하고 있는가? 만일 그러한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일반적인 원리들.
여기서 핵심적인 해석학적 문제는 곧 초대교회에 일어난 것을 설명하는 성경의 설화들은 또한 앞으로 올 교회에 반드시 일어날 것을 묘사하는 규범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가라는 문제이다.
사도행전의 여러 예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하여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든지 또는 '우리가 이것을 해도 될까'라고 의견을 타진해야만 할 어떤 규범적인 예들이 과연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주장은 이렇다.
성경이 우리가 어떤 것을 반드시 행해야 한다고 명백하게 서술하지 않는 한 단순히 기술되었거나 묘사된 것은 결코 규범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통상적으로, 성경에서 인출해 낸 교리적 서술은 다음의 세가지 유형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 (1)기독교 신학(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 (2)기독교 윤리학(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 (3)기독교 경험 또는 실천신학(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하는가?).
이런 유형들은 다시 두 종류의 진술들로 구별된다. 그것은 원초적인 진술과 부차적인 진술이다.
원초적인 진술은 성경의 분명한 명제들 또는 명령들로부터 유추한 교리적 진술들이 있고, 부차적인 진술에는 단지 부수적으로 암시나 선례에 의해 유추한 진술들이 있다.
즉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감되었다는 것이 원초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영감의 세부적인 특성은 부차적이다. 부차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부차적 진술이 지닌 궁극적인 신학적 가치는, 그 진술이 원초적 진술과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독교인들이 선례라는 명목으로 성경에서 유추해 내는 거의 모든 것은 바로 우리가 제시한 세 번째 유형인 기독교 경험 또는 실천신학 분야에 속하는 것이며, 언제나 부차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성만찬은 교회 내에서 계속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행사이다. 그것은 원초적인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그것을 명하셨고, 바울서신과 행전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성만찬 준수의 횟수나 그것을 실행한 장소는 다르며, 이것은 전통과 선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단지 그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표명하지 않고 있다.
세례의 필요성은 원초적이나 그 양태는 부수적이다.
이런 논의와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서 의도성에 대한 문제가 있다.
단지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어떤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해석학의 일반 원칙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이렇다고 분명히 의도된 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특히 역사적 설화를 해설하는 데 있어 핵심이 되는 문제이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전체 의도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누가는 예루살렘에 거점을 둔, 유대주의 본위의 유대인 신자들에게 그 기원을 둔 교회 어떠한 연유로 범세계적 현상인 주로 이방인들의 교회로 부각되었는지, 또한 성령께서 이 보편적인 구원 현상을 어떻게 은혜에만 기초를 두면서 주도하시고 계신지를 보여 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성령의 능력을 받은 교회의 이와 같은 전진 운동을 저지할 수 없다}는 반복된 주제를 보면서 우리는 누가가 그의 독자들에게도 이러한 것이 그들 실존의 모델로 간주하기를 의도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누가의 전체적인 의도를 간파하는 데 도움을 줄 목적으로만 제시된 설화 내의 세부적인 사항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세부 사항들도 동일한 교훈을 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가? 이것들도 설화의 모델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이러한 세부 사항들은 설화의 주요 요점에 부수되는 것들이라는 사실과 설화마다 그 세부 사항들이 불명료하다는 사실에 있다.
예를 들면 행6:1-7은 누가의 전체 구조에서 행전의 첫부분의 결론이요, 동시에 헬라인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게된다. 또 이 구절은 기독교 공동체 내의 일고 있던 첫 번째 긴장 관계를 어떻게 평화적으로 해결하였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행6:1-7에서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예를 들면, 교회 내의 소수 그룹을 돕기 위한 최선의 방안은 그들로 하여금 직접 선출한 지도자를 갖게 하는 것 등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누가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누가가 이 설화를 기록할 당시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고 우리가 믿을 만한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러한 이야기에서 어떤 것들을 얻게 되든지간에 그것들은 누가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의 부수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말의 핵심은 그 설화에서 우리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에서 가르치려고 의도한 것과 우선적으로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토대로 역사적 설화에 대한 해석 원리를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다.
1.행전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규범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행전에 기록된 설화들이 의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교훈과 우선적으로 관계하고 있다.
2.설화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에 부수적인 것은 영감을 받은 저자의 사건에 대한 이해를 참으로 잘 반영한 것일 수 있지만, 설화가 의도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교훈적인 가치를 지닐 수는 없다. 부수적인 것이 원초적인 것으로 되어서는 안된다.
3.역사적 선례가 규범적인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반드시 목적과 관계가 있어야만 한다. 만일 주어진 설화의 목적이 선례를 남기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날 수만 있다면, 그 선례는 규범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행6:1-7의 기록 목적이 교회에게 지도자들을 선발하는데 대한 선례로 규범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석의적으로 증명해 볼 때만 후대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따라 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특수 원리에 따라 취급되어야 한다.
특수 원리.
1.오늘날 우리의 행동에 성경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성경의 선례에 근거한 유비를 사용한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예)기드온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을 때 사용한 양털 - 이 행동에 대한 성경적 권위도 없고, 그런 행동을 권장하는 경우도 없다.
2.설사 이제 제시하려는 것이 젖짜의 우선적인 목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성경의 설화들에는 예화와 종종 패턴으로 삼을 만한 것들이 들어있다.
예)바울은 구약의 어떤 예들을 들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경고하였다(고전10:1-3).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행한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윗의 예를 역사적 선례로 사용하였다(막2:23-28).
선례를 들어 현재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경우에서는 그 선례가 특정한 행위에 대한 규범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은 사람이 진설병을 늘 먹을 수 있다거나 안식일에 이삭을 딸 수 있다는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선례는 안식일에 관한 원리를 예증한다.
성경의 선례를 현재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데 사용하려면, 그 행위의 원리가 그러한 가르침의 목적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다른 구절들과 부합하여야만 한다.
3.성경의 선례들은 왕왕, 비록 그것들이 규범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계속하여 반복될 수 있는 패턴들로 간주되는 수가 있다.
특히 실행 자체는 반드시 행해야 할 규범적인 것이지만, 그 양태는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다.
어떤 실행이나 패턴들이 과연 반복되는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 짓기 위한 지침으로서 다음의 사실들을 고찰해 보면 좋다.
첫째. 단 하나의 패턴이 발견되고, 그 패턴이 신약성경 자체 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가장 가능성이 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둘째. 여러 패턴들이 불명료하게 등장하거나 어떤 패턴이 나타나기는 하나 한 번만 나타날 때, 그 패턴은,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인정한 것이라는 증거가 있든가, 다른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할 경우라면, 후기 기독교인들에게 반복적일 수 있다.
셋째. 문화적인 독특성을 지닌 것은 전혀 반복될 수 없든지, 아니면 새로운 또는 상이한 문화로 다시 표현되어야만 한다.
제7장 복음서 - 하나의 이야기, 다양한 면모들.
복음서도 보기에는 해석하기가 대단히 쉬워 보인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논리상 한편으로는 서신서를 해석할 때 사용한 원리를,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설화를 해석할 때 사용한 원리들을 따르면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 쉬운 문제만은 아니다. 복음서는 독특한 문학 장르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런 복음서의 문학 장르에 유비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해석학적 난제들도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해석학적 난제는 '하나님의 나라' 이해와 관련된 것이다.
복음서의 특징.
복음서 해석에 있어서 직면하는 모든 난제들은 다음의 2가지로 말할 수 있다.
1)예수님께서 친히 복음서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 즉 복음서는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었다는 사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기록한 책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책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교훈을 대단히 많이 수록하고 있다.
2)복음서는 4개가 있다는 사실. 이런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행전에 대해서는 4권을 갖고 있지 않다. 또 처음 세 복음서의 자료들이 거의 유사하여, 우리들은 이들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고 부른다.
네 권의 복음서가 존재하는 이유는 곧 예수님에 대한 책을 필요로 하는 각기 다른 기독교 공동체들이 존재하였다는 데에 있다. 하나의 어떤 공동체나 신자들의 모임을 위해 기록된 복음서가 또 다른 공동체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준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의 복음 - 가장 일반적인 견해로서 기록된 마가복음 - 이 먼저 기록되었고, 그 복음이 상당히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여러 이유들 때문에 '재기(再記)'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다.
이들 복음서와 별개로 요한은, 여전히 또 다른 일련의 이유들 때문에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종합적인 역사로써 이루어졌다.
각 복음서는 동일한 가치와 동일한 권위를 지닌 것으로서 서로 병존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왜냐하면, 매 경우마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두 차원이었기 때문이다.
첫째, 순전히 역사적인 관심으로서,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가 무엇을 말씀하셨고, 행하셨는가에 치중한 차원이다.
둘째, 실존적 관심으로서, 아람어가 아니라 희랍어를 사용하며, 또한 기본적으로 농가나 농경적 유대 배경이 아니라, 로마, 에베소, 안디옥 등과 같이 도시의 이교 환경 가운데에 있으면서 복음에 접촉하게 된 후대 공동체들의 필요를 위해 이 이야기를 다시 말하게 된 차원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복음서들은 이미 우리들에게는 해석학적 모델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복음서는 부분적으로는 전기적이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전기집은 아니다. 또 복음서는 비록 가장 위대한 사람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긴 하지만, 위대한 사람에 대한 당대의 '일대기'와 같지는 않다.
복음서는 '사도들의 회고록'이다. 4개의 전기가 동일한 가치를 지닌 채 나란히 설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책들은 나란히 서 있으니, 그것은 이 책들은 일제히 동시에 예수님에 관한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회상시켜 주며, 각각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서들의 특성이요, 특징이며, 이러한 사실이 석의나 해석학에 있어 모두 중요한 요인이다.
역사적 배경.
역사적 배경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 자신과 관계가 깊다. 여기에는 1세기의 문화와 종교에 대한 인식, 그 분이 사셨고 가르치셨던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에 대한 인식, 그리고 교훈을 하시거나 비유를 말씀하실 때의 특별한 배경에 대한 이해력 등이 포함된다.
또 역사적 배경에는 복음서 저자들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와 그들이 복음서를 쓰게 된 이유나 목적에 대한 이해도 포함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처한 역사적 배경 - 일반적 고찰.
역사적 배경 분야에서 특히 중요한 양상인데도 종종 간과되었던 것은 예수님의 교훈의 형식에 대한 문제이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예수님은 누누이 비유로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의미 심장한 과장법 사용의 명수이셨다.
예수님이 처한 역사적 배경 - 특수 고찰.
복음서의 내용은 개별적인 이야기 또는 어록들로 전달되어졌다. 이 어록들 중 대부분은 그 원래의 상황 그대로 전수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단편적 어록들을 선언적 이야기라 칭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설화 그 자체는 단지 설화를 결론 짓는 어록을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어록들이 전후 문맥이 없이 복음서 기자들에게 전래되었고, 복음서 기자들이 친히 성령의 인도하에 이 어록들에 그들의 이 문맥들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복음서를 읽을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가르침을 하실 때 그 청중들은 과연 누구였겠는가? 그와 가까이 있던 제자들이었나? 아니면 수많은 군중이었는가? 아니면 그의 적대자들이었는가?
예수님께서 처한 역사적 배경을 발견하고, 그의 교훈의 대상이 되는 청중을 안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근본적인 의미를 아는 데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에 대한 지식은 독자의 관점을 넓히고 심지어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요점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이 처한 역사적 배경.
복음서 자체는 출처가 어디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각 복음서 기자들이 그들의 자료를 선정하고 정리하여 배열한 방법에 의해 그들의 관심과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신할 수 있다.
예)마가복음은 특별히 예수님의 메시야직의 특성을 설명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마가의 관심은 예수님의 메시야직을 고난받는 종으로 그리고 있다는 사실은 막8:31-33의 예수께서 그의 고난을 처음으로 설명하시기 전까지 예수께서 가르치신 바 제자도에 관한 교훈을 하나도 싣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훨씬 더 분명해진다.
문학적 배경.
문학적 배경은 복음서의 각 문맥에서 특정 단편 단위의 위상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복음서에 있는 수 많은 자료들이 현재의 문맥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가 복음서 기자들이 성령의 영감에 따라 배열한 까닭에 있다.
이 항목에서 우리가 제시하려는 바 목적은 다음과 같다.
1)독자들이 복음서의 현문맥에 위치한 각 설화들을 해석하거나 읽을 때, 그 이해력을 증진시키는 일,
2)복음서의 전체 구성의 특성을 이해시켜, 복음서의 한 부분을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제반 사실들과 상관없이 해석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개별 단편들을 해석하기.
서선서 해석 원리에 적용된 '문단별로 생각하는 법'은 복음서에서는 그리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지 않는다. 복음서는 고유한 성격 때문에 다음의 두가지 사실을 고려하여야만 한다.
수평적으로 사고하는 것과 수직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수평적으로 사고하는 것 - 우리가 어떤 한 복음서의 단편을 연구할 때, 우리는 다른 복음서에 있는 병행 구절들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하나님께서 4개의 복음서를 주셨다는 것은 그 복음서들을 각기 독립적으로 읽는 것은 정당한 일일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병행적으로 복음서를 연구하는 목적은 어떤 사실들을 조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각 복음서의 특징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수평적으로 사고해야 할 기본적인 이유는 두가지이다.
첫째. 병행구들은 종종 우리들에게 각 복음서의 특징을 인식하게 해 줄 것이다.
둘째. 그 병행구들은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또는 유사한 자료들이 그후 교회들에서 존속했던 각기 다른 종류의 문맥들을 인식하도록 해 줄 것이다.
이처럼 복음서의 병행 구절들을 인식하고 있으면, 동일한 자료들이 왕왕 초대교회에서 어떻게 새로운 문맥에서 각기 다르게 사용되었는지를 아는 데 도움을 얻을 수가 있다.
*수직적으로 사고하는 것 - 수직적으로 사고한다는 말의 의미는, 복음서의 설화나 교훈을 읽거나 연구할 때, 두 역사적 배경 - 예수님께서 처한 역사적 상황과 복음서 기자가 처한 역사적 상황 - 을 모두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경고:수직적으로 사고하는 목적은 역사적 예수의 생애를 연구하고자 함이 아니다. 현재의 형태로 된 복음서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스스로 재구성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건전한 해석이란, 어떤 주어진 본문을 현재 기존한 성경의 문맥 속에서 이해하기 위한 적절한 입문으로서 먼저 그 본문이 처한 원래의 역사적 배경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할 것을 전제로 한다.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는 주인에 자기의 관용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대가는 공정 원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고 말씀하신다.
이 비유가 원래 상황에서는 아마도 예수께서 죄인등를 용납하시고, 이 행동에 대해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을 것이다. 즉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종일토록 수고와 더위를 견딘' 자들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더 많은 삯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그러우시며 은혜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가 '의인들'을 용납하시는 것과 똑같이 죄인들을 기꺼이 용납하시는 것이다.
본 비유의 요점은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관용이다. 그러나 마채복음에서는 이 비유가 제자도의 문맥에서 사용되고 있다. 즉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간 자들은 나중된 자들이었으나 먼저 된 자들이다.
복음서를 전체로서 해석함.
여기서는 독자들이 복음서를 읽고 연구할 때, 복음서 기자가 가지고 있던 저작 관심과 방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는데 있다.
복음서가 기록되는데 작용한 두가지 원칙들이 있다.
선별과 각색이다. 한편으로, 복음서 기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입은 저자들로서 그들의 목적에 맞는 설화들과 교훈들을 선별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선별하는데에는 굉장히 신중했음을 요한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동시에 복음서 기자들과 그 교회들은 그들이 선별한 것들을 또한 각색하도록 하는 특별한 관심들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요한은 우리들에게 특별히 그의 목적이 신학적이었음을 공공연히 알려주고 있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또 예수님이 유대의 메시야라는 이런 관심은 요한의 대부분의 자료가 예수님의 유대와 예루살렘 사역을 다룬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런 각색의 원리는 복음서들 사이의 상위점들을 대부분 설명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그 상위점 가운데 가장 알려진 것들 중 하나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사건이다.
마가복음의 무화과 나무 저주 이야기는 상징적인 신학적 의의를 위해 쓰여졌다.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사건과 그 나무가 마르기 시작한 사건 사이에 예수께서는 성전을 정결케 하심으로써 유대주의에 동일한 심판을 선언하시고 계신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신앙에 관한 교훈이 본 이야기의 유일한 관심사이다.
그래서 마태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것과 마른 것을 신앙 강조를 위해 함께 연결시키고 있다.
또 매 경우마다 무화과 나무 이야기를 전하는 일은 두 복음서 기자들 모두 영감하신 성령의 사역임을 기억하라.
막1:14-3:6의 예증을 보기로 하자.
마가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예수님의 공적 사역에는 세 단계가 있다.
⑴군중들에게 인기를 얻으시던 때
⑵소수에게 제자됨에 대하여 가르치시던 때
⑶그리고 고위직에 있는 자들로부터 반대를 받으시던 때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선언(1:14-15)이 있은 후, 처음 설화는 처음 제자들을 부르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 주제는 3:13-19, 4:10-12, 4:34-41 등에서 계속 세분화되고 있다.
*1:21-2:45에는 네 개의 단편들이 있다. 가버나움에서의 하루, 다음날 있는 짧은 설교 여행, 그리고 문둥병자를 고친 이야기 등. 이 부분의 전체적인 공통적 주제는 예수님의 명성과 인기가 급속도로 퍼진다는 것이며, 그 인기는 예수께서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1:45)는 구절로서 그 절정에 달한다.
그리고 여기에 마가는 거듭거듭 사용하는 문구인 '그리고 곧'(1:21, 23, 28, 29, 31, 42절<개역성경에 이 문구가 빠져있다>)과 마가가 매 문장을 시작할 때마다 사용한 접속사 '그리고'(이것도 역시 개역 성경에는 생략)가 있을 뿐이다.
*마가는 5개의 다른 유의 설화들을 선별하여 반대 장면을 묘사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처음 네 단편들에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말은 '어찌하여'라는 의문사이다(2:7, 16, 18, 24).
해석학적 관찰들.
교훈들과 명령들.
복음서들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교훈들과 명령들을 20세기의 문맥에 옮겨 놓아야만 한다.
예수께서 현세대와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하셨던 말씀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추측하기에 앞서 그 추측이 올바른 것인지를 조심스럽게 검토해 보아야만 한다.
우리에게 오리를 가자고 강요하는 로마 병사는 없다(마5:41). 그러나 이 경우에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기독교인의 호의'로서 이것과 비교될 만한 수 많은 상황 속에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다.
물론 여기서의 명령은 기독교인이 되거나 또 기독교인으로 남기 위하여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는 율법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것들에 완전히 순종하는데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용납하셨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삶은 마땅히 어떠한 삶이 되어야 할지를 묘사한 것이다.
먼저는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무한정한 사죄함이요, 그 다음에는 우리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무한정한 용서함이 뒤따라야만 한다.
기독교에서 종교는 은혜요, 윤리는 감사이다. 예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사랑받고 구속함을 받은 자녀로서 마땅히 살아야 하는 새로운 삶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설화들.
설화들은 복음서들 내에서 한 가지 방법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다. 예로 이적 이야기들은 도덕적인 교훈을 제공하거나 선례를 남길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이적 이야기는 예수님의 사역 속에 표출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활기있게 예증하는 역할을 한다.
부자 청년의 설화에서,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들의 소유를 다 팔아야만 한다는 것이 그 이야기의 요지가 아니다. 오히려 부자 청년 이야기는 부자가 먼저 물질에 철저히 고착되어있고, 그것으로 안전을 유지하려는 애를 쓰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부자들에게도 이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대단히 중요한 조언.
누구든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 개념을 분명히 이해하지 않고는 복음서를 정당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지 말라.
먼저, 독자는 전체 신약성경의 기본적인 신학적 구조는 종말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 당대 많은 유대인들은 종말론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
유대인의 종말론적 희망은 아래와 같다.
종말의 도래는 새로운 시작 - 하나님의 새 시대의 시작과 메시야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 새 시대는 하나님 나라를 지칭하기도 한다. 새 시대는 의의 시대이며,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것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오셔서 그의 사역과 함께 도래할 그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언하셨다(막1:14-15, 눅17:20-21).
사람마다 과연 그가 참으로 오실 그이인가 하고 그를 계속 주시하였다. 그가 참으로 그 모든 영광으로 메시야 시대를 도래케 할 것인가? 그런데, 그는 돌연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그 빛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살아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셨고, 성령의 충만함, 상징과 기사들이 있었지만, 종말은 분명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러므로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그 종말은 아직 충만히 임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종말은 이미와 아직의 구조속에 있다.
신약성경의 많은 가르침, 특히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을 이해하는 해석학적 열쇠는 이러한 '긴장'을 발견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의 때가 예수님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활하여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를 은혜로써 용납하시고, 죄를 사하여 주신 그 분의 주되심 아래에서 생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 윤리가 우리들의 생활과 이 현시대의 세상 속에서 역사하도록 해야 한다.
제8장 비유 - 비유의 요지를 알고 있는가?
간략한 비유 해석사.
예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비유는 예수님의 측근들에게는 비밀을 담고 있는 것인 반면, 그렇지 못한 외방인들에게는 강퍅케 하는 것임을 암시하신 듯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깨닫기를 원하여서 비유를 내셨다.
비유를 이해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는 비유를 처음 들은 원래 독자들을 밝히는 일이다.
비유의 특성.
그 종류의 다양함.
비유라고 말하는 것이 다 같은 종류가 아니다. 예컨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이는 참 비유라 할 수 있는데-와 누룩 비유-이는 직유이다-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참 비유는 시작과 마침이 있는 완전한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줄거리에 해당하는 것이 들어있다.
그러나 누룩 비유는 직유라고 하는 것이 더 낫다. 이러한 비유들은 일상 생활 가운데서 취한 예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비유들이 모두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비유 모두에 해당되는 어떤 규칙을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비유의 역할은 무엇인가?
비유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좋은 실마리는 비유의 역할에서 발견된다. 비유 그 자체는 메시지이다. 비유를 말한 이유는 청중들에게 교훈을 주며, 그들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재고해 보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한 어떤 방도로든지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반응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비유 석의.
비유가 언급하고 있는 것들의 요지를 찾아냄.
눅7:40-42의 비유를 예로 들어 설명하여보자.
(눅7: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눅7:41)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눅7: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여기서는 예수께서 시몬이라는 한 바리새인에게 저녁 식사를 초대 받은 것이 이 비유의 배경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초대는 유명한 랍비가 방문한 것과 같은 영예로운 초대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예수님께 흔히 누구에게 베풀 수 있는 호의도 베풀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깎아 내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성읍의 창녀가 간신히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서는 여자의 자존심도 버린 채 엎드려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던 것이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사항은 3가지이다.
돈을 빌려 준 자와 두 빚진 자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도 분명하다. 하나님은 돈을 빌려 주는 사람과 같다. 그 성읍의 창녀와 시몬은 각각 두 빚 진 자와 같다. 이 비유는 시몬으로부터 어떤 반응을 요청하는 심판의 말씀이다.
시몬은 이 비유의 요지를 거의 놓칠 수는 없을 것이다. 비유가 끝났을 때 그는 창피하여 얼굴이 벌개졌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유의 위력이다.
비유에 등장하는 것들은 단지 청중을 비유로 이끌기 위한 이야기의 부분들에 지나지 않으며, 청중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그것들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를 찾아야만 한다.
이 비유에서는 시몬과 그 친구들에게 내린 심판의 말과 창녀에게 내린 그녀를 용납함과 죄사함이 이야기의 요지이다.
청중이 누구인지를 밝힘.
청중이 복음서에 기록되었을 경우, 해석의 과제는 다음 세 가지 점들을 종합하는 일이 될 것이다.
1)비유를 반복하여 읽는 일.
2)예수께서 원래의 청중들이 간파하기를 기대하였던 내용을 찾아내는 일
3)원래의 청중들이 그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였어야 했는지, 또 그들이 무엇을 들었어야만 했는지를 결정하도록 노력하는 일 등이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율법 학자에게 베풀어진 것이다.
비유를 여러 차례 읽어 보더라도 그 율법 학자가 질문한 것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인상적인 방법으로서 비유는 그 율법사의 독선적인 자기 의를 폭로한다. 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알고 있었고, 그는 그가 아주 경건하게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할 만한 용어로 '이웃'의 의미를 규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2개 뿐이다. 그것은 위기에 처한 사람과 사마리아인이다.
1)다른 편에서 그냥 지나간 두 사람은 제사장 부류로, 율법에 정통한 랍비들과 바리새인들과는 대척적인 종교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다.
2)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푼 것은 바리새인들에게는 중대한 사건이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있다는 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하신 비유의 요지는 두 번째 큰 계명인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율법사는 어떤 한계 내에서만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는 몹시 좁은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하신 일은 그의 선입견과 그의 마음의 증오를 폭로하셨다.
그럼으로써 그는 이 계명을 진정으로 순종하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의 사랑의 결여는 사마리아인들을 증오하고, 또 제사장들을 경멸한다는 사실에 있다.
탕자 비유.
이 비유의 배경은 예수께서 악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을 용납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린 데 있다.
이 비유의 요지는,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들을 은혜롭게 사하실 뿐만 아니라, 큰 기쁨으로 그들을 용납하신다는 것이다.
형은 아버지가 잃은 아들에 대하여 쏟는 사랑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역사적 배경이 없는" 비유들.
원래의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하는 비유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문제는 비유가 언급하고 있는 것과 원래의 청중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유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가 떠오를 때까지 비유를 재삼 읽는 것이다.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언급하는 바는 단지 3가지이다. 집주인, 하루 종일 일한 품꾼들, 한 시간만 일한 품꾼들.
이 이야기를 듣고 가장 가슴이 뜨끔했던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당연히 하루 종일 일한 품꾼들이다.
이 비유의 요지는 탕자의 비유와 흡사하다. 하나님은 자애로운 분이며, 의인들은 하나님의 관대함을 시샘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기 마태의 문맥에서는 제자도를 가르치는 문맥에서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
하나님 나라의 비유란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으니...'로 표현된 비유들을 말한다.
첫째, 이끄는 말,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으니...'는 비유에 언급된 첫 번째 요소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도 상인도 밭에 감추인 보화도 아니라는 말이다.
문자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것에 비유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전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특성에 관한 어떤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둘째. 이 비유들은 예수님의 초대와 제자됨의 요청에 반응을 촉구하는 메시지의 수단이었다. 씨뿌리는 자 비유를 예로 들어보자. 네 종류의 토양은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한 네가지 각기 다른 반응과 같다. 그러나, 이 비유의 핵심은 시간의 긴박성에 있다.
이 말씀이 너희 앞에 있다. 그러므로, 듣고 주의하라. 열매 맺는 토양이 되라.
이 비유의 중요 사상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하였고, 하나님의 때가 가까웠다. 그러므로, 현재의 순간은 대단히 긴박한 순간이다.
예수님의 선포에 있어 이같은 긴박성은 이중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다.
1)심판이 임박하였고, 재앙과 파국이 문앞에 이르렀다.
2)그러나 기쁜 소식이 있다. 그것은 구원이 모두에게 골고루 주어진다는 것이다.
눅12장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에서는 종말이 바로 문전에 다가왔는데, 자기의 소유나 자기 안보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라면,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임을 지적한다. 예수님께서 지적하고자 하시는 바는 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현재 상황에서는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16장)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의 긴박성으로 도전하시는 것이다. 청지기는 임박한 재난을 준비하기 위하여 행동했다. 자기의 처지에 대비하여 어떤 것을 행하였다. 너희들도 마찬가지이다. 긴급한 때이므로 행동을 취하라고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
1.행동, 즉 회개를 요청하는 긴급한 때는 또한 구원의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는 기쁜 소식이기도 한 것이다. 마13장에는 쌍둥이 비유들(밭에 감추인 보화와 극상품 진주 비유)은 발견의 기쁨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농부에게 엄습해 오고, 상인은 그것을 추구한다. 그들은 보화와 진주를 사기 위하여 기쁨으로 그들이 가진 것들을 청산한다.
하나님 나라는 보화도 진주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나라를 발견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다.
해석학적 질문.
비유의 해석학적 과제는 특이한데, 그것은 곧 비유가 본래 말하여졌을 때에는 해석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비유는 청중들에게 즉각성을 지녔고, 많은 비유의 효과는 청중을 사로잡을 능력이 있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비유가 우리에게는 기록된 형태로 전해졌고, 우리는 원래의 청중들이 가졌던 비유가 언급하는 바를 즉시로 이해치 못하기 때문에 비유는 정확히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작업을 해야 하는가?
1.우리는 기본적으로 성경의 현 문맥에 위치한 비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태가 한 것처럼(예컨대, 마18:10-14; 20:1-16) 동일한 가르침을 우리의 상황 속으로 번안하는 일이다.
2.예수님의 모든 비유는 어느 방도로든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수단이라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독자는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의미에 흠뻑 젖을 필요가 있다.
제9장 율법서-이스라엘의 언약 규정.
구약 성경 39권 중 단지 네권만이 육백 남짓한 계명들을 포함하고 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그래서 이 책들은 율법서로 알고 있다.
물론 창세기를 포함해서 말할 수도 있다.
신약에서 실제로 구약 성경을 의미하면서 '율법'으로 언급된 적이 여러번 있으며, 이럴 경우, 구약의 대부분의 책들은 모세오경의 율법을 예증하거나 적용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대개 율법이라고 말할 때, 출애굽기 20장에서 신명기 마지막까지의 일단의 내용 체계를 의미한다.
출20장에서 신33장의 주요 내용은 법적 형식으로 되어있어, 우리는 이것을 구약 율법이라고 부른다.
이 계명들에 대하여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안고 있는 가장 어려운 문제는 해석학적 문제이다. 이 법적 형식을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아니 적용해도 되는가?
기독교인과 구약 율법.
여러분은 기독교인으로서 구약 율법을 지켜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제단 위에 동물을 올려 놓고 드릴 만한 성전이나 중앙 성소도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만일 구약 율법을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왜 예수께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이라고 하셨는가?
여기 기독교인과 구약 율법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6가지 기본적인 지침을 제안하겠다.
1.구약의 율법은 언약이다. 언약은 두 명의 당사자 사이에 체결된 계약으로, 쌍방 모두 언약에 명기된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구약 시대에는 많은 언약들이 종주권 언약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즉 봉신은 군주에게 충성하고 군주는 봉신에게 혜택과 보호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봉신이 어떻게 충성을 보여줄 것인가? 그것은 언약에 명기된 규정들을 지킴으로써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대 언약들과 흡사한 방식으로 구약의 율법을 제정하셨다. 그리하여 주 야훼와 그의 봉신 이스라엘 사이에 결 속의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받은 혜택과 보호에 보답하여, 우리가 출20장에서 신명기 33장에 걸쳐 발견하는 언약 율법에 포함된 육백 남짓한 규정들(즉, 계명들)을 지켜야만 했다.
2.구약은 우리의 언약이 아니다. 구약은 옛 언약이며,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지킬 의무가 없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옛 언약의 규정들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새 언약에서 다시 새롭게 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전혀 구속력이 없다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즉 구약의 율법이 어떤 방도로든지 신약 성경에서 재천명되거나 재언급되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에게 직접적인 구속력은 갖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인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였었던 것과는 다른 순종과 충성의 표들을 기대하신다.
충성 그 자체는 여전히 기대외어진다. 그러나 그 충성의 방식은 바뀌었다.
3.옛언약의 규정들 가운데 새 언약에서 분명하게 갱신되지 않은 것들도 있다.
모세 오경의 대부분 율법들을 두 부문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부문 중 어느 것도 기독교인들에게는 더 이상 해당되지 않는다.
이 부류에 속하는 율법은 (1)이스라엘의 시민법과 (2)이스라엘의 의식법이다.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고대 이스라엘의 시민이 아니다. 또 의식법도 예수께서 단번에 그리고 영원한 효과를 지니는 제사를 드렸을 때, 이 옛언약은 즉시로 구시대의 것이 되고 말았다.
비록 새 언약의 방법대로 예배는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옛 언약은 더 이상 기독교적 예배 방식이 되지 않는다.
새 언약이 옛 언약과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성경의 언약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우리가 여전히 율법 아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눅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눅16: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은, 율법은 변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옛 율법을 없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취시키는 새 율법을 주셨다. 새 율법 또는 새 언약은 그것을 지킨 자들에게, 옛 언약을 엄격히 지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훨씬 뛰어난 의를 줄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전 율법을 성취하셨으며, 새 율법인 사랑의 법을 주셨다.
4.일부 옛 언약이 새 언약에서 갱신되었다.
일부란, 구약의 윤리적인 법의 어떤 국면들이 신약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재서술된 것을 가리킨다.
율법은 새 언약의 두가지 기본 법에 지탱하고 있다.
(마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율법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양상들이 옛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갱신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직접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기속적인 의무로서 부가되는 것은 단지 제율법들의 양상들이기 때문이다.
5.구약성경의 모든 율법들은, 설사 그것이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아니라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에는 개인적인 말씀은 아닐지라도 필히 알아야 하는 하나님의 갖가지 명령들이 포함되어있다.
이같이 구약의 율법을 처음 들은 원래 청중들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우리는 율법이 뜻하는 바를 알고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직접 주는 율법은 아니다.
6.구약의 율법으로부터 분명하게 그 의미가 새로워진 것만이 신약의 '그리스도의 법'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다(갈6:2).
이런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십계명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신약에서 여러 면으로 기독교인들을 여전히 구속하는 계명으로 인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성경 내에서의 율법의 역할.
율법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갈3:24), 하나님의 의의 표준이 얼마나 높으며 누구라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이 표준들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줌으로써, 구원의 역사 속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율법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바로 이런 식으로 작용하였다. 율법 그 자체가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율법은 단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충성의 서약을 표명하고 있을 뿐이다.
절대 당위법.
'..을 하라' 또는 '...을 하지 말라' 등으로 시작하는 명령들을 절대 당위법이라고 칭한다. 이 계명들은 일반적으로 적용하여야 할 직접적인 명령들이다. 그러나, 이 율법이 모든 것을 다 포괄하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율법은 모델로서 하나의 예로 표준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율법에는 모든 가능한 상황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지 않다.
율법에 서술된 것들은 일반적인 적용과 함께, 신뢰할 만한 지침을 주려는 것이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상황들에 대해 전문적으로 서술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그 정신에 있어서는 매우 포괄적이다.
*율법은 우리들에게 독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를 보여준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우리는 구약의 율법을 읽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기에는 얼마나 무가치한 자인가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결의법
'(신15:12)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 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 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신15:13)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신15:14)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신15:15)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 (신15:16)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신15:17)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지니라'
위의 율법 안에 있는 요소들은 조건적이다. 이런 율법은 오직 다음의 경우에만 적용된다.
1)당신이 이스라엘인으로서 최소한 한 명의 종을 가지고 있을 때,
2)당신이 이스라엘인으로서 종을 소유하되, 당신의 종이 법적 기한이 지난 후에 자원하여 당신의 종으로 계속 남기를 원하든지 아닐 경우이다.
이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이는 특정한 때, 특정한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조건적이다.
이런 결의법이 모세오경 법전에는 육백 여개의 계명들이라는 많은 분량을 이루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들 가운데 어느 것도 새 언약에 분명하게 갱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율법들은 특정한 이스라엘의 시민, 종교, 윤리 생활에 적용되었기 때문에, 적용면에서 대단히 한정적이다.
그런 이유로 기독교인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결의법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해석학적 원리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는가?
첫째. 우리가 개인적으로 종들을 가지지 않을 수 있지만, 옛언약 아래서 하나님께서 종 제도를 내신 것이 잔인하다거나 가혹한 규정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종을 단지 육년만 섬기게 하다가 놓아줌으로 한계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종들에게 사랑을 베푸셨음을 배운다. 하나님은 종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행하신 것처럼, 종들에게 관용을 베풀 것을 요구한다.
셋째. 노예, 종들이 실제로 자유하기보다는 종으로 있는 것이 더 지내기 편하다고 할 정도의 관용적인 방법으로 실행될 수 있었다. 곧 종의 주인은 그의 종들에게 음식과 의복과 주거지를 공급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종들의 생존과 복지를 잘 유지시켰음을 뜻한다.
넷째. 종을 소유한 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 종을 소유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종의 주인과 종의 소유자였다.
신15장의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 그의 공평성 요구, 이스라엘 사회를 향한 그의 이상, 그리고 특별히 '구속'의 의미와 관련하여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 등에 대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데 있다.
이런 점에서 율법은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제공해 준다.
(1)구속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의 배경에 되는 중요한 부분.
(2)구약의 노예제도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노예제도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명백한 상.
(3)우리가 달리는 가질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관점 등.
즉 이 법문은 명백히 우리에게 직접 적용될 수 있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니지만, 여전히 우리를 향한 귀중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율법들은 철저한 상황 묘사보다는 백성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예들을 보이고 있다.
구약의 법은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백성들에게 제시한 표준의 종류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 할 경우, 훌륭한 교훈을 주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과 여타의 고대 법전.
고대 국가들이 사용한 초기 법전들을 구약의 율법과 비교해 볼 때, 구약 율법이 훨씬 진보된 것임이 드러난다.
에쉬나 법전이나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계급 차별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종이나 서민의 죽음에 대한 처벌로서 단지 벌금형을 부과한 반면, 귀족의 일원의 죽음에 대해서는 사형을 가하고 있다.
여자에게 해를 끼쳤을 경우, 귀족의 남자들은 일신상의 처벌은 면제되었다.
심지어 귀족의 남자가 다른 귀족의 딸을 죽게 하였을 경우에도 그 자신의 처벌은 받지 않고, 대신 그의 딸이 죽음을 당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24:16) 아비는 그 자식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법전들은 여자와 종들은 재산으로 취급한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법은 이들 법전들보다 윤리적으로 훨씬 앞서 있다. 살인 금지는 성(性) 또는 사회 계급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또 종들은 구약의 율법하에서 고대의 율법하의 종들의 지위와는 전혀 다른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신23:15) 종이 그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 주인에게로 돌리지 말고 (신23:16) 그가 너의 성읍 중에서 기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 거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은전(恩典)인 구약 율법
영생과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의를 제공하는 능력에 관한 한 율법은 상당히 불충분한 것이다. 율법은 이런 목적 때문에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 자체의 목적들을 정당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게되면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익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음식법.
'(레11:7)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이런 음식법은 강한 보호의 의미가 있다.
대부분의 금지된 음식들은
1)시내 광야나 가나안 땅의 건조한 기후 가운데서 질병을 옮기기 쉬운 것들, 또는
2)시내 광야나 가나안 땅의 특정한 농업 환경 속에서 음식물로는 아주 비경제적으로 사육한 것들,
3)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본받아서는 안되는 집단이 실행하는 종교적 제사에 선호하는 음식들이다.
더욱이 음식 알레르기는 인종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 볼 때, 음식법은 이스라엘을 어떤 알레르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음식 알레르기 전문가에 따르면, 많은 주요 고기들 가운데서 가장 알레르기가 적은 것이 양이었다.
피흘림에 관한 법.
(출29:10) 너는 수송아지를 회막 앞으로 끌어오고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 송아지 머리에 안수할지며 (출29:11) 너는 회막문 여호와 앞에서 그 송아지를 잡고 (출29:12) 그 피를 네 손가락으로 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단 밑에 쏟을지며
죄는 심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법을 통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한 사람은 살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하지만 또 죄인이 죽음을 모면할 절차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대리자의 피를 흘림으로써 가능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신 희생을 요구하는 율법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의 전례가 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요구를 이룬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는 기초가 된다.
색다른 금지들.
'(신14:21) ........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레19:19)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이 율법들과 다른 금령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백성들의 번식 숭배에 연루되는 것을 금지할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가나안 사람들은 '교감술'을 믿고 있었다.
이것은 어떤 상징적인 행동이 신들과 자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상이다.
그들은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과 함께 삶게 되면 마술적으로 염소떼의 지속적인 번식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하였다. 동물을 혼배한다든가, 종자를 섞어 뿌리고, 두 재료로 직조하는 행위들은 서로 '혼인하는 것'으로 간주, 마술적으로 그 열매를 생산하는 장래에 농작물의 풍성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복을 주는 법.
'(신14: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신14: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이스라엘의 모든 법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의 방편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법들은 특별히 그것을 지키면 복을 줄 것이라고 언급한다.
십일조에 대한 신명기 14장이 그렇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알리셨다.
만일 이 명령이 그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돈을 도적질한 것이 된다.
이 법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며 - 구약의 사회 보장 제도는 잘 설정되었다 - 동시에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잘 돌보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다.
요약:몇 가지 지침 및 주의 사항.
1.구약의 율법을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영감된 말씀으로 생각하라. 구약의 율법을 당신에게 직접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생각하지 말라.
2.구약의 율법을 옛 언약의 기초요, 그러한 까닭에 이스라엘 역사의 기초로 생각하라. 구약의 율법을, 그것이 특별히 갱신되지 않았으면 새 언약 가운데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구속력 있는 것으로 생각지 말라.
3.구약의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공의, 사랑, 그리고 지고의 표준들을 생각하라. 하나님의 자비는 표준들의 엄격함과 대당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4.구약의 율법이 완전하다고 생각지 말라. 그것은 기술적으로 전포괄적이지 않다. 구약의 율법을 페러다임(모범)으로 생각하라. 그것은 광범위한 상황이 예상되는 행동들에 대한 예들을 제시한다.
5.구약의 율법이 선지서들이나 신약에서 자주 인용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율법의 정수는 선지서들에서 반복되며 신약에서 갱신되었음을 기억하라.
6.구약의 율법은, 순종할 때 더 많은 복을 가져오는, 이스라엘의 은혜로운 선물임을 알라. 구약의 율법을 백성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임기응변적이고 귀찮은 규율들의 일단으로 생각지 말라.
제10장. 선지서-이스라엘 내의 언약 시행.
예언의 성격.
선지서들이야말로, 성경 가운데서 해석을 하거나 읽고 깨닫는데 가장 난해한 부류에 속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유는 예언서의 역할과 형식에 대한 제반 오해들과 관련이 있다.
예언의 의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언을 사전에서 정의하는대로,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 예고 또는 예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 예언의 2%미만이 메시야 예언이고, 5%미만이 특별히 새 언약의 시대를 묘사한다. 1%미만이 장차될 사건들과 관련있다.
선지자들이 미래를 선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선포한 것은 우리들의 미래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유다 그리고 그들 주위에 있는 다른 나라들의 긴박한 미래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선지서를 이해하는 열쇠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들에게는 선지서의 예언들은 성취되었음을 아는 것이다.
대언자로서의 선지자들.
선지자들의 최우선의 역할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과 동시대인들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대언적 성격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수백 명의 선지자들 가운데서 단지 16명만 예언을 말하고, 그것을 수집하여 책에 기록해 두도록 선택함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들 선지자들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그들이 실제로 한 말들보다 더 많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말한 것보다 그들이 행한 것이 훨씬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구약의 설화책들 가운데서 일반적으로 듣는 것은 선지자들에 관한 내용이지, 선지자들로부터 직접 말을 듣는 것은 극히 드물다. 반대로 선지서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으며, 선지자들 자신에 대하여 듣는 바는 적다.
또 선지서는 긴 책을 담숨에 읽는 것이 어렵다. 왜냐하면 긴 선지서들은 대언한 예언들을 수집해 놓은 것인데, 이들은 원래 연대기적 차서대로 제시되지 않은 것이 태반이며, 어디서 한 예언이 끝나며, 어디서 또 다른 에언이 시작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그 예언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암시가 전혀 없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문제.
선지서의 이해를 복잡하게 하는 또 다른 문제가 역사적 괴리의 문제이다. 이스라엘에게는 분명한 것이 우리들에게는 불명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그런가?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역사적, 문화적 생활로부터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들로서는 선지자들이 말한 말씀들을 그것들의 원래 문맥에 적절히 배치시키는 데 큰 어려움을 갖는다는 점이다.
예언의 기능.
먼저 이스라엘의 선지자의 역할과 기능에 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1)선지자들은 언약 시행의 중보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그의 법을 주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행하신다는 사실이다. 적극적인 시행은 축복이요, 부정적인 시행은 저주이다.
선지자들이 출현하게 된 것이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적극적이든, 부정적이든 그의 법의 시행을 선포하셨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을 처음 선포하셨을 때, 그 율법의 중보자였다. 그리하여, 그는 선지자들에게 한 모델이 되었다. 이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중보자들 또는 언약의 대언자들이다.
그리고 율법을 지킬 경우 복을 받을 것이지만, 지키지 않을 경우, 형벌을 받을 것이다. 선지자들은 그들이 선포한 복과 저주를 창안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되풀이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언약을 시행할 그의 의도를 선언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충성 여부에 따라 혜택이 되기도 하고, 해가 되기도 한다.
율법은 언약에 충실한 자들에게 내리는 공동의 축복의 일정한 표준들을 포함하고 있다. ①생명, ②건강, ③번영, ④농작물의 풍성함, ⑤존경, 그리고 ⑥안전 등. 성경에 언급된 대부분의 축복들은 이 6개의 일반적인 그룹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저주에 대하여 율법은 공동의 형벌들을 묘사하고 있다. 죽음, 질병, 한발, 기근, 위험, 파멸, 패전, 추방, 빈곤 그리고 치욕이다. 대개 저주는 이것들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동일한 표준들이 하나님께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상황에서도 적용된다. 이런 저주들은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비유적인 의미를 지닌다. 항상 국가 전체를 의미하는 공동의 저주들이다. 개인의 번영이나 기근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회개하도록 강구하실 때에 축복보다는 저주의 경고가 탁월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통계적으로 보아 주전 8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활동한 선지자들이 선포한 대부분의 메시지 내용은 저주에 해당한다.
남.북 왕조의 붕괴 후, 주전 587년 이후에는 선지자들이 저주보다는 축복을 좀더 자주 말하게 되었다.
곧 이스라엘의 형벌이 완료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본적인 계획 - 긍휼을 보이시는 것을 개재시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자가 선지서를 읽을 때에는 이러한 기본적인 형식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1)이스라엘의 죄 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내는 일
(2)상황에 따른 저주 또는 축복의 예언 등.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그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선지자들을 세우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선지자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사실 셈족어 동사 '부르다'에서 파생된 것이다. 사실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수차례에 걸쳐 일인칭을 사용하여 주께로부터 직접 전달된 것을 표현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에 대하여 '나는' 또는 '나를'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이스라엘과 또 다른 나라들에게 전달하는데 도구로 사용된 선지자들은 일종의 사회적 직책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재자의 뜻을 천상 궁정에서 파송된 대사와 같았다. 어느 단체가 이 율법들을 파기하였든지간에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형벌의 말씀이 전달되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왕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였으며, 전쟁을 선포하기도 하고, 전쟁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자기들이 창안해 낸 것이 아니다. 선지자들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가 읽은 것은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본질상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전해 주셨던 것과 동일한 메시지인 것이다.
물론 메시지가 전달되는 양식은 각기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의 메시지는 옛적의 메시지를 변경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선지자들은 모세오경의 율법에 포함되지 않은 어떤 교훈을 선포하거나 다른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영감받은 것은 아니다.
호4:2에서 십계명 중 5계명이 하나씩 하나의 용어로 요약되어있다.
(호4:2)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저주-'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3계명.
사위-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9계명.
살인-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
투절-도적질 하지 말라는 8계명.
간음-간음하지 말라는 7계명.
두 번째 예는 메시야 예언과 관계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메시야 개념을 불러 일으킨 것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처음으로 하신 것은 아니다. 사실 이 메시야 개념은 율법에 기인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하셨기 때문이다.
'(눅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모세의 율법에 메시야의 사역을 예언한 내용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신18:18은 탁월하다.
'(신18: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석의적 과제.
도움이 될 만한 참고 문헌.
성경 사전, 주석류, 성경 핸드북 등이 유용하다.
역사적 배경.
훌륭한 석의를 수행하기 위해서 모든 선지서들에 대한 두 종류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광범위한 배경.
구약의 16개의 선지서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 B.C.약 760-460년에 쓰여졌다. 아모스와 말라기 사이의 근 3세기 동안 선지자들의 말이 집중적으로 기록된 까닭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역사 중 이 시기는 특별히 선지자들의 과제인 언약 시행의 중재를 필요로 하였다는 것이 그 대답이다.
두 번째 요인은, 선지자들이 이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포하였던 경고와 축복을 후대 역사를 위하여 기록하려는 하나님의 확연한 소원에 있다.
이 시기의 특징은 다음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전례 없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사회적 대 변동.
2)엄청난 수준의 종교적인 부정과 고대 모세 율법을 등한시함.
3)인구 팽창과 국경의 확대 등.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이 요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일으키셨으며 적절하게 그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북왕조는 당시 근동의 최강대국인 앗수르에 의해 B.C. 722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후 유다의 극심한 죄악과 또 다른 초강대국 바벨론의 부흥으로 이사야, 예레미야, 요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를 포함한 많은 선지자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유다 역시 불순종으로 인하여 B.C. 587년에 붕괴되었다. 그 후에, 에스겔, 다니엘, 학개, 스가랴, 말라기와 같은 선지자들은 그의 백성의 회복, 국가의 재건 그리고 정통성의 재흥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선언하였다.
이 모든 것은 신명기 4:25-31에 기록된 기본적인 패턴을 따른다.
(신4:25)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격발하면 (신4:26)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신4:27) 여호와께서 너희를 열국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열국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신4:28)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신4: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신4:30)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 (신4:31)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선지자들은 대부분 이러한 사건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그리고 역사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그 분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그 역사의 어떤 부분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특정한 상황들 : 매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전달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만 있다면, 연대.청중.상황 등에 대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예언을 이해하는데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개체 예언들의 분리.
누구든지 선지자들을 연구 또는 석�거인 지식을 목적으로 읽게 될 경우, 그가 배워야 할 첫 번째 것은 예언을 생각하는 일이다. 대개의 경우, 선지자들이 말한 바는 의미가 계속 연결되면서 그들의 책에 제시된다. 다양한 시기, 다양한 장소에서 말하였던 것들이 수집되어, 한 예언이 어디서 끝나며 또 다른 예언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지시하는 분절이 없이 총괄적으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이것이 같은 날 동일한 청중들에게 말하여진 것인가? 아니면 다른 환경하에 상이한 그룹에게 수년 후 아니면 전에 말하여진 것인가?
그러므로 주석, 성경사전, 성경 핸드북을 통하여 도움을 입어야 한다.
예언의 형식들.
매 예언의 분리가 선지서 이해의 열쇠이기 때문에 선지자들이 그들의 예언을 구성하기 위해 사용한 다양한 형식들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성경 전체가 매우 다양한 종류의 문학과 문학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선지자들도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하는데 있어 다양한 문학 형식들을 채용하였다.
여기 가장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형식 3가지를 선정하였다.
1)소송 : 소송 비유에서 하나님은 피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원고, 기소하는 변호인, 재판관, 법정의 간수 등 상징적으로 묘사되었다.
(사3:13)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사3:14)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되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 (사3:15)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리로다 (사3:16)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사3:17)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사3:18)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사3:19)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사3:20)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사3:21) 지환과 코 고리와 (사3:22)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사3:23)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사3:24)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사3:25) 너희 장정은 칼에, 너희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사3:26)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시온은 황무하여 땅에 앉으리라
사3장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다.
법정이 소집되고 이스라엘에 대한 소송이 제기된다(13-14절). 고소장이 낭독된다(14절 하-16절). 증거에 의해 이스라엘의 유죄가 분명해졌기 때문에 심판의 판결이 언도된다(17-26절). 언약을 파기하였기 때문에 언약에 열거된 온갖 종류의 형벌들이 이스라엘의 남녀들 위에 내릴 것이다.
이런 비유 형식은, 이스라엘은 불순종 때문에 징계를 받을 것이며, 그 징계는 극심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알리는 극적이며 효과적인 방도이다.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는 데 효과적인 특별한 문학 형식이 채택된 것이다.
2)화 : '화'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앙이나 죽음에 직면하여, 또는 장례식에서 슬퍼할 때 부르짖던 용어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화'의 의미를 사용하여 임박한 파멸을 예고하셨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단어의 의미 심장한 사용을 알아차렸다.
화 예언은, 세가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①재앙의 선언, ②재앙의 원인, ③파멸의 예고.
3)약속 : 약속 또는 구원의 예언이다. 미래에 대한 언급, 급진적인 변화의 기술, 축복의 언급 등. 전형적인 약속 언약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축복은 언약의 표준들 - 생명, 건강, 번영, 농작물의 풍성, 존경과 안전 - 을 통하여 온다. 가장 핵심적인 강조점은 농작물의 풍성함에 있다.
시인으로서의 선지자들.
시는 고대의 문화에서 매우 높이 평가되는 표현 양태였다. 국가적 서사시, 중요한 역사적, 종교적인 기념들은 다 시로써 보존되었다. 시는 산문과 비교하여 훨씬 더 암기하기 쉽다. 또 시에는 어떤 리듬이 있으며, 대칭과 어떤 전체적인 구조가 있다.
시는 비교적 규칙적이며, 질서가 있다. 일단 잘만 배워 놓으면 시는 산문보다 훨씬 덜 잊어 버리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읽고, 쓰는 기술이 그리 발달되지 않고 개인적으로 책을 소유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던 시대에 이처럼 유용한 현상을 잘 사용하심으로써,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로 시로써 말씀하셨던 것이다. 백성들은 시에 익숙하였고, 이러한 예언들을 기억할 수 있었다.
구약시의 반복 형식의 3가지 유형들을 소개하겠다.
1)동의 대귀법 - 두 번째 행은 첫 행의 의미를 반복 또는 강화한다.
(사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2)반의 대귀법 - 두 번째 행은 첫 행의 사상과 대조를 이룬다.
(호7:14)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
3)종합 대귀법 - 두 번째 행은 어떤 방도로든지 좀더 많은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첫행을 부연한다.
(옵1:21) 구원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해석학적 제안들.
다른 시대에 하나님의 고대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이 영감된 시적 예언들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엑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엇일까? 먼저 본서 4장에서 서신서들의 해석에 대하여 말한 것 중 상당 부분이 여기에도 적용된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특별히 생각하여야 할 3가지 문제들이 있다.
그것은 경고, 관심사, 축복이다.
1)경고 : 미래의 예언자로서의 선지자.
먼 미래를 예고하는 것이 선지자의 일차적인 일이지만, 지금은 그 미래가 과거이다. 즉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비교적 즉각적인 미래에 다가올 심판과 구원에 대하여 예고하였지만 오늘날 우리 시대의 미래에 대하여 예고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예언한 것의 성취를 보기 위하여, 그들에게는 여전히 미래에 속하나 우리들에게 과거가 되어 버린 때를 회고해야만 한다.
겔25-39장에는 주로 이스라엘 외의 다른 나라들의 운명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들의 운명을 언급하셨고, 그 성취가 예언이 전달된지 수십년 내에, 즉 거의 B.C. 6세기 안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들에서 신약시대의 사건들을 지나치게 찾으려고 할 때 문제가 일어난다.
현세적인 것은 영원한 계획의 빛으로 관조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마치 큰 원판과 그 앞에 있는 좀 더 작은 원판을 동시에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 그런 다음 계속되는 역사의 관점에서 이 두 원판을 측면에서 관찰하여 이들 두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가를 아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종종 종말적 사건들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 현세적인 심판들을 미래에 속한 것으로 밀어 붙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또 종말론적인 용어는 그 용어의 특성상 비유적인 것인 경우가 있다.
에스겔 37:1-14에서 뼈가 회복되는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사건인 죽은 자의 부활 용어를 사용하여 에스겔을 통해 이스라엘 나라가 주전 6세기에 바벨론 유수로부터 돌아올 것을 예고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과거 사건인 것이 마치 마지막 때의 사건인 양 종말론적인 용어로 비유적으로 예고되었다.
관심사 : 예언과 부차적인 의미들.
신약에 언급된 구약 본문들이 원래 구약의 문맥에서는 분명한 의미를 지닌 것이지만, 신약 저자에 의하여 상이한 의미로써 사용되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어떻게 이적적으로 반석에서 물을 공급받았는지를 증거하는 두 이야기에서 바울은 고전10:4에서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을 그리스도와의 대면과 일치시키고 있다. 바울은 반석에 부차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킨 것이다. 이러한 부차적인 의미를 일반적으로 보다 완전한 의미라고 부른다.
바울은 '반석이 그들에 대한 관계는 그리스도가 우리들에 대한 관계와 같다' 즉 '신령한 것들이 우리에게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인 것처럼 그리스도는 생명을 유지시키는 원천이시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이런 유비로 기록하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가 구름과 바다를 세례로(2절), 반석을 그리스도로(4절) 이해할 수가 있었겠는가? 성령께서는 바울을 영감하여, 광야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스도 안의 생활 사이의 유비적인 관계를 문맥, 의도, 문체, 용어에 대한 일상적인 법칙을 따르지 않고도 기록할 수 있게 하셨다.
바울이 영감을 받아 구약과 신약을 비유적으로 연결한 것은 신뢰할 만하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서도 우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원리를 세울 수 있다. 보다 완전한 의미는 영감을 받을 때는 작용했으나 조명 - 즉 성경을 읽을 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심 - 에는 작용하지 않는다.
영감이란 성경을 어떠한 방법으로 기록하기 위한 원래적 동기를 가리킨다. 조명이란 성경의 저자들이 기록한 것을 이해하는 통찰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조명으로써 성경을 다시 기록하거나 재정의할 수 없다.
마지막 축복 : 바른 신앙과 바른 생활에 대한 이중적 강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에게 바른 신앙과 행동의 조화를 이루도록 촉구하셨다. 선지자들은 계속하여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 시행을 원하신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새 언약의 계명들에 순종하는 자들의 궁극은 최종적이며 영원한 축복이 될 것이다.
불순종하는 자들의 궁극은, 그들이 지상생활 동안 어떤 훌륭한 대접을 받았던지 간에, 저주 뿐이다.
그러므로 말라기의 경고(말4:6)는 아직도 계속된다.
(말4: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제11장 시편 - 이스라엘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시편 해석의 문제는 주로 시편의 특성 - 시편이란 무엇인가? - 에서 나타난다.
시편은 기본적으로 기도와 찬송이기 때문에, 시편은 그 특성상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찬송으로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이 말씀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는가?
그리고 시편은 우선적으로 교리나 도덕적 행위를 가르치는 기능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편은 시편을 영감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이 중요한데, 그것은 (1)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표현하고 (2)그의 길을 상고하는데 일조한다.
그러므로 시편은 성경으로부터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희망과 회한을 표현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하는 신자에게 대단히 유익한 것이다.
시편은 빈약한 이해로 잘못 적용된다. 부정적인 듯이 보이는 것과 화자의 비참을 표현하는 시편은 어떻게 사용될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의 역사와 이스라엘에 내리는 하나님의 복에 대하여 말해 주는 시편은 어떤가?
메시야의 사역을 예언하는 시편은 어떤가? 바벨론의 어린 아이들을 반석에 메어치기를 바라는(시137:8-9) 시편의 내용은 도대체 어떻게 취급해야 할 것인가?
기본적인 석의적 관찰.
시로서의 시편.
시편을 읽고 해석하는 데 있어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시편이 시라는 명백한 사실이다. 시편과 관련하여 첨가해야 할 3가지 사실이 있다.
1.히브리 시는 그 특성상 가슴을 통해 마음에 호소하는 시이다. 즉 강한 감정적인 언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의 매 단어 또는 구절에서 전혀 의도되어 있지 않은 특별한 의미들을 찾아냄으로써 시편을 지나치게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동의 대귀법의 경우, 두 행 모두 시인이 의미하는 바를 표현하며, 두 번째 행은 전혀 새롭거나 다른 어떤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19: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시편 기자는 하늘과 궁창이 각기 별개의 것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두 행 모두 하나의 영광스러운 실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2.시편은 여느 시와 똑같지는 않다. 시편은 음악 시이다. 음악시는 감정에 호소하기 위한 것이며, 감정을 자아내고 어떤 사실에 대한 개인의 단순한 인지론적인 이해를 넘는 반응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다. 시편에는 교리가 포함되어 있지만, 마치 교리 체계를 가르치는 것으로 읽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이라고 말했을 때, 임신은 죄악이라든지, 그의 어머니는 수태함으로써 죄인이 되었다든지, 원죄는 태아에게도 적용된다든지 등의 유사한 어떤 종류의 교리 체계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시편 기자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강하고,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과장법을 쓴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을 읽을 때, 의도하지 않은 사실을 억지로 캐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3.시의 어휘는 목적상 비유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비유의 의도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만 한다. 은유를 억지 춘향이로 해석하여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문학으로서의 시편.
시편은 또한 문학의 형태이기 때문에, 그 시편의 어떤 문학 형식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형식들을 주목하지 않으면, 해석과 적용상의 몇몇 오류에 빠질 수가 있다.
1.시편은 몇 개의 다른 유형들로 구성되어 있다.
1)슬픔의 시 -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서 슬픔을 표시하고 도움을 호소할 수 있었다.
2)감사의 시 -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 보이신 자비로 인한 기쁨을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독자가 시편을 읽을 때, 그 유형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좀처럼 시편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2.매 시편은 그 형식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형식이란 독특한 유형을 의미한다.
시편의 구조를 이해하게 되면, 그는 시편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따라갈 수 있다.
3.시편의 각 유형들은 이스라엘의 생활 가운데 어떤 주어진 기능을 감당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각 시편에는 의도된 목적이 있다. 즉 이스라엘의 왕위 즉위식 때 부르는 왕의 시를 결혼식에 읽는다면, 이것은 온당치 않는 일이다.
4.시편에 나오는 다양한 패턴들을 배워야 한다. 시편 기자들은 자주 단어에 문체 놀이뿐 아니라, 단어와 소리의 배열, 또는 반복을 즐겨 하였다. 또 아크로스틱(각 행의 첫 자를 히브리서 알파벳 순서에 따라 지삭하는 것, 예 시119편)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5.매 시편은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읽어야 한다. 시편은 단일 구절들 또는 사상으로 세분되어서는 안되고, 전체로서 취급되어져야 한다.
잠언의 경우, 한 문장이 전체와의 관계를 떠나서도, 얼마든지 제구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시편의 경우, 시편의 흐름과 균형을 잘 따라가는 것이 읽는 데 도움이 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의 시편의 사용.
시편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하여 예배시에 이용될 목적으로 지어진, 실제로 사용하기 위한 노래였다. 시편은 예배하는 자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대부분 시편들의 연대를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시편은 특이할 정도로 거의 모든 시대에 적용 가능하다.
고대에서는 보통 시편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드리러 갈 때 예배의 보조물로 사용하였다. 시편들은 점차적으로 '권'이라 부르는 그룹들로 수집되었다. 5권의 그룹이 있다.
1권:시편 1-41편. 2권:42-72편, 3권:73-89편, 4권:90-106편, 5권:107-150편.
표제 - 이것은 원래의 시의 일부는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영감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지만 - 에 따르면 다윗이 시편의 절반 가량 - 을 썼다.
시편 1편은 전체의 서론으로서 처음에, 시편 150편은 결론으로서 마지막에 각기 위치하게 되었다.
바울은 초대 교인들에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기를 권하였다(엡5;19, 골3:16). 이 세 용어들 모두가 시편을 언급한다고 할 수 있다.
시편의 유형들.
시편을 7개의 각기 다른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슬픔의 시.
개인 및 공동체의 슬픔을 표현하는 시로 시편에서 가장 많이 차지한다(거의 60개 이상).
시편의 애가는 그 백성이 느꼈던 고뇌를 깊고 정직한 열정으로 표현한다.
감사의 시.
슬픔의 시와 정반대의 상황에서 사용되었다. 이 시편들은, 만사가 순조로이 진행되고, 환경이 쾌적하고, 또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보호하심과 복주심에 대하여 백성들이 하나님께 감사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여호와께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찬미의 노래.
이전의 불행이나 최근의 기쁜 일들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과 그의 엄위로우심, 그리고 그가 온 세상과 그의 백성들에게 베푸신 은택들에 대하여 찬송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창조주로서 찬양을 받으신다. 또 이스라엘의 보호자와 은혜를 주시는 자로서 찬양을 받으시기도 한다. 또 역사의 주인으로서 찬송을 받으시기도 한다.
구속사의 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역사, 특별히 그들을 애굽의 굴레서 구원하셔서 그들을 백성으로 형성하신 것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경축과 수임의 시.
첫 번째 종류는 시편50, 81편과 같은 언약 갱신 의식의 시. 이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그 백성과 맨 처음 맺었던 언약을 갱신하도록 하기 위한 시이다. 이 시편들은 갱신 예식을 위한 예배 지침으로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두 번째 왕의 시. 왕직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왕을 세운다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안정과 보호를 주시는 까닭에 중요한 제도로 간주되었다.
세 번째 대관식 시. 고대 이스라엘에서 왕의 대관식을 축하하는 것이며, 이 예식은 매년 반복되었음 직하다.
마지막으로 시온의 노래, 또는 예루살렘 성의 노래. 신약성경이 (하늘의) 새 예루살렘 상징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 시편들을 기독교인들의 예배에서도 유용하게 이용됨을 알 수 있다.
지혜의 시.
8개로, 지혜와 현명한 생활의 유익을 찬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뢰의 노래.
10개의 시로, 하나님은 신뢰할 만한 분이시며, 그의 백성들이 심지어 절망 중에 있을 때에라도 그의 선하심과 돌보심도 표현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석의적 예문.
시편의 형식과 구조를 아는 것이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시편 3편 : 슬픔의 시.
슬픔의 시에는 실질적으로 등장하는 6개의 요소들을 분리할 수가 있다.
이들 요소들의 전형적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대상 : 시편 기자는 그 시편을 기원하는 이를 밝힌다. 물론 그는 여호와이시다.
2.고소 : 고소란, 문제가 무엇이며, 왜 여호와의 도움을 찾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3.신뢰 : 즉시 하나님께 신뢰를 표현한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그가 적절하다고 보시는 방법대로 우리의 고소에 응답하시도록 그를 신뢰해야 한다.
4.구원 : 고소한 상황 가운데 구원해 줄 것을 하나님께 간구한다.
5.확신 :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에 대한 확신을 표현한다. 이 확신은 어떤 경우 신뢰의 표현과 병행된다.
6.찬양 : 하나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복에 대하여 하나님께 찬양, 감사, 존귀를 드린다.
이 시편은 교훈이 아니라, 안내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우리는, 우리가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 의기소침되었을 때, 여러 가지 문제에 둘러싸여 있을 때, 또한 실패의 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 바로 이 시편을 사용할 수 있다.
시편 138편 : 감사의 시.
감사의 시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1.서론 -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요약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2.곤궁 -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기 전의 상황을 묘사된다.
3.호소 -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호소가 반복된다.
4.구원 -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이 기술된다.
5.증거 -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찬양의 노래가 제시된다.
특주 : "저주의 시"
시편이 모든 시대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닐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의 언어 이해에 있다. 인간의 모든 감정이 - 심지어 극단적인 감정까지라도 - 발견된다.
슬픔과 기쁨은 죄악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원한, 분노, 증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해하려는 욕망과 시도와 같은 죄악된 생각 또는 행동으로 이끌 수도 있다.
마음 속에 품은 분노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강렬한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래서 시편은 문자적으로는 물리적으로 향하는 우리의 분노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리게 하거나, 하나님을 통하여 전할 수 있도록 문자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타인에 대한 분노를 하나님께 글로 표현한 시편을 저주의 시라 부른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한 사람들에게 악으로 갚으려는 대신 우리의 분노를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을 통하여 표현함으로써 신약 성경이 가르친 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27)는 교훈을 성취해야만 한다.
저주의 시는 분노를 어거하고, 분노를 하나님께 표현하도록 돕는다.
시137편에서 저자는 언약의 저주대로 심판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 저주에는 모든 사악한 사회와 그 가족의 일원들을 일소해 버리겠다는 조항이 포함되어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언약의 저주들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극단적인 과장법적 언어를 사용하여 수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정에 대하여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다.
이 분노의 말들을 실제로 듣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죄를 유발하는 분노의 방향을 바꾸고 자제하기 위하여 그 시를 올바로 사용하게 되면, 저주의 시는 참으로 우리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시가된다.
저주의 시는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사랑이 적극적인 방법으로 정의되어있다. 즉 사랑이란 어떤 사람에 대해 당신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가라기보다는 사랑을 보이는 그 사람을 위하여 당신이 무엇을 행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있다.
성경은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사랑하는 감정을 품어라(느껴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주의 시를 통하여 아무리 지독한 증오의 감정을 품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정직하게 표현하여야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학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공의로 처리하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참음으로 인해 계속 악을 행하는 원수는 참으로 커다란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저주의 시의 진정한 역할은 우리에게 '악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분을 발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마지막 말 : 시편에서 '미워하다'는 용어는 다른 문맥에서는 '멸시하다'로 번역된 단어이다. 이 말은 참지 못하다, 참을 수 없다. 거절하다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것을 근거로 볼 때, 저주의 시에 사용된 언어가 성경의 다른 곳의 가르침, 특히 마태5:22과 위배된다고 추정해서는 안된다.
해석학적 관찰들.
시편의 세가지 근본적인 유익
첫째, 시편은 예배의 지침서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호소하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내리신 복을 기억하려는 예배자는 그의 사상과 감정의 정식적인 표현 방법으로 시편을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둘째, 시편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솔직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누구나 시편으로부터 기쁨, 좌절, 분노 또한 그 밖의 여러 감정들을 표현함에 있어 얼마나 솔지갛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할지를 배울 수 있다.
셋째, 시편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에 대한 반추와 묵상의 중요성을 제시한다.
주의의 말.
시편은 유쾌한 삶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시편의 어떤 구절로부터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행복하게 하고, 그들의 삶을 만사 형통케 하시기로 약속하셨다고 추론하는 것은 시편의 언어를 오해한 것이다. 시편을 많이 저술한 다윗은 언젠, 슬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열렬하게 찬양하였으며, 그에게 감사드렸다.
바울도 역경 중에서 찬양과 감사를 드릴 것을 권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또 그 불행한 중에서도 그의 크심과 선하심으로 인해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이런 삶은 고통을 전혀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증을 하지 않는다.
제12장. 지혜서 - 과거의 지혜와 현재의 지혜.
구약은 세권이 '지혜서'로 알려져 있다. 전도서, 잠언, 그리고 욥기 등.
지혜의 특성.
정확히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란 진리를 경험의 빛하에서 개인의 생활에 적용하는 훈련이다.
지혜 문학의 오용.
전통적으로 지혜서는 다음 세가지 방법으로 잘못 사용되어 왔다.
1)이 책들을 단지 부분적으로만 읽는다. 영감받은 저자의 의도에 따른 전체적인 메시지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2)사람들은 왕왕 지혜문학의 문체, 문학 형태 뿐 아니라, 지혜문학의 용어와 범주도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잠14:7) 너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 그 입술에 지식 있음을 보지 못함이니라
이 말씀은 신자들이 저능아, 무식한 사람 또는 정신지로한을 앓는 사람과 사귀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잠언에서 '어리석은 자' '미련한 자'는 기본적으로 '믿음이 없는 자'를 의미한다. 즉 이 단어는 이기심에 따라 생을 살며, 방자하고 변덕스럽고, 자기 자신 이외의 더 높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불신자를 의미한다.
3)사람들은 종종 지혜 강설의 논쟁의 맥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가 있다. 따라서 그들은 부정확하게 이해한 것으로 연명하려 한다.
(욥15:20)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강포자의 햇수는 작정되었으므로
이 말은 악한 사람은 참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욥은 그것을 오히려 열렬하게 논박하였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그가 그렇게 많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욥 자신이 악한 자이기 때문이라고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욥의 말을 변호하면서, 엘리바스의 말을 정죄한다.
욥기 전체의 논증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이 사실을 알 수가 없다.
지혜자는 누구인가?
지혜는 논리적이거나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지혜는 개인이 그가 경험을 통하여 습득한 진리를 따라 생각하고 행동할 때만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단순히 이론적인 사람이 아니라, 매우 실천적인 사람이다. 종종 지혜는 건축 또는 항해와 같은 기술적인 문제들에도 적용된다.
지혜는 또한 다른 사람들의 복리에 영향을 끼치는 결정을 한 사람들에 의해 추구되었다.
구약 성경은 마음의 지적 기능 뿐 아니라, 도덕적, 의지적 기능도 가르친다.
지혜의 교사.
고대 이스라엘에는 지혜를 얻기 위해 전렴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지혜 얻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지혜의 교사들은 제사장과 선지자 '지혜로운 사람들'(현자들) 등으로 불리웠다.
이 특별한 지위에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왕정시대가 시작되는 무렵에 일어나서, 지혜를 찾는 사람들의 교사와 상담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지혜로운 사람이 그로부터 지혜를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 일종의 부모 대역을 했다.
요셉은 하나님에 의해 바로의 '아비'가 되었고(창45:8), 여선지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어머니'라 불리웠다(삿5:7).
그래서 왕왕 잠언에서 지혜의 교사가 그의 생도들에게 '나의 아이야'로 부르는 것을 본다.
부모들은 자기들의 아이들을 보내어 지혜의 교사들에게 지혜로운 태도와 생활 습관을 배우도록 하였고, 이 지혜의 교사들은 그들의 생도들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가르쳤다.
가정에서의 지혜.
지혜는 다른 상황에서보다 가정에서 더 많이 가르쳐지는 것이 보통이다. 잠언은 마치 기독교인 부모가 그러해야 하듯이 하나님의 지혜에 맞춰 충고를 한다. 그 충고는 매우 실천적이며 세속적 문제들과 관계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도달할 수 있을 가장 지고의 선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동료들 사이의 지혜.
사람들이 자기들의 지식과 그에 부응하는 행위를 세련시키는 하나의 방법은 토론과 논쟁에 의한 것이다. 독백이나 대화 형식을 띨 수도 있다. 잠언에 특히 두드러진 지혜의 종류는 소위 잠언적 지혜라는 것이다. 반면, 전도서와 욥기에서 발견되는 지혜는 흔히 사변적인 지혜라 일컫는 것이다.
시를 통해 표현된 지혜.
구약시대에는 생도와 교사 모두 그들이 지혜를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는 다양한 문학적 기교들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들은 학습하기에 용이하고 기억하기에 수월하게 되었다. 시에는 문체상의 특징들이 있다. 그런데 잠언, 전도서, 욥기 등도 주로 시로 구성되었다. 특히 기교들 가운데 동의 대귀법, 반의 대귀법, 공식(잠21:16 - 처음 말이 알파벳 순서에 따라 쓰여진 시), 두운법, 비교법 등이 사용되었다.
지혜의 한계.
고대 세계의 모든 지혜가 경건하거나 일반적으로 옳다고 인정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근동 여러 지역에 지혜의 교사와 서기관들의 계급이 있었다.
이 상당수의 근동의 지혜는 구약의 지혜와 유사하다. 게다가 지혜는 삶의 전반을 다 망라하지는 않는다.
지혜는 대단히 실천적이기 때문에, 성경의 다른 곳에서 중요하다고 하는 신학적, 역사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솔로몬의 위대한 지혜는 그에게 부와 권세를 얻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그의 말년에 하나님께 성실한 데서 돌이킨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재능으로서의 지혜는 하나님께 순복할 때에만 구약성경이 의미하는 바 그 궁극의 목적에 도달하게 된다.
전도서 : 냉소적인 지혜
전도서는 종종 기독교인들을 당혹케 하는 지혜 독백이다. 그래서 전도서의 주요 내용은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허무하며, 죽음이 모든 것을 허망하게 할 것이므로, 누구든지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의 인생을 즐겨야 한다는 교사(전도자)의 충고의 말로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전도서의 시종 일관한 메시지는 죽음의 실재와 종국은, 인생에는 궁극적인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의 충고 역시 실존적이다.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대로 힘껏 인생을 향유하라'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거의 전부이고,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윤택하게 살아라. 이것 이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다.
그러나 전도서 마지막 12장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전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이 두 마지막 구절을 제외한 전도서의 대부분은, 가령 하나님이 인생에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경우, 또한 사후의 생명이 없는 경우라면, 사람이 인생을 관조할 수 있을 만한 제 방법을 훌륭하고 예술적인 논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지혜는 실천적인 무신론자가 산출하는 세속적, 숙명론적 지혜이다. 하나님을 우리와 멀리 떨어진 위치에 놓을 때, 그리하여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분으로 만들어 버릴 때, 전도서와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 그러나 전도서는 독자로 하여금 저너머를 보게 한다.
욥기의 지혜.
욥기에도 온갖 종류의 잘못된 충고와 바르지 못한 결론들을 포함하고 있다.
독자가 욥기를 통독해 보면, 욥기가 얼마나 잘 짜여진 대화 또는 담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 담화에서 독자들의 마음에, 인생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항상 하나님께서 원하기 때문에 또는 그것이 공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욥기는 전도서의 목적과 거의 정반대의 목적이 있다.
전도서는 인간 만사에 개입해 있지 않은 하나님을 묘사하려 하였다. 반대로 욥의 위안자들은,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지만, 금생의 사건들을 통하여 계속하여 그의 심판을 할당하신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어하신다면 세상의 흥망성쇠가 다 그의 행하심과 그의 뜻에 따른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듯하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오히려 세상이 타락했고, 죄로 인해 더럽혀졌으며, 사단의 통치하에 있고, 인생에 일어나는 많은 것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친다. 특별히 고난은 죄의 필연적인 결과는 아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들의 방법을 초월해 있다. 그가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그가 무엇을 행하시는지 알지 못하고 계신다든지 그가 그것을 행할 권리가 의심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세련된 의미에서 진정한 지혜이다.
욥기를 읽는 사람은 세상의 지혜 - 그것이 논리적인 듯하지만 사실은 그릇된 지혜임 - 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이며, 또한 하나님의 주권과 의를 확신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잠언의 지혜.
잠언은 신중한 지혜 - 사람들이 책임 있는 삶, 성공적인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규율들과 법칙들 - 의 중요한 보고이다. 잠언의 지혜는 주로 실천적인 태도들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잠언은 지혜로운 생활과 어리석은 생활 사이의 엄격한 대조를 제시한다.
특별히 종교적인 언어는 잠언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인생의 모든 것이 경건한 것이 되기 위해, 엄격히 종교적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잠언의 사용과 오용.
잠언에 관하여 기억해 두면 좋은 한 가지 사실은 잠언이 히브리어로 메샬림(비유적 언어, 비유, 특별히 고안된 말)이라고 불리운다. 잠언은 간결하고 구체적인 진리의 표현이다.
히브리의 많은 잠언들에는 특히 배우기 쉽도록 하기 위한 음율, 음성 반복, 어휘의 특징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 잠언은 합리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잠언은 잠언으로서 취급해야 한다. 잠언은 진리에 관한 모든 것을 진술하지 않고, 진리를 향한 방향 제시를 하는 것이다.
잠언은 비유적 언어를 사용하여 세밀하게보다는 암시적으로 사물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잠언의 말씀은 너무 문자적으로, 또는 너무 보편적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잠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분명하며 항상 적용 가능한 약속이어서 만일 누구든지 자신의 게획을 하나님께 철저히 맡기면 그 계획은 반드시 이루고야 말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실망할 수가 있다. 그들은 어떤 아주 이기적이거나, 어리석은 계획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길 수 있다. 그런 것들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의 이 말씀이 절대적이고, 항상 적용 가능한 엄격한 약속이 아니라 좀더 일반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잠언을 잠언으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암시하는 진리의 특수한 시금석으로 이해한다면 잠언이야말로 삶의 중요하고 도움이 되는 보조물이 된다.
해석학적 지침들.
잠언은 하나님의 법적 보증이 아니다.
잠언은 어떤 선별된 실천적 목표에 접근하기 위한 지혜로운 방법을 서술하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성공 보장과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잠언 어느 곳에서도 자동적인 성공을 가르치지 않는다.
(잠22:26)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잠22:27) 만일 갚을 것이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이 말을 극단적인 단계를 취하게 되면, 융자를 얻어서는 안되니 집을 결코 살 수 없게 될지도 모르겠다. 또 신용 카드의 외상 거래의 빚 갚는 것을 태만히 하다가는 결국 침대를 포함한 당신의 모든 소유를 잃고 말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문자적이고, 극단적인 해석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잠언의 요지를 놓치고 만다.
본문의 말씀은 '저당잡힌 것을(기한이 지나) 되찾을 권한이 상실되면 대단히 가슴 아픈 일이 될 것이므로 빚은 조심해서 지도록 하라'는 사실을 시적으로, 비유적으로 서술한다.
잠언의 이 말씀은 전문적인 어떤 것을 표현하기보다는 광범위한 원리를 지적한다.
(잠29:12) 관원이 거짓말을 신청하면 그 하인은 다 악하니라
이 본문은 진리 대신에 거짓말 듣기를 좋아하는 관원의 주위에는 그 관원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게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 결과 그 관원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역시 비유적인 방법으로 원리를 지적하고 있다.
(잠15:25)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본문은 의도상 문자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교만한 사람의 집이라도 든든히 서 있으며 탐욕스러운 채권자들이나 사기꾼들에 의하여 기만당하는 과부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곤고한 자들 - 과부, 고아, 나그네 등은 전반적으로 남의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들이다 - 의 편이시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악한 것들을 바로잡으시며, 교만한 자들을 멸하시고 외롭게 고난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보상하신다는 일반적인 원리를 지적하기 위하여 성령에 의하여 기획된 간략한 비유이다.
잠언은 총체로 읽혀져야 한다.
잠언의 말씀은 다른 것들과 균형이 맞추어져야 하며,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비교해 가며 이해해야 한다. 개체의 잠언이 오해될 경우, 그것은 잠언을 전체로 읽는 경우보다 당신을 훨씬 더 온당치 않은 태도와 행동으로 이끌지도 모른다.
더욱이 당신은 잠언의 물질적인 것들에 너무 집요하게 실제적인 관심을 두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이 세상이 여러분들에게 물질주의와 세속화주의를 경고하고 있는 성경의 다른 균형잡힌 가르침들을 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잠언은 종종 다양한 방법으로 단락이 지어 있어서, 잠언은 통독하는 중에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뛰어 넘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잠언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말이 아니라, 기억하기 쉬운 말이다.
어떤 잠언의 말씀도 완벽한 진리 서술인 것은 없다. 어떤 원리가 간략하게 비유적으로 서술되면 될 수록, 그것을 온당하게 해석하기 위한 상식과 올바른 판단이 더욱 필요하게 되나, 그것은 더욱 효력이 있으며 기억하기 쉽다.
잠언은 시적 문장과 생생한 상상력을 대단히 많이 채용한다. 그래서 그 구성상 마음 속에 있는 영상을 자극하거나, 귀를 즐겁게 하는 음성들을 포함하고 있다.
잠언 31:10-31에 묘사된 현숙한 아내의 지극한 헌신은 사실 본받기에는 불가능한 생활 양식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묘사는 현숙한 아내가 그녀의 가정에 가져다 주는 기쁨을 과장법을 써서 강조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는 요지를 파악해야 한다.
끝으로, 어떤 잠언은 이해하기 위하여 '번안될' 필요가 있다.
대단히 많은 잠언들이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것들이었으나, 지금은 더 이상 존속하지 아니하는 관습들과 제도들에 따라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번안되어야 의미가 통한다.
잠언에서 나오는 '왕'은 항상 모든 지도자들에 대한 제유이다. 그래서 잠22:11은 지도자들과 책임맡은 자들은 정직과 사려 깊은 말에 일반적으로 감명을 받는다는 진리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잠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적절한 잠언의 사용과 잠언의 신적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몇가지 법칙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1.잠언은 흔히 비유적이다. 즉,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용어 그 자체 이상의 어떤 진리를 지적한다.
2.잠언은 실천적인 것이지 논리적으로 신학적인 것이 아니다.
3.잠언은 기억하기 쉬운 말로 되어 있으며, 기술적으로 정확성을 기한 말은 아니다.
4.잠언은 이기적인 행동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오히려 정반대이다.
5.고대의 문화를 강하게 반영하는 잠언은 그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이해 가능한 '번안'을 할 필요가 있다.
6.잠언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어떤 보장이 아니라, 선한 행동에 대한 시적 지침들이다.
7.잠언은 그 핵심점을 이루기 위해 매우 특수한 언어, 과장법 또는 그밖의 다양한 문화적인 기교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8.잠언은 생애의 어떤 면들에 대한 지혜로운 접근을 위한 훌륭한 충고를 제시하나, 생의 전반에 걸친 모든 사례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9.잠언은 잘못 사용되어질 때 우둔하고 물질적인 삶의 양식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잠언은 올바르게 사용될 경우에는 매일의 생활에 대한 실천적인 충고가 된다.
제13장 요한 계시록 - 심판과 소망의 상징들.
요한계시록에는 천사, 나팔, 지진, 짐승, 용 그리고 심연의 구덩이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학적 문제는 본질적이다.
풍부하고 다양한 상징들이 있고, 그 중의 어떤 것은 다루기가 쉽지만, 어떤 것은 애매 모호하다. 문제들의 대부분은 상징들에 기인하며, 게다가 본서가 미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도 있다.
맨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아무도 겸손함이 없이는 요한계시록에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요한계시록의 특징.
요한계시록 석의의 첫 번째 열쇠는 그것의 문학 종류를 검토하는 일이다. 요한계시록은 세 개의 독특한 문학 형식 - 묵시, 예언, 그리고 서신서 - 으로써 특이하면서도 섬세하게 혼합된 조화물이다. 그리고 묵시는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문학 형태라는 점이다.
묵시로서의 요한계시록.
계시록은 근본적으로 묵시이다. 그것은 주전 200년에서 주후 200년 사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졌던 수십 가지의 묵시문학 가운데 하나이다.
계시록의 묵시에는 몇가지 공통적인 특징들이 있다.
1.묵시문학의 주근은 구약의 선지문학, 특히 에스겔, 다니엘, 스가랴 그리고 이사야의 일부이다. 묵시문학의 주된 관심은 임박한 심판과 구원이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핍박시, 또는 대환난의 때에 탄생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의 큰 관심은 더 이상 역사 내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이 아니다. 묵시문학가들은 하나님께서 역사에 격렬하고 과격한 종말을 가져오는 때만을 염원하였다.
2.선지서들과 달리 묵시문학은 처음부터 문학 작품이었다. 묵시문학에는 특별히 기록된 구조와 형식이 있다. 요한은 '그가 본 것을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 반면 선지자들은 그들이 듣고 본 것을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3.묵시문학의 가장 자주 사용되는 '재료'는 이상과 꿈의 형태로 제시된 것이며, 그 언어는 암호적이며 상징적이다.
4.묵시문학의 싱징들은 종종 실체가 아닌 환상의 형태들이다.
5.묵시문학은 문학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대부분은 형식을 갖춘 문체를 이루고 있다. 시간과 사건들을 세밀하게 구획하는 경향이 강하게 있다. 또 상징적인 숫자의 사용을 대단히 좋아한다.
계시록은 익명이 아니라는 점을 빼고는 묵시문학의 모든 특징을 다 가지고 있다.
예언으로서의 요한계시록.
요한의 묵시록이 익명이 아닌 이유는 아마도 요한 자신의 이미/아직으로서의 종말에 대한 인식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요한은, 단지 종말을 대망하기만 하던 그의 선례자들과 달랐다.
그는 종말이 예수님의 초림과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런 이해의 결정적인 것은 성령의 강림이다. 요한은 새 시대에 속하며, 그가 본 것을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성령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요한의 묵시록이 여타의 묵시문학과 다른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묵시와 예언의 요소들이 혼합되었다는 사실이다.
계시록은 묵시적 틀로 이루어져 대부분의 묵시문학적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박해시에 탄생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승리와 함께 종말에 관하여 말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요한은 이 묵시를 교회를 향한 예언의 말씀으로 의도한 것이 분명하다. 그의 책은 미래를 위해 봉함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 말씀은 대개 앞으로 올 심판과 구원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서신서로서의 요한계시록.
1:4-7, 22:21을 보면 서신 형식의 모든 특징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그 최종의 형태에 있어서는 요한에 의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로서 보내어진다.
이것이 계시록의 상황적 면모이며, 그 상황이란 적어도 이 편지를 받는 특정한 교회들의 필요들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기 위하여서는 그것의 원래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도록 해야만 한다.
석의의 필요성.
1.계시록 석의의 첫 번째 과제는 저자의 원래 의도, 그리고 그와 함께 수반되는 성령의 의도를 찾는 일이다. 계기록의 일차적인 의미는 요한이 의미하려는 것이며, 이것은 또한 그의 독자들이 읽고 그러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었던 어떤 것이어야 한다.
2.계시록이 예언적인 의도를 지니고 잇으므로, 독자는 성령으로 영감된, 그러나 저자나 그의 독자들에 의해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부차적인 의미의 가능성에 대하여 개방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석의의 과제는 요한이 그의 원래 독자들이 듣고 이해하기를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3.계시록의 석의에 있어 '성경의 유비' 개념을 과잉 사용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성경의 유비란 성경을 다른 성경의 빛으로 해석해야 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해석의 열쇠는 계시록 자체의 본문에 내재해 있든지, 아니면 원래의 수신인들이 그들 자신의 역사적 배경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든지 해야만 한다.
4.계시록의 묵시적, 예언적 특성 때문에 석의의 수준에서 난제들이 있다. 이것은 특히 상징들에 관한 것이다. 이점에 몇가지 제안을 열거한다.
①누구든지 요한계시록의 작성에 사용된 사상들의 풍부한 배경에 민감해야 한다. 이런 사상들과 상징들의 주요 원천은 구약성경이다. 물론 고대신화에서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감하에서 그 의미가 파기되었거나 변형되어 '새로운 예언' 속으로 혼합되어 들어왔다.
②묵시문학적 상징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또 어떤 상징들은 유동적이다. 유다 지파의 '사자'는 사실 '어린 양'인 것으로 판명된다. 12장의 여인은 긍정적인 상이지만, 17장의 여인은 악하다. 또 어떤 상징들은 특정한 사물들을 언급한다. 7촛대는 7교회를, 용은 사단을 지칭한다.
③요한 자신이 그의 상징들을 해석하였을 경우, 이 해석된 상징들은 다른 것들을 이해할 출발점 역할을 하며, 우리는 이것들을 견지해야만 한다.
계시록에는 해석된 6개의 상징들이 있다. 인자 같은 이는 그리스도이며, 그만 홀로 '죽었다가 ... 영원 무궁히 사실 분이다' 금 촛대는 7교회이다. 7별은 교회의 7천사들, 또는 사신들이다. 큰 용은 사단이다. 7뿔은 그 여인이 앉은 7언덕들(또한 7왕들)이다. 음녀는 큰 성읍 - 로마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④이상들을 전체적으로 보아야지, 알레고리적으로 세세한 설명을 가해서는 안된다. 전체의 이상은 어떤 것을 말하려 한다.
⑤계시록에서는 미래에 대한 자세하고 연대기적인 언급이 거의 없다. 계시록에서는 이런 관심을 초월하고 있다. 요한의 지대한 관심은 현재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역사와 교회를 통어하신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앞으로 고난과 죽음을 경험할 것이지만, 그것은 그의 적들을 심판하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역사적 배경.
계시록을 통독하는 것이 좋다. 큰 장면을 읽고,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지 말라.
당신이 계시록을 읽을 때 저자와 그 독자들에 대한 암기용 간략한 노트를 하도록 하라. 요한의 독자들이 '고난에 동참한 자'(1:9)임을 지시하는 모든 언급들을 일일이 뽑아내라. 이것들은 결정적인 역사적 지시어들이다.
요한 자신은 그의 신앙으로 인해 유배당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의 증거'를 인하여 고난을 경험하며, 한 사람은 심지어 죽기까지 하였다(2:13). 요한이 성령 안에 있을 때, 그는 그들의 현재의 고난이 단지 '짐승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들에 대한 화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모든 교회들이 그들 앞에 있는 것들을 맞이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던 것이고, 그리하여 이 예언을 기록하였다.
주요 주제는 분명하다 : 교회와 국가는 역사적 진행에서 계속 충돌하며, 승리의 기선은 국가가 잡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교회에게 고난과 죽음이 앞에 놓여 있다고 경고한다. 교회는 상태가 호전되기 전에 최악의 상태를 맞이할 것이다(6:9-11). 요한은 고난과 죽음이 속박의 때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14:11-12, 21:7-8). 그러나, 이 예언의 말씀은 격려의 말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어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역사의 열쇠를 쥐고 계시며, 그는 그의 손으로 교회들을 붙들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망을 통하여도 승리한다(12:11).
로마는 심판을 받게 될 원수이다.
계시록 해석의 열쇠는 두 핵심적인 단어 또는 개념들에 대한 요한의 구별에 있다.
그것은 환난과 진노이다. 이를 혼동하거나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면 계시록의 메시지 파악에 절망적이 될 것이다.
환난(즉 고난과 죽음)은 교회가 겪고 있는, 또한 앞으로 겪게 될 것임의 일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게 한 사람들에게 부어질 그의 심판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두려우신 진노가 그들의 원수들에게 쏟아질 때 그것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요한계시록의 여러 문맥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또 이런 구별이 신약성경의 다른 가르침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살후1:3-10절에 사용된 '환난'은 요한계시록의 '환란'과 같은 헬라어이다.
(살후1: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문학적 배경.
서신서에서는 '문단을 생각' 해야하는 것처럼, 요한계시록도 그렇다.
계시록은 하나의 거대한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맨 처음 장면은 무대와 배역들을 설정하며, 나중 장면들은 우리가 플롯(줄거리)을 따라갈 수 있도록 앞의 모든 장면들을 필요로 한다.
1-3장은 무대를 설정하며, 우리들에게 중요 '배역들'을 소개한다.
먼저, 책 전체를 걸쳐 해설자 역할을 할 요한 자신이 있다(1:1-11).
그는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인하여 유배되었고, 현재의 박해는 앞으로 있을 것의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는 예언자적 통찰력을 지녔다.
둘째, 그리스도가 있다.1:12-20). 요한은 단10장에서 나오는 찬란한 모습을 인용하여 그를 역사의 주요 교회의 주인으로 묘사한다. 그리스도가 홀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신다.
셋째로, 교회가 나온다(2:1-3:22). 대표적인 7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요한은 교회들을 격려하며 경고한다. 이미 박해에 당면해 있다. 또 교회에는 더 많은 박해가 기다리고 있다. 이기는 자에게는 최후의 영광의 약속들이 있다.
4장-5장 :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말할 수 없이 놀라운 이상들과 함께 교회는 하나님께서 대주재의 엄위로써 통치하신다는 음성을 듣는다(4장). 하나님이 과연 거기 계시며 그들을 위하여 어떤 행동을 취하시는지에 대하여 의아해 하고 있을 신자들에게 요한은 하나님의 '사자'는 고난을 통하여 친히 인류를 구원한 '어린 양'임을 깨닫게 한다(5장).
6-7장에서는 실제의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계시록을 통하여 3번이나 조심스럽게 7개씩으로 구성된 이상들이 제시된다(6-7장, 8-11장, 15-16장). 매 경우마다 앞의 네 개는 하나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한데 어울려 있다.
6-7장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진행되는지를 살펴보자.
1. 흰 말 탄 사람 = 정복
2. 붉은 말 탄 사람 = 전쟁
3. 검은 말 탄 사람 = 기근
4. 청황색 말 탄 사람 = 사망
5.순교자들의 탄원 :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6.지진(하나님의 심판) : 누가 능히 서리요.
⒜인 맞은 자 십 사만 사천
⒝큰 무리
7. 하나님의 진노 : 8-11장의 7나팔들
8-11장은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을 계시한다.
처음 네 번째 나팔들은 자연계의 큰 혼란을 초래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다섯 번째 나팔과 여섯 번째 나팔은 야만인들의 무리와 큰 전쟁이 있을 것을 지적한다.
일곱 번째 나팔이 울리며 결론을 맺는다. '이 세상의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도다'
12-22장은 그 심판과 승리를 세세하게 묘사해준다.
12장은 요한계시록의 신학적 열쇠이다. 두 이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멸하려는 사단의 시도와 그 패배를 읽는다. 그런즉, 신약성경이 되풀이하여 일어나는 이미와 아직 구조 가운데서 사단은 패배한 원수이나 그의 궁극적인 종말은 아직 임하지 않은 것으로 계시된다.
13-14장은 어떻게 그 복수가 요한의 교회에게는 종교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로마제국와 그 황제들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17-22장에서 계시록은 '두 도시의 이야기'로 종결된다. 세상의 도시(로마)는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함으로 인하여 정죄된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히 거주할 하나님의 도시가 뒤 따른다.
해석학적 질문들.
선지서와 요한계시록은 그들에게 장차 일어날 일들에 관하여 언급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장차 일어날 일'은 왕왕 시간적으로 즉각적인 경우도 있어서, 우리의 역사적인 입각에서는 이미 일어난 사건이다. 로마제국은 요한이 내다본 것처럼 부분적으로 야만인들의 물리로 말미암아 일시적인 심판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해석학적 난제는 이 책의 요지인 경고와 위로의 말씀을 경청하는데 있지 않다. 그 난제들은 예언의 다른 현상, 즉 '당대에 관한' 말씀이 종종 궁극적인 종말론적 실재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데 있다.
몇가지 제안들.
1.우리는 미래의 그림들이 단지 그림이라는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림들은 실재를 표현하나 그것 자체는 실재와 혼동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림의 아무리 세세한 부분들이라도 반드시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성취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4 나팔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한 부분으로서 자연의 재앙을 선포할 때, 우리는 이 그림들의 문자적인 성취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2.주로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어떤 그림들은 단시간, 적어도 우리의 제한된 시각에서의 단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사단의 때가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이 '곧 바로'란 의미를 지닌다고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단지 '제한된'이란 의미일 뿐이다.
3.'당대의' 사건과 '종말론적' 사건이 긴밀히 연결된 그림들을 동시대의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심판과 구원의 '종말론적' 차원은 우리들에게 그 많은 그림들의 '아직'의 차원의 가능성을 경고한다.
계시록은 중공의 존재를 예언하려는 것이 아니며, 우리들에게 역사의 결과에 대한 문자적으로 세밀하게 설명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4.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열쇠가 없다. 신약 자체도 상당한 분량의 애매 모호성이 드러난다. 예컨대, 적그리스도는 특히 난해한 인물이다. 바울서신(살후2:3-4)에는 그 인물이 어떤 누구를 지칭하고 있고, 계시록 13-14장에서는 적그리스도가 로마의 황제로 등장한다. 두 경우 모두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종말론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한일서에서는 이 모든 것이 교회에 살며시 들어온 소위 영지주의자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재해석되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교회는 각양 각색의 세상 통치자들을 적그리스도의 표출로 간주하였다. 히틀러는 확실히 적그리스도에 적합한 인물이다. 이런 의미에서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계속 출현할 것이다(요일2:18).
그러나, 종말의 궁극적인 사건들을 동반할 한 특정한 범세계적인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5.전체적으로, 종말론적인 것을 의도한 그림들은 여전히 그렇게 취급되어야 한다.
성경의 처음 시작의 말씀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한 것이듯이, 그 결론의 말씀 역시 하나님과 창조의 완성에 관한 것이다. 이 모든 세사한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 나갈지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그의 시간과 그의 방법으로 이루어 가실 것이라는 확신에는 전혀 모호함이 없다.
그가 오실 때가지 우리는 이미의 미래를 살며, 우리는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산다. 그러나, 이와 같은 책들이 더 이상 필요가 없는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다 나를 앎이니라'(렘31:34). 그리고 우리는 요한과 성령과 신부와 함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