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영성
영성이란,
1) de-mystification, 2) de-spiritualization, 3) de-formalization,
4) de-moralization 이라고 정의해 볼 수 있지 않을까.
1.
영성(spirituality)과 신비주의(mysticism)는 동의어로 사용가능한 것일까. 영성이란 말이 처음으로 학문적으로 사용된 것은 17세기 프랑스이고, 학문의 체계로서 사용된 것은 20세기 후반의 일인 것을 감안하고, 그리고 영성이란 게 교부시대로부터 17세기 이전까지는 신비신학 (mystical theology)
금욕신학 혹은 수덕신학(ascetical theology)이란 말로써 그 의미가 표현되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영성과 신비주의라는 말의 교환적 사용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문제는 있다. 신비주의라고 말할 때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 체험이다. 신비주의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일치 경험이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혹은 제자도(discipleship) 처럼 기독론적으로 말해도 변하지 않는다. 그 하나님 체험과 그 체험에 대한 경로 방법 따위를 총칭하여 우리는 신비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사전적 의미는 아니다.
나는 그저 내 느낌과 현재까지의 지식을 동원하여 분석하고 있을 뿐이다.
영성을 신비주의와 동일한 용어로 사용한다면 영성은 하나님 체험(God-experience)이 된다.
두 용어의 교환가능성은 여기서 문제가 된다. 영성은 단지 하나님 체험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성은 해석(interpretation)도 포함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체험 자체와 함께, 혹은 체험 자체가 아니라, 영성의 관심은 체험에 대한 해석이라는 것이다.
John Hick의 표현을 빌자면, 사실, 체험 자체란 없다, 그저 해석된 체험(experienced-as)만이 있을 뿐이다. 좀 더 도발적으로 말하면, 체험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체험은 나의 신학적 구조, 혹은 해석학적 구조 안에서만 일어나라 뿐이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구조(structure)인 것이다.
이 구조는 다름 아닌 인식의 구조, 혹은 사유의 구조이다. 이것을 문제삼지 않은 채 하나님 체험을 말하는 것은 영성을 신비화(mystify)하는 것이다. 신비화는 체험 지상주의를 낳을 우려가 있다. 그 체험 지상주의는 현실에 뿌리박는 게 아니라 초월적 관념에 뿌리박는다. 그렇게 되면 영성은 현재적 삶의 가치기준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현재적 삶의 가치를 무화시킨다.
2.
영성은 하나님 체험과 그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삶의 방식이다.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영성은 삶이지 관념이 아니다. 영성은 현실(reality)이다.
있는 그대로, 진짜, 곧, 지금 여기이다. 이것이 예수의 삶이요 사유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영성을 말하면서 '영적인 것' '영적인 목회' '영적인 삶'을 운운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의식구조는 대부분 이원론적이다. 이원론적 의식구조는 대부분 선악의 가치판단을 함유한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구분할 때에 영적인 것은 좋고 육적인 것은 나쁘다 라는 관념이 있는 것이다. 육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가두는 감옥이다. 오로지 영적인 것만이 영원하다.
실체(substance, essece)는 영적인 것 뿐이다. 육적인 것은 가짜이다.
좀 래디칼하게 말한 것이지만, 사람들의 이원론적 의식구조의 저변에는 이와 같은 사고가 분명히 있다.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 이와 같은 플라톤적인 이원론은 어떻게 보면 영성생활의 출발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인식이 없이 영성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출발점이 도착점은 아니다. 눈이 띄여졌으면 이제 그 눈을 가지고 제대로 보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른바 '영적인 것' '육적인 것'은 언어이다. 언어는 현상을 설명하는 체계이지 현상 자체가 아니다.
이를 테면, 먹고 싸는 게 영적인 것인가, 육적인 것인가. 성경을 읽는 것은 영적인 것인가 육적인 것인가, 하루에 한 시간 기도하는 일은 영적인 것인가, 육적인 것인가. 혹은, 기도하는 것을 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기도는 몸으로 하지 생각으로 하는 것은 아닐텐데, 그렇다면 기도는 육적인 것인가.
영성은 늘 개혁이다. 영성은 교회와 신학이 관념화되고 제도화될 때 그것을 넘어서서 다시 예수의 삶과 사유방식으로 돌아가게끔 인도하는 그 무엇이다. 그 무엇을 총칭하여 영성이라고 부른다. 관념화, 제도화의 저변에 깔린 것이 바로 영육에 대한 극한적인 이원론이다.
자꾸 그렇게 구별해가면서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싶을 때 영성은 필요한 것이다.
3.
영성에는 형상(Form)이 없다. 영성은 형상을 갖지 않는다. 플라톤이 말한 형상이란 이데아이다.
절대적인 실체요 모든 것의 근원이며 가짜를 가능케 하는 진짜이다.
영성이 만일 그러한 실체적 이데아를 말한다면 그것은 영성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실체에 집착하는 한, 불완전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성은 목적이 이끄는 삶(purpose-driven-life)이라기 보다는 성령이 이끄는 삶(Spirit-driven-life)이다. 전자로 말할 경우, 자칫하면 성공신화에 빠져들 우려가 있다. 자신이 그렇게 가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영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목적이 없는 것이다. 창조 자체가 목적이라면 목적이지, 창조가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 그 무엇이 아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현대적 적용일 뿐이다. 영성은 누리며 사는 것이지 쌓아두는 삶이 될 수 없다.
형상을 세우고 목적을 세우는 한 우리는 누릴 수 없다. 그저 쌓아두려는 경향성에 사로잡힐 뿐이다.
교회는 형상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교회를 형상으로 인식하면 목사는 하이이라키의 꼭대기에 서게 된다. 그리고 신학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안타깝지만 이게 교회의 현재 모습이다. 영성의 일차적 과제는 해체(deconstruction)이고 이차적 과제는 재구성(reconstruction)이다.
4.
영성은 도덕적인 삶(moral life)을 포함하지만 거기에 매이지 않는다. 오늘날 영성이라고 부르는 학문분과는 전통신학에서 도덕신학(moral theology)의 범주에 속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차원이 핵심적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morality)이란 물론, 단순히 선이냐 악이냐를 말한다기 보다는 어떤 것이 보다 하나님의 뜻에 가까우냐 하는 문제를 말한다.
그런데, 이 도덕이란 절대적일 수가 없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게, 어떤 초월적인 혹은 절대적인 실체로써 딱히 규정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살인이니 간음이니 하는 것도 그것을 놓고 도덕적이다 비도덕적이다 운운하는 것은,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말할 수 있을 지 몰라도, 어떤 특별한 상황에 직면해서는 복잡한 면들(complexity)을 다 고려한다.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도덕이라는 것도 철저하게 역사적이며 문화적이다. 다시 말하면, 도덕 역시 상황적(contextual)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도덕적인 삶에 국한될 수 없다. 도덕이 사람을 부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도덕을 부릴 수 있는 그런 것을 우리는 영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을 통해서 우리가 만나는 예수가 바로 영성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이 식별(discerment)이다.
B . 영성학
학문으로서의 영성은 영성학이지 영성신학이 아니다.
영성학은 신학의 한 부류가 아닌 신학의 방법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서, 영성학은 어떤 특정한 영역을 그 대상으로 삼는 신학 지류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대상으로 삼는 신학의 총론이다.
따라서 영성학은 성서학, 조직신학, 교회사를 포괄하며,
심리학, 사회학, 과학, 문화이론, 문학과 같은 인문/자연과학과 대화한다.
이것은, 기도하면 다 보인다, 뭐 이런 식의 교만함에서 나온 주장이 아니라
영성은 학문을 하는 어떤 자세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 방법, 자세란 무엇일까.
첫째, 영성학은 모든 학문이 주어진 현실로부터, 곧, 어떤 고정된 교리/제도/전통이 아닌, 현실(reality)로부터 출발하게끔 한다. 학문의 출발은 현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학문의 출발은 현실문제에 대한 성찰이고 해결에 대한 모색이다. 그래서 학문은 현실의 모순을 해결/초월하는 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다른 차원에서 말하면 모든 학문은 토착학문이고 또한 토착학문이 되어야 한다. 신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자신이 발디고 서있는 땅의 전통과 현재를 자신의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리 변명을 해도 도그마/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성학은 토착화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도그마/이데올로기를 지적/거부/변혁시킨다. 그래서 영성학은 언제나 래디칼하고 현실초월적일 수 밖에 없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영성학은 현실을 긍정하며 전통을 소중히한다.
둘째, 영성학은 항상 통전적이다. 영성학은 신학의 따로따로 분과들을 하나로 엮는 역할을 하며, 타 학문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의 현실에 대한 통전적인 이해를 추구한다. 요즘 학문은 너무나 갈기갈기 찢어져 있어서, 아무리 날고기게 박사공부를 해도, 앞뒤 꽉꽉 막힐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통전적인 이해를 결여한 채, 하나만 파 들어간 까닭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하나를 깊게 파는 게 학문에선 기본이지만, 그 기본은 다른 또하나의 기본, 곧, 대화, 라는 기본과 맞물릴 때에만 의미/유효성/힘을 갖는다.
영성학이 왜 통전적일 수 밖에 없을까. 그것은 영성학은 관상(contemplation)이기 때문이다.
관상이란 있는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며, 현실의 양면(dialectic), 곧, 음양을 동시에 관하는 것이다. 관상은 그래서 항상 연기적 관상이다. 연기적 관상이란 현실의 제 요소들이 얽히고 설켜있음을 보고/깨닫는 것, 그러자니 영성학이 통전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통전적이라는 얘기는 하나의 뷰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통전은 침묵일 수 밖에 없다. 왜, 완전한 통전이란 한 사람의 의식세계 안에서 또는 어떤 한 커뮤니티의 시스템 안에서 절대 구축될 수 없는, 곧, 늘 미완성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완전한 통전이 어느 한 순간도 구현될 수 없다는 말이라기 보다는 완전한 통전은 늘 한결같이 유지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셋째, 영성학은 대화이다. 대화는 평등이다. 평등한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화는 민주주의고 영성학은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나는 매우 포괄적으로 쓴다. 나는 예수의 삶과 말씀의 핵심을 민주주의라는 용어에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영성은 대화를 방법으로 사용하며 그것을 목적으로 한다. 대화는 상대방을 냅두고, 존중하며, 결과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융통성이 있다. 대화는 그래서 반자본주의적 속성을 지닌다.
- 출처 : http://blog.daum.net/loveeve/8371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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