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신학!! 구약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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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아들 2015. 4. 8.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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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본 성경

* 구약에 대한 Critical Approach: Historical-critical Mathod (source criticism, text criticism)

1) 문서설(Document Hypothesis)
구약은, 한 권(예-모세오경)이라 할지라도 단일 저작이 아니고, 한 번에 쓴 것도 아니며 여러 시대에 걸친 여러 저자의 작품이다. 왜냐하면 논리적 일관성이 없고 중복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doublet’(중복보도)는 한 사건을 두 번 이상 기록하는 형식이다.
J, E, D, P 등의 문서들로 성경을 모두 찢어내기 시작하여 현재는 그 분류들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인정하는 상태이다.
Martin Noth : 성경의 문서설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서, 한 사건이 두 가지로 기록된 것을 증명하는 확실한 근거는 ‘doublet’ 밖에 없다.
Eissfeldt(최고의 문서설 학자) : 문서설은 확실한 fact 위에 근거한 이론이라기 보다 가설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

2) Form Criticism(양식사학 비평)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문서설의 극단화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문서설은 J, E, D, P라는 문서의 본래적 성격을 그래도 인정하여 현존하는 원문을 추적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비해 양식사학은 기록된 형태 이전의 form을 추구한다.
현재의 구약 형태가 존재하기까지는 간단한 것들의 복합이 아니라 더 오래된 기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J, E, D, P 이전의 문서가 있을 수 있고 문서 이전에도 구전의 형태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pre-literary stage(문서 이전의 상태)를 인정하고 그것까지 추적하려 한다.
그런데 남아 있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데 그 방법으로 Gattungsforchung(쟝르, 형식)를 사용한다. 이 형식 연구의 근거는, 고대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형식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종교적 영역에 있어서는 더욱 보수적이므로 더 형식에 철저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서화 이전의 형식은 보수적 성격 때문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형식과 삶의 내용(상황)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현재의 삶의 내용 속에서 고대의 형식(gattung)을 추적할 수 있다 - 삶의 상황을 전제. 현존 형태 이상의 풍부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unit 안에 여러 쟝르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서로 찢어 분류(atomistic)하다보니 원문으로서의 구약 전체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3) Canonical Criticism(예일대의 B. S. Childs가 주장)
위의 2가지 비평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데 비해 이들은 현존하는 정경 자체를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인용한 구절은 구약이었다고 하여 구약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의 근저에는 문서설과 양식비평이 전제한다. 비평의 방향만 달리하며 현재 형태의 구약에 관심을 두고 이 구약이 어떤 경로를 거쳐 이루어졌나를 연구한다. 연구의 방향은 다르지만 연구의 방법론은 변하지 않았다(Childs의 ‘The Crisis of Biblical Theology’를 보면 근본적으로 우리와 다르다).

* 이들 3비평의 공통점은 오늘 우리의 성경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점이다. 한 사건의 중복기록은 서로 모순된다고 하여, 그렇게 되면 양자가 모두 그릇되거나 적어도 하나는 그릇되므로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의 한 unit를 다른 새로운 문맥에 집어 넣음으로서 본래 문맥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context 변조).

성경연구의 도입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인 것이 아니다. 기록된 때에 따라 편의상 구별한 것이다. 구약을 접근하는 방식, 구약을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하다. 각자 원하는 방식이나 시각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어떻게 접근하고 바라봐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성경 자체가 성경에 대해서 여타의 책과 구별하는 것이 영감이다. 자유주의는 이 영감을 인정하지 않고 성경과 다른 책들을 구별하는 것을 포기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의 독특성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태초부터 창조, 타락, 이스라엘의 선택, 그리스도의 초림, 재림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데, 현대는 역사관이란 역사를 보는 제 입장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다양한 역사관이 있다는 뉘앙스를 준다. 현대신학에서는 역사의 문제와 신학의 문제가 맛물리고 있고, 역사의 의미에 따라 신학의 정립이 달라진다. 그러나 성경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공통적 견해이다. 역사에는 역사 자체와 역사 기술이 있는데 역사 기술은 결국 역사 해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요즈음 역사 해석이 중요한다고 본다. 즉, 성경은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의 실현이라고 보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은 절대적인 역사관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天은 heavenly realm(허공)을 말한다. 地는 earthly realm 즉, 물리적 공간이다. 따라서 두 개의 실재 영역으로 나뉘어진다(realm of reality). 물리적 공간 즉, 인간이 사는 삶의 장은 시,공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리적 공간 외에 또 다른 실재 영역이 있다. 그것이 heavenly realm이다. 통속적으로는 영계(靈界)라 한다. 역사란 물리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총체를 가르쳐 역사라 한다. 이 천상의 영역과 물리적 영역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는 이 천상의 영역에서 시작되어 물리적 영역으로 넘어간다고 본다.
성경은 하나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물리적 영역인 시,공의 영역의 일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Docetism, 이것이 더 세련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불트만(Neo-Gnosticism)학파로서 시,공의 역사가 다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는 시,공의 물리적 공간에 뿌리를 박은 것이다. 또한 성경의 역사는 하나의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의 흐름이라고 할 때 지혜문학(시편, 잠언 등)이 포함되기 어려운 점이 있긴 하나 하나의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신학의 왕은 조직신학(교의신학)이다. 그러나 모든 신학의 근거는 성경이다. 이제까지의 신학 중 가장 성경과 밀착된 것이 조직신학이었다. 성경의 진수를 체계적으로 진술해 놓은 것이 교의신학이다. 혹자는 교의신학도 시대상황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나 이러한 시대적 영향은 오히려 교의신학을 오도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특히 독일철학에서 그러하다). 독일에서는 철학의 발달의 궤와 신학의 발달의 궤를 같이 한다. 철학과 신학이 매우 밀접하여 신학에 많은 해를 끼쳤다.
성경과 가장 밀착된 것이 조직신학이지만 조직신학 속에서 성경을 더욱 가깝게 느끼기 보다는 멀리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조직신학의 용어가 성경의 용어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은 주제별로 나뉘어져 기록되어 성경의 역사성이 상실되어 있다. 즉, 조직신학은 주제별로 성경 내용을 조직화하였다. 이는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사색이 들어가고 오늘의 상황에 대한 사색(refleetion)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합리적 설명을 가함).
성경은 구체적, 역사적 사건 기록이다. 교의신학은 추상적, 체계적이다. 이것이 교의신학의 약점이자 장점이다. 사건을 기록한다는 것은 사건 자체로 끝나지만 추상적이라고 함은 하나의 원리를 추출하는 것으로 다른 여러 사건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유익이 있다. 조직신학 자체가 추상적인 것은 사색을 거쳤기 때문에, 철학적 요소가 가미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에 근거하나 시간의 제약 등의 이유로 성경의 실제기록(직접적인 내용)과 기록 속에서 원리를 추출하는 과정이 생략되었으므로 성경과 거리감 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사색을 통한 추상적, 체계적, 조직적 작업은 정도의 차이 뿐이지 모든 신학에 다 있다. 방법론의 독특성은 과거의 사건 자체 지향보다는 현재지향적이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는 주제별로 발전되어 간다.
신 론 변증가들, 삼위일체론 ↓
인간론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 ↓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옴.
기독론 이성론 논쟁 ↓
구원론 종교개혁시대 ↓
교회론 ↓
내세론 ↓
그런데 성경 자체가 신론, 인간론 등으로 구별하여 이야기하고 있는가? 성경과 교의신학에서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는 ①교의신학이 주제별로 모았기 때문이고, ②이들이 사용한 방법론이 다르기 때문이다. 교의학은 현재지향적(오늘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이고 성경은 과거 사건을 기록(그때 무엇이 일어났는가?)했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이 오늘 필요한 교리, 어느 시대나 적용되는 원리 등을 추출하여 기록한 것이기에 이러한 과정에서 구체적인 역사와는 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주제별로 항목을 나누고 이에 관련된 성경 구절을 각 문맥에서 뽑아내므로 문맥 파괴가 이루어지고 유기적인 흐름이 깨어지게 된 것이다. dicta probantia = proof text(특정 교리를 증거해주는 성구들) 때문에 역사성 자체가 증발해 버린다.
이렇게 성경의 역사적 성격은 없어져 버려도 좋은 것인가? 이것에 대한 반론이 성경신학으로 나타났다. 성경의 역사성을 고수해야 한다. 즉 신학에서 꼭 회복해야 할 것으로 자유, 보수 양편 모두 주장한다.

* 성경의 역사성(Geschichtlichkeit : Historicality)

1) 성경의 역사적 성격
성경은 어떤 책이냐? 하는 것이 현대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다. B. W. Anderson의 ‘Exodus Typology in Second Isaiah’에서 ‘Allegory와 Typology는 2개의 상이한 존재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Allegory : 구체적, 역사적 시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무시간적, 영원한 어떤 것에서 참 실제를 발견하고자 함. 알레고리칼한 해석은 구체적 관심보다는 배후의 진리에 더 관심이 많다. 이러한 해석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구체적 역사는 실제적 역사의 영역이 아니고 무시간적 영원한 역사의 표면적 구체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참 실제는 구체적 역사 속에 있지 않고 실재를 초월한 것이다. 시공의 역사적 사건은 무시간적 진리의 일시적 구체화에 불과하다. Plato의 Idea에서 이러한 입장이 잘 나타난다. ‘현상은 영원한 이상의 묘사요 그림자이다’
Typology : 시,공에서 일어난 일은 영원한 실제와 동일하다. 역사 속에서 궁극적 실제가 표출된다 .
성경은 Anderson의 2가지 주장 중 어느 한 범주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성경이 진술한 내용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이 역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에 뿌리박은 구체적 역사요, 구체적 목표를 향해 시작과 끝을 가지고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교의신학은 이러한 역사성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주요한 성격을 놓치고 있다(오랫 동안 전통신학과 자유신학의 구체적 충돌이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교의신학의 그런 성격 - 성경의 역사적 상황(context)을 근거하지 않는 - 때문이었다). 만약 성경신학이 전통적인 신학의 조류였다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성격 때문에 처음부터 자유주의 신학의 짜집기 성격과 크게 충돌하였을 것이다.

2) 성경의 중심 주제와 관련된 역사성
요 5:39 - ‘너희가 성경(구약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눅 24:24 -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구약성경)에 나를 가르켜 기록한 모든 것...’
이런 구절들은 적어도 신약을 영감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열쇠를 제공한다. 신,구약의 근본적 통일성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이다. 신약이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한다는 것은 이견이 없지만, 구약도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한다는 것에는 자유와 보수 사이에 많은 이견이 있으며 정통 견해 중에도 그리스도의 구체적 증거에 대해서 서로 다르다.
신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인 것은 분명한데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하는 데에 대해서는 확연하지 않다. 구약에서는 메시야가 나오지만 그 당시의 인물을 말하고 오실 메시야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그 많은 기록들은 다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구약의 메시야에 대한 기록은 예수님이라는 한 인격보다는 좀더 넓은 의미에서 메시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구약의 다른 내용과는 별 상관없이 단편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구약이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의 방식이 매우 포괄적이며 직접적인 방식과는 다르다.
구약의 다른 내용과 관련되어 있으며 오히려 구약 전체를 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구약의 요약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구약 전체가, 구약 전역사가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흔히 구약은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신약은 그리스도를 성취했다고 한다. 신약의 많은 구절들이 ‘...이것은 구약의 그리스도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라고’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구약은 예언(prediction)이고 신약은 성취만으로 되었는가? 이것은 약간 주저되는 결론이다.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성취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구절만 찾으려 한다.
이렇게 할 때 시편, 이사야, 미가 등만 찾기 때문에 역사서 등 그 외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찾지 못하여 구약의 많은 부분을 윤리적으로 해석(moralize)해 버린다. 예표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성막이나 제사, 그리고 그 외의 사건을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풀어가지만, 오히려 그 사건이 그 당시에 갖는 실제적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신약 편향적’이 된다(예언→성취의 입장).이들은 신약 저자들이 ‘...은 구약의 ...을 이루려함이라’고 기록한 부분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구약은 순전히 예언이고 신약은 그 성취라고 보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구약에도 성취가 있으며 신약에도 예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구약은 모두 예언과 성취의 역사이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 이러한 결론은 예언 성취의 의미를 단순히 시간적 의미에서 보다도 폭넓게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① 왕하 17:22-23에 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말씀에 근거했고, ‘역사는 바로 하나님 말씀의 실현’임을 말해준다(Actualization). 모든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 말씀의 실현인 것이다. 말씀은 약속의 형태든지 예언의 형태든지 말씀의 실현은 바로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하나님 말씀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 55:11-12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한 번 나오면 반드시 구체화되고 실현된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성경 저자들의 근본적 역사관(참 역사관)은 ‘전 역사는 하나님 말씀의 실현이다’라고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신약 특히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이미 이런 역사 기술 방법을 이어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언 성취를 보다 폭넓게 보면 신,구약이 모두 예언과 성취이며 말씀의 실현이다. 성경 역사를 하나님 말씀의 실현이라고 볼 때 사 55:12에는 ‘내 입의 말이 헛되이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했다(구속 역사와 관련).
결론 :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실현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원리들을 가르치실 때에 반드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통해 하신다. 성경의 구체적 역사성을 부인하는 입장 중 하나는 Gnosistism인데 도세틱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가현설을 주장한다. 성육신은 역사 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성경은 항상 구체적 역사와 관련이 있다.
신,구약의 관계를 예언 성취의 관계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어법을 잘 모르는 입장이다. 그렇게 될 때 구약은 그 자체의 역사성이 약해지며 신약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② 성경은 하나님 말씀의 실현이라고 할 때(사 55:11-12) 그 의미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관련 구절은 암 3:6하 ‘하나님의 행하심이 아니고서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7절 ‘하나님께서 자기 계획을 선지자에게 먼저 계시하시고 행하신다’, 8절 ‘주께서 말씀하시면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장래사의 계획을 선지자에게 말하시고 선지자는 선포하는 것이다.
렘 23:16 거짓 선지자의 하나님께서 말씀치 않은 것에 대하여 예언한 것을 책망함.
18 참 선지자는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하여 비밀계획을 전수 받는다.
왕상 22장에는 하나님의 회의가 나옴(미가야 선지).
이사야는 하나님의 어전회의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알게 된다. 14:27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 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이는 이스라엘 뿐아니라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결정과 뜻에 따라 실현됨을 알 수 있다.
사 40장 이후에는 이방신들을 국문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너희 이방신들아 너희가 장래 일을 말해보라.’ 미래사를 말한다는 것은 역사를 주관한다는 것을 뜻하므로 하나님의 그 말씀은 자신만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시 33:9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매 이루어졌다.’
이렇게 성경 역사를 하나님 말씀의 실현이라 볼 때 구약과 신약의 첫 부분으로부터 마지막까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구약도 역시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의 역사이며 의미 있고 실제적인, 하나님 그 백성의 역사이다(여기서 불트만 등은 구약을 무의미하다고 하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허상의 역사, 알맹이 없는 역사가 아니다. 구약은 ‘예언 모음집’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여러 곳에는 신약을 가리켜 성취의 역사라 한다. 그러므로 구약은 그 자체가 예비적 성격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러한 양자의 입장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구약은 하나님 말씀의 실현임과 동시에 구약의 예비적 성격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결론 : 구약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이루어지는(점진적 성격) 어떤 목표, 종국,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완성의 역사이다.
낮은 단계는 높은 단계를 내다보는 것이다. 구약 자체로서도 의미를 잃지 않고 신약에 대한 예비적 성격도 살릴 수 있다. 구약의 역사가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이 된다는 점에서 진정한 발전의 성격을 가지고있다. 신약의 ‘...이루려 함이라’라는 뜻의 πληροω(플레로오)의 뜻은 make full fill이라는 뜻이다. 이는 consummation(가득 채운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성하러 왔다고 했을 때 역시 πληροω를 쓰는데 그것은, 구약의 절정은 그리스도에서 성취됨을 의미한다.
③ 구속역사가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을 향해 가는 완성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 목표를 향해 흘러가는 역사를 꿰뚫고 있는 일관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무엇인가?
대전제 : 성경의 중심 주제는 무엇인가?(요 5:39 성경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 직접적인 대입은 지양하되 성경의 중심 주제는 예수님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야 한다.
전통적으로는 예언 성취의 관계로 신,구약을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 후로는 신,구약의 통일성을 covenant에 의해 이해하려고 했고 이 시도는 구속사의 점진성, 즉 성경계시의 역사적 성격을 드러내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계시의 여러 성격에서는 역사성과 함께 상이성(발전성)을 보이고 있다.
존 머레이는 ‘계약신학이야말로 구속사의 진전성을 나타내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언약’의 개념이 성경의 중심 주제를 꿰뚫는 중심사상이 될 수 있는가? 관련 구절에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뒷받침 한다(현재는 covenant에 대한 명확한 개념도 설정되어 있지 않다). 보편적인 언약의 개념은 ‘관계확립’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관계결속’은 다윗과 아브라함 언약에 국한될 뿐 노아에 있어서는 관계결속에 맞지 않다. 그렇다고 할 때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과의 관계확립이라고 할 수 있다(‘나는 너희 하나님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성경을 흐르는 하나의 핵심사상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모든 성경의 중심사상인가? 하는 것은 주저하게 된다.
이와같이 언약개념이 언약의 실제 내용을 담는 형식에 불과하거나 그 내용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서 그 내용은 어떤 더 큰 주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형식으로서의 언약은 충족되지만 그 내용까지 포괄하지 못한다. 언약이 전 구약 중심 주제에 부합되는 것에 부족하다는 것은 언약을 관계결속이라는 것으로 할 때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을 연결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언약의 개념이 구약의 전 내용을 담지 못하고 여러 가지 언약의 내용이 서로 산만하게 존재하다가 그리스도에 와서 종합됨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것은 언약들의 서로의 성격이 긴밀한 연결을 갖지 못하는 것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약에는 일관된 중심 주제가 있는가?
그에 대한 대 전제는, 이러한 중심 주제는 신,구약이 지목하는 그리스도에 직결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이것은 신학적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에대한 구절이 바로 마태복음 1장이다. 마태복음 1장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전 구속역사의 뼈대를 보여주고, 어떻게 구속 역사를 이해할 것인지를 설명한다.
마 1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나온다.
?βιβλος γενεσεως Ιησου Χριστου ......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예수 크리스투...)
신약의 저자들이 표현할 때 구약의 표현을 인용하는데 70인역을 많이 참조한다.
예) 구약의 ‘תודלות הלא’가 모두 족보의 뜻을 가진 것은 아니고 야곱에서는 ‘약전’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근원, 역사라는 뜻이 더 정확하다. 족보는 어느 의미에서 가장 압축된 역사하고 할 수 있다. 족보의 확대는 바로 역사이다.
תודלות הלא는 성경의 핵심적인 표현이다. 이 말은 훨씬 복잡한 의미가 있다. 이 족보는 인류의 역사를 크게 구분짓는 분기점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데, 족보란 가장 함축된 형태의 역사이다. 인간의 존재방식의 특수성 즉, 혈통, 혈연이 연속성을 통해서 후손을 이어간다. 따라서 족보는 어떤 역사의 줄기를 시사하는데 사용되고, 역사의 근원을 항상 제시해 준다(혈통의 근원을 시사).
성경의 족보 사용례를 살펴보면 어느 근원점에서 시작된 역사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아 새롭게 시작될 때에 그 근원(새 역사)과 이전의 근원(옛 역사)과의 연속성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예) 마 1장은 예수님의 족보와 아브라함의 족보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역사 속에서 어떤 인물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때 그 역사의 근원을 미루어 살피므로 그 역사의 근원과 현재의 사건의 관련성과 연속성을 시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 역사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이 하나님의 약속은 당대로 그치지 않고 혈통을 통해서 계속 이어져 내려온다. 그러다가 이 약속이 성취되거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때, 지금 일어난 일은 특히 한 인물에게서 되어지는 일은 실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족보를 사용한다.
그 역사의 줄기, 근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계획을 의식한다(새로 시작되는 역사의 근원과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고 중심인물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따라서 어떤 혈통이나 역사의 줄기, 그리고 역사와 관련된 하나님의 계획이 그 역사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다가 어떤 인물의 생애에서 실현되려 할 때 그 인물의 족보를 기술한다. 새로운 국면, 한 segment의 시작시 ‘족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 관점에서 ㉠ 마 1장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 새 역사의 근원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 아브라함과 다윗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역사를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보고 있다.
17절 아브라함 - 다 윗 / 14대
다 윗 - 바 벨 론 / 14대
바 벨 론 - 그리스도 / 14대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해 성경기자는 전 구약역사를 압축하여 설명함을 알 수 있다.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이루어지는데 이 새로운 역사는 이전의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게되고, 이 하나님의 약속이 누구로부터 주어졌는지를 밝히므로 이 새로운 역사가 이전 역사와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역사는 이전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마 1:17 이 새로운 역사 즉, 아브라함-예수까지의 이전의 역사는 크게 3부분으로 구분된다고 시사해 준다. 이 역사의 구분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로 되돌아와 본 것인데 되돌아와 보니 이전 역사와 관련이 있고 그 역사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역사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역사와 관련이 있고 이 역사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이 있었다. 따라서 창 12:1-3의 아브라함으로 돌아가 보면 잘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 근원인 아브라함의 역사를 이해하여야 한다. 아브라함의 왕국건설의 약속은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 하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연결되어져야 한다.

창세기(תישׁארב; Genesis)

창세기 12장은 이스라엘의 역사 즉, 교회의 역사의 시작을 다루고, 창 1-11장은 인류의 보편사이다. 12장부터의 이스라엘의 역사란 선택된 백성의 역사이다. 이를 구속사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전면에 나타나고 여타의 역사는 필요할 때마다 나타난다.
창 1-3장은 매우 압축되어 있어 이 부분을 다루면 성경전체를 다루게 된다. 그러므로 매우 방대하다. 1-3장이 이스라엘의 역사와도 연결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아브라함부터 시작했으나 이는 셈으로 연결된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 누가복음은 아담,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 상태에수부터 시작한다. 1-3장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와 연결된다. 구속은 창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창 11장은 바벨탑 사건이다. ‘동방으로 이주하다가 시날 땅에서 한 평야를 발견했다. 그리고 거기서 정착해서 살았다’ → 12장 1절의 땅의 주제가 11장에서도 나온다. 따라서 11장, 12장의 structure가 같다.

׃םשׁ ובשׁיו רענשׁ ץראב העקב ואצמיו םדקמ םעסנב יהיו2
ינפ־לע ץופנ־ןפ םשׁ ונל־השׂענו םימשׁב ושׁארו לדגמו ריע ונל־הנבנ ׀ הבה ורמאיו4
׃ץראה־לכ
(11:2 와예히 베나스암 밐퀘뎀 와임체우 비크아 베에레츠 쉬네아르 와에쉐부 샴)
(11:4 와요메루 하바 | 니베네-라누 이르 우믹달 웨로쇼 바샤마임 웨나아세-라누 쉠 펜-나푸츠 알-페네 콜-하아레츠)
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ריע;이르 이 중요한 것이다. 탑(망대)은 ריע의 부속물로서 짓자는 것의 주요 대상은 ריע이다. 여기서 ריע는 도시 보다는 국가의 의미이다. 당대는 국가의 경계가 분명한 것도 아니요 한 성을 중심으로 국가를 이룩했다. 즉 11장에서도 하나의 나라 건설을 다루고 있다.
역사 속에서 아브라함 소명 사건을 조명해 보면, 11장 바벨탑 사건과 나라 건설이라는 유사성이 있고, 한편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나라는 축복의 나라인데 다른편 11장의 나라는 그 종국이 흩어지는 결과 즉 분열과 멸망, 저주받은 나라로 끝난다.
언어의 혼잡 : 의사소통의 단절은 인류사의 분열이며 특히 그 내적분열을 의미한다. 고대사회는 농경사회이므로 땅과 유리될 수 없는 때이다. 따라서 자신의 정착지를 떠나지 않는다. 역병, 기근, 전쟁 등 목숨을 내놓는 그런 사건시만 자신의 땅을 떠나는데 따라서 정착지 땅을 떠나는 것은 저주를 뜻한다.

창 12:1-3절은 아브라함의 소명사건이다(각 사건은 전체 역사와 연관되므로 문맥은 중요시된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 시각으로 아브라함을 보았으나 창 12:1-3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성경은 구속사와 발맞추어 기록되었다).
창 12장의 key word는 다음과 같다. 11장에는
?? Land ?? 지시할 땅(רשׁא ץראה  ?? 시날평지
? Nation = ? 큰 민족 לודג יוג  ⇒ ? 큰 성과 대
?? Blessing ? 네 이름을 창대케 함 ? 자기 이름
(name, 모든 ?? 복의 근원이 됨 ?? 저주받음
민족에게 축
복의 매개자) 지시할 땅(하아레츠 아쉐르), 큰 민족(고이 가돌)

이에 앞서 11장에는 바벨탑 사건이 나오는데 성과 대를 쌓는 일이 나온다. 그 이유는 자기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다. לדגמו ריע ונל־הנבנ   절; 니브네-라누 이르 우믹달)
이 두 가지 사건은 크게 대조되는데 둘 다 나라(왕국건설)에 관한 것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은 어떤 땅에 나라를 건설하고, 그 나라는 축복을 받고, 그 나라를 통해 만민이 복을 받는다. 11장의 사건은 자기네들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으셨다. 이것은 저주를 의미한다(땅을 떠나도록 한 것, 바벨론 포로는 하나님이 흩으신 저주의 대표적인 예). 하나는 세계 만민의 축복의 나라이고 하나는 저주의 나라이다. 왜 이런 상반된 결과를 낳는가? 여기서 서로 다른 것은 무엇인가?
12장에 나타난 동사는 하나님 1인칭으로 되어 있다. 왕국건설의 주체가 하나님이다(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왕국). 반면 11장의 동사는 사람들(1인칭 복수)이다(우리 이름을 내고 건설하자. 즉 사람이 주어인 인간의 왕국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이 2개의 unit가 공통점이 있으나 한편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축복과 저주). 이 근본적인 차이는 사람을 위한 왕국건설과 하나님이 세우신 왕국건설(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운)이라는 것이다.
인간왕국은 왜 저주로 끝나고 하나님의 왕국은 축복으로 끝나는가? 이 두 사건은 대조로 시작하여 대조로 마친다. 두 사건 모두 주제는 왕국건설이다. 그러나 아브라함(동사의 주어가 하나님,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은 축복의 왕국이고 다음은 저주의 왕국(주어가 사람, 사람의 나라)이다. 두 왕국의 건축자가 다르다. 그런데 창 12:1-3 앞에는 셈-데라의 족보가 나오고 11:1-9 앞에는 노아 후손의 족보가 나온다. 홍수 후 노아 후손의 역사는 홍수 이후의 새 인류의 역사이다. 10장에서는 홍수 이후 인류가 어떻게 세계로 흩어지는가를 나타내는데, 그 다음이 바벨탑 사건이라고 하면 홍수 이후 인류의 새로운 역사의 특성을 드러내주는 전형적인 Topical-event라 하겠다. 홍수 이후 은혜를 입은 노아 후손의 새 역사는 시날 평야에서 자기 이름들을 내기 위한 것으로 특성된다. ‘하늘에까지 닿는 탑’이 상징하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자세라고도 하는데 군사력을 상징할 수도 있다. 어째튼 이것은 하나님께 도전하고 반항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자신의 지위를 하나님의 지위까지 높아지기를 원했다). 하나님은 이같은 상태를 흩어버리셨다. 저주하셨다. 족보의 기능은 ㉠ 지금 시작한 역사는 이전 역사의 근원으로 올라가고, ㉡ 그 역사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이 세우는 나라는 왜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는가? 창 6장의 문맥으로 살펴보자. 창 6:5에는 ‘ובל תבשׁחמ רצי־לפ’(콜-에체르 마쉐보트 리보) 그 마음에 생겨먹은 꼴이 원래(항상) 악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간은 그 생각의 근원이 악한 것이다. 인간은 속속들이 썩었다. 완전히 썩은 상태 즉, core(핵심)까지 완전히, 또한 평생 동안 악했다. 즉, 전적 타락, 부패하여 전혀 돌이킬 수 없었던 상태이다. 이것이 홍수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창 5장에 시작된 아담의 역사로부터 악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두 쓸어버리기로 하셨는데 노아만이 은혜를 입었다.
그런데 8:22에 보면 사람의 내적, 심적 부패성은 치료되지 않은 채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약속하시며, 사람이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저주하지는 않겠다고 하신다. 이것은 홍수의 근본 원인인 ‘사람의 악함’이 홍수 후에도 없어지지 않은 채인 것을 아시고 잠정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다. 새 인류는 그 근본부터 심판과 멸망이 자초되도록 되어 있다. 탑의 성격은 그것이 종교적인 건축물인지 어떤지는 상관 않고도 탑의 의미가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해 보겠다는 의미이다.
노아의 세 아들의 새 역사가 결국 바벨탑에서 드러나듯이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려고 함으로써 근본적인 마음의 악이 처리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악의 표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흩어짐). 그러므로 인류의 보편역사는 저주와 심판의 역사이다. 근본적으로 악한 인간의 역사는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결국 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벨탑 사건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벌이는 어떤 노력이나 왕국은 하나님의 심판밖에 불러오지 않는다. 인간이 자기를 구원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 멸망받음을 나타내 보여준다.
창 11:10부터는 셈-데라의 족보이다. 아브라함 역사의 근원은 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노아의 술취한 사건과 셈의 행동을 통해서 인류의 운명이 결정되어버린다(창 9장).
9:26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라’고 노아가 셈을 축복한다. ‘...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최초로 나타나는데 ‘셈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셈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covenant fomular는 ‘나는 네 하나님 되고 너는 내 백성’인 것인데 특별한 관계를 표현할 때 쓰인다.
홍수 이후 인류가 새롭게 시작하지만 그 역사는 망하기로 운명지어진 역사이다.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축복의 나라를 건설하시려는 위대한 큰 경륜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겠다는 약속이 12장의 약속이다. 심판과 멸망을 자초할 인류 역사와 인간 나라 속에서, 그 배경 속에서 생명과 축복을 주시는 축복의 나라를 건설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바벨탑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의 새 역사가 시작되면서 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는 심판과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를 전제로 하고 또 다른 줄기로 셈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심판과 저주 가운데서 한 sign으로서 셈의 역사는 은혜로 이루어진다. 셈과 함께 하신 은혜의 역사는(데라로부터) 아브라함으로부터 큰 진전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셈의 약속이 구체화되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새 왕국 건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셈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것이다. 스스로 인간의 힘으로 하는 모든 노력은 멸망으로 끝남을 보이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 왕국의 건설을 선언하신 것이다(창 12:1-3).
창 12장의 아브라함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한 형태가 그 이름을 창대케 하고, 만방에 알리겠다는 것, 그리고 열방들이 그를 듣고 그를 통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왕국 건설의 약속을 주시고 있다. 성경은 역사적 흐름을 따라 기록되었으므로 메시지를 이해함에 있어서 역사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역사적 흐름을 따라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왕국건설의 약속을 곧장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시키는 것은 성경에 대한 가난함이다. 아브라함의 왕국건설의 약속은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면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연결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바로 아브라함을 통해 생명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아브라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건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에 대한 성취이다. 아브라함의 축복의 한 형태가 그 이름을 창대케 하고 만방에 알리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방들이 그를 듣고 그를 통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장
?? Abraham - David(구약에서의 하나님 왕국의 형성)
? David - Captivity(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한 왕국의 와해)
?? Captivity - Jesus Crist(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왕국의 재건 → 왕국의 소망)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였다(하나님 왕국의 도래). 히브리서 11장 8-9절의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건설하시는 한 성, 왕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모든 역사의 핵심은 하나님의 왕국건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건설자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히 12:10절의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는 말은 창 12:1-3절의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대한 약속으로 봐야 한다.
참고) 폰 라드 - 성경의 중심주제는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적 역사보다도 각 시대마다 그 공동체에 있어서의 의미를 추구했기 때문에, 당시 각기 나에게 주는 의미를 따지다보면 중심 주제는 없어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역사의 일반적 흐름을 찾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개별적 역사로서 분리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전체로서 일관된 흐름의 한 가운데에서 의미를 가진다. ‘일관된 무엇’ 곧 중심주제를 골자로 하여 형성되는 사건이다. 연속적 흐름으로서의 역사의 증거는 성경에 있어서 족보기록이다. ‘족보’는 과거의 사건과 현재가 연결된 의미를 주고 그 근원을 파내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주제 아래 그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내 왕국을 세우시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를 ‘족장사’(Patriarchal History)라고 한다.

* 족장사의 구조(frame)
?? 아브라함(11:27-)
? 이 삭(25:12-)
?? 야 곱(36:1-) 이 큰 세 덩어리로 구분된다.
이 역사는 성경에서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 있다. 여호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으로 지칭된다. 이 3 구조는 전체로서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

* 족장사의 관심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12장) :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나라를 허락하시자 4절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갔더라’고 기록한다. 롯도 함께 간다. 함께 간 의미가 13장에 나온다. 6절 이하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고, 그 도착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온다. 세겜 땅 모레 = 가르치는 사람(종교적 점치는 자). 7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의미는 지시하신 땅이 바로 이 땅이며 이 땅을 후손에게 주겠다 하시며 이 땅에 왕국을 세우실 것을 확인하신다. 하나님 자기 나라를 세우실 땅이 바로 가나안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였다.
8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이 말은 창 4:26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와 같은데 이것은 예배와 같은 의미이다. 부르는 것은 예배의식에서 한다. 도움을 간구한다. 예배를 드린다의 의미이다. ‘단을 쌓고’ 대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곳에 단을 쌓는다. 신을 예배하는 곳에 성전을 짓고 신을 예배했다는 것이 종교적 풍습이었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 자체는 옳을 수 있으나 종교적 풍습이라고 격하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사람을 만나셨다는 의미로서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전제하면서 성막이나 성전의 기능 혹은 의미를 상기시켜 준다. 그런데 8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말씀하셨으며 여기에 단을 쌓았다는 것은 다른 의미,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사 19:19 애굽에도 단을 쌓겠다 ⇒ 애굽 백성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리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라는 말씀과 관련하여 제단을 쌓은 의미를 살펴보면 이 땅은 하나님이 섬김을 받는 땅이요,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나라가 세워질 땅임을 확인하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 말씀, 계시, 교통하시며 인간의 섬김을 받으시는 곳이 바로 제단을 쌓는 곳이라는 의미라면 이 땅이 바로 하나님이 섬김을 받는 땅이요, 하나님이 다스리는 땅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실 왕국의 약속을 받은 자이다. 하나님의 왕국건설에 관련된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는 하나님 왕국의 진정의 역사이다. 창세기의 역사에서 왕국건설의 실현(예비적 성취)이 가나안 땅이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제사와 아울러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표현한다).
10절에 극심한 기근으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다. 애굽은 삼각주로서 나일강의 범람으로 아주 비옥한 땅이다. 하나님이 지시하지 않는데 애굽에 내려갔던 일은 죄로서 더 큰 죄를 짓게 된다고 종래 해석해 왔다. 아내를 이용하여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며 애굽 왕에게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한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시했는지 않했는지 기록이 안나왔지만 지시했을 수도 있고, 기근 때문에 내려갔을 수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성경의 모든 사건을 도덕화하는 것을 moralize한다고 한다. 선악으로 모든 사건을 구분하려 하는 것이다. 이 사건을 moralize할 수 있다. 그 근거가 있다. 그러나 기근으로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간 것은 탐욕 때문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단순하게 moralize할 수 없다. 저자가 그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저자의 기록의 목적, 그리고 저자의 관심이 아브라함이 선한가 악한가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셨다. 즉 그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약속받은 자와 사라를 보호하셨다에 point가 있다.
하나님이 사라를 보호하심에 주된 관심이 있었다(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룰 즉 아브라함의 후손을 낳을 사라를 보호하셨다). 즉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이루심이다. 물론 아브라함의 행위가 책망받을 만한 것이었다는 것은 바로의 책망을 통해서 볼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도덕적 차원의 문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아브라함과 함께 사라도 약속을 받은 자(bearer of promise)이다. 그들을 바로로부터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 : 약속 자체에 대해 신실하심을 보여주신다.

13장 애굽에서 귀환한 것이 먼저 기록된다. 아브라함의 윤리적 경건의 상태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하나님이 지키시고 부를 소유하여 돌아오게 하셨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것인가?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바로 앞에 수치를 당한 것, 애매한 사람이 고통을 당한 것 등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 성경이 그런 의도가 아닌 것을 보여준다.
애굽에서 돌아온 후 부유해진다. 땅이 협소하여 롯과 아브라함이 함께 거할 수 없게 된다. 지금 아브라함과 롯이 살고 있는 땅은 목축하는 곳으로 물이 굉장히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땅이 협소하였다는 말은 땅이 좁다는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고 샘과 초지가 목축업에 필요한데 이런 것이 부족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요단 들은 물이 넉넉하고 애굽처럼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이라고 말한다. 11절까지는 롯의 잘못을 볼 수 없다. 12절에 롯이 장막을 옮겨 소돔에까지 이르른다. 그런데 소돔은 악하여 큰 죄인의 성이다. 사람들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죄의 성에까지 이르며 성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성이 있는 지역을 택한 것은 롯의 동기가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땅의 악함의 접촉에도 불구하고 탐욕적으로 그 땅을 선택했다면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떠날 때의 그 동기도 외적 영광, 인간적인 동기로 떠난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롯의 신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불순한 요소와 피상적인데가 그의 신앙에 있지 않았나 보여진다.
어떤 동기와 상황에서 되었든 간에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 결별의 의미가 무엇인가?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아브라함과 롯이 분리한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축복하신다. 여기서 떠난 후라고 못박은 것이 중요하다. 그 뒤에 그 의미가 나온다. 떠난 후 하나님이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하신다. 이것은 12장에서 하신 약속을 확인시키심이다. 그 약속이 롯과 헤어진 후에 확인되었다는 것은 롯이 그 축복의 약속에서 제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 족장사에 있어서 주된 관심은 누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땅을 상속할 것인가? 이다. 그 땅의 상속은 그 나라의 상속이요, 그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 롯의 사건을 통해서 역사적 흐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이 땅까지 왔으나 그러나 롯은 이 땅의 약속에서 떨어져 나갔다. 롯이 이 약속에서 떨어져 나간 것의 의미는 족장사에서 밝혀진다. 그러면 무엇이 이 땅을 소유하게,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 이어 16절에는 땅의 약속뿐 아니라 셀 수 없을 만큼 후손을 주겠다하심. 너를 통해 큰 민족, 큰 나라를 이루겠다는 약속이 다른 형태를 취한 것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믿음을 가진 자, 믿음의 족속의 조상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위의 약속을 전제로하여 이 약속을 의식하여 한 말이다.
종횡으로 행하여 보라는 말은 이 땅을 네 발로 밟으면서 이 땅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땅인 것을 체험해보라는 말이다. 비록 네가 지금은 나그네로 다니지만 먼 미래에 하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을 믿음으로 확인하며 살라는 의미이다.

14장의 등장 인물은 ① 시날(메소포다미아의 바벨론 = 이라크)왕 아므라벨(לפרמא;아므라펠   Hammurabi), 보수주의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이 Hammurabi와 같은 시대로 추정하며 동일인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ל(라메드;‘ㄹ’발음이 남)자가 빠져서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시날왕은 강력한 나라의 왕이다. ② 엘라살왕 아리옥 = 이 사람은 정확치가 않다. ③ 엘람왕 그돌라오멜 = 페르시아(이란 동쪽)의 큰 세력으로 추측, ④ 고임(יוג(고이)의 복수, 민족의 복수로서 고유명사인지 소국가의 연합체인지 확실하지 않다)왕 디달(헷족속 = 지금의 터어키로서 애굽과 세력을 다투던 큰 세력이다. 애굽과 형제의 조약을 맺음). 이상의 왕과 요단 서편의 5개의 소왕국(소돔왕, 고모라왕, 아드마왕, 스보임왕 등)과의 싸움이 일어난다.
거대한 제국들 더구나 연합제국들이 이 작은 성들을 왜 쳐들어 왔겠는가? 더구나 아브라함이 318인으로 구해온 것이 가능한가? 동화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12년 동안 속국으로 지배를 받다가 13년에 이 다섯 왕들이 배반한다. 속국이 배반하자 연합하여 쳐들어 온 것이다. 성경을 볼 때 아마 다섯 왕만 배반한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전 지역에 해당하는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이 연합하여 함께 배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반란의 범위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제국이 연합하여 침략했다는 것이 가능하다.
14:13에서 아브라함이 단, 호바까지 가서 롯과 재물을 찾아온다. 침공한 열강 대제국들이 아브라함의 318인에게 패퇴한다. 열강에 대한 아브라함의 승리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집안은 너로 인하여 큰 자손을 이루겠다는 약속의 집안이다. 그러므로 당시 아브라함의 집안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미래 역사의 전개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⑴ 아브라함의 왕국에 대한 태도와 행위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태도와 같다. 아브라함에 대한 대적은 하나님에 대한 대적이다. 아브라함에 대항하는 나라는 다 심판과 멸망으로 끝난다.
⑵ 하나님이 이미 창 12:1-3에 약속하신 나라가 이루어지기 시작함을 나타내며,
⑶ 하나님의 나라가 매우 강성한 것을 표현해 준다. 즉 세상 세력이 그 앞에서 전혀 무력함을 보여주신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아무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시작된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야 한다. 인류의 유일한 소망인 하나님의 나라의 약속을 지닌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했고 하나님은 가나안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땅이라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이 땅이 하나님을 섬기는 땅이 될 것을 체험하게 된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결별하는 것은 심각한 의미를 가지며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이 땅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어질 것라는 의미를 갖는다.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이제는 자연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의 성취가 그의 삶 속에서 서서히 이미 진행된 상태였기 때문에 항시 아브라함과 그 가족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려 318명을 데리고 가서 4대 강대국 연합국을 물리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강할 것과 어떤 다른 나라도 하나님 나라를 대적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즉 창 12:1-3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이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하리라’(םשׁ לודג; 가돌 샴, 4대 강대국이 아브라함에게 무릎을 꿇는다). * Hammurabi법전 Second colum 6절에 함무라비가 주변의 모든 세력을 무찌르므로 바벨론의 이름을 존귀케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가간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한다는 의미가 나라와 나라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17절에 아브라함을 맞이하는 사람이 2명이다. 이 둘의 태도가 매우 대조적이다. 살렘왕 멜기세덱 : ①살렘(예루살렘)의 왕, ②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Priestly-King, 신정일치시대의 제사장 겸 왕인 인물, ③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히 7:3).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 멜기세덱에 대한 견해
1.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는 표현은 바로 특별한 사람이다라는 견해, 그래서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이는 신비스럽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가? 아니다.
2. 구약의 제사장은 다 혈통을 따라 제사장이 되었다. 멜기세덱은 혈통에 따라 된 제사장이 아니다.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 아비, 어미가 없는 인물이 아니라 레위족속, 즉 레위 혈통이 아니라 다른 혈통인데도 불구하고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왕직과 제사장직을 겸한 인물(제사장적 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런 분이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한 것이다.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나아온다. 아브라함에게 정치적으로 구출해준 것에 대한 감사로 영접하러 나온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으나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왕으로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직분으로 아브라함에게 나왔다. 당시 제사장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축복을 선언, 전달하는 자였다. 그래서 멜기세덱은 직분에 걸맞게 아브라함에게 나아와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선언한다. 이러한 축복은 아브라함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복 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선언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대적을 아브라함에게 붙이신 사건 즉 아브라함의 승리를 하나님 허락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았고, 이로 인해 아브라함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본 것이다. 즉 창 12:1-3의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아브라함의 위치는 하나님께 복 받은자요, 만민에게 복받게 할 근원인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바친다. 승리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며 이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승리, 영광, 명예, 이 사건을 통해 그가 획득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의미로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의 제사장, 하나님의 축복의 대리자로 멜기세덱을 인정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으나 멜기세덱에게 바친 것이다.
21절의 소돔왕의 태도 : 전혀 멜기세덱과 상반된 태도이다. 냉냉하고 사무적이었다.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 아니라 상업적인 동기로 왔다. 구출해 준 것에 대한 상대방의 공로를 최소한 답례로 최대의 이익을 보려는 상업적인 동기로 나왔다. 소돔왕의 동기가 선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물건은 가지고 사람은 돌려달라’ 아브라함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승리, 축복에 대해 감사하지 않고 냉냉한 소돔왕으로부터 아브라함은 어떤 물건도 받기를 거절한다.
아브라함은 왜 물건 받기를 거절하였는가? 아브라함은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대변하는 자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인간적인 것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이므로,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일깨움을 받아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자가 마치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손으로 이루어주었다고 착각할까봐서 단호히 도움을 거부하고 있다.
내가 너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기 원치 않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와 함께 간 사람들에 대해서는 보상해주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 나라의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도움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와 같이 간 사람은 세상 방법에 따라 세상의 가치 만큼 보상해 주라고 한다. 소돔왕은 불쌍한 자이다. 만민 속에 찾아온 하나님의 나라를 그러한 태도로 대하는 것은 자신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축복을 차버리는 태도이다. 아브라함을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나뉘어진다. 예로서 멜기세덱과 소돔왕을 들 수 있다. 이 둘의 상반된 태도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15장은 세계 열강에 대한 승리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신다. 세계 열강과의 싸움 속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방패요, 상급이 되심을 확신해 주신다. 2절에 아브라함은 다른 태도 보인다. 나는 자식없이 죽어갑니다. ‘ירירע ךלוה’(홀렉 아리리)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잘은 모르나 85세 이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85세 때에 하갈을 취하기 때문이다. 85세가 되어서도 소식이 없자 하나님께 질문 or 항변한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는 늙은이로서의 한탄하는 것인가?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국에 그가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그가 하나님께 무엇을 주시려나이까?하는 것은 하나님 약속의 땅에 대한 상속자의 관심이다. 나의 상속자 엘리에셀이 나의 후계가 될까요? 묻는 것에서 볼 수 있게 된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볼 때는 하나님 나라의 대변자요,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받은 자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자녀가 없는 것을 한탄함이라기 보다는 나에게 자녀가 없으므로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온 인류에게 복을 줄 하나님의 나라를 이을 자가 되겠는가 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염려로 묻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자녀가 없으므로 엘리에셀을 통해서라도 이 나라를 이어가시겠는가?라고 묻는다. 하나님 나라 건설의 막중한 사명의 안타까움이 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하나님은 아니다. 분명히 네 몸에서 날 자(ךיעממ;밈메에카  친자식)가, 네 몸에서 난 친자식이라야 네 후손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 하늘을 보고 별을 보여주시며 이 뭇 별처럼 후손을 많게 하시리라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자 그가 믿었다. 이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여기서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후손을 뭇 별처럼 많아지게 하겠다는 단순히 그 사실을 믿은 것이 아니라 나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 던져 넣겠다는 보다 깊은 의미이다. 믿음이란 자기 부정이다. 단순히 어떤 사실을 믿는다는 의미보다 그분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고 그분 안에 나의 모든 것을 던져 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신자의 기본자세를 한 마디로 믿음이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믿음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믿음은 가볍고 값싼 것이 아니다. 믿음은 내 생명, 내 생애를 그의 손에 맡기고 그의 뜻대로 살기로 하는 것이다.
‘나는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이때 내가 무엇으로 이 땅을,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지 확실한 표적을 아브라함이 요구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징표를 구한다. 아브라함이 깊은 잠이 들었는데 어두움이 임하고 심히 두려워한다. 엄위하시고, 크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임재하심을 보여준다. 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보여준다. 즉 출애굽 사건을 이미 예견하고 계신다. 아브라함이 죽어 평안히 조상에게 돌아갈 것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의 Project는 아브라함 당대에 단기간에 걸쳐 이루어질 일이 아니요, 장기간에 걸쳐, 여러 세대 몇 백년에 걸쳐 진행될 장기적 계획이다. 4 Generation에 걸쳐 애굽에서 돌아올 것이다. 400년 동안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그 후에 돌아와 하나님 왕국이 건설될 것이다.
당시 근동지방은 매우 타락한 곳이었다. 왜 이렇게 극악하고 타락한 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 하는가? 이런 극심한 타락한 곳에서 악을 제거하고 여기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쪼개진 짐승 사이로 불이 지나간다(하나님 현현의 상징). 이것은 covenant (making ceremory)이다. 횃불이 지나갔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나가심이다. 당시 언약의식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신 앞에서 고기를 쪼개고 고기 사이를 지나간다. ‘만약 이 언약을 지키지 않을찐대 네가 이 쪼개진 짐승처럼 될 것이다’는 것이다. 이것은 즉 내가 나의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내가 이 고기처럼 쪼개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심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처럼 극적, 감동적으로 나타낸 곳은 없다. 하나님 스스로 저주를 짊어지심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확약하신 후 하나님 나라의 지경과 경계를 말씀하신다. 흔들거리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 굳게 하신다. 하나님 왕국건설의 구체적 계획의 진행을 말씀하신다.

16장에는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초조하여 하갈을 첩으로 준다(여종의 자식을 통해 대를 이음). 하갈이 잉태하자 사라를 멸시한다. 당시 여주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면 그 여종으로 하여금 자녀를 낳게 한다. 아이를 낳아도 여주인과 종의 주종관계는 엄격히 지켜진다. 사라가 하갈을 학대하고, 하갈은 도망간다. 7절에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난다. 여주인에게 복종하라. 하나님께서 사라와 하갈의 주종관계를 확정시키신다. 이 사실은 이 두 사람에게서 태어날 두 자녀의 관계도 확정됨을 의미한다. 이 두 자녀의 관계는 종과 자유자의 관계이다(갈 4:21-31). 그가 모든 형제의 맞은 편(동방)에 살리라. 이것은 서로 적대적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을 암시한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
17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친자식일뿐 아니라 사라의 몸에서 태어난 자라야 상속자라고 말씀하신다. 이삭을 이스마엘이 희롱하자 사라가 이스마엘을 쫓아내려 할 때 아브라함은 불쾌히 생각한다(당시 풍습으로는 쫓아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들으라 하신다. 즉 상속자는 이삭이며, 이스마엘은 상속자에게서 제외된다.

?야곱과 에서?
같은 아버지, 어머니, 형, 아우도 없는 쌍둥이인데 이미 태중에서 상속자가 결정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데에는 육적인 조건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아브라함의 자녀 이삭에 있어서도 ‘약속을 따라 난 자’이기에 된 것이다. 내년 이맘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에 따라 난 자,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이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 외에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방법이 없다. 이것을 가장 잘 극명하게 표현해 주는 것이 야곱과 에서이다. 그들이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즉 육적인 것이나 윤리적인 어떤 행한 것이 조건이 되지 못함을 보이면서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결정된다. ② 갈 4:29에서 이삭은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요, 이스마엘은 육적으로 육신을 따라 태어난 자라고 한다. 이삭은 영적으로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이기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이다(요 3:5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17장은 15, 16장의 문제를 종결짓는다. 15장에서 후계자, 상속자 문제를 아브라함이 염려하면서 누가 아브라함의 약속의 상속자가 될 것인가를 걱정하고, 엘리에셀인가를 묻자,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라고 말한다. 16장에서 사라가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를 희망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에서 날 자라고 말하신다. 즉 이스마엘은 진정한 약속의 상속자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7장은 할례와 관련하여 상속자의 문제를 종결하신다. 100세에 아들을 낳을 것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וילא רמאיו םרבא [די]ס־לא הוהי אריו םינשׁ עשׁתו הנשׁ םיעשׁת־ןב םרבא יהיו  
׃םימת היהו ךלהתה ידשׁ לא־ינא
׃דאמ דאמב ךתוא הבראו ךניבו יניב יתירב הנתאו  
(17:1 와예히 아브람 벤-티슈임 샤나 웨테샤 샤님 와예라 아도나이 엘-아브람 와요메르 엘라우 아니-엘 샤다이 히트할렉 레파나이 웨흐예 타밈)
(17:2 웨엣테나 베리티 베니 우베네카 웨아르베 오트카 비므오드 메오드)
여기서 1절의 ךלהתה(히트할렉)는 περιπατεω(페리파테오)로서 walk, 살아간다,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2절에 언약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언약이라는 말은 의식을 뜻하는데 이는 할례이다. 17장에 하나님께서 또 언약을 세우신다 : 할례의 언약. 할례의 의미는 תירב תוא(오트 베리트)로서 11절 언약의 sign이다. 그 언약의 내용은 내 앞에서 온전할지니라(1절). 15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손(상속자)을 주실 것이며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이 땅을 유업으로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이 땅을 준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준다는 의미이다. 이 언약의 징표는 바로 15장의 약속의 내용의 징표이다. 즉 하나님 나라, 이 땅에 대한 것과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또한 저주를 받은 세상에서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는 이 할례 받은 자들에 의해서 세워질 것이며, 이 할례 받은 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것의 징표가 될 것이다. 언약의 핵심적 본질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이다. 할례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너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은혜로운 약속의 표시이나, 1절에 보면 다른 내용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 살아야 할 모습으로 살라고 한다. 15장은 무조건적 언약(은혜), 하나님 편의 언약이라면 17장은 은혜를 받은 자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아브라함 편의 언약인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 백성의 반응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전할 것이다.
언약의 이러한 이중적 면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은혜를 받은 자가 해야할 것의 이 이중적인 면이 언약에 항상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시내산 언약도 출애굽 사건을 전제로 한다. 즉 출애굽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이에 대한 하나님 백성의 응답으로 시내산 언약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시내산 언약이나 아브라함의 언약이나 본질적으로 같다.
할례와 더불어 또 다른 의미가 덧붙여진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름은 그 사람됨, 본질을 의미하므로 이름을 바꾸는 것은 그가 가진 의미의 변화 즉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말한다. 할례는 신약에서 세례와 비교되는데 세례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생명의 탄생, 즉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할례 역시 새로운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새로운 신분을 의미한다. 15-17절은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고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웃는다. 이는 아브라함이 연약해서 흔들리기도 하고 시험을 받기도 하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믿음의 정도보다 믿음의 질(quality)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할례의 의미는 은혜받은 자로서의 당연한 삶을 담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2장은 그 의미를 밝혀주고 있다. 바로 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할례는 영에 할지니’(성례=새마음), γραμμα(그람마; 의문) ↔ πνευμα(프뉴마; 성령).
?? 15장 - 하나님 편의 Commitment(언약) → 쪼갠 고기
?? 17장 - 아브라함 편의 Commitment(언약) → 할례
* 할례는 언약의 표징 : 이것은 생식기 절단의 뜻을 가진다. 언약을 파기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당시 이방에서 행해지던 관습이라고 보고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성경의 내용과 당시 이방관습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다.
약속의 자녀는 사라의 몸에서 난 자이다. 사라 = 열국의 어미, 로마서 9장과 갈라디아서에서는 이삭이 약속과 성령을 따라 출생했다고 기록한다(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자). 결국 이스마엘은 약속을 따라 난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난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난 것이다. 야곱도 에서를 젖히고 약속의 상속자가 된다.
이스마엘에 관해서도 네 기도를 들었고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겠다하심. 그러나 사라가 낳을 이삭과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신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의 상속자로 이삭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상속자라 했을 때 이 언약의 상속자, 즉 하나님이 이삭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특별한 의미의 상속자이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나 이삭은 특별한 의미의 언약의 상속자라는 말이다.

?이삭의 출생의 의미?
갈 4:21-31,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논하면서,
구약 - 육적인 차원 ??
신약 - 영적인 차원 ?? 의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이것은 구약에서 영적인 구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며 그러나 육적 질서 속에서 주어진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이삭과 이스마엘의 신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갈 4:28에서 이삭을 따라 난 자는 약속의 자녀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라고 말한다.
?? 이스마엘 - 육적으로 태어난 자
?? 이 삭 -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
너희도 이삭을 따라 태어난 약속의 자녀, 즉 이삭의 출생과 관련된 원리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는 의미이다.
요 3:1절 이하에는 이삭이 태어난 경위, 출생의 원리를 신약의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큰 관련이 있는 것으로 말한다. 성령의 중생 사역에 관해 ‘바람이 임의로 불매...’ 즉, 성령님의 주권적 역사라는 것이다. 그 바람의 소리를 듣는 것은 중생을 아는 것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거룩한 감동을 감지하는가?
하나님 나라는 출생부터 성령으로 시작하고 성령으로 인도 받으며, 성령으로 썩을 것까지 영화롭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성령을 모르고 성령으로 인도를 받는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는가? 영적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서 다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없다. 영을 다 믿지 말라(요일 4장). 방언 등의 역사가 있는 것도 사실이나 거의 대부분 요즈음의 영적 역사들은 거짓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것도 모르는가? 이 말은 니고데모에게만 적용되는가? 나 자신에게도 적용해 봐야 한다.
17장에서 언약의 의미 즉 하나님의 백성됨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히신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을 할례로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이 나라의 진정한 상속자가 내년 이맘 때에 태어날 것을 예고하는 데 그는 ‘약속을 따라 난 자’이다. 약속의 내용은 무엇인가? ‘내년 이맘 때 아들을 낳으리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정하심에 의해서 태어날 자요, 자연적 출생이 불가능할 때 이루어진 출생이요,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출생이다. 이것을 신약에서 ‘성령으로 난 자’라고 설명한다. 약속의 자녀의 출생 예고와 이삭의 출생 사이에 일어난 일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이다.

아브라함과 관련해서 아들이 태어날 것을 17장에서 말한다면 18장에서는 사라와 관련해서 아들이 태어날 것을 말씀하신다. 10-15절에는 여호와께서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경수도 끊어지고(자연적 출생의 불가능을 사라가 말함), 하나님께는 이런 일이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없다(이삭의 이적적 출생을 예고). 인간적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삭이 태어날 것이다.
창 18:16-20:18의 내용은 이삭의 출생의 context에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이삭 출생의 의미를 밝히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세상의 축복을 위한 대언자(=intercessor)로서 이삭에 의한 하나님 나라는 세계 전체를 위한 나라라는 것을 암시한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된 세상의 표본으로서 이를 심판하시려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셨다는 것이 소돔과 고모라 사건의 의미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너무 심해서 하나님이 내려가셨다. 즉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셨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약속의 자녀를 예고한 후 세상의 심판을 묘사하는 사건이 나타나는 것은 약속의 자녀의 탄생 의미를 밝혀주는 것이다. 이는 창 11장 이하와 창 12:1-3의 내용의 비교대조의 그 구조가 그대로 나타난다. 즉 창 11장의 세상의 극악한 타락과 그것을 배경으로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는 것을 12장에 묘사해 주는 구조로 창 18:16-20:18의 내용이 이삭의 출생 사건의 context 속에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을 부르신 의미와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이 유익하다.
알다 = 선택의 의미이다. 이 선택의 의미는 의와 공의를 지켜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하기 위해서이다. 의와 공의 =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이루는 것과 같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시는 방법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것은 이 나라로 하여금 세상 나라가 복을 얻고, 의와 공의를 행함으로 이와같은 일을 이루시겠다. 악한 세상 가운데 의와 공의를 행하는 나라로서 이 세상에 복을 전달하는 일을 이루겠다. 사회 정의 정도가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차원에서 의와 정의이다. 이는 우리의 선한 행실, 윤리적으로 깨끗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전달한다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된다. 하나님 앞에서 또는 전세계에 대해서 세상에 하나님 축복을 전달하는 매개자로서 이와같은 위치를 가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기대(요구)하신 것이 무엇인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의 역할, 이것은 아브라함이 롯을 위해 기도하는 혈족주의자로 보는 자유주의와는 다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다스리시는데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 의인을 위하여 진노의 심판을 늦추어 달라는 간절한 기도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기도를 기억하신 것은 혈족에 대한 아브라함의 기도가 아니라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실 수 없다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기도를 기억하셨다는 말이다.

20장은 새로운일이 벌어진다. 4절에 의로운 자도 멸하시려 하십니까?에서 여기서 의로운 자는 이 일에 있어서 불순한 동기가 아니고 잘못됨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 때 일은 애굽에 내려간 일과 유사점도 있고, 틀린 점도 있다. 이 블레셋에서의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다윗에 가서도 블레셋은 멸망받지 않고 계속 싸움을 했으며 이삭 때에는 블레셋과 약속을 맺는데 이것은 블레셋이 약속의 땅과 계속 관련을 갖는다. 여기에 언급되는 사건들이 후일에 이스라엘 역사와 깊은 관련을 갖게되는 사건들을 예시하는 것들이다.

21장에서 이삭이 태어난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는 불편해지고 이스마엘을 쫓아내라는 사라의 말은 당시 관습에서 온당치 못한 일이어서 아브라함이 망설이며 근심하나 하나님이 사라의 말을 들으라 하셨다. 사라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진 의미는 아브라함의 상속은 육적인 상속이라기보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혈연적인 무엇이 개입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난다. 인간적, 육적, 혈연적인 것이 여기 상속에는 전혀 개입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이루어짐을 밝히는 것이다.

22장은 그 일 후에 하나님께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았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것’으로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곳이다. 이는 윤리적 살인행위가 종교적 경건의 극치로 보는 것으로 이것이 어떻게 조화가 가능한가? 키에르 케고르의 「Fear and trambling」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여기에는 하나의 단절이 있다. 이 단절을 신앙과 인식에까지 적용하고 있다. 유대인 랍비들도 이 문제를 고민하였다. 22장의 시험은 아브라함의 생애를 마감하는 대단원이라 할 수 있다. 성경 진술이 23, 24, 25장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죽음, 이삭과 리브가의 이야기로서 세대교체를 보여주는 것을 보면 이 시험은 아브라함의 생애의 절정 or 대단원, 아브라함의 생애를 마감하는 대단원이라 할 수 있다. 22장의 이 사건의 성격을 나타내주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הסנ(나사)   시험이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에 있어 하나의 시험이었다. 이 시험의 구체적 형태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다. 22:2의 번제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번제의 의미를 정확히, 분명히 나타낸 곳은 없다. 문맥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는 구절은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22장 번제에 빛을 던져주는 말씀이 창 22:12절이다.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셨을 때 하나님이 진정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ךדיחי(예히데카) = μονογενης(모노게네스; 요한일서에서 독생자)
네가 사랑하는,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을 취하여 번제로 드리라. 이것은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 목숨과 같은(보다 귀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 가장 사랑하는 그것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않고 바쳐라. 이것은 철저하고도 온전한 헌신을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 남겨놓은 부분이 없이 전체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바치라는 의미이다. 번제 = 전체를 몽땅 태워버림.
신약의 부자 청년에게 너의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부자 청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재물이었다. 세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인데 삭개오는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할 줄 알았다.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나?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존재였는가? ‘네가 사랑하는 아들’. 아브라함이 육정적인 애정으로 이삭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이삭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의 이삭이다. 앞으로 건설하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갈 사람이다. 육정적 애정과 집착의 대상으로서의 이삭의 포기가 아니었다. 믿음과 소망의 유일한 토대로서의 이삭이었다. 따라서 이삭의 포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전체를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전체의 삶을 바쳐서 지켜왔던 믿음과 소망에 대한 포기였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네게 이 땅을 주고 네 자손으로 큰 백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믿는 삶이었다. 이러한 요구는 자신의 삶 전체를 바치게 했던 믿음과 소망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 약속의 포기였다. 이 시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부정하고 불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믿음, 소망, 경건의 삶 전체가 결부된 그리고 신앙적 차원의 흐름 속에서 볼 때 아브라함에게 가장 크고 심각한 시험이었다.
이것에 대한 근거로 히 11장을 들 수 있다. 약속을 받은 자인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명령이 주어진다. 이삭을 통해 네 후손이 번성하리라. 이삭을 통해 약속이 성취되리라는(이루어져 갈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이었다. 다 주어놓고 다 무효화시키는 하나님이라는 의심쪽으로 갔다면 하나님의 불신실하심의 근거가 되는 명령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아브라함의 반응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를 준비하고 모리아산으로 간다. 번제의 장작을 준비하고 이삭을 죽이려 한다. 아브라함은 범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진 아브라함의 독특한 위치를 생각하여 독특하게 주어진 시험으로 본다. 이삭 대신 양을 죽임으로 하나님께서는 인신제사를 원치 않으심을 보여주신다. 오히려 인신제사 드리는 것을 원치 않으심을 반대로 보여주신다. 성경은 인신제사를 가증한 죄악으로 여긴다.
히브리서, 야고보서에서도 이 사건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혹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죽이려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오해했다고 말한다. 번제는 전체를 드리는 것임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험의 의도는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아브라함이 몰랐다고 말한다. 번제의 진정한 의미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제사가 아니라 좀더 높은 차원의 의미였는데 그것을 아브라함이 몰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좀 단순한 생각이라고 본다. 22장을 자세히 보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올라갔던 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었다고 본다.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의 자세로 올라가서 칼을 잡고 죽이려 했을까? 이에 대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이삭과 아브라함의 대화이다.
השׂה ול הארי םיהלא(엘로힘 이르에 로 하세)에서 열쇠는 האר(라아)의 inpf. 이다.
God will see for him sheep
= God will take care of it
= 하나님께서 그 일을 처리하실 것이다. 준비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조처가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도 살리실 수 있는 능력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었다고 히브리서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일부이지 아브라함의 믿음의 전체를 표현하는 내용은 아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은 더욱 포괄적이고 넓은 것일 것이다. 이 구절은 이제까지 성경해석자를 당황케한 구절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살려내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겠지만 단순히 이 믿음만으로 아들을 죽이려고 칼을 잡았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욱 포괄적이고 넓은 내용이 아니었을까?
하나님께서 마련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에 그대로 응답하셔서 이삭을 죽이지 말라 하시고 수양을 마련하셨다. 성경 기자도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수양을 마련하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הארי(이르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수양을 보았다.
이는 הארי와 같은 맥락에서 대비시킬 수 있다.
아브라함이 이 장소를 여호와 이레 = 여호와께서 보신다(살피신다).
= 하나님이 준비하신다. 마련하셨다.
즉 수양을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으로 본다.
14절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 모리아산 = 시온산
여호와의 산에서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임재하셔서) 마련하시리라.

* 여호와께서 임재하셔서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산의 의미.
모리아산이 ?? 성전이 세워질 곳
↓ ? 양들이 대대로 희생되기 위해 키워지는 곳
↓ ??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게 될 곳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려 돌아가신 사건까지 연결되고 있다.
16절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케 하신 양을 마련하시고 양이 대신 죽은 의미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자기 독자도 아끼지 않고, 하나도 남김없이 전체를 바치는 아브라함의 헌신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친아들을 인간의 죄를 위해 희생케 하실 것을 예표하는 것과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독자라도 아낌없이 바친 사건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피흘려 죽게하심을 유발시켰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칼을 손에 잡음으로 이삭을 드린 것이요, 그의 믿음의 헌신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야고보서에서 아브라함의 행위에 의해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한다. 야고보서는 믿음의 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진정한 의미를 말하려는 것이다. 믿음은 죽은 믿음도 있다. 산 믿음도 있다. 믿음은 생명이므로 생명의 열매인 행위가 반드시 따른다. 아브라함의 헌신은 믿음을 증명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처럼 남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간 처럼 하나님 말에 숨기운 것도 없이, 자신의 전부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으므로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바친다는 믿음의 헌신을 보여준 것이다.
ינממ ךדיהי תכשׁה = spare) אל(로 하사크타 예히데카 밈메니)
자신의 것으로 남겨둔 것(움켜쥔 것) 없이 하나님께 전부를 바쳤다. 창세기 22장은 할례 언약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행한 경건한 헌신의 삶의 절정이요, 헌신의 믿음을 증명해 보이는 사건이다. 이 시험 후에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의 경건을 확인한 삶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살피시리라는 믿음이다. 이삭 대신 양을 마련하신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내 아들 내 기뻐하는 아들’ :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아브라함의 독자=이삭, 하나님의 독생자=예수 그리스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은 철저한 자기 헌신이요, 자기 부정의 의미라면 자신의 모든 것 전체를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친 것이다. 이삭은 나를 위해 남겨질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바쳐야할 존재이다. 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쳐져야 할 존재 대신 양이 바쳐졌다는 것의 의미는 이삭이 바쳐졌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진정한 상속자, 하나님 나라의 헌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삭이 하나님 나라 상속자의 완전한 실체가 아니라 완전한 상속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한다. 이삭이 아니라 완전한 상속자가 따로 있다. 기다려야 함을 말한다.
번제 속에 번제가 속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한 이삭이 그 속죄를 이룰 수 없었다. 이삭 대신 양을 잡게 하신 것은 이삭이 속죄에 있어서 NO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온전한 속죄를 위한 번제에 있어서는 양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YES가 된다. 즉 인신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심과 통한다. 이삭 자신은 죄인으로 죽어야 할 자라면 양이 대신 죽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는 것이다. 후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표적인(암시적인) 사건으로 봤을 때 너무나 풍부한 의미를 갖는다.
믿음은 곧 헌신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공로(merit)가 아니다. 믿음은 자기 부정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자기를 부정하고 모든 가능성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의와 가능성을 부인하며 자신의 생명의 가능성을 하나님께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은 공짜로, 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그에게 던지는 것으로 내가 그의 것이 되어 그의 것을 누리는 것이다. 믿음 자체가 헌신을 포함한다. 믿음 자체가 헌신을 내포하고 있다. 믿음의 성격이 행동으로, 헌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경건도 하나의 믿음이요, 헌신이다. 공로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헌신 한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 족장사에 나타나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고찰
족장시대 계시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형태는 ‘여호와의 사자’, 또는 ‘하나님의 사자’를 통한 계시이다. 창세기 16:7, 22:11,15, 24:7,40, 31:11, 48:16(창 32:24ff과 관련하여 호세아 12:4 또한 참조하라) 등에 그 언급이 있다.
이 모든 경우에 특수성은, 한편으로는 사자가 스스로 여호와와는 구별(distinguish)된 것으로 말하여 여호와를 3인칭으로 언급하나, 또 한편으로는 같은 문맥에서 하나님을 1인칭을 사용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현상에 대해서 여러 설명들이 주어졌다. 설명하자면, 두 비판적인 견해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말락)이란 말을 추상명사인 사명(embassy or mission)으로 번역하여 여호와께서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보내셨다(Jehovah despatched from Himself after an impersonal fashion) 라고 하자고 제의한다. 이런 개념은 시내(Sinai)에 거하시는 여호와께서는 인격적으로 그곳을 떠날 수 없으시고, 다만 그의 백성이 가나안으로 가는 여행로와 그 거룩한 땅에서 사는 동안 동행하기를 원하시어, 그가 인격적인 임재(personal presence)로서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일종의 힘(influence)을 보내실 수 있다는 고대적인 신앙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그 개념은 적어도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랜 것이다.
둘째 견해로서는, 사자의 형성을 하나님을 높이는 후기 유대사상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원래의 옛 이야기들이 하나님께 연관시키고 있듯이, 지상의 피조물과 하나님께서 그렇게 깊고 밀접하게 연관되고,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맞지 않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들은 이런 반이신론적인 관점에서 다시 쓰여졌는데, 이런 종류의 모든 특징과 행동들은 천사계층의 중재에 의해 수행되고 나타나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자는 아주 후기의 기원을 가지고 있는데, 여호와에 대한 이신론적인 사고의 형성만큼이나 늦은 것이다.
이 두 이론 모두 같은 근거에서 반박될 수 있다. 그것은, 만일 이런 현상이 시내로부터의 부동성을 견지하기 위해서나, 피조물과의 교섭의 부적절성에 의한 것이었다면, 작가나 편수자들은 그 반대현상이 나타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틀리지 않게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인즉, 사자에 의한 고상한 형태의 계시와 함께 이전에 사라졌어야 할 신현들이 계속해서 기사들 가운데 발견되고 있다. 그런 인물의 형성을 한 교정의 성격을 지닌 것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그 외에도 둘째 이론에서는 ‘여호와의 그 사자’(the Angel of Jehovah) 대신에 ‘여호와의 사자들’(an Angel of Jehovah)이란 말을 기대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고유명사 앞에서 선행하는 명사는 한정적이기 마련이라는, 환언하면 비록 그런 의도를 가졌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사자’는 부정관사를 붙어 쓸 수 없다는 반론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다. 히브리말에는 ‘여호와의 사자(들)’이란 관용어귀가 있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사자(Angel)와 여호와 사이에 전치사  (라메드)를 삽입하는 것이다 - 여호와에의 사자(an Angel to Jehovah). 그러나 만일 문제가 하나님과의 피조물의 거리를 유지하는데 있었다면 그 때에는 그 사자가 여호와처럼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소기의 목적을 흐리게 하는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두 견해 중에서 하나는 하나님과 사자의 차이를, 또 다른 하나는 그 동일성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 하는 데에 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해석은 하나 뿐이다. 즉, 이 두 표상 뒤에는 신성의 참 계시가 있다는 것이다(Behind the twofold representation there lies a real manifoldness in the inner life of the Deity). 만일 이 보내신 사자가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Himself partaker of Godhead)이라면,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도, 동시에 하나님으로서도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며, 그 두 경우 모두가 참인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삼위일체라 부르는 것 중에 많은 것이 비실재적이며 환상적인 것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으로부터 이런 계시방식의 정확한 목적이 삼위일체의 진리를 계시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실재적인 것은 그것 없이 일어날 수 없으나, 여기서는 일단 다른 진리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랬다가 오랜 후에 이 간접적인 방법으로 이 사자로서의 신현(Angel theophanies)이 삼위일체를 계실하게 될 수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처음 나타났을 때는 이를 알 수 없음은, 그 당시의 최고의 목적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식에 하나님의 단일성을 확고히 해주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일찍 삼위신을 계시하는 것은 다신론에의 유혹이 될 가능성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오랫 동안 메시야의 신성과 성령의 인격성은 다소간 뒷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즉 삼위일체의 계시가 아니었다면, 이 새로운 계시양식의 도입 목적은 무엇인가? 그 목적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고, 또 하나는 아주 새로운 것이다. 전자로서는 ‘성례전적인 것’(the sacramental)을, 후자로서는 ‘영적인 목적’(the spiritualizing intent)을 뜻한다. ‘성례전적인 목적’이란, 하나님께서 가장 그의 의도가 잘 드러나는 방법으로, 그들과 함께 하심을 확신케 하기 위해 당신의 백성에게 가까이 하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이 성례전적인 의도는 처음부터의 모든 신현에도 있었던 것이다. 즉, 이런 의도의 신현이 여호와의 사자의 출현을 통해서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출현이 없었다면 또 하나의 원칙, 즉 신성의 영적 성질의 원칙을 모호하게 하는 옛 방식 속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니시고, 먹고 마실 때, 육체적인 방법(bodily fashion)으로 말씀하시고 들으시며,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마치 하나님의 본성의 당연한 귀결인양 생각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것은 당신의 본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고, 다만 당신 편에서 스스로 성례전적으로 낮추신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적인 방법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하나님의 영적 성질이 그 배후에 있음 또한 필연적인 것이다. 이것이 사자가 하나님으로서 말하는 것 배후의 것을 전달하는데서 성취된다. 즉, 그 사자는 연약성과 제한을 지닌 사람을 만나시는 하나님의 오든 낮추심을 체현한 분이며, 동시에 그런 물질적인 방식으로 뵈옵거나 받을 수 없는, 그 사자가 3인칭으로 언급하는 바로 그 하나님의 또 다른 분(aspect)으로서 계시는 분이신 것이다. 하나님과 당신의 사자 사이의 이 업무분담에서 이 신현의 불가결한 핵심이 살아난다. 이 영적인 의도는 저 성례전적인 것을 돕는 것이다. 이 사자는 참 신이심에 분명한 것이, 만일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확신하게 되는 성례전적인 기능을 담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만남의 필요는 하나님의 본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 그것도 주로 죄된 본성이 이를 필요로 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성육신에서 이 기본적 뜻의 최고의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성육신은 하나님 편에서의 본래적인 필요의 결과가 아니다. 이에 반하는 것은 그것이 많은 이의 지지를 받는다 해도 범신론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구속을 필요로 하는 우리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함한 전체 성육신은 하나의 큰 구속의 성례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의 성질(인성, 인간성을 말함)을 위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영성(spirituality, 신성이라해도 좋음)을 신자들에게 말하기 위한 특별한 배려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원칙은 요한복음 1:18절에서 그 고전적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사자출현의 전체 사실이 처음부터 구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구속의 중요한 일의 수행이 그에게 부여되어야 함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언약이 체결된 직후에 드디어 그가 등장한다(창 16:7). 델리취는 이를 잘 파악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사자) 출현들의 목표와 궁극 목적은 그 시작에서 판단될 수 있다” 모세 시대에 그 언약의 수행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자에게 맡겨져 있음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특별히 이 언약과 밀접히 관련된 자들의 삶과 사역을 보호하신다. 야곱은 말하기를(창 48:15f)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라고 하였다. 또한 말라기 3:1절의 “언약의 사자”를 참고하라. 그 성질로서 뿐만 아니라 그 기능에 있어서도 여호와의 사자는 일반 천사들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 사자는 잠시 동안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가는, 다시 나타날 때까지는 다시 형체를 갖지 않는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서 나타난다. 사자가 구약시대에는 계속해서 그런 동일한 출현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출현되는 곳에서의 형태의 다양성(variableness)과는 모순되는 생각이다. 이것은 물론 항상 하나님이신 신성의 둘째 위가 형태를 띠고 나타나신 성육신의 선취일 수 있다(요 1:14). 그러나 영원 전부터 이 위는 자신에게 적합한 육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계셨다는 생각은 더 큰 오류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성과 맞지 않고, 사자를 통한 계시가 원래 의도한 바를 봉쇄하는 오해를 일으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주 제기되는 질문으로서 이 사자는 피조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는 위(the Person)와 출현 모습을 명확히 구분함으로 충분히 대답할 수 있다. 만일 위에서 시사한대로 사자 개념이 신성 자체의 차이를 지시할 수 있다면, 즉 그 사자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예상형(또는 선취형, prefiguration)이라면, 그 계시에 나타난 위(Person)는 분명히 피조된 분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반면, 사자란 말로서, 이 위(Preson)가 취하신 표현 형태를 지시하는 것이라면, 사자는 피조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즉, 그리스도의 신적 위(Divine Person)는 피조될 수 없는 것이다. 신성과 피조성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인성에 관한 한, 예수는 피조된 것이다. 그와 사자 사이의 차이점이 있다면, 구약엔 피조된 형태가 단명하지만 성육신의 경우엔 영원하다는 것 뿐이다.
모세시대에 있어서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첫 언급은 출애굽기 3:2절에서, 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났을 때이다. 그와 하나님이 동일시 됨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떨기나무 불꽃 중에서 불러내셨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다음으로는 출 14:19절에서 그가 이스라엘 진 앞서 행하다가 구름기둥과 함께 뒤쪽으로 옮겼다는 기록에서 그에의 언급을 볼 수 있다. 23:20,21절에서는 그에 대한 공식적인 약속이 주어진다. 그는 이스라엘과 동행하게 될 것이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이 구절의 전체 구조는 바록 본문에 사자(an angel)라고만 되어 있어도 단지 일반적인 천사로만 생각할 수 없게 한다. 70인경의 ‘내 사자’라는 독법에서 원래 히브리말이 이 형태(접미사와 함께)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사자의 기능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포괄적인 것임을 이 구절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그에 대하여 죄를 짓는다는 말로부터 그가 하나님과 동일시 됨을 배울 수 있다. 반면 출애굽기 32:34절에서는 ‘내 사자’(my angel), 출애굽기 33:2절에서는 ‘한 사자’(one angel)란 언급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상황이 이를 요청하는 것이다. 즉, 사자를 보냄은 여호와 당신께서 백성과 함께 가실 것이란 원래의 약속의 철회로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 33:3-5).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를 보냄은 여호와 자신이 동행하심과 다르지 않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원래의 약속대로 함께 하시리라는 다른 제안은 모세의 간곡한 청원이 있고서야 나타나기 때문이다 - “내가 친히 가리니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출 33:14).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의 역사에서도 나타난다(민 22장). 여기서 그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락의 도모를 좌절시키시는 것이다. 이는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하는 그의 일반적 사역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예이다(민 20:16 참조).

22:20-24장은 리브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리브가에게 많은 양의 지면을 할애한다. 이 본문에서 중요한 말은 브두엘이 리브가를 낳았다는 것이다. 23장에 들어오면 사라의 죽음이 나온다. 여기서는 여자 상속자 문제의 세대교체를 중요하게 보여준다. 사라의 죽음은 리브가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사라의 후계자는 리브가이다. 창 12-22장까지는 남자 쪽의 후계자 문제를 다룬다면 창 22:20-24장까지는 여자 쪽의 후계자 문제를 다룬다. 리브가에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녀의 차이가 천국에서는 전혀 없다. 창조 질서 속에 존재하는 동안에는 그 원칙을 순종해야 하나 원칙적으로는 남녀의 차별이 없다.
이삭은 남자 쪽 즉 아브라함의 후손일뿐 아니라 여자 쪽 즉 사라의 후손이어야 했다. 사라도 특별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 사라의 죽음과 리브가의 등장은 영적인 계보를 매우 중시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모계를 통한 신앙의 순수성의 강조가 부계 쪽 만큼 중시되고 있다.

23장 사라의 죽음은 리브가 시대의 등장을 예고한다. 사라의 죽음과 함께 약속의 땅에서 장지를 마련한다. 장지 구입의 과정에서 아브라함에게 헷족속이 말한다.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세상 속에서의 아브라함의 삶의 quality를 보여준다. 즉 아브라함은 복음의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외인의 선한 증거, 하나님 나라 밖의 사람의 증거를 통해 아브라함의 경건한 삶과 아브라함의 헌신과 믿음이 참됨을 증거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방인 가운데 살면서도 그들에게 덕과 은혜를 끼친 아브라함의 경건한 삶은 중요한 것이다. 장지 구입의 세세한 사항이 기록된 것은 이 땅은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못박기 위해 세세한 과정을 다 묘사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돈을 다 지불하고 장지를 구입한 것은 장지에 대한 끈질긴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아브라함이 장지에 대해 끈질긴 관심을 가졌을까? 이 장지 마련은 단순히 무덤 마련이 아니고 약속의 땅에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야곱도, 요셉도 이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 장지에 대한 애착은 바로 이 장지가 약속의 땅에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 약속의 땅에 묻히기를 원했나? 이곳이 내 삶이 뿌리박은 터전이요, 나는 이곳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그네로 방랑했는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묻힌다는 소망이요, 하나님 나라의 약속은 죽음과 더불어 해소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고 죽음 후에도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만이 아니라 언젠가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담는 것이다.

24장에는 아브라함이 종에게 이삭의 아내 구하기를 명한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인 며느리 얻기를 거부한다. 이 사실은 아브라함의 진정한 의도는 가나안에의 동화를 거부한 것이다.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이 몸담고 살던 땅이고 그 삶의 터전이요, 가나안인은 접촉하며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아브라함의 운명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멸망받기로 결정된 사람들이었다. 즉 가나안인과 결혼을 거부한 것은 함께 사는 사람들이었으나 그들과 혈연을 맺음으로 그들을 집안에 끌어 들이는 것으로 그들의 타락한 종교와 생활에 오염될 것을 염려하였다. 결혼을 하는 것은 육체적 결합만이 아니요, 정신적, 내적 교류를 의미하고 성경에서는 가장 깊고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관계라고 말한다. 그래서 ‘한 몸’이 된다고 말했다.
가나안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 선언 아래 저주와 멸망의 백성이다. 아직 죄악이 관영치 않았기 때문에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창 18장)는 심판 받는 것의 예표이다. 비록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했지만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과 판단을 아브라함이 소홀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할 사람의 위치와 사명, 멸망해가는 사람들에 대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지만 아브라함이 그 세상 속에 뛰어들어 산 것은 아니다. 그들과 한 통속이 된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의 사명과 위치는 분명히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가나안인 며느리 얻기를 거부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상호배반적,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지나 그렇지 않다. 세상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소유해야할 자세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소유하고 세상에 전달해야할 존재이나 분명히 망해가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이 며느리 얻기 위해 동족에게 가라고 했다. 왜 동족에게 가라고 했나? 아브라함은 혈족주의자인가? 이유가 종교적으로 그들이 가나안인 보다는 덜 타락했기 때문이거나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더 우월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동족에게서 며느리를 취함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결단을 하게 함으로서 신앙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리브가가 본토, 아비, 친척의 집을 버리고 약속의 땅, 약속의 가정(Abraham's house)에 속하도록 지금 막 결단하여 떠나라 했을 때 리브가가 흔쾌히 떠난다. 만일 그 여자가 나오기 원치 않으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절대로 본토, 친척 땅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한다. 즉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불요불굴의 신앙과 헌신을 뜻한다. 아브라함이 여호와께서 순적히 하실 것임으로 가라고 말한다.
cf) 환도뼈 : 인간의 생식기관을 둘러싸고 있는 부분, 인간의 vitality,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 풍속, 습관들이 민족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르므로 성경 속에 있는 사건들과 함부로 연관시켜서는 안된다. 성경이 말하는 확실한 윤곽과 테두리를 잡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게 좋다.
아브라함이 후계자, 아내 선택을 여호와께 맡겼다는 것은 여자 상속자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약속 정하심과 하나님의 선택에 맡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며느리의 선택의 모든 진행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이다. 종이 그 지역에 도착하자 마자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과정을 간섭하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택이 리브가의 자원하는 심정,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신앙고백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자원하는 심정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경우와 똑같은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신다. 리브가도 아브라함과 똑같은 결단에 직면한 것이다. 리브가 자신이 본토,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는 신앙의 결단을 요구받았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그리스도가 세우시는 교회 안에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 남자에게만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고, 여자는 부수적으로 남자를 따라가는 것 아니다. 남녀 모두에게 신앙의 결단이 요구된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한 몸 되는 것, 한 권속이 되는 것은 신앙의 동질성이다. 물론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의 선택이 있으나 인간 편에서의 이 신앙의 동질성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 리브가를 사라의 장막에 모셔들인다. 이것은 사라의 후계자로 리브가를 맞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25장은 아브라함의 세대를 마감한다. 즉 아브라함의 죽음이 나온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나 모든 유산은 이삭에게 준다. 아브라함의 진정한 상속자는 이삭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처의 자녀를 이삭에게서 즉, 약속의 땅(가나안)에서 멀리 떠나게 한다. 이것은 이삭의 상속권을 강조한 것으로 그들을 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서 떠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상속은 단지 재산 상속이 아니요, 가나안 땅의 상속이다. 그리고 상속의 핵심은 아브라함의 축복이다.
ןימע־לא ףסאיו(=gatter; 와예아셒 엘-세데) 이 말은 그의 백성에게로 들어갔다(모아졌다).
그가 열조와 함께 잠들었다는 표현이 열왕기에 있고,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다는 표현은 이삭, 야곱, 요셉, 모세와 아론에게까지 나타나고 있다. 창 17장에 보면 ‘할례받지 아니한 자마다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했고, 창 17장은 할례의 언약을 의미하는데 그 백성은 바로 언약의 공동체이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언약이고 그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백성에게로 들어갔다는 것은 의미가 더 깊다. ①죽음이 끝이 아니다. ②죽음 후의 일을 말한다. 죽음을 가리켜 그 언약 공동체 백성에게로 들어간다고 했다. 이는 죽음 후의 일이며 죽음 후에도 끊쳐지지 않고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죽음 후의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히브서에서 ‘하늘의 도성’이라 했다.
25:17에서 이스마엘도 그랬다 한다. 이스마엘은 약속의 상속을 상실하고 쫓겨난 자였으나 이 기록을 보면 이스마엘이 개인적으로는 구원 받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스마엘도 할례받게 했다. 즉 이스마엘도 이 언약에 속한 자라는 의미이다. 즉 상속자의 의미에서 상속은 개인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과는 다른 독특한 의미이다. 아브라함 → 이삭 → 야곱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line은 이스라엘의 선택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선택 즉, 상속자로서의 선택이 구원의 차원으로 동일시 하면, 롯이라든가 아브라함 집의 할례받은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상속의 의미는 개인의 구원의 차원도 있으나 이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족장사를 통한 상속자의 의미는 특수하다.
25:12에 보면 약속에서 떨어져 나간 이들을 먼저 언급한 후에 약속의 자녀를 언급한다. 19절은 이삭의 후예를 언급한다. 이삭의 역사가 시작되자 말자 후계자 문제가 또 언급된다. 아브라함의 후계자 이삭의 출생의 특성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주권적인 정하심에 따라 난 출생이다.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 후계자가 정해진 사건이 야곱, 에서의 사건에서는 더욱 극명히 나타난다.
이삭과 더불어 이스마엘이 상속자의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종의 자녀요, 이복형제, 외적 자격으로는 이삭과 차이 많았다. 그러나 야곱, 에서에 와서는 문제가 더 분명해진다. 한 어머니의 아들로 동복이요, 쌍둥이였다. 그리고 태어난 후 결정한다면 외적으로 상속자를 정할 수 있겠다 하겠으나 이미 뱃속에 있을 때 정해진다. 누가 더 상속자가 될만한가를 정할 수 있는 외적 조건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신다. ‘선악을 알기 전에’ 즉, 후계자의 선택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따른 것이다. 이삭에서보다 야곱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더욱 극명히 나타난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극명히 드러난 야곱의 선택에서 또한 인간의 자발적인 참여의 요소도 현저히 나타난다. 야곱의 경우는 이삭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선택을 극명히 보여줌과 동시에 또한 야곱 스스로의 원함과 노력을 수반함도 야곱의 경우에서 더욱 뚜렷이 보여진다. 25:31절에서 야곱은 상속권 얻기를 소원했고, 열망했고, 자원하여 노력함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 원하고 자원하여 열심과 노력으로 이를 얻으려는 것이 같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실제로 행해지려 할 때 인간의 자유와 책임과 형식이 무시되지 않고 인간의 책임과 행동, 자원함이 함께 나타난다. 신앙의 책임과 불순종의 유기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유기로 말할 때 동시에 로마서에서 이야기 한다.
야곱이 당사자이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의 계획 속에 invalve되었음을 확인해 준다. 기근이 들었을 때 내려가지 말고 머물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소망하고 이 약속의 소망에 흔들리지 말고 서있으라 하신다.

26장 이삭이 기근들어 그랄로 내려간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간 사건과 비교하고 있다. 성경은 이 사건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야곱은 요셉이 청할 때 아들을 보고 싶으나 애굽에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 하신다. 한 편 애굽에 내려가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후에 내려가라 하심으로(아직 때가 안되었기는 하나) 알 수 있으나 그러나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타당하다.

27장에서 야곱의 교활함이 나온다. 이러한 교활함은 25:31절에서 야곱은 상속권 얻기를 소원했고, 열망했고, 자원하여 노력함에서 볼 수 있다.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상속권을 얻으려 한다. 아마도 리브가가 상속권을 야곱이 받을 것이라고 계속 말해주었을지도 모른다. 야곱이 상속권을 얻으려 한 동기 자체는 나무랄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상속을 얻으려 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을 때 그것을 인간 편에서 이루어보려는 노력을 정당한 노력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불효로 봐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야곱과 에서의 축복의 내용
야곱은 형제를 다스리는 자 ?? 로 축복의 핵심은 상속이었으나 그 내용은 매우
다른 형제는 야곱을 섬기는 자 ?? earthly한 축복이었다.
그러나 28:4절을 보면 상속문제는 아브라함의 축복으로서 이 왕국이 만민의 축복을 위한 것으로 이 왕국은 earthly kingdom이 아니고 따라서 이삭의 축복 내용, 부요한 축복은 상징적인 것이다.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을 때 그 내용은 종과 주인의 관계를 말하는데 이는 상속의 의미에서 중요하다.

28장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곳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한다. 성전 = 지상과 하늘의 통로, 만남의 의미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을 재확인해 주신다. 땅에서부터 하늘로 탑을 쌓아 올라가는 것 = 바벨탑적 성향이나 하늘에서부터 땅을 향해 세워있는 것 = 사다리.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 내려온 것만 의미가 있다. 성전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실 때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다.

30장은 여러 복잡한 경로를 통해 야곱이 두 아내, 두 여종을 통해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야곱의 12아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을 보여준다. 족장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택의 역사는 끝난다. 즉 선택이 확정된다. 야곱이 원하는 것은 인간적인 재주를 부려서라도 소유하고 마는 것을 보여주는 생활이 바로 밧담 아람의 생활이었다.
야곱이 아내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갈 것을 묻는다. 이 역시 리브가에게 묻는 신앙적 결단과 같다. 신앙의 동질성을 하나님께서 철저히 요구하심이 나타난다. 이어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온다. 에서가 두려워 인간적 실수로 대비한다.

32장은 야곱이 천사와 다투는데 무엇을 위한 투쟁인가? 즉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투쟁이다. 하나님의 약속한 땅에 들어 가는데 에서에게서의 두려움과 그 밖의 인도, 보호, 약속의 땅에서의 축복을 구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형과 아버지를 속일뿐 아니라 하나님과도 싸우겠다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집요한 열심이다. 여기서 보면 야곱은 자기의 힘으로 싸웠다. 환도뼈 =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의 능력, 생식력.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적인 노력과 열심으로, 능력으로 얻을 수 없음을 가르쳐 주심이다. 야곱이 다리를 절었다. 이는 하나님 앞의 패배이다. 낮아진 자의 모습이다. 자연인 야곱의 패배는 신앙인 야곱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계속해서 36장까지는 야곱의 선택이 그의 생애에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될 열두 아들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언급한다. 자기의 힘으로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려는 야곱의 모습이 철저히 부숴져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한다. 하나님께 은혜를 철저히 구한 자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칭호를 얻는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는 하나님과 싸워서 인간의 힘이 승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께 패배함으로 하나님께서 승리하신 자라는 뜻이다.

이상에서 볼 때 족장사의 총관심사는 “누가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는 상속자가 될 것인가?”이다. 아브라함과 함께 동일한 약속을 함께 받은 자. 족장사에 있어 그리고 이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 왕국의 상속자가 될 성격이 많이 나타난다.
아브라함 → 부르심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한 자.
이 삭 →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따라 난 자(약속, 성령을 따라 난 자, 자연적 출생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마엘은 제외되어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그두라의 자식들도 가나안 밖으로 떨어져 나간다. *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과 동일 =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야 곱 →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됨(창 25:23). 상속자로 정해진 때는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이다.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선택이 되어졌다. 그들이 선악을 알기 전에 먼저 선택하고 부르셔서, 믿게하셔서 하나님 왕국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이므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난다.
이러한 선택의 역사는 야곱에게 와서 종결된다. 야곱 = 이스라엘, 그에게 있어 12 아들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다. 야곱이 선택된 것은 그 이름 이스라엘이 선택된 것이다. 하나님 왕국의 상속자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37장 2절에는 야곱의 약전이 나온다. בקעי תודלות הלא(엘레 톨르도트 이야콥)
= 역사라는 의미(계보, 세계)
약전은 야곱의 생애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단순하지 않다. 이제까지 야곱의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마치 이제부터가 야곱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야곱의 약전은 이러하니라’고 표현하고 있다.

* 창 25:19 קחצי תודלות הלא(엘레 톨르도트 이츠핰) 이삭의 이야기가 18, 19, 22, 23, 24장에 이미 중요한 생애에 대해 다 나왔는데 25장에 와서 이삭의 약전을 말한다. 그리고 35장에서 이삭의 죽음과 아브라함의 죽음을 언급하고 37장에 와서는 에서와 이스마엘을 언급하며, 37장에 와서 야곱의 약전과 이삭의 약전을 기록한다. 우리는 족장사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아브라함 싸이클과 이삭 싸이클, 야곱 싸이클로 나눌 수 있다. 아버지가 죽기까지는 아들의 역사가 아버지의 역사에 다 속하고 아버지가 죽는 것으로 그 세대가 다 마감된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아들의 이야기가 다 아버지의 이름 하에 기록되는 것이다.

37장에 넘어오는 이제서야 야곱의 아버지가 죽고 그의 시대가 되어 그가 상속자가 되고, 그가 지배자가 되며, 그의 시대가 된다. 진정한 의미의 야곱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표현하므로 ‘야곱의 약전은 이러하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야곱의 약전을 말하고 요셉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후의 일이 요셉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나오나 창세기 기자는 어디까지나 이 부분을 야곱의 역사로 취급한다. 그리고 창세기는 야곱의 죽음으로 끝난다.

* 요셉(창 37장에서 시작됨) : 야곱의 약전으로 시작된다. 아비가 살아 있을 때의 자식들의 역사는 아비의 약전에 속한다. 야곱의 역사는 하나님 왕국의 상속자로서의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실제로는 요셉 한 개인의 역사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개인의 성공에서 나타난 의미는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이다. 요셉의 역사를 시작하면서 야곱의 역사로 표현했다는 것은 요셉의 역사를 어떤 시각으로 봐야할 것인가를 말해준다. 야곱의 역사는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대칭된다. 따라서 요셉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야곱의 역사는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의 역사이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라 했으나 한 개인의 역사로 진행해 나가고 특히 요셉의 꿈도 요셉 개인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즉 앞으로 요셉이 그의 형제들 가운데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매우 개인적인 것인 것 같다. 하여튼 한 개인의 경건과 영달에 관한 것처럼 보이므로 요셉 개인의 역사를 하나님께 경건, 순종할 때 그것이 개인의 영달로 끝맺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셉의 개인적인 성공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우선은 요셉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그것이 꿈으로 계시,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셔서 그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것이 개인의 역사 이상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36장까지의 역사는 누가 유업으로 이어받을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다가 이제는 누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으로 이어받을 것인가에 대해서 ‘이스라엘’로 일단락이 된다. 따라서 요셉의 역사는 개인의 역사가 아니고 이 하나님의 왕국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계획과 도우심과 인도로 성취된 역사이다. 요셉 개인의 역사의 목적은 한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하나님 왕국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역사이다.
그 역사의 의미는 요셉이 후에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로 하여금 당신들을 위하여, 남은 자를 위하여 하나님의 큰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당신들을 큰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서 당신들 먼저 보내셨다’고 요셉이 말한다. ‘당신들이 보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45:6). 요셉의 역사는 요셉 개인의 순종과 영달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상속자로 결정된 이스라엘을 보존하고, 하나님의 왕국을 보존하고, 하나님의 왕국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큰 목적이 요셉의 역사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요셉의 이야기나 구약의 성경을 moralize할 때는 이 진정한 큰 목적을 잃어버리게 된다. 요셉은 자신의 생의 참된 의미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을 먼저 애굽에 보냈다고 본다. 구속사적 관점이 드러낸 중요한 시각이다. 성경의 역사를 개인의 역사로 보지 않고 이스라엘의 역사로 본다. 물론 이 성경 역사에서 개인의 삶의 교훈적 의미도 발견 할 수 있으나 그러나 항상 그 개인의 삶의 진정한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요셉의 삶의 의미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데 진정한 의미가 있었다. 요셉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남은 자를 보내어 구원시킴). 야곱 가정의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이 달린 구원이다. 즉 하나님 왕국의 존폐와 관련된 구원이다. 요셉을 통해 애굽과 이방 족속이 이익을 받는다. 요셉은 자기의 역사를 하나님 왕국의 유업을 받기로 결정된 이스라엘의 역사로 보고 있다. 요셉이 야곱에게 내려오라고 한다. 브엘세바 = 약속의 땅의 가장 변방지역이다. 여기를 떠나면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이다.

46장 브엘세바에서 야곱이 떠나기를 주저했고 하나님께 희생을 드린다. 야곱은 버지의 말씀 즉 이 약속의 땅을 떠나지 말 것을 기억하고 아들의 청이 있다 하더라고 주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야곱의 온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간다. 하나님께서 브엘세바에서 나타나셔서 약속하신다. 46:3-4 애굽에 내려가는 것은 아브라함의 약속이며 그 약속의 일부분임을 말한다. 애굽 이주와 관련된 하나님의 계획과 왕국건설을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확인되며 실현되어 진다. 요셉을 통해 애굽에 내려감은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왕국실현의 역사였다. 이스라엘 민족을 비옥한 애굽 땅에서 큰 민족으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요셉 사건은 하나님의 왕국 백성으로 선택된 야곱 가족이 어떻게 애굽으로 갔는가를 보여주며 큰 민족이 될 것을 보여준다(큰 구원을 위해 준비된 역사). 애굽 이주 사건은 단순히 한 가문이 기근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로 장차 애굽에서 큰 나라를 이루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인 것이다(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실현). 이 족장사가 출애굽의 배경이 된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인도하신 역사,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쓰임받은 역사.
우리는 성경의 개인 역사를 단순한 의미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 왕국건설의 참여자로서와 쓰임받는 자의 역사임을 보아야 한다. 각 부분의 역사가 또 다른 부분을 위한 연결의 채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개인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보아야 한다. ①왕국의 실현에 참여하는 구속사의 일부분, ②왕국의 실현에 쓰임받는 생애와 역사이다. ③구속역사의 준비하는 역사이다. 개인의 역사는 그 다음 단계의 구속역사를 연결하는 채널이다.
요셉은 족장사와 출애굽 사건을 연결하는 역사(종적)요, 또 자기 자신과 열방을 연결(구원)하는 역사(횡적)이다. 이는 우리에게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그의 뜻 실현을 위해 전개되는 역사라는 시각을 가지지 않고는 이런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축복의 전달자로서 이스라엘의 의미는 종적으로는 다음 세대의 구원역사의 연결이고 횡적으로 이웃에게 하나님의 축복 전달자이다.

창세기는 야곱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대한 축복으로 끝난다. 하나님 왕국 상속자에 대한 축복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관심이 이스라엘임을 말해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미래의 막연한 사건이 아니라 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언급(창 49:29-33, 50:25-26)이 또한 있다. 즉 야곱과 요셉이 자신의 시신을 이 땅에 묻지 말고 약속의 땅에 묻으라고 말했다. 요셉이 약속의 땅을 대망하는 메시지를 50:24에 전한다. 즉 이스라엘은 분명히 출애굽을 내다봤다(창세기 자체의 시각). 하나님이 그의 뜻을 여기서 다 이루신 후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을 출애굽하실 것을 내다본 것이다.


출애굽기(תומשׁ הלאו; Exodus)

출애굽의 중요성 : 이스라엘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사건들의 하나가 바로 출애굽이다. 신명기 26장에서 보듯이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가장 크다. 우리가 출애굽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앞의 사건과 관계없이 그저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은혜의 사건으로만 볼 것인가? 창세기부터 출애굽기까지는 연관된 역사이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출발부터가 의미심장하다. 70인이 내려갔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고 이에 대해 세상 나라가 핍박하고, 그 핍박 때문에 세상 속에서 갈등과 투쟁을 한다. 결국 세상 속에서 교회는 싸울수 밖에 없다 = 전투하는 교회(militant church). 그러나 이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다.
출애굽기 전체 성격을 파악하려면 서론 1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박해 받는 것과 창세기를 어떻게 연결지을 수 있는가? 출 1:1-7에 나와 있다. 이것이 출애굽의 출발점이요 전체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출애굽기 1장의 내용 1-7절과 8-22절로 나눌 수 있는데 1-7절은 야곱의 혈속 = 예렉(허벅지) = 친혈족을 의미한다. 애굽에 내려간 이는 70인 이었는데 이들의 생육이 중다, 번식, 창성, 심히 강대해진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출애굽의 출발점이다. 관심의 촛점은 이스라엘(야곱)이고 이스라엘 역사가 주된 관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을 기업으로 택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70인이 심히 강대해진 것의 의미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성취이다. 그리고 야곱에게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이 밝히신 이유는 이 민족을 큰 민족을 이루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 함(창 46:3), 즉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셨고(큰 민족 만드셨고), 이제는 그 다음 단계의 약속을 이루시겠다. 즉 이는 창세기와 연결되며 출애굽의 배경이 밝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의 성취를 위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보내셨다. 이제 큰 일이 있게 되는데 이 시기를 사도행전 7:17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1:8절 이스라엘 백성의 박해가 기록되어 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 - 새 왕조인가? 새로운 인물인가? 그 특징은 요셉이 애굽에 끼친 큰 공적을 모르는 이든지 아니면 요셉의 공적과는 관계없는 이일 것이다. 아마 공적과 관계없는 인물로서 새 왕조라 여겨짐, 즉 요셉을 아는 왕조는 Hyksos왕국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 왕조는 셈족 출신, 요셉도 셈족 출신 같은 족속이므로 요셉에게 호의 베풀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한때 이 왕조가 애굽을 다스리다가 축출되고, 함족 출신의 왕이 새 왕족에 들어섰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1:9절 이 새 왕이 이스라엘을 박해하기 시작하는데 이스라엘의 강성은 애굽에게는 위협이 되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기들 가운데 유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심히 강해지므로 박해한다. 왜? 강해지는 것을 불안해 했는가? 만일 다른 민족이 애굽에 쳐들어 올 때 그들과 합세하거나 도망갈까봐.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 외의 백성은 이방, 세상, 이방(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다. 따라서 애굽의 박해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먼저 애굽으로 내려 보내셔서(세상 속에서) 큰 백성을 이루신다. 자기 나라에서 점점 강성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세상은 점점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강대국이 하나의 약소민족을 압박, 착취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하나의 약소민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가 점점 강성해질 때 세상으로부터 박해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강성해지면서 세상과 필연적으로 갖게되는 갈등을 표현한 것이다. 바로의 염려한 핵심은 이스라엘이 강성해져서 애굽을 떠날 것을 염려한 것이다. 바로가 다른 이민족과 연합할 것에 대한 염려였다면 이스라엘을 내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떠날 것을 염려한 그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 큰 유익을 주는 것 같았다. 즉 경제적, 지적으로 애굽에게 상당한 유익을 주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적정 수준에 묶어 두어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숫자만 남겨두어 자기 유익을 취하고자 즉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으려, 자기를 섬기게 하려고 하였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강성함을 두려워함으로 배제하려는 것만이 아니고 좀더 적극적 의지를 갖는데, 즉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이용하여 자기를 섬기게하여 자기의 유익을 취하려 한다. 이같은 바로의 의지는 세상왕국의 특성, 즉 죄와 마귀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악 한 가운데 세워지며, 하나님 나라를 압박하는 세상은 항상 사단의 세력이 있어서 하나님 나라를 놔주려고 하지 않고 항상 자기 유익을 위하여 이용하고 자기를 섬기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노역을 강하게 시키나 이스라엘이 더 강해지고 산파들도 바로 왕의 말을 듣지않는다. 이것은 앞으로의 승리를 암시해준다. 바로가 사내아이를 다 죽이도록 하는 그 계획(이스라엘을 멸절시키려는) 가운데 오히려 이스라엘을 구출해내는 사람이 애굽의 보호 아래 애굽의 심장부에서 자라게 된다. 바로의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자기의 계획 속에 자기를 멸망하게 하는 일이 진행된다. 출애굽의 역사는 사도행전의 역사와 유사한 점이 있다.
세상 핍박이 극에 달했을 때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모세가 태어난다. 죽음의 상징인 물 속에 모세는 갈대 바구니(תבת;테바트   방주)에 담겨있었다. 즉 노아의 방주처럼 또 하나의 방주에 넣어져서 물 속에 던져진 것이다. 바로의 공주에 의해 죽음의 영역인 물 속에서 건져져서 바로 공주의 아들, 왕자(prince)가 된다. 애굽의 모든 지혜를 배우고 말과 행위에 능하였다(사도행전). 애굽의 왕자로서의 교육은 통치자, 지도자로서의 교육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멸절시키려는 대적의 심장부에서 미래의 구원자를 교육시키시되 최고의, 당시에 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시키신다. 말도 능하였다는 말은 세상 모든 학식에 능함을 말한다. 당시 최강국 애굽의 교육, 당시 가장 이상적으로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는 교육을 받았다. 당시 세상 교육은 강한 자가 칼과 무력으로 정복하는 통치자, 지도자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 세상 교육을 받은 모세가 동족을 구하기 위해 처음 행하였던 것은 칼과 무력으로 동족을 구원하려 함이었다. 이렇게 세상적인 방법으로 했을 때 실패한다. 하나님 나라의 지도, 통치 방법은 세상 나라 통치 방법과는 다르다. 이것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련되게 조작하는 것과는 다르다.
출 1:1-7은 창세기와 연결시켜 볼 때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 보내신 목적이 성취되었고 이제는 그 다음 단계의 역사를 기대하게 한다.
출애굽의 근본 의미는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을 다시 이끌어내심이다. 큰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이 하나하나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보내시고, 큰 민족을 이루시고, 다시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귀환하는 것, 즉 하나님의 본래 계획이 긍정적으로 하나하나 이루어져간다. 하나님의 그 큰 계획이 단순하게 이뤄지지 않고 복합된 상황에서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박해를 당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 내려간 것은 외적인 생존 수단이 가장 풍성한 곳에 내려가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한다는 것만이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애굽 왕이 이스라엘을 박해한 것을 보면 애굽은 세상 나라로 볼 수 있다. 즉 일반화시켜 그 의미를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는 곳은 세상 가운데서이다. 세상에서 유리된 별천지가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서 비록 겨자씨 같이 미미하게 시작했어도 큰 나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미하게 시작한 하나님 나라가 강성한 나라로 되자 세상 나라는 적대 세력으로 하나님 나라가 커지는 것을 방해하고 하나님 나라를 자기 손에서 자기 수준에서 조작할수 있고 조종할 수 있는 상태로 이끌려고 한다. 아브라함 같은 미미한 존재로 하나님 나라가 존재할 때도 의와 공의의 증거로써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구실을 했다. 예로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구실을 했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제사장의 나라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서 강력한 나라(물리적인 강력함이 아니다)이기를 원하셨다. 이 강력한 하나님 나라에 애굽이 위협을 느끼고 필연적으로 갈등이 일어난 것이다.
산아제한과 산파로 사내아이를 죽이도록 명령하나 더욱 창성, 번식하자 노골적으로 사내아이를 애굽 나일강에 버리도록 한다. 한 가문이 겪는 애환이나 강대국에게 착취당하는 약속민족의 비애를 보고 하나님께서 억압받는 백성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보면서 해방신학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창세기부터 출애굽기를 연결시켜 볼 때 이런 관점은 틀리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 세상 나라 세력 간의 갈등, 투쟁을 말하는 것이다. 이 갈등, 투쟁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를 모세를 통해 암시해준다. 이스라엘에게 고역시키고 산파를 조정하려 했으나 바로의 계획은 다 실패하고 이스라엘이 더욱 창성, 번식하게 된다. 이어 바로의 가장 극단적인 계획(강물에 던지는 것) 속에서 모세가 건져냄을 입고, 바로의 공주의 손에 바로의 궁중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모세가 자란다. 바로 궁중의 교육은 왕자의 교육으로서 통치자의 교육이다. 이 교육은 ①미래 통치자로서의 교육이기에 모세는 세상적인 통치자로서의 교육을 받는다. ②당시 최강국의 교육, 당시 사람들이 이상으로 삼는 통치자의 교육(칼과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다스리고 통치하는 세상 나라의 교육)과 그 속성을 배우는 교육이었다(정복하고 통치함).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말씀하심, 요 18:36절 “내 나라가 세상의 나라일것 같으면...”
출 2:11절 앞으로 모세가 어떻게 사역을 할 것인가를 보여준다. 사소한 일처럼 보이나 뜻은 분명하다. 2:13-14절 모세가 민족으로부터 배척을 받는다. 이는 배은망덕한 태도(백성을 염려한 모세의 애정과 염려를 배척하는 것 같은 태도) 같으나, 출애굽기의 사건을 따라 조심스럽게 이 사건을 조명해 보면 이 배척은 좀더 깊은 뜻이 있다. 이 반문에 깊은 암시가 있다(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로 삼았느냐). 누가 자기를 통치자, 지도자로 세워주지도 않았는데 바로의 궁정에서 받은 통치자의 이상에 따른 통치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려 했다. 통치자의 태도와 통치 방식에 큰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다.
① 하나님이 세우지도 않았는데 자신을 지도자로 자천한 것. 세상은 자기의 힘으로 지도자직을 탈취하려 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다. 하나님으로부터 세우심을 받아야 한다. 자신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지않는다. 세상 나라의 leadership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aggressive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우신다. 몇 십년 동안 세상 교육을 받은 채, 그 생각이 바뀌지 않은 채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잘못이다.
② 통치 방식에 문제가 있다. 내 힘으로 칼과 무력으로 쳐 죽인다. 네가...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이 반문은 무력으로 살륙하는 방식이 하나님 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암시한다. 이 통치 방식이 자기 백성에게 가해질 때 자기 백성을 칼로 죽이는 방식이 된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지도자의 성품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기를 원하시는지를 볼 수 있다.
2:11절 이제 하나님의 교육이 나온다. 세상의 통치자 이상의 교육을 받고 애굽의 모든 학식과 교육을 받았으나 이 세상 통치 방식이 실패로 돌아가자 하나님의 교육이 시작된다. 미디안 광야로 들어간다. 십보라와 결혼하고, 양치는 목동 생활을 한다. 40년간 목동 생활이 하나님의 구체적 교육 내용과 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없으나 추측할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세가 부르심 받았을 때, 모세는 거듭거듭 사양한다. 내가 누구관대, 나는 말할 줄 모른다고 사양, 그러나 행 7:22에 보면 말과 행동에 능한 자로 모세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태도에서 40년간의 교육 통해 모세가 얼마나 낮아졌는가, 겸손해졌는가를 볼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오묘한 성경의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을 뜻한다. 자신은 철저히 무능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철저히 맡기는 확신, 세상에서 받은 모든 것, 모든 교육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무용지물임을 깊이 깨닫고 그런 세상의 것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변화되어 하나님께 쓰여져야 할 것을 깊이 깨닫는 것이 겸손이다. 하나님의 교육 = 양들을 치는 목동생활(양들은 우둔하고 일일이 사람의 손이 필요한 동물), 아마도 목회가 이와같은 성격의 일임을 말해주는 것 같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모세의 태도를 보라 - 차라리 내가 죽겠다고 탄식한다.
2:23-25절 애굽 왕이 죽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셨다. 앞으로 하실 하나님의 행위는 물론 이스라엘의 부르짖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의 역사에 대한 진전이요, 계속이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 개입하여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 개입의 필요성 암시, 모세를 죽이려는 왕이 죽었으므로 모세의 귀환을 암시하는 표현이 나온다. 하나님의 역사는 족장들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3장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는 내용이다. 모세가 양을 치면서 호렙산에 와서 이상한 현상을 본다. 가시떨기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므로 접근하지 말라하시고, 여기서 하나님을 뵙게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사명을 주신다.
8절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당함을 보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손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려오셨다. וליצהל דראו(와에레드 레하칠로) 하나님께서 내려오셨다는 표현은 바벨탑 사건, 소돔과 고모라 사건 때도 나온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심 =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 개입(incarnation),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무엇인가를 이루실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역사 개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약속의 땅으로 귀환하는 것, 아브라함, 야곱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이다. 특히 후자의 약속(야곱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이요 그 다음 단계의 일을 행할 때가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3:10절 내가 너를 보낸다. 모세가 자기 백성을 무력으로 구원해 보려 할 때와 매우 다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보내신다. 즉 모세가 사명을 받음이다. 8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도록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는다. 이스라엘을 해방(구원) → 땅에로 인도(자유), ...을 향한 자유 - 적극적 자유(...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 가장 기본적인 부분과 기초적인 부분에서 점검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문제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바로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케하여 약속의 땅으로 돌이키는 사명,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서 이 백성을 구원하겠는가?” 이 때는 모세가 좀더 현실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궁중 당시는 돈키호테처럼 순진하게 민족을 구하려 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미화시키는 것이다. 모세가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강대국 바로에게 모세 일 개인이 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모세는 자기가 철저히 무능함을 깨달았다. 자기 힘으로 그 강력한 세상 세력에서 이스라엘을 구할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에 대한 고백은 정당하고 꼭 필요한 것이다. 신자는 절대 현실적이어야 한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Be Ambitions’는 옳지 않다.
철저히 무능을 고백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 즉 이것은 네가 하는 일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하는 일이다. 너는 하나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심.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므로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게 된다. 하나님의 일은 자기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하나님이 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이루시는 나라다. 자기가 할 수 있다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 영광을 위해 자기 힘으로 하므로 하나님 나라를 다 망가뜨리는 자이다.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성경에 자기 힘으로 자기 영광을 위해 일하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망가뜨린 사람이 많았다. 자기부정으로 끝나면 낙심과 좌절밖에 없으므로 자기 부정하는 사람에게 또한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있어야 한다. 자기를 부정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데 이 새로운 가능성은 하나님께 있다(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는 이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짐). 하나님의 사람은 이런 기본적인 원칙이 확실해야 한다.
3:12절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셔서 그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는 증표, 표적이 있는데 이 때의 표적은 미래의 표적이다. 이 표적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현재에 나타내 보이는 것인데 모세에게 주신 표적은 미래적 표적이다(미래적 표적도 있다) - ‘이 산에서 나를 섬기리니’
3:13절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םשׁ(샴) = 그가 누구시요 어떤 분이요? Who is He? 이름은 그 사람의 본질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14절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will be what I will be = היהא רשׁא היהא;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바로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 바로 나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일면을 나타내주며 또한 일면은 숨긴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말함, 누가 나를 규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즉 나는 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따라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분, 또 달리 표현하면 누구도 하나님의 본질을 꿰뚫어 알 수 있는 자가 없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내 보여주기 전에는 그분이 자신의 계획을 알리시기 전에는 아무도 알 사람이 없다. 그가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자요,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타내 주는가에 따른 계시에 따라,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는 가에 따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분이다. 즉 앞으로 행해질 이스라엘에 대한 계시에 따라 하나님이 알려질 것을 나타내 준다.
3:15절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리라. 조상에게 나타내 보여 주셨던 하나님과 연속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행해질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데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되는 칭호 오고오는 세대 동안 바로 이러한 하나님으로(출애굽 시키신 하나님) 불리울 것이요 알려질 것이다.
* 출애굽의 의미는 새로운 시대를 출현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요, 따라서 아빕월로 새 달을 삼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나타낸다. 즉 영원한 이름, 대대로 기억할 표호의 의미는 하나님은 앞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출애굽을 행하신 하나님으로 기억될 것을 말한다.
3:16-22절은 하나님의 행하실 역사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4장에 모세가 그래도 사양한다. 나는 무능한 자이므로 못맡겠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능력을 행할 수 있는 기적을 보이신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능력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과 관련 내가 너를 통해 큰 역사를 이루겠고 그것으로 내가 어떤 자인 것을 보이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하나님을 보이시며 그들로 순종케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적은 항상 믿음을 주기 위한 것이다(신약에서도 마찬가지).
4:10절에 계속해서 말 못하는 자라 사양하자, 아론을 대변인으로 삼아서 가라하심. 모세가 주저할 때마다 그것에 추가되어 모세의 사명이 분명해지고 하나님의 뜻이 명확해진다. 모세의 궁중교육과 광야 목동생활 전체로 인해 모세는 하나님이 쓰실만한 사람이 된다(자기부정 → 하나님의 능력 표현).
4:13절 하나님 그만 하십시요. 보낼 딴 사람을 찾아 보십시요. 하나님이 노하시고 가라하신다. 이일을 통해 복합적인 뜻이 있는데(가라, 못 가겠읍니다. 할 때 이런 일련의 행동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① 하나님으로부터 쓰임받는 자로 하여금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게 함이요, 무능한자와 함께 하나님이 역사하시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 무능한 것을 알리시고 무능한 자로 하나님이 함께하셔 하나님이 이루심을 보이신다는 것이다.
② 부수적으로 하나님이 기묘하게 이루시는 이 일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역사하실 것이며, 그가 사용하실 도구를 세우실 계기가 된다. 즉 모세와 아론이 부르심과 세우심을 입고, 모세를 통해 이루어질 출애굽의 사건은 결정적인 사건이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되게 하신 사건은 출애굽 사건을 시편 등의 성경에서 말한다. 출애굽이 결정적인 사건임을 잘 드러내주는 성경구절은 출 3:14 이스라엘의 출애굽시키실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 할까요? 이는 모세 자신의 질문이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내가 누군인가는 앞으로 사건을 통해 가르쳐 줄 것이다. 이 명칭은 대대로 영원한 기념 칭호가 될 것이다. 오고오는 세대를 통해 이스라엘 가운데 출애굽을 행하신 하나님으로 기억될 것이다.
4:22-23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로 앞에 서서 어떤 말을 하라고 하셨나? 출애굽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혀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요 이스라엘을 내보내어 나를 섬기게 하라” = 이것이 출애굽의 의미의 핵심이다. 여기서 출애굽의 최종적 목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겨서 구원얻는 것은 아니다. 출애굽이 예표적 사건이라 할 때 구원의 목표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해드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 이것이 진정한 삶이요, 구원이요, 축복이요, 생명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나?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 하나님을 섬기는 것 즉,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요, 삶이요, 축복이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이룬다0는 것은 내가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사는 것,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드려 그 댓가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는 구원의 가장 큰 방해거리요, 사단의 가장 교묘한 속임수이다.
구원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것, 구원하신 목적 자체가 율법을 지키는 것, 구원하신 것에 감사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도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요, 하나님 은혜의 핵심은 성령이시다. 하나님 섬기는 그 자체가 나의 생명이요 축복이다. 이것이 축복으로 느껴지지 않고 하나님께 무엇인가 해 드리는 것으로 느껴진다면 자신의 신앙을 check해봐야 한다.
4:24-26절 수수께끼 같은 불가해한 사건이 나온다. 모세를 여호와의 사자가 죽이려 하신다. 십보라가 그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다. ‘당신은 나의 피의 남편이요...’, 이는 모세 아들의 할례에 관한 사건으로 이제까지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행해야 했는데 하지 않았다. 여기서 피의 남편이라는 이 뜻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드로는 모세의 장인으로 미디안의 제사장이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리가 없고 이방인으로 자기의 신을 섬겼을 것이다. 그 지방 제사장과 함께 살므로 모세가 자신의 신앙(분)을 드러내놓지 않은지도 모르고 그래서 자기 아내, 아들에게 자기의 신앙이 받아들여지도록 되지 않은 것 같다. 즉 언약 백성으로서 자신을 내보이지 못함을 추측할수 있다. 피의 남편이라 함은 육체의 남편만이 아니고 언약과 연결된 신앙의 동질성을 십보라가 인식하게 된 사건이 아닌가 보여진다. 정확한 해석은 알 수 없고 추측해 볼 수 있다.
5장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고하고 표적을 행하자, 이스라엘 백성이 믿는다.
열 재앙의 의미(출 7:8-12:36)
1. 나일강의 물이 피가 되게 함(7:14-25) - 나일강의 신 Nilus 징치
2. 개구리로 온 땅을 덮게 함(8:1-15) - 다산신인 개구리 형상의 Hekt 징치
3. 애굽 온 땅의 티끌이 이(빈대, 모기)가 되게 함(8:16-19) - 땅의 신 Seb 징치
4. 파리떼 일으켜 사람들과 짐승들 쏘게 함(8:20-24) - 투구풍뎅이 신 Khephera 징치
5. 모든 생축이 악질이 생겨 죽게 함(9:1-8) - 수소와 암소의 신 Apis와 Hathor 징치
6. 재를 뿌려 독종(붉게 타들어가는 피부병;욥)이 생기게 함(9:9-12) - 악마의 눈을 가진 신 Typhon 징치
7. 하늘에서 우박이 내리게 함(9:18-21) - 대기의 신 Shu 징치
8. 메뚜기로 푸른 곡식을 먹게 함(10:4-19) - 곡식을 지켜주는 신 Serapis 징치
9. 캄캄한 흑암이 3일간 온 애굽을 덮게 함(10:21-29) - 태양신 Ra 징치
10. 장자를 죽이는 재앙(12:29-33) - 생명의 신 Ptah 징치
7:10절 구체적으로 바로 앞에 가서 행하라고 하시는데, 바로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미리 알려주신다(바로가 강퍅해질 것). 11절은 지팡이가 뱀이된다. 애굽의 술객도 지팡이로 뱀이 되게한다. םיפשׁכמ(메카쉐핌; 박사), ימטרה(하르테메; 박수), םהיטהל(라하테헴; 술객) 단순히 마술을 행하여 눈속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악령의 도움을 받아 악령의 힘으로 행하는 것이다. 계몽주의의 영향이 여러가지 해를 끼치는데 미신이라 하여 쓸데없는 공포로부터 해방시켰다고 하는데 오히려 눈을 감고 못보게 하는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심리적인 것, 착각이라고도 하나 그런 것도 있을 수도 있지만 실제 악령이 행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마술을 하는 사제, 제관 : 박수
사람이 잘 모르는 비방을 행하는 자 : 술객이라 한다.
출애굽을 세상 나라 안에서 자라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세상 나라가 박해하고 없애버리려 하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갈등의 역사로 본다. 이는 제일 처음 사건이다. 모세를 정점으로 하는 세력과 바로를 정점으로 하는 세력의 싸움과 갈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싸움이 정치적 싸움, 강대국에서 약소국을 해방시키는 육적 싸움이 아닌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바로가 세상 나라의 대표라 할 수 있는데, 바로가 술객들 제사장들 Priest를 내보내는 것을 볼 때 단지 이는 정치적인 싸움이 아니다. 종교적 충돌이요 배후에는 악령들이 개입되어 있다. 모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혼자 대결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두 충돌은 세상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의 충돌이 아니요, 이 충돌은 악령과 사단과 하나님과의 충돌이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의 왕권, 하나님 나라의 고체(imbody)라 할 수 있는 자는 모세, 이스라엘의 장로들이다. 세상 나라 사단의 도구는 바로와 술객들이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악령들간의 싸움이다. 하나님 통치 받는 나라와 그 백성과 세상의 사단의 통치받는 세상 나라와 그 백성과의 싸움이다. 12절 모세의 지팡이가 변한 뱀이 바로 술객의 뱀을 잡아먹는다 = 하나님께서 앞으로의 투쟁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여준다.
14절 나일강을 당시 사람이 먹음 - 식수였다. 그리고 애굽의 풍부함의 근원이 나일강이었다.
* 나일강은 생명이요 풍부함의 상징. 그러므로 이 생명의 근원인 나일강을 신격화시킨 나일강을 피가 되게 한 것은 이것이 애굽의 생명줄이 아님을 보여주고 하나님께서 나일강을 피가 되게 하신 것으로 치신 것은 애굽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요 심판이다.
8장 1절 개구리 재앙, 16절 티끌이 이가 되게함, 19절 애굽 술사들이 이를 행하지 못함 - 이를 보고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손가락이라함, 하나님의 손가락 =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셨음을 말한다. 애굽의 술사들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이는 신의 직접적인 개입이요 자신들이 당할 수 없음을 말하고, 이들은 악령을 부리는 자들이요 이들처럼 악령을 통해 행하는 술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행하시는 것임을 알게된다.
9장, 10장은 파리재앙, 역병이 가축을 치고, 피부병(이때 애굽 술사들이 악령의 하수인들이나 하나님 앞에서 견디지 못함), 우박으로 곡식을 치신다(생존수단 또는 일의 수단을 치심) =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아니라 애굽도 통치하시는 분, 모든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보여주는데, 이 모든 재앙들이 유월절의 재앙으로 연결되어진다. 유월절에 가서 굴복되어진다.
메뚜기 재앙을 당하고 바로의 신복이 굴복하고, 우박 재앙시부터 바로 신복들 중에서 이탈자가 생겨나는데, 이것은 이기적 관점보다는 물론 그들의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나 이들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시 이스라엘만이 아니고 많은 잡국이 함께 출애굽했는데 그중에 애굽인도 포함되었을 수 있다. 온 우주 만물의 하나님을 체험하고 믿어 함께 나왔음을 보여준다.
흑암 : 생명부재, 죽음, 심판의 상태임을 표현, 죽음이 사흘 동안 임함은 암시적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빛이(생명력)이 있었다.
마지막 재앙이 유월절이다. 애굽 술사로부터 시작한 모든 재앙들의 절정이 유월절이다. 즉 악령과의 싸움에서 절정을 이룬다.
11장 이제까지 지팡이를 던져 일으킨 재앙 사건들의 절정이 유월절 사건이다. 이 사건들의 의미는
⑴ 하나님과 그 백성, 사단과 그 백성의, 즉 세상 나라와의 전쟁이다. 이제까지는 내보내지 않았으나 이 유월절 사건 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빨리 나가라고 내쫓는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절정적인 승리(사단과 세상 나라에 대한 승리).
장자 : 기력의 시작, 장자를 치는 것, 애굽 기력의 시작을 치는 것. 원칙적으로 애굽을 깨부수는 것, 결정적인 패배를 주는 것이다.
마귀가 하나님과 동등한 세력이 아니다. 마귀도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다. 즉 유월절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한 세력에 대한 심판의 성격을 갖는다. 앞의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반역한 세력에 대한 심판의 성격을 갖는다. 앞의 모든 사건은 명령을 거부한 것에 대한 징벌의 사건이요, 그 심판에서 이스라엘은 항상 구별되어 심판을 면한다.
유월절도 이 사건들의 절정이므로 사단과 그 추종자들인 세상 나라에 대한 심판이요 이스라엘은 그 심판을 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심판을 무엇으로 면하는 가가 유월절 사건에서 보여짐, 즉 어린양의 피를 근거로 심판을 면한다.
유월절 사건과 비슷한 사건 : 이삭을 제물로 바침. 앞으로 성전이 세위질 곳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어린양이 피 흘려야 할 장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할 장소, 이 어린양의 그 제사의 성격이 유월절 사건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진다.
*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① 그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지 않으시고 넘어가시는 것과
② 그 어린양의 살을 먹는데 모든 이스라엘이 참여하는 것, 각 개인이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 가족 단위로 또 가족 수가 적은 자는 다른 가족과 합하여 먹음, 즉 공동체 단위로 참여한다.
① 피 : 생명을 의미, 나 대신 생명을 희생한 그것에 의해서 생명을 얻음, 새 생명을 얻는 것이요,
② 제육에 참여함 : 그 제사에 내가 하나된다, 그 양과 내가 하나된다.
아담이 하와에게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라”는 것은 그가 나와 하나이다라는 의미.
로마서 6장에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으심에 하나됨, 즉 제육에 참여한다, 살을 먹는다 - 성만찬과 연결 -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에 참여하는 것이 공동체 단위로 참여, 나 혼자만이 관계,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만이 아니고, 수평적인 관계 교제가 포함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 성만찬이 강조하는 것, ?너희로 그리스도에게 하나되게 하는 것이요 이는 또 너희들도 하나되게 함? 교회의 분열 계급화를 반대 = 제육에 참여함은 교회의 성만찬과 동일한 본질의 의미, 그리스도는 성만찬을 유월절과 관계시키셨다.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며 구약자체 내에서도 이를 읽을 수 있다.
유월절의 독특함 : 유월절 어린양을 대신함으로 내가 생명을 얻음, 이 새 생명의 핵심에 대해 바울은 죄사함이라한다. 죄사함을 위해 흘리는 어린양의 피라함 = 어린양과 하나가 됨과 동시에 그 어린양에 참여한 모든 지체와 또한 내가 하나됨을 포함한다.
이렇게하여 출애굽이 이루어지는데, 숙곳에서 발행하여 약속의 땅으로 간다. 이때 불레셋 땅으로 가지않음은,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보고 후회할까 보아서이다. 요즈음 옛 지도가 발견되어지는데 옛 애굽의 수비대들의 위치를 그린 지도가 발견되었다.
어떻게 홍해를 건너게 되었는가? 바로는 다시 마음이 강퍅해져서(하나님께서 강퍅케하심), 바로가 다시 전차를 내보내어 이스라엘을 추적한다.
* 추적하던 이 병거와 전차들이 홍해 속에 결국 몰사하고 만다. 이 의미는 무엇인가? 한 나라의 세력은 군사력으로 단적으로 표현된다. 병거, 전차는 그 당시 최신 무기, 강력한 무기요 그 병거는 600승이었다. 이도 선정된 것이요, 최신예의 병거 중에서도 또 뽑아 선정된 것이 600승, 그런데 이것이 몰살된다.
장자를 침 = 애굽의 기력을 침, 세력의 기를 꺽음.
병거를 몰살 = 다시 애굽이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결정적 사건으로 쐐기를 박는 것 같은 사건, 이것은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측면으로 보았는데 그 측면에서 사단 세력을 깨뜨린 하나님의 결정적인 승리의 사건.
*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고전 10:1-4절에서는 홍해를 건너는 것을 구름 아래에서 세례를 받았다라고한다.
홍해 : 옛 땅에서 새로운 땅,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는 최대의 장애, 그냥 건널 수 없는 죽음을 상징(애굽 병거의 몰살)한다.
구름 아래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이다. 하나님의 임재 아래에서 애굽에서 노예상태로 있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인 죽음의 장소를 하나님의 임재 아래에서 마른 땅처럼 건넜다.
고전 10:2절 “모세 안으로 모세 속으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
모세를 그리스도와 비교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분,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종.
그리스도는 신약에서 구원사역을 이룸, 모세는 구약에서 구원사역을 이룸.
신약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사역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나아갈 때 구원얻는 것처럼,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구원사역을 이루실 것을 믿고 모세를 의지하여 나아갈 때 구원을 받게하신다. 이렇게 볼 때 홍해사건과 유월절 사건은 같은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두 번 반복하신 것이다. 다시 돌이켜 홍해사건을 일으켜 하나님께서 애굽을 쳐부수고 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주시고 두려움을 씻어주신 것이다.
이 사건들을 통해 최종적으로 보이신 목적은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이시며, 애굽의 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유일한 신이심을 보이시는 것,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사건이다.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신 사건도 되나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이신 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인이 됨, 즉 세상의 노예됨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인이 된 것이다.
*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을 못살게 하고 억압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복되게 하고 잘살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축복이요 생명이다.
유월절 사건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사단(세상)의 세력을 멸하시고 그것에 사로잡혀 노예된 그의 백성을 구원하셔서 자유인이 되게 하셨다. 이 원리는 신약에서 그대로 적용되었다.
홍해 - 애굽과 약속의 땅의 경계, 두 영역을 나누는 것.
이스라엘은 이 죽음의 영역을 넘음으로 노예의 땅에서 완전히 결별 즉 노예생활과 세상문화, 세상의 타락한 생활 속에서 완전히 결별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새 생활이 시작된다.
세례 -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탄생을 의미, 노예생활이 끝나고 새 생활이 시작됨, 이 새 생활에 대해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내어보내라” 세상 세력에게 명령했는데 그 생활의 목적은 “나를 섬기리라”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새 생활을 하는 것. 이것이 적극적 의미에서 해방과 하나님이 주신 자유이다. 즉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성경 속의 작은 조직신학이라 할 수 있는 로마서의 구조가 이렇게 되어있다)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해방되고 새 생활을 시작한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생활은 광야생활이었다.
광야의 의미 : 먹을 물과 양식이 없음. 즉 생존수단이 없음 = 죽음의 땅. 사람이 자기 힘, 능력으로 살기 힘든 땅. 바로 그런 땅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쓴 물(썩은 물, 먹으면 죽는 물)이 식수로 바꾸어 지며, 바위 속에서 물이 터져나오고, 아무 곡식이 없는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으로 살아간다. 이것은 신약 성도에게도 그대로 적용 - 예수를 믿으면, 중생하면 옛 존재 노예로 지내던 생활에서 자유얻어 새 사람이 된다. 이 새 사람이 살게 내버려둔 곳이 낙원이 아니라 이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순종하며 살라하신다. 이 새로운 삶의 본질적 성격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요, 그의 전 삶이 하나님을 순종하며 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 속에서 이렇게 사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은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또 역설적으로 살 수 있다. 그것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살 수 있다. 하나님이 죽음의 땅에서 솟아나게 하시는 생수로, 하늘로부터 내려주시는 음식으로 살 수 있다. 고전 10장에서 이 반석이 생수의 근원이라 했고, “나는 진정한 만나요”라고 요한복음에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이 내려주심인데, 예수의 생명을 직접 누리게 하시는 분 성령님, 성령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노력하면 할수록 안되는 것을 깨닫을 수 밖에 없게된다. 그때부터 엎드리기 시작한다. 그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다. 이 내용이 롬 7-8장에 나온다.
13장 광야 생활 중 이스라엘 백성은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겠다 하나 이 고난의 여정은 그렇게 절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절망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13:20절 광야가 시작되는 에담에 이르렀을 때 구름기둥, 불기둥이 나타남 =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 구름기둥, 불기둥이 이스라엘을 인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던 여행이었다.
13:22절 두 기둥이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고 항상 그들 앞서 행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지 않고 항상 그들 앞서 인도하심. 마 28:20절 말씀에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성령을 보내시겠다(요한복음)하심. 구약과 신약은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나 본질에서는 같다. 구약은 가시적으로 나타남 - 구약의 특성. 그러나 그 본질은 구름기둥, 불기둥 그 자체가 무엇이냐가 아니고 생명의 공급자가 하나님이요 성령이심을 나타내 주시는 것으로 같다.
* 이 여행은 평생동안 계속되는 것이 아니고 안식의 땅을 바라고 소망하는 목적지가 있는 여행, 언제나 고난과 더불어 무한정하게 싸우는 싸움이 아니고 목적지가 있는 소망이 있는 여행이며, 하나님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고 함께하셨던 여행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명을 누렸던 여행, 육적생명 뿐아니라 영적실체를 말한다. 영적실체는 신약에서 확실하고 분명히 나타난다.

광야여행의 목적
출애굽 후 즉시 가나안 땅으로 들이시지 않고 왜 혹독한 삶의 환경 속에 두셔서 고통하게 하시는가? 그것은 Test(δοκιμαζω;도키마조), 신약에서 이 단어를 보면 광야생활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시험하시는데 사단이 하는 유혹과는 그 방법과 목적이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련하시기 위해(연단을 위해서 = 더 굳게 하시기 위해)서 이다. 롬 5:1절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 = 전혀 새로운 존재 즉 하나님과 생명의 교통을 누리는 자가 된다. 곧이어 하시는 말씀이 5:2절, 이런 가운데 기뻐하지만 또한 환난 가운데 기뻐한다고 함. 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 = 이것이 바로 시험이다. 롬 12:1-2절은 시험을 통해 단련된 자의 모습을 소개해 준다.
출 15:25 “율례와 법도를 베푸시고 거기서 시험하셨더라” 시험과 율례, 계명은 깊은 관계가 있다. 광야기간을 주셔서 단련하시는 목적은 인간의 힘으로는, 자연인의 능력으로서는 생존이 불가능한 광야를 걷게하심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계속 함께 하시고 양식과 물을 주심으로 생명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함이다. 인간은 자기의 노력으로 뭔가 얻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내 힘으로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는 절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단련하시는 시험기간으로서의 광야생활에 율법이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항상 순종하는 것을 통해 단련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순종은 믿음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신다. 내 생명의 근원이시요, 주인이심을 믿을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순종한다.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 진정한 순종이 있다.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순종해서 뭔가 얻으내려는 상업주의가 마음 속에 감추어 있는 것이다. 순종할 때 살리시고 불순종할 때 죽이신다 - 광야생활 여기서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뭔가를 얻어내는, 순종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뭔가를 사려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순종이란 믿음의 자발적인 표현이다. 그런 믿음이 있으면 자연히 순종하게 된다. 이런 믿음과 순종 역시 내가 믿고자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되어진다.
이러한 믿음과 순종의 삶이 바로 생명의 삶이다. 믿음과 순종의 삶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복된 다스림을 받아들임이 순종이요 생명이다. 이 순종을 좀 더 정확히 나타내는 것이 불순종이란 말인데, 자기 의지하여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불신앙이요 불순종이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만나 주시고 생수 주시고 고난의 광야를 걷게 하신 것은 ‘...을 알게하려 하심, 인정하게 하심’이라고 표현한다. 즉 내가 너희의 구원자요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기 위해, 믿음의 순종과 단련을 위해서이다. 신자의 세상에서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통스런 세상 속에서의 삶의 의미 = 고난은 순종을 굳건케하는 즉 축복의 시간, 하나님이 구원과 더불어 함께 주시는 추가적인 축복이다. 인간의 기본 상식은 주고, 받는 것이다. 공짜 좋아하는 자를 비윤리적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 잠재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은 상업주의 그러나 하나님께 이런 상업주의 의식으로 나아갈 때 그것은 죄악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자의 자세를 함께 묶어 한마디로 말하면 믿음이다. 믿음은 깊고 넓은 내용을 가졌다.
시내산에 이르름 - 광야여행시 처음 들른 곳,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는 것의 배경이 18장 내용이다. 18장에서 모세 장인 이드로가 온다.
18:1-12절 이드로가 모세 즉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모세에게 온다. 이드로가 방문한 의미가 13절 이하에 나타남 - 모세에게 충고함. 이스라엘의 행정조직이 이루어짐 - 다스릴 자를 백성 중에서 뽑음, 이런 행정조직이 이루어졌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다. *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했다 - 율례와 법도가 필요함.
18:20절 “율례와 법도를 가르치라” 하나님의 율례 - 사람의 율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례를 가져야 했다 - 율례의 필요성. 이런 배경하에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게 된다. 또한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은 하나의 징표가 되었는데(출 3:12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다는 사실의 징표는 바로 시내산에서 주님을 섬길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심), 이 징표는 - “너희가 애굽에서 나와 이 산에서 너희가 나를 섬기리라”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도 된다.
광야여행 속에서 이 율법을 주신 것도 또한 의미가 있다. 광야여행은 시험기간, 즉 믿음과 순종의 단련기간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믿음과 순종의 단련의 수단으로 주어짐으로 광야여행 초두에 이 율법 주신 사건이 일어남은 광야여행의 본질과 의미에 매우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시내산 율법 주심에 대하여도 포괄적인 시각에서 말씀하신다.
19:4-6 “너희는 나의 구원을 다 보았다 그러므로 너희가 다 내 말을 청종하면 너희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 구원을 보이신 뜻과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신다.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를 밝히는 것, 하나님을 순종하며 산다는 것은 하나님 백성으로 산다는 것,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으로 살 때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온 땅이 내게 속하였다(하나님이 온 세계를 소유하셨고 다스린다는 의미) 할지라도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은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소유물 - 이스라엘이 선민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교회에도 적용된다. 이스라엘의 신민됨이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 속에 산다. 그러나 이 세상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이스라엘과 일반 민족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며,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는 것과 일반 민족을 다스리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 세상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에게 특별한 의미이며 의미가 있다.
① 제사장 왕국이요, ② 거룩한 나라. 이스라엘 자체를 제사장 왕국이라 함. 제사장은 일반백성과 구별되어서 하나님과 특별히 가까이 하나님을 모시고 섬긴다. 이스라엘의 독특한 존재 의미는 제사장 나라라 한다. 이스라엘은 일반백성과 구별되어 하나님을 가까이 모셔 섬기는 특권을 소유한 자이다. 또한 세상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중보자적 역할을 감당한다.
제사장 =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축복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자 - 백성에게 유익을 주는 자이다.
예로 아브라함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간구를 통해서 보았다.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이스라엘의 즉 제사장 왕국으로서의 이스라엘의 본질은 거룩한 나라이다. 즉 성결함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셔 섬기는 자의 가장 중요 특징이 성결. 성결이 없으면 교회의 존재 의미 상실한 것. 이 성결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축복을 세상에 전달하는 축복을 감당한다. 성결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함으로 이루어지는데, 성결된 민족으로서 성결을 이루는 수단으로 율법이 주어짐,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복된 통치에 이스라엘이 순종함으로 거룩한 백성으로서 제사장 왕국이라 한다(율법, 거룩, 제사장).
시내산에서 불러 왜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소유물로 삼았나 그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과 뜻을 가르쳐주신다. 그리고 부르심의 목적과 뜻을 성취하는 수단으로서 율법이 주어진다, 율법 :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규범.
순종을 요구하심, 여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순종을 맹세함. 24:1-3절 이러한 관계에 근거하여 하나님 말씀을 고하고 이스라엘은 순종을 맹세함 - 신약 교회의 세례와 같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다음 시내산으로 불러 하나님의 뜻을 알리심. 제사장 나라가 되어 하나님 백성으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겠다 하심. 즉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이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 거룩하게 사는 삶이 이방의 빛으로서 사명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거룩하게 사는 삶이 이방의 빛(중보사역)이 될 수있나? 거룩하게 산다 = 순종하여 산다는 이것이 이방에 대해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하게하는 것, 이것은 소극적인 것 같으나 사실은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효력이 된다. 한 마디로 증인사역, 증거사역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 자체가 세상 나라에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이스라엘이 세상 한복판에 있었다. 길목에 있었다. 강한 나라의 한 가운데, 거룩하게 사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이러하다고 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마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빛이라는 것은 증인사역과 깊은 연관을 나타낸다. ?이방의 빛?이라 표현하고 있다.
빛 - 너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거룩하고 의로운 삶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하는 증인사역, 빛의 사역 여기는 말의 증언과 삶의 증언이 동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말도 삶의 일부, 행동의 한 형식). 내적인 것을 표현하는 두 가지 방식 행동, 말이다.
19:9절 하나님이 강림하심, 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모습으로 나타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이시면서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분, 경계를 정하사 그 정하신 경계를 넘을때 진멸하실 것을 말씀하신다(가까이 주님을 모시는 이스라엘이라도). 이 거룩하심을 보이는 것은 의미가 깊다 - 20장으로 연결, 그 의미의 중요성은 율법을 주심이다.
출 20-23장은 십계명, 율법주심.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거룩하게 살게하신 목적을 선포하신 후 거룩하게 사는 방법으로 율법을 말씀하심, 즉 거룩하게 사는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을 반포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통치의 근본사상을 요약하고, 율법을 주신 자가 누구인지를 밝힌다.
20:1-2절 나는 노예의 집, 애굽 땅(세상 나라를 상징,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 귀신을 섬기는 땅,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사는 땅, 죄의 세력)에서 이끌어 낸 너희 하나님으로서 구원주로서 이것을 명한다 하심.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명하시는 권위의 근거를 밝히신다. 이 사실은 새 상태, 새 생명의 삶이 시작됨을 의미하는데,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명백히 밝히신다.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 새 생명을 주신 그 자격으로 이스라엘의 삶의 도리를 말씀하신다.
1-2절 Motive close, 왜 지켜야하나 지켜야 할 동기를 말씀하심, 세상 나라에서 벗어나서 죄의 노예가 죄가 시키는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거기서 해방되어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킴, 세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 도리 즉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곧 십계명이다. 율법은 삶의 원칙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통치하는 매개체, 구속 받은 자의 삶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다. 해방되고, 새롭게 된 삶, 나는 너희 하나님(ךיהלא;엘로헤카),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절대적(배타적) 권리 소유를 말하신다.
3절 1계명 -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당시 종교적 상황을 의식하시고 말씀하심으로, 당시 여러 신을 섬겼다. 오직 하나님만이 너희 하나님인 것을 천명함. Exclusive Claim = 배타적인 요구, 하나님 외에 어떠한 신도 너에게 있을 수 없다.
4절 2계명 - 어떠한 존재의 형상을 본따서 신이라고 여기지 말라.
근본적 의미 =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 형태로 형상화하지 말라. 즉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과 피조계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과 피조계 사이에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다” 건너뛸 수 없는 큰 간격을 말함.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기 전 이스라엘이라도 침범할 수 없는 경계를 정해 주사 접근하지 못하게 하심도 다 이것과 관계가 있다. 인간의 이해와 파악 능력 밖의 존재이다. 당시 가시적, 물리적 형상으로 형상화시키지 말라는 것은 인간의 고안물도 포함된다. 즉 돈, 인간의 과학, 이성 등도 다 그 속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피조계로부터 무한히 높으신 분이므로, 하나님께서 알리실 때만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인간이 지상의 어떤 것으로부터 유추해내어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로마서 1장에 의해 혹 어떤이는 인간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을 알 수 있을 것이라 했으나 옳지 않다(바르트와 부른너의 논쟁).
하나님의 형상을 어떤 피조물로도 형상화하지 말라 = 하나님을 피조화 하지 말라. 하나님을 피조물로 끌어 내리는 것, 즉 피조물을 신격화 시키는 것(TWO Way crosses).
스랍이라도 두 날개로 얼굴을 두 날개로 발을 가리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말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접근할 수 없는 그 거룩하심 앞에 이사야가 내가 죽었구나라고 고백할수 밖에 없는 것.
이 선언은 당시의 종교 상황에서 보면 놀라운 선언이다.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       . 여기서 죄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이다. 계명을 지킴 →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계명을 안지킴 →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 계명을 지키고 안지키는 것은 그 근본이 사랑에 있다. 계명을 지키지 않음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방종교와 다른 점은 그들은 의식과 행위로 신앙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순종의 삶으로 신앙하는 것이다.
십계명을 주심 - 애굽에서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시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되 섬김의 규범을 주심이다. 천지간에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상에 노예되었던 상태에서 구원해내셔서, 이곳까지 인도해내셔서 하나님을 섬기되 천지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요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난, 초월하신 분이므로 어떤 피조물의 형상으로도 비교될 수 없는 유일 독특한 하나님이시요, 어떤 가시적 형태로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려 해서는 안된다.
3절 다른 신들을 내게 있게 말라(1계명).
20:3절 의식영역에 있어서 하나님 섬김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섬겨야 하는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인간의 피조성을 철저히 가르쳐주신다.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하고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찾아오시겠다. 의식은 단순히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임재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의 통로이다. 오늘날 기도, 예배, 성만찬도 역시 상징적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축복하시고 임재하시는 것이다.
다른 신들의 존재의 속성을 알려줌, 피조물의 형상을 따라 피조물을 신격화시킨 인간의 고안물이라는 우상임을 보여준다(2계명에서 밝힘). 천지간에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임을 십계명 자체가 밝혀주고 있다. 세상에서 너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
질투 = 열심. 인간의 저속하고 악독한 질투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바알브엘에 빠져 음행을 함, 비느하스가 창으로 제사장을 죽임, 이때 비느하스가 하나님에 대하여 느꼈던 질투, 열심 이것을 תדק(콰다트)라 한다.
다른 우상에게 탈취당하시지 않으시고 진노하시는 것,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인간을 하나님이 처벌하심. 이는 하나님의 주권 침해이다. 하나님 되심과 그의 영광을 모독하는 것 처벌하실 것을 말씀하심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하나님의 주장에 근거한다. 이 하나님의 주장을 무시할 때 십자가는 희극이 되어버린다. 굳이 십자가의 고통스런 방법을 택하심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불순종하는 자를 3대까지 그 책임을 묻겠으나 나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는 그 축복, 은혜를 천대까지 베풀겠다 하심. 하나님의 사랑에 묻혀서 하나님의 義의 요구를 무시해 버릴 때 값싼 사랑이 된다. 이 하나님의 義의 요구가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값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 - 그의 통치에 순종하는것, 네 성품, 마음 너의 전부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라, 순종의 내적 동기는 사랑이다. 순종은 하나님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내적인 표현. 사랑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순종은 무의미하다. 사랑이 없는 순종은 무의미하다.
요한일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 그럼 그의 계명을 지키자 이것은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다. 사랑의 표현으로 순종을 하지 않을 때 상업주의 순종이 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이 전제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순종하게 된다. 순종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형식이지 하나님의 축복을 사는 공로가 아니다.
7절 3계명 :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in vain; 의미없이, 헛되이) 일컫지 말라” 뜻없이, 아무렇게나, 경솔하게, 준비없이 하지말라.
1, 2계명과 다 연관된다. 1, 2계명을 더 확대한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라는 것이 1, 2계명의 건전한 뜻이라면 여호와의 이름을 경홀히 여기지 말라는 3계명은 1, 2계명의 확장.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거룩하시고 엄위하신 분으로,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분으로, 그의 앞에 꿇어 엎드려 마음으로부터 언어, 행동에 이르기까지 두려움으로 섬겨야 한다. 하나님이나 그에 관한 일을 농담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죄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높이고 경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이 모자라 우리로부터 영광을 받으려 하시지 않으신다. “너는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라” 말과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이어야 한다.
인간 편에서는 알 수 없고 인간의 생각이나 무엇으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알려 주실 때만, 알려 주시는 만큼만, 즉 계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유일한 형상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사람이 생각해내거나 사람이 무엇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셨고,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셨고,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형식으로 자신을 계시해 주신 것이다. 친히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 한 분 뿐이다. 인간의 이성으로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은 한없이 높고, 거룩하신 분이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 방법이다 = 즉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 이름에 합당한 경배를 드림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는데 뜻없이 하는 함부로 하는 것은 죄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8절 4계명 “안식일을 기념하여 거룩히 지키라”
6일 동안 네가 모든 일을 행할 것 - 명령, 제 7일에는 여호와의 거룩한 날 - 명령. 사실 모든 날(전체)이 하나님께 속해있다. 그러나 6일은 일하라는 명령, 제 7일은 쉬라. 창세기 2:2절의 하나님의 안식은 모두 완성하신 후의 안식으로, 제 7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선언적 의미를 갖는다(piel형으로 쓰임, ךרב שׁדק;콰도쉬 바랔 . 제 7일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성하시고 그 완성된 상태를 복되고 거룩하다 하심(완성의 상태 = 복되고 거룩함).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복되고 거룩하다고 한다. 하나님이 쉬신 것은 모든 창조가 완성되어 그것이 복되고 거룩했다. 따라서 제 7일을 거룩하게 하라는 것은, 그날을 기억하고 축하하라(festival)는 것, 즉 하나님의 완성의 사역을 축하하고, ‘복되고 거룩함’을 높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안식은 출애굽과 관련되어 나타나 창조와 구속의 연결성을 갖는다.
“חונ(노하)” 라멕이 노아를 낳고 이름을 지을 때 ‘חונ’라 했다 = 안위하다, 안식하다 → 고역으로부터 안식하게 될 것. 창조 후 타락이 있음으로서, 완성된 안식이 상실됨. 그러므로 안식은 그 이후 다시 회복됨을 전제한다. 즉 안식은 구속을 전제하고 있다. 노아와 여호수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진정한 안식이 되어진다.
창 3:17-19절에 아담은 원래 땅을 정복하게 되어 있는데 그의 타락으로 인해 질서가 뒤바뀌어 땅이 아담을 반항하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것, 그래서 노아 이전까지의 땅은 상당히 척박했을 것이다. 그런데 노아를 통해 회복된다 → “안식”(구속). 인류의 구속은 본래 창조 목적의 회복을 전제한다. 최초의 창조 사역의 완성과 관계된 ‘안식’이 출애굽 이후의 구속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안식일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래 창조하신 후 안식하신 하나님의 안식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안식을 회복하심을 시작하셨음을 생각해야 한다.
주일 :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부활로서 안식의 개념이 주일로 바뀌고 최초 창조의 목적이 회복되고 완성되었음을 우리가 기억하고, 온전한 안식이 이루어질 것을 축하하는 날이다.
깊고 넓은 내용.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삶의 도리가 20-23장에 나타나고, 신명기, 민수기에서 이것이 확장되는데, 어쨌든 출 20-23장이 핵심이다. 여기에 법은 안식법이다. 즉 안식일이라는 틀 속에 이 법이 소개된다.
안식년 레 23장에 3절기가 나옴. 안식일, 안식월, 안식년. 7년 대속죄일, 대개가 성회로 모이는 절기이다. 7년 안식년, 7년*7년=희년. 안식일, 안식년 -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기본틀이 됨. 안식은 םולשׁ(샬롬; 평강 = 온전하다. 어그러진 것이 없다)의 의미와 연결되었다. 창조 후 안식하시면서 거룩하게 하시고 축복하셨다. 하나님이 창조를 완성하신 후 거룩하게 하시고(성별하시고) 축복. 당시 속된 것이 있었나? 그러므로 성별하셨다기 보다는 PI HILL의 의미는 선언을 종종 말하므로 완성하신 창조 향하여 복되다! 거룩하다! 선언하셨다는 의미. 성경의 주요 개념이 안식이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완성을 기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역도 새 창조라는 것에서 다 포함한다. 이는 하나님에게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의미가 있다. 이것은 인간을 위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기념하여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할 뿐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극한, 거룩한, 복된 상태인 안식을 받아 누리라는 것이다. 안식은 매우 깊은 의미 갖는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복되고 거룩한 실재, 구원의 전 실재를 안식이라 한다.
그 이후의 계명 모두가(5, 6계명) 안식과 관련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도리를 가르치고 있는 출애굽기 20-23장의 법을 안식법이라 한다. 안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 섬기는 것이요,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권위에 순종,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안식은 하나님을 경외, 순종하고, 이웃 사랑이 바로 안식이다.
12절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성경은 함축적이다. 포괄적 원리를 제시한다. 부모는 육적 차원에서 존재의 근원이다. 궁극적 차원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근원이나 육적 차원에서는 부모가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요, 상대적 의미에서는 나의 주인이다. 자녀가 성년이 되기 전에는 모든 것이 부모에게 권리가 있다. 부모는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의 대리자요 상징이다. 부모의 공경은 단순히 부모 자신만이 아니고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와 질서에 순종하라는 의미이다.
먼저 부모 자식간의 질서를 말함은 인간 사회의 질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수직질서 임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질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대리적 권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권위는 상대적 권위요, 다 하나님께 귀착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모든 권위가 귀착하므로 더 지켜야 한다. 바울은 모든 권위의 근원이 하나님께 귀착되므로 모든 권위에 순복하라 한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 있다.
12절 약속의 땅 = 하나님의 나라가 세위질 땅 즉, 교회. 하나님께서 주신 땅 즉 하나님 안에서 네 날이 길고 복되리라.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장수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의 삶이 창조질서와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하나님의 권위로 알고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우리의 신앙적 삶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3-17절 6, 7, 8, 9, 10계명 - 수평적 관계, 이웃의 삶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 가정의 권리, 제물의 권리 등등. 이 모든 죄악의 동기를 탐심, 욕망에 두고 있다. 생명보다 귀한 것을 탐심으로 빼앗는 것 살인, 간음, 도적질이다.
한 공동체 서로가 자신을 위해 착취,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돕는 공동체요 사랑의 공동체이다. 레위기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소극적으로 네 이웃도 나와 같이 똑같은 삶의 권리를 가졌다는 것 뿐아니라 적극적으로 너와 나는 하나다 라는것 알아야 한다.
18-21절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엄위하신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남 - 하나님을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도록 나타나심. 오고오는 세대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 범죄치 않도록 하기 위해. 중보자로서 모세의 위치가 두드러진다.
22-26절 의식 영역(cultic sphere)에 있어서 하나님을 섬김에 가장 요점을 설명한다. 십계명 전부가 하나님 섬김의 법도 - 이것은 내적인 마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실생활에서 계명 순종으로, 또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의식의 영역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가 나옴, 레위기에서 더욱 자세히 나온다. 하나님 섬김은 도덕 윤리뿐 아니라 삶 자체가 섬김 곧 예배여야 한다.
번제와 화목제의 의미는 명확치 않다.
הלוע(올라; 번제) ? םימלשׁ(쉘라밈; 화목제)
모두 태워드림 ? 제물을 사람이 먹음(이는 하나님과 화평을 통한 교제 의미)
Cult(의식) - 롬 12장 : 하나님께(향해) 살아있는 제사를 드리라. 그 근거는 롬 6장(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에 나온다. λατρεια(라트레이아)는 ‘섬기다’의 뜻, 이런 단어는 모두 ‘의식영역’에 관계된 용어들이다.
우리의 삶의 섬김이 cultic용어들을 빌어 사용된 의미는 무엇인가? 실제의 삶과 의식을 통한 제사가 똑같이 ‘하나님 섬김’의 삶이며 이 둘은 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선지자들이 구약의 제사를 비난할 때 그 제사 자체에 대한 비난이 아니고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의식을 비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이란(상징적 의식) 일상생활에 나타난 하나님 섬김의 삶을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배한 후에 그에 따른 실제 삶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선지자들은 이것을 맹렬히 책망하고 있다. 실제 삶이 없는 예배란 무의미한 것이다. 의식영역의 하나님 섬김과 실제 삶에 있어서 하나님 섬김은 뗄 수 없다. B.C. 8세기에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이것을 공격한 것이다. 또 하나 예배 자체는 실제 삶의 일부인 것이다.
죄악을 사함받기 위해서는 양과 소를 바치는데 당시 소는 노예 한 사람 값이다(은 30).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24절을 보면 기념하는 곳(성소)에 찾아오셔서 축복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⑴ 신상문제
금, 은으로 신상을 만들지 말라.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재료, 하지만 이런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 피조물,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피조물을 초월하시는 분이므로.
⑵ 제단문제
자연석이나 흙이나 돌을 깎아서 만들지 말라. 자연성 그대로 인간이 고안해 낸 것으로 말라. 피조성이 가장 잘 드러내는 재료로 하고 그것도 자연 모습으로 제물도 짐승으로 하라, 인간을 제물로 하지말라.
의식을 통한 섬김은 철저히 피조물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섬김임을 분명히 하신다. 고대사회에서 널리 유포된 사상과 매우 비교가 된다. aultic Time, place - 거룩한 장소, 시간. 제물드리는 시간과 장소는 거룩한 장소나 시간이라 여겼다. 이러한 거룩한 장소와 시간이, heavenly realm과 earthly realm이 서로 만난다. 그 장벽이 철폐된다. 즉 신적 차원이 고양된다고 여김. 이러한 사상과 매우 다르다. 인간은 피조성의 한계를 철저히 나타냄. 인간의 피조성을 감추려고 금, 은을 사용하지 말고 흙이나 자연석으로, 양이나, 소, 짐승으로 제사하라! 피조물의 한계 내에서 피조물의 형식으로 그대로 제사하라! 이 의미는 또한 구약 체제의 불완전성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완전한 제사의 예표를 암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솔로몬 성전의 제단은 놋으로 만들고 금, 은을 가지고 성전지음 - 앞의 내용과 상충되지 않고 환경적, 시대적 상황에 의한 것. 앞의 원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 세상의 존재하는 것은 참 실체가 아니다. 하늘에 있는 성전의 모형이다. 여기서 말씀하신 명령은 나중에도 그 전제가 되어 있다.
21장 안식년, 노예를 자유케 하는 일, 노예의 인권, 삶의 권리 보장, 사형에 해당하는 죄(살인, 부모를 저주, 유괴 등), 상해 죄(사람 상해, 가축 상해, 물건 상해, 처벌, 변상 등) 등 이스라엘 공동체의 삶(하나님 섬김의 삶의 일부)을 다룬다.
21장 노예제도가 나온다. 앞의 것과 연결되면서 공동체의 원리의 부정적 상황이 전제되어 있다. 삶의 권리나, 자유를 저당 잡히거나 잃어버린 부정적 상황이 전제되면서 안식일과 관계되어 있다.
구약율법의 틀은 안식, 안식의 법이다. 삶의 상태의 부정적 시각, 부정적 상태를 제시하면서 이를 회복하는 방법이 나오는데, 상실되고 잘못된 부분에서 회복되는 방법이 안식과 관련되어 있다. 또 긍정적인 면은 회복을 통해 공동체의 긍정적 질서를 표현해준다.
노예는 가장 밑바닥 계층. 다른 나라에서는 노예는 물건처럼 팔려 평생 자유가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7년 후면 삶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안식년을 주신다. 이스라엘은 한 백성으로 그것이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있다.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소유할 수 없고 그 권리를 지배할 수 없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삶의 권리의 보장이 노예까지라면 다른 계층은 말할 것도 없다. 공동체 전체가 다 하나다. 이스라엘은 자유민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권리를 다 갖는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라도 자유자라는 의미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살 근본적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필요에 의해서 종이 될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가족 때문에 자유를 포기할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서 귀를 뚫어 영원히 종이 되는 것이다. 이는 가족유대(familiar tie)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7절 여종 - 대개 상전의 첩이 됨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런 관계라 할지라도 결혼의 의미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녀를 아들에게 주기로 하면 그를 딸같이 취급하라고 하는 것은 여종이라도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여종을 팔지 못한다. 특히 외국인에게 팔지 못한다. 다른 여종이나 아내를 얻는다 하여도 의식주와 부부생활을 거부할 수 없다. 즉 싫어한다 하여도 아내로서의 권리를 거부할 수 없다. 노예들에게도 삶의 권리를 인정해준다.
율법의 예증적 성격(illustrative) : 십계명 이후 바로 ‘상전과 노예’와의 관계를 취급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이 관계가 바로 ‘상전과 노예’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의 상하질서에 대한 예로 보여주신 것이다. 모든 상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인간관계의 예를 보임이요, 다른 쪽의 삶의 권리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엡 5장에는 모든 인간관계를 규정하면서 종과 주인을 이야기한다.
이 당시 노예에 대한 개념은 ‘물건취급’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인간권리’에 대한 법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질서의 관계가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를 누리며 맺어지는 관계라는 것이다.
동족간의 배상문제(Lex Talionis) : 여기서의 근간은 Lex Talionis인데 23절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의 완성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 같으나 이런 경우에 당시의 근동의 풍습은 완전보복이었음에 비해서 율법의 한계선은 인간의 완악함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것이지만, 근본정신은 신약이나 구약 모두 사랑으로서, 긍휼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원리 : 사회적 신분계층과 남, 녀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자유민으로 삶의 권리를 소유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것이 안식에 의해 보장받게 되어있다.
출애굽기 20-23장은 안식법이다. 여기 죄악들은 다 안식이 깨어진 경우이다. 노예 - 자신의 삶이 빼앗긴 상태(삶 상실). 살인 - 자신의 생명을 도적질한 경우. 부모를 침 - 사회질서, 권위가 짖밟힌 경우. 오늘날 권위가 무시되는 시대. 하극상의 풍조는 분명히 나중에 또 한 번의 진통을 겪는다. 유괴 - 가정이라는 평안과 복된 삶을 파괴하는 것. 공동체에서 악의 근원을 제거해 버려라. 공동체에서 질서를 파괴하는, 평안과 안식을 깨는 악의 근원을 제거하되, 그 방식이 항상 문제이다.
물질적 상해는 심한 경우가 아니면 변상을 통해서 깨어진 삶의 질서 즉, 안식의 상태를 회복할 것을 말한다. 왜 안식의 법이라 하면서 안식의 상태의 회복이라 하나? 또 하지말라는 부정적인 면이 나오나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안식은 죄로 말미암아 상실한 안식의 상태를 회복한다는 의미 갖는다. 즉 구속으로 인한 회복을 말한다. 안식과 구속은 깊은 관련을 갖는다. 특히 공동체적 삶에서 안식은 의와 공평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내 형제, 나와 똑 같은 삶의 권리를 갖는 자로 인정하라는 것이 명령의 기본 전제이다. 내 형제와 똑같은 삶의 권리를 인정하는 삶의 형태는 의로운 삶, 공평한 삶이다. 이와같은 것이 깨어졌을 때는 어떻게 회복할수있는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는 의와 공평을 말함이다.
⑴ 즉 안식의 상태의 본질적인 면을 표현해준다. 또 모든 사람의 공정한 삶의 권리로서 처벌을 받아야 하는 義의 면에 관심을 둠과 동시에,
⑵ 이것은 피에 굶주린 복수와는 또 다르다. 타락한 인간의 모습은 뿌리 깊은 복수심을 갖는다. 예 : 라멕의 노래 - 자신의 창상을 인해 살인하고 자신에게 상해를 입히면 77배로 복수. 물론 이러한 처벌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처벌이다. 즉 눈에는 눈으로 하지 그 이상으로 처벌하지 말라는 뜻이다.
점쟁이는 귀신과 짝하는 자이다. 짐승과 관계를 갖는 자. 성관계는 상대방과 하나되는 것이므로 짐승과 관계 갖는 자는 스스로 인간됨을 포기, 짐승 수준으로 자신을 떨어뜨림이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에 대한 모독이요, 하나님 은혜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특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22장 실화, 실수로 인한 이웃에게 해를 준 경우, 점쟁이, 짐승과 관계한 경우, 우상숭배를 다룸. 22:20-23:9절을 보면, 22:21절과 23:9절에 똑같은 말씀이 반복되어 있다 - Unclusio. 어떤 한 단위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동일한 사상을 반복하므로 이 단원의 전체 사상을 요약해주고 나타내주는 문학적 기교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안식 상태의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요소 나그네와 고아를 압제하지 마라.
나그네 - 공동체 내에 완전한 삶의 권리를 갖지 못한 자. 나그네에게, 타향인에게 텃세를 부리지 말라는 것.
고아 - 아버지가 없는 자.
과부 - 남편이 없는 자.
이들은 그 삶의 권리가 침해 당하기 쉬운 계층이다. 공동체 내에 가장 연약한 사람이다. 이는 단지 고아와 과부만이 아니라 모든 연약한 자들을 말함이다. 이들을 압제할 때, 이들이 부르짖을 때, 돌아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너희 아내와 자녀를 고아와, 과부되게 하겠다. 또한 가난한 자에게 이(利)를 받고 돈을 빌려주지 말라! 다른 이의 약점을 이용해서 너의 부를 축적말라.
이러한 부정적인 면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구절이 25절이다. 가난한 이에게 돈을 빌려주고 옷을 저당 잡았는데 돈을 갚지 않아도 해가 지기 전에 옷을 돌려주라. 그가 춥게 잘 것이므로 나는 저에게 옷을 돌려줄 의무가 없는데도 돌려주는 것은 이는 긍휼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고아, 나그네, 과부를 도우라는 말씀이다. 연약한 사람, 도와야 할 사람에게는 궁휼을 베풀어라! 긍휼을 베풀어도 되고 안 베풀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긍휼을 베풀라. 긍휼없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을 행하겠다.
앞에서는 안식을 의로 표현했다. 여기에서는 안식의 상태를 긍휼이라는 상태에서 더 보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자기 것을 먹고 남에게 해 끼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더 적극적인 면을 포함한다(영적, 물질적, 사회적, 지식적인 모든 가난함). 의와 긍휼이 있는 공동체의 삶에서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라 한다.
23:2-9절 의로운 태도(공정한 태도)와 긍휼의 태도의 관계에 대해 더 깊이 말하는 것. 잘못하면 긍휼이 소홀히 되기 쉬운데서 다시 의를 강조한다.
23:2절 너는 많은 사람을 좇아서 판결의 시비를 굽게 말라. 사람은 항상 대중의 의견에 따르는 경향이 있다. 모든 사람이 좇는다고 해서 그것을 따르지 말고 옳고 그름의 판단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시비 판단시 또 하나는, 힘있는 자, 다수가 압력을 가할 때도 시비를 굽게하기도 한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약한 자에 대해 관대함으로 시비가 잘못 판단되어서도 안된다. 약한 자나 강한 자, 타락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약한 자의 편에 역성들다가 옳고 그름을 잘못 판단하지 말라. 옳고 그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바르게 판단하라.
23:5 네 원수의 나귀라도 돕고 물을 먹이라. 나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자라도 그에게 인간으로서 베풀어야 할 일을, 도움을 주어야 할 일을 도우라. 시비 가리는 일과, 긍휼 베푸는 일은 둘 다 행해져야 한다. 시비 가린다고 긍휼을 버리는 것 아니고 긍휼 베푼다고 시비를 굽게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악인을 결코 의롭다 하시지 않기 때문, 하나님은 선과 악을 분명히 가리신다.
23:10 안식년, 21장 안식년에 노예를 자유케, 23장 휴경하는 것 - 인간의 타락으로 욕심이 많아져 착취함. 자연까지 착취함. 오늘날 먹고 마시는 일에 자연을 착취, 환경오염. 7년 마다 휴경 - 땅 자체의 안식도 있으나 땅이 쉬면 사람과 짐승도 쉰다. 그때에 자연적으로 나는 것은 고아와 과부에게 주라. 즉, 물질적인 것에 바둥바둥 말고 일용할 양식에 족하게 여기라.
12절에 안식일이 다시 언급되는데, 안식일의 의미가 안식년과 통한다. 안식일의 의미도 고된 노동에서 한숨을 돌린다는 것. 땅의 휴경을 명하사 사람과 가축을 쉬게 하시고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심이다.
23:14절 무교절, 출애굽 기념 - 안식과 깊은 관련. 수장절, 추수절도 - 안식일과 관련. 오순절 유월절로부터 그 다음 날부터 49일째. 7월(우리 달력 10월 연종). 5월에 추수시작, 10월에 다 거둠. 즉 7월에 다거둠. 즉 7월달은 절기가 많아서 거의 안식하는 날들이다. 안식일에는 축제가 있었다. 이는 즐거워하는 날, 안식일에는 이렇게 항상 희락이 있었다.
23:18절 누룩, 기름 - 부패하게 하는 것. 즉 변질시키는 요소를 경계하시고, 19절 염소 새끼를 어미젖에 삶지 말라. 이는 이방종교 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교의식의 혼입을 경계한다. 즉 신앙의 순결성 강조한다. 20절 사자를 보내겠다. 그 안에 내 이름이 있으며, 그의 말을 청종치 않으면 그 죄를 용서 않겠다. 그의 앞에서 조심하라 이분이 누구인가 예수님 제 2위 성자. 제 2위, 제 3위인 성자, 성령 하나님과 관련.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이스라엘 앞서 행하며, 보호, 인도하신다. 이스라엘 가운데 위하시며, 앞서 행하시는 신적인 분을 말하는데 이를 자꾸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방식에 경계를 주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불과 구름 기둥으로 임재를 보여 주실 때 불과 구름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시는 것이므로, 그 사자의 말에 순종할 것이며, 이교의 더러운 종교적 습관을 받아 들여 거룩하신 분의 임재를 더럽히지 말라.
24장 언약 맺으심.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이 세워지기까지는 이 언약의 규제를 받는다. 그리고 24장 이후에는 성막건설을 다룬다. 25-30장 성막 건설에 대한 명령과 지침.
23:20절에서 사자를 통한 하나님의 영적 임재를 말씀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명하신 성막 건설은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이 성막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막의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내가 거할 곳, 내 이름을 둘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어떤 형태로 계셨는가?
이 가시적 형태 자체가 백성 가운데 임재해 계신 하나님을 표현, 하나님이 백성을 세상 세력에서 해방시킨 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의 도리를 가르쳐 주시고, 하나님이 그 백성 가운데 임재해 계시는데 이것이 구원의 모형이다. 계시록에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장막이 내려온 것 계시하신다. 성막은 휘장 앞에 그룹을 수놓음, 전체 벽이 널판지로 되어 있는데 여기도 그룹이 있고, 덮는 천(세겹으로 덮는다)의 맨 속에도 그룹이 수 놓아져 있다. 성막 전체에 그룹으로 덮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히브리서는 이 성막을 하늘의 성소를 본따 지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보여주신 식양대로, 온 그룹이 하나님의 성막을 뒤덮고 있다.

성막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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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상에 미가야 선지자가 하늘의 환상을 보는데 영들이 하나님을 모셔 섰는 형상.
욥기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의 아들들(영적 존재들)이 둘러섰고
이사야에는 스랍들이 날면서 창화.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 = 통치자이신 하나님. 온 세계를 다스리시는 통치자.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권과 궁전을 묘사한다. 온 세계와 역사의 결정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것이 성막이다. 성막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왕으로 임재해 계신다. 이 왕의 지시와, 인도와, 말씀에 따라 진치고 움직이고 순종하여 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출애굽의 내용이다. 히브리서에 보면, 모세에게 준 성소의 원본이 하늘에 있다고 하므로 모세의 성막은 하늘의 하나님의 통치소를 본따 만든 것이다. 모든 구속사와 세계사가 하나님의 어전회의에서 결정되는 것이고, 그 결정사항을 선지자가 증거하는 것이다(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구별 : 하나님의 어전회의의 참석여부로 결정).

성막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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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9:42절 이하 ‘거기서 너와 내가 만나리라’ 성막은 하나님이 그 백성과 만나는 장소, 통치 장소이다. 출 25:22절에 보면 통치 명령이 성막에서 나간다. 성막이 지어지자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성막 위에 머무르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불기둥, 구름기둥과 함께 이스라엘이 이동한다.
성소의 기능 :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 만남은 왕과 백성의 만남이요, 만남의 형식은 경배와 예배이므로 그 도구는 제단이고 제사의 형식을 띠게 된다. 하나님은 거기서 백성을 축복하신다.
25-40장까지는 모두 성막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성막이 얼마나 핵심적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25-40장이 모두 성막문제인데 32장에 유일하게 금송아지 범죄 사건이 나온다. 그러므로 금송아지 사건은 성막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금송아지 사건의 독특한 성격 : 금송아지 사건 전후에 성막에 대한 지시가 있다. 금송아지 사건은 성막이라는 내용에서 나타남, 성막과 깊은 관계가 있다. 출애굽기 24장에서 피의 맹세로 다 순종하겠다 했으면서도 금송아지를 만든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자 이때까지 중보자 모세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웠다. 불안해진 백성들은 ‘뭔가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하나님을 보이는 형태로 가시화시킨 것이다(후에 여로보암은 똑같은 죄를 범한다. 북방에는 법궤가 없으므로 금송아지를 만든다). 이것은 제 2계명을 범한 것이다. 언약이란 ‘율법의 순종’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는데 이 사건은 스스로 율법의 불순종 = 언약파괴가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언약을 파기한 것이다. 레위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을 도륙한다.
모세가 율법의 판을 깨뜨려버린 일은 모세의 화난 결과라기 보다는 깨어진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십계명의 판 - 증거의 판. 율법이 기록되어 있다.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이 기록된 판이다. 판이 깨어짐은 언약이 깨어져 버림 - 언약이 무의미해졌다는 것이다. 모세가 목숨을 걸고 기도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백성을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חלס;살라 = 무조건 용서) - 하자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계명을 다시 주심, 다시 증거의 판을 주심. 즉 언약의 갱신이다. 이것은 중보자 모세의 간구, 그리고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깨어진 언약이 회복된다. 이 모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34절이다. 나의 사자가 나의 앞서 행하리라. 즉, 하나님이 동행하시겠다는 응답을 듣는다.
이 사건이 성막사건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는, 깨뜨려진 언약이 성막에서 치유된다는 것을 말한다. 성막 속에서 이루어진 일들과 이 언약의 갱신의 의미와 관련있다. 이것이 레위기에서 제사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성막은 이동식 궁궐이다. 이스라엘이 아직 약속의 땅에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에 솔로몬의 성전은 정착된 것이다.
21절 רמת(타메르; 쓰게하다, 고통하게 하다)는 노엽게 하지 말라 → 신약에서 성령을 근심되게, 슬프게하지 말라 즉, 성령을 거역하여 근심케하지 말라고 한다. 너희의 반역을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처벌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볼 때 신약에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앞에 삼가 조심할 것이며, 순종하고, 반역하면 처벌당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렇게 볼 때 말락 아도나이는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분은 과연 어떤 권세를 가진 분이신가? 그 안에는 나의 이름(하나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이름은 매우 중요한 뜻이 있다. םשׁ = ονομα(쉠 = 오노마; 이름). 신약에서도 그의 이름을 믿는다고 했다. 그리고 구약에서 םשׁ은 하나님의 그 인격 자체를 표현하기도 한다(시 21편).
내 이름이 그 안에 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3:13에 볼 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즉, 그가 어떤 분이냐. Who is he? 다시 말해서 내 이름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락 아도나이를 통해서 계시하시겠다는 의미이다. 3:13-14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철저한 주권성을 말하는 것이다. 앞으로 행하실 역사를 인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나타내 보이겠다. 내가 이 사자를 통하여 나를 알리겠다는 즉, 나의 이 사자를 통하여 나의 역사를, 나의 일을 이루겠다는 의미이다. 또한 말락 아도나이의 사역은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이스라엘을 안식의 땅까지 보호하여 들이시겠다는 것이다.
22절 말락 아도나이의 음성을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과 같다. 말락 아도나이와 하나님의 unlty가 암시되고 있다. 그리고 context를 살펴보면, 이 구절의 문맥적 상황을 보면 23:24-33에서 하나님 섬김의 순수성을 말하고 있다. 너희는 참된 신앙으로 성결하게 살아야 할 것을 말하시면서 왜 성결히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 즉, 말락 아도나이가 너희 가운데 계셔서 너희를 인도해 가시기 때문이다. 모세가 너희를 인도해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신다고 했는데 이는 실제로는 말락 아도나이를 통한 임재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통치해 가신다. 이것과 유사한 신약성경은 요한복음이다.
말락 아도나이에게 권세와 위엄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요, 그리고 절대순종을 요구하심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23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대적에 대해서 하나님이 대적하시겠다. 즉, 하나님이 대적하심은 말락 아도나이의 대적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말락 아도나이는 신적인 분이시다.
33:7 회막을 금송아지 사건 이후 진 밖으로 옮겨 버리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에 부족하여 도저히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시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 방식의 제한성이다. 성막에서도 그 제한성이 나타난다. 즉, 성소와 지성소를 휘장으로 나눈다. 이 제한성이 제거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휘장이 갈라지고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온전한 그리스도를 통한 교통이 있게 된다.
8절 당시는 성막이 있기 전이다. 모세만 회막에 들어가고 들어가면 구름기둥이 회막 위에 머문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이다. 백성은 자기 장막 문에서 먼 곳에서 보며 경배한다. 즉, 모세와 백성의 구별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독특한 지위를 볼 수 있다(9절). 모세가 하나님과 누리는 친밀함, 깊이가 11절에 보인다. 모세의 독특한 신분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사람처럼 만나셨다. 즉, 모세가 하나님을 얼마나 직접적으로 알았는가 하는 그 직접성과 심도를 암시하는 것이다.
12절 모세가 말락 아도나이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 나타난다.
14절 내가 친히 가리라 ינפ(파나이)가 ךאלמ(말락)과 동일하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봄.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자를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하였다.
18절 하나님의 영광을 내게 보여주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시적으로, 알 수 있게 체험케 해달라고 한다. 19절 이하에 ①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을 베푸심(긍휼을 베풀자에게 베품), ②긍휼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이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성격이 나타난다.
20절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직접 접촉할 수 없음을 말씀하신다. 내 등(배면)을 보리라는 것은 모세의 하나님의 지식의 제한성을 말한다. 즉, 간접성이다. 신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다. 초월적인 것이다. 인간이 그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 신약에서는 고린도전서 3장에 이것을 말한다. 모세는 구약에서 하나님을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본 자였다. 아주 특별하고 독특한 체험이었다. 그러나 이 독특한 체험도 우리가 신약에서 성령 안에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신다. 모세는 어디까지나 구약에 속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자체로 폐쇄된 책이요, 완전한 책이요, 동일한 책이므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고 풀어야 한다. 골 2:9에 보면 신성의 충만한 것이 몸(경험)으로 거하시고 요한일서는 본 바와 들은 바요 손으로 만진 바와 증인과 말씀으로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한다. 말락 아도나이로 통한 하나님의 얼굴을 통한 임재와 인도, 분명히 ‘나’라고 하는 분과는 구별된 절대순종을 요구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안식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분 말락 아도나이를 분명히 계시하셨다.
출애굽기가 성막중심화 경향에서도 의식적 요소가 현저하게 나타남은 레위기를 위한 예비적 단계이기 때문이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외부적(phisical), 가시적 상징이다. 성막, 법궤, 이 모든 것은 물질로 되어 있다. 성막중심화 경향과 의식적 요소가 현저해지면서 계속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속죄소와 그룹은 연결되어 있다 =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가장 현시적인 것은 구름과 불기둥인데 잘못하면 구름과 불기둥을 하나님의 본체와 일체화시키기 쉽다. 제 2계명 우상을 만들지 말라 ; 초월적 하나님을 이 지상의 어떤 것으로 형식화, 가시화하지 말라는 것으로,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임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임재해 계시는 것은 말락 아도나이의 인격으로서 임재해 계신다. 구름이나 불이라는 비인격이 아니라, 인격적 임재이다. 즉, 말씀하시는 하나님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한 다른 인격을 통해 임재하신다. 삼위일체 교리에는 불분명하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말락 아도나이는 자기에게 절대 순종을 요구하고, 불순종시 엄한 처벌을 하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분이시다. 말락 아도나이 자신도 우리 경험으로 이해 하능하거나 보는 구름, 불기둥과 동일시하시 쉬우나 그러나 말락 아도나이는 나의 얼굴이라 하신다. 즉, ינפ(파나이; 얼굴)는 그 자신이 신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이성, 지적 능력으로 그 본질을 꿰뚫어 알 수 없는 분이다.
성막중심화 경향과 함께 말락 아도나이 또는 파나이로 하나님의 임재를 자꾸 거론하는 것은 성막이 이스라엘 삶의 핵심적 위치에 있지만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쇄기를 박기 위함이다. 그 위험성은 ①하나님의 임재를 불기둥과 구름기둥과 동일시하기 쉽다. ②하나님의 임재를 가시적, 물리적인 것에 국한시키기 쉽다.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의 존재의 의미이며(출 33:16), 그 삶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 되게 하는,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즉, 이스라엘의 존재의미가 하나님의 임재이다. 그것을 표시하는 가시적 표시로 성막과 구름기둥이 있다. 하나님은 그 백성 가운데 영적, 인격적으로 임재해 계시는 영이시며, 초월자이시며, 무한자이시고, 영원자이시며, 물질에 갇히어 국한되거나 가시화될 수 없는 분임을 깨우치는 부분인 것이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시 기도에 보면 하나님은 하늘의 영역이라도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런 계속적인 경고는 결국은 하나님 자신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안으로 들어오시므로 우리가 결험할 수 있는 영역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 없음을 상기시키는 것은 구약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이며, 완성을 기다려야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사무엘이 교회(이스라엘은 국가가 아니다)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 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적 임재에 있어서 왜 의식이 필요한가? 하나님은 영이신데도 의식의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었는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로서 성막이 두드러지는 과정 속에서 말락 아도나이, 파나이를 통해서 영적으로, 인격으로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보여주신다. 하나님 임재의 가시적 상징인 성막과 불,구름기둥으로 국한시키는 위험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로 나타낼 수 없는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사실과 맥락을 같이한다. 가시적 상징 표시가 실재와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성막에 가까이 가는 자는 쳐죽이도록 되어있다. 이스라엘 한 가운데 성막이 진치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삶의 한 중심을 차지한다. 즉,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는, 하나님이 삶의 중심을 차지하는 그런 삶이다. 레위긴ㄴ 출애굽기의 이와같은 문맥을 전제로 하고 있다. 레위기의 내용은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성막 중심의 이스라엘의 삶에 대해서 말한다.
레위기의 초두에 보면 1:1에서 여호와께서 회막(meeting place)에서 모세를 부르신다. 회막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회막은 meeting place로서 하나님과 백성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이 장소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의 본질을 ןברק(코르반; 하나님께 드림)이라고 한다. 하나님 백성의 삶의 핵심, 삶의 본질을 뜻하는 것으로 매우 귀중하다. ברק(콰라브; 가깝다), בירקה(히크리브; 히필형으로서 가져오다, offer, 바쳐드리다), ןברק(코르반 = 고르반; 하나님께 드림, offering의 의미).
이스라엘의 삶의 본질은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다. 이스라엘에게 1년에 3차씩 하나님게 보일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 하신다. 이는 헌금을 가져오라는 요즈음의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 드림은 상당히 복잡하고 깊은 의미이다. 이는 자기 의(義)나 갚음의 의미가 아니다. 전체적인 의미는 대속적인 의미이다. 회막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로서 이스라엘의 한 중앙에 위치하고 그 중에서도 하나님과 직결되는 곳은 지성소였다. 그리셔 지밀(至密)의 처소(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사귐, 만남이 이루어지는 처소)이다. 이러한 처소에서의 만남은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이는 의식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cult, rite, ritual).
의식(cult)이란 무엇인가? 의식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는 단어는 רכז(자카르; 기억하다)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지나간 과거를 지금 현재에 와서 돌이키고 재생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의미를 갖는 유월절 등은 항상 기억하라고 한다. 기억이란 과거의 재생에 의해 그 효과를 지금에까지 미치게 하고, 다시 오늘에 와서 되살려 놓는 것이다. 시간적 의미를 떠나서는 Vergegenwärtgung(페어게겐붸르트궁; 현림)인데 contemporary + persidence의 두 의미가 합한 것이다. 즉, 지금 여기 있지 않는 것을 지금 여기 있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임재의 뜻을 가진다.
의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어떤 역사적 사건과의 관련성(역사적 밀착성), 예를 들어 유월절 의식의 근거는 출애굽시 하나님이 애굽의 장자를 치신 사건인데 유월절 의식은 해마다 4월이 되면 옛날에 하나님이 하신 역사를 오늘에 다시 한 번 살리는 것,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또 의식은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의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킬 때, 저주와 심판 아래 살다가 노아 때의 안식을 기억하며,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신 그 안식을 기억하고 되살려 다시 누린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실 안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서 주실 안식을 미리 오늘날 다시 소망의 형태로 미래를 오늘에 미리 당겨서 살리는 것이다(성취). 예를 든다면 성만찬도 역시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과 앞으로 이루실 구원을 미리 소망의 형태로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시간이 집중하게 된다.
concentrated moment(accumilate point) = 직접점. *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이것을 신화적 주제와 관련시켜 말하는 자유주의 학자들이 많다. 특히 cult를 극대화시키고 과장하여 ‘eternal now’라 해석한다. concentrated moment(= 집중적인, 밀도있는 순간). 자유주의 학자들이 cult를 과장하여 주장한 한 예를 보자. holy time, holy place에서 의식이라는 형태 속에서 모든 시간이 해소되어 버린다 - 초시간, 무시간. 천상의 영역과 지산의 영역이 만나는 곳, 특별한 공간, 특별한 시간이 마련되는 것 - 시,공의 개념이 없는 것.(노우트 한 페이지(페이지 17)가 복사되지 않았음)
특히 천상의 것, 영적인 것을 인간의 존재방식으로 나타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는 영적이며, 인격적임을 강조해온 것과 같이 하나님은 영이시요, 그러므로 물질적, 가시적 예배는 하나님이 직접 받으신다고 볼 수 없다. 물질적인, 가시적인 형식을 통해서 드려지는 영적, 인격적 섬김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요, 받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 4:23)에서 볼 수 있다.
인간도 영적 존재이므로 하나님과 교통이 있다. 순전히 영으로만 섬김과 교제가 가능한데, 순전히 영으로만 교제하는 것이 바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 창조상태에 사는 이상 인간은 항상 영육의 통일체로 살게 되어 있다. 영육의 unity 속에서모든 것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영육의 통일체로서 영혼과 가장 밀착된 예배의 형식이 고전 14장에서는 말씀, 예언, 기도, 찬송(언어는 인간 내면과 가장 밀접히 관련)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항상 언어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이런 가장 영적인 예배도 인간 영육의 통합체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 창조질서에 사는 이상 그리고 인간이 영육의 통일체로 살 때, 항상 영적, 인격적인 것이 항상 외적, 가시적 형태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삶이라고 한다.
참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의 존재방식으로 취하셨다. 가시적 형식에 담긴 영적, 인격적 섬김과 그 육체를 심자가에 못박히심도 육체만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의 통일체로서 드리셨다. 구약 성도들도 그들 삶의 전체로 드림에 있어서 영이신 하나님께 영적, 인격적 섬김을 외적 모습으로 드렸다. 첫 곡식, 가축, 곡식 등을 드림. 특히 말과 형식(언어로 찬송, 감사; 내면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했다.
롬 12:1-2 마음이 새로워져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 즉, 삶 자체를 드리는 것이다. 이는 이성적 존재(영혼을 소유한 존재)로서 마땅히 기대되는 섬기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 인격적 삶이 인간의 실재 삶(눈에 보이는 행동)으로서 드려지는, 인간의 존재에 있어서 영적인 것만 드려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 드려지기 원하신다. 즉, 오히려 자연적 인간의 삶을 지키기 원하시는 것이다. 의식에 의해서 지상적인 것이 천상적인 것으로 바뀌어지기(로마 천주교의 사상)를 원하시지 않는다. 철저히 인간의 삶에 충실한, 그 피조성을 철저히 드러내는 형태로 드려지기를 원하신다(= 인간의 존재방식에 충실한 형태 = 영과 육의 통일체). 이는 내면과 외면의 일치를 원하신다.
출 33장의 ינפ 모세와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뒤만 본다. 죽이는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하나님 그 자신은 어떤 가시적 형태인, 언어의 형태인 계시와는 구별되며, 그 하나님 자신은 어떤 인간도 파악할 수 없으며, 가시적인 것으로 나타낼 수 없다. 오직 배면만 즉, 가시적 형태는 간접적 경험으로만 하나님 자신을 알 수 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되심, 독생하신 하나님만이 하나님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본질, 본 모습을 완전하게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오관을 초월한, 인간의 경험을 초월한 방식으로 임재해 계시며, 영육의 통일체인 인간과는 다른 분이시다. 즉, 인간과 하나님과의 무한한 거리를 말한다. 그래서 cult는 상징성을 띨 수 밖에 없다.
cult : 상징적으로 제물과 언어로 나타내는 것이 의식이다. 영이신 하나님,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성막에서 가시적, 가현적 형식을 띠는 의식을 통해 만나는 것은 상징성을 띨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독립적 영역이 아니라 실재적 삶의 영역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고 이것이 깨어질 때 의식 자체도 무의미해진다. 영이신 하나님이 가시적 형식을 띠는 의식을 하도록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방식의 고려에서 나온 것이다. 영육의 통일체로서, 영적인 것과 분리되지 않으며 영적인 본질을 담고, 영적인 삶도 전체적인 삶의 일부분으로 가장 실제적인 삶이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초월성, 영적 성격이 가장 두드러지는 장소인 성막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영육의 통일체 즉, 육체와 상관되는 인간의 섬김은 모든 활동이 육체적으로 나타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 섬김이 영적 사귐을 상징하는 형식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도 물론 영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과 우리와 영적 사귐이 가능하겠으나 우리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무한 질적 차이 때문에 더더욱 죄인(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이러한 장벽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안된다. 성령님이 없이는 하나님과 우리의 실제적 만남이 불가능하다. 칼빈은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할 때 성령으로 그 은혜를 받아 누리게 한다’고 말한다. 영의 질적 격차, 죄인으로서의 장벽 때문에 상징화된 의식을 해소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이 은혜를 실제화시키는 분은 성령이시다.
cult의 공동체성과 관련하여 상징될 수 밖에 없는 필여성, 그런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섬김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진다면, 물론 영적인 예배가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예배 의식은 공동체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공동체로서의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은 항상 communication이요, 이렇게 communication이 요구됨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한 마음으로 드려지는 것이 요구된다.
공예배에서 요구되는 것(공동체에서 드려지는 예배에서 요구되는 것)은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한 마음으로 영적 예배를 드리려면 상호 communication이 필수적이다. 그들의 내면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고리 즉, communication 수단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적 내면을 직접 대할 수 없고 언어나 행동이라고 하는 영적 내면의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내면과 접촉하게 하는 것이 언어와 행동이다. 따라서 어떤 공동체가 어떤 영적 체험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형식성을 띤 외부적인 매체가 필요하다. 이것이 cult가 왜 언어와 형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그 이유를 밝혀준다. cult는 항상 공동체를 전제로 하므로 공동체가 함께 하기 위해 언어의 통일이 있게 된다.
말 signifying referent ; 말 자체도 상징이므로 음성기호 sign이라 한다. 기호라는 것은 공동체 안의 하나의 약속이다. 행위는 상당히 형식화되어 있다. 언어와 행동은 영적 내면을 가르키기는 하나 내면 그 자체는 아니므로 따라서 언어와 행동은 내면 상태에 대해 상징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영적 내면에 뿌리를 둔 언어와 소리라는 외부적 표현, 가청적 표현인 찬양은 그것이 단순히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내면의 찬송과 분리될 수 없다.
외부적 형식, 약속만으로 공동체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성령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한 마음으로 드릴 수 있다. 오직 이 의식을 믿음으로 참여하여 드릴 때, 성령이 이 예배가 영적 내면에 실체가 되도록 하신다. 요 4:24 신령과 진정으로 = 정당한 예배, 이때 신령은 우리의 영과 성령 둘 다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남은 다시 태어나고 또한 위로부터 나는 이중적인 의미의 언어를 요한은 사용한다.
롬 12:1-3의 영적 예배는 영적 존재로서 적합한 예배 형식에 대해 하신 말씀이다. 영적 존재가 변화되어 외부로 나와야 한다. 전인격과 삶을 통한 예배, 단순히 표식의 형태로서만이 아닌 즉, 영육의 통일체로서 드린 예배가 섬김의 삶으로, 외부적 표현으로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는 것은 그 몸을 통해 자신의 삶을 드리라는 것이다.
35장 성막을 짓는다. 40장 성막 세우는일, 성막 봉헌식으로 마침.
출애굽기가 성막사건으로 종결짓는 것은 구속사의 흐름이 성막과 큰 관련이 있음을 말한다. 구원의 마지막 모형은 성막으로서, 하나님이 그들을 다스리시며 통치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구원의 완성도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이 성막사건은 큰 의미가 있다.
성경은 역사 이야기이다. 그리고 궁극적 목적을 가지고 나아가는 역사이다. 그 역사의 중심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역사를 마태복음 1장을 통해 관찰하는데 예수님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 즉 창세기 12장으로 연결 올라간다. 즉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약속(세상으로부터 구원하시겠다는 약속), 이 약속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으나 아브라함 때 이미 맺어지고 성취되어 가고 있다. 이 약속이 일단 다웟에게서 완성되었지만, 그러나 구약의 왕국은 그림자, 예표이다. 이 왕국이 몰락, 부패, 와해된다.
성경이 역사를 지배하고 있다. 성경의 역사를 강조할 때 중요한 면은 역사는 변하는 것, 변화를 전제로 한다. 역사 통해, 본질적으로는 아브라함 통해 이루어 왔으나, 각 시대마다 형식에서는 변화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한 시대의 계시, 규례들이 다른 역사 시대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 있다. 여기서 구속사적 역사가 역사를 통해, 또한 상황에 따라서 구속사적 형식이 달라지고 의미가 달라진다.
구약 - 짐승잡아 제사 = 예수님의 사역의 예표.
신약 - 짐승잡아 제사하면 죄 = 예수님의 구속사역 완성. 지금은 성만찬으로 기념.
율법이 타락전 : 아담이 지킬 수 있다.
타락후 : 인간이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됨, 정죄하는 의미를 갖는다.
성령오신후 : 성령 안에서 다시 지킬수 있는 법이 됨.
같은 율법이라도 시대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성경의 개념이나 중요사상 이해할 때 그것이 갖는 의미가 다름, 즉 어떤 역사적 상황에 서 있는가, 구속사적 상황에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봐야한다. 항상 변해버린 구속사적 상황에 맞추어 해석하라.
성경을 역사적 시각으로 보는 관점을 이해하라. 각 시대마다 역사 안으로 초청하여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제사 예표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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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타락 아브라함 출애굽 민수기 Exile 예수님 완성 파루시아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Theophany로 보여진다. 시내산에서 불꽃, 천둥, 번개, 구름기둥, 불기둥 등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는 이와같은 또는 성막 같은 물리적 처소 통해 임재해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구약에서도 인격적, 영적 임재이셨다. 하나님과 다른 인격이신 분이 인격적으로 임재하셨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의 사역인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인지 정리해야 겠으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신구약에 하나님의 사역의 본질은 차이가 없다. 구약에도 단순히 외적 의식 통해 성부만의 사역은 아니었다. 스데반의 설교에서 보면 ‘너희가 성령을 거스렸다’고 하여 구약시대에도 성령의 사역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의식의 특징은 과거, 미래의 일을 상기하거나 성취하는 것이다. 영적 실재를 경험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식은 공동체로 많이 드려진다(예배). 이스라엘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림 = communication이 있었고, 이는 언어나 외부적 상징물로 되어졌다. 외적 상징은 의식도 포함되고 이도 역시 약속하는 것이다. 언어, 외적 상징, 의식 등 다 약속으로서 동참하는 자들의 내면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한 상징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효력이 없고 믿음으로 참여할 때만 그 효력이 나타난다.

* 출애굽기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사자(הוהי ךאלמ; 말락 아도나이)
출애굽기 34장 이후에는 성막 중심화 경향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 의식적 요소의 두드러집이었다. 또한 이와함께 병행해서 주입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방식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방식과 관련하여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는 것이다. 3:2,4에서 하나님과 여호와의 사자가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구약에서 말락 아도나이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와 “여호와의 사자께서 말씀하셨다”가 거의 동일하게 나온다. 즉, 말락 아도나이는 보통신분이 아니다. 하나님이신 또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이신 분임을 알 수 있다.
14:19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는 분이 말락 엘로힘이었다. 이분이 돌이켜 가면 구름기둥이 따라 움직였다. 에담에서부터 불기둥, 구름기둥이 나타난다. 이 신적인 분이 가시적 형태와 일치된 것은 하나의 신현현상(Theophany cloud)이다. 구름기둥은 바로 말락 아도나이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 형태였다. 그리고 밤에는 구름기둥에서 불꽃같은 것이 비워나온다. 3:2에서 불꽃형상으로 해석함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불꽃형상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23:20은 3:2, 14:19와는 달리 여호와의 사자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앞의 두 구절이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고, 하나님과 동등시 되는 분이라는 막연한 암시가 있다면 23:20에서는 הלשׁ(αποστελλω; 샬라; 아포스텔로) 즉, 이스라엘 앞서 행하시도록 보내심을 받은 앞서 행하시는 분, 도중에서 너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내가 예비한 장소로 너희를 인도해 들이는 분으로 묘사한다. 이는 신약과 매우 흡사하다(요 14:1 이하).

레위기(ארקיו; Leviticus)

레위기는 시내산 언약의 일부(Sinaite Covenant Law)이다. 레위기 7:37절에 보면 율법의 일부인 Cultic regulation을 시내산에서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5대 제사의 규례). 율법(law)은 출 20장에서 십계명으로 주어진 후(pecalogue), 21-23장(civil law)은 시민법이며, 24장에 오면 covenant making(언약의식)이 된다. 25장은 성막건축을 지시하는데 먼저 헌물에 대하여, 설계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31장에 가면 건축기술자를 택정하고(브사렐, 오홀리압), 이어 12-18절은 안식일 규례를 말씀한다(이것은 언약에 있어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나와 너희의 표징, 영원한 언약이라 한다 - 두 돌판을 주심.
32장은 Aposfacy of Israel(이스라엘의 배도), Intercession of Moses for Israel(모세의 중보), Covenant Renewal(언약갱신)이 나온다. 31:18절에서 두 돌판 주심은 증거판이며 맹세인데 32장에서 배도해 버리자 모세가 돌판을 깨어버린다. 그 의미는 언약의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세는 다시 중보기도하고 renewal한다 - 두 돌판 다시 주심.
34장에 두 돌판을 다시 들고 내려옴.
35장에 안식일 규례가 또 나타난다.
31장의 성막규례가 나타나고 또 35장에 다시 성막규례가 있는 그 둘의 차이는, 전자는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신 것이고, 후자는 그 명령을 받은 모세가 대신 명령을 시행하는 것이다. 그런 구조에서 볼 때 31장의 성막규례는 바로 35장으로 연결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32-34장의 내용은 왜 들어가 있는가?
그 의미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대해 이스라엘이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하며 모세의 중보로 인해 파기된 언약이 다시 갱신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문맥은 성막건축 명령과 시행(35장) 사이에 되어짐으로서 성막의 기능의 주요한 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파기된 관계를 회복시키는 의미라 하겠다. 이것이 레위기의 성막제도(cultic system)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거룩하지 못한 백성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제사를 통한 거룩화된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성막인 것이다.
35장은 성막건축이 시행된다. 헌물 → 시행자를 불러 → 성막을 세움.
35-40장은 성막에 관계된 제도이다. 반면에 레위기는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의 일부인데 특히 성막과 관계된 율법이다.
34장은 십계명과 연결되는데 조목이 3개 많아 13계명이라 한다. 그 계명은 cult와 관련된다. 그래서 34장은 cultic pecalogue라고도 한다. 어떤 자들은 출 20장의 십계명과 34장의 십계명을 다르게 해석하는데, 그것은 모세와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을 너무 축소화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출 20장의 십계명은 그것만 말씀했다는 뜻이 아니라 많은 말씀 중 가장 밀도있게 요약하여 주신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레위기는 출 34장의 십계명을 더욱 자세하게 풀어 설명하는 것이다. 출 5장에 보면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섬기게 하기 위함이다’고 한다. service는 애굽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삶의 본질을 의미한다. דבע(아바드) : 하나님을 섬기는 삶. 이것은 롬 12장의 신약적 원리와 같다.
하나님 섬김의 원리는 ‘십계명’(출 20장)이다. 20장 첫 부분은 하나님 섬김이 나오는데 특히 뒷부분에는 의식영역(cultic service)에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김은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제사적 형태의 service이다. 레위기는 성막 중심의 삶이다.
출애굽기 마지막 부분에서 확인한 것은 성막 중심의 삶이다. 법은 삶의 규범, 도리이다. 따라서 삶의 중심에 성막이 위치함은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레위기는 성막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삶이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성막을 회막(דעומ להא; 오엘 모헤드)이라고 한다. 회막 = 만남의 장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영적, 인격적으로 그들 가운데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과 만남. 만남의 장소이므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고 그에게 말씀하신다 = 계시. 그러므로 cult의 기본구조(임재, 계시)는 만남이다. 이것은 족장시대의 cult구조와 동일하다.
이스라엘의 삶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다. 회막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특징은 형식으로서는 제사요, 본질로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다(고르반).
Theophany(하나님이 직접 인간 처럼 나타나셔서) 계시하신다. 성막의 임재 특성은 throne(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왕으로서의 통치이며 그 백성을 다스리시는 형태이다. הבצמ(미츠바)  또한 예배의 형태이다. 성막 중심의 삶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하나님 면전에서의 삶이다. 신약의 요한 1서는 레위기를 근본으로 하는 것인데 cultic 구조 속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리킨다(κοινωνια;코이노니아). 하나님에 대한 감사, 사랑, 헌신 등이 일어나는 장소, 이런 형태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제사이다. 사죄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제사이다. 이와같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사죄이다. 그러므로 그 만남은 사죄와 동시에 축복의 만남이다.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당시의 cultic system을 비판하는데 그 이유는 예배와 삶이 괴리되었기 때문이다. cult는 life를 통해 더욱 구체화 되는 것이다(롬 12장).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된 삶을 cultic용어로 말하는 것에서 cult와 life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삶과 예배가 분리될 때는 둘 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mere cult - 형식주의에 빠짐
mere life - 인본주의에 빠짐
실 생활에 이루어지는 감사와 헌신, 사귐 등이 가장 밀도있게 이루어지는 순간과 장소가 바로 예배이다. 물론 예배 자체도 하나님 섬김의 삶의 일부이지만, 예배는 대표성을 갖고 삶을 예배화시키는 것이다.
구약체계 속의 이스라엘은 율법지킬 능력 없음 때문에 반드시 성막과 제사를 필요로 한다. 비거룩한 존재가 거룩성을 요구받을 때, 그 결과는 절망이고 그 회복은 제사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신약의 요한 1서에도 그대로 구조화되어 나타난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범죄하면 거짓말 ??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죄없다하면 거짓말 ?? 그 해결책은 요일 1:9절의 자백이다.
레위기 6,7장을 보자. 성막 중심의 삶은 곧 하나님 중심적 삶이다. 그것은 ןברק(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리는 것(offering)이다. 그리고 제사에 관한 것이 6,7장이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고르반의 의미가 매우 복잡하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실제에 있어서는 매우 복잡하다. 드림의 구체적 형태는 5가지 제사로 나타난다. 이것을 흔히 5대 제사라 한다.

* ןברק(코르반)의 종류(5대 제사)
1. הלע 올라; 번제)
2. החנמ 민하; 소제)
3. םימלשׁ חבז(자바 쉘라밈; 화목제) - 감사제(הדוג;고다 , 서원제, 낙헌제
4. האטח 헤타아; 속죄제)
5. םשׁא 아샴; 속건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빈손으로 나아오지 말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항상 드릴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속죄제나 속건제는 사죄의 의미이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 있지 않고 하나님께 받는 것이 오히려 포함되어 있다.

* 제사드리는 방법
화제 - 태워드림, 요제 - 흔들어 드림, 전제 - 부어드림.

* 제물의 종류
밀가루, 기름, 향료, 소금, 소, 양, 염소, 비둘기

* 번제, 화목제, 소제 → 삶의 의식적 형태(드려짐)
속죄제, 속건제 → 피로 인한 대속

번제는 모든 것을 다 태운다. 이것은 순전히 드림만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1:3절을 보면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열납되는 것이 포함된다. 4절은 이 제사를 통해 속한다(רפכ; 카페르). 이는 pay off로 갑을 치루는 뜻도 있다. 죄값을 지불하는 것(속죄)과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죄가 덮여지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드림의 의미도바 우리가 받는 것의 의미가 더 많다. 하나님께 드림의 형태가 제사의 형태로 되어 있다. 이는 상징적인 행동 양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어서 인간들의 행동이 상징성을 띨 수 밖에 없는데 이는 하나님은 영이신데 인간은 영육의 통일체(영육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현 창조질서의 존재방식에 결과). 그러므로 영적 만남이라도 가시적 형태가 필요했다. 이 여러가지 형식은 영적 실재들을 상징한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이 반드시 이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레위기에서 여러 형식이 어떤 영적 실재를 상징하는지 잘 알 수 없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그 의미가 어느 정도 밝혀져 있으나 화목제도 추측할 수 있는 당시 실마리가 있는데 번제와 소제는 무엇을 의미하는제 성경내에서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번제 הלע는 출애굽 이전 노아시대까지도 드려졌던 종류이다. 속죄제나 속건제는 출애굽 이전에는 출현하지 않는다. 번제, 화목제는 이스라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고대 근동 여러 민족에게서도 보이는, 이방종교에도 있는 형태이지만 속죄제와 속건제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형태이다. 그리고 속죄제와 속건제는 그 제사의 뜻이 분명하게 밝혀진다(죄를 사함).
번제, 화목제의 뜻이 명확치않는 이유는 이방종교에도 알려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 당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제사의식이므로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근동지역의 종교적 맥락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오히려 이 의미는 구약성경 문맥에서, 그리고 역사적 으로 성경을 자세히 살피면, 역사적 흐름이 예전부터 있어 왔음을 희미하게 발견할 수 있다. םימלשׁ은 LXX에서 σωτηριος(소테리오스)라고 번역함으로써 구원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האטח와 םשׁא은 이스라엘의 독특한 제사형태이다.
구약에서 가장 오래된 제사는 소제와 번제이다. 즉, 가인과 아벨의 제사이다. 이 두 사람의 제사는 다 소제였다. 레위기의 5대 제사에서는 번제가 먼저 언급되었으나 역사상으로는 먼저 소제가 나와 있다(명백한 언급). 소제가 역사상 최초의 제사였으나 제사의 존재를 맨먼저 언급하는 구절은 아담에게 가죽 옷을 입힘에서 즉, 동물을 죽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치부를 나뭇잎으로 가림은 성적인 범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성결의 상실이 그러한 표현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즉, 내적 부패의 표현, 다른 사람의 나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순결하게 보지 못하는 내젹인 부패에 대한 표현이다. 내적인 욕망, 정욕이 생겨 자꾸 죄를 생각나게 하므로 부끄러워 그 나체를 가리게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를 생각하지 않도록 즉, 이는 우리의 죄성을 은폐해 보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혀 수치를 가리셨다. 짐승의 죽음은 피흘림으로 죄를 가리움이다. 이것은 바로 속죄의 원리가 아담에게 계시되지 않았겠나 추측할 수 있다(단순히 추측이다). 그리고 레위기의 번제에서 다 태우는데 그 중에 안태우는 것이 있다. 바로 동물의 가죽이었다. 이것과 이상의 가죽 옷을 연상하는 사람이 있다. 만일 이것과 관련을 시킨다면 이것은 역사적인 면에서도 최초의 제사는 번제라고 볼 수 있다. 성경에서 명백하게 말하지는 않았으나 성경의 문맥을 보면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동물은 정결한 짐승에 속하며 대개 가축(야생동물이 아니다)에 해당한다. 여기서 제물의 종류에서 생각할 점은 첫째 ‘음식’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 생산하는 것들이다. 이런 점을 organize한다면, 성막 중심의 삶이 첫째로 제사로 시행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ןברק(제사)으로 된다는 것(바치는 것)이다.
소제 : 최초로 성경에 기록된 제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였다. 레위기의 소제는 밀가루, 향료, 소금 등으로 드리는 식물성의 제사이다. 가인의 제사는 곡식, 아벨은 양을 드렸다. 그러나 아벨도 소제로 드렸다고 나온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의 의미는 소제라고 보는 것이 좋다. 왜 한 사람은 곡물로, 한 사람은 동물로 제사를 드렸는가? 창 4:4절을 보면 분명히 아벨은 제물을 죽여서 드렸다. 뿐만 아니라 아벨의 제사는 기름으로 드렸다. 그런데 분명히 동물을 죽여서 드렸으나 성경은 곡식으로 드린 것이나 동물을 죽인 것(피흘린 제사)도 다 החהנמ(민하; 소제)로 표현했다.
가인 - 곡식, 아벨 - 동물의 제물에서 이는 자기 직업과 관련된 제물이었다. 즉, 자기 일에 열심히 해서 그 소산으로 제물을 드림이다. 여기서는 제물의 종류보다는 그들의 공통점 즉, 그들이 숙하여 일한 열매로 하나님께 드렸다고 보는 것이다. 직업, 수고, 삶의 열매,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의 영역에서 수고로 얻은 삶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림 즉, 삶 자체를 드리는 것이다. 물론 신약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 맺는 삶을 드리라고 한다. 이는 레위기 2장의 소제와도 연결된다.
기름은 대개 성령을 상징한다. 즉,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맺게 하시는 열매를 드린다. 이것을 태워 드릴 때, 향기롭고 하나님께서 열납하신다. 소제에 관하여 또 참고해 볼 수 있는 성구가 창 32장이다. 야곱이 에서에게 선물을 보내는데 그때 선물이 바로 החנמ(민하)인데 에서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이다. םינפ אשׁנ(나샤 파님) 누구에게 호의를 베풀다. ...을 맞아들이다. 누구에게 편애, 특별대우하다. 사정을 봐주다의 의미이다. 이것은 소제와 관계가 없으나 החנמ의 성격을 보여준다.
창 4:7 תאשׂ ביטית־םא אולה(할로 임-테티브 세에트) 여기서 ביטית는 אשׁנ בוט(토브 나샤)이다. 어찌 낯을 들지 못하느냐, 왜 얼굴이 떨어졌는가? ביטית는 내적 삶만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외적 삶의 형식도 나타내는 두 성격을 포함한 것이다. 소제는 삶의 열매, 직업과 관련된다. 그래서 내적인 면과 외적 생활도 포함하는 것이다. 창세기 32장과 4장에서 알 수 있는 소제의 성격은 그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제사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이다.
최초의 명백한 번제의 제사 기록은 노아의 제사이다. 바로 홍수 후에 정한 짐승을 잡아 번제로 드렸다. 최초의 두 가지 제사 형태는 번제와 소제이다. 이는 레위기 5대 제사들의 순서와 일치한다. 창 4:26 셋의 아들 에노스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 5:21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 이곳에서는 제사가 있었는지 명백한 기록이 없다.
노아에 와서 두번째로 제사가 명백히 기록되었다. 노아는 제사 드리기 전 먼저 제단을 쌓았다. 회막 앞의 제단은 번제단을 말한다. 상번제는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불이 타게 한다. 안식일에는 2번 드리나 평일에는 한 번 드린다. 화목제(기름, 콩팥 등만 드림)는 이 상번제 위에다가 사르게 되어 있다. 레위기의 번제의 제물은 정결한 짐승 중에서 가축을 드린다. 소나 양이나 비둘기 등을 드리는데 노아가 정결한 짐승을 드림은 앞으로 레위기에서의 제사의 선조전형(proto-type)이다. 노아에서부터 정결한 짐승을 구분하였다.

레 1:3 번제의 효과는 죄값이 치루어져 그의 죄가 가리워져 속하게 된다. הוהי ינפל ונצרל ותא בירקי(야크리브 오토 리르초노 리프네) 여기서 밑줄 친 ו는 황소를 가리키는지, 제물드린 제사자를 가리키는지는 이론적으로 둘 다 가능하다고 보여지나 문맥을 보면 황소를 드려 제물을 열납되게 하라는 의미보다 제물 드린 자가 열납되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자로 설명한다. 즉,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서게하는 것이다. 의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의 조건이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것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과 상호교환된다. 히 11:4 더 나은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는 제사요 이는 의롭다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즉, 더 나은 제사 = 열납되는 제사 = 의.
1:4 안수한다 = 동일시한다. 내가 죽어야 할 것을 짐승이 대신 죽는다. 그러므로 내 죄를 전가한다는 의미보다는 내 대신 짐승이 죽는다는 동일시의 의미가 더 강하다. 예를 들어 신약의 안수는 하나님이 디모데가 장로회에 안수하셨다는 것으로 하나됨의 의미가 더 커서 동일시의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뿐만 아니라 야곱이 므낫세, 에브라임에게 안수한 것은 야곱의 축복에 동참함이다.
레위기 1장에서 번제의 의미를 살펴보면, 대속적인 죽음에 의해서 내 죄가 사해지고 내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다는 중요한 의미이다. 가죽을 제외한 전부를 태워 드리고 내장과 다리를 씻어 전부 드림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노아에게서도 속죄적인 의미의 번제를 찾아볼 수 있다. 창 8:21ff에서 노아의 제사를 열납하시면서 하나님은 인류의 악함을 인정하시고 그러면서도 이 땅과 모든 생명을 저주하지 않으시고 멸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희망이 없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죄를 사하사 죄의 결과인 사망의 효력을 무력케 하셨다. 이는 레위기와 일치한다. 삶의 질서존속을 약속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선언하신다.
번제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창 22장 이삭을 바치는 사건에서 나타난다. 창 15:9 언약의식과 관련하여 제사드림이 나오는데 이도 번제이다. 언약과 제사의식을 논할 때의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창 22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온전함을 알기 위한 시험이다. 번제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헌신, 자기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의미가 있음을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창 22장은 창 17장과 더불어 주어진 할례의 언약(새 삶의 시작으로 새 삶에 대한 요구)을 완결하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인신제사를 요구하심. 당시에도 통상적인 제물은 양이었음을 알 수 있다(22:9). 따라서 인신제사를 요구하심은 상상밖의 일이다. 결국 시험의 목적이 경건, 헌신을 알고자한 것이었다는 결론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이삭을 바치라는 이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인신제사를 하나님은 절대로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세의 율법에서도 절대 인신 제물을 드리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전체 삶을 통해 드리는 헌신과 순종을 즉,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더욱 요구하시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질 수 많은 제사(대하 3:20, 모리아산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짐)를 예시한다는 것을 비춰볼 때, 이삭을 바치는 인신제사는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이삭은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선언 명령이었다. 이삭은 그 허리 안에 이스라엘이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보면 인신제사는 필연적이었다. 동물의 피가 인간의 죄를 해결 못하므로 인간의 제사가, 인간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번제에는 ①경건 또는 헌신, ②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삭을 바치라는 인신제사에는 이삭이 죄인으로 반드시 죽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의해서 심판과 죽음이 제거된 후에야만 경건과 헌신이 의미있고 하나님의 정당한 요구였다. 따라서 이삭은 죄인이요 죽어 마땅했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요구가 다른 사람의 죽음에 의해서 만족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유일무이한 인신제사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린 것이기 때문이다. 인신제사를 금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이교에서의 악한 풍속(이기적인 제사)의 부당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을 확대하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누구도 죄를 대속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특별한 의미에서의 인신제사를 드려야 할 분이 오셔야 함을 의미한다.
소제(החנמ  중에 한줌을 태우는 것을 ‘기념물’(레 2:2)이라 한다. 번제는 헌신, 화목제는 감사, 서원, 낙헌제는 교제, 속죄제, 속건제는 속죄, 소제는 처음 것을 바친다. 이런 것들이 제사 속에 포함되어 있고 또한 제물의 재료는 손으로 수고하여 얻은 것이라고 한다면, 신 26장의 고백처럼 이스라엘의 생명이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의미이다.
이 제사(의식)의 내적 의미가 ‘하나님 섬김과 감사의 삶’에 있다고 할 때, 선지자들의 지적(삶과 의식의 괴리)과 롬 12장의 바울의 명령들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갈 5장, 롬 6장에서 성도의 삶을 ‘열매’라고 한다는 것을 본다면, 삶이 모두 주께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제사의 ‘제물’은 삶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또한 제물은 내 삶과 나 자신을 바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제사가 삶의 대표적 집결형태로써 나타난 것이 첫째 의미라고 한다면 두번째 속죄제와 속건제의 의미는 피로 인한 대속에 있다.
피는 생명의 희생인데, 제물이 희생됨으로써 내가 희생됨을 대신한다(제물과 나는 identification 됨). 제사드리는 자는 제물의 피를 통해 죄의 무서움을 실감해야했고 하나님을 반역한 댓가의 심각성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죽을 것을 제물이 대신 죽는 것이다. 그러나 제물이 죽는다고 해서 진정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을까?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은 죽는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두 가지(드려짐과 속죄)가 동시에 만족되는 예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이다. 그러므로 제사는 본래부터 완전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보다 나은 온전한 제사(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를 바라보는 성질이 있었던 것이다. 드려짐과 속죄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동시에 충족한다.
offering 하나님과 나의 화목 ??
하나님으로부터의 내 죄의 속죄 ??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
피와 살은 결국 의식적 용어인데 성만찬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겨냥하고 제사의 온전함을 기념하는 중요한 성격이 있다.
화목제, 감사제, 서원재, 낙헌제 등 여러가지는 그 모델이 야곱이 벧엘에서 서원한 것이 그 모델이다. 다른 제사와 다른 화목제의 특징은 제사드리는 사람이 그 제육에 참여함이다. 제사자가 함께 참여하는 교통, 사귐을 통하여 대적관계의 해소, 화목이 이루어진다. 그 화목에 근거한 사귐이 그 요소마다 나타난다.

* 신약에 근거해서 구약 제사제도를 밝힐 수 있겠으나 구약의 제사제도를 통해 신약을 밝힐 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죽음을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배하는 삶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막을 주시고 그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삶, 섬기는 삶의 형식이 제사이다. 자신의 경건과 수고로 되는 것이 아니고 먼저 우리의 죄 값이 먼저 치뤄졌음을 알아야 한다. 대속적인 죽음(죄사함이 있은 후에) 후에 헌신과 경건이 가능하다. 제사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통한 삶(하나님의 은혜)과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드림이다. 성막에서 상징적 형태로 섬겼다. 즉,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을 예표하기 때문이다. 이는 예표적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말하기 때문이다.
레 1:3-4 제사가 열납됨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의 삶의 핵심을 차지하는 성막이 하나님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성막에서는 제물 즉, 가시적 물건, 행동으로 의식이 이루어지기는 하나 여기서 예배자는 하나님의 어떤 면을 가장 철저히 느끼고 의식하게 될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물론 하나님이 임재하시겠다고 했지만 그리고 법궤, 그룹 등으로 임재를 표현했지만)이므로 하나님의 철저한 영적 성격을 느낄 것이다. 영이신 분, 인간을 초월해 계시는 분임을 느낀다(하나님의 인도하심, 역사하심은 생활 속에서는 더욱 느낄 것이나). 그러면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요 4:24 신령과 진정이다. 이때 진정은 진리, 참된 것, 진실함이다. 이 신령과 진정은 여러 말로 번역이 가능하다. 신령 - 영, 성령. 진정 - 진리, 참된 것, 진실함. 하나님을 확실히 의식되는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적 자세, 영적 자세가 절실히 요구된다. 하나님이 예배에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가장 깊은 본질인 영적인 자세로 내면의 마음을 원하신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바로 상한 심령이다(시 51:17).
시편에서 예를 보면 다윗의 시, 아삽(레위인으로서 성전에 관련된 찬양대 사람들)의 시를 볼 수 있다. 사해사본 psalm scrawl에 보면 시편 중 가경이 한 편 삽입되어 발견되는데 여기에 나와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상번제를 드릴 때 찬양을 드렸고, 이 찬양을 위해 365곡을 지었다. 절기, 안식일을 위해 작곡했다 한다. 제사가 있을 때 찬양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요제와 같은 흔들어 드리고 들어서 드리고 하는 외적 상징도 있었지만 상당히 영적 내용을 갖춘 찬송도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향은 성도의 기도(게시록, 스가랴 보면 분향시 밖에서 백성은 기도한다)로 보인다. 그래서 제사는 외적 상징 의식과 함께 내적, 영적인 찬송, 기도가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속죄제를 드리는 경우는 행하지 말아야 할 것(금령)을 범한 경우인데, 누가 알려주거나 스스로 깨닫거나 간에 드려졌다.
속건제는 누가 맹세, 저주하는 말을 듣고도 증언을 거부할 경우, 부정한 것에 접촉한 경우, 말로써 함부로 서약하는 등 말로 범죄하는 경우, 여호와의 성물을 범하는 경우에 드려졌다. 그러나 속건제는 속죄제보다 가벼운 경우의 죄일때이고 그리고 20%를 더하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 경우와 하나님의 성물을 속되게 하는 경우로 보여지기도 한다. 어쨌든 두 경우(속죄제, 속건제) 다 죄를 깨닫고 죄를 속하는 제사이다. 그래서 죄가 용서 받고 사해지는 제사이다. 이것은 신약의 요한일서 1:9와 연결된다.

6-7장은 1-5장의 내용의 반복인 것 같으나 1-5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규례라면, 6-7장은 제사장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례로서 제사장들에 관한 구절이 많다.

8장은 성막을 지키는 자들의 세움 - 아론과 그 아들의 임직식. 제사장을 세웠다고 하는데 제사장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은 중보자를 통해서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복된 삶을 매개하는 중보자이다. 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중보자 역할이다(축복의 전달자). 출 20:24 → 신 12:5. 성막에서의 하나님을 섬김에 이스라엘 백성이 참예하는 부분은 제물을 끌고와서 안수하는 것, 화목제의 경우는 함께 먹음, 그 나머지는 모두 제사장이 제사를 행한다(제물을 죽임, 피뿌림). 그리고 아무나 지성소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제사장 조차도 1년에 한번씩 돌아가며 들어갔다.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고 중보자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보자는 양편을 다 대신한다. 중보자가 이스라엘을 대신한다는 증거는 흉패와 견대 위의 보석에 12지파의 이름을 새김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편에서는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제사장이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증거는 민수기 6장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을 제사장이 대리하여 선언한다.
구약의 제사장, 제물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사장과 제물의 의미를 다 갖고 계신다. 제사장과 제물의 대리되는 섬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제사와 제물이 결합되어 그 의미를 나타내 준다.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림과 동시에 이것이 대속의 효과를 가지고 동시에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셔서 섬기셨다.
7일간의 임직식 후 8일에 첫 제사를 드린다. 이때 하나님이 가시적으로 영광으로 나타나셔서 제사를 받으신다. 즉, 하나님 앞에서 불이 나와 모든 제물을 불태운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와 이스라엘의 제사를 열납하심의 가시적 확인이다. 이 첫 제사 때 불이 나와 살랐기 때문에 그 불을 항상 꺼뜨리지 말고 보존하라는 것은 번제단의 불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초자연적인 불이라는 의미이다.

9:22ff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하였고 번제, 속죄제, 화목제를 드린 후 내려왔다고 되어 있다. 그 다음 모세와 아론이 회막 밖으로 나와 백성을 축복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표시가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그의 앞에서 불이 나와 번제 위에 놓은 것(기름) 등을 태움은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열납하셨다는 표시이다(번제의 제사는 내장의 기름, 콩팥, 신장 등을 태운다). 그리고 번제 위에 화목제 등의 제사의 제물을 태웠다. 제단 불을 꺼뜨리지 않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초자연적인 불에 의해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기를 원하셨다.

10장은 성막에서의 섬김의 전형을 가르친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분향)을 드리다가 하나님께로부터 불이 나와 그들을 태운다. 여기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불이 아닌 다른 불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죽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며, 더우기 제사장이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즉각 하나님이 처리하시며 3절 이하를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말은 제사장의 중보자적인 역할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사건으로 הוהי의 명하시지 않는 불을 분향하자 즉사해버린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상징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성막의 삶은 일상생활의 삶의 응집된 형태인데 이 삶의 모형 사건에서 일상생활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를 깨닫는다. 임직한 제사장이 첫번째 행한 사건이 즉사사건인데 그런 무서운 징계의 의미가 10:3절에 나온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는 더욱 엄격한 성결이 요구되는 것이다. 제사장은 모든 백성의 model로서 정결의 모형이다.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모시는 특권을 가진 자로서 가질 태도는 가장 엄격한 성결이다. 그 성결을 통해 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신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에게는 괜찮은 일이 제사장에게는 안되는 것으로 요구되는 것이 많다. 제사장의 불경건을 심판하심으로써 모든 백성의 성결을 깨닫게 경계하신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왕국으로서, 이스라엘 전체의 성결이 요구되는 것이다.
דבכא םעה־לכ ינפ־לעו שׁדקא יברקב(비크로바이 에콰데쉬 웨알-페네 콜-하암 에카베드)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 공경, 중히 여김, 거룩히 여김. 이는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으로 인정받음을 나타낸다.
왜 나답과 아비후를 혹독히 심판하셨는가? 이는 10:3 거룩히 여김을 받거나 거룩함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이다. 이 거룩을 나타내심의 목적은 모든 백성에게서 공경을 받거나 영광을 얻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제사장의 위치는 모든 백성의 본이 됨이다. 하나님은 그를 가까이 하는 자에게 더욱 성결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의 실패는 그 제사장에게 엄중히 문책하신다. 심판은 하나님의 집(백성), 교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심을 통해, 그의 삶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신다. 즉, 신자의 성결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성결을 나타내 보이신다.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는 제사장에게 더욱 성결을 요구하심으로 인해 일반 백성에게는 허용되는 일이 제사장에게는 허용이 안되는 것이 많다. 부모, 친척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고, 제사드릴 때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처녀와 결혼하고, 제사장 자녀 중 창기 노릇을 하는 자는 불태워 죽이라고 하시면서 더욱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신다. 이러한 요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 바울의 교훈은 성도들의 본이라고 한다. 벧전 2장은 이 원리를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확대하신다. 마 5장 역시 너희의 선행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신다.
10:4은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제사장은 섬기기 위해 성막에 올 때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어떠한 진지함으로 섬겨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보이지 않으나 영으로 임재해 계시므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너무도 분명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예배는 너무도 인간중심적이다. 인간들에게 흥미 혹은 재미있는 것을 제공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10:8-16절에 이와같은 사건을 통해 모세가 ‘제사장의 성결’을 가르친다. 여호와의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 독주를 마시지 말라. 성,속을 구별하고, 정하고 부정한 것을 구별하라. 그리고 이 구별을 일반 백성에게 가르치라고 한다. 16절에 보면 속죄의 제육을 먹게되어 있는데 아론이 태워버렸기 때문에 모세가 노하자. 아론이 ‘속죄제육을 먹었더면 הוהי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하자 모세가 선히 여겼다고 한다. 이상한 것은 나답, 아비후도 법규위반이고, 아론도 법규위반인데 나답, 아비후는 즉사하고 아론은 그 마음 동기로 인해 용서 받았다(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제육먹기를 삼가한 것). 그러므로 법규위반 자체가 그렇게 문제되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을 어떻게 여기는가가 문제가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cult는 하나의 기계적 효과나 단순한 의식 효과가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믿음과 내적 태도가 동반되어야 함을 가르치신다.
① 나답, 아비후 즉사 사건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무리 미미한 의식이라도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라면 죽음으로도 바꿀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② 아론의 사건에서는 하나님께서 cult만이 기계적 효과가 아니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내적 태도를 중요시함을 가르친다.
①의 보충사건은 홉니와 비느하스의 제육 뺏은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죽이시기로 뜻하실만큼 의식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②의 보충사건은 이스라엘이 법궤를 메고 나가기만 하면 이길 것이라고 마법적 신앙 가진 것을 하나님께서 깨뜨리시고 패배하도록 하신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법궤가 블레셋에게 갔을 때는 그 법궤 자체의 거룩성이 또한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사건을 한꺼번에 다루심으로 하나님의 명령의 중하심과 명령의 기계적 적용보다는 유기적 순종의 중요함을 동시에 가르치셨다. 하나님을 모셔 사는 자에게는 구별됨이 요구된다. 철저히 구별하여 거룩하고, 정결한 것만 취하고, 부정하고 속된 것을 제거해 버려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 이 사건이 기록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10:11로서 이 성,속의 구별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를 가까이 하는 자는 거룩해야 한다는 사실이 제사장 뿐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도 요구됨을 간접적으로 확인하신다.

11장 이하 온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성,속 구별의 규례에 대해서 설명한다. 44절 이하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하신다. 11장의 성,속 구별이 어떤 영역에서부터 시작되는가? 먹는 음식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먹는 음식에서부터 철저히 성,속을 구별하여 지키라고 하신다. 속된 것에서 자기를 지켜 성결하게 되는 삶이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10절 ץקשׁ(샤콰츠; 가증한 것)는 혐오감을 주는 것,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구역질난다는 뜻을 가진다. 비록 외부적인 것이라도 우리에게 혐오감을 주는 것은 철저히 피하고 하신다.
이 먹는 것에서부터 성,속을 구별하여 지키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적용될까? 먹기를 탐하는 자 처럼 하지 말라. 바울은 누추한 말, 희롱의 말을 피하라고 한다. 이는 말까지도 조심하라는 뜻이다. 혐오감을 주는 것은 먹는 음식에서 유출병(피나 썩은 고름, 썩은 피 등이 흘러 나오는 것)의 모든 것, 아이가 태어나는 고귀한 생명의 탄생에 있어서도 혐오감을 주는 것은 정결케 하기를 말씀하신다. 그러나 과연 혐오감 주는 것 때문에만 금하심인가? 바리새인이 제자들을 비난시 예수님께서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했다.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의 두 가지 원리를 배울 수 있다. ①사람의 존재 방식은 마음에서부터 즉, 사람의 성결은 마음에서부터이다. ②구약의 규례도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이다. 겉만 깨끗케 함이 아니요, 영혼을 깨끗하려 하려는 것의 상징적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정한 것은 초식동물(반추동물)이다. 반대로 부정한 것은 맹수(피와 살을 찢고 먹는 것), 포학성, 비늘 없는 것(뱀 처럼 생긴), 새는 육식류인 맹조류이다. 부정한 것들 중 특히 그 시체가 우리를 더럽게 한다. 이는 더러움의 진정한 근원이 죽음에 관련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특히 죽음이 더러움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또한 죽음은 죄와 관련되어 있다. 죽음은 육체의 죽음 뿐 아니라 죄의 모든 악한 결과를 말한다. ‘먹으면 죽으리라’에서 이때의 죽음의 의미는 매우 포괄적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모든 죄악의 악한 결과이다. 육체적 죽음은 여러 의미의 죽음의 극단적이고 가시적인 표현이다. 바로 죽음의 대표격이다.
채식은 창조 때부터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채식에는 부정, 정결의 구분이 없고 육식(노아 이후)과 관련해서 정결과 부정, 먹을 것, 먹지 못할 것을 말씀하신다. 노아 이후 왜 육식이 허락되었을까? 외부적, 육신적 차원에서 보면, 육식은 매우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즉, 과중한 육체 노동을 하는 자들이 필요로 한다. 타락 후 인간의 사회 환경이 열악해진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마에 땀이 흘러야 즉, 중노동을 해야 먹고 살게 된다. 노아를 낳을 때 중노동에서 안식을 주신다는 의미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노아 홍수 이전에 지금보다 따이 훨씬 척박했다. 삶의 환경이 훨씬 열악했으므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육식을 허락하심은 오히려 은혜라 할 수 있다. 성경을 보면 홍수 이전보다 홍수 이후가 훨씬 더 환경이 좋아졌을 것이다. 이 육식 허락이 있기 전 노아가 정결한 짐승 잡아 번제를 드린다. 따라서 육식 허락이 단순히 식량 문제 뿐 아니라 번제와 관련이 된다. 짐승은 사람의 죄를 해결하는 외적 상징이 되어왔다. 육식 허락은 하나님의 은혜의 허락이었으나 단순히 물질적 양식뿐 아니라 영적 차원의 제사제도의 의미도 가졌다고 본다.
성막 중심적 이스라엘의 모습은 광야의 출애굽 때나, 가나안 정착 이후나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포로시대에도 역시 성막중심이었고, 에스겔에 보인 제 2성전의 이상은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며 그를 섬기는 삶이 이스라엘의 본래적 삶인데 상징적 모습이 레위기에 드러났다. 성막을 통한 제사에서 감사와 서원 등이 있고(cult), 금지 동물과 허락 동물이 주어졌고(음식규례), 윤리적 영역으로 확대되었다(성적규례).
「성막의 삶」 = Cult → 음식 → 윤리 → 삶 전체 영역에로 확대
cultic service → whole life service
그 섬김의 삶의 질(Quality)은 한 마디로 ‘שׁודק’(콰도쉬; 거룩)이다. 레 11:44-45절은 הוהי가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신다. 그 명령의 근거는 출애굽으로 인한 구원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명령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말씀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백성(창 1:26-27), 그런데 거룩의 근거를 창조에서 찾지 않고 구속으로부터 찾는 것은 구속의 의미가 창조의 완성이요 회복이기 때문이다.

* שׁודק의 개념
① ...으로부터의 분리적 의미 ?? 레위기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 아래의 삶의
② ...에로의 합일된 의미 ?? 질이 「거룩함」이다.
שׁודק의 개념을 세목해보면 pure(정결)와 관련된다. רוהט(정결)   המט(부정),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이후 하나님께서 성,속을 구별토록 하셨다. 거룩한 것과 거룩을 더럽히는 것을 구별하셨다. 성,속의 구별은 ‘음식’에서부터 시작한다.
먹을 수 있는 것 - 새김질하고 굽이 갈라진 것. 이 특징은 초식동물이라는 것이다.조류도 맹금류는 금지되고 순한 것만, 물고기도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만 해당된다. 부정한 것을 관련짓는 단어는 ץקשׁ(샤콰츠)로서 이것은 혐오스럽고 가증한 것이다.

12:45 성,속 구별의 목적과 이유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그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속된 것에서 끊어 성결하라. 우리 삶 속에서 얼마나 성결해야 되는가? 신약에서 희롱의 말이나 부정한 말도 하지 말라고 한다. 사회적으로도 신사적이지 못하고 비열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천박한 말이나 행위는 특히 목회자에게 합당치 않다고 했다.
12:1을 보면 매우 의아스러운 내용을 다룬다. 출생과 관계된 내용이 나온다. 출생은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도 출생과 관련해서 정결케 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깊이 생각할 것을 요하는 문제이다. 새생명, 새존재의 탄생, 가장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새생명의 탄생도 더러움에 오염이 있으므로 정결케 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외적인 위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모든 외적인 규례는 내적 성결에 대한 상징이다. 인간의 모든 생활 영역이 타락해서 부정하다. 죄의 결과 타락의 부정이 삶의 구석 구석에 스며 있다. 출산하면 산모가 부정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신약에서 보면 해산하므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해산을 부정한 것으로 보는 이유가 있다. 최초의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그 타락이 미친 결과 중 가장 직접적인 것이 죽음과 해산의 고통이다. 해산은 죽음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새생명을 잉태하는 모체가 죽음의 위협을 느낀다. 즉, 죄의 저주로 인한 해산의 고통을 상기한다. 특히 다량의 출혈로 인해 죽음의 위협이 가중된다. 특히 출산 후 7일간 부정하다. 이는 생리 기간과 같이 부정하게 여긴다. 이는 창세기의 죄로 말미암은 저주이며 심판과 관련이 있다.
사내아이는 7일간 부정하고 33일의 정결기간이 필요하다.
여자아이는 14일간 부정하고 66일의 정결기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구별은 최초 범죄의 경중을 구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사내아이는 8일에 할례를 행한다. 이때는 옛 존재의 죽음과 옛 존재를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됨을 의미한다. 새 생명이라도 죄를 끊어버려야 새 존재가 되는 것이다.

13-14장은 악성 피부병, 문둥병 = 썩은 고름이 터져 나옴, 부스럼. 음식(육적 생존), 출산(새로운 탄생으로 하나님 형상을 가진 존재로 태어남), 생리나 병은 인간의 생존과 삶에 들어온 것으로 순수한 부정적 요인으로서 죽음과 좌와 관련된 것이다. 특히 피부병은 가장 외적인 병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이런 환자는 진 밖으로 내보내고 나으면 들여보내라. 이는 잠정적인 출교(excommunication; 교제의 단절)이다. 특히 피부병은 전염성이 강하다(사람의 옷, 담벼락에까지 전염). 즉, 다른 사람에게 더러움을 옮기는 전염성이 강한 것이다. 악성 피부병 환자를 진 밖에 내어보냄은 오염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다. 나으면 다시 들여 보내라는 말은 오염의 근원이 제거되면 다시 들여보내는 것이다. 이때 오염을 문제삼는 것은 공동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이것을 오늘날 적용하면 고린도교회의 성범죄에 대하여 볼 수 있는데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짐을 비유한다. 외부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너희를 더럽게 만드는 오염의 근원을 제거하여 온 공동체 전체가 부패하는 것을 막으라는 것이다. 즉, 공동체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범죄의 경우는 돌로 쳐 죽이는 등 죽임으로 완전히 그 근원을 제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염을 제거하는 방식은 마 18:15-17로 온유한 심령으로, excommunication은 육체를 사단에게 내어주고, 그 영혼은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다. 철저히 회개하여 돌이키게 하기 위해 출교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교는 돌이켜 다시 돌아오게 하는 선한 의도와 목적을 가진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원리를 알 수 있다.

15장은 유출병, 해산, 주검. 성생활에서의 유출도 정결케 하라. 외부적 혐오감의 근원까지도 제거하거나 정결케 하는 그 동기는 거룩하신 하나님 그분의 임재의 처소인 성막이 너희 가운데 있으므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백성은 모든 일에 정결하고 거룩해야 한다. 고전 6:19-20 ‘너희 몸이 하나님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제까지 말한 먹고, 자고, 아이를 낳고 하는 일은 우리 생활의 가장 일상적인 일이다. 이런 일상적인 사소한 일까지도 부정한 것,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구별하여 정결케 하라는 것은 우리의 거룩한 삶이 지밀의 처소 성막에만 국한되지 않고 가장 일상적인 일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부부생활까지, 사적인 일인 것 같으나 이것까지 성경은 모두 거룩함을 나타내도록 하라고 말씀하신다. 신약에서도 너희 침상을 더럽히지 말고, 너희 아내를 거룩함으로 취하라고 하신다.
하나님과 영적인 만남 → 영적인 은혜의 삶 → 섬김의 삶이 상징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섬김의 삶은 성막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의 가장 일상적인 삶에까지 이루어져야 함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 이 세세한 부분까지 일일이 지시하신 것이다.
이런 것들이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갈라내는 principle을 낼 수 있다면, 타락 이후의 인간과 세상 질서의 포악성을 의미한다. 타락의 결과인 ‘죽음’은 타락 이후의 모든 왜곡된 상태의 카테고리를 포함하고 있는데 타락은 몸과 마음의 더러움을 가져왔다. 죽음의 외부적 전형은 ‘육체의 사망’이다. 사망을 향한 모든 것들이 질병과 악성병환들이다. 이런 것들을 부정하다고 하는 뜻은 이런 것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의 결과를 지적하는 것이다.
성막의 삶이 cult에서부터 윤리적, 전체 삶의 성결로 확대된다는 것은, 타락 이후 전체 삶이 부패되어 버린 질서를 회복해가는 가치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막적 삶이 cult로 응결되어 있고 그 제사 형태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사를 상징하고 있음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모든 만물의 회복을 의미하고 내적정결을 갱신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음식 자체의 규례’에 point를 두지 않고 그 규례가 영적인 의미에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히 7장의 피뿌리는 의식과 물로 정결케 하는 의식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고, 앞으로 오는 온전한 제사의 그림자인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있어서 cult는 온전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그때의 의미는 너무나 중요한 ‘회복의 의미’이다. 당시에는 윤리적 가치가 부여할 수 없는 의식적 요소까지에서도 거룩과 속됨을 구분하는 것에서 온전함을 향한 명령을 본다.

* 파괴된 성결의 회복(속건제, 속죄제로 인한 속죄)
15장 파괴된 ‘삶의 질서’의 회복으로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삶 - 원래 창조질서에로의 회복이다. 회복의 수단의 첫째는 물이다. 물로써의 정결은 내적정결을 의미한다. 히브리서는 물 자체로 정결되는 것이 아니고 온전한 정결의 그림자이지만 적어도 내적, 온전한 정결을 가리키는 점에서 의미있다.

* 제사와 하나님의 임재와의 관계
생명의 희생을 통한 사죄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과의 만남이므로 그럴 수 밖에 없다. 하나님과 인간관의 만남이므로 항상 예배의 형식을 취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라 하심 즉, 우리를 귀히 여겨주셨다. 그리고 히브리서에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갈지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불렀을지라도 이 만남은 예배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꿇어 엎드려서 그의 발을 붙잡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형식은 감사, 찬양, 기도로 이루어지고 하나님 편에서는 참 경건(예배)한 자를 축복하시는 평강, 안식,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16장은 대속죄일(7월 10일, 레 16:29-34). 대속죄일의 맨 초두에 아론의 두 아들이 죽은 사건이 나온다. 이 사건을 상기시키는 이유는 10장에서 여기까지가 다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즉, 일상적인 생활에서부터 철저히 성,속을 구별하여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심이다. 이런 성,속의 구별과 관련하여 대속죄일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대속죄일은 모든 삶의 영역,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종류의 더러움 즉, 의식적이든 물질적 더러움이든 이 더러움을 일괄적으로 정결케 하는 것이다. 일년에 1차씩 지성소에 피를 가지고 들어간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리다가 즉사한 것을 상기시킴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조심없이 방자히 나아간 것을 상기시키면서,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나아가서 죽임을 당치 말아라고 하심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아라. 왜냐하면 속죄소로 인해 하나님이 구름 가운데 저희를 찾아오셔서 너희를 만나실 것이므로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속죄소에 나아가지 말라.
대속죄일은 1년 1차로 7월 10일인데 제사장이 자신 위해 속죄제로 황소나 수양을 취해 번제로 드린 후에, 그리고 회중 위해 수염소 둘을 위하여 한 마리를 번제로 드린다. 회중의 두 수염소를 제비 뽑아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해 속죄제로 드리고,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해 방목한다.
לזאזע = לזא זע(에즈(염소) 아잘(가는) = 아자젤) 즉, 광야로 보내버리는 염소
αποπομαιος = αποπεμπω 보내버리다의 명사형
הוהיל דחא(에하드 라아도나이) - 여호와께서 인격적 존재라고 한다면 이 표현에서
לזאזאל דחא(에하드 라아자젤) 아사셀도 인격적 존재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광야는 죽음, 황량한 곳, 폐허의 상징이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광야는 악한 귀신들이 거하는 곳으로 본다. 이는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다. 그래서 악령들의 거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 13:20-21 들짐승 = 악령의 뜻, 사 34:14 들짐승 = 악령, 마 12:43; 눅 1:24; 계 18:2 등에서 광야는 파괴, 황폐를 상징한다. 귀신이 갖는 특성이 파괴요 황폐이다. 사단을 잘 나타내는 사건은 귀신들린 자가 자신을 상하게 한다. 돼지들이 물 속에 빠져 죽는다. 이는 귀신의 파괴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그러면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보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단의 요소인 죄, 죽음 등을 제곳으로 보내버린다는 뜻인가? 이렇게 보기는 힘들다. 이유는 16:5에 두 마리 염소는 다 속죄제이다. 이 염소들은 백성의 죄를 다 짊어진다. 특히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의 온 죄를 안수하여 다 고백한 후 광야로 보낸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다 짊어진 자는 그의 영역, 죽음의 영역으로, 사단의 영역으로 가서 죄값을 온전히 다 치룬다. 아론이 자기 가족의 죄를, 온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한 다른 한 양은 죽임을 당한 후 진 밖으로 끌고 나가 불살라 버린다. 아사셀의 염소를 광야로 내쫓는 것과 같다.
*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에는 주후 400년에 사도신경에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어 지옥에까지 내려가셨다는 문구를 삽입하였다. 이 그리스도의 지옥강하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에 의해 반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죽음의 영역(사단, 음부의 영역)에 까지 내려가시므로 죄값을 다 치루셨다고 보면, 아사셀로 보냄의 해석이 맞다. 그러나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 때문에 그렇게 보기 어렵다.
* 예수님께서 온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성문 밖에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은 죽음의 영역까지 내려가시므로 죄값을 치루셨다면 구약의 아사셀과 비슷하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영육간에 철저히 죽음을 당하셨다고 한다면, 이것 자체로도 아사셀의 염소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사망, 음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사셀에게 양을 보냄이 죄에 대한 책임을 사단에게 지는 것이 아니다. 사단은 죄에 ㄷ해 고소하는 자이지 죄에 대한 책임을 해결해야 할 것은 없다. 하나님에게만 죄에 대한 책임을 진다.
16절 너희 가운데 있는 부정과 죄로 인하여 지성소와 회막을 위해 속죄제 드리라.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므로 신자 자체가 성전, 성소로 비유된다. 백성의 모든 윤리적인 면과 의식적인 면까지 깨끗게 하라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금지된 성관계 또는 이웃 사랑을 포함한 윤리, 종교적 규례가 나오는데 그 한 가운데 대속죄원리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성,속의 구별이 일상생활의 먹는 것(사소한 것)에서부터 삶 전체로 확대되어 윤리적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17장은 진 안에서나 진 밖에서 제물로 사용 가능한 짐승을 죽이는 경우를 다룬다. 이때는 먼저 하나님께 드린 다음 죽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피흘린 자로 간주하여 백성 중에서 끊쳐지게 된다. 이 말로 판단하건데 육식은 먼저 화목제를 거쳐서 그 제육을 먹는 것으로 되어있다.
7절 회막문에서만 드리지 들에서 제사하지 말라. 들에서 드리는 것은 마귀에게 드리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수염소는 마귀라는 뜻을 가진다. 회막에 끌고와서 먼저 제사한 후에 그 제육을 먹으라는 의미는 종교적, 신앙적 잘못 왜곡을 금하고 막기 위한 것이다. 들에서 드리는 것을 마귀에게 드리는 것이라는 의미는 그 전에 이스라엘이 이교적 풍습에 오염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그래서 결국 그 제사가 마귀에게 드린 제사가 된 것이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우상 제사의식에 참여하게 되면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라고 본다. 너희가 어떻게 주의 성찬과 귀신의 상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즉, 우상에게 제사하는 것은 결국 귀신에게 절하는, 귀신에게 드리는 것과 같은 영적 효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외적인 상징과 의식과 관련해서 어떤 영적 자세로 드리냐에 따라 영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 바로 귀신과 짝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의미이다.
이교 우상 제사의식에서 중요한 것 두 가지는 ①제물은 식물에 불과하다. ②상징물에 불과하나 그것은 영적 자세를 나타내므로 어떤 영적 자세를 가지는가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Hidden Azenda의 말을 빌자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면 굳이 제사를 드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교의 잘못된 신앙 풍습이 들어올까봐서 하나님께서 막으심이다. 이처럼 회막에서만 제사를 드리라고 제한하심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자적인 신앙 풍습과 사상이 생겨날 것이므로 결국 남북왕국이 분열되며, 우상을 세우고 평민을 제사장으로 세움을 북왕국에서 볼 수 있다. 신앙의 동질성이 깨어지고, 신앙의 동일성을 근거로 한 신앙공동체인 이스라엘의 분열이 오래도록 지속되게 된다. 신앙의 통일성과 동질성을 근거로 하는 하나님 백성의 하나됨과 이방 종교의 제사의식에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 신앙의 변질을 막기 위해서 회막의 제사의식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궁극적으로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므로 유일한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도 포함된다.
하나님께서 제단에서 의식을 거친 ㅎ 그 제육을 먹게 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즉, 그것은 피채 먹지 말라하심이다. 피채 먹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고, 피는 육적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피흘림은 생명의 희생이요 이 생명의 희생은 더 깊은 차원에서 오직 다른 생명을 속하는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이 원리를 따라 성전, 성막에서 짐승이 피를 흘려야 했고,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다. 그러면서도 구약에서는 인신제사를 엄격히 금하셨는데 이는 인간의 생명을 진정 속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고, 오직 하나님 뿐임을 보이시기 위함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하는 필연성을 보여준다.
피흘림, 특히 죽임은 오직 다른 생명을 속하는 것만 가능하다. 그래서 피흘림 즉, 모든 제사의 핵심인 이 피흘림의 의미에 대해 말씀하시고 강조하신 것이다. 이 피흘림은 원칙적으로는 부자연스러운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오직 한 곳에서만 피흘림이 긍정적인데 그곳은 바로 십자가이다. 그러나 십자가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긍정적인 것만은 아닌데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이요, 끔찍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 죄의 끔찍함을 깨닫게 된다.

18장은 가나안 땅과 애굽의 풍습을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의 여호와니라’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2절의 내용이 4절까지 반복되는 것이다. 4절을 보면 ‘내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호와께서 너희 섬김을 받고 너희는 여호와의 통치하심을 받는 나의 백성, 나의 민족이다. 이 의미를 곧 애굽의 풍습과 가나안 풍습과 규례를 좇지 말라고 표현했다. 즉, 내 백성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다. 애굽 = 너희가 탈출해야 할 죄악의 세상, 가나안 = 너희가 정복해야 할 죄악의 세력. 가장 죄악의 세력이 강한 그 세상에 들어가 너희가 세상과 하나님 백성간의 근본적 차이는 삶의 규범이 다르다는 것을 보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곧 삶의 통치자가 다르다는 의미요, 여호와의 율법으로 살라는 말씀이다.
5절은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고 하신다. 바로 계명 준수가 생명이다. 게명은 인간이 지켜야 할 당연한 것이다. 거룩함의 요구는 당연한 요구이다. 이 요구는 한 번도 폐해진 적이 없다. 이 하나님의 요구가 신자에게서는 그리스도에게서만 만족되고, 성령의 통치를 받는 신자의 삶에서만 가능하다. 레위기 전체는 출애굽, 홍해를 경험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요구되어졌다. 1-17장까지는 의식적 삶에서의 성결이 요구되었으나, 17장 이후에서는 이방 종교의 악영향을 이야기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성결을 요구하신다.
6절은 성범죄가 나열된다. 성에 있어서의 성결을 말씀하신다. 성범죄는 외면적인 죄이다. 다른 죄는 몸 밖에서 짓는 죄이나 성범죄는 몸에 짓는 죄이다. 성범죄는 상대방을 즉, 인간관계를 전제로 하는 가장 외적이며, 친밀한 관계이다. 가장 밀접한 육체적 관계이면서 육체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는 관계이다. 성관계의 이런 성격 때문에 세 가지를 금하신다. ①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지 말라. 혈연관계 내에서의 성관게를 금하신다. 성관계를 가짐은 남편과 아내가 되어 버림으로 혈연관계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성관계에 의해서 인간 사회의 질서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사회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역할이 다 파괴될 수 있다). 따라서 근친상간의 성관계를 금하신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성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참되고 바르게 가르치면 성은 더럽고 악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가장 친밀하게 만드는 아름답고 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되지 않을 때 가장 악하게 된다. ②생리시 성관계를 금지하심, ③이웃의 아내를 범하지 말라.
21절은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자녀를 우상숭배에 사용치 말라고 하신다. 자녀는 성생활의 열매이다. 따라서 성을 종교에 오용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간음을 종교의 이름으로 미화하는 것에 대한 반대이다. 종교 제사 중 간음을 이방종교는 행했다. 즉, 종교의 이름으로 간음을 행하고 이것을 미화한 것이 이방종교이다. 이것에 대한 명백한 반대가 21절의 말씀인 것이다.
이어 22절은 Homo Sex를 금하시고, 남녀가 부부될 것을 명하신다. 여기 Homo Sex는 창세기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23절은 동물과의 교합을 금하신다. 성관계가 하나됨이라면 자신을 짐승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모독하는 것이요, 나아가 인간됨을 포기하는 것이다.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여 지으신 하나님의 의도를 모독하는 것이 된다. 레위기의 모든 자세한 내용은 다 일맥상통한 것이다.

19장은 거룩과 윤리적 삶을 관련시킨다.
cult(응결된 service) → 먹고 사는 일상생활 → 성생활 → 모든 삶의 영역
이 삶의 질서가 파괴될 경우 회복되는 통로를 마련하신다. 성결의 파괴가 회복되는 수단이 성막에서 이루어진다. 물로 씻는 것과 제사 - 전 이스라엘이 함께 대속하는 날(7월 10일), 1년에 1차씩 대제사장이 전 이스라엘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정결함을 받는 날(대속죄일)이다. 거룩과 생명은 너무나 밀접한 관계이다. 거룩은 하나님과 만나 정결해지는 것인데 하나님과의 연결만이 생명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거룩은 바로 생명의 통로인 것이다.
2절에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내용을 재천명하신다. 19장은 일관된 제목하에 분류될 수 없는 잡다한 법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으나, 오히려 다양한 삶의 영역에 관련된 다양한 법들을 단편적으로 모아 놓은 것에는 뜻이 있다. 즉, 다양한 삶의 영역에 관련된 다양한 법을 말함은 포괄적 삶의 원칙, 성결의 원칙의 대강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 영역에서의 전체적인 삶의 원리로서 하나의 대표적인 뜻을 갖는다. 부모공경 - 인륜의 질서토대와 권위의 상징이다. 안식일 - 의식 영역에서의 하나님 섬김의 기본 틀이다. 우상 숭배나 화목제물도 같은 내용의 하나님 섬김의 내용들이다.
9절은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해 추수한 것들을 남겨두라고 하신다. 객과 가난한 자는 어떤 집단 내에 삶의 터전, 삶의 권리를 갖지 못한 자들로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계층)의 대표적 사람들이다. 추수라는 것은 내 노력과 수고의 결과를 내가 차지할 것이므로 마땅한 권리이나 내 수고를 다른 이를 위해 남겨두라는 것은 긍휼의 법칙이다.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라는 공평의 원칙을 지나 내 자신을 희생하여 내 것으로 남을 돕는 사랑과 긍휼의 원칙을 말씀하신다.
11절은 이웃의 삶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 13절은 이웃을 압제하거나 착취하지 말라. 경우에 어긋나면서까지 이익을 취하려 말라. 14절은 장애자를 골탕먹이지 말라. 남의 약점을 이용하거나 욕보이지 말라.
15절은 재판의 경우 = 옳고 그름의 결정, 판단에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시비판단의 중요한 것은 큰 자 즉, 사회에서의 특권 같은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고 얼굴을 봐주지 말라. 또 하나는 가난하다고 해서 얼굴을 봐주지 말라. 의롭고 마음 약한 사람들 중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나 시비판단에 있어서는 아주 공정해야 한다. 너무 약자를 의식하다가 약자 편에서 시비를 그릇판단하고 옳은 것을 굽게 할 수 있는데 시비판단에 있어서는 약자인지 강자인지를 생각지 말라.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 하여 시비를 굽게해 달라는 외부 사람의 요구가 있을 수 있으나 시비는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
17절 네 이웃을 마음으로(= 진정으로) 미워하지 말라. 이웃을 책망하여 바로 잡으라. 그래서 이웃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다. 이 세 구절은 상충되지 않고 하나의 조화된 뜻을 갖는다. 이 세 마디는 서로 서로를 규정해 준다. 억울한 일 당할 때라도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라. 그러나 억울한 일 당할 때, 이웃으로부터 다하는 불의를 참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여기서 더 나아가는 적극적 사랑을 요구한다. 미워하지 말고 책망하여 바로 잡으라는 것이다. 책망은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마음으로 미워말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무관심으로 또는 귀찮거나, 너 한 번 당해봐라는 마음으로 내버려두지 말고, 책망해야 한다. 그러나 그 책망은 사랑으로 하라. 이렇게까지 사랑하지 않으면, 적극적 사랑이 아니면 죄를 짓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을 책망하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외식주의(형식주의)이다. 하나님 계명의 피상적 오해와 이와 관련된 자기 의(義) 때문이었다. 신약과 구약의 하나님 사랑은 같다. 오히려 구약이 더욱 더 생생히 표현하지 않았다. 호세아와 고멜, 이사야에서 보면 부모의 사랑을 지닌 사랑이다.
19절은 가축과 종자를 혼합교배하지 말라. 즉, 잡종을 만들지 말라. 이는 순수함을 보존하라는 뜻도 있으나 더 나아가 하나님이 창조한 질서를 혼란, 혼잡시켜 버리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유전공학은 얼마나 하나님의 창조에 대항하는 것인가?
26절은 점술, 사술을 하지 말라. 인간의 진행, 운명, 생사화복을 귀신에게 묻는 것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귀신이 주관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 처럼 보이나 이것을 캐보면 무서운 죄악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생사화복의 비밀을 알기는 하나 주관하지 않는다. 사람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달려 있다. 통계학 원리 자체가 비성경적이요, 사이비 과학이다.
이 19장에 나타나는 다양한 삶의 영역이 언급되고 그와 관련된 규범된 제시가 있다. 이와같은 원칙 제사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을 붙이신다. 이 모든 윤리 원칙이 성결에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성결이 포괄하는 영역은 삶의 전 영역이다. 종래에는 거룩이라는 개념은 교회와 관련된 활동, 교회 내의 활동만을 국한하여 말하였었다. 교회 내에서 교회와 관련된 일들에도 속된 일이 많다. 이렇게 보면 모든 영역에 걸쳐서 이루어져야 할 삶의 quality가 거룩이다. 긍휼, 동정, 사랑 뿐만 아니라, 피부병, 먹는 음식, 성생활 등까지 다 포함된다.

20장은 자녀제사 드리는 일 금지, 성적 범죄 금지이다. 21절을 보면 가나안 사람들이 축출되는 이유가 역겨운 일을 행했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거든 하나님이 너희 민족을 다른 민족들과 철저히 분리, 구별해 내신 하나님인 것을 기억하라. 너희 자신을 혐오스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21장은 제사장의 특별한 성결을 다룬다. 백성과 구별되어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는 자들이 제사장인데 여기에는 10:3의 원리가 적용된다. 하나님을 가까이서 섬기는 자들의 성결의식은 더 엄격하다. 일반 백성에게는 허용되는 일이 제사장들에게는 허용이 되지 않는다. 4-5절은 이교 풍습을 좇지 말라고 하신다. 또 13절은 제사장의 결혼을 말하는데 처녀와만 결혼하라고 하신다.
16절은 제사장이 될 사람은 흠없는 자만이 되는데 이는 하나님께 온전히 offering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제사장 나라)의 모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이런 부분은 백성에게 적용안되는 부분이다. 즉, 제사장에 관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야 할 부분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되어야 할 부분인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모델로서 제사장은 오늘날 성직자에게 관련되는 부분에서 보면, 너희는 모든 면에 본이 되라 하심에서 볼 수 있다.

22장은 성물의 구별

23장은 여호와의 절기들 = 성회 - 온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림(3대 절기) → 유월절(무교절), 초막절. 여기서 절기라 할 때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될 것은 이것은 항상 공동체적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이루어진다. 즉, 오늘날 공예배와 같은 의미이다. 절기의 가장 큰 특징은 정한 날, 정한 곳에서 모임(시간, 장소가 구별되어 있다)이다.
요즈음 성수주일의 문제를 보면 Westminster 견해는 구약 안식일의 의미의 전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전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로마서에 보면 모든 날이 거룩하다고 한다. 그래서 각각 자기 형편에 따라, 양심에 따라 지키라고 한다. 후자를 따르는 자는 주일 성수를 자유롭게 하라고 한다. 그러나 이 후자의 의견이 설혹 틀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일을 가볍게 여기거나 자기 편한 날 하겠다 함은 잘못이다. 주일의 의미가 들어간다면 덩ㄱ 의미있고, 지켜야 하며, 또한 모든 성도들이 한 곳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공예배로 드려지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따라서 직장을 쉬고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일에 하루가 드려져야 한다.
모두 함께 모인다는 공예배로 드려진다는 것(구약에서도 일하지 않는다)은 일상의 직업에 매여서는 잘 이루어질 수 없는 하나님 섬김의 삶을 통해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정당한 바른 말씀이 성령의 능력으로 전달된다면 이 공예배는 개인적으로 말씀을 보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하며 이것이 없이는 풍성하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없다. 가장 밀도있고 깊은 차원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은혜 받는 시간으로서 소중히 여기고 빠지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local church(지역교회)는 지역별로 그 주위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를 말하는데 그 교회 지도자와 그 교회 교인들과 영적으로 하나된다는 의미가 있다. 이때는 하나님을 만나 예배하고 감사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스라엘 공동체 삶의 절기로 내용이 나아감은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제사장 직무는 개인적 차원의 사역이 아니요,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표하는 자로서 직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일하지 말라. 타락은 인간의 노동이 고역이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일을 쉼으로 육체의 휴식도 안식에는 포함된다. 이보다 큰 것은 공동체의 예배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적극적 요소가 있다.
유월절은 이 날로부터 이스라엘이 시작된다. 이는 이스라엘의 존재의미를 말함이다. 유월절과 더불어 시작되는 절기는 무교절로서 무교절은 누룩(다른 것을 변질시키는 것 = 죄, 오염)을 없앤다. 누룩 즉, 죄를 없애는 성결한 삶을 의미한다. 즉,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는 성결한 삶을 살므로 구별됨인 것이다.
맥추절은 각 개인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맺어진 삶의 열매를 드림이다. 첫 이삭을 드림은 수고한 열매를 드림인데(신 26장), 전체 삶을 드리는 표시이다. 이 복된 삶의 영역(땅)에서의 삶과 삶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림이다. 보리 추수는 4월 말 - 5월 초이다.
오순절은 밀 추수 후인데, 밀은 보리보다 늦게 즉, 2-3주 늦게 추수한다. 밀 추수는 오순절과 유월절 사이에 온다.
제 7월(안식월)은 절기가 가장 많다. 1일은 성회로 모이고, 10일은 대속죄일이요, 15-23일은 수장절, 초막절로서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절기이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초막에 살 때 하나님이 보호해 주심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그리고 이 성회의 기본의미는    (안식)로 시작한다. 성회의 다음은 안식년이 나오고, 희년이 나온다. 전체가 ‘안식’이라는 구조 속에서 다루어진다.

24장 1절에서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켜 두는 것은 이스라엘의 공동체로소의 삶과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의 삶과 관련이 있다. 즉, 23장의 구별된 날, 정한 날에 이루어지는 것 말고, 항상 언제나 일상적인 날에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삶을 말한다. 그리고 이 등불은 하나님 앞에서 빛된 삶, 이방인에게 비취는 빛으로서의 삶, 어두움을 비추는 세상의 빛으로서의 삶을 말한다. 5절은 항상 열 두 개의 떡을 둔다(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상징). 이 떡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옴의 감사와 수고의 삶의 열매 드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열매이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삶에서 거룩히 구별된 날에 대해 말한 후 매일 일상생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삶은 holy time에서만 아니라 매일, 항상,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10절은 거룩함을 오염하는, 파괴하는 자의 처리가 나온다(사형 = 오염의 제거).

25장에서는 안식년이 나온다. 1-7절은 휴경을 명하심으로 안식의 법은 땅, 환경에도 적용된다. 이는 안식의 은혜의 포괄적 적용성을 말한다. 롬 8:21-23을 보면 그때는 땅도 새로와질 것이다. 특히 파종을 말라는 것은 땅만 쉬지 말고 사람 특히 종이 쉬게 된다. 그래서 이 안식년에 히브리인 종은 다 자유케 된다. 8절은 희년을 말한다. 바로 안식년 중의 안식년이 이 희년이다. 안식년을 7번 한 후 다음 해인 50년의 대속죄일이다. 이때는 해방을 선언한다. 이때 종은 자기 친족과 자기 기업에게 돌아가는 귀향과 해방의 날이다. 땅도 그 전 소유주에게 돌아간다. 그러므로 땅을 사고 팔 때는 희년을 계산하여 사고 판다. 이 희년은 각자 자기 기업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기회는 주는 것이다. 23장에서 ‘땅은 여호와께 속하였다’고 했다. 이 말은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보면, 너희의 전 존재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여호와야 말로 너의 삶의 전 존재요 전 터전이다. 여호와께서 진정한 삶의 터전임을 일깨워주는 표시요, 또한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의 터전을 박탈, 상실하는 것이 없도록 보장하신 것이다.
24절은 기업을 무르는 제도가 나온다. 땅의 상실은 육적 생존의 상실이요, 다른 이에게 예속됨을 의미한다. 육적 얽매임은 육적, 정신적 얽매임이고 큰 영향을 미친다. 희년을 통해서 상실된 삶의 터전, 권리를 원칙적으로 회복하는 제도를 만드셨으나 희년까지 가지 않아도 기업무르는 제도를 통해 땅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다. 이것으로 시내산의 율법이 일단락된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대원칙은 거룩한 삶 =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삶 = 생명을 누리는 삶인데, 이 삶이 의식영역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의식영역 즉, 임재의 지밀에서 이루어지는 섬김의 삶, 축복의 삶, 하나님을 만나는 삶, 예배의 삶, 이 삶이 전 영역으로 확대되어진다.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즉, 음식, 성생활, 아이 잉태하는 것, 윤리적인 것, 이웃관계, 절기 통해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삶, 경제적인 것까지 인권문제까지 다 확산된다. 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이스라엘 한 가운데 계신 성막에서 시작해서 개인적, 사회적, 모든 삶의 영역으로, 전 공동체적인 삶의 영역으로 확산된다. 이 모든 영역에서 거룩한 삶이 이루어질 수 있고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의 삶 구석구석까지 물들어야 한다. 먹고, 입고, 자는 데까지, 직장, 모든 영역에서 성,속을 구별해야 한다.

* 거룩과 안식의 관계
최초의 안식은 창 2:1절 인데 그 날을 하나님께서 복주시고 거룩케 하셨다. 축복(blessing)과 거룩(holy)과 안식(rest) : 하나님 통치의 구조이다. 제 7일을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 piel형은 선언적 형태(declarative)를 의미한다.
?? 복주셨다 ךרביו(와에바렉)
?? 거룩케 하셨다 שׁדקיו(와에콰도쉬) → 안식은 복되고 거룩한 것으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안식은 타락으로 파괴되고 구속으로 회복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는 안식은 파괴된 질서로부터의 회복을 항상 의미한다. 노아(הנ 의 의미가 ‘안식’이라는 뜻임을 생각할 때 죄의 결과인 타락으로부터의 회복은 모든 안식으로 설명된다.
레위기에서도 안식일과 모든 절기들, 안식년, 희년들이 모두 복된 회복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고 예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출애굽 역시 안식의 시작이며 가나안은 안식의 완성의 모형이고 전인적, 완전한 안식의 예표로 주어졌다. 앞으로 올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는 것이다. 안식은 그래서 성결의 회복, 삶의 질서의 회복을 의미하며 그것이 절기의 제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절기를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감사하고 즐거워한다. 즉, 축제를 벌인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통한 다스림을 받을 때만 이러한 참된 안식은 가능하다.

민수기(רבדמב; Numbers)

민수기는 백성 수를 세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그 배경을 출애굽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통치 조직을 세우고(십부장, 백부장...) 그 이후 율법이 내려오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계시되었으며, 성막과 cultic law들이 내려졌다.
그리고 제사장 임직이 있은 후 계속 율법의 명령이 내려진다. 이제 이스라엘 전체의 인구조사를 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지파와 종족을 따라 싸울만한 자들을 계수한다. 이들을 가지고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도록 한다.
????????????? 3 ?????????????????→이스라엘 전체 병사
? ?????? 아론 ?????? ?
? ? ???????? ? ?
3 고핫 ? 성막 ? 게르손 3
? ? ???????? ? ? תבצ תצק(콰차트 체보트)
? ????? 므라리 ????? ? תואבצ(체바오트)   divisions
????????????? 3 ????????????
이것은 군대조직이며 백성조직이다. 각 3지파씩 동서남북으로 나눈다. 그러므로 민수기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광야’이다. 시내산-모압평지까지의 민수기 역사는 광야 여행기간이다. 광야 여행을 위한 조직이 군대조직이라면, 그 광야 여행이 전쟁을 위한 여행이며, 약속의 땅을 정복하러 가는 전투적 모습이다. 기동성을 전제한 조직으로서 성막을 중심으로 항상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광야 여행이 정복을 위한 군대 여정임을 시편은 많이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2:33절에 보면 레위 자손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계수되지 않았다(레위자손은 이스라엘 중에 계수하지 말라). 레위인의 구별됨을 말한다(이 근거는 금송아지 사건 때 하나님 편에 선 자들(레위족)이 나와 배도자들을 칼로 죽임).
3:1절에 보면 아론의 자손이 구별되어 계수된다. תודלות הלא(엘레 톨르도트; 아론과 모세의 족보 = 제사장 직분). 그리고 3,4장은 제사장의 직분을 말한다.
5장 문둥병, 유출병, 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는 진 밖으로 보내라. 하나님을 모시는 자들의 순결성을 강조한다(purity). 요한 1서에도 하나님께 범죄할 때마다 자백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5절 이하에 보면 여성이 간음죄를 범했다는 심증이 가면 그녀에게 쓴 물을 먹여 범했으면 저주가 되고 범하지 않았으면 해 없이 잉태하리라.
이러한 성경의 법은 case law의 차원이 아니라 illustrative law의 차원이며 원리의 제시임을 알아야 한다. 그 case의 법 뿐이라면, 그 case만 해당되지만 성경의 법은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case를 초월한 원리). 여기서의 원리는 하나님을 모시는 자들의 ‘성결’이 얼마나 엄하게 언급되고 있는지를 말한다. ‘은밀하게 지은 죄’까지라도 모두 밝혀질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6장 나실인의 규례는 성결의 적극적면을 가르치는 것이다.
* 5장의 부정규례는 남녀 차별의 법규가 아닌가 하고 생각되지만 성경 전체 문맥을 보면, 하나님의 본 뜻은 항상 남녀 동등의 원리이다. 예수님께서 이혼 문제를 다루실 때, 구약 때는 너희가 완악하여 하나님이 묵인하신 것이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하셨기 때문에 당시의 하나님의 묵인된 상태와 오늘의 엄격한 상태의 차이점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이 정도의 구약 규례는 당시 고대 근동의 문서와 비교해보면 구약 규례가 얼마나 엄격하게 남녀 동등과 인격을 가르치는가를 알 수 있다. 근동의 문서는 너무나 잔인하고, 바윤리적인 것들이 많은데 그런 점에서 보면 구약의 법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구별됨과 공통성’ 레위인과 제사장을 이스라엘과 구별시켜 cultic service를 하도록 한 것에 있어서 그 ‘구별됨’은 이스라엘 전체 백성과 어떻게 차이가 있는가? 구별성에 있어서 그 원리는 ‘구별됨’이 일차적으로 크게 하나님께서 나누셨다. 나답과 아비후 범죄사건 때 하나님께서 ‘구별된 자’의 거룩성을 요구하셨다. 공통성에서 그러나 넓게 보면 이스라엘 전체가 또 세계 열방 중에서 구별된 제사장 왕국이므로 제사장의 거룩은 이스라엘이 배워 지켜야 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인 제사장설은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에 적용될 때 제사장적 구별은, 현재의 cultic service를 하는 목회자들에게 적용되어야 하면서도(구별성) 또한 제사장적 특권은 모든 신자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7장 성막 봉헌식. 이것은 출 40장의 연결이다.
8장 성막의 등대제도. 레위지파를 취하여 성결케 함.
9장 유월절 = Passover. 시내산을 떠나는 context에서 지킨다. Passover는 하나님의 대적을 쳐부신 사건(홍해사건과 동일시)이다.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이 있다.
10장 은나팔 둘은 행진이나 전쟁, 절기 때 사용한다. 29절 이하에 보면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모세가 당신이 진칠 줄을 알기 때문에 우리의 눈이 되어달라고 한다. 그러나 호밥이 동행한 것에 대해서는 성경이 말하지 않는다. 33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쉴곳을 말하신 분은 הוהי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이스라엘의 인도자는 הוהי이시다.
법궤 : 그룹, 속죄소, 언약궤가 있는데 이것이 앞으로 나간 것은 하나님의 임재로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가신 것을 의미한다. 호밥의 예와 언약궤의 사실은 대조적으로 기록된다.
11장 이스라엘의 배도가 나온다. 그래서 모세가 내가 이 백성을 낳았느냐고 외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고기를 실컷 먹이시고 진노하신다(11:33-34). 70인 장로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신을 충만케 하신다.
12장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시기한다. 이들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는데 이 도전은 계시의 중보자로서의 모세의 독특한 지위에 대한 반역이다. 여기서 모세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나타나 3인을 부르셔서 처리하신다. 미리암은 문둥병이 걸리고, 아론이 모세에게 간청하고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낫게 하신다.
13장 가나안 정탐 사건(가데스바네아 사건 = 출애굽 1세대). 하나님께서 왜 가나안을 정탐하라고 하시는가? 광야여행은 하나님을 순종하여 믿는가 하는 test period였고 이제 가나안 정탐은 마지막 test course였다. 갈렙과 남은 10인의 태도는 달랐다. 나머지 10인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능력이 어디서부터 나오는가를 모르는 자이다. 27절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해놓고 32절에서는 악평하여 척박한 땅이라고 했다.
14장 이스라엘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즉 죄된 생활로 다시 가려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히 12장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내려 현저히 욕보임이라’고 말한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들을 말리자 이스라엘이 돌로 치려고 한다. 10절 이하에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신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멸하고, 모세에게 다시 큰 나라를 세우겠다고 하신다. 큰 나라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축복의 땅, 하나님의 나라인데 이것을 다시 모세를 통해 세우겠다고 하신다. 그러나 모세가 다시 중보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여 부르짖는다. 20절 이하에 중요한 결정이 나온다. “내가 용서하노라 그러나 הוהי의 영광이 온 세상에 충만할 것으로 맹세하노니”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의 완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패역한 자손들은 약속의 땅을 보지 못하리라 오직 갈렙만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 민수기 13장의 배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이 25절이다.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길로 하여 광야로 들어가라. 이 사건 이후로는 광야여행의 의미가 달라진다. 이전까지는 test period였지만 이후는 judgement period가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고 그 구원사를 원점으로 돌이켜 버리신다. 그러나 완전히 원점(애굽)은 아니고 광야로 보내신다. 출애굽 세대는 멸절당하고, 다음 세대는 이루어질 것이다. 심판의 의미도 갖지만 또한 정결케(여호수아, 갈렙, 광야 2세대) 하는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불신앙에 대한 심판뿐 아니라 정결의 의미로 이어진다. 이는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20세 미만의 자녀들만 들어갈 것이다.
15장 성막에서 하나님 섬기는 규례이다. 제사, 제물에 대한 기록으로 32절은 안식일을 범한 자는 쳐죽이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삶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다루는 구절이다(안식일에 일한 자를 반드시 죽임, 제사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살리라(계명 순종이 생명과 죽음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호와를 멸시하는 것은 불순종으로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37절에는 옷가에 술을 달고 계명 순종을 위하여 거룩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하신다.
16장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는 고라 자손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교권주의를 옹호하는 근거 구절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반드시 대적할 수 없다. 레위 자손 중의 고라 자손이 모세를 대적하여 “온 회중이 모두 거룩한데 왜 너희가 스스로 높이느냐?”고 했다. 이들의 주장은 만인제사장설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도 하나님께서 ‘거룩한 나라’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사실적으로는 틀리지 않으나, 이들의 동기는     를 대적하는 것으로서 악한 것이다. 7절을 보면 이들의 행위는 분수에 지나친 도전인 것을 나중에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질서를 수평적으로 동등하게 하셨다. 그러나 또한 수직적(명령과 복종) 질서를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으로 다스리고, 순종하는 관계도 주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유기적 공동체의 성격이다. 이 유기적 성격을 잘못 이해하면, 왜곡된 민주주의가 되기도 하고 왜곡된 독재주의가 되기도 한다. 마치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대적하여 모세의 권위를 자기들과 같은 수평적 차원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이 하나님께서 세운 질서를 왜곡시키려는 반역이 되는 것과 같다.
고라 자손의 멸망은, 곧 모세를 하나님이 특별히 세우셨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sign이 되었다(민 16:28-31). 41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이제 הוהי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 염병을 내리시므로 모세가 아론에게 속죄하라고 하여 속죄를 빌매 염병이 그친다.
17장 8절에서는 아론의 지팡이가 싹이 나서 하나님의 택하신 제사장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19장까지 정결규례가 나온다.
20장 신광야에서 반석의 물을 쳐서 백성에게 먹이고, 반석을 명하라고 했는데, 반석을 두 번 쳤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한 이유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이어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는다. 이제 1세대가 끝나감을 암시하고,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22장의 발람 사건. 발락이 이스라엘을 보고 위협을 느껴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한다. 그리고 그 발상은 악한 것이었다. 그러나 발람은 결국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말았다.
* 발람은 어떤 의미로 선지자적 일을 감당했는가? 고대 사회에 있어서 Spiritual medium이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한 것이었는데 그런 점에서 ‘발람’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위협적 존재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을 통해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셨다.
25장의 행음 사건 - 발람의 꾀(계 2:14; 민 31:16).
26장 새 세대를 암시 - 백성 수를 다시 계수한다. 이때의 백성 수는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자를 계수한다.
민수기 14, 15, 16장은 광야생활의 전환점이다.
20장 이후는 광야의 마지막 부분이다. 1절에 보면 가데아에서 미리암이 죽는데 미리암은 당시 상당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계시 전달자). 28절에 나오는 아론의 죽음은 첫세대의 지도자들이 하나씩 사라짐을 보여준다.
므리바 물가의 반석사건은     께서 바위에게 명하라고 하셨는데 모세가 바위를 쳤음으로서 모세와 아론마저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드러낸다(20:12). 20장은 아론의 죽음으로 끝나는데 이 문맥에서 첫세대는 종결을 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1장은 불뱀, 놋뱀의 사건이다.
* 성경은 항상 구속역사적으로 해석하며 한 사건의 구속사적 위치 등을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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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on Fall Exodus Exile Ιησου χριστος παρυσια
예) 출애굽에서 포로 때까지는 ‘제사’의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제사의 온전성으로 인해 우리가 다시는 드려서는 안되는 것이 된다.
예)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의 계명(율법)은 생명의 도구(가능성, 실행)였으나 타락 이후에는 계명이 인간에게 있어서 실현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은 우리를 정죄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 이후 성령세례 받은 우리에게는 온전한 실행은 어렵지만 원리적으로는 실행이 가능하도록 되었다.
예) 모세의 율법에서는 아내와 이혼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 우리의 이혼 가능성의 규범이 될 수 없다. 율법시대의 역사성에서는 하나님이 묵인하신 것이지만 신약시대에서는 율법의 온전한 뜻이 나타났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불허하시는 것이다.
20장의 반석사건. הוהי의 명령 - 반석에 명하라. 모세의 반응 -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고 바위를 두 번 침. 이때 하나님의 책망이 나타나고 12절에 너희가 나를 믿지 않았다, 너희가 나를 배역하였다고 하셨다. 신명기에서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너희로 인하여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결국 모세는 이스라엘로 인하여 하나님을 불순종하게 된 것을 말한다.
21장 불뱀사건. 이 문맥은 대적에 대한 승리의 장이고 불뱀은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려는 것인데 그 불뱀을 죽여 장대에 매달았다고 하는 것은 satan, 흑암의 세력을 죽여 하나님께서 승리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대는 군기인데, 그것은 승리의 깃발이며 승리를 암시한다. 사단을 죽여 승리한 것(놋뱀=불뱀)으로 놋뱀은 불뱀을 의미하여 만든 것이며, 불순종을 이기고 승리한 것이다. 하나님의 전쟁을 시작하는 문맥에서 놋뱀사건이 나온 것은, 하나님이 이기시는 전쟁에 satan을 죽여 매다는 사건으로 이해된다.
22-25장의 발람의 축복은, 창 12장의 아브라함의 축복의 반복으로서 하나님께서 계속 성취해가고 계신 축복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26장 두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계수가 나온다(제 2세대). 26:63-64절에는 모세가 계수한 자들이 한 사람도 들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광야에서 반드시 죽으리라’하셨기 때문에 그렇다.
27장 모세가 자신의 후계자를 간구하여 여호수아가 선정되고 나머지 율법(제사관계)이 나오고 약속의 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26-36장까지는 신명기의 배경적 문맥이다. 첫세대가 끝나고 둘째세대에게 약속의 땅에 대하여 가르치는 부분이다.
시내산 언약 이후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눈 앞에 보면서도 불신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40년을 유리 방황하게 된다. 민수기 마지막 부분에는 첫세대가 멸절하게 되고 두 번째 세대가 일어난다. 지도자의 세대교체가 일어나는데 모세 대신 여호수아, 아론 대신 엘르아살이 지명된다.
이 세대교체는 상당한 의미를 가지는데, 광야생활을 히브리서에는 성도의 삶과 비견하고 선지서에서는 광야생활이 심판의 결과로 나타난다. 호세아서에서는 음란한 여인을 광야로 데리고 가서 그 음란성을 고치시고 회복하는 것으로 된다. 아모스에서도 이스라엘 역사를 원점으로 되돌려버린다고 하면서 구속사를 되돌려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멸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구속사를 원점으로 돌린다는 것은, 징벌의 광야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불신을 제거하고 정화하고 단련하는 것이다. 그 심판 후에는 완전히 새로워진 이스라엘(New Israel)이 나온다.
민수기는 한 세대의 멸절과 다른 세대의 출현을 통해서 불신의 이스라엘이 제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앞으로의 이스라엘 역사가 이러한 의미의 반복임을 암시한다. 정화된 이스라엘은 선지서의 소망적 예언이다.


신명기(םירבד; Deuteronomy)


신명기는 한 마디로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이제 요단강을 눈 앞에 두고 모압광야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행한 연설이다. 모세는 옛세대의 대표이자 마지막 인물로서, 광야에서 멸절되도록 되어있는 마지막 사람이므로 모세의 설교는 광야여행의 마무리장이라 하겠다. 또 신명기는 모세의 죽음으로 끝나므로 모세의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별설교(Fareuall Adress) : 요 15장의 예수님의 고별설교, 여호수아 24장의 고별설교 = 여호수아는 언약갱신으로 끝난다. 모세의 고별설교도 신 29장에 언약갱신(Covenant Renewal)으로 끝남으로써 같은 구조적 흐름이다.
신명기의 핵심적 단어들을 빼낸다면,
① לארשׂי עמשׁ(샤마 이스라엘) - 너희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רחא 한 분(대문자로 기록함)
② רכז(자칼) 기억하라 현재를 의미함 התע(아타)
과거를 상기하는 표현 הרות(토라; 하나님의 율법을 들으라)
?? עמשׁ는 다시 말하면 exaltion(권고, 권면)이다.
?? רכז는 과거를 되살리는 의미인데 그 사건은 지금에도 동일한 의미가 있다는 것 -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עמשׁ와 רכז는 같은 의미이다.
실존주의적 의미에서 과거를 되살리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들은 과거 역사의 자체로서의 의미는 없고 나와 관계될 때만 의미가 있다고 하며 사실적 연결은 무시해 버린다. 과거와 나와는 인과적 법칙에서만 뿐이고, 그 의미는 내가 과거를 받아들이는 결단에서만 온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과거를 과거로서 끝맺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오늘도 그 의미와 효과가 있음을 알도록 하시는 것은 עמשׁ와 רכז로 말해진다. ‘과거를 배우라’고 한다 - 과거의 교훈.
과거에서 무엇을 배운다는 말은 과거가 오늘과 연결된 것이라는 것이다. 역사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본다면 과거역사의 하나님 통치 원리가 근본적으로, 동질적으로 오늘 역사의 원리가 된다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주관적 결단으로서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우리는 객관적 사실로서의 과거 역사가 오늘 역사의 의미의 key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 기계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향한 하나님의 뜻이 변함없이 이루어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인간이 참여하는 방식은 믿음과 기도와 인격적 만남이고 하나님께서는 허락, 부여해 주시는 것에 불과하다.
1장 רבעב(베아바르) - 동편, 요단 동편은 아직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이라는 것.
광야 - 아라바(홍해 맞은 편 ףוס םי;임 슈프 
 절은 요단 동편을 가리키는 아라바 같은데 1절 하반절은 사해 및 아라바를 말한다. 하세롯, 라반, 도벨 등은 광야 전체를 말하므로 신명기는 그렇다면 요단 동편에서만 한 유언이라고 보기보다는 광야생활 전반에 걸친 모세의 이야기 같이도 보인다. 그러나 모세는 요단 동편에 서서 아직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이 광야 전체의 생활을 회상할 수 있는 배경으로 된다고 한다. 아직 들어가지 못한 것은 아직도 광야생활임을 말하는 것이다. 광야 전체의 삶이 배경이 되는 것은 2절에 나오는 말로 보면 자연스럽다. ‘호렙에서 세일까지 가데스바네아까지는 열 하룻 길이다’
3절은 제 40년 11월 그달 1일이라고 함으로써 11일이라는 기간과 40년이라는 기간을 대조하여, 왜 이런 기간이 많이 필요했는가를 기억하게 한다(너무나 대조적인 기간이다). 이것은 광야여행의 의미와 교훈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즉 광야여행의 종장으로서 그 모든 과거사건을 돌아보고 그것의 의미를 알려주고자 함이다.
4절은 시혼과 옥을 쳐부수고 난 후의 일을 말한다. 이는 약속의 땅 정복의 시작이며 예비적 성취이다. 민 21장의 발람의 예언의 의미는 이스라엘의 미래의 축복(약속의 땅 정복)이며 승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신명기에서 시혼과 옥을 승리한 것(정복의 역사)을 첫 서술한 것은 앞으로 올 정복과 승리의 역사를 내다보는 의미가 있다.
1-3절은 retrospect(과거의 회상) - רכז이고
4절은 현재의 전망(권고 - Ermahunung) - התע עמשׁ(샤마 아타) 이어 권고의 핵심은 율법해석이다(5절).
?? (과거)רכז(기억하라) ?? ?? 하나님의 의미?? 과거??하나님의 주체(율법)
?? (지금)התע עמשׁ(들으라) ?? הרות(율법) ?? 현재?? 통치원리
광야여행에서 배운 교훈의 핵심은 순종 = 생명, 불순종 = 죽음이다. 신명기가 율법을 remind하는 이유가 순종→생명, 불순종→죽음이기 때문이다.
8장 순종하면 살리라. 지켜 행하면 살고, 번성하고 얻으리라. 만나 주신 이유 = 사람이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 육신적인 생명을 포함한 전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에 달린 것(순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기준이 될만큼 너무나 중요하다.
13장 여기서 선지자가 예언의 성취를 시행하더라도 다른 신을 섬기자고 하면 때려 죽이라고 함. 이 말씀에 대한 중요성은 12:32절(원문 13:1)에서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말을 지켜 행하고 가감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앞으로 올 계시(revelation)와의 unit로 이해해야 될 것을 말한다 = ‘계시의 동일성’(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
모세가 그의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을 설명한다는 사실은 율법준수가 이스라엘의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29장에는 언약갱신을 하며 축복과 저주를 눈 앞에 둔다고 한다. 그런데 31:27-30절에 보면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제시해 놓고 언약의 파기를 할 이스라엘을 예언하고 있다. ‘너희가 스스로 הוהי의 길을 떠나서 악을 행할 것이라’고 한다.

* 성경에 나타난 “비관주의”(passimism)
선지서나 마찬가지로 모세는 비관주의로 말한다. 이것은 비관으로 끝나는 비관주의인가? 그것은 더 온전함을 기다리는 자신의 연약성을 바라보는 소망의 비관주의이다. 그것은 선지서에서도 계속 나타난다. 예레미야나 이사야는 현실에 대해 아주 비관적이고 절망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나은 상태, 온전한 구원을 기다리는 기대감이다. 지금 상태의 불완전함과 앞으로 올 완전함을 대조하여 말한다. 오히려 이것은 미래지향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사상이 이스라엘 구원의 초장부터 나타난다. 하나님 백성의 역사를 배경으로 나타났다(시내산 언약에서의 금송아지 사건). 이것은 완전한 구원(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보게 하는 배경적 사실이다. 선지서는 그런 점에서 새로운 계시가 아니고 신명기 32장의 연속인 것이다.
신명기의 구조는 곧 설교구조와도 상통한다. 과거를 기억하게 하고 현재에 권면하는 것이 설교style 같다. Von Rad는 그래서 신명기를 ‘설교’라고 취급한다. 후대 왕국의 레위계통의 설교라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신명기의 기본 테마는 ‘권고’이며 언약수립으로 끝난다(모세). 이것은 여호수아의 경우와 사무엘의 경우 그리고 예수님의 경우에서도 일치된다. 고별설교와 성만찬의 새언약으로 끝나는 것이다.
?? 신 명 기 - 언약(신 29장)
「권고 → 언약수립」 ? 여호수아 - 언약(수 24장)
?? 예 수 님 - 새언약(요 15장)

여호수아(עשׁוהי; JOSHUA)

첫째 이 글은 여호수아서의 서론에 불과하다. 여기서는 간단한 설명만을 말하기로 하고 실제로 들어가서 의미를 연구하는 것이 본인에게도 유익하리라고 본다.

여호수아서를 볼 때 우리는 먼저 삶을 생각해야 한다. 즉, 우리들 자신에겐 결여되어 있는 삶, 우리가 갈망하는 - 계획이 아닌 - 삶, 우리가 기대하는 보다 풍성한 삶.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삶이 아니라 특정한 삶 즉, 안식의 삶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것이 의도하는 바와 의도하지 않는 바를 깨닫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 신약성경 가운데 히브리서 4장에서 거의 출현하고 있는 “안식”이라는 단어는 매우 흥미있는 단어이다. 명사로 쓰일 때는 “고요함, 평화, 휴식, 평정” 등을 의미하고 동사로 쓰일 때는 “끊기다, 멈추다, 그만두다, 단념하다, 중지하다, 삼가다” 등을 의미한다. 또한 명사로 쓰일 때든지 동사로 쓰일 때든지 “철저한” 또는 “철저하게”를 의미하는 전치사적인 접두어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에 담긴 사상은 내적인 평화, 영적인 평정, 완전한 휴식에 관한 것이며 어떤 일을 그만둔 결과 얻어진 상태에 관한 것이다. 그 의미는 소극적이면서도 적극적인 것이다.
더우기 이 안식의 삶은 믿음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인가? 히브리서 기자는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희망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이고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녹스, Knox)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에 대한 잘 다져진 확신이며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재에 대한 확신이다”(웨이무쓰, Weymouth)

그리고 믿음은 고지식함이나 억측이 아니라 행위에 관한 도덕적 영적 원리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엡 2:8). 믿음으로 인하여 영적 실재들이 인간 경험의 영역 속에 들어오게 된다. 이는 코울리지(Coleridge)의 말과 같다.

“믿음이란 긍정하는 것이며, 영원한 진리를 실제화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점이 하나 더 있는데 앞으로 이에 관해 반복해서 강조할 것이다. 이는 안식의 삶이란 믿음에 의한 것처럼 노력에 의한다는 것이다. 안식의 삶을 누리려면 수동적이고 비활동적이어야 한다는 사상은 성경에 반대되는 것이다. 영적 안식에 관한 진리는 꿈이나 환상, 열광적인 감정의 영역에 속하는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개념이 아니라 값비싼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히 4:11)라고 한다. 여기서 “힘쓸지니”(strive eagerly)라는 말은 여호수아서 4:10의 말과 같은 것이다.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속히 건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믿음이 노력을 대체하지 못하며, 노력 또한 믿음을 결코 대체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실제적인 성결에 관한 진리가 때때로 어려움을 겪곤 한다. 이는 성결한 삶을 이루는데 있어서 인간의 노력은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묘사는 올바르지 못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이며 자신의 성화에 대해 책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안식은 바쁜 일과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어떤 이의 국면에
맞추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선하신 분을
사랑하고 섬김이여!
그분을 향하면서 벗어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된 안식입니다.

그리고 삶의 어떤 질적인 면모를 생각하려고 한다. 이는 포기하는 자세와 따르는 자세를 포함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 의해 도달하여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을 실제화시키며 자기 신조의 신실성과 능력을 인격과 행위로 증명해 보이려는 지속적인 정력적 노력을 통해 지탱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호수아서에서 접근할 때는 그 이야기가 애굽의 속박에서 피와 능력으로 이미 구속을 받았으며 하나님을 힘입어 국가로 구성된 백성들에 관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심으로 전 인류를 향하신 구원 계획을 성취하고자 하셨다.
여호수아서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뒤이어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 책의 관점을 결정하면서 그 주제가 구속이 아니라 이미 구속받은 백성들의 성격과 소명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여호수아서를 지금의 시점에서 생각해 보기에 적절한 주제로 만드는 것은 이런 사실 때문이다. 이른바 “케직”(Keswick)의 메시지는 중생치 못한 사람들 - 비록 그런 사람들도 그 메시지로 인해 감동을 받는다 할지라도 - 에게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중생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처음 받은 은혜의 생활과 예배 속에 함축된 의미를 끊임없이 직면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 선포되는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축복은 중생할 때에 주신 바 된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볼 때 그 모든 축복들이 우리의 소유로 되는 것은 믿음과 노력에 의해서 그것들을 사유화할 때 뿐이다.
축복의 총체인 기업(inheritance)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의 것이 된다. 그러나 소유하는 것(possession)은 그 기업 중 사유화하는 부분들이다. 대약진이 이루어진 후에 여호수아로 하여금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수 13:1)라고 말하게 한 것도 이런 차이 때문이다. 중생 속에 싸여진 것이 성화 가운데서 펼쳐져야 한다. 기업이 소유하는 것으로 되어야 한다. 가능한 것이 실제화되어야 한다. 숨겨져 있는 것이 뚜렷이 드러나야 한다. 잠재력이 중심세력으로 되어야 한다. 여호수아서의 진행과정에서 마땅히 소유해야 할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것 중 많은 것들을 소유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천 삼백여 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답변은 이스라엘의 문자적 역사는 모형적 의미를 지녔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라고 말한다. 유월절, 만나, 갈라진 반석, 장막, 제사장, 희생제물, 홍해, 요단강 등은 모두 영적 실체들을 지닌 역사적 모형들이다. 가나안과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에 들어간 것, 그들의 지도자 여호수아, 가나안 땅에서의 열 두 지파의 경험 등 모든 사실은 오늘날 영적 생활에 관한 진리와 경험을 나타내고 있음을 히브리서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히 4:8,9,11,13)

여호수아서에는 영적 경험들이 역사적 사건들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몇몇 구절 속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서 그러하다.
역사적으로 안식의 땅이었던 것이 영적인 면에서 안식의 삶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의 영역은 특별한 장소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엡 1:3) 인격이다.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백성의 기업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업이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소유하는 것은 그들이 그 땅을 소유했던 것의 원형(antitype)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역은 지상적이었지만 믿는 이들의 영역은 천상적이다. 그들의 영역은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우리의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 그들의 부요함은 일시적이지만 우리의 부요함은 영원하다.
여호수아서에서 역사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서신들에서는 영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과거에 한 민족의 몫이었던 것이 지금은 하나님의 보편적 교회의 특권이 된다.

여호수아서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호수아서는 동일한 내용은 아니지만 긴밀하게 연관된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각 부분들의 제목은 가나안 땅에 들어감(1:1-5:12), 가나안 땅을 정복함(5:13-12:24), 가나안 땅을 소유함(13장-24장) 등이다.
이 제목들은 역사의 과정을 지칭할 뿐 아니라 역사가 안고 있는 영적 진리를 나타낸다. 역사적으로 모형화된 영적 축복에 들어가려면 믿음의 행위에 의거해야만 한다. 이것이 1장의 주제이다. 그리고 들어간 땅에서는 싸워야만 한다. 원수들을 정복해야만 한다. 믿음은 노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것이 2장의 주제이다. 마지막으로 들어가 싸운 땅을 소유해야만 한다. 믿음과 노력과 엄청난 부요함을 가져올 것이다. 이것이 3장의 주제이다.
각 장의 배열은 전진적이다. 들어가는 것은 정복하는 것에 선행해야 하며 정복하는 것 또한 소유하는 것에 선행해야 한다. 안식을 얻기 위해 싸워야만 한다는 사실이 기이하게 여겨진다면 여호수아서에 대한 신약의 대응부인 에베소서가 안식을 싸움과 연관시켜 강조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베소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았고, 하늘에서 우리의 씨름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는 것을(엡 1:3, 2:6, 6:12) 말한다. 에베소서에 다섯 번이나 나오는 “하늘”(heavenlies)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와 동일시된 신자의 영적 경험의 영역”(스코필드)이라고 올바르게 정의되어 왔다. “하늘”은 여호수아서의 가나안 땅에 대해 신약적으로 상응하는 것이다.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구분짓는다면 이 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신자가 개종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신분과 기업에 관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신자가 믿음과 노력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이르러야 할 수준과 소유하고 있는 내용에 관한 것이다. 첫번째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 지위에 관련되며, 두번째 것은 경험적인 면에서의 실제 상태에 관련된다. 이런 구분점을 파악하지 않는다면 흐리멍텅한 생각만 갖게 될 것이고 실망스런 결과만을 낳는 노력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며 정복하고 소유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 것이 된 모든 축복을 경험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 맨 끝 부분이 역대기이다. 여호수아에서 열왕기까지를 Former prophets, 이사야에서 말라기까지를 Latter prophets라 한다. 단순히 선지자들에 의해서 쓰여졌기 때문은 아니다. 선지자로서의 사역에 걸맞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선지자들의 사역이 어떤 것이었고, 그리고 그들의 기록이 그들의 활동에 맞는 것이었는가? 흔히 선지자는 미래의 일을 계시를 받아 예언하는 자라고 본다. 그러나 이사야, 예레미야의 예언은 미래의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사역을 미래와 관련시켜서 이해하나 히브리에서 말하는 선지자는 과거의 사건을 말하기도 한다. 선지자의 사역은(미래와 관련되어 예언한 이사야, 아모스 등) 미래의 사건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과거, 현재, 미래에 연관되어 있다. 선지자의 사역은 현재에 비추어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역사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밝혀주고 있다. 역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의 행위는 누구에 의해 정해지는가? 우리의 행위의 의미는 내가 정한다. 어떤 행위가 있다고 하면 그 행위의 의미는 행위의 주체자에 의해서 부여된다. 그렇다면 나의 행위는 과연 나에 의해서만 결정되는가? 다른 많은 영향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역사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간이다고 봐서 시작하는 것이 철학적 방법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간의 마음까지 포함해서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 즉 역사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을 그 원대로 주관하시는 이,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의 뜻, 계획)의 실현이다. 역사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실현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서이다. 선지자들은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에 비추어서 현재와 과거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선지자의 근본 사역이 어느 한 시기에 국한될 수 없이 과거, 현재, 미래에 나타나는 것이다(과거 역사를 선지서로 구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느 시대에 선지자를 허락하심은 일차적으로 그 시대를 위한 사역자로 주신 것이요, 그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보내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사역은 현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여호수아 1장 1절에서 신명기까지의 역사적 흐름을 보면 불순종의 제1세대의 멸절후에 새로운 세대가 나오는데 인구조사(계수)로 시작되어 새로운 이스라엘을 모압에 세워놓고 모세가 자기의 떠날 날이 가까운 것을 알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언을 한다. 이스라엘의 과거를 돌이켜보고 과거의 비참한 역사를 돌이켜보며 이스라엘의 생사가 하나님을 순종하는데 달려 있음을 가르친다. 이런 생명의 원리는 광야에서만 아니라 오늘 너희에게도 적용된다고 신명기 4장 처음에서 간절히 말한다. 생명의 원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존재가 하나님의 말씀 순종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모세가 죽은 다음이 여호수아의 시작이다. 모세는 약속의 땅 건너편까지 인도하는 것이 그의 사역이었고, 여호수아는 그 백성을 거느리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서 땅을 유업으로 얻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운 다음 여호수아를 격려하는 말씀이 5절이다.“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take one's stand)에서 이방 백성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 아무도 여호수아에게 맞설 수 없음을 밝혀준다. Leadership의 핵심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로 들어가면 된다. 즉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야 진정한 지도자가 된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유기체(organic body)이다. 유기체의 각 요소들이 나름대로의 존재요소를 독특하게 갖고 있다. organic body의 중요한 개념은 각 존재가 독특하지만 그 전체가 하나인 것이다.
6절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에서 보듯이 땅을 유업으로 얻게하는 것이다. 이 땅은 역사적으로 관통해서(창세기-계시록), 창 12장과 관계해서 보면 하나님의 왕국과 관련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그 땅에서 삶의 터전을 얻는다는 것이다(예, 산상보훈).
7절 이하에서는 이전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조건은 하나님이 지도자와 함께 하시기 위한 조건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리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 율법이 가르치는 곧은 길로만 가라 그리하면 내가 갈 수 있는 길 어디든지 형통하리라(산상보훈)는 것이다. 율법은 온전한 지혜를 제공한다. 유대주의에 와서 지혜신학이 발달했으나 그 근원은 율법이다. 성경이 우리의 진정한 지혜가 됨을 신명기, 민수기 등에서 보여주고 있다.
지도자의 삶과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하는 지침이 율법이라고 하신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의지인 명령과 관계시켜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수단이다. 법은 바로 통치자의 뜻(will)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은 지도자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요구하신다. 여호수아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은 하나님의 명령을 대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후에 이것은 왕에게 적용된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중보적인 왕권(지도권, 주권, mediatorial. kingship. leadership)으로 율법이 여호수아가 지혜롭게 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겠다 - 백성과 inclusio, 핵심적인 내용을 처음과 나중이 일치함으로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1-9절까지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시고 사명을 주신다. Authoriged leader Joshua.
10절 이하 1) 1:1-9 Joshua Authoriged by as the leader of Israel
2) 10절 이하 백성에게 명함 - 이 명령은 Leadership의 행사이다.
12절,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는 메니하 즉 안식의 개념이 덧붙여진다. 그러면 여호수아의 안식의 개념은 무엇인가? 여호수아가 르우벤 지파의 약속을 상기시키며 그것을 이행토록 촉구한다.
15절에서 안식이란 개념과 연결이 된다. 이어서 16절은 여호수아의 명령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으로서 그 반응은 그의 Leadership을 인정한다(be strong). 이것은 하나님이 쓰시는 용어인데 여기서는 백성이 여호수아를 격려해 준다. 지도자는 필히 그가 지도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격려와 위로를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에서 나오는 안식과 땅의 개념을 보면 여호수아의 사역이 중보자적 사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지도자가 누구인가를 강하게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함께 하셨듯이 여호수아에게도 함께 하셔야 합니다라는 백성들의 바램이다. 하나님의 대행자 - 하나님의 다스림을 중보하고 매개하는 자이다.
여호수아 2장은 정탐을 보내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정탐 두 사람을 뽑아 싯딤에 보내는데 이들이 여리고에 들어가 기생의 집에 들어갔다. 왜 기생의 집에 들어갔을까? 가장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고 온 갖 정보를 캐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리고 왕이 정탐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잡으려 하자 기생 라합이 이들을 숨겨주고 그들이 나갔다고 거짓정보를 준다. 2장의 주된 관심이 무었일까? 여리고 성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정탐을 보낸 목적이 무엇일까? 여리고 성의 수비와 약점들을 알아내서 주력부대로 공격하기 위한 군사적 정보를 얻기 위한 파송인가? 이들이 얻어온 것은 무엇인가?
24절에 보면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말하기를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븉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이들이 가져온 정보는 군사적인 정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단 한 가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우리 손에 붙이신 것이 확실함을 알고 있다.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이 사실이 이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음을 그 나라의 백성인 기생 라합과 그 백성들의 입으로부터 듣고 온 것이다. 미래에 대한(그리스도께서 주실 구원의 확신) 여호와의 구원의 확신을 주었다.
기드온의 경우에는 종자 하나를 데리고 미디안 진 중에 정탐하러 갔다가(보리떡의 꿈) 적군들이 꾼 꿈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서 미디안을 기드온의 손에 붙인 것을 확신하고 담대하게 승리했다. 싯딤의 여리고 사람들 -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홍해에서 건져내셨다는 소식을 듣고 간담이 녹아졌다. 라합이 두 가지를 이야기 한다. ①홍해 사건, ②시혼과 옥을 죽인 사건, 여호와의 두려움이 그들에게 이르러 마음이 눈처럼 녹아버렸는데 이는 심리적으로 전투의욕이 사라져버렸다는 뜻이다. 이는 전쟁의 패망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온다.
예) 골리앗과 다윗 : 함성을 지르며 상대의 기를 죽이는 심리적인 요소가 옛 전쟁에서는 크게 작용했다. 신명기와 민수기에 보면 앞서 그들에게 두려움이 임하게 하리라. 이는 하나님의 구원약속의 성취의 시작을 이미 본 것이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어떤 면에서 Holy War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진정한 용사란 여호와시다. 그래서 이를 여호와의 전쟁이라 한다. 전쟁의 승패가 여호와의 손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예를 들면 미디안의 군대나 다윗의 전쟁 등에서 보면 적군이 겁에 질려 우왕좌왕 하다가 아군들을 서로 죽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용사는 여호와이신 것으로 중요한 것은 두려움(panic)이 임한다는 것이다.
라합의 신앙고백은 여호와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시혼과 옥을 죽이신 것을 듣고 이스라엘의 편에 동조하여 자기 민족을 반역한 것이다. 라합의 자기 민족을 버림이 뜻하는 것은, 옛 사람은 무신론이 있을 수 없다. 절대 신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왜곡된 신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대 종교는 모든 삶이 종교와 직결되어 있다. 한 민족을 버린다는 것은 지금 말하는 정치적인 집단을 떠나는 것과 달리 옛날은 한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택하는 것이다.
룻의 신앙고백을 보면 알 수 있다. 라합은 룻보다 오래전 인물이다. 라합은 자기 민족을 버리고 이스라엘을 택하는 것은 정치적 종교적 인 이유보다 결정을 내리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12절에 있는, 여호와께서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기에 자기 민족을 버리는데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는 신약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믿고 고백했던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약자, 천대 받았다는 관점에서 하나님을 모셨다고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가나안 땅은 창 12:1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왕국이 세워질 땅으로 정하신 곳으로 이 땅에 세워질 왕국이 하나님의 왕국으로 이스라엘의 왕국은 진정한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왕국은 지금 교회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왕국이 완전히 완성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이며 그 의미는 이스라엘 왕국이나 교회나 하나님의 나라나 다 같은 것이다.
구속사적인 관점이 중요하다. 창조(C)-타락(F)-노아(N)-아브라함(A)-출애굽(Ex)-신명기(D, 할례, 제사)-포로(Exile)-그리스도-재림. 이 전체는 하나의 연관된 흐름이다. 일관성과 동질성이다. 발전=변화. 구속사의 큰 사건이 있을 때 마다 각 상황이 다르다. 따라서 각 사건에 적용된 것을 다른 곳에 적용시키지 못한다. 변해버린 구속사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면 출애굽 후 그리스도 이전까지의 사람들은 할례, 제사를 드려야 하나 그리스도 이후의 사람들은 할례나 제사를 드리면 안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역사적 시점의 어떤 시점에서 살고 있는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할례, 제사를 드림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상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두 다 해결되었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요구들).
3장 싯딤을 떠나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나온다. 언약궤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가? 언약궤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밀접하고 언약궤가 앞서가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뜻한다. 요단강을 건너는 이스라엘 앞에 언약궤가 앞서 건넌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인도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뜻한다.
ןורא(아론) = 법궤(언약궤) → 언약궤 안에 있는 두 돌판이 법궤의 의미를 대표하는 것인가? תרפכ  רפכ(카파르, 케파라트) - cover λαοτηριον  רפכ(카파르) - 속죄, 속죄소 위의 두 그룹이 법궤의 뚜껑인지 그룹의 발판(podium)인지 잘 모르겠다.
 אפכ־לע  בשׁוי היבורכה בשׁי רע בשׁי(야샤브 알 야샤브 하케로베 요샤브 알-카파)
 sit onthroned)
요단강 건널 준비를 명하시면서 성결케 할 것을 명하신다.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법궤를 메고 백성들 앞에 행하라 하셨다. 5절에서 여호수아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너희 자신을 성결케하라 그 이유는 내일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임이니라. 요단강 도강이 어떤 도강인지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적적인 도강이 될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이적적인 도강을 하시는가? 이 목적을 뭐라 말하는가? 7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늘날 내가 너를 온 이스라엘 앞에 높이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는 것을 보이리라. 여호수아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앞에 세우신 지도자임을 확실히 알리기 위해서였다. 구름기둥, 불기둥, 연기 등을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가시적 형태의 영광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이적, 신현, 예언을 통해 이스라엘을 통치하셨는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심을 이렇게 도식적인 방법으로 표시한다면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
Archer는 Pre-Adamic human raichypothesis(아담 이전의 인류 가정설)를 주장하여, ‘창세기는 하나의 우주다’라는 경향으로 아주 위험하게 흘러간다(근래 미국 보수신학의 흐름이). Carborn test는 5천 년 이상은 별가치가 없다. Carborn의 반감기 기준에 의해서(가정으로 된 것으로) 확정할 수 없다.
이적적인 도강으로 하시는 목적이 여호수아를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임을 확인시키기 위함이며 10절에 보면, 이것으로 너희가 알리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 계심을 알리라. 그리고 너희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7족속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실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다. 이런 면을 무시하고 성경에서 여러 기사가 주어지면 자유주의자들은 오직 한 가지 의도만 보고 편집자들의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가지 의도로만 기록되었다고 본다.
요단강 도강의 목적 : ①여호수아의 하나님이 세우심에 대한 증거, ②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다는 의미, ③가나안 7족속을 몰아내심의 의미.
우리 자신도 행동을 할 때 한 가지 행동만을 위해 하지 않고 그 의도와 목적은 여러가지가 들어 있을 수 있다. 요단강 건너는 사건은 이스라엘의 과거 사건과 비교하면 홍해와 유사성을 갖는다. 홍해사건을 통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높이 보였고, 요단강 사건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시며 가나안 7족속이 너희 앞에서 쫓겨나리라 했는데, 홍해사건도 홍해사건을 통해 구원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확실케 하는 신앙으로 나타났다. 요단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가나안의 여러 왕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 두 사건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단순한 약속 이상의 것이요, 하나의 전쟁이었다. 홍해 = 애굽의 최정예 부대가 물 속에 수장됨, 요단 = 적들의 간담이 서늘하게 됨. 이것으로 하나님의 전쟁의 의미가 강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전쟁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두려움인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패배의식을 심어놓은 것이다. 요단강을 건넘은 가나안 백성과의 싸움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4장에 보면, 홍해 경험을 통해 노예로서의 이스라엘은 죽고, 건넌 후에는 자유로운 이스라엘의 새로운 존재로서 탄생하게 된다. 이런 의미가 요단강의 도강에서도 조금 다른 의미로 적용된다. 요단강을 건넌 후 약속의 땅이, 순례자의 생(pilgrim)이 안식의 삶이 된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넘으로 광야에서 약속의 땅이 되는 새로운 의미가 된다.
4:1절에 요단강 건너편에 열 두 돌을 취하여 세운다. 돌을 취하는 것은 12지파가 광야생활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광야생활의 12지파가 죽고 안식의 땅에서 새로운 안식이 시작된 것을 상징한다. 광야생활의 종식과 약속의 땅의 생활이 시작된다. 돌을 세움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 이스라엘의 신앙전승은 아비가 아들에게 이야기 한다.
②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큰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 기념비 등으로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분명히 모세나 여호수아는 자신의 사건에 대한 기록을 한 것은 사실이다(모세오경 저작, 여호수아 기록설).
14절에 이스라엘의 회중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생전에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두려워하였다. 요단강 도하 날짜 = 정월 10일, 유월절 양을 선택하는 날 = 14일에 양을 잡아 하나님께 바친다.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킨다(1월 14일).
유월절의 의미를 크게 생각한다면 출애굽의 경우는 먼저 유월절이 있은 다음에 홍해가 있고, 광야여행이 있다가, 요단강에서는 요단강 도하가 먼저 있고 유월절이 있다. 홍해에서부터 요단강의 기간은 transition period이고, 홍해 이전의 시대는 이스라엘의 옛시대(애굽의 노예 상태)이고, 요단 이후의 시대는 새 이스라엘의 시대로 구분짓는다(약속의 땅에서 축복의 상태의 삶).
유월절 ??????? 홍해 ??????????????????????????????????? 요단 ???????? 유월절
길갈은 여호수아가 정복전쟁을 하면서 본진(main camp)으로 삼은 곳이다. 고별사를 행할 때는 세겜에서 행한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이 도강한 사실을 당대에 이스라엘이 느끼도록 하지 않으시고 대대로 온 이스라엘에 선포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행하신 큰 기원의 행동을 대대로 알기를 원하셨는데 그 방편으로 돌들을 세우셨다(4:19-24).
요단강 도하 사실과 홍해를 건넌 사실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여기서 비교할 점은 홍해사건과 요단강을 이적적으로 건너게 한 사실이 24절에 나온다. ①땅의 온 민족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온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으로)하시기 위함이다. ②온 민족들로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다.
자연계 변화(Naturwan Dlung)
약속의 땅에서 자연적인(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현상은 하나님의 원하실 때마다 변화될 수 있다는 것, 이는 하나님의 자연계에 대한 통치권(주권)을 말한다. 홍해와 요단강을 일시적으로 말리우심은 자연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리이다. 라합이 이런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신앙고백을 했다(롬 1:18). 모든 피조계를 통해 변명할 수 없도록 자신을 알리신다.
자연계시 :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보고(보이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 추론해서 알 수 있다고 한다. 본래 인간의 지음이 그렇게 지어졌다. 자연계시가 인간세상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느냐 하면 우상숭배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 이유는 ①인간의 이성이 제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고(εν διαλορισμοις; 엔 디알로리스모이스), ②이성이 제 기능을 상실한 것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내가 내 가치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인간의 뿌리 깊은 반역심이 더 큰 원인이다.
계시는 점점 발전해서 더 밝게 풍부하게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그 내용은 그 당시의 수준에다가만 맞추어서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러한 사회적 한계를 넘어가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온 천하 만민들이 그 사실을 보고,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깨달아 알게 하려는 목적이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평생토록 여호와를 경외케 하려 하심이다.
5장 초두에 하나님께서 이와같은 목적을 가지고 행하신 이적(천하만민으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하나님 되심을 알리는 이적)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열왕들의 마음이 녹아버렸다(םבבל; 레바밤 . 하나님의 행동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 ①라합과 같이 믿음을 유발시킨다. 순종의 믿음에는 항상 순종의 전제가 있다. ②두려움(המיא; 임마 이 있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믿음(의지,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롬 1장에서 바울이 복음전도를 자기의 사도 직분 받은 목적을 무엇으로 표현하느냐 하면 롬 1:5 εις υπακοην πιστιως(에이스 휘파코엔 피스티오스)라고 한다. 믿음과 순종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bilievism, 마귀도 하나님 계신줄 안다. 그렇구나 하는 믿음은 마귀도 갖고 있다. 요단강 도강은 가나안에 대한 하나님의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고, 이스라엘의 대적을 패배시킨 하나님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5:9 할례를 행함으로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5장을 보면 요단강을 건넜고 가나안 땅들 아모리 왕들의 마음이 녹았다.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은 할례를 행한다. 그 이유는 출애굽 제 1세대는 할례를 행하였지만 광야 여정에서 낳은 자들은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할례의 본 뜻은 창 15장에 나타나는데 언약 즉, 하나님 편에서의 Commitment(헌신, 은혜)이다. 창 17장에서는 할례를 가리켜 언약의 징표라 하였다. 갈라놓은 짐승 사이로 하나님이 불로 지나가심으로 확실케 해준다. 내가 만약 어길진대는 쪼개진 짐승처럼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창 17장에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시면서 할례를 지시하신다. 하나님의 백성 편에서의 하나님께 대한 징표이다(아브라함의 Commitment). Corporate personality individualim individuality.
개인신앙을 강조하면서(에스겔서의 이야기를 들어서) 개인주의 원리를 강조한다. 그러나 십계명에 아비의 잘못을 삼 사대까지 저주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까? 아담이 행한 범죄가 모두에게 미치고, 그리스도의 의로운 한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고 하는데 이것은 왜 그런가? 인간들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각각을 취급하면서 집단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이를 히브리서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을 때에 성경은 그 후손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흥망은 그들의 왕과 일치한다. 왕과 이스라엘 백성은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류를 하나의 유기체로 본다. 성경은 인류 속에서의 한 개인, 인류를 어떤 조직으로 보느냐 하면 유기체로 본다. 유기체란 각자 개별성이 있으면서 상호간에 뗄 수 없는 연결이 되어 전체가 하나됨을 말한다. 유기체적인 인간관계가 항상 필요하다. 할례가 이처럼 은혜받은 자(언약)의 징표이다.
길갈에서 할례받은 이스라엘이 어떤 이스라엘인가? 그것을 생각해봄이 중요하다. 불순종의 광야세대의 이스라엘이 다 멸망한 후 새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의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순종과 언약을 맺게 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약속의 땅에 들어온 새세대에게 명하신 삶은 성결의 삶을 명하신 것이다. 이방 땅의 노예상태로부터 광야생활 길을 지나 약속의 땅, 새언약의 땅으로 인도하신 후에 새세대에게 명하신 것이 할례를 통한 순종과 헌신의 맹세였다. 가나안 입성과 할례는 아브라함 언약과 약속의 신실성을 하나님께서 증명하신 것이다. 11절에 만나의 종결사건이 있는데 이는 가나안 정복의 때가 임박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13절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출현한다. 너는 우리 편이냐 적이냐?하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이제 도착했음을 알리고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다하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암시한다. 이 말을 하는 자가 신적 존재임을 암시해 준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출애굽의 사명을 맡기신 것과 연관이 되어진다. 특별히 여호와의 군대장관의 출현과 관련시켜 보면 여호와의 군대장관의 의미는 여호수아의 질문에서 나오는데 적이냐 위하는 자냐고 물어보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을 위한다는 말과 함께 만나 종결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전쟁이 도래함을 말한다. 이것은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정복의 사명을 명하시는 것으로 해석되어진다.
6장에 여리고성이 닫히고 이스라엘은 군대진영으로 전형적인 공격진영을 취한다. 고대로 갈수록(야만 사회로 갈수록) 왕 자신이 진두에 선다. 특히 동로마제국(불가리아)은 황제가 선두에 서서 싸웠다. 중국에서는 왕 자신이 나서기 보다 중앙에서 지휘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궤를 중심으로 두고 공격진영을 취했다. 여기의 전쟁방법이 특이하다. 6일 동안 성을 돌고 7일에 성이 무너진다. 이 전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쟁법을 알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טרח; 하라트 → ban).
이것의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초토화시키라는 명령이요, 몰살시키라는 명령인데, 라합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본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가 하나님과 함께 거함을 특별히 보여준다. 다른데는 여자의 이름이 나오지도 않는데 나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연관되는 때문으로 본다.
7장 아이성에서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한 참패가 나온다. 제비뽑아 아간이 걸려 돌로 쳐 죽임이 되어 후세의 모든 이에게 경고가 되었다. 매우 시사적인 상반되는 두 사건이 나타난다. 라합과 아간이다. 라합이 본래 멸망받기로 약속된 이방민족으로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아간은 하나님의 백성된 자가 스스로 하나님 백성됨을 포기했던 자이다. 하나님의 백성되기를(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했던 자로서 가나안이 당할 벌을 아간이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7:19절 이하에 보면 제비를 뽑아 아간이 걸린다.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사람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라 한다. 생각해야 할 여지가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을 드리는 구체적인 것은 자복이다. 매우 재미있는 것은 찬송하라는 히브리어는 הדות(토다) ← הרי(야라) → הרותה(하토다; confess)이다. 어떻게 죄의 고백이 하나님께 찬송이 되어지는가?
아간의 죄가 마땅히 진멸해야 할 여리고성의 모든 것 중에 그는 금과 옷을 숨겼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대신 멸망(진멸)을 당한다. 여리고와 아이성 공략과 관련해서 라합과 아간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라합의 경우는 이방여인으로 하나님의 능하신 능력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이방여인 한 사람의 신앙고백이 끼친 영향은 심히 컸다. 이스라엘의 두 정탐군이 갔다와서 얻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며 승리케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왔는데 이는 라합에 의한 것이다. 라합은 어떤 의미에서 여리고성을 믿음으로 정복케 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스라엘과 함께 살게 되었고 아간은 저주의 대상인 물질을 탐해 숨김으로(라합은 이스라엘의 백성을 숨겨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 자기 백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않음을 초래하여 이로인해 이스라엘의 마음이 물처럼 녹아 믿음 대신 패배의식과 두려움을 갖게 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아간으로 인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좌절되지 않고 계속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진로는 험난해져 적국이 이스라엘에 대항할 마음을 주어 가나안 왕들이 뭉쳐 대적하는 동기를 주었다.
이어 에발산과 그리심산에서 율법을 낭독하고 축복 및 저주를 선포한다. 이 의미는 무엇인가? 왕의 통치는 구체적으로 왕의 칙령, 법을 선포함으로 시작된다. 축복과 저주의 선언은 하나님의 통치선언이다. 이 땅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국임을 선언한 것이다. 율법선언을 이야기하면서 세겜정복이 안나온다. 이로인해 생기는 영미 자유주의자들의 견해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 trihalleague는 야웨종교를 중심으로 동맹체를 형성하였다고 독일 계통의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예) 델피동맹:희랍의 여러 반국가들이 동맹체 형성한 것(amphyctyony).
9장-12장까지는 가나안 지역을 본격적으로 정복한 내용을 적고 있다. 대규모 정복전쟁을 언급하기 전에 유의할 점은 9:1절에 온 가나안 주민들이 이스라엘과 싸우기를 꾀했다(결심). 그러나 단 한 곳, 기브온 주민들은 이를 거절한다. 멀리서 온 것처럼 꾸며서 화평을 꾀한다. 이스라엘은 속은 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 이 기브온은 이때 맺은 언약의 신실성으로 인해 사무엘하에 나타난다. 사울이 기브온 백성을 죽이자 이로 인해 책망과 기근이 오고 사울 집안의 일곱 자손이 죽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얼마나 심각하게 보시는가를 알 수 있다. 이 문맥에서 기브온 사건의 의미는 이로 인해 기브온 백성이 이스라엘과 화친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브온을 먼저 치려하자, 길갈로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고 아얄론 골짜기 싸움이 시작된다. “태양아 머무르라”는 기적이 일어난다. 기브온 사건을 통해 여호수아가 남방연합세력을 완전히 쳐부수는 계기가 된다.
세겜과의 충돌사건이 왜 없었을까? 세겜은 그 민족이 히위민족이고 기브온이 히위민족이다. 왜 기브온민족이 이스라엘과 화친했을까? 여호수아 10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정복은 중요 거점만의 정복이지 완전한 정복은 아니다. 이 정복전쟁도 하나님의 전쟁이다.
11장에 북방지역 전쟁이 나온다. 메롬 물가에서 싸워 이긴다. 이 정복전쟁은 장기간에 걸쳐 수행이 된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무서운 적으로 그들을 제거한 것은 이스라엘의 정복전쟁의 종결을 말한다. 12장에 여호수아가 정복한 땅의 상태가 나온다. 그리고 이어 13장에 땅분배를 명하신다.
아직 정복해야할 땅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하신다(중요 거점만 정복한 것이기에). 완전한 정복이 아니므로 그렇다. 남은 땅(블레셋) 정복은 다윗 때에 이루어진다. 다윗은 여호수아가 이루지 못한 정복을 종결한 인물이다. 각 지파에게 할당된 지도를 그려오게 한다. 이는 도면상의 분배이다. 완전히 정복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사사기의 배경이 된다. 여호수아로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기 사명을 다했다. 14:10절에 갈렙이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45년으로 말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전쟁기간을 포함한 것이다. 저자의 의도를 잘 파악하여야 한다. 21:43절에 보면 약속의 땅에서의 각 지파의 기업이 분배되고 각자가 분배받은 땅에서 정착하는 생활은 안식의 생활이라고 한다(44절).
22장 두 지파는 회향하다가 요단강가에서 단을 쌓고(이는 이스라엘의 동질성을 표시하기 위한 제단을 쌓은 것) 하나님이 예비한 처소는 한 곳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한 시기에는 오직 여호와를 예배하는 곳이 한 곳밖에 없다. 이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계명을 엄하게 지켰으며 하나님의 성소를 한 곳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였는가를 볼 수 있다.
23장 여호수아의 고별사가 나온다. 신명기의 모세의 고별사와 그 골격이 유사하다. 과거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미래에 대한 확신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 하나님의 성전과 직결된 모든 것들을 이야기 한다. 23:14절에서 임종을 앞둔 심각한 경고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성이다. 24장에서도 고별사가 계속된다. 제 2의 시내산 언약(Covenant Renewal)으로서 시내산 언약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약속의 땅, 유업의 땅에 묻히는 것은 의미가 굉장히 깊은 것이다.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제사장)의 죽음은 땅 정복세대가 종말을 고하는 것을 암시한다. 세겜 땅의 장사 내용은 땅 정복의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방 애굽에서 눈을 감은 요셉의 하나님 언약을 굳게 믿은 믿음을 신실하고 확실하게 보는 장면이다.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사가 한 세대를 구분짓는다. 땅 정복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로운 약속의 완성을 의미하고 있다.

사사기(םיטפשׁ; Judices 

사사기는 비평가들에 있어서는 굉장히 논란이 있다. 하솔왕 야빈의 사건과 갈렙의 정복사건도 doublet였다고 말한다. 즉 이것은 두 사건의 중복표현이라는 것이다.
1장 여호수아의 정복은 원칙적인(도면상의) 정복이었고 그 이후에 구체적 정복사역이 계속 필요했다.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은 믿음으로 쳐서 이길 과제로 남았다. 사사기의 도입 부분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라고 시작한다.
2:10절에 보면 2세대가 죽고 3세대가 시작되어 그들은 הוהי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을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들의 처음 질문은 하나님께 ‘누가 정복사업의 주도역할을 감당할 것인가?’를 묻는다. 모세가 죽을 때는 새로운 지도자를 세웠는데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는 아무도 계승자가 없어서 그들은 혼란에 빠졌다. 즉 지도자의 공백기가 온 것이다. 그들은 누가 우리의 지도자가 될 것인가를 알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지파’(유다지파는 후에 다윗 왕조와 연결)가 먼저 올라가라고 하셨다. 사사기 끝 부분은 왕이 없어서 각기 제 소견대로 행했다고 함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지도자가 없던 시대였음을 말해준다.
이 시대의 정복사역의 특징은 이스라엘이 뚜렷한 구심점과 응집력 없이 각 지파가 자율적 위치로 행했다는 점이다. 이것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이다.
① 이 신적통치를 이상적인 형태로 볼 것인가? 모세, 여호수아 같은 중보자가 필요없이 안식의 땅이므로 하나님의 직접통치가 좋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인가? 그것이 옳다는 것을 지지하는 구절은 기드온이 말한 ‘너희 왕은 하나님이시다’라고 한 것이 근거가 된다. 종말론적 통치(계시록)에서는 인간 중보자 없는 하나님의 직접통치를 말하고 있으므로 이상적이라고 한다.
비평적 견해 :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각 지파의 자율적체제를 이상적형태로 본다. 암픽티오니를 이스라엘의 시작으로 보고 최초의 정치체제로 본다. 이것이 선지자들의 이상이었고, 다윗왕조는 그 이상적체제에 대한 반발적 형태로서 백성을 착취했다고 한다. 이 왕조체제를 반발한 사람이 엘리야였다고 하며 그 입장을 지지한 자들이 선지자들 집단이었다고 한다. 이와같이 이스라엘 역사를 기술하려는 자유주의 학파의 경향은 보수주의 진영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 다윗왕조는 결코 하나님의 적극적 뜻하심이 아니고, 허용적인 것 뿐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직접통치는 가장 이상적인 것이었는데 ‘왕정형태’는 이스라엘이 요구하므로써 하나님이 그냥 용납하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사사들의 출현이 ‘하나님의 직접통치’에 대해 이스라엘이 혼란스로워하므로 비상조치로 주신 것이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아무 인간적 지도자를 주시려고 안했는데 이스라엘의 요구로 인해 할 수 없이 주셨다는 것이다.
② 그러나 하나님의 직접통치 형태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의 근거는 사사기의 기록을 전혀 하나님이 기뻐하신 역사로 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사사기의 기록을 전반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계속해서 ‘지도자’를 통한 구원역사를 이루시기를 기뻐하셨지, 직접적인 통치로 하시려고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나중에 왕정형태를 주심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왕정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키는 구체적 도구로 하나님이 기뻐하신 뜻의 구체화이다.
1장의 정복사역은 모두 그들에게 주신 기업에서 자기들이 쫓아내야 할 가나안을 다 쫓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주민들이 계속 살았다고 한다. 정복사업이 갈수록 지지부진해졌다. 이스라엘 가운데 가나안인이 살기도 하고(2:29 에브라임지파 경우) 가나안인 가운데 이스라엘이 살기도 할만큼(31절 아셀지파 경우) 정복사업은 부진해졌다.
2장 보김에서     의 사자가 와서 그들을 책망한다.      우는 자들      울다는 뜻, 1장에서 다 쫓아내지 못한 이스라엘의 실패를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키지 못한 불순종으로 꾸짖고 그 벌로 3절에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소리 높여 울었다. 따라서 1장은 2장의 서론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연약의 신실하심을 천명하셔서 끝까지 지키심을 말씀한다. 그러나 언약관계의 의무는 쌍방적이므로, 이스라엘의 할 일은 있는 것이다.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고 그 단을 헐라 하였거늘’ → 죄와의 연합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포기하는 것이다.
a. 그들과 언약 맺은 것은 민족간의 화평조약이다(하나님과 연합, 창기와 연합). 가나안과 공존하는 길을 택함으로 결국 타협해버렸다. 정치적인 평화공존의 언약 → 이것이 하나님과의 언약파기, 이것은 정복사업 사명의 포기요 상실이다.
b. 가나안의 제단을 헐지 않은 것은 종교적인 공존을 뜻한다. 가나안 종교를 용인하고 묵인한 것이다. 하나님이 가나안 원주민을 진멸해 버리라는 근본 뜻은 그들의 타락과 부패상을 본받지 말도록 하시는 것이다. 종교, 도덕적인 타락을 막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하나님의 뜻은 거룩하고 성결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것이며 창 12장과 출 19:5,6의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려는 뜻인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반역한 것이다. 사사시대의 어두운 타락의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통곡하고 울었으나 그것이 회개의 차원에까지 가지 못하고 책망에 대한 ‘자기 좌절’, ‘자신의 무력감’을 느낀 정도였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앞길에 대한 절망감’을 절실히 느낀 것이다. 이런 사건들은 절망적인 역사를 암시한다.
6절 이하는 어려운 문맥인데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냈다고 되어있다. 여수아가 1장에서는 죽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다시 살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어 8절에서는 여호수아가 죽은 사건이 다시 나온다. 비평가들은 2:6절의 서론과 1장의 서론이 서로 다른 서론으로 되어 있다고 하며 그 이유는 사사기의 편집과정이 복잡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서론 사이에 ‘보김사건’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사사시대의 성격을 논함에 있어서 2개의 다른 관점에서 논할 수 있다. 사사시대 전체를 보는 관점을 2가지로 놓고 볼 수 있다면 1장-2:5절의 관점과 2:6절 이하의 관점으로 구분지을 수 있다. 이 상이한 관점은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한다. 사시시대의 의미를 다양하게 밝힌다.
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남겨 놓으신 이유가,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전쟁을 가르쳐 알게하기 위해서라고 하신다. 또한 율법준수 여부를 알고자하심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의도, 전쟁을 가르치는 것이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생존의 전쟁 때문일까? 그것은 영적훈련과 믿음에의 훈련 때문이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 믿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약속의 땅의 전투적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2:22, 3:4절의 목적과 관계 있는데 이 전쟁 속의 시련 속에서 그들의 믿음을 훈련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러나 6절에 보면 그들은 가나안과 통화하며 그들의 신을 섬겼다. 정치적으로 공존, 지역적 혼합생활, 물리적 교환 등은 종교적으로 발전하여 혼합주의의 이방 우상숭배로 발전한다. 이를 통해 가나안 진멸의 이유를 알 수 있게끔 된다.
가나안 → 이방신 숭배 → 종교, 도덕 타락 → 이스라엘의 올무가 되어 타락에 빠짐 → 그들의 신을 섬기게 됨 → 이스라엘의 배도 → 하나님의 심판(징계) → 그들의 간구 → 하나님의 구원(응답) 이러한 도식이 사사기에 성립된다.
     (건지는 자들) : 사사를 이렇게 타락으로부터 건지는 구원자들로 말한다. 이것은 여호수아의 직책과는 다른 것이다. 심판에 이른 백성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 사사이다. 그러나 이러한 직책은 다윗왕가에서 절정을 이루고 메사야적 성격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사사들의 직책마저도 백성의 타락과 함께 타락됨을 볼 수 있다. 예) 입다의 경거망동한 human sacrifice, 삼손의 비참한 최후 등은 사사들의 타락을 보여주는 것이다.
후에 미가의 사건에 보면 드라빔(우상)을 만들고 사적으로 레위인을 삼아 섬기고, 단 자손이 그 레위인을 자기들의 제사장으로 삼는다. 이러한 종교적 죄악은 전 백성에게 편만하게 되었다.
기브아사건에 보면, homosex를 하는 모습을 본다. 꼭 소돔성과 같다. 그대신 여자를 주매 밤새 강간하고 내어주어 죽게하고 그 여자를 남편이 12토막내어 온 지파에 보낸다. 그래서 베냐민지파가 모두 멸절당한다.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 속에 버려진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백성에게 왕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자기 옳은 소견대로 했다는 것으로 결론 맺는다. 왕(지도자)이 없는 것은 이스라엘의 혼란스런 모습의 이유로 보므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 통치는 왕으로 연결된다.
사사기는 어떻게 해서 여호수아가 지도자를 남겨두지 않고 진행되었나? 무언가 필요해서 그 중간기로 두었는가? 아니면 왜 그랬을까? 우리가 고려해야 할 사실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시험하기 위해서 남겨 놓으신 원주민을 통해 이스라엘은 훈련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패역하여 통혼하고 동거하게 되었다. 혈연적 혼합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주위세력으로써 징계하셨고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으로 다시 구원자를 보내셨다. 그러나 점점 타락한 이스라엘은 기브아와 미가사건에 와서 완전히 종교적 배도로 일관되었다. 그것은 가나안 종교의 깊은 영향이었다(마치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에 방불했다).
완전히 와해된 이스라엘의 상태는 사사기 마지막 21:25절에 볼 때 각기 자기 소견대로 행했으며 왕이 없었다고 기록한다. “기브아 사건과 미가 신상 사건”「dischronologization」(연대기를 흐트리는 기술방법) 그것은 사시기 전체의 타락적 성격을 규정짓는 사건들이며 사사기에서도, 초기에는 정복사업이 있었다가 후에 그들과 동화되어 버린 과정으로 나가므로, 그 사건들은 말기적 세대의 사건들일 것이다.
사사들의 성격은 일차적으로는 여호수아 뒤를 잇는 지도자들이다. 초두 1장에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정복을 이끌 것인가?라는 문제에 답변하는 자들이다(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직접통치가 이상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달리 생각해보면 신 17:14-15절에는 왕제도가 나온다. 왕제도에 대해서 본문은 긍정적이지 않다. 왕을 세우는 것은 백성들이 ‘열방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우자’고 할 때이다. 사무엘 시대 때 백성들이 왕을 주소서하고 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배역하는 것이라고 하심으로써 왕제도 자체가 부정적 대응으로 나타난다. 왜 그렇게 부정적인가?
?? 간헐적 구원자 → 완전한 통치(다윗왕) ?? 영원한 아들 예수
?? 부정적 ?? 당 대 → 영원성(다윗왕조) ?? 그리스도의 오심.
? (실패) ?? 이 동(성 막) → 성전(하나님의 온전한 통치) ??
? 백성은 안식했으나 하나님은 안식않음
?? 긍정적 ?? 구원자(여호수아를 잇는 עישׁומ; 모쉬아)
(예비적) ?? 정복사업을 이끌어 간 자들
구약전체의 frame으로 보면 ...와도 같다. 다윗왕조(예비적) → 영원한 왕조(실재).
사사의 성격은 구원자(עישׁומ 였다. 사사제도는 사사 자신이 타락함으로 인해 마지막 사사 삼손은 비참한 최후로 마친다. 사사시대가 이스라엘의 실패였고 지도자(왕)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라고 기록한다. 그러므로 사사제도는 이스라엘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기에서는 간헐적 사사의 출현으로는 불완전했고 보다 완전한 통치의 필요가 소망되었다. 이와같은 필요는, 시편 등에서 볼 때 사사를 통한 통치의 완성이 다윗에게 와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사사는 통치의 불완전성의 성격이 있었고, 그런 성격은 다윗왕에 있어서 극대화 되었다.
또 하나 사사시대는 단대로 끝났지만 왕조는 영원성으로 이루어진다. 정착기에는 사사의 간헐적 출현이지만, 정착한 후에는 왕권의 정착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통치는 성막인데 성막 자체가 이동적 성격을 가지나 다윗 -솔로몬의 성전은 곧 영원한 왕권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으로 이어진다. 시 110편 ‘너는 영원한 제사장이라’(멜기세덱의 반차). 하나님의 통치가 영원한 아들의 통치로 이루어진다.

1. 사사기의 시대적인 위치
여호수아 시대 때의 가나안 정복이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13장에 보면 아직도 정복할 땅이 많이 남아 있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그 남아있는 땅이 어떤 땅인가에 대해 열거하고 있다. 13장 이전에 여리고 전쟁이나 남방 연합군들을 쳐부순 것이나 13장 이후의 북방왕 하솔왕 야빈이 이끄는 왕들을 격파한 전쟁들은 결정적인 승리이긴 하지만 가나안이 완전히 이스라엘에 의하여 평정이 된 것은 아니다. 단지 원칙적으로 굴복 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후에 요셉 지파와 유다 지파가 나뉘어서 남쪽으로, 북쪽으로 정복을 시작하지만 그 정복도 역시 완전한 것이 아니다. 요셉과 유다지파는 여호수아 시대 때 정복 사역을 어느 정도 행하지만, 다른 지파는 18장에 나타나는 말씀을 보면, 요셉과 유다 지파외 다른 일곱 지파(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강 동편 곧 트랜스 요단 이라는 곳에 기업을 얻었음. 그렇기 때문에 남은 지파는 아홉 지파라고 할 수 있음. 물론 레위 지파는 기업이 없다.)의 정복사역은 아주 지지부진하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언제까지 이렇게 지체하려고 하느냐?”고 책망한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각 지파에서 세 사람씩 뽑게 해서 가나안 전 지경을 돌아보게 한 뒤 요셉과 유다 지파가 차지한 나머지 부분들 가운데 자기들이 원하는 곳의 지도를 그려 그것을 놓고 실로에서 일곱 지파가 도면상의 분배를 한다. 이렇듯 아직도 여호수아의 정복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사기 2장을 보면 여호수아 사후 그리고 여호수아와 동시대에 속했던 모든 사람들이 죽고 난 이후에(삿 2:6-10) 사사시대의 본격적인 역사가 진행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사시대가 끝나면 사무엘을 거쳐서(사울은 사실 큰 의미가 없는 것이고) 다윗 시대로 역사가 진행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사시대는 출애굽하여 가나안 정복이 시작되고 이 정복이 다윗에 의해서 완전히 마감이 되면서 이스라엘에 다윗왕조가 들어서는 그런 역사적 흐름 사이에 끼어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해서 가나안의 정복전쟁이 시작되고 이 정복사역이 다윗에 와서 마감이 된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사사시대는 실패한 시대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정복사역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것을 다윗 때 완수 했다. 때문에 우리는 여호수아로부터 시작해서 다윗시대 때까지를 가나안정복이라는 하나의 시대로 묶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사기는 이 일의 진행과정에 위치한 시대라 할 수 있다.

2. 사사시대의 성격
위에서, 다윗에 의해서 이 시기가 마무리 지어진다고 했는데, 이것의 의미는 단순히 이스라엘에게 모든 기업을 차지하게 하는 정복, 정착사역이 완전히 마무리 된 것만을 뜻하지 않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왕권을 세우셨다고 하는 사실이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출애굽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가 일단 그 나름대로 하나의 종지부, 다시 말해서 어떤 의미에서 완성되는 시점이 어디인가 하면 다윗, 솔로몬 때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출애굽해서 정복이 시작되고 결국, 이스라엘 내에 통치를 담당할 통치권이 확립되는 역사의 흐름이 있는데, 이것이 사사시대를 거치면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이스라엘 내의 중심적인 위치가 요셉지파에서부터 유다지파에게로 옮겨 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해하기 조금 어려울지 모르겠으나, 잘 아는대로 여호수아는 요셉지파 사람이다. 그 이후에도 사사기를 보면 더러 드러나지만, 사사시대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주도를 맡은 지파는 에브라임, 곧 요셉지파다. 이것은 그저 우연하게 된 것이 아니고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역대상 5:1 이하에 보면 족보가 나오는데 족보를 왜 이런 순서로 나열하고 있는가? 유다지파로부터 나열하고 있는데, 족보를 이렇게 언급하는 이유에 대해 잠깐 언급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르우벤이 실질적으로 장자로 나왔지만은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렸고, 그래서 그 장자명분이 요셉지파에게 갔다고 말하고 있다. 야곱은 죽을 때 요셉지파에게 두 몫을 준다.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각각 한 분깃씩 준다(창 48장).
고대풍습에 의하면 장자에게는 두 몫을 주게 되어있다. 두 몫을 준다는 것은 결국 장자명분을 준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상 5:1에서 비록 혈육을 따른 장자는 르우벤이지만 그러나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 넘어갔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장자의 명분이 여전히 요셉지파에게 있지만 그러나 통치권은 유다지파에게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의 족보를 맨 먼저 기록한다고 되어있다.
성경의 이런 말씀들을 읽어보면,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사사시대의 성격을 좀더 뚜렷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시편 78편에 보면 사사시대에서 역사의 흐름이 요셉지파 중심의 역사흐름에서 유다지파에게로 이행하게 된 경위와 이유에 대해서 간략하게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거기에 9절을 보면 에브라임지파에 대한 불신앙, 불순종에 대한 책망이 나온다. 그 내용은 전쟁의 날에 물러갔다(돌아섰다)고 되어 있다. 이 의미가 무엇인가? 60절에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요셉지파를 버리고 유다지파를 택하셨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이 78편에서 취급하는 역사는 사사시대라고 짐작 할 수 있다. 이 사사시대에 에브라임이 전쟁의 날에 활을 가졌으면서도 등을 돌렸다라는 것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하면 그 당시 에브라임 지파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 곧 지도자적인 역할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다. 그 시대는 가나안에서 대적을 멸하고, 이스라엘을 정착케 하는 사명을 받은 시대, 즉 전쟁을 수행해야하는 시대적 사명을 띠고 있었다. 즉 다시 말하면 전투하는 교회라고 말 할 수 있겠다. 이런 전투의 사명을 교회(이스라엘)가 감당하는데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지파가 요셉지파(에브라임지파)였는데 그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그 책임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래서 언약을 어겼다고 이야기한 다음 그 이하에 보면 사사시대의 지도적 역할을 맡은 그런 사람이 제대로 책임을 감당하지 않고 그 책임을 포기해 버리니까 결국 그 영향이 온 이스라엘에 미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정복세대로서의 책무를 감당하지 못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배역한 역사에 대해서 그 이후에 쭉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물으셔서 실로를 버리시고 요셉장막을 버리시고 유다지파를 선택하시고 그 다음 시온을 택하신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선택된 다윗은 하나님의 양떼를 잘 돌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흔히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고 할 때 너무 지엽적인 내용비교를 통해서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다. 좀 넓은 시각 즉 전체 역사흐름에서 성경과 성경을 서로 연결시키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사실 옳은 원칙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데 그 원칙을 옳바로 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성경을 볼 때 때로는 어느 한 부분이 이해가 잘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성경 다른 부분에서 그것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시편 78편 경우는 사사시대의 역사를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봐야 할 것인지 분명히 알려준다. 이 시편 78편은 사사시대를 통해서 요셉지파가 지도자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주도권이 유다지파로 넘어가서 결국 다윗왕권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모든 일이 인간의 책임, 즉 인간이 잘하고 못하는 것에 따라서 역사가 진행되는 쪽으로만 이해하기 쉽다. 물론 그런 부분도 분명히 이야기해야 한다. 동시에 그것은 실상 모두 예언이 되었던 것이다.
신명기에 보면, 모세가, 과거의 광야기간 동안 실패했던 역사를 말하면서 그 기간 동안에 우리가 얻어야 했던 교훈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즉, 시내산에서 남쪽으로 곧, 가나안으로 직행하면 열 하루길 밖에 않된다. 그런데 그렇게 짧은 기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그 가나안 땅을 왜 이스라엘은 40년간 방랑하고, 제 1세대가 광야에서 멸절할 수 밖에 없었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그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불신앙이었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망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역사적 교훈을 상기시키고 곧이어 말하기를 10계명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12장 이하에 가면, 이스라엘이 살아야 할 구체적인 규례 특별히 하나님 섬김의 규례에 대해 말하면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성소에 관한 부분이다. 즉,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단 한 곳에서만 섬김의 예배가 드려져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하의 내용에서, 앞으로 있을 중요한 두 가지 하나님의 선택이 있을 것을 말하면서 그 첫째가, 신명기 12장에 나오는대로 성소의 선택이다. 너희는 어디 다른 데 가지말고, 다시말해서 이방신들의 성소에 가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실 그 곳으로 가서라고 되어 있다. 이렇듯 성소의 선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하면 성소 선택 하는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소 선택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과 직결되는 만큼 성소라고 하는 곳, 단 한곳에서만 예배드려야 하는 장소적인 의미가 나중에 신약에 와서 어떤 큰 의미로 발전되는가를 안다면 그 의미가 결코 사소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다음의 또 하나의 중요한 선택은 왕의 선택이다. 신명기 17:15에 보면 하나님께서 택하실 사람을 왕으로 세우라고 되어있다. 그래서 시편 78편을 보면 다윗왕권의 선택과 시온의 선택, 그리고 지도자로서 에브라임의 선택과 실로의 선택 이것이 왜 서로 밀접하게 관계가 되는가 하는 것도 이런 것들에 비추어 봐서도 잘 알 수 있다. 물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성소의 선택과 왕권의 선택이 내적으로 어떻게 깊이 연결되어 있는가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창세기 49:10에 보면 에브라임지파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조가 되지 못하고 결국 유다지파가 역사적으로 선택이 되는데 이것도 결국 역사적 우연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된 것이라는 것을 창세기 49장에서 미리 말씀하고 있다. 즉 치리자의 홀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을 분명히 예언하고 있다.
이렇게 성경의 다른 부분의 증거로 비추어볼 때 사사시대의 대체적인 성격이 성경역사의 큰흐름 속에서 이 시대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라고 할 때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사사시대는 과도기적 즉 왕정이행의 예비적과정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 또는 교회에서 악의 세력을 완전히 정복, 축출하고 안식을 성취하는 과정이 여호수아에게서 시작이 되어서 다윗에게 와서 완성이 되며 그 가운데 이 사사시대는 왕정확립시대로의 이행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이 부분을 강조하는 것은 이 시대의 성격에 대해 여러가지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이 시대는 타락의 시대요 실패의 시대가 분명하다.

3. 사사기의 통치형태에 대한 이해와 그 구속사적인 의미
문제는 사사시대 초기 모세로부터 여호수아에게로 지도권이 넘어오게 될 때 모세가 에브라임지파에 속한 여호수아를 세우는 것이 있다. 그러나 여호수아로부터 사사시대로 넘어 갈 때는 이것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사사시대의 첫부분은 이스라엘 내에 명백한 지도자가 없는 지도권 공백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사시대 이스라엘 내에 명백한 지도자가 없었다라고 하는 이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를 한다. 그 이유로 사사시대가 이렇게 시작됐다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는 더 이상 인간지도자가 필요 없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일종의 회중정치 제도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딱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인것 같다. 이것은 다 같은 보수신앙을 지니고 있으면서 하나의 교회정치의 이상적인 모델로서 그런 쪽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해석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하는 묘한 해석이 있는데 즉 이 시대는 중앙집권적인 다시 말해 중앙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는 통치자 없이 각 지파가 자기 나름대로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 요즘 말하면 민주적인 지방자치의 시대였다. 그래서 이것이 이스라엘에 있어서 즉, 하나님의 교회에 있어서 하나의 모델이 되며 이스라엘은 항상 이 사사시대를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상태로 생각하고 또한 이것을 옹호하고 그대로 지킬려고 했고, 그 후에 등장한 왕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좋은 상태를 파괴하고 타락으로 몰고 간 나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왕정시대에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왕들을 비판할 때 항상 이들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이란, 사사시대의 모습 즉, 명백한 중앙집권적인 통치없이 모든 사람들이 자율적으로(마음대로) 행하는 그런 상태였다라고 생각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새로 등장하는 왕정에 대해서는 항상 부정적이었다라고 자유주의자들은 이야기를 한다.
이것은 여러 사회학 이론들을 원용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해석유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들에게 별 문제가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별 위협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문제는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사사시대의 초기를 교회정치의 이상형으로 볼려고 하는데 있다. 이것은 어떤 문제점을 가지는가 하면 다윗왕권의 등장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성경의 본뜻이 아니다.
신명기 17장에서도 분명히 왕의 등장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서 백성들이 열방들처럼 왕을 요구하거든 왕을 세우라고 하신 말씀이 왕권에 대해 부정적인 해석이 가능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본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윗왕권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의 예표였다. 그래서 다윗왕권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까지도 부정적으로 볼 수 밖에 없게된다. 다시 말해서 부정적인 시각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연결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사시대의 첫 상태를 하나의 이상적인 시대라기 보다는 지도자 공백기라고 할 수 있고 다윗 왕권을 세우시는 최종적인 목표에로 나아가는 이행과정의 일부였다고 생각 할 수 있겠다.
사사시대의 초기상태를 교회정치에 있어서 하나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결국 교회내의 지도자에 대해서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각 자를 직접 다스리시는데 지도자가 있어야 할 필요가 있나, 이렇게 나아가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뜻하는 것과는 다르다.
교회의 지도자는 상당히 중요하고 성경이 또한 그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민수기 27:15 이하에 보면 모세가 죽을 날이 가까운 것을 알고 즉, 사역기간이 거의 끝나감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민 27:15-18참조).
예수님께서도 당시의 이스라엘을 보고 마치 목자없는 양과같다. 지도자 없는 양과 같다고 하셨다. 말하자면 지도자 없는 교회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사시대 초기 여호수아가 명백한 후계자를 남겨놓지 않은 것을 인간 통치자가 없는 하나님의 직접통치의 이상적 시대의 도래로 의미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자 없는 여호와의 회중, 교회라고 하는 비정상적, 불안, 위태한 상태를 뜻하며 이런 흐름 속에서 영원한 왕권이 예언된대로 유다지파의 리더쉽이 부각될 것과 또한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서 왕의 필요성이 암시되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것을 보면 교회 내에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가 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필요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런 지도자들을 통해서 그의 교회를 다스리신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대행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에는 지도자가 오히려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없을 경우에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상태가 되어서 좋지 않다. 사사시대를 보면 목자 없는 양의 상태인 이스라엘이 외부의 적에 대해 전혀 조직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도자의 존재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리더쉽의 근원과 본질과 성격이다. 사사시대를 통해 사사시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기드온의 승리시대에 천명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너희의 왕이시라는 것이다. 교회의 진정한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분명해야 된다. 교회 지도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세운 사람인데 하나님으로부터 지도자로 세운 사람은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다스려서는 안된다. 그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대행하도록 세워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대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여기서 벗어나면 이미 그는 교회 지도자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 1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세움 받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제일 첫 조목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고 네 옆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고 하셨다. 그 뜻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스리시기를 원하신다고 하는 뜻이 바로 그 율법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도자는 매일 읽고 그 뜻대로, 그 말씀대로 교회를 다스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교회를 다스릴 때만이 참 교회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율법대로 말씀대로 교회를 다스리는 지도자는 교회에 아주 필요하고 긴요하다. 이러한 지도자가 없으면 양들은 목자없는 양처럼 우왕좌왕하고 외부의 적들에 대해서 전혀 대처를 하지 못하는, 그래서 잡혀 먹힐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태로 떨어지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면 사사시대는 왜 실패를 했느냐, 그것은 이러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백성들이 원한 교회 지도자상이 어떠했는가, 이것에 대해 몇 구절을 통해 짐작 할 수 있겠는데 기드온에게 백성들이 와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당신이 우리를 구원했으니 이제부터 대대로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 되어 달라! 언뜻 보기에는 그 말에 아무런 해가 없는 말 같은데 실제 그 속에는 이들이 원한 왕의 상, 즉 교회 지도자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왕이 아니었다. 이들이 원한 지도자는 우선 자기들을 미디안과 같은 대적에게서 육적인 해방을 주는 즉,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세상의 일반 지도자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였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그대로 충실하게 대행하는 그런 지도자상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드온은 백성들의 말 속에 하나님을 거스리는 어떤 것이 있음을 간파하고 오직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편 78편에서도 확인했지만 다윗같은 경우, 그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린 자라고 말하고 있다.
사사시대는 여호수아가 남겨 놓았던 미진한 정복사역을 완성할 뿐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충직하게 다스리는 하나의 지도자 다윗의 출현에 이르는 이행기간을 다루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왕의 출현에 대해서 이렇게도 이야기를 한다.
본래 사사시대 처음 시작할 때는 하나님께서 왕을 원하신 것이 아닌데 나중에 백성들이 다 타락하고 나니까 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 부득이 허락하신 제도였다고, 그러나 이 말에는 맞지 않는 것이있다. 즉,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 가면 이런 말이 나온다. 당시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즉, 무정부 상태, 무질서 상태가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강력한 지도력이 없는 교회 상태를 얘기하면서 왕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사사기 마지막에 기록된 두개의 대표적인 사건이 단지파 이주사건과 레위 사람의 첩 강간사건으로 인한 전쟁, 이 두가지 사건인데 이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 시기가 언제였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단지파의 이주가 언제 일어 났는가 추측하기 힘들지만 사사기가 대략 300, 400년에 이르는 장구한 기간이니까 이 사건은 그 기간 중에 상당히 이른 시기에 있었지 않았나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특히 이 레위족 첩 강간사건은,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모여 의논할 때 비느하스 제사장 앞에 모여 의논했다. 비느하스는 여호수아가 마지막에 엘르아살이 죽고 대신 그의 아들 비느하스가 제사장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그 인물이다. 그렇다면 비느하스가 400살까지 살지않는 이상, 이 사건이 그가 살아 있을 동안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이 사건은 사사기 초기에 있었던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초기의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당시에 왕이 없었기 때문에 백성이 이러이러 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왕의 필요성이 사사시대 말기에 도저히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 부득이 허락 했다기 보다는 이미 초기부터 계속 거론 되었던 말씀인 만큼 사사시대의 전체적인 상황과 관련해서 볼 때 그 시대는 왕의 필요를 분명히 증명한 시대였고 또한 대망하는 시대였다고 말하는것이 옳은 시각일 것이다.

4. 사사기의 구분
사사기를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구분은 1장에서부터 3장 6절로 서론이다. 두번째 부분은 3:7부터 16:31까지로 사사시대의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 몇을 들어서 즉 옷니엘, 에훗, 드보라, 바락, 기드온, 입다, 삼손 등(그외 중요하지 않는 사사들의 이름이 언급되지만)의 활동을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세번째 부분은 17장부터 21장까지로 위에 언급한 연대순에서 조금 벗어난 두 사건이 언급되고 있다(사실 여호수아, 사사시대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연대문제다). 대체로 추측컨데 마지막 두 사건은 시기를 소급해 올라간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 마지막 부분은 사사시대의 두 대표적인 사건을 통해서 그 시대의 성격을 분명히 부각시키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1) 서 론
서론은 조금 특별한 모습을 하고 있다. 1장 1절에 서론으로 이야기가 쭉 진행이 되다가 2장 1절부터 5절에서 보김사건을 이야기한 다음 6절 이하에서는 다시 여호수아 생전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중 서론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서 머리 쓰기 좋아하는 사람은 온갖 이론을 만들어 낸다(편집이다 뭐다하면서). 그러나 거기에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1) 교회의 지도자론
이제 서론을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시작된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가나안과 전쟁을 함에 있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맨 먼저 올라 가리이까?(삿 1:1, 강의자가 구약 히브리어를 사역한 것임) 그럴 때 하나님께서 유다가 올라갈 것이라고 2절에 말씀하고 있다.
여호수아 사후 분명한 후계자를 남겨놓지 않아서 지도자 공백기가 오게 되었는데 이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물었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긍정적으로는 결국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참 통치자는 하나님이심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 모든 것을 묻고 행하는 그러한 긍정적인 뜻이 있다.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참된 왕으로 생각하고 그의 뜻을 묻는 긍정적인 뜻이 있기 때문에 사사시대 초에 이상적 교회 모습을 말하는 사람은 특별히 이 부분에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호수아 1장과 비교 해보면 대조가 드러나지만(수 1:1-2 참조,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바) 여기서도 물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지만 자기 스스로 그러한 일을 자진하고 나선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모세가 세운 것도 아니다. 모세는 그저 하나님께 물었을 따름이다. 민 27장에 보면, 모세는 “이 교회 즉, 이 회중을 목자없이 놔 두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고, 이에 하나님께서 직접 명하여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그를 교회 지도자로 세우라”고 했으니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것이다.
따라서 실제에 있어서 인간 지도자를 세워서 하나님께서 통치 하시는 것과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하나님께 물어서 통치하시는 것 사이에는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양쪽 경우가 모두 다 하나님의 직접 통치다. 그래서 이 경우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리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실질적인 통치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이지 그것이 지도자를 통한 것이냐 그렇지 않은 것이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지도자가 하나님의 통치를 행하지 않고 엉뚱하게 행할 때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자라고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이니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2) 교회의 성결(1장의 흐름)
사사기 1:1에서 주의해야 할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이러한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직역을 하면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가나안인에게로 올라 가리이까?” 그런데 올라가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 말에 의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호수아가 죽고 난 이후의 시대도(여호수아를 통한 정복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온 땅에 안식을 주셨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안식은 가나안 땅의 모든 대적이 전부 멸절된, 축출된 그런 완전한 안식이 아니고 아직도 전쟁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그런 의미의 원칙적인 안식이었다고 하는 것을 사사기가 밝혀 주고 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복시대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교회의 전쟁에서 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만 그렇게 무참하게 애들도 남기지 말고 다 죽여 버리라고 했는가, 소나 양도 남기지 말고 다 죽여버리라고 했는가, 그런가 하면 가나안 밖 먼 곳의 민족하고는 될 수 있는대로 화평하라고 하셨다. 먼저 화평을 선언하고 그래도 전쟁을 하고자 하면 그때는 싸우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 이렇게 차별 대우를 하시는가? 우리는 의아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렇게 가나안 족속을 죽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창 15장에서는 죄악이 관영한 때가 아직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사기시대에는 죄악이 관영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듯이 심판하시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확인하는 말씀이 삿 1:7의 아도니 베섹의 말 가운데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아도니 베섹이 잡혀 죽으면서 하는 말이 옛날에 내가 잡은 왕들 모두의 손 발가락을 끊고 했는데 이제 내가 그 꼴이 되었다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이 정복 전쟁이 악한 백성과 악한 왕을 심판하는 의미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가나안 밖 지경에도 마음대로 나가서 거기도 정복해 버리지 무엇 때문에 그곳 사람들과는 화평을 하면서 이 지경 속에 있는 사람만 왜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잔인하게 죽여버리라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창 1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떠나라고 하시면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에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말하자면 이 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살게 하시는 곳, 즉 그의 백성의 영역 곧 오늘의 교회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나안 땅에서 그처럼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모든 악의 근원을 쓸어 버리라고 하신 것은 교회 내에서는 이처럼 악에 대해서 철저하게 끊어내는 일이 있어야 되는 것을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지시하신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신약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로마서에 보면 외인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화평하라고 했다. 그들이야 본래 복음을 받기 전에는 교회에 속하지 않아서 죽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여하튼 이렇게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영역,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세우시는 영역에 있어서는 철저히 죄악을 제거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던 시대가 바로 사사시대였다.

(3) 누가 교회의 지도자가 될 것인가?
여호수아 때도 그랬지만 이러한 교회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누가 먼저 올라가야 하리까? 이 말의 뜻은 결국 교회의 이와 같은 시대적 사명 즉, 교회 내에 존재하는 모든 악과 싸워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받은 일에 있어서 누가 지도적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먼저 올라갈 것이다. 유다가 지도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가라고 얘기 할 수 있을른지 모르겠으나 사사기 맨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레위족 첩을 강간하고 죽인 사건으로 인해서 온 이스라엘이 분노해서 하나님 교회 내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온 이스라엘이 분개해서 일어나 베냐민 지파를 거의 멸절시키다시피 죽여 없애버렸다. 다 없애 놓고서는 나중에 이스라엘 내에 한 지파가 궐이 났다고 통곡을 하는, 그 정도로 무참하게 악을 쓸어 버린 일이 있었다. 이 때에도 백성이 묻는다. 이 전쟁에서 누가 먼저 올라가야 하리이까? 물으니 또 유다가 먼저 올라가야 할지니라고 하셨다. 이렇게 사사기에 보면 처음과 마지막에 중요한 암시가 있다.
결국 이 시대를 통해서 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전면에 나서게 될것인가 하는 것을 처음부터 암시하고 있고 이것은 비단 이 시대에서만 시작된 것이 아니고 창세기 49장에서 하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할 것이라고 예언하신 대로 지금 역사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후에 정복사역이 쭉 진행이 된다. 그런데 12절이하에 보면, 갈렙이 기럇세벨을 칠 때 그것을 취하는 자는 내 딸 악사를 주리라는 약속이 나오고 그럴 때 조카 옷니엘이 그것을 취해서 악사를 아내로 맞이한 일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여호수아에 이미 기록된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양쪽에 다 나오고 이 시기는 여호수아 사후라고 되어 있는데 어떻게 양쪽에 다 기록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겠지만 그러나 성경기자들이 역사를 기록하는 나름대로의 틀을 알면 이런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 괜히 그런 것을 모르고 엉뚱하게 이중보도라고 이야기들을 많이 하지만 1장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정복사역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개관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수아 사후에 사사시대라는 특별한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그러나 그 시대적 사명이 전 시대의 사명을 그대로 이어 받는 시대인 만큼 그 정복사역을 이야기 하면서 옛날에 했던 것을 전체적으로 통틀어서 개괄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가능하다.

(4) 초기의 가나안 정복사역
이제 이 정복사역을 보면, 유다로부터 시작이 되고 그 다음에 에브라임 그 다음에 다른 여러 지파들의 정복사역 내용으로 옮아 가게 된다. 그런데 유다지파가 가장 훌륭하게 수행을 한다. 그 다음 여호수아 출신지파인 에브라임지파(요셉지파)가 또한 그렇게 한다. 여호수아 18장의 정복사역 진행 상황을 보면 남쪽에는 유다지파 중심으로 정복사역을 가장 충실하게 행하고 북쪽에는 요셉지파가 가장 충실하게 정복사역을 행했다. 전체 이스라엘을 두고 보면, 남북으로 유다지파, 요셉지파로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까지 나머지 일곱 지파의 정복사역은 지지부진하다. 그래서 여호수아에게 책망을 받고, 그리고 가나안 지경을 조사해 와서 도면상의 분배를 받는 일이 있었다.
여기서도 그 때까지의 정복사역의 상황진척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남쪽에는 유다가 이렇게 행했다. 그리고 북쪽에서는 에브라임 중심으로 이렇게 이렇게 행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면 유다의 경우는 상당히 성공적이었고, 그런가 하면 반면에 지도상으로 보면 북쪽 요셉지파와 남쪽 유다지파 사이에 같은 요셉지파이면서 베냐민지파가 그 사이에 끼어 있다. 그런데 이 베냐민지파는 그 곳에 살고 있던 거민들을 축출하지 못했다. 즉,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사람과 함께 거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요셉지파의 정복사업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벧엘을 정복하고, 그 다음에는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므낫세의 경우는 가나안인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이스라엘이 강해진 다음에야 이들을 노역에 종사시켰고, 축출하지는 못했다고 되어 있다. 그 다음 30절에 보면 스불론에 관해서 나오는데, 거민을 축출하지 못하고 스불론지파 가운데 가나안인들이 거주하였으나 노역에 종사하였다고 되어 있고, 아셀지파의 경우에는 아빅과 르홉거민을 축출하지 못하고 아셀지파 자손들이 오히려 가나안거민 가운데 거주했다고 되어 있다. 정리해 보면 유다지파는 상당히 성공적이었고 요셉지파도 상당히 성공적이었고 므낫세지파는 조금 문제가 있고 베냐민지파도 문제가 많았고 스불론 경우는 조금 괜찮았다. 왜냐하면 스불론지파 가운데 그들이 거했다고 했으니까 스불론지파가 대세를 쥐고 있는 가운데 가나안인이 거주했다고 되어 있다.
아셀지파의 경우에는 가나안거민 가운데 아셀지파가 거주했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가나안거민 가운데 아셀지파가 거하나 아셀지파 가운데 가나안인이 거하는 것이나 같은 말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은 가나안인 가운데 아셀지파가 거했다는 것은 가나안인이 거의 대세를 장악하고 있고 그 가운데 아셀지파가 발을 붙이고 있는 형편이라는 암시가 담겨 있다.
납달리지파는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축출하지 못했고 노역에 종사할 뿐 이었다. 그런데 특별히 34절의 단지파의 사정을 보면 주객이 완전히 전도되어서 오히려 아모리 족속이 단지파를 압박해서 산지로 쫓아 보내서 평지로는 내려 오지도 못하게 했다고 되어 있다. 이 곳은 쫓아 내야 할 사람과 쫓길 사람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이렇게 단지파는 정복사역에 완전히 실패하고 사사기 말기에 기록된대로(단지파 이주가 나온다) 자기 기업으로 할당받은 곳은 차지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 북쪽에 가서 조용한 마을을 덮쳐서 그 곳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북쪽으로 올라 가면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많이 저지른다(우상숭배......).
이렇게 보면 1장은 전쟁을 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 받은 교회로서의 이스라엘 즉, 하나님께서 교회의 영역으로 지정한 곳에서 모든 악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만들라는 명령을 부여 받은 교회로서 그들이 한 정복사역이 어떻게 진척이 되었는가를 쭉 이야기하고 있는데 결국 시간이 갈수록, 처음에는 제법 되는 것 같다가 갈수록 지지부진 하다가 나중에는 그냥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영역에는 발도 못 붙이고 오히려 쫓겨나는 그런 꼴이 되고 말았다. 교회가 무력해져 버렸다는 말이다.

(5) 교회의 정복사역의 포기(2:1-5의 흐름)
2장 초두에 기록하고 있는 “보김”이라는 말은 “통곡하다. 울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을 책망하니까 그 말을 듣고 통곡한 일이 있다. 그러니까 바로 앞의 정복사역의 내용은 보김에서 있었던 일의 배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자가 길갈에서 보김으로 올라오셔서 이스라엘을 책망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즉, “내가 너희와 함께 애굽으로부터 올라가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한 그 땅으로 너희와 함께 가리라 그리고 그 뿐 아니라 너희와 세운 언약을 영영토록 내가 어기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들과 항상 함께 하시며 무슨 일을 하든지 그들로 형통케 하시고 하나님 편에서는 결코 깨뜨리지 않으시겠다고 하는 신실성을 여기서 재천명 하신 것이다. 사실 그 때까지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 편에서 언약을 깨뜨린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너희들의 경우를 보면 어떠했느냐, 하나님 편에서 언약을 맺었는데 이스라엘 백성 편에서 행해야 할 어떤 일에 관해서 말씀하시길,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들을 전부 파괴해야 할 것이라고 말을 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 너희들은 내 음성을 청종치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언급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면서 그들이 지켜야 될 것을 두가지 말씀하셨는데, 이 땅 거민들과 언약을 맺지 말아라, 그리고 그들의 제단들을 철저히 파괴하라는 것이다. 그 땅 거민들과 언약을 맺는다고 하는 것은 그들과 함께 살기로 곧 공존의 길을 택하는 화평조약을 맺는다는 것이고, 그들의 제단을 부수지 않았다는 것은(단이라는 것은 종교적 의식이 행해지는 곳이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를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의 제단을 모두 파괴해 버리라는 것은 가나안 인들의 우상종교를 철저히 말살하라고 하는 그런 뜻이 있다) 적어도 신앙적인 면에서 가나안 인들의 우상종교를 용인하는 묵인하는 정책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은 특별히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악을 행하고 개인 차원에서는 몰라도 전체적인 차원에서, 나라전체가 하나님을 배역하는 그런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책망하시는 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이 교회의 영역으로 지정해 주신 그 곳에서 악의 세력을 축출하지 않고 오히려 축출해야 할 그들과 공존하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정복의 사명(교회 내에서 모든 악의 세력을 제거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로 거룩하게 하는 사명을 주었는데)에 충실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과 악의 세력과 타협하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더 이상 그들을 너희 앞에서 축출하지 아니하겠다(3절).”
사실 이스라엘의 전쟁은 매우 특이하다. 그들의 전쟁은 군사가 많다고 해서 이기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적다고 해서 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전쟁이기 때문에 사람이 강하고 강하지 않은 것은 상관이 없다. 이것은 교회에 속한 자들이 유념해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교회는 혈과 육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힘과 재주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친히 싸우시는 것이다.
그렇게 악의 세력을 멸하시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세력, 교회내의 대적들을 숙청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은 이제 교회가 전혀 무력해졌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 곧 악을 제거하시는 능력이 더 이상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지 않겠다고 하는 선언인 것이다. 교회가 악과 싸우는 사명에 충실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너희들을 통해서 교회 내의 악을 제거하는 역사를 행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수아 5:13에서, 요단강을 건너서 할례를 받고 여리고 성을 취하기 위해 칠려고 할 때 즉, 가나안 땅의 본격적인 정복전쟁이 시작 될려고 할 때 동일한 여호와의 사자께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났는데 그 사자의 모습이 칼을 빼든 모습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칼을, 전쟁의 능력을 빼드셔서 가나안 족속을 멸하시겠다고 하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습과 완전히 반대의 모습이다. 너희들이 싸우지 않고 등을 돌려 대겠다고 하니, 그들과 타협하고 살겠다고 하니 더 이상 너희들을 통해서 악과 싸우는, 악을 제거하시는 일을 행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빼셨던 칼을 집어 넣겠다는 말씀이다.
더 이상 가나안인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대적으로 하여금 너희의 옆구리의 가시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듣고 온 백성이 통곡을 했다고 되어 있다. 더 이상 가나안인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하지 않겠다. 이것이 타락의 시대로 접어드는 사사시대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 될 것인가, 중요한 암시가 되는 것이다.

(6) 이스라엘의 보김 통곡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의 실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책망 곧 너희들이 악의 세력과 싸우지 않고 즉, 너희들의 사명이 바로 악과 싸우는 것인데 악과 싸우지 않고 그들과 타협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스스로 공존의 길을 택했다고 책망을 하시고 따라서 더 이상 승리를 보장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듣고 보인 이스라엘의 반응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케 한다. 그들의 반응은,온 백성이 통곡했다고 되어 있다. 통곡을 했다는 것은 자기들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잘못을 인정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이후의 역사를 보면 아무 변화가 없다. 그대로 그냥 진행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보김에서 보인 반응 곧 통곡의 의미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여기에 대해 생각 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스라엘을 동정하는 시각으로 이해를 한다면, 여호수아 때부터 지금까지 전쟁을 했지 않은가 그것도 1, 2년이 아니고 몇 십년이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계속 될른지도 모른다. 전쟁이라는 것은 당연히 훈련하고는 다르다. 전쟁이라는 것은 생명을 건 일 아닌가,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는 것이 전쟁이다.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는 그런 모의 전쟁이 아니다. 따라서 전쟁하는 동안 사람은 극도로 긴장하게 되어있다. 그것도 한 두달도 아니고 일 이년도 아니고 수 십년을 그냥 싸우라고 하시니 그 전쟁의 긴장을 어떻게 견뎌 내겠느냐 이 말이다. 가나안 족속이 그냥 단숨에 지도상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도 단숨에 무너뜨려 버렸으니까 쉬울텐데 그것이 아닌 것이다.
나중에 이들을 남긴 이유가 나오겠지만, 쫓아내면 다시 들어 오고 또 그렇고...... 이것은 우리가 죄와 싸우는 것을 연상하면 잘 이해가 될 것이다. 오늘 죄를 쫓았는데 내일 또 들어오는, 우리의 삶이 죄와 싸움의 연속이 아닌가.
일년, 이년 십년, 이 십년 싸우다 보니 이제 지쳐 버린 것이다. 그래서 에라 그냥 공존해 버리자 너 좋고 나 좋자 이것이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보김에서 이스라엘이 통곡한 심리적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이 사람들은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그래서 책망을 받았을 때 울었다. 옳은 것을 알고도 행할 수 없는 자기들의 무력함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전제가 되었다고 생각이 된다. 아무리 싸워 볼려고 해도 내 힘으로 안된다는 것을 이들이 잘 안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자기의 무력함을 깨닫고 난 다음이 문제다. 어디서 떨어졌는가를 생각하고 회개하고 돌아와서 전쟁의 승리의 능력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알고서 돌아 왔다면 이후의 시대의 역사는 달라졌을텐데, 그 이후에 아무 변화가 없었던 것을 봐서(물론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다 아시고 앞으로는 쫓아내지 않겠다고 하셨겠지만) 이들의 자기 무력함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신앙으로 돌아선 것이 아니고 체념으로 끝나 버렸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통곡은 체념의 눈물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무서운 심판, 험난한 앞길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대한 눈물이었을 것이다. 지나친 추측인지 모르겠으나, 앞뒤의 문맥을 봐서 보김에서 이스라엘이 통곡한 것은 대개 그런 정도의 의미가 아닌가 생각 해 볼 수 있겠다.
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평생을 생명을 거는 전쟁의 긴장 속에서, 영적인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한다. 결코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타협하면 이스라엘 꼴이 되고 만다.
이 정복전쟁은 단숨에 이루어 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늘 무슨 대단한 결심을 해서, 아주 이상한 은혜, 굉장한 은혜를 받아서 마음이 뒤집어지는 그런 역사가 있었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번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요 일년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지지부진한 진척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소망을 잃지 말고 타협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감당해야 하지 아니하였을까, 이스라엘의 보김에서의 통곡은 그 면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대적은 강한 자이다. 철병거, 철옹성, 장대한 용사, 모든 면에서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뛰어난 전쟁의 용사들이다. 우리의 힘으로 당할 수 없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그 세력, 악의 세력과 무엇으로 싸우겠는가. 우리의 승리의 능력과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사사기에서 사무엘까지의 내용은, 신명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 예언으로 하신 말씀 곧 만일 백성이 이르기를 우리에게도 열방처럼 왕이 있어야겠다고 하거든 어떠어떠한 왕을 세우라고 하신 그 말씀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역사적으로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는 다윗왕조 성립의 하나의 서장으로서, 어떻게 백성들이 우리에게도 열방처럼 세상처럼 왕이 있어야 겠다고 요구하게 되었는지 경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고,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런 부정적인 역사적 배경에서 성립된 다윗왕조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목표를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1장에서 2장 5절까지 내용은 대체적으로 여호수아시대부터 시작해서 사사기 초반의 가나안의 정복사역이 어느 정도 성취가 되었고 결국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즉, 정복사역의 진행과정을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7) 세상과 공존하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조처
2장 1절에서 5절까지 보김에서 있었던 사건은 이처럼 여호수아 시대를 이어서 교회(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가나안 땅에서 계속 악의 근원을 제거하고, 축출하고, 그 영역에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이루어지며, 그 통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복되게 사는 그런 복된 삶의 영역을 이루어 가도록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받은 이스라엘이 그 때까지 행해 온 진행과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받아 들여셨는가, 말하자면 그때까지 진행된 교회의 시대적 사명 감당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 평가가 한 마디로 이스라엘이 공존의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공존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가, 심각한 책망을 들어야할 만한 잘못된 일인가? 그것은,공존이라는 것은 싸울 의지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전쟁의사를 포기해 버렸다는 것이다. 당시의 이스라엘이 싸울 의사를 포기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더 이상 악과 싸우길 포기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의 교회에 명하신 뜻, 이루시고자 하신 뜻이 전투하는 교회인 것이다.
교회의 영역으로 지정된 곳에서 모든 것을 정결케 하시고 모든 악과 오염의 근원을 제거하시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또한 그 사명을 교회에 주셨는데 교회가 그 사명을 포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정면적 거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이와 같은 사명을 주셨는데 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치 않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로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싸울 의사가 없는 즉,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거부하고 공존하기를 원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너희에게 전쟁의 승리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요, 너희들이 싸워서 멸하고 제거하기를 거부한 대적 세력들이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옆구리의 가시처럼 너희를 괴롭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원칙적으로 교회였다고 하면 이런 원칙은 오늘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이다. 분명히 교회가 성별되기를, 교회가 참된 모습을 굳건히 지켜 나가면서 계속 교회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야 될 터인데 세상 가운데서 교회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고 거룩한 교회가 세워져 가야 할 것인데 오히려 이방(세상)과 타협하고 공존하기를 택한다고 한다면 사실 공존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때부터는 세상 세력이 교회에 침투해서 교회를 변질시키고 교회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될 수밖에 없다.

2) 2:6이하의 흐름
2:6이하는 전에 잠시 언급한대로 마치 또 새로운 서론이 시작되듯이 시기를 다시 거슬러 가서 여호수아 생전 시대로 다시 거슬러간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 어떤 사람이 주장하듯이 제 2의 서론이 아니고(즉 편집과정에서 생겨난 제 2의 서론이 아니고) 앞에서 행한 이스라엘의 정복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와 정복사역을 포기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시겠다는 처리 방침을 보김에서 밝혔는데 거기에서 언명하신 그 하나님의 처리 방침대로 이루어진 사사시대 역사의 개요 즉 개략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사사의 출현배경
그러면 왜 여기서 다시 여호수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야기 하는가? 그것은 여호수아시대와 그의 사후 새로 시작된 이 사사시대의 시대적 성격을 구별 대조 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여호수아시대를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사사시대와 비교해서 여호수아시대는 이스라엘이 다 거룩했고 무조건 완벽했다는 뜻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사사시대와 비교할 때 여호수아시대는 어떠했는가를 비교 평가한 것이 2:7에 나타난다.
여호수아 이후에 계속 살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구원들을 직접 체험한 나이 많은 사람들 즉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겼다고 되어있다. 사사시대와 비교할 때 여호수아시대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유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10절에 보면 이들이 다 죽고 난 다음 새로운 세대가 일어났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일어났는데 이 세대의 특징이 11절에 말씀한 바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세대였다. 그 악한 시대의 근본적인 성격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들이 바알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렸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저버리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사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셔서 그들을 압제하는 외민족의 손에 붙이셨다고 되어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형태가 교회의 외부적인 대적 세력의 손에 교회를 붙이시는 그런 형태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심판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이 여기셔서 그들이 빠진 심판의 상태에서 구원할 자를 일으키셨는데 그들이 바로 사사들이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계속 반복이 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고 악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외민족의 손에 붙이시고 또 그 고통 가운데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하나님을 찾으면 다시 사사를 일으켜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전체적인 과정은 점점 악화일로를 걷게된다.

「2:19」
19절에 보면 사사를 보내셔서 구원하시면 사사가 살아 있는 동안은 어느 정도 괜찮다가 사사가 죽고 난 후에는 그들의 조상보다 더 부패하여 다른 신들을 쫓아 섬겼다고 되어있다. 세대가 거듭할수록 이스라엘은 더욱 악해졌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인들을 더 이상 축출하지 아니하겠다고 하셨는데 가나안인을 축출하지 아니하면 남아 있는 가나안인은 이스라엘에게 가시같은 존재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와 같은 예언이 사사시대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그 구체적인 내용은 3:7이하에 나온다. 3:6까지는 개략적인 내용 사사시대에 있었던 고정적인 틀, 반복된 악순환의 틀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을 버리고 악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외적의 손에 붙이셔서 심판받게 하시고 그 가운데서 회개하여 부르짖으면 사사를 일으켜서 구원하시는, 그러나 그 전체적인 과정은 반복되는 동시에 계속 악화일로를 걸었다는 것이다.

「21-22」
21절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가 남겨놓은 가나안의 세력을 더 이상 축출하지 않으실것을 언명하신 말씀이 나온다. 22절에는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인을 축출하지 않으셨는가? 여리고 성 전투같은 기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결코 그런 능력이 없어서 그리하신 것은 아니다. 여리고 성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싸운 것은 결코 없다. 그저 법궤 메고 돌고 나팔분 것 밖에 없다. 그러나 순식간에 성이 무너져 버렸다. 이스라엘은 들어가서 죽일 것 밖에 없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이들을 남겨 놓으셨는가? 다른 여러 곳의 말을 종합해 보면 너무 일시에 다 쫓아내어 사람이 살지 않게 되면 땅이 황폐해지고 야수들이 들끓어서 오히려 이스라엘을 해치게 될까 염려하셨다는 말씀도 있다.

(2) 시험의 의미와 목적
[3:1-4]
여기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그들이 여호와의 길을 쫓아 행하는지 그것을 알기 위해 시험하셨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전쟁을 가르쳐 알게하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단번에 구원하지 않으시고, 모든 대적 세력으로부터 일시에 구원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남겨두신 것은 그들을 시험하려 하신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 시험의 내용이라는 것은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는가? 그것을 아시기 위해서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아스러운 것은 시험이라는 말이 나올 때 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과 그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 드는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데, 즉 우리가 얼만큼 견딜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또 우리의 연약함과 악함과 부패함을 다 아시는데 무엇을 또 구태여 알아 보시려고 시험하시는가? 특히 신명기 같은 곳을 보면 내가 너의 체질을 안다고 하셨다. 그 체질이라고 하는 것은 의학에서 사용하는 그런 체질이 아니고 영적인 체질을 뜻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들이 어떻게 생겨먹은 존재인지 아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타락과 부패성을 다 아시는데, 어떻게 될 것인지 다 아시는데 또 시험하시겠다고 하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의아스러울 수 밖에 없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시험하시겠다고 할 때 그것은 대개 긍정적인 의도를 내포한 시험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체질, 믿음의 성격을 모르셔서 알아 보시기 위해 시험하신다는 뜻보다 아시기 때문에 시험하신다는 뜻으로 해석을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시험하실 때는 연단의 의미를 갖는다. 그와 같은 어려움을 통해서 연단을 받게 하시는 그러한 의미의 시험인 것을 광야시대의 역사를 통해서나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일시에 멸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남겨 두셨다. 남겨두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로 하여금 계속 전쟁을 하도록 하셨다는 이야기다.
가나안 정복, 정착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또 역사라고 하는 것, 곧 성경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된 땅에 견고하게 뿌리를 박는 삶이다. 그것이 성경의 역사다. 가나안 땅이 우리에게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복된 영역이다. 그래서 신약에 오면 바로 이 땅이라고 하는 것이 성도가 받을 기업(구약에서 이 땅을 기업이라고 했다) 즉, 믿는 자가 받을 축복, 구원과 동일시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의 복된 다스림 속에 사는 삶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구약에서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나안 정복, 정착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약속의 땅, 약속하신 축복 속에 삶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그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약속의 땅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는 이 과정을 하나님께서는 대적 세력을 남겨 두셔서 계속 싸우게 하심으로서 끊임없는 긴장 속에 살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그들을 남겨 두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로 하여금 전쟁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이것도 이해하기 곤란하다. 전쟁이 뭐가 좋은 것이라고 그냥 차라리 편안하게 지내게 하시면 오히려 나을 것인데 왜 전쟁이라고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게 하시는가?
그러나 전쟁을 반드시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하고 의지하고 붙잡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전쟁인 것이다. 이 전쟁이 독특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무엇을 경험하게 되어 있는가 하면 교회 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있는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그러니 전쟁을 통해서 오히려 믿음이 성숙하게 되고 믿음이 더욱 확실해져 간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전쟁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을 훈련해 가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시험의 긍정적인 목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전쟁은 교회 안에 존재하는 악의 세력들과 끓임없는 전투를 통해 악을 제거함으로써 성결한 백성의 모습을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의 표명이요, 이와 같은 과업을 교회에 맡기셨고, 교회는 이와 같은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그들 가운데서 친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어 더욱 큰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니 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견고해져 간다고 말 할 수 있다. 얼핏 보면 외적인 전쟁인 것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영적전쟁의 차원을 그 자체가 포함하고 있고 또한 이것은 신약의 교회가 겪을 그것을 예표, 상징하는 의미도 있겠다. 마치 이스라엘이 정복, 정착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축복 속에 더욱 뿌리를 내리는 그런 과정이었듯이 신자들도 죄와 끊임없이 싸움으로서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 축복 속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는 영적 유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롬 5장에서 이것을 표현하기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는 말씀으로 표현한다. 환난 자체가 어떻게 보면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신자를 낙담하고 절망케 하는 것이 아니고 매우 긍정적인 기능을 갖는다는 것이다. 지상교회가 편안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끊임없는 마귀의 도전과 파괴공작이 연이어 교회 안팎에서 있을 것인데 이것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대처하면 그들과의 영적인 전쟁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또한 이런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연단받고 더욱 확실해져가고 믿음이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렇다면 시험이 우리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긍정적인 데로 더 나은 상태로 인도하게 될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다 멸하지 않으시고 남겨 두셨다고 하는 것은,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 그러셨다는 것은 이와 같은 뜻을 갖는다고 생각된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대적 세력인 가나안 족속이라는 구체적인 세력들과 싸움의 방식도 칼과 창으로 싸웠으니 오늘 우리하고는 사정이 다르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물론 외형적인 차이는 분명히 있으나 그 본질은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비록 외형의 모습은 다르지만 그러한 외형적인 전쟁은 우리와 동일한 영적인 차원의 전쟁이며, 시련과 연단의 측면이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믿음 없이 싸움을 할 수 없다. 그것이 외적인 전쟁이든 내적인 전쟁이든.
이런 목적에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민족을 다 멸하지 않으시고 남겨 두시어 하나님의 교회로 하여금 계속 영적인 전쟁을 수행케 하심으로 그 전쟁을 통해 연단받게 하시려고 하셨는데 이스라엘은 그 전쟁의 긴장을 견뎌내지 못하고 전쟁의사를 포기 해 버리고 그저 적당히 타협해서 공존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악을 제거하시고 교회의 영역으로 지정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의로운 나라로 거룩한 나라로 세우시려고 하는 근본적인 뜻이 좌절되게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더이상 교회로서의 존재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전쟁을 포기할진대 나도 더 이상 너희의 대적을 너희 목전에서 축출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3) 첫 사사 옷니엘의 출현
이런 하나님의 선언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그 역사적 실례들을, 사사시대를 통해 가장 두드러진 실례들을 3:7이하에서 기술하고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타락 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람 나하라임 지역(지금의 시리아북부 옛날의 하란지역,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강 상류 북쪽의 하란지역) 구산 리사다임이란 왕의 손에 붙여서 18년간 압제를 받게 하신다. 그럴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일으키셔서 그들 손에서 구원하게 하시고 40년간 나라(교회)가 평안하였다고 되어있다.
그 후 옷니엘이 죽고 나니 또 이스라엘이 타락하였고 타락하니 하나님께서 진노 하셨고 그래서 이번에는 모압왕 에글론에게 붙이셨고 그럴 때 이스라엘이 회개하니 하나님께서 에훗을 일으켜서 그들 손에서 구원하시고 80년간 교회가 평안했다.

(4) 여선지자 드보라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 왕 야빈에게 붙이셨다. 갈릴리 북쪽에 있는 강대한 나라 하솔에서 통치하는 야빈 왕에게 붙이셨고 특별히 군대장관 시스라가 하로셋에 진치고 상주하면서 이스라엘을 심히 괴롭혔고 그들은 철병거를 가지고 있어서 도저히 대적치 못할 강대한 세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즘은 철병거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겠지만 당시에는 요즘의 보병들한테 탱크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때 드보라라는 여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다스리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바락이라고 하는 사람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하솔 왕의 손에서 특히 군대장관 시스라의 손에서 구원하도록 요청한다. 그럴때 바락이 혼자가지 못하고 드보라에게, 함께 가야만 내가 전쟁을 수행하겠다고 하자, “당신이 이번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고 대신 여인이 그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전쟁이 크게 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시스라가 패하고 도망하여 겐 족속 야엘이라는 여자가 있는 곳에 들어 갔는데 여자가 그를 잠들게 한 다음에 머리를 쳐서 죽이게 된다.

* 드보라의 노래
그런데 이 드보라의 사건은, 드보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케 하는 것들이 있다. 얼핏 보면 별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 여선지자의 출현 그녀가 또한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던 것, 그런데 단순히 여사사가 다스렸다고 끝나지 않고 전쟁을 수행하는데 남자 사사라고 할 수 있는 바락을 일으키셨는데 바락은 또 하나님께서 사명을 부여하셨다는 말씀을 듣고도 달갑게 순종하지 않는 비겁한 모습들 등 대개 이 정도만 눈에 띄는데 그러나 자세히 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뭔가 있다고 하는 느낌을 주게된다. 즉 이런 간단한 서술이 무엇을 배경으로 하는가? 이 간단한 서술의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 그 다음에 나오는 드보라의 노래라는 것이다. 노래라고 하면 대개 별내용은 없고 그냥 노래다 싶어서 슬쩍 지나가는데 그러나 그 속에는 드보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그것이 어떤 시대적 영적상황을 배경으로 되어진 일인가를 우리에게 알게 해 주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5장]
사사기 5장은 우리 말로는 매끄럽게 번역이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구약을 공부하는 사람에 있어서는 가장 해석하기 까다로운 장 중의 하나이다. 사용한 말 표현 중에 이해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 많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내용에 있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대체적인 내용을 이야기 한다면, 첫째 드보라와 바락이 노래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구원을 찬송한 찬송시인데 이러한 말로 시작된다. 2절 말씀 중에 “이스라엘의 두령이 영솔하였고”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안된다. 이해하기 힘든 단어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에는 ‘플로아’란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말은 나실인들이 서원한 기간 내에는 그 규례대로 머리를 장식하지 않고 늘어 뜨린 채로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머리를 풀어 헤치는 일이 있었을 때”인데 그러면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해석하기가 난감하다. 그런데 그 다음 말 그것과 짝을 이루는 말이 “백성이 즐거이 헌신 하였을 때”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과 관련시켜 보면 즉, 머리를 풀어 헤친다는 것이 백성들이 헌신한 것과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머리를 풀어 헤친다는 말이 헌신과 관계가 된다면 이스라엘이 시스라와 전쟁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생각 할 때 백성이 자원(헌신)했다고 하는, 즉 전쟁에 솔선해서 참여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 것과 관련해서 머리를 풀어 헤친다는 것이 만일 이것이 나실인적인 배경을 갖는다면 나실인은 특별히 자신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성별해 드리는 기간을 이야기한다. 그 기간이 평생이 될 수 있고 일정 기간도 될 수 있다. 이렇다고 한다면 하나의 나실인의 그것을 상징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 할 수 있겠다. 나실인이 자신을 철저히 구분해서 하나님께 드리듯이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자신을 철저히 헌신한 그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조금 더 상상을 엉뚱하게 해서 하는 말이 나실인들이 머리를 풀어헤친다는 뜻이 있으니까 대개 전쟁을 할 때 이상한 모습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상대에게 공포감을 주고 자신에게 신적인 각오를 다지기 위해 머리를 풀어 헤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즉, 민족에 따라서 얼굴에 페인트를 칠하든지(인디안 같이) 괴상한 탈을 쓰고 나간다든지 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렇게 전쟁을 하는 모습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이야기를 한다.
여하튼 2절의 내용은 교회를 괴롭히는 대적과의 싸움에 있어서 헌신한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이 헌신했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우선 이것만 보면 온 이스라엘이 나서서 자원 했다는 정도로 들리기 쉬운데 그 이하의 내용을 읽어 보면 그렇지 않다.
「3-5절」
이 때까지 이스라엘을 선대해 오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역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출애굽시대부터 하나님께서 어떠한 위대한 일들을 행해 오셨는가를 조금 언급을 하면서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신 경이로움에 대해서 잠깐 말씀한다. 4절 “하늘도 새어서” 하늘에서 물을 내렸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갖게 하는 현상들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구원의 능력의 위대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역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시대가 지날수록 쇄락의 일로를 걸었던 것이다.
6-7절에 “.....” 길이 그쳤다는 것은 통행이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상황이 위험해서 사람들이 길을 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시스라가 굉장한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땅에 상주하면서 포악한 정치를 베푸니 사람들이 길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는 그런 뜻이겠다. 길에는 통행이 없고 농촌의 삶이 불가능해졌다. 마을에 내려와서 사람 사는 곳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말이다. 나중에 기드온시대에도 나오지만 미디안이 쳐들어 왔을 때는 사람들이 동네에 거주하지 못하고 전부다 산에 굴을 파고 지냈다고 했다. 그와 비슷한 상황이 드보라 시대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퇴락한, 거의 폐허화 된 모습이 드보라가 일어나기까지 계속되었다. 즉 드보라가 일어나기까지는 이스라엘이 그런 지경이었다는 얘기다. 8절에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은 무리들이 즉 백성이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전쟁이 성문에 미쳤다 외적들의 침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외적이 침입했는 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4만명 중에....보였던고” 4만명 가운데 방패와 창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결국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이 전혀 전쟁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무력해졌다는 것이다. 교회가 능력을 상실해서 외적의 침입에 대해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9절에 “......” 우리말 성경(개역성경 표기)은 이것을 긍정적으로 해석을 하는데,“여호와를 찬송하라”는 말이 나오니까 그 앞의 내용이 긍정적인 내용이 되어야 할 것 같아서 긍정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으나 그러나 여기 찬송하라는 것은 나중에 이와 같은 상태에서 행하신 일을 염두에 두고 찬송하라고 한 것이다. 오히려 그 안의 내용과 부합되게 해석한다고 하면 9절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관원(이스라엘을 통치한 지도자, 교회의 지도자)들이 특별히 백성들 가운데서 자신을 헌신한 자들에 대해 내 마음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교회가 이런 위경에 빠진 때에 자원해서 교회의 위경을 해결해 보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내 마음이 간절했다. 다시 말하면 제발 좀 누가 나서서 이러한 교회의 위경을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이 없는가? 안타깝게 기다렸다는 그런 뜻이 될 것이다.
10-11절 “흰나귀를 탄 자들” 신분이 높은 그런 사람들 즉 귀인들이다. 직역을 하면 ‘흰나귀를 탄 귀인들아 생각을 해 보라 그리고 이하의 내용이 샘물가에 있는 자들의 음성을 좀 관심있게 들어 보아라 그리고 그들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의로운 일들 즉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일들을 말하는 것을 들어 보아라. 또한 이스라엘에 행한 의로운 일들 하나님이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우물가에 모여서 이야기 할 때 들어 보아라’가 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과거 역사 동안에 교회가 위경에 처했을 때 어떤 인물들을 일으켜서 그들을 통해 어떤 구원을 행하셨는가를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에 좀 귀 기울여 보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결국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가 그 처럼 위경에 빠져 있는데 그것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지도자로서의 맡은 바 책임 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바락이여 일어나 포로를 잡을지어다”라고 이야기했다. 마땅히 이런 위경에 처했을 때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할 교회 지도자들이 가만히 손을 묶고 앉아 있으니 결국 백성들이 누구에게 갔느냐 하면 드보라에게 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드보라가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 지도자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래에서만 나올 뿐 만 아니라 바로 앞에서도 이것과 비교 해 보면 상황이 대개 맞아 들어간다.
드보라가 먼저 바락에게 당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했지만은 바락이 꽁무니를 뺀다. 당신이 함께 가야 내가 하겠다. 그 때 드보라가 일어나니 남은 백성들 즉, 여러 지파들이 다 모였다. 15절에 보면 이렇게 많은 지파가 모인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이 지파들이 하나님의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전쟁에 아예 참여치 않은 지파도 있었기 때문에 책망하는 말이 나온다.
특히 ‘르우벤 지경에 대한 나의 마음에서 찾는 소원이 아주 컸다’는 말은 결국 이 전쟁에 르우벤(요단강 동편 지경)사람들이 와서 좀 도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는 말이다. 옛날 여호수아 때 정복전쟁을 할 때 먼저 요단강 동편에 정착한 두 지파 반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앞장서서 전쟁을 수행했다. 그때 일을 기억했는지 모르겠으나 아직 거기는 별 탈이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주된 공격로가 갈릴리 북쪽이다. 그리고 그들의 압제를 심하게 받았던 지역이 납달리, 스불론 즉 북부 갈릴리 주변 지파들이었다. 이들의 압제를 직접 받지 않은 요단강 동편지역 사람들이 와서 좀 도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다”(15절)라고 히브리 원문을 긍정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석을 하면 그 다음 말과 전혀 연결이 되지않는다. 그들에 대한 마음이 컸다는 것은 그들이 좀 와서 어떻게 해 주었으면 하는 안타까운 소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16-17절 “......” 여기에 보면 특별히 르우벤과 요단강 동편지역과 아셀지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양 우리에 앉아서......어찜이뇨” 양 우리 옆에 편안히 앉아서 양 떼 부르는 휘파람 소리나 듣고 한가하게 앉았는가라는 말이다. 요단강 동편지역의 사람들아! 이 전쟁의 참화가 너희에게 미치지 아니하니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가만히 앉아 있는데 어찌된 일이냐 하는 책망이다. 그런데 18절에 보면 스불론과 납달리는 자기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이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이들이 전쟁을 수행했는데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셔서 이들을 통해 열왕을 쳐부셨다고 되어있다.
19절 “......” 이 말은 그들이 어떤 유익을 바라고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참된 믿음에서 자원하여 참여한 이 전쟁은 하늘에서부터의 싸움이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싸우셨다는 말이다(20절).
23절에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메로스에 대해서는 저주를 받을지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야엘에 관해서 말하되 여자 중에 칭송 받을지어다. 야엘은 여인이다. 이것은 반대로 바락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남자가 전쟁에 나서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남자가 나서지 않으니 여인이 나서서 큰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마땅히 일을 감당해야 할 사람이 감당하지 않고 있으면 여인이라도 나서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일을 감당해야 될 사람을 향한 경고요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그런 뜻이 속에 들어있다. 전쟁에 자원해서 참여한 지파가 있는가 하면 그것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전혀 관심도 갖지 않고 뒤에 물러 앉았던 지파도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우리에게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 하면, 이전에 옷니엘이나 에훗시대에는 에훗이 모압왕 에글론을 죽이고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었다. 즉 전쟁신호를 해서 온 이스라엘을 모아 모압을 쳤는데 아마 그때까지는 이런 전쟁에 있어서 각 지파간에 유대의식이 강해 합심해서 어떤 일에 대처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드보라시대에 오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다 나뉘어져서 자기 앞에 불똥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저 강건너 불구경하듯 가만히 앉아있는, 그리고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처한 위기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자기할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 여선지자가 나타난 이유
그런 위경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세우셨어도 그 하나님께서 명하신 전쟁에 자원하여 목숨을 걸고 나선 자가 별로 없었다고 하는 뜻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 드보라의 노래에 단편적으로 암시된 내용에 비추어 보면 4장에서 시작되는 드보라에 관한, 서술체로 된 내용이 더 분명해 질 것이다.
왜 여선지자가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었는가? 남자가 자기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남자의 일 여자의 일이라고 보기 보다는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뜻을 갖는다고 생각된다. 전쟁이나 혹은 다스리는 직분이라는 것은 결국 남자가 갖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서에 보면, 하나님을 거역하게 될 때 온갖 질서가 뒤바뀌게 되는데 뒤바뀌는 모습을 말하기를 여인이 남자를 다스리게 될 것이고 어린 사람이 노인에게 공갈을 하고 위협을 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질서가 완전히 뒤바뀌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남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나이 많은 자가 다스리는 지위에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그렇지 못할 때 즉 남자가 남자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이 많은 자가 나이 많은 자 값을 못하면 결국 질서가 전도되는 상황이 도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판의 한 형태다.
결국 드보라의 경우를 통해 암시하고자 하는 바는 그 당시의 그와 같은 교회의 위기 상황을 감당해야 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자기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특히 바락과 같은 사람에게 그와 같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전쟁을 하라고 명하셨는데도 뒷꽁무니를 뺀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정복하기를 포기했다. 하나님께서 이 영역에서 그의 거룩한 나라를 이루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예 포기를 해 버린다. 그리고 적당히 함께 살자고 했다. 그런데 함께 살 자가 될 수가 없다. 결국 옆구리의 가시처럼 찔려서 그들의 종교적 타락과 도덕적 타락에 오염이 되어서 이스라엘의 자세가 자꾸 변질이 되고 그러니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의 의미가 자꾸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니 교회가 완전히 결단이 나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교회가 일반 믿지 않는 사람의 통제를 받는다고 생각을 하면 그 꼴이 어떠하겠는가? 바로 그런 모습이 된 것이다. 교회에 속하지 않은 세력에 의해서 교회가 좌지우지 되고 지배를 당하는 형편이 된 것이다. 그것이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렇게 교회가 완전히 위경에 처했는데 당연히 나서서 싸워야 할 지도급 인사들이 무얼 하는지 전혀 손을 쓰지 않는다. 이와같은 일들이 교회 내에서 처리가 되어야겠다는 소리가 들릴 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강건너 불구경 하듯이 내버려 두고 가만히 있었다. 드보라가 등장할 때까지 이스라엘의 형편이 결국 이러했다. 처음에는 함께 살자고 했다가 결국 그들에게 물들어서 교회가 완전히 변질이 되고 세상 사람들이 판을 치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고 그러다 보니까 그런 위경에 처했을 때 안되겠다고 이야기를 해도 그저 강건너 불구경이다. 다행히 목숨을 걸고 나선 사람도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교회를 다시 세우시는 은혜를 베푸시기도 헸다. 그것이 바로 드보라의 승리다.

(5) 기드온 사사시대[6장-7장]
그런데 사사시대가 끝나자 또 이스라엘이 타락해서 하나님께서 미디안 손에 붙이는데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산에 가서 살 정도로 완전히 자기 기업의 땅에서 다 쫓겨나서 굴을 파고 사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교회에서도 그렇다. 실질적으로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교회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한구석에 쫓겨나서 굴을 파고 사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형편이 난감해져 갔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어서 죄를 책망 하신다. 그 책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근동에서 최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손아귀에서도 소수의 미약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낸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출애굽을 언급한 것은 그런 의미가 담겨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긴다니 어찌된 일이냐?라는 책망이다. 그런데 그런 책망을 듣고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별 무반응이었던 것 같다.

「6:11-12」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께서, 밀을 떨어 미디안의 눈을 피해서 숨기려고 하는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구원을 약속하신다. 그러자 기드온이 반문을 한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 일이 닥쳤는가? 「13-14」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이적 기사들은 도데체 어찌 된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셨으나 지금은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 손에 붙이지 않으셨읍니까? 기드온의 이러한 반문은 실제로는 얼마나 무지한 자인지 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 손에 붙이셨는지 이유 조차 모르는 이스라엘의 영적 무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무지하고 미디안의 눈을 피해 밀을 숨길 정도의 비겁하고 연약한 사람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맡긴다. 우선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를 찍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우선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할 자의 신앙의 재정비라 할지 신앙의 정화를 명하신다. 그리고 이런 여러가지 연단을 통해서 연약하던 기드온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용사로 점점 변모 시켜간다.

「7장」
기드온이 군사를 모은다. 22,000명을 귀환 시키고 10,000명만 남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모여든 많은 군사들을 정선하는 일을 행하시는데 첫째 모여든 사람 32,000명 중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을 돌아가게 하시니 22,000명이 돌아가고 10,000명이 남는다. 그 중에서도 물을 핥는 자(엎드려 먹는 자 말고) 300명만 선정한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군사 숫자가 너무 많다고 말씀하시고 숫자를 줄여가신 이유에 대해 많은 군사들로 승리를 하면 자기들의 힘으로 행한 것으로 알고 자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 스스로 영광을 취할까 염려하셔서 그렇게 행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당시 형편을 암시하는 다른 뜻도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32,000명이 모였는데 두려워하는 자 22,000명이 돌아가고 10,000명이 남았다. 두려워 한다라고 하는 것은 마지 못해 억지로 전쟁에 나온 사람들이다. 전혀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각오도 되어 있지 않고 믿음도 없는 자라는 이야기다. 특별히 시내에서 물을 마시게 함으로서 그 태도에서 과연 전쟁을 행할 만한 준비나 자격을 갖춘 자인가를 시험한다. 결국 온 이스라엘 중에 남은 자 즉 전쟁을 수행 할 만한 자가 300명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역으로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 형편이 어떠했는가를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드보라시대에는 스불론, 납달리지파같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여호와의 전쟁에 자신을 헌신한 지파가 그나마 있었는데 기드온 때 오면 300명 이외에는 전혀 쓸모없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군대로서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전쟁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수행할 믿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구원 베푸심을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요, 숫자가 많아서 이긴다 할지라도 결코 자고하거나 이것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무엇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고 믿지 않고 전쟁의 의미를 바로 이해 하겠지만은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 즉 오합지졸을 모아서 전쟁을 해서 이겨 놓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겼다고 이야기 하겠는가? 자기 생각대로 자기들 능력으로 이겼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돌려 보내시면서 이대로 내어 보냈다가는 자기 숫자들 힘으로 이겼다고 할 것이니 도저히 안되겠다고 그 수를 줄이라는 말씀의 배후에는 이러한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 폐허상황, 곧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300명밖에 남지 않은 교회적 상황을 암시하는 뜻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런 소수의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정병으로서 준비가 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이렇게해서 그들이 가서 한 것이라고는 항아리 속에 휏불 집어넣고 항아리 깬 것 밖에 없다. 그럴 때 미디안 군사들이 자기들 끼리 쳐 죽이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래서 망한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에 의한 승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나타나고 기드온이 부르자 그때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미디안 사람을 쳐 죽인다. 일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 벌어지는 상황이 8장에 나타난다.

[8장]
미디안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나와서 왜 우리는 안불렀느냐고 한다. 기드온이 겸손했던 것 같다(그는 므낫세 출신이다). 그렇게 겸손하니까 무마가 된다. 이것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그 때까지는 이스라엘의 주도적인 역할을 에브라임지파가 맡아 왔던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하는데 왜 내 허락없이 함부로 그런 일을 했느냐고 한다. 이것은 지도자의 허세다.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지도 못하면서(하나님께서 자기를 지도자로 세운 것을 알았다면 나서서 일을 해야지 가만히 있다가) 남이 다 해 놓고 나니까 그 때서야 나와서 큰소리다. 이것은 영적 능력을 상실한 지도자의 허세다. 이러한 능력 상실한 지도자의 허세가 입다 때 가서는 이스라엘을 동서로 완전히 갈라놓는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갈수록 이스라엘의 타락이 심화되는 만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돋보이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암시를 준다.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우셔서 교회를 다스리도록 하신 만큼 일반 단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도자가 공동체에 끼치는 영향이 대단하다. 그런 만큼 책임도 크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영적 지도자, 그 영적지도자들을 거론하면서 그들의 타락을 얘기할 때 단순히 그 지도자 한 사람의 죄악을 얘기하기 보다는 지도자란 것은 또한 백성을 대변하는 자이기도 하니까 이스라엘의 전체적 상황을 암시하기 위해서 지도자의 영적 상태를 말씀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 사사기에서도 지도자의 영적 능력 상실 즉 도저히 사명을 감당하기가 역부족인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은 지도자의 부족한 모습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당시 이스라엘의 전체적인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앞에서 이스라엘의 전체에 대해 말씀한 이야기들이 지도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없이 백성과 지도자 모두 전쟁을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공존의 길을 택하였고 다른 신을 섬기는데 지도자가 앞장 섰든지 아니면 백성들이 부추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도자가 공동체에 차지하는 비중, 끼치는 영향력, 직분상의 권위 등을 생각할 때 특히 사사시대 때 형편과 관련해서 생각할 것은 그들이 분명 앞장 서야 할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더 큰 책임이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지도자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책망 한 가지가 덧붙여지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왜 타락일로를 걷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앞에서 몇 가지 이야기했다. 즉 전쟁의사 포기, 신앙의 변질 이것이 그대로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 한 가지가 덧붙여져야 한다.
기드온시대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는가? 기드온의 반문을 통해서 짐작 해 보면 옛날에 우리 조상들을 놀라운 능력으로 구원하셨던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영적 무지와 그들이 당하는 상황의 진정한 원인이 어디 있는지에 대한 무지를 나타내지만 동시에 이전에 그들의 교회를 놀랍게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능력이 지금은 과연 사라지고 없는가?하는 심각한 반문이 가능할 정도로 은혜가 핍절한 정도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영적으로 매우 곤고한 시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긍휼이 여기셔서 연약한 기드온을 세우시고 이런 저런 모양으로 그의 믿음을 준비시켜서,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교회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케 하셨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전혀 무력하였고 그들에게 있어서 볼 수 있는 것은 실패와 타락되고 변질된 교회의 모습 밖에 없었기 때문에 전혀 인간의 힘을 빌리지 않은 미디안 군대에 대한 승리는 곧 하나님의 승리는 더욱 돋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기드온을 통해서 베푸신 구원 이 구원은 사사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구원으로 꼽힌다. 히 11장에 사사들의 인물이 언급이 되지만 특히 이사야서 같은 부분을 보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놀라운 구원을 말씀하면서 무엇에 비교하고 있는가 하면 ‘출애굽과 미디안의 날에’라고 비교하고 있다. 출애굽의 중요성은 새삼 언급치 않아도 잘아는 것이고 미디안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기드온을 통한 구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출애굽의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에 비견되는 구원이다. 사사시대의 하나님의 구원의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사사시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기드온시대 곧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이 가장 돋보인 이 시대는 또한 하나의 분기점이 된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구원체험이 이스라엘을 패괴케하는 계기가 되고만다. 여기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우선 이스라엘 백성이 기드온에게 당신 집안이 이스라엘을 대대로 다스려 달라고 이야기한다. 그와 같은 요청에 대해서 기드온은 일언지하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린다는 말로 일축하고 만다. 나와 내 아들도 결코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시요 그가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왕제도를 부정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 통치자를 통한 간접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바람직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많이 얘기를 하지만 그러나 직접적인 통치냐 간접적인 통치냐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기드온 자신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고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다스린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분명히 백성들의 요구 속에 적어도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는 요소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사사시대 서두에서 여호수아가 명백한 후계자를 남겨놓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물었다는 것을 가지고 이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의 모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백성들이 공식적으로 하나님께 물은 것인데 거기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어떻게 물었겠는가? 통성으로 기도를 했겠는가? 나중에 사사시대 여러 경우를 보면 대개 어떤 식으로 물었는가 추측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제사장을 통해서 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사시대 때 여호수아와 같은 그런 사역을 감당할 지도자는 없었지만 제사장이라는 또 다른 하나님의 통치의 중보자(그런 영적지도자)는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 공백기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하던 그런 성격의 지도자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지도자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 하시느냐 아니 하시느냐 그것이 관건인 것이다. 이런 것이 전제가 된다고 한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통해서 구원을 베푸셨는데도, 당신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으니 당신과 당신 아들이 대대로 이스라엘을 다스려 달라고 하는 백성들의 질문에 대해 그냥 못하겠다고 하지 않고 왜 여호와께서 다스린다고 말을 했을까? 그말이 있고 난 다음에 나와 내 아들도 결코 다스리지 않겠다고 말을 했는가? 이 말에 대한 배경에 대해 잘 생각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백성들의 요구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요구 속에는 적어도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참통치자이시라는 것을 부정하는 요소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나중에 사울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즉 다윗을 세우기로 하셨다. 그것은 이미 창세기 때 이미 다 예언을 하신 것이고 그리고 구약에서 세워진 다윗 왕 이라는 것도 그 자신이 궁극적인 왕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왕 제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백성들이 요구한 왕상, 왕권의 본질과 성격이 무엇인가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열방처럼 우리도 왕이 있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이들이 교회 밖의 대적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한계를 느꼈던 것 같다. 여호수아 같이 일사불란하게 백성을 이끌어 줄 지도자는 없고 그리고 시대가 진행될수록 백성들의 마음은 자꾸 갈라진다. 적과 싸우는 전쟁에 있어서 의욕을 상실하고 어떤 한 지파에서 큰 위기가 있어도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식으로, 말하자면 교회 내부의 긴밀한 결속감이 점점 붕괴되어 가고 느슨해져 가는 그런 과정이 시작되고 있음은 드보라 사건에서도 이미 살펴 보았다.
이런 때에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쳐들어와서 쑥밭을 만드는 이방나라들을 보니 그 나라에는 왕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 전쟁은 지금과 달라서 전쟁이 거의 백병전이다. 그래서 전쟁을 좌우하는 것은 사기다. 심리적으로 지기 시작하면 그 전쟁은 불문가지다. 그래서 대개 보면 전열선두에 누가 서는가 하면 제일 강한 용사가 서거나 왕 자신이 앞장을 선다. 영웅적인 모습으로 군대 앞에 서서 호령을 하면 군사들이 나아가서 전쟁을 하는 그런 양상인데 열방들은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효율적으로 이스라엘을 몰아붙여 초토화시키니 아무래도 우리도 저런 조직을 갖추어야 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요즘도 그렇지만 국가 안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정권이양 곧 승계문제다. 사사들은 어떤가? 하나님이 세우고 죽고 나면 그걸로 끝이다. 그러면 그 다음은 또 무정부 상태다. 그러니 또 야단법석이 나고 그래서 안되겠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나라를 보니까 세습제다. 그러니 정국이 안정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우리도 저러한 지도자 즉 왕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드온에게 청을 한 것인데 기드온이 그 요청의 성격을 알았기 때문에(그들의 요구의 성격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교회)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이다’라는 것을 분명히 지적한 것이다.
기드온이 300명을 뽑은 것을 가리켜 전쟁을 수행할 믿음이 준비된 사람을 뽑은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별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여기 이스라엘 백성의 기드온에게 한 요구에 대해 그 속에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성경에는 뚜렷이 그렇다고 말씀하고 있지도 않은데 너무 지나친 추측이 아닌가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글의 흐름을 보면 바로 이어 지는데 아비멜렉 정권으로 이어진다. 거기서 전체적인 흐름이 나타난다. 백성들의 잘못된 요구에 대해서 기드온이 교회는 어떠한 곳이다라고 분명히 하고 있고 또한 그 교회를 다스리는 분이 누구시라는 것까지는 참 좋았다. 적어도 기드온에게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한 가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암시 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백성들 편에서 그들이 원하는 교회 지도자상이 이미 상당히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교인(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하는 지도자상 즉 교회는 이런 사람이 지도해야 된다는 생각에 많은 변화, 변질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그 다음 그들의 잘못된 요구에 대해서 교회의 성격과 본질을 기드온은 분명히 했다. 교회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다해놓고서는 곧이어 기드온의 실수가 시작된다. 기드온이 가장 돋보이는 시점에서부터 또한 나락의 길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나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선 그가 전리품을 가지고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힘들지만 하나님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에봇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교회 지도자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암시가 되었듯이 이미 백성들 자체 속에서 믿음의 변질이 오기 시작했는데 기드온이 세운 에봇과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결합이 되어서 우상숭배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기드온의 본래 의도가 무엇인지는 차치하고) 그가 행한 일이 계기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오도하는 불상사가 생겨났다.

(6) 아비멜렉의 난[9장]
기드온이 죽고 난 다음에 아비멜렉이라고 하는 첩의 자식이 등장해서 자기 어머니가 세겜출신 여인이니까 거기에 가서 혈연에 호소한다. “당신들과 나는 피가 같지 않소 그러니 당신들은(기드온이 남긴 아들이 70명인데) 그 사람들의 통치를 받겠소, 나 한 사람의 통치를 받겠소”라고 선동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결국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우고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70아들을 한 반석에서 잡아 죽인다. 요담만 겨우 난을 면해서 도망한다. 아비멜렉이 이처럼 기드온의 아들들을 다 죽이고 핏줄에 호소를 해서 이스라엘의 왕, 교회의 지도자가 된 그 사건이 결국 무얼 의미하는가를 암시하는 하나의 비유를 말하고 있다.
감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등과 같이 열매를 맺는 즉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나무는 한결같이 자기에게 맡겨진 직무에 충실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섬길 뿐이요 사람 위에 군림하기를 오히려 거부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기드온이었다. 그러나 기드온에게 왕되기를 요청한 백성들의 원하던 교회의 지도자상이 세상에서 군림하는 영웅적인 모습의 지도자상 이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사울에게도 그대로 확인이 된다. 사울을 묘사할 때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로 머리 하나 더 컸다고, 곧 장대하고 얼굴이 준수한 영웅적인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아비멜렉이 혈연에 호소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는데 스스로 왕되기를 자임하고 나선 아비멜렉의 정권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가를 가시덤불의 비유를 통해서 분명히 이야기한다. 가시덤불은 불쏘시게 외엔 아무 쓸모가 없다. 남에게 유익하지 않다. 이런 쓸모 없는 자들은 우리의 왕되기를 원한다. 이와같은 왕권은 철저한 전제주의, 왕에 대한 절대 복종을 요구하고 이를 위해서는 폭력정치 즉 자기편을 보호하고 반대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징치하고 숙청하는 그런 정권이다. 이런 비유를 통해서 새로이 들어선 교회의 지도자, 정권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암시한다. 그리고 결국 이 정권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 서로 망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사실 그대로 이루어졌다.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을 치는 도중에 마지막에 여인이 던진 멧돌에 맞아 죽게된다.
사사시대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타락해져 가는 과정을 추적할 수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교회로서 존재할 것을, 교회란 곳이 어떠해야 하며 교회는 이러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모습을 포기 했을 때 하나님께로 부터 책망을 듣는 것이다. 교회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을 성결케 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교회로 만들어 가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단번에 가나안 족속을 멸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 자체가 그들을 남겨 두시고 두고두고 그들을 연단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책망하신 가장 근본 원인은 그들이 전쟁의사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와같이 시작된 이스라엘의 타락이 결국 드보라에 와서는 이미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에는 무관심하고 방관적인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교회의 하나됨이 이완되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물론 가장 근본적인 죄악이란 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나타난 과정을 추적해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기드온 때 오면 백성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교회 지도자상에 대한 오해와 변질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우리에게도 세상 지도자와 같이 번쩍거리는 지도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처럼 교회가 세상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것에서 해방시켜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7) 입다 사사시대[11장]
그 다음 중요한 사사로서는 입다의 출현이다. 이때는 압몬족속들에게 핍박을 받을 때이다. 입다는 길르앗 출신이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편 땅 므낫세 반지파와 르우벤과 갓지파가 차지하고 있던 그 땅이다. 용사였으나 출신이 미천하다. 미천한 출신이기 때문에 형제들이 자기들 가운데 유업을 주지않고 떠나라고 해서 비류처럼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외침에 의해 위기를 당하게 되자 입다가 용사인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장로들이 입다를 청해서 그들의 방백이 되어서 암몬자손들과 싸워 줄 것을 청한다. 그리고 이 청을 들으면 길르앗 거민의 우두머리로 삼을 것을 약속하자 입다가 이를 수락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의 진행 과정 자체가 과연 얼만큼 타당한 것인가, 물론 나중에 입다가 정작 암몬자손과 싸울 때에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하였다고 되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지만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를 사용하셨다고 해서 그의 모든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전혀 하자가 없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특별히 암몬자손과의 전쟁을 앞두고 만일 여호와께서 이번 전쟁을 승리하게 하시면 나를 맞으러 나오는 자를 잡아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약속한다. 이기고 돌아 왔더니 자기를 맞은 사람이 무남독녀 딸이었다. 이미 하나님께 서원을 하였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해서 크게 슬퍼하는 가운데 그 딸이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하고 자기 스스로 죽겠다고 한다. 얼마간 기간을 주어서 처녀로 죽음을 슬퍼하게 해 달라고 한 다음에 기록된대로 그렇게 하였다.

* 인신제사가 의미하는 바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많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생각하면 참 곤혹스러워 한다. 기생 소생이었고 비류 출신이었고, 그런 사람으로 끝났다고 하면 별난 사람이었구나라고 치부해 버릴텐데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큰 역사를 이루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셨다는 말씀 다음에,전쟁에 임하면서 입다가 이런 서원을 했다는 것이다. 입다가 이런 서원을 했다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에도 설왕설래가 있고 그리고 서원을 행한 것이 잘한 것이냐 못한 것이냐 등등, 일단 하나님께 약속을 했으니 무슨 일이든 무조건 해야 된다. 즉 잘한 것이다 하는 이도 있고 잘못한 것이다라는 이도 있다. 그런데 나중에 뭔가 되긴 된 것 같은데 끝말이 명백하지가 않다. 번제로 드렸는가? 사람을 잡아서 번제로 드린다는 것이 너무 엄청난 일이니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딸을 성소에 보내서 평생을 성소에서 지내면서 처녀로 늙어 죽게 했다고 해석을 하는 이도 많이 있다. 그것은 나름대로 어려움을 느껴서 이런 저런 해석을 하는 것인데, 우선 맨 마지막에 처녀로 죽음을 슬퍼했다고 되어 있고 그 다음에 보면 이스라엘 중에 해마다 입다의 딸의 죽음을 슬퍼하는 규례가 생겨났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단순히 성소에 가서 처녀로 늙어 죽은 것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해마다 슬퍼했을까?(시집 못간것 때문에) 그것은 좀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서원을 행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처음에 분명히 입다는 번제로 드리겠다고 했다. 어떤 이는 번제를 영적으로 해석을 해서 하나님께 헌신한 것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사람을 잡아죽이는 번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고 하면 문제가 됐다는 것 자체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정도 가지고 슬퍼 할 것은 못되기 때문이다.
분명히 입다가 서원한 것은 율법이 금하고 있는 인신제사를 서원했었고 돌아와서 자기 딸이 바로 그 대상으로 지목이 되었고 그리고 죽었다. 결국 죽었다는 것이 그 뒤에 나오는 내용으로 봐서 맞는 것 같다. 단순히 성소에서 독신으로 늙어 죽었다는 말만 가지고는 그 후에 이스라엘의 반응이 잘 이해가 되지 않고, 입다의 딸 자신이 몇 달 동안 슬퍼했다는 것 등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실제로 있었으니까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문제는 입다의 서원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냐, 그것은 아니다. 서원 자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서원을 하는 것이 잘못 됐다고 하는 것이 이런 것에 의해서 암시가 되고 있다. 결국 그가 돌아왔을 때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이 딸이었다는 것은 입다의 서원 자체가 얼마나 무모한 것이고 잘못 되었다는 것인가를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서원에 얽매어서 딸을 죽였는데 이런 것은 사사시대의 사사들, 그들을 통해서 놀라운 구원을 일으킨 그런 사람들을 너무 완벽한 사람들로 이해할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할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까지 흘러온 사사기의 전체 흐름을 볼 때 또 사사기 초두에서 이야기한 대로 세월이 갈수록 이전 시대보다 그 다음 시대가 더욱 부패했다는 말씀을 비추어 볼 때 이것은 결국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사람들 조차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했고,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긴 했으나 다른 한편 얼마나 그들이 영적으로 무지했고, 상식 있는 자 곧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자라고 하면 분명히 이것이 어긋난 일이라는 것을 알만한 데도 무모한 짓을 행한 불상사였다고 생각한다.
주변국가에서는 아주 후에 일이지만 이런 일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모압을 칠 때 거의 성이 함락될 위경에 처했을 때 모압 왕이 자기의 황태자를 잡아서 제사를 지낸다. 이렇게 주변국가에서는 위경에 처했을 때 사람을 죽여 제사하는 일이 있었다. 만일 이런 배경이 깔려 있는 것이라고 하면 입다가 이스라엘의 운명이 걸린 전쟁에 나가면서 그와 같은 서원을 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세상의, 이방의 타락한 종교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었는가 알 수 있다. 기드온시대 이후로 이스라엘의 타락의 도가 얼마나 심화 되었는가를 암시하고 있다.

* 교회의 분열(주도권 쟁탈)
입다에게 와서는 그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이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얼마나 무지했는가, 얼마나 무지막지한 일을 행했는가? 사람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를 만큼 무지했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입다에게 와서 이스라엘에 가장 아픈 교회의 분열이 일어난다. 이 분열의 기미가 기드온 때 어느 정도 표면화 됐었다.
길르앗 사람은 요단 동편 사람들이고 그외 나머지 지파들은 요단강 서편에 기업을 얻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입다는 길르앗 사람이고 대체로 그때 전쟁을 수행한 사람은 요단강 동편 지역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그들을 통해 놀라운 구원을 베푸시자 이제는 에브라임 사람이 들고 일어난다.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고, 정작 필요할 때 일찍 달려와서 도와 주었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터인데 일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 와서는 이스라엘의 장자 지파로서의 위신, 권위 이런 것들을 세우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도자의 허세다. 일종의 헤게모니 쟁탈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전에 이런 일이 있었을 때는 기드온이 겸손하여서 나는 당신 발치에도 못미치는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에 일이 무마가 되었다. 그런데 입다의 경우는 따지고 든다. 우리가 당신들을 불렀지 않느냐, 당신들이 오지 않고 선 이제와서 딴소리냐 하고서는 싸움이 붙어서 큰 전쟁이 나는데 에브라임 사람이 패한다. 길르앗 사람들이 요단강 나루터를 지키고 서서 요즘도 우리 나라의 경우도 지방에 따라 말이 다르듯이 에브라임 사람들이 잘 하지 못하는 씹볼렛 발음을 하게 해서 잘하지 못하면 잡아 죽이는 불상사가 생겨났다. 요단강을 중심으로 교회가 동서로 분열했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이러한 교회 분열의 심각성을 암시하는 일이 여호수아서에 기록되어 있다. 정복전쟁이 거의 마무리가 되고 여호수아는, 이 때까지 자기들의 가족과 모든 소유를 요단강 동편에 남겨두고 요단강을 건너와서 자기 형제들을 앞장서서 전쟁을 수행하던 르우벤지파 갓지파 므낫세 반지파의 용사들을 다시 고향에 돌려 보낸다. 돌아 가면서 이들이 요단강 가에 큰 제단을 쌓았다고 되어있다. 그러니까 이 소식을 듣고 여호수아가 노발대발하고 온 이스라엘이 들고 일어나서 쳐 없애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제사장을 시켜서 진상을 확인하는데 확인하는 과정에서, 너희들이 왜 이런 제단을 여기에 세웠느냐? 여호와의 법궤가 있는 곳까지 예배 드리러 와야 하지 않느냐? 너희들이 그 땅이 싫으면 이리로 건너오면 얼마든지 땅을 주겠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 말 속에 어떤 뜻이 내포되어 있는가 하면 성소가 두 개 생기게 되면 결국 교회가 둘로 분열되고 만다. 그 성소를 중심으로 섬기는 제사장이 서게 될 것이고 결국 교회가 분열되고 마는 것이다. 오직 한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하신 그 뜻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으나 그 중에 아주 중요한 의미 중 하나가 이스라엘의 영적 통일성 곧 교회의 하나됨을 유지하기 위한 뜻이 그 속에 분명히 있었다. 따라서 요단강 동편에 또 하나의 제단을 쌓았다고 했을 때 온 이스라엘이 들고 일어난 이유는 결국 무엇에 대한 분개인가하면 물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한 것도 있지만, 그 명령의 참 뜻이 이스라엘에 영적으로 하나의 구심점이 있게 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도전 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면 그것은 교회 분열에 대한 분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같은 해석이 타당한 것은 그 후에 이 일이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다. 그때 그쪽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이런 제단을 우리가 만든 것은 여기에서 제사를 드리고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요단강 서편에 동일한 제단을 쌓아 둠으로서 너희와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세웠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수긍하고 돌아가고 만다. 우리가 이스라엘에 속한 이스라엘과 하나인 것을 부정하지 못하도록 증거로 쌓은 하나의 제단이다, 한 교회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한 어떤 조처였다고 이야기를 하자 납득하고 돌아간 일이 있다.
이런 사건을 살펴 보면 초기 이스라엘백성들이 이스라엘의 분열을 얼마나 심각한 것으로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염려하던 그 일이 여기 입다 때 와서 교회 내의 주도권 쟁탈 즉 누가 주도적인 역할을 차지 하느냐 하는 것 때문에 교회가 갈라서고 만다. 이 때까지는 적어도 이스라엘 내에서 서로 싸우는 일은 별로 없었다(소규모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집단적으로 큰 규모로 서로 죽이는 일은 본격적으로 여기서 처음 시작된 것이다. 이때까지는 교회의 대적이 교회 바깥에 있었으나 이제 여기서는 그 대적이 내부에도 있게 된다. 그것은 교회의 분열의 모습이다.
기드온시대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이 본격화 되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교회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좀 소극적이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면 이제부터는 적극적인 변질이 시작되었다. 우선 교회 지도자에 대한 상이 변해졌다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온 세계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나 특별한 의미에서) 영역이요 하나님께서 왕이시며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라고 하는 그것을 빼고 나면 교회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 바로 그 교회를 다스리는 그것이 무엇이냐?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가 점점 세속화 되어가는 것이다. 세상처럼 좀 되어 보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적으로 세상의 지도자와 비슷한 교회 지도자상을 원하게 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완전히 표면화된 것이 첩의 소생 아비멜렉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스라엘내 교회 지도자상과 관련해서 어떤 변질이 일어났는가? 그것이 사건으로 돌출된 것이 아비멜렉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내 편이 되라 그러면 잘 해 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없애 버리겠다고 하는 이런 모습은 결코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는 지도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교회 본질 자체의 변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이 입다에게 와서는 사람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무지막지한 일로 나타나게 되었고 더우기 교회의 헤게모니 쟁탈로 인해서 교회가 동서로 분열되는 참담한 현실을 초래하게 되었다.

(8) 입산과 엘론의 사사시대(통혼이 의미하는 바)[12장]
두 사람의 사사가 짤막하게 나타나게 되는데 즉 입산과 엘론이 나타난다. 이 사람들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가 없고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짤막한 언급이 있다. 딸 서른과 아들 서른이 있는데 모두 바깥 사람들과 결혼시켰다고 되어 있다. 바깥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당시 각각 자기 지파대로 살고 있었으니까 자기 지파 외에 다른 지파들과 통혼한 것이다라고 긍정적으로 해석을 한다. 그런데 사실 이스라엘 지파 간에 혼인이 금해진 것도 아니다. 단지 아버지가 아들없이 딸만 두었을 때 그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기업이 다른 지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처로서, 같은 지파 내 사람들과 결혼하라는 명령은 있었지만 이스라엘 내에서 서로 통혼 하는 것이 결코 금지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바깥으로 시집 보내고 며느리로 맞아 들였다는 이 표현은,여기서 바깥이라는 것은 분명히 이방인들과의 통혼이라고 생각된다. 왜 통혼을 했는지 모르겠으나(일종의 외교수단으로 정략결혼 즉 평화적인 관계를 위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그 의도가 무엇인지간에 초래된 결과라고 하는 것은 혈통이 뒤섞이는 것이다. 구약에 있어서는 교회의 외적인 형태가 혈통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던 만큼 구약에서는 혈연이 중요했다. 지금은 교회가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교회의 일원이 된다. 물론 이 원리가 구약에는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있었지만, 그러나 구약에서는 외적으로는 적어도 아브라함의 육적 혈통을 타고 나면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에 속하게 되어있다. 이런 구약적 특성을 감안한다고 하면 혈통의 뒤섞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세상과 교회간의 구분을 완전히 철폐해 버리는, 세상과 구별되는 존재로서의 교회 존재를 포기해 버리는 행위다. 이것도 이스라엘의 한 일각에서 부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교회 지도자가 솔선수범한 꼴이 되고 말았다.

* 사사엘론
그 다음 스불론인 엘론이 7년을 치리했고 압돈이 8년을 치리했다고 되어있다. 이 사람에게는 아들 40, 손자 30이 노새 70필을 타는 자였다고 되어있다.
이 뜻이 무엇일까? 드보라의 노래에도 잠깐 언급이 됐었는데, 나귀 타는자(노새 타는 자)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지도급 인사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노새라고 하는 것은 귀인들이 타는 것 곧 신분의 상징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아들 40, 손자 30이 노새 70필을 탔다라는 것은 자기 아들과 손자들을 이스라엘의 요직에 다 앉혔다는 것이다. 이런 형태를 가리켜 족벌정치주의라고 한다. 기드온 이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성격을 급속도로 상실해간다. 교회 지도자들에게서 변질이 일어나고 영적무지, 무모함, 주도권 쟁탈로 인한 교회분열, 세상과의 통혼을 통한 공존, 세상과의 구별을 상실하고 혈연에 의한 권력구조 형성 등 이런 모습들이 나타나게 된다.

(9) 삼손 사사시대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삼손이다. 지금까지 진행 된 과정을 보면 이스라엘이 타락했다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사사가 죽고 나면 또 타락하고 또 부르짖고 구원하는 이것이 계속 반복된다. 또 동시에 하나의 큰 흐름은 악화일로로 치닫는 흐름을 관찰할 수 있다. 지도자로부터 시작해서 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 갈수록 나타나는 양상이 하나님이 다스려 가시고자 하시는 교회의 본질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모습들로 나타난다. 자기 완력으로 폭력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될려고 한 아비멜렉 같은 자가 있는가 하면, 영적으로 우둔하고 무지해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서도 알지못하는 무지한 지도자도 있고, 교회 주도권을 쥐기 위해 교회를 갈라 쪼갠 일도 있었고, 교회 지도자가 솔선수범해서 교회성계를 파괴해서 세상과 마찬가지로 만들어 버린 일도 있고, 족벌주의 즉 교회에 자기 친족들을 다 중직에 앉혀서 족벌정치를 하는 현상들도 나타났다. 이것은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교회사에서 얼마든지 있어왔고 교회가 타락하기 시작하면 대개 이런 경로를 밟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가 어디서 변질되며 어떤 경로를 거쳐서 어떤 결말로 끝나게 되는가를 한번 돌이켜 보고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특히 삼손 만큼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임한 사람도 없었다. 놀라운 힘을 개인에게 주신 일이 전무후무하다. 처음에는 하나님에게서부터 도모(지혜)가 생겨나서 블레셋 여인과 결혼한 것 처럼 해서 블레셋을 친다. 그런데 나중에는 거꾸로 삼손이 당한다. 들릴라라는 여인의 유혹에 빠져 있는데 블레셋이 그 여인을 이용해서 삼손을 타락시키고 그의 능력을 제거시킨다. 여자 때문에 망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시대 교회나 나타난 것은 다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삼손이 마지막에 머리가 다시 자라기 시작해서 다시 한 번 힘을 얻고 다곤신전을 무너뜨리니 그 때 죽은 자가 삼손이 이전에 죽였던 자보다 많았다고 큰 승리를 얘기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삼손은 매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그가 회개한 것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나 사사기 전체흐름, 타락일로와 결말의 과정에 비추어 볼 때 이스라엘은 갈수록 타락일로를 걸었고 삼손에 있어서는 특히 매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사사라고 이야얘기할 수 있겠다.

(10) 두 가지 사건[17장-21장]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반드시 연대적 순서인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그 두 가지는 단지파의 이주와 우상(신상) 만드는 사건 그리고 또 하나는 레위족 첩 강간사건이다. 이것은 사사시대를 통해 나타난 이스라엘의 모습을 단적으로 요약 총괄해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에브라임선지 미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이 사건의 경위를 본문을 보면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어머니에게서 은 천백을 취하니 어미가 저주를 하고 또 취한 은을 다시 어미에게 돌려주자 어미가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또 이 은을 성별하여 신상 곧 우상을 만든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영적 부패 영적 무지 등을 암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뒤죽박죽이다. 이렇게 해서 미가라는 한 개인에게 속한 하나님의 집, 개인성소가 존재하게 된다. 드라빔과 에봇을 만들고 그 아들 중 하나를 제사장으로 만들었다. 이에 대한 평가를 당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기 제 눈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이스라엘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하나님 백성으로서 한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보면 영적으로 이스라엘은 이미 갈갈이 찢어져서 전혀 영적 결속감이 없이, 전혀 질서가 없이 각기 제 눈에 옳은대로 소견대로 행했다. 그래서 전혀 통제불능 상태가 되어서 제각기 제 마음대로 행한다. 자기 마음대로 제사장을 세우고, 그렇다고 이 사람이 전혀 하나님의 규례를 모르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레위인 소년이 들리니까 그 사람을 잡아놓고 제사장을 하라고 했으니까 제사장은 본래 레위인 그것도 아론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개인 차원에서의 신앙의 변질 곧 하나님의 섬김, 예배의식과 관련해서 생겨난 하나의 변질이라고 하면 여기에는 묘한 요소가 하나 덧붙게 된다.
단지파는 앞서 이야기했지만 아모리 족속을 정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쫓겨났다. 유업을 얻지못하고 빙빙 돌아다니다가 결국 여기 이르러서 미가라는 사람의 집에 있는 개인성소를 지키는 레위인 제사장 소년을 만나게 된다(17:13절 참조).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는 하나의 성소 밖에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를 납치하여 이 때에 이미 단지파에는 독립된 성소를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의 섬김의 도리에 있어서, 의식영역에 있어서 특히 성소와 관련해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무지하고 타락했는가를 알 수 있다. 뻔히 율법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도리에 벗어난 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레위 족속인데 여기에도 꼭 같은 말로 시작된다. 당시 왕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제 눈에 좋은대로 행했다. 레위 사람이 첩이 음행을 해서 쫓아 보냈는데, 연연해서 쫓아가서 데리고 오다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밝을 때) 이방인들이 사는 마을에 가서 자면 될텐데 그래도 하나님 백성(교인) 집에 가야 된다고 해서 찿아갔는데 아무도 맞아 주는 사람이 없다. 그때 한 노인이 맞아 주어서 들어간다. 그런데 같은 교인들이 맞아 주기는 커녕 비류들이 찾아와서 남자를 내어 놓으라고 한다(homo-sex). 그럴 때 노인이 자기 딸을 주겠다고 해도 안된다고 해서 결국 레위 자손의 그 첩을 내어 놓는데 그들은 그 첩을 밤새 괴롭혀 죽게 한다. 그러자 그 시체를 12조각 내어서 12지파에게 돌리고 온 이스라엘은 분노한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들고 일어난다.
이 내용이 소돔, 고모라시대와 흡사하다. 사건의 구체적 내용까지 거의 흡사하다. 소돔 고모라 사건이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모든 선악간에 심판을 하시겠지만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너무 극악해서 특별히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불로 심판하심으로서 불의와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어떤가 표본적으로 보여 줄 수 밖에 없는 타락의 상징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다.
이스라엘이 그와 동일한 죄를 범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는 교회가 주도권 쟁탈로 인해서 분열되고 또 지도층이 권력욕에 사로 잡혀 족벌정치를 한다든지 통혼을 한다든지 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가장 극악한 두 개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타락의 정도가 얼마나 깊었는가, 심했는가를 보여주는 두 사건을 기록하고 마지막에서는 온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여서 이런 악을 행한 베냐민 사람의 처리를 하나님께 묻는다. 유다지파가 선두에 서고 그 일을 처리하는데 너무 분개해서 베냐민 지파의 600명만 남기고 다 죽여 버린다.
죽여 놓고 선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한 지파가 궐이 났다고 통곡을 한다. 남자만 600명 남아서 광야로 도망쳤는데 이 사람들을 짝지을 일이 걱정이다. 그리고 또 길르앗 야베스 사람은 이번 전쟁에 오지 않았으니까 멸하자 해서 다 죽여버리고 남은 과부를 짝지어 주고 그것도 모자라니까 실로에가서 축제 때 무조건 잡아 오라는 등 되어가는 꼴이 전혀 교회답지가 않다. 한마디로 제 눈에 옳은대로 행했다. 완전히 질서가 붕괴된 교회 모습을 사사기는 그리고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왕이 없었으므로라는 말씀을 덧붙임으로서 지도자, 목자없는 회중에 닥치는 여러가지 어려움, 확실한 리더쉽이 없는 교회가 겪는 붕괴과정을 말씀하는 동시에 앞으로 어떤 소망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간접적으로 암시하기도 한다.
참된 왕 다윗 그를 통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 그가 이러한 상태에서 소망 임을 말씀하는 것으로 사사기는 끝이 난다. 그래서 그 다음 성경(곧 룻기, 사무엘상, 하)은 바로 사사시대가 대망하던 강력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메시아 바로 그 통치권이 확립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사사기는 뚜렷한 교회 지도자 없이(인간 지도자 없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 이상적인 상태에서 출발한 역사라고 보지 않고 오히려 뚜렷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시대를 통해서 요셉지파에서 부터 유다지파에로 지도권이 넘어가는 이행기간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고 분명히 말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좁은 시각에서 보면 분명히 리더쉽이 없어서 발생한 일이다. 그 후에 일어난 여러가지 타락의 악순환마다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보내셨지만 간헐적인 사사들의 출현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형편에 처하게 되었고,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왕조의 필요성, 왕권확립의 필요성과 메시아 출현에 대한 기대를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사사기는 통상적인 이해와는 달리 교회에 있어서의 리더쉽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가장 강조하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그 리더쉽의 본질과 성격이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지도자를 통해서 실제로 그 교회를 다스리시는 그러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아비멜렉과 같이 강력한 통치를 행사하려고 했으나 그가 행사한 통치 자체가 하나님의 통치와 거리가 멀 때는 교회를 패괴케 하는 촉진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사기를 통해서 교회가 타락, 붕괴, 와해되어가는 과정이 어떠했는가? 어떻게 시작되어서 어떤 현상들이 수반되었고, 어떤 결말로 끝나게 되었는가 한번쯤 깊이 생각해야 하겠다. 개 교회마다 사정이 다를 것이고, 교단마다 사정이 다를 것이고, 나라마다 교회 사정이 다르겠으나 각 교회가 어느 수준에 있는지, 정상 수준에 있는지, 타락해 가는 과정에 있는지, 타락하고 있다면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 한번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사기의 사건들이 그 당시에만 의미있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고 한다면 성경으로 남겨 둘 필요가 없다. 기록한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함이요 후세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의 경고로 기록하신 만큼 이러한 일들을 깊이 상고하고 우리도 이런 결말로 교회가 끝장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힘을 떨치고 일어나서 일을 벌린다고 될 일도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마음으로 예의주시해야 할 것이다. 경성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룻기(תור; Ruth)

룻기를 전선지서에 포함시킬 것인가 아닌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 룻기의 위치는 70인경에는 사사기 뒤에 있으나 히브리 성경에는 잠언 뒤에 있다. 잠언 등은 지혜서인데, 성문서에 해당한다. 그런데 에스라, 느헤미야, 다니엘 등과 잠언, 시편, 욥기, 룻기가 성문서라고 한다면 그 근거가 무엇인가? 어떤 자들은 오경과 선지서가 편집된 후 나머지를 한꺼번에 םיבותכ(케토빔; 성문서)으로 넣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잠언 맨 마지막인 31장은 이상적인 치리자(왕)의 자세와 “현숙한 여인”으로 끝나는데 아마 룻을 현숙한 여인의 대표적 인물로 본 것 같다. 또한 보아스를 가리켜 ליה רוביג 기보르 하일; 유력한 자 = 남자다운 남자)라고 하고 있으므로 ליה תשׁא(에쉐트 하일; 현숙한 여인)과 ליה רוביג은 대조되고 있으므로 남자다운 남자의 전형과 여자다운 여자의 전형으로서 보인다. 잠언 31장도 왕과 여인의 이야기로 끝맺고 있다.
성경은 여자를 남자와 동등하게 취급하나 모든 면에서 다 그렇지는 않다. 신구약성경의 순서는 신약 - 시내산 사본을 따른다. 바티칸 사본은 복음서-바울서신-사도행전-공동서신(히브리서)-계시록이 나온다. 구약 - 우리말 성경은 70인역을 따른다. 그러나 히브리성경의 마지막은 역대상하이다. 에스라, 느헤미야도 마지막에 나온다.
그러나 이 룻기는 현숙한 여인의 기록뿐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데 그 근거는 초반이 ‘사사시대’라는 기록과 종반이 다윗의 족보로 끝맺고 있으므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련된 message임을 본다. 이것은 다윗왕조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효성 많은 여인의 model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 각 권의 순서의 분명한 이유는 없다. 룻기는 사사시대의 사건이므로, 사사기 다음에 위치하는 것이 좋다. 사사시대 한 가정의 일이 룻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기에 사사기 다음에 위치하는 것이 좋겠다. 만일 히브리 성경대로 잠언과 아가서 사이에 삽입하면 내용상으로 잘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잠언, 아가서는 특정 역사에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다(솔로몬이 지었으나 특정시대에 관련된 내용이 아니요 보편적인 내용이다).
룻기의 사건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교훈은 무엇인가? 룻기를 알기 위해 사사기를 보자. 사사기란 책 자체가 어떤 문맥에서 진전되어 가는가? 사사기의 진정한 면을 보기 위해 열왕기를 보면 특히 열왕기하만 보더라도 잘 나타난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을 실패한 역사로 본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볼 때 이스라엘 역사는 계속된다. 성경은 될 수 있는대로 넓은 의미로 보아야 된다. 성경신학은 성경을 개괄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사기와 더불어 열왕기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와해된 것으로 보나 룻기가 등장해서 전개될 진로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사사시대의 막다른 상황이 무엇으로 인해 되어진 것이고, 어떻게 이 상황에 대처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를 바로 룻기가 제시해 준다. 즉 룻기가 역사의 구심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암시해 준다. 그러나 룻기는 사사시대의 한 가정의 사건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윗왕의 족보로서 중요한 사건이고 시대적인 배경의 사건이므로 위치는 70인경, 우리 개역의 순서가 더 좋다.

룻기는 사사시대의 한 역사로서 특히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들었던 사사시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1:1에 보면 사사들의 시대(400여년간 4-5대밖에 안됨)에 약속의 땅에 기근이 있게 된다. 한 가정이 기근 때문에 자기 삶의 터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버리고 다른 이방 땅으로 간다. 2절에 하나님 나라의 공적으로 지적된 모압지방에 나오미 일가가 가서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주어진 땅을 떠나 삶을 포기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거기서 남편, 아들들이 다 죽고 과부만 셋 남는다.
신명기에는 모압인을 영영토록 이스라엘 회중에 못들어 오게 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출애굽시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한 족속이요, 롯과 근친상간한 족속이기 때문이다. 나오미 일가가 그들과 연합된 삶으로 이방풍속을 좇고 이방여인과 혈연을 맺게 되는 것은 사사시대에 이방과 통혼하고, 삶의 공간, 문화를 공유하고 이방과 한 몸이 되는 그때 상황과 유사하다.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든다는 것은 레위기 26장에서는 기근이 언약 어김에 대한 심판이라고 말하고, 신명기 11:9-17절에서 이스라엘의 땅은 천수답(하나님이 때를 따라 비를 주심에 따라 풍작과 흉작이 결정)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비를 주고 안주심은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여부에 달린 것이다. 따라서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듬은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패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를 가진다. 기근은 하나님의 심판의 요소로 나타났고, 이 심판으로 인해 한 가정이 이방 땅 모압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그 약속의 땅에 발붙이지 못하고 이방 땅에 나가 살게 되며, 또 남자들이 다 죽어 한 가정이 몰락한 사건은 그 의미하는 바가 사사시대의 전체의 축소판이다. 그런데 이 지리적 배경은 베들레헴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다윗왕조에서 나온 예수님을 암시받을 수 있다.
엘리멜렉 :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
나오미 : 사랑받는 자(beloved) ??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이다. 이스라엘과 하나님 관계는 남편, 아내의 관계로 묘사된다. 부자관계, 부부관계로 묘사되는 관계는 지극히 친밀한 연합관계인데, 신실함과 정결함이 요구되는 관계이다. 이들의 아들은 말론과 기룐(ןוילכו ןולחמ 이다. 아들과 남편이 죽은 나오미는 가장 불쌍한 상태이다. 성경은 가장 불쌍히 도와야할 대상을 고아와 과부 계층이라 한다. 아들이 끊김은 대가 끊겨 소망이 없다는 말이다.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이 죽고 난 후 가장 소망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것은 소망없이 멸망당할 위기의 이스라엘의 message이다.
1:6에서부터 사건은 시작한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셨다는 것은 기근의 심판이 끝났다는 것이요 그 백성에 대한 긍휼을 의미한다. 심판이 끝나서 고향으로의 귀향하는 나오미 일가를 다루는 것이 룻기의 이야기이다. 잘 살아보겠다고 떠난 나오미 일가는 오히려 세 과부만 남게 되었다. 이것은 나오미 일가의 몰락이다. 나오미 일가의 완전한 몰락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동생이 가계를 세워줄 수도 없는 아무 소망이 없는 모습이다. 나오미의 집은 바로 소망이 끊어진 가계이다.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자손이 단절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희망이 꾾어진 집안으로 망한 집안이다. 유업의 땅, 약속의 땅을 버리고 이방 땅에서 과부가 된 상황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런데 룻기에서는 사사시대의 암흑에 대한 기록이 아니고 그 다음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권고하시는 구원의 때를 듣고 돌아가는 내용이다.
과부만 셋 남은 집안에서 나오미가 하나님의 땅에 기근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두 자부에게 각기 자기의 곳으로 돌아가기를 권한다. ‘나의 아들이 있느냐, 나의 태가 남아 있느냐, 아들이 생긴다해도 어떻게 너희가 그들을 기다리겠느냐?’ 이것은 나오미의 처절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렇게 하여 오르바는 돌아가지만, 룻은 돌아가지 않는다.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오미는 하나님 백성의 약속의 땅을 생각했을 때, 인간적 헌신된 삶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건널 수 없는 깊은 간격을 깨달은 것 같다. 나오미가 친정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는 것, “보라 네 동서는 그들의 신들에게로...” 이 말은 그녀의 백성과 그 신들을 포기하고 어떤 의미에서 신앙의 결단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처음에 두 사람 다 어머니 백성(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겠다 했다. 그러나 질과 성격이 다름을 말한다. 나오미가 육적 차원에서 아무 소망이 없음을 말할 때 오르바는 돌아가 버린다. 그녀는 육적 이스라엘만 생각했었다(영적 본질에 대해 생각지 못함). 오르바의 믿음에 대해 나오미는 ‘그녀의 백성(이방)과 그 신들(우상)에게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오르바는 하나님의 백성의 독특한 위치에 대해서는 몰랐다. 영적 관계 맺음에 있어서 하나님 백성의 관계 본질에 대해 무지했다. 외견상 동일한 고백을 했으나 룻의 그 고백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룻의 고백은 육정(나오미에 대한 동정)이 아니고 근본 동기가 신앙적인 것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으로 삼음을 알았다. 어머니를 따라감은 자기 민족의 거짓 종교, 신들을 버리고 하나님 섬김의 의미를 갖는 이스라엘에 속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섬김을 말한다. 믿음의 열조들이 묻힌 땅에서 자신은 묻히겠다는 것이다. 창세기에서의 족장들의 마지막 소망은 조상들의 약속의 땅에 묻히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 백성의 신앙이다. 나오미는 믿음의 확실성 때문에 권면을 포기한다(룻의 효성 때문만은 아니다). 이스라엘에게 돌아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여기서 여자는 남성의 신앙을 따르는 부속물로 보이지 않는다. 남편과 떠나 자신의 독자적인 신앙의 결단이 족장시대에도 나온다. 또 신앙의 계보는 남자에게서만이 아니라 여자에게도 이어진다. 즉 하나님 나라에서는 남녀의 차이다 없다. 남녀가 다 동질의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룻기의 전반적 흐름은 회복의 이야기이다. 모압에서의 처절한 삶과 기근 등은 회복의 멧세지의 배경적 역할을 하고, 그 생활에서 돌아오는 회복의 과정에서 룻이 따라붙는다. 이처럼 망한 집안에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길에 룻이 같이 오는데, 이스라엘이 다 놀란다. 그 이유는 전에 나오미와 엘리멜렉의 삶이 풍성했음을 보고 이렇게 비참하게 돌아온 것에 대한 놀라움이다.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 도착시 이전 모습과 급변한 변모에 모든 사람들이 놀란다. 이는 사사시대 초기의 이스라엘과 말기의 이스라엘과의 차이이다.
그에 대해 나오미가 말한다. ① 나오미라 하지 말고, 마라라 하라 ימענ → הרמ; 나오미 - 마라 . ② 풍성하게 나갔으나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 האלמ → םקיר; 멜레아 - 레이쾀 . 나오미는 행복한 자, 사랑스러운 자였으나, 마라는 비참한 자란 뜻이다. 충만한 상태에서 제멋대로 갔으나 빈손, 모든 것이 궁핍으로 전락한 모습이 되어 돌아온다. 21절에 여호와께서 나를 괴롭게 했다고 말한다. 이 역사는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사사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왜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우리에게 도우라고 하셨는가? 고아와 과부는 제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에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 된다. 옛 고대사회에서 특별히 과부는 생계가 힘이 들었다. 22절의 추수기는 과부의 삶과 비교시 고아, 과부들의 은혜의 시기이다. 하나님께서 과부, 고아들을 위해 추수 때 이삭을 남겨두게 한다. 과부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삶을 살 수 있는 시기(이삭줍는 시기)가 바로 추수기인 것이다. 이로보아 룻기의 주제가 회복임을 의도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룻이 왜 나오미를 좇았는가? 인간적인 사랑 때문인가? 단순히 인간적인 정이 아니라 룻의 나오미가 돌아가라는 말에 대한 대답에서 볼 수 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된다’는 내용에서 그 동기는 신앙적 동기였음을 볼 수 있다.
2:11-12의 보아스의 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께서 네 행위를 갚으시기를 네가 하나님의 날개 아래 피하기 위해 왔다 부모와 고국을 떠나 네 친척 아비집을 버리고 네가 알지 못하는 백성에게로 왔다’. 이것은 곧 룻의 신앙의 결단을 말한다. 즉 리브가, 라헬, 레아에게 요구된 신앙의 결단이었다. 친척 아비집을 버리고 약속의 땅으로 가기를 요구 받았던 신앙의 결단과 같다.
보아스를 통해서 룻의 신앙의 성격을 말하게 한 것은 중요하다. 이방을 떠나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온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룻은 아무 소망이 없는 집안에서 믿음 때문에 시어미를 좇아 이스라엘로 온다. 시어미에 대한 친절한 행위, 하나님의 신뢰에 대한 의지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이다.

2장의 유력한 자(ליה רוביג; 기보르 하일 라는 말은 도와줄 능력이 있는 자란 뜻이다. 1장 마지막이 ‘보리 추수 때’라고 하여 회복의 가능성을 말하고, 2장은 유력한 보아스의 출현으로 시작한다. 그는 나오미의 친족이요, 또한 לאג 고엘; redeemer = 구속자 = 기업무를 자)이다. 이것은 빈털털이 나오미의 신세가 이제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 룻이 생계를 위하여 이삭을 주으러 나간다.
3절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에 따라 간 곳이 우연히(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친족 보아스의 밭에 있게 된다. 이것은 이삭줍는 자체가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해 있고, 모든 실상을 하나님께서 세우셨음을 암시한다. 우상숭배의 땅에서 나와 하나님의 백성되기 원해, 나오미 따라 살기 원하는 룻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하나님이 세운 이삭줍는 제도와 보아스라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긍휼을 보게 된다. 보아스가 굉장한 호의를 베푼다. 이는 남자다운 남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룻이 이방여인임을 나타내고 11절에 호의받을 자격없으나 호의받음에 감사하자 은혜베푼 동기를 12절에 말한다. ‘그 은혜 사모자에게 하나님께서 갚아주심’(룻의 효심에 대한 글이 아니다)이다. 보아스의 긍휼 베품이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을 암시한다. 이는 룻의 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다. 여기서 룻의 삶은 신앙의 삶인 것을 알 수 있다.

3장 1,2절의 내용은 룻의 방종이 아니다. 무분별한 처세가 아니라는 말이다. “온 성이 현숙한 것을 안다 함”이 그 증거이다. 9절의 옷자락은 날개란 뜻이다. 시어미가 축복시 ‘여호와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한다’는 말이 또 사용된다. 룻의 행위를 방종이 아니고 친절, 사랑, 긍휼의 행위로 보아스는 받는다.
?? 2:11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받으러 온 네게 상주시기를 원한다’
?? 3:9 ‘당신의 날개(옷자락)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나의 구속자가 됨이니이다’
3:1절은 나오미가 룻에게 ‘안식할 곳’을 찾아 복되게 하도록 한다. 이것은 일종의 구원인데, 10절에 보아스가 너의 처음 דסח 헤세드; 순종   시어머니에 대한 순종 = 이스라엘로 오는 것)보다 나중 דסח 순종 = 보아스에게 가라한 시어머니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 더 나은 신앙이라고 한다. 즉, 나이 많은 보아스에 의지하는 것을, 그 백성되기 위해 시어머니 말을 따른 행위보다 더 아름다운 신앙의 행위라고 성경은 말한다. 시어머니의 종용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행위이다. 13절의 보아스도 친절, 사랑으로 이를 갚아준다.
출애굽기와 사사기, 그 전체 내용이 이스라엘 민족이 중심이라면 룻기는 한 가정, 가계가 중심이 되어져 가고 있다. 이 룻기의 위치가 사사기 - 룻기 - 사무엘상하의 위치라 한다면, 즉 이 위치에 의미가 있다면 룻기의 의미는 한 가정에 국한될 수 없고 이스라엘 전체에 암시를 주고 있는데, 마지막의 다윗의 가계가 주어지는 것은 구속사의 한 출발점으로 아름다운 인간관계 이상의 것임을 암시한다.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한 가계는 결국 다윗에게로 이어진다. 다윗은 구속사에서 중요한 포인트로서 아브라함에 못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가정을 통해 여러가지를 암시해 주고 있다.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이 나오미에게서 집약적으로 대표하여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룻기의 배경이고, 룻기의 진정한 시작은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했으나 심판이 끝나고 약속의 땅으로 귀가하는 회복이 룻기의 주제이다. 나오미가 처한 희망없는 상황은 이스라엘의 상황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기근 자체가 사사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일어났다면 나오미 가정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당한 것으로서 나오미의 경험은 이스라엘의 경험을 대표한다. 나오미의 상황과 이스라엘의 상황은 상징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와같이 완전히 망해버린 집안이 누구를 통해 회복이 되느냐? 기업무를 자인 보아스에게서 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룻이지만 사실상 내용은 나오미가 더 중요하게 나온다. 나오미로 시작해서 나오미로 끝나는 것이 룻기이다. 나오미는 여호아로 말미암아 풍부하게 나갔다가 빈털털이가 되어 고향에 돌아온다. 또 하나의 주인공은 보아스이다. 고엘의 본래의 의미는 redeemer, 즉 기업무를 자이고 이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노예된 사람들을 위해 그의 친척이 그 값을 갚아주고, 삶의 터전을 찾아주고 자유의 신분을 찾아주는 것을 말한다. 기업무를 자인 보아스로 인해 가계를 잇게 되어 나오미가 자손을 얻어 기뻐하게 된다.
룻기는 믿음의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아름다운 일들을 보여준다. 아무 소망없는 시어미에게 자신을 희생하는 룻의 믿음, 불쌍한 과부 집안에 은혜 베푸는 보아스의 믿음, 시어미가 룻에게 베푸는 은혜의 아름다움 등,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헤세드인데 가장 번역이 어려운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룻기의 근본적인 틀, 즉 저자가 의도하는 내용은 이와 좀 다르다. 룻기가 주는 멧세지를 며느리의 효행의 전형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시어머니를 위해 희생하는 며느리가 보상을 받는 권선징악이 주제인가?
사사시대가 부정적인 면이 있으나(나라로서의 와해되어버린 무정부 상태의 멸망됨을 보는데) 그렇다고 사사시대가 다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다. 이 부정적인 image를 수정하는 본보기의 예가 바로 룻기이다. 그러나 과연 룻기는 이 정도의 어두움 속에서 한 면의 어두움을 밝히는 한줄기의 빛이었을까? 좀더 넓은 포괄적인 의미는 없을까?
룻기는 다윗의 혈통에 대해 이야기 한다. 유다지파자손(나손, 살몬, 라합, 보아스, 오벳...)가계가 어떤 것인가? 보아스를 유력한 자라고 한다. 다윗에게도 이 말을 사용한다. 잠언 마지막의 현숙한 여인을 집을 세운 여인이라 한다. 잠언 마지막의 현숙한 여인으로 룻을 현숙한 여인이라 할 때 이럴 경우 몰락해버린 남편의 집을 세우는 여인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다. 자부에 관한 이야기인가? 효성의 강조 정도만인가? 주인공은 룻도 나오미도 보아스도 다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모압 이방여인이 믿음을 따라 자기 민족과 고향을 버리고 이스라엘에게로 들어오게 된 교훈을 담고 있다고도 한다. 과연 룻기가 그런 정도 의미의 책인가? 처음과 마지막이 중요하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이 결국 다윗왕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윗왕의 출생의 배경에 대해 나오면서 다윗왕의 출생의 의미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룻기의 사건은 단순한 가정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만은 아니다. 룻기야말로 사사시대 성격을 잘 나타내준다.
룻기의 주제는 바로 redeemer이다.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오미는 이스라엘 자체를 상징한다. 이 나오미가 기업무를 자를 통해 모든 것을 회복하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보아스의 후손인 다윗이 할 것을 보여준다. 즉 완전히 몰락해버린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키고 세우는 역할을 다윗이 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사건이 그 당시 한 가정 내에 그치고 마는 좁은 의미의 사건이 아님을 보여준다.

4장에서는 기업무르는 것이 나온다. 보아스가 기업무르는 일을 하고 룻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그리고 이 룻기는 4:13절에서 보아스와 룻의 자녀 오벳의 탄생과 함께 다윗왕가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4:11절에서는 베들레헴의 장로(남자)들의 노래가 나오고, 4:14절에서는 여인들의 노래가 나온다. 이런 노래들이 다윗왕가의 족보와 관련되어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볼 때 그 내용은 중요하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그 집에 들어갈 때 여자들이 무어라 하는가? 11절의 라헬과 레아같이 되라한다. 이러한 축복이 하나의 관례였으나 이 축복은 상당히 깊은 의미가 있다. 이후 진행될 역사를 생각하면 의미가 큰 것이다. 라헬과 레아가 누구인가? 이스라엘 민족의 어머니요, 이스라엘 집을 세운 어머니이다. 이는 룻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암시한다.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는 역할을 할 것이다. 룻을 통해 태어날 후손이 이스라엘 안에서 행할 사역이 암시되어 있다. ‘라헬과 레아 같게 하시기를’은 이 결혼을 통해 세로운 이스라엘이 다시 세워지기를(이스라엘 재건의 역사를 암시) 소망한다.
여인들의 축복 내용 : 여호와를 찬양하라. 기업무를 자를 주셔 그 이름이 일컬음 받게 하셨다. 나오미의 상태는 대가 끊긴 절망의 상태인데, 기업무를 자를 통해 대가 생기게 하셨다. 또한 네 생명의 봉양자이다. 이것은 앞으로 룻과 보아스 사이의 아이가 이스라엘의 왕의 사역을 담당할 것을 말한다. 대가 이어지는 것은 곧, 나오미의 대임과 동시에 이스라엘이 끊기지 않고 다시 회복할 것을 시사하는 sign이다.
사사시대 말기 이스라엘은 완전 몰락 상태였다. 여기 ‘베레스의 집과 같기를’이란 말은 유다지파를 지칭한다. 창세기 49장은 영영한 유다지파의 왕국을 상징하므로, 14절의 여인들의 축복과, 15절 생명의 회복자, 17절 오벳 = 섬기는 자요, 이어서 다윗의 족보가 나온다. 룻기의 의미를 한 가정의 효성, 이방의 구원에 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축소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확대할 수 있겠는가? 룻과 보아스의 아이는 나오미의 노년의 봉양자요, 생명의 회복자라 한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허물어진 집을 세울 것에 대한 암시이다. 이스라엘의 와해, 몰락하는 상태를 말하는 사사기 21:25절의 말씀은 룻기에 와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룻4:22절은 “...다윗을 낳았더라”고 말한다. 이 말은 창세기에 10회, 민수기에서 제사장 가문과 관련해서 나오고 여기서 나온다. 제사장 다음은 왕족이다. 왕에 대한 약속이 유다지파와 관련해서 창세기와 민수기에 나오고 있다. 그 당시 이방에서 행해진 왕제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족보가 지시하는 것이 다윗이라 한다면 룻기를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은 장차 축복의 가계를 통해 행할 다윗의 사역이 어떠할 것인가를 암시해 주고 예표해준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라가 와해되어 버린 사사시대의 형편에서 룻 가정의 redeemer인 보아스가 룻의 가정에 새생명을 회복했듯이, 다윗을 통하여 이스라엘 역시 회복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의미에서 룻기는 사사기와 사무엘상하를 잇는 책(사사기 - 룻기 - 사무엘상하)이 된다. 다윗왕조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책이 바로 룻기이다.
보아스(기업무를 자)를 통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가정이 모든 것을 회복하고 얻게 되는 것, 이것이 구원의 사건이다. 아무것도 없는 나오미가 자기의 노후를 보양할 자를 얻음 그래서 이를 생명의 회복자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죄의 노예인 상태에서 생명의 근거를 마련해주고 죄로부터 자유를 주시는 분이다. 구약의 외적 상징과 또 영적 실제적 의미에서 기업무를 자는 바로 구속주이다.
이스라엘의 상황과 나오미의 상황이 사사시대 일반적 상황과 비슷하다면 나오미 일가의 상황은 사사시대의 축소판일 것이고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암시로 확대시켜 볼 수 있다. 나오미 일가가 위기 당할 때는 사사시대고 사사시대에 속한 한 가정의 역사를 대변한 것이며, 그 시대의 상황이 한 가정에 투영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나오미의 상황이 사사시대 상황의 투영이라면 나오미는 이스라엘과 상응한다. 보아스가 한 일은 나오미 일가에게 기업을 회복, 구속한다. 이스라엘이 사사시대에 몰락한 것으로부터 다윗에게서 다시 일으키심을 받는다. 이방여인으로서의 룻이 상응하는 것은 이방나라요, 다윗왕국은 다윗시대에 와서 주변국가들을 다 정복한다. 이방여인 룻이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것은, 다윗의 사역을 통해 사사시대 몰락이 회복되고 이방들이 그의 아래로(왕국 확대) 몰려오는 요소와 상응한다. 이러한 성격들은 다윗 등장의 사무엘서를 읽을 때 확실해진다.

* 나오미를 이스라엘의 상태로 취급하는 것은 타당한가? 단지 이스라엘 왕족의 조상역사가 한 경건한 가정사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는 없는가?

* 신 23:3절에는 모압, 암몬자손은 הוהי(아도나이; 여호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혈연적인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충분조건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라합의 경우는 이방인일지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족장사의 예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혈연적으로만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신앙의 결단처럼 계속 리브가와 라헬, 레아에게도 신앙의 결단이 요구됨으로써 혈연적인 것만이 아니고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룻의 경우도 믿음의 결단이 요구되었다.

* Von Rad식의 예표론과 보수주의의 예표론의 다른 점은?
전자가 당시 사건 기록 속에 기록자의 의도가 삽입되어 룻기 같은 경우에 그 인물 속에 상징적 멧세지를 기록자가 넣었다고 보는 반면에, 후자는 사건 속에 하나님의 의도가 삽입되어 하나님의 멧세지가 담긴 것이라고 보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상징적인 것뿐 아니라 실질적인 사건이 있는 것이다. Von Rad는 실제 사건보다는 상징적 의도를 더욱 강조하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모든 역사적 사실이고, 실제적 사건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실제적이면서도 그 실제 사건 속에 하나님의 기록 의도가 있는 것이다. 다윗왕국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징할뿐 아니라 그 당시의 열방을 다스리는 실제적인 왕국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상징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실제적 성격을 상실시킨다.

사무엘(מבזנ?)

사시기, 룻기, 사무엘서는 왕조의 확립에 대한 기록읻. 사무엘은 사사요, 선지자인데, 역대기에는 레위족속으로 나오고 사무엘상에는 에브라임지파로 나온다. 대개 보면 지파들이 자기 산지에서만 산 것이 아니고 다른 지파 산지에서도 살았다고 보면 사무엘은 레위족속으로서 에브라임 산지에 살았다고 보인다.

1장은 엘가나의 가정 - 경건한 가정을 말함.
두 아내 ??? 한 나 - 무자 : 엘가나의 사랑은 받음
??? 브닌나 - 자식 있음

브닌나가 한나를 경멸한다.
“barren woman moyif”→ 엘리사벳 - 요한, 마노아 - 삼손, 사라 - 이삭
여자가 하나님의 간섭으로 아이를 낳은 주제들은 그 아이를 통한 특별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가르친다.
한나가 그 아들을 평생 나실인으로 바치겠다는 서원을 한다. 성별하여 드리겠다는 서원을 한다. 한나즈이 중얼거리는 기도와 서원을 보고 엘리는 그가 술취한 것으로 안다. 엘리는 한나 가정의 경건함을 판별하지 못하는 영적 우둔함을 보인다. 그러나 한나의 기도 내용을 듣고 하나님의 축복을 한다. 한나가 아이를 낳아 젖 뗀 후 하나님께 바친다.

2장 한나의 노래(기도송, 찬양송)
한나의 찬송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시편을 보면 대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데 기도와 찬양의 구분이 없다).
하나님이 그녀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기쁨.
hwhy 같이 거룩한 자가 없으시며 주 밖에 다른 이가 없다.
전능하시고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이 모든 인간 행사를 아신다. 즉,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한다.
하나님 통치의 성격을 구명
한나에게 임한 결과 ??? 용사의 활을 꺾으시며 : 배부른 자 거지 : 무산자 일곱 아들
??? 넘어진 자는 띠를 띠도다 : 배고픈 자 풍부 : 많은 자 쇠약
여기서 철저한 통치의 주권성이 나온다. 하나님 뜻대로 하시는 통치의 특성.
여호와는 죽이시기도 하고 살리시기도 하신다.
이 한나의 기도는 사무엘서 전체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특성은 또한, 어떤 자들에게 임하는가를 보여준다.
??? 거룩한 자(경건한 자)의 발을 지키심
??? 악신은 어둠 중에서 침묵케 하심
주권은 인간 편에서의 경건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뢰하는 자 : 이것은 결코 인간 공로주의적인 경건을 말하는것이 아니다. → 신뢰의 자세는 하나님의 통치를 움직인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할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2장은 한나의 경험한 구원의 성격을 보편화시켜 말한 것이다. 10절에 보면 기도와 간구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jussive -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를 쳐부수며 하늘 우뢰로 치시리로다 → 대적 멸망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하시고 → 통치의 편재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 →왕권의 능력 → 승리
자기의 기름 부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
그의 대적의 패배와 하나님 통치의 확장은 그의 왕응ㄹ 통해 이루어질 것을 말한다. 그 왕은 하나님 통치의 대행이며 그의 뿔은 높아질 것이다.
한나의 기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단지 개인의 사소한 일을 과장해서 ㅁ라한 것인가? 아니면 후대의 편집자가 사무엘의 왕국 수립적 사역을 안 경험을 토대로 해석했는가? 아니면 성령께서 한나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것인가?
한나는 단순히 자신의 원체험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구원, 세계통치로 확대시키고 있고, 특히 약한 것에 임하시는 구원의 주권적 특성을 발전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대적을 멸하심으로 그의 통치가 땅 끝까지 이루어질 것과 그 일의 Modvitior(중보자)의 뿔을 높이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를 볼 때 상당히 시사적인 것이다. 블레셋의 지배하에 있던 비참한 이스라엘을 구원한 다윗왕국에 대한 예언이다. 이 예언을 사무엘의 출생과 관련시켜 말한 것은, 사무엘의 특성이 왕국수립의 준비 역할로서 충분할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누가복음 1장에서 사가랴의 엘리사벳의 노래(세례 요한의 출생)와 거의 비슷하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출현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관계는 사무엘과 다윗의 관계와 같다. 왕의 준비 역할과 그 왕의 오심을 말하는 것 - 왕국 수립의 역할.
사무엘과 엘가나의 경건한 모습과 대조적으로 엘기 가정의 불경건한 모습이 나온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이다. 이들은 여호와를 알지 않음. = âdy âl. 제사 드리는 중에 고기를 낚아채감 - 하나님의 제사제도를 능멸함.
사무엘의 어린 시절이 나온다. 엘리가 엘가나와 한나를 축복하여 하나님께서 3남2녀를 주신다.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hwhy Mî) 자라난다. : 이것이 자랄 때의 특성임. 이어 엘리의 아들들이 성전에서 수종드는 여인을 겁탈함.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를 책망하는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예배의식(Cult)을 멸시하는 죄를 크게 징벌하시겠다고 한다. 예배는 삶을 반영한다는 견해를 Negative하게 받아들이는 오류는 예배(cult) 자체를 부인하려는 경향을 가지는데 하나님께서는 직접 제정하시는 cult를 잘못 드리는 자들을 엄히 다스리신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cult sin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었다. 이것을 하나님 멸시한 죄라고 한다. 즉, cult를 멸시한 것 = 하나님을 멸시한 것. 그래서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멸시할 것이며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리라’고 하신다.
심판의 내용 : 네 집에 노인이 없을 것. 이스라엘의 복된 날에 너는 환난을 볼 것.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을 것.
언약의 확인 :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세우고, 그가 내 뜻대로 할 것 → 그를 통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라.
이것은 엘리 가정의 멸망과 사무엘의 흥황을 다루는 좁은 범위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원성을 지닌 견고한 집에의 건축을 말하며 특히 엘리의 직분을 27절에 출애굽과 아론의 가문 전체에 관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론 제사장 직분 = 영원한 충실한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의 사건은 표징(sign)이라는 것. 이것은 앞으로 올 본격적 사건의 sign의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제사직분의 타락과 멸망을 sign한다고 한다면, 새로운 제사장 직분의 필요와 오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제사장의 오심을 기대하게 한다. 즉, 멜시세덱의 반차를 기대하게 한다. 실로의 파괴사건은 아론족속의 제사장 직분의 멸절인 것이다.
이 예언의 성격은 사무엘의 역할을 포함할 뿐 아니라 그 역할 이상의 영원적 의미를 지닌다. 사무엘의 역할은 이 예언의 영원성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대조 ??? 아론계열 - 출애굽과 제사제(그림자), 실로, 홉니와 비느하스의 sign
??? 충실한 제사장 - 견고한 집

3장 사무엘이 여호와를 섬길 때
hwhy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음 = Nyzh = 엘리의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보이지 않음 = 이것은 엘리의 영적 무감각의 상태를 암시적으로 표현.
하나님의 계시의 중보자로서의 엘리 사역이 끝났음을 말하며, 사무엘을 부르셔서 새로운 사역을 맡기심이다. 11-14절에 나오느 엘리 가정에 대한 심판은 용서받지 못한다. 19절에 사무엘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받아 그 말이 권위 있음을 볼 수있다. 이는 사무엘을 hwhy의 선지자로 세우심이다.

4장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
하나님의 심판이 전쟁을 통해 나타난다. 전쟁은 패하고 전령이 엘리에게 궤 빼앗긴 일을 말하자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는다.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이를 낳고 그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부른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되어 있는데 그것이 떠났음을 말한다.
*제사장 가문의 몰락과 법궤 빼앗긴 사건
하나님이 실로에서 떠나셨고 이스라엘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실로성과 직결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엘리의 징벌은 하나님의 떠나심을 의미한다. 실로는 이제 황폐되고 하나님의 처소는 시온이 선택된다. 그 이후 아론의 제사장 직분이 쇠약해진다. 그런데 법궤는 블레셋 진영에 가자마자 하나님의 재앙을 몰고 온다.
cult symbol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불신앙한 이스라엘에게 있어 ‘법궤’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상징의 역할을 나타내지 않았으나, 이방 블레셋에 있어 ‘법궤’는 다시 하나님이 참 선이심을 드러내는 일을 하였다. 하나님은 신앙 벗이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아니심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동적 기ㅖ처럼 법궤만 들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님을 보이신 것이다.
이러한 cult symbol에 대한 태도는 오늘날 성찬제도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와 관련된다. 의식은 그 의미가 우리의 진정한 믿음에서 드러난다. ‘떡과 포도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떤가? 법궤는 다시 블레셋의 신들을 쳐부수고 영광 가운데 이스라엘로 오신다.

6장 벧세메스로 법궤가 오는데 사람들이 그 안을 보다가 죽는다. 이 일로 법궤는 이제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게 되고 거룩히 구별된 엘리아살이 지키게 된다.

7장 지난 시간에는 사무엘의 출생과 엘리 가문의 몰락에 관하여 봤는데사무엘의 출생은, 한나의 노래에서 암시하듯 새 시대의 출현과 관련된 출생이며, 후에 메시야 사역의 에배자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것을 살폈다.
사무엘의 나실인적 헌신은 하나님의 궤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을 감당한다. 엘리 제사장은 당시 영적, 소경적 상태를 대표하느 쇠퇴의 성격을 묘사하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능멸하는 배역에 앞장선다. 엘리 가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완전히 몰락하고, 사무엘이 선지자와 사사의 사역을 겸하여 새로운 시대를 연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시작하시는새로운 일, 새 시대의 일은 ‘미스바에서의 회개’로 시작된다. 기럇여아림에 언약궤가 있은지 20년 된 후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회집한다.
‘미스바 성회’ - 전심으로 hwhy를 섬기겠다는 회개의 모임이었다. 블레셋이 미스바로 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은 사무엘에게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이다. 하나님을 붙잡으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을 믿은 것이다. 사무엘이 번제 드릴 때 하나님이 블레셋을 쳐서 패하게 하신다. 에벤에셀 =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8장 사무엘이 새로운 시대의 예비사역자임을 밝힘.
사무엘이 늙어 아들들에게 사사를 시킴. 여기서 그의 늙음은 그의 시대가 끝남을 의미한다. 그 사역의 때가 끝나고 진짜로 새 시대의 주인공이 올 것을 암시한다. cf) 세례 요한의 사역이 끝난 후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됨과 같음.
사무엘의 아들들이 뇌물을 취하고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자 이스라엘이 불만을 드러내고, 왕을 세우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이 요구 속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반역적 요소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 요구의 어디에 그런 요소가 있는가? 왕 제도의 요구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었는가? 그것은 그들이 왕을 요구하는 것이 열방과 같이 통치되기를 원하여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열방처럼’이라는 말이 하나님을 거스린 요소인 것이다.
신명기17장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할 때 열방적 왕을 요구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므로 왕 제도가 하나님의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통치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자유주의 신학에서 암픽티오니와 왕 제도의 갈등을 말하는 논리에서 나온다. 또한 보수주의에서도 왕 제도를 기버하시지 않았었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사무엘상 초두에 이미 하나님께서 왕 제도를 두시려는 뜻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2:10절에 ‘hwhy께서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라고 하고 있다.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가 하나님을 거스린 요소는 ‘열방처럼’ 왕을 요구한데 있었지만, 왕 제도 자체를 하나님ㅁ이 금한 것은 아니었다.
열방처럼 왕을 달라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이 바라는 ‘왕의 상’을 보여주는데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왕의 상인 것이다. 7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나를 거부한다’고 하시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요구는인간적인 왕을 요구한 것이다. 이 요구를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인 반역의 연장으로 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10절에서 저들이 요구한 왕의 실상들을 보이신다. ‘너희를 다스릴 왕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자기의 사병으로 삼고 자기 사적 노예로 만들고, 딸들을 노비로 삼고, 재산을 왕실화시키고, 경제적 착취를 시도할 것이고, 모두 왕의 종이 될 것이다’
이 제도는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로의 왕이 아니라 백성을 착취하고 종으로 삼는 왕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열방의 왕 제도의 실상이며, 타락한 열방의 참 모습인 것이다. 세상적 제도의 모습을 억압과 착취의 성격을 가진다고 규정한다. 세상의 통치원리는 ‘힘의 논리’요, ‘지배적인 논리’이다(교회의 통치는 불신 세상의 통치원리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반드시 왕을 달라고 고집한다.
그들은 반드시 왕이 있어야 하는데 열방과 같이되어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라는 요구를 한다. 열방의 군대는 훈련된 병사들이었으므로, 이스라엘은 열방의 조직력과 힘에 매료되어 그렇게 조직화해야한다고 생각했다(교쇠가이렇게세상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에 매료당하면 자기의 기술을 의지하고 자기 방법으로 해볼려고 한다).
이스라엘은 그 전쟁을 더 이상 하나님의 손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들의 방법과기술로 싸워보겠다는 것이다. 약속의땅의 전쟁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여하에 달려 있는데도 이스라엘은, 순종하기 보다는 하나님 없이 자기 힘으로 이겨보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불신앙이고, 배역하는 것이다.
그들의 실패의 진정한 원인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에 있음을 깨달아야 할 그들이 그것을 깨닫기는 커녕 자기들의 전쟁기술 부족으로 생각하여 열방의 조직력을 바란 것이다.
‘우리 왕이 우리 앞에 나가 우리의 전쟁을 하게 할 것이라’ 하나님께 전쟁의 승패가 달린 것을 믿지 않고, 더 이상 하나님께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쟁을 우리가 하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곧 하나님의 전쟁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의 전쟁을 우리가 스스로 처리하기를 요구했고 그래서 그들의 힘 있는 왕을 요구했다. 이들의 요구대로 얻은 첫 왕은 사울의 못브에서 볼 수 있다. 사울은 용사의 모습으로 능히 싸움에 나갈 용장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등장은 실패로 끝난다.

9장 사울 왕의 출현
사울 : lyê rôbg(유력한 자의 태생) 그는 키가 크고 준수한 자이었다.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를 잃어버려 아들 사울에게 찾으라고 하자 그는 나귀를 찾으러 다닌다. 이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임하사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신다.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의 손에서 건져낼 자’라고 하심.
이 표현은 사울 선택이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울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백성의 악한 요구에 따라 내려진 왕인 것이 분명한 만큼 결국 사울의 왕됨은 다윗왕조의 선택과는 다르다. 사울은 선택받을 때에 하나님의 신이 충만한 사람이 되었다. 그때 그는 겸손한 모습을 가진다(21절).

10장 사울에 대한 부정적 평가
19절에는 백성의 악한 요구가 불신앙의 요구인 것을 말하고 백성에게 제비를 뽑게 한다. 이때 사울이 뽑힌다. 이 일은 출애굽 이후 계속 배역해온 역사의 연장으로 기록된다.

11장 사울에 대한 긍정적 평가
암몬(나하스) 사람을 사울이 쳐서 이긴다. 사무엘이 길갈에거 사울을 왕으로 삼는다. 이는 사울을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잠시 보인 것이다.

12장 길갈 - Covenant Making. 여기서 왕을 세우는 의미는 백성의 요구한 악한 의도대로 한 것을 명백히 밝히기 위하여 이곳에서 왕을 세운다. hnh → ‘이제 왕이 너희앞에 행하니느라’ 17절을 보면 너희가 왕을 구한 일이 여호와의 목적에서 범한 죄악이 크다고 말한다. 그날에 우뢰와 비를 보내리라고 하자 백성이 hwhy와 사무엘을 두려워한다. 20절에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오직 돌이켜 헛된 신을 좇지말라고 권면한다. hwhy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을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고로 너희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크신 이름 때문에. 이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긍정적으로 쓰신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13장에서 15장까지는 사울의 불순종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13장 사울이 실패한 사건
사울이 직속부대를 주둔시킨다. 이때 블레셋과의 전쟁이 나온다. 블레셋 - 병거 3만, 마병 6천, 백성도 해변의 모래처럼 많음. 이 전쟁에서 사울과 이스라엘이 두려워 떨며 사무엘이 늦게 오자 그것을 기다리지 못한 사울이 친히 번제를 드린다(번제와 화목제). 사무엘이 도착하여 이를 책망하지 사울은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사무엘의 대답을 보면,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나이다. 이 불순종 때문에 사울은 버림받고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왕이 되게 하겠다고 선언한다.
* 사울의 역사에서 말해주는 것은 사람이 요구한 인간적인 왕은 결코 하나님을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 또한 그의 종말이 어떠할 것인가를 예시하여 준다.

14장 요나단의 사건
요나단의 승리가 나오고, 사울은 전쟁 끝날 때까지 금식을 명한다. 이 사울의 명령은 참으로 경박한 것이었다. 즉 사울의 경솔한 명령이었다. 요나단이 꿀을 먹으매 사람들이 말리자 요나단이 사울의 경박한 명령을 비평한다. 이 일을 통하여 우리는 사울의 경솔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15장 결정적인 사울의 불순종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철저히 Mrê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 일을 보시고 사울을 택한 것을 후회하셨고(sorry),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보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심이다. 그리고 사무엘이 아말렉왕 아각을 찢어 죽인다. 즉, 하나님께서 Mrê(렴절)하라는 명령에 순종한다.

16장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부음
사무엘이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보러간다. 장자 엘리압을 보고 사무엘이 기름 부으려 하자 하나님께서는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사울 왕의 특성이고, 백성들이 요구하는 왕의 특성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윗을 보매 그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고 말하는 데, 여기서 눈이 빼어남은 암시적 표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건히 모시는 자의 특성이다. 그 예로서 우리는 엘리와 사무엘을 볼수 있다. 엘리 제사장은 눈이 침침하였다. 반면 그 당시 사무엘은 여호와를 섬기는 자였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 붓자 다윗이 hwhy의 신에 크게 감동된다. 이어 그는 사울의 수금 타는 자가 된다. 또 21절에 사울의 병기든 자가 된 것을 볼 수 있다.

17장 블레셋과 전쟁
15절에 보면 다윗이 항상 사울 곁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부친에게 왕래하였다. 다윗의 등장에서 중요한 것은 사울이 다윗을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냐고 묻는다. 16장과 17장은 두 개의 tradition의 이질적 삽입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16장과 17장의 다윗의 못브은 실제로 다른 모습이다. 수금 타는 자로서의 다윗과 용사로서의 다윗은 서로 다르다. 그리고 이 면은 굉장히 중요한 다윗의 두 국면이다. 사무엘하 23:1절의 다윗의 마지막 말에서 볼 수 있다.
???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Singer)로서의 모습
??? 메시야(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모습
이렇게 볼 때 음악가 다윗과 용사 다윗의 기록은 의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 음악가로서의 다윗과 계시 받은 자로서의 다윗의 모습이 사무엘하23:3절에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시편 저자가 다윗임을 볼때 음악은 굉장히 중요하다. 즉, 음악의 위치가 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찬양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hbn라고 하여 예언과 동일시 하고 있다.
사무엘상 17장부터 사울(하나님이 버린 자)의 몰락과 다윗(하나님이 택한)의 강성이 나타난다. 계속해서 다윗의 경건을 볼 수 있다. 원수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고 함.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도와준 놉 제사장들을 모두 죽인다.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돕는 자들을 이렇게 한다느 위헙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전화위복되어 아비아달이 에봇을 가지고 다윗에게로 오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이어 사울의 최후가 등장한다. 그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대답치 아니하시므로 답답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아 사무엘을 불러오게 한다(삼상28장). 이것은 초혼술과 흡사한대 다른 곳의 성경이 내증하는것은 아니다. 당시의 사무엘은 SATAN의 장난이며, 사울이 직접 사무엘을 본 것도 아니고, 신접한 여인만이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노인은 사울의 최후를 예언한다.
그러면 어떻게 SATAN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가? 성경은 거짓 선지자도 앞날을 예언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잘못된 것이라는 증거는, 예언의 결과가 사울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울을 엎드러지게 했다는 데 있다.
이스라엘의 왕권이 다윗에게 넘어가자 다윗음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옮겨온다. 이는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심이다(성전은 하나님의 집). 이스라엘의 통일(내부 정리)이 끝나고 주변 정복기록(주변 정리)이 나온다. 내치에서 외치로 넘어가는 중간에 사무엘하 7장이 있다.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하자. 하나님은 다윗에게 네 집을 지어주겠다고 하신다. 여기 다윗의 집은 바로 다윗왕조를 말한다. 10절에 보면 사사시대처럼 불안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왕국이 되게 하겠다고 하신다. 다윗왕조를 통해 영원한 집을 건축하심이다.
① 사사시대의 불안정 → 다윗시대로 안정
여호수아는 원칙적 정복이었고, 사사시대는 실패며, 비로소 다윗시대 때 실제로 안식이 완성된다.
② ??? 사사시대 → 사사를 통해 다스림
??? 다윗시대 → 다윗을 통해 다스림. 사사는 당대에 그쳤으나 다윗왕조는 영원한 후대의 통치로 통치조직의 안정을 이루게 된다. 이 말의 핵심은 영원한 왕조를 이루는데 이스라엘의 왕권은 하나님의 뜻임을 알리는 것이다.
모세시대부터 하나님께선 계속 지도자를 세워오셨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잠정적 지도자들이다. 그러나 이제 영원한 왕권을 통해 통치가 안정되기 시작한다. 모세부터 왕국시대를 발전적 흐름으로 본다면 왕국성립은 긍정적인 것이다.
신명기 17장을 보면 백성들이 왕을 세우겠다고 하면 왕을 세우라고 하시면서 왕은 은, 금, 여자, 말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왕은 세상적 재력, 부력으로 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후궁(여자)을 거느리는 것은 외교적 술책과 관련된 것으로 인간적인 것이 아니기를 원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외교술책으로 정략결혼을 한다는 것은 권력유지의 핵심수단이다. 그렇다면 이 명령(첩을 두지 말라)의 의미는 하나님 왕국의 왕의 통치의 근거와 힘이 왕의 노력(외교, 금력, 경제)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왕의 타락은 직접으로 백성의 락에 영향을 미치므로 그 만큼 엄격한 경고의 말을 명하신 것이다.
*왕조의 성립은 왜 하나님께서 ‘열방처럼 왕을 달라느 ㄴ백성의 요구’와 관련시켰는가? 기드온과 사울의 경우 그 왕에 대한 요구를 하나님은 하나님 왕권에 대한 반역의 행위로 보신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왕조의 성립을 말씀하시면서 반역적 요소를 포함시키는가? 이러한 부정적 언급은, 왕국성립의 역사가 반역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예언적 시각으로 말해진 것이다.
ex)율법명령하고 나서 백성들에게 너희가 지킬 수 없다는 부정적 예언을 말한 것과 같다.
* 사무엘하 7장에서 또 하나 언급된 것은 다윗의 몸에서 날 자를 통해 성전건축이 될 것이라는 예언, 성전건축의 의미는 성막으로 떠돌아다니신 하나님의 방랑에 대하여 하나님의 안식을 말하는 것이다.
??? 광 야 → 천막생활 → 하나님은 성막
??? 가나안 → 정착 → 하나님은 성전 = 안식하심

출애굽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느 다윗 - 솔로몬의 역사에서 일단락(구원-안식)된다. 마태복음 초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한 단락의 역사로 보는 것의 의미가 있다.

열왕기(םיכלמ; Reges)

열왕기 기록은 다윗 - 포로 때까지를 다룬다. 이 역사의 부분은 마태복음의 제 2 section에 해당한다.
마태복음 ?? 아브라함 → 다 윗(14대) - 1 section
? 다 윗 → 바 벨 론(14대) - 2 section
?? 바 벨 론 → 그리스도(14대) - 3 section
다윗 왕국의 확장 때에서 드러난 것은 영원한 왕국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왕국에서 잘못할 때는 징계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완전한 심판은 아니라 할지라도 상당히 불온전한 역사 과정을 거쳐서 영원한 왕국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윗왕은 영원한 왕국의 궁극적 왕이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다.
밧세바 사건과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사건이다.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인구조사를 통해 다윗이 징계받는 장면이 나오고 그것으로 인해 성전의 장소(아라우나의 타작마당)가 결정된다. 다윗의 범죄로 인해 ‘성전마당’의 하나나님의 용서로 변한 것은 ‘성전의 기능’이 하나님과의 교제회복에 있음을 보임이다.
cf) 성막제정(제사)이 금송아지 범죄 context에 나온다.

* 제 2 segmant의 역사를 핵심적으로 다루는 사건이 엘리야 사건이다.
< 엘리야 사건 >
엘리야의 성경적 위치는 신구약 여러 곳에 나온다. 마태복음 16장에는 예수님이 광야로 기도하러 가신 것이 나온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데 세례 요한의 잡힘(세례 요한의 사역이 끝남 = 준비기간)을 듣고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된다 → 새로운 시대의 도래
여기서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광야로 기도하러 가신다. 이 관계를 염두에 둘 때, 요한의 죽음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느끼셨는가? 요한의 사역이 예수님 사역의 준비자 역할이라면, 예수님은 요한의 죽음을 통해 자기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셨을 것이다. 이제 자신의 죽음의 때를 앞두고 기도하러 광야로 가신 것이다.
마태복음 14:23절의 밤 중에 바다 위를 걸으신 사건 후에 베드로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신적인 사역이 거듭 드러나고 예수님 사역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 마태복음 16장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난다. 예수님이 이런 고백을 유도해 내신 목적은 바로 베드로의 고백 후에 예수님의 죽음을 선포하신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됨의 고백’과 선포는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봄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17장에 변화산 사건이 나타난다. 이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난다. 여기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논하신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함이다.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공관복음 기록의 방향이요, 목적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 자신의 삶에서만 방향적인 것이 아니고 전 구속역사의 방향이요, 목적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타내는 변화산 사건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
* 모세가 나타난 것 - 이스라엘 건국의 주요 인물로서 예수님의 사역과 대비적 역할이기 때문이다.
* 엘리야는 왜 나타났는가? 엘리야 출현이 가지는 구약적 의미는 무엇인가? 엘리야와 그의 사역의 의미가 어떤 것이기에 예수님과 모세의 사역의 동일한 차원에 들어가는가?
열왕기상 16:29절에 보면 당시 이스라엘왕 아합왕의 죄악상을 나열하면서 엘리야 출현의 서장(배경)을 말한다. 엘리야의 처음 등장은 13장이다. 아합(오므리 왕조)은 바알종교(시돈)를 받아들임으로 여로보암의 죄를 가볍게 여기고 이전의 어떤 왕보다 악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한다. 이 상태는 이스라엘의 막다른 골목에 진입하여 무슨 일인가 일어나야 할 것을 암시한다.
솔로몬의 치세는 처음에 잘 순종하였으나 말기에 여러 아내를 거느렸으므로 הוהי의 명에 불순종했다. 이 결혼정책은 정략결혼이며 외교정책인데 ‘평화’를 위한 정책이었다. 외교상 관례로 이방 공주들의 종교관습을 그대로 존중해 주게 되어있으므로 이 관습으로 말미암아 이방종교가 이스라엘에 들어오고, 이 죄악 때문에 이스라엘은 2개로 분열된다(이스라엘과 유다).
신명기에서는 왕에 대한 경계 명령이 가장 강조되는데 이처럼 솔로몬의 배역은 곧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지켜야할 골목에 이르게 되고, 10지파를 떼어 순수성을 지키려 하였다. 그리고 여로보암에게 10지파를 주었는데 여로보암은 종교적 집합을 위해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하나님을 배역한다. 이 금송아지와 관련된 여로보암의 죄는 이후 이스라엘 열왕의 불순종을 취급하는 근거로 기록된다. 즉, 악한 왕의 기록은 ‘여로보암의 죄를 좇았다’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금송아지’는 여호와 종교를 떠난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형상화한 죄악을 말한 것이다(제 2계명을 범한 것).
cf) 시내산의 금송아지도 완전히 הוהי를 떠난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는 ‘이것이 너희를 구원한 הוהי’라는 변질된 표현, 즉 하나님의 상을 금송아지로 표현한 것이다. 이 변질된 하나님의 상은 우상숭배와 본질적으로 같은 죄악이다(롬 1장의 반역은 하나님을 잘못 아는 것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금송아지는 이방종교의 영향이다 : syncretism. 그런데 열왕기상 16장에 와서 아합의 죄악이 여로보암의 죄를 가볍게 여기고 모든 왕보다 더욱 악했다고 한다. 여로보암의 죄는 혼합주의였지만, 완전한 배도는 아닌데 반해 아합은 완전한 배도를 시도한다(바알 숭배).
아합의 아비 오므리는 뛰어난 왕으로서 오므리의 정책 중 하나가 두로, 시돈과 화친하고 아람을 대항한 것이다. 당시 화친 정책은 정략결혼을 수반하므로 오므리는 아합과 시돈의 공주 이세벨을 결혼시킨다. 이때 바알 종교가 들어와 완전히 여호와 종교를 대치시켜 여호와의 선지자를 모두 죽여버린다. 아합이 ‘이전의 어떤 왕보다 악했다’는 말은 그가 여호와 종교를 완전히 바알 종교로 대치했다는데 있다.
엘리야의 출현은 바로 이런 배도적 배경에서 나타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3년 동안 기근을 주시겠다고 하신다(기근은 언약 파기의 심판으로 나타나는 결과이다). 모세와 엘리야의 연결은 시내산 언약과 언약의 파기의 관계이다. 언약의 파기는 아합에 와서 절정에 이른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와 갈멜산에서 대결을 한다. 누가 참 신인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바알 선지자들이 자기들의 신을 부르고 자기 몸을 해한다 → 바알 cult. 엘리야는 하나님을 부른다.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이 사건 이전에 어느 쪽을 선택하라고 하자 백성이 묵묵무답이다.
18:38절을 보면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제물을 사르자 온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הוהי 그가 하나님이시다’고 고백한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인을 모두 쳐죽이고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 기도하자 큰 비가 내린다. 비가 내렸다는 것은 심판이 그쳤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바알 종교는 분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고, 바알 선지자는 모두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이제는 심판이 끝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세벨의 대응은 더욱 심했다.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하매 엘리야가 도망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 엘리야의 낙심에 하나님께서 먹이시며, 엘리야는 40주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고 동굴에 유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강한 바람, 지진, 여기에 הוהי가 계시지 않는다. 세미한 소리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명을 다시 주신다. 이전에 엘리야가 말한 것(왕상 19:10) ‘저희가 주의 언약을 어기고 주의 단을 헐며 주의 선지자를 죽였나이다’ 로마서에는 바울이 이 말에 대하여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했다고 한다.
엘리야의 송사
①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송사 -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요구
② 하나님 자신에 대한 불평 - 하나님께서 왜 가만 계시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엘리야가 요구했던 ‘하나님의 개입’은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의 형태였다(왕상 19:11). 엘리야는 실제로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큰 승리했던 것이 생각났다(큰 능력 → 큰 결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진이나 바람 형태 속에 계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요구한 ‘하나님의 개입’ 형태를 아니라 하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신다(이것이 하나님의 개입 형태).
하나님의 심판 ?? 아람왕 하사엘 ??
?? 예후 ?
?? 엘리사 ?? 를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엘리야의 호렙산 경험이 얼마나 큰 context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가?이다. 신약에서 엘리야의 사역 의미를 모세, 예수님과 동일선상에 놓고 있다고 할 때, 엘리야의 의미는 전 구약적 배경을 가진다.
엘리야의 로뎀나무 사건은 하나님의 힘으로 떡과 물을 먹음이다. 그리고 도달한 곳은 호렙산이다. 그리고 나중에 엘리야 승천직전의 사역은 길갈 → 벧엘 → 여리고 → 요단강을 건너 강건너편에서 승천한다. 그런데 벧엘은 곧 아이를 연상시킨다. 꼭 이스라엘의 정복사역의 경로와 역순으로 나간다. 엘리야의 행적은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대표적 역할임을 암시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내산’인데 이것은 언약체결장소이다. 열왕기상 19:9절에 보면 시내산의 동굴에 엘리야가 들어간다. 동굴은 הרעמ(메아라)인데 정관사를 붙인다. 즉, 그 동굴(הרעמה; 하메아라)이다. cf) 출애굽기 33:22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받을 때 רוצה תרקנ(니크라트 하추르; 돌틈)인데 이것은 바로 굴을 말한다. 모세는 이 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Teophany, 신현현상). 엘리야 역시 이 호렙산 동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이것은 신학적 차원에서 같은 의미를 갖는데,
①모세는 왜 이 산에 올라왔는가? 이스라엘이 언약을 파기했으므로 그 문제를 하나님께 묻기 위하여 올라온 것이다.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해 간구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회복시켜서 새로운 두 돌판을 주신다. 첫째 돌판을 깨뜨려 버린 것은 모세가 화가 나서 던진 것이 아니다. 돌판의 가장 첫 계명은 우상숭배금지인데 이들이 이것을 범함으로 이 돌판의 증거적 의미가 깨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두 돌판을 주신 것은 언약을 회복시켜주신 것이다.
②엘리야도 역시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의 문제를 가지고 올라갔다. 호렙산에서 다시 언약의 문제를 취급한다. 그 결과는 모세 때와 같지 않고, 이스라엘을 철저히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볼 때 엘리야는 모세와 거의 동일한 차원에서 대표하는 의미를 갖는다. 제 2의 모세의 의미를 가지는 엘리야의 사역은 상당히 넓은 역사의 segment를 cover하는 것이다. 엘리야가 받은 계시의 핵심은, 언약을 범한 이스라엘을 철저히 심판하시되, 신실한 남은 자를 남겨두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멧세지의 핵심이 된다.
모세와 대조해 볼 때 순종과 불순종이 조건으로 제시되는데 엘리야 때 와서는 아합의 패역으로 인해 완전히 불순종해버린 것 때문에 앞으로 이들을 어떻게 하시겠는가?에서 완전히 멸절(심판)시키나 남은 자를 구원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엘리야 이전과 이후는 전 구속역사의 흐름을 한 번 회복시키고 전환시킨다.
모세 → 엘리야 → 8세기 선지자 → 예수 그리스도
(조건)→?조건 없음(멸망→심판, 긍휼→남은 자)
그렇다고 보면 예수님의 죽음에서 변화산에 나타난 엘리야의 의미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엘리야는 9세기 선지자이고, 그 사역을 엘리사가 계속하며 엘리사가 죽고 여로보암 2세의 융성이 나타나고, 8세기 선지자들의 활동이 나타난다. 8세기 선지자들은 엘리야의 멧세지의 확대 해석인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8세기 선지자 멧세지의 근거와 토대를 제시한다.


성경 역사의 구조 = 하나님 나라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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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타락 아브라함 출애굽 가나안정복 사사시대 다윗 성전 포로회복 JX초림 JX재림
⑴ ⑵ ⑶ ⑷ ⑸ ⑹

1. ① 아브라함의 약속은 종말론적 성취를 소망한다. 여기에서의 성취는 초림과 재림을 한날(הוהי의 날)로 보는 종말론적 성취를 궁극적으로 지향한다(히 11:8-10, 16).
② 그런데 1차적으로는 창세기 12:1-3절의 약속은 바로 5절에 성취된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건이다(히 11:9-16).
③ 2차적으로는 아브라함부터 가나안 정착이라는 구약적 segment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12지파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는 약속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 1차 Exodus → Canaan이라는 segment에서 이해하는 2차적 성취이다. 여기에서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가나안 정착과 아울러 다윗과 솔로몬을 잇는 하나님의 성전(하나님의 안식) 건축까지를 한 segment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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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출애굽 가나안 다윗 솔로몬 성전건축
(약속) (백성안식) (하나님안식) = 한 사건으로 본 성취

2. 출애굽 사건을 중심으로 보면 이 사건은 자기 백성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재림)을 예표하는 것으로서 가나안까지를 한 segment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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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 --- 광야(긴장) --- 가나안 → already not y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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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림 --- 긴장 시대 --- 재림 긴 장

3. 가나안을 중심으로 보면 이 segment는 다윗왕국 건설까지를 한 주기로 볼 수 있다. 이 시대는 사사들의 시대인데 사사는(עישׁומ; 모쉬아)로서 다윗왕조를 바라보는 중간기이다.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정착(안식)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왕조(솔로몬→성전건축 포함)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안식으로 일단락 맺는다. 그러므로 실패의 역사이면서 왕국과 성전을 기다리는 예비적 역사이다.
긴장상태(예비) 다윗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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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정착 다윗 솔로몬 성전건축
(백성들의 안식) (완전한 안식) = 한 사건으로 보는 성취
이미 이루어진 ←------------→ 아직 이루어지 않은
① 이 정착은 여호수아로 인해 이미 원리적으로 땅을 차지한 정복완성의 정착이다. 그러나 아직 정복해야 할 전쟁이 남아있으니, 이미 주신 땅을 그 백성의 믿음의 전쟁으로 성취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② 그러므로 사사들의 성격은 불완전한 지도자(실패한 지도자)이면서 완전한 지도자(다윗왕조)를 기다리는 예배적 구원자요, 궁극적으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그림자 역할이다.

4. 다윗왕국을 중심으로 보면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과 다윗의 집(왕조)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볼 때 이 왕국은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을 예표한다.
새 시대의 시작 → 하나님 나라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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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왕국(약속) 성전 JX초림 재림
그러므로 사사시대에 비교하면 다윗왕조는 안정되고 온전한 성격이지만 궁극적인 하나님의 왕국에 비교하면 아직 예비적 성격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격으로 이미 안식하신 하나님이 더 나은 안식을 바라보게 하시는 긴장의 성격을 주신다. 다윗왕국의 왕들은 불안정한 지도자이지만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지도자이므로 다윗왕국은 또한 실패이면서도 완성을 향해 가는 예비적 왕국인 것이다.

5. 선지시대를 중심하여 볼 때, 그들은 다윗왕국과 바벨론 포로를 이어 포로귀환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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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왕국 분리 선지자들의 지적 Is의 멸망 Jd의 멸망 포로기 JX초림 JX재림
= 한 사건으로 보는 성취
이들은 포로의 심판과 회복의 멧세지를 전하며 약속의 땅 귀환을 곧 영원한 왕국의 회복과 동일시 한다.

잠언(ילשׁמ; Proverbs)

히브리 성경 중 독특한 쟝르가 바로 지혜서이다. תמא(에메트;진리)에서 א(히브리 첫 글자로서 ‘알렙’이라고 읽고 음가는 ‘ㅏ’발음이 남)는 욥기(בויא=욥=이옵), מ(‘멤’이라고 읽고 음가는 ‘ㅁ’이다)은 잠언(ילשׁמ=미슐레), ת(‘타우’라고 읽으며 음가는 ‘ㅌ’이다)는 시편(םילהת=타할림)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합쳐져서 지혜서를 이룬다. 그러므로 시편 속에서도 지혜문이라 부를 것이 많다. 욥기, 잠언, 전도서는 쟝르가 각각 다르다. 시편이 큰 범주이고, 욥기, 잠언, 전도서는 독특한 범주이다.
히브리어 자체가 어렵다. 역사서에서 보는 이야기체가 아니다. 이 부분을 엮어서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것은 이 내용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이다. 잠언, 전도서, 욥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오리무중이다. 내용상 난해하다. 성경의 다른 부분의 결론과 다르다. 전도서는 허무하다로 시작하여 허무하다로 끝난다. 회의를 느낀 사람의 회의를 적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알레고리란 헬라어 원어 뜻으로는 다른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본문하고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포괄적 뜻이다. 알레고리 해석의 특수 상황이 알렉산더학파였다. 알레고리는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전도서에서 먹고 마시는 뜻을 신령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알레고리이다. 전도서 전체 흐름, 구조는 짧은 글이나 몇 시간 강의로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잠언은 오랫 동안 열리지 않은 책이었다.

1장
1절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했는데 그대로 받으면 된다. 왕이 지은 잠언이다. 왕이 지었다는 것 외에 지혜문학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혹자는 말하기를 거꾸로 말해 잠언은 이스라엘 혹은 성경의 독특한 문학 쟝르 아닌 여러 나라에서 유포된 문학 쟝르라고 한다. 잠언이 존재하고 남겨놓은 것은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현상이 아닌 보편적 현상인 것이다. 외국의 경우도 잠언의 수집, 출판은 궁전 중심으로 발견된다. 대개 왕은 한 나라 통치하는데 내치(內治)를 할 때, 무력이 아닌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왕 주위에 왕의 통치를 보좌하는 지혜자들이 있었다. 왕의 통치를 보좌하여 지혜로운 정책을 제시하는 지혜자들의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내에도 이런 지혜자들이 있었다. 이는 아히도벨이 대표적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잠언을 독특한 형태로 분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ץעי(야아츠) = councel 이런 지혜자들은 이스라엘 궁정에 있었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제사장, 선지자 등이 지혜자였고, 같은 동의어로 םימכח(하카밈;지혜자들) ← םכח(하캄;지혜자)가 나온다. 역대기에 보면 히스기야 신하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편찬했다는 말이 나온다.
애굽의 지혜문의 특징은 “말한 것을 귀 기울여 들으라, 내 마음을 기울여 들으라, 네 마음에 두라, 억눌린 자를 착취하지 않도록 하라, 상전에게 말대꾸하지 말도록 하라” 등의 문체가 잠언과 유사하다고 많은 학자들은 말한다. 이처럼 외적 유사성, 문체 등이 이스라엘 내 모사집단이 있어서 나라 정책에 크게 관여했고, 그들을 통해 잠언이 수집, 편찬될 가능성이 있다.
이렇듯이 혹자에 의해 주변 국가의 잠언집과 성경의 잠언을 동일시 취급하려는데 대해 우리의 견해는 어떠한가? 그런 주장의 전제와 그 결과가 초래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보편적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고유의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고, 인류의 보편성이라는 의미 속에 포함된 뜻은 계시와는 무관하다는 뜻이다. 타민족에도 유사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계시와 상충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친근히 느낄 것은 잠언이다. 우리 양심을 편하게 해주는 말이 있다. 또 예수 믿는 초신자에게 권하는 책이 시편 혹은 잠언이다. 여기에 특별히 거룩하고 희생하는 삶이 있지 않고 세상을 지혜롭게, 약게, 꾀 많게 살 수 있는 지식의 보고로 본다. 말하자면, 보편적이라는 말은 세속적 지혜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이런 것은 너무 피상적 관찰이다.
잠언 서두에서 이것을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했다. דוד־ןב(벤 다위드)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이라 했다. 여기서 다윗의 아들이라는 말은 영원한 왕통을 이어받은 사람이란 뜻이고, 이스라엘 왕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 즉, 구약교회에서 왕이었다는 것으로 그 의미가 달라진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다스린다는 것이 이스라엘 속에 내재해 있다. 그러므로 잠언은 인류의 보편적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같은 특별한 의미에서 말하는 잠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린다는 의미는 다르다. “이스라엘 왕”이라 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교회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왕”은 교회 통치자, 지도자의 잠언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메시야를 상징한다.
유래없는 지혜를 수여받은 솔로몬이다. 솔로몬이 받은 지혜라 할 때, 여러 인간 중 특출한 인간이 아니라, 이스라엘 혹은 교회의 통치자로 세움을 받았을 때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잘 다스릴까 해서 구한 것이 지혜였고(대하 1:7-13), 이때 하나님께서 유래없는 지혜를 주신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잠언이 나온 것이다. 다른 나라의 지혜문을 읽어보면 겉으로는 유사하나 본질은 천양지차이다. 잠언을 통해서 우리를 풀어 놓아주는 듯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혜문의 번역은 앞으로 많은 손을 봐야한다. 잠언에 대한 이해를 쉽게하면서 삶의 지도서로서 이해하는 것은 번역의 책임이 있다.
1절 לשׁמ(마샬) = ①통치하다, 이는 동음이의(同音異意)로 해서, ②비슷하다, 같다, 복사하다. 여기 לשׁמ이 잠언이라는 뜻을 갖게 되는 것은?
영어 Proverbs - 일반적 진리를 유용한 사상으로 효과적이게 표현하는 격언이란 뜻.
독어 Gleichnis - 이것이 더 לשׁמ에 가까운 뜻이라고 본다. 신약에서 비유로 해석하고, 사전적 의미로 본질적인 유사한 두 사건을 나란히 비교하는 것.
이때 לשׁמ이 Gleichnis(글라이슈니스;비유, 격언)와 가깝다면 어원적 의미와 같아진다. 유사 사건을 나란히 두고 비교하는 것. 사실 לשׁמ은 유사성, 동질성, 동등성을 전제로 한다. 쉬운 예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반드시 문자적 의미가 아니다. 여기에 일반적 뜻이 있다. 따라서 격언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본질적 진리를 찾아야 한다.
격언의 형성과정은 어떻게 되나?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여러 일들 속에는 세부적 상황이 다르나, 동일한 원리가 개입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다양한 사건 속에 함축된 원리를 뽑아내어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원칙을 포함한 대표적 실례를 들어 원칙을 설명한다. 그래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공동으로 나타나는 원리를 깨달아서 직설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 원리를 잘 나타내는 실례를 들어 말하는 것이 격언의 성격이다.
우리가 잠언을 이해할 때 우리에게 해석학적 원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잠언의 사례를 통해 표현하는 근본 원리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음녀의 집에 가까이 말라”고 했을 때 “음녀”의 상징되는 근본 원리가 있다. 경우에 따라 이런 문학 쟝르가 훨씬 효과적으로 정곡을 찌를 수 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가장 효과있게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원리를 함축적으로 말씀하셨다. 그 예로 우리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볼 수 있다.
이 잠언은 이스라엘의 왕인 솔로몬이 놀라운 지혜를 얻게 된 것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기 위한 지혜였다. 형식 자체가 깊고 심오한 진리를 어려운 말로 직설적 표현이 아닌 우리 일상 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을 실례로 하여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잠언을 대할 때 어떤 자세로 대할 것인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2절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이후 부정사가 나온다. 솔로몬의 말하려는 기능을 나타낸다. 첫째는 알기 위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즉, 지식이다. 지식의 내용이 지혜로 되어 있다. רסומ(무사르;교훈하다;훈계) = המכח(하크마;지혜) 1장은 잠언의 서언이고, 2절, 3절의 말은 역사서에 쓰일 경우 내용을 짐작할 수 있으나 잠언에 오면 רסומו המכח(하크마 우무사르;지혜를 교훈한다) 등이 유사 단어인데 반복하므로 어렵다. 각 단어가 유사한 것으로 반복은 내용 강조이다.
תעד(다아트) → 지식......2절의 각 단어들의 유사성은 어디에 있는가? 지혜문의 내용에서 2절의 단어 뜻의 기준이 필요하다. 각 단어의 어원 추적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 방법은 아니다. 말의 의미는 context에서 이해해야 한다. 어원 중심의 추적은 context에서 벗어나갈 수 있다.
같은 말이 한 문장에 나타날 경우 그 의미 파악에서 어원 추적은 위험성이 있고 이것은 단지 context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사전을 찾아 그 단어가 함축한 의미의 사용 경우를 찾으면 된다. 그러나 쉽지 않다. 우리는 성경 자체 본문에 들어가서 하나 하나를 이해해야 하나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2절의 말은 현대 인간 정신의 분류를 구분하는 것과 다르다. 지식의 내용은 רסומ המכח이라고 말한다.
המכח → 지혜. 우리가 범할 실수 중 하나가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에서 습득된 개념들과 정신 기능이 성경 이해에 혼란을 주기도 한다. 잠언을 읽을 때 조심할 것은 이성과 신앙의 분류 도식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이성, 신앙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러면 이성은 무엇이고, 신앙은 무엇인가?
이성과 신앙이라 할 때 각 사람마다 틀릴 것이다. 이성과 신앙이라 할 때 인간 정신의 상이한 두 기능으로 생각한다. 성경 자체도 인간 정신 기능의 다양성을 쓴다. 같은 내용을 똑 같이 표현한 것이 아니라 각 단어는 인간 정신면을 쓴 것이다. 우리가 잠언에 들어갈 때 인간 정신의 구분은 큰 역할을 안한다. 잠언을 이성과 신앙의 구분 도식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잠언은 인간의 정신 활동의 전반적인 것에 대하여 언급한다. 동일 기능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를 המכח(지혜)라 하고, 또 하나를 어리석은 것(המרע;아르마)으로 말한다. 상이한 정신 기능의 구별이 아니고, 정신 기능이 어떻게 나타나느냐?이다. 하나는 지혜로운 정신 기능, 또 하나는 어리석은 정신 기능으로 나타난다. המכח를 지혜라 한다. 이때는 특수 정신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특수기능을 전제하고 말한다. 그래서 잠언의 목적은 알게하는 것인데, 아는 것은 המכח, 그리고 רסומו המכח이다. 여기서 רסומו는 지시하다, 교훈하다, 올바로 인도하다, 꾸짖어 교정하다의 뜻이다.
잠언의 목적은 알게하는 것인데, 지혜와 훈계(רסומו המכח תעדל;라다아트 하크마 우무사르)를 알게 하는 것이다. 지혜를 알고 훈계를 안다. 히브리 어법 중에 hendyadis(二思一意; 두 말이 합쳐 한 뜻으로 나타나는 것)가 있다. 그 예로 תמאו דסח(하사드 웨에메트;친절,긍휼과 진리)가 있는데 이 둘의 요소로 하나의 뜻을 나타낸다. 즉, “인자의 성실”
רסומו המכח에서 המכח 속에 רסומ가 포함된다. 지식, 대상에 대한 המכח가 아니고 רסומ를 포함하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바른 길 제시하는 성격을 가진 지혜이다. 지혜가 바른 것을 제시하는 רסומ적 요소를 갖는다면 삶과 밀접히 연관되는 실천적 지혜이다. 모든 이념의 이론적 지식은 삶에 영향을 미치기에 지식이 관념으로만 존재하기에는 불가능하다.
지식은 삶에 영향을 초래한다. 어느 대상에 대한 지식은 삶의 태도를 지시한다. 나무를 보고 목수와 생물학자의 관점은 다르다. 관념이요, 추상적인 수학도 수학자는 수학으로 세상을 본다. 대표적인 것이 물리학이다. 물리학이 보는 세상과 시인이 보는 세상은 다르다.
המכח가 רסומ의 요소를 포함한 것은, 무엇이 옳은가? 바른가?의 기준이다. 3절의 “의”, “공의” 이것은 지혜와 관련된다. 잠언은 가장 일상적 삶과 연결되어 있어서, 잠언이 정리 안되면 가장 일상적 삶의 기준을 놓치게 된다. 일상 삶에 대해 철학이 제시하고 성경은 침묵한다고 여겼으나 성경은 더 정확히 말한다.
복습
지혜문의 문체 특성이 이스라엘에 국한 된 것이 아니고 고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것이었다는 견해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정리하였는가? 일부 학자들은 이같은 견해를 중시해서 유사한 문체를 비교 연구하여 성경의 잠언을 보편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것이 학계에서는 정설화 되어있다. 왕의 통치를 보좌하는 지혜자, 모사들의 공통점 등, 우리가 이런 설명을 받아들이게 될 때, 이들 설명의 전제는(타 민족 문화권의 공통점)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보편적 현상이니까 잠언의 독특한 규범적 성격을 취급할 이유를 부인하고, 둘째는 보편적 현상에 전제되는 것은 인간의 경험에서 생각해 내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번째 생각이 더 성경 연구에 치명적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이같은 계시를 모든 인류에게 주셨다는 논리를 가능케 한다. 계시의 보편성보다 인간 경험 위주에서 나온 것으로 계시의 성격 자체를 부인한다.
혹 어떤 사람은 이 두 가지를 혼합해서 말하기도 한다. 즉, 인간의 경험 중에서 하나님이 가르친다는 것이다. 우리가 혼합주의를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 경험 중에 깨달았다는 논리가 되는데, 이 논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어떠해야 할까? 우리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누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계시 중에서 자신을 참되이 나타내 보이신다. 그리고 이 둘을 나누는 이유는, 일반계시는 그것에 대한 접근이 보편적이어서 모든 사람에 제시된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이 보이시는 가시적, 물리적, 역사 속에서 보편적으로 제시되어 계시 대상, 접근도 보편적이어서 누구에게나 개방되었다. 특별계시는 특정한 시대, 특정한 채널을 통해 주어진 계시라는 의미이다. 어느 때 사람, 문화에게 주어진 보편계시의 일부로 본다는 것은 잠언을 특별계시의 일부로 보는 견해가 될 수 없다.
우리가 특별계시로써 성경에 포함될 자격이 위와 같은 견해로 보면 없어진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이같은 차원으로 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하나님이 충실히 자신을 나타내시나 인간이 본래 의도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에게 와닿는 순간 이성에 의해 변질되어 진리가 거짓 것으로 변한다. 일반계시가 중생 못한 자에게 받아들여질 때 왜곡된다. 특별계시는 특별한 채널인 영감을 통해서 깨달아진다. 일반계시 차원에서 깨달을 수 없는 것을 특별한 채널 통해 깨달은 것이 영감이다. 바로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알게되는 것이다. 보편성이라는 것이라 할 때, 잠언을 인류의 보편적 겸험의 범주에 넣는데 이것은 위험하다.
잠언은 특별계시의 범주에 속한다. 특별계시는 특수 시대, 특수 상황을 통해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면 잠언에서 그것이 특별계시라는 그 근거는 무엇인가?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이었고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사실 이스라엘의 독특한 지위를 모르고 일반 국가로 이해할 때 특수한 의미를 모르게 된다. 이스라엘의 독특한 의미를 알 때 ‘이스라엘의 왕’은 보통 의미가 아니다. 민족 중에 있는 국가 지도자로서 왕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 교회의 지도자이다. 흔히 목회자를 교회의 지도자라 할 때의 의미와도 다르다. 이스라엘 왕은 메시야의 예표로서 구약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예표적 직분인 것이다. 이것은 사무엘하 7장의 약속과 관련된다.
성경은 왜곡된 일반계시를 수용하지 말고 짓밟으라고 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모든 제단을 부수어야 했다.
잠언이 피상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성경 내에 위치한 계시 범주임을 분명히 한다.
1:1이 잠언의 성격을 분명히 밝힌다. 특히 솔로몬은 유래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이어받은 자이다. 지혜를 구할 때 자기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을 바르게 다스리기 위해서 지혜를 구한 것이고, 하나님은 유래없는 지혜를 주셨다. 그리고 이것을 사람의 지혜라 할 때 그것은 특별한 성격을 갖는다.
לשׁמ(마샬)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근본 뜻은 ‘유사하다, 같다’ 이것이 잠언의 뜻으로 사용될 때 영어에서는 proverbs라고 한다. 이 말은 라틴어 proverbia에서 나왔는데 이것의 의미는 본질과 뜻, 두 가지를 비교하는 것이다. 문자적 의미의 사건 하나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포함된 근본 원리가 동일하게 적용될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잠언은 상징성(대표성)을 띠게 된다. 결국 이야기는 그 자체가 아니고 원리, 원칙을 말하려는 것이기에 그 사건은 광범위할 수 있다. 원리를 말하는데 구체적 실례를 들어 핵심을 말하는 것이므로 상징성을 잠언은 띠게된다. 이것이 לשׁמ의 성격이다.
이 뜻으로 잠언으로 발전된 이유의 타당성을 이해했을 것이다. 잠언은 같은 사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의 핵심을 말하므로, 이것이 잠언에는 같다는 뜻이 있는 이유이다. 어떤 본질적인 뜻을 집약해서 표현한 만큼, 원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한 만큼, 단순한 문체이다. 잠언은 서술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표현으로 무엇을 가리킨다. 즉, 상징적 서술이다. 여기에서 ‘음녀’, ‘외인’은 문자 그대로 의미가 아니고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같은 사례를 상징하는 무엇이다.
지난번에 말한 것은 רסומ이다. המכח는 인간의 정신 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잠언은 특수한 인간 기능에 관심있는 것이 아니고, 동일한 기능이 상반된 질로 나타나는데 긍정적으로는 מהכח, 부정적으로는 המרע로 나타난다.
영적 차원, 일상적 삶의 차원에서 지혜와 어리석은 길에 대해 잠언은 말하고 이것이 잠언의 주된 관심이다. 사람의 지혜로운 삶에 대해 말한다. 우리 모든 삶이 המכח를 알게 한다. 지혜로운 삶을 파악하고, 인식하고, 배우게 하는 목적이 לשׁמ이다. 인간의 모든 영육활동을 두 개의 상반된 질 속에서 긍정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지혜를 알게 하는 것이 לשׁמ의 목적이다. 그리고 רסומ는 hendyadis(이사일의;두 가지 다른 뜻의 말이 합쳐져서 한 가지 뜻을 가짐)로서 여기 지혜는 경계, 교정(어그러진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לשׁמ을 통해 지혜를 배우게 하는데 지혜 속에 רסומ이 있다. 여기 뉘앙스는 실천적이고, 이것은 또한 바른 표준을 전제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המכח는 약삭빠른 지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2절 ןיב(빈)의 어원적 뜻은 between으로 구별한다, 분별한다 → unterscheider(운터샤이더)로 사이, 거리(einscher;아인슈어)를 뜻한다. 또 쪼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 하나 구별한다, 속으로 꿰뚫어본다는 의미도 있다. 우리로 하여금 바른 삶을 살게하는 지혜를 파악하고, 분별하여 깊이 이해하게 하는 목적이 לשׁמ이다.
목적은 덮어두고 line의 동사의 목적어가 관심을 끈다.
לשׁמ??? 2절 תעדל 알게 하고(라다아트)
? 3절 תחקל ?? 취하게 하고 : 지혜를 통해서(라콰아트)
?? 4절 תתל ?? 주기 위해서 : 여기의 주어는 가르친다의 의미이다.(라테트)
3절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קדצ(체뎈)의 어원 자체가 복잡하다. 즉, 의미가 단순하지 않다. “자로 재었을 때 바르게 하는 것”, “옳은 것”, “참되다”는 뜻도 있다. 어원 자체가 복잡하다. 용례를 통해 그 의미가 부각되지 않는다. “옳고 바른 것”이 모호하면서도 곁길로 어긋날 가능성이 있으나 그 뜻을 제한적으로 두지 않는다고 본다.
לכשׂה רסומ(무사르 하쎄켈;지혜롭게 하다)을 통상적으로 직역하면 어떻게 될까? 여기 לכשׂה(하쎄켈)은 깊이 생각하다, 숙고하다, 통찰력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통상적으로 이해하면 이것은 무엇인가를 꿰뚫어보게 하는 רסומ이다. 즉, רסומ는 옳바른 것을 전제로 한다. 3절 후반부에서 קדצ(체뎈)을 말한다. 옳고 바른 것 취하여 배우게 하는 것이 לשׁמ의 목적이다. 이렇게 할 때 지혜의 성격이 명료해진다. 자기가 원하는 것 얻는 교활한 지혜가 아니라, 옳고 바른 것과 뗄 수 없는 본질적 지혜이다. 잠언을 처세술로 보려는 사람은 처음을 잘 보아야 한다. 솔로몬은 잠언을 통해 옳고 바른 것을 분명히 가르치려는 것이다.
4절 אתפ(페타) → 오도하다, 길을 잘못 인도하다, 유혹되다 → underfahrer 사실 경험없는 사람이 유혹 잘된다. 경험없는 미숙한 사람을 רענ אתפ(페타 나아르)라고 한다. 젊은 사람이 미숙하다는 것은 노인이 지혜롭다는 반어적인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말의 함축적 의미는 무엇인가? 지혜를 획득하는 것과 관련하여 나이 많은 자가 지혜롭다 할 때 그 속의 원리는 무엇인가? 지혜를 획득하는 과정은 경험, 체험과 그 과정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다. 여기는 광범위하게 학습, 배우는 것이 포함된다. 우리가 지혜 얻는 것에 대한 균형을 얻기 위해서이다. 지혜는 오랜 경험, 학습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지혜 얻는 것은 그런 과정을 배제하지 않는다. 지혜 획득의 배움은 그 과정이 배제되지 않는다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말한다.
성경은 제한적이 아닌 우리 삶의 모든 영역(수학, 과학 등)을 포괄적으로 근본 차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 삶의 영역에서 사는 자세를 말한다. 잠언은 실제적 삶에 직접적 관계를 갖고 있다.
지난 번에 서론의 서론을 했다. 특히 6절과 관련하여 저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암시한다고 말했다. 다윗이 예표적 메시야라고 했고,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잠언이라고 했다. 혹자는 지혜와 지식의 뜻을 구별하여 사용하나 잠언에서는 상호 긴밀한 요소로 본다. 여기서 המכח는 우리가 생각하는 지혜, 지식이 아닌 그 속에는 רסומ적 요소인 훈계, 권면의 요소가 들어 있다. 권계, 권면은 바른 것을 전제로 한다. 명철의 말들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2절 하반절). 이 말은 이상하다. 인식의 대상이 동일하다. 명철의 말들(ירמא ןיבהל;레하빈 아므레)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2절 하반절의 말들의 함축적 의미는 무엇인가? 깨달음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잠언이다. 사물을 깊이 파고 들어 그 본질을 파악한 내용, 결과를 전달하는 말, 말은 communication이 전제되는 것이다.
ירמא(아므레;말하다) → 이 말은 지혜 획득에 있어서 말을 매개로 전달 과정이 개입되는 것이다. 지혜로 인도하는 권고를 잠언에서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지혜라는 말과 병행되는 것은 옳고 바른 규범들이다. 지혜(רסומ)에서 암시되나, 여기서 명확히 나타난다. 참된 지혜의 속성은 옳고 바른 것이다.
그 다음에 미숙한 젊은이, 분간 못해서 그릇 행동하기 쉬운 젊은이(어리석은 자)에게 통속적인 지혜를 제공하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다.
1-4절까지 지혜의 목적을 말한다. 잠언의 목적을 말하면서 지혜의 본질을 말한다. 지혜의 성격이 일반적 지혜의 성격과는 다르다. 잠언에서는 지혜를 다양한 시각에서 제시한다.
5-6절은 문법적으로 다르다. 위는 명사문장으로 말하다가 5절에 오면 달라진다.
הנקי תולבחת ןובנו חקל ףסויו םכח עמשׁי
(이슈마 하캄 웨요셒 레콰 웨나본 타헤블로트 이크네)
“지혜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설교자는 본문의 깊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히브리어에서 기억할 것은 inpf.(infinitive;부정사)를 modal vb.(동사의 모델 혹은 전형)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so that으로 마지막 낱말을 보아야 한다. “지혜로운 자는 들어 교훈을 더하라 그리하여(so that) 명철한 자가 지침을 얻도록 하라” 즉, “지혜로운 자는 삶의 지침을 얻기 위하여 들어 교훈을 더하라” 특히 여기서 바로 이 지혜를 획득하라는 것은 4절에 근거하여 당연하다.
그러면 4절에서 지난 번에 말한 것은 무엇인가? 경험없는 자(미숙한 자)로 하여금 지혜롭게 한다. 경험없는 자를 젊은이로 해석하는 것은 반대로 나이 많은 자는 지혜롭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지혜 획득은 오래 배운 삶을 통해 습득되는 것이다. 이런 전제 하에서 “지혜를 들어 획득하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배우라는 것이다. 즉, 배워 습득하라. 배우는 것은 청종의 의미요, 특별한 요소가 있다. 특히 지혜를 삶의 지침으로 말하는 것은 지혜가 옳고 바른 규범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들어 배워 삶의 지침을 얻으라 했는데, 권고의 대상은 םכח(지혜자)이다. 지혜를 배우라 하면 어리석고 모자란 사람이 그 대상일텐데, 오히려 대상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7절을 보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지혜로운 자만이 지혜를 깨달을 수 있다. 어리석은 자는 더더욱 어리석어 망한다. 본문에서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배척한다고 했다. 이 말씀의 보편적 표현이 에수님의 “있는 자는 더 있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이다. 왜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배척하는가? 모순같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지혜가 없기 때문에 배척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6절 “잠언과 비유와 지혜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지혜로운 자는 들어 교훈을 받아 지침을 얻도록 하라. 그 이유는 무엇인가? 거꾸로 말하면 지혜롭지 못한 자는 잠언의 의미를 모른다는 뜻이다.
הדיח הצילמ לשׁמ(여기서 밑줄 친 단어는 시편 1편에서는 ‘오만한 자’로 해석했다)
(마샬 멜리차 히다) ץיל(리츠)는 오만한 자, ץילמ(멜리츠)는 중보자, 통역이란 뜻.
뿐만 아니라 ץיל는 ‘문이 갈라진 틈으로 보다'(문틈으로 보다 = durch turspalt schanon)라는 뜻이 있다. הדיח → דוח(후드) 걸어 잠그다, 걸어 잠그니 속의 것이 안보인다. 즉, 수수께끼,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닫아 걸고 자기를 안나타내니 알 수 없어 수수께끼이다. לשׁמ의 의미를 지난 번에는 상징성이라고 말했다. 여러 구체적 사례에 적용되는 보편적 원칙을 아주 구체적 예로 표현하여 나타내는 것이라 했다. לשׁמ은 상징적이다. 그러나 그 배후의 깊은 뜻을 알아야 לשׁמ을 알 수 있다.
위의 문장이 לשׁמ의 의미를 알게 한다. לשׁמ의 목적은 우리로 지혜를 얻게하는 것이다. 위 표현이 우리로 지혜를 얻게 하는데까지 이르게 한다. 우선 לשׁמ에 대하여 지혜로운 자를 들어 습득하라. 그래서 לשׁמ을 배우라 한다. לשׁמ을 가리켜 문틈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엇이라 했다. 즉, 잠언은 드러나지 않는 무엇이다. 잠언은 비유, 상징적 표시이다. 감추어져 있다. 희미하다는 의미는 불투명성이다. opaqueness, 이 불투명성이 לשׁמ, לשׁמ은 그 내용이 지혜를 근거로 하니 표현 형식만 아니고 지혜 자체까지 불투명성이 해당되는가? 만일 이것이 지혜 자체의 불투명성과 관련되어 있다면, 지혜는 누구나 접근 가능한 것은 아니다. 순전히 인간의 지적 능력만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인간의 능력 앞에 불투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지혜가 인간의 지적 능력에 불투명한 것이라면 지혜 습득은 계시성에 근거해야 한다. 인간의 지적 능력 외의 것을 필요로 한다.
2:6을 보면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말하면 고린도전서 2장을 기억할 것이다. “세상 지혜를 미련하게 하사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하게 하셨다” 우리는 흔히 고린도전서 2장 말씀을 생각할 때, 인간의 지적 능력이 무능력한 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영역에만 해당되고 타 영역은 파악 인식이 가능하다고 대부분 생각한다. Luther 자신도 믿음 영역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으나 이성 영역은 인간 스스로 인식 가능하다고 했다.
문제는 참된 의미의 지혜는 영역 구분이 있는가? 이다. 방금 이런 말들이 시편, 잠언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중요한 말이다. 기독교인의 지적 활동에서 황금률이라는 것일 수 있는 7절의 말 이해에 배경이 된다.
תישׁאר?(레쉬트;처음, 시작의) 참된 의미의 지식은 하나님 경외를 전제하고서야 가능하다. 참된 의미로써 지혜는 하나님 경외를 근거로 한다. 하나님 경외없이 하나님의 지혜에로의 접근은 불가능하다. 인간 스스로 지혜에의 접근 가능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지혜주시는 계시성, 은혜성과 연관된다. 결국 לשׁמ(지혜 가르치는 잠언)은 지혜자가 들어 깨달을 수 있고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깨달을 수 없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어리석다고 배척하여 망하는 길로 가고 지혜자만 지혜로울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는 자는 계속 지혜로우나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배척하다가 망하고 만다. 크게 보아서 대개 2가지의 상반된 이야기 했다. 젊은이 → 미숙하고, 지혜없는 자. 늙은이 → 경험있고, 지혜자. 이것은 지혜 습득과정을 말하는데 지혜를 내가 연구하고 습득하는 것 같은데,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지혜를 깨달아 아는 자가 더 지혜롭게 된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배척하고 망한다. 이 말은 상치되는 것 같다. 그러나 상치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 잠언을 읽어가면서 깨닫도록 하자.
7절의 한 마디 말에 대해 생각해 보자.
תעד תישׁאר הוהי תארי(이르아트 아도나이 레쉬트 다아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תישׁאר)” 여기서 תישׁאר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①시작, 처음(beginning), ②주된, 머리된(지위; chief) ③가치(cheice;차이세) → 고르고 고른 것, 최상의 것. 이 해석을 따르면 ③은 하나님 경외는 최상의 것이다. ②는 하나님 경외는 주된(chief) 지식이다. ①은 하나님 경외는 지식의 시작이다. ⇔ 이 3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과연 ①, ②, ③ 중 선택 가능한 것은 어디인가?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 경외라는 것이 어떤 관계를 갖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견해를 말하면 “지식에서 제일 원리”라는 표현이다. 이 의미는 지혜, 지식의 앞에서 언급한 속성과 관련시키면, 지식은 옳고 바른 규범과 밀착되어 있다. 여기서 떠나면 참된 지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이 의미에서 하나님이 제일 원리된 지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바른 척도이다. 하나님께서 옳고, 바르고, 참된 것의 근원이시다.
이것은 어떤 사실에 근거하는가? 하나님이 세계 창조주와 통치자라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세계 창조주와 통치자로 세운 질서(영계, 사회 등)에서 세운 지혜가 바른 척도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이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인격으로 세계 통치자인 하나님과 관계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창조주와 통치자로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 경외이다. 세계 내 존재인 인간은 하나님이 세운 질서, 그 질서의 인격적 주체인 하나님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지혜의 제일 원리이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 경외가 지식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신앙의 출발이 인식의 출발이라는 것과, 그 다음에 이성의 작용은 아니며,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이 하나님 경외하는 활동 자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 경외는 지혜, 지식의 출발, 전제요, 근본이다. 하나님 경외하는 행동 안에서 전체 지식 추구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인간 삶의 어떤 부분도, 인간 지적 활동의 어떤 부분도 하나님 경외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Luther보다 Calvin이 옳다. 전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을 근래 잘못 적용하여 하나님 신앙인의 영역까지 말하는데, 잠언에서는 특별한 영역인 신자의 영역이다. 이것이 무조건 확대되어 일반 세상에도 동일한 원칙 적용은 힘들다. 솔로몬이 교회 지도자로서 한 말이기에 이미 신자의 영역에 제한된 것이다.
첫째가 하나님 경외가 지식의 출발점이다.
하나님 경외와 떨어질 수 없는 지혜와 지식을 어리석은 자는 멸시한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잠언에서 지혜는 어리석은 것과 대조해서 항상 말한다. 지혜를 신앙과 대비시킨 이성으로 말해서는 안된다. 이성이 모든 인간의 활동기관이라면 이성은 인간존재의 근본으로서,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성은 작용한다. 이성 기능에서 두 가지로 기능을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지혜롭게 또 하나는 어리석게 기능할 수 있다. 신앙을 토대로, 하나님 경외를 토대로 하는 이성 활동은 המכח이다. 이것은 바른 삶을 가능케 한다. 하나님 경외를 목적으로 하는 이성 활동을 뜻한다.
하나님 경외없는, 하나님을 거스려 반역하는, 독자적 이성 활동을 가리켜 어리석음이라 한다. 그래서 계몽주의 시대에 하나님을 제치고 이성으로 하나님을 판단한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께 독립하여 이성 사역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성은 가장 많이 활동한다. 계몽주의 시대 지식을 포용하고, 논증하나 결코 바른 것에 도달 못하고 왜곡을 초래했다. 인간 존재의 기간 동안 이성은 멈추지 않는다. 인간 이성이 모든 것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은 한계가 있다. 원시 상태도, 인간 이성은 한계에 있었다. 타락 후는 더하다. 전도서 2장에서 이것을 말한다. 이성의 판단으로 세계는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말한다. 지식을 더해 보았자 고통만 더하다고 했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인간의 이성 한계 밖의 것에 대해 신앙을 빙자한 인식론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인간 이성이 오성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하는데 이는 오해이다.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것을 신앙한다고 한다. 여기서 이성과 신앙의 기능 영역이 갈라지고, 그 대상도 구분된다. 인간 이성의 초월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통해 파악하고,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 받아 누리는 것이다. 그 자체가 초월적 대상을 파악할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경외 떠난 이성으로만 세계 내의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자세이다. 신앙과 더불어 하나님 경외를 토대로 하여 출발점으로 할 때 인식이 가능하다. 자연계의 인식은 하나님의 피조물임과, 그 안에서 비 가시적 신성 파악까지 이르러야 한다. 신앙 떠난 자연과학은 우상으로 떠나게 되어 현상 자체에 만족한다. 모든 대상에 이성은 신앙과 더불어 지혜의 바른 인식에 도달하며, 여기에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이 함께 하여 능력을 준다. 이성으로 바른 인식하게 한다. 성령의 성화 역사 말할 때 단순한 인간 활동 아닌 지적 부분까지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 아는데 있어서, 세계 아는데 성령이 바르게 인도하신다. 신자에게 있어서 영역이 구분된 이분법 아닌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잠언 1장을 보면 1-9절, 10-19절, 20-33절로 나눌 수 있다.
1-9절은 서론으로서 솔로몬(이스라엘의 왕)이 לשׁמ이라는 표현으로 지혜를 알기 위해 적은 글로 말했다. 서론에서 잠언의 성격을 암시하는 것을 보았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לשׁמ과 평행된 רסומ, המכח가 있다. 지혜는 수수께끼와 같이 숨겨져 있고, 문틈으로 엿보듯이 알기 쉽지 않다. 알려주지 않으면 불투명하다. 지혜에 도달하는 어려움과 더불어 לשׁמ의 상징성 때문에 도달하기 어려운 것인가? 지혜 자체가 도달하기 어려운 것인가? לשׁמ의 사용 자체가 피상적 배후에 있는 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것이기에 이해하기가 어렵고, 형식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지혜 자체의 내용도 불투명하다. לשׁמ을 사용하는 의도는 깊고 심오한 지혜의 상징적 표현이어서 직접적 표현보다 어렵다. לשׁמ을 사용하는 의도는 깊고 심오한 지혜를(그 자체가 접근이 어렵다) 함축한 것을 예로 들어 표현한 것이다. לשׁמ에는 우리가 접근하기 어려운 것을 쉽게 하려는 긍정적 의도도 있다. 그것은 지혜의 불투명성을 제거하는데 있다.
예수님이 παβαβολη(파라볼레;비유) ↔ πρρησια(플레시아;명백한 표현) 사용, 예수님께서 παβαβολη(비유)를 쓰신 이유는 어떤 이에게는 명백히 나타내고 어떤 이에게는 숨기기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나타낸다는 παβαβολη = לשׁמ은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뻐하는 자에게는 나타내시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숨기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에 접근케 하여 그 뜻을 깨닫고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은 지혜의 불투명성의 암시를 준다.
7절에서는 잠언 전체를 지배하는 제일 큰 원칙을 설명하고 있다. 지혜 얻는 원칙(제일 원칙)은 무엇인가? 이것은 바로 잠언의 원리이다. תעד תישׁאר(레오쉬트 다아트;①시간적 의미에서 처음, 시작, ②지위, 중요성, 지혜의 우선성과 관련하여 주된, 가장 좋은, 값진) 여기서는 2가지의 의미가 결합되어 있다. 지식의 출발점, 시작, 전제가 된다. 지식의 첫 출발점, 단계가 되는 것은 참된 지식은 하나님 경외를 전제로 한다. 하나님 경외에서 출발, 토대로 한다. 참된 지식은 하나님 경외를 바탕으로 가능하다. 시간적 의미에서 처음이 아니고, 내용상 중요한 위치라고 하면 참된 지식에 있어 가장 중요, governing principle, 참된 지식 도달에 모든 것 지배하는 원리이다. 참된 지식은 하나님 경외 전제에서 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הוהי תארי[이르아트 아도나이;두려워 하다, 경외하다; הארי의 특수형태의 부정사형, הָ(아;글자의 뒤에 붙어 부정사를 만들기도 한다)가 붙어서 부정사가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뿐만 아니라 ארי(야레; 두려워하다)의 Qal inf.(기본적 부정사)로 명사로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는 경건이라면 의롭게 사는 것으로 이해한다. 경건은 내적 자세이다. 피조물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세가 경건이다. הוהי תארי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하나님 앞에 마땅히 취할 자세이다. 또한 이 말은 신약에서 역시 하나님 앞에 취할 믿음의 자세와 다를 바 없다.
근본 뜻은 하나님 앞에 취할 내적 자세이다. 하나님 경외하는 믿음의 자세이다. 행동, 삶은 믿음의 삶에서 나온 결과를 뜻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의 첫 출발이요, 이같은 자세에서 지혜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다. “하나님 경외”를 믿음으로 바꾸어도 된다. 믿음을 신앙과 이성으로 나눈 이분법의 의미가 아니다. 경건의 자세,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지혜 접근의 첫 출발이다. 하나님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잠언 마지막이 “너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 곧 무슨 일하든지간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7절에 보면 묘한 대조가 나온다. 참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은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다. 여기 רסומ המכח 이 말은 이사일의(다른 뜻을 가진 두 단어가 합쳐져서 한 단어의 뜻으로 쓰임)로써 훈계하는 지혜를 말한다. 훈계라할 때 권위적 요소가 들어 있다. “하나님 경외가 지식의 시작이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경멸한다” 말의 논리가 모순되는 듯하다. 이 말은 가장 압축된 말이다. 모순되는 듯한 말을 통해 많은 것을 말한다.
“참된 지식은 하나님 경외인데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멸시한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멸시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기대하기는 어리석은 자에게 지혜의 말을 해서 깨닫게 하는 것이 보통인데 실제로는 지혜로운 자에게 지혜를 주어서 깨닫게 한다. 이것과 관련된 것은 있는 자는 더할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경멸하고 들어가므로 지혜를 알 수 없다. 지혜에의 도달은 은혜로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에의 접근이 거부된 사람, 지혜를 멸시한 사람이다. 어리석은 자에게 있어서 지혜의 결여는 하나님 거스리는 불신앙의 요소가 필연적으로 포함된다. 하나님 경외하고 출발하는데 하나님의 지혜를 어리석은 자는 경멸한다. 그러므로 7절은 전체 속에서 무한한 확대 가능성을 갖는다. 지혜에 도달하는 것이 하나님 경외이다. 그 반대는 하나님 경외 없으면 지혜 접근이 불가능하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경멸한다. 이유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를 깨닫는 것이다. 요한일서 마지막 장에서 죽음에 이르는 죄에 대하여는 기도하지 말라고 한다. Calvin은 하나님께서 어떤 이에게 등돌린 것이 분명할 때는 연연해하지 말라고 했다. 내 의지로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겠다는 마음은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 간구할 수는 있다.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이 있다.
8절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내 아들이여 네 부모의 가르침과 권고를 참고하고 떨쳐버리지 말라”고 되어 있다. 지혜를 가르치는 자로 부모가 언급되고 있다. 그러면 지혜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교육 즉, 신앙교육의 전부가 하나님 경외 교육이다. 이같은 교육은 부모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을 말한 사람이 바로 솔로몬이다. 솔로몬이 “내 아들이여...”라고 한다.
ינב(베니) = my son, 솔로몬이 말하는 것은 가정의 아들 대상이 아닌 지혜 가르치는 자는(교육자) 부모이고, 피교육자는 아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부모 자식간이 가르치고 배우는 하나의 Model이다. 이것은 창조 질서에 의해 자연스럽게 마련된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침 받는 대상이 ינב = my son이라고 한다면, 여기 부모와 아들간은 혈연 관계만 아니고 모든 교육자와 피교육자에 해당하는 전형이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교육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가정교육의 중요성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곳이(창조질서 속에서) 가정이다. 참으로 중요한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창조질서 속에서 마련하신 교육기관이 가정이다. 우리는 교육을 교육기관에 맡기고 가정에서의 교육을 등한히 한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 교육의 핵심은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다.
가정교육, 교회에서의 교육은 참된 의미의 교육이다. 학교교육은 사회인으로서 알아야 할 지식 습득 이외에 의미부여 할 수 없다. 타락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땀흘려야 겨우 생계유지 된다. 우리는 이런 세상 속에 산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의 본질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참 교육이다.
솔로몬이 말하는 것을 통해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교육자와 피교육자간이고, 창조질서 속에서 가정은 하나님 경외의 교육을 위한 틀이다. “아들아”(피교육자)라고 부르는 것은 교육자는 아비의 심정으로, 사랑과 간절함으로 교육해야 한다. 교육자의 자세를 부모의 비유로 말하고, 피교육자는 교육자를 아버지로 대해야 한다. 부모라는 것이 혈연관계에서 성립된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서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교육자를 아버지라 한 것은 아버지 속에 권위 요소가 들어있다는 말이다.
עמשׁ(쉐마) = 들으라 → 순종의 요구가 함축되어 있다. 바울 사도가 여자에게 가르치는 것을 금하는 이유와 근거를 알 수 있고, 그 근본 이유는 창조질서(남녀간의)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특수 의미 아닌 지식 전달, 정보 전달의 의미는 가능하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권위 요소가 포함됨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특히 훈계와 가르침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가르침’(תרות(토라트)에는 규범적 요소가 들어간다)과 ‘들으라’는 말은 교육의 내용이 지식 전달과 동시에 그 지식의 내용과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른 교리, 규범을 말한다. 피교육자로서 아버지를 대하는 아들같이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 שׁטת־לא(알 티보쉬) → ‘떠나지 말라’라고 하는 것은 가르침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피교육자의 취할 자세이다. 왜 아비의 가르침을 들어 순종하고 떠나지 않는 것인가?
9절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여기를 보면 앞의 말과 맞지 않는 듯하다.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요, 훈계와 가르침을 떠나지 말라 했는데 갑자기 의미가 생소해진다. 앞의 말과 비교하여 달리 표현한다. 머리와 목은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이다. 사람의 얼굴은 시선이 집중되고 말을 많이 하는 곳이다. 그리고 화관과 목걸이는 장식이다.
ןח(헨) = grace; ①favor, ②우아함, 아름다움
은혜가 은혜의 의미를 갖는 동시에 우아함, 아름다움의 뜻을 갖게 되는 것은? 어원의 뜻에서 추적한다. 그것은 무엇을 향해 마음이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애정을 느끼고, 동정심 갖는 뜻이 있다. 이것이 사역형의 뜻을 가지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이는 아람어로 어원을 추적할 때의 의미). 이것은 아름다움을 말한다. 우리에게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ןח의 어원적 뜻이 사랑스러운 것, 부드러운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들은 네 머리의 아름다운 화관이요, 네 목의 목걸이다” 여기서 “아름다운”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가장 주(主)가 되는 말이다. 부모가 가르치는 교훈이 너에게 있어서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부모가 가르쳐준 하나님 경외함이 진정한 아름다움인 것이다. 이는 신약 벧전 3:1-2, 3:3-6,7 이하는 남편된 자의 태도, 영생의 공동 상속자로 취할 것이라고 말한다. 3:3,4 바깥 사람을 금사슬로 꾸미지 말고 썩지 않는 것으로 즉, 속 사람을 꾸미라고 한다. 이는 지혜에 관한 모든 말을 배경으로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영적 아름다움이다. 하나님 백성이 꾸밀 것은 내적인 것이다. 영적인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이런 말씀에 비추어 보면 잠언에서 하나님 경외함으로 얻어지는 참된 지식을 말하면서 ‘아름답다’라는 말을 쓰는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의 의미를 말한다. 즉, 미(美)의 의미의 중요성을 말한다.
하나님 경외하는 지혜가 너희를 아름답게 꾸미는 화장품이다. 진정한 미(美)는 하나님 본질이다. 모든 참된 미는 하나님 경외이다. 이것이 우리의 정서를 움직인다. 모든 진실된 신앙의 표현이 아름다움이다. 참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의 표현이 참된 아름다움이다(행위, 글 등). 우리 타락한 정서 움직이는 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성경은 그것을 추(醜)하다고 한다.
이사야 3장에 보면 여인이 꾸민 아름다움의 외적 모습이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것으로 심판 선포 중에 말씀하신다. 내적인 아름다움이 없는 외적 미는 가증스러운 것이다. 믿는 자는 미적 감각에 영향 받는다. 세상이 달리 보인다. 어제까지 무의미한 것이 의미있다. 이것이 변화된 미적 감각이다. 믿는 자는 미의식, 미적 감각이 달라진다. 변화가 일어날 때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신자의 정서를 움직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신앙의 표현이 우리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므로 이 치장은 영적 치장이 되어야 한다. 벧전 3:1 이하에서 여인의 아름다움은 속 사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10-19절은 죄인들이 잘못된 길로 유혹할 때 행할 태도에 대하여 말한다.
20-33절은 지혜가 부르는 소리에 대하여 말한다.
다시 1-9절에서 지혜라는 것이 무엇인가? 가장 큰 원칙, 근본 원리를 제시하는데 이것과 진정한 아름다움과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아름다움의 본성은 중요한 것이다. 타락한 정서가 문제이다. 아름다움이란 독특한 귀한 정서가 있다. 참된 아름다움은 참되게 느낀다.
잠언을 통해 넓고 깊게 성경이 어떻게 우리 삶의 구석 구석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배우게 된다. 신앙 생활이 폭넓고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해 우리 스스로 무지했다. 하나님 백성으로 살라고 한 영역이 폭넓다. 잠언을 통해 이같은 것들이 열린다. 잠언을 통해서 성도의 삶의 영역이 폭넓게 열린다면, 진정한 철학의 토대는 전도서에서 찾을 수 있다.
복습
잠언 1장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①1-9절 : 전체적 서론, ②10-19절 : 어리석음의 유혹, ③20-33절 : 지혜의 부름, 초청
서언에서 취급한 중요 내용은 무엇인가? “솔로몬의 잠언”이라는 말 속에 중요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לשׁמ 속에 문학적 특성을 말하고, 저자를 솔로몬으로 말하고, 솔로몬과 동격으로 취급되는 것이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לשׁמ이 성경만의 문헌 아니고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있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잠언을 외국의 왕에 자문위원을 중심으로 생긴 것을 가지고 추측하여 성경의 잠언도 같다고 한다. 세상 여러 나라에 존재하는 지혜문 중의 하나라고 보는데 그 정도로 취급하면 곤란하다. 이러한 주장에 쐐기를 박는 것이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란 말이다.
이스라엘 자체가 곧 의미있는 말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교회이다.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왕은 메시야로 예표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말은 교회의 통치자라는 뜻인데, 진정한 교회의 통치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므로 이는 그분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은 교회의 지도자에게 준 잠언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유래 없는 지혜를 받았다. 교회의 지도자에게 준 잠언인 만큼 이것이 특별계시의 한 부분으로 기록된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잠언의 목적은 무엇인가?
성경이 생각하는 지혜의 특수 성격에 대해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단순한 지적 이해가 아니다. 일반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가 아니다. 3절에서 처럼 지혜는 의와 공평과 올바른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므로, 지혜는 이같은 성격과 밀접하다.
5-6절과 관련하여 한 말은 무슨 뜻인가?
לשׁמ을 깨닫는 것이 쉽지 않다. הצילמ(멜리차)의 어원은 문틈으로 보는 것과 같다. 얼핏 한 번 보는 것이다. לשׁמ이 이해하기 어렵다. לשׁמ이 논리적으로 제시된 성격 아니고 우리게 친숙한 것으로 가리키려는 암시적 방법이요, 상징적 수사법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여러움을 겪는가? 형식상의 어려움만은 아니다. 에수님께서 비유 말씀하실 때 숨기시려는 의도가 있으나 지혜 자체가 어려워 이해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지혜의 접근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지혜 접근이 어렵다.
5절을 보면 누가 לשׁמ을 깨닫고 청종하게 되는가? 권유대상이 ‘지혜자’이다. 조금 이상하게 들린다. 지혜는 지혜자가 아니면 깨달을 수 없다. 7절에 나오는데 어리석은 자는 지혜자를 어리석게 비추어 경멸한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경멸하고 배척하나, 지혜자는 지혜를 얻어 더욱 지혜를 가지라 했다. 이 비유는 지혜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2장이 암시해 준다.
잠언의 결론으로 볼 수 있는 지혜의 황금률이 7절에 나타난다. תישׁאר(레오쉬트)는 하나님 경외의 첫 출발(우선순위),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지배원리이다. 지혜의 첫 출발이 하나님 경외이다. 진정한 지혜의 출발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경외하는 심적, 지적 자체가 무력하다. 인간 스스로는 얻을 수 없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진정한 지혜에 도달할 수 없음을 7절 한 마디가 말해준다.
8절 עמשׁ(쉐마) = 부모의 법(혹은 교훈)을 들으라, 하나님 경외의 자세가 지혜이다. 이것은 하나님 경외하는 것과 분리된 부모 나름대로의 법도가 아니고 부모가 가르치는 교훈의 내용 자체가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다. 여기서 교육자로 부모 언급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부자간은 상하의 기본 질서이다. 가르침 속에는 권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교육의 대상이 ‘my son' 즉, ‘나의 아들아’이다. 부모는 다양한 교육자의 대표이다. 부모의 심정으로 교육해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피교육자는 아비와 같은 권위를 인정하게 한다.
9절 여기서는 하나님 경외가 지혜의 원리이다. 부모가 피교육자에게 말하면서 그 청종할 이유가 ‘네 머리의 아름다운 화관이요 네 목의 목걸이’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ןח(헨) = 아름다움이 중심 단어이다. 이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하나님 경외하는 지혜가 토대되는 지식과 지혜가 참된 아름다움이다. 그러므로 지혜에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전제 된다.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외부 사람을 꾸미지 말고 숨은 속 사람을 단장하라고 한다. 동시에 지혜를 말하고 그것이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목적, 토대로 하고, 권고의 목적은 아름다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름다움이 신자의 신앙영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여기 ןח이 우리의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 내면 생활에서 큰 작용하는데 아름다움을 무시할 수 없다. 아름다움에 대한 힘이 얼마나 강한가는 타락한 아름다움에 남녀가 빠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쁘기는 하나 아름다움에서 강한 흡인력을 느낀다.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영접하면) 정서의 변화가 나와 미의 개념이 바뀐다. 신약 자체도 아름다움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여성에게 가장 취할 것은 아름다움이요, 남성에게는 힘이다. 남자의 힘과 여성의 아름다움은 그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 하나님이 여성에게 주신 아름다움을 잘못 사용하여 추악하게 미혹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참된 의미에서 아름다움이 우리 신앙 영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을 이해하고 나서 기독교 문화, 예술에 대한 언급이 가능해진다. 역으로 여기서 아름다움은 하나님 경외가 가능하다. 행동에서 있어서 지혜 등이 깊이 연관되어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규정은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규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10-19절까지 어리석음의 초대 혹은 유혹에 대해 알아보자.
하나님 경외로 출발되는 진정한 지혜와 지식 따라 사는 실천요강 1조는 10절의 죄인이 유혹할 때 넘어가지 말라고 한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여기서 문제는 הבת(토베)이다. 여기 어근은 무엇인가? 이 본문에 대해 הבאת(타아바)와 אובת(타부아)로 수정한 것으로 사본상 나타난다. הבאת는 אבא(아바)로 어근을 본 것이다. 이것은 desire, 열망하다로서 죄인이 유혹할 때 함께 원해서 따라가지 말라로 볼 수 있고, אובת는 어근을 אוב(보아)로 보아 죄인이 유혹할 때 가지 말라로 볼 수 있다. 근본 뜻에는 변화가 없으나 אובת로 쓸 때 뜻이 강해진다.
개개학자들은 지혜서 작성 시기를 포로 후기 시대로 본다. 이때 공용어는 아람어였다. 이것을 근거로 잠언을 포로 후시기 작품이라 한다면 우리는 고려할 가치가 없다. 아람어는 포로 후시대만 영향을 준 것 아니다. 시편에도 아람어는 나타난다. 그리고 창세기에서 ‘증거의 무덤’을 말할 때 아람어가 나오므로 언어 사용을 가지고 당시 시대를 규정하는 것은 모순이다. 당시 여러 제국을 이스라엘이 거느리고 있던 시기여서 아람어 사용도 가능한 것이다. 본문을 수정하지 않고 설명이 가능한 것은 הבא(아바)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죄인들이 길을 유혹할 때 너는 좋다고 나서지 말라고 한다.
אתפ(파타)가 갖고 있는 것은 어원적으로 화살 쏘는데 화살이 과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ךותפ(파투카)는 성경에서 사람을 꼬여 오도하게 하는데 있다. 젊다는 뜻이 이같이 쓰인 것이다. 젊어서 유혹을 잘 당하기 때문이다. התפ는 표적에서 벗어난다, ךותפ는 오도한다, 바른 규범에서 떠나는 것이 둘의 뜻이다.
지혜는 바른 것과 관련하여 떠날 수 없다. 어리석음은 바른 규범에서 떠나는 것이다. 지혜는 바른 도리, 어리석음은 여기서 떠난 것이다. 바른 것에서 떠나자 할 때 거기에 미혹되어 따라 나서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실천요강 1조이다. 지혜에 대해 실천 요강을 말하면서 바른 것에서 떠나자는 어리석은 말에 유혹되지 말라고 말한 것은 신자의 삶의 환경이 유혹과 미혹의 삶임을 암시하고 있다.
10절의 말은 어리석음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 지혜의 삶의 실천적 1조라고 말하고, 어리석음의 구체적 성격에 대해서는 11절에서 말한다.
11절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없는 자를 까닭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ונתא הכל(라카 이타누) ‘우리와 함께 하자’ 이후의 말은 흉악하다. 우선 이 말만 먼저 보자. 이 말과 연결하여 13절, 14절을 보자. 13절은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에 채우리니” “온갖 보화로 우리 집을 채우라” 즉, 부자가 되자. 14절은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우리 중에 제비를 뽑자” 즉, 가장 공평한 처리 방법을 쓰자.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즉, 공유하자. 이 말만 들으면 이웃 관계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이 말은 누구를 제외시키지 않고 함께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함께 나누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고 한다. 여기 ‘함께 하자’, ‘전대 하나만 두자’는 것은 공유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어디 있는가? 함께 모든 것을 하고, 나누고, 공평하게 나누는 사회요 부요해지자는 이것보다 좋은 권고가 없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있다.
12절에 “음부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 “사람의 피를 흘리자”, “음부 처럼 산채로 삼키자” 이는 외부적으로는 사랑의 요소가 있으나 일부분이 바른데서 떠난 폭력적 수단이다. 이렇게 보면 참 사랑과 이웃관계 파괴하는 부정의 차이는 정반대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의리로 밀접한 사회가 폭력 사회이다. 이것이 정당한 사회에서는 좋은 것이나 교묘한 탈을 쓰고 공동체를 파괴한다. 매우 달콤하게 함께 하자, 부자가 되자, 공평하게 하자라고 한다. 교회에서는 더 거룩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을 억울케 하는 것이면 그것은 가장 위험하고, 독소를 품은 거짓 사랑이다. 사랑을 까닭없이 해치는데는 당파성이 있다. 우리끼리 어떻게 해서 타인의 것을 빼앗자는 것이다. 당파성 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제일 먼저 당파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었을 것이다. 당파성은 이기심이 전제된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뭉친 것이다. 이것에 넘어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 자기 집 채우려고 부정한 일 한 사람이 나눌 이유없고, 타인의 것 갈취한 사람이 서로 나눌 이유 없다. 이익이 성취되면 그 안에서 또 싸우게 된다.
15-18절 타인의 생명을 해하려고 매복하나 결국 자기 생명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19절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עצב(보체아)는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자로 성경에서 쓰인다.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자로 말한 것은 10절에서부터 볼 때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을까? 불의하게 착취하려는 목적은 자기 집을 채우려는데 있다. 악행의 근본 동기는 이기주의이다. 타인의 것을 빼앗으려는 욕심이 있다. 욕심없이 이웃에게 범죄하는 경우는 없다. 모든 이웃관계의 범죄를 요약하면서 10계명 마지막에 “탐내지 말라”고 한다. 어떤 유익과 이기적 목적 얻으려는 행위는 악행이다.
결론 부분이 색다르다. 17-18절에 대해 19절에서 원칙화시켜 말한다. 불의한 죄 자체가 그 생명을 취하게 되어 있다. 근거 제시가 없이 끝난다. 나중에 가서 범죄자가 그 범죄에 대한 보응을 받고, 하나님 경외하는 길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말한다. 미리 말하면 세계를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20-21절 여기서 지혜의 부분과 초청에 대해 말하고 어리석은 자의 거절을 말한다. 지혜가 외치는 장소가 넓은 길거리이고, 성루, 성문이다. 왜 지혜가 외치는 장소를 바깥, 큰 길, 성루, 성문 곁으로 언급하고 있을까? 히브리 성경에는 당시 건축과 관련된 용어가 많이 나온다. 성문은 성 구조 전체이고, 성루는 문이 열리는 것을 말하고, 광장은 성 주변의 넓은 장소이다. 성문 주변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러한 장소에서 지혜가 소리를 높여 외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대개 성문은 재판이 열리는 곳이다. 저자 거리를 형성한다. 개인 생활 중심은 집안이나 공동체 삶의 전체 중심은 성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지혜가 외친다 할 때 תומכח(하크모트)이다. 복수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다양한 종류이다. 여기 암시는? 집 밖에서 사람이 다니는 곳으로, 공동체 삶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지혜가 외치는 것은, 지혜라 할 때 모든 사람이 듣도록 외쳐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또 어떤 의미인가? 성문에서 공동체 삶의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할 때 삶의 가장 평범한 장소, 일상 생활의 도처에서 지혜는 그 소리를 높인다. 자선, 구제, 흥정 등 자질구레한 삶, 긍정과 부정의 삶이 이루어지는 저자 거리에서 지혜가 외쳐진다. 사소한 평상의 일만 아니고, 가장 옳고 그름의 시비가 이루어지는 성문에서 지혜의 모습이 드러난다. 성문에서 그 지혜가 소리를 발하게 된다.
모든 사람에게 지혜가 차단되었다 할 때 지혜의 은밀성과, 온갖 잡다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저자 거리에서 지혜가 소리를 발한다 할 때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지혜는 집안의 은밀한 중에서만 아니고 일상 생활까지 확대, 연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일상의 말씨, 행동까지 지혜가 나타나 삶의 도처에까지 지혜가 외쳐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는 하나님의 통치 질서 속에 있음을 언급했다. 하나님 통치는 일상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이루어진다. 인간편에서 지혜의 삶이 일상에 드러나야 한다.
지혜가 일상 생활 구석구석까지 외쳐져도 사람이 모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혜 자체는 외쳐진다. 듣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일반계시 영역도 포함된다. 하나님의 의로운 세계 통치는 곳곳에 이루어지나 깨닫지 못하고, 지혜를 외치고 있으나 지혜를 듣지 못하고, 지혜를 알았다 하는 자는 왜곡시키고 있다.
복습
지난 시간에 1:7절 이하에 대해 어리석음의 유혹에 관하여 말했다. 어리석음이란 것은 “...의 결핍”을 의미한 뿐 아니라 끊임없이 강력히 유혹하는 힘이기도 하고, 외부적으로는 참된 것의 모양을 하고 있다. “...우리와 함께 하자”, “우리가 공유하자”는 자세는 형식적으로, 인간적으로 바람직한 모습으로 사랑과 일치한다.
그러면 형식적으로 사랑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것이 잘못된 것인가? 이러한 종류의 사랑이 어디에 잘못이 있다고 했는가? 위선성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 모든 거짓은 위선의 모습이 있다. 말로는 함께 하자고 하나 그 마음에서 하나 되자는 마음은 없다. 자기 이익을 위해 이웃을 죽이면서 자기 이익을 찾으려 한다. 자기 이익 위해 이웃을 죽이려는 자가 우리와 함께 하자고 할 수 없다. 사랑한다고 하나 이웃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죽이려 하니 자가당착이다. 이런 유혹을 따라 가면 상대의 것을 빼앗는데 보조가 되나 후에 내분이 일어난다. 그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좀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비윤리적인 모습과 사랑이 대치되는 것은 모든 율법이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라는 것에 다양성이 있다. 비윤리성과 외형적 사랑은 맞물리게 되어 있다. 하나님 율법에 어긋나는 것들이 비윤리적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 법 어기고 참 사랑 할 수 없다. 하나님 법과 사랑은 같다. 여기서 참 사랑에 불의가 섞일 수 없고 의와 함께 가는 것의 이유를 가늠할 수 있다.
내가 의식적으로 위선적이라는 것을 고의적으로 행했느냐는 것은 주관적인 것에 있지 않고, 그 사람의 외형적인 모습이 하나님 법에 정당하느냐는 것이다. 부정당하면 하나님 법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불의는 심판을 받아 멸망으로 인도된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원리만 배워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거짓된 것을 끊는 것이 초보적 단계에서 유용하나, 하나님 사랑을 지키는 것이 유익이요, 상대방 사랑에 내 이익이 섞이면 불의하다는 자연스러운 깨달음에서, 참 의롭고 거룩한 것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깨달음에서 구체적 계획놓고 분별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하나님 사랑에 어긋나는 것은 무조건 짓밟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모르는 것이다.
20절 이하에서 많이 다루었던 지혜의 모습은 어떠한가? 지혜는 길거리, 성문에서 외친다. 이런 장소들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고, 성문은 공동체 삶의 사건들이 가장 중요하게 판단되는 곳이다. 삶의 축소판이다. 인간이 공동체 일원으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 삶에서 성문은 인간의 삶의 전체 모습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장소는 공개된 곳, 가장 공개된 삶이다. 여기서 소리가 뻗치고, 목소리를 높인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지난 시간에 삶의 도처에서 지혜가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이것이 공개적 장소와 관련하여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지혜가 공개적 장소에서 외친다는 것은 누구나에게 지혜가 제시되고 있다는 말이다. 삶의 도처에서 지혜가 소리를 높여 누구에게나 자신을 제시하고 있다. 지혜라는 것은 하나님 경외를 그 내용으로 한다. 이것이 누구에게나 제시되고 삶의 도처에서 외친다는 것은 신약의 로마서 1장에서 삶의 도처에서 지혜의 소리가 들린다는 말보다 포괄적이다. 온 땅에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소리가 충만하다.
여기서 지혜와 관련하여 우리가 처한 삶의 이질적인 다른 환경의 요소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삶은 끊임없는 어리석음의 유혹이 작당하여 이웃을 해하자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삶의 도처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지혜의 소리가 도처에서 들리는 세상이다. 어리석은 소리와 지혜의 소리가 세상에 공존한다. 일반계시로 볼지 모르겠다. 삶의 도처에서 지혜의 부름이 있고 나서, 22절에서 반문을 제시한다. 어리석은 자는 적극적으로 어리석음을 사랑하고, 오만을 탐하고, 지혜를 미워한다. 어리석음의 적극적 성격을 말한 반면에, 또한 일반계시에 대한 인간의 부정 반응을 볼 수 있다. 이것을 신약 로마서 1장에서 말한다. 진리를 억누르는 자는 참된 모습이 아니다. 바울 사도가 성령의 영감으로 로마서를 썼으나 구약을 바로 깨달은 자는 낯설지 않다. 역으로 로마서 1장의 바울 사도의 말을 알려고 하면 구약의 폭넓은 이해가 없으면 안된다.
이 부분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것은 23절의 “나의 권고로 돌아오라”이다. ובושׁת(타슈부; 돌아오라) → 인간의 보편적 타락 모습, 인간의 어리석음, 무지의 말이다.
יחור םכל העיבא ↔ םכתא ירבד העידוא
(아비아 라켐 루히 ↔ 오디아 데바라이 에트켐)
밑줄 친 곳이 나의 신(영)과 나의 말로 대비되고, 첫 단어인 העיבא는 עבנ(나바)로서 샘에서 솟아오른 것, 흘러 나온다, 쏟아붓는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지혜가 의인화 된 것으로 본다. 지혜가 “나의 신(영)을 쏟아 부을 것이요 나의 말들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면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나의 신(영)’(יחור)과 ‘말’(ירבד)은 어떤 관계인가? 말은 ①마음 속의 것을 표현하는 표현 수단, ②의사 전달, 이 의미는 말은 표현이요 계시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너희가 내게 돌아와 순종하면 “내가 나의 신을 쏟아 부어 흘러나오게 하고 나의 말을 너희에게 알릴 것이다”라고 했다. 나의 신을 쏟아 붓는 것과 나의 말을 알리는 것은 동일 표현인가? 다른 별개의 뜻인가? 여기서 ‘나의 신’과 ‘나의 말’이 신약의 의미에 어디까지 근접하는가? 이것은 뒤에 하기로 하자. 지혜와 인간의 관계는 무생물에 대한 파악 아닌 인격적 관계로 된 것이다. 지혜와 인간이 비인격적 대상의 관계 아닌 다른 차원이다. 인격적 개입이 있다. 필수적이다.
24절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지혜의 간곡한 부름을 배척한 결과로 말한다. 온 천지에 계시의 외침으로 그 소리가 동시에 얼마만큼 간절한 의도가 담긴 것인가를 말한다. “손을 뻗친” 것은 그 부르짖음의 의도가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를 말한다.
두번째로 여기서도 지혜라는 것을 비인격적 무엇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어떤 인격으로 보는가? 비인격체인데 인격화시킨 것인가? 어떤 인격과의 관계는 피하더라도 지혜를 신격화 시키는 것은 지혜는 인격과의 관련을 떠나서는 알 수 없음을 말한다. 그것은 지혜의 모든 것으로 의미된다. 모든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고린도전서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한다. 지혜는 비인격적인 관계로 하나님 떠나 홀로 존재 못한다. 지혜를 의인화시켜서 말한 것은 이상하지 않다. 계시의 부름 배후에는 인격으로서 하나님의 의도가 배제될 수 없다. 특별히 ‘손을 내밀었다’는 표현은 신약에서 ‘내 손을 벌렸으나 그들이 거절하였다’로 표현된다. 이런 지혜의 간절한 권고를 사랑않고 무시했다.
26절 이하에서 지혜를 멀리한 결과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재앙’이다. 여기서 지혜의 부름의 한시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일반적 말로 사후약방문의 뜻으로 볼 것인가? 확대가 가능한가? 지혜를 알 때가 있다. 그때가 지나면 모른다. “문이 닫히면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우리는 일부에서 사색보다 행동을 요구하나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깊은 사색을 요구한다. 사색 자체가 신앙 안에서 정당히 자리잡아야 한다. 아까 말한 것은 지혜가 공개된 것은 삶의 도처에서 지혜가 누구에게나 외쳐지고 있다고 했다. 여기에 대한 반응은 부정적이다. 지혜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돌아오라고 한다. 그리고 지혜의 간곡한 부르심을 거역한 결과에 대하여 말씀한다. 우선 이제 공포가 임할 것으로 막연히 말씀한다. 공포의 일반적 성격을 말한 후에 지혜의 부름은 한시적이어서 그때가 지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29절에 보면 매우 특별한 내용이 나타난다.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행위”(31절) → “삶의 방식”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29절이다. תעד(다아트; 지식) ″הוהי תארי(이르아트 아도나이; 여호와 경외)가 병행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하나님 경외가 지혜 자체이다. 지식 추구 목표가 하나님 경외이다. 즉, 지식 자체가 하나님 경외이다. 하나님 경외와 지식은 분리될 수 없다. 지식이 하나님 경외와 분리 불가능하다면 지식 거부는 하나님 거부이다.
31절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우리 삶 속에는 Vergeltung(보응의 원리)가 존재한다. 보응의 원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보응원리 존재는 그 보응하는 인격적 존재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행한대로 그 열매 먹게 되는 것은 지혜의 태도 여하에 따라 다른 결과가 초래된다. 지혜의 태도에 따라 각기 보응의 원리가 존재하는데 어리석은 자에 대한 보응은 죽음이다. 지식의 결핍으로 어리석음에 상응하는 결과가 죽음이다. 그 이유는 모든 참 지식은 하나님 경외이다. 어리석음은 지식을 미워하고, 거부하고, 하나님 거부하는 적극적 성격이다. 그러므로 그에 상응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은 빈말이 아니다. 이것은 동시에 지적 영역에서의 하나님 경외 배제가 죽음을 초래하는 무서운 죄라고 하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죄이다. 지식 자체가 인간의 정신 기능과 삶과 분리될 수 없다. 지식 배제는 하나님 경외의 배제로 죽음을 초래하는 무서운 죄의 형태이다.
32절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어리석은 자의 멸망이 나타난다.
33절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晏然)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지혜자의 안전도 나타난다.
7-19절까지 어리석음의 모습과 악한 자의 보응을 말하고 끝나는데 32-33절에서 어리석은 자와 지혜자에게 각각 상응의 보응이 있다는 것으로 끝난다.

2장
1-2절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아비” → 잠언에서는 선생의 대표적 모습이다. 선생이 피교육자에게 권하는 말, 이것이 christian education(기독교 교육)이다. 교육 내용이 전달되는 형식에서 계명을 말한다. 계명은 권위의 요소이다. 교육 내용은 지혜인데, 교육 내용의 전달 형식은 말 = 계명이다. 피교육자의 자세는 “지혜에 귀를 기울이라”, “명철에 마음을 기울이라”로 귀와 마음은 안과 밖으로 전심으로 귀를 기울인다는 의미이다. 참 지식은 하나님 경외를 토대로 하므로 이런 참 지식 교육에는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다. 심령을 기울이는 것이다.
3절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사모하는 간절한 삶이다.
4절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지혜를 소리쳐 부르며(3절), 숨겨논 보물을 찾듯이 찾아 뒤지라는 것은 지혜를 찾는데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함과 노력의 자세를 말한다. 피교육자는 철저히 지혜를 찾되 숨겨놓은 보물을 찾듯이 찾아야 한다.
5절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그러나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다. 그가 말씀하시는 것 즉, 계시를 통해 주신다. 조금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피교육자는 열심히 찾는다 할 때 자기 노력으로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둘은 인간의 지혜 추구 노력과 하나님의 지혜 주심을 깊이 있게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상호보완하는 관계를 경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이 숨겨진 보물을 찾듯이 찾아야 하나 하나님이 지혜를 계시 통해 알려 줄 때만 가능한 것임을 전제로 해야 한다.
지혜는 숨겨져서 아무도 접근을 못한다. 그 후에 지혜는 공개적 장소에서 외쳐지고 있다고 한다(1장에서). 상반된 표현 같다. 여기서도 숨겨진 보물을 찾듯이 찾으라 하고,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고 했다. 상반된 표현은 성경에서 많은 것을 가르치는 함축적인 경제적 표현이다. 서로를 상호 규정해 준다. 인간이 소리쳐 간절히 찾는 것 이 자세는 하나님이 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지혜 추구 자세는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그를 의지하는, 신뢰하는 믿음의 자세여야 하고, 은혜 구하기를 사모하는 기도의 자세이다. 지혜를 참되게 사모하는 자, 모든 영혼을 기울여 간절히 찾는 자가 하나님께 신뢰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사모하고 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시는 이 둘의 관계는 신비로 남아 있다. 조금 전과 같은 표현 양식은 상반된 두 가지가 상호 규정하게 되어 있고, 그 같은 표현으로 지금 취급하는 대상이 신비로운 것이다.
6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여” 지혜 구하는 자에게 지혜 주신다. 지혜를 간절히 사모하여 찾을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는데 하나님 경외를 깨닫게 된다고 했다. 모든 지식은 하나님 경외 틀 속에서 이루어지고, 하나님 경외를 그 목적, 목표로 한다. 지혜 추구의 자세, 모든 지식 추구의 자세가 하나님 경외 자세이다. 이런 의미에서 참된 지혜는 하나님 경외, 하나님 아는 것, 이것이 참된 지혜이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하나님 경외의 틀에서 벗어나 만들어낸 지적 추구 작업(문학, 과학 등)은 진리의 왜곡이요, 참된 지식은 아니다. 이런 형태의 진리 왜곡은 과학만이 아니고 예술, 문학 등에도 있다. 모든 참된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말씀해 주셔야만 한다.
지난 시간에 1장 20절 이하에서 지혜의 초청에 대하여 다루었다. 지혜의 부름에 응하는 것과 쓰이는 것에 대해서도 말했다.
2장에 들어오면서 1장에서의 지혜의 부름, 초청에 응답하는 방식이 나타난다. 이제는 삶의 각처, 도처에서 지혜의 소리가 들리고,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 방식은 소극적인 자세 아닌 적극적 자세이다. 귀를 기울이는 것이요,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요, 은처럼 소중히 여기는 자세, 보물을 찾듯이 파헤치는 자세, 지혜를 찾고, 소리 불러 외치는 자세라고 했다. 지혜를 숨긴 보물을 찾듯이 찾고, 소리 높여 외쳐 부르고, 은을 소중히 여기듯 지혜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는 지혜가 공중 앞에서 외쳐 불리는 때의 이 지혜는 즉각적으로 파악이 가능하다.
Transprarenz(트란스프라렌즈; 명백한) 지혜가 도처에서 외치는데도 자연스럽게 포착 가능한 것은 아니다. 지혜의 관통성이라고 할까? Durchschanburkeit(뒤르히샨부르카이트; 관통성) 지혜의 편재성, 또는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포착이 용이한 것이 아니고, 지혜는 땅 속 깊이 묻힌 보배처럼 삶의 복잡성과 다양성 속에 숨겨져 있고, 삶 처럼 애매모호한 심오함이다. 이것을 삶의 표면에 드러내어 일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일상 사는 사람에게 포착 가능한 것은 상징으로 가능할 뿐 포착이 용이한 것은 아니다. 이와같이 지혜의 은밀성, 심오성은 지혜가 포착하려는 삶의 본질 자체가, 지혜가 포착하려는 세계 질서 자체가 인간 한계를 넘어선 창조주 하나님께 근원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 경외 자체이다. 그래서 지혜는 심오하고, 포착 어려운 애매모호한 것이다.
지혜를 찾는 자에게 하나님 경외, 하나님 찾고 깨닫게 된다. 지혜를 찾고 추구하는 자는 경건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 지식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 편에서 지혜를 찾는 자세는 반드시 결실을 본다. 이것은 인간이 지혜를 찾는 수고로만 가능하다고 여기면 잘못된 오해이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지혜의 본질은 하나님 경외, 하나님 지식은 관념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실제적 순종의 자세의 차원의 것이다. 신앙하는 자세 속에는 지식이 있다. 지혜에 대한 물음을 인간 편에서 사모하고 추구하는 것이 결실되는 것은 인간 스스로 지혜를 찾는 결과가 아니고, 하나님이 지혜, 지식, 긍휼을 주시기 때문이다.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 은혜이지 인간 스스로 포착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성은 삶의 본질을 꿰뚫어서 파악을 못한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가능하다. 인간은 하나님을 신뢰, 의지, 그를 바라보고, 오직 그의 긍휼과 은혜 베푸시는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 경외이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데만 기대한다. 지혜가 하나님 편에서 오는 것이면, 인간 편에서 지혜 찾는 노력은 하나님 경외, 신뢰하는 믿음의 틀에서 이루어진다. 지혜를 귀한 것으로 여기고 찾는 것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앙 행위여야 한다. 이런 믿음 안에서 내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결실된다. 하나님의 신실성 즉, 은혜로우신 분으로 여기는 우리 믿음에 대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하나님의 신실성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까지 발전이 가능하다.
7절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그에게 지혜와 명철을 주시어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을 깨닫게 하도록 하신다고 했고, 온전한 지혜를 예비하시고, 온전한 자의 방패가 된다고 했다.
8절 “대저 그는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는 공의의 길을 지키신다고 했다. 여기까지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보호적 기능으로 우리에게 방패가 되며, 지혜 찾는 자에게 길을 주신다고 했다. 좀 자세히 보면 지금까지 말한 것과 상충되는 듯하다. 지혜가 약속된 대상은 누구인가? 옳바른 사람, 온전히 행하는 사람이다. 욥기 1장에 하나님을 경외하여 온전한 자라고 나온다. 경건한 자에게 이르시기를 참 지혜를 그를 위해 간직하신다. 지혜가 주어지는데도 조건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7절 한 구절만 떼어 본다면 그같은 느낌이 정당화될 수 있으나 1장 1절부터의 내용을 염두에 둔다면 구별된다.
처음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이 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편의 조건이 인간편에서 지혜를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신다고 했다. 여기 7절에서의 경건한 자, 온전히 행한 자의 의미는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에게 은혜로 주신다는 표현을 전제로 하는 것이 옳다. 특히 그같은 믿음을 가진 자, 하나님이 경건을, 하나님이 지혜 주시는 전제 조건이 아님에도 지혜와 경건이 밀착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하나님 경외를 토대로 하고, 그 틀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 자체가 하나님 경건을 목적하므로 믿음과 경건이 분리될 수 없고, 지혜와 경건이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 경외하게 하는 지혜 주신다는 것이니까 여기서 경건이라는 말 속에는 지혜를 얻기 전의 전제 조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혜 얻기 위한 전제는 오직 믿음 뿐이다. 하나님 경외를 목적으로 하는 지혜에서 그같은 믿음 주면 결실 맺게 되므로 경건과 자연스럽게 맺어진다.
7-8절에 보면 하나님 지혜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을 올바른 자로 부른 것은 이유가 있다. 지혜 주시는 목적이라 할까? 근본 목적이 지혜주시는데 있어 지혜의 보호적 기능을 말한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지혜를 바라는 자에게 은혜로 지혜를 주시는데, 그 지혜는 보호 기능을 한다. 그 보호 기능에 대해 말하기를 그것이 방패가 된다고 했다. 또 공의의 길을 지키시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온전히 행하는 자에게 방패되시고, 경건한 자를 보호하신다. 지혜의 보호 기능 통해 공의를 유지하시려는 적극적 의도가 암시되어 있다. 단순히 하나님 경외하는 자를 보호하신다는 차원을 넘어서 공의를 유지하시려는 태도가 8절 상반절에 나타나 있다.
9절 “그런즉 네가 공의와 공평과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 여기서 앞과 잘 연결 안된다. 끊어지는 것 같다. 형식적 고려가 이 부분 이해에 도움이 된다. 2장 1절에 보면 ~ חקת־םא ינב(베니 임-티파)
5절 יכ ← יבת זא(아즈 타비)
9절 יכ ← יבת זא
이같은 형식적 고려를 보면 ןיבת זא(아즈 타빈)은 7-8절에서의 계속이라기 보다는 조금 거리를 두고 5절까지 거슬러 가기도 하면서 새로운 글의 느낌을 준다. 여기보면 “옳고 바른 세계 질서” 이것이 난잡한 철학적 난제이다. 여기서 9절 말씀은 번역이 어렵다.
טפשׁמ(미슈파트) → 법정 용어, 옳고 그름의 기준이다. “공의”라는 번역은 오역이다. 앞의 내용을 전제할 때 지혜를 간절히 외치는 자에게 모든 선한 길을 찾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체가 영생이다. 9절 자체가 선한 것이다. 공의와 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 통치자로서 여호와께서 옳고 바름의 하나님이시요, 그의 통치 본질의 속성이 그렇다. 하나님의 세계 내에 최선의 길은 순종하는 것이 명약관화하다.
어떻게 선하고 옳고 바른 길을 깨닫게 될 것인가? 10절에 나온다.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에 즐겁게 될 것이요” 사람이 옳고 바른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지혜가 그 마음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요, 이 지혜가 사람에게 파고 드는 것이다. 지식이 네 마음에 기쁨이 되리라는 것은 지혜가 마음 속에 파고 들어가 일으킨 변화로 그의 계명을 순종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바로 지혜의 성격이기도 하다.
11절 이하에는 7-8절에서 말한 지혜의 보호적 기능을 구체적으로 상세히 설명한다. “분별(근신)이 너를 지킬 것이요,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12절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기를(11절의 말씀) “악한 자의 길과 편벽되이(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내리라”
12절 (남자)שׁיאמ ךליצהל(레하칠카 메이쉬) - 악한 자의 길과 편벽되이 말하는 자
16절 (여자)השׁאמ ךליצהל(레하칠카 메이솨) - 음녀와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지혜라는 것은 ......이런 자에게서 너를 구원하리라는 의미
잠언에서 여자의 경우는 남자를 유혹하여 간음하게 한다. 여자만 언급하는 것 아니고 남녀를 같이 말한다. 성경에 남녀는 모든 종류, 계층의 사람이다. “남녀(성별), 노소(나이), 종이나 자유자나(신분계층의 다양성)” → 다양성, 포괄성, 모든 계층 총망라.
12절 이하 지혜의 보호 기능에 대해 “악한 길에서 너를 보호할 것이요 편벽된 데서 너를 구할 것이요”
13절 “...어두운 길로 행하는 자”
14절 “악한 자의 패역을 기뻐하는 자”
여기서도 지혜의 보호 기능이 위의 상식과 어긋나는 듯 하다. 악인에게서 보호라는 뜻은 악인이 우리에게 끼치는 폭력으로부터 보호인데 여기서는 악한 길에서의 구출이다. 이는 악인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지혜의 보호 기능이다. 흔히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혜로 보호한다 할 때 세상 악행에서 나를 보호하는 것으로 아는데, 내가 악한 길에 들어가지 않도록 지키신다. 보호기능의 뉘앙스가 다르다.
지혜의 보호기능은 악행자로부터 피해를 지키는 것도 보호기능에 속하나 우리로 악의 길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은 근본적 보호기능이다. 행악자의 악행의 피해는 함께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우리에게 악행을 하지 않게 지키는 것이 근본적 보호기능이 되는 것은 결국은 세계를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의 판단 기준, 갚으심을 안다. 참으로 우리가 두려워 할 처벌은 악인으로 인한 해악이 아니고, 영과 육신을 함께 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손으로부터 보호가 근본 보호기능이다. 하나님의 심판 근원은 악이다. 이 악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근본 보호기능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말씀은 우리 안에 간교히 숨겨져 있는 것을 찌르는 말이다. 우리는 선하다고 스스로 여기고, 타인을 악하게 여긴다. 여기서는 너로 하여금 악인의 악에 오염되지 않게 하셔서 행악의 길을 보호하신다는 것은, 범죄 길에서 보호하셔서 나의 연약한 부분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여기보면 12절의 ‘남자(개역성경은 악한 자)로부터 너를 지킬 것이다’ 남자와 관련된 보호기능, 남자의 악은 어떤 성격의 것인가? 바른 것 버리고 악을 좋아하는 형태로 본다.
14절 남자와 관련된 악은 폭력과 결부되어 있고, 타인을 억울하게 한다. 남자는 힘의 상징인데, 이것이 왜곡되면 폭력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여자는 아름다움의 상징으로서, 이것이 왜곡되면 유혹으로 나타난다.
16절 이전에서는 남자와 관련된 악이나, 여기서는 여자와 관련된 악을 말한다.
הירכנ הרז השׁא(이솨 자라 나크리야) 여기서 הרז(자라)는 낮선 자로서 어떤 집단에 속하지 못한 자요, הירכנ(나크리야)는 국적이 다른 여자를 말한다. 이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낮선 여자( = 음녀)” = ‘이방 여인’이다. 어떤 이는 솔로몬이 말하는 직접 대상은 자기 후에 이스라엘 다스릴 왕의 교육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왕에서 큰 위협은 정략상 외국 여자와 결혼하는 것인데, 이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 경외를 모르는 이방 여인의 위험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좀더 넓은 의미에서 잠언을 이해하자. 물론 후손(후에 왕들) 교육도 포함한다. 여기서 הירכנ הרז(낮선 자)는 이질적으로 다른, 삶의 공유가 불가능한 이질적 대상이다. 이질적인 자와 삶을 함께 하면, 그 자신의 삶 또한 변질된다. 그렇다면 여자와 관련하여 생긴 위험은 그런 종류의 악을 포함한 것으로 대표적으로 말한 악이다. 여기서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삶과 이질적 삶을 말한다. 이런 형태의 모든 삶에 대한 경고이다. 남녀의 대조 자체가 모든 종류의 사람이요, 여기 여자와 관련된 악도 모든 종류의 악이다. 대표적인 여자의 악을 말한 것이다.
여성의 죄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범죄의 유형이 여성적이지 남자도 짓는다. 그 본질은 우선 말을 매끄럽게 한다고 되어 있다. 그 말 속에는 강한 유혹성이 있는 것이다. 매끄럽다는 것은 그 외에 위선, 거짓이 있다. 그 다음 지적이 17절이다.
17절 “그는 소시의 짝을 버리며 그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여기 죄를 여성의 간음죄와 밀착시켜 이해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죄는 어떤 죄의 대표적 성격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 여자는 과거의 남자를 배신하며 그녀의 하나님의 언약을 잊는다” 여기서 החכשׁ הי(הלא תירב)־תא(에트 베리트 엘로헤하 샤케하)는 ①그녀의 하나님 언약 → divine covenant, 신적 언약, ②그녀의 신적 언약 → 혼인 관계, 혼인이 하나님 차원에서 언약, 혼인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 혼인의 신성함에 대한 증거 구절이다.
הלא(엘로헤)를 남편에 좁게 국한 시키지 말고 넓게 해석한다면 친밀한 사람의 관계를 배신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불성실한 것으로 해석해도 좋다. הלא ①남자와 관련시키면 남편 배신한 죄가 된다. ②혼인의 신성함을 나타내는 하나님 앞에서 언약. 여성 언급이 여성의 악의 대표로 죄를 언급한다. הלא와 관련시킬 것만 아니고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는 불성실한 태도이다. לשׁמ이 비유적 상징적이므로, 여기서 너무 축소해서 하지 말고 넓게 보는 해석이 필요하다.
지혜의 보호기능은 편벽된 길에서와 이방 여인에게서의 보호 성격 기능 이상의 대응이다. 모든 여성 특유의 감정, 유혹으로 사람을 오도하는 그런 종류의 위험에서 보호, 바른 길에서부터 벗어나게 하는 위험으로부터 탈출하게 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 쪽은 남성적 형태, 다른 한 편은 여성적 형태의 오도에 대하여 말한다. 지혜의 보호 기능에 있어서 목적 중 소극적 목적은 ......에서부터 구출하는 것이며 적극적, 궁극적 형태의 지혜의 기능은 20절에서 언급된다. “지혜가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우리도 악에서 이처럼 구원한 후 선한 길로 가게하기 위함이다. 물론 선한 것이 무엇이고 의로운 자의 길이 무엇인가 하는 구체적 내용은 짐작하기 어려우며 나중에 나오나 미리 이야기하면 선한 길 = 하나님의 뜻 = 지혜. 선하고 의로운 길 걷게 하기 위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지혜의 보호적 기능이 될 수 있는가? 악에서부터 구조해 내는 것이 지혜의 보호적 기능이 될 수 있는가?
21절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올바른 자가 땅에 거하면 악인은 그 땅에서 끊어지고, 소멸된다. 여기보면 매우 중요한 개념이 땅이며, 선하고 의로운 길을 걷는 목적이 땅에 거하기 위해서이다. 이유는 이 땅은 정직과 온전한 자만이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땅에 거한다는 구체적인 뜻이 무엇인가? 이 땅이라 하는 것이 우리가 노래하는 삶의 터전과 공간으로서, 쉽게 말하면 이 땅에서 잘 산다는 그런 뜻인가? 여기 말하는 땅의 특수한 의미는 혹자는 모든 사람의 삶의 공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잠언의 표현성을 강조하는 자들이 이같이 강조한다. 여기 잠언에서 모든 사람에게 다 개방되어 있는 땅으로, 영역으로 지시하는 듯한 표현이 많다. 그렇다면 여기 21절은 어떤 의미를 가리키는가?
역으로 이 땅에서 의인과 정직한 자만 잘살고, 악인은 징벌을 당하여 그들에게 지상의 삶의 영역이 거부되고 있는가? Yes로 대답하기 힘들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데로 이 잠언은 솔로몬이 교회의 지도자로 하나님의 백성 위해 이야기한 것이다.
21절의 내용은 신약의 표현과 비교 되는데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요”(마 5:5) 여기서 땅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 처럼 하나님 백성이 사는 특수한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선한 길을, 지혜의 길을 가야 하는가? 정직한 자만이 땅에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의롭고, 정직하게 사는 것은 이 땅에 사는 것의 조건이 되는가? 우리가 의롭게, 선하게 살아야 그 나라에 들어가는가? 신약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많다. 한 쪽에서는 은혜, 한 쪽에서는 율법주의로 가리키는가? 이는 그 나라에 거하기 위한 조건이라기 보다는 그 나라에 사는 자로써의 삶의 본질을 가리킨다. 그 나라에 속한 자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은혜로 그 나라에 속한 자에게서 이것이 나타난다. 의외로 이 순서를 이해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은혜에 속하다가 어떤 경우에는 율법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야고보서가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 나라에 속했다 하면서 삶이 다를 때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라에 들어 가는 것은 공로와 관계 아니며, 삶과 관계 아니다.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은혜 속에는 그 심령이 그 나라 삶에 적합하도록 변화되는 은혜가 역시 포함되어 있다.

3장
이때까지는 지혜의 부름과 부름에 대한 응답 방식을 언급했다. 적극적으로 지혜도 추구하는 자세여야 한다. 3장에 보면 1절에서 지혜는 한 번 얻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지혜와 더불어 사는 삶, 지혜를 따라 지속적으로 살 것을 말한다. 이와같은 지혜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따라 사는 사람에게 지혜가 가져다 주는 결과로 ①장수할 것이다. ②생명의 해와 날이 길 것이요, ③평강을 더할 것이다. 여기서 생명의 날과 연한이 길 것이다라고 하나 문제는 하나님 시각에서 생명과 평강이라는 것이 어떤 시각인가? 하는 것이다.앞에서 땅이라는 것이 육적 차원의 영역이 아님을 생각할 때, 이스라엘 나라가 이루어지는 영역이라 할 때, 생명과 평강이라는 말은 특수한 의미를 가진다.
2절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날이 길다’는 오래 계속된다는 지속성을 뜻한다. 지속성이라 하면 무엇을 전제하는가?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음을 전제한다. 구약에서 여러 번 나타나는데 이것은 단순한 육적 생명의 장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복된 삶의 영역에서 흔들린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 땅에서 너의 유업이 견고하리라.
3절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二思一意; 인자와 진리. דסח(헤세드) → 번역하기 까다로우며, 의미를 규정하기가 어렵다. 사전에도 이런 식, 저런 식으로 중구난방이다. 그러나 넓고 광범위하게 번역하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진실한 사랑, 진실이 구약에서는 사실과의 부합이라는 뜻과도 같지만 근본 뜻은 견고하다, 흔들리지 않다, 신뢰할만 하다, 믿을만 하다이다. 그래서 신실한 사랑, 변함없는 사랑이다. 이것은 매우 묘하게도 2:12절 이하의 내용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12절 이하에서는 바른 길에서 떠나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악을 행한다는 것은 이웃과 관계에서 억울케, 착취하는 것이다. 이에 대응하는 것이 דסח = 사랑이다. 그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언제나 도울 태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두번째 이방 여인, 신실치 못함과 관계되어 진다. 여기서 דסח(헤세드; 사랑)와 תמא(에메트; 진리)가 앞에 있는 두 가지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면 재미있다. 앞에서는 지혜의 부정적인 면, 여기서는 지혜의 긍정, 적극적인 면이다. 여기서 신실한 사랑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만은 아니고 하나님과 신실한 사랑이다. 어떤 다른 인격과의 관계에서 가장 지혜로운 관계는 신실한 사랑이다.
“목에 매며”는 가장 잃어버리지 않으려 할 때 몸에서 떼어 놓지 않는다. 항상 소중히 여겨 내게서 떼어 놓지 않는다.
“네 마음 판에 새기라”는 그리하면 4절이 된다.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앞에서 דסח와 תמא가 인간과의 관계만은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자세로서 포괄적인 자세임을 알 수 있다.
5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하나님을 향한 דסח,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자세가 무엇인가? 말씀 →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대개 요한일서,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그의 지혜를 순종, 그의 계명 순종을 떠올린다. 그것은 그 중요한 전 단계를 생략한 표현임을 명심치 않으면 오해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 아니다. 하나님 사랑 말고도 게명 지킬 수 있다. 지키는 척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사랑 = 계명 순종을 완전히 동일시 하면 오해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계명의 순종이 되어지나 그러나 하나님 사랑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 신뢰하는 것이다. 신약적 표현으로 그를 믿는 것이다.
6절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5절), “네 모든 길에서 그를 의지하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7절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 “지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네 모든 삶에서 네가 행하는 모든 행위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네 삶의 주관자가, 주인이 되시게 하라이다. 네 삶에서 주인되심, 삶의 목적과 방식 모든 것에 있어서 הוהי(아도나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지혜로운 것인가?
나중에 가서 결론 부분에 나올 것이지만 세계의 통치자가 하나님이시므로 이 삶의 틀에서 가장 지혜로운 길은 세계 통치자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길이며, 안전한 길이다. 그분께 우리 삶 맡기는 것이 당연하다. 네 스스로 지혜로운 것 처럼 하지 말라!
내가 나 자신을 볼 때 내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 또 이 일을 내가 할 수 있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자세인가? 자신의 삶을 자기가 주인으로 여기며, 자율적 인간이며, 자신이 자기 삶을 주관한다. 내 스스로 내 지혜, 힘으로, 내가 옳고 귀중하다는 대로 내 삶을 꾸려나가겠다는 것이다. 일반 세속 철학, 학문이 겉으로 고상해 보여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배역하며 마귀에게 속하여 사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 교육의 목표가 자기성취, 자기완성이며 이같은 교육을 인간 삶의 최고 목적으로 둔다. 그러므로 겉으로 아무리 고상해 보여도 본질에 있어서는 마귀적이다. 성경을 볼 때는 괜찮으나 나아가서는 다 넘어간다. 학식있는 자 앞에서 그것 괜찮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이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 아닌가?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해서 그가 인도하시는 대로 가라고 하는가? 아니면 믿으면 이렇게 되고, 인격이나 모든 면에서 가장 아름답게 되며, 효과적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교회에서도 이렇게 하기 쉽다. 말은 쉽다.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다 잃으면 유익이 되나 이것 따라 사는 것이 어렵다.
9절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9절 전에서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하나님으로 네 주인이 되게 하라”하고 9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경하라” = 귀하게 여기다. 네가 얻은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 보다 하나님을 귀하게 소중히 여겨라. 하나님을 네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로 삼으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 것보다 10절에 관심이 있다.
10절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이것이 돈이 많이 들어온다는 뜻인가? 풍요로움을 말하는 것인데 돈이 많이 들어온다는 뜻이라기 보다 영적 축복이다.
11절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또 다른 하나님에 대한 바른 자세가 나타난다. 징계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표현하시는 형태의 하나이다. 아버지의 사랑 가지고 우리를 직접 교정하신다. 자신의 신뢰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 공경해야 한다. 그의 징계하심 즉, 아버지의 사랑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요,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자세이다.
13절 이하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러한 지혜를 발견한 자가 왜 복된가?
14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은보다 귀하고 금보다 귀하다” 직역하면 ‘지혜가 장사해서, 무역해서 얻은 것, 지혜가 초대하여 얻은 결과이다’ 지혜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결과, 지혜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14-15절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이 지혜가 가장 소중한 것이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사는 것이 금, 은, 산호, 그 어떤 것보다 귀하다. 그러므로 이 지혜가, 진리가 참으로 복되다.
16절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부귀, 영화 가진다 하니” 지혜에는 관심없고, 교회에 잘 나가고, 목사님 시킨대로 잘하고, 헌금 잘하면 이것은 저절로 굴러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여기 보면 장수 = ךרא(오렉), 부는 항상 돈을 생각하나 부귀는 풍요로움, 결핍없는 상태이다. 영화 = דובכ(카보드), 전적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부요함, 존귀의 길이다. 그 길은 사랑스러운 길이요, 여호와 보시기에 사랑, 평강의 길이다. 흔히 말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평강은 가정 화목, 사랑은 남편에게 사랑받는 이런 수준 못벗어나면 안된다. 더 나아가서 그것이 지혜이다.
18절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생명나무 붙잡는 자, 생명나무는 생명과가 열리는 나무이며, 생명과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이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이 지혜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소유하는 자는 복되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얻었으니 얼마나 복된가?
19절 이하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것, 바다를 만드신 것, 비, 이슬, 삶의 공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에 의한 것이다.
21절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로 네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내 아들아 분별하여 지키라”
22절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 네 목에 장식이 되리니” “네 영혼을 살리고 진정한 아름다움이 될 것이며”
23-26절 이미 앞서 언급했으나 19절 이하에서 지혜는 우리 영혼을 살리는 것, 평안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와 형제되셨다.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 되셨다. 형제 = 동일한 본질을 교리로 이야기하는 것, 그러나 구제시 믿는 자에게만 구제하는 것 아니다. 다른 무엇이 있다. 그 이유는 그 동일한 지혜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다스리신다. 지혜로 다스리신다. 그 지혜가 하나님으로 살리고 아름답게 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체가 지혜로운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것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그 내용을 말씀하신다.
27절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이유를 향한 דסח, 앞에서는 지혜로 사는 길이 무엇인가? 삶의 자세에서 דסח와 תמא를 말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이 자세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본절에서 “인자와 성실”의 자세는 무엇인가? 선은 주인으로부터 거절되어서는 안된다. 선의 주인은 내가 베푸는 선을 꼭 필요로 하는 자, 도움 필요로 하는 자에게 도움 거절해서는 안된다. 특히 네가 도울 힘이 있을 때 거절하지 말라.
28절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갔다 다시 돌아오라 내가 내일 주리라” 하는 태도도 안된다.
29절 “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謀害)하지 말며” “이웃에게 악을 행치 말라 그가 너와 더불어 평안히 거하게 하라” 이는 더불어 사는 삶의 원칙이다. 그와 더불어 평안히 거하게 하라. 이웃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자세이다.
30절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나하였거든 까닭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시비, 논쟁하지 말라. 이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시비, 논쟁하는 것이 가하나 시비, 논쟁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나에게 손해 있으므로 시비, 논쟁에 가담치 않겠다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누가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 한 나 몰라라 해서는 안된다.
31절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 편벽된 자는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자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와 친밀하시기 때문이다.
32절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느니라” ודוס(수두);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님과 늘 영적 깊은 교통 가운데 사는 사람의 모습이 이러하다.
33절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의인의 밭(집)에는 복이 있다”
34-35절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현달(顯達)함은 욕이 되느니라” 여기 보면 이웃에게 어떠한 자세 가질 것인가? 도울 수 있으면 도우라. 인색한 마음으로 차일피일하지 말라. 까닭없이 다투지 말라. 악한 사람 부러워 하지 말라. 이것은 참 지키기 어렵다. 어느 한 파당이 있어서 나쁜 짓으로 중요한 자리 차지할 경우에 나는 가만히 있으면 나는 다 빼앗긴다. 그러므로 나도 이렇게 하자!라고 하면 악인이 그런식으로 잘되는 것을 부러워하는 마음이다. 이런데 넘어가서 망치는 자 처럼 어리석은 자 없다. 선하게 있다가 남 하는 것보다 함께 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교회에 속한 자가 망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자기와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 망할 것이다. 무엇이 부러운 것인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행악자가 잘되는 것 보고 행악을 행하고 내가 분을 내고 하면 망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웃을 향한 바른 삶의 자세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는가? 하는 해답은 바로 하나님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 이웃을 향한 성실한 삶이 결국 하나님과 관계된 말로 결론지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이웃과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로 관련지어지고 만다. 이웃과 잘못, 죄, 악에 대해 사람이 책임을 묻지 않는다. 하나님이 책임을 물으신다. 이웃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종속된 무엇이요, 거기에 포함된다. 지혜가 이처럼 윤리적 성격인 사랑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것은, 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흔히 지혜라 할 때 약삭빠른 것이나 지식을 생각하는데 지혜라는 것은 약삭 빠르게 굴어 무엇인가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바로 지혜이다. 우리도 잘하다가도 자긍하면 옛날의 부리던 솜씨로 돌아간다. 망하는 길이다.
복습
1-8장까지 한 단락을 이룬다. 1장 서론 지난 후 지혜의 부름이 나타나고 8장까지 이어진다. 1:20절부터 지혜의 부름, 초청이 나오고 이후는 지혜의 응답 자세를 말한다. 3장에서는 지혜를 계속 기억할 것을 권고하고, 지혜를 따라 지속적으로 살 것을 말한다. 13절 이하부터는 지혜 획득자의 복됨을 말한다. 3장에서 어떤 인격적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든, 이웃이든 간에 지혜로운 삶의 모습을 “사랑과 신실함”으로 말한다.
어떤 대상에 지혜로운 태도는 “사랑과 신실함”(דסח와 תמא)이다. 이 둘은 따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과 신실함”은 이사일의(二思一意)이다. 이것이 하나님,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지혜로운 삶의 원칙이다. 다같이 하나님, 이웃에 대해 사랑과 신실함이다. 3:5의 신실한 사랑의 자세가 무엇이냐 하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네 생활을 의지하지 말고”라는 말을 통해 전자의 말을 강조하는 것이다. 믿음의 구체적 자세를 6절에 보면 “모든 일을 행함에 그(하나님)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4장
2장 후반부에 나온 내용을 확대, 반복하고 있다. 초두인 1-3절을 보면서 우리가 주의하여 짚고 넘어갈 것은 내 말에 귀 기울일 것을 권고하면서 “나도 내 부모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부모는 선생의 전형이다. 이것은 무엇에 대한 암시인가? 지혜의 전승, 지혜를 물려받은 것이다. 지혜의 전승적 성격, 또는 전승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우리가 이미 앞서 말했듯이 부모는 모든 교육자를 대표하는 표현이요, 부모가 교육자의 전형으로 나타난 것은, 교육자는 부모의 권위, 부모의 상징인 자기 자식 사랑으로 피교육자를 대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상적 교육자상을 부모에게 찾았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모든 교육자의 1차적인 것은 부모이다. 에베소서 5장 마지막과 6장 초두에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말한다. 자식은 부모 공경하고 부모는 주의 훈련으로 양육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현재 교육은 변질되었고, 실제 교육은 양육의 한 부분이요, 진정한 교육은 양육과 일치한다.
부모가 1차적 책임있다. 자식을 그리스도의 가르침 대로 해야 한다. 부모가 1차적 교육자요, 책임자이다. 현재 교회 교육이 각 부서로 나누어 있으나 이것이 부모의 1차적 자녀 교육의 책임을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부모의 자녀 교육을 통해 지혜가 전수된다는 것은 전승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말한다. 지금 지혜를 교육하는 부모 자신도 아버지께 받은 것이라 한다. 지혜의 전승은 교육자의 교육 통해 전승되는데, 참된 의미에서 지혜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이시고, 이것이 성경이나 부모 통해 교육으로 지혜가 전승되는데 깊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를 통해, 그가 세우시는 여러 직분을 통해 그의 뜻을 이루시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것과 사람을 통해 행하시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님이 하시나 사람을 통해 하신다고 할 때 이 두가지 요소가 균형갖기 보다 역방향으로 기울지 않았나 한다. 성경은 은혜 베푸는 자가 하나님이요, 모든 시선이 그분에게 가야한다. 그런데 인간 쪽에 너무 치우친 듯 하다. 하나님이 그의 교회를 통해 일한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그 반대 방향도 나타난다. 하나님 역사의 직접성을 간과하고 약화시키는 폐단이 있다.
이처럼 지혜가 교육자 통해서 전수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스라엘의 지도층이라할까, 하나님의 대리 통치 부류가 ①제사장, ②선지자, ③지혜자로 나누어진다. 지혜자가 제사장, 선지자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leadership이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지혜자가 어떤 공적 직분을 맡았는지 확인되지 않으나 예레미야서에는 제사장, 선지자와 더불어 언급되므로 직책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그들은 상담자로 표현되기도 한다. 왕에게 자문하는 역할을 했다. 즉, 왕의 참모 정도였을 것이다(ץעי;야아츠; 복수형태는 ץעיי;이아츠; 상담자). 이는 5절과 7절에서 같은 뜻을 달리 표현하고 있다.
7절 הניב הנק ךנינק־לכבו המכח הנק המכח תישׁאר(한 문장 - 지혜가 제일이니, 연계형 - 지혜의 시작은
(레오쉬트 하크마 퀴네 하크마 우베칼-퀸얀카 퀴네 비나)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
지혜를 사라고 하는 적극적 권유를 2장에서 배웠다. 지혜는 하나님의 은혜로 얻고, 하나님이 지혜의 근원이요, 출발이다. 지혜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나 인간편에서 얻으려는 적극적 자세를 동시에 언급한다.
6절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를 사랑하라”
8절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지혜를 품으라”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요, 인간의 적극적인 추구의 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이 둘은 연결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인간편에서 적극적 자세가 하나님이 주시면 개입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인간편에서 적극적 자세는 내 의지, 노력으로 도달하는 것을 생각하기 쉽다. 이런 개념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성과 상충되게 여긴다. 지혜는 인간 의지로 도달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대전제 되었다면 인간의 자세는 하나님을 지혜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지혜를 구하는 믿음의 자세이다.
하나님이 지혜의 근원이요, 하나님이 지혜주신다는 하나님 경외의 자세를 가질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고, 그것도 하나님이 세운 일반적 보편자인 부모, 선생의 교육의 전승을 통해 주신다는 뜻이다. 이 말은 믿는 자에게 있어 중요한 삶의 자세이다. 하나님편의 은혜주심과 인간편에서 구하는 것이 결합될 수 없는 이중적 자세로 본다. 그같은 생각은 인간의 진정한 의미의 적극적 자세를 오해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 하나님 떠나서는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밖에 받을 수 없다는 것으로, 하나님 향한 인간의 유일한 자세는 믿음의 자세 뿐이다.
“사랑과 신실한 마음”이 하나님께 타나날 때는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나타나고, 하나님이 모든 일에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자세와 연결된다(약 1:5).
이런 면에서 세속 교육의 때를 벗지 못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적극적 인간 자세의 혼동을 갖고 온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서 인간의 의지에 대한 것이 깨어지지 않을 때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7절에서는 “......지혜를 얻으라” 신약에서는 ‘값진 진주를 얻으라’ 고린도전서나 골로새서에서는 복음 자체가 지혜요, 복음의 본질인 그리스도를 가리켜 지혜라고 한다. 7절의 말씀은 지혜를 최우선의 것으로 생각하라는 뜻의 말씀이다.
10절 이하는 앞의 말의 반복이다. “악인의 길에서 떠나라......” 지혜로운 자의 제 1원칙이다.
17절 이하에는 지혜롭지 못한 자의 삶이 악한 것으로 특징지어진다고 한다.

5장
두번째는 2장 말미에서 말했듯이 이방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 “이방 여인”의 의미를 하나님 백성이 아닌 자,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라고 했다. 이방인을 성경에서는 불신자, 하나님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라고 한다. 본질에 있어서 이질적 존재이다. 존재의 새로움을 알지 못한다. 즉, 중생, 새 생명을 모른다.
3-6절 이방 여인의 특징에 대한 설명,
4절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위선적 모습, 여기의 근본적 경계의 말은 하나님의 교회와 근본적으로 이질적 요소를 조심하라는 말이다. 특히 이방 여인이라 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악을 행케 하는데 여성적 세력, 여인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은 아름다움이다. 그 영향력은 달콤하고 매끄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이 아름다움이 변질될 때 무서운 무기가 된다. 외향으로 사람의 마음을 녹이나 실상은 칼처럼 사람을 상하게 한다. 이것을 멀리하라는 것이 본문의 요지이다.
7-8절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아예 접근을 하지 말라. 달콤하고 매끄럽게 유혹하는 그런 형태의 죄에 빠지지 않는 것은 접근하지 않는 것이다.
15-19절 실제적으로 신자의 삶(부부관계)에 적용가능하나 이것은 이방 여인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 여기 “아내”는 이방 여인을 폭넓게 이해할 때 세상 쾌락에 취하지 말고 교회의 아름다움에 만족하라. 너에게 주어진, 교회에 맡겨진 참된 기쁨과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라.
잠언은 부모 자식간의 관계로 이해하기 쉬우나 이스라엘이 갖는 의미를 이해할 때 잠언은 그 적용성이 넓어진다. 남녀간의 규범이 신실성에 있어 이방 여인의 유혹에 안넘어가고, 아내와 동거동락은 교회에 속한 자로 믿음을 지키는 신실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21-23절 이방 여인에게 유혹당하지 않고 본 아내를 사랑할 이유가 21절 이하에 나온다. 여기보면 인과응보가 하나님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 아니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와 직결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원리이다.

6장
1절 이하 이웃의 보증을 서는 일에 대해 나온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여기서 “이웃”은 그 다음 구절에 의해 규정된다. 어떤 종류의 이웃인가? 그는 외인이다. 이것은 이방 여인과 연결된다. 이방인으로 표현되는데, 이방의 이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백성이 아닌 자이다. 하나님 백성과 질이 다른, 교회에 속하지 않는 그런 자이다. 보증을 선다는 것은 그 사람을 신뢰하고 동사(同事)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보증 취소”는 세상 사람과 교회에 속한 자 사이에는 커다란 장벽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일을 도모할 생각을 말라. 신약에서는 이방인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일반적 권고로 악인을 멀리하라는 부류의 권고이다. 너와 본질적으로 다르고 신뢰가 불가능한 자와의 약속은 잘못이므로 약속을 취소하라는 것이다. 교회 밖 사람, 이질적인 자와 같이 말라. 그것은 스스로 굴레에 얽매이는 것이다.
26절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정숙지 못한 유부녀를 좇지말라. 유부녀와 관계는 불륜의 관계이다. 정당치 못한 행위의 대표이다.

7장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욕망을 채우자는 유혹이 교묘하게 나온다. 정숙하지 못한 여자의 접근 방법은 어떠한가? 그것은 7절 이하에 나온다.
10절 유부녀가 창기의 옷을 입고 접근한다. 이 여자는 집 안에 머무르는 일이 없다. 12절 이하에도 하나님께서 내 서원한 바를 들으셨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이 하나님 일이라 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다. 하나님이 간음하도록 허락하셨다고 한다.

8장
1절 이하의 표현과 1:20절 이하의 내용을 보면 유사함을 볼 수 있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지혜의 초청, 부름의 장소가 나온다. 지혜의 부름의 장소를 말씀하기를 길가, 높은 곳, 모든 사람의 시선이 들어오는 곳, 늘 접촉하여 사는 일상 속 등이 지혜의 삶의 장소, 지혜의 초청의 장소이다. 이는 지혜의 보편성, 누구에게나 개방된 지혜를 말한다. 그러나 지혜를 획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지혜가 진실, 올바름과 긴밀한 관계에 있고 편벽, 왜곡 된 것과는 반대된다. 지혜라 하면 규범적 성격과 관계없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는 윤리성, 옳고 바름과 떨어질 수 없고, ......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윤리성만 아니고 하나님을 근거한 믿음의 자세이어야 한다.
15절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이하에 보면 땅의 제왕들이 지혜를 가지고 그들의 통치를 베푼다고 한다. 이 저변에는 어떤 전제가 있는가? 왜 땅을 다스리는 자들이 지혜로 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언급된 열왕, 통치자들은 하나님께 세계 통치의 위임을 받은 대리 통치자이다. 모든 지상 통치자가 지혜로 다스릴 것은 그 왕이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지혜로 다스리는 통치는 의, 신중, 분별, 상황에 적절한 판단력이 지혜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져올 결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22절 이하에 보면 지혜가 한 인격으로 제시된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지혜의 근원, 지혜가 무엇인가에 대해 근원적 답변을 한다. 표현을 의인화시킨다. 마치 인격 처럼 취급되어 제시된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가 의인화된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지혜 자체의 인격성을 말한다고 못박을 것은 아니다. 일반적 의미에서 지혜를 의인화해서 부른다.
22절의 전후 문맥을 보면 지혜와 지혜 추구자의 관계를 인격적 관계로 추구한다. 지혜가 인격적이 아닐 때 창조했다는 것은 창조된 무엇이다. 지혜를 하나님 속성 중 하나라 한다면 이는 영원한 것이다. 여기서는 창조된 것으로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가 한 인격과 관련된다고 할 때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 한다. 무관하지 않는 이유는 신약에서 예수님을 지혜에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여기서 창조했다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인가?
יננק(콰나니); 창조하다, 획득하다, 존재하다. וכרד תישׁאר(레오쉬트 다르코); 특정한 시간에 없다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 초월해서 영원적으로 발생하신의 의미이다. 이 표현 속에는 성자의 영원적 발생이 포함되어 있다. יננק와 성자의 영원적 발생과 큰 무리가 아니다. 창조 사역에 인격으로 참여하였다는 가까운 표현으로 사용된 것이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라고 부르는 것이 굉장히 넓은 기반 위에 이해된다.
23절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창세 전에 나는 태어났다
1-21절까지 지혜를 말한다. 22절에서 독특한 지혜의 모습을 말하는 것은 모든 지혜가 한 인격 속에 환원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신약 골로새서 2:3에서도 증언한다. 한 인격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가 축적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격으로서 지혜임을 말한다. 지혜의 본질 자체가 인격으로 연결되는 것은, 지혜는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진리, 길, 벗이다. 또 이런 내용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된다. 세계 질서를 세우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할 때 하나님 곁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다. 30절에 ןומא(아몬)을 쓰면서 건축자의 계획대로 실현하는 것으로 말한다.
지혜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하나님 계명, 하나님 경외, 의로운 삶의 동의어가 된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지혜는 삶의 기술이라면 성경에 그대로 적용되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혜가 삶의 기술로 어떻게 삶을 바로 사는 것이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되는가? 쉽게 말해 하나님 경외하고 순종하는 삶이 지혜의 삶이 되는가? 세계와 그 안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삶의 질서를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이다. 지금도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가하는 지혜, 지식(사물을 관찰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지혜에 포함된다. 어떤 존재의 참된 것은 하나님만이 아신다. 피조물의 일부인 물리적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도 믿음 안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모든 존재의 참된 본질은 하나님만 아시므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알 수 없다. 이런 것을 배경으로 하고 지혜, 지식의 출발은 하나님이다. 모든 것의 지적 작업은 하나님 경외하는 믿음에서이다. 하나님 경외가 지혜, 지식의 출발이라 할 때 포괄적 의미가 있다. 8장은 지혜의 가장 근원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에 귀속된다.

전도서(תלהק; Ecclesiastes)

전도서부터 시작합시다. 왜 전도서부터 시작하는가 하면 전도서는 인생의 가장 궁극적이고 기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전도서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게 무엇입니까?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말이 제일 기억에 남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실 허무한 감이 듭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아름답고 인생은 의미가 있다는데 계속 허무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니 얼핏보면 성경에 이런 글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서를 제대로 알고 보면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인생의 근본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1절에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왕 전도자의 말이니라’라고 해서 솔로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상 가장 지혜로왔던 인물이라 일컫는 솔로몬이 내린 결론이 ‘인생은 헛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인생은 헛되다’는 결론으로 끝나고 마는가? 1장부터 이런 결론을 복선으로 깔고 들어가는 것을 보면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 결론이 나오는 것은 그냥 내뱉어진 것이 아니라 전도자가 이전에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다가 나름대로 잘 추구해서 내린 결론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품었던 의문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3절에 보면 ‘사람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라고 해서 자기가 품었던 의문이 무엇인지를 제시합니다. 즉, 쉽게 풀자면 사람이 일평생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람에게 남는게 무엇인가?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 여기에서 ‘해 아래서’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즉,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땅에서의 삶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것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풀어가면서 가장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 주는 글입니다. 도대체 성경은 인생의 의미를 뭐라고 가르쳤으며 그 해답은 어떤 과정을 통해 결론으로 이끌어지는가? 그 과정 속에는 이제까지 세상에서의 모든 종교, 도덕, 철학 등에서 그 나름대로 생각하고 추구하는 방법과 과정들이 몽땅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전도자는 이와같은 질문을 제기해 놓고 1차적으로 ‘헛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헛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쓰여진 의미는 수증기, 입김이라는 의미입니다. 기껏 인생 60, 70년을 살았더니 남는게 없더라는 이야기 입니다. 어떻게 솔로몬이 이런 결론을 내렸을까요?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인생의 의미를 알아내고자 하여 전도자는 지적인 방법과 경험적인 방법 두 가지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전도자가 시도했던 이 모든 방법 외에 혹시 여러분이 알고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생각해 보시고 저에게도 가르쳐 주세요. 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혹시 다른 방법이 있다면 다른 결론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저희 신학생들끼리 모여 여기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아무리 궁리해도 전도서에 나오는 범주를 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선 전도자는 첫번째 방법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채택했습니다. 여기서 둘로 나누어 우선 자기 바깥 세계, 우주의 피조계에 대해 살펴보는 부분부터 시작됩니다. 4절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에서 땅에 대해서 우선 생각합니다. 5절 ‘해는 떴다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해는 보통 천체를 상징할 때 쓰이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반복되는 흐름을 갖고 있다는 특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6절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바람이라 하면 보통 신비하고 알 수 없는 특성으로 이해되어집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예수님의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나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함과 같이 성령으로 난 사람도 이러하니라’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네번째로 7절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즉 물의 운행에 대해 관찰하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자연계, 우주계를 살피고 관찰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줄만한 것이 있는가를 관찰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발견한 공통점은 8절과 같이 만물이 피곤하다는 결론입니다. 이 말은 피곤해서 지친 상태라기 보다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뺑뺑도는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른 보기에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 같지만 가만보니 그 나름대로의 법칙과 굴레가 있어서 반복된 질서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없고 법칙과 질서만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따라서 9절 내용과 같이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이전에 있던 것을 생각지 못해서 새로운 것처럼 생각할 따름이지, 근본적으로는 한계와 법칙의 굴레에 갖혀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피조계를 살펴본 결과 여기서는 인생의 의미를 찾을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그 두번째의 방법으로 이제는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합니다. 즉 인간에 대해서 말입니다. 12절에서 18절까지가 이 내용입니다. 특별히 창세기 1장과 이 부분을 연결시켜 생각하면 좋습니다. 창세기 1장은 자연계와 우주계를 먼저 다루고 그 다음으로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계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인간에 대한 부분입니다. 전도서도 이와 마찬가지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이 내용이 12, 13절에 나옵니다. 여기서는 이 현실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최선의 인간 즉, 이상적인 인간을 두고 생각합니다.
13절에는 ‘궁구하며 살피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기 위해 온 마음을 기울여 깊이 있고 넓게 애쓰는 사람을 말하는데 13절 중간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즉,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을 때는 도대체 이 땅에서 왜 사는가?라는 것을 마땅히 나름대로 생각해 보고 궁구하며 살도록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을 수단으로 해서 그것을 생각하느냐 입니다. 여기나온 13절에 ‘지혜를 써서...살핀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지혜를 사용해서 삶의 의미를 생각했음을 알게 됩니다. 역사상 솔로몬보다 더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솔로몬이 취한 방법은 자기가 가진 지혜, 이성을 가지고 찾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과정에서 한계에 부딪힌 것입니다. 즉, 15절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에서와 같이 지혜를 그 수단으로 하여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다가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이성으로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르네상스 시대를 아시죠? 그 시대에는 중세 때와는 달리 이성이 모든 것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이성이 모든 문제를 결정하고 모든 것의 의미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때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교육만 잘 시키고 이성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되면 모든 것이 가능해지리라는 생각이 편만했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러한 생각이 파괴되기 시작하면서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되고 결국 이성으로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 철학자 ‘칸트’가 바로 그의 책 ‘순수이성비판’에서 이 이야기를 합니다. 칸트에 이르러 비로소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에 비해 벌써 몇 천년 전에 성경이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다 해답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놀랍지 않습니까? 성경은 이성에 대해, 그것이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삶의 의미를 풀 수 없다고 가장 지혜 많았던 솔로몬의 입을 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인생의 거대한 의미를 알아내지 못한다고 하면, 최소한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미친 짓인가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17, 18절에서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18절에 보면 많이 배울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며 마음만 괴롭고 고통만 더한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 정리해 봅시다. 처음, 문제제기를 한 것은 삶의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 방법으로서 우선 자기 주위의 세계를 살펴보니 거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 방법은 포기합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가진 이성과 지혜를 사용해서 알아보려니 여기에도 한계가 있어서 결국 찾지 못했더라는 이야기가 1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지혜를 써서 연구하는 방법에는 한계가 있으니 이제 실제적으로 몸으로 부딪히면서 삶을 경험해 봐서 내 인생의 참 즐거움을 줄만한 것이 있는가를 찾기 위해 새로운 방법 즉, 경험적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이 2장 1절부터의 내용입니다. 한계에 다다른 이성으로서의 방법은 포기하고 실제 삶으로 들어가서 내 인생에 기쁨을 주는 것이 있는가를 모두 시험에 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냐 하면 혹시 남들이 미친 짓이라고 하더라도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줄 수 있다면 경험하겠다고 하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3절부터 시도한 방법이 다양하게 제시됩니다. 첫번째, 술독에 빠져보는 것입니다. ‘술’은 쾌락의 대명사로 보통 언급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것은 세상적 방탕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전도자는 거기에 어떤 인생의 즐거움이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방탕한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그만둘 자세로 술독에 빠져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이정도 술에 빠지면 머리 속에 지혜가 없어지기 마련인데 3절을 다시보면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이 말은 즉, 이것이 어떤 인생의 의미가 있는가를 마음에 생각하면서 술에 빠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지혜는 여전합니다.
두번째 방법으로 3절 후반에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어리석은 일이라도 가리지 않고 모두 해보았다고 합니다.
세번째로 남자들이 보통 많이 쓰는 방법이 나옵니다. 4절 ‘나의 사업을 크게 하며...’ 이것을 현대말로 풀어보겠습니다. 요즘말로 하자면 기업을 하나 세웠는데 현대그룹과는 비교도 안되는 어마어마한 기업입니다. 즉, 사업성취를 해서 대궐같은 궁전을 지었습니다. 여러분, 솔로몬이 지은 궁전을 아시죠? 그러고 또 에덴동산 같은 큰 정원도 가꾸고 거기에 온갖 아름다운 나무도 심고 또한 무역을 크게 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팔레스틴 밑에는 이집트가 있고 위쪽으로는 바벨론이 있습니다. 일상 4대문명이라고 하면 어디를 꼽죠? 인도문명, 중국문명, 애굽문명, 그 다음으로는 바벨론문명 이렇게 꼽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인류의 거대한 두 문명권인 애굽과 바벨론의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한 것입니다. 중간에서 중계무역도 하고 통행세도 받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이 강해지면 이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쳐들어오고 바벨론도 그랬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숙명적으로 이리 맞고 저리 맞게 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고, 이것을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가나안 땅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더 강대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하여 모든 권세를 쥐고 부를 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많은 돈도 벌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노래하는 남녀를 항상 두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지금 유명한 사장들이 가든파티를 할 때 밴드를 부르곤 하지요? 그러나 이건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속으로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 8절 이후를 봅시다. 솔로몬이 처와 첩을 몇 명이나 두었는지 아세요? 굉장히 많습니다. 즉, 남녀의 사랑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가 있느냐를 찾으려 애썼던 것입니다.
자! 솔로몬은 이 정도로 권력도 가지고 모든 것을 성취하고 누리면서 해 볼 것은 다 해보았습니다. 어느 정까지냐? 10절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다른 말로 하면 생각나는대로 원없이 하고 싶은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것들은 다 해봤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정도로 호강하면 일반 사람들은 생활의 안락함으로 지혜가 없어지게 마련인데 지혜도 여전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1절에 보면 모든 것을 다 해봤지만 모두 헛되다는 결론으로 갑니다. 전도자는 왜 이 모든 것을 다 해보면서 어떤 과정을 통해 헛되다는 결론을 내렸는가? 하는 점입니다.
1차적으로는 가만히 살펴보니 이 땅에 살면서 세상에서 누구보다 잘사는 것 같지만 종말을 보니 결국 똑같이 죽더라는 것입니다. 즉 허무하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일반으로 똑같이 죽어서 땅에 묻힌다는 겁니다. 또한 이렇게 전도자가 자기 시대에 큰 일을 했더라도, 영원히 사람들이 기억해 주지 않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날리기 위해 산다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전도자는 사는 것은 헛될뿐 아니라 혐오스럽기까지 하다고 합니다. 23절까지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일평생 잠도 안자고 고민하며 지혜를 짜서 나름대로 업적과 기업을 이루어 놓았는데 이것을 지혜자가 물려 받을지 우매자가 물려 받을지도 모르고, 내가 열심히 이루어 놓았지만 결국 누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러니 아무리 노력해도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렇다면 그나마 삶에 즐거움을 주는게 무얼까를 생각해 본 것이 24절에서 26절까지에 나옵니다. 먹고 마시고 쉬면서 인생을 즐기는게 최고가 아닌가? 하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즉, 벌은 만큼 잘 먹고 잘 살기라도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조차 마음대로 안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그것도 하나님이 주셔야하지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내 인생에서 내 손에 있는 것같은 재물로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도 내 손에 달려있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래서 2장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는 모든 것을 다 시험해 보았지만 결국 내 인생이 내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절박하게 느끼고 26절 ‘이 모든 것이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하는 것 같다’라고 합니다.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전도자는 우선 이 땅에서의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면서 1차적으로 그것을 찾기 위해 첫번째로 피조계를 관찰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일정한 법칙과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 다음, 지혜, 이성을 수단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성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자 그 다음 실제적으로 생활하고 경험하면서 큰 사업을 성취하고 쾌락을 즐겨 보았으나 그것도 모두 헛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죽고 난 다음에 자기 업적이 기억된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게 이루어 놓은 것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렇다면 살아있는 동안 잘먹고 잘살기라도 하자고 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그 스스로 원하는 바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더라는 것이 1, 2장까지의 설명입니다.
여기까지에서 전도자가 좌절한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 자신이 어떤 한계 안에 갖혀 있다는 것을 본 때문입니다. 삶의 적극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 인생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로 인해 불가능하다면 차선책으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잘먹고 잘살자는 시도를 해보았으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자 삶의 허무를 논할 수 밖에 없는 상황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전도자는 놀라운 것을 발견함으로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3장부터 유명한 구절이 나오지요? ‘만사에 다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부분에서 시작해서 11절까지 계속 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생각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해 줍니다. 전도자가 좌절한 근본 이유는 한계 때문이었는데 그 한계가 왜 생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한계 때문에 좌절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것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셨다는 사실이 11절에 나옵니다. 똑같은 내용을 두고 예전에는 그것을 생각할 때 좌절과 허무로 밖에 갈 수 없었던 것이 관점이 바뀌니까 마음이 기쁘고 평안하고 어떤 아름다움을 느낀 것입니다. 전도자의 표현한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아름답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다스릴 때 그 뜻과 계획에 따라 그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에 맞는 한계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한계는 나로 하여금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드셨다는 이야기이고, 그러면 그 한계를 왜 정하셨는가를 알아가면 오히려 허무로 가는게 아니라 그 한계를 통해 내게 가르쳐 주시는 뜻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3장 이전까지는 ‘하나님’ 이야기가 한 번도 안나옵니다. 그리고 3장 이후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즉, 이전까지 삶의 의미를 생각하되 내가 바라보는 안목을 세상과 자신에게만 두고서 찾으려니까 한계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한계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 없는 사고체계와 세계관에서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인정하는 자리까지 들어가는 내용이 3장의 내용입니다.
자기를 좌절케 하였던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그 속에서 찾아나갈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방법임을 깨닫고 그래서 의미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는 아름다운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계관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 우리가 잘 아는 불교의 철학입니다. 그것은 반복, 즉 윤회사상이 골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한계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없는 것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한계에 대해 그 우주질서 자체에서 우연히 생긴게 아니라 그렇게 만드신 분이 있고 그 한계를 만드심으로 온 우주를 다스려 나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삶의 한계 안에서만 보면 숙명론에 빠지고 말게 됩니다. 그래서 발달한 것이 점성술이고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계관이 취하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게 아니라 그 한계를 느끼게 하고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 한계를 두신 이유를 찾아 나간다는 것,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섭리하셔서 아름답게 만드신다고 말합니다.
모든 세계의 한계 자체만을 볼 때는 분명히 비참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아무 의미없이 그렇게 만드신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인생을 의미있게 하려고 하신다는 의미에서 전도자는 ‘만사에 다 때가 있다’고 고백하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섭리하시기 때문에 좌절을 느꼈던 한계가 하나님 안에서 의미있게 되는 것이라고 전도자의 결론이 바뀌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없는 세계관에서 근본적 한계에 부딪혀 좌절했지만 이제는 그 한계는 마음대로 생긴게 아니라 그것을 정하신 그분의 뜻과 섭리를 이루어 나가시는 방법이기 때문에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알게 되어서 내린 결론이 3장 14절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라고 본론적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여기까지 지나온 과정을 봅시다. 처음에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생각해 보았으나 부딪혔던 벽이 인간의 한계였습니다. 문제는 그 한계 때문에 좌절한 것인데 그러나 새롭게 깨달은 것은 그 한계는 하나님이 우리를 잘 다스리시기 위해 만드신 것이며 아름다운 계획이 있어서 그렇게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던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자리까지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다스려 나가시되 그 방법으로서 우리 인생에 한계를 두시고 자연에도 법칙과 한계를 두셨으며,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그대로를 다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름답게 때를 따라 이루어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전도자는 이제까지 하나님 없이 생각하다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생각하는 자리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 문제를 우리에게 적용해 보기로 합시다. 여러분 가정이나 국가의 문제, 혹은 생활상의 여러가지 문제나 내가 처한 상황에서 부딪히는 한계라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참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없이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뒤집어 놓고 생각해 보세요. 그걸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스려 나가시며 우리의 생각을 바로 잡아 놓으려고 하신다는 것, 자신이 처해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들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되면서 겸손하게 하시며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아님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고백했습니까?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닌 솔로몬의 입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그는 지혜가 최고로 많았고 또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경험해 본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물며 우리야 어떻겠습니까?

지난번 강의에서 우리는 사람이 일평생 동안에 사는 동안의 삶의 의미와 목표에 대하여 진지한 답변을 시도하였습니다. 전도서는 우선 헛되다는 표현을 5번이나 반복하면서 삶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추적합니다. 먼저 이 세상 바깥의 우주를 관찰, 연구해 보았으나 움직이는 세상의 법칙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것 같지만 그것은 진정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만 그렇게 느낄 뿐이라는 것입니다.
“보라 이것은 새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않으니 앞으로 올 세대가 우리 세대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않으리라.
우주와 세상으로부터 이제 인간 자신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의 창조순서를 따르고 있는 셈이기도 하지요. 인간 자신을 살펴보아도 거기에서 엄청난 한계를 느낍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고귀한 것은 생각하는 능력인데 그 능력도 무한한 것이 아니라 역시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사람이 스스로 생각해서 인생과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찿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결핍과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이 기독교와 전혀 상반되게 인간으로서 가지는 그 한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뛰어 넘으려는 다양한 형태의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불교에서 윤회사상이라고 언급하는데 인생이 부딪히는 여러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노력을 피눈물나게 하는 것입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 다음으로 시도했던 전도자의 방법은 삶의 현장 속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혀서 찾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술에 만취해 보기도, 방탕해 보기도, 돈을 원하는 대로 벌어 보기도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모두 다 시도해 봅니다. 그런 시도를 했던 궁극적인 이유는 내가 술을 마시고 방탕하면서도 방탕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거기서나마 나의 삶의 의미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혹시 있지 않을까?라는 입장에서 방탕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헛되었다고 전도자는 고백합니다. 모든 인생이 부러워할 만한 또한 아직도 많은 인생이 솔로몬이 누렸던 것들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 열심히 살아나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그 모든 것이 헛되더라는 솔로몬의 자전적인 고백은 우리에게 큰 경종과 의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은 무엇 때문에 헛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고 고백합니까? 가만히 살펴보니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권세와 부를 가지고 살았다손치더라도 그 인생의 마지막을 보니까 모든이가 똑같이 죽음으로 끝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뛰어 넘을 수 없는 필연적 한계로 인하여 좌절하다가 그럼에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삶을 살아보려고 애썼지만 종국에 가서 그렇게 산 사람이나 그냥 아무렇게나 산 사람이나 똑같이 죽음이라는 거대한 한계에 부딪히니 얼마나 헛된 인생인가?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무런 희망이 없이 염세주의적 인생관을 가질수 밖에 없으나 솔로몬은 바로 이런 헛된 삶에서 우리가 해방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제시하는 과정이 전도서 3장 이하입니다.
솔로몬은 인생을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했던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새로운 조명으로 이 문제를 다시 풀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바로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가지는 한계는 우리 인생을 좌절하고 허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아름다운 뜻이 있어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조성하신 한계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그 뜻은 아무렇게나 생긴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그 한계 때문에 허무하고 좌절하고 말았다면 이제는 그 한계 때문에 인생은 의미 있을 수 있다는 대역전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한계는 의미없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한계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면 오히려 인생을 아름답고 의미있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지 않느냐는 솔로몬의 깨달음입니다.
세상의 종교들과 인간들의 철학들은 그 한계를 넘으려고 애쓰고 있으나 기독교에서는 단지 현실도피적으로 야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시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려 나가시는 방법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대단한 믿음이 없을 때는 물론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부딪히는 한계에 대하여 일차적으로 원망하거나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방법이라고 믿을 때 오히려 그 한계로 인하여 감사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자리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놓고 신자와 불신자가 정반대의 해석을 내리고 정반대의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계와 인간 그 자체만 또한 세계와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인간은 당연히 좌절, 실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가 하나님이 없는 인생관 및 세계관에서 드디어 하나님 중심의 인생관 및 세계관으로 바뀌어지는 분기점인 것입니다.
신앙인은 어떠한 처절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옵니다. 하나님의 크신배려 속의 계획과 그의 간섭을 믿고 인정하면서 그 한계와 좌절을 아픔과 한숨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님의 새로운 뜻을 알아나가는 더 깊은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라는 세상적인 좌절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이 때에 따라 아름다게 하신다는 그분의 뜻과 섭리 안에서 큰 기쁨과 감사를 발하는 찬송으로 전도서는 2차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까지의 복습입니다만 여기서 덧붙여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법에 대한 두 가지 형태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처한 환경을 통한 섭리적 인도와 또 다른 하나는 본인 스스로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의식적으로 따라가는 인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곤합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니까 그때 그 순간에는 알지 못했는데 지내고 보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였다고 말입니다. 이 때는 그 사건을 당하는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무지하여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으로 섭리적 인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며 또한 있을 수 밖에 없으나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자각하는 분량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섭리적 인도만으로는 그 사람 스스로 온전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유아기적 신앙으로 배고프면 울고 불편하면 징징대는 형태가 많은 것입니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도했느냐고 물으면 사실 오랜 세월 후에 보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였다는 결과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의 신앙 형태는 그 어려움에서 대부분 처절한 좌절과 슬픔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형태로 있다가 지내고 나서야 분명히 하나님의 손길이었음을 발견하곤하는 것입니다.
여기 전도자도 천하의 범사에 때가 있어서 나의 한계로 인한 좌절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오히려 아름답게 만들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과 인간 자체만 놓고 - 하나님 없는 세계관 - 생각하다가 그래서 전도서 2장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거기서 허무감과 좌절감을 발견하고 드디어 하나님을 발견하는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주인이 되어서 생각하던 자리에서 드디어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서 생각하는 관점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연법칙 또는 우리 인생이 처한 모든 한계들은 우리를 좌절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미있게 다스려 나가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에서 외쳤던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것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라고 감사, 찬양하는 자리에까지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면 처음에는 감격이 넘치고 참 좋습니다. 실패했을 때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발견하면서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몇 년 정도 다니고 나면 예전에 가지고 있던 것보다 더 큰 실망감이 사람을 사로잡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나서 한없이 계속 즐거웠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솔직하게 가만히 자신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아름답게 다스려 나가신다고 했는데 신실하게 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쁜 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팽개치고 예수를 안믿겠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아름답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전도자 솔로몬이 딱 부딪힌 것입니다. 요전까지는 비신앙인이 고민하는데서 신앙인으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신앙인으로서 가지는 중요한 고민과 갈등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성경이 제시하는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의미있게 다스릴 것이라고 믿지만은 마음으로는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머리로는 믿지만은 실제적인 생활에서는 ‘그렇다’는 것이 없이 그냥 그냥 살아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기형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문제들을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아주 잘 풀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의 뜻대로 아름답게 주관하심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믿는 사람에게 생겨난 새로운 문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로 요약해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첫번째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에게 있는 한계를 두셔서 우리를 다스려 나가신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이 뜻은 아름답고 멋있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좋은 뜻을 갖고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그 뜻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처해 있는 문제에서 과연 하나님께서 왜 나로 하여금 이런 상황에 처해있게 하실까?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참 아름답다손 칩시다. 그것을 우리가 또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내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바로 이 문제에 부딪힌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의미있게 다스려 나가신다 하더라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를 3장 11절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에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계시다면 당연히 사람들은 그 뜻을 알아야만이 참으로 기쁘고 참으로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실제로 가만히 살펴보니까 문제는 인간이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더라는 것을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가 많다는 솔로몬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만 우리 인간 스스로는 그 뜻을 알아서 찾아갈 수 있느냐 말입니다. ‘없다’는 이야기를 이 전도자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쪽에서 아무리 좋은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저 아무 의미도 모르고 그냥 살아 간다면 단지 알지 못한다는 차원을 넘어 우리의 삶이 꼭둑각시에 불과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드디어 하는 겁니다. 그것이 1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더하거나 제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사람이 그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두번째 문제제기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 인간 스스로는 내가 처해 있는 그런 상황 속에서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또한 가만히 살펴보니까 하나님은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셔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고 싶으신대로 다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하나님 하시고 싶으신대로 다 하실텐데 내가 이 땅에서 열심히 한다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또 하나님이 하시고 싶으신대로 하신다면 우린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린 하나님에 의해서 끌려 다니는 꼭둑각시에 불과한가? 하는 심각한 문제를 여기 14절에서 제기시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는 더 할 수도, 덜 할 수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세번째는 정말 더 심각한 문제제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심각하냐면 12장까지 대부분의 이야기를 세번째 문제로 삼은 걸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상을 가만히 살펴보니까 하나님께서 아름답다하고 다스리시는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부조리도 많고 뒤죽박죽인가 하는 문제제기 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면서 이 땅에서 돌아가는 것을 보니까 악인들이 더 출세를 하고 잘사는 것이 현실로 보이더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다스리신다는데 왜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은 바르게 되어지는 일이 아니라 뒷구멍으로 하는 일이 더 잘되는가 말입니다. 그 부조리한 내용을 이제 하나 하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대표적으로 뽑아서 보면,
?내가 보면 이 세상에는 잘못된 것이 많이 있다. 법정에도 악이 있고 반드시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는 곳에도 악이 있다?(3:16)
재판이라는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것을 판별하는 자립니다. 가장 공의로워야 되고, 가장 공평해야 되고, 가장 의로워야할 자리에 악이 있다는 말입니다. 모순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악과 부조리가 공의를 행해야 될 곳에 만연돼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의 우리 사회를 보아도 피부로 느끼는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부조리한가?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모든 학대와 슬픔을 보았다. 학대 받는 자가 눈물을 흘려도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학대하는 자에게는 권세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미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자보다 더 행복하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 않아 이 세상의 악을 보지 않은 자이다?(4:1-3)
여기 내용은 세상의 여러 부조리한 문제를 제시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느니라’ 정작 위로를 받아야 할 이에게는 위로해 주지 않고 포악과 아픔과 학대만 준단 말입니다. 우리 자신들을 잘 봅시다.
잘 차려 입은 사람만 반대로 대접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권력을 가졌던 사람이라는 것으로 그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엄청난 비리가 폭로 되었음에도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속성이 아닙니까? 반대로 약자는 위로를 주기는 커녕 짓밟는다 말입니다. 또한 포악하게 하는 자가 더 큰 권세를 가지고 행사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전도자는 아주 냉소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학대와 착취를 당하는 한 마디로 약육강식의 세상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정말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는 위로를 해주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포악한 사람이 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니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이 왜 이렇게 부조리가 있느냐? 하고 이 전도자는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생기는 심각한 고민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고민과 갈등은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제기하고. 거기에 대해 어물쩡 넘어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 이런 부조리도 있습니다.
?나는 또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여 성공하고자 하는 동기가 자기 이웃에 대한 시기 때문인 것을 알았다. 이것 역시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팔짱을 끼고 스스로 굶어 죽는 바보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별로 가진 것은 없지만 마음이 편안한 것이 많은 것을 가지고도 정신없이 일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낫다?(4:4-6)
여기 내용은 온갖 수고와 노력을 다하여도 칭찬은 커녕 온갖 욕만 당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한 사람이 자기가 한 만큼의 수고에 대해서 인정을 안해주는 사회란 말입니다. 경쟁사회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삶의 정당한 능력과 가치를 평가하기 보다는 어찌해서든 깎아내려 놓아야만 속이 시원한 사회란 말입니다. 또한 실력으로 승진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편법이 동원되는 것이 인간 사회가 아니냐는 심각한 지적입니다.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나는 이밖에도 세상에서 또 헛된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아들이나 형제도 없이 혼자 살면서 억척스럽게 일하면서 자기 부를 만족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즐거움도 마다하고 누구를 위해서 그처럼 열심히 일하는가? 이것도 다 헛된 것이며 불행한 일이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은 협력하므로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두 사람 중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그를 도와 일으킬 수 있으나 혼자있다가 넘어지면 그를 도와 일으켜 주는 자가 없으므로 그는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추운 방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해진다. 그러나 혼자서 어떻게 따뜻해질 수 있겠는가? 한 사람으로서는 당해낼 수 없는 공격도 두 사람이면 능히 막아낼 수 있으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외로움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인류가 타락하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생기는 일이 창세기 4장의 사건으로 가인이 그의 형제 아벨을 죽이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살인으로까지 가는 것이며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살인의 진정한 의미를 지적하심으로 죄 문제를 정확히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물질을 위해서라면 형제도 아니다. 아무리 형제애 뭐라해도 자기가 손해를 보는 일은 안하려고 합니다. 우리 현실에 널려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인간은 결국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간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이런 문제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지혜로운 소년은 모든 조언을 거절하는 늙고 어리석은 왕보다 낫다. 그런 소년은 감옥에 있어도 나와서 성공할 수 있으며 비록 가난하게 태어나긴 했지만 왕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앞으로 왕이 될 그와 같은 소년을 따르는 것을 보았다. 왕이 다스리는 백성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그 다음 세대는 그를 좋아하지 않으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4:13-16)
이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왕이 젊었을 때는 백성들을 참 지혜롭게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모두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왕이 늙었다고 이제는 왕을 쫓아 내려는 것입니다. 민심이 소위 말해서 조변석개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서로에 대한 신실함이 없고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까 인간이 혼자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인간이 혼자일 수 밖에 없느냐?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4장 마무리에 하고 있습니다.

4장에서 제기했던 문제를 뒤집어서 추적해 보면 어떤 일관성 있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살펴 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서로 협력할 수가 없고 서로 협력할 수가 없으니까 개인주의로 빠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주의로 빠질 수 밖에 없으니까 경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경쟁을 하다가 보니까 강자가 약자를 잡아 먹을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사회는 약육강식의 사회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근차근 한 단계씩 올라가는 것입니다.
4장 제일 처음에서 제기했던 문제가 약육강식의 사회문제였는데 그 문제의 핵심은 서로에 대한 신의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마무리 합니다. 그래서 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다스려 나가신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부조리가 많고, 불의가 많고, 정작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 위로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천대를 당하고 또 포악한 사람이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고, 또 끊임없이 사람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못잡아 먹어서 으르릉 거리고 또 신의가 없는 이런 사회냐는 말입니다.

5장에서 몇 가지 문제를 더 제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학대받는 것과 정의가 무시 당하는 것을 보아도 너는 놀라지 말아라. 모든 관리는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의 감시를 받고 있다. 모든 사람이 농산물의 혜택을 받고 있으며 왕도 밭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산다. 돈을 사랑하는 자가 그 돈으로 만족을 얻지 못하고, 부유하기를 바라는 자가 그 수입으로 만족을 얻지 못하니 이것도 헛된 것이다. 재산이 늘면 그만큼 소비도 많아진다. 그 소유주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 외에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노동자는 먹을 것이 많든 적든 단잠을 잘 수 있느나 부자는 재산이 많으므로 이것 저것 걱정하다가 잠을 자지 못한다. 나는 또 하나의 다른 심각한 문제를 보았다?(5:8-12)
가난한 자가, 빈민이, 집 없는 사람이 학대 당하는 현실적인 모습을 이야기 한 후에, 어떤 사람이 어렵게 재물을 모았는데 재물이 많으니까 손 벌리는 사람만 많아져서 결국에 재물은 눈요기감이 되어버렸다. 또 힘쎈 사람에게 결국은 빼앗겨 버리고 재물을 관리하느라 신경만 쇠약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의 부조리로,
?사람이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수고를 하지만 식욕을 다 채우지는 못한다.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가난한 자가 처세술을 잘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낫지만 이것도 역시 헛된 것이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6:7-9)
지혜가 많은 자가 등용될 기회가 정당하게 주어지지 않아서 지혜를 사용할 기회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연줄도, 재산도 없어서 가난한 지식인의 설움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취직이 어렵고 비정상적인 사회의 부조리를 적발하며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부조리로,
?나는 헛된 세상살이 모든 것을 보았다. 의로운 사람도 젊어서 죽은 사람이 있고 악한 사람이 오래 사는 사람이 있으니...?(7:15)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은 이 사회에서 업신여김과 조롱을 당하고 인간사회에서 뒤지게 되며, 온갖 술수를 부리는 악인은 사회의 유력한 위치에서 오래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부조리로는,
?내가 세상을 살펴보니 빨리 달리는 사람이라고 해서 경주에서 언제나 일등하는 것이 아니며 강하다고 해서 전쟁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생활비를 많이 버는 것이 아니며, 총명한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부를 얻는 것이 아니고, 유능하다고 해서 언제나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뜻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 불행한 일을 당할지 그 때를 알지 못한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듯이 사람도 갑자기 재앙이 밀어 닥치면 거기에 걸리고 만다.
나는 지혜의 좋은 예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인구가 별로 많지 않은 조그만 성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강력한 왕이 자기 군대를 이끌고 와서 그 성을 포위하고 성벽을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이때 그 성 안에 가난하지만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가 지혜로 그 성을 구했으나 그 후에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혜가 힘보다 낫지만 지혜로운 자가 가난하면 무시를 당하고 그가 하는 말을 인정해 주는 자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9:11-16)
전도자는 원칙대로 마땅히 있어야 할 순리대로 되지 않는 여러 모습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정당한 원칙이 없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불안을 깔고 있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기하는 네번째 문제는 우리로 더 심각하게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성찰케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 또 사람이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결국 사람에게나 짐승에는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죽으면 저것도 죽는다. 사람과 동물은 다 같이 호흡하는 동물일 뿐 사람이 짐승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모든 것이 헛될 뿐이다. 사람과 짐승은 다 같은 곳으로 가게 되는데 모두 흙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의 영은 하늘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으로 내려간다고 누가 입증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의 삶은 죽음으로써 다 끝난다면 아무리 그가 멋있게 의미있게 살았다고 해도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9장 4절을 보면 ‘그래도 살아 있는 자가 희망이 있는 것은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다.’
사자가 아무리 용감하다지만 죽고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차라리 살아 있는 개가 죽어 있는 사자보다 더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생에 있어서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정면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으로써 우리의 삶이 다 끝나 버리고 만다면 우리의 삶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 여기까지 생각이 드니까, 그렇다면 기껏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고 어떤 물질을 주신 것은 어떤 적극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인생 자체가 허무한 것이니까 잠시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쉬운 표현으로 이야기하면 마약을 사용하는 식으로, 인생을 즐기는 것으로 위로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라고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쾌락주의적 결론을 내리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쾌락을 즐기면서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셔도 이 땅에는 막 돌아다니니까 그런 것을 잊으려고, 그것을 잊기 위한 수단으로서 쾌락이나 즐기면서 사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했다기 보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생을 보내는 철학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첫번째 강의에서도 어떤 한계들에 부닥쳐 가지고 그런 한계성 속에 부닥쳤다면 기껏해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런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즐기는 것이 낫지 않느냐? 하는 방식으로 여기서도 결국은 이 문제들이 만약에 풀리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순간마다 즐기면서 사는게 최고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냉소적 쾌락주의의 결론을 내리면서 사는 것이 최선이 아닌가? 하는 결론은 사실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인정을 하더라도 참으로 풀어야할 문제들을 풀지 못했을 때, 실제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다 여기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제기했던 네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이제 전도자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전도서의 결론인 것입니다. 전도서의 서론이 인생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있는 것인가? 의미있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그 결론을 바로 이런 삶이라고 제시하기까지 그 고민의 과정을 우리도 정당하게 추적한 다음에야 솔로몬이 내린 결론을 나의 인생관으로 의미있게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부분인 12장 13-14절을 보시면,
?이제 모든 것을 다 들었으니 결론은 이것이다 :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선하건 악하건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은밀한 것까지 다 심판하실 것이다?
이것을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의미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정당한 삶이냐?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지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왜 이 명령을 지키는 것이 정당한 삶이냐? 여기서 첫번째 제기했던 문제를 푸는 것입니다. 사람 스스로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스스로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안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명령을 지킬려면 우선 그 명령을 내리는게 있어야 그 명령을 지킬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을 의미있게 다스려 나가시면서 우리에게 모르게 담아 놓은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의미있게 다스려 놓는 다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가르쳐 주신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가르쳐 주신다 말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열심히 깨닫고 궁구하고 연구해야 할텐데 그것을 안하더란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의미있게 다스려 나가시고 우리에게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첫번째 말씀이 뭐냐면 선악과 금령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공부를 통해 선악과 금령의 말씀을 잘 깨우치는 기회도 다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을 우리에게 안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앞날에 대해서도 우리가 쓸데없이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우리 나라는 성경을 좀 잘못 배워가지고 이상한 말세론이 자꾸 유행해서 모든 말세론에서 모든 이론이 다 나옵니다. 항상 요한계시록을 강의한다 하면 사람을 공포에다 몰아넣고 이상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나면 아무런 문제가 안됩니다. 환난이 일어나도 성도에게는 아무런 염려가 없습니다. 결론부터 내리면 아무리 환난이 일어나도 우리에게는 털 끝만큼도 까딱 못한다고 그랬습니다. 괜히 환난의 정당한 의미를 모른체 공포에 몰아 넣는데 유혹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여 나가실 때에 역사가 어떻게 끝나고, 세상이 어떻게 움직여 나갈지 그 큰 흐름들을 구체적으로 상세한 것들은 그 사람이 처해 있는 환경에 따라서 본인이 깨닫게 하셨고, 근본적인 역사의 큰 흐름은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안배우려는데 있지 하나님께서 안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첫번째 제기했던 문제는 여기서 해결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뜻을 가지고 계신다 하더라도 인생이 거기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이냐고 문제를 제기했는데, 그것이 거꾸로 우리를 질책하는 질문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가르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의미있는 아름다운 뜻을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우리가 해야할 일이 뭐냐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뜻을 제대로 배우고, 그 말씀을 배운데서 인생이 올바로 의미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참으로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인생의 기본자세가 아니냐라고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미있는 아름다운 뜻을 가르쳐 주시되 우리는 목석같이 꼭둑각시처럼 있는 것이 아나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두번째 제기했던 문제도 풀어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되 계명의 형태로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계명’의 형태라는 의미는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꼭둑각시처럼 자동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참으로, 그것이 참으로 옳고 바르다고 생각해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순종을 할 때 그 계명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때 하나님은 절대로 강제로, 억지로, 마지못해 순종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찌 하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 마음대로 된다면 우리는 로보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실제로 로보트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문제는 그런 다음에야 정당하게 풀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듣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결정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자발적인 순종을 내려서 행동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일생은 그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로보트처럼 아무런 결정력도, 사고의 과정도 없이 움직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으시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은 꼭둑각시가 아닌 책임있는 존재로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명령에 대해서 ‘너는 충분히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었는데 왜 하지 않았느냐’고 나중에 충분히 책임을 물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려 나갈 때 로보트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고 깨달아서 하나님의 계명이 참으로 옳음을 알아 감사함으로 자발적인 순종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라서 인생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정했다는 말씀을 이해해서 자기는 가만히 로보트처럼 있고 무슨 신비한 능력이 내 의식과 상관이 없이 그냥 죽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우리 머리로 잘 이해되지 않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그 인격으로 결정하여 인생을 살게 하시면서도, 그 인생과 역사에 대하여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방해받지 않고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이요, 그의 엄청난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자기 생활에서 하나님 말씀에 얼마나 순종했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10년 동안 성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 순종해서 가정에서 가장으로 성실히 살았으면 그만큼 그 가정은 편안할 것이고, 10년 동안 가정을 소홀히 하면서 몸을 아무렇게나 굴렸으면 그 사람 몸에도, 가정에도 나타는 큰 불안과 어려움 가운데 괴로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잘못되었다고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고 그 죄 문제에 대해서 그가 용서 받았을지라도, 그가 이제까지 낭비한 모든 것은 회개했다고 해서 원상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용서 받았지만 이때까지 알았던 죄로 인한 여러 결핍이 그 사람의 속에 남아서 말할 수 없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진작 그때 하나님 말씀을 들을 걸 하고 후회합니다. 바로 이것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되 기계적으로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인격자로 대하시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를 고귀하게 대하시는 고귀한 존재임을 깨우쳐서, 고귀하게 대하실 때 하나님에 대해서도 고귀한 반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되 그 뜻을 배워서 우리가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는 것이지, 그냥 기계적으로 억지로 로보트처럼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사람이 스스로 좋아서, 그것이 참으로 좋은 것이라고 깨달아서, 순종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꼭둑각시가 아닌 것입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 말씀이 옳고 좋아서 정말로 그렇다라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결정한 수준까지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올라가는 것이 인생의 참 목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데 왜 이렇게 부조리가 많으냐? 이 세상에서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면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겁니다. 우선 14절 말씀을 보십시요. 이 세상 그 자체만을 볼 때는 불의와 부조리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정말 악인이 받아야 할 보응을 의인이 받고, 선인이 받아야 할 보응을 악인이 받는 것으로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 세상을 살 때 억울하게 판결받고, 억울하게 살 때가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은 이 세상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내세가 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조리들은 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심판하시되 대충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밀한 것까지도, 그때는 옳은 것은 옳다고 말씀하시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공포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사는 한 평생의 의미가 단지 이 땅에서의 한 평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의 나그네 삶을 끝내고 이어지는 내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 삶이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면 우리가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는 문제도 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촛점이 내세로 옮겨가니까 현실도피적인 삶의 태도를 부추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현실과는 상관이 없고 내세로만 된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사실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 내세를 말하는가는 전도서의 처음 문제제기를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출발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 자체만을 바라보고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로 인하여 심령이 상하고 오히려 허무한 생활로 빠져서, 허무주의로 빠질 수 밖에 없어서 결국 그 사람의 삶은 쾌락주의로 빠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쾌락은 어떤 적극적 의미에서의 쾌락이 아니라 괴로움과 슬픔을 잠시 잊기 위해서 즐기는 것 밖에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올바로 인식한 인간 석학들의 자살행렬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 대부분이 그렇게까지 삶의 문제를 심각히 생각하지 않기에 잊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세가 없이 이 세상 자체만을 바라본다면 그 삶이 어찌된 것인가를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오늘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창세전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완성될 것이며, 우리를 그 시민으로 부르시고 있고 그 시민답게 지금 만드시며 완성시키실 것을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그 나라와 그 안에서 완성될 삶을 참으로 소망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 땅에서 모든 부조리와 부정, 모든 것에 대해서 낙담치 않고 올바른 평가기준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나라와 그 땅에 대한 소망이므로 모든 일들로 인하여 필요 이상으로 낙담하지 말고, 이 세상에는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자신의 삶을 한탄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악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세상의 종국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이것으로 끝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무슨 수를 쓰더라도 즐기면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최선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내세가 있는 동시에 그것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자만이 내세의 소망 속에서, 현재를 참으로 의미있게 만들 수 있다고 전도자는 마지막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역설적인 그러나 기가막힌 내용입니다. 내세의 삶이 있기에 현재의 삶이 의미있게 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전도자는 이 땅에서 사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출발했다가 거기서부터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의 인생관이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세상과 인생을 보는 모든 것이 달라졌고 새로운 인생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출발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정말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내세에 비춰서 현재를 살 때에 현재의 삶에서 불의가 득세하는데 낙담치 않고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바로 살 수 있는 것이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설날을 생각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세상과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이 땅에서 흔들리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억울한 사정을 아무도 몰라주고, 불의가 득세하는 것 같고, 바로 살려고 애쓸수록 괴로움만 더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은밀 중에 갚으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때에, 현재의 삶을 방탕하거나 좌절, 낙담치 않고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그 많은 지혜와 권력과 권세를 맛본 솔로몬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이 땅에서 참으로 의미있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삶 자체에만 눈을 고정시켜서 살펴보면 절대로 삶의 의미를 제대로 찾을 수 없고, 오히려 눈을 들어서 나와 나의 밖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한 내세를 바라보는 삶을 진정으로 소원할 때, 진정 이 땅에서의 삶을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도서의 전체적인 흐름입니다. 이 결론만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까지의 심각한 고민의 과정을 그가 가진 심정으로 추적해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그 결론이 얼마나 아름다운 결론이며,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분이 다스리는 뜻과 내세의 삶과 소망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도서는 이런 헛된 삶이 신자들의 삶이 될 수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역설적으로 초두에서 제시하는 방법으로, 이런 식의 사고와 삶은 헛된 것이라고 강하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전도서라면 헛된 것이라고 기억하시지 마시고 이 땅에서 가장 의미있게 사는 삶을 소개한 것이며, 내 인생의 참다운 가치와 삶의 방향을 정해주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기초를 제공했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생각해 봅시다.
1. 솔로몬이 생각해 본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2. 이 세상과 인간 중심으로 문제를 풀어 보려했던 솔로몬은 무엇 때문에 허무하고 헛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까?

3. 솔로몬이 좌절의 벽에 부딪혔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4.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새롭게 생겨난 4가지 문제는 무엇입니까?

5. 솔로몬은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이사야(היעשׁי; Jesaia)

모든 선지서가 이사야 한 권에 압축된다고 할 만큼 중요하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66장이 신구약을 대표한다고도 한다. 마가복음의 경우 이사야의 인용으로 시작할 정도이다. 이사야는 매우 깊으므로 또 중요하므로(구약 이스라엘 멸망과 메시야 왕국의 예언, 매우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 신구약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선지서 중 가장 밝히, 풍부히 신약을 나타내는 것이 이 이사야이다. 그렇게 중요한 만큼 마귀의 장난으로 가장 말 많은 책이기도 하다. 18세기 비평학 이전에 이븐 이즈라는 사람은 제 2이사야란 칭호를 붙였다. 최근에 56장 이후를 제 3이사야라고까지 부르기도 한다. 이런 이론들의 근거는 굉장히 복잡하다. 이런 쓸데 없는(그럴듯하기는 하나)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
최근의 책들은 1,2,3 이사야서 이론이 정설처럼 되어 버렸다. 인정하건 반대하건 이 구분설을 인정해야 이야기가 된다. 순수한 예언의 가능성을 믿는다면 이 구분설은 필요가 없다. 8세기 선지자들은 세계 상황의 변화를 보고 예언할 수 있었다는 이론, 이것은 예측에 불과하지 순수한 예언이 아니다.
1:1 ןוזח(하존)은 아모스서의 ירבד(디브레)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같이 ןוזח이라고 되어 있다. HJA는 아람어로서 히브리어의 RAh와 같은 뜻이다. 이사야의 아버지는 아모츠인데 아모스서의 아모스와는 다르다.
ימיב(비메) / 하나님의 계시는 관련된 시기가 명시되어 있다. 시대적 상황과 결부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선지서의 역사의식은 선지자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경계시의 보편적 특징이다. 성경의 기본틀은 歷史이며 그 歷史的 상황과 결부하여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사야서를 이해하려면 그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B.C. 19세기 / 구 바벨론
B.C. 11세기 / 다윗왕국
B.C. 9-8세기 / 앗시리아
B.C. 8-7세기 / 신 바벨론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주인이 바뀔때마다 서남쪽으로 진출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목재(레바논 : 두로, 시돈), 공물, 해상무역 때문인데, 애굽도 힘이 남으면 올라간다. 팔레스틴은 바로 두 세력간의 길목이다. 그래서 항상 짓밟힌다.
이사야 시대(B.C. 8-9세기)에는 친 애굽파와 친 앗시리아파 등으로 팔레스틴은 복잡했고, 그러나 당시 애굽은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였다.
팔레스틴의 내부는 다윗왕국 이후 내부 분열이 일어나고 솔로몬은 실정함으로 외부 반란이 일어난다. 웃시야 시대는 북 아람의 내부 분열로 이스라엘은 세력을 확장하고 남 유다도 에돔까지 정복하여 솔로몬 시대의 고토를 거의 찾았다. 팔레스틴 지역은 한편으로는 열강의 각축장이나 또 한편으로는 주요 교역로이다. 이 교역로를 장악하는 것은 부의 원천이 된다. 솔로몬 시대에는 백향목을 뽕나무처럼, 은, 금을 돌처럼 흔하게 했다는 말이 이런 것이다.
북 앗시리아가 돌아가고 아람이 불안하고 이 지역의 주도권을 남북 이스라엘이 50년간 잡았던 때가 이사야의 시대적 배경이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망상을 아모스가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도 당시의 시대 배경을 이렇게만 생각할 것인가? 사 1:1에서 언급하는 시대 배경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역사적 사실 진술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고 사건들을 꿰는 틀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으로는 열방의 침입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다.
메소포다미아 지역의 2개의 세력은 바벨론과 앗수르, 니느웨요, 구 바빌로니아의 가장 흥한 왕이 바로 함무라비이다. 그후 B. C. 11C에 다윗왕국이 큰 나라를 형성한다. 이때는 바벨론이 약했었다. 그리고 바벨론 대신 앗시리아가 커진다(B. C. 9C). 그리고 이 앗시리아는 느부갓네살의 신 바벨론에게 B. C. 8-7C에 망한다. 그리고 이어서 동방의 고레스에 의한 메데 바사에 신 바벨론 역시 망한다.
Palestine의 세력 균형은 바벨론(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애굽에 의해 이루어진다. 바벨론이 커지면 서방정책을 쓰고(두로와 시돈 향하여) 레바논의 목재와 광석을 구하기 위해 지중해 진출을 하게 되는데 이때 소아시아 진출의 길이 열린다. 그리고 힘이 더 강해지만 애굽을 바라보고 남하정책을 쓴다. 반대로 애굽 역시 마찬가지이다. 애굽이 커지면 북진정책을 쓰고, 더 힘이 커지만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넘보게 된다. 따라서 두 문명권의 길목이 바로 Palestine이기에 항상 짓밟힌다.
다메섹의 아람민족 - 아람 다메섹이(벤하닷, 하사엘 왕) 큰 세력으로 당시 존재했다. 이들은 두 산맥 사이의 깊은 골짜기-베카(קב; 골짜기, 쪼개어진 곳), 골란고원에 위치하였고 이들의 침입경로는 이 골짜기를 따라 갈릴리로 들어온다. 그리고 다메섹 위에 하맛왕국, 그 밑에 두로와 시돈, 해안평야지대로서 블레셋 지역, 이 모든 곳 즉, 야르묵강=길르앗지역을 성경에서는 바산지역(골란고원)이라고 한다. 이 야르묵강에는 라반의 민족(아람민족의 근원)이 살았다. 아람과 이스라엘의 경계지역(라반과 야곱의 협정)이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친애굽파와 친앗시리아파의 갈등이었다. 정치적으로 저울질하다가 갈등한다. 그러나 당시 애굽은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였다. 르호보암 때 시삭이 쳐들어 왔고, 8세기 선지자인 요나, 아모스, 이사야, 미가 시대에는 가장 위협세력이 앗시리아였다. 이스라엘의 내부사정을 보면 내부적으로 혼란했다.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지자 속국들(아람, 다메섹)이 떨어져 나갔고, 나라는 2분되어 서로 분열과 다툼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때부터 2대를 못나가 반란이 일어난다.
북이스라엘은 두로와 시돈 화친으로서 아합을 두로의 공주와 결혼시키고, 여호사밧의 아들과 아합의 딸 아달랴를 결혼시킨다. 이때 아람이 앗시리아 때문에 힘이 부쳤던 것 같다. 아합시대는 그의 아들 때 예후의 반란으로 끝난다. 예후 이후 이스라엘은 아람에게 짓밟히기 시작하고, 이 결혼으로 남, 북이 흥망성쇠를 같이 한다. 아합이 병거 천승, 보명 2만을 둔 것에 비하여 예후 때는 앗시리아가 쳐들어 올 때 파견한 군사가 겨우 병거 십승이었음을 볼 때, 이스라엘은 공격력이 전무한 상태인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아람에 의해 철저히 유린된 상태였다.
앗시리아가 서남진정책을 쓰면 다 망하고 마니까 앗시리아와 동맹을 맺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Qarqar전투에서 여러 동맹국이 앗시리아와 대항하나 이때 앗시리아가 철저히 승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추측컨대 한참을 앗시리아가 저지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Adadhirari 3세가 앗시리아 왕일 때 아람, 다메섹을 완전히 짓밟고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받는다. 그러나 여로보암 2세 때 앗시리아가 바벨론 때문에 지치고 아람 다메섹과 하맛의 자기네들끼리 싸우므로 그 틈을 타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큰 세력을 떨치게 된다.
여로보암 2세, 웃시야 왕 때에 이스라엘이 세력을 크게 확보하기 시작한다(에돔을 다시 정복). 웃시야 왕은 농업을 크게 일으키고, 옛 솔로몬 시대에 버금가는 영토가 된다(비록 남북으로 갈라졌으나). 나쁘게 보면 열국 사이에서 눌리는 지역이지만 좋게 보면 두 큰 문명권의 다리 역할(교역로)로 여기서 떨어지는 부가 상당히 크다(솔로몬 시대가 그러했다). 그리고 그 다음 앗시리아가 침략할 때까지 약 50년간 그 당시 판도를 주름잡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부흥기였다.
이스라엘이 가장 정치적으로 융성했던 시대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선지자가 8세기 선지자들이다. 그 당시 교회 지도자들의 자세, 그들의 업적에 대한 자랑, 유례없는 축복의 때에 살고 있다는 허황됨에 대한 치는 예언자가 아모스였다. 그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를 평가했다. 이스라엘이 맞은 정치적 호기들을 이렇게 해석하고 보아야 할 것인가? 이사야 1:1의 말씀에 비추어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 대해 어떻게 암시하고 있는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주류인데, 과연 그러한가? 역사적 사실만 들어서 이야기한 것이지만 이 사실들을 꿰는데는 어떤 틀(시각)이 있다.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는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겠다는 큰 나라 형성 계기와 엘리야 사건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가실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한 사건이다. 언약 파기한 이스라엘에 대해 철저한 심판을 하고, 그 심판의 도구는 하사엘(이스라엘을 철저히 괴롭힌 자), 예후, 그 손을 피하는 자는 엘리사를 통해 심판하시리라. 그러나 남은 자를 남기리라. 이러한 이스라엘이 당할 심판을 예언한 자가 요나이다(여로보암 2세 때). 죽었다가 사는 의미의 심판이다. 사망의 곳에서 부활하여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요아스, 여로보암 2세를 통해 융성케 하신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이스라엘이 너무 고생하므로 불쌍해서라고 한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교회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시각을 제공한다. 조금 넓게 보면, 글을 남긴 선지자 - 아모스, 호세아 등등 8세기에 들어와 거의 동시대에 선지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물론 엘리야, 엘리사, 요나 등등 함께 튀어나온다. 이들 선지자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표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주신 계시의 말씀은 특정시대와 관련되어 이해되어야 하고, 그것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오고 오는 모든 시대에 말씀하시는 계시의 성격이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이사야가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에 연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12장과 13장 이후는 그 내용이 구분된다. 1-12장은 이스라엘에 관심이 있고 13장 이후는 이방에 관심이 있다. 심판과 구원의 예언이 번갈아 등장한다.
文體 / 說話體 : 오경, 역사서, 역대기(중간 중간 모세의 노래, 라멕의 노래 등은 詩體가 되기도 함). 詩體 : 히브리 시체의 특징은 parallelism한 시행이 둘로 나뉜다. 앞과 뒤가 상관관계 가짐. 대표적으로 시편, 욥기, 잠언, 전도서.
동의적 평행법 : 같은 뜻, 같은 내용을 반복.
반의적 평행법 : 다른 것을 대조함으로 강조.
합성적 평행법 : 특별한 내용상의 상응관계가 없다.
선지서들 거의 대부분이 시체로 기록되어 있다. 이사야의 경우 시체로 계속되다가 7,19,20,36장에서 설화체 부분이 나온다.
설화체 부분을 중심으로 2분하는데, 전 후반부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전반 끝 : 서원, 후반 끝 : 찬양.

1장
이사야를 가리켜 ץומא ןב(벤 아모츠)
아모스서의 아모스는 סומע(아모스)로서 서로 다르다.
1절에 등장하는 이상 즉, הזה(하자) = 말씀과 연결시켜 말함 즉, 하나님의 계시와 깊은 관계가 있다.
아모스 1:1 היח־רשׁא / סומע ירבד(디브레 아모스 아쉐르 하야)
이스라엘에 대해 본 / 아모스의 말씀들
하나님의 계시와 관계된 선지서의 언급 순서는 누구에게 그 계시가 주어졌나? 이 계시가 무엇에 관한 것인가? ימיב(비메; 시기, 때) 즉, 이 계시가 주어진 때의 순서를 갖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는 특정한 시대와 그 상황과 밀착되어 있다. “......에 관한 계시”라고 밝히는데 대부분 그 시기가 명시되어 있다. 어떤 시대적 상황과 결부되어 있고, 그리고 그 시대와 결부시켜 해석(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특정상황에 대해 말씀되어진 계시라는 뜻이다.
어느 시대나 초시간적으로 영원한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과 연관된 계시임을 밝힘이다. 이것은 성경계시의 보편적 특성이다. 성경계시가 담긴 틀 자체가 역사이고, 역사 흐름과 결부되어 계시된 것을 볼 수 있다. Von Rad는 구약을 가리켜 “역사책”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이사야의 계시를 이해할려면 당연히 이사야가 처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계시의 말씀이 특정 시대, 특정 인물과 관련하여 주어진 것이지만, 그 계시의 의미가 그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앞으로 올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말씀인 것은, 그것이 기록되었다는 사실로 보아 알 수 있다. 계시가 특정 시대, 시간, 공간, 특정 대상과 연관되되 그 시대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임은 아주 중요하다. 여기에 대해 역사주의는 이 계시는 그 시대와 함께 끝나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의미가 있는가? 실존주의에서는 나의 삶의 관계 속에서 내 관심사와 관계된 것이 있을 때, 과거의 사실이 내게 의미있게 된다(그 계시의 객관성과 관계 없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만 찾는다). 과거를 과거로 묻어버리는 역사주의와 실존주의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와 과거 속에 묻혀버리지 않고 오늘도 내게 말씀하신다.
2절 רבד הוהי יכ ץרא יניזאהו םימשׁ ועמשׁ(쉬므우 샤마임 웨하아지니 에레츠 키 아도나이 디베르)
1장 내에서도 내용을 구분할 실마리가 있다. 즉, 실마리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하나의 연결된 표현을 시작과 끝에 나누어 이 전체가 하나의 unit를 이루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1-9가 한 단락, 10-20가 한 단락, 그 나머지가 한 단락. 즉, 이와같은 단락법이 내용에 충실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들으라” 그 후에 이스라엘의 죄악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8세기 선지자들의 주된 내용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선언이기 때문이다. indictment(정죄)의 글이라고 볼 수 있다. “자녀로 길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녀 처럼 키우고, 양육하였는데 이스라엘이 부모를 배반하듯 하나님을 배반하였다. 짐승도 주인과 구유를 아는데 “이스라엘은 짐승보다 못하다”.
여기서 ‘자녀로 키웠다’는 것은 비유적 표현으로 “아비와 자식”의 관계는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양식비평학자들은 지혜문학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잠언에 그 표현이 많으므로). 가장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 나라,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아비와 자식”,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의”, “정절”이 아주 중요하다. 이처럼 신실이 강조될 때 이 표현을 쓴다. 결국 이 말은 이스라엘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기르시고, 양육하셨다.
언약 파기 때는 하나님을 배반하였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은 언약과 관계되어 있다. 신 32:1에 ...ץראה עמשׁתו / ...םימשׁה וניזאה (하아지누 하샤마임... / 웨티슈마 하아레츠...)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들으라’라고 말하는 배경이 된다. ץראה־תאו םימשׁה־תא םב הדיעאו(신 31:28; 웨아이다 밤 에트-하샤마임 웨에트-하아레츠) 여기서 밑줄 친 것은 명사에서 동사로 만든 것으로(dinominative) “...을 증인으로 세우다”의 뜻이다. 이 말은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운다. 앞으로 너희가 반역할 것에 대한 증거의 노래이다. 다시 말하여 이 노래가 증거가 될 것이다. 이것을 예언하면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운다. 그러면서 신 31:28-29는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들으라”고 하면서 하늘과 땅을 세워 증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사 1:2이하는 신 32:1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32: 6 - 이스라엘은 지혜가 없는 우매무지한 백성이며
7 - 하나님을 아버지로 묘사
20 - 무신한 자녀
32 - 소돔, 고모라
이렇게 신 32장 자체는 앞으로 이스라엘이 배역할 것에 대한 증거이며 이사야는 이 말씀(증거)을 배경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이사야가 출현한 역사적 상황은 엘리야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시의 말씀 즉, 시내산 언약이 전제되고 있다. 시내산은 어떠한 곳인가? 이스라엘이 순종을 맹약한 장소이다. 그곳에서 철저한 심판을 선포하심은 근본적으로 언약 파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사야의 구속사적 맥락에서 보면, “하늘이여 땅이여 들으라......”는 말은 시내산 언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이 언약 파기를 선포하심이다.
“아들 처럼 길렀다” -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언약의 주로서 기대되는 모든 은혜를 베푸셨다는 말씀이다(부성적인 사랑으로). 이 언약의 관계가 의무 이상의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나에 대하여 반역하였도다”로 보여지며, 그와같은 사랑 받고도 반역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짐승보다 못하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죄 범한 민족이요” אטח(호테) = miss the mark; 하나님의 표적에 이르지 못함
ןוע(아온) = 길에서 벗어나다
결국 이 말은 반역 = 하나님의 요구하신 정당한 길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렸고 말씀을 능멸했다” 죄의 근본적 동기를 하나님을 버린 것(뒤돌아섬, 등을 돌림)과 말씀을 능멸한 것으로 즉, 그가 명하신 율법의 말씀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짓는 고범죄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등을 돌리고 세상의 욕심을 좇을 것인가 중에 선택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죄의 근본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이때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취급해 오셨는가의 은혜의 역사를 말하고 동시에 그 반응으로 이스라엘이 계속 반역했던 것을 말한다. 상처투성이의 이스라엘(어찌하여 더 맞으려고 반역을 계속하느냐)에게 묻는 질문은, ①배역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때리심을 볼 수 있다. “온 머리가 병들었고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고 표현 즉, 상처가 아물 틈이 없도록 계속 맞아왔다. ②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속 반역하고 있다. 혹은 반역해 왔다.
7절 땅이 황폐했고 너희 성읍은 불살라졌다. 이는 전쟁의 참화를 그린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곧 전쟁은 배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8절 딸 시온만이 오이밭의 망대 처럼(포도원의 움막) 예루살렘만 남았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만 남겨두지 아니하셨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배역을 치셨고, 이스라엘은 계속 배역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남기셨다(그 채찍 속에는 그래도 아들에게 향한 사랑이 “남은 자”로 표현되어 남았다). 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로 표현했나가 여기서 밝혀진다(아들의 배역에도 불구하고 문 밖에 기다려 섰는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었으므로).
10절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아 - 이는 두번째 부분의 시작으로서 들으라는 대상을 지칭한다. 이 표현은 바로 앞 절을 의식한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위해 긍휼 베푸시지 않았더라면 소돔과 고모라 같이 완전히 멸망받아 마땅했다(그 죄질 자체로 볼 때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죄질이기 때문이다. 경제, 사회적으로 부요하고 군사적으로 강국이었고, 그들의 외적 경건과 열심도 대단했다. 즉, 3일마다 십일조를 드리고 제물의 향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사야는 “오해하지 말라”고 한다. 너희는 망해야 마땅한 존재이지만(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의 시기이다),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잠시 외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 뿐이라고 한다. 오늘 우리 시대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평안이 없는데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지 않는가? 위기의 시대 속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상, 죄질에 대해 원칙적으로 재림까지 유보된 상태였으나 심한 죄악상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잠시 심판하신다.
11절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어떠한가? 너희 많은 제물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목까지 차서 넘어오려고 한다” - 배불렀고 /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찬양하나 올라올 정도라니...... ירצח סמר(ל) םכדימ תאז שׁקב־ימ(미-비퀘쉬 조트 미웨드켐 리르모스하체라) 나의 뜻을 밟는 것(부사적 연계형)은 תאז(조트)를 수식. 이에 대한 해석은 ①내 성전을 짓밟는 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했느냐?(즉, 나의 뜰을 밟는 것이 짓밟는 것이라고 말하는 격), ②한글역;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는 두 가지가 있으나 둘 다 가능한 해석이다.
13절 일을 하지 않으면서 모이는 것(그 모이는 사람들이 악을 행한다고 하면) 즉, 성회와 기도로 모이는 것이 짐스러운 것이 되었다 - הרצע(아차라; 도저히 못참겠다) 왜냐하면 너희 손에 피(ואלמ םימד םכידי; 위데켐 다밈 말레우; 모든 종류의 폭력, 남을 억울하게 하는 것, 말, 정신적 폭력까지)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16절 ועמשׁ(쉬므우) 들으라 - 듣는 대상이 이스라엘로 직접 호칭한다. 과거 역사에 관한 것으로 하늘이여 땅이여 하고 하늘, 땅을 대상으로 불렀으나 이제는 취급하는 상황이 이스라엘의 현재상황이다. 그 첫 예가 그들의 예배의식(cult)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언약의 주로서) 선택하여 세우신 그 일에 있어서 모든 임무를 행하셨으나 이스라엘은 배역하였다. 이같이 배역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고치시려고 징계하시나 이스라엘은 고침받으려 하지 않고, 반역을 계속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은 자”를 두셨다. 여기서 ‘남은 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희망을 아직 버리지 않으셨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소망을 가질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한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과거역사의 모습니다. 10절 두번째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들으라 하늘이여 땅이여 ?? 어법 자체도 첫째 부분에서 들으라는 대상이 제 3자이고
들으라 이스라엘이여 ?? 이스라엘의 지칭도 3인칭으로, 이스라엘의 과거 상태이다. 나 자신이 3인칭으로 지칭될 때는 강도가 약하다. 그래서 두번째 부분에서는 2인칭으로 호칭(“너희들”; םה; 헴)하므로, 이때는 강력한 호소력이 있다.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가 주된 관심이 된다.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에서 취급하는 것은 의식(cult)이다(삶에 연결되지 않은 cult의 영역). 의식 명령에 평가 대상을 삼는 이유는? 현태 상태에서 의식을 취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식은 현재와 관련되어 있다.
cult의 본질적 특성은 Vergegenwärtigung(페어게겐베르티궁; 현현화)이다. 미래의 일을 지금 이 시간에 성취하고, 과거 사건을 지금 이 시간으로 재현(review)하는 의식은 과거와 미래가 한 순간에 집적(현재화)한다. 의식이야 말로 우리 삶의 현재와 가장 밀착된 것이므로 우리는 과거의 사건을 현재에 체험하고, 미래에 있을 역사를 선취체험하며, 우리의 경험 영역 밖의 하나님을 가시적 순간을 통해 영적인 것을 우리 삶의 현실 속에서 누리는 것이 cult이다.
동시에 cult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성전이다. 성전은 이스라엘 삶 속에서 핵심적,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여기서부터 이스라엘의 삶은 시작된다. 여기서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모든 영역으로 삶이 확산된다. 이스라엘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여기서부터 하나님에 의해 거부되고, 하나님이 혐오스러워 “내 얼굴을 돌리겠다, 눈을 감겠다”는 것,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하는 것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하나님에 의해 거부되었다. 하나님과 영적 교통에 장애가 되는 것을 넘어선 헌신된 삶, 영적 기도, 영적 형식의 삶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되었다.
대개 제사와 관련하여 성경에 잘 나타나는 표현은 하나님이 제사를 열납하시는 것이다. 본래 제사가 잘 되었으면 열납되어야 하는데 혐오, 가증한 짐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말이다. 의식이 이루어지는 장소(cultic place)인 성막은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이 모든 다양한 것을 하나로 묶는 본질은 만남이다. 성막을 회막으로도 말한다.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제사드리는 것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것인데 만나기를 외면하시겠다고, 거부하셨다.
15절 하반절 하나님이 친히 제정하신 것이 의식인데 하나님께서 만나기를 거부하신 것은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피는 삶의 모든 종류의 폭력을 의미하며, 남을 억울하게 한 것이다. 바로 손은 인간 행위의 도구이다. 너희 삶이 남을 억울하게 하는 폭력으로 가득하다. “성회와 아울러”, 성회는 금식을 선포하고 아무 일도 않고 모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식을 거부하는 이유가 그들의 삶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다.
17절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가르치신다. 일상 삶의 질서와 관련된 부분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려는 의식적 시도들이 철저히 거부되는 이유가 그들의 삶이 선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우리 교회에 적용시킨다면? 이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주위 세계의 의식 개념에 대한 변증적 의도와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의식이 무엇인가’ 이방세계의 cult는 철저한 비윤리성이다. 신에게 이방인들이 드리는 cult는 그 사람의 윤리적 상태는 필요없고, 절차에 따라 요식법대로 되었느냐는 것이다. 아모스서에서 법의 이름으로 행한 불의를 지적한다. 이방의 의식은 정신과 상관없이 요식대로 행하면 효과가 나온다. 이런 의식은 아무 상관없다. 그들의 삶과 직결되지 않는 의식은 하나님이 거부하신다. 이사야서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가 이 부분인가?(17절) 이것이 이사야의 생각의 전부일까?
쉽게 말하여 우리 행위를 고쳐 우리의 삶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의식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까? 이런 피상적 판단에서 생겨난 것이 바리새인들이었다. 삶 속에서 실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는(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바르지 않다 하고 여기서 그치면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한다. 여기서 바리새인의 외식주의가 나온다. 겉으로 무엇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역기서 하나님이 참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성전 밖의 일상적 삶과 의식과의 괴리 같은데, 외부적 특징이 뚜렷한 것이 의식인데, 삶도 마찬가지이다. 외부적 행동도 우리의 내면적 본질을 표현하는데 외부적 형식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면적 진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여도 그 마음은 멀도다” 실제적 삶과 의식을 대비하면서 우리에게 경계시키는 것은 외식주의이다. 진정한 내면적 본질, 경건, 사랑을 제외한 것은 무의미하다. 진정한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외부적 삶은 무의미하다. 내면적 본질을 강조한 성경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행하지 않은 것이 죄’라고 한다. 우리 행위가 잘못되면 우리의 내면적 믿음의 상태를 알아보아야 된다. 믿음이 고장난 것이다. 잘못된 행위를 고치려는 것은 고쳐지지 않는다. 고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가능한 것이다.
18-20절 이 부분의 말씀에서 문장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 “오라 변론하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변론하자는 말은 따져보자는 말인데 그런데 따져보자 해놓고, 그 다음에 나오는 “주홍같이 붉을지라도......”와는 맞지 않는다. 이 본문을 요즈음 와서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주홍같이 붉으면 과연 희어질 수 있겠는가?”(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다고 하자). 이 해석은 이스라엘 스스로의 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다. 하나님의 엄중한 평가원리를 말씀하신다. 이 판단원리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운명은 분명하다. 이렇게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추가적 진리는 이스라엘에 희망이 없음을 말한다.
21-31절, 18-20절이 하나님의 심판원리요, 이스라엘의 소망이 없음을 말한다. 이것을 확증케 하는 것은 20절의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하고 엄중하게 끝난다(추가적 언급). 21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정죄의 심판을 선고받은 이스라엘의 상태이다. 예레미야 애가에는 “어찌하여 통곡하는가?”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시온의 심판을 눈 앞에 두고 하는 말이다. 예레미야의 슬픔은 바로 하나님의 슬픔이었다. 이렇게 볼 때 21절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스라엘의 이전 상태를 신실, 공의로 충만, 그 안에 의가 거하였던 그런 때가 있었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살인자들이 우글거린다. 신실했던 성읍이 창기, 공평과 의가 있었던 곳이 살인자들로 우글거린다.
22절의 말 뜻은 םיגיס(시김) = 은박(pbo - 산화납)으로서 은에 pbo가 섞이면 쓸모없는 은이 된다. 여기서 은이 찌끼가 되었다는 것은 즉, 제거되어야 할 가짜 은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신실, 의, 공평이 없어지고 창기의 불성실, 살인자의 폭력과 불성실로 된 이스라엘은 내적 본질이 변질되어버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은을 원하셨으나 즉, 신실, 의 공평을 원했으나 살인자의 폭력과 불의로 바뀐 것이 외형적 은이 찌끼로 바뀐 것과 같은 것은, 겉으로는 의로운 것 처럼 보이나 속은 딴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현재 상태를 가리켜 변질되었다고 선언하시는데 그 선언의 전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참 본질이 된다. 그것이 앞에서 언급한 신실함, 공평, 의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너희는 변질되었다고 함은 이는 변질되기 전 참 본질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3절 이하 너희 방백들은 반역자들이요, 도적들과 한 패라. 뇌물을 좋아하며 추구하고, 과부들의 송사는 올라오지 않고, 과거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삶의 본질에서 변화되었다. 내가 내 대적들로부터......보수하시겠다. 이 대적은 바로 이스라엘을 가리킨다(하나님 백성의 본분을 버리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슬프다” 이 말은 이스라엘에 대한 절망감의 표현이다. 왜 절망할 수 밖에 없는가 상황을 묘사한 후 24절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고 하신다.
그리고 24절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나 다시 정결케 하시고 회복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모든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의 미래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이스라엘의 미래는 하나님의 미래이기도 하다. 절망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이것은 2가지 의미를 시사한다. 첫째는 불순물 제거 과정 즉, 모든 찌꺼기와 잡된 불순물을 제거하리라는 정화의 의미와 다음에 옛 재판관들을 회복하신다. 정화와 회복 후(옛 상태로)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읍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본질대로의 회복(의롭고 거룩한 백성으로 세움을 받는 일)이 심판의 의미이다.
27절 시온이 공평으로 귀속(회개하는 자들이 구속되리라) בושׁ, בשׁ, היבשׁ(슈브, 샤브, 샤베하) = 회개하다, 돌아서다. 패역한자는 패망 = 여호와를 버린 자는 패망한다 = הוהי בזוע(= הוהי יבזע; 요자브 아도나이 = 요즈베 아도나이)
정리해 보면, 8-20절에서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 역사는 하나님 앞에서 혹은 하나님의 평가에 의해서는 절망적이다. 그래서 남은 것은 이스라엘의 모습대로 보면, 철저한 심판 밖에 없다. 이스라엘 스스로의 가능성으로는 철저히 부정적일 수 밖에 없으나 인간의 힘, 지혜, 계획에 의한 역사가 아니고,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해서만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 계속 반역하는 이스라엘을 아주 멸망케 하지 않으시고 철저한 하나님 은혜에 근거하여 남은 자를 남기시는 미래, 죄에 처한 백성을 회복케 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미래의 소망은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더러움 제거, 참여케 하시고 신실하고 의로운 백성에 대하여 회개하는 자) 밖의 사람은 철저히 심판당할 것이다.
בשׁ(샤브; 돌아오는 자, 회개하는 자) / דירשׁ(샤리드; 남은 자) -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가 돌아온다. 이 두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모든 신학자들의 공통되는 주장이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하시면 이는 철저한 심판인데 그와 동시에 돌아오라고 요구하신다. Psychological impossibility(심리적 불가능, 정신적 불가능) = 8세기 선지자는 너희는 철저히 멸망하리라고 선포한 반면, 그후 선지자들이 돌아오라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로서의 미래는 심판으로 확정 선언하면서 그러나 그들 가운데 ‘남은 자’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결코 상호모순한 것이 아니다.

2장
1-4절이 그대로 미가(같은 8세기 선지자이다)서에서 반복된다. 이것은 이사야서 전체 내용의 서론이요 요약이다.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계속 반역한 이스라엘은 징계를 받는다. 이 일은 인간의 철저한 부정과 오직 하나님께 모든 가능성을 두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이것이 우리 심령 속에서 철저히 고백되어야 한다.
원래 범죄 - 하나님 같이 되어보리라는 충동 /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게 하는 것이 마귀이다. 나의 능력, 목표에 대한 부정이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미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공평과 의(이스라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귀속이 되리라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 = 우상숭배하는 자들 = 가짜 하나님을 택하고 참 하나님을 버리는 자 = 그들은 그 우상들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시온을 구원하실 때 그들이 섬기던 신이 거짓된 우상임이 밝혀질 것이다. 하나님의 미래 즉,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여호와를 버린 자를 멸망시킨다는 것이 종말론에 투사된다. 모든 산들 위에 굳건히 설 것이요,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시온, 즉 하나님의 교회)이 우상의 산(산당, 우상 섬기는 곳)들 보다 높아지겠다, 높이 들리겠다. 이는 교회가 높아진다는 뜻이다.
그러면 교회가 높아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교회의 높아짐의 참 본질이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이다. 불신자들로부터 “참으로 너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 교회는 인간들이 모여 장난치는 장소에 불과할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역한 것과 징계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반역과,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로 남은 자 두심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외면당한 그들이 열심히 여호와를 찾고, 외양으로는 어느 때보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컸으나 하나님 앞에 그들의 시도가 역겹고 가증스러운 것이었다는 엄청난 불행의 원인에 대해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나?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식과 실생활간의 괴리, 실생활에 옮겨지지 않는 예배는 무의미하다. 의식과 예배의 관계는 성경에서 여러 군데 다룬다. 롬 12:1; 신 16장 등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그 땅의 소산을 가져오라 원래 유랑인이었으나 그 축복의 표시인 땅의 열매를 드리라.
가장 중요한 문제 제기는? 의식을 통한 하나님 만남의 실패, 예배의식과 삶의 괴리가 원인이다. 그러면 이 간격을 제거하는 일에 있어서 위험한 것은 율법주의이다. 바리새인들의 경건은 과소평가할 것은 아니다. 바울도 율법의 의로 말하자면 책망받을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율법주의가 왜 나쁜가? 의식과 삶의 간격이 없어지면 된다. 의식과 관계된 것이 우리 삶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영적 영역에서의 무엇없이는 결코 삶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데 있다.
막 7장에서 왜 손을 씻지 않고 먹습니까? 왜 유전을 지키지 않습니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하신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떠났다” 즉, 마음이 없는 외부적 선행, 경건을 위선이라고 하고 외적 규례만을 강조, 발전시켜온 장로들의 유전이나 그것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법을 저버린다고 하셨다. 이는 영적 무지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법의 참 뜻을 오해하여 저버리는 그 한 예로서 “고르반”을 들고 있다.
이것이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밖에서 먹는). 우리를 참으로 더럽게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을 깨끗케 하는 것을 부정, 정결은 심령에 있다(마음과 영적인 차원). 인간의 존재방식이란 내부에서 시작되어 외견에 드러난다. 그러므로 안을 고쳐서 밖이 깨끗케 된다. 우리 마음(영적 내면)이 부정, 정결을 결정한다. 참된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것은 모두 악하다. 깨끗한 마음에서 시작되지 않은 선행도 더럽다는 것이다. 겉으로 아무리 꾸며도 마음이 깨끗지 않으면 그것은 더러운 것이다. 위선은 있을 수 있으나 위악은 있을 수 없다.
의식과 삶의 괴리 문제에 있어서도 이런 내면적, 영적 문제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의식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이야 말로 어떤 면을 직접적으로 가르치는가? 영적 차원 즉, 의식을 통해 참으로 영적 은혜에 참여해야 한다.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진정한 경건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사야 1장만 보아도 선지자가 어떤 재료를 선택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가? 왜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를 말하며 예배의식적 상황을 예로 들고 있는가? 이는 그들의 영적 상태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절망, 소망이 전혀 없다. 여기에 하나님의 미래의 2가지 면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구원과 심판이다. 즉, 시온이 의와 공평(하나님의 의와 공평)으로 귀정, 구속되리라. 이는 이스라엘의 모든 가능성을 부정했기 때문에 남은 소망은 하나님의 의와 공평(“결정하다”는 뜻으로 재판정을 염두에 둔 단어이다) 뿐이다.
2절 하나님의 산이 영화롭게 될 날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모든 산(우상 신전들이 있는 산)들 위에 높아지리라. 이 말은 무엇을 염두에 둔 말인가? 앞으로 행하실 하나님의 심판의 핵심은 인간들이 의지한 우상들이 수치를 당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으로 드러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 즉, 교회의 높아짐 그것은 곧 하나님의 높아지심이요, 진정한 하나님되심이 계시,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있는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 영광의 참 본질이다. 여기 시온은 여호와의 통치가 이루어질 곳이요, 앞으로 메시야의 통치기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한다.
구약에 있어서 “날들의 끝”(末日)은 상당히 포괄적 의미를 가진다. 열방들이 모여든다. 무엇을 보고 모이는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이는 교인들에게 무엇을 제시해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내게 없으면 나누어 줄 것도 없다. 열방이 나아온 목적을 3절 하반절에서 설명하기를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길로 행함을 배우러 나아온다. 시온 = 예루살렘(하나님의 통치 보좌가 있는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통치가 시온으로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이 온 우주의 통치자시며 생사화복이 그에게 달려 있는 그런 분이심을 계시하신다.
4절 그가 열방을 판단하신다. 즉, 그의 심판이 보편적(세계로 확대된 것을 의미)이라는 말이다. 하반절에서는 통치의 결과가 나타난다. 그들의 칼, 창(이는 살륙의 도구)을 보습과 낫으로 바꾸어 다시는 전쟁 훈련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바로 평화의 통치요, 평화의 나라일 것이라는 의미이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다시는 살륙이 없는 참된 평화의 통치일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나라에 대적하는 세력을 멸하시지만 그 나라의 본질은 평화이다(םולשׁ; 샬롬).
5절 “야곱 집아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이는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통치로서 그 통치는 안식이요(이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전제된), 온전함이 된다. 그러므로 ‘빛’은 하나님의 통치 자체요, 하나의 힘(power)이요, 생명이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자고 권고하는데, 이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내다볼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주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시며’에서 빛은 주의 얼굴을 바라볼 때 비쳐지는 실제적인 무엇이다.
6절 “주께서 야곱 족속을 버리심은...” 이는 1-5절 내용(앞으로 나타날 통치 바라보는 구원)과 상반된다. ךמע התשׁטנ יכ(키 나타슈타 암므카) 여기서 יכ라는 접속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여러가지로 볼 수 있다. 즉, for, but, although, indeed 등 다양한 뜻 중에서 but이 가장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6절 이하는 심판의 내용이다. 이 급격한 전환은 1:27-28에서 예견할 수 있었다. 앞으로 행하실 하나님의 구원의 양면을 보면 알 수 있다. 미래에 대한 소망에서 하나님께 외면당한 비참한 현재 상태로 되돌아온 것.
וקיפשׂי םירכנ ידליבו םיתשׁלפכ םיננעו םדקמ ואלמ יכ(키 말우 미퀘렘 웨온님 카플리슈팀 우브얄르베 나크림 야스피크)
밑줄은 버림받은 이유를 말한다. 여기 םדקמ는 옛날부터 동방과 전쟁이 가득했다는 의미이고 םיננעו는 신접한 자를, םיתשׁלפכ는 블레셋으로서 어미가 붙어 블레셋의 아들 처럼이요, םירכנ ידליבו는 동방에 사는 족속들로 인하여 혼혈아가 탄생하였고, 이로 인하여 영적변질이 유도됨을 그리고 וקיפשׂי는 많았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볼 때,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했는가?를 볼 수 있다. 블레셋 처럼 신접한 자들이 가득했고, 이방인의 소생(국제결혼의 소산)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결국 외국인들이 많았다는 의미는 신접한 자들이 많아졌다는 말이다. 즉, 이스라엘 내에 이질적 요소들이 존재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구별됨”을 상실하게 되었다. 혈통적 순수성을 상실함으로 변질되어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질은 영적 변질까지도 암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혈통적 변질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변질되어가는 모습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오늘날 세속화된 교회의 모습과 유사하다. 물탄 술 같이, 은이 변질된 것 처럼 이것이 속화된 이스라엘의 구체적 모습이었다.
7절을 보게되면 그들의 땅에 은, 금이 가득했고, 말도 가득했고, 병거 수가 한이 없었다는 표현은 은, 금은 경제력의 상징이요, 말과 병거는 군사력의 상징으로서 돈을 의지하고 인간의 폭력적 수단을 의지했다는 말이다.
8절 그들의 땅은 우상들로 가득했고, 그 본질은 그들의 손으로 만든 것에 그들이 절하는도다. 우상은 Man-made Religion(인간이 만들어낸 종교, 신앙)로서 인간이 의지하면서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것의 특징이 있다. 곧 우상숭배의 근거는 인간숭배이다. 모든 우상숭배의 특징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자기 행위로 하나님의 축복을 살려는 것(이것이 율법주의), 자기 힘으로 안되는 것을 깨달은 자만이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린다. 자기 모습을 자기가 알 때 꿇어 엎드릴 수 밖에 없다.
9절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שׁיא־לפשׁיו םדא חשׁיו(와이솨 아담 와이슈팔-이스) 여기 םד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라는 의미요, לפשׁיו는 인간이 낮아졌고 사람이 낮아졌다는 의미이다. 9절은 8절 초반에서 연결되는 ו접속법(와우접속법)으로 여기서는 미완료로 되어있다. 하나님 대신 돈을 의지, 군사력, 특별히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는 오히려 피조물 앞에 절하는 하나님 형상의 고귀함을 저버린 비참한 저질화된 인간으로 낮아졌다. 즉, 원래 만물을 다스릴 자로 지으셨는데 그것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욕되게 했으니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말라” 돌이나 흙 속에 뒹굴라(자신의 더러운 모습 숨기기 위해 땅 속에 숨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에게는 구원을 베푸시나, 어떤 자에게는 심판을 베푸신다. 그러나 궁극적 결과는 같다. 오직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 되심이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홀로 높아지시리라. 인간이 스스로 의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들의 정체가 드러남으로 인간이 자랑하던 것들이 모두 다 낮아지고 하나님 홀로 높아지시리라. 인간에게는 무엇을 기대하지 말아라. 그 호흡이 코에 달려 있는 만큼. “수(數)에 칠 가치가 없느니라”(무엇으로 쳐줄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문이다). 3장부터는 그것이 이스라엘의 현상황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가 나타난다.
심판과 구원의 교차구조가 큰 맥락에서 독특한 의미있겠으나 1장에서 보았듯이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그 후에 오는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반영한다. 이 동일한 메시지의 반복은 앞으로 행하실 심판과 구원의 내용이 더 풍부하게 제시되어 가고 있다.
1장은 이사야 전체의 근본적 내용의 틀을 제시한다(이스라엘의 과거는 반역이요, 현재는 심판을 받아야 할 상태이다). 그 미래는 그 자신으로 볼 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고 다만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볼 뿐이다. 심판이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구원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멸절로 끝나지 않고, 그 심판은 죄된 이스라엘을 정화시켜 구원의 반열에 참여케 하심이다.
2장은 포괄적으로 종말의 시간까지의 풍부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신약의 모든 메시지를 cover하는 구원 메시지가 주어진다. 낙관일색의 미래는 아니고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극적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한다.

3장
3장은 당시의 구체적 상황으로 옮아간다. 포괄적, 궁극적 심판이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미래 시행원칙들이 당시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הנעשׁמו ןעשׁמ(마슈엔 우마슈에나) 즉, 같은 단어를 남성, 여성, 단수, 복수를 다양하게 함께 씀으로 모든 종류의 의지물들을 제거하실 것을 의미한다. 빵, 물(육적 생존의 기본 조건), 용사(군사력, 대적으로부터의 보호), 재판관(한 공동체 내에서 질서확립 직임), 선지자, 점쟁이(םסק; 코셈; 신접자), 장로들(ןקז; 자퀜; 원숙함, 오랜 경험의 축적을 통해 어린 사람을 지도할 수 있는 지혜자들), 지혜자들을 앞으로 제하실 것이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그의 뜻을 알리리라 하심으로써 의로운 모습을 잃지 않도록, 회복하도록 세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에 םישׁרח םכח(하캄 하라쉼) 즉, 매직 Art(사술), 귀신과 속살거리는 것, 사술에 능한 자들도 장로들과 함께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의 신앙이 변질되어 이들이 세움을 입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רענ(나아르; 미숙하고 제멋대로 날뛰는 어린 아이들) 즉, 이 미숙자들이 제멋대로 날뛰다가 사회질서를 붕괴시키는데 그 이웃과 더불어 사나와진다. 즉, 싸우려는 태도를 갖게된다. 젊은 아이가 노인에게 큰 소리지르면서 권위를 무시하고 휘둘러대는 것 바로 하극상이 일어날 것이다. 천한 신분의 사람이 존귀한 신분의 사람에게 대든다. 즉, 고상한 것이 천한 것에 의해 축출당하고 짓밟힌다. 이 말은 곧 그 사회 가치관의 전도(뒤바뀜)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런 형편에서 모두 책임을 회피한다. 그리고 네가 이 난국을 수습해 보라. הלמשׂ, םחל(시믈라, 레헴 = 겉옷과 빵) 이는 경제적 여유, 지위를 뜻한다고 생각하기도 하나 사실 겉옷은 그 사람의 신분과 지위를 상징한다. 엘리야의 승천시 겉옷(선지자의 직분)을 떨어뜨린다. 그러므로 이 말은 위정의 책임을 맡을 만한 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무질서한 상태에서 난국 수습해달라고 하나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상처를 싸매는 자가 되지 아니하리라” = 나는 그럴 능력도 책임도 없다.
이와같은 심판의 이유에 대해서 8-9절에서 그들의 말과 혀가 하나님을 거스려 촉범케 했고, 표정이 그들에 대해 증거하며, 죄가 소돔처럼 말하고 숨겨도 숨겨도 숨길 수 없는 상태, 이스라엘의 죄악의 상태가 그토록 심각하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상태를 11절에서 말한다. 어린 아이가 백성을 학대하고 여인들이 그 아이들을 관할할 것이다. 이스라엘 지도층의 난맥상(무자격자들의 천행)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들이 내 백성이 행해야 할 길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이와같은 이스라엘의 지도층의 잘못을 심판하시려고 재판하실 것이다.
14-15절 이것은 폭력이다. 교묘하게 말로하는 폭력, 남의 칼로 폭력을 쓰기도 하고, 남을 억울하게 하는 그 모든 것이 폭력이다. “지도층” - 그들이 가진 권력을 연상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신 것은 그 힘과 능력으로 가난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돕게 하려 하심이나 오히려 짓밟고 힘을 오용하였다.
재판관은 법을 이용한 폭력,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폭력, 지식인은 지식으로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은사, 힘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돕고 일으켜 세우기 위함 즉, 사랑을 베풀기 위한 수단으로 이러한 것들이 주어졌으나 자기를 위해 남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사랑을 위해 쓰지 않고 자기 위해 쓰는 것이 곧 권력남용이다.
남자다움을 연상하면 힘이다. 이 힘은 너그럽고, 인내하고, 포용하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 힘을 타인에게 유익을 주고 세우는 목적에 사용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오용하면 폭력으로 남을 착취하게 된다. 남자의 사나움은 힘이 아니다. 반대로 여성의 연상은 미(美)이다.
16절 이하 여인들의 죄를 논하면서 그 핵심을 아름다움에 두고 있다. 남자들이 착취한 것을 집에 가져오면 여자들은 그것으로 자신의 외모의 아름다움으로 치장한다. 그러니 진정한 아름다움이 그곳에서 나올 수 없다. 부드러움과 겸손과 단아함이 여자의 무기요, 이것은 내적인 아름다움이요, 성경이 말하는 여자의 진정한 미이다. 아기죽거리고, 늘인 목과 눈은 타락한 정욕을 자극하는 미로서 진정한 미가 아니다. 바로 선정적인 태도이다. 이들은 속사람을 아름답게 하는 대신 남을 유혹하고, 충동하게 한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선정과 유혹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머리(여자의 머리는 치장의 핵심이다)에 부스럼이 나게 하고, 대머리(수치를 드러냄)가 되게하겠다고 하신다. 이 말은 바로 그들의 치장을 수치스럽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4장
1절은 전쟁이 나면 남자가 귀해질 것이므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2-6절 ‘구원의 예언’이다. 이스라엘의 임박한 미래는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그것은 정화를 의미하며 다시 구원으로 이어질 것을 암시한다. הוהי חמצ(체마 아도나이; 여호와의 싹) 이는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은 앞으로 메시야가 “아름다움과 영광”이 되리라는 말인데, 이 영광은 이스라엘 남은 자들의 영광과 자랑거리가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타락하고 부패한 아름다움은 제하시고 그 후에 여호와의 싹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이 영광은 어떠한 것인가? ץראה ירפ(페리 하아레츠; 그 땅에 와서) “메시야가 그 땅에 와서 이루실 일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영광이 될 것이다. 예루살렘에 남은 자가, 생명 얻기로 녹명된 모든 자들은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때 시온이 거룩하다고 불릴 것이다. 메시야로 말미암은 치장과 아름다움은 ‘성결과 거룩’이다. 즉, 영적 아름다움이다.
어떤 의미에서 메시야가 영광이 되시는가? 진정한 ‘성결과 의’를 주시므로. 4절에 보면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폭력과 죄)을 씻으심으로 성결과 의를 주신다. 여기서 우리의 성결(여호와께서 주시는 내적 미)은 사죄에 근거한다. 심판, 공의, 불사름의 영으로 이스라엘의 더러움과 죄를 씻기실 것이다(심판을 통해). “그 죄값이 다 치루어졌도다” 육신의 고난은 죄값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요나서 - 이스라엘의 죽음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그 완성이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이 이스라엘의 죄값을 완전히 치루었는가? 전부는 아니다.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은 더 궁극적인 심판과 죽음을 상징한다. 완전히 죄값이 치루어진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임박한 심판은 앞으로 올 궁극적 심판의 표현이다.
5절 여호와께서 시온의 모든 집회 위에 구름과 연기, 화염과 빛이 될 것이다. 이때 구름과 연기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말하며, 이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이 거룩을 전제로 해서만이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임재하실 것이다. 이 임재하심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자랑과 영광이 될 것이다.

5장
포도원 노래(그의 포도원을 위한 사랑의 노래)이다. “내 사랑하는 자(하나님)를 위하여 노래하되...” 하나님 편에서는 농부로서 하실 일을 다 하셨다. 내가 농부로서 포도원에 하지 않은 일이 무엇이냐? 이 말은 1장을 상기시킨다. 바로 1장 전반부의 요약이다. “열매 맺지 않은 과일”을 불에 던지리라. 이어 비를 내리지 않겠다는 것은, 식물 성장의 ‘비’는 싹틈을 가능케 하는 생명을 상징한다. 바로 영적인 사망 속에 방치해 두시겠다는 표현이다.
הקעצ הקדצ חפשׁמ טפשׁמ(미슈파트 미스파 체다콰 체아콰)
공의를 구했으나 옳은 길에서 벗어났고, 의를 구했으나 울부짖음 뿐이다. 너희가 그 토지의 소유로 잘먹고 잘살겠다하나 불의한 수단으로 모아봐라, 결국 너희 많은 집들이 황폐하게 되리라. 8절은 이스라엘의 극단적 이기심을 나타내고, 12절은 세상 연락에 깊이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 10에바 = 1호멜, 1바트는 40되. 10절의 ‘열흘갈이’는 1겨리(2마리)의 소가 하루 동안 갈 수 있는 넓이가 바로 10에바이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행하시는 일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세상 쾌락에 빠져있다. 따라서 내 백성은 영적 무지로 가득차 있다. 그로 인하여 너희의 부요가 하루 아침에 무너질 것이다.
18절 ‘헛된 줄 = 자로 죄악을 끄는 자’라는 말은 죄를 적극적으로 짓는 사람들로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태도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고의적으로 범하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 해볼려면 해 보십시요”라고 하는 양심에 화인 맞은 자의 모습이다. 일말의 양심적 가책없이 행하는 일들에 대하여 강하고 잔인한 큰 민족을 불러 일으켜, 이스라엘을 철저히 심판하실 것이라는 선언을 하신다.

6장
1-12장에서 6-8장은 문체 style이 다르다(narrative section). 6장이 차지하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6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이사야가 겪은 경험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즉, 첫소명으로 보느냐, 이미 선지자로서 활동하던 중에 겪은 경험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웃시야가 살아있는 동안에 어느 정도 활동을 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느 정도 연대적인 틀에 비추어 볼 때, 6장보다는 더 앞에 받은 경험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웃시야의 죽던 해라고 한다면 웃시야와 요담 섭정기간에 받았던 계시를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보면 곤란한 점이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이 전혀 자격없음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죄를 깨끗케 하시고, 사명을 주신 이 일이 첫소명 때인가? 활동 중이었는가? 2차적인 경험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예레미야서 등 선지서의 구조를 들어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해고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6장에서의 사건을 이사야의 첫소명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내용상으로 볼 때). 그러나 이사야의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 중간에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통상적으로는 맨 앞에 위치해야 한다). 웃시야 시대의 선지자 이사야의 활동은 1년 미만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웃시야의 죽던 해는 죽은 그 해를 말한다.
이사야가 부르심받은 해가 웃시야의 죽던 해라 함은 암시적인 표현이다. 웃시야는 솔로몬 이후 가장 위대했던 왕이었다. 정치적 번영의 시대가 이때였다. 솔로몬 때와 버금가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던 때이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앗시리아의 팽창과 맞먹던 나라가 아람, 다메섹의 벤하닷이었다. 벤하닷 이후 이스라엘이 세력을 떨치게 되는데, 이들 세력이 그때 약화되기 때문이다. 당시 북왕국은 여로보암 2세, 남왕국은 웃시야였다. 북 이스라엘이 먼저 쇠퇴하기 시작하고, 유다에 있어 웃시야는 정치적 강성과 번영의 시대였다. 그러나 웃시야가 죽던 해라는 것은 번영의 시기의 종말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전성기의 종말과 더불어 이사야가 등장한 것은 그의 사역과 메시지의 성격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이사야가 본 성전은 지상 성전이 아니라 하늘 성전을 말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 만유를 통치하시는 왕의 모습, 온 세계의 왕의 모습으로 보았다. 쇠락에 들어선 이스라엘의 왕은 죽었으나, 하늘 보좌의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위로의 메시지라고도 해석하나 실제로는 위로의 뜻보다는 심판의 의미를 시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때 스랍이 좌정해 계신 하나님 위를 날고 있었는데, 이와 똑같은 장면이 계시록 4장에 나타난다(보좌에 둘러선 4생물과 24장로들). 스랍과 4생물의 관계는 무엇인가?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하는 그 소리의 거대함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지극하심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거룩 앞에서 거룩을 직면한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םיתפשׂ(세파타임; ותפושׂמ;메수파토)는 תפשׂ의 Nip.(사파트의 니팔형) 이 일로 인하여 ‘침묵시켜져 버렸다. 당해버렸다. 죽을 자 같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요한도 죽은 자 같이 되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입술이 부정한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 앞에 직면하여 자신의 더러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자기의 죄된 모습 때문에 “나는 죽은 자다”고 했는데 왜 자신의 죄를 입술의 부정으로 표현했을까?
선지자로서의 사역이 말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해왔다. 렘 1:9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다(그 입에 손을 대시며). 그러나 이 해석이 조금 곤란(무리)하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거하면서...’에서 그 죄는 내 죄이기도 하나 백성의 죄이기도 하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 이는 영적 더러움이다. 말은 영적 내면 상태와 가장 밀접한 상태요, 입술은 말과 연결된다. 따라서 영적 내면의 부정함을 입술의 부정으로 표현했다. 입술의 부정함은 그 사람의 전인격적 부정을 뜻한다. 29장의 내용과 관련해서 본다면 ‘입술로는 나를 부르나 마음으로는 내게서 멀도다할 때, 영적 내면과 일치해야 할 기관이 서로 다르다.
이사야의 환상의 의미
․왕상 22:19-20 미가야가 본 환상 - 하늘의 모든 영적 군대들이 좌우편에 서 있었다. 스랍들이 모셔섰다. 천사들이 찬사하는 소리, 누가 아합을 꾀어 엎드러지게 할꼬.
․사 6장 이사야가 본 환상 -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이 두 환상은 장면의 유사성이 있다. 이로 볼 때 두 환상은 동질의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욥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시고 사단이 와서 충동하는 사건이 가리키는 바는 무엇인가? 바로 지상의 역사는 하늘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선지자들은 어떤 특권을 얻은 자인가? 천상에서의 하나님의 결정(렘 23:18; 암 3장)을 환상 중에 계시받고 이것을 하나님이 명하신 자에게 전달하도록 파송받은 자들이다. 누가 하나님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 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였느냐?
6장의 전반부는 아사야가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뵙고 선지자의 사명 받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 자신의 계획을 인생에게 알리심이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역사 결정이다. 6장 이전에 이어 이 환상을 기록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정을 이사야가 친히 환상 중에 보고 전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계속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말아라. 계속 보라 눈을 풀칠하라. 명령으로서 imp형. 이 백성의 마음을 기름지게 = 둔하게 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마음으로 깨닫고 혹시 나음을 얻을까 하노라. 결과적으로 그렇다. 이는 예수님의 천국비유와 동일하다. 그들이 듣고 보아도 깨닫지를 못한다.
πωρω = hardening, Verstockung(페아스톡쿵) 돌처럼 굳게 만들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왜? 나음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구원 못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 선언한 하나님 심판의 예언의 또 다른 양상이다. 인간의 배역과 하나님의 심판 그것과 다른 새 국면이다. 2가지 예상이 가능하다. 유기적인 의미에서의 hardening, 심판의 한 형태로서의 hardening, 계속 돌아오지 않을 때 계속 내버려 두어(영적 무지 가운데) 회개의 길을 막으시겠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후자의 쪽이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심판은 인간의 책임을 전제한다).
영적 무지의 상태를 주여 언제까지니이까? 언제까지 그 완악한 상태로 버려두실 것입니까? “성읍이 황폐할 때까지” 그 목적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철저히 심판 받도록 하겠다. 거룩한 씨가 그 땅의 그루터기이다. 이는 남은 자를 전제로한 심판이다. 여기서 ‘거룩한 씨’는 누구인가? 남은 자인가? 아니면 메시야인가? 이 거룩한 씨가 싹터서 새 생명으로 자라나 열매 맺게 될 것이다. 이 유기는 정하신 기간 동안 영적 무지 가운데 버려두셔서 철저한 심판을 받게 한 후 새 소망 주실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남은 자 보다 그 핵심은 메시야이다. 이스라엘의 배역과 하나님의 심판과 그 다음에 오는 미래의 구원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한다.

7장
임마누엘의 예언이 나오는 곳, 가장 어렵고 논란이 많은 곳이다(7-8장). 7:14의 לא ונמע과 이것을 어디까지 확대시키느냐의 문제가 있다. 8:8, 8:10의 לא ונמע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앗시리아가 쳐들어오면 Palestine의 소국가들이 동맹하여 대항하려 했다.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이 반앗시리아 연합 동맹 맺으려 했으나 앗시리아의 포로로 사로잡히게 된다. 아하스는 반앗수르 동맹에 가담하기 싫어했다. 그래서 먼저 유다 쳐서 자기들에 동조하는 왕을 세우려하는 것이 역사적 배경(열왕기 참조)이다. 이에 아하스가 앗시리아 왕에게 도움을 청하자 와서 북 이스라엘, 아람 다메섹을 쳐 복종케 한다. 모든 나라를 앗시리아에 편입시키고 북 이스라엘은 조그만 영토에 붙어살다가 망해버린다.
6장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통해 새로운 소명을 받게 된다. 심판 예언 다음에 왜 또 다른 구원을 약속하시는가? 6장에서 암시되기를 심판 자체에 대해서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들의 마음을 영적 무지 가운데 잠시 버려두는 것,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완악케 하사 회개케 하는 것을 막으심, 이것이 가장 무서운 심판일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철저히 심판하심이요, 나무가 둥치째 짤려버린 것 같은 상태까지이나, 남은 자를 남겨 두시는 하나님의 긍휼 = 그러나 거룩한 씨가 남아 있도록(새 생명의 가능성) 하시겠다. 완악한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이 남겨두시지 않았더라면 소돔과 고모라 같았으리라(긍휼의 여지). 미래의 역사가 완전한 절망이 아님을 암시한다.
7장에서는 앗시리아에 대해 북 이스라엘과 아람이 주동이 되어 반 앗시리아 세력을 규합하는데 이에 대해 유다가 동조하지 않자, 이스라엘 왕 베가가 아람 왕 르신과 더불어 유다를 쳐들어 온다. 아카바 항구를 점령한 북 이스라엘 베가가 수만의 포로를 잡아가나 선지자의 책망 때문에 돌려보낸다. 이 사건을 당한 유다의 자세는 백성과 왕의 마음이 나무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요동했다. 상당한 동요가 있었다. 이때 이사야가 그 아들 스얄야숩(= 오직 남은 자 만이 돌아오리라)을 데리고 아하스를 만나러 간다. 이 스알야숩은 역사 계획에 대한 하나님께서 세우신 표적이었다. ‘에브라임은 65년 내에 멸망하리라’ 이때가 B.C. 735년 쯤이었고 721년 혹은 722년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다.
이사야를 통해 아하스에게 말씀하신 것은 구원의 약속이다(일방적인 하나님의 선언). “너는 스스로 조용하라 무서워 말라 네 마음이 왕들 앞에서 요동치 말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몇 년 후 앗수르 원군에 의하여 대적이 망한다. 하나님은 구원을 선언하시되 단 한 가지 조건은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라는 것이다.
9절 ונמאת אל יכ ונימאת אל םא(임 로 타아미누 키 로 테아메누) 이 말은 믿지 않으면 정녕 서지 못할 것이라는 이중적인 뜻을 가진다. 그리고 ונימאת와 ונמאת는 조건으로서 ןמא(아민) 즉, 믿는 것이 선행되는 것을 뜻한다.
10절 하나님께서 이어 말씀하시기를 “네가 여호와로부터 표적을 구하라” 하나님이 선언한 구원이 확실한 것을 보증하기 위한 것이었고(이스라엘로 믿게 하려하심이다), 표징을 통해 확실한 믿음을 가지라고 하신다.
12절 그러나 아하스의 대답은 여호와를 시험치 않겠다고 한다. 이미 아하스는 앗시리아 원병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먼저였었다. 그는 하나님보다 앗시리아의 군대를 더 신뢰하였다.
13절 사람을 곤비케 한 것이 외적 침입으로 국난을 겪은 것인지 명확히 모르겠다. 그 당시 아하스는 다윗 왕조를 대변,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14절 마 1장에서 예수의 탄생과 관련하여 마태복음 기자는 동정녀를 통한 예수의 탄생을 이 구절을 인용하였다.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궁극적 사실은 움직일 수 없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의지는 이루어진다. 아하스의 불순종과 그 결과 이루어진 심판의 의미는 무엇인가? 6장에서는 이스라엘을 영적 무지 가운데 두시고 철저히 심판하시나, 하나님이 거룩한 자를 남기신다. 이것인 실증된 예이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유다의 멸망으로 놔두지 않고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거룩한 씨(6장)가 새싹의 움틈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한 번 선언하신 구원의 뜻은 변치 않고 이루신다. 아하스의 불순종으로 이스라엘에게 선언된 구원은, 하나님의 심판은 먼 미래로 밀려났다. 이렇게 보면 7장과 8장의 구분되는 내용은 지금까지 상호 연관성 없이 된 역사적 상황과 결부된다. 여기에 심판과 구원의 의미가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된다.
이것을 넓은 맥락에서 살펴보면, 이사야의 독특한 면은 이스라엘의 심판은 당시 역사적 상황과 밀접하다. 구원은 당시 상황과 유리된 면이 있다. 1장과 2장, 4장에서도 앞에 이스라엘의 타락한 여자를 말해 놓고 הוהי חלצ(첼라 아도나이)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의 내용이 6장이다. שׁדק ערז(제라 코데쉬) 마지막 거룩한 씨라는 말로 언급한다.
하나님이 선언하신 표적이 “임마누엘” 이스라엘의 임박한 심판의 표적이면서 앞으로 올 구원의 표적, 임마누엘 표적이 심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이라 한다. 9장에 가면 이 아이를 신적으로 말한다. 임박한 역사적 상황과 관련되면서도 거리가 있는 상태이다. 이같은 예언 성격 때문에 저자가 여러 시대 사람이라 한다. 이같은 상황이 다른 선지서에도 나온다.
마가복음에 보면 사 2장의 시온성에 대한 것과 같이 말한다. 미가는 이사야와 같은 시대이다. 이사야와 다른 것은 웃시야가 빠진다는 것인데, 동일시대 하나님의 계시의 사역자로 말한 사람에게 유사성이 발견되는 것은 당연하다. 믹 5장, 4:13 앗시리아의 침입을 에언한다. 5장의 예언이 어떤 맥락에서 언급되었는가? 다윗의 존재 계통에서 나오는데 신적 존재이다.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적군에 붙이리라(5:3). הדלי הדלוי תע־דע םנתי(이테넴 아드-에트 욜레다 얄라다) - Assyrian invasion, Assyria defeat liberation 앗시리아의 침입과 멸망 사이에 신적 존재의 출현과 밀접히 관련시킨 깊은 의미이다.
당시 역사적 상황을 초월하면서 밀접하게 연관된 의미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앗시리아의 멸망 - 해방에서 선용하신 사람은 궁극적 구원자가 아니고(히스기야 등), 이들은 신적 존재의 예표이다. 이런 예언 구조는 당시 역사에 우리 시선을 머무르게 하고 앞으로 올 것을 보게 한다. 먼 미래 사건 인물과 관련됨을 의식하고 선지자들은 예언을 연구했다 → 벧전 1:10-11. 이 예언의 궁극적 성취는 앞으로 올 한 인물에 대해서 선지자들도 그 시대를 초월하여 미래를 가르치는 것임을 인식하고 예언을 연구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역사가 요지부동한지 아하스 사건을 통해 알려졌다. 이스라엘의 미래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준다. 앗수르가 유다에 침입하나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것은 히스기야를 통해 이룬다. 선지자 중심으로 한 그의 제자들인 남은 자들은 어찌 살 것인가를 말한다.
11절 이 백성이 행한 길로 가지말아라 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말라 이것은 당시 가치관의 혼돈, 정치적 무질서 등, 당시 진리의 척도의 혼란을 말한다.
14절 이스라엘의 두 집(유다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거치는 돌이 된다.
16절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인봉하라. 이 말은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와 모순된다. 16절의 말은 이사야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증거를 인봉하라는 뜻은 온 나라가 망했으나 주의 통치가 남는 자 중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또 달리 타락한 백성 편에서 보면 교회가 타락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소수 무리에 국한된다고 볼 수 있다. 15절에 보면, 악을 거부하고 선을 택한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규범의 단순형태이다. 선, 악을 안다, 구별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행동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서양에서는 올바른 행동규범을 분별하는 나이(age of discontinue)를 13-14세로 잡는다.
여기서 버터와 꿀의 의미는 무엇인가? 7:2에 보면 “그날에” 앗시리아가 침범하여 황폐케 되는 날에 암소 1마리, 양 2마리에서 나오는 우유가 너무 많아 버터를 만들지경이라면 말이 안된다. 즉,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다 죽고 없을 것이다. 버터를 먹는다는 것은 평화로운 암시보다 심판으로 말미암은 황폐현상이다. 꿀은 자연식품이다. 이스라엘에 전쟁으로 인한 황폐상태가 있을 것을 말한다. 버터와 꿀은 앞으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황폐한 상황을 말한다. 이 아이가 커서 버터와 꿀을 먹을 때는 심판의 참담한 환경에 처할 것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선악을 분별할 나이가 이르기 전에 아람 왕과 북 이스라엘 왕의 땅이 완전히 망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제시하심을 받고도 불순종한 유다에게도 앗수르 왕을 보내어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13년 이내에 아람과 북 이스라엘, 유다까지 쓸어버리겠다는 것이다. 이 아이가 14세 쯤 되면 전쟁의 참화를 느낄 것이다. 여기서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니”라고 한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임마누엘이 예수님일 수 없다(?). 아직까지 깨끗하게 해결못했다. Calvin은 15절과 16절을 분리하여 다르다고 한다. 15절 아이와 16절의 아이는 다르다. 이것은 옹색한 해석이다. 15절과 16절은 יכ(키; 왜냐하면)로 연결된다. המלעה(하알마)는 꼭 처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가 크게 패한다. המלע(알마)는 왕궁의 처녀아내로 보고, 아이를 히스기야로 예언한다. 히스기야는 이미 태어난지 오래 되어 9세 정도로 추측한다. 또 אמלעה는 그 당시 처녀가 낳은 아이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님과 관련성이 희박해지고 특히 동정녀와 관계가 없어진다. 70인 역에서 המלע를 신혼의 아내로 하지 않고 παρθενος(파르테노스; virgin; 처녀)이라 한다. 그러나 אמלע는 앞으로 태어날 신비한 인물을 반증하는 것이다. γενανις(게나니스; 젊은 여인)이라고 후대 역본에서 바꾼 것은 초대교회에서 헬라어로 사용, 당시 복음증거시 παρθενος를 가지고 증거하므로 반작용으로 γενανις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당시 신혼 초의 여인들이 낳은 아이들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에 제동거는 것이 70인 역에서 παρθενος라고 번역한 것을 말한다. 당시 אמלע를 통한 아이가 신비한 것임을 알고 번역한 것임을 반증한다. 이 예언을 둘러싼 논의가 복잡하다. 이 문맥을 보아서는 이 아이가 성년이 되기 전에 전쟁의 참화를 겪고, 앗수르, 북 이스라엘, 유다가 망하고 전쟁을 겪을 것을 분명히 말한다. 임마누엘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Immanuel Sign) 위협적 심판의 의미이다. 이 자체의 문맥을 보면 너무 당연하다. 임마누엘 표적은 앞에 한 말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임마누엘 해석시 7:4 전후를 보는데, 8:10 마지막 부분에 임마누엘이 2번 나온다. 즉, 7-8장의 문맥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8장
표적의 의미를 이 아이가 철들기 전에 다메섹과 사마리아로부터 약탈당하게 된다.
6절 앗수르 군대를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이 침입시킴.
8절 목에까지 찰 것이다. 죽음(위험수위)에 임박한 상태, 아이가 성년이 되기 전에 세 나라가 망한다. 8장에서는 엄마, 아빠를 부를 때까지는 즉, 수년 내에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신다. 촉급함이 나타난다. 미묘한 반전이 일어난다. 마헬살랄 = 서둘러 약탈하라. “날개” = 세력, 앗수르의 세력의 펼침이 온 땅에 가득하다. “온 땅”을 “당신의 온 땅에 편만” 당신은 임마누엘, 앗수르가 쳐들어온 그 세력의 편만 속에서 임마누엘을 부르며 당신의 땅에 앗시리아의 참화가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임마누엘을 2인칭으로 언급하며 탄원한다.
9절 10절에서 임마누엘 뜻이 풀어진다. 이방이 유다를 멸망시키려고 쳐들어오나 성공 못한다. 그들의 도모가 서지 못한다. 임마누엘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소망이다. 구원의 소망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17절 배역하므로 하나님이 그 얼굴을 돌리시고, 영적 무지 중에 두시고, 철저한 심판을 겪게 하시는 상황에서도 그 얼굴을 완전히 돌리신 하나님, 그러나 남은 자 중에 하나님의 통치는 이루어지고, 생존하는 자 중에 이사야는 소망을 잃지 않고 얼굴 돌리신 하나님께 간구한다. 이사야와 그의 자녀는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하나님의 징표들이다. 방금 말씀은 미래 앞에 서 있는 믿는 자가 취할 태도이다.
19절 믿지 않은 자의 태도, 이들의 영적 무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망할지도 모르고 귀신에게 가서 묻는다. 사단은 우리 죄를 참소하는 자이다. 계시록의 “아바론” = 파괴자, 사단은 죽이려고 인격을 파괴한다.
20절 영적 무지 중에 살게 된다. 이들은 여호와의 율법과 증거를 바라지 않은 자들이다.

9장
1절 환난의 땅 =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땅, 스불론과 납달리 땅 → 갈릴리 지역(circle ring; 이방과 대적 지역), 아하스가 앗시리아에 원병을 청했을 때 Dor(해변지역) 지역을 따라 내려와서 애굽 지경에 진을 치고 예루살렘 쪽으로 올라온다. 그들은 갈릴리, 길르앗, Dor 지역을 자기 땅으로 편입시킨다. 이 땅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심판 당한 상징의 땅이다. 이 땅에 다니는 백성에게 빛이 비취인다. 예수님의 갈릴리 지역 사역을 이 예언의 말씀에 비추어 말한다. 앞으로 임할 구원은 앗시리아의 침입에 의한 역사적 사건과 연관된다.
5절 전능하신 하나님 = 용사로서의 하나님(그 백성을 대적에게서 구하시는), 태어날 아이는 신적이다.
7절 아하스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밝혀진다. 곧 아람과 이스라엘이 망할 것이요, 그 앗시리아는 유다까지 침입할 터인데 이와같이 남은자 =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미래 앞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나?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말라. 그들이 말하는 반역을 반역으로 여기지 말라 - 진리를 분별하라. 하나님만이 네가 두려워 해야할 대상이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은 성소가 되어주신다. 이스라엘의 두 집(남,북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파멸의 올무가 될 것이다.
16절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제자들에게 율법을 봉함하라. 그러나 나는 여호와를 기다리며 바라보리라. 이것을 이사야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내용이라고 본다. 교회가 타락할 때 계시, 진리의 말씀이 소수의 남은 자에게 국한된다. 온 나라가 망했으나 주의 통치가 남은 자(그 적은 무리) 가운데 상존한다는 뜻이다. 이사야가 바라보는 것은 야곱 집에 낯을 가리우시는 하나님을 나는 기다리며, 배역함으로 하나님께서 얼굴 돌리시고 영적 무지에 가두시고 철저한 심판 겪게 하시는 중에도 이스라엘에게서 완전히 얼굴 돌리신 하나님, 소수의 무리들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의 통치는 이루어지며 상존한다. 그 하나님을 기다리리라. 나(선지자 이사야)와 그의 자녀들은 이와같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교리의 표적, 징표이다. 하나님의 미래 앞에 선 믿는 자가 취할 태도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의 태도는 19절에 신접한 자, 마술사에게 물으라고 하거든 어찌 산 자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 하나님 불신하는 자들의 영적 무지. 사단의 이름; 참소하는 자, 방해자, 파괴자(영혼의), 하나님의 율법으로 돌아가자 말하지 않는다면 날의 밝아옴이 없을 것이다.
21절 굶주리고 짓눌려 분노가 끓어올라 자기 왕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다.
23절 그러나 어두움이 있는 땅에는, 억압받던 땅(환난 = 하나님의 심판)에는 어두움이 있지 아니하리라. 이전에는 스불론과 납달리(아하스가 앗시리아 원병을 청했을 때)를 낮추셨으나 이 심판의 땅과 그 백성에게 큰 빛이 임한다. 탈취물을 나눈는 때, 미디안의 날과 같이 될 것이다. 이와같은 구원의 날이 누구에 의해서 일어나는가? 한 아기에 의해서 전능하신 하나님, 용사로서의 하나님, 모사(Wonderful counceller), 기묘자 즉, 하나님이신 신적인 분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가 다윗의 위에 앉아 공의와 정의로 든든히 할 것이요, 임박한 심판과 심판 뒤에 올 구원이 드러나며, 그 구원은 신적 모습으로 태어날 여호와의 순에 의해 일어날 것이다. 앗시리아의 침입과 패배와 관련하여 극도로 확대되는 신적 메시야, 임마누엘에 의해서이다.
지금까지 진행된 것을 보면 이스라엘의 구체적 상황을 언급하고, 예언이 진행되는 중에 하나님의 심판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구원은 한 존재에 의한 것으로 말한다. 4장 - 여호와의 순, 7장 - 임마누엘, 9장에 오면 신적 존재로 태어날 어떤 분임을 말한다. 9장 나머지와 10-11장은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의 심판이 앗시리아와 더불어 확대된다. 앞으로 태어날 메시야가 어떤 분임을 말한다. 거룩한 씨 - 철저한 심판이 완전한 멸절은 아니고 남은 자 통한 구원의 시사이다.
8장까지 드러난 의미의 대강은 하나님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을 제시하신다. 아하스의 불신앙(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대변)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임마누엘’이라는 표적(상징)으로 제시되는데, 그 표적의 첫번째가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박한)이다.
앗시리아의 위기가 유다에게 닥쳤을 때, 앗시리아에 뒤덮인 땅을 ‘임마누엘이여’ 당신의 땅이 앗시리아에게 짓밟혔습니다고 탄원, 그 탄원자는 누구인가? 36,39절 설화체.
앗시리아 군대가 유다를 침입한 위기 상황에 있어서 아하스는 하나님을 불신앙하고 오히려 앗시리아를 택하나, 히스기야는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 즉,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나타낸다. 이 두 경우에 앗시리아 침공을 유다의 구원으로 끝나리라는 예언을 받지만 즉, 하나님이 똑같이 구원을 제시하셨으나 부자(父子)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익명의 이 탄원자는 히스기야 시대의 신망자들을 가리킴, 왕이 백성을 대표하는 자라면 그 시대의 이스라엘의 탄원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는 자기 스스로를 ‘남은 자’로 이해하고 있다. 남은 자의 2가지 자세 ①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요(그가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실 때까지), ②귀신들에게 물으며,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는데까지 이르며 스스로 자멸하는 자들.
9:7 이하 주께서 말씀을 야곱에게 보내셨고 그 말씀이 이스라엘 가운데 떨어졌다(여기서는 실현되었다). 말씀이 떨어졌다는 말에 대하여 실현되지 않았다고 일반적으로 말하나 여기서는 실현된 것으로 본다. 그 말씀의 이루어진 것을 체험하고서도 마음이 완악(교만)하여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이스라엘에서 흔한 천한 재목)들이 찍혔으나 백향목(이스라엘에게 나지 않은 귀한, 최상의 건축재료)으로 대신 하리라” 천한 건축재료가 무너졌으나 그보다 더 나은 것으로 지으리라 → 이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만홀히 여기는 자세(경험하고서도 깨닫지 못함), 이에 대해 하나님은 아람 왕 르신의 대적들을 일으킬 것이요(동), 블레셋을 일으켜(서) 그들이 이스라엘을 삼키리라고 말씀하신다. ו(와우) 접속법을 분사로 해석하나 운문에서는 불규칙적이어서 구분하기 어렵다.
10절 (ו)와우 계속법을 적용하며, 르신을 일으켰고, 그를 치게 하셨다 - 이는 이방을 통해 심판하신 사건(예; 앗시리아 침공).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이스라엘의 대부분을 앗시리아에 빼앗기고도)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았다는 말인가? 이스라엘을 치는데 르신의 대적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치게 한다는 말은 맞으나, 문제는 아람(당시 정치 상황과 맞지 않다)과 블레셋(주로 유다가 침략을 받는다; 지리적 상황이 부적합)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러나 이렇게 볼 때는 전체적 흐름이 느슨해 진다. 앞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10절의 심판은 앗시리아에 의한 심판이라 하고 와우 접속법을 무시하면 외부적 세력(10,11절에 의한), 내부적 전력 분열로 보면 르신의 대적들과 아람 즉, 정복한 나라의 군사로 다른 나라를 친다(총알받이). 앗시리아 자체보다 앗시리아가 정복한 땅의 친앗시리아적 아람 정권이 앞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2절 그 백성이 그를 치신 자는 하나님이셨다(앗시리아가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머리(정치적 지도층)와 꼬리(선지자들과 거짓 선지자들)를 잘라버리겠다 - 이는 백성을 인도할 자가 오도하는 자가 되었다. 영적 지도층의 오도로 인한 난맥상을 시사한다.
16절 지도층의 제거 - 심판이 먼저 지도층에 임함을 뜻한다. 왜냐하면 백성을 인도할 책임이 있으나 오도함으로, 부실함으로 영적 무지와 배교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지도층의 제거는 백성들에 대한 심판이기도 하다(공동체 질서의 와해, 무정부 상태). 이런 악순환, 상황의 악화는 하나님 심판 형식의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국가도 그렇지만 교회가 이런 악순환에 빠지면, 서로서로 세워야 할 공동체가 무너지면 더욱 무서운 일. 이러한 무질서 속에서 골육상잔(형제가 형제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며, 왼쪽으로 빼앗고 오른쪽으로 만족함이 없는 므낫세가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이 므낫세를)이 발생한다. 하나님 심판의 한 형태인 동시에 또한 범죄함이다.

10장
3절 보응의 날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누구에게 피하겠느냐?) 어찌하여 여호와를 버렸느냐? 이런 부패의 거센 탁류에 휩쓸리지 않고 굳건히 서는 사람이 있어서(남은 자) “하나님 나라의 참된 모습은 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다”를 알고, 체험하고, 스스로 보여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영적 어두움이 심할 때는 복음전파보다 가짜들이 많이 날뛰니까. “참 하나님의 것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는데 실제적으로 능력있는 나라 보여주고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가 전할 것이 무엇인가를 자기 스스로가 분명히 알고, 말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것이 분명치 않으면 암만 신학공부해봐야 불필요하다. 분명히 전할 것을 알고 있는 자가 굳건히 설 때 다른 사람들이 위로받는다(그 속에서 능력있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때, 그 하나님 때문에 힘과 위로를 얻는다).
5-34절 앗시리아의 심판에 대해 예언. 앗시리아 - 하나님의 이스라엘 심판 위한 도구, 이것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뜻한다. 그 심판의 이유는 앗시리아와 그들이 행한 역사적 정당성은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 그러나 앗시리아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계획대로 행하지 않았다. 그들의 정복욕에 의해서 많은 나라들을 멸절시키려 했다. 앗시리아 - 대규모 추방정책, 이전에는 침공국과 조약 맺고 조공만 바치게 했었다. 그러나 앗시리아는 다른 곳의 거민을 그곳에 두고 그 거민은 사방으로 흩어버려 다시는 나라를 형성하지 못하도록 와해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특별히 8절에 그 교만한 마음에 대해서 말한다. 예전 나라의 멸망은 그 수호신의 멸망을 의미 - 신들의 전쟁, 국가의 운명과 수호신의 운명이 직결되었다. “사마리아와 그 신들” - 예루살렘과 그 신상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행하리라. 여기서 그들의 정복욕의 절정에 달한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모욕으로 연결, 이에 대해 하나님은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그들의(앗시리아) 교만과 자랑을 처벌하리라” 도구가 사용자에게 대항하여 교만할 수 있는가? 앗시리아의 멸망은 그들 자신의 범죄 때문이다(여기서도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난다). 앗시리아의 죄 -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짓밟고 착취하는 것, 이것은 이스라엘 내의 지도층의 죄와 상응한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스라엘의 죄는 이방의 죄와 똑같다. 즉, 세대 속에 야합하여 세속화했음을 의미한다.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과 관련지어 하나님께 물은 선지자 - 하박국, 바벨론도 심판 받으나 그 역시 그 자신의 죄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공의에 입각하기에 남을 억울케 하는 일이 없다. 악인도 그 날에 적당히 쓰임받는다. 그러나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철저히 옳고 의로우셨음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20절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그를 친 자(앗시리아)를 의지하지 아니하리니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라. 여기서 남은 자(하나님께 돌아온 자)의 특징은 “돌아오리니” = 참 믿음의 회복을 의미.
24절 앗시리아의 멸망이 애굽이 이스라엘을 박해하던 것과 비교된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처럼 그의 막대기를 바다 위에 펴실 것이다. 과거 홍해사건 통해 애굽군병 멸하셨듯이 앗시리아 멸망케 하실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앗시리아에서의 해방이 예전의 출애굽과 비교될 수 있는 사건임을 시사한다(제 2의 출애굽). 앗시리아의 이스라엘 박해와 애굽의 이스라엘의 박해를 호세아서와 비교해 보면 심판 = 구속역사를 원점으로 환원시키는 일의 의미를 가진다. 호세아서 - 음녀 고멜(범죄한 이스라엘) 데리고 광야(즉 범죄한 이스라엘을 광야로 내칠 것을 시사)로 간다. 옛날 이스라엘이 노예로 살던 땅, 따라서 세상 세력의 노예가 되는 상태로 되돌아 갈 것.
배역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인 앗시리아가 심판받게 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편애로 억울하게 압제자가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앗시리아 자체의 죄악(국가적 횡포)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모든 일들에서 공의로우시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억울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공의를 구부려뜨리시면서 “예정”을 이루시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인 동시에 의이다. 은혜와 의 사이에 잘못된 긴장이 있어서는 안된다. 앗시리아의 심판(심판의 도구 제거)은 이스라엘의 심판 도구 해소로서 더 이상 앗시리아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심이다.
교회사 - 일반 역사학적 방법론에 치중하고 있으나(최초에 일어난 학문) 사실은 하나님의 실제적 역사는 따로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으시고 단지 계시로 알려주셨다. 따라서 교회사는 철저히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사는 성경해석사이다.
앗시리아의 압제는 세상 세력의 구현이다(하나님 백성을 자기의 노예로 삼으려는). 앞으로의 앗시리아의 위협이 극에 달할 것이다(예루살렘에까지 이 세력이 침입할 것이다). 북편에서부터 앗시리아가 침입할 것이다. 이는 산헤립 때 성취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앗시리아가 질 것이다. 왜냐하면 시온을 곧 하나님을 만홀히 여김으로(랍사게의 행동과 편지 내용). 하나님의 군대가 하룻밤 새 18만명을 몰살시킨다(36절).

11장의 내용이 climax(1-10장의)이다.
1절 이스라엘을 꺾어버린 그 앗시리아의 세력이 하나님에 의해 꺾여진 다음
ישׁי עזגמ רטח(호테르 믹게자 이샤); 가지가 짤려나가고 남은 둥치(cut accoss), 그 밑둥치에서 새로운 시작이 날 것, 그 뿌리로부터 싹이 나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여기서 이새의 언급은 다윗왕조를 의식한 것, 다윗 왕권이 이스라엘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 수 있다. 이는 다윗 왕권으로부터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을 의미한다. 이새 자신은 다윗 왕권과 아무 연관이 없다. 그런데 왜 이새를 언급했나? 다윗 왕조의 뿌리, 밑둥치를 언급. 미 5장 ‘네게서 다스릴 자(다윗 왕권)가 나올 것인데 그의 근원은 상고라’ 즉, 앞으로 나타날 메시야는 다윗 왕권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부분으로 다윗 왕조의 근원적 성취일 것이다. 열매 맺을 것이라는 말은 다윗에게 주사 언약이 성취될 것을 의미한다. 메시야 이 사람에게 성령께서 임하실 것이며, 메시야에게 임한 성령의 능력은 지혜로, 명철로, 힘, 모략, 지식,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나타날 것이다.
9장에서 הצע(에챠; 모략), רובג(기보르; 힘)라는 단어를 사용함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언된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정사를 멘 자 즉, 9장에서 태어날 아기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11장 초두의 메시야는 9장의 아기와 동일하다. 11장에서 그분의 등장을 말씀하시면서 다윗왕조의 근원에서부터 나온 분이라 하여 성자 하나님의 incarnation(성육신)을 말한다. 3절 이 모든 능력, 모략, 지식, 명철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함이다. 내가 나의 뜻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함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주님은 그분의 뜻을 순종으로서 이루신다. 하나님 왕국의 통치자에게 요구되는 이상적 전형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다윗이 이상적 모형으로 제시됨은 그가 철저히 순종하여 그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한 자이므로 이 가지에서 나오는 것으로 말한다.
4절 가난한 자의 언급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통치로 가난한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와 공평함으로 다스리리라. 이 통치에 의해 가난한 자(영적 가난한 자)들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와같은 통치의 수단은 막대기(무기)와 입술의 능력(말씀과 관련 - 계시록)과 입의 기운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말씀으로 통치하신다. 이 통치는 가난한 자를 구원하는 통치와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악인들에 대한 심판의 통치이다. 이때 성령님께서 통치하는 능력을 חור(루하)라고 한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진리로 허리를 동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쟁의 준비이다. 4-5절은 종합하면 메시야가 통치하여 악인을 죽이는 심판을 시작하는데 의와 진리의 말씀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이 통치의 구체적인 수단은 의와 성령의 말씀이다. 바로 성령의 지혜와 권능으로 나타난다.
6절 이와같은 메시야 통치의 결과는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거하게 된다. 6-10절이 그 통치의 결과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인류의 뿌리깊은 적의(투쟁, 피흘림)가 제거되고 참된 평화가 모든 영역에, 동물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평화가 도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레미야 31장과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게 된다. 하나님과 인간의 영적 깊은 관계를 앎(메시야 통치의 결과)으로 표현한다.
10절 이새의 뿌리 = 다윗의 약속, 왕조의 뿌리,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모든 민족을 향하여 확장되어가는 왕권이다. 열방이 그에게 나아올 것이다. 그의 안식처 곧 메시야의 안식처가 영화롭게 될 것이다. 열방이 시온을 향하여 나오는 것이 사 2장에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의 통치 때문이다. 여기서는 메시야의 통치가 나타났다. 모든 기독론의 핵심이 시편 2편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셨다. 그리스도께서 만국의 기호로 선다. 이는 만인의 통치이다. 모든 민족 통해 확장되어가는 형태이다. 시온을 하나님의 안식처라고 한다(시 130편). 그의 안식처가 영화롭게 될 것, 여기서도 시온 성전이 메시야의 안식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메시야의 동일시이다. 그리고 열방이 나아오는 이유가 이것이요, 모든 기독론의 핵심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시는 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시편 2편은 잘 설명한다. 그의 resting place, 예루살렘 시온의 성전은 “하나님의 안식처”라 부르게 된다. 시온 성전이 영화롭게 되리라(시 87편). 시온에 대해 영광스런 일을 언급하리라 하면서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에 와서 예루살렘 시민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예루살렘은 교회를 의미한다. 말세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11장 전반부에서 메시야 출현, 그의 통치, 그의 통치는 말씀으로, 평화를 끼치므로 열방이 그에게로 나아온다. 열방의 통치를 구체적으로 말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앞에서는 다윗이 모델이었고, 두번째로 내 손을 더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더하시겠다는 말씀으로 앗수르와 애굽에서 남은 자를 다시 구원하시겠다고 한다.
15절 이것은 출애굽 사건의 model이다. 그가 다시 능력 행하신다는 것은 제 2의 출애굽을 시도하신다는 것이요, 10장에서 말한 앗시리아로부터 해방과 관련된다. 10장 하반부에서 이미 앗시리아로부터 해방을 언급했는데 또 여기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11장 전체가 종말론적 성격이 강하다. 10장과 11장 사이에 상당한 시간적 gap이 있다. 40장 이하 해석시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이것은 다음에 다룰 것임). 11장으로 넘어가면서 시간이 밀려간다. 이런 시간적 확대와 더불어 예언의 성격, 내용도 시공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즉, 종말론적 성격을 띠게 된다.
앗시리아로부터 해방,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은 그 나라 자체도 가리키지만 어떤 비유적 의미도 있다. 그리고 뒤에 언급하는 나일강 상류의 애굽인 바드로스, 구스(더 동남쪽), 엘람(인도지역), 시날(북쪽)의 언급은 그 당시 알고 있는 전세계(모든 민족)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앗시리아로부터의 해방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학개, 스가랴는 포로후시대 이미 앗수르, 애굽이 없을 때 앗수르와 애굽에서 해방된다고 기록함은 실제적 나라보다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 노예로 삼으려는 하나님의 대적세력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때의 앗수르와 애굽 해방은 문자보다 무엇을 상징한다. 밑줄친 부분을 염두에 둔다면 「제 2의 출애굽」은 종말론적 의미가 강하다 하겠으며, 이 해방이야말로 궁극적인 해방인 것이다. 즉, 몇 십년 이후 있을 앗시리아의 해방의미 이상이다.
11절 만민을 향하여 기호로 설 것이요, סנ(네스; sign)
12절 10절에서 이새의 뿌리가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라 하므로 이 기호는 메시야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이 세계 각처에서 메시야의 깃발 아래 메시야 왕국을 세우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12절의 결과가 13절이다.
13절 이들이 한 몸을 이루어 한 왕국을 성취할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야 왕국의 통일성은 다윗을 모델로 한다.
14절 블레셋에게 날아가 앉고, 동방자손을 노략한다. 남으로는 애굽을, 서로는 얌마를, 북으로는 앗수르를 동으로는 에돔, 암몬, 모압을 노략하게 되는데 이는 메시야 왕국의 정복사역으로서 메시야의 왕국이 전세계로 확장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 복종한다는 것은 다윗을 모델로 하고, 또 동서남북의 정벌은 여호수아를 모델로 한다. 그리고 애굽을 치는 것은 모세를 모델로 한다.
11절이 출애굽을 연상시킨다면, 12-14절은 다윗과 여호수아의 정복사역을 연상시키며, 그리고 11절은 15절과 연결되고, 16절에 연결되어야 자연스러운데 그 사이에 정복사역이 끼어있다. 이 의미는 앞으로 메시야 통해 정복사역이 이루어질 것인데 출애굽이 모델의 틀이 되어 출애굽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이루어질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미래의 출애굽과 메시야 왕국의 설립이 엄격히 분리되지 않는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하나의 내용을 가진 역사이다. 출애굽, 나라정복, 건설은 메시야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는 하나의 동일한 본질, 내용을 다루고 있으면서 출애굽으로 표현한 것은 전체의 내용을 출애굽의 내용으로 요약하고자 함이다. 사실 4장, 7장에서 메시야 왕국 건설이 투사되나 여기서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12장의 내용은 정리하는 찬송이 나오고 내용이 마감된다. 또 13장 이후는 우주적 열방에 관한 예언들이 등장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12장까지 일단락된다. 즉, 일단 앗시리아와 관련지어 내용이 마감된다.

내용정리
1장은 이스라엘의 과거 배역의 역사와 징계하신 역사, 긍휼히 여겨 남은 자를 두신 역사, 그러나 정죄받아 망할 수 밖에 없는 현재, 하나님의 미래는 심판과 구원이다. 바로 초두에서 이사야는 심판과 구원을 말한다. 앞으로 구원받을 이스라엘에게는 심판도 정화의 의미(끝까지 배역하는 자는 철저히 멸망)를 갖는다. 하나님의 미래 계획이 이스라엘의 구체적 역사와 관련되어 구체적으로 확대 제시되는데, 심판도 말할 수 있으나 이사야를 통해 알리신 구원계시를 종합해보고 여기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1장 후반부 ①시온이 공평과 의로 구속되리라 - 4장, 53장으로 이어질 때 큰 의미를 갖는다. ②2:1 - 시온으로부터 하나님의 통치, 그로 인해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고 열방이 모여든다. ③4:2 -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통치하실 것이다.
4장이 주는 의미
①הוהי חמצ(체마 아도나이)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통치하시는 것을 보고 열방이 나올 것이다. 스가랴에서도 이스라엘의 심판과 정화를 말하는데 그러나 그 심판 후에 의와 공평으로 구속될 것이다. 이때 열방도 참여된다.
②2장 1절 이하는 시온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면서 그 결과는 평화이다.
③4장 2절 이하에서는 시온이 의와 공평으로 구속되는데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곳을 거룩하다고 불릴 것이다. 왜냐하면 시온으로부터 죄를 씻어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분이 הוהי חמצ이다. 죄를 정결케 하므로 제사장적 사역을 감당할 인물인데 하나님의 임재로 나타날 것이다.
임마누엘(לאונמע) - 예언의 의미, 구원적 의미의 구체화는 앗시리아가 예루살렘을 침입할 때 실현되었다. 이는 적어도 제사장적 직분을 포함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9:1이하에서는 왕으로 나타난다(앞으로 태어날 한 아기). 즉, 제사장이면서 왕이신 모습이다. 그리고 이것의 절정이 11:1 이하이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구원 내용이 나타나는데 즉, 구원의 핵심인물이 나타나는데 이가 임마누엘이다. 그는 제사장이면서 왕이다.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스가랴서와 히브리서이다. 왕직과 제사장직의 결합을 통해 암시되고 있지만(왕직, 제사장직의 결합은 53장을 하고 나서야 밝혀진다) 그러나 찾아보니까 앞으로 올 구원사건은 출애굽과 다윗사건, 홍해사건과 연관된 사건으로 미래를 알리신다. 하나님이 미래를 말하면서 창세기부터의 모든 역사와 관련하여 언급하므로 과거사건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 올 구원사건은 가장 흔한 것이 출애굽, 다음이 미디안 사건, 다윗정복, 여호수아, 모세를 언급하고 11장은 에덴동산을 언급한다.
창세기부터의 모든 역사가 다 거론되는 것, 모세, 다윗, 여호수아, 기드온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은 모든 역사의 절정, 완성이 그리스도이심을 보이고자 함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미래 구원역사의 핵심인물로 등장하는데 이분이 행할 사역을 옛날 인물과 관련시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모든 구원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된다. 11장을 읽으면서 다양성은 그 자체가 뜻이 있다. 신약에서도 말하기를 약속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되었다고, 궁극적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다양한 인물, 사건이 그의 사역에서 발견된 이유는 무엇인가? 히 1장에 보면 πολυμερος(폴류메로스; 여러 모양), πολυτροπως(폴류트로포스; 여러 부분) 등 여러 부분으로, 여러 모양으로 당시에 계시하셨다고 한다. 구약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언급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지막날에는 아들 안에서 말씀으로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요 5:39를 보면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지혜와 모든 보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데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구약의 선지자들이 증거하고 있다.


아모스(סומע; Amos 

1. 서론
아모스는 요나, 호세아, 이사야, 미가 등과 함께 기원전 8세기에 활동한 선지자이며 특히 남 유다왕국 출신으로서 북 이스라엘왕국에서 선지 사역을 수행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남동 쪽에 위치한 드고아 지방 출신으로서 뽕나무 재배와 양을 치는 미천한 목동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예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상당한 식견과 문학적 교양을 지닌, 즉 뽕나무 재배와 목축을 하는 부농이었는지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선지 사역과는 전혀 상관없는 직업에 종사하던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이 아모스를 ‘양의 뒤를 따르는 데서’ 불러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을 맡기셨다는 사실이다. 즉 그의 예언 사역은 오직 주권적인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은 종교 지도층마저 이용되고 상업화한 당시 아모스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선포하는 참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음을 뜻한다. 아모스 1장 1절에 보면 아모스의 예언 사역 시기를 가리켜 유다왕 웃시야와 이스라엘왕 여로보암 때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이 두 왕은 이스라엘의 최 전성기인 다윗-솔로몬 시대의 영토에 버금가는 영토확장을 이룩하였고 또한 두 주요 교역로 비아 마리스(Via maris)와 킹즈 하이웨이(King's Highway)를 장악함으로서 막대한 부가 이스라엘로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솔로몬 이후 가장 번영한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2. 심판예언
적어도 외적으로는 가장 번영한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유례 없는 축복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할만한 시대를 향해 아모스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으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암 1:2)였다. 그는 마치 사자의 포효처럼 무섭고 위협적인 심판의 말씀을 이스라엘과 그 주위 열방들에 대해 선포하였다. “...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은 실상 사자가 그 먹이를 찢듯이 곧 무서운 심판으로 역사 속에 개입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위협적인 말씀이었다.
우리를 더욱 당황케하는 사실은 이 무서운 심판의 대상에 열방 뿐만아니라 이스라엘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선택받은 민족도 아니며 오히려 이스라엘을 괴롭혀온 열방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별히 선택된 이스라엘이 바로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전혀 기대 밖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와같은 전혀 기대 밖의 일을 행하시는 이유, 즉 그의 친백성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이유에 대해 첫째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배척하고 지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며, 두번째로 그들이 “거짓 것”(우상)에 미혹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암 2:4). 하나님의 율법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음으로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친백성으로 삼으실 때 이 하나님 왕국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살아야할 도리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따라서 이 율법을 순종치 않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순종치 않은 것이며 이 율법을 배척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요 그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배척한 이스라엘은 “거짓 것”에 미혹되어 우상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삼았으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게된 이유였다.
아모스 2:6-8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는 행위가 그 당시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말해주고 있다(여기에 열거된 이스라엘의 죄는 구체적인 죄들인 동시에 당시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전형적인 죄이기도 하다).
첫째로,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 때문에 궁핍한 자를 파는”죄였다(이것은 아마 왕하 4:1절 이하의 경우처럼 빚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가 종으로 팔리는 경우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인을 종으로 사거나 파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는 않으나 주인은 그를 품꾼처럼 대하게 되어 있으며 희년이 되어 자유할 경우 후한 품삯을 주어 자립할 수 있도록 하게 되어 있다. 이런 원리에 비추어 보면 신발 한 켤레 정도의 사소한 빚 때문에 상당한 금액(노예 값은 대개 은 30세겔 이상)을 받고 종으로 팔아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것은 합법을 가장한 불법이며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처사임을 알 수 있다.
두번째로, 부자(父子)가 한 여인에게 다녀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죄이었다. 여기 “여인”은 “여종”을 의미하며 율법에 의하면 여종을 아들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할 경우 딸처럼 대하게 되어 있다. 아들이 관계한 여종을 아비가 다시 관계한다는 것은 근친상간의 죄와 다름이 없으며 거룩해야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참고, 고전 1:1이하). 특히 여종의 입장에서 볼 경우 완전히 인간성을 말살당하고 쾌락의 노리개로 전락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돈을 벌기 위해서는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부당하게 종으로 팔아 넘기는 일도 서슴치 않으며 이렇게 팔린 여종을 부자(父子)가 함께 관계함으로서 인간 이하의 노리개감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를 가리켜 가난한 자의 머리를 땅에 대고 짓밟는 짓이라고 아모스 선지자는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암 2:7).
세번째로, “모든 단 옆에서 전당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포도주를 마시는” 죄이었다. 율법에 의하면 빚진 자의 옷을 전당잡을 경우 해지기 전에 그 옷을 돌려 주게 되어 있다. 명백한 율법의 명령을 어기고 전당잡은 옷을 깔고 잠을 잔다는 것은 하나님 면전에서 죄악을 범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완악함을 잘 드러내주는 행위이다.
특히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상에 대해 아모스 4장 4절 이하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수 많은 희생제물과 십일조, 낙헌제를 드린 후 그것을 자랑하고 다니는 종교적 허영심을 가리켜 이것은 “너희들이 좋아서 하는 일일 뿐”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며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사 1:13) 이와같은 예배는 오히려 죄에 죄를 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암 4:4). 여기에서 우리는 생활과 예배, 참 경건과 예배가 완전히 분리되어 예배가 순전히 형식과 외식이 되어버린 상태를 볼 수 있다.
이와같은 타락상의 의미를 더욱 깊이 밝히기 위해 아모스는 2장 9절 이하에서 이스라엘의 근원과 역사를 상기시킨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사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신 은혜의 역사를 말한 다음 그 후 선지자를 통해 그의 뜻을 알리시며 그들 가운데 나실인을 세우신 사실을 상기시킨다. 나실인은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헌신한 자이며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목적을 위해 구별된 이스라엘의 성별과 헌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나실인으로 독주를 마시게 하고 선지자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구별된 자신의 위치를 저버리고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분명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어 땅의 모든 족속 중에 홀로 하나님의 아신 바 된 민족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위치를 저 버릴때 선택은 더 이상의 은혜와 축복의 근거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근거가 됨을 아모스 선지자는 힘주어 말한다(암 3:2). “땅의 모든 족속 중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3. 이스라엘의 무감각
아모스서 전체를 통해 이스라엘이 자신의 타락상의 심각성을 의식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안일과 향락에 탐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같은 이스라엘의 영적 무감각 상태의 원인을 다음 몇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첫째로, 외적인 번영에 대한 오해가 그 원인이었다. 솔로몬 시대에 버금가는 정치적 영광과 유례없는 경제적 번영을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고 생각하였으며 그들은 유례없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 이와같은 외적 번영은 아람에게 박해 받음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베푸신 은혜였다(왕하 14:22,23).
이런 착각을 가능케 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영광스러운 과거의 종교적 업적이었다. 여로보암 2세는 아합 집을 숙청한 예후의 증손이었다. 예후 왕조는 특히 이스라엘로 하여금 배도케하였던 바알 숭배를 척결한 위대한 종교적 업적을 이룬 왕조였다. 이러한 왕조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리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기대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 그 후 바알 숭배가 근절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호 4:11), 그들이 합법적 성소라고 생각한 벧엘 조차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섬기는 불법적인 성소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말하자면 당시 이스라엘은 그들의 과거의 영광에만 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현재 상태를, 그들의 참 모습을 날카롭게, 철저하게 살피고 비판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의 가능성에 대해 무감각하게 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었다. 그들의 행위야 어떠하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구원자와 보호자이시며, 이스라엘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 선택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목적이 있음을, 즉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제사장 왕국과 하나님께서 진리를 다스리시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음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다. 뿐만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성결을 져버릴 때 하나님의 선택이 오히려 심판의 근거가 됨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내가 너희만을 특별히 사랑하여 선택하고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더더욱 너희 죄악을 심판하리라”는 하나님의 논리이었다.

4. 결론
우리는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상과 위선을 꿰뚫어보고 날카롭게 지적하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한 아모스 선지의 예언이 오늘 우리 교회 현실의 어두운 면을 비춰주며 심각한 경고를 던져줌을 지나칠 수 없다. 돈과 쾌락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었던 이스라엘의 부유층과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을 비교해 볼 수는 없을까? 특히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린다는 지도자들이 상아로 꾸민 집에서 상아 침상에 누워 살찐 양과 기름진 소를 먹으며 온갖 향락과 사치를 누리되 정작 그들이 돌보아야 할 하나님 백성의 아픔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이스라엘 지도층은(암 6:6) 우리에게 전혀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오직 예배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법도대로 드려져야 할 것인데 불법적인 성소, 불법적인 예배, 불의한 제물로 바치는 제물과 십일조, 자신의 믿음과 경건을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지켜야 할 것인데 오히려 이를 광포하며 자랑하고 다니는 종교적 허영심, 한 마디로 생활과 예배의 괴리, 참 경건이 결여된 예배, 신앙과 생활의 분리 등 이와같은 이스라엘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외적인 번영과 화려함에만 정신이 쏠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로 믿는 우리, 과거 한국교회의 업적, 또는 한국교회의 장점에만 집착하여 그 영광 뒤에 가려진 무서운 독소를 날카롭게 꿰뚫어보고 도려내지 못하는 무비판적인, 깊은 자기 성찰이 없는 한국교회는 과연 당시 이스라엘과 어떻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른지?
복음을 달콤한 약속과 축복 뿐인양 전하며 하나님의 복되신 부르심의 근본 목적이 우리를 거룩케 하시려는, 그의 거룩한 친백성으로 삼으시려는 것이며(살전 4:7,8)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고난, 죄와의 피나는 투쟁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부라는 사실과 또한 죄에 대한 날카로운 책망이 점점 설교 중심에서 밀려나는 오늘 우리 교회 현실은 과거 이스라엘의 경우와 얼마나 먼 것일까?


1:1 היח      רבד(다바르......하야)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받는 것과 그 내용을 의미한다(신으로부터의 계시이다). 여기서 היח는 ‘보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선견자도 ‘보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러면 ‘보다’라는 말이 왜 계시와 연결되는가?
모든 선지서에 다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첫 절에는 ‘어느 시대 누구에 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이다’라는 서두(Ubeschrift)의 짧은 내용이 나타난다. 이 서두에서 제시되는 내용은 이것이 ⑴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라는 확신과, ⑵ 계시의 대상과, ⑶ 이 계시의 말씀이 임한 시기(유다왕 웃시야, 이스라엘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시대)가 나타난다.
선지서에 그 대상과 시기가 나오는 곳은 “특정시대”에 사는 “특정사람”에게 주어지는 만큼 그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해석에 유의해야 한다. 특정대상, 특정시기와 관련된 계시라 하여 세속사가들의 견해처럼 역사적 밀착선과 고정, 얽매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어쨌든 이것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은 그 대상과 시기를 뛰어넘어 오고오는 세대에도 필요한 것임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시기와 대상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다른 시대에 적용하더라도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적용해야 함을 의미한다.
「드고아」 예루살렘 남쪽, 유다광야에서 멀지 않은 지역, 아모스의 사역지는 북이스라엘이다. 이것은 유다 출신의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에 가서 사역한 것은, 남북이 나뉘었을지라도 이스라엘은 하나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주어진 계시이다. 넓게는 웃시야, 여로보암 때라고 했지만 좀더 구체적으로는 ‘시대의 지진 전 2년’ 즉, 지진 2년 전이다. 7장에 보면 유다에서 예언하라는 말로 보나, 슥 14:5절에 나타난 지진(스가랴 - B.C. 8C 선지자)으로 본다.
①‘유다왕 웃시야(B.C. 6C) 시대에 그 지진 앞에서 도망했듯이’라고 종말론적 심판을 말하면서 도망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아마 대규모의 재난을 가져온 지진으로 볼 수 있다.
②200년이 지났는데도 웃시야 시대의 지진을 언급한 것도 재난의 양이 컸음을 알 수 있다.
③갈릴리 북쪽으로 일그러진 단층이 있음도 고고학이 증거한다(약 B.C. 760년으로 추정). 특히 지진 2년 전에 주신 계시라 함은 그 지진이 심판의 일부이거나 혹은 전조라는 암시가 있다.
1절의 시대 언급은 연대 측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왕하 19장에서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주신 말씀은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 즉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배도 속에서도 하나님은 7천명의 남은 자를 남기시겠다」는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약속과 그 의미가 연결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의 핵심이다. 바로 이것이 아모스의 배경이다. 철저한 심판과 그 중에서 의인을 남기시겠다는 것은 이후 선지자들의 멧세지의 핵심이요 원형이었다.
엘리야의 출현시기는 아합시대다. 아합의 아들시대에 예후에 의한 모반이 일어난다. 예후는 엘리사가 보낸 사람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았고,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일이었다. 아합왕가와 그와 관계된 모든 사람을 쓸어버리시기 위한 대숙청이었다. 유다왕 여호람도 아합을 도우러 왔다가 예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후 아하시야가 유다왕이 되지만 아합의 딸 아달랴가 유다왕가를 몰살시킨다. 그러나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댜에 의해 피신되고, 나중에 왕위를 계승한다.
북이스라엘의 딸이 유다왕가의 명맥을 끊으려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예후를 세우심으로 바알숭배의 원흉인 이세벨과 아합왕가가 완전히 숙청되고, 전국에 포교령 내려 바알 제사장들을 바알을 많이 섬기게 하겠다고 거짓말로 산당에 불러 모아 문을 닫고 도륙한다. 즉, 북이스라엘의 바알숭배를 완전히 근절시키셨다. 엘리야 통해 시작된 바알척결이 예후를 통해 어느 정도 일단락된 것이다. 그러나 예후도 여로보암의 죄(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만들고 유다에 대항하기 위해 불법적 하나님을 만듦 섬긴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성소와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유다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올라가서 벧엘 성소가 불법적임을 지적하자 여호보암의 손이 굳어졌고, 앞으로 요시야왕이 나타나 불법성소를 정결케 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예후도 이 죄에서는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4대의 왕권(예후-요아스-여호아스-여로보암 2세)을 약속하셨다. 대개 이스라엘의 왕조는 2대 혹은 3대이다. 그러나 예후는 4대까지 갔다. 예후왕조의 첫 시작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아람이 강성해져 이스라엘을 침공한다. 왜냐하면 예후가 정권을 잡으면서 ①아합과 관련된 모든 자를 다 죽여 지도층이 없어짐으로 국력이 약화되었고, ②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해 아람에 하사엘을 세우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엘리야에게 약속하신 내용이었다. 예후 때 이미 요단 동편 땅이 점령되었고 예후의 아들 대에는 이스라엘의 존립이 불가능할 정도로 아람의 위성국으로 몰락한다. 그 아들 요아스 때 엘리사 임종시 이스라엘왕을 불러 “동쪽을 향해 활을 쏘라”, “땅을 두 번 치라”고 함으로 그래도 아람에 대해 2번 승리할 것을 말한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전투에서 아람을 대퇴시키고 옛지경을 회복한다. Palestine지역에서 지도력을 회복하여 국력을 절정에 올려놓은 사람이 여로보암 2세이다. 사실 Palestine지역은 메소포다미아문명과 애굽문명의 중간 위치에서 두 문화권이 안정되면 세력확장으로 이스라엘은 항상 짓밟히거나(두 세력의 경쟁으로),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다. 에굽은 B.C. 7C 고왕국, 중왕국시대에 많이 진출하지 않았고, 애굽이 약할 때 힉소스인들이 쳐들어 왔고, 그러나 애굽이 강해지자 위로 올라와 헷과 교류했고, 다윗, 솔로몬 때는 애굽이 별로 힘이 없었다. 헷족속은 B.C. 13C에 사라져 버린다.
바벨론→앗시리아제국 건설→신바벨론(느부갓네살)→페르시아(고레스)→알렉산더
북이스라엘 망함 남유다 망함 포로귀환 최종세력
B.C. 7-8C
7-8C 역사와 밀접한 관련세력은 앗시리아의 등장이다. 앗수르는 내부를 안정시키고 아래로 내려오려한다. 왜냐하면 그 땅은 비옥하지만 자원이 풍부한 지역은 아니어서 지중해 서쪽으로 진출하고자 한다. 이 원정이 나오면 주위 산간부족들이 앗시리아를 위협하고 그러면 되돌아갔다가 또 나오고를 반복한다.
이러한 조그마한 나라가 앗수르의 공격을 받으면 공동협력으로 대치했다. 아람과 이스라엘, 애굽은 앗수르에 공동으로 대적하나 앗수르가 물러가면 자기네들끼리 또 싸움을 한다. 아합 때 이스라엘 국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아람이 강해질 때 아합의 아들 때에 이스라엘이 약해져 병거 10승으로 나타난다. 아람이 이스라엘을 타작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후 앗시리아가 와서 쳐도 서로 동맹관계를 잘 회복하지 못했다. 앗수르가 다메섹을 포위하고 거의 장악할 때 산간부족이 앗수르를 침으로 앗수르는 되돌아갔다가 50년 후 다시 왔다. 그 기간동안 아람과 하맛과 싸우는 동안 이스라엘은 강해져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웃시야 때 부국강병책으로 이스라엘의 국력이 신장되었다. 이는 50년간 앗수르가 나오지 않았고, 아람은 약화되었고, 북 이스라엘, 남유다는 솔로몬시대에 버금가는 절정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위와같은 시각은 세속 역사가의 시각에서 본 것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① 역사학적 세속사가의 설명 - 하나님없는 역사( = 인간들의 역사)
② 성경이 말하는대로의 역사적 설명 - 하나님의 역사
③ ①과②의 적절한 조화의 시각 - 이것은 설득력이 있으나 고려해야 한다.
지난 시간에 아모스가 예언했던 시기의 역사적 형편을 말하였다. 협의적으로는 팔레스틴의 상황과 광의로는 근동지역의 세력판도를 말했다. 그 역사적 상황을 어떻게 설정하든지 그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세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적 시각은 하나님 있는 역사, 즉 역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려하고, 세속적 시각은 하나님없는 역사로 인간들 중심의 역사이다. 어떤 운명이나 impersonal power 등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고 역사적 동인을 정치 사회상황과 영웅의 야망 등으로 본다.
근동지역의 그 당시 정치상황은 작은 세력과 큰 세력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작은 세력인 아람, 다메섹, 큰 세력으로는 앗시리아가 있었다고 보는 세속역사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하사엘을 기름부으라” 하심으로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아람의 침입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는 것이 성경의 역사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역사이다.
하나님 있는 역사와 하나님 없는 역사는 근본적으로 그 시각이 다르다. 역사는 역사적 현상 제시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설명이요, 해석이다. 아람-하맛과의 세력 다툼으로 약화된 틈을 타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솔로몬시대와 같은 세력 팽창을 한 역사 현상을 하나님은 달리 설명하신다. 이스라엘이 아람에게 극심히 고통당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심이요, 이때 구원을 선포한 것이 요나 선지자이다. 이렇게 볼 때 세속사가 보는 역사와 성경(하나님)이 보는 역사의 설명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주도권을 잡았다 함은 교역로 장악을 의미하고 이는 또한 경제적 번영을 의미한다(교역로에서 떨어지는 막대한 이익). 이때를 제 2의 정치, 경제적 황금기라 한다.
선지서의 특징은 ①선지자가 맞는 특정 지역과 정치적 상황을 함께 제시하며, ②대상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서의 계시는 특정시대에 특정 대상을 향하여 주어진 계시임을 고려해야 한다.
1절의 לארשׂי־לע(알-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주어진 계시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에 관하여 이 표현이 성경을 해석하고 오늘 이 시대에 적용하는데 있어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교회가 정치(현실)에 참여함이 옳다는 근거를 지금까지 아모스에서 찾아왔는데 그것이 과연 옳은가? 아모스서가 과연 교회의 사회참여를 지시, 정당화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가? 그러러면 먼저 이스라엘의 본질에 대한 규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과연 이스라엘의 Identity가 무엇인가?
‘공의를 강물처럼 흘리라’ 아모스서가 타락한 정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스라엘을 하나의 국가로 본 태도이다. 사무엘의 기도에서 ‘내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아니하겠다’를 정부를 위한 기도로 해석하는 것도 그 한 예이다.
Theokratie(신정)를 교회 + 국가로 보는 보수주의의 경향이 있다.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는 예수님 당시에도 복잡한 문제였다. 지금은 문제되지 않으나 앞으로 국가가 교회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먼저 교회와 국가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해야 할 것이다.
국가는 권성징악적 차원에서 칼을 쥐고 질서 유지하기 위한 제도, 단체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로서의 국가란 어떤 것인가? 국가의 역사상 출현은 인류 공동체의 가장 큰 단위이다. 이는 씨족, 부족이 모아져서 되었다. 따라서 국가 형성에 있어 혈연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국가와 민족은 대개 같은 단위로 형성된다. 이 시초가 창세기 10장에 있다. 역사상의 민족들이 열거되고 있다(민족 도표). 홍수 후 새 인류의 역사에서 발견된다. 본래 언어가 하나이고 단일집단이었으나 바벨탑 사건 이후 나뉘이게 되었고 그 결과가 10장에 나타나 있다. 본래의 국가 형성은 인류 분열에 근거한다. 그러면 이들은 무엇을 근간으로 나누어졌는가?
התפשׁמ(메쉬파타) ןושׁל(레숀)
혈통적 의미의 종족 언어 따라서 혈통과 언어를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었다. 홍수 이후의 인류사회를 특징짓는 질서는 사실 노아언약에서 찾을 수 있다.
노아언약이란 무엇인가?
חנ(노아)의 뜻은 ‘안식’이라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즉, 이 말은 ‘고역으로부터 우리를 쉬게 할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조처 때문에 주신 이름이다. 인간의 다른 동물에 의한 피해를 막기 위해 동물에게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창 9:2). 땅도 인간을 괴롭게 하는 가시와 질려를 내었다. 그러나 이것은 잠정적, 불완전한 조처로 취해진 것으로 노동의 고역이 완화된 것이다. 이는 외형상 창세기 1장의 것을 회복시키는 것 같으나 많은 회복을 약속하실 뿐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약속하신다. 즉, 심판의 완화가 이루어진다. 범죄 후의 심판에 대한 미봉조처라 할 수 있다. 타락 이후 피조계의 특징은 분열이었다. 가인과 아벨의 모습은 인간 사이의 유혈(폭력)에 대한 그 상응한 처벌로서 가족을 떠나는 분열이 시작된다.
로마서 14장, 베드로전서를 보면 국가에 칼을 주어 악을 처벌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이 노아언약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타락한 인간에게 처벌규정을 두어 악을 자제케 하는 긍정적인 제도이다. 국가질서는 홍수 후 인간사회 질서와 상응한다. 노아언약의 범위는 모든 인류에게 주시는 보편적 은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연계의 질서를 회복케 하실 것도 약속하고 있다. ‘다시는 홍수가 없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인가? 이는 아브라함부터이다. 그러면 아브라함 이전에 그러한 제도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국가제도는 노아언약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반면에 교회제도는 아브라함언약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아브라함 약속의 실현이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교회는 동일한 언약의 역사적 구현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스라엘과 교회는 같은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 이전에 교회가 없었는가? 노아의 홍수를 구원의 전형(모형)으로 보고 있다.
교회에 대하여 처음부터 역사적 순서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아브라함언약과 노아언약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 것이 합리적일까? 노아언약이 아브라함에 와서 즉, 아브라함의 선택과 더불어 국가제도와 교회제도가 분열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같이 교회와 국가는 두 가지 상이한 언약에 기초하고 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라는 두 개의 흐름이 노아시대에는 뒤섞여졌다가 그 질서를 규정하는 노아언약이 나오고, 이것이 한 사람의 선택(아브라함)과 더불어 분화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제도와 교회제도는 엄밀하게 구분된다.
사실 이스라엘 안에 외형적으로 국가와 같은 질서(왕이 있었고, 법(시민법)이 있었고, 악한 자에 대한 처벌규정도 있었다)가 있었다. 또한 분명히 정치, 경제적 차원의 삶이 있었다. 그러면 교회에는 정치가 없는가?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을 「구약시대의 교회」라고 부른다. 구약의 이스라엘에서 혈통은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예)가속에게 할례를 행함. 이것은 신약의 교회와는 다르다. 이스라엘은 「구약적인 교회」라고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 국가가 아니고 교회였다면 아모스서는 국가를 향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를 향하여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5공화국 시대에 아모스서로 정부를 비방한 것은 자신(교회)을 바로 보지 못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을 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적용될 때 교회의 잘못된 것을 책망하시는 말씀으로 비추어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주제는 국가제도와 교회제도의 엄연한 구별에 초점을 두었다. 그러면 교회는 국가를 등지고 살아야 하는가? 아니다! 교회의 의무의 하나로서 성경은 국가를 위해 기도할 것을 명하신다. 구별성, 차이성 일변도로 국가, 교회를 바라보아서는 안되나 최초 그 구별이 흐려진 현실에서 그 구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가장 분명하게 표명하신 것은 ‘내가 다스리는 나라는 국가 차원의 나라가 아니다 만약 내 나라가 세상 나라와 같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고 하셨다(요 18:36). 신약에 와서 국가와 교회의 차이는 더욱 radical하게 규명되고 있다. 사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국가와 교회가 단절되는 개념으로 등장한다.
만약 이스라엘에 국가적 요소(성격)가 포함된다면(신정정치의 견해대로) 구약 말씀 속에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을 교회가 국가를 향해 행동할 요소를 포함하게 된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Civil Law인가? 구약 율법 중 국가적 요소와 관계된 것이 무엇인가? 옛 이스라엘에 국가적 요소가 있었다면 무엇인가? 행정조직, 왕, 전쟁......
이스라엘의 전쟁은 국가로서의 전쟁이었는가? 교회로서의 전쟁이었는가? 이스라엘의 정치는 국가로서의 정치였는가? 교회로서의 정치였는가? 국가의 본질은 혈연(혈연을 근간으로 형성된 대단위의 집단)과 언어에 있다는 개념에서 이스라엘의 형식(외적 유사성)에서 국가적 요소를 찾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로서의 국가’가 노아언약에서 나타난 국가의 성격으로 볼 때 외적 유사성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국가로 볼 수는 없다.
1절 근동지역의 위협적, 파괴적이었던 앗수르 ?? 로부터 위협받지 않던 시대였다.
다메셋, 아람(이스라엘을 괴롭혀왔던) 약화 ?? (여로보암 시대)
열왕기상 14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영토를 아라바에서부터 르보 하맛까지 즉, 옛 솔로몬 시대의 영토(이스라엘의 세력이 강성한 시대)와 같았다고 말한다. 이때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 외침으로부터 자유로왔고, 잃었던 것을 회복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거의 전국토가 아람 손에 짓밟혔던 때를 기억해 본다면 엘리사, 요나를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을 예언하셨던 그대로 옛 이스라엘의 영광을 외적 모습으로는 되찾았던 시대이었다. 대부분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그의 계획은 우리를 위하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로 말미암은 어마어마한 유례없는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를 통해 외치신 첫 마디가 2절이다.
2절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גאשׁ(샤악; 부르짖으시매)’(맹수가 포효하는, 간담 서늘케 하는 위협적 음성) 그 당시 이스라엘로서는 매우 뜻밖의 일이었을 것이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위협적 음성이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라’(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옥한 땅)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즉, 팔레스틴에 식량 공급하는 주원천은 무엇인가? 목초지로부터 나오는 육류, 우유, 버터였다. 사실 북이스라엘은 곡식을 기를 평야가 거의 없는 지역이었다. 남쪽은 블레셋, 갈릴리 지역에 조금 있을뿐이다. 이 말은 바로 식량 공급원의 고갈, 끊어짐을 의미한다. 양식(생명유지수단)이 마르고 없어질 것은 이스라엘의 생존이 위협받을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생존을 유지시키던 삶의 질서가 와해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아무 걱정이 없는 번영의 시대에 이스라엘의 삶의 기반을 허물어뜨리리라는 뜻을 밝히신다.
이 말을 들은 그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미친 녀석이다’ 아마샤 같은 사람은 “네 고향에나 가서 예언하라”고 한다. 예언이 진행되면 될수록 이스라엘을 향해 호의적인 것이 아니라 진노의 말씀, 심판의 말씀으로 기대밖의 것이 된다. 또 열방에 대한 심판도 예언한다.
시온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참되신 왕으로 좌정해 계신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으로부터 뜻밖의 심판의 말씀은 이스라엘을 넘어서 열방으로 확대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예언형식의 정형(定型)은 “messanger's formula” = הוהי רמא הכ(코 아마르 아도나이; 메신저 보낼 때 그가 보내신 자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다는 의미)이다. 그 대상은 이스라엘이고 그 다음 절은 죄목의 지적과 죄목에 대해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다.
messanger's formula는 הוהי רמא로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으로, 하나님 말씀임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요, 결코 자기의 것이 조금도 들어있지 않다는 형식이다. 바울도 자기의 것과 주의 계시를 분명히 구별했다. 또 이 말 전함에 있어서 자기와 하나님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사도, 선지자들). 오늘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의 하나님과 자기의 동일시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 정형에서 바뀌는 것은 심판 대상과 죄목만 바뀐다. 내가 다메섹의 3-4가지 죄에 대하여 내가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ונבישׁא אל(로 아쉬벤누) 여기 보면 벌이라는 대명사 앞에 선행사가 나타나 있지 않다. 앞쪽에서 보면 ונ(누)는 「삶의 질서 와해시키겠다는 심판의사를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즉, 「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이란 부분을 말한다.
여기에 언급된 정죄와 심판의 대상은? ①다메섹 - 이 당시 Aram 세력 중 강대 세력을 대표하는 유프라테스 상류지역 - 에덴지역으로 다메섹 중심의 아람세력을 의미한다. ②가사 - 블레셋지역, ③두로와 시돈, ④에돔, ⑤암몬, ⑥모압, ⑦유다, ⑧이스라엘 순이다. 이 모두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주변 국가들이다. 즉, 북 → 남 → 동 → 서의 순서이다. 이스라엘을 중심한 전Palestine 지역이다.
그 심판의 음성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가 삶의 질서를 무너뜨리시겠다는 데 있었고, 그 심판이 열방에 대해 확대되는 의미는 무엇인가? 또 이들은 계속 이스라엘을 괴롭혀왔던 국가들이다. 특별히 첫 언급이 조금 전에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다메섹, 아람 지역일 때 이스라엘은 ‘아, 그러면 그렇지 우리의 대적을 향한 심판이겠지’하는 안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전세계 열방 국가들을 다스리시고, 그들의 죄에 대해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 세계의 통치자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교회뿐 아니라 온 세계의 통치자시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죄악에 대해 심판하실 범위는 전Palestine 지역이다. 전 근동지역을 심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선언하신다. 이는 앗시리아의 등장을 염두에 두고 계심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이 “불”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때의 불은 전쟁의 참화를 상징한다 → “앗수르라는 무자비한 강대국에 의해 수 많은 국가가 전쟁의 와중에서 망하리라”
열방에 관한 예언에서 관심 기울여야 할 것은 열방들의 죄의 성격이다. 왜냐하면 전체 논의에서 긴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1. 다메섹에 대해서(왕하 10:32)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예후가 길르앗 지역을 아람에게 상실한다. 라반(아람족속)이 야곱을 길르앗 다멕에서 증거의 무덤을 쌓고 조약을 맺는다. 이 길르앗 다멕은 아람족속의 경계이기에 항상 전쟁이 있었고, 아람과의 전쟁에서 항상 짓밟히는 지역이었다. 아합시대부터 아람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치열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가 아람이었다.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하사엘’을 기름부어 아람의 왕을 삼으라고 하신다. 이때 엘리야는 하사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괴롭힐까를 알기에 그에게 기름부으며 울었다.
3절 그러나 이스라엘을 잔혹하게 짓밟았음(타작기로 짓이기듯)에 대해 심판하시고 책임 물으신다. 이들의 짓밟음은 영토 확장을 위한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수탈, 착취행위였다. 이러한 일의 보응으로 그들이 이스라엘을 날카로운 철로 짓밟았으므로 전쟁 통해 하사엘의 집(아람왕조 = 왕의 멸망은 국가 멸망과 직결됨)에 불을 보내리라고 하신다. 이 예언은 피디오 필랏필 3세에 의해 성취된다.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이 동맹하여 앗수르 세력을 막으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르신과 베가를 폐위시키고 아람은 ‘길’에 추방당하리라고 말씀하신다.
6절 가사 - 블레셋 족속에 대한 죄목은? 한 거민을 몽땅 잡아 에돔(당시 국제 노예 무역상)에게 넘긴다. 즉, 노예로 팔아 먹었다(이것은 인신매매이다). 다시 말하여 인간을 자기 이익을 위한 도구화했다는 말이다. 인간은 하나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소유물이기에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소유로 속할 수 없고, 삶의 권리, 인권을 박탈할 권리가 없다. 따라서 인간끼리는 형제의 관계이다. 이스라엘의 경우 노예라도 7년에 한 번 안식, 해방케 하였고, 부부관계도 거절이 불가했다. 노예로 팔리는 것은 삶의 자유를 상실케 하는 것이다. 노예는 자기가 원치 않는 악행이라도 주인이 원하면 해야 하는 자유, 책임이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자 노예의 경우 자신의 정조지킬 권리가 박탈되었고, 성적 노리개감에 불과했다. 그러나 인간을 노예로 삶을 수 있는 권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요구하실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사람이 전쟁포로로 잡혀 다른 나라에 팔려갈 경우 신앙의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하나님의 법대로 순종하며 살 권리를 박탈당하고 우상을 섬겨야 할 것을 강요받게 된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그 예이다.
9절 두로의 죄 - “에돔에게 노예를 팔아 먹었을뿐 아니라 형제맹약을 기억하지 않았다” 레바논은 다윗왕 때부터 이스라엘과는 우호관계에 있었다. 한때 단절된 적은 있었지만 두로 왕이 성전건축 재료 보낸 것으로 솔로몬이 땅을 떼어 주었을 때 히람 왕이 마음에 안들어 “형이여(brother)”라는 대등한 관계에서의 호칭을 사용한다. 왕에게 이렇게 부른 것은 국가간에 형제맹약을 맺은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맹약을 배신하고 이익을 위해 노예로 팔았다.
11절 에돔의 죄 - 그의 형제를 칼로 뒤쫓고 긍휼히 여기지 않았다. 여기서의 יחא(아히; 형제)는 특별한 의미 즉, 야곱과 에서의 관계인데 이것을 여기서는 םחר(라함)이라고 표현하였다. 그 죄의 질을 “긍휼을 버리며”라고 표현하고 있다. 에서의 성격은? 야곱의 죄를 잊지 않는 뿌리깊은 원한, 이것은 사랑의 속성이 아니다. 고전 13장에 보면 사랑은 악을 생각지 않는다. 에서는 뿌리깊은 증오 때문에 형제의 정을 말살하고 앙심깊은 죄(=노를 영원히 품는 죄, 노를 풀지 않는 죄)를 저질렀다고 말한다.
13절 암몬의 죄 - 길르앗 지역의 임산부의 배를 가른 죄인데 이 죄는 영토확장을 위해서 이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 당시의 싸움은 심리적인 것에 많은 영향받는 종류의 싸움이었다. 따라서 전쟁시 심리적으로 기수를 잡으려는 의도가 많았다. 예를 들어 ‘항오를 서서 고함지르며’, 심리적으로 공포 유발하기 위한 조처 중의 하나로 “임부의 배를 갈랐다” 전쟁할 기력, 대항할 마음 품지 못하도록 잔인행위를 했다. 이는 다만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2:1절 모압의 죄 - 죽은 시체를 불살라 뼈를 갈아 버리는 잔혹행위, 잔인한 복수행위, 공포를 유발케 하는 행위를 하였다. 여기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을 심판하시게 된 하나님이 보신 그들의 죄악상을 보았다. 이들을 처벌하신 근거가 그들 자신의 죄 때문인가? 그들의 침략의 대상이 주로 이스라엘이었다. 즉, 교회였다는 점에서 그들의 죄가 교회를 대상으로 한 것인가? 아니면 인륜적인 의미에서의 죄인가? 다른 선지서에 보면 하나님의 교회를 괴롭히는 죄를 하나님은 묻고 계신다.
이스라엘에 대한 악행은 하나님 앞의 죄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기 어려운 것은 앞의 모든 경우는 그 대상이 이스라엘이라 해도 아니라고 하기 어렵지만 모압은 이스라엘이 피해 대상이 아니라 에돔이 그 피해 대상이다. 에돔은 하나님의 백성(선민)과 같은 계열로 보고 교회에 대한 죄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열방들에 대한 죄는 교회를 파괴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보편적 차원에서 행한 일들이 도저히 용서하실 수 없는 죄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혹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심이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 책망할 책임의식의 근거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교회를 침해했기 때문에 심판을 선언하신 것이라면, 세상 국가가 교회를 침해하지 않는 한 교회가 세상 국가를 책망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일반 죄악에 대한 심판이라면 교회는 국가가 교회에 해를 가하지 않아도 죄악에 대해 경고, 책망할 책임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율법(의의 규범), 善인데 현실적으로 이것이 적용가능하기 위해 전제(선행)하는 조건이 무엇인가? 교회가 율법을 선포할 때 그 궁극적 의도는 무엇인가?
중생하지 않은 자는 율법을 행할 수 없다. 따라서 교회의 율법 선포는 “사람으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자기로서는 구원의 길이 없으며 따라서 회개하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새 사람으로 살아라”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 향한 교회의 율법 선포는 이미 그것이 실제적 효과를 거둘 수 없음을 전제한 것이다. 국가제도 자체는 인류의 죄악을 해결하고 궁극적 질서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시적, 잠정적인 것이다(노아언약에서). 오직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충만하게 차실 마지막 때에 그가 이루실 회복만이 참된 질서요, 참된 제도의 성취이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말씀하시기 전에 주변 국가들과 열방의 죄를 말씀하시는가? 열방의 죄의 성격은 탐욕을 위해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고, 사람을 이익의 도구로 사용하고 가장 기본적 인간의 정인 혈육, 형제지정까지도 부정하고, 형제 사이에서도 살륙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2:4절 이하에 보면 마지막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지적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Palestine의 한 위치에서 주변 국가의 정황에 따라 변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해 심판을 예언하신 사실은, 당사자인 이스라엘로서는 경악할 예상 밖의 일이었을 것이다. 왜 하나님의 백성이 심판의 대상이 되었고, 맨 마지막에 이스라엘을 언급함으로써 아모스 선지자의 심판의 선언의 주된 대상이 이스라엘이었음을 말하는가?
유다의 죄의 특수성 : 보편적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한 죄」이다. 즉, 이스라엘의 통치자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절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의 특수성은 무엇인가? 앞서 열방에 대해서는 일반적 윤리 원칙을 적용하여 심판을 선언하신 대신 유다에 관하여는 특별한 「하나님의 율법」을 적용하여 정죄하고 있다. 구약 이스라엘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 특수한 것들도 있지만 대체로 일반법과 공통된 것이 많다(부모공경, 착취금지, 살인, 도적질금지 등).
Pascal - “인간의 양심은 위도상의 문제다” 즉, 지역에 따라 정죄도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대개는 어느 사회나 덕목과 정죄는 일치한다. 이러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로마서 2장에 보면 본성에 새긴 법의 잔흔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 속에 그 율법을 새겨 놓으셨다. 그러면 지역에 따라 정죄되는 일들이 양심의 가책없이 자행되는가? 양심의 타락, 악함에 따라 마멸,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윤리의식이 사람, 지역에 따라 다른 이유는 이것이다.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과 본성에 새기신 하나님의 법은 대개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에 주신 하나님의 법은 특수규범(추가된 성격의)이라 할 수 있다.
왜? 1차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외에 특수한 내용들이 구약계시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동일한 내용을 말씀한다 할지라도 유다에 주신 율법은 특수하다.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실 때 그 백성에게 지킬 것을 맹세케 하신 후에 주신 “언약법”이기 때문이다(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되기로한 맹세).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 백성이다. 그러나 특별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 함은 특수한 것이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온 세계가 나에게 속했다 할지라도 너는 나에 대해 특별한 소유라고 말씀하신다. sanction한 의식이요, 역사적 계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엇다.
율법이란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과 특수한 관련을 갖는 특수한 규범이다. 이것은 오늘 교회와도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율법에서 보편적 규범(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과 일치하므로 모든 인류에게 규범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이 특수규범은 이스라엘에 대해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말하자며 하나님의 율법은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과만 실제적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신약에 와서 매우 분명해지는데, 교회나 언약 밖에 있는 자에게 이 율법은 실질적으로 정죄하는 기능 외에는 아무 유익이 없다. 그들에게는 전혀 실현 불가능한 것이요(무용지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피조된 자만이 성령께서 그를 인도하시는 안에서, 그 능력 안에서만 순종될 수 있는 교회 안에서만 긍정적 의미를 가지는 법이다.
교회 내에서는 실현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행하라”고 요구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법에 순종하도록 요구되고, 믿음을 따라 살 때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이 율법은 이스라엘과 인류와 구별된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의 언약, 교회 안에 있는 자, 참 하나님의 백성인 자에게 요구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특별한 의미의 법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 받고 새 피조물 되는 것과, 새 피조물 된 후 이 율법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잘못하면 율법주의(구원을 위해 율법 지키는 것이 필수조건이 되는 것)와 방법주의(이 둘은 다 이단이다)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된다. Catholic 경우 99%의 은혜 + 1%의 나의 행위. 이것을 가장 무섭게 질책한 것이 갈라디아서이다. 그러나 로마서 6장에 보면 반율법주의를 경고, 질책하기도 한다.
그러면 율법이 이제 정죄의 기능이 없으니 구원 받은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가? 죄에서 자유케 된 우리가 어떻게 또 죄 가운데 살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에게 있어 구원 받은 삶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내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때 거룩한 삶은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는가? 그의 계명을 순종하여 사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와같은 율법의 총체를 “사랑”이라고 한다.
구원 받은 후 하나님께 순종해 사는 삶은 성령의 인도함 받는 은혜 안에서만 가능하다. 구약에서 언약 안에 있다함은 오늘 교회(그리스도 믿는 은혜의 영역) 안에 있다 함이다. 따라서 율법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신 명령, 계명의 기능을 갖는다. 그리스도를 믿음과 은혜 안에서만 실현 가능한 것이다.
2:4절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였고 그들의 거짓 것들이(잘못 믿는) 그들을 오도하였다」
“רזכ”(카자르) → 우상을 말한다. 참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인 것으로 속여 말하는 것이므로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참 지식을 계시하시는데 만물이 핑계할 수 없게 계시하셨다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바로 깨달을 지식을 상실하였다. 일반계시를 왜곡시켜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거짓 것으로 바꾼다. 로마서 1장의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참 계시를 거짓 것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형태의 오해 - 철학, 사상, 이념까지도 포함된 것이다.
우선 이스라엘의 죄를 율법을 거부한 죄라고 말한 후 “그들의 거짓 것(진리에 대한 상반 개념들)들이 그들을 오도하였다”는 표현에서 이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계시하셨는데도 그들은 거짓 것(하나님에 대한 변질된 이해)에 미혹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약 계시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심을 잘 보이셨다. 바로 구약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미혹(신앙적 변질)은 잠시 일어난 일이 아니요, 「그들의 조상들이 좇아간 것」이라 말하므로 오랜 기간 동안 역사과정 속에서 되어온 사실을 암시한다.
이스라엘은 새로운 환경인 가나안 문화와 접촉하면서 하나님은 잔인할 만큼 멸절시켜 오염되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 철저한 םרח(헤렘; 멸절)을 명령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주변국(가까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 교회의 범위가 지역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교회 안의 범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멸절시키심이다(고전 5장). 교회 내 사람의 악(악한 자)은 축출하라고 명령한다. 교회 내의 악의 세력을 근절시키라는 이유는 “죄의 오염성” 때문이다. 죄는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변질시키는 것” 처럼 교회를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사사기를 통해 볼 때 이스라엘은 가나안 민족과 투쟁에 지치고, 오히려 그들의 문화에 오염되었다. 타락한 이교(異敎)의 제의(祭儀) - 성적 타락이 그 특징이다. 성창(여사제)이 신전마다 있었다. 모든 여인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는 것이 그 신을 섬기는 의식으로 보았다. 이단의 특징은 극단적 성문란주의이기도 하다. 또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이 주신 것은 깨끗하니 거룩하게 사용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세련된 문화 - 유사과학적, 타락한 본성에 맞는 합리화한 신관에 미혹되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거짓 것, 우상을 따르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범죄의 출발은 참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인간들이 좇는 거젓 하나님을 섬기고 따른 것이 얼마나 생활의 큰 범위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볼 때 그들의 전 삶의 영역에 미친 것을 볼 수 있다. 과학을 통해서도, 성경을 통해서도 같은 길로 갈 수 있다는 전제는 잘못된 생각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버리고 거짓 것을 섬김으로 전 삶의 영역에 무서운 차이를 가져왔고 이 미혹은 대대로 후세대의 이스라엘을 타락시켰고, 더구나 「신앙전통」이라는 탈을 쓰고 그 미혹은 더 용이했다. 따라서 신앙전통에 대한 맹목적 순종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늘 재검토, 확인, 수정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그러나 전통적이라는 것 자체를 배격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2:6절 이하의 이스라엘의 죄는 열방과 동일할 뿐 아니라 더 교묘하고 위선적이라는 사실은 경악할 일이다. 우리가 정부를 비난하나 같은 죄가 교회 안에서 자행되고 있다. 더구나 거룩한 얼굴로 위선을 가장하고 자행되기 때문에 더욱 혐오스럽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 유다(죄의 지적이 포괄적, 개괄적)와 이스라엘(보다 구체적)을 향해 정죄한다.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에서 사역했으나 그의 예언은 전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 몽땅 다 합해 남북이스라엘에 관한 죄로 2:4절 이하를 같이 봄이 좋다.
6절 이하의 죄의 세목은 어떤 맥락에서 보아야 하는가? 이는 4절 이하의 내용의 구체화이다. 즉, 4-5절을 전제로 한 죄목들이다. 유다(하나님에 대한 죄)와 이스라엘(이웃에 대한 죄)은 한 나라였으나 솔로몬 이후 교회가 분열되었던 것이다. 이는 다 합해 선민 이스라엘의 죄의 특수성, 이웃에 대한 악행의 근원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에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왜곡된 이웃관계의 성격에 대해 6절 이하가 언급한다.
?돈을 받고 의인을 파는 죄(신발 한 켤레 때문에 가난한 자 파는 죄)?
ףסכב(바페섹; 팔다) - 정관사와 관련해서 ‘일정액’을 받고로 해석하기도 한다. 여기서의 ‘의인’은 7절에 ‘가난한 자의 길을 굽게’한다에서 볼 수 있듯이 판결을 굽게한다는 것인데 의인의 의미는 매우 상대적인 의미이다. 즉, 「시비판단을 올바로 받지 못하고 억울함을 당하는 자로서의 의인」이다. 유다와 다말 사이의 사건에서 유다가 ‘네가 나보다 의롭다’로 며느리에게 말한다. 즉, 가난하다고 함은 “권익이 가장 침해당하기 쉬운 약한 자”를 말한다.
⑴ “신발 한 켤례로 인하여”라는 말은 사소한 이익 때문에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노예로 파는 행위 - 사소한 빚 때문에 갚을 능력이 없으므로. 신발 → 어떤 일을 확증하기 위한 증서로 이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빚 못갚으면 이 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명하신 일이므로 양심의 가책이 없다고 합법을 가장한 불법을 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예(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권익을 포기해야 하는)는 비록 7년 동안이라도 종살이의 비참함을 안다면 사소한 빚 때문에 긍휼과 사랑을 파는 행위를 해왔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좌정해계신 하나님이 진노의 심판하실 일차적인 대상을 그 주변국가로 하셨고, 그 이유는 영토확장을 위한 잔인한 침략행위와 사람을 팔아다가 자기의 도구로 만들기 위해, 저항의지 자체를 꺾어버리기 위해 천인공로할 만행을 서슴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이 Palestine지역에 전쟁의 참화를 일으켜서 열방들이 망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심판의 선언을 따라가보면 이스라엘 주변국가들로부터 시작되지만 심판선언의 초점은 이스라엘과 유다에 모아진다.
9장까지의 모든 부분이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심판선언이다. 하나님께서 시온에서부터 선언하신 심판의 주된 대상은 하나님의 교회임을 알 수 있다. 그 죄는 하나님의 율례를 어기고 지키지 아니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의로운 삶의 계획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과 다스림을 거역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은 통치자에 대한 반역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
“그 열조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다” 오늘 우리 교회가 가장 심각하게 생각할 부분이 이것이 아닌가?
‘거짓 것’에 담긴 의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통해 진리가 무엇이고 참 은혜, 참 의의 규례를 밝히셨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에 진리, 참에 대한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을 그들은 거짓 것으로 바꾸어버렸다. 이 거짓 것에 대한 미혹 즉, 참 것을 왜곡, 변질시킨 일은 이스라엘 역사의 한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오랜 신앙 역사 전통 속에서 점진적으로 부단히 이루어져 온 것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형편을 생각하자면 그들이 몸담고 살던 문화적 배경, 가나안 문화, 애굽지역들의 타락한 종교, 이런 것들에 마음이 끌려 미혹되어 버렸다.
“하나님께서 너희처럼 참 진리를 계시하신 민족이 어디 있느냐? 이것이 너희의 자랑이요 지혜가 아니냐?”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것을 버리고 타락한 심성을 좇아 미혹되어 버렸다. 당시 옛 이스라엘 형편에서 보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으나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초대 교회 때부터 유대주의와 이교철학과 영지주의 등에 미혹되어 교회가 얼마나 큰 영적 손상을 입었는가? 교부들 조차도 그들의 저술을 통해 이교철학의 영향 아래 기독교 진리를 왜곡시키는 저술들을 많이 썼었다.
터툴리안이 한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냐?” 반지성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인간들이 생각해낸 철학과는 아무 상관이 업다는것이다. Aristoteles를 통해 성경의 진리가 어떻게 왜곡되고 생명없는 딱딱한 논리화되었으며, 유럽 특히 독일의 철학에 의해 생명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왜곡되고 괴물과 같이 변케 되었는가?
한국 교회는 다른가? 온갖 신비주의, 무교적 잡신주의, 유교적 배경 통해 얼마나 기독교를 변질시켜왔는가? 오히려 선진들의 유산이라고 찬양하고까지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말씀)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로 그것 때문에 유다가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또 동시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했다는 언급이 이스라엘의 죄로 하여금 매우 독특한 의미의 죄 즉, 이스라엘과 언약 맺으신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한 특수한 죄를 구성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2장 이하의 이스라엘의 죄는 얼핏보면 이방의 죄와 유사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다는 점에서 특수한 죄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는 일정 금액을 가지고 의인을 팔았고 가난한 자를 신발 한 켤레로 인하여 재판을 굽게 하였고 인신매매한 것이 이 죄의 본질이다. 돈을 받고 팔았다는 그 행위의 성격, 본질을 짐작케 하는 두 가지 말이 있는데,
םילענ רובעב ןויבאו קידצ(차딬 웨에브욘 바아부르 나알라임)
신발 한 켤레 때문에 가난한 자 의로운 자를 팔았다
힘없는 자 즉, “불의한 짓이다”
구약시대에 신발을 증서처럼 주고 받았는데 돈을 쓰고 갚지 못할 때는 노예로 팔려서 그 빚을 갚아야 했다 → 구약에서 남에게 가장 착취당하기 쉬운 계층을 과부, 고아, 가난한 자라고 말한다. 즉, 연약한 자를 불의하게 팔아 넘김을 이 말은 의미한다.
신발 한 켤레와 같은 그런 사소한 빚 때문에 사람을 팔았다. 이것이 불의하다. 사실 이러한 행위 자체는 법적으로 합법적이다. 그러나 사실 신발 한 켤레의 빚도 갚을 수 없는 그런 가난한 자는 긍휼의 대상이어야 하기에 법의 정신과는 달리 불의하게 판 것이라고 말한다.
7절 마땅히 베풀어야 할 긍휼을 베풀지 않고 적은 빚에 사람을 팔아 넘긴 자들을 가리켜 7절은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하는 자’라고 하였고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하는 자’라고 하였다.
םילד שׁארב ץרא־רפע־לע םיפאשׁה*(하쇼아핌 알-아파르-에레츠 베로쉬 달림)
땅의 티끌 헐떡거림, 짓밟다
①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땅의 티끌에 대해 무자비한 탐심을 가짐
②가난한 자의 머리를 땅에 대고 짓밟음
*는 ⓐ헐떡거린다(pant after) - 목이 갈한 사슴이 생수를 갈급함 같은 간절한, 여자가 남자를 인하여 연연해 하는. ⓑ짓밟다(trample) - 짓밟는 것.
대개는 ①의 해석을 선호한다.
인신매매에 대해서는 두로, 시돈, 블레셋의 죄를 말할 때 언급했으나 인간의 도구화가 전제되며 타인, 이웃을 나와 동등한 삶을 영위할 권리를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살인자는 피흘려 죽게 하리라 그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연관성이 배제된 인간 자체만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신적 가치를 토대로 한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 자기 이익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더불어 자유롭게 살 이웃의 권리를 박탈하고 다만 노동 제공의 수단으로만 전락시키는, 인간됨을 부정하는 행위, 우리 가운데(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인간 부정이요, 내 이웃을 내 이익의 도구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교회 안에도 있다. 아모스서는 매우 깊은 의도를 가지고 이방의 죄나 이스라엘의 죄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의 윤리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이웃과 형제로서 살라는 것이요, 내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전체를 위해 섬기는 자로서 사는 것이 참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보이지 않고 돈으로 보이는 당시 이스라엘(교회)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어떤가? 이번 주 등록교인이 몇 명이다 하면 “헌금이 불어나겠구나” 하는 의식, 찾아오는 교인이 헌금 액수로 보인다면 같은 죄이다. 죄의 본질을 우리는 더욱 정확하고 날카롭게 볼 필요가 있다. 약육강식과 자기 이익 추구에 혈안이 된 사회에서 대개 착취, 희생되기 쉬운 자들은 가난한 자요, 연약한 자들이다(긍휼과 자비의 대상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위를 가리켜 가난한 자의 머리를 땅에 대고 짓밟는, 그들의 삶의 권리를 유린하는 행위라고 정죄하고 있다. וטי םיונע ךרד(데렉 아나윔 야투) 이 말은 법정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길(재판)을 굽게 한다”는 뜻이다.
⑵ 7절 하반절에 보면 어떤 사람과 그 아비가 한 소녀에게 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הרענה־לא וכלי......(엘쿠 엘-한나아라)에게 들어가다(성관계를 말한다). 여기서 הרענה는 무엇인가? “모든 단 옆에서 전당잡은 옷 위에 누우며”로 보아 신전의 “성창”이라고 보기도 하나 오히려 “여종”의 경우를 말한다고 본다.
위에서는(상반절) 일반적으로 남자가 노예로 팔리는 경우를 말했고, 하반절에서는 주로 여자가 노예로 팔리는 경우라고 본다. 부자가 한 여자에게 가는 일은 주로 여종에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여종의 경우 대표적 유린의 방법이 성적도구화였다. 이방 세계에서는 크게 문제가 안되었지만 이와같은 악을 교회 내에서 없애기 위해 율법에서는 여종으로서 팔려 주인과 관계를 가질 때는 아내로서의 대우를 받도록 되어있었다. 즉, 의식주와 잠자리를 거부할 수 없도록 했다. 교회 내에서는 주인과 노예 관계라 할지라도 인간의 기본권리를 파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말은 父와 관계하면 子에게는 母요 ?? 성경은 가까운 혈연 내의 결혼을 금
子와 관계하면 父에게는 며느리이다 ?? 한다. 이는 인륜이 파괴되기 때문. 父子가 함께 관계를 가지면 여인 편에서는 인간부정이요, 성적도구화, 인간성 말살이다. 이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가진 사람의 사람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사실 타락과 부패의 질과 정도가 가장 심각한 것이 성적타락이다.
2:6-7절에 나타난 교회의 성격은 어떠한가? 타락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내 이웃을 욕망 성취의 도구로 이용하고, 이 욕망 성취 위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8절 저당잡은 옷을 깔고 누우며(제단 옆에서), 압류한 포도주를 하나님의 집에서 마신다. 이것은 비유적 표현이다. 출 25장은 옷을 저당잡을 경우 해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되어있다. 옷을 저당잡히는 사람의 형편을 알만하다. 따라서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마땅히 긍휼을 베풀어야 함을 의미한다. 긍휼을 베풀어도 좋고 안해도 좋고가 아니라 베풀지 않으면 책임을 묻겠다는 말씀이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와 같은 이야기다.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돈을 내 놓으라 함은 자기가 받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다. 이것은 배은망덕 이상의 의미를 포함한다.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동관에게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배운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체험이 없이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도저히 살 수 없다.
이처럼 옷을 저당잡힌 자를 긍휼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삶인데도 불쌍한 자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고 즐기는데 그 장소가 제단이라는 것이다. 그곳은 바로 자기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장소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착취한 것을 즐기고, 여기서 발견되는 놀라운 사실은 1:3-2:3절에서 언급된 이방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가 유사하다는 것이다. 영토확장욕 때문에 임산부의 배를 가르는 것이다. 성적욕구를 위해 인간성을 말살하고, 가난한 자에게서 빼앗은 것을 즐기는 이 죄는 이방과 이스라엘 사이에 어떤 실제적 구별과 차이가 없으며 완전히 동일함을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참 지식, 하나님의 참 모습, 참 은혜에서 떠나 열국의 우상들을 따르게 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웃과의 관계의 성격을 규정하고 그 토대가 됨을 암시한다.
2:9절 이하 이방과 완전히 같아진 이스라엘의 현 모습을 가리킨 후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 역사과정에서 매우 독특하게 형성된 존재임을 말씀하고 있다. 아모리족속을 저희 앞에서 멸하게 하셨다(백향목같이 높고 강대한 나라들). 뿌리부터 열매까지 진멸하셨다. 창 15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모리족속을 멸하신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다.
2:10절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타락한 문화, 세상 세력의 영역인 애굽에서 너희를 구원, 해방시켰고, 죄의 영역에서 불러올려 광야에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삶으로 연단시키셨다.
사람이 사는 것은 들의 곡식으로 인한 빵과 흐르는 강물과 지하수를 먹고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과 반석에서 물내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가 만나를 통해 베푸시는 은혜로 사는 것임을 철저히 배우게 하셨다. 그 후 가나안 땅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케 하셨고, 선지자들을 세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평생 일정기간 모든 더러움에서 자신을 끊어 철저히 하나님께 성결한 자로 사는 나실인을 세우셨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이방 모든 민족 중에 하나의 표적과 sign으로 세우심을 의미한다. 나실인을 일으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 즉, 이스라엘로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는 경륜을 상기하게 하신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아 참으로 그렇지 아니하냐?고 묻고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은 나실인으로 하여금 억지로 포도주 마시게 하고 선지자에게는 “예언하지 말라”고 했다. 이는 이스라엘로 세상의 빛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행위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성별됨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sign인 나실인의 거룩하게 살려는 성결한 신앙양심을 짓밟는 행위였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적인 「세상에서의 성별」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나님 자신에 대한 반역이며 하나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악독한 반역이다. 이방 열국과 동일한 타락과 부패의 모습을 가진 이스라엘이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 은혜에 대한 배은망덕 - 이에 대한 하나님의 조처는 심히 견디기 어려운 극한 심판을 내리실 것을 말씀하신다. 곡식단을 무겁게 실은 수레가 땅을 누름같이 그 심판이 너희에게 무거울 것으로, 활 가진 자도 그 심판 앞에서 설 수 없으며 말탄 군사도 그 생명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강한 자라도 벌거벗은 채로 도망하리라.

3장 애굽에서 끌어 올리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세상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소유로되 특별한 의미에서 나는 너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이 선택을 오해하지 말라. 편애가 아니다. 따라서 모든 족속 중 너만 알았기에 너의 모든 죄에 대하여 심판하리라. 즉, 이스라엘의 심판은 특별한 목적 위해 성별된 민족이기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와 이방의 죄가 동일하다는 것, 정도는 덜하더라도 왜 동일하게 심판하실 수 밖에 없는가를 말씀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택하셨기에(하나님의 복된 의의 길을 따라 살도록) 그들의 죄는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성격, 그것이 참 축복임을 알지 못할 때, 그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참으로 값없이 은혜로 나를 구원하셨으나 그 은혜의 부르심을 거룩한 부르심에 합당하지 못한 극단적인 죄의 예 외에 경건한 모습으로 위장된 죄라도 죄의 본질은 동일한 것이다.
우리 교회는 세상과 무엇이 다른가? 교회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그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하게 역사하심이 없으면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니다. 전도할 때 무엇을 믿으라고 하는가? 무엇을 전하겠는가? 생명을 바쳐서라도 이것을 전하겠다 하는 것이 분명한가? 교회에게만 주신 그 독특한 생명, 그리스도의 죄사함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 그 생명이 교회에서 흐려져가고 있다. 구제사업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의 표현이지만 교회는 그 정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에 처해있는 생명들을 살려야 한다.
지금까지 유다와 이스라엘의 정죄 내용을 살펴보면서 그 모습은 이방들의 타락한 모습과 죄와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임을 보았다. 교회와 세상이 뭐가 다른가? 하는 반문을 가능케 하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가장 여실히 드러난 현상 그 자체에 우리 눈을 고정시켜서는 안된다. 그것을 슬퍼하고 자책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이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교회의 거룩과 성결을 찾아야 한다.
이방들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가 본질적으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죄의 성격은 특수한 맥락에서 특수한 의미를 갖는다. 지금까지의 말씀 자체만 보더라도 이웃에 대한 무자비한, 긍휼없는, 내 이익의 도구 이상으로 삼지 않는 이스라엘의 죄를 거론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한 것이라고 한다.
율법에서 구체적 이웃 사랑의 형태를 말씀하고 계신 것도 사실이다. 2:4절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율법과 거짓 것이 대조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 이상의 의미가 있는데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진리 -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 인간을 알기 위해 하나님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Calvin) - 에서 떠나게 된 것이, 참되게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떠나게 된 것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상과 방불한 모습으로 전락시킨 참된 원인이었다. 율법, 계시의 말씀에 대해 구약이 여러 번 증거하되 하나님 백성이 살아야 할 교리에 그치지 말고, 그것이 참된 진리라고 하는 깊은 의미까지 율법에 부여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세상과 구별되게 하는 이스라엘의 핵심은 무엇인가? 율법을 계시받았다는 것, 이것이 너희를 세상과 구별시키는 것이다.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떠나는 것에서 필연적으로 윤리적 타락이 오늘 어떻게 교회의 참된 모습을 회복할 것인가? 그 원인진단이 피상적이어서는 안된다.
이것과 관련하여 목회서신에 보면 마지막 부분으로 갈수록 강조되는 것은 건전한 교훈, 올바른 교리(διδακη; 디다케) 그것이다. 경계되는 것은 거짓 선지자이다. 그러나 타락한 교회의 회복을 위한 조처를 발견하기 위하여 원인진단이 피상적이어서는 안되고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정도의 차원에 그쳐서는 안되고 말씀의 중요성에 대한 구호가 요란하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모여 성경공부하는데도 왜 전혀 변화가 없는가에 대해서도 거론되어야 하고, 성경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스라엘, 교회가 세상과 방불한 모습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세상과 같아진 것에 대해 “별것 없어구나”하고 체념하시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매우 심각한 것임을 2:9절 이하에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그 독특한 형성역사, 아모리족속을 멸하시고 그 땅을 주시며 그 가운데서 늘 성결하게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그 하나님 말씀을 일깨우는 나실인을 세우시고, 선지자를 보내셨다. 그 아들의 피로 값주시고 사신 교회인데(매우 독특한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 그 은혜 입은 자가 그 은혜로운 부르심의 목적을 배반하고 타락한 세상과 같아짐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 너희만 알았거늘, 내 아들의 피로 값주고 산 만큼 그것 때문에 너희를 심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신다.
3:3절 이하에서는 개괄적으로 제시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이에 대한 논의로 옮겨가기 전에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논제는 교회에 대한 논제임을 알아야 한다. 죄질의 근본성격을 드러냄으로 연결될 수 있지만 노예로 파는 것, 극단적 성범죄, 압류한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 피상적으로는 오늘 교회와 관계없는 것같은 느낌을 주나,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이 말씀은 한국 교회의 부정적 모습을 이야기할 때라도, 나도 한국 교회의 한 사람으로서, 공동책임져야 할, 동일하게 회개해야 할 한 사람으로서 죄의 본질적 성격을 감안할 때 한국 교회를 어떻게 진단해야 할 것인가? 이스라엘의 죄에서 언급된 것은 이웃은 착취의 대상(내 이익의 도구)이 아니고 내가 섬겨야 할 자들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두 사람이 의합(합의, 공동목적)지 못하고 어찌 동행하겠느냐? 사자가 움킨 것이 없이 즉, 무언가 잡았으니 숲속에서 굴에서 부르짖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말하는 원리가 무엇인가? 인과관계 즉, 이런 일이 있으려면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3:6절 성읍에 재앙이 임할 경우, 하나님의 시키심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지자들에게 비밀한 일, 알리시지 않고 행하시지 않으신다. יכ(키)는 보통 “왜냐하면”이라기 보다 강조사로 사용된다. 앞에서 원인과 결과를 실례로 든 말들의 적용대상이 무엇인가는 찾기 어렵다. 5절까지는 분명히 예로 든 것이지 이것 통해 메시지 전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원리의 적용범위는 어디까지인가? 6절(앞으로 임할 심판이 여호와로 말미암았음을)을 그 적용대상에 포함시킬 것인가? 아니면 6절까지를 앞의 예증(인과관계의)으로 볼 것인가? 그렇다면 적용대상은 7-8절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살펴 보건대 6-8절이 다 그 적용대상이라고 본다. 즉, 6절이 나팔을 불고, 8절이 심판을 선언, 하나님이 진노의 음성을 발하셨으니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사이에 7절이 삽입되었다. 여기서 강조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두 선지자에게 알리셨다는 것이 주된 목적인가? 아니면 선지사역의 성격(하나님께서 그의 비밀한 계획을 계시하셔서 선포케 하는 자라는 성격을 나타냄)을 말하는 것인가?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본다. 이런 삽입구 다음에 “사자가 부르짖은 즉......” 하나님께서 그 시대 향해, 선지자 통해 예언하신 내용이 “진노의 심판의 음성”임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누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3:8절 이하 그 인과관계를 확장하여 여러가지와 관련시킨다. 성읍의 재앙,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을 선포하는 자 → 선지자. 인과관계는 바꾸어 말하면 “필연성” → 여러가지 일들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이 시대 향하신 하나님의 태도가 진노와 심판임을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알리셨고 선지자는 선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아모스 선지자 자신의 예언사역의 정당성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선지자될 외적 자격을 갖추지 않은 자라는 뜻 - יבאנ ןב(벤 나아비; 선지자의 생도)
3:9절 3:2절의 내용이 9절에서 계속이어진다. “아스돗(애굽 땅, 대상은 이방들, 세상)에 있는 요새들에게 선포하라(선지자들)” 「너희는 사마리아산에 모이라 그 가운데 있는 많은 웅성거림을 보라 억울한 자들을 보라」
너희는 세상에게 선포하여 듣게 하라. 그들로 사마라아(북왕국 이스라엘의 왕궁이 있는 곳,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있는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억울한 일들, 웅성거림을 보라)산에 모여 즉, 세상을 불러 교회의 타락한 모습을 목격케 하고 그들로 증인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오늘 교회의 비극들 - 신문, T.V.에 오르내리는 - 바로 이것들이 그것이 아닌가? תמוהמ(메후모트) = unrest = 동요, 웅성거림, 평화가 완전히 깨어진 상태.
구원의 가장 본질적 요소가 평안(םולשׁ; 샬롬 인데 그것이 깨어진 상태, 이 unrest의 원인을 암시하는 단어가 םיקושׁע(아슈킴)이다. 이것은 폭력을 전제로 한 것으로 당한 편에서는 억울함이다. 이런 것들로 교회가 동요하고 웅성거려 평안이 깨어진 것이다. 사마리아의 왕궁이 있는 곳에 대해 이런 것이 있음을 말한 것은 교회 통치의 형태가 어떠했는가를 암시하는 것이다.
성경 말씀이 내게 직접 부딪히면 내가 못견디니까, 죽으니까 말씀을 둔화시키고 합리화하려 하는 우리.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비추어볼 필요가 있다. 폭력으로 말미암은 불안, 동요, 그들은 옳은 것(straight)을 행할 줄 모른다. 그것은 폭력과 파괴를 쌓는 자들이다. 따라서 환난, 대적이 그 땅을 두를 것이요,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네 요새들이 약탈당할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교회)의 멸망을 암시한다. 교회 내에 자행되는 파괴, 폭력행위, 억울함, 그로 인한 동요, 불안, 화평의 파괴, 교회 정치로 말미암은 상황 - 이에 대한 교정의 책임을 물어서 이스라엘의 지도층, 통치자, 이것을 멸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감찰, 물으시는데 누가 그 앞에 설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쓸어버릴 수 밖에 없는 교정의 이런 죄들의 심각성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3:12절 “목자가 사자로부터 두 다리, 귀 조각을 건져냄 같이......건져냄을 받으리라” 양이 사자에게 잡혀 먹어 두 다리, 귀만 남았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철저히 심판하실 것인가의 심판의 강도를 암시한다.
목자 - 그 당시 사회의 쓰레기들에 속했다. 예수님 당시 공민권을 박탈당했다(믿지 못할 존재들로 낙인). 대개 삯군, 고영인이어서 들에서 남의 양을 잡아먹고 주인의 재산을 축내놓고, 짐승들이 잡아먹었다고 거짓말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증거품을 내놓아야 배상하지 않아도 된다.
두 다리, 귀 - 남은 자의 은혜를 암시(때로는 남은 자가 이런 의미를 갖기도 한다)하는 말인가? 죽음의 증거품인가? 심판을 몸으로 증거하는 증인들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본다면 여기서는 하나님 은혜로서의 남은 자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에 대한 또 다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어 사마리아 지도층들에 대해 증거하시기를 “침상 모퉁이에나 걸상, 비단 방석에 앉아 있다” 여기서 침상의 의미는 다메섹의 침대는 오늘의 이태리 침대로서 호화와 사치, 안일에 젖은 지도층을 암시한다.
3:14 “제단 뿔들이 꺾여 땅에 떨어지고”
3:15 “여름 궁, 겨울 궁, 상아 궁이 폐허가 되게 할 것이요 많은 집들이 끝장나리라” 여기서 심판들의 대상은 ① 벧엘의 단 לא־תיב תוחבזמ(미츠베호트 베트-엘)
② ףרחה־תיב,ץיקה תיב, ןשׁה יתב, םיבר םיתב(베트-하호렉, 베트 핰콰이츠, 바테 하쉔, 바팀 라빔) 차례대로 여름 집, 겨울 집(동계 별장), 큰,대저택, 상아로 치장한 집을 말한다. 집(건축물) - 쌓아올린 업적(경제적, 정치적, 종교적)들을 상징, 그들의 자랑거리, 영광들.
벧엘 -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하며 성소를 지은 곳, 왕이 출입하는 성소,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허물어 버리시겠다고 하심.

4장 1절 “사마리아의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이것은 문자 그대로 암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지도층의 부인들을 의미한다)”
사마리아산에 거하는 자 - 이들을 가리켜 “가난한 자를 억누르고 착취하여 짓밟는 자(여성명사)”라고 했다. 직접적으로 불의한 일에 가담했기 때문인가? 그러나 그 착취 방법이 간접적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의 주인에게 말하기를 “가져오시오 그래서 먹고 마십시다”고 졸라댄 것, 이런 간접적인 죄도,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짓밟는 죄라고 말씀하신다.
바산의 암소(ןשׁבה תורפ; 파로트 하바샨) - 바산은 오늘 날 골란고원이다. 성경에 바산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것은 「황소」 즉, 최상급의 황소산지이다. 이 바산의 암소는 지도층의 부인들을 말한다.
2절 고기가 낚시 바늘에 걸리듯 고기를 낚아 채서 집어 내던지리라.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이 불시의 재앙으로 빼앗길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2인칭 남성 명령형 ??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 교회 전체 지도층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4절에서 갑자기 바뀌는 것으로 보아 여성을 대상으로 함이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4:4절 “너희는 벧엘로 가서 반역하라 길갈로 와서 너희 반역을 더욱 더하라”
① 벧엘로 온 것 자체가 반역이다. ② 벧엘에 와서 행한 행위가 반역이다.
길갈 - 성소 비슷한 것이 있었던 것 같다. cultic places에 와서 반역하라는 뜻이 무엇인가?
다시 ①부터 살펴보자. 벧엘(하나님께 예배)에 간 것 자체가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벧엘은 합법적 성소가 아니다. 이는 벧엘 성소의 불법성이 아주 심각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로보암시대 때 남,북이 갈라지며 예루살렘성전 대신할 성소를 벧엘과 단에 세우고, 평민을 제사장 삼고 제사드렸는데 이 행위의 불법성을 말한다. 유다에서 한 하나님의 사람이 올라와 여로보암의 죄를 지적했을 때 잡으려던 여로보암의 손이 굳어지고 제단이 갈라졌었다. 앞으로 요시아가 나타나 그 제단을 파괴할 것이라고 예언하시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합법적 예배장소가 아님을 분명히 하셨다.
이 죄의 심각성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가? 단 7일 동안 치리한 왕에 대해 “저가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 여기서 여로보암의 죄란, 하나님의 규례에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예배드린 행위인데, 이스라엘 모든 왕들의 통치를 평가, 정죄하는 핵심과 척도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벧엘로 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반역이 될 수 있다. 불법적 성소에 가는 일 뿐 아니라 거기서 드리는 예배 행위도 정죄의 대상이 된다. “아침, 저녁 상번제와 3일마다 십일조 가져왔다” 이러한 표현은 그들의 외적 종교적 열심이 대단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특별히 3일마다인가? 이스라엘은 매 3년마다 과부, 고아를 위하여 십일조를 하여 그들과 함께 나누게 되어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헌금은 가난한 자 짓밟고 착취하고 뜯어낸 돈으로 헌금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종교적 열심 배후에 있는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다.
“감사제를 드리고 낙헌제를 광포하라” 할 때, 감사제와 낙헌제의 성격이 하나님 은혜에 대한 찬송과 자원하는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라면, 그 사람의 믿음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제사인데 나팔을 불어댄다. 그 근본 동기는 자기 영광(사람의 인정과 자기 이름)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예배에 대하여 “너희가 이렇게 행하는 것을 사랑하는도다” 즉, 이것은 너희가 좋아서 행하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성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며 수 많은 제물을 바친다 해도 그것은 자기 허영심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요, 오히려 반역하는 것이다. 참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외적 경건만 가르치고 강요해 놓고 그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그 죄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외적 형식, 교회 재정, 활동에 도움이 되는 것만 칭찬해 놓으면 그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피상적 목회의 심각성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양상은 다르지만 죄질에 있어서 이방들과 같은 이스라엘의 죄악, 세상과 같아져 버리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매우 심각한 범죄가 됨을 우리는 볼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하나님 백성됨의 근거로 생각했던 선택이 오히려 이들에게 혹독한 심판의 근거가 됨을 3장에서 볼 수 있다. 내가 너만을 알았기에, 구별하여 취급하였기에 심판하실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
3장 이하에서 마지막 부분까지 세상과 방불하여진 이스라엘은 결코 정상적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거룩한 나나로 세우시기 위해 선택하신 만큼 이스라엘의 죄악은 변질이요(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3장 이하에서는 그 변질된 모습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우선 지도층들의 부패한 모습, 하나님께서 아시는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그 변질된 모습의 성격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단어가 있는데 3:9-10에 나타나 있다. 평안치 못함, 소동, 불안한 모습, 억울한 일이 많기 때문에 야기된 불안, 한 사람도 율법에 바르게 행하는 자가 없고, 폭력, 불법이 성행한 것을 그리고 있다(10절).
바르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성 중에 평안이 깨어진 불안한 상태, 그것은 바로 행할 줄 몰랐기 때문」 우리 나라에서 남자다운 남자상, 선비의 모습 → 대쪽같은 성품, 초지일관. 그러나 성경에서 바르다함은 그런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르게 행함과 대조되는 것이 סמח(하마시; 폭력)이다.
아모스에서 강조되로 있는 단어가 הקדצו טפשׁמ(메샤파트 우체데카; 공법=공평과 의)이다. 성경의 말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 조심할 것은 「의」를 우리 사회의 「의」로 대치시켜서는 안된다. 형식상 일치하는 듯한 의미있는 것은 사실이나 근본이 전혀 다르다. contexual dislocation, context modiation(변조) = 어떤 본문을 그 자체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지 않고 그 당시 근동지역의 종교적 배경 속에서 이해하려 하면 그 근본 의미가 변질되어 버린다. 성경의 「의」란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쉬운 예로 「孝」는 유교에서도, 성경에서도 이야기하나 유교적 맥락에서 이해할 때와 성경적 맥락 속에서 이해할 때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진다. 폭력과 대조되는 「바르게 행함」 이것은 הקדצו טפשׁמ와 연결되고 있다.
지도층에 대한 정죄가 4장부터 이어진다. 특히 지도층의 여인들과 관련하여 그들의 죄질을 간접적인 죄와 직접적인 죄를 같은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손안대고 코풀기).
4:4절 이후에 보면 cultic영역(예배의식)의 변질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인 벧엘, 길갈로 찾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다. 특히 벧엘의 경우, 그 성소와 그곳에서 드려지는 예배 자체가 불법임을 하나님은 이미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셨다. 그러나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 자체가 내적동기면에서도 잘못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4:5절 외양으로는 어느 시대보다 많은 헌물이 드려졌으나 이것은 결국 자기 영광, 자기 과시를 위한 종교적 허영심에서 나온 것에 불과했다. 「이는 너희가 기뻐하여서 한 행위(종교적)에 불과하다」라고 지적하신다. 그리고 그 성 중의 모습은 불안(질서 무너지고 평강이 깨어짐), 폭력, 억울함이 즉, 이러한 질서가 와해된 정당한 모습에서 벗어나 변질된 것이 지도자와 피지배자 간에서만 아니라 이스라엘 성 전체, 그리고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이러한 폭력과 억울함, 평화가 깨어진 상태가 사회 전체에 팽배해 있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까지도 이러한 모습은 예외가 아니었다. 이를 오늘의 말로 바꾸면, 오늘 교회 전체, 성도간의 관계에 있어서나, 하나님께 드리는 공예배에서도 남녀 모두 정당한 것에서 벗어나 있음을 지적한다.
4:6절의 이야기는 바뀌어서 이스라엘이 이렇게 되기까지 하나님은 방치해 두셨는가?는 질문에 대해 6절 이하에서 말씀한다. 이스라엘이 이런 상태에 오기까지 얼마나 완악하였는가?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이를 깨끗하게(양식 결핍)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들을 굶주리게 하신 것, 재앙 보내신 목적이 이들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율법에 돌아와 순종케 하시기 위함이었음을 암시한다.
4:7절 “하나님은 비를 내리지 아니하였다” ①추수전 석달, ②추수 때까지 석달 동안. 추수 석달 전의 비는 늦은 비에 해당하는데 농사 결실하는데 매우 중요한 비다. ①이든 ②이든 이것은 농사에 치명적 타격을 주는 조처였다. 전체 땅에 안주면 포기할텐데, 어떤 데는 주시고 어떤 데는 주시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더 피곤하고 안달이 났을 것이다. 이런 기간에도 그들은 회개할 줄 몰랐다.
4:9절 그 다음 여러가지 병을 보내셨다. 사람의 병인지 병충해인지는 불확실하나.
4:10절 풍재, 깜부기 재앙으로도 회개하지 않았다. 심한 염병과 젊은이들을 칼로 살해하였을지라도, 너희 진에 악취가 코를 찌르게 할지라도 즉, 전쟁을 보냈어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4:11절 나중에는 소돔과 고모라 뒤엎듯 엎으셔도 마치 불 속에서 꺼낸 몽둥이 같이 되었을지라도 회개할 줄 몰랐다. 아람 군대, 주변 국가로부터의 유린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상당한 기간 동안 진행된 사건들이요, 하나님은 그 시간 동안 여러 방법으로 그들을 회개케 하기 위해 노력하셨으나 이 노력은 오히려 그들의 완악을 드러내게 하였다.
4:12절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선언하시기를 “이스라엘에게 이것을 내가 행하리라”고 하신다. 그럼 이것은 무엇인가? “내가 이를 행하리니 너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 4:4-5절에 있는 cultic place를 찾아가는 일과 거기서의 섬김의 핵심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일이다. 만약 정상적인 성소 출입이었다면 아침마다 상번제, 3일마다 십일조 드리는 외적 경건으로 보자면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풍성을 누렸으리라 생각할만 한데 이렇게 열심히 교회당에 출입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만나라」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아이러니칼한 뉘앙스가 이 말 속에 들어있다.
이 말씀 전의 전제는 너희의 잦은 성소출입이 오히려 하나님께 반역이었고 하나님은 이에 대해 징계하신 징계의 역사였다. 이렇게해도 너희가 회개할 줄 몰랐기에, 그들의 돌이킬 수 없는 완악함에 대해 하나님은 심판하실 것을 “이와같이 행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하나님 만날 준비는 심판 맞을 준비하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의 예배는 「내가 너희를 그곳에 찾아와 너희를 축복하리라」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하나님은 심판하실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이다.
4:12절 산들을, 바람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기 뜻을 사람에게 나타내시며 새벽을 어둡게 하시는 하나님... → 이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주와 통치자로서의 하나님, 세상의 어떤 것도 그 앞에 설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이 심판하실 하나님과 직면해야 할 때에 그 심판의 엄위하심을 이와같이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오랜 기간 이스라엘의 죄를 돌이키시려 노력하셨고 이스라엘은 계속 그들의 완악을 고집하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8C 선지자들의 예언을 오늘 우리의 설교에서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 특별히 이스라엘의 멸망을 오늘 교회와 어떻게 연관시킬 것인가? 성도의 견인과 연결하여 생각해보라. 고전 10장에 보면 과거 이스라엘의 실패와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이는 하나의 모형(오늘 교회에)이라고 말씀하신다(typical). 곧 이어서 이 역사기 기록되어 너희에게 건해진 것은 너희의 νουσεσια(뉴세시아; 경고)를 위해 기록된 것임을 고려해야 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8C 선지자들의 모든 결론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구원을 말미에 언급한다. 이스라엘은 그 범죄로 말미암아 나라가 망했으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 말씀이 무엇인가? 이 심판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소되었고, 궁극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을 것을 예언한다. 이 경고와 구원 사이에서 해결을 찾아보라.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베푸실 심판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서 밝히시는데, 한 마디로 הניק(키나; 애가 = 장송곡, 만가)라고 표현한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향해 베푸실 일은 “이스라엘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가가 될 것을 암시한다.
5:2절 הוהי ינדא רמא הכ יכ(키 코 아마르 아도나이 엘로힘) → 여기 הוהי는 ינדא와 함께 나올 때 םיהלא으로 읽어야 한다.
הי(야하) shortenedform ??→ 이로부터 야훼라고 읽혀지지 않았을까 상상한
Ίαβε(야베) 헬라어 성경에서 발견 ?? 것 뿐이다.
“천 명이 나가는(전쟁의 군인들) 성읍” → 천 명 군인을 낼 수 있던 큰 성읍이 100명만 남고 즉, 1/10의 감축, 넘어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함 즉, 나라로서의 존재가 남지 못할 정도의 전멸을 의미한다.
5:4절 완전히 망할 것이라고 선언하신 이스라엘에 대하여 “나를 찾으라 그리고 생명을 얻으라 벧엘을 찾지 말고 길갈로 가지 말라”고 하신다. 이 나를 찾고 생명을 얻으라는 말은 앞의 이스라엘의 멸망과 상충되는데, 정말 살 가능성을 두고 하신 말씀인가? 아니면 이스라엘 범죄의 다른 면을 지적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인가? 둘 다의 의미를 가진다고보는데, 살 수 있는 길이 여호와를 찾는 것이라는 사실에 시선을 돌리자. 여호와를 추구하는 것이 곧 생명의 길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4:4-5절의 헛된 예배의 위선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진정한 예배의식에 있어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진정한 자세를 나타내기도 한다.
예배와 섬김의 본질은 하나님을 찾는 자세이다. 예배 행위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는 말은 많은 의미를 포함한다. 이것은 믿음이란 말과 동의어이다. 믿음과 신뢰, 그의 은혜와 긍휼구하는 내적 자세인데 우리의 모든 것이 그에게 있다. 섬김 → 내 존재의 근원과 목적이 하나님 안에 있다라는 믿음과 동의어이다.
예배에는 하나님이 죄인을 긍휼히 받으시고, 은혜 베푸시고, 축복하심 ??
섬김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 감사 ?? → 이러한 행위의 본질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너희의 살길은 cultic place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데 있다. 성소의 불법성과 그곳에서의 섬김의 불법성만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외형적 열심, 밤낮없이 출입하며 무의미한 제사의식 그 자체를 지적.
그런 곳에 가지 말라함은 제사의식의 진정한 동기가 참된 믿음이 결여된 하나님 찾음이 없이 드려졌다고 말하면서 당시 이스라엘의 외식성, 위선성을 폭로한다. 자기 자랑, 외식, 위선, 자신의 만족과 기쁨 위한 종교적 행사였을 뿐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진정한 믿음없이 외형적으로 열성적인 경건, 예배는 단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을 반역, 거스리는 범죄행위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오늘 우리 교회가 자성할 부분이다.
예배자의 마음의 시선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진정한 믿음인지, 인간의 눈을 의식한 심리적 평안 얻으려는 자세인지......종교적 허영심(중심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주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바라기 보다는)인지. 요즘 웬만한 교양인의 조건이 교회 직분을 얻는 것이 되고 있으나 하나님 향한 믿음과는 무관한 것들이다. 특히 공예배(교회생활)에서만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데, 이 공예배의 성격과 내용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고 있다. 신령한 찬미, 기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수단이요, 통로, 이런 예배 통해 우리 영혼이 치유받고 참된 은혜 누리지 못한다면, 그 예배는 오히려 범죄행위가 되는 것이다.
5:6절 ףסוי תיב שׁאכ חלצי־ןפ(펜-이츨라 카에쉬 베트 요셉)
이스라엘 집이 불같이 성공하다 ...하지 않도록
(불태우다) 그래서 שׁאכ חלשׁי라고 고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요셉집 처럼 불태우지 아니하도록”
그 다음 “불이 붙어서 끌 자가 없으리라”와 연관시킬 때 거의 맞아들어간다.
5:7절 의를 독초(     로 바꾸는 자들이여 → 다른 사람에게 해독끼치는 무엇으로 변질된 자들로서 10절과 매우 비슷하다(남을 억울하게 하고 손해 끼침).
5:8절 삼성과 묘성 - 이는 4장 마지막 부분과 비슷하다. 4장의 구조와 비춰볼 때 한 단락의 마지막 부분이다. 5장의 마지막(23절) 부분에서는 “오직 의를 하수처럼 흘릴지니라”로 끝나는 것을 볼 때, 만약 7절이 윗쪽 부분과 연결되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여기서 10절과 연결되면 8절이 삽입된 결과가 생긴다.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이 성막에 있다 할 때 예배야 말로 우리 삶의 핵심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예배로 인해 범한 죄는 이스라엘의 본질적인 문제였다. 성소 출입을 빈번히 한 그들에게 “하나님을 만날 것을 준비하라” 그러나 그 하나님은 더 이상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요, 그들을 진멸하실 수 밖에 없는 진노의 하나님일 것이다(4장 말).
5장 초두에서 이스라엘의 진멸된 상태 묘사한다. 그러나 살 길은 “하나님 자신을 찾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언한 위치에서의 회개촉구의 말씀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와같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시고 진행하시는 가운데서도 남은 자(참된 믿음을 붙잡는 자들)는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경건과 실상의 폭로들이다.
빈번한 성소 출입과 수 많은 제물, 헌물 등 이러한 이스라엘의 경건과 신앙은 더 이상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의 실상(경건의)을 폭로한 것이다. 참 믿음과 전혀 다른 이질적 믿음이 이스라엘의 마음 속에 있었음은 이사야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황소의 피」를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 구역질나서 견딜 수 없다. 하나의 요식행위로서 예배를 치루면 거기에 마술적 효과가 있으리라 기대한 것을 싫어함이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이방의 종교심이 주된 성격을 이룬 예배를 싫어하심이다. 부적 붙이고 다니면 액을 면한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나 윤리적 행위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요식행위로 예배드리면 약속된 축복이 임할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참된 믿음 없이 제사의식에 참여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으로 믿었다.
이것은 오늘 한국 교회의 큰 병폐가 되고 있다. 얼마나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는가?(집회에 빠지지 않고) 이런 것이 믿음의 척도가 되고 있다. 물론 우리의 믿음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열매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행위가 있으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위험한 것이다. 명제가 옳다고 그 역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봉사 열심히 하고 십일조 내면 참된 믿음이 있다고 도장찍어버리는 현실, 내적 믿음을 확인하려는 작업이 세례문답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가 열심히 교회 출석하는 것 보고 인정에 끌려 그 사람의 사정을 봐준다고 하지만 그 폐단은, 믿음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교회에서 인전해 주니까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따라서 성장할 수도 없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이구나’하고 거기서 끝나버린다. 이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 우선 도장찍어 놓고 교회생활하게 하면 나중에 믿음이 자란다 하나 실상은 그 반대로 그들은 많은 고민하며 자신의 위선성을 자책한다. 물론 분명한 믿음이 있는데도 의심으로 흔들리는 것인지와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러한 위선에 빠져있었다. 예배의 요식행위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확보했다고 자처했다. 1:4절의 말씀은 포괄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 변질시켜온 이스라엘의 죄악들은 오랜 시간(역사 속에서 되풀이되어 왔다) 그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 자신이 아니었음을 폭로하고 있다. 이러한 내적 신앙, 하나님 섬김의 변질이 이스라엘의 전통형식으로 왜곡되고 악화되어 옴으로 막다른 골목(하나님의 심판 받아야 함)에 이르게 하였다. 오늘 이러한 변질이 우리 교회 안에 없는지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사랑하시는 백성 위해 쉬는 날 정하시고, 함께 모여 예배드리게 하시고, 일상생활의 분주함과 고된 환경에서 누릴 수 없던 하나님의 축복과 안식을 누리게 하셨다. 서로 만나볼 수 없던 성도들이 한 곳에 모여 영적으로 깊은 교통 누리게 하시는 영적 은혜를 주셨다.
예배란 하나님 섬기는 의식인 동시에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는 수단이다. 기도도 내 존재 전부가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아는 자(자기 힘으로 살 수 없다는 믿음 자진 자)가 자기의 믿음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지 그것이 공로가 될 수 없다. 모든 순간 순간이 기도일 수 밖에 없다. 그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바랄 수 밖에 없다. 기도응답의 근거(우리의 간절함과 믿음이 무시되어야 함은 아니나)가 하나님의 긍휼일 뿐, 이 긍휼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하는 형식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움 구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믿음의 기도인 것이다(기도할 믿음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
찬송은 막간의 이용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부르는가? 자기 열심과 흥분제로 자기의 냉냉한 마음을 부추기려고 부르는가? 참된 감사에서 우러나는 기쁨과 감격으로 부르는가?
5:4절 「나를 찾으라」 이러한 하나님 백성의 삶의 모습이 강하게 부각되는 것이 예배의식이다. 이스라엘의 예배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예배였다.
5:7절 그 다음 section의 서두인지 윗부분과 연결되는지? 구조상 윗부분과 연결된 것으로 본다. 4:13절과 같이 하나님의 엄위로우심을 선언하는 일종의 짧막한 doxology 즉, 한 section을 끝마무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시작으로 보게 되면 8절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10절 이하와도 연결된다.
윗부분과 연결될 때 טפשׁמ와 הקדצ를 각각 「독초로 변하게 함」과 「땅에 던지는 자」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의 טפשׁמ와 הקדצ는 어떤 영역에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웃과의 관계를 말하는 정치적, 법정적인 영역에 국한시킬 것인가? 아니면 보다 포괄적인 영역으로 넓힐 것인가?
4-5절을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삶의 영역을 다룬다고 볼 때 여기서 טפשׁמ는 이웃관계 뿐 아니라 좀더 포괄적 영역에서 해석되어야 즉, 하나님과의 관계 및 모든 영역과 예배의식에까지도 적용되는 경우로 보아야 할 것이다. 5:24절이 처한 맥락도 예배의식이다. 따라서 טפשׁמ와 הקדצ는 예배의식의 영역에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교회에서 권징하는 것은 정리하고 끊어버리는 것이 끝이 아니다. 「그 육체는 사단에게 내어주고 그의 영혼은 구원하려 함이다」 그가 낙심하지 않도록 권고할 것을 말씀하신다. 끊어내는 극단적 조처가 그의 영혼을 닫아버리고자 함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져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일단 드러난 범죄에 대해서도 끊어버리지 않으면 “교회는 저런 곳이구나, 그렇게 해도 되는구나”하여 함께 교회가 오염되어 버린다.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의 은혜로(긍휼과) 세워진다” 이것을 확실히 할 때 교회는 힘이 있다.

* 이스라엘이 무엇인가는 이스라엘 자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자신이 일반 국가로 생각했을지라도 사울은 왕으로서 세상과 같아지기를 원했기에 하나님은 사울을 폐하고 다윗을 세우셨다. 그 이후 열왕들도 여전히 세상의 왕들과 같이 행했으나 그것은 교회의 세속화로 보아야 한다.

* 남유다 출신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에 가서 예언 활동했다는 것으로 아모스의 예언 대상을 북이스라엘로 볼 것인가? 1:1절은 포괄적 의미의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2:4절은 유다를, 2:6절은 이스라엘(「요셉지파를 싫어버렸다」에서 여로보암이 요셉지파였으므로 북이스라엘을 의식하고 한 말씀)을 → 같은 것으로 이어짐을 볼 때 북이스라엘만 아니라 전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한 예언이라 생각할 수 있다. 주된 대상이 북이스라엘임은 확실하나, 분열된 교회를 하나로 보셨다는 증거는 아모스가 남유다 출신으로서 북이스라엘에 가서 예언한 자체가 교회의 일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북이스라엘이 벧엘에 단을 세울 때 남유다 출신 선지자가 올라가서 불법임을 선안한 것도 그 한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나누신 것이 아니므로 분열된 교회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공법과 정의」 הקדצו טפשׁמ (결정하다) = 법정적 판결, 규범. 이렇듯이 2개의 말로서 한 가지 뜻을 나타내는 hendyadis, 그 대표적인 예가 תמאו דסח(헤세드 우에메트) “인자와 진실”= 진실한 인자. 따라서 「공법과 정의」는 거의 보편적 용어가 되어 “옳고 바른 것”의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통치의 본질, 성격을 나타내는데 쓰인다. 주의 보좌의 토대는 “공평과 의”,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된다면 이는 또한 「하나님의 율법」과 관련된다.
이전에 5:1절 이하의 구조에 대해 잠간 이야기했는데 “옳고 바른 것을 독초로 바꾸게 하며 옳은 것을 땅 바닥에 내버리는 자”를 4-6절에 붙여야 할지, 7절에 붙여 9-11절에 연결하여야 할지생가해 보아야 한다. 농지세, 소작료를 올려 받고 부를 축적하는 죄에 대해 위에서 언급한다. 이와 연결시킬 경우 8-9절의 내용이 곤란해진다(전혀 무관한 내용이 됨). 즉, 하나님의 엄위하심, 그의 주권적 통치자로서의 권세를 강조하는 표현이 나오므로 이와 비슷한 표현이 4:13절에서도 나왔었다. 즉, 어느 한 section을 마감하는 위치에서 이런 말을 언급해 왔다. 따라서 8-9절은 마감하는 한 section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1차적으로 4-6절(예배의식과 관련된 죄)에 연관되는 것으로 볼 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다. “벧엘, 길갈을 찾지 말라”(“나를 찾으라”하시면서). 따라서 예배의식과 관련되어(4:4-5절의 이스라엘의 예배 즉, 외적으로는 경탄을 자아낼만한 거창한 예배의식의 위선성을 드러내어주는 기능을 한다) טפשׁמ와 קדצ를 연결시킨다면 이웃과의 관계라기 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의식의 영역까지도 변질시키고 바꾸어버렸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4:12절부터 심판주 하나님을 만날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이 직면해야 할 하나님의 엄위하신 모습을 이야기한다.
5:1절은 이스라엘이 망하게 될 것이다고 심판을 선언한다.
4-6절은 회개의 권고이면서 죄를 폭로하시고
7절 그들의 죄질에 대해 옳고 그른 것을 변질시키고 땅바닥에 내팽개친 자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2장에서 유다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배척한 죄와 상관있다.
8-9절 이같은 심판 행하시는 하나님의 엄위로우심, 통치자로서의 권세와 능력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5:10절 이스라엘의 죄를 단순한 시각이 아니라 복합적 시각에서 말한다. 성문에서 바른 소리 하는 자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이런 악한 시대에는 참 도리 아는 자가 입을 다물어 버린다.
??10절 문장 unit의 처음과 마지막에 동일한 유사한 표현을 반복함으로써 전체 내용
? 의 핵심을 가리켜 주는 역할을 한다.
??17절 inclusio
11-12절 그것과는 매우 다른 “지주들이 땅을 빌려주며 지세올리는 즉, 가난한 자들로부터 소작료를 올려받는 죄”를 언급한다. 가난한 자는 긍휼의 대상이요, 도울 대상(어느 단체에서나 가장 침해받기 쉬운 대상)인데 그들이 어떤 대접을 받느냐로 사회, 교회의 수준을 알 수 있다(그 공동체의 건강도를 측정 가능). 야고보서도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교회에서도 차별대우”를 언급한다. 힘없고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억누르는 일이 교회에서 나타나면 교권, 학교에서 나타나면 교수권이 된다. 긍휼의 대사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은 결과의 돈으로 다듬은 돌을 사서 집을 건축한다. 그러나 그 집에 평안히 거하지 못할 것이다. 탐낼만한 특등급의 포도원을 만드나 거기서 나는 열매와 포도주를 너희가 마시지 못할 것이다(불의로 쌓은 부). 왜냐하면 너희의 죄가 중함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5:12절 하반절 “의인의 적이라”   ...... םינויבאו        קידצ(차딬 ... 웨에브요님 ...) → 의인을 핍박하고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넣는, 함께 parable columm에 나타나는데, 이때의 의는 가나하기 때문에 억울함을 당한 의를 말하며, 그 구체적 내용은 사회의 통치 맡은 자들이 뇌물받고 성문(모든 송사를 심리, 판결하는 장소)에서 법정시비를 굽게한 것 즉, 정경유착(돈 가진 자를 유리하게 하는)의 상황이다.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지기”(얼굴 아는 것), “내 이익 추구 위해 내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구함” 마지막에 보면 이웃관계에 있어서도 시비판단이 왜곡된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 관계에서의 옳은 것의 왜곡, 변질은 이웃관계에서도 왜곡되어 나타난다. 유다(하나님 관계에서의 죄)와 이스라엘(이웃관계에서의 죄)을 나누어 나타나는 것처럼(2장에서). 따라서 옳고 바른 것이 하나님 관계뿐 아니라 이웃관계에서도 전 살믜 영역에서도 변질, 왜곡되었다. 옳고 바른 것에서 떠남으로써 이웃에게 해, 자신에게도 해를 끼치는 독초로 바꾸고 만 것이다.
5:13절 힘있는 자 편에 서서 가난한 자를 억울케 한 것에 대해 하나님은 심판하실 것이다. 여기에 보태어 옳고 바른 것을 변질시키는 자는 바른소리 하는 자를 싫어한다. 이런 시대가 되면 그 사람은 입을 다물어 버린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시대이다. 옳고 바른 것이 외쳐지는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각자 자신에게 비추어보고 돌이킬 가능성이 있지만 이런 바른 말씀이 외쳐지지 않으면 그것은 내리막길로서 심판만 남는다.
10-13절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는 시각이 매우 복합적이다. 가난한 자를 내 이익의 도구, 착취의 도구로 삼는, 이러한 악을 정당화시켜 시비를 굽게 하며(가난한 자를 억울케), 옳고 바른 것을 싫어하고, 죄지적함을 싫어하는 죄.
5:14절 “선을 추구하고 악을 추구하지 말라” - 너희가 살기 위해서는. 앞에서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여 생명을 얻으라”했다. 두 결과, 목적이 생명 얻는 것인데 그 대상은 다르다. “선과 하나님”. 하나님을 찾는 것(우리가 살 수 있는 생명의 가능성이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의 자세, 율법이 가리키는 대로 죄사함의 은혜가 있는 것, 이는 신약의 믿음과 동일하다)과 선을 추구하는 것(선을 추구하는 것은 여호와를 추구하는 자의 삶의 특징이다. 즉, 믿음의 특징이다. 원인, 결과의 관계이지 동일한 것은 아니다)은 어떤 관계인가? 어떤 의미에서 동일하나 어떤 의미에서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선을 추구하는 삶”과 “하나님이 함께 하심”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다 하면서 어둠 가운데 거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이다(요한일서). 선의 추구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모습이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하나님과 함께 함이 생명의 본질인 것이 요한일서 초두에 나타난다. 이것을 가리켜 믿음의 열매라고 한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 선을 추구한다는 율법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전제되어, 그 앞에 나아감을 얻은 자가 그 결과로 자연히 나타나는 선의 추구가 아니면 이것은 오해려 가장 무서운 미혹자가 된다. םתרמא רשׁאכ(카아쉐르 아마르템)   “너희가 말하는대로” 이스라엘의 자기 기만, 환상을 시사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나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것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요한일서와 일치한다). 좀더 극단적 경우가 마태복음 7장이다. 말씀전파 뿐 아니라 귀신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였으나 주님은 그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큰 착각이 있었다.
5:15절 선의 추구와 하나님 추구를 분리시키지 말아야 착각이 없다. 회개란 악행을 고치는 것이다. 선을 미워하는 상태에서 선을 추구하는 상태로의 변화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특별히 긍휼의 대상을 “요셉의 남은 자”(1/10의 감축의 의미- 넘어져 일어설 수 없는)라고 함은 남은 자에게 국한시킴은 이스라엘의 심판이 기정 사실이나 그 중 이 말씀을 듣고 돌이키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을 말씀하신다.
“교회에서 시비판단을 바로 세우라”는 말은 한국 교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웃, 가난한 자를 착취의 대상으로, 시비를 굽혀 가난한 자를 억울케 → 명예, 교권, 돈 등의 이익이 시비판단을 왜곡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함은 자기 이익 따라 교회일 결정한다는 것이다. 형제 대하는 태도에서 취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심.
5:16절 긍휼의 대상을 요셉의 남은 자로 말하여 이스라엘의 심판을 기정 사실화 한 후 그 심판이 얼마나 무서울까를 16절에서 언급한다. יהנ יעדוי(요드에 네히) → 곡하는 사람을 불러 장례 때 곡하게 하는 것, 곡하는데 농부를 불러온다. 이것은 너무 죽은 사람들이 많아 전문가를 못부르는 사태가 일어날 것을 암시 즉, 시체가 즐비한 참화를 겪게 될 것을 말하심이다. ךברקב רבעא־יפ(키-에에보르 베퀴르베카;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 지나갈 것이므로) 애굽 가운데 행하셔서 장자를 치신 것처럼 그때도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5:18절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여기 ‘여호와의 날’은 무슨 날로 이야기되는 가? 구약에서는 심판의 날로, 이날은 어두움의 날이요 빛의 날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그날이 심판의 날이 됨을 전혀 기대치 못한 일, 이스라엘에게는 그 날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복된 날로 기대했었다. 오바댜 15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생각하던 “여호와의 날”과는 달리 모든 것을 그들이 행한대로 하나님게서 갚으시는 날이다. 그들은 그날을 복된 날로 알았다는 것은 자기들은 그 심판에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착각(온갖 악 자행하면서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착각)한 것이다. 너희들은 심판 받아야 할 죄인들이다. 그들의 현재에 대한 착각, 미래에 대한 착각(הוהי םוי; 욤 아도나이; 여호와의 날 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종국은 빛이 아니요 어두움이요, 심판이라는 것이다.
5:21절 예배의식과 관련하여 다시 돌아와 언급하고 있다. 너희가 광야 40년 동안 화목제와 소제를 나에게 가져왔느냐? 24절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 예배와 관련하여 말씀하심. 어떤 이들은 예배를 받지 아니하심은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함으로 즉, 윤리적 삶이 없는 예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이다. 「이스라엘 종교사의 한 전환점은 선지자이다. 이전에는 원시적 신앙이었으나 선지자들에 의해 제의적 종교를 윤리적 종교로 바꾸었다」고 말하나 이는 오해이다.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의식이었는데 그것이 없이는 윤리도, 의식도 무의히하다. 의식적 예배 반대하고 윤리적 예배, 삶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여기서 “물”은 풍성함을 상징할 수도 있으나 생명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성경은 대개 사용한다. 이스라엘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곧 옳고 바른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존재이다.
“기근”은 말씀의 기근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형제의 관계에서 옳고 바름, 이것이 교회로 교회답게 존재케 하는 그 무엇이다. 쉬임없이 흐르는 하수와 같이. 거짓 것과 위선이 판치지 않도록 즉, 진리를 왜곡시켜 교회를 죽이는 독초가 되지 않도록해야 한다. 옳고 그름이 예배와 관련되어 언급됨은 의미있다. 이스라엘의 삶의 핵심은 예배, 예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죄사함의 은혜, 그 가운데 하나님과의 교통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 여기서부터 옳고 바른 교훈을 세우라. 신자 삶의 전체가 예배이다(예배의 삶인 것은 사실이나). 외식으로 상징되는 예배의 실체는 이스라엘의 영적 삶과 죽음을 판가름하는 중대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옳고 바른 것을 세워가는 것이 필요하다.
5:25절 이스라엘이 광야생활 동안 의식은 하나님께 향했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 향한 것이 아니라 우상(자신을 위해 만든 너희 신)을 향한 것이었고, 끊임없는 배역의 역사였다. 선의 추구가 없었던 것은 너희 삶 자체가 하나님 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상, 이방과 방불해진 이스라엘의 예배는 하나님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신 것은 너무 당연했다. 광적인 종교적 열심, 외적 경건, 3일마다 드리는 십일조, 수 많은 제물이 정말 나를 향한(위한) 것이었느냐?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행하실 구체적 심판 내용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다시리시는 약속의 땅에서 추방당하리라.」 즉, 추방은 흩으심인데 「세상과 같아졌으니 세상에 가서 살아보아라」

6장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정죄 = 시온(예루살렘)과 사마리아 → 남북을 포함한 이스라엘에게 아모스가 예언 대상으로 똑 같은 정죄대상으로 삼고 있다.
1절 아무 염려없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 = םיננאשׁ(샤아난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했으나 실상 함께 하시지 않는 위기 속에서 빛의 날이 아닌 심판의 날로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의 위기, 철저히 버림받은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무감각, 영적으로 무지했다. 1등 국가(그 당시 이스라엘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므로)의 존귀한 자(지도자)들, 이 말에는 비아냥거리는 tone이 있다. 그 지도자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찾아오면 “갈레”에 가보라.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을 불러 세 번 땅을 칠 때 “아람에 대해 승리하리라” הלכ  הנלכ(칼라, 켈라나) 역행동화로 보면 같다 → 아람의 중요 도시로 볼 수 있다. 교세를 자랑하기 위해 파이프 organ을 내보이고, 주보 내보이며 이스라엘의 결정적 승리의 자리로 인도해하며 “우리가 이런 일 이루었다”고 자랑.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 보라” 이스라엘이 남북합해 중요한 승리 거둔 전적지. 이 역시 국세를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아람, 하맛, 블레셋 왕국보다 나으냐 비교해보라. “내가 교회 맡고나서 이룬 업적으로 보라”고 큰 소리치는 것. 풍전등화의 상태에서 자기들이 이룬 업적(영토, 군사, 경제력)을 자랑한다. 즉, 교회의 본질에 있어서의 세상과 비교가 아니라 세상과 같은 가치관에서의 비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평안케 하신 것은 그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너무 짓밟히니까 긍휼히 여겨 구해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영광으로 삼는 사기꾼이다. 세속적 영광 - 영토의 크기로 자랑, 하나님의 나라 참된 영광인 의와 거룩은 무관심하면서, 위기의 날을 오도하면서 대신 폭력의 통치(하나님과 멀어지고, 이웃을 억울케 함)에 전념하고 있다. 정작 돌아보아야 할 요셉의 상처, 이스라엘의 아픔에는 전혀 무감각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갈 때에 지도층이 제일 먼저 끌려가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생각한대로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도 아니었고 그들의 미래도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열심히 예배드리고(굉장히 열심), 그러나 그들이 추구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옳고 바른 것을 변질시켜 버린 나머지 나중에는 바른 것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소리 듣기 싫어하고, 그들로 입다물게 하고 그러고도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고 믿고, 그들의 미래는 밝은 것이라고 믿었더, 어떻게 이러한 심리가 가능한가? 이들을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당시 이스라엘의 믿음은 전혀 가짜였다. 전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고 믿었고 그들의 미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날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일 이들이 모종의 믿음을 가졌으나 그 믿음이 참되지 못하여 스스로 속고 있었다 하면 우리는 참 믿음의 정의를 어디까지 엄격히 해야 하나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아모스의 중요한 대목(5:7, 5:24, 6:12)에서 계속 반복하고 있는 말은 “옳고 바른 것을 변질시켜 버렸다 그러니 그것을 바로 세워라”인데.
5:24절 특별히 여기서 “공법을 물처럼 흐르게 하라”에서 물을 풍성함의 상징으로 볼 수 있으나 성경에 흔히 사용되는대로 생수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즉, 옳고 바름은 교회로 살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생명과 같다는 것이다.
5:7절 공의를 독초로 변케한 자들, 그들의 착각(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들의 거짓 소망,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바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다는 전체 내용을 הקדצ  טפשׁמ가 둘러싸고 있는데, 옳고 바른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왜 중요한가? 옳고 바른 것이 정말 드러난다고 할 때 그 앞에 나를 비추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여기서의 옳고 바름은 율법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자세를 말한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믿으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신앙은 어떤 신앙인가? 우리 가운데 그러한 유형의 신앙을 찾는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의 신앙일까? 이 말씀 가지고 타락한 세상 책망할 때는 좋았지만 교회와 나에게 적용시켰을 때 우리의 위선이 다 드러나는 것 같지 않은가?
어쨌든 옳고 바름이 없었기에,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의 자세가 없었기에 이스라엘은 망하여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6장에서 그 지도층에 대해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셔서 외적 평안주시는 줄 알지 못하고 교만해져서 “교회를 보라 어디가 부족한 것이 있는가? 재앙의 날은 멀다”라고 횡포 일삼는 지도층의 평안, 안일, 일락 추구함으로써 깊이 병들어 있는 교회에 전혀 관심이 없고, “평안하다 평안하다”하는 바로 이 죄 때문에 그들은 맨 앞장서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6:8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야곱이 자랑하는 것, 외적 부요, 번성의 자랑을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신다” 한 집에서 10사람이 남는다해도 다 죽을 것이다.
6:10절 친척, 시체를 불사를 자 דוד(도드; 친가쪽 친척), ופרסמו(우메사르포; 외가쪽 친척으로 보기도 한다) 아직도 시체를 끌어낼 자가 있느냐? 없다. 잠잠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도록하라. 이는 시체를 끌어내면서 물으니까 ‘없소’할 때 “조용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두려운 상태임을 표현한 것이다. 이와같은 공포의 대상으로 직면하게 된 하나님을 만나라.
6:12절 말이 바위 위로 달리고, 소가 바위에 밭가는 것 → 상식 밖의 일 곧, 이스라엘이 공법을 인진으로 의를 독초로 바꾼 일을 말한다.
13절 רבד אל(로 다바르) → “아무 것도 아닌 것”(허무한 것으로 번역됐으나 한 지명일 가능성이 많다), 아람과 싸우면서 크게 승리한 곳 중의 하나.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서 너희를 핍박(학대)하게 하되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①사해 남쪽 아래쪽, ②사해 북쪽 시작쪽) 시내까지. 이것을 전체 이스라엘로 본다면 남북을 다 가리키며, 북이스라엘로 본다면 북쪽의 시작을 가리킨다고 보겠다. 심판의 모습이 점점 구체화된다. 약속의 땅에서 쫓겨갈 것이라고, 시체가 즐비, 곡성이 들릴 것이며, “하나님이 세우시는 한 강대국에 의해서” 심판이 이루어지리라.

* 흔히 아모스를 국가와의 현실관계에서 다루고 있지만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교회를 향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물론 성경이 국가정치에 대해 전혀 침묵하신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백성이 국가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취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니엘에서 그 모본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도 아니었고, 바벨론의 한 정치가였다. 정치가로서 국가에 대하여 세상에 대해 어떻게 처신했는가의 모본이다. 그외 로마서, 베드로전서에서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찾아볼 수 있다.

* 왕(다윗)과 제사장(아론계열)이 겸직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혈통으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에 오면 왕, 제사장, 선지자가 통합된다. “멜기세덱의 반차 좇은 영원한 제사장”(시 110편). 제사드리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승리의 왕직으로 나온다. 왕직과 제사장직이 한 인물에서 통합될 것으로 예언한다.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리니”, 이는 모세가 그 예표이기 때문이다. 선지직은 유동적이어서 왕도(다윗-사도행전에서 보면) 선지자가 될 수 있었고, 다윗은 수 많은 시편을 저술하면서 선지직을 겸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영적 변질이 아모스가 관심가진 핵심적 문제였다. 14절에서 앞으로 올 심판을 말하기 전에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느냐” -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이스라엘은 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올 심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하나님이 세우시(일으키시는)는 한 나라 - 앗시리아를 통해 하시겠다.

7장 아모스가 보는 vision애 대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 보이셨다” 제사장 아마샤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지만, 4개의 환상을 보이신다.
①메뚜기, 황충으로 심판하실 것. שׁקל(라퀘쉬) 가장 늦게 뿌리는 파종. “늦게 파종한 싹이 올라올 때 황충을 보내겠다”는 것은 대체 작물이 없다는 뜻이요, 대파의 가능성이 없는 시기로서 여름 지나고 건기가 6개월 되는 때로 즉, 식량을 끊어버리겠다는 말이다. 땅의 채소를 다 먹어 치웠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간구한다. חלס(셀라)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만든 후 이스라엘을 다 없앤 후 너로부터 새 민족 시작하겠다 했을 때 모세가 긍휼을 간구, 용서 구함을 본다. 이스라엘의 연약함 때문에 모세가 야곱이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즉, 그런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고 이와같은 선지자의 간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며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고 하심.
②불로 심판 - 전체적인 소멸을 말함이다. 아모스는 심판의 혹독함과 이스라엘의 연약함에 근거하여 또 호소하자, 하나님께서 철회하신다.
③다림줄 환상 ךנא תמוח(호마트 아낙) 주석(실에 달린 추의 다림줄)으로 만든 벽 → 다림줄(곧은가 아닌가를 재는 도구)로 세운 벽. 여기서 하나님께서 최종적 결정하심. 이스라엘 가운데 다림줄 두시겠다함은 엄격한 척도에 의해 이스라엘의 잘못을 재시고 더 이상 간과하지 않고 조처를 취하시겠다는 뜻이다.
이삭의 산당(성소-하나님을 섬기는 복된 장소)들이 황폐해질 것 שׁדקמ ...תומב(바모트... 미크라쉬) 같은 내용을 평행하여 반복으로 이스라엘의 섬김 자체가 불법적임을 말씀) 이스라엘의 성소가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할 때 이 말씀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스라엘에게 행하실 심판의 내용인데, 성소를 황폐케 하고, 교회 최고 지도자를 칼로 멸케 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여로보암 1세 - 교회 분열시 북이스라엘은 제사장을 제멋대로 세웠다. 그렇다면 아마샤도 적법한 제사장이 아니고 불법적일 것이다. 길갈 - 여호수아의 진이 멈추었던 곳(본진영).
7:14절 Institution vs Charisma(제도 對 은사), 제도에 의해 세운 자와 하나님의 은사 따라 세움 받은 자와의 대조, 분리로 보는 자도 있다. 왕과 제사장은 세습제였으므로 제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지직은 은사에 의한 인물로 보았다. 자유주의 뿐 아니라 보수주의 내에서도 은사 강조하는 편에서는 제도와 은사가 상반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제도와 은사는 상호 배타적인 것인가?(2분법적 사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은 제도와 은사가 일치, 결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전 14장에서의 이 은사 사용은 인간의 절제와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라’, ‘예언하는 자는 예언하는 자에 의해 분변되어야’ 분명히 이 두 사이에 유추관계가 성립한다. 고전 12장에서는 그가 원하시는대로 각자에게 나누어주신다 하면서 12장 마지막에서 이 은사는 직분으로 바뀐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은사(성령의 주권적 역사)와 제도(인간의 self-control)의 결합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모종의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רקוב...איבנ” → 목자, 많은 양떼를 소유한 목장주를 가리킬 수도 있다. 반드시
(나비아...보퀘르) 비천한 직업을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니다. 따라서 아모스의 사회적 위치는 모호하다. 문학적 기교로 볼 때는 상강한 학식의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 가까와 보인다.
“םימקשׁ סלוב(볼레스 샤크밈)” → םימקשׁ ; 뽕나무, 고급목재로는 쓰이지 못하고 하층민들이 사용하는 목재. סלוב; 뽕나무에 구멍을 내면 빨리 익는다고 함 = 뽕나무 침 찌르는 자
결국 이 말은 “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한 나를 하나님이 부르셨기에 그 하나님을 거역치 못하고 선지자 노릇하는 것이오” 아모스가 자기가 선지자 된 것을 그와같이 대조시켜 말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제도 자체가 제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모스의 출현은 비상조치인 것이다. 제도는 은사가 작용하는 틀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었다. 종교개혁 전후 로마 카톨릭이 제도의 기능을 상실했을 때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을 통해 비상조치를 취하신 것처럼. 따라서 아모스가 반제도적 태도, 종교에 반발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에서 제도와 은사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왕직과 선지직을 비교해 볼 때 독특한 면도 있지만 왕과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대놓고 거역, 반역할 때 취해진 조치이다. 어쨌든 명목상 제사자이었던 아마샤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을 때 그 심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말라”한데 대한 “공법과 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니라”는 것은 가서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는 것이다. “네 아내는 창기가 될 것이요,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 즉, 가정과 개인의 파멸을 선언하는데 이는 이스라엘 전체에 확대가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더러운 땅 - 땅은 네 땅, 약속의 땅 - 삶의 권리 확보. 여기서의 땅은 물리적 땅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는 의미로서 이것은 개인에게서 시작하다가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된다.
④지금까지의 환상의 의미를 종결하는 부분

8장 1절 보면 마지막 환상은 여름 과일 바구니 환상이었다. ץיק 콰이츠; 여름과일) ץיק בולכ(켈루브 콰이츠; 종말) 여기서 밑줄 친 것은 동음이의어이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은 이스라엘의 종말이요, 더 이상 간과하지 않으실 것이다.
8:3절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 → 하나님과 교통의 삶을 상실하므로 슬픔, 처처에 시체가 즐비할 것, 사람이 잠잠히(쉿) = סה(하스), 이것은 극도의 공포심에 질린 상태이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돌이키지 아니하리라고 하신다.
8:4절 이스라엘의 변질의 성격을 ①긍휼의 대상을 짓밟는 것, 극단적 이기주의, 믿음의 실상을 매우 아이러니칼하게 지적하고 있다.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회당 - 필로, 요세푸스 등은 모세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다. 월삭이나 안식일을 지나면서 빨리 지나가기 바라며 하나님 향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열심의 실상을 밝혀주는 것이다.
②척도 변경; 많이 받고 돈을 적게 주는 것, 남에게는 엄격하게, 자신에게는 너그럽게, 공평한 척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익이 되면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지 생각해보지 않는 자세.
8:8절 잊지 않고 책임을 물으시겠다. 온 땅이 뒤엎어질 것이다(땅바닥으로 곤두박질). 땅의 뒤엎음은 해가 대낮에 어두워질 것이 모든 이스라엘의 삶의 질서가 붕괴될 것이다. 기쁨의 노래가 애가로, 독자를 잃은 것같은 비참한 슬픔이 된다.
8:11절 אמצ בער (라아브 차마; 기갈과 기근) 생존수단이 고갈되고 결핍될 것이다. ‘...םימל אמצ־אלו םחלל בער־אל...’(...로-라아브 랄레헴 웰로-차마 람마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수 없으므로 오는 영적 기갈, 이스라엘이 당할 비참함의 절정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인격간의 교통, 사귐의 한 수단)의 의미는 무엇인가? 말씀(생명의 양식, 생수)의 단절은 이스라엘에게는 영적생존수단(양식과 생수)이었다. 오직 טפשׁמ와 קדצ를 하수와 같이 흘릴지로다. 유다의 핵심(죄의)을 하나님 율법을 거스린 것, 이것이 생명을 좌우한다. 8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당할 심판으로 맺는다.
7장에서부터 하나님께서 보이신 환상. 마지막 환상 직전에 아모스 선지자가 선포한 메시지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을 보임으로써 8장 이하의 심판이 불가피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일,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종말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변질된 모습(8:45)을 간단히 언급하자면 서로 사랑해야 할 하나님의 교회가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무정한 사회로 변했는가? 이러한 이스라엘의 변질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들의 종교적 열심, 믿음, 형식적 의례에 불과한 예배였고, 그들이 참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고 집스러운 의무 뿐니었다.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원래는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기 위한 제도였음을 그들이 알지 못했다.
8:11절 모든 표준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왜곡 변질시키는, 세상 즐기기 위해서는 남은 어떻게 되어도 개의치 않는 것에 대해 말한다. 8장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그들의 삶의 형태를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 즉, 앞으로 올 심판에 외적차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한 구원이 영적 차원이라면 진정한 심판 역시 영적 차원임을 암시한다. 말씀을 양식과 생수에 비유한다. 영적 차원에서 사람을 살게 하는 생명수단임을 암시한다. 말씀이 하나의 문자로 그칠 때는 아무 의미가 없으나 성령께서 친히 말씀하실 때, 우리 영혼을 살린다.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신다. 이러한 말씀을 들을 수 없다 함은 성경이 없는 것이 아니요, 말씀이 인격간의 사귐이라면, 말씀을 그치셨음은 교통의 단절, 하나님의 침묵을 의미한다.
거의 마지막 부분에 와서 말씀으로 인한 영적기갈 상태는 아모스가 전체적으로 앞부분에 언급한 것을 다시 언급하여 마무리하고 있다면 이스라엘의 변질의 핵심은 여호와의 율법을 배척한 사실과 관련된 것이다. 그때 “여호와의 율법”과 대조된 것은 “열조들이 따라갔던 거짓 것”, 거짓 것이라는 우상의 설명은 참된 것 곧,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 하나님이 계시하신 참된 것과 대조이다.
이 거짓 것을 “열조들이 따라갔다”함은 이스라엘이 오랜 역사 과정 통해 하나님의 율법 왜곡을 변질 시켰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변질이 예수님 당시에는 “장로들의 유전”으로 나타났고, 그것 때문에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를 죽이는 일이었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오해 즉, 어느 한 시대에 그치지 않고 오랜 신학적 전통 속에 이어왔다는 것이다.
참된 것과 대조되는 거짓 것. 이것은 아모스의 주제적 단어인 הקדצו טפשׁמ(옳고 바른 것)와 연결시킬 때 옳고 바른 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한다. 이는 삶의 전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포괄적 의미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근본 성격을 הקדצו טפשׁמ라고 한다면 그것은 죄(공의)를 미워하는 심판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 자비가 사랑이 포함된 것이다.
옳고 바른 것이 왜 교회가 존재하는 생수 같은 것이 될 수 밖에 없는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영적 생명이다. 율법을 가리켜 신명기는 הקדצו טפשׁמ라고 말한다. 옳고 바른 것은 그 속에 공의와 사랑을 포함한다. 참 사랑은 공의로운 면을 가지고 있다. 의가 강조되는 곳이 깡패사회이지만 그것은 참된 의미의 의리가 아니다. 서로 같이 망하자는 것일 뿐.
8:13절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 버리고 변질적 예배의 곳인 우상제단을 찾는 이스라엘을 말함.

9장 1절 하나님께서 제단을 대하여 서신 것을 보았고, 기둥머리치면 문지방이 흔들리리라. 제단은, 성소, 은혜의 핵심인 제단이다. 기둥머리를 쳐 허물어버리심은 은혜와 축복의 상징을 파함이다. 하나님이 그들 중에 임하셔서 예배를 받으시고 그들에게 은혜 베푸시는 곳, 은혜의 장소들을 하나하나 폐해버리시는 하나님, 그분은 말씀을 그치시고(침묵하시고)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죄사함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성소 무너뜨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셨다는 것, 더 이상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음이다.
9:4-6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시되 Solomon의 기도 중에 「성전-이곳에 대해 하나님의 눈이 늘 향하시고, 이곳에서 그들의 기도 들으심」 그러나 그 시선의 의미가 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재앙을 위해 시선을 고정시키심이다. 이 시선에서 피할 자가 없다는 것. הבוטל אלו הערל(레라아 웰로 레토바) 즉, 모든 것을 뒤엎으시는 심판이 될 것이다.
9:7절 너희는 내게 있어 구스의 자손과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블레셋, 갑돌, 아람 사람의 길에서 구원해 올리지 않았느냐? 아람의 출신지가 길, 블레셋은 갑돌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스라엘을 구원해 올리셨다 함은 세상 세력의 노예로 있던 자를 자유케 하셔서 하나님 섬기는 민족으로 올리신,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새존재) 하신 중요 사건. 이스라엘이 다른 백성과 다른 것은 하나님께서 노예된 그들을 이끌어 내어 하나님 백성 삼으신, 이방과 구별된 지위의 상징이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신 중요한 사건들, 갑돌에서 블레셋으로 길에서 아람을 이끌어낸 것이나 다름없는 사건으로 만들었다. 이스라엘을 다른 모든 민족으로부터 구별하신 구원 사건을 무효화하여 그들이 이방 백성과 아무 차이 없는 민족으로 만든 사건이 이스라엘의 죄이다.
아모스 맨 처음 지적처럼 이방들의 영적 상태처럼 무자비한 이스라엘의 죄가 열방의 죄와 동일한 것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구별해 세우셔도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 백성되기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나갔으니 하나님이 그들을 이방과 똑같이 취급하시겠다고 하신다. 이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위치의 상실 즉, 구원전 상태로의 복귀(원점회귀)이다. 앞으로 행하실 이스라엘 심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것이다.
9:8절 하반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야곱의 집을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하시겠다 하셨으나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최종적인 말씀은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다는 말씀이다.
9:9절 이스라엘을 체질하시듯 하나 자갈(남은 자)은 딸어지지 아니하겠다. 즉, 체질하시는 것인 심판의 의미를 정화와 선별의 의미로 말씀하고 계신다. 선별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어디있느냐 하던 자들」은 멸하고 반대로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는 자만이 선별될 것이다. 그러므로 남은 자가 어떤 자들인가를 알 수 있다.
9:11절 남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다윗왕권의 회복으로 말씀하신다. 아모스서 자체의 논리를 보아도 이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방 심판의 내용들이 왕조의 심판인데, 왕조와 국가의 흥망성쇠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런 아모스서의 논리로 보아 당연하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다윗왕권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창세기부터 약속된 메시야를 상징하고, 이스라엘에 관한 약속의 핵심, 이것이 미래의 축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에돔의 남은 자들을(회복된 다윗왕권의 남은 자들이) 축복하고 유업으로 받겠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나라를 기업으로 얻으리라. 구원의 확장성이 여기서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민족이 그 구원에 동참케 될 것이다.
9:13절 ‘파종과 추수가 함께’라는 말은 급속한 성장을 말한다. 풍요한 결실을 비유한 표현이기도 하다. 약속의 땅에 풍요로운 축복이 임할 것이다.
9:14절 평화로움의 상징, 상실했던 나라를 회복하고 영원한 나라로 심으실 것이다. 다른 선지서들의 기본적 요소들이다(9:7-15). 다른 선지서들은 이것을 확장하는 것(확대)이다.
앞으로 행하실 하나님의 심판 - 하나님이 선택받아 세상 가운데서 구별된 교회가 성결을 나타내지 못하고 세속화된 이스라엘에게 영적 생수와 같은 하나님을 거부했으니 너희가 말라죽을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떠나 이방과 똑같아지리라. 더 이상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요, 다시 남은 자를 두시고 그들로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구원과 축복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이 두 가지 말씀이 다 하나님의 진의임을 기억해야한다. 이스라엘 심판 선언이 구원의 약속(남은 자)이 어떤 관계를 갖는가? 둘 다 옳다는 것이다. paradox적 언급이 나올 때 우리는 중간에서 적당히 타협하고자 한다. 요한일서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귐이 있다하면서 죄 가운데 거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 때때로 ‘거짓말하다’는 동사가 현재형이라는 이유로 반복적 죄만 죄라고 합리화하나 그러나 둘 다 성립한다. 죄 가운데 거하는 것도 거짓말하는 자요, 죄없다 하는 자도 거짓말하는 자이다. 거기에서 우리의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 찾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심판과 미래의 약속, 진정한 다윗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이런 것들이 얼버무리는 것이 되지 않고, 각각 명백한 위치에 두는 것이 좋다. 하나님의 교회가 옳고 바른 것을 잃어버릴 때, 교회다움을 상실했을 때, 하나님께 어떠한 조처와 평가를 받겠는가? 심판으로 끝났으면 소망이 없으나, 죄악과 심판이 미래에 오실 다윗의 후손에 의하여 소멸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다윗의 후손의 구원과의 관계, 남은 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회개도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나(הנוי; Jonah)

요나서를 보면 형식상 매우 독특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로 보면 문체적인 특징이 나타나는데 이는 역사적 서술체와 같다. 내용은 요나 선지자가 겪었던 일을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엘리야처럼 역사서에 포함되어야 할 기록인데 선지서에 포함되어 있다. 그 이유는 요나서 1장 1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은 선지서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이 선지서의 독특한 면은 아니다. 그러나 서두 자체가 이렇게 시작하는 만큼 선지서의 시작은 이렇다고 할 수 있다. 2장 같은 경우에도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한 내용이 있다. 이는 선지서의 문체의 유일한 부분이다. 대개 선지서는 역사적 서술체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시적 문체로 쓰여져 있다. 성경에서 사용된 문체는 역사적 서술체와 시적 서술체 두 가지가 있다. 요나서 2장의 원문을 보면 1장과 다른 그 문체적 차이가 또렷하다. 보통의 선지서는 시적인 문체로 되어 있다. 물론 선지서 중간 중간에도 역사적 서술 부분이 간혹 나타나나 이것은 극소수이다. 선지서 대부분이 이러한데 요나서는 전부가 역사적 서술체이고 시적 서술체는 2장에만 나타난다. 하박국서 같은 경우는 3장에 가서 하박국의 기도로 끝난다. 이는 요나서와 유사성이 있으나 하박국의 선지자의 글은 1장 1절에 나타난다. 하박국은 문체 관점에서 선지서에 포함된다. 요나서는 문체적 관점에서는 선지서에 속한다고 말하기 보다는 역사적 문체 속에 속하여 역사서에 해당된다.
또 하나 요나서의 문제점은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간 것을 부인하는 진보적 학자들이 있다. 그리고 요나가 니느웨성에 가서 외친 기간에 관한 것이다. 요나는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한다. 만일 요나가 여로보암 2세 때의 선지자와 동일하다면 당시의 앗시리아는 팔레스타인을 기회만 있으면 쳐들어 온 나라였고, 이 나라의 가장 강력한 도시인 니느웨가 큰 회개를 했는데 역사적 상황과 이 말이 잘 맞지 않는다. 요나서가 영적인 진리를 말하기 위한 픽션이냐? 이런 논의가 생기고, 요나서의 역사성을 인정한 사람 중에서 요나의 흔적이 나타나야 하는 데 그렇지 않기에 8세기의 요나와 요나서의 요나가 다르다고 한 사람도 있다. 역사적으로 요나는 미궁 속에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왕하 14:25에 요나가 하나님의 은혜로 국토를 회복했음을 말한다. 우리는 요나를 왕하 14:25과 욘 1:1의 인물을 동일시 한다. 요나는 여로보암 2세 시대의 선지자였고 8세기 선지자가 분명하다. 여로보암 시대 때 활동을 한 선지자는 요나 외에 호세아, 아모스가 있고, 남쪽에서는 이사야, 미가가 있다. 아모스와 요나는 거의 같은 시기의 사람이나 선지서의 정황상 요나가 조금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아모스도 요나와 거의 같은 시기인 여로보암 2세 때에 활동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요나서의 문체는 역사서와 유사하다. 우리가 요나서를 선두주자로 볼 경우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엘리야의 선포 메세지는 심판과 남은 자이다. 이것을 엘리사가 이어 받았고 그는 구원을 선포한다. 엘리사 다음에 밀접한 사람이 바로 요나이다. 왜냐하면 엘리사의 예언이 실현된 때가 바로 여로보암 2세 시대이다. 요나 선지자의 메세지는 하나님이 선포한 역사 계획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미래를 말한다. 앞으로 이스라엘에게 행할 하나님의 계획을 추가적으로 요나를 통해 말한다.
이것은 논리적 설득력이 약하다고 보나 요나의 나레이티브(narrative) 스타일의 의문이 해결된다고 본다. 더 나가기 전에 요나서는 매우 간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순종-니느웨 사람의 회개이다. 혹자는 선교적 관점에서 이방에 최초로 선교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요나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요나의 경험은 한 선지자의 경험에 국한되고 마는 것인가? 엘리야를 그 당시 한 개인사건으로 보는 것으로 그치겠는가? 아니면 이것을 확대하느냐에 따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성경을 우리는 신약을 통해서 확대해 보아야 한다. 마 12:39절을 보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이 내어 쫓기며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활동을 보여 주는 데도 바리새인들은 바알세불을 언급한다. 이때 예수님의 답변이 마 12:29절이다. 지금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 지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뜻으로 된다고 할 때 바리새인들은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한다. 이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말한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자신이 3주야를 땅 속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요나의 표적이다.
투 세메이온 = 표적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을 나타내는 이적적 성격과 함께 표적의 중요성은 그 의미가 그 사건 자체에 국한되지 않고 상징성을 가지게 된다. 그 사건을 넘어서 다른 것을 가르치는 요소가 표적의 중요한 뜻이다. 그러므로 표적은 상징성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요나가 겪은 일은 하나의 표적인 것이다. 요나의 사건은 그 자체보다 그것을 넘어 다른 것이 있다. 그러면 이 표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다음에 예수께서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 말하는데 이어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말고 눅 11:30절에 보면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고 말한다. 여기보면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부활만 가르치지 않고 그 당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표적을 언급한다. 즉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었다. 요나는 앞으로 일어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르칠 뿐만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에 대해서도 표적을 가졌다. 요나 사건을 한 선지자의 경험된 사건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은 얼마나 풍부하고 심오하게 하고 정확하게 하는 것이다. 요나서가 그 단적인 예이다. 성경을 자주 보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드러난다.
왕하 14:25에 보면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의 메세지를 선포하는 선지자로 요나를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긍휼을 베푸시고, 이스라엘은 외적으로 유례없는 번영이 허락되었다. 요나에게 또 다른 계시가 임했는데 그것은 큰 성읍 니느웨에 가서 그들에게 크게 외치라고 했다. “그들의 악이 하나님께 상달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선포하라고 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요나는 이상하게도 좋아하지 않고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보여진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망 간 이유를 모르겠다. 8세기 선지자라 하면 앗시리아가 어떤 나라인가를 아는 자이다. 앗시리아는 기회만 있으면 팔레스타인을 침공하려고 했던 나라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할 때 좋아라고 가야 할텐데 도망갔다. 요나가 도망간 이유가 분명치 않다. 왜 요나는 앗시리아를 쳐서 선포하라는 말을 어기고 도망했을까? 선지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한 이유는 4장 2절에 나타난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 메세지의 결과가 구원과 긍휼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겨 구원을 선포하게 한 것을 체험한 사람이 요나이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에 선포하라고 할 때 그는 하나님의 긍휼을 직감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이방에 대한 혐오감인지 근동 지방의 제국세력 앗시리아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것을 싫어하였는지 가늠하기 어려우나 요나는 앗시리아가 하나님의 긍휼받는 것을 싫어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제국세력이라는 것 때문일까? 앗시리아의 도덕적 타락 때문인가? 이스라엘의 심판의 도구로 심판할 나라는 앗시리아이다. 그 앗시리아가 싫어서일까? 요나의 그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표적만 아니고 그 당시 사람에게도 표적이 된다. 이 요나는 니느웨 사람에 대해 표적을 갖는다. 또한 요나는 당시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표적을 갖는다. 바로 요나는 당시 이스라엘의 축소판이었다. 요나가 겪은 것도 요나 개인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겪은 역사적 체험의 축소판이요, 예표였다. 요나를 통해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을 본다면 요나가 다시스로 도피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어떤 상황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부름 자체의 목적은 세상 민족의 축복의 매개 역할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사명이 왜곡되어 이스라엘은 이기적이고, 국수주의적으로 변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왜곡됨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 나라와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매개의 역활을 져버렸다. 이방의 빛을 꺼버리는 직무유기로 이방인의 눈에 보인다. 요나의 도피는 선지자의 직무를 유기하고 도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이 얼마나 왜곡되었는가는 아모스를 통해서 알 수 있다.
1장 4절에 보면 요나가 다시스로 피해 도망가는데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파선할 정도가 되었다. 요나 사건이 개인 경험에 그치지 않고 상징적 뜻을 가진다고 처음부터 밝힌 이유는, 처음부터 상징적으로 해석을 품고 요나의 개인 사건 이야기 안하면 전체 사건의 이해가 힘들기 때문이다. 바다의 폭풍은 전 세계의 정치 혼란의 대격변기로 설명한다. 단 7:2-3에서 “네 바람이 큰 바다에 불어서 큰 짐승 넷이” 나갔는데 이것은 앞으로 4강대국 등장을 말한다. “바다”는 바로 정치의 무대를 말한다. 이것은 바로 정치 혼란을 통해 4열강이 생긴다는 뜻이다. 이것은 앞으로 앗시리아라는 큰 세력 등장으로 고대 근동이 들끓고 수 많은 나라가 멸망할 것을 말한다. 산헤립 때의 랍사게가 히스기야 왕에게 와서 자기 손에 망한 나라를 말한다. 이것은 요나 때문에 이방 선원들이 피해를 입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심판을 위해 앗시리아를 세웠는데 이 앗시리아로 인해 열방들이 끌려 들어가는 것이 선지서에 다 나타난다.
1장 5절 이하에 요나는 폭풍이 부는데도 배 밑으로 들어간다. 이는 이방의 어려움을 무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 의지를 관철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 받는 것이 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이 이러하다.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배 밑으로 들어가 영적 깊은 잠에 들어간다. 이방 선장이 깨워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한다. 이방인에게 깨우침을 받은 요나의 모습은 로마서 1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방을 구원하는 것이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폭풍 속에서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걸린다. 이방인이 요나에게 죄를 자백하라고 한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민족 출신을 고백하게 하고 자신을 소개하게 한다.
10절 이하에서 요나의 말을 듣고 이방인이 근심하게 된다. 요나의 직업이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알고 이 재난을 모면할 길을 묻는다. 요나는 자기를 물에 던지라고 한다. 이때 요나를 구원하려고 힘껏 배를 젓는다. 이런 대조를 하나님이 표현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요나는 배은망덕하고 무정한 사람이다. 이스라엘로써 이방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얼마나 배은망덕하고 무자비한 일인지 모른다. 요나를 구원하려는 노력이 수포가 되자, 요나를 던지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확인 한 후에 행한다. 이방인의 경건과 요나의 무정함과 불경건이 대조를 이룬다. 바로 이 재난은 이스라엘로 말미암은 것이다. 요나를 바다에 던진 것은 이스라엘의 죽음과 심판을 의미한다.
그 구체적인 형태는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한 폭풍이 일고, 앗시리아로 말미암은 정치적 폭풍 속에서 이스라엘이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으킨 정치적 폭풍 속에서 이스라엘이 던져질 것을 암시한다. 결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망한다. 이방은은 요나를 던지고 바다가 잠잠해지자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상이면 범죄대로 그 결과가 없으나 하나님을 보고 이방인이 두려워할 것임을 요나를 던짐을 보고(이것은 이스라엘을 던지는 것) 깨닫는다. 정치적 소동 속에서 이스라엘은 던져지고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게 되고 여기에 이방도 함께 포함된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3일 동안 있게 된다. 신약에서는 3일 동안 예수님께서 죽음의 영역에 계심을 말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한 후 2-3일 지나서 구원할 것을 선포한다. 바로 2-3일은 이스라엘이 죽고 삶에로 연관된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연결되고 이것은 또한 이스라엘의 죽고 삶에로 2-3일이 연결된다.
2장에 들어와서 물고기 뱃속에 삼킨 자체를 요나가 생각하기를 어떻게 보았을까?
물고기 뱃속은 보통 음부의 뱃속으로 해석된다. 이스라엘이 열방의 전쟁 속에서 던져짐을 당하는데 이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것이 죽음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과 가인의 추방이 죽음의 본질을 암시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죽은 상태에서 하나님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은혜를 간구해서 뭍으로 토해내어 진다. 죽음의 영역인 바다에서 삶의 영역인 뭍으로 나온다. 이스라엘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체험을 물고기 뱃속은 상징한다. 이것은 또한 부활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이 3년 동안 앗시리아, 바벨론에 망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고 신자에 있어서도 옛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변화, 마지막날 부활까지 연결된다.
3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했다. 앗시리아를 멸망하려는데 구원 선포를 요나에게 말하신 하나님을 보라. 요나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증거하라 했을때 처음에 도망갔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후 재차 사명을 받은 것은 죽음의 맛을 본 새 이스라엘이 살아나서 이방에 복음 전달자가 됨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 헬라나라로 오심을 말할 때 예수님은 십자가 부활 후에 그곳에 복음 증거가 되리라고 한다. 이것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심판 메세지를 들은 니느웨는 왕과 백성이 금식하고 회개한다. 하나님이 이들의 회개함을 보고 이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하나님께서 재앙의 뜻을 돌이켰다. 이것이 못마땅해서 요나는 4장에서 기도한다.
4장에서 요나는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았다. 니느웨의 회개와 하나님의 긍휼이 요나는 싫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요나의 국수주의적 편협한 민족주의에 대해 하나님은 박넝쿨을 예비하여 시들게 함으로 요나의 이기심을 지적하신다. 요나는 박넝쿨이 있을 때 좋아하나 이것이 없어지면 죽겠다고 한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선지자 요나와 하나님의 긍휼이 대조를 이룬다. 요나는 박넝쿨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하나님은 지적하기를 박넝쿨이 있다가 없어지는 것은 아까와 하면서 사람의 생명의 존엄성을 알지 못하는 요나를 책망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은 두 가지를 지적하시는데 요나의 이기심과 하나님의 긍휼을 보게 한다. 요나는 이기심으로 박넝쿨을 아까와 했으나 하나님의 긍휼과 대조시킴으로 요나의 잘못을 깨우치신다.
이것은 결국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허시고 모든 민족에게 확대되는 복음을 예표한다. 이 예언의 모토가 요나서에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편애로 이스라엘이 선택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이스라엘의 담을 넘어 이방인에게 확대되어 하나님의 긍휼과 관심이 계심을 여기서 말한다. 조심할 것은 하나님의 보편적 관심을 없애고 적당히 기독교가 도덕적 종교로 되는 것은 위험하다. 사망을 전하지 아니하고, 가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나님의 보편적 관심을 사회적 관심에 대한 것과 혼동치 말아야 한다.

총정리를 해보자. 아까 서두에서 요나서의 메세지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선포하신 이스라엘의 역사 계획을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되 남은 자를 남기시겠다고 하신다. 요나서는 이것을 확대시키고 추가적 요소를 말한다. 예로 이방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나타나고 그것을 실현하는데 있어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을 말한다. 어떤 선지서에 보면 이런 기본 요소가 있다. 이스라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하나 완전한 멸망이 아니고 남은 자를 두시려는 것으로 이해되는 심판이다. 그루터기의 둥지에 새 싹이 나듯이 요나서는 이것을 구체화시키고 확대시킨다. 이 심판은 죽음과 부활을 보여주는데 바다 가운데서 죽으나 하나님께서 마련한 물고기 뱃속에서 죽음을 체험 후 새롭게 변화된 이스라엘이 되어 부활할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한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의 빛으로 이스라엘의 사명을 감당할 것이다. 이스라엘을 통해 이런 일을 이루신 근본 동기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모든 민족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선지서에서 흐르는 사상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남은 자를 남기나 이를 통해 이방이 구원을 얻고 이 구원은 확대되어 보편적 구원으로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방의 구원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선지서의 핵심이다. 역사적 사건에 따라 각도는 틀리나 선지서의 기본 뼈대는 변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면서 선지서를 본다면 선지서의 의도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신약에서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요나가 표적이었으면 이스라엘 자체에 대한 경고이고, 니느웨에 표적이 있으면 요나와 관련에서, 예수님에 관한 표적이 있으면 예수님과 관련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요나서의 말은 큰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심판은 그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스라엘과 이방에 대한 의미를 개괄적으로 말한다.








출처 : 김광석 목사와 함께 하는 성경 공부
글쓴이 : 김광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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