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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길선주와 박형룡을 통해서 본 한국교회 영성의 회복

하나님아들 2015. 8. 27. 11:33

길선주와 박형룡을 통해서 본 한국교회 영성의 회복

2007년 2월 12일 오후 5:04공개조회수 12 0

길선주와 박형룡을 통해서 조명하는 한국교회 영성의 회복

1. 길선주(吉善宙, 1869 ~ 1935)
영계(靈溪) 길선주는 한국 기독교회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며, 한국 장로교 노회조직의 선봉이자 한국교회의 대 부흥가이다. 특히 그는 성경과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기독교의 특성을 세운 목회자로 기억되고 있다.

1)길선주의 신앙과 말씀운동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을 말할 때 가장 먼저 회자(膾炙)되는 사람이 길선주 목사이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로 시작되는 유명한 회개는 오늘날에도 신앙자들의 귀감(龜鑑)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길선주를 말하면서 그가 성경에도 해박한 학자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구약을 300독, 신약은 1000독, 계시록은 1만독 이상을 하였다고 한다. 요한1서는 500독, 창세기에서 에스더까지는 540독 이상을 하였다 한다. 그는 목사가 되기 전,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때문에 그러한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이며, 또한 그가 자유자재로 인용하는 성경에서 교인들은 큰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한국교회사, 김해연, 성광문화사(1983) p.302

그의 신학은 근본주의적이며 특히 말세론을 많이 가르쳤다. 그는 계시록 강해를 통해 종말적 현상이 도래했음을 강조했으며, 또한 현대신학을 거짓 선지자로 규정했다. 2년여를 서대문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하나님께 매달리며 계시록을 1만 번 이상을 읽게 된다. 그리고 말세론을 옥중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앞으로 일어날 재난 속에 인류가 받을 환난을 내다보면서, 민족의 장래를 위해 복음이 하루속히 이 땅에 충만해지고 교회가 소성 받아야한다는 신념을 다지게 된다. 이때 심취한 계시록의 영향으로 “심판의 때”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그는 역사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시며 인간, 고통으로부터의 궁극적인 해방은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영원의 세계를 갈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철저히 전 천년설을 거부할 정도로 정통신학을 가졌던 것이다.
특히 그는 책을 읽음에 있어서 많이 읽는 것보다는 정밀히 읽고, 정밀히 읽기보다는 외우기를 힘써 왔다. 그래서 믿은 후에도 성경을 외우는데 힘썼다. 그리하여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히브리서, 요한서 등의 몇 책은 눈을 감은 채 줄줄 외울 수 있었고, 그 밖에도 중요한 성경 구절은 거의 다 외우고 있었다. 구약과 신약성경 전부가 다 그의 머리 속에 들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친구목사들은 다 오늘의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따르지 못할 만큼 성경에 정통하였다고 전해진다.
길선주는 요한계시록을 1만독을 하면서 “영계의 거성(巨星)”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의 부흥회의 주제는 종말과 재림신앙 등이었는데, 고난 받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천국의 소망을 심어주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현세적인 삶을 도피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26년 장대현 교회 청년계층 교인들이 길선주 목사 배척운동을 벌인 것과, 1933년에는 결국 길선주 목사가 자신을 지지하는 일부 교인들과 따로 이향리(履鄕里) 교회를 세우게 된 것 등은 그의 말년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는 교회 안의 청년-원로, 진보-보수 집단의 갈등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사회주의적인 진보이념을 가진 이들이 그의 보수적 신앙에 대해 저항한 것이었다. 김탁(철학박사), 종교신문, (2002. 11. 12)

결국 길선주의 목회가 배척을 받은 것은 성경적 근본신앙이 그 이유가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평양 대부흥의 떠들썩한 오순절적 분위기는 크게 오해된 면이 많다. 이는 성경을 근본으로 하여 일어난 회개와 회심의 구원의 서정이었다. 이에 대해서 평양 장대현 교회 전도사로 길선주 목사를 섬겼고, 목사 안수 후 1937년 중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던 방지일 목사(영등포 교회 원로목사)는 "길선주 목사님은 부흥회가 체험으로 끝나지 않도록 꼭 말씀 중심의 사경회를 했다"며 평양대부흥운동이 성경 중심의 말씀운동이었음을 강조했다. 평양대부흥운동, 박용규, 두란노, 2000. (김철영, 뉴스파워, 2007. 1. 15. 에서 재인용)


2) 길선주의 기도와 부흥운동
현재 한국교회의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는 길선주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정설(定設)이다. 그는 기독교에 입문하기 전에도 9년 동안 선도(仙道)수련과 함께 고행적인 기도생활에 전념하였다. 길선주는 개종 후에도 선도식 수행을 계속했는데, 기도생활에서 더욱 뚜렷하게 지속되었다. 그는 선도 수행 때부터 행하던 대로 하루 세 차례 시간을 정해 기도했다. 특히 새벽기도를 하고 선도식 체조를 했는데, 이 선도식 체조는 선도 수행의 필수과정 이었다.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p.284

이처럼 그는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성신(聖神)이 자기 안에 늘 충만케 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아침 5시 또는 밤 10시로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였다. 매일 한 시간의 이상의 보통기도와 매주 사흘씩의 금식기도와 매년 1주일간의 금식 대기도를 세상 떠날 때까지 계속하였다.
1901년 장대현 교회의 장로가 된 길선주는 신자의 신앙의 열심을 보유하기 위하여 기도와 성경공부, 전도와 예배 출석, 헌금 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도의 열심을 모범으로 보여 주었다. 신자는 각자가 시간이 허락되는 한 하루에 한 번씩 하나님과 대면함으로써 심령의 새로운 힘을 얻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예배당을 밤낮 개방하였고, 그로 인해 교회를 순례하는 발걸음이 새벽부터 밤까지 그치지 않았다. 길선주 장로는 교회의 영적 변화가 크게 일어나야 할 것을 통감하고 박치록 장로와 새벽기도를 시작했는데, 이 사실을 안 교인들이 참여하여 새벽기도가 시작되었다.
이에 힘을 얻은 그는,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기 위한 영적 개혁 운동에 모든 교인들의 정성이 집중되고 성령의 역사로 승화됨이 있음을 확신하고, 이를 계속하였다. 당시의 새벽기도회는 대중적으로 매일 계속된 것은 아니었고, 개개인이 자유롭게 기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특수한 사정이 있을 때마다 그 필요에 따라 집단적으로 새벽기도를 하였다. 이 날부터 새벽마다 종이 울렸고, 교인들은 죄를 자복하며,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다. 1905년 두 사람이 시작한 새벽기도회의 불씨는 전국교회로 번져 나가 오늘에 이른 것이다. 영계 길선주 목사의 영성신학, 허호익(대전신학 교수), 논문(야후 블로그 수도원교회 영성실천신학에서 발췌 재인용)

원산해변에서 시작된 이 성령의 무서운 불길은 결국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전국을 휩쓸게 되었는데, 이 불길이 전국적인 것이 되는 데는 평양의 길선주의 힘이 컸다. 그는 이때 성령의 체험을 한 이후로 전국을 누비며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기독교인이 있는 곳에는 비슷한 성령운동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를 통하여 한국교회는 토착적 신앙형태를 구축하게 되었다. 아직 전 세계 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새벽기도회를 비롯하여 열성적인 성서연구열, 헌금열, 개인전도의 전통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스도를 위한 한국인들의 헌신은 정말 선교사들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였다.
또한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한국인들의 신앙지도력과 목사들의 실력이 인정받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아직도 나이 어린 한국교회의 신앙과 그 지도자의 능력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혹시나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있지 않나 의심하였고, 또 한국인들의 입신(立身)동기가 불순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부흥운동을 통하여 오히려 서양의 기독교보다 한국인들의 기독교가 더 순수하다는 것을 고백하기에 이른 것이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종교적 문화적 우월성의 교만이 거꾸러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신학사상사, 송길섭, 대한기독교출판사, 1992. pp.155-158


2. 박형룡(朴亨龍;1897-1978)
한국교회 역사에서 한 인물이 영향을 미친 측면에서, 죽산(竹山) 박형룡 박사를 능가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보수적인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박형룡이야말로 신학의 정초를 놓고 신학교육과 저술을 통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한 신학자요, 교육자요, 그리고 저술가였다. 특히, 1920년대 후반부터 평양신학교에서 교수하기 시작한 이래,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장로교회에 있어서 신학적 중심축의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의 신학사상과 저술은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학에서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성도들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박형룡 신학이야말로 한국 장로교인들에게 신학적으로는 “정통주의”를 택하게 하고, 신앙적으로는 “보수주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결과, 수많은 시련과 박해를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을 소유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시대적 요구에 맞는 신학”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었다. 박형룡 자신이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전통에 관해 정의한 내용을 보더라도 그의 신학은 기독교인의 생활과 복음전파를 특별히 강조하면서 역사적인 웨스트민스터 표준서에 따라 이루어진 한국에서 발달한 개혁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역사에서 차지하는 박형룡의 역사적의미”, 박응규, 정암탄생 100주년 기념 강좌,(기독넷마당에서 재인용)


1)박형룡의 꽃다발 신학
박형룡의 신학적 배경으로는 좌경화(左傾化) 되기 전의 구 프린스턴 신학 전통을 지적할 수 있다. 그가 유학한 1923년부터 1927년은 미합중국 장로교회 안에 근본주의 대 근대주의 논쟁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로, 자유주의자들이 교회 안에서 관용(Toleration)을 외치며, 보수주의자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던 때였다. 이런 시기에 박형룡은 메이천 교수로부터 일생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런 영향은 평양신학교에서 박형룡에게 배웠던 박윤선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어 두 사람 사이에 신학적인 동질성을 이룩하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조직신학자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사상”, 김길성, 신학지남 97년 가을호 통권 252호, 신학지남사. 1997. pp.58-59

그가 받은 구 프린스턴의 신학사상은 다음과 같이 4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프린스턴 신학교는 개혁신조학을 고백한다. 박형룡은 그 가운데 하이델베르그 신조는 언급은 하지만 수용하지는 않고,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와 고대 칼케돈 신조를 수용한다.
(2) 프린스턴 신학교는 고등한 성경관을 가지고 있는데, 성경을 영감 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박형룡은 성경의 축자영감론을 수용하며, 성경의 자증성을 강조한다.
(3) 프린스턴 신학에서 보이는 스코틀랜드 보편 이성론에 있어서 박형룡박사는 이성의 강조를 완전히 배격하지는 않고 적게 수용하는 입장을 취한다. 즉 인류의 보편 상식을 전제로 변증학을 전개하며, 귀납법적이고 실증주의적인 연구방법을 취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있어서 합리적 신학 방법을 어느 정도 수용한다.
(4) 프린스턴 신학에 있어서 과학적 경험주의는 19세기의 문화사조의 특색으로서 세상을 낙관적으로 전망하는데, 진화론을 신학의 방법론으로 채택한 결과이다. 박형룡은 이러한 과학적 경험주의를 완전히 배격한다. http://blog.empas.com/kechurch/15529501

이러한 박형룡의 신학은 성경무오(無誤) 사상에 입각하는 비타협적 보수주의 신학이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무오함을 믿는 신앙이야말로 박형룡의 신학의 기초요,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는 이 신앙과 신학을 비장(悲壯)한 각오로 가르쳤고, 그것을 변증하며 수호하는 과정에서 그의 영감적 성경관을 고집하여 다른 신학과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것이 그의 신학적 특색이 되었다. “박형룡-근본주의”, 배종임,유완선,이맹영,이인형, 장신대학원 1학년 2006년 2학기 과제물, p.7

또한 박형룡의 교의신학은 그 자신의 말을 빌려서 말한다면 벌코프, 핫지, 워필드, 메이첸, 카이퍼, 바빙크, 보스 등 대표적 개혁신학자들의 신학의 꽃송이들로 엮어진 꽃다발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즉 박형룡의 신학은 “꽃다발 신학”이다. 그러나 이 “꽃다발 신학”을 구성하고 있는 꽃송이들이 각 개인이라고 할지라도, 전체적인 모양과 이름은 분명한 박형룡이다. 즉 “꽃다발 신학”은 서양의 선진개혁자들의 신학 중에서 주옥같은 것들을 골라서 그것들에 입각하여 우리 한국교회와 한국의 크리스찬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리와 구원의 바른 길로 인도하며 지도하고자 하는 신학이다. "총신의 신학적 전통", 박아론, 신학지남 91년 가을호 통권 229호, 신학지남사, 1991. pp.66-67


2) 박형룡의 신학투쟁과 보수주의 사수
박형룡은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을 막는 일에 공헌했다고 평가된다. 1934년과 1935년에 한국장로교 안에 보수와 자유 양자간의 신학적 논쟁에서 박형룡은 보수신학의 입장에서 투쟁함으로 자유주의 신학자인 김재준을 신학지남에서 퇴출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재준과 더불어 일본 청산학원 신학부 출신인 김영주 목사의 “모세의 창세기 저작 부인”, 김춘배 목사의 “교회 안에서 여권(女權) 문제”로 인한 자유주의 신학에 전투적으로 투쟁하여 정통 보수신학을 지켜내는데 박형룡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김양선의 지적대로 한국장로교회가 희년을 맞이한 해에 한국장로교회는 박형룡의 지도 하에 있었다는 평가는 옳았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신학교를 비롯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총회가 그들의 손에 점령당할 뻔한 시기에 정통신학을 사랑하는 신학생 51명이 조선신학교 내 김재준을 비롯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교육에 저항하여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그런 혼란기에 만주에서 귀국한 박형룡 박사는 “다시 한번 김재준의 신학을 비판하는 멍에를 메기”에 이르렀다. 결국 총회에서 자유주의 신학자 김재준을 축출하여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을 막는 결정적인 신학 작업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박형룡이었다. “박형룡의 한국교회사적 평가”, 김의환, 제3회 죽산기념강좌, “야후 블로그 윤재정”에서 재인용

박형룡은 근대과학 정신과 고등비평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집필한 ‘아빙돈 주석’을 구독하지 못하게 했고 총회가 『표준성경주석』(1956)을 만들어 내도록 했다. 그는 김재준의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성경관을 혹독하게 평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의 본질을 간파한 그가 자유주의 신학이 한국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이러한 박형룡을 근본주의자로 분류하기도 한다. 근본주의는 1920년대 미국에서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일어난 전통적 기독교 신학운동이다. 독일신학과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는 객관적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즉,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초자연적 이적 능력 등을 불신했다.
그러므로 이를 반대한 박형룡의 신학은 1920년의 미국의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의 시대의 용례에 따르면 근본주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학 개념으로 보면 근본주의가 아니다. 그가 소개한 신학은 성경적이며 지성적인 것이었으므로 개혁주의 정통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박형룡이 구체적으로 소개한 신학체계는 장로교회만이 아니라 감리교회, 침례교회, 성결교회 등에도 이런 저런 형태로 널리 알려지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전체적으로 보아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따른다고 할 만큼 이 신학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을 수용하면서도 시대경륜설적 세대주의 천년왕국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이것들을 결속시킨 초기 선교사들의 노력과 바른 신학을 집대성한 박형룡의 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박형룡과 개혁파 정통신학”, 최덕성, 한국개혁신학회 발표 논문(2006.11.4)

이처럼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박형룡의 신학은 1)보수주의 신학수립과 발전에 공헌을 하였고, 칼빈주의적 정통신학 확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2)보수신앙을 심어주며 일제말기와 같은 어려운 시기에서도 핍박을 끝까지 견뎌낼 수 있는 신앙의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한국신학사상사, 송길섭, 대한기독교출판사, 1992. p.328

3.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교회에는 길선주의 개인적인 새벽기도가 한국교회의 전통으로 굳어진 것에 대해서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첫째는 게르만 민족과 라틴기독교가 결합되어서 새로운 문화적 전통으로서 중세유럽의 카톨릭 문화를 만들어 낸 것과 같은 “기독교의 토착화”라는 의견이고, 둘째는 한국인의 무속적 전통과 가치가 지니고 있는 우상숭배의 요소가 그대로 기독교와 결합되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기복신앙”이라는 의견이다.
두 의견이 다 일리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당시 부흥운동에 있어서의“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이다. 그리고 그 전통이 지금까지“이어져 내려오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당시 길선주를 비롯한 부흥운동의 주역들의 (새벽)기도는 예수를 믿지 못하고 살아온 날들의 죄와,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 분의 뜻에 합당치 못하게 살아온 죄들에 대한 통회였다. 이것은 분명 성경적인 기도이며,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의 기도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새벽)기도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데서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새벽기도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들의 내용은 그 옛날 부흥운동의 기도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 믿기 이전의 가치관을 그대로 표현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다양한 기도 제목들이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소원이나 설교자들의 대응에서 기복신앙의 엄연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토속신앙적인 소원이 (새벽)기도회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 옛날 선조들의 심령 속에서 살아 움직였던 부흥을 기도해야 한다.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에 내 기도가 오염되고 있지는 않은가? 말씀 앞에서 점검하며 속히 성경적인 기도의 내용과 자세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개혁교회가 날마다 개혁되어야 하듯이 우리 기도의 내용도 날마다 성경적으로 개혁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기도의 영성이며, 세속에 물든 심령을 다시 일어나게 하는 영성인의 기도인 것이다.
또한 기도와 함께 중요한 것이 바로 말씀을 지켜 행하는 영성이다. 박형룡의 보수주의적 혹은 개혁주의적 신학은 현대의 우리가 성경을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거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바른 신앙에 있어서 타협은 없다.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교회도 모르게 교회 속으로 들어와 있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주의(主義)가 필요한 것처럼 오늘의 교회에도 분명 주의(主義)가 필요하다. 지금 나는 어떤 주의를 갖고 있는가? 텍스트보다는 콘텍스트에 더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오늘에 있어서는 박형룡과 같은 정통신학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신학사상을 좇았던 자들도 오늘에는 그의 신학을 포용성이 없는 배타적인 교조주의라고 비난하는 입장에 서기도 한다. 그러나 하늘의 것은 이 땅위의 것과는 섞일 수가 없다.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아멘”하면 될 뿐이다. 내가“아멘”한다고 상대방이 싫어하거나 편협하다고 비난해도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과 같이 절대진리가 혐오감을 주고 상대적 진리가 오히려 교회에서도 환영을 받는 시대에는 더욱 더 바른 신학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의 신학도와 목회자들에게는 바른 신학에 대한 사수(死守)의 각오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바른 신학을 통하여 우리는 성경을 변호할 수 있다. 성경이 영감 된 책이라면, 이 성경을 바르게 변호하려는 자에게도 분명 성령의 영감하심이 있을 것이다. 칼빈이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하여 기독교 강요를 쓴 때가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도저히 사람의 힘만으로는 쓰여진 것 같지 않다. 우리가 비록 칼빈이나 박형룡과 같은 천재적인 학문성과 성경을 보는 혜안이 열려지지 않았다 해도,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좇는 자로서는 동일한 위치에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굳건히 서서 인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배격하며 성경의 근본진리를 지켜 나가는 동일선상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바른 영성은 성경적인 참된 기도와 성경적인 참된 주의(主義)가 온전하게 합하여지고 모든 성도가 이에 전무(專務)할 때, 이 사회에 소금과 빛의 역할로서 그 참된 진가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
글쓴이 : 오직 성경으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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