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어거스틴의 참회록
자료출처 / 브리태니커 CD 2000
아우구스티누스 / Aurelius Augustinus
(영) Saint Augustine. Saint Augustine of Hippo라고도 함.
354. 11. 13 누미디아 타가스테~430. 8. 28 히포레기우스.
축일은 8월 28일.
로마령 아프리카에 있던 도시 히포의 주교(396~430).
당시 서방교회의 지도자이자 고대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일컬어진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종교성과 그리스 철학의 플라톤 전통이 그에게서 완벽하게 융합되었다. 그러한 그의 사상은 중세 로마 가톨릭 세계로 이어졌고 르네상스 시대의 프로테스탄트를 낳았다. 유명한 〈고백록 Confessions〉이 없었더라도 그의 중요성은 인정되었을 것이다. 45세 때 쓴 〈고백록〉은 잘 알려진 대로 12년 전 로마 가톨릭에 귀의함으로써 끝난 그의 방황과 유년시절을 기록한 책이다. 그런데 잊기 쉬운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진짜 작품이 〈고백록〉 이후에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고백록〉은 전기라기보다는 감사와 회개에서 나온 봉헌물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고백록〉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 주교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억해낸 사실들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아우구스티누스를 이해하는 데 〈고백록〉이 쓸모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림은 적당한 비례로 그려져야 하며, 배후에 있어야 할 것을 앞으로 끌어내 지나친 찬양을 해서는 안 된다.
어린시절과 회심
현재 알제리 해안의 현대식 항구인 히포레기우스는 당시에는 로마의 속주 누미디아에 속해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거기서 약 72㎞ 떨어진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가정은 중산층이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말년까지 이교도로 남아 있었다. 어머니 모니카는 열성적이고 경건한 그리스도교도였다. 어린시절 어머니의 교육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해 경외심을 품었고 그 영향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유아세례는 받지 않았다. 초·중등학교를 거치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적인 재능을 보이자 가족들은 학비를 마련해 공무원을 시키려고 했다. 19세 때 카르타고에서 학생이 된 그는 지금은 유실된 키케로의 글 〈호르텐시우스 Hortensius〉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철학'에 대한 정열로 가득 찼다. 그것은 단순히 진리를 추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속적인 야망보다 명상하는 삶을 더 낫게 여겼다는 뜻이다. 그의 눈에 비친 가톨릭 교회의 신앙은 문화인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비철학적이었다. 그래서 어느날 마니교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권위보다 이성에 호소하는 마니교에 쉽게 심취했다.
마니교의 영향
서로마 제국에 퍼져 있던 마니교는 유물론적 이원론이었다. 세상을 빛과 어둠의 투쟁의 산물로 보고 인간의 영을 어둠 속에 있는 빛의 요소로 보았다. 마니교는 스스로 참된 그리스도교라고 주장하며, 그리스도를 옥에 갇힌 자녀들을 탈출시켜 본향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해방자로 보았다. 마니교회에서 '선택된' 고위 성직자들은 철저히 금욕적이고 독신이었다. 육적인 것은 모두 어둠의 세력에 봉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9년간 몸담고 있으면서 천한 집안 출신의 여자와 교제하여 아들을 얻었고 그 아들을 몹시 아꼈다. 그러는 동안 '청자'(聽者)라는 낮은 직책을 마니교에서 얻었는데, 그 직책에는 육신의 약함이 인정되어 결혼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 '계몽의 종교'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열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마니교 지도자들의 지적 수준이 낮아 아우구스티누스의 물음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점차 환멸을 느낀 그는 꽤 널리 퍼졌던 반(反)영지주의를 수용했다. 그리하여 28세경 그동안 자유교사로 수사학을 가르치던 카르타고를 떠나 더 나은 학생을 찾아 로마로 갔다. 친분관계를 통해 그는 당시 서로마 황제가 머물고 있던 밀라노에서 정식 교수로 일할 수 있었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교 성직자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를 소개받았으나 가까이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으러 갔고 거기서 그리스도교 지성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편견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그가 마니교를 버리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유물론적 전제들이 남아 있어, 궁극적 실재에 대한 마니교의 교리를 대체할 만한 답을 발견하지 못한 채 회의에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설교를 들은 후에도 하느님의 존재, 죄의 본성과 기원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었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신플라톤주의의 저술을 접하면서 그 2가지 문제가 동시에 풀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통해 신플라톤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지게 되었다. 3세기의 철학자이자 신비주의자인 플로티누스에게서 비롯된 신플라톤주의는 오직 하나의 실체만 인정하는 영적 일원론이다. 그에 따르면 이 세상은 절대 단일체로부터 일련의 유출과정을 거쳐 이룩되었다고 한다. 초월적인 일자(一者)에게서 자의식을 가진 정신이 나온다. 그리고 그 정신으로부터 영혼 또는 생명이 나온다. 영혼은 정신과 육감 사이에 있는 매개물이다. 물질은 일자의 가장 낮은, 최후의 산물이다. 한편 일자는 실재이면서 선이기 때문에 악의 잠재성이란 결국 일자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물질이되 무형의 물질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악이란 모든 사물의 최소한의 가능성이요, 선의 결핍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신플라톤 신비주의에는 내면이 외부보다 우월하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러므로 선에 이르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궁극적 실재에 도달하는 정신은 인간의 가장 깊은 자아의 중심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백론〉 제7권을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그같은 내면화를 거쳐 하느님을 발견한 대목이 나온다. 내재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인, '변하지 않는 빛'인 하느님은 우리의 직관을 통해 진리와 선을 알려주는 근원이다. 그러한 하느님의 발견은 합리적인 추리의 결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비적인 체험이요, 환상이며, 왔다가 사라지는 접촉이었다. 하느님의 발견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오랜 의문이 풀렸다. 하느님은 빛이며 악은 어둠이다. 그것은 마니교에서 말한 바와 같지만 어떤 것도 물질은 아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빛은 순수하게 정신적(영적) 실체이며, 어둠이 실체가 아니라 빛의 결핍이듯이 악은 실체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로 회심
아우구스티누스의 신비체험, 하느님에 대한 경험은 순간적인 것으로 쉽게 사라졌다. 그는 자기가 최고가치를 정신(영적인 것)에 두지 않고 아직 육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사실 신플라톤주의는 마니교의 원칙을 더 강화하고 있었는데, 하느님에게 돌아가려면 육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우선 성적인 욕망에서 즉각 떠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고백록〉 제8권에 나오는 유명한 회심 이야기는 어떻게 그가 동서의 그리스도교 금욕주의를 시행했는지, 어느 정도 그가 자기의 육체적 연약함 때문에 스스로를 경멸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의 육체적 저항은 마침내 밀라노의 정원에서 끝났다. '집어 읽으라'(tolle, lege)는 어린아이의 소리에 그는 〈신약성서〉를 펼쳐 바울로의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로마 13:14).
386년 늦여름의 일이었다. 방학이 가까웠으므로 그는 학교를 떠나 그의 제자들, 아들 아데오다투스,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시골로 내려가 친구에게 빌린 집에서 독서회를 가졌다. 거기서 행한 문학수업과 철학토론에서 현존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최초의 저술들이 나왔다. 그것은 주로 대화들로서 종교적 회심에 대한 강조가 별로 없고 그리스도교적인 주제도 별로 다루지 않고 있다. 그때문에 훨씬 후에 씌어진 〈고백록〉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이 학자들 사이에 많이 제기되었다. 성적 본능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투쟁이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결심한 '철학적 삶'의 최종 국면이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387년 봄, 그가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을 때 이미 그리스도교도였음을 부인할 이유는 없다. 물론 3, 4년 후 〈참된 종교 De Vera religione〉를 쓸 때까지도 그는 그리스도교를 신플라톤 철학으로 푼 것이 사실이다. 〈참된 종교〉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로고스)은 플로티누스의 정신과 같으며, 인간의 이성을 비추고 인간으로 하여금 초월자 하느님에게 도달하도록 한다. 또 그리스도의 인간적 삶은 육적인 고통과 쾌락을 이겨낸 금욕의 표본으로 그려졌다. 그리스도교의 도덕은 영혼을 맑게 하여 관조의 삶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했고, 훈련을 위해 교회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보았다.
주교 및 그리스도교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세례를 받은 직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와 친구 몇 명과 함께 밀라노를 떠나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로마의 항구 도시 오스티아에서 어머니가 죽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와의 마지막 대화를 기록해두었는데, 거기서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용어를 빌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올라가는' 이야기를 나누어 어머니와 함께 영생의 신비체험을 했다. 타가스테의 집으로 돌아온 뒤, 친구들과 소공동체를 만들어 종교적인 명상과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391년 히포를 방문했을 때 그의 평화는 깨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권유에 못 이겨 사제서품을 받고 늙은 주교 발레리우스의 보좌사제로 일했다. 5년 후 발레리우스가 죽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가 되어 죽을 때까지 봉직했다. 로마령 아프리카의 주교는 교구의 사제, 교사, 설교자일 뿐 아니라 자주 발생하는 민사사건의 즉결 재판장 역할도 해야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건강이 아주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막대한 분량의 저술은 속기사의 꾸준한 봉사와 그의 정돈된 사고력 덕택이다. 남아 있는 400개의 설교문이 그것을 입증한다.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그에게 해결을 요청하는 질문들이 많아졌는데, 그의 저술은 대부분 그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으로 작성된 것이다. 그의 편지가 200개 이상 보존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소논문이 될 만큼 긴 분량이다. 그는 끊임없이 이단과 논쟁을 벌였다. 마니교·도나투스파·펠라기우스주의가 대표적인 이단들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주의라고 할 만한 그의 심오한 사상은 성서주석과 설교집에 들어 있다. 특히 〈시편〉 주석과 〈요한의 복음서〉·〈요한의 첫째 편지〉에 대한 글들이 뛰어나다. 그가 이룩한 신학적 특징은 논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의 사상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전환점은 사제서품이었다. 그결과 그는 원래 뜻을 두었던 명상의 생활에서 떠나 세상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그의 연구도 철학에서 성서로 방향전환을 하게 되었다. 그의 목회지 아프리카는 아직 사람들이 완전히 그리스도교화되지 않았던 반면 그의 마음은 급속도로 성서적 종교에 심취했기 때문에, 신플라톤주의와 바울로의 그리스도교의 차이를 더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세례 이후 그가 원했던 유일한 지식은 하느님과 영혼에 대한 것이었다. 하느님을 발견하려면 내면으로 들어가라는 플로티누스의 가르침도 무익한 것은 아니었다. 성서에도 사람의 영혼 속에 하느님과 비슷한 것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인간 영혼의 신성(神性)이 축소된 신성이라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신성은 '영원하고 변치 않는' 것이 잠깐 스친 것이요, 그래서 변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에 들어 있는 형상을 따라 하느님을 아는 작업이 그리스도교 철학자의 임무라고 믿었다. 물론 그리스도교 철학자는 성서적 계시의 인도를 받아야 했다. 바로 그런 길을 따라 쓴 위대한 논문이 〈삼위일체론 De Trinitate〉이다. 영혼의 본성을 알려면 즉각적인 자기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영혼의 자기의식은 하나 속에 셋으로 되어 있으며, 그러한 자기의식이 '어두운 유리처럼' 창조주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그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의지한다는 것은 전혀 의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존재하고, 인식하고, 의지하는 내가 있다. 그러나 그 3가지 가운데 어느 것도 혼자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어느 것 하나만으로는 존재를 유지할 수도 없고 욕구를 채울 수도 없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의 조물주요, 모든 진리를 비추는 빛이시요, 모든 복을 주시는 분" (〈신국 De civitate Dei〉8:4)이다. 그는 그것을 플라톤주의에서 배웠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우주론·지식론·윤리학은 그 자신의 것이다. 그의 이론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주론
플로티누스가 말하는 창조는 아무런 목적도 동기도 없고 신의 자기 관조의 자동적인 부산물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를 "선한 것이 있도록 한 선한 하느님의 의지"(〈신국〉 11:21)의 결과라고 보았다. 뻗어나가는 창조적 사랑의 힘이 그의 신학 전체의 핵심을 이룬다. 하느님의 창조 의지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거나 존속하는 것이 없으므로 '존재를 가지고 있는 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다. 그리고 분명 선의 등급이 있으니 존재의 등급도 있다. 그러나 '비존재'에 가까운 무형의 물질이라도 하느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선하다. 악의 기원을 물질에서 찾으면 안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책임을 물질적 조건에 돌리려는 데 반대했다.
지식론
플라톤을 따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참된 지식을 만드는 능력을 밖에서 주입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교사가 할 일은 학생이 이미 알고 있되 다만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보도록 돕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직관적 지식의 예로 수학적 명제들과 도덕가치의 인식을 들었다. 그것들은 어느 한 개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누구나 똑같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사상가는 진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사상가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인 그리스도가 '내면의 스승'이 되어서 그에게 귀기울이는 자마다 진리를 스스로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윤리학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 윤리이론의 기본 가설을 수용했다. '유다이모니아'(eudaimonia), 즉 인간의 보편욕구인 행복 또는 복지를 위해 행동하라는 것이다. 질서정연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우주 속에서 가치의 등급은 존재의 등급과 일치했다. 존재 등급이 낮은 것은 높은 것에 복종하도록 되어 있었다. 육은 영, 곧 정신에 복종해야 하고 정신은 하느님에게 복종해야 한다. 인간은 우주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알아야 하고, 또한 흔쾌히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것에 각기 합당한 상대적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행동에 영향을 주는 윤리적 가치평가를 위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는 ' 사랑'(amor)이다. 사랑은 사람이 행동하도록 하는 도덕적 힘이다. 사랑의 방향이 올바로 되어 있을 때는 등급이 낮은 존재에 높은 가치를 두는 일이 없다. 낮은 선은 높은 선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한다. 최고의 선만을 궁극적 목표로 마음에 두고 '즐겨야' 한다. 인간은 최고의 선 속에서만 완전히 도달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최고선은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사랑이며,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아가페'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랑이 하느님을 즐기는 데 이르면 그는 '아가페', 곧 사랑 자체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자신을 사람에게 주었으니, 그런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사람은 서로를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처럼 자신을 남에게 줄 수 있는 힘을 지닐 수 있다.
도나투스파 분리주의와 투쟁
주교 재임 첫 15년 동안 아우구스티누스는 목회로나 저술로나 그 열정을 대부분 분리주의를 종식시키는 데 바쳤다. 아프리카 교회에 퍼져 있던 분리주의는 거의 1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스도교 분파인 도나투스파(지도자 도나투스의 이름을 땄음)의 숫자는 여러 지역에서 가톨릭교도보다 많았다. 그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발생한 대박해(303~313) 때 배교한 자들의 때가 묻지 않은 자기들만 참된 교회라고 주장했다. 분리주의를 제거하려던 제국 정부의 노력은 오히려 순교자 정신을 부추겨 도나투스파에게 득이 되었다. 순교자 정신은 당시 아프리카 그리스도교의 특징이었는데, 종교적 차원보다는 사회·경제적인 차원에서 슬픔을 안고 있던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도나투스파의 순교는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한편 분리주의는 폭력을 통해 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평화적 토론을 통해 문제의 핵심을 풀려 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노력은 무위로 끝났다. 결국 제국 정부는 도나투스파가 아프리카의 안정을 해친다고 믿게 되었다. 도나투스파 주교들은 411년 정부의 중재로 카르타고에서 열린 공식회의에 참석하여 가톨릭 주교들을 만나도록 강요되었는데, 그 회의는 가톨릭 교회의 승리로 끝나도록 되어 있었다.
사제가 집전하는 교회의 성례전을 통해 성령이 신자에게 전달된다는 것이 도나투스파와 가톨릭 교회의 공통된 견해였다. 그런데 도나투스파는 사제가 심각한 죄에 오염되어 있지 않아야 성례전이 타당성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성령은 죄인을 떠나며, 죄인은 '자기가 지니지 못한 것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답변은 성례전이 성령을 전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기름부음 때문이므로 사제의 품행과는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의 통일성은 성령의 최고 선물인 사랑에 근거하는데, 분리주의자들은 그것을 부인했다. 분리주의를 종식시키는 수단으로 설득 이외의 다른 방법을 계속 반대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불행하게도 끝내 도나투스파에 대한 법적 제재를 승인하게 되었다. 그것은 도나투스파의 폭력이 무서워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이여,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는 그의 명언은 사실 사랑으로 행한 추방을 정당화하는 말이었다.
이단 펠라기우스주의와 투쟁
도나투스파 논쟁이 끝나기 전부터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죄론과 구원론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펠라기우스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이 느슨해지는 데 반발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연약함을 이유로 실패에 대해 변명하자 펠라기우스는 하느님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자유를 주어 선을 선택하고 완성할 수 있게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하느님이 금지한 행위, 피할 자유가 있었던 그런 행위를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그러한 자유가 없다면 하느님의 심판과 보상이 정당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를 냉엄한 도덕주의로 환원했기 때문에 펠라기우스주의는 교회의 평범한 성례전이나 예배행사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는 세례를 베풀어 '죄를 씻어왔고', 유아도 아담의 죄를 이어받았다고 하여 세례를 주었다. 바울로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담의 범죄가 인류 전체에게 사망을 가져왔다고 했기 때문이다. 원죄의 교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 이미 서방교회의 확고한 교리로 뿌리를 내렸다. 따라서 펠라기우스의 제자 켈레스티우스가 공개적으로 원죄를 부인했을 때, 펠라기우스주의는 이단으로 단죄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가 발을 빼자 교황 조지무스(417~418 재위)는 전임자 인노켄티우스 1세가 내린 단죄를 번복했다. 그러다가 418년 봄, 아프리카의 주교들이 이단자를 추방하는 칙령을 황제 호노리우스로부터 얻어내자 조지무스는 거기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를 위한 투혼으로 가득 찼다. 그는 펠라기우스주의가 단지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치명적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즉시 알아차렸다.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의로움을 얻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논쟁이 있기 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와 은총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작업을 했다. 물론 합리적 설명을 교회가 완전히 받아들인 적은 없다. 아무튼 그는 원죄를 믿는 교회 전통을 받아들였다. 원죄는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인데, 아담의 죄란 창조 질서 속에서 인간이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결과 인간 자신의 질서마저 혼란하게 되어 육이 영에 대적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장하기를, 모든 사람이 아담의 죄와 벌에 참여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교를 통해 출생한 점에서 분명하다고 했다. 성적 충동이란 영이 육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말년에 에클라눔의 펠라기우스주의자 주교 율리아누스가 치명타를 가한 것이 바로 원죄를 성교와 연결시킨 부분이다. 그는 인간의 피조된 본성에 속하는 본능은 도덕적으로 중립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로 되돌아갔다고 공격하면서 싸워 이겨야 할 충동을 아우구스티누스가 악으로 만들고 말았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의 질서가 파괴된 데서 인간타락의 의미를 찾았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떠나 인간은 자기사랑을 추구하고 자기보다 낮은 것에 예속되었다. 인간은 자기 행위로 타락했으며 자기의지로는 타락의 결과를 돌이킬 수 없다. 영이 육에 예속되었으므로 인간은 노예이며, 그러한 노예의지는 구원 자체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필요한 것은 무게중심을 뒤집는 일이다. 밑으로 내려가는 사랑을 위로 올라가는 사랑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죄인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것이 성육신과 오순절의 복음이라는 것이다.
한편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다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보기에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도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 속에서 도덕적인 빛을 필요한 대로 모두 얻었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의 주장, 즉 자유를 타고난 것으로 보는 관점이나 환경에 관계없이 선택할 수 있는 절대적 힘으로 보는 관점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도덕적인 행위도 그 행위자의 상황에 따라 많이 좌우됨을 지적하면서, 똑같은 행위를 했어도 주체가 누군지, 어떤 목적으로 했는지, 어떤 감정으로 했는지 따위가 고려되어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의지의 움직임은 지식뿐 아니라 감정에도 좌우된다고 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옳은 일을 하지 않는다. 무엇이 옳은지 몰라서 그렇기도 하고 옳은 일이 달갑지 않아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몰랐던 것은 알게 될 수 있으나 달갑지 않은 것이 달갑게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려면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죄의 용서 De peccatorum meritis et remissione〉)
옳은 것을 기뻐하는 마음 없이는 좋은 일을 하는 데 참자유가 없고 노예처럼 율법에 끌려다닌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유이다. 그리스도교도의 삶의 동기가 되는 그 하느님의 사랑은 바울로가 말한 대로 성령의 은총으로 인간 안에 들어간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의 선물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완전히 자유로운 것으로 보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은총에 인간의 완전한 자유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인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하느님이 일으킨 것 아니면 사람이 일으킨 것이라는 생각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선한 행위를 오직 하느님 때문이라고 보게 되었다. 한편 주교 재임 첫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9~11장을 연구한 결과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도 어떤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영원한 뜻을 바꿀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의 선택은 창조 전에 정해졌다. 성령이 어떤 특별한 상태로 주어질 때 한 개인이 어떻게 응답할지 하느님은 알고 있다. 시간의 흐름과는 별개로 알고 있다. 그래서 오직 선택된 자만이 은총을 받아들인다.
펠라기우스의 도전에 부딪혀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논쟁하는 동안에 썼던 걸작 〈신국〉에서 보이지 않는 두 사회, 곧 선택된 사회와 저주받은 사회의 '처음과 중간과 나중'을 장엄하게 그려냈다. 작품의 구상은 410년 서고트족이 로마를 점령하여 제국을 뒤흔들어놓기 전부터 그의 마음 속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신국〉은 로마의 재앙이 옛 종교를 버렸기 때문에 받는 벌이라는 이교도들의 주장에 대해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두 도시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교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이교도나 세속사회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두 도시는 천사들의 타락 이후 하느님의 창조질서 속에서 서로 경합하고 있는 2개의 영적인 힘을 상징하고 있다. 하나는 신앙이고 하나는 불신이다.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고 하느님을 미워하느냐, 아니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미워하느냐'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 2개의 힘 가운데 어떤 것도 이 세상에 순수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는 하늘의 도성과 땅의 도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만일 〈신국〉에 역사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예정론 철학이 될 것이다.
노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학설이 몇몇 제자들에게 이해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도덕적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칭찬이나 비난을 모두 근거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후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마지막 논문에서 예정론을 논리적으로 밀고 나가 잔인한 결론에 도달했다. 마지막으로 손질된 그의 학설이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가장 예리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스콜라 학파의 토마스 아퀴나스나 종교개혁자 칼뱅의 작품에 그대로 재등장했다. 그의 작품은 진실로 이 세상에 얽매인 인간이 하느님의 영원한 눈으로 세상 존재를 관조한, 과감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망했을 때 히포는 반달족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고, 아프리카의 로마 문명은 막을 내리고 있었다. 수년 후 레랭의 빈켄티우스는 가톨릭 교회의 정통성을 가리켜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고, 누구나 믿는 것'(Quod ubique quod semper quod ab omnibus creditum est)이라는 유명한 구절로 표현했다. 가톨릭 교회를 그처럼 정의한 데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학설 가운데 들어 있는 좀더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렇지만 빈켄티우스는 감히 아우구스티누스를 이단적이라고 하지는 못했다. 아무튼 아우구스티누스의 학설 속에 끼여 있는 좀 터무니없는 주장들은 그의 권위 때문에 신학적으로 해로운 유산이 되었음은 사실이다. 그런 문제가 있지만 그가 그리스도교 사상에 끼친 엄청난 영향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의 사상은 서방 그리스도교를 하나로 묶어왔고 언젠가는 현재의 분열을 치유할 것이다. 그처럼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인은 명쾌하고 심오한 그의 지성이나, 신비스럽기까지한 그의 품행이나, 거대한 학문체계보다는 그의 독특한 종교적 천재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캔터베리의 성 안셀무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성공회 기도서 The Book of Common Prayer〉의 저자), 살레의 성 프란키스쿠스, B. 파스칼, 자크 베닌 보쉬에, 조지프 버틀러, 자크 마리탱, 라인홀드 니부어, 파울 틸리히 이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큰 영감을 받았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문제의 핵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참된 철학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이다"(Verus philosophus est amator Dei)라는 것이다. 〈신국〉에 들어 있는 이 말을 통해 그는 가장 훌륭한 자기 초상화를 남겼으며, 그의 저술들을 그보다 더 정확하게 평가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중세 초기부터 그는 교회의 박사로 존경받았다.
J. Buyrnaby 글 | 梁明洙 옮김
자료 출처 / 경북대사학과 홈페이지
어거스틴의 <고백론>에 관한 일고찰
1. 서 론
신학, 철학, 역사, 정치 사상과 같은 면에 어거스틴이 끼친 영향은 지속적으로 이어져오고 있으며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넓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레오.C.데일리가 서구문명사에서 "어느 누구도 어거스틴 만큼 희랍 철학과 유대교적 전통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잘 종합한 사람이 없다." 라고 말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그의 영향력과 업적은 무엇보다도 그가 남긴 다수의 저술들에 기초하고 있는데 120권에 이르는 저술과 269편의 서신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백론>과 <신국론>이라 하겠다. 이 중에서도 <고백론>은 어거스틴 자신의 생애와 사상의 변천, 회심에 따른 고뇌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이해와 그 사상의 뿌리들을 탐색하는데 가장 직접적인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외에도 이 저술에는 어거스틴에 대한 개인적인 사실들을 통해 희랍, 라틴 사상과 기독교의 조우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가고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으며 어거스틴 자신이 골몰해 오던 문제들 즉, 선과 악의 문제, 원죄론, 시간론, 창조론, 의지론 등에 관한 그의 생각을 직접적이고 핵심적으로 개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어거스틴 사상의 틀을 이루는 관건적인 요인들로써 실상 기타 그의 다른 서술들은 이러한 기본 사상 체계를 확대하거나 각도를 달리해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점에서 <신국론>도 사실은 <고백론>적 인식을 국가와 사회, 역사에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J.O'meara의 말은 타당한 것이다.
2.<고백록>에 대한 평가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우선 그것은 기독교 역사상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고백서라고 인정되어야 하는데 물론, 그 이전에도 이러한 저술들이 있었지만 그 심도는 <고백록>에 미치지 못 하는 것이었고 이런 점에서 A.F.West 교수는 <고백록> 이전의 그 어떤 이도 이같은 집필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이와 같은 작품이 탄생하기까지는 천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Bourk는 웨스트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어거스틴이 자신의 삶과 사상 그리고 감정을 자성적으로 분석한 업적은 후기 기독교 심리학의 기초를 이루어 놓았다." 고 평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고백록>은 단순한 '자기 성찰적 자서전(Introspective Autobiography)'에 머무르지 않고 문학 형식사(The History of Literary Form)상 하나의 신기원을 이루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문학 형식면에서도 독특한 경지를 열고 있는데 이것은 로마인들의 창안물인 '자서전적' 형식에 시적인 운율, 간결한 문체, 서정성을 도입하여 독특한 문학 형태를 창안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이와 함께 깊숙한 그의 내면을 분출시키고 하느님 찬양의 장엄한 분위기를 유지시키기 위해 시적 요소와 산문성을 적절히 조화시킨 기도형식의 문체를 구사하였다.
그러나, <고백록>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하는데 먼저, 그 형식의 단조로움과 주제의 단순성은 독자들에게 '지루한 느낌'을 준다는 평가가 있다. 그래서, 부아지에(M.Boissier)는 이 저술이 단조롭다고 비판하고 있으며 하르나크(Harnak) 또한 이 책은 그 분량이 너무 많고 근대적인 사고에 익숙치 않은 내용이 많으므로 독자들에게는 축약하여 소개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또, 와필드(Warfield)같은 이는 이 책은 라틴어로 읽혀질 때 그 진수를 터득할 수 있으며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전해 질때는 메마른 듯한 내용으로 전해지는 단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고백록>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비판도 있는데 Joseph McCabe는 어거스틴이 자신의 젊은 날의 잘못들을 오히려 미화시켜 보이려는 그릇된 의도를 가지고 썼다고 통박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이것은 한 인간의 과거를 빌려쓴 하나의 신학 논문으로 힙포 주교의 수사적 구사력에 의해 인간의 본성과 은총, 철학과 기독교를 적절히 배합시킨 자기 시현의 책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3.저술 배경
어거스틴이 <고백록>을 써야 했던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들을 살펴 봄에 있어서 그가 <고백록>을 쓰기 시작한 397년을 전후로 일어난 역사적 변화는 이 책의 집필 배경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상황은 기독교가 크게 성장하고 있던 반면, 로마 제국은 곳곳에서 몸살을 앓기 시작하였는데 378년 서고트족의 침입과 동로마 제국 황제 발텐(Valens)의 아드리아노플에서의 패사는 야만인 족으로 기울기 시작한 대세의 신호탄이었고 어거스틴이 로마로 가던 383년에는 '로마의 기근'이라 불리는 혹심한 배고픔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기독교는 로마와는 반대로 그 위세가 커져 가고 있었는데 어거스틴이 개종한 7년 후인 394년에는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공식적으로 모든 형태의 이교 신앙을 금지 시킴에 따라 기독교는 법적으로나 실제면에서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으므로 이제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체계화 시켜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럼에도 로마의 쇠퇴에 대해 기독교는 나름대로 설명을 해야 할 필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즉, 기독교는 이제 내외적으로 보다 더 체계적이고 이론적이며 경험적인 대응의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의 신앙 조건이 안정되어감에 따라 초기 기독교인들의 관심이 순교에 모아졌던 것에 비해 이 시기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신앙적 고뇌와 회심의 과정 그들의 가르침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것도 <고백록> 집필의 외적 요인으로 무시 할 수 없을 것이다.
396년에 어거스틴은 정식 주교로 임명되면서 그 개인의 주변 상황에도 크게 변화가 왔는데 주교가 된 지 일년이 지난 시점에서 <고백록>을 쓰기 시작 했다는 점은 주목 할 만하다. 그가 이 저술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43세 였으니 인생의 원숙기인 중년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점검하며 미래에 대한 신앙을 정립 해야할 내적 충동을 깊게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 자신과 주변관계면에서도 <고백록>집필의 필요성은 증대되고 있었다. 즉, 교회 내에서의 그의 위치는 급속도로 상승되어 온 반면 다른 사람들의 그의 과거에 대한 의구심은 바뀌기 어려웠다. 그의 급속한 위치의 상승은 그에게도 힘든 변화의 연속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칭송과 의구심을 동시에 가지게 했던 것이다. 그가 과거 마니교도에서 개종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의 글에는 이교적 플라톤주의자들의 사상적 영향이 사라지기 않았다는 사실은 주위의 의구심을 사기에 충분했으며 교회내의 위치상승과 마니교도들과의 논쟁과 문필력은 그에게 명성을 안겨줌과 함께 그에 대한 반대자도 낳았다.
그리고, 어거스틴 자신도 주교가 되는 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유혹들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들을 전해주고 싶었고 아프리카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고립 되고 후진 지역이었으므로 다른 성직자들과의 접촉이 쉽지 않아서 그만큼 자료나 신앙서들이 필요하였다는 사실도 성직자로서의 그의 책무와 관련되어 고려되어져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의 아프리카인적인 기질은 우정을 중시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와 변화를 나누어 가지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의 극적인 회심의 경험과 같은 이러한 내적 비밀을 개인적인 편지로 전하는 것보다는 하나의 책으로 집필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 판단한 것같다. 그래서, <고백록>은 교육적인 의미와 자기정리의 필요,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그의 타고난 문장력과 감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4.저술목적
어거스틴이 <고백록>을 서술한 근본 목적에 대해서는 <고백록>에서의 그의 서술, 후일 <재고록>에서 다시 회상하여 밝힌 내용, 그리고 '고백'이라는 말의 의미를 성서적 관계에서 검토하여 봄으로써 얻어질 것이다.
어거스틴이 사용한 '고백(Confession)'이란 "하느님이여,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당신께 고백하게 하시고,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시 66:6)에 가까운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여기서의 '고백'이란 인간의 죄에 대한 고백일 뿐만아니라 신의 능력에 대한 고백이라는 의미이고, 범죄와 불의에 대한 고백은 신의 은총에 의존하기 위한 것이며 죄의 고백은 신의 영광에 대한 찬양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백'은 본질적으로 두 개의 의미를 가지는데 하나는 죄에 대한 것이며 또 하나는 신에 대한 찬양으로 이해 된다. 이러한 점은 어거스틴이 로마 관리인 다리우스에게 보낸 편지나 그의 다른 저술인 <재고록>등에서 죄의 고백과 하느님에 재한 찬양을 거듭하여 강조하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고백록>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즉, 1-9권까지는 '죄에 대한 고백(Confessio Pecati)'이며 11-13권은 '믿음에 대한 고백(Confessio Fiedi)'으로 이루어 지게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또한 <고백록>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의 마음과 사랑을 신에게 돌리는 도구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어거스틴 자신의 참회에 대한 것만 고백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알리피우스, 빅토리누스 등 다른 사람들의 참회와 생활을 기록한 것도 이러한 의도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어거스틴은 창세기를 쓴 모세나 시편을 쓴 다윗과 같은 소명감을 가지고 <고백록]을 저술하였다. 즉, 기독교 이론은 체계화 되지 않앗고 회심의 과정에 대해서나, 죄의 문제, 죄인이 구원받는 과정 등에 대한 기준적 설명이 요구되는 당대의 신앙적 상황이 모세가 살았던 출애급의 시대처럼 구시대에서 신시대로 넘어가는 시대로 보고 자신의 체험이 신앙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서의 '시편'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시편에서 다윗이 서술한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 죄의 고백등이 자신의 신앙적 도정과 유사하다고 보고 자신의 체험을 시편의 형식을 빌려 쓰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문체와 내용, 그리고 그 감동에서 그러한 냄새가 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고백록>은 단순히 개인의 죄에 대한 고백으로 끝날 수 없으며 신에 대한 장엄한 찬양과 자기의 죄에 대한 아픈 고백 그리고, 기독교리 체계의 기조를 놓는 논리적 신학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요컨데 A.Pincherle가 <고백록>의 주된 의미를 세 가지 기본 요소 즉, '찬양의 고백','죄의 고백','믿음의 고백'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 세 요소가 어거스틴이 <고백록>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핵심적인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한 자전적 저술이 아니라 자전적 형식을 빌린 치밀한 신학 이론서이며 사상서인 것이다.
5.<고백록>의 구성
<고백록]은 전부 1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과 문체의 특이성에 따라 크게 3부분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다. 제 1부분은 1권에서 9권까지로 묶이며 이것은 다시 1-4와 5-9의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성장의 과정이며 후자는 기독교로의 회심 과정이라 하겠다. 제 2부는 10권 단권으로 여기에서는 회심후의 영적 현재 상태, 철학 및 신학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으며 제 3부분은 11-13까지로 이는 창세기주해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3부분은 그의 시간관과도 관계가 되는데 제 1부분은 과거의 사항이며 제 2부분은 현재 상태, 제 3부분은 미래 지향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문체에 있어서도 제 1부분은 개인적 서술의 형식을 띠어 솔직한 표현과 개인적인 고백에 즉각적인 흥미를 느끼게 하는 반면, 제 2부분은 친숙한 개인적 명상과 회고에 몰입함으로써 사상서적이며 이론적인 서술의 느낌을 갖게 한다. 제 3부분은 장대한 사상과 통찰에 감명을 받게 하며 창세기의 서술방식을 택하고 있다.
1권은 그가 15세가 되는 369년까지의 일로서 마다우라에서 수사학을 배우고 나서 공부에 대한 열정은 있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더 이상 공부를 계속하지 못 하고 고향인 타카스테에 돌아와 있을 때의 일들을 서술했는데 그가 주로 다룬 문제는 원죄설의 근거와 자신의 가정 형편, 싫어했던 희랍어와 좋아했던 라틴어,연기된 세례 등에 대한 것들이고 성적인 금욕주의와 엄격한 교육과 훈련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제 2권은 성장기(369-370)로 그의 나이 16세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그의 좌절기로 악한 행동을 하는 원인은 재미있었기 때문이라는 심리적인 기술을 하고있다.
제 3권은 카르타고에서의 생활(371-373)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인과의 동거,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음으로써 자극된 지혜에 대한 추구와 철학적인 갈증, 그리고 선악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마니교를 수락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서에 다시 돌아가려다 환멸을 느낀 점인데 이는 유아 시절의 세례연기와 더불어 어거스틴이 이때부터도 가톨릭 지향적 심성에 놓여 있었다고 할 점이다.
제 4권은 19세 생일이 지난 후부터 28세에 이르는 기간(373-382)에 대해 적고 있다. 이때에 그는 미신과 점성술에 탐닉하여 <사물의 아름다움과 적절함에 대하여>(380)라는 처녀작을 썼고 아리스토텔레스의 <10범주론>을 읽었으며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제 5권은 마니교도와 결별하는 과정과 로마행, 그리고 밀란에 가서의 암브로시우스와의 만남(382-384)을 쓰고 있다. 여기서 서술된 마니교도와의 결별은 그가 이미 10년간 그 종교에 침잠한 이후의 일이어서 이후 그의 사상형성에 미친 마니교의 영향을 논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되었다.
제 6권은 5권에서 시작된 회심과정의 구체적인 서술로 암브로시우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는 시기(384-386)의 일이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15년간의 동거녀와의 결별 그리고, 새로운 신부를 기다리는 동안의 성적인 타락과 건강의 악화 등이 그려지고 있다.
제 7권에서 그는 철학을 통해 제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하느님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관계에 대한 문제, 그리고 자유의지나 악에 대한 자유 선택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플라톤학파의 몇 권의 책'에서 얻게 된다. 그는 신플라톤 철학의 글들을 통해 하느님의 본질이 최고의 靈임을 깨닫게 되고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신플라톤적인 방법으로 해석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논자들간에 어거스틴의 핵심은 신플라톤 주의였으며 크리스챤으로서는 아니었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계기가 된다.
제 8권은 바로 회심의 장(386)이라 하겠는데 그의 나이 32세때의 일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회심의 결단을 예로써 설명하고 아직도 마음의 소리가 의지에 미치지 못 함을 한탄하던 중 무화과나무 밑에서 '취하여 읽으라'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고 세례를 받을 최후의 결심에 이르게 된다. 이때까지는 신플라톤적인 영향과 신비주의적인 영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 하다.
제 9권은 그의 33세(387)에 해당하는 시기로 세례와 친구의 죽음, 수사학교수직의 포기, 어머니의 죽음과 그에 대한 회상으로 채워진다.
제 10권은 9권 내용의 시기보다 12년 후(399)인 현재의 자기를 고백하고 있다. 이 무렵 그는 <선의 본성론>과 >삼위일체론>도 함께 저술하고 있었으며 이때는 자신이 힙포의 감독이 된지도 9년째에 접어든 해이다. 이 내용은 자기가 회심한 이후에 얻은 경이로운 깨달음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며 동시에 빠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정욕에 대하여스스로를 타이르며 남에게도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적 상념에 대한 설명적 기술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부분은 기억의 신비함과 그 능력을 기술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기억은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하느님을 깨달을 수 없다고 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유혹과 시련의 원인을 설명하고 이것들을 절제를 통하여 극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마지막 부분에 속하는 11,12,13권은 창세기의 주석에 해당하는 글로써 11권에서는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창조의 사역이 시간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문제를 논의한다. 12권에서는 태초의 세계를 이해시키기 위해 물체의 질료, 영원성, 창세의 비화들을 논하고 있고 13권에서는 하느님의 완전하심과 피조물의 불완전한 관계를 설정하여 하느님은 영원하며 사물과 생명의 유일한 근원임을 밝힌다. 그리고, 삼위일체설을 설명하고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적으로 말하며 모든 백성이 그에게 돌아가기를 호소하고 그의 은혜와 경이를 찬양하며 글을 마친다.
6.<고백론>의 체제 논쟁
<고백론>의 내용에서 우리는 그것이 서로 다른 내용과 성격을 가진 몇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음을 보았다. 이 점은 이 책에 대해 이 책이 통일성을 지닌 책인가? 아니면 다른 책을 서로 함께 묶어 놓았을 뿐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게 히였다. 어거스틴 자신은 이것을 '단일 저술'로 간주하고 있는 반면 B.Warfield나 Max Zept등은 <고백록>을 1권에서 10권까지와 11권에서 13권까지로 나뉘어진 서로 관계가 없는 두 책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이 책은 어거스틴의 회심 고백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며 그것으로 이 책의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고 나머지의 서술은 앞의 고백적 의도와는 무관한 창세기 주석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두 입장은 <고백록>안에서 나름대로의 근거를 들고 있어 서로가 타방의 주장을 배제하려하고 있다. 그래서, 통일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추된 가설을 설정하고 이를 통해 전체를 꿰뚫어 보려하면서 그것들이 가지는 상이점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분리론자들은 그 차이점에 집착한 나머지 통일성을 지나치려 하고 있다.
분리론을 주장하는 측은 <고백록>을 어거스틴의 죄의 고백과 자전적 생애를 기준으로 평가하려는 관점과 어거스틴의 신앙이 10권까지에서 완성되었다고 하는 관점에서 나머지의 내용을 전혀 다른 별개의 책으로 보고 있으나, 어거스틴 자신이 밝힌 바와도 같이 <고백록>은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신앙이 완성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세례받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그는 10권에서 회심한지 12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욕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서술하여 회심 이후까지 가진 자신의 약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의 탁월한 신앙적인 정직성을 보여 주는 이 대목에서 <고백록>이 단순한 신앙적 자서전이 아니며 동시에 회심으로 그의 신앙이 완성되었다는 의도로 쓰여지지도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형식과 톤은 다르지만 고백이 10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야하는 필요성과도 관련이 된다고 하겠다.
J.Copper가 지적한대로 <고백록>은 단순한 삶의 기록이 아닌 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경이로움이었고 이러한 사실은 창조와 영원과 같은 문제를 다루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고백록>이 창세기에 대한 주석으로 끝맺은 것은 저자의 사상적 배려에서 나온 결과라 하겠다. 그리고,그에게 문제가 된것은 피조물의 최초상태 즉, 순수했던 상태를 찾아보려하는 것과 창조자와 피창조물의 관계를 대비시킴으로써 창조자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영원한 휴식이 없다는 사실을 창조론의 명시적인 사실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데 어거스틴은 <고백록>을 '고백'이라는 단어의 이중적 의미에 맞추어 서술하였으며 그런 점에서 앞 부분과 뒷 부분은 서로 상이한 책의 묶음이 아니라 어거스틴의 계획에 의한 것이며 믿음의 본질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그가 그토록 고심하며 추구했던 하느님의 본질, 선과 악, 시간 문제 등에 필수적인 답이 되는 창조론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7.희랍 사상의 영향 문제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어느 부분까지가 플라톤적이며 어디까지가 크리스챤적인가 하는 문제는 <고백록>에서 추적하고자 하는 중요한 잇슈가 되어 왔다. 그는 <고백록> 제 7권에서 플로티누스의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고 그것을 통해 체계적인 해답에 도달하고 있음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플로티누스의 <Enneads>에서 영혼 문제를 논의됨으로써 어거스틴은 물질적인 한계를 극복하게 된다. 그래서, 창조자와 피조물과의 관계는 '유출설'에 의하여 해독이 가능했고 악과 선의 관계도 이 유출의 관정에서 생기는 선의 부족상태라는 방법으로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7권에서 그는 플라톤의 [로고스]와 말씀과의 관계를 비교하여 그 유사성을 터득하면서 그같은 깨달음에 이르게 한 것을 하느님의 도움으로 돌리고 있다. 그래서, O'meara는 어거스틴의 플로티누스적 회귀를 신약에서 말하는 탕자의 돌아옴에까지 비유하고 있고 어거스틴이 플로타니우스의 책을 읽음으로써 전혀 다른 새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어거스틴의 젊은 시절의 철학적인 각성도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10범주론> 등을 통해 이루어졌고 그가 회심한 후에도 플라토, 플로티누스 등을 칭찬하는데 이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전 사상이나 교육의 중요성을 부인한적이 없으며 신앙과 이성의 중요성을 논하고 있는 경우에도 이것들을 대립적으로 파악하지는 않았다.
이상과 같은 신플라톤주의와의 관계 때문에 어거스틴의 회심이 성서적인 완전한 회심이 아니고 다만, 신플라톤주의로써의 사상적 전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대두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주장의 핵심은 어거스틴의 사고는 본질적으로 신플라톤주의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회심은 신플라톤주의적 유심론의로의 회심이며 무화과 나무 아래의 신비적인 경험도 신플라톤주의적 신비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비록, 어거스틴이 뒤에 기독교에 포용되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일생을 통하여 본질적으로 신플라톤주의자로 남았으며 적어도 신플라톤주의적 사고기조가 아직도 동화되지 않은 상태의 기독교와 더불어 마음속에 공존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들이 나름대로의 근거는 가지고 있지만 그 주장들이 지나친 일반화나 과장의 위험도 가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먼저, 어거스틴의 회심을 지나치게 플라톤사유에로의 변천에 초점을 맞추어 파악하려는 근시안적인 태도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어거스틴의 사상적 변천 과정에서 신플라톤주의가 가지는 역할을 무시 할 수는 없지만 플라톤의 서적을 읽기 이전인 어린 시절부터 어거스틴은 기독교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랐으며 동시에 이교도였던 그의 아버지도 죽기 수년전 즉, 어거스틴이 13-15세에 해당하는 시기에 개종하여 사실상 전가정이 기독교화된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적 배경 때문에 어거스틴은 그의 사상적 방황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저변에 기독교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또, 한발 더 나아가 그가 <호르텐시우스>를 읽은 감동에 이어 다시 <성경>을 읽어 보려한 것, 그때부터 선과 악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급기야 마니교도가 되었다는 것도 사실은 기독교적 가르침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 즉, 진리 탐구의 과정에서 그곳에 빠져 들어갔다고 역설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후에도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고 회의주의에 빠지며 플로티누스의 책을 읽고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보다 바른 종교를 찾기 위한 사상적 추구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극적인 회심의 체험을 겪은 후 카시키아쿰에서 세례를 준비하고 있을 때의 대화나 저술의 내용이 아직까지도 철학적인 질문에 가득차 있으나 이 같은 질문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즉, 그는 <아카데미파 반박>의 제 3권에서 그러한 질문의 목적은 "이성을 권위에 통합시키고 그의 믿음을 그리스도의 권위에 통합시키는데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플로타니우스에게서 찾으려 한것도 신앙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도구를 찾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성과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도 회심할 당시에는 독립적인 것으로 파악했으나 뒤에 이성이 신앙에 도움을 준다고 이를 수정한 것도 사실이나, 카시키아쿰 대화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플라톤적 사상기조 위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지 결코, 플라톤 이해로 자족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적어도 두 요소가 공존 상태에 있었으며 그 후 점진적으로 성서적 크리스챤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요컨데 그는 기독교를 플라톤적 사유 방법으로 이해 수용하였고 이 수용의 전기를 통하여 성서적 이해에 삼투되어 들어갔으며 궁극적으로 이를 극복하여 기독교적으로 소화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결과로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 것이다'라는 명제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고백록>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신플라톤적 사유체계를 서술하려는 것보다도 자신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고백이었다는 점은 어거스틴의 신앙변천의 궁극적인 성격을 대변한다고 보겠다.
8.<고백록>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역사인식
어거스틴의 역사 인식을 논할 때 제일 먼저 이해해야할 요소는 그의 '기억론'이다. 그는 인간이 가진 기능 중에서 가장 경이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기억이라고 보고 사물에 대한 인식도 기억의 매체를 통해 가능하며 神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기억을 더듬어 찾아 가는데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사유'는 기억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며 또, 그것이 인간의 행위로 표현이 가능하다고 하고 기억이 없으면 사유가 있을 수 없으며 사유가 없는 행위란 상상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았다.
사실, 의지의 선택도 사유 없이는 불가능하며 의지의 선택이 없는 정상적인 행위 또한 존재하기 힘든 것이라 하겠다. 기억의 문제를 역사 인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의지'와 '시간'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 그것이 역사 인식과 역사 행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더욱 부각된다. 객관적인 역사로서는 엄연히 일어난 사건들은 기록의 유무에 관계 없이 일어난 사실임에는 틀림없으나 실체에 있어 그것이 기억되거나 기록되지 않으면 그 역사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은 일찍이 역사의 주관성을 예언했다 하겠다. '기억'된 과거는 또한 단순히 기억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 선택,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인간의 과거 역사란 현재적 행위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고 다른 의미에서 현재의 행위와 의지는 과거기억의 축적 결과라 하겠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매우 현대적 감각의 역사 인식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억과 시간의 문제도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시간이란 단순한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그것들은 기억속에서만 존재한다. 지나가버린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 사이에서 존재하는 시간은 오직 현재뿐인데도 우리가 과거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기억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며 미래가 올 것을 예언하는 것도 우리의 의식이 그렇게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기억이 없는 시간이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모든 역사는 현재적 관점에서 조명 할 수 밖에 없는 역사의 현재성을 일찍이 간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기억속에 없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기억속에 없는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의지선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어거스틴에게 기억을 배제한 역사인식은 있을 수 없으며 기억은 곧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기억은 현재적이며 그래서, 현재적 관점에서만 역사의 조명은 가능하다. 이 점에서 크로체가 역사를'현재적 역사'라고 한것이나, Carr가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던 것은 어거스틴에 그 연원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9.결 론
<고백록>은 어거스틴 사상의 핵심이 모아진 것이며 이에 대한 이해없이 어거스틴 사상의 이해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고백록>은 단순한 신앙 고백의 차원을 넘어서는 조직적인 신학서이며 사상서이고 신의 본질, 선과 악의 문제, 시간관, 창조론등 그 속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은 그 자체로 매우 획기적인 주장이지만, 그것들은 또한 고대 헬라적 신관이나 역사,우주관과 맥을 달리하는 또다른 사상의 진원이 되었다.
경험 없는 개념 정립이란 불가능하다고 본다면 <고백록>은 어거스틴의 고뇌어린 삶과 신앙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농축된 사상이라 할 수 있고 <고백록>은 이전 사상편력에 대한 정리이며 이후 저술들의 원칙이 된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백록>에서 제시되고 있는 창조론, 시간론, 의지론등은 이미 기독교적 역사 인식의 틀이며 그가 제시한 이러한 개념들은 바로 중세 사학이나 근대 사학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李 石佑.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대한 일고찰]. <경희 사학> 15. 1988
자료출처 / http://mi21.pe.kr/index1.htm(미션 21)
어 거 스 틴
어거스틴은 바울 이후 신학을 가장 잘 집대성한 신앙인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신앙적 이론에 대해 수세기 동안 비판이 있었지만 그의 사상을 훼손시키거나 변경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대에도 그의 이론은 도전을 받고 있지만 그 도전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전성기의 말기에 태어났습니다. 당시 로마는 전성기를 맞아 지중해의 무역 중심국으로 대제국을 건설하고 번영과 평화를 누리고 문화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죽을 무렵에는 대제국의 면모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무너졌습니다. 그 시대 분위기는 로마인들조차 로마와 로마 지도자들의 위대함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가치있는 일을 시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는 닥쳐올 위험을 막연히 인식하면서 불안해하고 내적인 세계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에 거세게 반항하다가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후 로마의 식량 공급지로 전락한 북아프리카에서 A. D. 354년에 태어났습니다. 이 곳은 어거스틴이 교육을 받고 복음 사역을 감당한 어거스틴의 일생의 터가 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는 카르타고의 베르베르 종족인데 종족의 특징은 작은 키, 검은 피부, 넓은 어깨, 좁은 엉덩이의 신체 조건을 가졌고 성격은 신경질적이고 극성스런 기질을 갖춘 전형적인 전투사들이었습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세계로 영토를 넓히던 로마를 위협한 하니발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가난했습니다. 그의 성격은 수집어하는 편이었지만 명석하고 다소 괴팍스러웠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빨리 숙달하지만 싫어하는 것은 무관심하는 편으로 편집증적인 면이 강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불성실하고 무뚝뚝하며 순각적으로 화를 내며 폭발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이 깊고 경건했으며 신중하고 모성애가 강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30년 기도로 어거스틴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남편도 말년에 개종시켰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고백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육신으로 나를 이 세상에 낳아주셨고 영적으로는 주님의 영원한 빛 안에 낳아주셨습니다."
그는 집안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출세의 수단으로 공부를 하려고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공부를 출세의 길로 여긴 것은 그의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어거스틴은 15세에 고등교육을 받기위해 고향 타가스테를 떠나 도시인 마다우라로 진학했습니다. 당시 마다우라는 거리마다 이방신들의 상과 신전이 즐비했습니다. A.D. 313년에 '콘스탄틴 화약'을 통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승인되었지만 이방신전과 상들이 교회당 옆에 건재했고 사람들은 임의로 신과 종교와 철학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서 어거스틴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며 언변만 늘었습니다. 마다우라의 교육은 '문학과 웅변술'을 강조했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수사학과 언변에 능통하게 되었습니다. 언변의 재료는 이방신들의 신화와 전설이고 여기에서 유추한 내용이 합리적인 설득방식으로 받아 들여지던 시대였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교육을 통해 신앙이 희미해져갔습니다. 결국 교회 생활을 하지 않고 세상 출세와 여자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칭찬받으며 순진하게 신앙생활하던 그는 화려하고 다양한 것들을 맛 볼 수 있는 도시생활에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도시생활을 1년한 후 경제적 뒷받침이 없어 공부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목표를 상실하였고 그를 지도할 사람은 주위에 없었습니다. 이 기간에 행실이 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더나아가 자신의 악행을 자랑하며 즐겼습니다. 후에 그는 고등 교육도 자신 속에 내재된 죄를 통제하지 못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다행히 로마니아누스라는 부유하고 관대한 사람이 그의 후원자가 되어 카르타고의 교육을 받도록 비용을 대주었습니다. 카르타고는 국제적인 대항구도시였는데 온갖 불법과 성적 쾌락을 추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17살이면 결혼을 해서 안주할 나이였지만 세상 출세을 추구하는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출세에 대한 야심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수사학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우월감을 가질 정도로 세상에서 성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적 갈등 속에서 그는 열정을 쏟을 대상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기간에 진리와 지혜를 열심히 찾고 이것들을 위해서 야심를 버리겠다고 결심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로마의 위대한 철학자, 정치가, 웅변가인 키케로의 사상에 심취되었고 '지혜를 연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으로' 보게되었습니다. 19살이 되던 때에 그의 부친이 죽었고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동거하는 여인을 얻게 되었습니다. 둘사이에는 아데오다투스(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카르타고의 3년 학교생활 후 수사학 교사로 귀향을 했습니다. 그는 키케로의 책 '호르텐시우스'에 심취되어 그 책을 강연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책에서 제기된 '행복으로 가는 탐구'라는 질문 때문에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번역이 잘 못된 라틴어 성경과 구약의 전쟁 역사를 읽는 그는 성경를 더 이상 탐구할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당시 카르타고에는 그리스도를 지혜의 원리로만 믿는 이성과 지성을 중시하는 마니교가 성행했습니다. 어거스틴같은 지식인이 매료당하기에 충분한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마니교는 자기의 죄를 변명할 수 있는 이원론적이고 구원이 지식과 깨달음에서 온다는 영지주위적인 종교였습니다. 그는 10년간 마니교에 심취되어 방황하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서 논쟁에 대한 열의와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는 순진한 고향 사람들에게 마니교를 가르쳐 신앙에 혼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귀향을 했지만 동거하는 여인과 아들 그리고 마니교를 가지고 갔으므로 어머니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모니카는 엎드려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기도를 해서 기도하는 곳마다 눈물로 적실 정도였습니다. 그 지방의 교회 감독은 마니교도로 자라 개종한 사람이라 모니카는 그에게 아들을 만나 줄 것을 거듭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만 기도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래도 불안한 모니카는 끈질기게 간절히 감독에게 애원하였습니다. 감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습니다. "안심하고 가세요. 이렇게 눈물로 빈느 아들을 잃어버릴리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우정을 잘 지켰습니다. 이 재능은 힙포의 감독으로 새인생을 살 때 공동체의 생활과 사귐을 통해서 복음 역사에 쓰임받았습니다. 그는 귀향 후 동갑내기의 절친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관심사가 동일한 둘은 매우 친밀하게 되었고 어거스틴은 친구에게 마니교의 이론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가 갑자기 열병에 걸려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고 살아났습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농담으로 생각했으나 친구의 신앙적인 단호한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며칠 후 이 친구는 열병이 도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친구를 아끼는 어거스틴에게 오랫동안 큰 슬픔이 되었습니다. 친구에 대한 슬픔을 잊기위해 그는 고향을 떠나 카르타고로 떬겼습니다. 그는 수사학 교사로서 상당한 사회적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카르타고에서 성공하고 새로운 생활을 접하면서 어거스틴은 영혼의 갈증을 잊었습니다. 그는 학문적으로 정치적으로 고위층 사람들과 사귐을 갖기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어거스틴은 수학과 천체의 징조에 관한 서적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들은 마니교의 중요한 소재였기도 하였고 당시 과학적 지식과 마니교의 주장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고민 끝에 마니교의 교주를 만나 궁금을 풀고자 했으나 핵심을 벗어난 화려한 미사여구식 답변에 실망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단순한 철학적 진리와 고상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과학적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니교의 모순을 과학적 사실로 증명할 수 있게 되자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공공연히 비난하고 배격하다가 29세에 마니교를 떠났습니다.
어거스틴은 절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고향을 떠났고 10년간 의지한 종교를 버림으로 방황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친구와 고위직 사람들에게 들은 말에 끌려 로마에 대한 동경심을 품었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로마로 떠났습니다. 로마는 학문과 문화의 발상지인 동시에 범죄와 폭력의 발상지이기도 하였습니다. 학생들은 예의가 바르고 온순했지만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사고방식으로 인간성이 삭막했습니다. 평생지기가 된 알리피우스를 만난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로마의 검투사 시합같은 퇴폐적 쾌락 문화에 빠져들어가는 그를 보고 고상한 이상과 확고한 의지를 가진 자라도 죄악된 본성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와 마니교에 혐오감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황제와 황사부 암브로스가 있는 밀라노의 수사학 교사로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마니교도들이 로마의 황제가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도록 보낸 전령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모든 신앙을 잃고 진리를 찾는 것에 절망을 느꼈습니다.
모니카는 남편의 유산을 정리하고 밀라노로 이사하여 어거스틴 곁에 왔습니다. 당시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버린 상태로 아직 진리를 붙잡지는 못했지만 마니교의 허위에서 벗어난 상태였습니다. 황제와 귀족을 상대하는 자로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 그는 법적 아내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15년간 동거하던 여인을 떠나보냈습니다. 그러나 결혼할 신부는 법적 결혼 연령에 못미쳤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2년간 동거할 새로운 여자를 맞이 했습니다. 밀라노에서 알리피우스와 네브리디우스는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알기위해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모니카를 중심으로 카르타고인들이 모여 자기 것이 없는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스를 만났는데 그는 어거스틴의 아버지같이 그의 인격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어거스틴보다 14살이 위였고 어거스틴 복음 사역의 본이 되었습니다. 암브로스는 훌륭한 선생이며 설교가였습니다. 또한 저술가이고 행정가이며 정치가로서 황제의 어머니에게 대항하여 기독교를 철저하게 수호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성령을 통한 성경 해석으로 율법과 선지서를 일관성있게 풀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과거 모순처럼 보이던 것들이 가장 이성적 진리였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설교에 빠져들었습니다. 마니교의 모순에 실망한 그는 성경의 진리에 들어가지 시작했습니다. 경건한 삶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일상 생활도 어거스틴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암브로스는 생활과 설교을 통해 금욕과 자제를 권면했는데 이것은 어거스틴의 정욕적 생활에 양심의 가책을 주었습니다. 이즈음 어거스틴은 마음에도 없이 황제와 귀족들을 칭송하며 시를 띫조리는 삶에 혐오감을 느껴습니다. 그는 암브로스를 통해서 사람의 구원의 길은 성경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암브로스는 플라톤의 철학으로 어거스틴이 이원론적 사고 방식을 벗고 일원론적 세계관을 가지도록 가르쳤습니다. 어거스틴은 내면의 죄욕구를 이길 수 없는 자신을 보면서 철학과 교육으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일한 고민을 한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5장과 7장은 그에게 영적인 깨달음을 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정욕의 쾌락을 포기하기 싫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게 순결을 주소서.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아직은 마옵소서." 갈등 속에서 그는 암브로스의 영적 아버지인 심플리키아누스와 상담했습니다. 심플리키아누스는 최고 의결기관인 로마 원로원의 수좌인 빅토리누스를 회심을 시킨 간증을 들려주어 어거스틴을 감동시켰습니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서 어거스틴은 시간이 날 때마다 교회에 들렀습니다. 그러다가 폰티키아누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성 안토니의 성결한 삶을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 간증을 듣고 회개를 미루는 자신를 발견하고 죄를 결단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때 어린 아이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집어 읽으라. 집어 읽으라." 그는 이 소리를 성경을 펴고 읽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여겨져서 가지고 다니던 바울의 서신서를 폈습니다. 로마서 13장 13, 14절이었습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믈 도모하지 말라." 그는 이 성경 말씀으로 쾌락을 즐기던 죄악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33세에 모니카의 기도대로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내적 여행은 철학과 종교와 과학을 거쳐 기독교에서 마쳤습니다.
회심한 어거스틴은 돈을 벌고 출세하려는 야심을 버리고 밀라노의 수사학 교사라는 직분이 신앙과 상충된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를 포기했습니다. 그는 시골로 내려가 요양을 하면서 여자문제를 깨끗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는 휴양지에서 친구들과 공동체를 이루면서 사색하고 글을 쓰면서 신앙 생활의 깊이를 더 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발전함으로써 글을 쓰고, 글을 씀으로써 발전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 기간에 "아카데미학파의 사람들에 대하여", "행복에 관하여", "질서에 관하여"란 3권의 책을 집필했습니다. 이 책은 공동체에 있었던 토론을 기초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는 신앙의 공동체가 지식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진리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진리는 혼자 사색하는 것보다는 토론과 교회의 교제를 통해서 더 잘 깨달을 수 있다는 것과 토론과 모임 후에는 되새기며 생각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과 여유를 반드시 가질 것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독백"이라는 책을 통해서 하나님안에 있는 생명과 삶을 깨닫고 은혜의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어거스틴은 휴양을 끝내고 영적 아버지인 암브로스에게 돌아갔습니다. 암브로스는 세례를 주기 전에 초대 교회의 사도들의 신앙을 그에게 가르쳤습니다. 많은 성도들의 축복 속에서 그는 아들과 친구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 어거스틴은 매일 교회에 나가 암브로스의 말씀 강해를 들으며 은혜에 깊어 졌습니다.
어거스틴은 친구들과 가족과 상의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 신앙 공동체를 세우자는 합의를 하였습니다. 귀향 중에 모니카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아들아, 이제 네가 세상이 줄 수 있는 행복을 쳐다보지도 않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보았으니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셨고 그 외에 많은 것을 더 들어 주셨다." 어거스틴은 이제 어머니도 없고 세상의 지위도 없고 아내도 없는 상태로 고향에 도착했습니다. 어거스틴을 중심한 공동체는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공동체로 성장해서 훌륭한 신앙인들을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절친한 친구 네브리디우스와 아들 아데오다투스가 다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와 공동체를 창설했던 친구들은 한 교부을 섬기는 감독이 되어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계속 지켜보면서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공동체 생활을 조직화하며 확고한 기초를 다졌습니다. 그리고 성경과 명상과 연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그가 일생동안 추구한 철학과 학문을 두 번째로 떬겼습니다. 그리고 "참종교에 대하여"라는 책으로 플라톤이 추구했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했다는 것을 주장하고, 당시 번성하던 마니교를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신도로 살기를 고집해서 40세까지는 감독이 없는 도시는 절대 심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구원하고 신앙 공동체를 건설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힙포에 갔다가 뜻하지 않게 그 곳의 감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침에 평신도 였다가 점심에 성직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힙포는 카르타고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는데 마니교에 의해 장악이 되어 기독교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도나투스주의도 기독교를 위협하는 큰 위험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성직자가 되자 힙포에 수도원을 세우고 임박한 영적 전투를 위해 성경 연구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힙포의 감독은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지도력과 전도에 열심을 부리지는 않았습니다. 이단에 대한 그의 대체는 소극적인 행정적 조치에 불과했고 이단 종교들은 계속해서 세를 확장해갔습니다. 논쟁에 익숙한 마니교도들은 힙포의 감독과 어거스틴을 공개 토론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토론회에서 승리하여 마니교를 추방했습니다. 또 다른 이단인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도 공개 토론회를 제의했지만 그들이 피하자 어거스틴은 그들의 전도방식인 유행가를 이용하여 그들을 몰아냈습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개혁을 위해서 아프리카 교구의 총회에서 '바른 신앙과 바른 삶'에 관해 발표하여 교회 지도자들의 중심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어거스틴 수도원"을 세워 북아프리카 교회의 10명이나 되는 감독을 양성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북아프리카의 기독교는 강성해졌고 이단들을 몰아내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41세에 힙포의 감독이 되어 34년을 봉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 양무리에게 유익을 주려는 자세로 봉사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여행을 아주 싫어 하였는데도 교회 모임과 심방에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감독들은 국가 고위 관리와 면담하고 지방 유지들과 모임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사소한 행정보다는 성경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신앙적인 권면을 하였습니다. 그는 점차 신앙인들과 그 사회에 영향력을 끼쳐갔습니다.
어거스틴은 공동체 생활에서 힘을 얻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공동체 생활은 그에게 활력을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10년의 공동체 생활 끝에 "어거스틴의 규칙"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신앙공동체 생활의 원리를 정리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설교에 전념하는 것과 저술에는 양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단과의 싸움에서 논쟁을 주로 사용하였고 논쟁에 일생을 바쳤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논쟁을 이용한 것은 로마 시대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의 문화가 논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문화를 이해했고 문화를 통해서 복음을 수호하고 전파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책은 신앙 생활과 복음 수호하기 위해서 발생한 실질적인 도전과 의문에 대한 진지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순수 복음을 수호할 뿐 아니라 반대자들을 설득하고 개종시키기 위해 열정으로 쓴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목소리가 작았지만 수사학 교사로서 웅변을 배웠기 때문에 훌륭한 설교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든지 할 수만 있다면 설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설교를 단순한 메시지로 그치지 않고 훈련된 제자가 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가르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며 설득하는 것은 승리하는 것이다." 양들이 말씀에 순종하도록 돕는 것이 그리스도가 승리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이 말씀과 영적 세계를 쉽게 이해하도록 그들이 알고 있고 경험한 것을 예로 설교하려고 노력했으며 사람들의 소망과 마음에 말씀을 심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와 도나투스주의자들을 물리치고 로마는 그들을 유혈진압하여 비참한 종말을 맞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결말에 회의를 느끼고 논쟁보다는 저술에 관심을 가륵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친구의 아들 율리안이 반대편에 서서 그를 반박할 때 교회를 위해서 끝까지 싸워 논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속에서 자신의 허물과 사역에 지쳤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더욱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 "본성과 은혜", "은혜와 자유 의지"을 통해 하나님의 설비와 경륜을 통한 전적인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거스틴은 나이가 많아 허약해지고 후계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기간에 자신이 출간한 책들을 개정하며 서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심려하지 않도록 기도하는 가운데 75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거스틴은 본래 약한 사람이었으나 은혜로 강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야심과 정욕으로 얼룩져서 좋지 못한 성품을 가졌으나 은혜로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은사로 받은 열정적인 성향이나 논쟁을 즐기는 성향은 회심 후에 오히려 하나님의 복음을 확장하고 수호하는데 쓰여졌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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