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1832-1905)
그의 생애와 선교사역
서 론
개신교 선교의 제 1기가 윌리엄 캐리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면 개신교 선교의 제 2기는 허드슨 테일러에 의해서 막을 열게 되었다고 랄프 윈터는 기술한다. 제 1기 시대와 제 2기 시대의 주요한 차이점은 선교지역이 해변지역에서 내지(內地)로 전화되면서 그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서구인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내지로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생각하였다. 교통과 통신, 물자의 공급, 신변 보호 등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전염병과 풍토병은 서구인들에게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내지선교의 문을 연 사람이 허드슨 테일러(Hudson Tatlor, 1833-1905)였다.
그가 1865년 구성한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CIM)는 당시까지의 선교기관과는 다른 면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선교비용을 기존의 교회조직에서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구하고 하나님의 응답으로 공급받는 것을 재정 정책으로 내세우는 것이었다. 특히 선교본부를 유럽이 아닌 중국에 두었으며 중국인의 옷을 입고 중국인의 관습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순회전도를 통해서 광범위한 지역에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선교의 흐름이었고, 특히 허드슨 테일러의 매력적인 인품과 함께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 그의 생시(生時)에 중국내지선교회 소속 선교사의 숫자는 800명에 도달할 정도였다.
이러한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사역은 21세기 한국교회의 선교사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영감을 줄 수 있다고 본다. 한국교회가 보여주는 선교사역에 대한 열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며 인력과 자금력에 있어서도 구미 선진 기독교 국가들과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교사역이 그 핵심을 벗어나 물량공세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중국선교에 있어서 금권력이 주는 부정적 영향은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소고는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사역의 발자취를 통하여 한국교회의 선교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늠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본 론
1. 허든슨 테일러의 생애
허드슨 테일러는 진실한 의미에서 가장 선교사다운 대표적 인물이었다고 평가된다. 테일러는 1832년 5월 21일 영국의 요커셔(Yorkshire)주 반슬레에서 독실한 감리교도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테일러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전 아들이 태어나면 중국에 선교사로 보낼 것이라고 하나님께 서원하였다고 한다. 허드슨 테일러는 17세가 되던 1849년 회심과 함께 세례를 받고 중국 선교의 결단을 하게 되었으며, 1853년 9월 19일 ‘중국복음전도협회’ 소속으로 중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중국복음화 선교회를 이끄는 구츨라르프 선교사는 테일러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모험심, 용기, 중국관심에 대한 적응성, 선교방법의 원칙 등에 있어서 테일러의 행동은 구츨라르프를 잠재적으로 본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항해 초기에 폭풍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는 오히려 정말 중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6개월 간의 항해 끝에 1854년 3월 1일 수요일 허드슨은 중국 땅에 첫발을 딛게 되었다. 그는 충분한 선교훈련도 받지 못했고 대학교육도 부족했지만 간단한 의학공부를 마치고 21살의 나이에 중국에 도착한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후일 CIM(Chinese Inland Mission)은 정식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도 선교사로 허입을 시켰다.
중국에서 그는 독립적인 사역을 하기 원했다. 특정 교단을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과 친분을 맺었다. 그는 목회를 했지만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또한 메드허스트(Walter H.Medhurst)의 영향을 받아 의료사역을 했지만 의사는 아니었다. 테일러는 사람들의 전통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를 수 있도록 자신을 자유로운 상태로 만들기 위해 독립적인 사역을 선호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은 태평천국의 난으로 시내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외국인이 성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으나 테일러는 위험을 무릅쓰고 나가서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곳에는 지붕이 파괴되어 없거나 총탄이나 대포에 의해 구멍이 나고 손상을 입은 집들이 즐비했다...... 전쟁의 포성만이 아니라 그 포화로 파괴된 실상을 직접 목격하고 나니 허드슨은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둘은 불교도들의 절이 있는 쪽으로 걸으면서 도중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었다. 허드슨은 전도지를 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연료로 불태우거나 뭉쳐서 벽의 구멍을 막는 데 사용하기 전에 내용을 읽어보게 해달라고 속으로 간구했다”
그는 언어의 장벽과 전쟁의 위험 속에서도 중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중국어를 공부하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중국의 몇몇 해안 도시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상하이 같은 도시에는 복음이 어느 정도 확산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중국 내지의 원주민들에게는 아무도 용기를 내어 들어가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벽에 붙어있는 중국지도를 꼼꼼히 들여다보던 허드슨에게 한 가지 기발한 착상이 떠올랐다. 중국은 몽골을 접경으로 해서 11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허드슨은 그 지역들을 위해 매일같이 기도했다. 각 지역마다 두명의 선교사들을 모집하면 어떨까? 1년 정도 지나면 중국의 모든 지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각 지역에서 전도할 수 있지 않겠는가?”
테일러는 1854년부터 1860년까지 10차례에 걸쳐서 절강성을 순회하며 선교여행을 하였다. 이 기간 중 그는 중국어 신약성경 1,800권과 2,000권이 넘는 선교책자들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이에 테일러는 중국의 오지에 있는 무지한 중국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강을 따라 배를 띄워 중국 구석구석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테일러는 계속해서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점점 중국인들을 닮아갔다. 그것이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국인들의 옷을 입고 중국인들처럼 변발을 했다. 중국옷을 입고 중국식으로 생활하는 것은 후에 중국내지선교회(CIM)의 특징이 되었다. 그런 그를 영국에서는 못마땅해 하기 시작했다. 야만인들의 방식을 따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의 영혼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런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인들이 한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더 큰 불행은 없었다.... 허드슨은 하나님께 중국을 위한 스물네명의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1865년 테일러는 중국의 영적필요와 간구라는 호소문을 유럽 전역과 미주 지역에 보냈다. 그는 중국선교의 절박성을 조리있게 호소하면서 22명의 자비량 선교사가 중국에 와서 선교사업에 종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중국내지선교회가 조직되었다.
마침내 1865년 7월 27일, 허드슨은 “중국내지선교회(Chinese Inland Mission)”를 공식적으로 창립하였다. 테일러는 중국내지선교회를 찾아온 선교 지망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고 한다.
“선교회나 자기와 친한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혼자 살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선교를 포기하십시오. 선교사는 범사에 어느 때든 예수님과 중국 영혼들을 첫째 목표로 놓을 수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선교사들도 1백명이 넘고, 선교사역이 커짐에 따라 매일 매일 필요한 것들도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중국내지선교회의 선교사들과 허드슨 테일러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놀랍고 정확하게 응답받곤 하였다. 테일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구해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는 사람이었다. 또한 자신의 선교단체만이 아니라 다른 선교단체들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노력하는 것이 그의 사역의 원칙이었다.
테일러의 중국선교 52년간의 사역은 천로역정과도 같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대학졸업장과 의학 학위가 없고 목사 안수도 받지 않은 평범하고 연약한 선교사였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써 중국교회와 중국선교의 역사상 참으로 위대한 일을 남기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테일러는 후세에게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연약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하나님을 믿음으로 위대한 일을 남겼다”
허드슨 테일러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중국 땅의 모든 곳을 구석구석 찾아나서는 ‘중국과 중국의 혼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테일러는 1905년 6월 3일 그가 마지막으로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중국 사람들의 땅에 뼈를 묻었다. 그의 묘비명에는 “허드슨 테일러,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새겨졌다. 그의 가슴 속에 항상 불타고 있던 바로 그곳, 중국의 심장부 깊은 곳에서 그는 자신의 생을 마감한 것이다.
2. 중국내지선교회(Chinese Inland Mission)
허드슨은 친구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며칠간 함께 모임을 갖고 새로운 선교단체의 근간을 이룰 여섯 개의 기본 원칙을 세웠다. 내지회는 종래의 모든 교파 혹은 회와 다른 특색을 가졌다. 그 근본 방침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초교파적 선교단체를 지향하여 함께 일하기로 동의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교파 출신이든지 제한을 두지 않는다. 둘째, CIM 소속의 선교사는 단체의 정기적인 후원 대신에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의뢰한다. 셋째, CIM은 하나님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재정 후원을 요구하지 않는다. 넷째, 중국 현지의 선교지도자는 영국에서의 지시를 기다릴 필요없이 독자적으로 선교사역을 결정하고 실행할 재량권을 갖는다. 다섯째, 중국 복음화를 위한 계획에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이 참여한다. 여섯째, CIM소속 선교사는 가능한 중국 현지인처럼 생활한다. 중국 의상을 입고 젓가락을 사용하며 중국식의 집에서 거주한다.
1893년 말까지 내지회는 14성에 선교사가 거주하는 123개의 선교부를 설치하였고 그 중 105개 선교부는 중국인 목회자들이 관리하였다. 1895년에는 614명의 선교사와 462명의 중국인 보조자, 260개의 전도소를 세우게 되었는데 신도수는 5,200여명 이었다. 내지회의 선교 노력의 성과는 소속 선교사와 신도수의 변화로 확인할 수 있다.
내지회 소속 교회, 선교사, 신도수의 변화(1865-1905)
시 기 |
1865-1875 |
1875-1885 |
1885-1895 |
1895-1905 |
선교본부 |
13 |
30 |
123 |
600 |
예배당 |
7 |
67 |
133 |
703 |
선교사 수 |
36 |
137 |
604 |
825 |
세례 교인 |
7 |
7,173 |
7,647 |
18,625 |
1914년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선교회가 되었고 최대 전성기인 1934년에는 1,368명의 선교사가 활동하였다. 1950년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하자 내지 선교회는 다른 선교 단체들과 함께 중국에서 추방을 당하게 되었고, 1964년 (현)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선교회로 이어지게 되었다. 여전히 O.M.F.는 아시아 선교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허드슨 테일러와 CIM 사역의 선교 정신에 입각한 “믿음선교”를 계승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테일러는 오직 중국 내지의 복음화에 힘을 쏟았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급료도 주지 않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중국인의 옷을 입혀 중국인 사이에서 꾸밈없이 살게 하였는데, 이런 내지회의 운동은 초교파적 혹은 국제적인 순수한 복음 선교사업으로서 19세기의 해외선교사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3. 선교사역의 특징
내륙지방을 여행하는 동안 한 가지 문제가 계속해서 허드슨의 마음을 잡고 있었다.... 상하이에서 20-30Km만 벗어나도 중국인들은 허드슨을 보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왜냐하면 이상한 서양 복장과 곱슬한 노랑머리 외국인을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그 점을 메드허스트 박사에게 의논하자 박사는 허드슨에게 중국인의 복장을 해보라고 적극 권했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중국인 복장을 함으로써 손실보다는 이득이 더 많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허드슨에게는 매우 비실용적이고 불편해 보였지만 당시의 중국인들은 그와 같은 복장을 하고 다녔다.... 허드슨은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스스로 놀랐다. 더 이상 그를 주목하거나 빤히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런던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군중 속의 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처럼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사역의 특징은 성육신적 선교 즉 “동일화”라고 할 수 있다. 동일화란, 선교현장에서 선교사가 현지인들의 문화와 관습을 단순히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방적이고 신뢰적이며 수용적인 전망을 가지고 한 문화에 들어가 배우는 것이며, 문화적 차이점들에 대하여 겸손하게 반응하여 타문화권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발사는 남자들의 머리를 자르고 뒷면에 남은 머리카락에 모조 변발을 이어 붙였다. 그리고 모든 남녀 선교사들은 중국 의상으로 갈아입었다. 거리로 나온 허드슨과 선교사 일행을 본 중국인들과 심지어 외국인들까지 그들 주변에 모여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댔다..... 상하이 지역 신문까지 중국내지선교회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싣고 그들을 ”변발선교회“라고 불렀다. 상하이에 사는 많은 외국인들은 새로운 선교회 사람들의 행동을 반 영국적이며 반 기독교적이라고 비난했다.... 사람들의 비난과 냉소적인 반응을 보면서 과연 중국인 복장과 중국 생활방식이 현명한 처사인지 의문을 갖는 선교사들이 생겼다. 그러나 허드슨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제 곧 내지로 들어가면서 평생 백인을 한번도 보지 못한 수많은 중국인들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타일렀다. “사람들이 당신을 해괴한 서양 옷을 입은 사람으로 기억하길 바라시오.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기억하길 바라시오? ”라고 그는 선교사들에게 질문했다
이러한 동일화의 과정이 없이는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자신의 문화적 기독교를 전하여 오히려 타문화권 선교지 내에서의 반감만을 초래할 것이다. 성육신적 선교의 뒷받침은 바로 하나님이신 것이다.
결 론
중국의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여 중국 내지 깊숙이 들어감으로써 “내지선교시대”의 막을 연 허드슨 테일러의 사역은, 가벼운 금전적 동정보다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며, 일체의 모금 운동을 사양하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의뢰하였다는데 그 중요성이 있다. 이는 21세기 중국선교에 열정을 다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금권력을 의지하는 경향이 있는 한국교회가 새겨들어야 할 금과옥조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에 헌금하고 싶어 하는데 왜 만류한거요?” 허드슨은 어쩌면 돈을 주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헌금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선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돈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액수의 돈으로도 한 영혼을 구하지 못합니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후원할 재정은 절대로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또한 그의 사역은 연합운동이었으며 모든 선교지원자들에게 관대하였고 특히 자국인 지도자들을 양육하는데 힘을 썼다. 이런 모습도 오늘 한국교회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선교현지에서도 교파와 교단을 따지고 협력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그냥 소문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또한 선교현지에서 개척한 교회에 한국에서 후원하는 교회 혹은 모교회의 이름을 붙이는 식민지적 선교행태는 이제 지양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2,000년 교회사에 있어서 신기원을 이룩한 허드슨 테일러의 사역을 본받아 교파와 교단을 초월한 협력사역과 현지에 적응하는 동일화 사역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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