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구원을 감사하는 사람들
(시 70:1-5)
(시 70:1) “[다윗의 시로 기념식에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70:2)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시 70:3)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시 70:4)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70:5)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불의의 사고나 갑작스런 질병으로 인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경우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경우 친구나 이웃에게 도움을 청했기 때문에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무슨 일이 생기면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보다는 대부분 119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보편화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웃에게 도움을 청할 이유가 없고 아파트에서 문을 마주하며 살지만 이웃이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을 정도로 점점 더 이웃이 멀어져 가고 시도 때도 없이 119를 찾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화
올해 행자부 감사 자료에 따르면 올해 충북 119구조대는 하루 평균 15.8명의 소중한 인명을 구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한해 119 구조대를 통해서 병원으로 이송된 사람들이 지난달 25일까지 모두 5만721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동물처럼 육신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그보다 다 소중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로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심약할 뿐 아니라 영혼마저 나약해졌을 때 쉽게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사소한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우울해 하고, 불안해하고 심지어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깊은 절망에 빠져 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어느 때보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이웃은 고사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가족조차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가까운 사이에게 상처를 더 많이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런 경우 마치 쉽게 부를 수 있는 119처럼 상한 마음과 영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영혼의 119가 세상에 없을까요? 있다면 어떻게 영혼의 119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도우소서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에게 영혼의 119는 하나님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매우 절박한 심정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중에 얼마나 위급했으면 속히 도우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시 70:1)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여기서 ‘속히’라는 말(vWj 후쉬)은 말로는 ‘서두르다, 재촉하다’라는 뜻입니다. 시편 기자만 아니라 오늘 우리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 위기의식과 불안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가 그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까닭은 무슨 천재지변이나 불의의 사고를 만났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순전히 인재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마땅히 도움을 나누었어야 할 이웃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심각한 위협으로 인해 죽음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시 70:2)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여기서 ‘영혼을 찾는 자’라는 말은 시편 기자를 괴롭히는 정도가 아니라 죽이려는 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또한 '수치‘ 라는 말(vWB 부쉬)은 미완료 상태로 모욕적인 언사로써 상대를 극도로 창피하게 만드는 것이고, '무안’이라는 말(rpej;, 하페르)도 ‘부끄러움을 당하다, 당황하다’라는 뜻으로 그 때문에 시편 기자가 낙심을 하고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그들을 대적할 만한 힘이 없는 매우 가련한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시편 기자가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고 동정을 하거나 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재미있는 경기를 관전하는 사람들처럼 오히려 재미있어하고 더욱 괴롭히는 것입니다.
(시 70:3)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그런 경우 장본인은 육체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그와 같은 고통을 오늘 시편 기자만이 아니라 마치 시편 기자가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에게 잡혀 온갖 모욕을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원수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시편 기자가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고 동정을 하거나 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재미있는 경기를 관전하는 사람들처럼 오히려 재미있어하고 더욱 괴롭히는 것입니다.
(시 70:3)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그런 경우 장본인은 육체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요즘 사람들은 이런 일 때문에 상대방을 복수하거나 심지어 모욕감을 극복하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흔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인터넷의 악플로 인한 불상사입니다.
(욥 6:20)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그와 같은 고통을 오늘 시편 기자나 우리들만이 아니라 마치 오늘 시편말씀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여러 사람들에게 온갖 모욕을 다 당하셨습니다.
1) 지나가는 자들
(마 27:39,40)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2)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마 27: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3) 십자가의 강도들
(마 27: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우리가 지금 우리가 이렇게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해서 세상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우리들처럼 신앙의 자유가 다 있는 줄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과격파 무슬림들인 IS 국가요, 알카에다요, 북한의 공산당으로 지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재판 절차도 없이 무참히 참수를 당하고, 불에 태워 죽이는 사례들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습니다.
특히 2013 년에 기독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심했는데 북한에서 순교한 기독교인 숫자가 일만 삼천 명이나 된다는 유튜브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웬만한 고난 앞에서는 기도할 뿐이지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말고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또한 신앙에 아무런 박해가 없이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면 특별한 은총임을 깨닫고 크게 감사해야 하며 지금도 세계 도처에게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하나님이여 그들을 도우소서라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중보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시 70:1) 하나님, 이 몸을 구하소서. 여호와여, 지금 도와주소서.』(시 70:2) 『나를 죽이려 하는 것들이 고꾸라지게 하소서. 어찌할 줄 몰라 허둥지둥하게 하소서. 이 몸이 고통 당하는 것 바라보고 좋아라 기뻐하는 것들이 물러가게 하소서.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시 70:3) 『히히덕거리며 이 몸을 바라보고 조소하는 것들이 도망치며 부끄러움 당하게 하소서.』
2. 주를 찾는 자들의 축복
오늘 시편 기자가 그와 같은 고난 중에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의 그와 같은 기도를 들으시고 즉각 사건에 개입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여전히 고통을 겪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원수들이 수치와 무안과 수모를 당하게 하시고, 스스로 물러가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수들은 여전히 득세하여 시편 기를 극도로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시 70:2)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시 70:3)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이럴 때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낙심하고 좌절하기 쉽습니다. 더 이상 기도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도에 대해 응답을 하시지 않는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가 낙담하고 포기하였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보이는 현실이나 시편 기자의 감정을 앞세워 믿음을 포기하는 경솔함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설령 시편 기자는 자신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소망과 기대를 더욱 공고히 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원수들이 자기를 박해하면서 낄낄거리며 기뻐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를 찾는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 달라는 적극적인 기도를 하였습니다.
”(시 70:4)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여기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라는 말(cWc, 수스) ‘아주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미완료 상태의 동사입니다.
과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여전히 어려운데, 여전히 고통스러운데, 더 좋아질 것 같은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를 지속할 수 있을까요?
물론 쉽지 않은 결단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억지로 그렇게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그러한 즐거움이나 기쁨이 저절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 그렇게 구한 것은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오늘의 고통이 변하여 내일에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꿔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기록한 기자는 믿음을 정의하기를 믿음은 현재 보이는 것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처럼, 아직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믿음을 정의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않음은 앞서간 성도들이 그와 같은 믿음대로 이루어졌음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그와 같은 믿음이 바로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인 부활신앙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한 것은 이삭에 대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려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히브리 기자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히 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올라가는 수고를 하였으나 그와 같은 믿음 때문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서 다시 내려 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이미 부활하실 것까지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고, 또한 말씀대로 장사한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과 달리 십자가 고난 앞에서 부활에 대한 소망도 믿음도 다 없었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없고 부활없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결단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소망과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믿음으로 내어다 보기 때문에 비로소 환난 중에서도 크게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환난 중에 낙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으로 말밈암아 당하게 되는 여러 환난은 장차 받게 될 영광의 보증서이기 때문입니다.
(엡 3: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여러 교회들 가운데 그와 같은 기쁨을 잃지 않은 대표적인 교회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인 것입니다.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우리가 시편 기자와 같은 고난을 겪게 될지라도 기쁨이나 감사를 잃어버리지 말고 전천후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장차 그와 같은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죄와 질고와 사망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3. 구원받은 자의 신앙고백
지금 지구는 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디서 IS 과격 무슬림들이 테러를 자행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르면 불안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아무리 풍족한 삶을 사는 사람일지라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미래에 대한 불안은 증폭되면 증폭되었지 감소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을 살지라도 인생 최대의 위기인 죽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갈수록 불안이 더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기자는 비록 원수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은 비록 현실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것 때문에 구원이 취소될 수 없고, 그와 같은 고난은 장차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구원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 구원을 사랑하고 그 구원을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주를 찾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바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고, 주께서 주신 구원을 사랑하고 자랑하는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시 70:4)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이 어떻게 그와 같은 구원의 축복을 얻어 누릴 수 있을까요? 물론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해아래서 범죄한 아담의 자손인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다 죽었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시편 기자의 마음에 간절한 소원은 그와 같은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와 같은 구원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깨닫고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를 구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 (시 70:4)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라고 기도입니다.
여기서 ‘위대하시다’ 라는 말(ld'G:, 가달)은 뜻은 ‘크게 되다, 강해지다, 찬양하다’라는 뜻의 미완료 동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는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딱 하나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살후 1: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 무슨 뜻이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일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구한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라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1) 흑암과 공허와 혼돈뿐이던 세상을 단 엿새 만에 그토록 아름답게 창조하신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으로 영광을 받으셔야만 합니다.
2) 하나님을 불신하고 뱀의 말을 따라 선악과를 따먹은 불순종의 아담과 그 후손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신 그 사랑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3)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함을 받아 영원히 확고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와 같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우리가 설령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할지라도 오늘 시편 기자의 기도처럼 위대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난 주일을 추수 감사주일로 지켰습니다. 성경적인 추수감사절은 단순히 곡식을 수확한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을 얻은 유월절을 전제하는 감사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후로 만세형통하기만 하고 아무런 시험이나 고난이 없이 만사형통하기만 하고 행복하기만 한 여생이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은 이후에 여정은 이미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홍해와 혹독한 광야 사십년의 방황과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서 들어간 후에도 오랜 기간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쟁에 시달려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훈련하여 마침내 가나안 땅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국가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그 후예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는 위대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와 축복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넘치게 부워져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은 더더욱 위대합니다.
그렇다면 그같은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설령 억울한 고난을 당하고, 신앙의 핍박을 받으며, 고난 중에 처할지라도 독생자 예수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끈을 놓치말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중단하지 말고 우리도 시편 기자의 소원처럼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로 그 놀라운 구원을 얻게 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라고 세세토록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성숙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 축원합니다.
(시 70:4)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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