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인 설교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조리있게 잘 표현하여, 앙떼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끼치는 것이다. 위의 정의에는 (1) 하나님의 말씀, 즉 설교의 내용과 재료가 무엇임을 보여주고, (2) 조리있게 잘 표현한다는 것은 설교의 내용과 재료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방법을 말씀하고, (3) 양떼들의 마음에 감동을 끼친다는 것은 말씀을 조리있게 잘 전한 결과 또는 효과가 어떠하여야 함에 대하여 말한다.
1. 영원한 설교 자료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
설교자로서 설교의 자료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느냐?하는 문제는 심각한 문제다. 설교자는 누구나 다 이 설교의 자료를 어디에서 구하느냐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들을 하고 있다. 우리가 설교 재료를 얻을 수 있는 근원은 바로 '성경 '이다. 성경이야말로 다른 어떠한 일이 없더라도 오직 그곳에서만 설교 자료를 취할 수 있는 근원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성경만이 근본적이며 영원한 설교 자료의 근원이 될 수 있는가? 성경 본문을 수없이 읽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설교자는 성경을 수없이 읽어야 한다. 설교자 자신이 성경 본문을 수없이 읽어야 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성경 본문을 많이 읽는다 하더라도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영안을 밝혀 본문 속에 숨어있는 성령님의 숨은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성경 본문에 인쇄된 글자 밖에는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은혜 주셔서 우리의 영안을 밝혀주시는 때에는 인쇄된 글자 속에 숨어 있는 성령님의 숨은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면 전에는 수백번을 읽으면서도 그대로 지나가던 본문인데 그 본문의 인쇄된 글자 속에 숨어있는 숨은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본래 계시의 말씀은 주님께서 은혜로 보여주셔야만 깨달아 알수록 되어져 있다. 누가복음 24장 16절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저희 중 두사람'이라고 했으니 예수님과는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지내던 사람인 것은 틀림없다. 예수님을 잘 아는 두사람이었는데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25리 되는 길을 걸어가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동행하시나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하였다. 평소에 잘 알고 있던 예수님, 더구나 25리나 되는 길을 예수님께서 가까이 동행하셨는데 어찌하여 예수님이신 줄 몰랐을까? 그 이유는 그들의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에 그러했다고 한다. 평소에 잘 알고 있던 예수님, 25리나 되는길을 예수님과 더불어 가까이 동행하면서도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니 눈이 가리워진다는 사실이 얼마나 불행한가? 그러나 31절에 보니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았다는 말이 나온다. 25리를 가까이 동행하면서도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한 두사람이 저희 눈이 밝아질 때에 비로소 예수님이신 줄 알게 되었으니 우리의 눈을 밝혀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들이 성경 본문을 아무리 많이 읽는다고 하여도 우리의 눈이 가리워져 있는 한 본문 속에 숨어 있는 성령님의 숨은뜻은 볼 수 없다. 언제고 간에 성령님께서 우리의 눈을 밝혀주시는 그때에라야 비로소 본문 속에 숨어 있는 성령님의 뜻을 볼수 있다.
우리가 성경 본문을 수없이 읽어 나가다가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안을 밝혀 보여주시는 말씀, 즉 본문의 인쇄된 글자속에 숨어 있는 성령님의 숨은 뜻이 바로 우리 설교의 자료가 되는 것이다. 이 자료를 일컬어 '기본자료'라 한다. 그 이유는 나중에 설교를 작성할 때에는 이 기초 자료를 토대로 주석이나 신학서적을 참고하여 살을 붙일 수 있으나 설교의 기초가 되는 자료, 마치 건물에 비하면 골조공사에 해당되는 기초 자료는 성경 본문에서 나와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 본문을 보다가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안을 밝혀 보여주시는 이 기초 자료라 나을 때마다 노트에 차례로 적어 놓는다. 그러다가 후에 설칠를 작성할 때에는 과거에 적어 놓은 것 가운데서 마음에 드는 어느 하나를 골라서 살을 붙여 설교를 작성한다.
호랑이를 설명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그림책 속에서 호랑이를 보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겠고, 어떤 이는 동물원에 가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호랑이를 보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이다. 후자는전자보다 좀더 실감나게 설명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심심산골 험한 골짜기에서 호랑이와 더불어 일대 일로 맞닥뜨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하자. 그 사람의 호랑이 설명은 누구보다도 가장 실감날 것이다.
잠언 17장 24절에 지혜는 명철한 자의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을 얻으려면 얻을 수 있는 자가서 얻으라는 말씀이다. 지혜는 명철한자의 앞에 있으니 지혜를 얻으려면 명철한 자에게 가야 하는데 미련한 자는 지혜를 찾을 수 없는 땅 끝에 가서 지혜를 찾는 헛수고를 한다는 말이다. 설교 자료를 얻으려면 성경 본문에 가야 한다. 성경 본문 아닌 엉뚱한 곳에서 설교 자료를 찾으려고 하다가 고생은 고생대로하고, 시간은 시간대로 보내고, 헛탕치는 불쌍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2. 짜임새 있는 설교를 조직하는 법
설교의 재료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설교가 되도록 조직을 바로 해야 하나의 설교가 된다. 설교의 조직은 ①대지를 어떻게 가르는가? ②전개를 어떻게 하는가? ⑦서론, 결론을 어떻게 하는가? ④ 데지의 내용을 어떻게 메우는가? ⑤설교의 분량을 어느 정도로 하면 되겠는가 따위의 문제가 고려된다.
(1) 성경의 결을 따라 대지를 가른다.
설교의 대지를 어떻게 가르는가? 성경 본문이 갈라주는 대로 갈라짐을 받아야한다. 설교의 대지는 순전히 성경 본문이 대지를 갈라주는 대로 받아야 한다. 설교자 자신이 제멋대로 대지를 가를 아무런 권리도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성경 밑에 있어야지 인간이 성경 위에 올라설 수는 없다. 성경 본문을 무시하고, 성경 본문에 근거 없는 대지를 설교자 자신의 주관대로 갈라서는 안 된다.
설교할 때 꼭 대지를 갈라야 하는가, 가르지 않아도 되는가의 문제도 성경 본문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성경 본문이 대지를 갈라주면 대지를 가르고, 성경 본문이 대지 없이 된 본문이면 대지 없이 해야 한다. 성경 본문이 대지를 둘로 갈라 주면 두 대지로 갈라야하고, 성경 본문이 대지를 셋으로 갈라주면 세 대지로 하고, 성경 본문이 대지를 다섯으로 갈라주면 우리도 다섯 대지로 갈라야 한다. 바위가 제멋대로 생긴것 같지만 그 바위의 결이 있듯이 성경에도 대지의 결이 있다. 이 바위에 있는 결은 창조 후 몇 백년이 지난 뒤에 어떤 사람이 만들어 넣은 것이 아니라 창조 때부터 그렇게 되었듯이, 성경 속에 있는 대지의 결도 기록된 후 얼마 후에 어느 사랍이 넣은 것이 아니라 성경이 기록된 때부터 아예 되어 있는 결이다. 이 바위들은 결을 따라 깨어야 바위가 쉼게 또한 깨끗이 깨어지듯이, 우리가 대지를 가를 때에도 이 성경 속에 이미 박혀 있는 결 그대로 대지를 갈라야 한다. 산맥에는 광맥이 있다. 그러고 이 광맥은 창조 때 이미 되어 있는 광맥이지 창조 후 어느 사람이 만들어 넣은 것이 아니다. 광산업자는 창조 때부터 이미 산속에 박혀 있는 광맥의 줄기를 바로 찾아가며 광석을 캐어야지 제멋대로 아무데나 가서 캐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성경 속에 이 성경이 기록될 때부터 아예 그속에 대지의 팡맥이 박혀 있는데, 설교자는 성경이 기록될 때부터 성경 본문 속에 박혀 있는 이 대지의 광맥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대지를 갈라야 한다. 우리가 개울을 건너갈 때에는 징검다리를 꼭 밟고 건너야 한다. 징엄다리가 두 개이면 두개를 밟고, 징검다리가 세 개이면 세 개를 밟고 건너야 한다. 징검다리가 없는데 내 멋대로 적당히 밟고 가면 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갈 수 있는 한계는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는 거기까지 가야지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는 그 이상은 한 발자국도 더 갈수 없다. 우리가 대지를 가를 때에는 성경 본문이 대지의 징검다리를 놓아주는 그대로 밟고 나가야 한다. 성경 본문이 대지의 징검다리를 두개 놓아주면 우리 설교의 대지도 두 발자국 내딛고, 성경 본문이 대지의 징검다리를 네 개 놓아주면 우리 설교의 대지도 네 발자국 나가야 한다. 성경 본문이 대지의 징검다리를 놓아주지 않는데 설교자 자신이 제멋대로 강물에 빠져가면서 걸어가서는 안된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본디 성경 본문에 놓여져 있는 대지의 징검다리를 따라가야지,
징검다리의 한도가 끝났음에도 내 멋대로 물에 빠져가면서까지 대지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2) 내용 전개는 분명하게
설교의 내용을 어떻게 전개시키는가? 선명하게, 분명하게 전개시켜 나가야 한다.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안에서 말하노라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전하지 않고 순전하게 전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무슨 말씀인지 선명하게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직설적으로 전개한다
'직설적 '이란 뜻은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에 한길로 곧게 가지 못하고 이리 구불 저리 구불 하면서 우왕좌왕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마치 캄캄한 밤에 반짝이는 유성같이 한 설교에서는 한 가지 진리를 선명하게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캄캄한 밤에 유성을 본다. 캄캄한 밤에 유성이 얼마나 선명한가! 캄캄한 밤의 유성은 운무가 아니다. 운무는 분명치 않고 희미하다. 우리의 설교가 운무처럼 희미해서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고 갈피를 잡을 수 없게 표현되면 안 된다. 꼭 캄캄한 밤의 유성같이 내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어떠한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들어도 다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도록 선명하게 말해야 한다. 우리의 설교는 마치 북경에서 출발하여 천진까지 직행으로 달리는 고속도로의 차들처럼 직설적으로 설명이 전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북경서 천진을 향하여 직행으로 달리던 차가 형편 따라 고속도로를 벗어나 이 지방 저 지방의 골목으로 드나들면 안되듯이, 우리의 설교가 한길로 곧게 나아가지 못하고 어느 골목으로 전개되어 나아가는지 분간할 수 없게 되면 안 된다. 화살이 여기 저기 들렀다 가는가? 그렇지 않다. 시위에 퉁긴 화살은 표적을 향하여 직선으로 '날아간다. 화살이 여기저기 들르지 않고 표적을 향하여 직선으로 날아가듯이 우리의 설교도 여기저기 들렀다 가지 않고 그 설교가 목표하는 표적을 향하여 선명하고 분명하게 직선으로 전개되어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설교를 가게에 비하면 마치 시시한 물건을 조금씩 다 갖다 놓고 파는 구멍가게 같아서는 안 된다. 그런 상점에는 웬만한 물건이 다 있다. 일용품 치고 별로 없는 것이 없다. 그러나 물건 한가지만을 전문으로 도매하는 도매상처럼 어떤 물건 한가지만을 깨끗하게, 굵게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우리의 설교가 구멍가게처럼 시시한 물건은 이것저것 다 갖추어 있으면서도 한편의 설교에서 어느 한 가지 내용만을 굵고 깨끗하게 표현하는 도매상 물품이 못된다면 그 설교는 실패이다.
우리의 설교를 음식에 비하면 일품 요리를 만드는 전문음식점이 돼야 한다. 이 음식 저 음식 조금씩은 다 만들지만 이렇다 할 특색있게 내놓을 만한 음식을 못 가진 대중식당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중식당은 어느 음식이고 거의 다 만든다. 그러나 그 음식점을 대표할 만한 특색있는 음식은 없다. 반면에 전문음식점은 어느 한가지 음식이라도 그 집의 명예를 걸고 내놓을 만한 특색있는 음시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설교가 이 음식 저 음식 조금씩은 다 들어 있는 대중식당이 되어서는 안되고, 어느 한 설교에서는 그 설교만이 표현하는 한 가지 진리를 굵고 선명하게 표현하는 전문음식점이 되어야 한다.
2) 떠벌리지 않는다.
설교를 '직설적으로 유성과 같이 선명하게 전개시키라'는 말을 달리 말하자면 설교의 전개를 '떠벌리지 말라'는 말이다. 떠벌리는 것은 위에서 직설적 전개의 정반대이다. 설교의 대지가 마치 첫째 대지는 상해로 내려가는 것 같더니 길림성으로 뻗어 올라가고, 둘째 대지는 하얼빈으로 올라가는 것 같더니 위해로 내려와 도대체 설교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사방에 떠벌려 놓으면 안 된다.
성경 본문을 무질서하게 나열시킨다고 해서 본문설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 본문을 이리 저리 떠벌리지 말고 질서있게 정돈시켜야 바로 본문 설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3) 통일성있게 집중시킨다.
설교를 '선명하게 전개시키라'는 말을 또 다른 면에서 말하자면 모든 대지는 제목을 중심으로 '통일성 있게 집중시켜야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경우와도 정반대이다. 위에서는 대지를 여기저기 떠벌리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설교의 모든 대지는 그 설교의 제목을 중심으로 통일성있게 집중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첫째 대지도 제목을 향하여, 둘째 대지도 제목을 향하여 통일성있게 집중되어야 한다. 마치 우리가 렌즈를 통하여 태양 광선을 한 초점으로 모아 야만 천에 대면 불이 나서 구멍이 뚫리듯이 설교의 대지의 모든 광선을 '제목'이란 한초점으로 집중시켜 '제목'이란 한 초점에서 구멍이 뚫어져 불이 붙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대지의 광선들이 각기 자기 나름대로 여기 저기 흩어져 '제목'이라는 한 초점으로 모이지 못하면 안 된다.
4) 대·소지를 복잡하게 가르지 않는다
'선명하게 전개 시키라'는 말을 대지를 가르는 실제적인 면에서 한 대지 안에 여러 소지를 둔다든가, 그 소지 안에 또 작은 소지를 둔다든가 하여 설교의 대지를 잘 분간할 수 없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설교는 어린이에서 팔순 노인까지 다 알아들어야 할 대중성을 띤 것이니 가능한 한 대지 구분은 단순하고 선명해야 한다. 성경 본문 자체가 대치를 그렇게 갈라주는 때에는 할 수 없으나, 그래도 대지를 가르는 실제적인 면에서 본문이 제시하는 대지 구분에 저촉됨이 없이 설교자 자신의 기교에 따라 대지 구분을 단순화할 수 있는 것이다.
(3) 효과적인 서론과 결론
설교에 있어서 서론과 결론은 효과를 나타내는데 필요하다. 그러나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는 서론과 결론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니고, 경우에 따라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때에는 서론 정도는 도리어 생략하는 편이 낫다. 효과면에 있어서 결론은 거의 빼놓을 수 없으나 서론은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때에는 백 번 빼도 좋다. 설교할 때 너무 서론의 종이 될 필요는 없다. 서론의 목적은본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다리를 놓아주는 일, 또는 본론의 구미를 돋우어 주기 위한 자극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본론의 내용이 어려워서 그 본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설명해주는 예비 설명, 즉 본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서론이다. 그리고 본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예비 지식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때라도 본론에 대한 흥미나 구미를 돋우어주는 자극을 일으키는 면에서 서론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두가지가 필요 없을때, 즉 본론이 쉬워서 서론의 예비 설명이 없어도 잘 이해되는 때와, 본론의 흥미나 구미를 돋우어 주지 않아도 될 때에는 서론은 언제라도 생략할 수 있다. 예비 설명인 서론이 없어도 본론이 쉽게 이해되는 경우, 본론의 흥미를 돋우어주는 자극적인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는 때에는 서론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설교를 작성 할 때에 있어서 너무 서론의 종이 될 필요는 없다.
'결론'이란 본론에서 설명한 진리를 간추려서 재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이 본론과 다른 내용이 나을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설교는 본론에서 설명한 진리와 전혀 다른 내용을 결론으로 내세우는 일이 있다. 본론에서는 노랗다고 실컷 설명해 놓고 결론에서는 빨갛다고 강조하거나, 본론에서는 희다고 설명해놓고 결론에 와서는 검다고 강조해서는 안 된다. 본론에서 노랗다고 설명했으면 결론에 와서는 '그러니 과연 노랗지 않느냐'하고 본론에서 애써 설명한 노란 사실을 결론에서 재 강조하고, 본론에서 희다고 설명했으면 결론에 와서도 '그러니 과연 희지 않느냐'고 본론의 진리를 간추려서 재 강조하는 것이 결론이다.
그런데 이 서론과 결론을 만드는 데 있어서 서론과 결론의 내용을 다른 어떤 말보다도 성경의 내용으로 하면 더 좋다. 보기를 들자면, 가령 '하나님의 위로'에 대하여 설교한다고 하자. 서론을 소개할 때에 다른 어떤 말보다도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라는 전도서 4장 1절의 말씀과,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흘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라는 시편 69편 20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세상에서는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해 줄 자가 없으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된 인자를 두려워하느냐?라는 이사야 51장 12절 말씀을 인용하여 우리를 진정 위로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라고 서론을 전개하면 다른 어떤 말로 서론을 전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게가 있고 가치가 있지 않은가. 결론을 맺을 때에도 다른 어떤 말을 빌려오는 것보다 성경 구절을 가지고 맺는 것이 더 좋다. 가령 우리가 주님을 섬기자'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고 하자. 주님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다 설명을 하고 난 뒤에 사람이 나(예수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신 요한복음 12장 26절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으면 다른 어떤 말을 빌려다 결론을 맺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고 무게가 있다.
(4) 대지의 내용을 어떻게 메우는가.
성경 본문이 대지를 갈라줄 때에는 대지를 세우고 설교하고, 성경 본문이 대지를 갈라주지 아니할 때에는 대지 없이 그대로 설교를 한다. 대지를 세우고 설교할 때에는 그 대지의 내용을 메우게 되고, 대지 없이 설교할 때에는 그 설교 자체의 내용을 메우게 되는데 대지 또는 설교 자체의 내용을 무엇으로 어떻게 메우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아마 이 문제는 설교학의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문제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대지 또는 설교자체의 내용을 무엇으로 어떻게 메우느냐에 따라서 설교의 평가가 거의 좌우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대지의 내용을 메우기 위하여 예화집이나 잡지나 기타 다른 문헌에서 그 대지의 내용을 메을 만한 내용을 찾는 것도 할 수는 있는 일이겠으나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는 그 대지의 내용들 보충 설명해주는 성경 구절로 메우는 것이 제일 좋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경 구절 아닌 다른 문헌들(예화집이나 신문 등)에서 재료를 찾는 수도 있겠으나 우선은 성경 구절로 메우는 것이 제일 건전하고, 더구나 교인들에게 성경 지식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데 도움이 크다. 대지의 내용을 성경 구절로 메우라고 주잘하면 어떤이들이 설교하는 데 있어서 예화를 전혀 안쓰는가? 하고 질문할지 모른다. 필자의 말은 성경 구절로 메우는 그것이 바로 예화라는 말이다. 예화가 무엇인가? 어떤 진리를 알기 쉽게 풀이하여 비유로 설명해주는 것이 예화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예화집에서 끌어와야만 예화가 되고, 성경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성경 구절 자체나 성경에 있는 이야기로 비유하면 그 재료가 단지 예화집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죄목( ? )때문에 예화가 될 수 없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어떤 진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 진리를 알기 쉽게 풀이해서 설명하기 위한 예화라면 그 예화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든지 간에 다 예화가 될 수 있지 않은가? 꼭 성경 아닌 다른 데서 그 재료를 끌어와야만 예화가 될 수 있다는 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예화집 아닌 성경에서 끌어온 예화를 구태여 명칭을 붙이자면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러니 대지의 내용을 메울 때에 예화집에서 예화를 끌어오는 것보다 무엇보다도 우선 일차적으로는 이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로 내용을 메우자는 뜻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로 대지의 내용을 메
을 만한 재료가 없을 때에는 할수 없이 이차적으로 예화집이나 다른 데서 예화의 재료를 찾으면 된다. 그런데 필자의 경험을 두고 말한다면 필자는 지금까지 설교하면서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에서 재료를 찾지 못하여 예화집을 더듬어본 적이 거의 없다. 여러 해 동안 설교하면서도 거의 모든 예화를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에서 끌어왔지, 본문 예화 아닌 다른 곳에서 예화를 끌어온 적은 거의 없다. 이것은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의 자원이 우리에게 얼마나 풍부한가를 보여준다. 거의 예화집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성경은 우리에게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를 공급해주는 예화의 보고이다.
대지의 내용을 메우는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를 인용함에 있어서는 두가지 방면에서 인용할수 있다. 본디 '보충설명 '이라는 것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에서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겸손하면 복을 받는다는 진리를 보충 설명할 때에 겸손하면 어떤 복을 받는가? 라고 설명하는 것은 긍정적인 면이요, 겸손하지 못하면 어떤 화를 받는가? 라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적인 면이다. 정직하라는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정직하면 어떠판 복을 받는가?라고 하는 것은 긍정적인 면이요, 정직하지 못하면 어떠한 화를 받는가? 라고 설명하는 것은 부정적인 면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 대지의 내용을 메우기 위하여 그 대지의 내용을 보충 설명해주는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를 인용할 때에도 그 내용을 보충 설명하는 긍정적인 면의 구절과 그 내용을 보충설명해 주는 부정적인 면을 다 들어서 설명할 수 있다.
대지의 내용을 메우는 데 있어서 그 대지의 내용을 보충 설명해줄 만한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두면에서 인용하면 좋겠다는 것은 공감이 가는데, 이제 남은 문제는 그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를 어떻게 찾아내느냐에 대한 방법이다. 어떠한 사실이 좋은 줄 알면서도 그 좋은 일을 실현시킬 만한 방법을 모르면 소용이 없다. 성경적 예화, 또는 본문 예화를 찾는 방법은 세 가지이다.
① 성경을 많이 읽으면 눈을 감고도 모든 성경 구젤이 환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을 가리켜 '뇌리 성경 일람표'라고 한다. '뇌리 성경 일람표'란 무엇인가? 우선 설교자는 성경 말씀을 수없이 많이 읽어야 한다. 설교자가 성경을 수없이 많이 읽으면 한번 눈을 감고 묵상만 해도 창세기 1장에서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까지의 모든 성경 구절이 한눈에 환하게 나타난다. 이것을 필자는 '뇌리 성경 일람표'라고 한다. 이 사실은 성경을 많이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가는 문제이다. 우리가 성경을 수없이 많이 읽을수록 한번 눈만 감으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성경 구절이 한눈에 환하게 나타난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예) 주산과 피아노 연주. 성경에 있어서도 성경을 수없이 많이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니 눈을 감고 명상하여도 성경 말씀의 일람표가 전혀 떠오르지 않으나 성경을 수없이 읽은 사람은 눈만 한번 감고 묵상하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의 성경 구절이 한눈에 환하게 나타나는데 자기 눈앞에 전개되는 이 성경 일람표에서 그 대지를 보충 설명해줄 만한 성경 구절을 자유롭게 택해서 인용한다. 이것이 이른바 '뇌리성경 일람표'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대로 '뇌리 성경 일람표'는 성경을 수없이 많이 읽은 사람에 한해서만 사용할 수 있는데 '뇌리 성경 일람표'가 눈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어떻게 하는가?
② 관 주. '뇌리 성경 일람표'가 아직 눈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우선 관주를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무엇을 이용할 수 있는가?
③ 성구사전 (Concordance) '뇌리 성경 일람표'가 아직 눈에 나타나기 전에 우선 신세질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도구는 성구사전(Concordance)이다.
그런데 관주나 성구사전도 도움이 되나 뇌리 성경 일랑표에 비하면 근본적인 면에서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뇌리 성경 일람표가 유기적인 면이 있는 점에 비하면 후자의 두가지는 보다 더 기계적인 점이다. 어떠한 점에서 기계적인가?
첫째로, 후자의 두 가지는 단어가 똑같아야만 인용 할 수 있다. 성구사전에 있어서는 더하다. 성구사전은 기계 적으로 단어가 똑같아야만 참고 구절을 찾을 수 있지, 단어가 똑같지 않으면 참고 구절을 찾을 수 없다. 가령 '은혜'라는 단어와 '은총'이란 단어는 뜻이 거의 같으나 성구사전은 '은혜 '라는 단어에 대해서만 참고구절을 열거했지, '은총'이란 단어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뇌리 성경 일람표에 있어선, 단어는 다소 다르다 하더라도 뜻에 있어서 거의 같은 뜻이라면 얼마든지 유기적으로 선택해서 쓸 수 있다.
둘째로, 후자의 두 가지는 그 뜻을 나타내는 긍정 적 인 면은 열거하나 부정적인 면은 열거하지 않는다. 더구나 관주에 있어서 가령 정직한 자가 복을 받는 구절에 대하여 예시할 때에 정직한 자가 복을 받는 그 면에 대해서만 예시하나, 정직하지 못하고 거짓말하다가 화를 받는 사실에대하여는 예시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뇌리 성경 일람표는 정직하지 못하고 거짓말하다가 벌을 받은 부정적인 면도 마음대로 유기적으로 선택하여 인용할 수 있다.
셋째로, 후자의 두 가지는 단어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단어가 똑같은가, 아니면 문장이 거의 같지 않으면 참고구절이 예시되어 있지 않으나, 뇌리 성경 일람표의 경우는 단어가 서로 다르고 심지어 문장과 문맥까지 다르다 하더라도 사실에 있어서 그 대지의 내용을 보충 설명해 줄수 있는 사실이라면 뇌리 성경 일람표에서 골라 유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가령 마태복음 5장 5절의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내용을 보충 설명할 때에 우선 긍정적으로는 창세기 26장의 이삭의 경우를 예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삭은 창세기 26장에서 우물을 세 번씩이나 양보했는데 네 번째 우물을 파고 이삭이 말하기를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창 26:22)라고 하였다. 온유하게 우물을 세 번씩이나 양보한 이삭에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장소를 넓게 해주셨으니 온유한 이삭이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았는가. 부정적으로는 아모스 1장 13∼15절의 예증을 들 수 있다. 거기에 보면 암몬 자손의 말이 나오는데 암몬 자손은 자기의 지경을 넓히려고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르는 잔인한 짓을 하였다. 그들이 온유하지 못하고, 자기의 지경을 넓히려고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를 정도로 잔인하고 강팍한 짓을 했는데 그렇다고 하여그들의 영토가 넓어졌는가? 아니다. 넓어지기는 커녕 저희의 왕은 그 방백들과 함께 사로잡혀 가게 되리라고 하였다. 자기의 영토를 넓히기는 커녕 이미 가지고있던 영토도 확보하지 못하고 살던 땅에서 쫓겨나 사로잡히게 되니 이것이 온유하지 못하고 강팍한 자가 받는 결과이다. 온유하지 못하고 강팍하더니 영토를 넓히기는 커녕 있던 땅도 빼앗겼다. 이 예증은 마태복음 5장 5절에 대한 부정적인 면에서의 보충 설명이다. 창세기26장과 아모스 1장 13∼15절의 예증을 보자. 이 두 가지 예증 가운데 '온유'라는 단어는 한번도 안나오고 문장도 없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예증은 관주나 성구사전은 예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두 본문 예화는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으며, 온유하지 못하고 강팍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못받을 뿐더러 가지고 있던 땅에서도 못살고 마는 예증을 각각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에서 보충 설명해주고 있지 않는가.
이와 같이 관주나 성구사전에서는 같은 단어나 같은 문장이 없기 때문에 예시하지 못하는 예증들도 뇌리 성경 일람표에서는 유기적으로 자유롭게 예증해줄 수 있다. 그러니 할 수만 있다면 하루 바삐 성경을 수없이 많이 읽어 뇌리 성경 일람표를 사용하는 것이 제일 편리하다.
대지를 메우는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에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고 하였다. 아로새긴 하얀 은 쟁반에 노란 금 사과를 올려놓으면 얼마나 잘 어울리겠는가? 이와 같이 우리가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은 쟁반에 금 사과 모양으로 꼭 맞는 구절을 인용하여야 한다. 두루뭉수리는 적당하게 갖다대도 괜찮게 들어맞는다. 그러나 톱니바퀴는 적당하게 갖다댄다고 맞는 것은 아니다. 톱니바퀴는 꼭 들어맞아야지 이 톱니바퀴와 저 톱니바퀴 사이에 1밀리가 어긋나도 안맞는다.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두루뭉수리처럼 이래도 적당하게 맞고 저래도 적당하게 맞는 식의 인용이 되어서는 안되고, 두 개의 톱니바퀴처럼 그 성경구절이 아니면 안 맞고 꼭 그 성경 구절이라야 정확하게 들어맞는 구절을 인용해야 한다.
둘째로, 어떤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에 바로 알고 인용해야 한다. 즉 해석을 바로 해서 인용해야 한다. 인용하는 성경구절의 참뜻을 바로 모르고 잘못된 뜻으로 알고 인용하면 안 된다. 현대 설교의 문제점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문제이다.
셋째로, 어느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에 그저 사무적으로 그 성경 구절을 소개하거나 한번 읽고 만 지나가지 말고, 모처럼 찾아내서 인용하는 구절인즉 그 구절을 인용할 때에 그 구절에서 설명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설명을 하고 지나가는 것이 좋다. 그 인용하는 구절을 보충 설명에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최대 한도로 우려내라는 뜻이다. 대지를 보충 설명한다고 하면서 모처럼 찾아낸 성경 구절을 그저 사무적으로 소개만 하고 지나 가든가, 한번 읽기나 하고 지나가면 청중들은 본문 설교는 건조 무미하다는 평을 하게 된다. 모처럼 힘들게 찾아낸 구절인즉 그 대지의 내용을 보충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이용할수 있는 최대한도로 이용하면 청중들이 인용하는 성구 하나 하나에 취미와 흥미를 느끼게 되고 따라서 성경 자체에 대하여서도 재미를 붙이게 된다.
보기를 들면, 우리가 느헤미야 8장에서 이스라뗄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실을 말한다고 하자. 느헤미야8장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 모습이 여러모로 나오는데 우선 1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라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는 사실을 보충 설명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한번 읽고만 지나가면 건조 무미할뿐더러, 이 구절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데 보충 설명하는 구절로 인용되어졌는지 그 이유조차 이해가 안갈 것이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거기에 '모든 백성'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에스라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 사람들은 제사장이나 레위사람 등, 즉 백성들의 지도층에 속하는 몇 몇 사람들만 말씀을 사모하고 일반 대중은 말씀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라 지도자이고 피 지도자이고, 남자이고 여자이고, 늙은이고 젊은이고 간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거족적으로 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다는 은혜로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렇게 설명할 때 청중들은 느헤티야 8장 1절이 무엇을 말하는지 밝히 알게 되며 이 구절에 대한 새로운 흥미가 붙을 것이 아니겠는가.
에스라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했는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구절은 느헤미야 8장 3절이다.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이 구절도 그저 한번 읽기나 하고 지나가면 무미 건조할 것이다. 새벽부터 오정까지라면 적어도 6시간쯤은 될 것이다. 20세기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가30분만 지나가면 벌써 교인들은 시계를 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에스라가 새벽부터 오정까지 장장 6시간 동안이나 성경을 읽을 때 청중들튼 지리하여 주리를 틀었는가? 아니다. 에스라'가 6시간 동안이나 성경을 읽었음에도 백성들은 지리한 줄모르고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귀를 기울이되 극성스러운 극성파 몇 사람만 그리한 것이 아니라 뭇 사람들, 즉 백성들 전체가 다 그리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인용한 구절을 최대한도로 이용한다는 뜻이다.
가령 우리가 야고보서 1장2절의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구절을 인용한다고 하자. '시험'이라는 것은 한 가지 시험이라도 괴로운 것인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시험'이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런데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되 겨우 기뻐하는 빛깔만 보여도 좋은 일인데 본문에서는 기뻐하되 보통 기쁨이 아니라 '온전히 기뻐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야고보서 1장2절이 뜻하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느 성구 하나를 인용할 때에 그 성구를 그저 소개만 하거나 한 번 읽기나 하고 지나가지 말고, 그 성구 가운데서 재미있게 설명할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가를 발견해서 청중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할 때에 청중들은 그 구절에 대하여 흥미를 느끼게 되며 따라서 점점 성경 전체에 대하여서도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바의, 인용한 구절을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최대 한도로 이용하라는 것이다.
3. 감동이 있는 강단
마태복음 7장 28∼29절에 나오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나, 마가복음 6장 2절의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아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는 다 예수님의 말씀에 청중들이 크게 감동되었다는 말씀이다. 학개서 1장에 보면 선지자 학개가 성전건축을 지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책망하며 꾸짖자 이 책망을 들은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바 모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하여(학 1:12) 힘을 내서 성전건축을 시작했다는 것도 역시 선지자 학개의 예언의 말씀에 그들이 크게 감동을 입었다는 말씀이다. 우리의 설교에는 이와 같이 양떼들의 영혼에 깊은 감동을 끼치는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
설교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경험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똑같은 설교인데 갑이란 곳에서 했을 때에는 큰 감동을 끼쳤는데 을이란 곳에서 했을 때에는 아무런 감동도 끼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똑같은 내용이요, 똑같은 조직이요, 똑같은 대지로 똑같은 설교를 했는데 어찌하여 갑이란 곳에서 설교할 때에는 청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끼쳐 울며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는데 을이란 곳에서 설교할 때에는 냉랭하기 짝이 없고 전혀 아무런 감동도 못 끼치게 되는 일들이 나타나는가?
왜 그럴까? 설교가 양떼들에게 감동을 주고 못 주는 데는 어떠한 요소가 작용하는 여부에 따르는가?'그것은 다만 성령님께서 역사해주시고 안해 주심에 따르는 것이다. 똑같은 내용이요, 똑같은 조직이요, 똑같은 대지요, 똑같은 설교이나 우리가 설교할 때에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시면 놀라운 감동이 임하나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시지 않는 때는 아무런 반응도 없다.
이 감동은 어떤 의미에서는 순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설교자가 강단에 서서 설교를 시작하는 그 현장에서 성령님께서 즉흥적으로 역사해 주셔야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설교자는 강단에 설 때에 설교를 시작하는 그 현장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해주셔서 양떼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사실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내 설교에 감동이 있으리라는 장담도 못하고 예언도 못한다. 강단에서 설교를 시작하자마자 현장에서 역사 하시어 양떼들의 마음에 감동을 끼치는 성령님의 역사를 확인할 때 비로소 설교자는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그 전까지는 누구도 장담 못한다.
그런데 설교가 감동을 끼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요인을 가지고 계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초래하는 인간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기도이다. 기도밖에 다른 방법도 없고 도리도 없다. 우리가 설교할 때에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시도록 하나남께 기도하는 이 일만이 설교에 성령님의 감동이 역사해 주시는 길이다. 인간의 재간, 수단, 방법, 요령 등은 다 소용이 없다. 다만 기도뿐이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은 연고로 은혜를 사모하고 나온 양떼들에게 울리는 꽹과리로 그치게 한다면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우리가 기도생활을 깊이 하여야 강단에 나설 때마다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해 주실 것이고따라서 양떼들의 영혼에 깊고 뜨거운 감동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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