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도란 무엇인가?
하나님과 성도의 중간에서 목사가 복을 전달해 준다고 오해!
한국교회는 축복기도가 아주 활발한 교회이다. 아이가 출생해서부터 가능한 때마다 목회자를 초청해서 축복기도를 받기를 좋하하고 목사는 복채를 챙겨서 좋아한다. 교인들이 목사의 축복기도에는 능력이 있으며, 하나님과 성도의 중간에서 목사가 복을 전달해 준다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축복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나 축복기도를 하는 사람이나 서로가 속고 속이며 살아갈 뿐이다.
그러면 목사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할 수 있는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주의 이름”은 그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그래서 “주 예수의 이름”은 “주 예수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즉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기에 하나님은 여호와가 되신다!”는 의미로서,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무이하신 중재자이다. 성도에게는 “주 예수의 이름”처럼 소중한 것은 없다. 우리 앞에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가 나타났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의 이름을 사용해서 기도할 수도 없고, 설령 기도한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만 기도하라”고 하셨지, 어떤 유명한 목사나 신학자가 복을 받아서 교인들에게 나누어주는 중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은 목사에게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고 믿고 있다. 목사 스스로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전달해주는 중개인(agent)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목사나 성도들이 동일한 제사장이요(벧전2:9),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이기에 목사가 교회의 회중들보다 권위가 있다거나 목사에게만 축도의 특별한 권세가 부여된 듯이 취급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축도에 올바른 의미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성도들이라면 누구나가 축복을 기원할 수 있는 것이다.
“축원”이라는 어휘가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대부분은“축원”을“축복”으로 이해하고 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막8:6) “축사하시고”를“축복”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과 같다. 즉, 중국어 성경을 번역한 한글성경이 안고 있는 기본적 문제 중의 하나이다. 같은 한자를 사용하는 역사 속에서도“원(願)합니다. 사(謝)합니다”의 앞에 축(祝)자를 붙이는 중국인들의 어휘 구성이 가져온 오해인 것이다.
그러나“축원”이라는 어휘가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기를 간구합니다! 기도합니다! 기원합니다!"라는 표현이 가장 적당할 것이다. “축원”이라는 어휘는 불교 혹은 토속종교에서 쓰이는 어휘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한국교회는 목사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토속종교에서 가져온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마치 강단 위에 서서 위로부터 받은 복으로 가득 찬 바구니를 가지고 강단 아래로 흩뿌려 주는 쇼를 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있을지어다” 의미는 명령적 의미가 아니라 “기원”의 의미
모든 교회의 예배 순서에 축도(Benediction)가 있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고후13:13절”의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 를 근거로 해서 여기에 다양한 수식어구를 삽입하여서 사용하고 있다. 개역성경은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라고 명령형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헬라 원문에는 "있을지어다"란 동사는 없다. 거기에 보면 "…meta panton humon"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영어 성경에는 "be with you all"로 되어 있다. 즉 “있을 지어다”의 의미는 “기원”의 의미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 교인들의 대부분은 “있으라”의 명령적 의미로 받아들여서 축도자를 하나님의 대리인의 자리에 놓는다. 축도하는 목사들의 억양도 마치 위에서 받아서 흩 뿌려주는 것처럼 흉내를 내고 있다. 그래서 목사의 역할을 중계자(medium)나 대리인(agent)의 역할로 오해하는 것이다. 축도자가 영매(靈媒)나 주술사(呪術師)의 위치에 올려놓고 말이다. 그래서 축도할 때에 축도자가 자신이 축복을 받아서 나누어주는 대리인인양 양 손을 펴고 양 팔을 들어서 강단 아래 교인들을 향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여 주심으로 지체 간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져서 화해와 협력이 이루어지게 되고,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실 것을 기원한 것이다.
이제 성도라면 하나님과 우리를 중보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요, 예수님과 우리를 중보하시는 분은 성령님 한 분 뿐이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실 선생도 한 분 뿐이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분도 한 분 뿐이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지도자일 뿐임을 믿고 의지할 뿐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동은 교회 정판옥 목사님의 글입니다
축도의 정의와 종류
축도는 복을 선포하는 "있을지어다"가 옳다.
Ⅰ. 축도의 정의
축도를 영어로 Benediction이라고 한다. 라틴어에서 전래되었는데 Benedicere의 뜻은 Bene는 축복이요, Dicere는 선포한다는 의미 즉, ‘복을 선포한다’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Ⅱ. 기도와 축도
1. 기도와 축도의 차이
기도와 축도의 차이점은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께 찬미와 영광을 그리고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아래서 위로 드리는 것이고, 축도는 하나님께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시는 선물이요 축복의 부여다. 즉, 기도는 간구요, 축도는 그 결과에서 오는 은혜의 선물이다.
2. 기도의 종류
1) 기도(εὐχή, 유케)
항상 하는 기도로서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는 보통의 기도를 의미한다(행 18:18; 21:23; 약 5:15). 사도행전의 두 구절은 성경에 ‘서원’으로 번역되었다.
2) 공중기도(προσευχή, 프로슈케)
이는 기도의 전체를 묘사하는데 여러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는 신약에 총 37회 사용되었다(마 17:21; 21:13; 21:22; 막 9:29; 11:17; 눅 6:12; 19:46; 22:45; 행 1:14; 2:42; 3:1; 6:4; 10:4; 10:31; 12:5; 16:13; 16:16; 롬 1:9; 12:12; 15:30; 고전 7:5; 엡 1:16; 6:18; 빌 4:6; 골 4:2; 4:12; 살전 1:2; 딤전 2:1; 5:5; 몬 1:4; 1:22; 약 5:17; 벧전 3:7; 4:7; 계 5:8; 8:3; 8:4).
3) 간구(δέησις, 데에시스)
특별한 은택과 유익을 위하여 하는 기도이다. 이 간구의 기도는 신약에 총 19회 사용되었다(눅 1:13; 2:37; 5:33; 행 1:14; 롬 10:1; 고후 1:11; 9:14; 엡 6:18; 6:19; 빌 1:4; 1:19; 4:6; 딤전 2:1; 5:5; 딤후 1:3; 히 5:7; 약 5:16; 벧전 3:12).
4) 중보기도(ἐντεύξις, 엔튝시스)
신약에 2회 사용되었는데(딤전 2:1; 4:5)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으로 대신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5) 감사기도(ἐυχαριστία, 유카리스티아)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기도이다. 신약성경에 명사 εύχαριστία(유카리스티아)로 모두 15회 사용되었고(행 24:3; 고전 14:16; 고후 4:5; 9:11; 9:12; 엡 5:4; 빌 4:6; 골 2:7; 4:2; 살전 3:9; 딤전 2:1; 4:3; 4:4; 계 7:12; 4:9) 동사 εύχαριστω(유카리스테오)는 총 39회 사용되었다(마 15:36; 26:27; 막 8:6; 14:23; 눅 17:16; 22:17; 22:19; 18:11; 요 6:11; 6:23; 11:41; 행 27:35; 28:15; 롬 1:8; 1:21; 7:5; 14:6; 16:4; 골 1:3; 1:12; 16:30; 11:24; 14:17,18; 고후 1:11; 엡 1:16; 5:20; 빌 1:3; 골 1:3; 1:12; 3:17; 살전 1:2; 5:18; 2:13; 살후 1:3; 2:13; 몬 1:4; 계 11:17).
6) 간청의 기도(αἴτημα, 아이테마)
신약에 3회 사용되었는데(눅 23:24; 빌 4:6; 요일 5: 15) 곤고하거나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 이를 해결해 달라는 청원과 진정의 기도를 의미한다.
7) 소원기도(Ἷκετηρία, 익케테리아)
신약에 한번 사용되었는데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에서 ‘소원’이 바로 ἱκετηρίας(익케테리아스)가 사용되었다. 이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통곡의 기도를 말한다.
Ⅲ. 축도의 종류
1. 구약의 축도
1) 아담의 축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2) 노아의 축도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신다(창 9: 26).
3) 이삭의 축도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창 27:27-29).
4) 야곱의 축도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되고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한다(창 48:15,16).
5) 모세의 축도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1-6).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 하신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신 28:7-13).
6) 아론의 축도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4-27).
7) 아론의 축도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 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레 9:22-24).
8)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의 축도
그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였으니 그 소리가 들으신바 되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대하 30:27).
2. 신약의 축도
1) 인사의 축도
(1)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롬 1:7).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고전 1:2,3).
(3)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 어다(고후 1:1,2).
(4)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갈 1:2,3).
(5)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 게 있을지어다(빌 1: 2).
(6)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엡 1:1,2).
(7)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골 1:2).
(8)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전 1:1).
(9)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살후 1:2).
(10)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딤전 1:1,2).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 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딤후 1:1, 2).
(12)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딛 1:4).
(13)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몬 1:2,3).
(14)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2).
(15)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을 자들에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후 1:1,2).
(16)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 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요한이서 1:1-3).
(17)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유 1:1,2).
(18)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계 1:4,5).
* 바울 서신과 일반 서신에 나열한 것을 살펴보면 -
1) 은혜와 평강(롬 1:7; 고전 1:2,3; 고후 1:1,2; 갈 1:2,3; 엡 1:1,2; 빌 1:2; 골1:2; 살전 1:1; 살후 1:2; 딛 1:4; 몬 1:2; 벧전 1:2; 벧후 1:2; 계 1:4,5)
2) 은혜와 긍휼과 평강(딤전 1:1,2; 딤후 1:1,2; 요이 1:3)
3) 긍휼과 평강과 사랑(유 1:2)
4) 진리와 사랑(요이 1:3)
야고보서 1:1의 원어에는 은혜라는 명사를 쓰지 않고 ‘은혜스러워’라는 문안의 말을 사용하였다. 히브리서, 야고보서, 요한일서, 요한삼서, 요한계시록에는 인사의 축도가 없다. 한글성경에는 직설법의 선포(엡 1: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딤전 1:1,2; 딤후 1:1,2; 딛 1:4; 몬 1:2; 요이 1:1-3)의 ‘있을지어다’가 ‘있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번역이 통일되지 못했다. 직설 선포로 ‘있을지어다’가 올바른 번역이다.
그리고 요한이서 1:3에는 ‘있으리라’(ἔσται, 에스타이)라는 미래형을 썼으나 ἔσται의 용법은 격언법(Gnomic use)과 명령법(Imperative use)으로 볼 수 있다. 격언법은 미래라는 관념을 떠나 시상에 얽매이지 말고 진리를 아는 모든 자(요이 1:1)이다. 진리의 영원성(요이 1: 2)은 진리를 아는 이에게 거하기(요이 1:1) 때문이다(갈 6:5; 롬 5:7; 7:3; 엡 5:31).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것이다(마 7:17). 또한 명령법(Impreative use)으로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는 명령을 뜻한다.
그러나 King James 역은 ‘Be with You’라 하며 K, 69, Lat, Syh 사본 등을 참조해서 ‘너희들과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하였다. Be(있을지어다)가 ἔσται(It shall be)를 바꾸어 현재 희구법 삼인칭 단수의 εἴη(Be)를 사용한 것으로 본다. ‘Be with you’(너희들과 함께 있을지어다)는 직설적 표현으로 통상적인 다른 종결의 축도와 같이 직설 선포를 했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에는 Grace, mercy and peace will be with us는 단순히 미래에 대한 예측의 표현을 했다.
한글성경의 ‘있으리라’(요이 1:3)한 것이 격언법이다. 또한 벧전 1:2과 벧후 1:2은 저자인 베드로의 필체로서 다른 서신과 다르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했는데 헬라어의 πληθυνθείη(플레툰데이에)라는 단순과거 희구법의 삼인칭 단수로서 수동을 썼다. πληθύνω(플레투노)는 신약성경에 12회(마 24:12; 행 6:1; 6:7; 7:17; 9:31; 12:24; 고후 9:10; 히 6:14; 6:14; 벧전 1:2; 벧후 1:2; 유 1:2) 나왔다.
(1) 마 24:12(성함)
(2) 행 6:1(더 많아져)
(3) 행 6:7(심히 많아지고)
(4) 행 7:7(번성하여)
(5) 행 9:31(수가 더 많아져)
(6) 행 12:24(더 하더라)
(7) 고후 9:10(풍성하게 하시고)
(8) 히 6:14(번성케 하고)
(9) 히 6:14(번성케 하고)
(10) 벧전 1:2(더욱 많을지어다)
(11) 벧후 1:2(더욱 많을지어다)
(12) 유 1:2(더욱 많을지어다)
헬라어 πληθύνω(플레투노)의 본래 뜻은 충만이다. 벧전 1:2; 벧후 1:2; 유 1:2은 많은 것(數的)으로 알고 행 9:31(수가 더 많아져)과 같이 번역되었다. 행 9:31은 양의 다수를 말하나 벧전 1:2; 벧후 1:2; 유 1:2은 질적 충만을 말한다. 그래서 ‘더욱 많을 지어다’보다 ‘더욱 충만 할 지어다’가 옳은 것이다. 한국교회는 대형 교회가 많으나 올바로 성경을 번역하기에는 앞으로 수십 년이 걸려야 할 것이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할 것인가! 기도해야 할 과제이다.
2) 종결의 축도
(1)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20).
(2)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전 16:23,24).
(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갈 6:18).
(5)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 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 6:23,24).
(6)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빌 4:23).
(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골 4: 18).
(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전 5:28).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살후 3:18).
(10)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딤전 6:21).
(11)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딤후 4: 22).
(12)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딛 3:15).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몬 1:25).
(14)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히 13:25).
(15)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벧전 5:14).
(16)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17)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요삼 1:15).
(18)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계 22:21).
* 축도의 대상
-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는 자(신 28:1)
-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신 28:1)
-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신 28:2)
- 여호와께 예물을 드린 자(민 6:21)
- 7일 안식일을 즐겨 지킨 자(대하 30:23)
-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롬 1:7)
-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롬 1:7; 고전 1:2; 고후 1:1; 엡 1:1;
골 1:2; 유 1:1)
- 거룩하여진 자(고전 1:2)
-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고전 1:2)
-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살전 1:1; 딤후 1:1)
- 믿음 안에 있는 자(딤전 1:2; 딛 1:4)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엡 1:1; 벧후 3:18)
-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빌 1:2)
- 말씀에 순종하는 자(벧전 1:2)
-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 받고 택함을 입은 자(벧전 1:2)
- 믿음을 받은 자(벧후 1:2)
- 진리를 아는 모든 자(요이 1:1)
-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자(유 1:1)
- 그리스도를 지키는 자(유 1:1)
-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계 1:3)
-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눅 23:53)
* 축도의 선물
1. 은혜 : 민 6:25; 롬 1:7; 16:20; 고전 1:3; 16:24; 고후 1:2; 13:13;
갈 1:3; 6:18; 엡 1:2; 6:24; 빌 1:2; 4:23; 골 1:2; 4:18; 살전 1:1; 5:28; 살후 1:2; 3:18; 딤전 1:2; 6:21; 딤후 1:2; 4:22; 딛 1:4; 3:15; 빌 1:2; 1:25; 히 13:25; 벧전 1:2; 5:14; 벧후 1:2; 3:18; 계 1:5; 22:21
2. 긍휼 : 딤전 1:2; 딤후 1:2; 요이 1:3; 유 1:1
3. 평강 : 민 6:26; 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1:1; 딤전 1:2; 딤후 1:2; 딛 1:4; 몬 1:2; 벧전 1:2;
벧후1:2; 요삼 1:15; 유 1:1; 계 1:5
4. 진리 : 요이 1:3
5. 사랑 : 고후 13:13; 요이 1:3; 유 1:2
6. 교통 : 고후 13:13
* 축도하는 자는 손을 들어
1.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하심(레 9: 22)
2.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 24:50-53)
* 헬라어가 가르치는 축도
기도는 아래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라면 축도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축도의 선포는 희구(Optative)도 아니고 명령(Imperative)도 아니고 직설(Indicative)이다. 즉 확실한 사실을 말함이다. 축도의 부여는 교회에서 예배, 묵도, 찬양, 교독문, 기도, 성경봉독, 설교(듣고), 헌금, 폐회찬송을 다한 성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선물로 주는 특혜의 축복이다. 성도가 구하거나 주는 것이 아니고 받는 것이다.
* 축도 ‘있을지어다’의 헬라어 문법
바울 서신에서 인사의 시작과 종결을 맺는 문자에는 기도하는 희구법(Optative)과 명령법(Imperative)을 사용하지 않고 은혜와 사랑과 교통을 받으라고 선포할 때 ‘있을지어다’의 영어의 ‘Be’를 사용하지 않는다. 명사로 사용된 헬라어의 격(Case)이 주격(Nominative)으로 되어 있다. 은혜와 사랑과 교통의 주격 용법(Use)을 독립적 절대법(Independent Absolute)이라 하는데 이 독립(Independent)과 절대(Absolute)는 특이하거나 예외라는 뜻으로 전후 문장에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사용되며 문법과 관계없이 예외로 사용한다. 축도의 은혜와 사랑과 교통의 주격을 독립적이거나 절대법으로 볼 때 선포의 주격(Nominative of Exclamation)은 외침과 선포다.
축도의 뜻은 ‘간절히 축원함’도 아니고 ‘간절히 기원함’도 아니며 복을 선포하는 ‘있을지어다’가 옳다. 다만 성부, 성자, 성령만이 성직자를 통하여 축복하시는 것이 축도다. ‘축도’라기보다 축포(祝布)의 뜻이 있다.
축도.....("있을지어다" vs "축원하옵나이다")
한국교회 안에는 축도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의 차이들이 있다.
1. 그 중에 가장 차이를 보이는 것이 종결서술어 대한 것이다.
축도에 있어서 끝말을 "있을지어다" 로 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
반대로 성경에 있는 내용대로 "있을지어다"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전자의 경우, "건방지게 보인다. 교만해 보인다" 고 하면서 겸손하게 " 축원하옵나이다" 를 사용하길 원한다.
후자의 경우, 성경에 있는 대로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임을 주장한다.
대체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과 고신, 개혁, 대신 등 소유 보수적인 교단은 "있을지어다"로 하고 있으며,
통합측에서는 "축원하옵나이다"를 사용한다.
2. '축도'란 용어 자체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있다.
축도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강복선언'이라고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영문 표기가 "benediction" 또는 "blessing"이기 때문이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시지만, 축도의 대상은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축도'란 용어를 주장하는 교회도 많이 있다.
축도에 대해서 예배학 전공 교수님들의 글을 인용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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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한 교수 (백석대학교 / 예배학)
공예배의 구성 요소 중 ‘축도’에 대한 명칭과 끝맺음 말인 종결서술어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한국의 각 교회에서 예배 때 시행하는 ‘축도’라는 말의 지칭과 ‘종결어’ 서술형이 통일되지 않고 목회자들마다 다르게 진술하고 있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우선 명칭을 보면 ‘축도’, ‘복의 선언’, ‘축복선언’, ‘강복선언’, ‘축복기도’ 등으로,
종결서술어에서는 ‘있을지어다’, ‘축원하옵나이다’, ‘계실지어다’, ‘축원하노라’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축도의 성경적 근거로는 구약에서는 민 6:24-26에 제사장적 축도로 ‘원하노라’로 표현해 행위자가 자기의 동작에 격식을 차려 기원적인 뜻으로 ‘그렇게 되어 지기를 선언적으로 공포한 것’이었다.
신약에서는 고후 13:13의 사도적인 축도로 ‘있을지어다’로 쓰여 ‘마땅히 그리 하여라’의 뜻으로 행위자의 기원적인 성격을 담은 둘 다 문어투(文語套)의 종결어미로 진술되어, 공통점은 듣는 이의 이익과 말하는 이의 기원을 담은 정중하고 경건한 표현양식이다.
이 축도를 바르게 이해해야 할 점은
첫째, 축도는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교통하심이 마땅히 그렇게 되기를 기원하는 선포요, 복의 임재를 하나님과 계약관계에서 확인하는 복의 선언으로 축복기도가 아니므로 명칭은 ‘복의 선언’으로 지칭돼야 한다.
둘째, 복의 선언은 기도체가 아닌 선언체이므로 종결어를 ‘축원하옵나이다’, ‘계실지어다’로 쓰는 것은 맞지 않다. ‘축원하옵나이다’는 기도체일 뿐 아니라 그 주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기 때문에 사람을 주어로 하는 종결어로는 합당치 않다.
또 ‘계실지어다’는 삼위 하나님의 인격체의 임재 선언이 아니고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하는 비 인격체인 복의 요소를 ‘계시다’로 표현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의인화요, 또한 삼위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명령형으로 할 수 없다.
‘원하노라’는 1인칭 단수 선언체로 신약적인 내용에는 부자연스럽고 복의 대상에 대한 하대어(下待語) 인상이 짙은 진술이다. 그러므로 복의 선언의 표준형은 고후 13:13의 사도적인 복의 선언의 종결어인 ‘있을지어다’로 통일함이 옳을 것이며, ‘마땅히 그리 해야 한다는 자기 다짐의 기원적 명령형 선언’이기에 ‘-ㄹ지어다’로 해야 한다.
셋째, 복의 선언은 목사의 은사를 입고 제사장적 직무와 권위를 위임받은 자격을 가진 목사가 그 직무로 복됨을 선언하는 것이어야 한다. 넷째, 복의 선언의 어순(語順)은 사도적인 기원체에서(고후 13:13) 구원론적인 차례를 논리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류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니(요 14:6) 그의 중보적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지 못하며(엡 3:12),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구원을 받게 하는 실제적 방법은 성령님의 교통이다.
그러므로 복의 선언의 표현 형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은 구원론의 논리적 차례이므로 이 형식을 변형하여 선언해서는 안된다. 이러므로 ‘복의 선언’은 삼위 하나님의 단순한 지칭과 복을 선언적으로 하되 성경을 표준으로 정중하게 시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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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복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 예배학)
1. 축도 사용에 대한 문제 제기
개신교 예배순서의 끝 부분에는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이 복내려 주심을 선언하는 강복선언(降福宣言-축도)이라는 순서가 있다. 이 축도 행위에 대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의 일부에서 축도가 목사만의 고유한 사역인지, 현재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축원하옵나이다"라는용어가 성경의 내용과 비교하여 올바른 사용인지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에 총회는 축도 연구위원회를 임명하고 이 문제에 대하여 연구보고토록 한바 있다. 이 위원회는 1년여의 연구 끝에 그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여기서 축도는 목사의 고유한 사역으로 인정하며, 목사에 한하여 하도록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축도 용어에 대해서는 의견이 대립하여 일치를 이루지 못하였다.
2. 축도 용어에 대한 논의
A. "축원하옵나이다" 혹은 "빕니다"의 견해
축도의 끝 부분이 "축원하옵나이다" 혹은 "빕니다"로 개정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가. 성경적 측면에서
1) 현재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축도는 고후 13:13의 말씀을 근거로 하였다고는 하나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후속사이며 문안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바울 사도가 보낸 서신마다 기록되었으며, 다른 사도들의 편지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2) "있을지어다"라는 말은 오직 예수님 자신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된 목사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실수이므로 수정되어야 한다.
3) 축도는 구약시대에 제사장이 하던 기도와 축복이 아니며 천주교의 신부나 교황이 비는 강복선언과도 다르다. 축도란 주님의 양을 치는 주님의 종된 목사가 주님의 양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옵나이다"로 수정되어야 한다.
나. 국문학적 측면에서
1) 축도란 어휘는 축복기도를 줄인 단어이며, 축복기도의 의미는 기독교적으로 예배가 끝날 무렵 목사가 성부, 성자, 성령에게 모든 신자의 복을 구하여 비는 기도이다.
2) "지어다"가 성서적이라고 하나 "지어다"라는 말은 우리말 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이다.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에서는 "빕니다"로 번역되어 있다.
3) "함께 있을지어다"의 끝말이 국문학적으로 타당하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옛날 왕이 신하와 백성에게 조서를 내릴 때 사용하는 계층적 어용어이기에 위화감과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지어다"의 뜻이 무엇이 되기를 바란다와 축원의 뜻이 비슷하고 현대인들의 문헌과 대화속에서 고문화되어져 가는 것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은 표현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 현실적 측면에서
현재의 "있을지어다"로 축도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근대적이요, 내면에서는 권위의식이 가득찬 발상이다. 현 사회에서는 대통령에게도 "각하"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계층간의 간격을 해소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우리 교회가 이 간격을 더 조성하여 목사와 신도들간의 위화감을 조장하는 발상을 하는 것은 신도들에게 "지어다"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게 할뿐이다.
1) 고후13:13 본문대로만 목사가 주문 외우듯 한다면 축복기도의 참 의미가 없어진다. 여기서 분별하여야 할 것은 고후 13:13은 어디까지나 축복문이다. 그리고 이 축도문을 목사만 전용한다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 것 같이 본문도 목사 축도 전용어인 까닭에 신도들은 성경에서 빼놓고 읽어야 한다는 이론이나 또는 본문을 이용하여 신도 누구나 축복기도를 하여야 한다는 문제가 부각될 수 있다.
2) 현실적으로 제일 심각한 것은 일부 목사(특히 젊은층)의 권위의식의 문제이다. 목사의 권위는 제도적인 것에 치중하기보다는 진정 하나님의 소명을 가진 자로서 진정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희생과 봉사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위를 소유할 때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된다. 축도를 "축원하옵나이다" 또는 "빕니다"로 한다고 해서 목사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100년의 한국장로교회의 전통에 이미 토착된 목사의 축도의 말미어는 국문학적으로 손색이 없고 이미 공동번역이나 새 번역에도 사용된 "빕니다"로 하여야 한다. "빕니다"는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뜻이라고 국문학적으로 해석된 단어이다. 또한 청소년 그리고 앞으로의 세대를 위해서 "빕니다"로 함이 가하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근거 위에 축도용어의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에서는 공동번역대로 "빕니다." 또는 현재 많이 사용하고 있는 "축원하옵나이다"로 축도의 끝말을 개정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B. 우리의 언어구조를 지지하는 견해
이에 대하여 다른 입장은 한국교회 축도의 어미가 가지고있는 문제점에 대하여는 공감을 표하면서도 그 개정은 성경에서 행하여진 대로하되 그 표현은 우리의 언어구조를 따라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이들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가. 성경적 측면에서
1)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예전에 대한 제반 법규를 준 후에 축도의 사역은 제사장 아론과 그 계열에게만 주었으며, 그 내용은 민수기 6:22에 규정되어 있다. 이 축도는 루터나 칼빈과 같은 개혁가들이 가장 활발이 사용하였으며 , 지금도 화란의 개혁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유럽의 교회들이 사용하고 있다.
2) 신약에서는 어원적으로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주는 선물"의 의미를 가진 어휘를 사용하면서 단순한 개인의 바램이나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는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써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볼 수 있다. 그 실례로 어린이에게 손을 올려 복을 주신 일(막10:16)과 승천하시기전에 손을 들어 제자들에게 축복을 하셨던 일(눅24:50)을 들 수 있다.
3) 사도들에게 이르러서는 축도의 내용을 일반기도와 달리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구체화하여 사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은 고후 13:14, 롬15:5-6, 엡6:23-24, 살전5:23, 살후3:16,18, 히13:20-21 등이다.
4) 성서적으로 축도는 기도와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축도는 자신이 원하는 사연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고,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역사하심이" 있어질 것을 알리는 의미로 사도들에 의하여 사용되었다.
나. 역사적 측면에서
1) 교회의 역사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본 축도는 사도적 전승을 받은 교회의 감독과 교부들이 사용하였으며, 이는 사도적 전통으로 예배의 결론 부분에서 사용되었다.
2) 363년의 라오디게아 회의에서는 이단들의 축도행위를 엄격히 규제하면서 예배순서로서의 축도를 존엄한 사건으로 규정하였으며, 후기의 신학자들은 축도를 하나님이 주시는 소중한 은사로 이해하였다.
3) 축도의 자세는 역사적으로 두 형태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두 손을 드는 것과 다른 하나는 십자가를 긋는 것이었다.
4) 중세의 교회를 비롯하여 현재의 구교에서는 축도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사제의 고유한 사역으로 이해하고 강복선언이라 칭하면서 예배에서 실천하고 있다.
5) 종교개혁자들은 예전의 상징적인 행위보다 말씀중심의 교회를 강조하였기에 축도는 더욱 소중한 부분으로 간주되었고, 그 정신은 현대의 세계 개혁교회에서 계승되어 목사의 고유한 사역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 세계 교회의 실태
세계 개혁교회연맹에 가입되어 있는 교회가운데 12개국 16개 교단에 공한을 보내어 그들의 교회가 사용하는 축도의 형태를 질의한 결과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예배의 마지막 순서로 사용하는 축도는 어느 특정한 나라의 고유한 언어나 문화적인 성격에 의하여 그 내용을 개정함이 없이 성경에 나타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2) 유럽지역의 교회에서는 아론의 축도(민6:22)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미국의 개혁교회들은 바울의 축도(고후13:13)를 대체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성경에 나타난 축도의 여러 형태를 사용하고 있다.
3) 회신을 보내온 교회들은 축도(Benediction 혹은 Blessing)를 일반기도(Prayer)와 분류하여 사용하고 있다.
4) 축도는 예배 집례자인 목사에 의하여 끝 부분에서 사용되어지고 있으며,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하고 축도의 순서에 임하는 특수한 경우는 끝맺음을 "우리와 함께 있어지이다"(be with us) 로 사용하는 사례가 있다.
라. 국문학적 측면에서
1) 제 64회 총회에서 결의한 성경 번역대로의 "있을지어다"의 표현은 현대어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의미에 있어서도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내려 주는 어감 때문에 축도를 받는 현대의 회중들로부터 거부감을 일으킨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2) 그러나 일부에서 주장하여 사용하는 "축원하옵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하옵나이다" 등은 완전한 기도의 형태로서 축도의 내용과 행위와는 다른 것이다.
3) 문법적으로 완전한 문장은 언제나 주어를 수반해야만 한다. 축도의 주어는 성경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이다. 이 주격의 행위를 전할 수 있는 술어는 "함께 하여지이다", "함께 있을 지어다" 등이 가장 적절하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어떤 경우도 축도를 하는 사람이 주격으로 등장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축도를 행하는 사람이 주어가 되는 경우에는 그것은 단순한 기도가 되어 비성서적이게 되며 이는 세계교회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사례가 될 것이다.
3. 제언
위의 두 입장을 고찰해 볼 때 필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안하고자 한다.
1) 축도는 성서적으로 일반기도와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하는 예전행위이기 때문에 먼저 축도를 기도의 개념에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
2) 축도는 예배를 집례하는 목사의 고유한 사역으로서, 목사의 권위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없으며, 오직 예전적인 순서로서 가급적 성경에 나타난 대로해야 하며 수식어를 첨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3) 축도의 주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어야 하기 때문에 축도하는 사람을 주어로 하는 "축원하옵나이다" 또는 "빕니다"의 종결어는 타당하지 아니하다.
4) 축도의 내용 중 "너희 무리들에게"는 현대어로서는 적절치 않으므로 "모든 성도들에게" 또는 "00 교회 성도들에게"라고 함이 타당할 것이다.
5) 축도의 끝말은 현재의 "있을지어다"가 거부감을 준다는 반응을 고려하여 "함께 하여지이다" 또는 "함께 있어지이다"로 할 수 있을 것이다.
6) 한글 사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사전을 찾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사전에서 지어다를 찾을 겨우는 "--ㄹ 지어다' 로 찾으면 그 뜻은 다음과 같이 설명되었다.
'마땅히 하여야 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맺음 끝. 예스런 정중한 표현에 쓰인다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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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몇몇 사람들이 고전13:13의 헬라어 원문에는 "있을지어다"란 말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내용을 참조하면 좋다.
축도 ‘있을지어다’의 헬라어 문법
바울 서신에서 인사의 시작과 종결을 맺는 문자에는 기도하는 희구법(Optative)과 명령법(Imperative)을 사용하지 않고 은혜와 사랑과 교통을 받으라고 선포할 때 ‘있을지어다’의 영어의 ‘Be’를 사용하지 않는다. 명사로 사용된 헬라어의 격(Case)이 주격(Nominative)으로 되어 있다. 은혜와 사랑과 교통의 주격 용법(Use)을 독립적 절대법(Independent Absolute)이라 하는데 이 독립(Independent)과 절대(Absolute)는 특이하거나 예외라는 뜻으로 전후 문장에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사용되며 문법과 관계없이 예외로 사용한다. 축도의 은혜와 사랑과 교통의 주격을 독립적이거나 절대법으로 볼 때 선포의 주격(Nominative of Exclamation)은 외침과 선포다.
축도의 뜻은 ‘간절히 축원함’도 아니고 ‘간절히 기원함’도 아니며 복을 선포하는 ‘있을지어다’가 옳다. 다만 성부, 성자, 성령만이 성직자를 통하여 축복하시는 것이 축도다. ‘축도’라기보다 축포(祝布)의 뜻이 있다.
***** 또 다른 이해 *****
축도를 바르게 이해하자
“주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찌어다”(고후 13:13)
한국교회 축도에 혼선이 생긴 것은 ‘축복기도’의 준말인 축도란 개념에서부터 ‘축복’이냐 ‘기도’냐, ‘기원’이냐 ‘선언’이냐로 헷갈리게 했다. 그래서 ‘축복과 선언’에 중점을 두고 ‘있을지어다’하는가 하면 ‘기도와 기원’에 중점을 두고 ‘있기를 축원하옵나이다’하기도 했다. 나는 축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한 것이지 이 두 가지 축복문의 형식에 따라 그것은 ‘축도’가 아니라고 배타하는 입장은 아니다. 축도란 목사가 하나님을 대리하여 선언하면서도 그 안에 자신의 기원이 내포되기 때문이다.
축도가 개인적 축복기도와 다른 것은 손을 들어 한다는 것과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 형식이 아닌 것과 목사들만 하는 것이란 사실이다.
여하 간에 축도문의 혼선을 방지코자 공식으로 총회에서 결의한 것은 이러하다. 1960년 제45회 총회에서 정치부장 권연호 목사의 보고 중 ‘본 정치부에서 제안하옵는 바는 목사가 예배 폐회 때 삼위의 이름으로 축기도 할 때에는 예배모범에 있는대로 ’있을지어다’로 일치하게 실시하기를 각 노회에 시달하여 주심이 가한 줄 아나이다’한 것을 받기로 가결하므로 이후 본 교단의 공식입장이 되었다. 1978년에 총회 교육부에서 발행한 ‘표준예식’서에도 129페이지에 ‘있을지어다’로 나온다. 통합측 교단에선 1979년 제64회 총회에서 고후 13:13 본문대로 하기로 결의하여 계속해서 ‘있을지어다’로 시행하다가 제74회 총회에서 ‘축원하옵나이다’로 하기로 변경 결의를 했다. 하지만 이것은 축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해석을 중심하여 이루어진 결의가 아니고 한국교계에서 장로 파워가 제일 드센 그 교단에서 목사들의 ‘있을지어다’가 권위주의적 행태라고 몰아가는 목사, 장로 세 싸움에서 ‘좋은 게 좋다’는 일부 분위기가 작용하여 근소한 표 차이로 결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 중 지성인이 제일 많이 나온다는 서울 소망교회 곽선희 원로 목사는 그가 속한 교단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지어다’라고 계속 축도한단다. 그는 말하기를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나는 …지어다 축도를 지켜 나갈 것입니다. 이 교단을 떠나는 한이 있어도 이 …지어다 축도를 사수할 것입니다. 그것은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축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단다. 이 같은 증언은 한 때 그와 함께 일했고 지금은 소원해진 그 교회 출신 장로 중에서 ‘크리스챤 신문’에 곽목사를 비난, 비판한 글에 나오는 내용이다.
대체로 축도에서 ‘찌어다’를 반대하는 것은 목사가 감히 하나님께 명령하는 것 아니냐는 극단론에서부터 카리스마적 행태라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런가?
1902년 한국 선교사로 와서 36년 간 평양신학교에서 실천신학을 강의한 곽안련 박사(C.A. Clark)는 1925년에 초판 간행한 그의 저술인 ‘목회학’ 책에서 축도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했다. 참고로 나도 그의 목회학, 설교학 책을 교재로 신학 공부했다. “① 축복이란 무엇인가, 고전 1장 3절과 고후 13:13에 있는 사도 바울의 축복 중에 ‘너희’라는 어구와‘있을지어다’라는 어구가 있다. 이것을 보면 축복기도가 다른 일반기도와 구별이 있다. 즉, 기도하는 그 대표자가 그 기도에 자기는 참여치 않고 교우들을 위하여서만 기도하는 것이다. 만일 그 어구를 고쳐서 ‘우리에게’라고 기도하면 신약의 원어의 의미와 달라진다. 또 ‘너희’라는 어구는 제 2인칭이요 서양어의 보통 예이므로 결코 하시하는 뜻이 아니다. 축복하는 사람이 자기의 권세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명을 실행하기 위하여 사명을 주신 주인의 대표자가 되어 말하는 것이므로 이는 합리적인 것이다.
② 어떠한 형식적 어구의 기도가 적합한가, 물론 성경말씀 그대로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지만 뜻을 변경하지 않는 한 그 제 2인칭 ‘너희’를 ‘우리’로 고치지 못할 것 외에는 편리할 대로 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너희’라는 말을 회중이라고 하여도 무방하다“
또 그는 1938년에 초판 간행한‘목사필휴’라는 예배순서를 비롯한 각종 예식 집전의 규범을 담은 책에서 축복문에‘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신의 감화하심이 너희에게 영원토록 계실지어다 아멘’이라고 썼다. 다른 축복문의 범례에도 똑같이‘계실지어다 아멘’이라고 썼다. 일제 때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한국장로교의 모든 목사들은 곽안련 박사에게서 예배학과 설교학을 배웠기에 곽안련 선교사의 입장이 한국교회의 진정한 전통인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다음 현재 통합 측 교단의 장로회 신학대학교에서 다년간 실천신학을 강의해온 정장복 교수(현, 한일장신대학교 총장)는‘기독교 예전과 설교’를 전공하여 신학박사를 받은 분인데 원래는 나와 총신에 입학을 같이 했던 분이다. 그는 1985년 통합 측 교단의 기관지 기독공보에 기고한 ‘축도의 권한’이란 글에서 구약의 민 6:24-26과 신약의 고후 13:13을 대표적 축도문으로 소개하고 거기에서 두 가지 중요한 부분을 알 수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첫째는 구약의 제사장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사용했던 축도는 단순한 기도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실 것을 선언(Pronounce)하는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구교에서는 이 부분을‘빌다’는 의미의 축(祝)자를 쓰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복이 내려옴을 알린다는 의미에서 강복선언이라고 이름하였다. 둘째로 이 복의 선언은 아무나 원하는 대로 이행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사제적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령받고 그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며 사는 목사들에 의하여 선언되어짐이 정당하다. 칼빈의 말대로 하나님의 사역을 위탁받은 사람들, 그것도 모든 시간과 정신을 온전히 바쳐 주어진 사명에만 전념하는 종들에 의해서만 선포되어 지는 것이 바로 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오늘의 개신교 예배의 현장에서도 이 축복의 선언만은 목사에 의하여 성실히 집례되고 있다” 부연하면 외국의 개혁 교회에선 예배시 공식기도를 ‘목회기도’라고 하여 목사가 직접하는 게 상례이다. 정장복 박사는 몇 가지 부탁을 결론으로 드린다며 이렇게 말했다.
“첫째, 복을 달라고 호소하는 일반적 기도와 복을 선언하는 목사의 축도와의 혼돈을 피하라.
둘째로, 축도의 끝마다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나이다’라는 것은 선언이 아니고 기도의 끝맺음이니 선언의 형태를 지켜라.
셋째로, 축도의 남발을 삼가하여 사제로서의 소중한 임무를 값지게 활용하라.
넷째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이여 축복하소서’ 등의 표현은 하나님께서 또 다른 신에게 우리를 위하여 복을 빌어 달라는 뜻이니 하나님이 복을 내려 주시는 개념을 먼저 설정하고 거기에 맞는 어휘들을 사용하라.
다섯째로, 목사는 복을 선언하고 빌어 주는 일을 상품화하여 평신도들의 신앙을 오도하거나 그들로부터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라”.
그 다음, 고신 신대원장을 역임하고 정년퇴임한 허순길 박사는 그의 저서 ‘개혁해 가는 교회’에서 말하기를 “어떤 교단에서는 축도의 맺는 말을 사도적인 축복의 선언인 ‘있을지어다’대신 ‘있기를 축원합니다’라고 하도록 합의를 보았다고들 들린다. 사도가 아닌 목사가 ‘있을지어다’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매우 경건한 이론에 근거한 듯 보이나 너무도 인간적인 사고가 저변에 자리잡고 있는 듯 느껴진다”라고 했다. 그는 계속하여 ‘그럼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누가 이 축도를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면을 고려할 때 본질상 목사가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자로서 책임과 권위를 가지고 그의 말씀의 약속을 믿고 축복을 기원하며 선언하는 것이다. 개혁교회에서는 고후 13:13뿐 아니라 민 6:24~26의 아론의 축도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론과 그 자녀들에게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이렇게 축복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래서 아론과 그 자손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하나님이 약속대로 축복하실 줄 믿고 축복을 기원하며 선언하였던 것이다. 목사가 ’있을지어다‘라고 할 때 스스로 권위를 가지고 한다면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자격과 권위를 가지고 함으로 이에 대해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따라 축복을 기원하며 선언할 뿐이고 축복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는 다음으로 축도의 대상은 건물이나 땅, 한국과 세계 등 비인격체가 되어서 안되고 성도와 성도의 모임인 교회여야 할 것과 축도에 군말을 너무 많이 부치므로 축도문을 혼란, 왜곡시키지 말 것을 주의하라고 했다.
또 그 다음 통합 측 장신에서 신약학 교수로 있다가 은퇴하였으며 한글학회 회원이며 대한성서공회 성서번역문장위원, 한국찬송가 공회 가사위원 등으로 문장의 정확성에 대하여 신학교수들 중에 가장 연구 실적이 많은 나채운 교수는 1988년 ‘교회와 신학’이란 장신대학 교수논총에 기고한 바 ‘소위 축도문제에 관한 연구-국어학적인 고찰을 중심으로’-란 주제로 장문의 연구논문을 통해 이 문제를 상세히 다루었다. 축도를 ‘있을지어다’에서 ‘있기를 축원하나이다’로 바꾸자는 1989년 총회의 찬반 토론 때 장장 1시간 반 동안이나 ‘찌어다’가 더 성서에 가깝다고 설명했던 나채운 목사는 ‘표결하지 않아도 될 일을 표결처리해서 역사를 거꾸로 했다’고 지금도 안타까워한단다.
미국 상항 한인장로교회 담임 최영교 목사는 기독신문에 기고한 ‘축도, 있을찌어다의 신앙’이란 글에서 언어적 측면에서와 교회의 권위적 측면에서와 신앙적 측면에서 ’있을지어다‘가 옳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그는 영어성경의 고전인 킹제임스(King James) 역을 예로 들며 거기엔 다른 영어 성경처럼 “be with you all”이라고 함과 더불어 원문에 없는 “Amen”까지 나오는 사실을 지적했다. 축도 문제에 대하여 ‘축원하나이다’를 선호하는 분은 정치 세력화한 장로들이며 이것을 ‘있을지어다’가 옳다는 분은 전문신학자나 공부하는 목사들인 사실을 참고함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한다.
목사가 축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는 것과 목사는 하나님을 대리하여 선언만 할 뿐 하나님의 강복이 그의 입을 통해 발표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인가? 성도들은 목사의 축복기도 받기를 원하겠는가 하나님의 복받기를 원하겠는가 새겨보시기 바란다. 지상의 목사는 하나님의 정해준 축복선언을 대행할 뿐이다. 천주교에선 미사예전 끝에 사제가 교우들을 향하여 오른 손을 들어 십자가를 그으며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신은 너희들에게 강복할지어다’하고 교우는 ‘아멘’이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만인제사장설을 극대화하여 설교, 축도, 성례 집행의 모든 것까지 누구든지 하자고 한다. 꼭 목사만 할 게 뭐 있느냐고 한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신데(고전 14:33, 40) 혼란과 무질서를 부추겨서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성도를 부르사 구별된 백성으로 삼았듯이 세상에서 직업을 갖지 않고 주의 사역에만 전적으로 헌신할 자를 부르사 신학교육과 훈련을 통해 안수하고 보내어 주의 교회를 위임하신 것이다.
외국에서는 목사가 설교권(Preaching License)을 딴 자에게만 설교권을 부여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공식적으로 강도사 인허를 받아야 설교할 자격을 인정하게 된다.
요즈음 책도 많고, 신학공부한 평신도 지도자들도 제법 있으니 함부로 대어드는 경우들이 있는데 정 그럴 양이면 세상에서의 직업과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교회가 정한 절차를 밟아 전적으로 몸 바치기 바란다. 현재 내가 하는 축도는 우리 교단의 결정, 한국교회의 전통, 성경적 신학적 뒷받침 등을 통해 하자 없이 하는 것이므로 누가 뭐라고 해도 혼동하지 마시기 바란다. 그렇다고 ‘축원하나이다’하는 분의 축도는 축도가 아니라고 거부할 필요도 없음을 부연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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