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하시는 하나님
요 20:19-23
2015, 4, 19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1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크고 작은 사고와 아픔이 있었지만, 세월호의 침몰의 상처는 우리 한국인들 전체에 깊은 우울과 정신적인 고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 침몰의 사건이 고통스러운 것은 자라나는 수많은 새싹들인 어린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데에 더 큰 아픔과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로써 세상의 고통과 아픔에 함께 안타까워하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극을 발생할 때마다 신앙적으로 묻게 됩니다. 하나님은 계신 것 인가? 하나님께서는 그 침몰하는 순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어린학생들의 기도를 듣고 나 계신다는 말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다는 말인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의 나찌의 민족주의적인 만행으로 유대인들이 600만명이나 학살되는 홀로코스트 속에 생존했던 ‘엘리위젤’은 그의 소설 ‘Night’ ‘밤’이란 책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 유대인 어린 소년이 작은 실수를 하였는데 유대인이란 이유로 교수형에 처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하나님은 우리의 울부짖음을 듣고 계시는가?’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럴 때 그 어처구니없고 끔찍한 장면과 주위에 울부짖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가슴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을 체험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곳에 계시지 않고 지금 ,,, 저기 소년의 목을 감고 있는 저 소년과 함께 있다, 하나님도 함께 교수형을 받고 계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위에 근엄하게 전능하다는 것으로 오히려 무능하게 저 위에 위엄을 가지고 계신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인간의 고통과 아픔 한복판에 계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함께 고통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 하신다는 고백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멀리 계셔서 무감동 하시거나, 불변적인 분이 아니시고, 자유 가운데서도 세상을 향한 신실한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기도 하는 분이신 것입니다.
초창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과 그의 삶을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로 이 땅에 오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창조세계에 존재하는 악의 파괴성은 하나님의 독단적인 명령에 의해서는 극복될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고귀하신 사랑의 역사인 예수그리스도의 우리의 고통과 함께 하신 역사에서만 극복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세상의 고통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극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전통적인 신앙으로 인간이 재난과 사고를 당할 경우에 어떻게 해석을 하고 생각하며 받아들였는가? 그것은 첫째로, 그 재난과 사고는 죄로부터 온 것으로 그 재난과 사고를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신명기7장 9~10절에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그래서 구약 욥기서에 보면 우스땅에 욥은 당대에 의인이며 ‘그 사람은 온전하여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라’ 심지어 그는 자녀들이 범죄할까봐 아침마다 자녀의 명수대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녀를 잃고 그것도 모자라 온 몸에 피부병이 생겨 개들이 와서 그 몸을 핥게 되는 고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그는 자신을 비관하며 ‘차라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라며 욥기3장 11절에 한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세 친구들이 그에게 위로하려고 옵니다. 그 세 친구는 그에게 '빨리 하나님께 감추어진 죄를 회개하여 병과 재앙에서 놓임받으라'고 합니다. 욥기서가 끝날 때까지 이 세 친구와 대화를 합니다. 욥은 말합니다. '나는 죄가 없다,,, 차라리 몸 밖에서 주를 만나 이 슬픔을 아뢰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친구는 '재앙과 고통에는 이유가 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너의 죄를 알고 너를 심판한 것이니 ,,, 너의 죄를 하나님께 고해서 고통에서 놓임 받으라'고 말하며 욥과 하나님사이를 더 단절 시키고 있습니다.
마지막 42장에 하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고 줄곳 우기는 고집을 책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세 친구를 책망합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욥42:7)
이 욥기서의 등장은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있는가?’ 라는 신정론에 대한 물음을 묻는 구약의 시가인 성문서로 자리매김하는 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잘 믿었지만, 계속되는 국가적 재난과 바빌론으로의 귀향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어디있는가? 하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이 고난과 고통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나온 욥기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이 욥기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을 죄의 댓가로만 해석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정의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것을 반영한 것입니다.
또 성문서중에 시편에는 수없이 ‘하나님 언제 까지니이까?’ ‘왜 응답하지 않으시나이까?’ ‘여호와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13:1) 라고 부르짖는 구절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심지어 신약에 와서 예수그리스도의 마지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27:46) 라는 절규도 하나님의 정의를 묻는 극치의 부르짖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재난과 고통에 대해 과거의 유대종교의 전통에서처럼 하나님의 형벌이나 죄를 지은 댓가라는 것으로 그 재난과 고통을 바로 적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당하는 자와 지금 울고 있는 자들에 대한 모욕과 또 다른 종교적인 억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 요한복음9장에 보면,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를 보며 예수님에게 묻게 됩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주님은 그의 미래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죄나 그 부모의 죄 때문에 그가 그렇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참상이나 재난, 고통은 그 당사자들의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또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치어죽은 사건을 제자들이 말을 할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이 죄가 더 많아서 그리 된 줄을 아는가? 아니다. 너희도 회개 하지 않으면 그와 같이 망하리라' 라고 말씀하시며 보편적인 인간 모두 옳지 못한 삶을 살면 그와 같이 재난을 당하리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재난당하는 자들과 자신들과의 차이와 구분을 두는 것을 경고하시고 계십니다.
또 재난과 불행에 대한 전통 신앙의 기독교적인 이해는 그 재난과 불행의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교육한다는 이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닥치는 재난과 불행을 통해서 미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가지게 하며 이 세상은 집착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그 재난과 고통을 인간들에게 허락하였다는 이해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하나님께서 주신 삶과 생명에 대한 무관심을 낳게 하며 이 땅의 불의와 운명을 새롭게 개혁하고 혁신하는 자세를 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고 마태복음6장 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기도문을 암송하며 소리로만 기도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은 온 몸으로 그렇게 희구하며 그 몸으로 구현하라는 뜻의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는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입으로 기도하며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또 ‘나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적극적인 삶, 이 땅의 불의에 대항하는 적극적인 하나님나라를 위한 동참을 요청하는 말씀인 것으로써 단순히 하나님께서는 저세상만을 위한 것으로 이 땅에서의 고통과 재난에 대해 초월하거나 관심을 거두라는 뜻으로 재난과 불행을 주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재난과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것은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신앙의 눈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저 위에 - 인간의 삶을 허락하시고 멀찍이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아들예수그리스도로 이 땅에 참여하셔서 인간의 고통과 아픔, 괴로움에 철저히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사역, 또 그의 죽으심은 단순한 인간 숙명에 대한 받아들이심이 아니라, 적극적인 거짓과 불의에 대항하시고 그 이유로 인하여 미움받아 십자가의 죽음으로 넘기우신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일으키신 것이고 그를 다시 살리신 것이라’고 초대의 사도들은 이해하고 깨닫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해할때에 저 위에 홀로 계시며 섭리하시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인간은 그저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잠잠하라가 아니라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인간과 똑같은 이 고통의 삶에 참여하셔서 고독하시고, 피곤하시고, 또 목마르시고, 배고프시고, 우시고, 안타까워 하시며, 분노하시며, 뒤집어 엎으시고, 철저히 우리의 고통과 고독, 아픔속에 함께 하시는 분,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는 하나님 신앙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하셔서 그렇게 살게하도록 우리곁에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아들의 영이신 성령 이렇게 삼위일체적인 하나님 이해로 우리가 신앙을 할 때에 오늘의 재난과 인간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아픔과 재난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불안에 떨며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몰라 한자리에 있는 곳에 찾아오시는 말씀을 본문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19절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20절에 '주님께서는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주님은 21절에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이 평강은 로마제국이 힘과 억압으로 만든 평강이 아닌 것 입니다. 이것은 온 백성에게 미칠 하나님의 평강인데, 죄로부터, 모든 갈등으로부터, 마지막 남은 종교와 양심의 법에서 사랑으로 놓임받고 궁극적인 용서의 자유인 평강인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당시에 죄의 사함의 권한은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의 권한입니다. 또 죄 사함을 받으려면 제사장에게 몸을 보여주고 제물을 바치며 예루살렘성전에서 제사를 드려야 죄가 사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십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종교적인 용어이지만, 성경전체에서 나타나는 죄의 개념과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속에 죄라고 표현된 신약성서의 기록은 인간전체를 억누르는 사회적 구별, 인종적, 신분적, 남과 여의 구별로써 '죄'라는 용어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장치로 작용되고 있었던 것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용서하라’는 말씀은 계속 악하게 사는 사람, 남을 억울하게 하고, 남에게 고통을 주고, 속이며 거짓을 일관하며 사는 악인을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척박한 삶을 사는 ‘오클로스’ ‘천박한 땅의 사람들’ 그들을 당시에는 ‘죄인들’ ,,, 예루살렘 정결법에 저촉이 되어 ‘더러움을 묻히고 사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개념이라는 것 또한 간과해서는 죄를 말하는 성경이 오히려 죄악을 용인하고, 죄악을 조장하고, 죄에 대해 경각심을 느슨하게 하는 이상한 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며 사하여 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한계시록 22장 11절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밖에 있으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요한이 밧모섬에 귀양살이 하는 가운데 거짓과 불의 의 성 로마제국을 향해 음란의 무리, 심판받을 성이라는 것을 하늘의 계시로 보면서 요한계시록을 써 내려가며 순결한 그리스도인들, 악에 물들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며, 지켜내고자 쓴 편지 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나 제도, 시스템은 하나님의 의와 사랑과 평화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또 정치적으로 낙후된 곳의 그 정직성은 더 심각합니다. 또 그 연결고리로 이어지는 사회나 종교도 역시 그리스도의 진실 된 삶과 가르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서 죽임과 고통을 당하는 많은 백성들의 고통은 바로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힌 고통과 재난과 소외, 버림받음이 극에 달하고 있는 현장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셔서 이 땅에서 벌어지는 고통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오셔서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고통당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에 동참하도록 이끄시고 불러내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이신 것입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라는 마태복음 25장 37절의 주님의 말씀을 다시 상기하면서 이 땅에서 인간과 함께 고통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아픔과 고난과 부르심과 부활의 역사에 동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부활절이후 셋째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주변에 고통과 불안과 근심의 소식과 절규의 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오며 우리 자신도 먹먹함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은 그런 불안과 공포 한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닫힌 문을 열어 제끼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하시며 우리를 보내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우리와 함께 고난 당하시는 주님,
이제 하나님이 멀리계신분이 아니라 나의 아픔과 고독, 또 염려와 작은 기도 속에 함께 거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자매와 형제를 살리는, 용서하는, 안아주는 삶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소망은 '회복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가운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믿음을 굳건하게 하옵소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주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새롭게 해 주시고, 돌보시고 ,위로하시고, 굳건케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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