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물

[스크랩] 이성봉 목사님의 생애와 그의 부흥사역

하나님아들 2016. 3. 31. 21:58
우리나라의 손꼽는 부흥사이셨던 이성봉 목사님에 대한 글입니다. 도움이 되시길.... . 이 성봉 목사의 생애 이성봉 목사의 생애는 그의 사역을 중심으로 목회사역에 헌신하기 전단계, 목 회자로서 헌신한 시기, 그리고 부흥사로서 활동한 시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런 구분은 단지 표면적인 연대기적 구분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실 존적 고민과 종교적 체험, 그리고 각 시기를 지탱하고 연결하는 모티브가 내재 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A. 제 1 기 : 소명을 위한 몸부림(1900-1924년) 이 시기는 이성봉 목사가 1900년 7월 4일 평남 강동군 간리에서 부친 이 인 실과 모친 김 진실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6세에 기독교에 입문하고, 중화 경의학교를 거쳐 신천 경신 소학교를 14세에 졸업하고, 26세에 신학에 입문하기 전까지를 의미한다. 그는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교육 아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고, 6세에 기 독교에 입문한 뒤 평양 선교리에 있는 선교리 감리교회까지 40리 길을 통교하 는 등 이미 유년기부터 기독교 신앙과 접맥되어 성장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부 정적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가정교육은 대단히 엄격하여, 소년 이 성봉이 부모의 명을 거역하면 종아리를 맞든지 쥐가 우글거리는 광 속에 가둘 정도였고, 이러한 교육의 엄격 성은 그의 인격형성에 기본적 예절과 상식을 존중하는 규범으로 긍정적인 영향 을 미쳤다고 보여진다. 무엇보다도 진실한 신앙의 소유자였던 어머니는 이 목사 가 6∼7세 될 때부터 그를 위해 기도하며 신앙의 바른 교육을 위해 힘썼는데, 비록 그가 청년기의 방황을 심하게 앓긴 했지만, 이런 유아기의 신앙 교육은 결 과적으로 이 목사를 하나님께 묶어두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이 목사가 신앙의 본질적 문제로 인해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은 보 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목사는 청년시기의 상당부분을 신앙에서 떠 나 있었는데, 이는 환경적인 영향이 더 큰 작용을 했다. 경신 소학교를 졸업한 뒤 경제적인 이유로 학업을 중단하게 되면서 그는 깊은 실의에 빠지게 되었고, 이런 실의는 그로 하여금 지금까지 아무 생각없이 믿어온 기복적 신앙의 종말 을 경험하게 하였던 것이다. 깊은 신앙적 동기가 없이 가정환경과 유아기적 낭 만에 의해 시작된 소박한 신앙은 험난한 현실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하나님, 천당, 내세, 지옥을 부인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저 주하며 물질에 대해 그의 온 관심을 집중시키게 된 것은 이런 류의 신앙이 다 다를 수 있는 자연스런 결과였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기는 경제적인 면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 이 성봉에게는 대단히 어렵고 부정적인 시기였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이 시기야말로 그의 평 생을 바꾸는 결정적인 시기이기도 했다. 이 전환을 가져오게 된 결정적인 전기는 그가 21세 되던 해에 그에게 찾아온 이름 모를 병마였다. 이 일로 그는 6달 간을 평양 기흘병원에 입원하게 되었 고, 그 기간동안 그는 인생과 죽음에 대해 비로소 깊이 있는 사색의 시간을 갖 게 된다: 죽음 아래 모든 것이 다 매장을 당한다. 돈을 많이 벌어보려 하지만 백 만 장자도 죽어버리니 허사요, 땅을 사고, 뫼를 사고, 밭을 사고, 고대광실 같은 집을 지어도 나 죽으면 땅 한평, 수의 한 벌, 관 한 개 밖에 못 가지 고 가는 것이며, 천문지리 상통하는 많은 지식을 가졌어도 나 죽을 날자 알지 못하고, 영웅호걸 미인들도 죽음 앞에서 다 항복하고 마는 것 아닌 가! 이와 같은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관조는 이 성봉 자신의 불우한 처지로부터 나온 자기한탄적 의미가 적지 않으나, 후에 그의 사역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만 가치를 두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동시에 이 사건이 대단히 중 요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병상에서 인생무상(人生無常)만을 염세적으로 읊조린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 나는 이제 죄인임을 알았다. 법률상으로 지은 죄, 도덕상으로 지은 죄, 양심상으로 지은 죄 등등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나는 죄인임을 절실히 깨 달았다. 육체의 고통을 통해 이 목사는 자신의 속사람을 바라보게 되었고, 죄의 심각 성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는 자신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이런 신앙 의 자각을 바탕으로 이 목사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헌신을 다짐 하게 된다 : 하나님,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이제야 깨달았나이다. 한 번만 살려주시면 이 몸을 주께 마치고, 이 사실을 모르는 불쌍한 인간들에게 또한 나의 뒤 로 오는 후배청년들에게 이것을 증거하겠나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전하겠나이다. 병을 통한 이러한 헌신의 다짐은 그후 이 목사의 생애를 바꾸는 구체적인 동 기가 되었고, 동시에 이 체험은 이후의 그의 신앙과 신학, 그리고 설교에서 대 단히 중요한 형성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즉 죽음으로부터 고침받은 체험과 병 상에서의 중생의 체험은 그의 인생을 하나님 위에 세우게 되는 동기가 된 동시 에 그로 하여금 평생 동안 '하나님 제일주의'를 지향하게 만드는 동인(動因)이 되었다. B. 제 2 기 : 목회자의 모범(1925∼1937년) 이 성봉 목사가 헌신을 결단하고 신학에 입문하게 된 것은 그가 26세가 되던 1925년 3월의 일이다. 그의 표현대로 3년간 계속된 신학수업은 그에게 '지적으 로는 별게 없었으나 영적인 부흥과 말씀을 통해 신앙의 지도'를 받게 했던 생산 적인 기간이었다. 특히 이 기간 동안 이 목사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여전히 놓여 있던 죄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던 시기였고, 이것을 해결함 받은 시기였다. 신학수업 기간 중에 그는 이미 청량리교외에서 유년 주일학교를 맡아 사역하 는 한편, 방학 중이던 1927년 여름에는 경북 김천교회에서 여름 성경학교 강사 로 활동하여 큰 부흥을 가져오는 등, 이미 그때부터 교역자와 부흥사로서의 가 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신학생 시절에는 선교사들의 횡포와 학생에 대한 열악한 대우 그리고 교수진에 대한 불만 등으로 동맹휴학 사건(1926년)이 터졌을 때, 화해자로서 그가 보여준 중립적 입장의 고수는 만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함 으로 매사에 임해야 한다는 그의 성숙한 신앙과 인품을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그의 신학수업 기간 동안에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졸업을 앞둔 시점에 겪은 거룩한 소명의 체험이다. 사역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자신없는 상태에서 영 적인 갈급을 느끼고 있던 이 목사에게 이 체험은 사역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 그리고 불타는 소명감을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전도생활의 좋은 준비 기간으로서의 신학교 3년 수양을 마친 뒤, 이 목사는 본격적인 목회의 길로 나서게 된다. 사실 그에게 목회는 처음으 로 개척하여 부임한 수원교회(1928∼1930년), 목표교회(1930∼1936년) 그리고 신 의주 교회(1936∼1937년)등에 지나지 않았고, 그 기간도 9년에 불과했으나, 그의 목회는 목회의 이상과 귀감으로 자리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목회를 통해 드러나는 특징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의 목회는 철저하게 구령열에 불타는 복음 전도자의 사명으로 일관 하였다. 그에게는 이 복음 사역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 명 때문에 그는 온갖 조소와 멸시를 무릅쓰고 성결교회의 초대 전도 방법인 노 방전도에 따라 나팔을 불며 농촌지역을 순회하였고, 매일처럼 개인기도와 가정 집회를 쉬지 않았다. 그의 관심이 영혼구원에 있었기에 당연히 그는 교인들에게 철저한 회개를 요구했고, 또 죄를 질책하는 설교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것들은 일시적인 부작용으로 그의 사역에 어려움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으나,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풍성한 수확이 그의 목회 사역기간 동안 이어졌 다. 둘째로 이 성봉 목사의 목회는 철저히 영적인 체험이 동반된 목회였다. 이것 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데, 그중 하나는 목회현장에서 이적과 기사가 나타남 으로써 그의 목회에 대단히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의 자서전이 전 하는 바에 의하면 첫 목회지인 수원교회 시절부터 병자가 일어나고 귀신들린 자들이 놓임을 받는 이적으로 많은 결실을 보게 되었는데, 이적을 동반한 이런 현상은 그가 부흥사로 활동하던 시대에도 지속되었다. 또 다른 의미는 이 목사 자신과 관련된 것인데, 그는 목회 사역기간 중에도 여러번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대표적인 경우가 수원 목회기간 중에 과 로로 병상에 누운 상태에서 이루어진 영적 체험과 신유이다(1928. 8. 12.): ... 그때 하늘로부터 십자가가 나타났다. 나는 분명히 주님이 달리신 그 십자가를 보았다. 감격하여 붙들고 애통하며 나의 모든 죄를 자복했다... 그(예수)는 나를 어루만져 주시며 천국으로 가자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한 참 가다보니 수정같은 맑은 요단 강물이 흐르고 저편에서 화려하고 찬란 한 천성이 보였다. 그런데 어디서 찬송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정신이 회복 되며 온 몸에서 식은 땀이 쭉 쏟아졌다... 아프던 내 몸이 거짓말처럼 완전 히 나았다. 이러한 영적 체험은 이 목사 자신의 말처럼 그후로 그의 신앙생활을 격려하 여주고 소망 중에서 살게 하고 현실보다 내세를 더 그리워하며 하나님만을 의 지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고, 언제나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그의 목회 생활과 말씀사역 그리고 목회사역에 긴장을 불어넣는 활력소가 되었다. 셋째로 이 목사의 목회는 철저히 기도로써 풀어가며 하나님께 맡기는 하나님 제일주의의 목회였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적인 동기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았고, 또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가려고 하 지도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었 다. 가령 당시 다른 교단의 감독정치 하에서 자신이 개척해 견실하게 성장시켜 놓은 수원교회를 사임하고 목포로 내려간다든지, 혹은 이 목사 자신의 표현처럼 제일 재미있게 일한 신의주 교회를 총회의 명에 의해 사임하고 부흥목사로 사 역해야 하는 것 등에 인간적 서운함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고향과는 전혀 반대쪽인 멀리 전라도 목포로 파송받았을 때 나는 정신이 아득함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막상 수원교회를 떠나자니 수 년간 갖은 어려움을 다 겪어 가면서 세워놓은 아름다운 성전을 남에게 맡기고, 약하고 어려운 셋방살이 교회로 가야하니 육정으로 생각할 때 기가 막혀 안 가 려고 많이 발버둥도 쳤다. 특히 목포 교회의 목회는 이 목사에게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은 어려움 과 시험을 가져다 주었다. 신비주의로 나가는 부인을 책벌한 사실에 앙심을 품 은 그녀의 아들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기도 했으며, 사랑하던 청년들이 이 목사 의 목회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기도 하였다. 이런 어려운 상황 가운데도 이 목사는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나아가면 주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지, 인간의 수 단방법을 써서는 안된다는 자세로 일관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성정(性 情)을 인내로써 참는다는 소극적 인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고 하 나님께 맡기는 적극적 신앙의 발로를 뜻한다. 이 목사의 목회가 오늘의 목회자 모두에게 귀감이 된다는 것은 이 목사가 인간이면서도 하나님의 차원에서 살려 했던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넷째로 그의 목회는 여러 면에서 풍성한 결실을 맺은 목회였다. 우선 그가 사 역하는 곳마다 수많은 영혼구원의 결실을 보았는데, 가령 그가 개척한 수원교회 가 그가 목회하는 동안 400여명의 교세를 갖춘 견실한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든지, 목포교회에서는 6년을 시무하는 동안 암태교회, 임자도 교회, 후중도 교 회, 그리고 압해도 교회 등 지교회를 개척한 일, 마지막 목회지인 신의주 교회 에서는 직원 50명을 포함 모두 1000여명의 교세를 갖춘 대형교회로 성장시키고 마천동 등지에 지교회를 개척한 것 등이 이를 잘 반증한다. 그의 업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부임하는 곳마다 교회의 신증축 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일부 현대교회들이 기업적 발상에서 기존의 훌륭한 건 물들을 두고도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를 세운다든지, 혹은 여러 여건상의 어려움 으로 인해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 신축을 기피하는 현상들과 비교해 볼 때, "죄 있는 장소, 불의한 집, 개인의 집은 좋은 집이 많은데 주님의 성전이 셋집일 수 없다"는 신앙의 발로에서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도 교회 건축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그의 신앙과 생각은 오늘날 목회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하 겠다. C. 제 3 기 :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1937∼1963년) - 이 성봉 목사의 부 흥사역과 그 의미 이 성봉 목사의 정체성을 가장 확연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바로 3기의 부흥목사로서 활동하던 기간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목사는 1937년에 서울 신학교에서 열린 총회에서 전국 부흥사로 임명받은 이래, 1941년 에 만주 봉천 중앙교회에서 잠시 목회한 것과 일본 유학 중에 공석 중인 동경 성결교회를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평생 동안 부흥사로 헌신한 분이다. 성공적인 목회자로서 착실히 목회하던 그로 하여금 부흥사로서 전국을 순회 하며 부흥 사역만을 전담케 한 것은 현재와는 전혀 다른 당시의 상명하달(上命 下達) 식 인사체제에 근거한 총회의 지명(指名)에서 기인하지만, 동시에 이런 결정을 이끌어 내기까지에는 그 당시의 교계 분위기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직시해야 한다. 이 목사가 총회에 의해 전국 부흥사로 임명받던 당시의 한국 교계는 일본의 '황국 신민화 정책'의 핵을 이루던 '신사참배' 문제로 극심한 어려움에 직면했던 시기였다. 일본의 파상적인 공세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순교를 각오한 저항 을 계속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지는 박해의 강도 앞에서 각 교단은 하 나둘 신앙의 지조를 저버리게 되었고, 3.1운동 후 근근히 이어오던 부흥의 불길 도 역시 점차 시들해지는 위기의 시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신앙의 정체성과 교회의 성장이라는 두 가지가 모두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한 상황 바로 그것 이 었다. 교회와 신앙의 위기는 비단 신사참배 문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 당 시의 우리 민족은 미증유(未曾有)의 심리적, 사상적 좌절 속으로 곤두박질하고 있었고, 정치적 환멸과 배금주의(拜金主義)의 만연, 사회-도덕적 퇴폐가 사회 구 석구석에 스며들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 성결교회는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이라는, 교회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적극적인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이 위 기를 극복하려 하였다. 즉 헌금 액수의 격감, 교세의 감소, 교회당의 폐쇄라는 한국교회 일반의 심각한 위기를 맞은 성결교회는 특유의 직접 전도방식인 노방 전도와 부흥회, 사경회를 통하여 성경에 대한 열의, 개인전도의 사명감, 성령충 만한 삶을 강조하였고, 급변하는 사회정세 속에서 성서로 돌아감을 통한 신앙적 대처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에 발맞추어 거교단적 차원의 전도운동과 전도 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어 가면서 전도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타오르게 되었다. 성결교회 제 1회 연회록의 '서부지방 교세 보고'는 당시의 전도 열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본 지방 각 교회는 특별히 기도의 불이 붓는 중 각 교회마다 기도회를 힘쓰는 바... 신의주 교회에서는 오개월 간 기도회를 계속하야 많은 은혜를 받았으며, 신의주 동교회에서는 1년 동안 계속하야 기도회를 회집하야 많 은 은혜를 받는 중이오, 각 교회에서 개인전도 노방전도를 힘쓰는데, 신의 주 서교회에서는 신결신자가 180명이요, 동교회에서는 900여명에 달하야 신천교회에서는 30여리 간에 있는 문회에 신개척하고... 이러한 총력전도의 분위기는 이 명직 목사의 "축복받은 신년의 결의"라는 글 에서도 확인된다: 전도는 교회의 사명이다... 전일에는 우리가 노방전도도 열심히 하였고 옥내전도도 열심하였고 개인 전도도 열심하였다. 그러나 금일에 이르러서 는 시국문제 등 그럭저럭하다가 슬그머니 잠이 들었고, 전투력을 잃어버리 고 말았다. 이러한 게재에 우리 회합에서 일치전도가 결의되었다. 어찌 희 소식이 아니리요. 이러한 소식은 그야말로 고목에 봄이 돌아오는 것과 같 은 감이 있다... 이 성봉 목사가 전국 부흥사로 임명받은 것은 이와 같은 당시의 시대적 맥락 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적 맥락은 이 목사 개인의 수락 여부와는 사실 상관이 없는 전 교회적인 대세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총회 의 결정은 신의주 교회의 성전을 봉헌한 지 3일 밖에 지나지 않은 이 목사에게 당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표현대로 여러 교우들과 큰 일을 겪고 떠 나는 약한 마음, 뒤를 돌아봄이 적지 아니할 수 없었으리라. 더욱이 이 목사 자 신의 말대로 가장 크게 부흥되고 목회의 재미를 한껏 누리고 있었던 상황이었 기에, 비록 총회의 결정이 부흥사로서의 이 성봉 목사의 역량과 능력을 인정하 였다는 증거이긴 해도, 그의 아쉬움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장면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의 참된 모습을 확인하게 된 다. 상황이 가져다 주는 여러 이익을 저울질하기 쉬운 상황에서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며 띠끌같은 미말의 자신"이라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의 모 습, 그리고 예레미야 33장 3절의 말씀에 의지하여 부흥사 지명을 "만세 전에 예 정하신 주님의 계획"으로 믿고 흔쾌히 새로운 사명의 길로 나서는 모습, 여기 서 우리는 철저히 사업의 논리와 사업가의 계산으로 오염된 현대 교회와 목회 자들을 향한 진정한 광야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흥미있는 것은, 이미 그의 생애에서 보았듯이, 생의 진로에 중대한 변화가 있 을 때마다 영적 체험을 했던 것처럼 부흥사로 임명되기 전에도 이 목사는 또 한번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목사는 그의 자서전 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37년(38세 때) 총회가 서울 신학교에서 있었는데, 그때 나는 단체 부흥 사의 사명을 받게 되었다. 그 사명 받기 전에 나는 이상한 꿈이라 할까 비 몽사몽같은 일이 한번 있었다. 총회 도중에 나는 너무 지쳐서(철야기도와 회의 때문에) 신학교 서쪽 사층 어느 조그마한 방에 들어가 잠깐 누웠는 데, 김 익두 목사님(장로교 부흥목사)이 오시더니 나를 위하여 안수기도를 한다고 나의 오른편 옆구리에 손을 대고 어루만지며 기도하셨다. 뜨끈뜨끈 한 손이 닿자마자 불의 폭발이 일어나는데, 너무 뜨겁고 놀라서 화다닥 침 대에서 뛰어 올랐다. 떨어지니 꿈이었다. 어찌나 혼이 났는지 온 전신에 땀이 흐르나 심령은 매우 상쾌하였다. 불세례를 체험한 것이었다. 이미 앞에서 부흥운동사에 큰 흔적을 남긴 인물들의 헌신이 바로 이러한 영 적 체험들을 모토로 하고 있음을 보았고, 또 부흥사역이 일차적으로 인간의 영 적 각성을 촉구하는 영적 차원을 다룬다고 보았을 때, 이 목사의 영적 체험은 그의 부흥사역의 신적 동기와 전제로서 당연히 요청되는 것이며, 이러한 영적 체험 후에 부흥사역에 일생을 헌신하게 된다는 부흥사역자들 일반의 공통점은 이 사역 자체가 인간적 노력이나 동기로는 감당할 수 없고, 또 감당해서도 안 되는 영적 차원과 관련된 일임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전국 부흥사로의 임명을 계기로 이 목사는 회갑까지 1천 교회 부흥 집회를 목표로 본격적인 부흥사의 사역길을 들어선다. 교단 기관지인 활천이 매달 상세 히 보도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의 사역은 만주, 용정, 평양, 이천, 재령, 인천, 홍산, 전의, 군산, 웅기 등 실로 도시와 농촌을 망라한 전국을 무대로 한 것이었 다. 이 목사 자신이 술회하는 것처럼 그의 부흥사역은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같이 하셔서 큰 불이 일어나고 예수의 향기가 진동하는 대단히 성공적인 사역 이었고, 동시에 교파를 초월한 사역이었다. 그 한 예로서 동북만 용정집회에서 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세 교파 신자를 놓고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강단에서 설교를 못하고 부인반 출입구에다 책상을 놓 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과 밖에 가득히 서 있는 사람들을 번갈아 보면서 설 교"할 정도였다. 이 집회에 모여든 2천명의 군중들 가운데 "회개하고 중생을 경험한 자가 부지기수이고, 새로 믿는 결신자가 130여명이었으며," 집회에서 바쳐진 헌금으로 교회를 신축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이 목사의 성공적인 부흥사역은 불과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막 을 내리게 된다. 그의 교파를 초월한 부흥사역에 대한 제재와 교파를 초월한 부 흥사역을 사명으로 확신한 이 목사의 소신이 빚어낸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악마의 시기와 질투가 나를 넘어뜨리려 했다. 왜냐하면 내가 부흥목사로 정오의 햇빛처럼 빛나고 점점 올라가니 우리 교파뿐 아 니라 장로교 감리교에서도 대환영들이다. 그래서 타교파에도 만히 나가게 되니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성결교 부흥사니 성결교만 집회하고 다른 교 파에는 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제지하니 내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나는 본시 장로교에서 구원받고 한 십년 있다가 또한 감리교 구역에서 한 십년 있었다. 그리고 25세에 성결교회로 왔던 것이다. 본래 나는 교파의 구별없이 봉사하는 것이 나의 사명인 줄 알아서 이에 불응했다. 결국 교단에서는 1939년 11월에 김 영균 목사를 북부지방 순회 부흥사로 임 명하고, 이 목사는 남한 지역에서 부흥사역을 수행케 하는, 사역 지역의 이분화 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 목사는 이 결정에 불복하고 결국 전국 부흥사 임명 1년만에 휴직청원을 제출하게 된다. 이 목사는 이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이라는 신앙적 표현으로 정리하고 있지만, 이 사건 배후에 그릇된 교단정치와 일부 교역자들의 인간적 시기와 질투가 스며들어 있음을 짐작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휴직청원 후에 이 성봉 목사는 신학을 연구할 목적으로 40세의 나이에도 불 구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이 목사는 대략 2년 정도 일본에 머물렀는 데, 처음 의도와는 달리 신학교에 입학하고도 그는 엄쳐나는 구령열로 인해 동 경, 신도, 대판, 관도, 풍교 등 각 곳을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책상 앞에 앉아 학문으로서의 신학에 깊이 빠져들기에는 죽어가는 영혼들의 촌각을 다투 는 신음이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인, 한국인 가릴 것 없이 부흥 회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는 한편, 동경성결교회를 임시로 맡아 돌보고 또 방 수 원 목사의 주선으로 '인생 허사가', '하나님은 사랑이라' 등의 독창을 레코드에 취입하여 큰 호응을 얻는 등, 그의 일본사역은 알찬 수확을 거둔 시간이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 목사가 1941년에 임명받은 사역지는 이 목사 자신이 스 스로 청원했던 만주 지역의 봉천 중앙교회였다. 처음 부임하여 성전 공사 중 중단된 채 방치된 성전을 6개월만에 완축하고, 새벽 기도회에 100여명이 모이는 등 비약적인 성장을 주도한 이 목사는 그러나 한 지교회에 머물러 목회의 여유 를 만족하기에는 구령을 위해 주어진 달란트가 너무 큰 인물이었다. 중앙교회를 김 홍순 목사에게 맡기고 사랑하는 가족들마저 고향으로 보낸 후에 이 목사는 홀로 만주에 남아 5년여 동안 복음전파에 주력하는 철저한 전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만일 그가 불타는 영혼사랑 이외의 그 무엇에 관심을 두었다면, 이러한 고생을 자초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죽은 심령이 살아나고 병든 자가 구원받 으며 만주에 와서 처음 믿음을 상실한 자들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는 것을 보 는 그 감격이 그로 하여금 고독한 전도자의 길을 가게 했던 것이다. 이 목사의 활동 영역은 비단 만주 일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국내에서 도 이 목사를 초청하려는 요청이 쇄도함에 따라서 평양 지역 및 황해도 등지에 서 교파를 초월하여 수십 차례의 부흥집회를 인도하였고, 그때마다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놀라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집회가 긍정적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특별히 십자가를 피 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수락한 황해도 황주와 사리원 집회에서 이 목사는 그 가 전한 설교 내용으로 인해 경찰서에 검속되고 심한 곤욕을 치루게 된다. 그 러나 그 어떤 굴욕이나 모욕도 복음을 위해서 마다할 그가 아니었다. 풀무불같 은 시련일지라고 복음을 향한 이 성봉 목사의 굳은 신앙을 녹일 수는 없는 것 이었다. 조국의 수많은 불신 영혼을 버려두고 타의적 상황에 의해 만주 일대를 떠돌 수 밖에 없었던 이 성봉 목사의 애환은 민족의 해방과 함께 종결되었다. 하지만 사상적으로 혼미를 거듭하던 당시의 상황은 이 목사의 자유로운 복음의 날개짓 을 제한하는 또 다른 장애물에 다름 아니었다. 해방 후에 7개월 가량 북한에 머 무는 동안에 이 목사는 북한 각지역을 순회하며 교회 재건을 주도하였고, 그 결 과로 북한과 만주에 산재해 있던 교회들이 조속히 재건되었지만, 점차 조여드 는 공산세력의 포위망으로 인해 결국 그는 1946년 3월 월남하게 된다. 이런 피난의 와중에도 그는 기회를 얻는대로 부흥성회를 인도하는 한편, 서울 에 도착해서는 서울 신학교 이사장을 맡는 등 교단의 재건에 혼신의 힘을 기울 였다. 그러나 이 목사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은 단순히 교단의 행정적, 정책적인 영역만은 아니었다. 더욱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 당시의 무질서의 극치를 달리 던 사회와 교회, 가치관의 혼란, 사상적 동요, 물질적 궁핍 속에서 신음하던 백 성과 성도들을 어떻게 하든 복음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각이 마련하는 이 목사의 진로는 분명할 수 밖에 없었다. "좌우간 1 년에 최고 기록은 82군데의 부흥회를 인도"한 것이리만큼 복음을 위한 충정은 하루도 쉴틈이 없는 강행군 그 자체였다. 그의 부흥사 사역은 6?25 한국전쟁이 라는 절대절명의 위기로도 멈출 수 없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은 것이었 다. 목포피난 시절에 빨치산들에게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목숨이 경각에 달 린 상황에서도, 정상적인 집회가 도저히 불가능한 피난의 와중에서도 전도하고 예배드리는 일을 마치 일상의 호흡처럼 계속했던 것이다. 특별히 1954년 5월 25일-1955년 4월 27일에 걸쳐 '임마누엘 특공대'라는 교단 희년기념 전도단을 이끌고 1년간 마치 적군과 전투하는 자세로 전국 70여 지역 을 돌며 성회를 인도한 것과, 그 이후 1956년 3월 18일까지 1천 교회 지교회 설 립을 위한 전국교회 순회 집회에서 그의 부흥사 사역은 절정을 구가하게 된 다. 특공대라는 명칭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 때의 전도사역은 목숨을 건 영적 전쟁 그 자체였다. 따라서 영적으로 무찔러야 할 적군이 있는 곳이면 그 어느 곳이라도 이 목사의 전투목표에서 제외될 수 없었다. 이 기간 중에 그는 농촌과 산촌, 도서 등지에서 부흥사를 청할 형편이 못 되는 곳, 지역으로는 후방보다 교세가 극히 미진했던 강원도 지역을 집중적인 공략의 대상지로 정하고 활동했 는데, 그의 부흥사역은 이 목사 자신의 표현처럼 전쟁 그 자체였다: 6월 11일-14일 횡성 성결군 대장 이 만선 목사의 고군분투하는 소식듣 고 급히 돌격하니, 교회당과 목사관 모두 빼앗기고 무너진 공회당 지하실 에서 장병들이 포위를 당하여 악전고투로 비절 참절이었다. 특공대 숙소는 신흥여관이요, 전투장은 건난장이라. 4일간의 공방전에 고지를 탈환하여 엉터리 신축 예배당에 가마니 깔고 승전예배드리니 부상 장병 50여명, 사 기충천하여 진지사수에 진력했다. 복음을 위한 이러한 강행군은 곧 희년 기간의 성회인도(1957년 5월 15일 -1957년 12월 29일), 그리고 제주도 하기 전도와 미국 순회 전도(1959년 4월 2 일-12월 8일)로 이어진다. 모든 여정이 복음전파와 영혼구원이라는 공통된 목표 에 맞추어 있지만, 특히 희년 기간에는 대도시 교회 위주의 집회가 특색을 이루 었고, 제주도에서는 교파를 초월한 집회, 그리고 미국집회의 경우는 교파와 인 종을 초월한 집회, 그리고 미국집회의 경우는 교파와 인종을 초월한 국제적인 집회였다. 특히 미국집회의 경우는 국내에 비해 현실적 긴박감이나 집회의 당 위성, 그리고 쉴틈없이 이어지는 집회일정 등에서 한결 여유가 있었던 것이 분 명하고, 또 도미의 1차 목표가 복음주의 협회(NAE :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대표로 회의에 참가하는데 있었기에, 모처럼의 여유있는 휴식을 가질수 도 있는 성격이었지만, 살아 있는 존재의 의미를 복음전파에서 찾는 이 목사에게는 강단에 서는 것 자체가 곧 휴식이요 안식에 다름 아니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 이 목사는 교단 분열의 혼란 속에서 교단합동을 위한 마지막 정열을 불사르게 된다. 그는 1년 5개월 간(1961년 9월 23일-1963년 2월 17일) 1일 1교회 순회집회를 계획하여 모두 480교회의 집회를 인도하면서 교회 의 하나됨을 역설하였다. 이 연속집회를 마지막으로 25년에 걸친 이 성봉 목사 의 위대한 부흥사역은 마무리되었다. 그의 부흥사로서의 사역은 비단 성결교단이라는 울타리 안에 갖힌 협의(狹義) 의 사역이 아니라 한국과 세계를 무대로 한 광의(廣義)의 사역이었고, 동시에 부흥사역은 어떤 것이어야 하며, 부흥사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 사표 그 자체이다. 우리는 부흥사 이 성봉 목사의 부흥사역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귀중 한 덕목으로 뽑아낼 수 있다. 우선 이 성봉 목사가 부흥사들이 흔히 빠지기 쉬 운 물질, 명예, 이성의 유혹을 초월한 완벽한 생애를 살았다는 데에 우리의 관 심이 모아지게 된다. 그가 당시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신의주 교회를 건축하고 수많은 성도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소위 성공적인 목회자였지만, 아무런 문제 없이 임지를 사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유일한 관심이 복음전파와 영혼구원 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평생을 성직에 있으면서도 일체의 교단 내의 정치적 직위와 담을 쌓고 살았던 것도 역시 그의 관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교단정치에 무관심으로 일관한 그의 태도로 인해 이 목사가 교단정치의 중앙무대에서 소외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없지 않다. 가령 이 목사가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직 후에 초교파적인 부흥사역을 감당하 다가 이사회로부터 교단 잔류와 탈퇴 중에 택일을 강요받은 것도 따지고 보면 정치적 성격이 짙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신실함을 최 대의 가치로 알고 인간적인 융통성이나 정치적 술수를 수치로 여겼던 그에게 이러한 불이익은 오히려 영광의 면류관으로 평가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오늘 날 이런 저런 감투에 혈안이 된 일부 부흥사들과 목사들의 자기 콤플렉스적 행 동들과 비교해 볼 때, 이성봉 목사가 주는 교훈은 실로 지대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목사의 성장과정을 보면, 경제적인 문제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정도 로 넉넉지 못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이런 성장 배경을 가진 경우에 대개는 물질 에 집착하기 마련인데, 이 목사는 이 문제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이 없는 흔적을 남기었다. 그의 셋째 여식인 이의숙 권사의 증언은 이 목사의 물질에 관한 생전의 태도를 잘 웅변해 준다: 목사님은 항상 가방 그득히 돈을 가지고 계셨지요. 그러나 그 돈은 언제 든지 하나님의 것이기에 약한 교회, 딱한 목사님들에게 아낌없이 내어주시 고 가사에는 인색하리만치 사용치 않아, 우리 가정은 항상 가난에 쪼들리 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 번도 이성봉 목사님을 아버지라고 느껴보 지 못하고 항상 근엄하신 하나님의 종 목사님으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성봉 목사님은 우리 자손들에게 아무 재산도 남겨주지 않고 가셨지만, 오 직 천국 시민권을 유산으로 남겨 주시어 그것으로 만족하고 이렇게 감사 하며 부유하게 살아간답니다. 오늘날 일세를 풍미하던 부흥사와 목회자들이 물질과 이성, 명예의 덫에 걸려 중도에 쓰러지는 경우가 얼마나 비일비재한가를 생각해볼 때, 그 누구보다도 이 모든 유혹의 파고가 드세게 몰아닥쳤을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이로부터 초연했 던 이 성봉 목사야말로 부흥사로서 갖추어야 할 인격적 자질에서 완벽한 인물 이었다 할 수 있다. 둘째로 이러한 고매한 인격을 바탕으로 한 부흥사로서의 그의 사역은,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라는 그의 평생 슬로건이 보여 주듯이, 인간적 정리(情理)를 넘어선 지사충성(至死忠誠)의 종말론적 사역이었다. 그의 사역에는 일체의 중간 지대와 인간적 타협이 배제되었다. 부흥성회를 인도하던 중에 모친이 위독하다 는 소식을 접한 이 목사의 태도는 그의 철저성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생전의 어머니를 뵈오러 가자니 불일 듯 일어나는 집회를 내버리고 굶 주리고 목말라 허덕이는 양떼를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아니 가자니 불효막 심하고 어떻게 할까? 그러나 전쟁에 나간 사람이 부무병들었다고 돌아갈 수 있는가?... 나는 영전에 나선 그리스도 정병이요, 복음의 결사대로서 전 투가 한창 치열할 때 사사로운 일에 매일 수 없어 그저 어머니를 주께 맡 기고 기도하며 그냥 집회를 인도했다. 모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적 고뇌가 왜 없었겠는가마는 이 목사는 만유의 주되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그 모든 인간적 정리를 감싸 안았던 것이다. 이 목사의 철저성은 1년에 최고 82군데의 성회를 인도한 수치에서도 볼 수 있거니와, 휴식기간 없이 때때로 하루 5-6회의 집회를 인도하 는가 하면, 병들어 들것에 실려다니면서까지 부흥회를 인도한 데서도 확연히 드 러난다. 그가 활동할 당시는 생활수준, 교통 등 제반 여건이 극도로 어렵던 때 였다.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 목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달리는 버스를 못타고 트럭 신세를 졌습니다. 장마통에 지게로 전도기구 를 짊어지고 걷기도 했습니다. 고장난 자동차를 떠밀고 대관령에서 비를 흠뻑 맞아가며 넘기도 했습니다. 새벽차를 타고 종일 차속에서 시달려 정 신을 못차리고 허덕일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밤낮 침식을 잊고 하 루에 천여리를 차 속에서 산 때도 드문드문 있는 일이었습니다. ... 어떤 수복지대를 갔더니 거기는 그릇이 없어 군인철모에다가 세숫물 을 주었다. 거기에 세수하고 보니 그것으로 소여물을 주었다. 또 다시 보 니 돼지 먹이를 주는 것이었다. 철모 하나를 가지고 내가 소, 돼지와 나눠 썼다. 그러다 어떤 때는 비행기를 타고 다니고, 어떤 때는 소달구지를 타 고 다니고, 비오는 새벽에 수십리씩 걸어 다니니... 그의 사역이 지닌 초인적 성격은 휴식없이 지속된 그의 임마누엘 특공대 시 절의 집회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 목사의 이러한 철저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그가 임마누엘 특공 대로 나서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글을 통해 우리는 그 이유를 대략적으로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1. 성지임을 믿음으로 그렇다. 주님은 약 한 자와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시고 또한 나뿐아니라 주의 종들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2. 시대가 너무 자유주의로 흘러 교회조차 법 적질서가 업고 혼란 무질서하여 이단과 속화를 방지하기 어려우므로 이제 는 내부 결속이 시급히 요청됨으로 그렇다. 3. 내가 나를 쳐 복종시키지 않으면 타인에게 복음전한 후에 내가 버림 받을까 두려워서 그렇다. 4. 타 인을 위하여 대를 구하고(대교회는 내가 안가도 갈 사람이 많다.) 자기를 위하여는 소를 구하는 뜻에서 그렇다. 5. 약소 교회를 동정하며 고루고루 은혜를 나누기 위하여 그렇다. 6. 새시대 남북 통일을 위한 전도훈련과 작 전 계획이다. 7. 환영하는 헬라로 가지 않고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 에서 밀알같이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열매를 맺은 주님 자취를 조금이라 도 밟아보려는 심정에서 된 것이다. 결국 구체적 소명에의 확신과 그에 따른 소명자의 자세 그리고 균등한 교회 의 발전과 거시적 통일 지향의 청사진,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 과 영혼에 대한 사랑이라는 분명한 신념이 바탕이 되었기에 그의 사역이 초인 적 성격을 띨 수 밖에 없었고, 이런 맥락에서 그의 주된 사역지가 부유한 여건 에 융숭한 환대가 보장된 도시교회, 대교회가 아닌 "사회에서 가정에서 동리에 서 버림받고 병으로 몸이 썩고 문드러지는 비참한 지경의 나환자들"이나 부흥 사를 초청할 여건이 되지 않는 농촌 산촌 도서벽지가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세 번째로 이성봉 목사의 부흥사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사역이 맺 은 영적, 교회적 그리고 사회적 차원의 성과이다. 그의 부흥회는 수많은 사람들 의 생을 바꾸어 놓았다. 송 헌빈, 차 몽구, 이 진우, 김 정기, 유 을회 등이 그의 집회를 통하여 교역자로 헌신하게 되었음은 잘 아는 사실이다. 경제적인 어려움 으로 교회건축이 중단된 교회가 이 목사의 집회를 계기로 건축을 마무리했는가 하면, 성전을 새롭게 신축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흥미있는 사실은 현대 부흥회 중에서 인위적인 목표를 설정해 놓고 교회건축을 위한 반강제적 헌금 작정의 기회로 부흥집회를 삼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반해, 이 목사의 부흥성회 는 철저한 죄의 회개에 기초한 자발적인 헌금에 의한 문제 해결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많은 경우에 교회의 영적 활력을 증진시키고 성도들 을 영적으로 무장시키며 교회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돌파구로 마련된 부흥 성회임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커녕 집회 후의 후유증으로 몸 살을 앓는 것이 현대교회 부흥집회의 한 현상인데 반해, 그가 인도한 집회는 그 러한 후유증과는 무관한 뚜렷한 영적, 가시적 성과를 남긴 성회로 집회의 일반 적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 갈 것은 이성봉 목사의 부흥성회가 수많은 결신자를 낳았다는 점이다. 오늘 날의 집회가 새신자 획득의 기회보다는 '교회 내적 차원'의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 이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원론적 의미에서 부흥성회는 회개를 통한 영적 각성과 재무장 그리고 그리스 도인으로서의 변화된 삶을 문제삼는 기존 성도들을 위한 영적 잔치의 성격이 훨씬 강하다. 그리고 현대교회는 사회 분위기와 사고의 변화로 인하여 전도집회 와 대별되는 원론적 부흥회, 즉 목회적 성격에 무게가 실린 집회로서 부흥회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목사가 활동하던 그 당시에는 교회에서의 부흥집회 자체가 전 부 락과 마을 포괄하는 하나의 축제였다. 이 시기는 문명의 이기가 침투하지 못했 던 시기, 따라서 볼거리와 들을거리에서 언제나 호기심이 발동할 여건이 충만했 던 시기, 비록 오늘 날에 비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배타성이 결코 적지 않았으 나 오염되지 않은 심성이 살아있었기에 복음의 침투가능성이 오히려 긍정적이 었던 시기, 사회, 정치, 경제적 혼란과 궁핍과 정신적 공백과 공황으로 인해 그 어떤 정신적 지주를 기대하던 바로 그런 시기였다. 이 목사 자신의 역량이나 성 령의 역사하심을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상황적 배경이 오늘과 다른 독톡한 부흥 성회의 성격과 열매를 가능케 했던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고 쉽게 짐작된다. 부 흥회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복음을 영접하였고, 깨어졌던 감정이 복음 안에서 치유되었으며, 따라서 교회도 양적, 질적인 면에서 상승된 변화를 구가하게 되 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결과가 단지 교회 내의 변화로만 자리잡은 것이 아니 고 사회를 포괄하는 사회적 차원까지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무속이 생활과 생각 을 지배하던 그 자리에 복음이 대치하게 되었고, 공허가 지배하던 자리에 복음 으로 인한 삶의 희망이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부흥성회를 통해 기독교에 귀 의한 사람들이 늘어감에 따라 한 마을에 교회가 선 의미는, 비록 모든 대도시까 지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제 해당 교회 자체의 의미를 넘어서 그 마을과 촌락의 정체성(正體性)의 변화라는 차원에까지 접맥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목사의 부흥집회 방식은 주로 설교를 중심한 밤 집회, 천로역정과 요나서 및 명심도 강화 위주의 낮집회 그리고 기도중심의 새벽집회로 진행되었다. 집회 는 일주일 간 계속된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대개는 촉박한 일정으로 인해 2-3 일 정도로 진행되었다. 부흥회 기간 중에 대부분의 참석자가 귀가하지 않은 채 교회에서 기거하면서 철야기도에 열심이었고, 특히 새벽기도회를 통해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많이 일어났다. 비록 그는 방언이나 입신, 예언 등 소위 오늘 날 의 부흥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은사'를 강조하지 않았고, 오히려 신비주의적 은사로 야기될 수 있는 신앙의 신비주의화, 신앙의 부작용을 경계하는 입장이었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회에는 언제나 놀라운 신유의 역사가 동반되었 다. 성령의 불같은 역사가 맹렬히 타올랐던 집회, 회개의 눈물이 바다를 이루는 집회, 문제가 해결되어 기쁨과 희망, 평강의 강이 넘쳐나는 집회, 삶의 변화가 가시적으로 증거되는 집회, 심령을 쪼개는 능력의 말씀과 불치의 환자들이 고침 받는 신유가 동반된 집회! 이것이 부흥사역의 거장 이 성봉 목사가 이끈 부흥회 의 특징이었다.
출처 : 목동감사교회
글쓴이 : 홍성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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