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g131027 보배 피로 거듭난 인생 (베드로 전서 1:18-23)
이태리 시실리 섬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어떤 전도자가 길을 가다가 산 속에서 강도를 만나게 ! 되었습니다. 이 강도는 돈을 다 빼앗고 소지품을 모조리 불 속에 넣으라고 호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전도자는 소지품을 모두 다 불속에 넣을 수가 있었지만 성경책만은 불속에 넣으려고 하니까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내가 이 책을 불속에 넣겠는데 당신은 여기에 무슨 말이 기록되어 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내가 한 두 마디만 읽고 불속에 넣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강도는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전도자가 성경을 펼치니 시편 23편이 나왔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하고 강도 앞에서 열심히 읽어가니 강도는 “아하! 그것 참 좋구먼!”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신약 성경을 펴고 마태복음 5장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아하! 그것도 좋구려, 그 책을 여기 놓으시지.”하고 나서 강도는 그 성경책을 싸가지고 날렵하게 사라졌습니다. 세월이 한 참 지난 후 목사님 한 분이 전도자를 찾아왔습니다. “날 기억하시나요?”, “아뇨.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면 오래전 강도를 만나서 돈과 성경책을 빼앗겼던 일은 기억하시나요?”, “예, 이제 기억납니다.”, “죄송합니다.” 말을 더듬으면서 “예, 제가 바로 그 강도입니다. 전도자의 물건 속에 주소를 보고 찾아왔습니다. 나는 그 책을 가지고 가서 읽기 시작한 후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나는 신학공부를 하고 지금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전도자님, 용서해 주세요.”라고 성경을 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우리를 위해 보배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경은 증거합니다. 이 증거를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무엇으로 죄 값을 지불했는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구속(救贖)은 죄를 지은 사람을 감옥에 구속(拘束)된 사람을 보석금을 주고 풀려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속은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을 속전을 주고, 값을 주고 사서 풀어주는 것, 자유케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신자는 자신은 자유하다고 자부하지만 사실상 노예입니다. 우리도 예수 믿기 전에는 노예였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사람들이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범죄한 사람은 모두가 죄의 종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사도는 정욕과 행악에 종이 되어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했습니다.(딛3:3) 베드로사도는 과거에 우리가 어떤 노예였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속이란 속죄, 속량, 대속이란 말로도 사용됩니다. 본문에 “대속함을 받은 것은”의 헬라원어“ελυτρώθητε”는 헬라 시대에 전쟁포로나 노예의 자유에 대한 몸값으로 지불된 돈을 가리키는 “λύτρον”에서 온 단어로 성경에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 죄 없으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구체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이러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최고의 위대한 행위요, 하나님의 최고의 희생이자 사랑의 절정입니다. 이보다 귀한 사역은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하며 기독교 복음의 최고 핵심입니다.
우리가 속전의 죄값을 지불 받아 죄에서 자유하여 해방되었지만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돈은 완전하거나 영원한 것이 못됩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입니다. 돈이 결코 만능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특히 구속문제는 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세교회는 돈으로 구속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면죄부를 팔아 착복하고 교회당 건물만 웅장하게 지었습니다. 성도들은 어떤 죄를 범해도 돈이면 해결되니 신앙양심에 가책 받음이나 두려움이 없이 죄를 범했습니다. 타락은 돈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속은 은이나 금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구속함을 받은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했습니다. (요1:29) 예수님은 흠이나 점이 없으신 분입니다. 예수님만이 인생들을 구속 하 실수 있는 유일한 구주십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관원과 장로들과 제사장들 앞에 서 증거 했습니다. (행4:12) 우리는 이미 주의 보혈로 죄와 사망에서 구속함을 받았음을 확신합시다. 감사하며 영광을 돌립시다. 더 이상 죄에 매이지 말고 삽시다.
우리는 본래 망령된 행실에 노예였는 데 거기서 구속이 되었다고 본문 1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망령된 행실은 헛된 정욕을 따라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4:3절에서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연락, 우상숭배 …… 이런 것을 망령된 행실로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망령된 행실은 조상으로부터 유전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조상대대로 그렇게 살고 있다. 모두가 그런 삶을 유전적으로 살고 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노예상태에서 구속하려면 반드시 속전이 필요합니다. 노예는 비참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에 노예가 500만 명이나 있었습니다. 인격적인 대우 못 받고, 주인의 동산이였습니다. 이 노예가 돈을 모아서 속전을 주고, 노예상태에서 풀려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군가 그를 위해 속전을 지불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무엇으로 값을 치루셨습니까? 은, 금 정도가 아닙니다. 이 보다 훨씬 비싼 값, 아주 비싼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19절) 보배로운 보혈은 아주 비싼 값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보다 더 비싼 것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 자신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피는 귀한 것입니다. 짐승의 피도 귀하고, 죄인인 사람의 피도 귀한데 하물며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야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이 보혈로 우리가 구속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자칫 "값없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틀림없이 값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결코 값싼 구원, 값싼 은혜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 아주 비싼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나를 구속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보혈, 그 생명을 지불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와 사망과 모든 저주에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그 고난을 당하시고, 그 보혈을 흘려주신 것을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자녀로서 헌신된 삶
피로서만 죄를 속할 수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창세전부터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주셨고 때가 찼을 때(말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보혈을 흘려주셔서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17절)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17절 말씀 상반 절에서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보시는데 외모로 보시지 않으며,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21절)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21절입니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 보자 앞에 나아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알렉산더 클라크(Alexander Clark)목사님이 한번은 정글을 지나다가 쓰러져 있는 흑인을 발견했습니다. 그 흑인은 사자에게 물려 피투성이가 되어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선교사님은 자기 집으로 업고 와서 정성을 다하여 치료해 주었습니다. 다 나은 이 흑인은 선교사를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3개월 후 이 흑인은 다시 찾아와서 말하길 "정글의 법칙은 구속된 자는 구속을 해 준 사람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죽었으나 당신의 손길에 의해 지금 살아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여기에 6명의 내 아내와 17명의 내 자녀들과 내 가축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대로 사용하십시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속함을 받은 자로서 우리를 구속해 주신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5:20),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구속함을 받은 자의 감격과 의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격과 의무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구속의 은혜에 감격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그 보혈을 흘려 나를 구원해 주신 우리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구속받은 성도는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야합니다.
"너희가 성령을 통해 진리에 순종함으로 너희 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 짓 없이 형제들을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킹 제임스 흠정역)고 했습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난하 에 다른 사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성령을 통하여'가 더 있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알레테이아 디아 프뉴마토스" "너 희가 성령을 통하여 진리를 순종함으로"라고 하여, "성령을 통하여"라는 말이 들어간 사본들이 고대 사본들 중에 많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게 된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하기에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인 문제요, 굳이 "성령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김요석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목사님은 음성 나환자들이 수용된 마을에서 10년 간 목회하였고, 지금 중국에 들어가 나환자를 직접 대하시면서 목회하시는 분입니다. 이 분이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15년간 공부하신 박사이신데, 귀국하여 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던 중에 어떤 목사님의 소개로 전라남도의 음성 나환자 정착촌의 하나인 영호마을의 교회를 목회하였습니다. 신학대학의 조직신학교수는 대우도 좋고, 장래가 보장되어 있는데, 그것을 마다하고, 음성나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이런 사실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독일의 스승이었던 교수가 퇴임하면서 튀빙겐 대학의 후임 교수로 들어오라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김요석 목사로부터 답이 오기를 지금 자기는 너무나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으니, 갈 수 없다는 것이였습니다. 도대체 한국에서 목회를 얼마나 재미있게 잘 하고 있기에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학 교수직을 마다하는지 궁금해서 독일의 스승 된 교수가 한국에 들어와서 드디어 영호마을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음성 나환자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스승 된 노 교수를 큰 충격을 받아 독일에 돌아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독일에서 존경받을 만한 목회자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 재는 중국 나환자 마을에 들어가 계십니다. 우리도 예수의 피로 구속받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최고의 계명대로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합니다.
22절의 말씀을 보면 먼저, 소아시아 성도들이 어떻게 영혼이 깨끗케 되었는가, 즉 어떻게 거듭났는지를 밝힙니다. 진리를 순종함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영혼이 거듭나는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이것을 흔히 사용하는 말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듭난 사람에게는 거듭난 특성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성도가 가진 구원의 가장 큰 증거 중에 하나입니다. 요한일서가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9,10절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3:14절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5:1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영적 빛 가운데 있는 증거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진 증거와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증거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아주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 거듭난 성도가 이런 특성을 갖게 됩니까? 우리가 거듭날 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속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이런 사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사랑이 우리 속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기적 사랑 혹은 왜곡된 사랑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는 이타적 사랑은 본래부터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로마서5:5절이 이렇게 증거 합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복음을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 속에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그런 특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 존재는 우리 속에 어떤 것이 들어오면 절대 감출 수 없습니다. 죄가 들어오면 죄의 특성을 드러내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오면 그 사랑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소아시아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이런 사랑의 특성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사랑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처음 사랑이 점점 식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똑같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주를 사랑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식어져 냉냉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도를 통해 다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기 “뜨겁게”는 운동선수가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전심을 다 해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특성이 식어지고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위해 의도적으로 애를 써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이렇게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가장 서툴고 잘 못하는 것이 형제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차 뜨겁게 사랑해 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호주의 ‘오들리’에 사는 70세의 노부인이 예수님을 영접한 후 주님의 평안과 기쁨이 가득 찼습니다. 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노부인은 교인들에게 “내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길이 뭐 없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마땅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예수님께 이것을 아뢰었습니다. 얼마 후 이 할머니는 기도 중에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오들리 대학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지금 살고 있는데, 네가 알다시피 그 대학에는 외국 학생이 많다. 그들은 모두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런데 네가 주일 오후마다 차를 준비해서 이 외국 학생들을 네 집에 초청해서 차를 대접하면 어떻겠느냐?” 할머니는 주일 오후에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한다는 광고지를 써서 붙여 놓았습니다. 첫 주일 오후에는 한 학생이 왔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세 명의 학생이 왔고, 그 다음 주일에는 여섯 명의 학생이 왔습니다. 매주일 학생들이 할머니의 집에 왔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의 단순한 신앙이었지만 이전에 몰랐던 일이 자기 마음에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후, 할머니의 간증을 통해서 학생들이 하나 둘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일은 5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학교에 퍼졌을 때, 약 70명의 학생들이 장례식에 나와서 운구를 했다고 합니다. 그 70명이 할머니를 통해서 예수님을 안 학생들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자그마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사랑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그마하고 잔잔한 사랑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사랑을 잉태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주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 식어져 냉냉해 지는 것입니다. 제 고향은 경기도 화성입니다. 서울 경기 사람들은 정중하게 예의를 잘 갖추기로 유명합니다. 흔히 매너가 좋다고 합니다.
제가 김제에 처음 내려왔을 때에 어느 성도로부터 “목사님은 아주 매너가 좋으신 분이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서울 경기 사람들의 약점이 있습니다. 개인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지도 않지만 자신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는 것을 매주 싫어합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집에 가려고도 않고 또 다른 사람을 자기 집에 초청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집사람이 경상도이고 또 전라도에서 목회를 하기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면 단합이 잘된다는 것입니다. 형제와 가족에 대한 우대가 매우 강합니다. 약점도 있습니다. 형제와 고향사람에 대한 우대가 강하다 보니 다른 지역 사람들에 대해서는 배타적입니다. 왜 경상도와 전라도가 지역감정이 생겼습니까? 물론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은 산물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서로 배타적인 성격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 벽을 무너트리지 않으면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의 보혈의 피로 거듭난 성도가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같은 벽을 허물고 피차 뜨겁게 사랑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마음이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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