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스크랩]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아들 2015. 8. 9. 16:32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욘2:9하). 그러나 주님이 사람을 다 구원하시지 않는다. 왜 그렇게 하시지 않는가? 저희의 죄가 너무 많고 타락했기 때문인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 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5) 그런고로 만일 하나님이 죄인 가운데 <괴수>를 구원하셨다면 타락하였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할 자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사람을 다 구원하시지 않는가? 어떤 사람들은 너무 마음이 돌과 같이 굳기 때문인가? 아니다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돌과 같이 굳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것이다.>(겔11:19)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자들은 너무 고집스러워서, 너무 제어하기 어려워서, 너무 반항적이어서 하나님이 그들을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실 수 없기 때문인가? 이 문제를 답하기 전에 다른 것을 질문해 보자.

 

적어도 어떤 신자들의 경험에 호소해 보기로 하자.

 

당신이 악인의 꾀를 쫓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서 저희와 함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눅19:14)라고 말한 때가 없는가? 당신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한>(요5:40) 때가 없었는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를 알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욥14:15)고 한 적이 있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변해진 것은 어찌된 일인가? 지금은 당신이 교만하게 자족함을 느끼는 데서 겸손한 갈망자로, 하나님과 원수되었든 자가 그와 화목하는 자로, 불법했던 자가 순종하는 사람으로, 미워하던 자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한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리고 <영으로 난>자와 같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라고 당신은 쉽게 대답할 것이다. 이제 당신은 다른 반역자들이 역시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힘이 모자란데 있지 않고 사람에게 강요하기를 거절하시지 않은 것을 알게 되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의지를 굴복시키실 수 없고, 당신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고, 당신의 도덕적 책임에 간섭하시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도 같이 하실 수 없겠는가? 하나님은 확실히 그렇게 하실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 악한 자들의 현재의 과정과 그 종말의 운명을 인정하려고 하며, 하나님이 저희를 구원하실 수 없다고 변론하며, 또 그들이 하나님으로 그렇게 하시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함은 불건전하고 비논리적인 말이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기를 원한 때가 있었다>고 당신은 말하는가? 사실로 당신에게 원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신 이는 오직 주님 이였다(시110:3, 빌2:13).

 

그렇다면 왜 그가 모든 죄인들로 다 원하게 하시지 않는가? 그 이유는 그는 주권적이요 또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시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처음 문제로 돌아가자.

 

모든 사람이 다 구원함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특별히 복음 전도를 받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믿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직도 당신의 대답인가? 그것이 사실이나 그것은 다만 진리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 편에 있는 진리이나 하나님 편에도 진리가 있으니 그 진리는 강조될 필요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빼앗기게 될 것이다.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은 믿기를 거절하기 때문에 버림을 받았으나 그 외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왜 믿는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유익하며 구원의 필요를 더 빨리 파악하기 때문인가? 그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은<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가운데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전4:7)라고 하였다.

 

택자들과 불택자들을 구별하신 이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왜냐하면 당신의 백성에 대하여 기록하였으니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찬된 자를 알게 하신 것이다....>(요5:20).

 

신앙은 하나님의 주신 선물이니 <믿음으로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살후3;2) 그런고로 하나님이 이 선물을 누구에게나다 주시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 그가 누구에게 이 구원하시는 호의(好意)를 베푸시는가? 그의 택하신 자들에게 그것을 베푸신다고 우리는 대답한다.(<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하신 말씀을 보니까). 그런고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딛1:1)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권으로 당신의 호의를 베푸시는가? 그렇게 하실 권리가 그에게 없는가? 아직도 <착한 집 주인을 원망 없이 하는 자> 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가 친히 한 말씀으로 충분한 대답이 될 것이니 <내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마20:15). 하나님은 자연계와 신령계에서 당신의 선물을 맘대로 주신다.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한 말이나 이제부터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구원에 나타난 성부의 주권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물들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관하여 그의 절대적 주권을 주장한 것들 가운데 가장 강하게 주장한 성구는 로마서 9장이다.

 

그 장을 전부 생각하려고 하지 않고 21-23절만 생각할 것인데 그 말씀은 다음과 같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구절에서 범죄한 사람은 자동력이 없고 무력하기가 생명이 없는 진흙덩이 같은 존재로 표현되었다. 택자들과 불택자들 자신에 아무런 <차별이 없음>이 성구에서 나타나 있다. 그들은 <한 덩이>의 진흙이니 엡2:3에 우리는 다 본래 <진노의 자식들>이라고 한 말씀과 일치된다. 각개인의 최종적 운명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결정되니 그것은 복을 받은 경우나 만일 그것을 우리의 생각에 맡겨 두었다면 우리의 최종적 운명은 다 함께 불바다가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 구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친히 당신의 피조물 각자의 방향이 같지 않게 하심은 그릇 하나는 <귀히> 쓸 그릇으로 하나는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드시며, 하나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으로 다른 것은 <영광 받기로 준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으로 각각 마드셨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장중에서 토기장이의 수중에 있는 진흙과 같음을 볼 때에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 겸손하게 하는데 성경 진리가 있다.

 

인간은 교만하고 지식을 자랑하며 사람을 신격화(神格化)시키는 현대에 토기장이가 자기를 위하여 토기를 만드는 사실을 주장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 자기 창조주와 맘대로 대결하게 버려두나 그가 하늘에 계신 토기장이의 장중에 있는 진흙에 불과한 것은 변치 않는다.

 

반면에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들을 공의롭게 다루시고 또 온 세상의 심판자이신 그는 올바르게 하실 것임에 불구하고 그는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기쁘신 대로 그릇을 만드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것은 당신의 맘대로 하실 수 있는 당당한 권리를 주장하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피조물들을 자기 맘대로 다루실 권리를 소유하실 뿐만 아니라 그 권세를 행사하신다. 그것은 그의 예정(豫定)하시는 은혜에서 보다 더 명백히 들어나는 데가 없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선택하셨다.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그의 눈앞에 아담의 존속 전체가 서서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사람씩 골라내서 <양자>를 삼기로 예정 하셨고, <성자의 형상과 같게 하시기로> 예정하셨고 영생을 주시기로 <예정하셨다>.

 

성경에 이 복된 진리를 말하는 구절이 많은데 그 가운데에서 일곱 개만 찾아보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9행13:48).

 

사람의 재간으로 만든 기교를 사용해서 성경 말씀을 분석하고 명백한 의미를 찾으려고 했으나 그것은 헛된 수고였고, 이와 비슷한 다른 구절들도 자연인의 마음에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은 일찍이 하나도 없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는 이 말씀에서 배우는 것 네 가지가 있다.

 

첫째로 믿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의 결과지 원인이 아니다.

 

둘째로 제한된 숫자만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됐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외를 두시지 않고 다 예정하셨다면 <.....된 자는 다>라는 말은 무의미한 제한이 될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이 <작정>은 단순히 외적 특권만이 아니라 <영생>을 얻는 특권이요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그 자체이다.

 

넷째로 영생을 얻도록 하나님이 작정하신 자는 다(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다) 믿을 것이 가장 확실하다.

 

위의 구절에 대한 C.H. 스펄존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주의할 만하다. <이 말씀은 예정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반증하기 위하여 많이 노력했으나 나는 그것들이 이 말씀에 너무 어긋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답변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는 다 믿더라>는 말을 왜곡하지 않고 누구나가 다 믿어야 된다고 함으로 하나님이 아니신가? 만일 사람들이 영생을 가지고 싶어 한다면 매번 하나님이 그들로 하고 싶어 하게 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이 잘못인가? 그렇게 하시는 것이 옳다고 한다면, 그렇게 하실 것을 목적하신 것은 잘못인가? 하나님이 은혜를 우연히 주실 것인가? 그가 오늘날 은혜를 주시기로 목적하신 것이 옳다면 영원 전에 그렇게 하시기로 목적하신 것이 옳으셨다(또 그에게는 변하심이 없으므로)>.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 하느니라>(롬11:5,6).

 

이 인용구의 앞에 있는 <그런즉>이라는 말씀은 전절에 대한 것이니 그 절의 말씀은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주었다 하셨으니>라는 말씀이다. 특별히 <남겨 두었다>는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엘리야 시대에 칠천 명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우상에게 절하지 못하게 보존해 두시고 참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하셨다. 이렇게 보호하심과 알려주심은 그들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감화와 섭리로 되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남겨 두심>을 받은 이 사람들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것인지 모른다.

 

이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이 남겨 두셨으므로> 남은 자들이 있는 것과 꼭 같이 이 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다고 했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여기서 선택과 원인에 관한 그 근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이남은 자들을 선택하신 기초는 그들에게 있는 신앙을 미리 보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선행을 미리 보셨으므로 선택함은 어떤 선택이던지 선행을 보고하는 것과 꼭 같은 경우이다. 그런 경우에 그것은 <은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기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라고 했다. 이 말씀은 은혜와 행위는 서로 반대됨을 의미하고 이 두 사이이에 공통점이 없어서 물과 기름과 같이 서로 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택자들에게 미리 보여진 선척적 선행이나 그들이 쌓아 놓은 어떤 공적 관념은 제외되어야 한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자가 있느니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오는 무조건 선택을 의미한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호의적인 선택이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 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 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 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니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이 구절에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하여 세 번 언급하였으니 택하심은 필연적으로 선택 즉 더러는 취하시고 더러는 버려두심을 생각게 한다. 선택하신 이는 하나님 자신이다. 피택된 숫자는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필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하여 이만큼 언급하고 이제는 그의 선택의 대상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위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하여 어급된 자들은 <세상에서 약한 자들이요, 세상에서 천한 자들이요 또 멸시를 당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며 확대하기 위한 그의 생각과 그의 길은 전연 사람들과 같지 않다. 육에 속한 생각에 의하면 선택 교리는 부유하고 유력한 층 즉 인자하고 교양 있는 층에 속한 사람들이 만든 것이므로 기독교가 그 허례와 인간을 위한 영광에 의하여 세상의 인정과 칭찬을 받게 하기 위함이 였다. 그러나 <사람 가운데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16:15).

 

하나님은 <천한 것들>을 택하시는데 구약 시대에도 그렇게 하셨다. 당신의 거룩한 말씀을 맡기기 위하여 택하신 민족과 언약한 씨가 오게 할 경로는 고대의 애굽인과 당당한 바벨론인이 아니요 도한 매우 문명하고 교양 있는 헬라 족속도 아니었다.

 

여호와가 사랑하고 <당신의 눈동자>같이 여기신 민족은 멸시를 받은 히브리 민족이였다.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살고 계실 때도 역시 그러했다. 그가 좋아서 당신과 가까이 하시고 당신의 사도들로 파견하신 사람들은 대개가 무식한 어부들이였다. 또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 즉 그가 하신 선택의 존재 이유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ㅊ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의 특별한 호의를 받을만한 것이 없는 자들을 당신의 선택의 대상으로 삼은 데에 아무 조건도 없기 때문에 모든 영광은 전적으로 그의 많은 은혜의 풍성함에 돌려야 할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 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 데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자의 듯을 따라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3-5, 11) 여기에서 다시 어떤 시점(時點)에 (만일 그것을 시간이라고 한다면) 대하여 말해 주는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신의 자녀들을 삼은 자들을 어떤 시점에서 택하셨다는 말이다.

 

그 시점은 아담이 범죄 하여 그 후손들을 죄와 악독한데 빠지게 한 후가 아니라 아담이 빛을 보기 오래 전에, 심지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

 

여기에서 하나님에게 그의 택자 들과의 관계에 어떤 목적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 목적은 곧 저희를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 함이고> 그것은 또 저희로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이고> 그것은 또 저희가 <기업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역시 그를 촉진(促進)시킨 동기가 발견된다. 그것은 곧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이 문구는 흔히 심한 공격을 하는 구절로서 그 공격은 하나님은 사람들이 나기도 전에 저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신 것은 폭군적이요 불공정하다는 공박이다).

 

끝으로 우리에게 알리는 것은 이 사건에 있어서 그가 누구와 상의하시지 않고 다만 우리를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 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

 

여기서 고려할 만한 점이 셋이 있다.

 

첫째로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 사실은 하나님의 택자 들은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택함>을 입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선택 교리는 다만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 외적 특권이나 계급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궤변과 애매한 언사를 없애버린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이 <구원> 그 자체이다.

 

둘째로 구원하기 위한 선택은 적당한 방편을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경고한다. 구원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셨으니 그가 믿든지 안 믿든지, 싫건 좋건 구원함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이 아니다. 성경에 어디든지 그렇게 가르치는 곳이 없다. 목적을 예정하신 하나님이 구 수단을 정하셨다.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택하신> 같은 하나님이 그의 목적은 성령의 역사와 진리를 믿는 일을 통해서 성취되도록 작정하셨다.

 

셋째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신 그 원인이 분명하다. 말씀을 살펴보자.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구원을 얻게 하심이라.... .>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이 복된 진리를 알게 될 때에 예정 교리 때문에 공포에 잠겨서 위축할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선물인 구속자 자신을 우하여 감사해야 할 근거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하신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사람은 자기 말로 의사 표시를 흐리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것 이상 더 분명하거나 더 강하게 말할 수 없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 있는 무엇에 의존하지 않았고, 우리의 무슨 업적에 대한 보상도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의 결과인데 이 은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되 우리가 빛을 보기 전에 또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주셨을 뿐만 아니라 창1:1의 <태초> 곧 오래 전에 주셨다.

 

또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소유한 빼앗길 수 없는 위로가 개재해 있다. 그가 영원 전에 선택하셨다면 그 선택은 영원까지 유호하게 될 것이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벧전1:2)이라는 베드로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 여기서도 다시 구원 받은 자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시며 그들이 믿음으로 순종하기 전에 성부가 먼저 택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선택을 온전히 사람의 입장에서는 제거되고 전능하신분의 주권적 기쁨에 의존되어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이란 말은 그가 모든 것을 미리 다 보셨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의 마음속에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나타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은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예정하신> 사실을 떠나서 복음을 듣고 믿을 사람들은 그가 <미리 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미리 보신 것은 모든 사람들이 죄는 사랑하나 하나님은 미워할 것을 보신 것이다. 하나님의 <예지>는 행2:23절의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란 말씀에 근거했다.

 

여기서 말의 순서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 <그의 작정>과 그의 <미리 아심>이다. 롬8:28, 29절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는 말씀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여기 처음에 <왜냐하면>(for)이란 말은 앞절(28절)에 있는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예지 하시고 예정하신>자들이다)란 말씀으로 돌아가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성경에서 어떤 사람을 <안다>는 말을 읽을 때에 그 말은 허락하고 사항하는 의미에서 안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8:3). 외식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오히려 <내가 너희를 결코 모른다> 즉 그는 결코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가 미리 아신대로 택한 자들>이란 말씀은 그가 특별히 허락하시고 사랑하심의 대상들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란 뜻이다.

 

지금까지 생각한 일곱 구절의 교훈을 총괄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니> 그 결과로 저희는 때가 되매 믿을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택자 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그들의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고 또 그들의 공적에 인한 것도 아니라 온전히 그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무 인간도 당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위하여 당신의 특별한 호의를 받기에 가장 가망 없는 자들을 그 대상으로 일부러 선택하셨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저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택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하시기로 택하셨으므로 또한 당신의 영원한 뜻이 성취되게 할 방편도 작정하셨다. 우리를 구원하신 자로 그 <은혜>는 당신의 목적 하신대로 창세전에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택자 들이 실제로 창조되기 오래 전에 그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택자 들을 그가 미리 아셨으니 저희는 그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자 이였음이 확실했다.

 

다음 제목으로 넘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예정의 은혜에 관해서 더 말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예정에 나타난 그의 주권 교리는 더 흔하지 공격을 당하기 때문에 이 근거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 진리를 왜곡(歪曲)시키는 자들은 여러 모양으로 죄인들에게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 이외에 어떤 원인을 발견 하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창조주의 손에서 자비를 받을 만한 것으로 이런 것 혹은 저런 것으로 부여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당신께서 택하기로 한 자들을 골라 내셨는가 라는 질문을 검토해 보자.

 

택자 자신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끌만한 무엇이 있었는가? 저희에게 어떤 덕행이 있었기 때문이었는가? 저희가 인자하고 온유하며 진리를 말하기 때문인가? 저희가 착했으므로 하나님이 저희를 택하셨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니라>(그는 하나님이다)(마19:17)고 하셨다.

 

저희가 어떤 착한 일을 하였기 때문 이였는가? 그렇지 않음은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2)라고 기록되었다. 저희가 열심히 하나님을 찾은 증거가 있기 때문이었는가? 롬3:11에 <하나님을 찾는자도 없고>라고 하였으니 그런 것도 아니다.

 

저희가 믿을 것을 하나님이 미리 아셨기 때문 이였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허물과 죄로 죽었든>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가 믿는 일이 불가능할 때에 어떻게 그들을 신자로 하나님이 미리 아실 수 있겠는가? 성경이 말하기를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다>(행18:27)고 한다.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니 이 선물을 떠나서는 한 사람도 믿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동기는 그분 자신에 있고 그의 선택의 대상자들에 있지 않다. 단순히 그가 저희를 택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가 택하기로 한 자들을 골라내셨다.

 

2, 구원에 나타난 성자의 주권

 

그리스도가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는가 성부가 그를 죽게 하심에 대한 분명한 목적이 잇거나 또는 성자가 당신의 생명을 버리시는 데에 일정한 계획이 있는 것에 대하여는 변론할 필요가 없다(<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행15:18).

 

그러면 성부의 목적과 성자의 계획이 무엇이었는가? 그리스도는 <하나의 택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우리는 대답한다.

 

그리스도의 사망에 제한된 계획이 세워져 있다는 것은 많이 논란되어 내려온 것임을 우리는 잊지 않았다(성경에 계시된 위대한 진리로 변론되지 않은 것이 있는가). 다음 사실들도 우리가 역시 잊지 않았다. 우리 주님의 인격과 업적에 관계된 것은 무엇이나 가장 존경하는 마음으로 취급해야 되며 또 <주님이 이렇게 일러 가라사대>라는 말씀은 우리가 주장하는 모든 말씀에 부언해야 된다. 우리는 율법과 계명에 호소할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죽으셨는가? 그가 피를 흘려서 구속하시려는 자들이 누구인가? 확실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그에게 확정적 목적이 있었다. 그러했다면 확정적 목적이나 하나님의 목적이 반드시 효력을 발생해야 되기 때문에 그 목적의 범위는 제한되어야 할 것을 필연적으로 의미한다.

 

만일 그리스도의 확정적 목적에 전 인류가 포함되었다면 가장 확실한 것은 온 인류가 다 구원받을 것이다. 이 불가피한 결론을 면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말하기를 그리스도에게 그런 확정적 목적은 없었고 그가 죽으실 때에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조건적으로 설계해 놓으셨다고 한다. 이 주장을 배격하는 사상이 언약에 나타나 있으니 그것은 성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사상이 언약에 나타나 있으니 그것은 성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아니 그가 육신으로 탄생하시기 전에 성부가 성자와 맺은 것이다.

 

구약의 교훈에 의하면 성부가 성자의 죄인을 위한 수난을 위하여 그에게 어떤 상급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대하여 잘 알려진 이사야 53장에서 한 두 구절만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되며.....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다> 또 <나의 의로운 종이....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10, 11절)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렇게 질문하고 싶다. 인류 전체 가운데서 어떤 이들은 구원하시기로 하나님이 작정하셨다. 그런고로 확실하다고 하지 않는다면, 어덯게 그리스도가 <자기의 씨를 볼>것이며 또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는 말이 확실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자들을 실제로 준비해 놓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가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라고 확언할 수 있겠는가? 주 예수께서 분명히 전 인류를 구원하실 목적을 가지셨다고 하는 주장은 어떤 지성인도 받아서 안 될 비난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의 무소부지에 의하여 미리 아신 것을 계획하신 것이 결코 그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비난을 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그의 사망의 목적이 예정된 것에 한 하여는 그리스도가 택자들만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만이 우리가 택할 주장이다. 모든 독자에게 이해될 말로 정리한다면 그리스도는 전 이류가 다 구원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죽으시지 않고 성부가 그에게 주신 자들을 확실히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께서 다만 속죄하시기 위하여 죽으셨을 뿐 아니라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히9:26) 죽으셨다.

 

(1) 구원의 제한된 계획은 필연적으로 성부가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영원 전에 선택하신 후에 오는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에 의하면 주님이 화육(化肉)되시기 전에 말씀 하시기를 <하나님이여 보시 옵 소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왔나이다>(히10:7)라고 하였고 그가 화육하신 후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해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 이니이라>(요6:38, 39)라고 하셨다.

 

만일 하나님이 태초부터 더러는 구원하시기로 택하셨다면 그리스도의 뜻이 성부의 뜻과 꼭 일치하기 때문에 그가 특별히 관심을 둔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쫒지 아니하리라....나를 보내신 의의 듯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7, 39).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주셨음이로이다.....세상 가운데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였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우너하옵나이다>(요17:1, 2, 6, 9, 24).

 

창세 전에 성부가 성자의 형상을 좇게 하기 위한 사람들을 예정하셨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주 예수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게 하셨다.

 

(2) 진정한 구속의 특성은 죄인들이 구속함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목적에 벌서 제한되어 있음을 증명해 준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 편과 인간 편의 두 가지 중요한 관점에서 고찰할 수 있다. 하나님 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는 화해, 하나님의 진노를 삭아지게 함 즉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에 합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 편에서 그것은 대속이요, 무죄한 자가 죄인이 죄는 것 즉 의인이 죄인을 위해서 죽는 것이다. 엄격하게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위한 대속과 자원해서 죽음을 취함은 대속하는 이와 자기가 위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화해하고, 죄를 지시고 또 법적 의무를 대신하실 분의 편에서 확실히 인정함을 포함한다.

 

더욱이 율법을 주신 분이 대속자가 마련해 놓은 만족을 받아드리신다면, 대속자가 대행하고, 또 그 자리를 취함 받은 자들은 필연적으로 사죄함을 받아야 한다. 만일 내가 빚을 지고 갚을 힘이 없을 때에 다른 사람이 와서 대신 갚아주고 영수증을 받았다면 채권자는 법적으로 내게 빚을 갚으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을 속죄 제물로 드렸고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신 것이 삼일 후에 무덤으로 증명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누구를 위해서 이 속죄 제물을 받았는가 함이다. 만일 그것을 전 인류를 위하여 드렸다면 모든 사람이 진 빚은 취소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면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아담의 후손 전부를 위하여 <저주함을 받았다면> 결국 한 사람도 정죄함을 받지 않을 것이다.

 

<빛을 하나님이 더번 즉 처음에는 내 피흘리는 증인의 손에서 그 다음에는 다시 나에게서 갚으라고 하실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예외가 없이 모든 사람의 빚을 다 탕감해 주시지 않았음은 <옥에 덤짐을> 받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니(비교: 벧전3:19에 <옥>이라는 헬라어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 그들이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 하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전 인류의 죄를 다 지신 것이 아님은 더러는 <죄 가운데 죽겠고>(요8:21) 또 더러는 그들의 <죄가 그저 있기>(요9:41)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아담의 후손 전부를 위하여 <주주를 받지> 않으셨음은 그가 말하기를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마25:41)고 함을 받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꼭 같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곧 <그가 지금 자기를 우 ㅣ하여 저주를 받고 있는 자들을 위해 저주를 받으셨다고 하는 것이요, 그가 지금 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으면서, 그를 앙망하고 있는 자들을 위하여 대신 벌 받으셨다고 하는 것이요, 또 그가 영원한 고통 가운데서 ‘죄 값을 사망’으로 지불할 사람들을 위하여 속죄하는 값을 지불했다>(G,S. Bishop)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반면에 성경이 가르친 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양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셨고, 또 그가 온전히 구속하는 구원을 예비하셨고, 그가 실제로 대속하는 값을 내셨고, 그가 진정으로 화목 시키는 화해가 되셨으며, 또 그는 참으로 구원하시는 구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3) 위에서 말한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고 또 그것을 확증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제사장직에 대하여 성경이 기르치는 교훈이다. 그리스도는 지금 대제사장적으로 중재의 역사를 하신다.

 

그러나 그가 누구를 위해서 화해를 하시는가? 전 인류를 위해서 또는 당신의 백성만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신약이 주는 해답은 분명하다. 우리 구주께서 참 하늘로 올랏가셔서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히9:24). 다시 말해서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히3:1)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 또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5)고 기록되었으니 구약의 예표(豫表)와 꼭 일치된다. 제사드릴 짐승을 잡은 후에 아론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로 또 그들을 위해서 지성소에 들어갔다. 이스라엘 각 지파의 이름이 그의 흉패에 새겨져 있고 그가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이것은 요17:9절에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우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고 한 우리 주님의 말씀과 일치 될만 하다.

 

이와 관련하여 매우 주의할만한 다른 성구가 있으니 그것은 곧 로마서 8장에 있다. 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라고 질문했는데, 그 다음에 성령의 감동으로 대답하기를 <외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간구하심은 같은 대상을 위하신 것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그것이 예표에 있는 것과 같이 원형에도 있다. 속죄와 구원은 같이 있다.

 

마일 그리스도가 택자들 만을 위해서 간구하시고 <세상을 위하지 않는>다면 그는 택자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다.

 

(4)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유익을 얻는 사람들의 수는 구속의 성격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의해서 뿐 아니라 그의 권세에 의하여서도 결정된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가 하나님으로 육신을 쓰고 탄생하셨다면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가 목적한 것은 그가 성취하시며, 그가 사신 것은 그가 소유하실 것이요, 또 그가 마음에 두신 것은 그가 확보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소유하셨다면 아무도 그의 뜻을 온전히 거스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추상적으로는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아무에게도 억지로 자기를 구주로 영접하게 하시지 않는 한 그가 이 권세를 사용하기를 거절하신다. 그것이 한 편으로 사실이나 다른 편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어떤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문제이다. 본래 죄인은 하나님과 원수이다. 그에게 역사하는 신령한 능력 이외에 아무것도 이 원수를 정복할 수 없다. 그런고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죄인으로 영생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로 올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은 죄인이 나면서부터 지닌 적개심을 정복하는 신령한 능력이다. 그러나 이 <적개심>이 전부 정복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 적개심이 너무 강해서 정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너무 강하게 반항하므로 그가 들어 갈 수 없기 때문인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의 무소 불능함을 부 인하는 것이 된다.

 

다음에 문제되는 것은 죄인이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님은 모든 사람은 다 나면서부터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오기를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즐거이 헌신하니>(시110:3)라고 함과 같이 그리스도에게로 오고자 하는 생각은 사람의 선천적 및 후천적 <적개심>을 정복하는데, 있어서 사람의 마음과 의지에서 역사하는 신령한 능력에서 생긴 것이다. 그리스도가 오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당신께로 오게 할 수 없다 고 말하는 것은 천지에 있는 모든 권세가 그의 것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사람의 책임을 말살시키지 않고 당신의 권능을 발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여기서 질문한 문제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당신의 권능을 발휘하셔서 당신에게 온 자들로 올 마음이 생기게 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그들의 책임을 말살 시키지 않고 이렇게 하셨다면 왜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실 수 없겠는가? 만일 그가 한 죄인의 마음을 당신에게로 돌이킬 수 있었다면 왜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실 수 없겠는가?

 

흔히 말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은 그로 하여금 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능력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의지에 대한 문제이다. 만일 주 예수께서 전 인류를 구언하시기로 작정하셨고 원하셨고 또 목적하셨으면, 전 인류가 구원을 얻던지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당신의 목적대로 성취하실 능력이 부족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결코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질문한 난제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실패하실 구주는 하나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의 계획을 제한하신 것을 믿어야할 일반적 우너리들을 생각했으니 이제 그것을 분명히 인정하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생각해 보자. 이사야53장에서 하나님이 성자에 대하여 <그가 곤욕과 신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리요>(8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요셉에게 주의 사자가 말한 것과 완전히 조화를 이룬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고 한 말이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이스라엘 뿐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은 다 가르킨다.

 

우리 주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하셨다.

 

그러나 예외가 없이 모든 사람을 포함했다면 왜 <많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그가 <속량하신> <그의 백성>이다(눅1:68). 착한 목자가 그 목숨을 버린 것은 <양>이지 <염소>가 아니다(요10:11). 자기 피로 사신 것은 <하나님의 교회>이다(행20:28).

 

한 성경 구절만 더 생각해 보자. 요11:49-52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되는 것이 너희에게는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으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을 미리 말함이더라>.

 

여기에서 우리에게 말한 대로 가야바가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과 같이(벧후1:21) 그의 예언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에 말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계시의 신령한 기원은 분명히 확증되었다. 여기서도 우리는 확실히 알려주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그의 교회를 위하여 죽으셨음은 교회로 하나님의 자녀들(여러 민족들 가운데 <흩으진>)을 이제 <모아 하나가 되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가 죽으시기도 전 그가 당신의 교7회를 설립하기 전에 교인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나기도 전에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함을 받았다. 그런고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양자로 예정되었기>(엡1:45)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같은 모양으로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기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있을 것이> 아니다)(요10:16)라고 했다.

 

만일 일찍이 십자가의 진정한 계획은 우리의 복된 구주의 마음과 그의 말씀에 제일 높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면 그의 전도 생활 기간중 마지막 주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전도 생활 기간중 마지막 주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주간에 대한 성구들이 우리가 탐구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 가 살펴보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17:19).

 

이 말의 의미는 성부가 그에게 <주신>자들 즉 그의 백성 때문에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만일 그리스도가 차별이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면 왜 이렇게 차별하는 말을 썼을까? 하고 질문할 수 있다.

 

이 대목을 끝내기 전에 그리스도의 사망의 제한적 계획을 가장 강하게 가르치는 것 같이 보이는 구절들 가운데 몇 개를 간단히 생각하기로 하자.

 

고후 5:14절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라고 했으나 이것이 본절에서 긍정하는 것의 전부는 아니다. 이 말씀이 포함된 구절을 세밀하게 살펴본다면, 그 말씀이 무제한 구원을 가르치는 대신 제한적 계획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들어날 것이다. 그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헬라어에는 <모든 사람>앞에 정관사(定冠詞)가 있고 동사의 시상(詩相) 부정(否定)과거이다. 그런고로 이렇게 읽어야 될 것이니 즉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니 곧 만일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다면 저희가 다 죽었다> <만일....그러하였다.......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라는 말에서 명백한 결론을 짓는다. 그가 의미하는 것은 한 사람이 그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저희들도 법적으로 죽은 것으로 인정된다.

 

다음절에 계속하여 말하기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한 사람이 죽었으나 <다시 살아나셨다> 그와같이 그가 위해서 죽으신 <모든 사람>도 살아났음은 여기에서 저희가 <산다>고 했기 때문이다. 위해서 대신함을 받는 자들은 법적으로 저희 자신들이 친히; 행하는 것으로 인정함을 받는다. 법에 의하면 대신자와 대신함을 받는 자들은 일체이다.

 

하나님 앞에서도 그러하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과 일체요 자기 백성은 그와 일체다. 그러고로 그가 죽으실 때에 저희도 죽었고(법적으로)그가 살아나실 때에 저희도 역시 살아났다.

 

그러나 17절에는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 피조물이요 그는 길제로 법에 의해서도 새 생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가 위해서 죽은 <모든 사람>은 자기들을 위해서 살지 말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살게 함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자기를 위해 죽은 이 <모든 사람> 층에 속하는 자들은 <저희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것이라는 번적 진리대로 일상생활에 그렇게 실천하라는 권면을 받았다.

 

그래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함은 우리를 위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위하여 죽으신 <모든 사람>은 <산자들>이요 또 <그를 위하여>살게 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는데 그 범위를 잘 보여 주기 위하여 그 순서를 끝에서부터 살피기로 하자.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해서 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게 하였다. 여기에서 이렇게 권면을 받은 사람들은 <산자들> 즉 영적으로 산 자들이다. 그런고로 저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왜냐하면 인생들 가운데서 저희들만이 신령한 생활을 소유하고 그 외의 노든 사람들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 즉 <저희들>이니 그들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이 구절이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가 당신의 모든 백성, 택자들 곧 성부가 그에게 주신 자들이요 또 그의 사망의 결과로(또 저희를 위하여 다시 살았음) 저희는 <살았다>(또 택자들만이 그렇게 <사는> 자들이요 또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희가 소유한 이 생명은 반드시 <그를 위해서> 살아야 하며 지금도 그리스도으의 사랑이 저희를 반드시 <강권하신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딤전2:5, 6).

 

여기서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라는 말씀을 설명하기로 하자. 성경에 <모든>(인류에게 씌여진 때에)이란 말은 절대적과 상대적인 두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어떤 구절들에 그것은 예의가 없는 모든 사람으로, 어떤 구절들에는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을 각각 사람을 의미한다. 어떤 구절들 중에 이 두 이미 가운데 어느 것인지는 문맥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하며 또 병행된 구절들과 비교함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라는 말이 상대적이요 또 제한적으로 사용됐고 그런 경우에는 차별 없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고 예외가 없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지 않음은 몇 성구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그 가운데에 두세 가지를 예시하기로 한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막1:5). 이 말씀은 유대와 예루살렘 온 땅에서 각 남자와 각 여자와 아이들 마다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뜻인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눅7:30에 뚜렷하게 말하기를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다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예외가 없는 모든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차별이 없는 모든 사람 즉 모든 계급과 상태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눅 3:21의 말씀도 같은 모양으로 설명된다.

 

또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라>(요8:2)라고 한 말씀을 절대적으로 혹은 상대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백성이 다>라는 말씀은 <예외가 없이 다>라는 뜻인가 그렇지 않으면 차별이 없이 다 즉 각계의 사람과 여러 상태의 사람들을 의미하는가? 후자를 의미함이 분명함은 이때 즉 초막절에 성전에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마다 다 수용할 수 없었음이다.

 

행 22:15에 말하기를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분명히 <모든 사람>은 인류의 각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는 딤전2:6에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라는 말씀은 차별이 없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고 예외가 없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말한다.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는데 이 모든 사람은 모든 족속에 속한 사람들 모든 세대에 속한 사람들, 모든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니 다시 말해서 계5:9의 말씀과 같이 모든 택자들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다.

 

계 5:9에 말씀하기를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라고 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구절에 언급된 <모든 사람>의 정의(定義)와 반대되지 않음이 마20:28에 나오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한 말씀에서 명백해 진다. 만일 그가 예외가 없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셨다면 이 <많은 사람>이라는 제한이 아주 무의미할 것이다.

 

더욱이 여기 제한하는 말인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는 문구를 반드시 생각해야 된다. 만일 그리스도가 전 인류를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다면 많은 사람이 영원히 멸망할 것이 확실함을 보면서도 이 사실을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인가?

 

그러나 만일 우리 본문의 뜻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택자 즉 민족과 사회적 유신과 도덕적 특성과 연령이나 성(性)의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다면 이 제한적 술어의 뜻은 온전히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기약>이 디면 이것이 저희의 각 사람의 구원이 실제로 성취될 때에 <증거 될>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 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2:9).

 

<사람>에 해당되는 말이 헬라어에는 없고 추상적으로 되어 있으니 즉 <그가 각자를 위하여 죽음을 맛보았다>라고 되어있다.

 

수정 영역 성경(English Revised Verision)에는 바르게 <사람>이란 말은 생략했으나 그것을 필기체로 삽입한 것은 잘못이다. 다른 해석가는 <것>(thing)이라는 말을 삽입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가 모든 것을 위하여 사망을 맛 보았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한다. 바로 그 다음에 오는 말씀이 이 본문을 설명하는듯하니 즉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 하도다>라고 한 말씀이다.

 

사도가 여기 기록한 것은 <아들들>에 대해서다. 우리는 <아들들>은 생략하고 또 아들이란 말을 삽입할 것을 제외한다. 그래서 히2:9-10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제한적 계획을 가르치는 대신 우리가 인용한 다른 성구들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 성구들은 구원의 제한적 목적을 말한다. 즉 우리 주님이 <아들들>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고> 전 인류를 위해서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결론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다루어 온 구속의 유일한 제한은 순수한 주권에서 생긴다. 이 제한은 가치와 제한에 관한 것일 뿐 아니라 목적과 활용에도 관한 것이다.

 

 

 

3, 구원에 나타난 성령의 주권

 

성령은 복된 삼위일체의 삼위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다른 두 위(位)의 뜻과 목적과 완전히 조화됨을 의미한다. 성부가 하신 선택의 영원한 목적과 성자가 죽으심의 제한적 목적과 성령이 하시는 역사의 국한된 범위는 완전히 조화된다.

 

만일 성부가 어떤 이들을 창세전에 택하셔서 그들을 성자에게 주셨으니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다면, 지금은 성령이 <세상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려고> 역사하시지 않으실 것이요 현재에 세상에서 하시는 성령의 사명은 그리스도가 드린 속죄 제물의 유익을 적용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성령의 범위가 아니라 그의 능력과 역사가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에 의하여 지휘된다는 점이다.

 

이 주장을 증명하기 전에 먼저 우리 주님이 (요3:8에)하신 말씀에 호소하여 본다면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바람과 성령을 비교했다. 비교한 것은 두 가지이니 첫째는 두 가지가 다 주권 아래서 움직이고, 둘째로 양자가다 신비하게 역사한다는 것이다.

 

비교는 <이러하니라>라는 말에 지적되어 있다. 첫째 유사점은 <임의 불매>라는 문구에 있고 둘째 유사점은 <알지 못하나니>라는 말에 들어난다. 우리가 지금은 둘째 유사점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첫째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바람은 제재하거나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바람이 사람의 의사를 물어보거나 그의 지혜로 말미암아 조종될 수도 없다. 성령도 이와 같다. 바람은 임의로 언제 어디로 던지 분다. 성령도 그렇게 하신다. 바람은 신령한 지혜에 의하여 조종되나 아직도 인간이 볼 때는 그것은 절대적 주권에 의하여 부는 것이다. 성령도 그러하시다. 어떤 때에는 바람이 너무 약하게 불어서 나뭇잎이 흔들리지 않으나, 다른 때에는 너무 강하게 불어서 그 소리를 먼 곳에서 들을 수 있다.

 

중생의 경우도 이러하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ㄴ무 부드럽게 다루시므로 그의 역사가 사람들이 거의 목격할 수 없을만 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의 역사가 너무 강하고 급하고 또 크고 변혁적이어서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명백히 알려진다. 어떤 때에는 바람이 전연 좁은 지역으로 불고 다른 때에는 넓은 지역에로 분다. 성령도 이러해서 오늘은 한 두 영혼에게 역사하시나 내일은 오순절 때와 같이 큰 무리의 전체의 <마음을 찌를>수 있다. 그러나 그가 소수나 다수의 사람에게 역사하던지 간에 사람과 의논하지 않는다. 그는 당신의 맘대로 역사하신다. 성령의 주권적 의사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가 각각 우리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성부는 구원을 예정하셨고 성자는 화해하시고 성령은 중생시키신다. 성부는 우리를 택하셨고 성자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고 성령은 우 리를 되살려 내신다.

 

아버지는 우리 때문에 걱정하셨고 아들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피를 흘리셨고 성령은 우리에게 내적으로 역사하신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성령의 역사와 그의 신생시키는 주권적 역사이다. 성부는 우리의 신생을 목적하셨고 성자는 신생이 가능케 하셨으나 그의 <고통>에 의하여 성령으로 난(요3:6)신생을 주시는 이는 성령이다.

 

신생은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고 사람은 그 역사의 일부분이거나 또는 그 원인이 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그 특성이다. 출생은 출생된 자의 편에서 오는 어떤 노력이나 또는 역사를 제외시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자연 출생에 못지않게 영적 출생에 대해서도 아무 관계가 없다.

 

신생은 영적 부활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요5:24)이다. 부활은 전적으로 사람의 권한 밖의 일이다. 아무런 시체도 다시 살릴 수 없다. 그런고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요6:63)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령이 각 사람을 다 <되살리지> 못하니 왜 그런가?

 

각 사람이 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보통으로 대답한다. 성령은 다만 택한 사람들만을 되살리신다고 생각한다. 신앙은 신생의 원인이 아니고 그 결과이다. 이 문제는 변론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외부에서 온 것이요 본래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신앙이 사람의 마음 즉 사람의 성품에서 보통으로 작용하는 것에서 생겼다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살후3:2)고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신앙은 영적 선물 즉 신령한 성품의 열매이다. 또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죽었으니(<허물과 죄로 죽었다>) 그들에게서 믿음이 생길 수 없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신에 잇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 그러나 육신이 믿을 수 있다면 그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이 말씀과 <믿음이 없이는 <그를>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한 히11:6과 비교해 보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생겨나지 아니한 것으로 <기뻐하시>거나 만족하실 수 있는가?

 

성령의 역사가 믿는 것 보다 앞서 있다는 것은 살후 2:13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라고 한 말씀에 의하여 명백하게 성립된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은 <진리를 믿음> 앞에 있고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신생이라고 대답한다. 성경에 <성화>는 항상 <분리> 곧 무엇에서 무엇으로 또는 어떤 사람에서 분리함을 의미한다. 이제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 신생에 해당하며 그 위치에 대한 결과를 지적한다는 주장을 확대시켜 보자.

 

하나님의 종 한 사람이 있어서 백명의 불신자들에게 죽음을 전한다고 하자. 그는 저희에게 성경의 교훈에 의하여 저희가 타락함과 멸망을 받아야 할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하고 또 하나님과 그의 성품과 공의로운 요구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스도는 이 요구에 응하려고 의인이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부르셨으니 <이 사람>을 통하여 저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전하고 결론으로 그들을 권면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가르친 것을 믿고 그의 아들을 저희의 구주로 영접하라고 했다.

 

이 집회는 끝났고 회중은 해산해 버렸다. 그 가운데 99명의 불신자는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오기를 거절하고 세상에서 소망과 하나님도 없는 캄캄한 밤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남은 한 사람은 생명의 말씀을 듣고 그 뿌린 씨가 하나님이 준비해 놓은 땅에 떨어져서 그는 좋은 소식을 믿고 그의 이름이 천국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면서 집으로 갔다. 그는 <거듭>났으니 이 세상에서 갓난아기가 약한 손으로 어머니에게 본능적으로 매달려서 생명이 시작되는 것과 같이 새로 난 영혼도 그리스도에게 매달렸다.

 

루디아의 마음을 <주님이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행16:14)것과 곡 같이 성령이 그가 복음의 말씀을 믿기 전에 그를 되살게 하셨다. 여기에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 있다. 이 중생한 한 영혼이 그의 신생으로 말미암아 다른 99명에게서 떠나갔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에게서 떠나갔다.

 

살후 2: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자.

 

여기에 들어난 사상의 순서는 가장 중요하고 교육적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요 둘째는 성령의 거룩케 하심이요 셋째는 진리를 믿음이다.

 

꼭 같은 순서가 벧전 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라는 말씀에도 나타나 있다. 여기에 있는 순종함이라는 말은 주 예수의 피 뿌림의 공로가 발생시킨 <믿음의 순종>(롬1:5)으로 본다. 그와 같이 <순종>(히5:9)하기 전에 성령이 우리를 분리시키는 역사가 있고 그 이면에는 성부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있다.

 

<성령이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택하사....구원을 얻게 하신 자들>(살후2:13)이요 또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택하심을 입은 자들>(벧전1:2)이다.

 

성령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시고 또 하나님의 택자들만 구원하시는 일을 하신다. 저희를 그가 <위로 하시며> <인치시며>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며 또 장차 될 일을 저희에게 보여 주신다. 성부의 영원한 목적을 완성 하시는 데는 그의 역사가 필요하다. 가설적이나 존경하는 의미에서 말하기를 만일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죄인을 원하여 죽게 하시는 일 이외에 다른 일을 하시지 않았다면 죄인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은 일이 없었을 것이다. 죄인이 자기에게 구주가 필요한 줄을 알고 그를 구주로 영접할 마음이 생기게 하기 위 하여는 그 위와 그 안에 성령의 역사가 긴급하게 필요하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죄인을 위해서 죽으시는 일 밖에 아무것도 하시지 않고 당신의 종들을 보내셔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전파하게 하시며 그를 영접하던지 또는 거절하던지 전연 저희에게 맡겨 두셨다면 죄인마다 다 그를 거절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마음에 하나님을 미워하고 또 그와 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롬8:7).

 

그런고로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하는 일과 그를 내심으로 반대하는 일과 또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일을 받아 드리는 일을 위하여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택자 들도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엡2:3). 그래서 저희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 원수가 성령에 의하여 소멸되고 성령의 중생시킨 결과로 저희는 그리스도를 믿제 되었다. 왜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 밖에 바려 두심을 받았는가 하는 이유는 저희가 거기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을 뿐 아니라 성령이 그들을 그렇게 되도록 다루시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성령은 당신의 마음대로 능력을 사용하시기를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과 같이 당신이 원 하시는 대로 역사하시는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온전하심을 증명하려고 한 것은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位)는 서로 합의하고 조화되어서 역사하신다. 성부 하나님은 어떤 이들은 구원하시기로 택하셨고 성자 하나님은 그 택자들을 위해서 죽으셨고 또 성령 하나님은 그 택자들을 되살리신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찬송 성부 성자 성령>.

 

 

 

 

 

 

 

출처: 인터넷신학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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