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

[스크랩] 오경의 저술

하나님아들 2015. 7. 22. 15:56

제 9장 오경의 저술

 

오경은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지난 두 세기 동안 이 질문만큼 구약 연구에서 주목을 받은 질문은 없다. 하지만 오랜 학문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전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 장에서는 당면한 이슈들이 해결되기를 바라기보다는, 다만 학자들의 주요 견해들을 개관하고 비평적 견해의 흐름을 짚어 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논쟁의 역사를 개관하고, 계시와 성경의 본질에 관한 전제가 비평적 논쟁의 성격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지적할 것이다.

 

논쟁의 역사는 세 주요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모세의 오경 저작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18000년까지; 2) 오경의 저술에 대한 문서이론이 비평적인 정통이 된 대략 1800-1975년; 3) 오경의 저술에 관한 논의가 훨씬 개방되고, 매우 다양한 입장이 여러 학자에 의해 주장되어온 175년부터 지금까지.

 

모세 저작을 인정하는 전통적인 견해

오경은 가르침을 목적으로 한 모세의 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오경은 모세의 삶과 그가 그의 가르침을 진술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다. 하지만 어디에도 누가 이 전기를 썼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특정 구절들은 모세가 썼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런 언급들이 어디까지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더욱이 거의 모든 율법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나 혹은 이와 비슷한 언급과 함께 시작한다. 만약 모세가 죽기 전에 한 세 번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든지 남기지 않았든지 간에 이 설교들은 모세가 한 말들인 것이다.

이런 관찰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오경을 단지 모세의 전기가 아니라 그의 저술로 이해하고 있다. 다른 구약 성경의 책들이 오경을 언급하는 방식 역시 모세의 저술을 암시한다. 모세의 저작은 신약성경 저자들의 전제이기도 하다.

오경의 마지막 몇 구절은 모세의 죽음을 기술하고 있다. 이것도 모세가 기록할 수 있는가? 1세기 유대인 저술가 필로와 요세푸스는 이것 역시 모세가 기록했다고 주장한다. 가장 위대한 선지자인 모세는 자기 자신의 죽음마저 기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유대적 견해는 아니다. 탈무드는 모세는 아마 여호수아가 팬을 들었을 마지막 여덟 절을 제외하고 모든 오경을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

 

오경에 대한 모세 저작설은 17세기까지 계속해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모두 인정하는 견해였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간혹 유대인과 기독교 변두리에 있는 일부 그룹이 이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기는 했지만 주류 학자들에 의해서 거절당했다. 이는 중요한 이슈도 아니었다. 오경을 포함한 성경을 신학과 윤리를 위한 지침으로 읽었을 뿐, 결코 역사적인 질문과 문학적인 질문에 대답하려고 읽지 않았다. 교부들과 중세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 혹은 종교개혁가들이 모세 저작설을 다루기는 했지만, 이는 오경의 고대성과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지, 누가 그 책들을 썼는지를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개혁가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초점을 맞추었으며, 이후 학계를 지배한 비평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실제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문서 가설

소위 문서가설(The documentary Hypothesis)이라고 부르는, 오경의 발전에 관한 표준적인 설명은, 19세기 말에 그 명확한 형태가 형성된 이래 거의 1세기 동안 논의를 지배하였다. 15세기의 르네상스와 16세기의 종교개혁, 그리고 17-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는 모두 오경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에 흥미를 갖게 할 만한 지적인 환경으로 변화하는데 기여하였다. 르네상스의 특징은 고대 고전 자료로의 복귀에 있었다. 사람들은 로마인들과 헬라인들이 실제로 무엇을 믿었고 행했는지를 찾는 일에 매료되었다. 특별히 고대 라틴어 문체가 부활했으며 사람들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떤 문화나 사상의 기원을 이해할 때 그 문화나 사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경향은 성경을 포함하여 문학의 기원과 연대에 간심을 갖는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헬라와 로마 시대 사람들에게는 고려할 가치가 없던 이슈들이 이제는 중요하고도 가치 있는 논의의 주제가 되었다. 따라서 르네상스는 고대 작품들이 기록된 상황에 대한 연구와 이 작품들 가운데 가장 비평적인 본문들을 확립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도록 자극하였다.

 

물론 이미 성경은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고대 문서였지만, 종교개혁의 결과로 신학적인 논의를 위해 더욱 중요한 책이 되었다. 종교개혁가들은 로마와의 논쟁 과정에서 성경의 절대 권위에 호소하였다. 그들은 후대의 교회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기도 했으므로 교회는 성경의 원래 의미를 회복해야 하며, 성경과 초대 교회의 원리를 따라서 교회 질서를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은 이런 식으로 성경의 의미와 기원에 대한 학자적인 관심과 논쟁을 더욱 강화했다.

종교개혁의 결과 유럽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믿는 나라로 양분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어떤 형태의 교의도 거부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생겨났다. 실제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통치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전쟁으로 모든 형태의 계시 종교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들은,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교회의 지시가 아닌 인간의 이성이 삶의 지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성에 대한 이 같은 신념이 만개한 것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까지이며, 소위 계몽주의라고 부르는 사조가 등장한 시기다. 이 시대까지 모든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인 신념과 도덕성은 하나님께서 주시며, 또 이것들은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계시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몽주이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모든 판단의 척도가 되었다. 종교적이든 아니든, 진리에 대한 주장은 인간 이성의 법정에서 판단 받아야 했다. 그들은 이렇게 질문했다: 이 믿음을 지지할 만한 증거가 있는가? 이 믿음은 그 자체로 합리적인가? 이 믿음의 기원은 역사적으로 인정받을 만한가? 따라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기적과 예언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개입과 관련 있는 증거들을 의심하는 경향을 보였다. 성경이 많은 기적과 예언을 포함하고 있고 하나님의 책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성경도 비평적인 조사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후대에는 비평 이론들의 상투어가 되어 버린 사상들이 처음으로 초기 계몽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다.

 

영국의 정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그의 책 Leviathan에 오경에 관한 몇 가지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실었다(1651년). 그는 모세의 죽음이나 여러 시대착오적인 기록 등 모세의 저작설을 부정할 만한 몇 가지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 하비스는 오경 전체가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그는 신명기 11-27장은 모세가 썼으며, 그것은 힐기야가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책이라고 주장하였다. 하비스는 에스라가 오경의 초종 편집자라고 생각하였다.

베네딕트 스피노자는 비정통 유대인으로서, 그의 책 Tractatus Theolgico-Politicus가 1670년 출간되자 강력한 반대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오경이 모세를 3인칭으로 말하고 있고, 그의 죽음을 기술하며, 후대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모세가 오경을 썼을 리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야곱과 요셉 이야기의 비일관성을 지적하면서, 이는 그것들이 서로 다른 두 자료들에서 가져와 결합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경의 주 편집자는 모세보다 900년 후의 사람인 에스라(주전 5세기)라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이 오경 안에 여전히 중복과 모순이 존재하는 것으로 볼 때, 에스라 역시 자신의 작품을 완전히 마무리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이신론자들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믿음에 도전하였다. 그들은 세상을 창조한 신은 창조 후에는 더는 기적이나 예언이나 성육신을 통해 이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책에서 그리스도의 기적과 다니엘의 예언과 성경의 저자에 대한 전통적인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신명기가 열왕기하 22-23장에 나온 요시아의 종교개혁을 촉진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맨 처음 주장한 사람은 이신론자인 사무엘 파비시이다. 그는 제사장들이 자기 목적을 위해 그것을 기록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모든 법은 힐기야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결론 내리고 싶다. 그의 능력과 정직함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수전하든지 아니면 꾸몄든지 간에 율법을 소유하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Parvish. 1746,p.324)

 

이런 사상들은 당대에는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취급을 받았으며, 주도적인 신학자들이나 성경학자들에 의해서 즉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와서 오경의 저술에 관한 새로운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며, 이제 나는 이것에 관해 설명하려고 한다. 이 공감대는 세 가지 주요 기둥에 기초하고 있다. 첫째, 네 개의 주요 문학 자료로의 오경 분석; 둘째, 오경의 연대를 주전 7세기 후반으로 정함; 셋째, 출애굽기 25장에서 민수기 30장까지의 예배에 관한 법들인 P(priestly) 자료의 연대를 포로 이후 시대인 주전 5세기로 정함.

신학적인 집안 출신의 프랑스 의사인 장 아스트뤼은 모세의 오경 저작설을 ‘지난 세기의 질병’이라고 묘사하면서, 모세의 오경 저작설을 부인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Conjectures on the Original Memoirs that it seems Moses used to Compose the Book of Genesis(1753) 이라는 제목으로 오경 안에 명백히 나타나는 비일관성에 관해 설명하였다. 그는 두 번의 인간 창조 기사나 사라가 두 번이나 이방의 왕에게 넘겨진 기사처럼, 창세기 안에 있는 반복된 기사들에 주목한다. 둘째,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이름들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에 주목한다: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여호와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스트뤽은 이런 이름들은 동의어가 아니며, 서로 다른 원저자의 성향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기준을 사용하여 창세기를 두 개의 긴 자료와 두 개의 짧은 자료로 쪼갠다. 그는 모세가 창세기를 쓸 때 복음서 시놉시스처럼 네 개의 병행이 되는 칸에 이 자료를 배열하였다고 주장한다. 후대에 누군가가 그 자료를 조합하여 오늘날의 본문을 만들었으며, 이 때문에 현제의 창세기의 특징인 반복과 비일관성이 생기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목적

앞의 논의는 이 책의 목적들과 목표들을 기술하는데 있어서 배경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앞으로 진술하는 내용들은 이 개론서의 구도에 대해서 지침을 제공해 주고, 이 책에 채택된 접근방법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 준다. 우리는 이 개론서가 지향하고자 하는 점들과 이 개론서가 다른 통상적인 개론서들과 다른 점들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신학적인 시각

 

우선 이 개론서는 본문에 대해서 프로테스탄트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접근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인 성향은 여러 가지 비평학적인 문제들을 논의할 때 특히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복음주의적인 교리가 모든 해석학적이고 주석적인 문제들을 다 해결해 주지는 않으며, 또한 이런 태도가 우리로 하여금 역사비평학의 전통으로부터 어떤 것을 배우는데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개론서는 복음주의적인 진영과 더불어 비평학적인 학자들이 수고해서 얻은 결실들에도 의존하고 있는 경우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복음주의 학자들과 비평학자들의 사이를 갈라놓은 많은 문제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상호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상호대화와 상호존경의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개론서는 비평학적인 연구들이 잘 준비해서 내린 결론들과 많은 경우 의견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움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심을 가지고 그렇게 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복음주의 학자들이 때로는 오직 학계에서 환영을 받기 위한 일념으로 무비판적으로 비복음주의 학계의 흐름들을 따라가는 것을 비판한 건드리의 지적에 동의한다. 우리는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복음주의적 시각에서 개론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교회가 물려받은 그대로 성경을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서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나 개별적인 성경책들의 형성과정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개론서는 최종적인 형태의 정경 본문에 정통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접근태도는 정경신학, 그리고 성경의 문학적인 연구에 대한 최근의 관심과 잘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비록 이것이 환영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의 유사성은 d어떤 의미에서는 피상적이다. 왜냐하면 성경 본문에 대해서 공시적인 접근방법을 취하는 비평학자들의 대부분이 사실은 통시적인 문제들을 단지 일시적으로 괄호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일즈가 그 좋은 예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전형적인 역사비평학을 버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이 신학과 교회에서 하고 있는 정경적인 역할을 강조해 주기 위해 이런 관심사들을 격하시키고 있다. 출애굽기에 대한 그의 주석(1974)은 공시적인 문제들과 통시적인 문제들의 관계에 대해서 아주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주석에서 이 두 부류의 문제들은 공존하기는 하지만 서로 통합되어 있지는 않다.

 

범위

구약의 개론서는 총론적인 개론과 각론적인 개론의 두 가지 영역으로 보통 나눈다. 총론적인 개론은 전 성경을 포괄하는 주제들, 즉 사본이나 정경 등의 문제들을 다룬다. 각론적인 개론은 개별적인 책들을 다룬다. 우리 개론서는 각론적인 개론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성경상의 책 순서에 따라 진행될 것이다. 특히 이 책에 채용된 순서는 영어성경의 독자들이 알고 있는 순서가 될 것이다. 이 순서는 맛소라 전통에 서 있는 히브리어 성경의 순서를 따르는 다른 많은 개론서들과 차이가 난다.

위에서 언급된 대부분의 개론서들은 성경의 각 책과 관련된 역사적인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통시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보수적인 노선이나 비평학적 노선의 구분이 없다. 저작권, 저작연대, 사본 발전 과정의 문제, 각 책 내용의 역사적 배경의 문제 등이 통시적인 문제의 전형적인 예들이다. 이런 문제들은 이 책에서도 필요한 경우에는 역시 다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 이외에도 독자들에게 구약의 책들에 대한 개관을 제공해 주는데 있어서 중요한 논제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문학적인 장르, 형태, 문체 등의 문제들은 바른 개관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들이다. 게다가 비록 성경이 각 책이 정경상의 다른 책들과는 별개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책의 현재의 의미는 정경의 다른 책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는 신약과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각 책의 신학적인 메시지를 광범위한 정경적 맥락 속에서 다소 충분하게 고찰해 보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세 가지 문제, 즉 역사적 배경, 문학적인 분석, 그리고 신학적인 메시지의 문제가 각 장의 논의의 내용을 구성할 것이다. 우리는 이 장의 두 번째 부분에서 이 세 가지 화제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을 제공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독자들은 이런 주제들을 다 포괄하면서 어떻게 이 개론서의 길이를 적당한 크기로 유지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하고는 했다. 우리는 이 책이 수업시간에 효율적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책의 크기를 제한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다른 개론서들의 경우보다 조금 덜 다루는 주제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연구사에 대한 것이다. 오경의 문서 분석 등과 같은 몇 가지 비평학적인 문제들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연구사 속에서 중요한 순간들만을 포착하고자 할 것이며, 과거의 학자들에 대한 총괄적인 개관을 하기보다는 대표적인 학자들만을 언급하고자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눈을 밝게 해준 연구들에 대해서는 그 가치를 인정해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또한 참고문헌 목록들은 관심 있는 독자들이 해당 책의 연구사를 접근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들의 목록을 제공해 줄 것이다. 참고문헌들의 경우에는 영어로 쓰인 책들과 소논문들에 우선권이 주어져 있음을 독자들은 발견할 것이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독일 학계가 이 분야에서 첨병의 역할을 하던 것으로 생각되던 시대가 종결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신학대학원 학생들에게 이런 참고문헌 목록들이 유효적절한 것이 되게 하려는 우리의 노력에서 기인한다. 외국의 참고문헌 목록들은 오직 논의에 매우 중요한 경우에만 목록에 포함되었다.

 

중요한 논제들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각 장은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각 책의 역사적 배경, 문학적인 분석, 신학적인 메시지를 다루고 있다. 이 개론적인 장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 세 가지 논제들을 설명하는데 할애하고자 한다. 다음의 내용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본 필자들의 성향을 이해시키고, 또한 본 필자들이 이런 더 일반적인 내용들에 대해서 재론할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세 가지 논제가 비록 분리되어서 다뤄지고 있기는 하지만 독자들은 이 주제들이 성경 본문에서는 완전히 통합된 형태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는 신학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신학은 역사적인 사건들에 근거하고 있다. 이처럼 신학적인 역사 혹은 역사화된 신학을 펼치고 있는 본문들을 우리가 문예적인 작품으로 부르는 것은 타당성이 있다.

 

모세가 어떻게 창세기를 저술하였는지에 대한 아스트뤽의 이론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없지만, 중복(dublets)과 하나님의 이름의 변경(changes)이라는 기준으로 책을 분석한 그의 원리는 후대의 논의에 기초가 되었다. 오경이 다양한 자료에 기초하고 있고, 한두 편집자가 현재의 오경을 형성했다는 주장 역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 자료의 성격과 그것들이 결합된 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논재잉 벌어지고 있다. 그 동안 오경의 발전에 관해서 세 가지 다른 모델이 제시되어 왔다.

 

가장 오래된 오경의 저술 모델은 단편가설(fragmentary hypothesis)이다. 이 이론은 한명의 오경 저자나 편집자가 다양한 자료-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다-를 이용하여 그것을 한데 엮어 일관된 진술을 형성하였다는 견해다. 저자나 편집자는 어느 정도 단편의 표현들을 자유롭게 고칠 수 있었지만, 그 자료의 개별적인 특성을 모호하게 할 만큼은 아니었다. 만약 그 저자나 편집자가 표현을 심하게 바꾸었다면 학자들은 오경에 편입된 단편들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19세기 초 단편 가설을 선도한 두 명의 유력한 학자는 스코틀랜드의 사제 알렉산더 게데스와 독일 학자 요한 세베린 파터다. 게데스는 오경이 모세 시대나 그 이전 시대에서 유래한 단편들을 편집한 채긍로서, 솔로몬 시대(주전 10세기)에 한데 모았다고 주장한다. 파터는 가데스의 생각을 좀 더 발전시킨다. 그는 자료의 연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이 자료들이 예루살렘이 멸망하기(줒ㄴ 587년) 직전 유다에서 한데 합쳐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과 문체, 그리고 오경 안에 중복의 문제들을 설명하는 다른 방법은 보충 가설(Supplementary Hypothesis)이다. 이 견해는 원래의 짧은 작품이 여러 시대에 후대의 저자들에 의해 확장되었다고 본다. 잠언의 표제는 잠언이 바로 이렇게 기록되었음을 암시한다(잠 1:1; 10:1; 25:1; 30:1; 31:1). 다양한 저자는 저마다 다른 문체와 관심사가 있기에 각각 다른 방식으로 썼을 것이다. 보충 가설은 오겨잉 계속해서 개정되었지만, 그때마다 이전 작품들을 제거하거나 변경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치 눈덩이처럼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늘어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자료들을 포함하면서도 그 자료들의 독특한 특징들을 보존하였다는 것이다.

보충가설은 1830년대와 1840년대 독일에서 유행하였으며, 당대의 주도적인 학자로는 에발트와 드 베테가 있었다. 그들은 일련의 층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장 초기의 것은 출애굽기 21-23장에 나오는 십계명과 율법들이다. 이것에 엘로힘 혹은 하나님 층-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모든 자료들-이 편입되었다. 다시 이것에 여호와 층이 추가되고, 끝으로 신명기가 덧붙여졌다. 신명기를 추가한 사람이 전체 오경의 편집을 책임졋다고 본다.

하지만 보충가설은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이 두 가설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다. 이 가설들은 모두, 오경은 원래 네 개의 주요 자료가 나란히 배열되었다가 후에 현재의 내러티브 형태로 결합되었다고 주장한 점에서 아스트뤽의 원리로 돌아가고 있다. 이 자료들은 창세로부터 가나안 정복에 이르는 세상의 역사에 대한 두 가지 버전과 아브라함시대부터 정복까지의 다른 한 버전, 그리고 넷째 버전인 신명기로 구성되어 있다. 아스트뤽은 모세가 그 자료들을 한데 수집하였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두 문서 가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일련의 편집자들이 자료들을 하나하나 결합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20세기 대부분의 오경 연구를 지배한 문서설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 연구의 두 측면을 따로 분리해야 한다. 자료의 확인이 그 첫째 측면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아스트륏의 분리 원리를 생각하게 한다. 둘째 측면은 이들 자료의 연대다. 이는 스피노자 같은 초기 계몽주의 저술가들과 영국의 이신론자들이 제안한 역사 비평 방법을 사용한다. 자료 분석은 자료의 연대에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먼저 다룰 것이다.

 

자료 확인

율리우스 벨하우젠은 오경의 확장에 관한 문서가설을 확립한 독일 하자로서, 그는 네 가지 주요 자료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가장 오래된 자료는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로 부르는 J 자료다. J자료는 창세기에서 출애굽기 전반부까지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민수기의 짧은 단락들도 이 J자료에 속한다. 다음으로 오래된 자료는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부르는 E자료이다. 이 자료 역시 대부분 J자료와 병행이 되는 생생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5-50장의 야곱과 요셉 이야기는 J와 E로 쪼개진다. E자료는 창세기 15장 이전에는 나오지 않으므로, J자료와는 달리 E자료에는 창조와 홍수 이야기가 없다.

셋째 자료는 대부분 신명기다. 이 자료의 장르와 문체 때문에 이 자료는 큰 내러티브 자료들인 J와 E와 구분된다. 앞서 보았듯이 신명기는 율법에 관한 일련의 설교다. 신명기에는 율법 준수를 촉구하는 권면들과 온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긴급한 호소와 불순종의 위험에 관한 경고등으로 가득하다. 신명기의 특징적인 하나님의 명칭은 “여호와 우리/너희 하나님”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을 각각 여호와나 엘로힘으로 부르는 J와 E자료와, 신명기 자료를 구분해 주는 기준이 되고 있다.

넷째 자료는 제사 자료이다. 이 자료는 대략적으로 아스트뤽의 창세기의 A자료와 상응하여, 이와 함께 출애굽기와 레위기와 민수기에 나오는 예배에 관한 모든 자료와, 제사장들이 관심을 가졌을 만한 문제들과 관련된 자료들이 다 여기에 속한다. 창세기에서 족보들이 이 자료에 속하며, 1장과 17장과 23장 역시 안식이롹 할례와 같은 종교적인 주제들을 가르치고 있으므로 이 자료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아주 단순히 이 분석을 표현하자면,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자료

하나님의 이름

특징

내용

J(Yahwist)

여호와(Yahweh)

내러티브

창세기부터 출애굽기 24장까지의 50%; 민수기의 단편들

E(Elohist)

하나님=엘로힘(Elohim)

내러티브

창세기부터 출애굽기 24장까지의 33%; 민수기의 단편들

D(Deutronomist)

여호와 너희/우리 하나님

설교

신명기

P(Priestly)

하나님=엘로힘(Elohim)

목록, 예배에 관한 법들 등

창세기의 17%; 출애굽기 25장부터 민수기 36장까지

 

실제로 문서 가설은 오경을 여러 자료로 분해하며, 현재의 오경은 이 자료들이 긴밀히 엮인 것으로 본다. 영어권 세계에서 문서 가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히브리어를 담당한 드라이버(S. R. Driver, 1846-1914)다. 아래는 그의 창세기 1-25장의 분석을 단순화한 도표이다.

 

문서가설

 

자료

하나님의 이름

특징

본문(*는 다른 자료들의 요소들이 포함되었다는 뜻임)

J(Yahwist)

여호와

생생한 내러티브

2:4b-3:24; 4:1-26; 5:29; 6:1-8; 7:1-5, 7-10, 12,

16b-17, 22-23; 8:2b-3a, 6-12, 13b, 20-22; 9:18-27;

10:8-19, 21, 24-30; 11:1-9, 28-30;

12:1-13:18*; 16:1b-14*; 18:1-19:38*; 21:1a, 2a, 33;

22:15-18, 20-24; 24:1-25:6, 11b, 18, 21-26a, 27-34

E(Elohist)

하나님=엘로힘

생생한 내러티브

15:1-21; 20:1-18; 21:6-32, 34; 22:1-14, 19

P(Priestly)

하나님=엘로힘

목록, 연대,

종교적 이슈들

1:1-2:4a; 5:1-28, 30-32; 6:9-22; 7:6, 11, 13-16a,

18-21, 24; 8:1-2a, 3b-5, 13a, 14-19, 9:1-17, 28-29

10:1-7, 20, 22-23, 31-32; 11:10-27, 31-32; 12:4b-5

13:6, 11b-12a; 16:1a, 3, 15-16; 17:1-27; 19:29;

21:1b, 2b-5; 23:1-20; 25:7-11a, 12-17, 19-20, 26b

 

자료 분석을 위한 두 가지 기준은 하나님의 이름과 자료의 중복이다. 하지만 다른 자료에 속한 자료의 다양한 장르들, 목록들, 내러티브들, 설교들이 있다는 것은 다른 자료들은 다른 문체들을 가지고 있음을 뜻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드라이버에 따르면 “P의 언어는 역사가보다는 법률가의 언어다. 이 언어는 상황적이며, 형식을 갖추었고, 정확하다. 주제는 조직적으로 전개되며, 반복을 감수하고라도 상세한 부분을 정확히 묘사하려는 경향을 관찰할 수 있다.” J의 문체는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다양하며, 하나님의 행동은 충분히, 그리고 상세한 부분까지 선명하게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J와 E 사이에는 각각 다른 하나님 이름을 선호한다는 점 말고는 문체상의 차이가 거의 없다. 반대로 신명기는 “구두 전달에 잘 어울리는 수사적 문체를 취하고 있다. 문장은 길고 유려하며, 유음과 핵심 단어와 사우적인 표현들을 그 특징으로 한다.”

문서 가설에 따르면 이런 자료들은 원래 독립적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단번에 한 편집자에 의해서 한데 통합된 것이 아니라, 여러 시대를 거쳐 여러 편집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가장 오랜 자료인 J에 그 다음 오래된 자료인 E가 합쳐져서 JE가 되었고, 다시 얼마 후에 D가 더해져 JED가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긴 자료인 Prk 덧붙여져 JEDP, 즉 현재의 오경이 되었다. 이는 다음과 같이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다.

 

J ---------> JE ----------> JED ----------> JEDP(오경)

 

E D P

처음 문서 가설을 주장했을 때 아스트뤽은 주전 13세기경 모세가 사용한 문서를 복원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벨하우젠이나 드라이버가 주장한 문서 가설에 따르면 이 문서들은 훨씬 후대의 것이며, 모세와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아주 미미한 수준에 그친다. 문서들과 관련된 연대는 다음과 같다.

문서

연대(주전)

(모세)

(1300)

J

950

E

850

JE

750

D

622

JED

600

P

500

JEDP

450

 

신명기의 연대를 제외하고 모든 연대는 추정치에 불과하다. 학자들에 따라서 50년 경도까지 그 연대를 조정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소한 문제들이다. 훨씬 더 설명하기 어렵고 정당화하기 어려운 문제는, 오경 자료에 대한 이런 연대를 추정하게 한 역사적인 주장과 비평적인 전제들이 남긴 부산물들이다. 이는 그동안 제기되어 온 모든 자격들과 불확실성들을 언급하는 설명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벨하우젠의 견해를 그가 Prolegomena to the History of Israel(1878)에서 제시한 대로 전하고, 후에 현대 학자들의 견해를 살필 때 문서 가설의 몇 가지 문제점을 언급하려고 한다.

 

벨하우젠은 이스라엘의 종교의 진화 과정을 다섯 영역으로 관찰하고, 역사서들에 묘사된 발전 과정과 오경 자료 안에 들어 있는 다양한 종교의 그림들을 조화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예배의 자리, 희생제물, 절기, 제사장직, 그리고 제사장의 수입 등을 관찰한다. 각 경우마다 벨하우젠은, 처음에는 모든 것이 다소 질서가 없고 규례도 단순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관료제도가 발전하고 법도 좀 더 세밀히 정비되고 더 엄격한 준수를 요구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예배의 자리에서 시작한다. 사사기를 읽으면, 우리는 어디서든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기드온은 오브라와 소라 땅 마노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삿 6:19; 13:2-23). 사무엘서를 보면 이런 인상은 더욱 굳어진다. 사무엘서에서 선지자는 다양한 성소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다(삼상 7:10, 17; 9:13; 11:15). 열왕기상 18장에서 선지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대규모로 제사를 드리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해지고 성전이 세워짐에 따라 예루살렘이 예배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이런 경향은 열왕기하 22-23장에 진술하고 있는 요시아왕의 개혁 때 그 절정에 이른다(주전 622년경).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밖의 모든 예배 처소를 훼파였으며, 경쟁 관계에 있던 성소들의 제사장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는 예루살렘을 전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예배 장소로 삼았다. 하지만 요시아가 죽자마자 옛 성소들이 부활하고, 사람들은 다시 그곳에서 예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주전 586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자 그 성소들은 다시 철폐되고 잊혔다. 주전 537년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대부분 예루살렘이나 그 주변에 정착하였으며, 예루살렘 밖에서 예배하는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예루살렘 한 곳만 예배 처소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역사서들은 예배 장소의 변모 과정을 보여준다. 원레 사람드은 어느 곳에서나 예배할 수 있었는데, 요시아왕 때(주전 622년)에 예배 처소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런 예배 처소의 중앙화 시도는 단기간 내에 실패하였지만 포로 이후에 쉽게 받아들여졌다. 벨하우젠은 종교 의식의 발전에서 이 세 단계가 오경자료들과도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J와 E에서 조상들은 다양한 장소에서 제사를 드리고 단을 쌓는다(세겜, 벧엘, 브엘세바, 모리아산). JE에 나오는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임재를 알리신 곳이면 어디든지 제사드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출 20:24). 따라서 J와 E는 요시아 개혁 이전의 일반적인 이스라엘의 예배의식을 반여하고 있다.

하지만 신명기는 이스라엘은 ‘주 너희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단 한곳에서만’ 예배해야 하고, 그 땅에 전체에 흩어져 있는 가나안의 성소에서 예배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12: 4-6). 이는 요시아가 추진한 예배 처소의 중앙화 프로그램처럼 보인다. 실제로 열왕기하 22:8-20은 율법이 성전에서 발견되었고, 이것이 요시아로 하여금 개혁하도록 도전하였다. 따라서 벨하우젠은 요시아가 발견한 이 율법의 책이 분명히 신명기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벨하우젠은 드 베테의 생각에 기초하여 전개하고 있다. 드 베테는 1805년 이후에 나온 자신의 책에서, 이 율법의 책이 신명기라는 생각을 널리 알린 사람이다.] 신명기와 요시아 개혁 사이의 명백한 관계는 모든 다른 오경 자료들과의 관계보다 훨씬 더 정확하다.

끝으로 성막과 제의의식들을 아주 상세히 진술하고 있는 P자료가 등장한다. 성소만을 희생제사를 위한 장소로 취함으로써 P자료는 오직 하나의 예배 처소만 있다고 전제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배 처소로 유일하게 인정한 곳이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이었던 포로 후의 상황을 반영한다. 이는 P의 성막이 예루살렘 성전의 원형이 아니라 그것을 반향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배 처소에 대한 P의 전제가 포로 후 시대의 역사적 사실과 잘 조화되므로, 벨하우젠은 이 자료가 오경 자료 가운데서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역사서와 오겨에 나오는 희생제물(sacrifices)에 대해서도 비슷한 접근 방법을 취할 수 있다. 초기에는 이스라엘의 희생제사와 가나안의 의식이 거의 다르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께 희생제물을 드렸을 뿐이다. 예배는 삶의 일부였다. 희생제물을 드리는 날은 기본적으로 추수 때나 손님이 방문하였을 때 흥겹게 고기를 먹는 날이었다(참조. 삿 6:19-24). 그들에게 이런 제물들은 세례나 결혼식이나 장례식 날 대접하는 음식과 그 성격이 같았다. 제사를 전혀 종교적 의무로 규정하고 있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들이 종종 희생제물을 정죄한 이유다(사 1:11-17; al 6:6-8).

하자만 요시아의 종교개혁을 통해 예배 장소가 한 곳으로 제한되면서 희생제물에 대한 모든 접근 방법이 달라졌다. 의식은 여전히 같지만, 분이기(mood)는 바뀌었다. “고향 언덕에서 포도 수학을 기념하는 절기를 기념하는 것과 예루살렘에서 그것을 기념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이제는 원한다고 언제든 희생제물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까운 가족 간에 모여 예배하는 것과 예루살렘에서 큰 무리가 경배하는 것은 매우 달랐다. “예배의 중앙화는 그런 공적 예배와 일상의 삶 사이를 분리했다. 헤브론에 살지만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렸다. 삶과 예배가 결별한 것이다.”

이 같은 예배의 분리는 포로기 때에 더욱 심화되었다. 제사장이자 선지자였던 에스겔이 재건된 성전에 대한 환상을 개괄한 때가 바로 이 시대였다. 그가 묘사한 예배는 오경에 묘사된 예배와는 달랐다. 따라서 벨하우젠은 그 당시만 해도 예배의 상세한 규정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포로기가 끝난 후 상세히 규정된 예배 제도가 두 번째 성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벨하우젠은 이런 희생제물 의식의 변화를 오경의 다양한 자료와 연관시키고 있다. J와 E에서 희생제사와 함께 먹는 일(예. 출 32:6)은 동시에 진행된다. 고기를 먹을 때 늘 그 고기를 희생제물로서 나왔다. 초기 자료에는 죄의 구속을 위한 희생제물의 여갈을 거의 강조하고 있지 않다. 희생제사는 감사와 기념을 위한 일인 듯이 보인다.

신명기에서도 희생제사는 여전히 흥겨운 일이지만, 이 제사는 지정된 장소에서만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지정된 장소 외에서 짐승을 잡는 일은 순전히 비종교적인 살인이었으며, 단 하나 그렇게 잡은 생축의 피를 먹지 않는 것이 유일한 원리였다(신 12:15-19).

희생제사(제물)에 관한 훨씬 많은 정보는 출애굽기 25장부터 민수기 36장에 이르는 제사 법전(Priestly Code)에 나온다. 벨하우젠은 이렇듯 지나치게 상세한 희생제사 절차에 대한 규정과 속죄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불퀘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속죄제와 속건제와 대속죄일과 예배 때의 향기를 도입한 것은 P이며, 이런 분위기는 두 번째 성전의 의식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비슷한 발전 과정을 절기의 기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원래 절기는 자연의 순환 과정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절기 때는 보리 추수, 포도주 수확, 혹은 올리브 추수를 축하하였다. 절기는 다른 도시에서 다른 시기에 지켰으며, 이 시기는 그 지역의 농작물이 자라는 다양한 시기에 따라서 결정된다. 가장 큰 변화는 유월절이 출애굽을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지키는 국가적인 절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절기와 자연의 관련성이 중단되고, 그 대신 이스라엘 역사 내의 역사적인 사건들과 관련되기 시작하였다. 포로 후 시대에 이런 과정은 더욱 심화되었다. 절기를 지키는 날들은 기후가 아니라 달력이 결정하였고, 모든 커다란 국가 절기는 출애굽이나 광야 경험과 연결되었다.

다시 한 번 벨하우젠은 이런 변화들이 오경의 다양한 자료에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J와 E는 아직 적기 규정이 없었던 때를 반영한다. 이 두 자료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때에 절기를 지킬 수 있었다. 신명기 16장은 절기를 지정된 도시와 관련을 짓고 거기서 절기를 지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제사 법전(민 28-29장)은 절기를 w키는 달에 대한 언급과 다양한 절기의 날에 얼마나 제물을 바쳐야 하는지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차 있다. 아래의 표는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삶의 발전 과정과 P자료와의 관계에 대한 벨하우젠의 견해를 요약해 주고 있다.

 

다양한 시대와 자료의 특징들

 

초기 왕정/JE

후기 왕정/D

포로 후/P

예배 장소

거룩한 장소는 어디든지

예루살렘으로 모든 예배를

중앙화 하려는 시도

예루살렘 성소에서만

 

희생제사(제물)

자발적이고 흥겨운

가족 행사

예루살렘에서만 희생 제사가

가능하지만, 비종교적으로

생축을 잡는 일은 어디서나

가능함

상세히 규정된 희생제사와

속죄하는 제사

 

 

절기

지방의 추수를

축하하는 행사

예루살렘까지 순레할 것을

요구함

달력으로 고정된 절기,

추수가 아닌 역사와 관련됨

제사장직

누구나 제사자이 되어

제사를 드릴 수 있음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이

중요해짐

큰 권위를 갖고 잘 규정된

제사장직

제사장의 수입

자발적으로 드린

제물의 일부

희생제물 중 앞 넓적다리,

양볼, 위

많은 희생제물들, 십일조,

첫 소산들

 

벨하우젠의 연구의 위대하고 새로운 점은 P자료가 후대에 속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데 있다. 모세의 저작설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문서 가설을 지지하든지 간에, 초기의 학자들은 P자료가 오경에서 가장 오래된 자료이며, 이른 시기부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한 공식적인 지침서였다고 믿었다. 이것이 후대의 허구라는 주장은 큰 노쟁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벨하우젠은 신학교 교수직을 포기하고 대신 아랍어를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세기 초 문서 가설은 주류 프로테스탄트 교파와 일반 대학에서는 널리 받아들여졌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가톨릭교회도 문서 가설의 유효성을 인정하여, 이제는 우리가 그것을 ‘확실한 비평의 결과물’ 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공공연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은 정통 유대인들과 이런 주장이 성경의 영감을 훼손한다고 주장하는 몇몇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이다. 문서 이론의 상세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계속 수정하여 제안해 오고 있지만, 대체로 20세기 대부분의 시기 동안 이 가설은 큰 도전 없이 수용되었다.

 

문서가설에 대한 20세기의 조정(adjustment)

 

하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이 이론은 완화되었으며(softened), 이는 구약의 메시지에 공감하는 학자들이나 교회의 성도들에게 더 적합한 형태가 되었다. 앞장에서 우리는 노트와 폰 라트의 저술에 주목하였다. 그들 둘은 모두 알프레흐트 알트의 제자였다. 알트는 성문 자료들에 관한 한 문서 가설의 결론을 수용하였지만, 결국엔 성문화된 문서에 편입된 구전 전승들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원했다. 자신의 논문 ‘The God of the Fathers'에서 알트는 창세기에 기술된 족장들의 종교를 전형적인 반 유목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족장들에게 주신 몇몇 약속의 기원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족장들의 이야기가 족장들 이후 천 년이 지날 때까지는 J와 E의 이야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는 여전히 약간의 정확한 역사적인 회고담을 보존하고 있다.

이스라엘 법에 관한 연구에서 알트는 사례법(case law, 만약 ···하면)과 절대법(apodictic law, 너는 ···하지 말라)로 구분하였다. 그는 사례법은 가나안에서 빌려 왔지만, 절대법은 시내산에서와 같은 언약적인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두 법이 모두 모세에게서 유래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모두 이스라엘 법의 초기 형태이며, 오경에 언급된 이 법들의 배경은 문서 가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오해하게 하는 허구는 아니라고 보았다.

오경 전승의 초기 형태와 최종 형태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이런 시도를 노트와 폰 라트가 이어받고 있다. 둘은 모두 다른 방법으로, 현재 오경의 메시지가 기본적으로 초기 형태에서 발전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폰 라트는 현재의 오경은 신명기 26:5-9의 고대의 신조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노트는 J와 E 배후에 공통의 자료가 있었으며, 이 자료는 모두 그 사건들을 말하는 시대와 근접한 시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또 12지파 동맹과 이스라엘의 언약 형성과 중앙 성소는 모두 사사기 시대,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지 1세기 이내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문서 가설에 대한 알트와 노트와 폰 라트의 수정 제안은 일반적으로 오경의 후대 저작설에서 주장하는 것보다 오경의 진정성(credibility)을 더 지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오경이 후대에 형성되었는데도 그 역사적인 확실성만은 지지하려는 시도가, 미국에서 올브라이트와 그의 학파, 그리고 탁월한 그의 동료 여행가들인 스파이저와 고든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그들은 모두 창세기의 본문들이 고대 세계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고대 근동의 자료들에서 나온 비교 증거(comparative evidence)에 호소하였다. 창세기가 전제하고 있는 관습들과 법들이 주전 2000년대 초기와 잘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비록 훨씬 후대에 기록되기는 했지만, 조상들의 이야기의 역사적 정확성만은 확증해 준다. 창세기와의 이런 병행들을 토대로 존 브라이트는 그의 책 History of Israel(1972, p. 9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분명하고 확신 있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들이 역사적으로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문서 가설이 주는 부정적인 인상은 제거되었다. 20세기 중반까지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오경은 훨씬 후대에 기록되었지만, 계속되는 연구를 통해서 볼 때 오경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 실제 일어난 일 사이에는 근본적인 연속성(continuity)이 있다.

 

1975년 이후 합의의 붕괴

 

하지만 20세기의 지난 몇 십 년간, 특별히 오경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이런 기분 좋은 합의는 사라졌다. 물론 다른 합의된 결론이 없는 경우엔 오경이 발전했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으므로, 여전히 이 주장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많은 성경 교사가 있다. 현재 상황은 매우 복잡해졌다. 많은 학자가 대체로 혹은 부분적으로 문서 가설을 거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종종 서로 모순되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중심적인 이슈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나는 현재의 논의들을 단순화할 것이다. 좀 더 상세한 분석을 원하는 이들은 이 장 끝에 나오는 ‘참고도서’들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문서 가설은 두 주요 기둥에 의존하고 있다. 하나는 자료의 확신(identification)이고 다른 하나는 그 연대다. 두 기둥 모두 오늘날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편으론, 문서 가설에서는 섞여 있는 것으로(composite) 보는 본문들이 실제로 통일체(unities) 이기에, 자료를 구분하는 기준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다른 한편으론, 오경 안에 분리된 자료들을 확인하는 사람들은 관례적으로 따르는 연대를 반박한다. 초기 J자료의 연대를 후대로 보는 d들이 있는가 하면, 후기 P자료의 연대를 이른 시기로 잡는 이들도 있다. 어떤 학자들은 신명기의 연대까지도 의문을 제기한다. 이슈의 초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나는 먼저 통일성(unity)의 이슈를 살핀 후 연대의 문제를 검토할 것이다.

 

 

통일성을 강조하는 경향

 

최근의 성경 연구는 본문의 최종 형태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문학 비평의 접근 방법을 통해서 자극을 받았으며, 부분적으로는 정경비평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경비평은 교회가 권위로 인정하고, 따라서 연구의 초점이 되어야 하는 것은 성경의 초종적인 혹은 정경적인 형태라고 주장한다.

오경에서 문서 가설이 자료들을 가장 주의 깊게 쪼개고 있는 책이 창세기다. 창세기 이후에 책들에서는 긴 자료 단락이 한 자료로 분류되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잘게 쪼개서 본문을 읽는 방식이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창세기에서 자료는 주요 자료인 J와 E와 P로 나눌 수 있으며, 이것들은 종종 서로 뒤섞여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요셉 이야기다. 여기에는 J와 E가 번갈아 가면서 나오며, 그 가운데 일부 자료들-예를 들면, 38장의 다말 이야기-은 다른 자료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옛 문서 이론가들은 그 내용이 J와 E와 분명히 차이가 있는 P의 독특성에 대해서 매우 확신하였지만, J와 E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의견 표명을 주저하였다. 드라이버는 이렇게 말한다: “JE분석의 상세한 부분에서는 종종 불명확한 점들이 있으며, 이는 기준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세기의 최근 연구에서는 전통적인 J와 E로의 자료 분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종종 있다. E라고 생각하는 자료가 이제 J와 뗄 수 없는 한 부분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J의 확장이라고 보기도 한다. 특벼히 둘로 구분하곤 했던 요셉 이야기를 이제는 단일 작품으로 읽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38장 역시 얼핏 보면 주요 이야기(main story)와 아무 관련이 없는 듯이 보이지만, 지금 창세기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는 요셉 이야기에서 뗄 수 없는 한 부분(integral)으로 생각한다. 그 모티브들(motifs)과 관심사들(interests) 모두 주요 이야기를 내다보고 또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J와 E의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지만, 많은 학자는 여전히 J와 P를 분명히 서로 구분할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P가 종종 창세기의 주 내러티브 안에 큰 단락으로 나타나는 이유다. E가 J와 섞여 있다고는 가정할 수 있지만, P는 J와 거의 섞이지 않았다. 이에 대한 가장 큰 예외는 홍수 이야기다. 이곳에는 P자료라고 생각되는 길고 큰 단락 안에 J의 특징들로 보이는 많은 부가적인 자료가 들어 있다. 현재의 홍수 이야기의 버전(version)은 분명히 확대 카이즘 구조(palistrophe)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J와 P버전 모두 그 자체로는 확대 카이즘 구조를 형성하고 있지 않으며, 또 최종 버전처럼 바벨론 홍수 버전과의 많은 병행 구절을 담고 있지도 않다. 이 때문에 홍수 이야기를 두 자료에 속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혹은 이것을 한 저자의 작품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그렇다면 자료 분석의 원리들은 그 자체로 유효한가? 화이레이는 그의 책 The Making of the Pentateuch에서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단편, 보충, 그리고 문서 가설 등 다양한 오경의 저술 모델 가운데, 문서 가설이 가장 증명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단편 가설과 보충 가설은 비교적 단순하고, 논리저긴 과정이 있으며, 동시에 완성된 오경의 불균형을 설명할 수 있는 듯이 보이지만, 문서 가설은 훨씬 복잡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오경의 기원에 대해 이해해 가는 발전 과정을 너무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잇기 때문이다.”

화이브레이는 두 가지 이유로 문서 가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첫째, 비논리적임 자기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둘째, 반복과 문체상의 차이에 대해서 이보다 더 나은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첫째, 문서 가설 이론은 비논리적이며, 반복과 모순에 대해서 설명이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실패하고 있다. 문서 가설은, 오경 안에 반복과 모순이 있으므로, 틀림없이 다른 자료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가설은 오경을 형성하는 각각의 자료는 반복이나 모순을 담고 있지 않다고 전제하고 있다. 비모순과 비반복이 자료를 구분하는 가장 주요한 기준인 것이다. 하지만 화이브레이는 이것을 기이하게 생각한다. 이는 히브리 저술 관습을 너무 심하게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초기의 저술가들은 모순이나 반복을 참지 못했지만, 후대의 작가들은 그것을 쉽게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의 태도가 변했는가? 만약 후대의 저술가들이 반복을 싫어하지 않았다면, 왜 우리는 초기의 히브리 저자들이 반복을 싫어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그런데 만약 초기의 저술가들이 후대의 저술가들처럼 모순이나 반복을 싫어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는 그 자료들을 구분해 낼 수 있는가? 그는 말한다.

“따라서 일관성은 다양한 문서의 특징(hallmark) 이지만 비일관성은 편집자들의 특징이라는 가정 아래서만 문서 가설을 주장할 수 있다.”

둘째, 화이브레이는 본문들 안에서 볼 수 있는 반복과 문체상의 변이(variation) 같은 변화들에 대해서 설명할 때, 이런 변화들이 서로 다른 자료를 반영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다른 문학 작품에서 반복과 변이를 볼 때마다. 다른 자료가 있다거나 그 변화의 책임이 저자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다른 종교적인 본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다양하게 제시하는데, 애 창세기에서만은 그 이름의 변화가 자료의 변화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렇게 하나님을 달리한 데는 신학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또 저자가 무의식적으로 다양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현대 문학적인 연구를 하는 학자들은 이런 반복을 문학적인 장치로 이해한다. 이는 단순히 논점을 강조하는 것 이상이며, 저자의 태도와 동기를 이해하는 실마리 역할을 한다. 이런 경향은 다른 많은 학자들 가운데 특히 알터와 스텐버그의 책에서 구약의 이야기 전달 방식에 상세히 적용되고 있다.

화이브레이의 책 2장은, 노트의 전통적인 비평적 접근 방법과 불룸과 렌토르프 같은 좀 더 최근의 학자들의 견해까지 반박하고 있다. 그들 역시 문서 가설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그들은 허약한 토대 위에 구전 전승의 발전에 관한 이론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문서 가설이 비논리적이고 자기 모순적이라면, 노트의 구전 전승에 대한 전제는 더욱 관념적인 이론이 되고 만다. 화이브레이는 노트의 이론들은 하나님의 관념 위에 또 다른 관념을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경에 대한 관례적인 비평 방법에 대해서 이처럼 전면적인 공격을 한 후에, 화이브레이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선호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그는 단순한 해결책을 바란다. 많은 최근의 연구들은 문서 가설이 인정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오경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저술(composition)을 책임진 한 명의 저자나 편집자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분명히 이 편집자는 다양한 자료를 사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화이브레이는 단편들의 정체는 확인할 수 없지만 단편 가설은 인정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포괄적인 작품으로서 오경의 초판(first edition)(어느 정도 첨부의 가능성도 있지만)이 한 사람의 역사가가 저술한 작품, 즉 최종판(final edition)m이 되지 못할 이유는 없는 듯이 보인다.”

 

자료의 연대

 

화이브레이가 자료 분석 분야에서 형성되어 온 합의를 깨뜨리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오경의 저술 연대를 결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료 분석의 합의를 따르고 있다. 그는 오경이 한 순간에 단 한 권의 책으로 모아진 것은 주전 500년경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벨하우젠과 그 후계자들이 오경의 최종 편집 시기로 주장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들은 이 시기에 JED가 후기 P자료와 결합하여 현재의 오경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학자, 존 반 시터즈는 오경 연구에 다른 급진적인 경향을 소개한다. 20년 동안 발표한 책과 논문에서, 그는 자료 분석과 오경의 연대를 모두 반박하였다. 화이브레이가 단번에 오경이 형성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단편 가설을 선호하였다면, 반 시터즈는 보충 가설을 가지고 작업하였다. 그는 수세기에 걸친 오경의 발전 과정을 추적한 후 오경이 주전 300년경에 완성되었다고 믿고 있다.

반 시터즌는 자신의 핵심 사상을 Abraham in History and Tradition(1975)이란 책에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고고학적 발견이 창세기의 역사성을 입증하였다는 견해를 공박하면서 시작한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특별히 미국에서 합의된 비평 이론에서는, 오경이 후대에 기록되었지만 창세기와 주전 2000년의 것인 고대 근동의 본문들 사이의 병행점들은 창세기의 이야기들이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충실히 전승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보고 있다. 기원전 2000년의 메소포타미아 본문들에서 유래한 결혼 풍습, 기업 무름의 규정들, 그리고 사람의 이름들과 반유목적인 삶의 방식은 창세기에 타나난 조상들의 삶을 묘사하는 부분과 많은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병행점들이 창세기 기술의 고대성과 진정성을 보여 준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반 시터즈는 이런 병행점들 사이의 유사성이 너무 과장되었으며, 병행점들이 강하게 타나나는 곳마저도 많은 자료가 후대의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창세기의 역사적인 신뢰성에 관한 고고학적인 결과들을 약화시킨 반 시터즈는, 이제 창세기 12-26장에 나타난 아브라함 이야기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자시느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자료들을 구분해 내는 전통적인 기준들에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그는 실제 중복(real duplication)만이 우리에게 다른 자료를 알아 낼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한다. 자료들 안의 반복은 단지 문체 가운데 하나일 수 있으며, 어휘나 하나니므이 이름이 다르게 나오는 것 역시 다른 자료들을 가리킨다고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가장 초기 형태는 세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었다. 12:10-20과 사라가 바로의 후궁으로 빼앗긴 사건 등이 그것이다. 후에 이 초기 형태에 창세기 20-21장이 덧붙여졌다. 독자들이 12장 에피소드를 알고 있다고 전제하므로, 사라의 두 번째 납치 사건인 20장은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에 P 자료를 제외하고 창세기 12-26장의 대부분의 자료에 해당하는, J 기자의 자료인 J가 첨가된다. 그는 전통적으로 문서 가설에서는 E자료라고 보는 15장 역시 J자료로 본다. 하지만 그는 창세기 15장이 다른 어떤 시대보다 포로 시대에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반 시터즈는 J자료의 연대를 주전 550년으로 봄으로써, 전통적인 이론보다 400년이나 뒤로 보고 있다.

후에 여기에다 P자료가 더해진다. 즉 창세기 안의 연대들과 다른 연대기적 자료와 창세기 17장과 23장이 추가된 것이다. 동방 왕들과 아브라함의 전쟁은 그 후에 추가된다. 반 시터즈는 동방 왕들이란 실제로 이 무렵 이스라엘을 정복한 페르시아를 언급하는 은밀한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끝으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환영을 받는 14:18-20이 덧붙여지는데, 이는 이 시대의 종교적인 혼합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이는 창세기가 주전 300년에 가서야 현재의 형태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 후에 쓴 책들에서 반 시터즈는 오경의 나머지 부분에 자신의 방법론을 적용하였다. Prologue to History(1992)에서 그는 창세기 1-11장과 헬라의 사료 편집 방법과 메소포타미아의 방법론과의 유사성을 보여 주었다. 그는 J기자가 이런 사상들을 바벨론 포로 시기에 배웠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The Life of Moses(1994)에서 그는 출애굽기에서 JE자료는 신명기에서 열왕기서에 이르는 역사서의 서론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많은 사상은 예언서에서 빌려왔다. 예를 들면, 모세의 소명에 관한 이야기는 이사야와 에스겔의 소명 기사에 기초하고 있으며, 출애굽 사상은 이사야 40-55장이 선포하고 있는 출바벨론 사상을 모델로 학 있다.

 

반 시터즈의 결론은 매우 급진적이다. 그 결론은 구약의 저술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들을 흔들어 놓고 있다. 오경을 히브리 성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지 않고 가장 최근의 요소들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이미 벨하우젠이 율법서가 선지서 다음에 위치한다고 봄으로써 이런 식으로 주장했다. 벨하우젠은 오경 안에 있는 율법들이 선지서 다음에 등장했다는 뜻이지만, 반 시터즈의 모델에서는 오경 전체라는 의미의 율법이 선지서 앞에 등장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벨하우젠의 문서 가설만틈 반시터즈의 패러다임이 아직까지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학자들이 그가 주장한 오경의 후대 연대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독일에서는 롤프 렌토르프와 그의 제자 에하르트 블룸이 문서 가설에 대한 반박을 주도하였다. 반 시터즈처럼 그들도 보충 가설 측면에서 오경의 발전 과정을 생각하고 있다. 렌도르프는, 본래 짧고 독립된 전승에서 큰 단위의 누적 과정을 통해 발생하며, 마지막에 현재의 오경 형태로 편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펜토르프는 새로운 오경 비평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그의 제자 블룸은 계속해서 두 권의 방대한 책을 내놓았다. 블룸이 찾아낸 자료들을 보면 전통적인 자료 문서들과 비슷해 보인다. 또 J와 E가 사라지긴 했지만, 주전 530년과 500년 사이에 있었던 본문에 대한 신명기적 개정은 반 시터즈의 J 기자와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볼룸은 자료의 연대를 반 시터즈보다 이른 시기로 잡고 있으며, 역사적인 가치에 좀 더 긍정적인 접근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 새로운 생각들이 독일에서는 영어권 세계에서처럼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문서 가설을 전제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변호하는 연구들이 많이 나왔다. 그렇더라도, 렌토르프가 이 주장을 하기 전보다는 새로운 모델에 더욱 열린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는 “우리는 오경의 문학의 연대는 단지 가설적인 전제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런 전제는 학자들의 합의 때문에 계속해서 유지되어 오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가 1977년에 이 책을 쓸 때만 해도 이 말은 상당히 급진적으로 들렸지만, 한 세대 후인 오늘날에는 이러한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료 분석과 연대에 대한 논쟁들은 대부분 창세기와 출애굽기 앞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출애굽기 25장부터 민수기 36장에 이르는 많은 P자료와 그 연대에 소홀한 것은 아마도 벨하우젠의 Prolegomena에서 차지하고 있는 P 자료의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벨하우젠은 이 책에서 P가 초기의 자료가 아닐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분명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이 부족한 모습은 구약 예배의 발전에 관한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의 무관심과 무지를 반영한다. 실제 Prolegomena에서는 창세기 안에서 P 자료가 진술하고 있는 예배가 포로기 이후 성전에서 드린 예배와 상응한다는 사실을 거의 증명해 주지 못하고 있다. 이 시기를 진술한 본문들인 에스라부터 느혜미야와 학개와 말라기까지의 책들은 이 시대에 관해 거의 정보를 주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포로기 이전에 기념하던 대속죄일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이 자료가 벨하우젠이 주장한 대로 포로기 이후에 지킨 절기여야 한다고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포로 이후 책들 어디에도 대속죄일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따라서 P의 연대에 관한 벨하우젠의 주장 역시 기본적으로 부정적이다. P는 그가 포로기 이전 예배 문서들에 대한 그의 독법과 잘 들어맞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포로기 이후에 나온 것이어야 한다.

이런 주장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비평적인 유대 학자들이다. 문서 가설에 대한 합의가 무너지기 훨씬 이전에 카우프만은 The Religion of Israel(1961)에서 P자료는 포로기 이후가 아니라 포로기 이전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둘째 성전이 아닌 첫째 성전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벨하우젠은 이스라엘의 종교는 가정과 농경 풍습에 뿌리를 둔 자연스럽고 즉흥적인 예배에서, 제사장이 주도하는 고도로 제도화되고 조직화된 체제로 진화했음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바벨론과 이집트 같은 다른 고대 동양 문화에는, 고정된 시간표와 복잡한 규정들로 제사장이 주관하는 매우 조직화된 예배 체계가 존재했다. 따라서 후대의 연대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카우프만의 견해는 밀그롬이 쓴 방대한 레위기와 민수기 주석과 후르비츠의 언어학적 연구를 통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그들은 에스겔서가 레위기와 민수기를 인용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고 주장한다. 에스겔이 포로기 초에 설교를 하고 있었으므로, 만약 이 두 책이 포로기 이후에 기록되었다면, 이런 주장은 이상한 것이 된다. 레위기와 민수기의 언어와 용어는 에스라와 역대기처럼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책들과 다르다. 실제로 에스겔서는 초기 히브리어인 레위기와 민수기와 후기 히브리어인 역대기와 에스라나 느헤미야의 중간 형태의 히브리어로 기록된 듯이 보인다. 끝으로, 벨하우젠은 P문서에 기록된 의식들 가운데 몇몇은 포로기 이후의 관습을 반영한다고 생각했지만, 유대 학자들은 두 번째 성전의 의식과 레위기/민수기의 지침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예를 들면, 더는 생축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제사장이 임명되지 않으며, 우림과 둠빔이 사용되지 않고 잇다. 이는 만약 P 자료가 포로기 이후 시기에 나온 것이라면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다.

더 최근에은 P 문서의 기원과 연대에 대한 이런 논의가 더 진전되었다. 이스라엘 크롤의 The Sanctuary of Silence(1995)는 벨하우젠의 비평적인 입장 가운데 다른 것을 반박하고 있다. 벨하우젠은 P 문서의 대부분이 주전 5세기 것이지만, 레위기 17-26장은 한 세기 앞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모든 자료를 면밀히 살핀 후 크놀은 P 문서의 대부분은 초기의 것이며, 레위기 17026장은 이보다 약간 후대의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P 문서의 대부분은 솔로몬 시대(주전 10세기)에 나왔으며, 레위기 17-26장과 관련 자료는 아마 히스기야 시대(주전 8세기 후반)에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P자료에 관한 연구들은 제사장 문학에 관한 논쟁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보여 준다. 모든 사람이 반 시터즈의 J에 관한 재정의와 다른 연대 제안에 설득당한 것이 아니듯이, 모든 사람이 이런 P의 다른 연대 제안에 대햐서도 다 설득당하고 있지도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확신할 만큼 깊이 있게 구약의 이 분야에 대햐서 연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P를 포로기 이후로 보는 주장이 이전 주장만큼 그렇게 설득력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른 시기를 지지할 정당한 논거가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비평적인 합의의 붕괴와 함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양극단으로 끌려가고 있다고 느꼈다. 급진적인 학자들은 오경이 후대에 만들어진 전적인 허구라고 주장하고,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오경의 후반부는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이슈들은 신명기에 대한 논의와 함께 다시 부상하고 있다. 신명기는 최근에 오경의 기원에 관한 논쟁에서 제외되어 있었지만, 벨하우젠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명기 연대를 정하는 일이 오경의 기원 연구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이것을 모르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신명기의 역사적 위치를 분명히 알게 되면, 우리는 곁길로 빠지지 않을 수 있으며, 제사 법전(priestly code)의 위치도 역사에 대한 언급에 의해서 확정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벨하우젠에게는 신명기와 요시아 개혁 간의 관련성이 그의 출발점이다. 그는 자신이 JE, D 그리고 P가 이스라엘의 종교에 대한 묘사에서 진전을 보이고 있고, 따라서 연대를 상대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서, 학자들은 이 자료들의 내용을 비교함으로써 어떤 순서로 그것들이 기록되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명기는 절대적인 영대를 보여 주는 책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논거가 분명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신명기를 주전 7세기 후반으로 보며 그 배경에서 신명기를 해석한다.

 

히타이트와 아시리아 조약들과 신명기 사이의 병행점들

히타이트 조약, 주전 14세기

신명기, 연대 미상

아시리아 조약, 주전 7세기

서문

서문 1:1-5

서문

역사적 서론

역사적 서론(1:6-4:49)

신적 증인들

약정(stipulations)

약정/율법(5:1-26:19)

약정

문서 규정(document clause)

문서규정(27:1-8)

 

신적 증인들

 

 

저주와 축복

축복과 저주(28:1-68)

저주

 

우리가 7장에서 본 대로 신명기는 그 형태 면에서 고대 히타이트 봉신 조약과 함무라비 법전 등 주전 2000년대의 법적인 문서들과 비슷하다. 더 후대의 아시리아 조약들(주전 1000년)은 요소들이 다른 순서로 배열된 점에서, 그리고 역사적 서론이 없다는 점에서 신명기와 다르다.

이런 이유로 미국 학자 클라인과 영국의 이집트 전문가 키친은 이것이 신명기가 모세에게 기원하였음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인펠트와 프랑케나 같은 학자들은 신명기 28장의 저주들과 몇몇 아시리아의 저주들 사이의 밀접한 병행 관계를 관찰하고, 이는 신명기의 연대가 7세기임을 뒷받침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신명기의 연대를 7세기로 보는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반박한 학자는 고든 맥콘빌이다. Low and Theology in Deuteronomy(1984)에서 그는, 신명기는 사람들에게 그 율법을 준수하도록 격려할 때와는 다르게 법적인 정확성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가 신명기보다 앞선 자료라고 생각하는 P자료와 신명기 사이에 명백한 상이점이 많음을 설명해 준다. 맥콘빌은 선택된 장소에서 예배하는 것에 관한 율법과 절기들과 비종교적인 생축 도살 같은 주제와 요시아가 예루살렘을 예배 장소로 중앙화한 것을 서로 관련짓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신명기는 예루살렘을 단 한 번도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유일하게 언급된 장소는 예루살렘에서 64킬로미터 떨어진 엘발산이다(신 27:1-8). 신명기의 규례들은 요시아의 개혁보다 훨씬 이전 상황을 반영한다. 최근 주석(2002년)에서 맥콘빌은 이런 생각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제사장과 선지자와 겸손한 왕에 대한 규정을 담은 신명기 16:18-18:22이 보여 주는 관리적 배열들은 사사 시대가 갖고 있던 조직에 대한 이상들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후대에 다른 자료들이 첨가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어렵다.

이것들이 최근 몇 십 년 동안 제안되어 온 오경 비평에 대한 매우 다양한 접근 방법 가운데 몇몇 방법이다. 나는 현대의 논쟁들이 너무 복잡하여, 이런 방법들을 전부 다 다루기보다는 몇몇 핵심적인 이슈들만 골라서 다루었다. 하지만 이 이슈들을 단순화 했는데도 여전히 이 이슈들을 해결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문서 가설을 대신할 만한 다른 합이에 이르는 것도 어렵다.

 

우리는 왜 이처럼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며, 왜 합리적으로 합의된 결론에 이르기가 어려운지 물어야 한다. 이는 부분적으로 전개 중인 논의들의 질에 달려 있다. 다른 견해들을 설명하면서 나는 가능하면 분명히 전하려고 애썼지만, 한 학자에게는 아주 설득력 있게 보이는 주장이 다른 학자들에게는 허술한 주장처럼 보일 수 있다. 반복이 한 학자에게는 다중 자료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탁월한 내러티브 장치가 된다. 히타이트 조약들과 신명기 사이의 유사성이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조약과 비슷한 시기에 기록되었음을 보여 주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것이 단순한 우연으로 보인다.

만약 특정 견해를 지지하는 주장들을 생각만 하지 말고 평가하였다면, 좀 더 나은 합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가장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여러 견해를 특정 견해에 대한 찬성과 반대, 두 측면에서 설득력 있는 것, 중간 정도, 약한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두 측면에서 모두 가장 허술한 견해는 제외하고 설득력 있는 것과 중간 정도의 견해들을 특정한 비평적인 입장을 평가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이 어느 정도는 이 영역을 단순화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끝에 가서는 주관성의 요소들이 대두될 것이다. 예를 들면, 상이한 본문들에 대해서 언어의 시대에 기초한 논쟁들을 벌인다면, 언어 학자들은 그 본문의 연대를 결정하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따라서 P의 어휘와 문체가 에스겔의 문체보다 더 이른 시기의 것임으로, P는 포로 이전 시기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하자만 이런 논쟁의 유효성은 P의 고대성에 대한 개별적인 예들이 충분하고 또 그 자체로 강력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만약 그 증거가 몇 개밖에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상투적인 표현(archaism)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 주장은 또 에스겔서가 포로기 작품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만약 이런 전제가 부정된다면 P의 포로기 이전 연대는 의문시될 수 있다. 언어학적인 논쟁에서의 불명확성을 허용한다 하더라도, 공공연하게 초기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자료들 안에, 역대기나 에스라처럼 후대의 자료들에서 볼 수 있는 아람어와 페르시아어에서 빌려온 단어들 같은 후대의 특징들이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구약의 책들이 거의 없기에 연대에 관한 논의를 세우는데 필요한 확실한 토대(ground)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특별히 오경은 더욱 그렇다. 급진적인 학자들이 옳고, 그래서 그들의 주장대로 오경과 대부분의 구약의 나머지 책들은 훨씬 이전의 삶이나 사건들을 진술하고 기록되긴 했지만 실제로는 포로기 이후에 기록되었다면, 우리는 결국 역사적 불가지론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포로기 이전 시대의 이스라엘과 그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된다. 구약의 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그 땅에서 살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포로기 이후 공동체의 바람이 분이다.

 

자료 분석을 논할 때 전망(outlook)과 성향(predispositions)이 결론을 내리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복잡하게 얽힌 자료들을 푸는 학자들의 기술은 너무 경외감을 가지고 본 나머지 전통적인 JEDP 분석에 너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문학을 중시하는 학자들이 반복과 변이를 통해서 발견한 통찰력을 좋아하는 이들은 본문을 통일된 작품으로 보려고 할 것이다. 결국 어느 정도는 취향의 문제인 셈이다.

하지만 개개인의 취향은 유행의 영향을 받는다. 지난 두 세기는 회의의 해석학의 영향을 광범위하게 받았다. 니체와 막스, 프로이드 같은 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은, 사람들은 비록 말하거나 행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사람들이 계급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서나 엄한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중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며, 우리는 그들이 정치인이든지 경찰이든지 언론인들이든지 성지자들이든지 간에, 권력자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다. 이와 비슷한 태도가 성경 연구에도 나쁜 영향을 끼쳤다. 본문은 실제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다를 것이라고 의심한 것이다 성경의 본문들은 특정 관점을 위한 선전이므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독자들이 그 권위를 존중하도록 하기 위해서 옛 것인 듯 가장한 것뿐이다. 이런 이념주의적 본문 비평에도 유효한 면이 없지는 않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무언가를 쓰거나 말하며, 만약 우리가 그들의 메시지를 잘 짚어 내지 못하면 우리는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 된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실제로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그들이 진실을 만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물론 특정 주제에 관해 모든 것이 다 사실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관련해서만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을 마하거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충돌하는 것을 말한다면, 우리는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말들이 잘못이라는 것이 증명될 때까지는 옳다고 믿을 것이다.

앗수르 전문가들과 이집트 전문가들은, 성경 신학자들이 바벨론이나 이집트의 본문들을 연구하는 학자들보다 더 성경 본문을 의심한다고 말한다. 만약 동양학을 연구하는 자들이 앗수르와 이집트의 본문의 증거를 받아들이기 전에 성경학자들이 요구하는 수중으로 증거를 요구했다면, 우리는 고대 세계에 관해 거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오경 연구에서 만나는 현재의 혼란은 우리의 전제와 우리의 방법론들을 다시 검토하라는 요청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비평적인 순수함으로의 회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성경 본문을 우리의 친구들과 가족들을 대하는 것보다 더 의심스러운 태도로 대해서도 안 된다.

 

OSWALD T. ALLIS의 문서설

 

오경의 자료 분해가 후펠트로 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후펠트가 거의 1세기 전에 만든 일반적 원리에 의해 지배되어 왔으므로 그 역사를 상세하게 연구할 필요가 없다.

 

 

아마도 드라이버(Driver)가 쓴 "구약문학서론"(Introduction to the Literature of the Old Testament)이 이론에 있어서 꽤 폭넓은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드라이버의 "서론"에 제시된 대로 후펠트의 이 세가지 문서설을 아스트록과 아이히호른이 제시한 두 문서설을 대조하는 것으로 족할줄 안다. 이렇게 함으로써 후펠트가 시도한 그 급진적인 변화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1> 첫 엘로힘 문서(P)가 독자적인 문체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계속해서 오늘날에도 강조되고 있다.

 

창세기 제 20장에서부터 시작되는 둘째 엘로힘문서(E)는 첫 엘로힘문서(P)보다 여호와문서(J)를 훨

 

씬 더 닮았다는 것과, 여호와 엘로힘문서를 그 구성부분에 따라 여호와문서와 엘로힘문서로 분해하

 

는 것이 어렵거나 혹은 불가능하기 조차 하다는 것이 인식되어졌다. 또한 여호와문서(J)를 닮은 들

 

째 엘로힘문서(E)는 하난의 독특한 문체를 가진 첫 엘로힘문서(E)보다 두 배나 많음을 알 수 있다.

 

 

2> 문서들의 연관성을 세우기 위해 비평가들은 "중복이론", 즉 동일한 사건에 대한 소위 유사한 기사나

 

서로 충돌하는 기사에 대해 많은 강조를 하였다. 주제(主題)에 따라 J와 E로 분류하는 것이 특별히

 

강조되었고, 이것은 어구(語句)에 따른 분류 만큼 중요시 되었다.

 

 

3> 한 문단에 있어서 똑같은 구절

 

이 나온다면 이것은 편집자가 최소한 이 점에 있어서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 자료를 복사한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와 반면에 비평가들이 P에 돌리고 싶은 구절이 J나 혹은 E부분에 나온다

 

면 그것은 편집자가 스스로 판단해 본후 그의 자료에 수정을 가하는 것이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변화를 가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문서설을 지지하기 위해 비평가들이 호소한 가정들을 검토해

 

볼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 주된 요점으로 압축할 수 있다.

 

 

<1> 창세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이 다름

<2> 용어와 문체가 다름

<3> 평행 혹은 이중 기사(중복)

<4> 여러 자료들의 연속성

 

 

첫 두 요점은 주로 언어와 문체에 대한 질문이요 마지막 두가지는 특히 내용과 주제를 다루는 질문이다.

 

제 1 장 하나님의 이름이 다름

하나님의 이름의 차이점들은 오경에 관한 현대이론에 열쇠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문서설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창세기의 첫 34절에 엘로힘(Elohim--하나님)이 33번 나오며 그다음 45절에 걸쳐 여호와 엘로힘(Jehovah Elohim--여호와 하나님)이 20번 그리고 그 다음 25절에 걸쳐 여호와(Jehovah)가 10번 나온다. 이것에 대해 몇가지 요점을 간추려 보자.

 

 

1. 아주 뚜렸한 차이는 드물다.

창세기 초반부에 하나님의 이름들이 큰 대조를 이루며 그것이 사용된 것을 우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들이 창세기 전권(全卷)을 상세하게 분해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다르게 사용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문서를 상세히 분해할려면 하나님의 이름을 다르게 사용한 것에 따라 할 것이 아니요 다른 자료에 근거해야 할 것이다.

 

 

2. 여호와 엘로힘이란 이름

창세기의 첫 부분에 엘로힘과 여호와가 제 2장과 3장에서 20번이나 함께 결합되어 있다. 이는 여호와와 엘로힘을 하나로 묶는 것이 오경에서 이 부분을 제외한다면 오직 한번만 출애굽기 9:30에서 나오며 구약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20번도 채 못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을, 여호와는 구속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창세기 2:4-3:24에서 여호와 엘로힘이 20번 나오는데 뱀과 여인의 대화에서는(3:1-5) 엘로힘이 4번 나온다는 것이다. 인류의 적이요 유혹자인 뱀의 입에서 여호와란 이름이 결코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3. 이름은 의미심장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름의 용법이 그 의미와 적용의 차이점에 근거하여 다르게 선택된 몇몇 경우들이 있다. 이들 중 가장 명백한 예(例)가 창세기 9:26(J)에 있다. 여기에서 여호와는 셈의 하나님으로 선포되며 엘로힘이 야벳을 창대케 하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예들을 통해 우리는 이름의 차이가 의미의 차이 때문이란 개념을 고정시킬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름이 다르게 사용되었다고 해서 바로 자료가 다르다는 주장을 하기 전에 그 차이가 그 이름의 의미와 의의에 근거한 용법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4. 자료분해는 본문을 절단해 버린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와같이 문맥에 따라 각자의 강조점을 가지고 사용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을 가자고 확대된 분해를 시도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본문을 절단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고야 만다.

창세기 2장에서 여호와엘로힘이란 복합명(複合名)이 여호와와 엘로힘을 동일한 것으로 사용한것 같이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비평가들의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이름때문에 짧은 문단이나 혹은 한절, 혹은 절의 부분 까지도 그 문맥에서 종종 절단해 버려야 한다는 결론까지 갈 수 밖에 없게된다.

상호 연관성을 분명히 지니거 있는 사건들을 하나님의 이름에 따라 분해함으로 본문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것을 야곱의 결론 기사와 베냐민을 제외한 그의 아들의 출생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출애굽기 6:3은 비평가들에 의해 잘못 해석되고 있다.

출애굽기 6:3이후부터 비평가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문서분해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오경의 마지막 네 권에 있어서 엘로힘보다 여호와가 훨씬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출애굽기에서 민수기 사이의 P기자가 여호와라는 이름을 자주 사용했던지 혹은 P문서가 이 책들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비평가들은 여기서 전자를 채택했다. 제사문서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비 정상적으로 사용된 것은 출애굽기 6:3에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고 비평가들은 주장한다. "엘로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엘 솨다이(전능의 하나님)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

 

 

비평가들에 따르면 이 절(節)은 제사문서의 기자가 여호와란 이름이 모세때에 처음으로 이스라엘에게 알려진 것으로 믿었다는 사실을 밝히 말해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는(P기자)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시대 착오적인 것을 사용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위해 여태껏 이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는 암시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절에 대한 비평가들의 해석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큰 난점들이 있다.

 

 

출애굽기 6:3에 대한 비평가들의 해석은 그 절 자체나 혹은 성경에 있는 다른 신빙성있는 자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론을 고집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출애굽기 6:3을 가지고 여호와라는 이름은 출애굽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다고 주장함으로써 P문서가 엘로힘과 여호와란 이름을 사용한 것에 대해 무리한 설명을 시도할 뿐이다. 이것은 해석의 역사에 의해 태어난 것이다.

 

 

6. 출애굽기 6:3 이후에 차이점들이 나타난다.

비평가들의 이론에 따르면 여호와와 엘로힘이란 이름을 사용함에 있오서 차이점이 출애굽기 6:3에서 끝을 맺는 것은 문서분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함에 있어서 출애굽기 6:3 이전에 발견된 것과 매우 유사한 것들이 출애굼기의 그 부분 이후에도 종종 나타나고 있음을 유심히 보아야 한다.

 

 

7. 이와 유사한 차이점이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창세게의 하나님의 이름이 이와 같이 다르게 사용된 것이 구약성경에서 전혀 독특한 현상이 아님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몇몇 경우에 있어서는 그 다른 용법의 이유가 아주 단순하고 명백하다, 또한 그렇지 않는 경우들도 있다. 이 차이점들을 두 가지로 대별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이름이 변한 경우: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이 아브라함과 사라라는 이름으로 변화되었고

 

(창 17:5,15) 즉시 바뀌어졌다. 또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은 두번이나 고지된다.

 

그러나 첫번째 뿐 아니라 두번째의 고지 후에도 그 새이름이 일관성있게 사용되지 않는다. 왜 그런

 

지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이름에 주로 근거한 문서분석은 족장

 

의 이름이 두 가지로 사용된 차이점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약간 유사한 것을 여룹바알이란 가명을 받은 기드온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여룹바알이

 

란 이름의 기원은 사사기 6:32에 진술되어 있다. 여룹바알이 9장에서는 독점적으로 사용되었지만 7

 

장과 8장에서는 기드온이 거의 배타적으로 사용되었다.

 

 

2> 차이점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경우: 애굽의 왕은 오경에서 주로 "바로"로 불려진다. 여기서 우리는

 

어투의 차이점이 문서의 차이에 있다는 가정에도 불구하고 동일문서 속에서 J.E.P가 모두 있음을

 

보게 된다. 동일한 왕에 대해 다른 두 가지 이름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름에 대해 철자를 두 가지

 

로 사용하는 이와 유사한 예로 오경 밖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8. 차이점에 대한 몇가지 설명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온 이와 같은 차이점들이 성경에 명백하도록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항상 분명하지 않으므로 몇가지의 설명들이 시도된다.

 

 

1> 이름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것은 계속적인 반복의 단조로움을 피한다. 역대기 상하에서 "여호와의

 

집"과 "하나님의 집"이 상호교차적으로 표현된 것은 이것에 대한 아주좋은 예증이다.

 

 

2> 사무엘상 3:3에는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가 나타난다. "(만군의)여호와의 언약궤---하나님의 언약궤---하나님의 궤---여호와의

 

궤---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궤"등. 이 구절들에서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동일시하려는 어

 

떤 의도가 있는지 혹은 그 차이점 자체를 제시하는 것이 주된 목적인지 분명치 않다.

 

 

3> 어떤 경우에는 이름을 다르게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측면과 관계들을 제시하고 있다.

 

 

4> 이와 반면에 정확하고 빈번한 반복은 단조롭기는 하나 인상적이고 강조적인 용법으로 사용된다. 창

 

세기 1장의 대 주제는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이다. 엘로힘(32회)만을 계속 반복한 것은 강조점을 불

 

어넣기 위함이다. 이것은 창세기 2:4-3:24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에서 더욱 분명하다. 복합적인 이

 

름이 단지 2:4에서만 사용되고 여호와란 이름만이 2장과 3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나타난다면 여호와

 

를 엘로힘과 동일시 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분명히 시사되었을 것이다.

 

 

5> 또한 성경에는 주어진 표현으로서 상투적인 표현을 만들고자 하는 아주 분명한 경향이 있음도 알아

 

랴 한다. 위에 제시된 예증들을 볼 때 좋은 표현의 용법을 결정하는 견고하고 확실한 규칙도 없고

 

두서너 개 이상의 원리들이 똑같은 타당성을 가지고 적용될 수 있는 경우에 한 구절의 정확한 형태

 

가 어느 문서에 속한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9. 편집자에 대한 호소

비평적 분석이 가진 치명적인 치면적인 결합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의 용법과 관련하여 이미 명백하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이제 그것은 편집자나 혹은 편집자들에 대해 호소하지 않고는 그들의 작업을 진행해 나갈 수 없다. 비평가들의 이론이 통하지 않는 곳이 나타날 때마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순전히 가정적인 편집자가 잘못한 것이라는 이 엉뚱한 비난으로 논리를 전개해간다. 그러므로 편집자에게 호소하는 것마다 그들의 이론이 그곳에서 난관에 봉착했음을 말없이 수납하는 것이다. 창세기나 오경 전체를 일차적인 기준인 여호와와 엘로힘의 이름으로 분해하려는 시도는 결국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기 때문에 이 이론의 옹호자들이 복합적인 저작권을 시사하는 다른 것을 제시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두번째의 기준을 검토하기 위해 넘어가야겠다.

 

 

 

제 2 장 용어와 문체의 차이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과 여호와 두 이름의 차이로서는 출애굽기 6:3 이후의 문서분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비평가들은 다른 기준을 만들어 오경분해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편의상 창세기 1:1-2:4A를 제 1 부, 2:4B-4:26을 제 2부로 부르고 이것들을 검토하며, 또한 제 1부를 첫 엘로힘문서(P)로 부르고 제 2부를 여호와 문서(J)로 보면서 그 용어들의 차이들을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즉시 그 차이점이 괄목할 만하다는 관찰을 하게된다.

 

 

그러나 그것들이 나타나는 구절의 주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단지 단어들에만 근거한 분석은 인위적이고 잘못된 결론을 내리기 쉽다는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두 부분에 나타난 두 가지 창조기사는 그 어떤 점에 있어서도 상호모순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관점에서 차이점을 가진다. 우리가 처음부터 기대한 바와 같이 주제가 그 어투를 주로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단어가 주어진 구절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 주제가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거나 혹은 필요한 때에 한해서만 의미심장한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즉, 한 구절에서 몇몇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주제를 살피지도 않고 문서 분해를 시도하는 것은 무모하다.

 

 

문서분해가 의도적으로 되지 않을 때마다 모든 책임을 편집자에게 돌려 그것이 편집자의 역할이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비평가들의 전체적인 위치에 대해 치명적인 것을 교묘하게 빠져 나가는것에 대해 이미 위에서 지적한 바가 있다. 비평가들이 문서분해를 만족스럽게 처리하지 못할 때마다 원자료의 본문을 변경시켜버린 알지도 못하는 편집자에게 그 모든 비난을 전가시켜 버리는 것은 비평가들이 자기의 이론을 살리기 위해 원래 잇는 그대로의 본문을 임의 대로 변경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증거를 손질하는 것"으로 불려지는 것이다. 이와같은 방식으로 어떤 이론도 증명이 되든지 안되든지 할 수 있다.

 

 

 

제 3 장 오경의 용어에 관한 이론

비평가들이 오경의 용어와 술어에 집착하면서 그것으로 문서분해를 시도하고 있으므로 이 분해에 대한 마지막 두 가지의 논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문제를 마무리지음으로써 오경의 통일성에 대한 번호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게 여겨진다. 세 가지의 요점으로 간추린다면,

 

 

(1) 오경의 용어는 멋지고 힘이 있으며,

 

(2) 비평적인 분해는 그릇된 기초 위에 근거하고,

 

(3) 비평가들의 시도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1. 오경의 문체는 멋지고 힘이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다양한 것을 제외하고라도 오경에 있는 용어와 술어가 상당히 다양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다. 주목할 만한 중점 (重點)은 그 차이점들이 특히 셈어적인 용법(Semitic usage)에서는 오히려 멋진 표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다루던 경우에서와 같이 세 가지의 특징이 다른 단어와 표현의 용법에서 다시 한번 더 나타난다. 즉 동일성과 다양성 그리고 상투적인 표현의 사용이 그것이다.

 

 

1> 용어의 동일성 혹은 일률성

한 단어나 구 혹은 구절을 자주 반복한다는 것은 단조로워지기 쉬운 경향이 잇다. 좋은 작가일수록

 

이 단조로움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똑같은 것을 계속 반복하는 것은 또한 대단히 인상적이고 강

 

조적인 것이 될 수 있다. 특히 그것은 상업문서나 법조문, 공공문서 등의 문체에서 하나의 특징으

 

로 나타난다.

 

 

2> 다양성

오경에는 저자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폭넓고 다양한 어휘를 구사한 구절이 많이 있다. 하나의 사

 

상이 확대되고 강조되어야 할 때 이와 같은 어휘의 다양성 요청된다.

 

 

3> 상투적 표현

자주 사용되는 구절이 상투적인 표현이 되기 쉽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이미

 

보았었다. 그러나 다른 표현에 있어서도 이것은 사실이다.

 

 

 

2. 비평적 분해는 잘못된 기초 위해 근거하고 있다.

어투와 문체가 다른 것은 저가가 다른것을 의미한다는 비평가들의 기본적인 주장을 조심스럽게 검토해볼 때 결국 우리는 비평적 분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원리 위에 서있었음을 증명하게 되었다. 좋은 작가일수록 풍부한 어휘를 구사한다는 점도 이미 지적하였다. 빈약한 어휘란 사상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며 개념들을 표현하는 능력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평가들의 이론은 어투와 문체의 다양성이 저자의 다양성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오경의 어휘들이 소위 말해지는 "조그만 변화"를 제외한다면 네 가지의 서로 다른 저자들 혹은 자료들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한다.

 

 

 

3. 비평가들은 불가능한 것을 시도한다.

오경의 문서분해가 많은 점에서 봉착하는 난제들과 그 난제들을 억지와 모순으로 처리해 버리는 것도 그들의 시도한 작업이 불가능한 것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좋은 예증이 된다. 하나님의 이름에와 같이 두번째의 기준에 있어서 언어와 문체의 차이를 주목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어투에 관한 논쟁을 결론지으면서 유사한 표현들을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정확한 단어의 뜻과 그 차이점들을 결정하는 것이 결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부연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오경에 각각 두번씩만 나타나는 이 두 단어가 다른 문서에 속한 것으로서 한 명의 동일한 저자가 둘 다 모두 사용할 수 없엇고, 사용해서도 안되고 사용하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그 가정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비평가들이 이 가정위에서 그들의 직업을 계속해 나간다는 것은 정확한 언어비평과 문학 비평을 버리고 그들의 가정 위에 작업을 펼쳐나가는 것이다. 그 독단성을 언어와 문학에 잘 연마된 학생에게는 너무나 명백한 것이 아니겠는가?

 

 

 

제 4 장 관점과 주제의 차이들

분해의 자연적인 결론이요 한 걸은 더 나아간 결론은 그 문서들이 또한 관점과 주제에 있어서 특징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이히호른은 창세기 5:1-28, 30-32; 11:10-32을 엘로힘 기자에게 돌리면서 전자(前者)는 족보를"연대기적으로"(chronological)구성하였으나후자는"우주적으로"(cosmological) 기술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4:1; 5:29; 11:9을 여호와기자에게 돌린 후 그는 이 기자가 고대시대의 역사를 씀에 있어서 "어원학"을 기록하는데 관심을 가졌다고 말한다. 따라서 아이히호른이 5:29을 여호와기자에게 할당한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음을 보게된다.

 

첫째, 언어학적 이유로서 여호와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것과,

 

둘째, 특징적인 이유로서 노아라는 이름이 여호와기자의 어원에 대한 경향(penchant)을 보여주는 예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홍수 기사를 여호와문서와 엘로힘문서로 나눈 것은 상당히 많은 차이점들을 만들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전자는 정결한 짐승과 불결한 짐승을 구별함으로써 정결한 짐승을 일곱씩 방주 안으로 들여보내지만 후자는 이와같은 구별이 없고 오직 한 쌍만을 노아에게 이끌어 온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제시에 있어서 이와 같은 차이점이 강조되면서 쉽게 서로 충돌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언어와 문체에 있어서의 차이점에 일차적으로 기초한 분해의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후펠트가 1853년에 참 엘로힘기자의 문서의 한계를 더욱 정밀하게 규명하려고 시도하면서 원문서와 여호와문서와 다른 후대의 엘로힘문서가 있었음을 확립함에 있어서 그가 명백한 주제의 차이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대단히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일이다.

 

 

야곱의 생애에 대한 역사의 첫부분을 다듬으면서 후펠트는 28:19; 35:7; 35:9-15에 벧엘이라는 이름에 대한 세개의 다른 기사가 있음과 첫 두 기사는 그 작명을 야곱이 라반에게로 가기 이전에 놓여있음과 세번째 기사가 그 후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세번째 것을 원문서(P)로 할당하였고 나머지 둘을 여호와 문서와 두번째 엘로힘문서로 각각 배정해 주었다.

 

 

비평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오경에는 두서너 개의 기사가 따로 떨어져 있기도 하며 결합되어 있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중복의 두서너 개의 문서들을 결합한 결과이기 때문에 오경은 문서들의 복합체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 몇 개의 중요한 구별들을 만들 필요가 있다. 물론 신약성경에서와 같이 구약성경에도 동일한 사건을 여러번 기술(記述)하거나 혹은 동일한 주제를 한번 이상 다루는 경우들이 있는것이 사실이다.

 

 

구약성경은 또한 동일한 것에 대해 괄목할 만큼 서로 다른 기사들을 포함하고 있다. 창세기에 있는 두 개의 창조기사도 상당히 다르다. 하나는 우주적인 것으로서 우주를 다루며 인간에게서 그 절정에 도달하나 또 다른 하나는 개체적인 것으로서 인간에게 중심을 둔다. 홍해를 건넌 산문체 기사는 (출 14장), 그 다음 장에 있는 운문체의 기사와 아주 다르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는 산문이요, 다른 하나는 운문이라는데 있다.

 

 

이와같은 경우에 있어서 두 기사 사이에 있는 차이점이 두서너개의 자료가 있었다는 이론을 요청한다는 것은 분명히 논쟁의 여지가 많은 문제이다. 그러나 최소한 이 자료들을 사용하여 그것들은 자신의 작품에 정리하여 삽입한 저자나 혹은 편집자가 그것들을 서로서로간에 조화있고 확실한 것으로 간주했다고 가정할 수는 있다. 그것들 상호간에 있는 차이점들은 사실적이라기보다 분명한 것으로서 저자나 편집자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하고 확실한 사실들을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경의 복합적인 문서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문서의 연속성을 세우는데 비평가들이 의지하는 중복은 두 가지 종류이다.

 

 

1> 독특하나 유사한 사건의 기사는 동일한 사건을 다르게 기술한 것으로 주장된다.

 

2> 동일한 사건을 너무나 같게 쓴 기사는 그 사건에 대한 두서너 개의 서로 갈등하는 기사들로 구성

 

되었다고 단언된다.

 

 

 

제 5 장 단언된 중복에 대한 설명

오경의 기사들 중 많은 부분이 여러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다른 요소들을 자료에 따라 분류해야 된다고 제법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문서설이 성경(히브리) 문체가 가진 두 개의 독특한 특징에서 거의 자연스럽게 설명이 될 수 있다.

 

 

이 특징 중 첫째 것은 구문론(syntactical)이다. 느슨하게 이어진 문장들과 그리고(and)로 묶여진 완전문장들이 구약성경에는 자주 나타난다. 창세기 1장은 이것에 대한 대표적 예증이라고 할 수 있다. 31절 중 거의 대부분이 완전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 중 몇몇은 하나 이상의 완전 문장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문장들은 접속사 "그리고"와 함께 느슨하게 묶여져 있다. 히브리어는 영어보다 종속접속사를 더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의 문장을 다른 것에 종속시켜야 할 곳에 "그리고"를 사용하여 절(節)을 자주 이어 버린다. 설화적 산문에 있어서 동사가 문장의 첫 부분에 있는 것은 규칙적이기도 하다. 이것은 히브리어의 설화체적 문체가 단순하고 통일성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비평가들이 쉽게 문서분해를 시도할 수 있게된 성경 문체의 두번째 특징은 성경 속에 나타나는 부연과 반복이다. 그것들은 너무 자주 나타난다. 물론 성경 문체가 종종 간단명료한 특징을 가지는 것도 사실이다. 놀랄만큼 짤막한 단어로서 성경의 많은 부분이 쓰여졌다. 그것은 청중이나 독자로 하여금 그것이 다루고 있는 주제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설화에서 강조를 하는 가장 자연스런 방법도 확대설명이나 중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성경 문체는 종종 너무 확산하는 듯하며 세부사항을 확대해가고 반복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이 중요한 특징을 예시하는 데는 몇개의 예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이 이론을 옹호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방법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성경을 분해해 버리는 그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이 성경문체의 특징적 모습을 사용하는 것이 전혀 성경자체의 특징과는 상관없는 것들임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그러므로 결론을 내리자면 그들의 이론을 그 자체가 그릇된 편집이론이다.

 

 

 

제 6 장 문서의 연속과 범위

우리는 후펠트의 작업이 두 가지 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을 보았다.: 그는 창세기에서 문서적 자료들의 연속성을 일깨웠고, 그는 첫 엘로힘문서(P)와는 아주 다르나 여호와문서(J)와 닮은 둘째 엘로힘문서(E)를 인식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전에 엘로힘문서로 분류되었던 창세기 20-50장에 있는 자료들 중에서 대부분을 두번째 엘로힘문서에 돌렸다.

 

 

이 두 원리는 서로 적대적이다. 창세기에 세번째 문서가 있다는 것은 문서들이 서로 연속된 것을 증명하는데 더 어려움을 준다. 또한 첫 엘로힘문서(P)를 엘로힘 자료 중 아주 작은 부분에 제안해버린 것도 후펠트가 이론 수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연속성을 파괴하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중복이론에 대한 상당한 강조를 해준 바로 그 원리였다.

 

 

오경 안에서 중복되었다는 것으로 주장되는 문서들이 연속성을 지닌 것에 대한 질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응 이 자료들이 오경 범위 밖에도 적용이 되는지 그리고 적용된다면 어느 정도까지 추적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아스트룩과 아이히호른이 그들의 분해를 출애굽기의 초반부 이상을 넘어 시도하지 않았는데 1822년 경에는 오경의 나머지 부분뿐 아니라 여호수아서까지 확장되었다. 결과적으로 비평학계에서는 "육경"이란 말이 오랫동안 쓰여오던 친숙한 단어"오경"과 주로 대체되어 버렸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은 이 여섯권의 책이 오경과 같이 역사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하나의 그룹을 형성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비평가들이 일반적인 유사성을 인정하면서도 여호수아서와 오경의 문서들 사이에 구분을 긋고 여호수아서를 전선지서(Former Prophests)의 나머지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다면 후펠트로 부터 문서설의 옹호자들에 의해 그렇게도 강조된 그 문서들의 연속성은 대부분 파괴되고 결국 육경을 주장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없어져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그레이(G.B.Gray)가 그의 책 " 비평학개론"

(Critical Introduction; 1924)에서 드라이버의 "육경" 분해를 주로 따르면서도 자신은 "오경"으로 말하기를 더 좋아했다. 이러한 그가 육경이란 문서가 실제적으로 존재했었는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육경이론은 비평가들에 있어서 하나의 동의가 아니라 하나의 강한 경향이다. 그것은 오경에 대한 모세의 저작권을 반대할 논증을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제 7 장 관점과 주제의 차이에 관한 결론

중복설에 대한 고등비평의 방법론과 결과에 대한 자연스럽지 못한 첫 반응은 비평가들이 만든 차이점과 상호 모순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차이점들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단순하고 간단한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수정 구슬 목걸이를 하나하나 짤라 하나하나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토론을 하고 이 구슬들이 모두 다른 동네에서 모여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오직 하나의 결정적인 반박은 그것들이 다시 꿰어졌을 때 다시 한번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결국 성경에 나타나 있는 성경 기사의 통일성과 조화가 이 자충족적인 기사는 몇 개의 다르고 상충적인 기사를 결합한데서 기인했다는 이론에 대한 가장 좋은 반박이 된다.

출처 : 예림의집
글쓴이 : 김정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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