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선교사! 목회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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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아들 2015. 12. 30. 18:55

설교의 역사

 

 


A. 서론

설교자가 설교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그의 설교 사역과 설교에 대한 자세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져야 한다. 이제 목회자이며 설교자이고 종교개혁자였던 칼빈을 살펴보면서 칼빈이 인식한 설교와 설교자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의 실제 설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은 종교개혁당시 교회의 개혁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임에 틀림없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와 신구약 주석을 통해 신학자로서, 주석가로서 널리 공헌하였다. 그리고 이 문서들이 종교개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설교가로서의 칼빈보다는 신학자요 주석가이며 행정가로서의 칼빈을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역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설교사역이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보통 격주로, 주일에 두 차례(신약과 시편에 관하여) 그리고 주중에도 거의 매일 설교를 하였다. 그는 불어로 설교를 하였다. 목회자가 없는 교회에서는 자주 그의 설교를 강단에서 낭독하곤 하였다. 이렇게 그의 설교사역은 중요한 부분이었다.
설교 없는 종교개혁은 상상 할 수 없다. 종교 개혁은 올바로 말씀선포에로의 회귀였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입"이 되어 종교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칼빈과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과연 그의 설교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시대와 문화가 바꾸어도 하나님 말씀과 인간의 타락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여전히 진리이며, 인간은 여전히 타락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나 오늘날이나 본질상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설교를 살펴서 그의 설교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으며, 설교자로서 그는 무슨 말을 했는지를 살펴보아서, 오늘날 설교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되돌아보자(Reflection)는 것이다.

B. 본론

1. 칼빈의 설교자(목회자) 직분에 대한 인식

1) 하나님을 대표하는 설교자
교회의 권위에 있어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를 다스리는 유일한 권위라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 강요 4권 3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교회를 지배하시며, 교회 안에서 권위를 또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셔야 한다. 그리고 이 권위는 그의 말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고 전제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눈에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은 그의 이 권위를 사람들의 봉사를 통해 이루신다"고 말했다. 설교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목사의 직분은 영광스러운 직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칼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먼저는 우리에게 대한 관심을 표명하심인데 사람들을 택하여 자기의 사자(고후 5:20)가 되게 하시며 그의 비밀한 뜻을 해석하게 하시며 하나님을 대표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사람들의 겸손을 위한 훌륭하고 유익한 훈련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위와 같은, 때로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권위 있는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가 그 말씀에 복종하는 습관을 가지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의 지혜를 약한 질그릇에 숨기신 것은(고후4:7) 우리가 얼마나 그 보화를 귀중히 여기시는가를 시험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임명된 한사람의 목사를 통해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제자로 부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하여 교육을 받아 한 끈으로 교회를 묶어서 연합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2) 사도의 계승자인 설교자
칼빈은 "현대의 교사들(신학교수들)은 고대의 선지자들에, 그리고 목사는 사도에 해당한다고 했다. (기독교 강요 4권 3장 5) 그는 '사도'라는 말은 원래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뜻인데 교회의 사역자들은 주께서 자기의 사자로서 파견하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물론 예수의 12사도와는 다른 것이다. 목사가 사도와 같은 책임을 맡았다는 것은, 주님이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세례를 주어 죄사함을 얻게 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오늘날의 목사들이 동일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도는 전 세계를 위해 활동했지만 목사는 각각 자기가 맡은 양떼를 위해 일을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사도와 동일한 직분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칼빈은 설교자, 즉 오늘날의 목사를 사도의 계승자로 보았던 것이다.

2. 설교에 대한 칼빈의 인식

1)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
칼빈은 복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고 선언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기가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연장을 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이 복음 전할 때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의 입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고, 하나님은 그 도구를 사용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왜 인간을 통하여 말씀하시는가? 그 이유는 우리에게 대한 자신의 관심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의 겸손을 위한 유익한 훈련이 된다는 것이다. 흙에서 나온 보잘것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 설교자가 우리보다 나은 점이 없을지라도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겨 배우는 태도를 보인다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을 가장 잘 증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도구로 사용하시어 자신의 말씀을 선포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도 자신을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교에 대한 인식은 모든 믿는 자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구원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2) 성례전의 신비와 동일한 신비로운 설교
칼빈은 설교자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 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 동안 성령께서 계속 감동할 여지가 있어야 함을 확고히 믿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오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하거나 역사함 없이, 도는 믿음으로 오지 않는다면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와 조명이 없이는 말씀에 성실한 설교일지라도 청중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와 같이 성령의 내적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회개와 같은 은사도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통이 없는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회개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설교는 그 자체로서는 듣는 이들을 변화시킬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성례전에 대한 그의 교리와도 통하는 견해이다. 성례전에서 주님의 은총이 임하듯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것이다. 성례전의 떡과 포도즙은 객관적 실체로서 그 자체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 그러나 믿음으로 참례하는 자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주님이 약속하신 실재(예수의 피와 살)을 먹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교자의 설교를 청중이 믿음으로 받을 때 성령의 역사에 의해 주님이 약속하신 구원에 이르게 되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칼빈은 성례와 설교가 기록된 말씀에 의존해야 하지만, 둘 다 성령의 은혜로운 임재로 채워질 때에만 실재적 은혜의 방편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3) 구원과 심판의 이중 음성의 설교
칼빈에 의하면 설교에는 두 가지 목소리가 있어야 하는데, 첫째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온유한 음성이고, 둘째는 이리와 도둑을 몰아내는 뇌성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설교에 대한 그의 이 두 번째 견해로 인하여 죄인들과 다른 설교자들에게까지 반발심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그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라는 복음 설교를 해야 되는 것이지,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려 들면 무익한 일이 된다고 하였다. 선하고 진실한 목자는 성경을 간신히 해설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덕을 주기 위하여 진지하고 분명하게 성경 말씀을 사용해야 한다.
이와 같이 칼빈은 설교자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 자신은 그 말씀을 변개할 수 없고 청중은 그 말씀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교인들의 취미와 즐거움에 영합하여 자기 인기를 위해 온전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이 들어서 모나지 않는 설교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에게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고 설교자의 설교를 비판이나 하고 경청하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며 거절하는 자임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도구로서의 사명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3. 칼빈의 설교 연구
칼빈은 위와 같은 설교자와 설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설교 사역을 이루어 나갔다. 그의 설교 내용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1) 성경을 그 본래 의미를 간결하고 분명하게 전달하려고 했다.
종교 개혁 초기의 사역 자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철저히 아는 것을 제 일차적 임무로 삼았다. 말씀을 전하는 그들의 태도 자체가 이 일을 불가피하게 했던 것이다. 그들의 제일차적 참고 자료는 성경이었다. 성경 강화가 그들의 설교였다. 칼빈도 예외는 아니었다. 칼빈은 그의 주석의 원칙을 명료성과 간결성에 두었듯이 설교에서도 이 원칙을 따르려 노력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성경을 강해 하는 것으로 그의 설교를 삼았다. 칼빈은 연속적 강해를 했기 때문에 특별한 서론이 없이 지난 번 강해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는 것으로 서론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설교를 할 때 미리 정한 어떤 순서를 따라 하지 않고 본문의 말씀이 놓여진 순서를 따라서 해 나갔다. 그래서 어떤 주제나 제목을 잡지 않았다. 따라서 한 설교에 여러 개념들이 설명되고 있다. 그는 대지를 구분하는 식으로 설교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고 설명하여 성도들의 삶에 적용토록 호소하였던 것이다.

2) 칼빈은 성경 중심의 설교를 했다.
시대적 상황을 성경 말씀으로 조명하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 설교의 주요 원천이 성경이나 신조가 아닌 매일 발행되는 신문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문제이다. 국제적 회의의 논문이나 특별한 사건들이 설교의 소재가 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며, 이러한 사건을 설교에 적절히 섞어 넣는 것이 유능하고 시사에 밝은 설교자가 선호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종교 개혁 초기의 사역 자들은 성경 연구를 철저히 하여 설교를 준비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이 일차적 참고자료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 후 17세기에는 설교의 주 자원이 그들의 교의와 신조였다. 성경이 무시된 것은 아니었으나 다시 수사학이 설교의 구조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성경이나 신조가 아닌 시사성 있는 문제나 일간 신문, 잡지의 기사 등이 설교의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칼빈은 상황에 따라 설교하지 않았다. 그래서 칼빈은 특정한 절기의 설교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최고의 본문으로 삼고 상황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대와 상황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죄인 된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상황이 설교를 좌우하는 경향이 있으나 칼빈은 성경 말씀으로 상황을 극복해 나가도록 했던 것이다.

3) 칼빈은 하나님 중심의 설교를 했다.
칼빈의 설교는 항상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섭리를 확신하는 설교를 하였다. 하나님은 설교자를 위한 권위요 동기일 뿐만 아니라, 모든 설교의 자원과 대상이요, 모든 설교의 중심적인 요점이다. 하나님은 성삼위적 충만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매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계신다. 루터는 매우 의도적으로 성경의 매 대목을 강해 할 때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았다. 루터가 그리스도를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설교한 반면에 칼빈은 성삼위 구속주 하나님을 보다 더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설교를 했다. 그래서 칼빈은 복음을 제시할 때 하나님 중심적으로 복음을 제시했다. 칼빈은 교회 중심의 로마 교회체제를 배격하였다. 또한 사람 중심의 자유 사상가들의 철학을 배격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성삼위의 제 2위격이나 제3위격에만 초점을 맞추어 강조하려는 종파들의 잘못된 경향을 논박할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칼빈은 성령을 중심 삼는 종파는 치명적인 주관주의로 빠져 들어가는 제 일보를 내 딛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는 것도 휴머니즘에 가까운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칼빈은 모든 영광스러운 충만함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만을 설교의 중심으로 삼고 있었다.
이런 하나님 중심의 설교의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강조에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는 것은 마음의 주림을 채워 주는 근본인 것이다. 상처받은 상한 심령을 치료해 주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의 궁극적인 차원은 계시된 뜻이라기보다는 계시되지 아니한 뜻이다. 이러한 관점이 드러나지 아니한 칼빈의 설교는 거의 없다. 칼빈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것들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다루시는 모든 행사의 모든 궁극적 비밀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은 고통 당하는 심령들에게 주권 적인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게 가지고 계신 비밀스러운 목적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처럼 좋은 위로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 칼빈은 문답을 사용하여 청중의 이해를 돕는 교육적 설교를 했다.
칼빈은 그의 설교에서 자주 질문을 사용하였다. "그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하면서 강해를 해 나갔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설교를 교육적 효과가 극대화 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이런 질문을 통해 문제를 좀더 확대해 나가거나 심층적으로 다루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청중들이 설교에 지속적으로 집중하도록 유도하였으며, 청중들이 알아듣고 이해하기까지 반복적인 설명을 계속하였다. "다시 말하면, 왜냐하면, 좀더 설명하면, 바꾸어 말하면"과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하였다. 따라서 칼빈의 문자화된 설교에는 한가지 요점에 대하여 설명한 후 그 요점에 대하여 다른 방식으로 재설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반복설명을 할 때 청중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했으며,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자신의 재능을 다 사용하면서 힘을 썼던 것이다. 칼빈은 자신의 청중들이 충분히 깨달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질문과 함께 여러번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C. 결론

칼빈의 설교는 성경의 충실한 해석과 적용이었다. 그의 설교는 설교자로서의 자기 인식과 설교에 대한 성경적 확신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정확한 뜻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칼빈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이며 그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고한 신앙 위에 서 있었다. 그는 도한 설교란 성경이 충실히 그 본래의 의미를 찾아 설명되어지고 가르쳐질 때 하나님의 귄위를 갖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성경 강해설교를 최고의 설교라고 인식했다.
설교자가 자기 인식 없이는 설교 사역의 변혁도 없는 것이다. 설교자의 자기 인식과 설교에 대한 칼빈과 같은 개혁자의 인식을 재발견하는 것은 오늘날의 설교 사역을 새롭게 변혁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설교사역에 대한 회의가 일고 있다. 설교에 대한 확신이 사라져 가고 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 자라는 인식이 불분명해 가고 있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성도들 중 누가 들어도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한 원만한 설교를 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이런 시대일수록 개혁자 칼빈의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땅에 설교자가 자신과 자신의 설교가 현재 어떠하며, 앞으로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Reflection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설교는 하나님께서 설교자라는 도구를 통하여 하나님자신이 하나님 자신의 뜻을 선포하신다는 분명한 인식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 참고서적**
1. 죤 칼빈, 엄성옥 역, 요한 칼빈의 설교집(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은성, 1989.
2. 박건택 편저, 칼빈과 설교, 도서출판 나비, 1988.
3. 로날드 윌리스, 이종태 역, 칼빈 신학의 이해, 생명의 말씀사, 1991.
4. 죤 맥아더외, 김동완 역, 강해 설교의 재발견, 생명의 말씀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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