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사상과 삶
1. 칼빈주의 정의
우리는 흔히 칼빈주의는 요한 칼빈에 의해서 전해진 신학사상이거나 그의 창작인듯이 생각하는데, 사실은 칼빈은 이사상의 해설가일 뿐이다. 칼빈주의 사상은 모든 동시대 개혁가들이 가졌던 것이며 이는 어거스틴의 사상이요 더 위로 올라가면 바울의 사상이고 성경전체의 사상이다. 그러기에 칼빈주의는 칼빈이나 기타 개혁가들의 사색에서 얻어진 결론이나, 그 의견들의 집합체가 아니고 하나의 기본원리를 공동토대로 하고 있는 유기적 총체라 할 수 있다.
칼빈주의는 다만 성경의 교훈을 조직적으로 해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인간의 사색된 철학이나 종교가 아닌 참된 복음과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고있다. 칼빈주의는 하나의 포괄적인 성경적 사상체계인데 주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그의 관계로 구분할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칼빈주의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성경에 있는 그대로이다.
칼빈주의의
근본원리는 하나님의 교리에 궁극적 관심을 집중시킨다. 칼빈주의자는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 멈춘다. 칼빈주의자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죄인”임을 깨닫는다. 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단독 사역으로 된 것임을 확신하면서 살아간다.칼빈주의자는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 멈춘다. 칼빈주의자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죄인”임을 깨닫는다. 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단독 사역으로 된 것임을
확신하면서 살아간다.
2. 칼빈주의 교리로서 (5개조)
칼빈주의 5개조는 칼빈주의를 완전히 해석하는 사상은 되지 못한다. 이는 알미니우스(James Armimius)와 그의 제자들이 제시했던 다른 5개조에 반박하기 위하여 교리를 개요하여 “칼빈주의 5개조”를 만들었던 것이다.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자를 알미니안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칼빈주의를 따르는 자를 칼빈주의자라고 불렀다. 본래 칼빈주의자란 말은 불란서에서 카톨릭 신자에 의해 멸시와 천대받던 말로 쓰여졌던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알미니안주의와의 논쟁에서 칼빈주의자들은 스스로를 항의자라고 부르고 알미니우스가 죽은 1610년에 화란정부가 “5개조”논쟁에서벨직신경(Belgic Confession)과 하이델베르그(Heiderberg Confession)신경을 수정 할 것을 요구했다.
그 후 1618년에 화란국회는 돌트총회(Dordt Syond)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1618년 11월에 열리어 154회의 회의를 거듭하며 그 이해인 5월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돌트 총회의 의장은 요한네스 보걸만이었는데 그는 철저한 칼빈주의자로서 화란 칼빈주의 운동의 계보에 첫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었다. 그 회의에서 “칼빈주의 5개조”가 성경 말씀에 입각한 참된 교리란 결론을 얻어 승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흔히 “5개조”의 영문 첫글자를 따서 튜립(Tulip)이란 글자로 요약되고있다.
<1> 인간의 전적부패(TotalDepravity)
다른 말로는 인간의 전적무능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을 떠나서 타락한 인간은 그의 존재의 전체가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졌고 훼손되었음을 가르친다. 타락한 인간은 무엇보다 먼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사역 곧 성령의 도움 없이는 구원을 위한 한치의 걸음도 옮겨 놓을 수 없고 그러한 복음을 자기 스스로가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2>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선택한 것으로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택한 것이다. 이 선택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과 사랑에 의한 것이지 결코 선택된 자의 현재나 미래의 어떤 성품이나 행위때문에 된 것이 아닌 것이다. 인간의 전적 타락과 무능을 확인할 때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이 아니고서는 인생에게 소망이 없다.
<3>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다른 말로는 특수 구속이라고도 한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실제는 선택함을 받은 자만 구원하고 또는 구원받기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바 된 자들을 위한 것이지, 버린 자와는 결코 무관하다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희생의 제물로 죽으셨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며 소명신앙의 궁극적 구원과 영화를 얻는다.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다른 말로는 효과적 소명이라고도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며 인간은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뜻이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는 그들 자신의 악한 요구와 욕망 때문에 영적 죽음의 고통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선택되었으면 확실히 구원받아야 되므로 죄악을 지닌 진노의 자식들이지만 하나님은 그의 극진하신 사랑 때문에 성령을 보내사 그리스도와 함께 그들을 살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믿음의 선물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고 선한 사업을 시작하며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게 하시는 것이다. 이 성령은 성부의 뜻과 즐거움을 이루시기 위하여 가장 효과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역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5>성도의 궁극적 구원과 보호(Perseverance and Presvation fo the Saints)
하나님은
어떤 자를 전적타락에서 구원하시려고 선택하면 그들의 구원과 성결을 증명하기 위하여 효과적으로 그를 부르실 뿐 아니라 거룩한 새 생명과 의와 참된
지식을 보호하실 것을 작정하신다. 우리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께서는 선택받은 자가 끝까지 참도록 보호 격려하는 것이다.
3. 칼빈주의의 역사
칼빈주의 역사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시고 죄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의 계획의 역사이다. 칼빈주의는 무엇보다 진리체계를 하나님의 자증적 계시인 신구약 성경에서 찾는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의 역사는 16세기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경역사에서 찾아보게 된다.
(1) 칼빈주의 원리는 역사 이전에 있었음
칼빈주의 신앙의 역사는 또한 사랑의 역사이다.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세상이 있기 전에 벌써 하나님께서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백성을 사랑하고 가르친 교리를 명백히 알 수 있다.
(2) 칼빈주의와 초기 성경역사
구약의 성경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선택되고 구속함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함을 받은 택한 백성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그 택한 백성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확인하였다. 그것은 택함 받은 사람의 성격때문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구속 행위이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는 창세 전에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그의 계시 역사인 구약을 통해서 그것을 명백히 보여 주신 것을 칼빈주의자들은 깨달은 것이다.
(3) 칼빈주의와 성경이후역사
아담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하나도 빠짐없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택함을 입은 자를 구원하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택함을 입은 자만을 위한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돌트총회와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바울의 저작 중에 있는 몇몇 성경문맥을 인용 언급한 것을 칼빈주의자들이 고스란히 받아들인 어떤 교리라는 인상을 가진다. 하지만 이것은 참된 성경적 사실이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섭리를 이한 것이지 칼빈주의 자들의 교리를 위한 교리가 아닌 것이다.
(4) 후기성경역사와 칼빈주의
어떤 사람들은 초대 교회의 교부들 가운데 어거스틴의 은혜의 교리를 그대로 지나쳐 버리는 모양인데 이교도가 판치고 있던 그 당시에 어거스틴은 보다 높은 통찰력으로 잡다한 다른 교리들을 제치고 이 은혜의 교리를 발전시킨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교부들은 오늘날 칼빈주의에서 독특하다고 생각되는 교리를 부인하기는커녕 도리어 많은 증거를 제시했다.
(5) 종교개혁사와 칼빈주의
밤이 깊을수록 별빛은 더욱 찬란히 빛나듯이 9세기 동안의 캄캄한 암흑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새롭게 복음의 빛은 비추어졌다. 종교개혁의 광명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중세 카톨릭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전승에다 가두어 버린 것이라면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다 교회의 전승을 재해석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종교개혁이란 바로 성경해석의 부흥이요, 칼빈은 종교개혁가일뿐만 아니라 성경해석의 개혁가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 후반기와 17세기초에 칼빈주의는 영국교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 칼빈주의의 영향은 모든 부면에 있어서 의식적으로 개혁파 신학에서만 채용된 것이라고 국한할 수는 없다. 칼빈주의는 17세기 영국교회의 청교도운동의 밑거름이 되었고 영국 침례파 신학의 심장부였다고나 할까. 칼빈주의는 영국이나 유럽대륙에 국한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미국에 간 영국의 개혁자들에 의해 급속히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신학뿐만 아니고 화란 개혁자들 특히 돌트총회 의장을 역임한 요한네스 보걸만은 칼빈주의의 화신이었고 빌더다익, 아이삭 다코스타도 빼 놓을 수 없다.
(6) 후기 종교개혁사와 칼빈주의
종교개혁이후 신학서적 가운데 오고 오는 후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감화력과 영향력을 끼친 것은 역시 칼빈주의자들의 저서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17세기는 신학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 책들 가운데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성전”, 벡스터의 “성도의 영원한 안식 ” 그 외에도 허다히 많다.
종교개혁이래 칼빈주의가 많은 복음적 교회의 신학이 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성경적 충실성과 하나님앞에서 인간의 철저히 부패한 죄악성을 깨닫기 때문이다.
계몽주의 사상과 지적인 발달로 전 유럽 대륙에 칼빈주의에 대해서 쐐기를 박는 새로운 적들이 일어났으니 칸트주의자, 헤겔의 유심론, 맑스의 공산주의, 다윈의 진화론, 모두 인본주의 사상가들이었다. 유럽전역에서 일어난 이와같은 지적사조들은 이른바 “칼빈주의적 도그마의 어두운 쇠고랑에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슬로건을 내어 걸고 성경 하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인간의 깃발을 높이 세웠다. 이러한 몸부림을 저들은 종교에 대한 민주적 행위라고 말하였다. 그뿐 아니라 역사적 칼빈주의 신앙은 과격한 혁명의 지도자들에게 날카로운 공격의 화살을 받았다. 허나 저들은 후에 칼빈주의를 바로 깨우침으로써 저들의 신앙이 얼마나 엉성했는지를 깨닫게 됐다.
한걸음 더 나아가 19세기의 진화론 철학은 더욱 기세를 올려 칼빈주의 가 표방하는 역사적 기독교를 거부하고 사회복음을 옹호함으로 칼빈주의에 대해서 더욱 호되게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인본주의적 유물론적 철학을 통쾌하게 그리고 효과있게 거부하는 신앙이다. 칼빈주의는 영국이나 유럽대륙에 국한되지는 아니했다. 왜냐하면 미국에 간 영국의 개혁자들에게 매우 급속히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7) 현대선교사와 칼빈주의
칼빈주의자는 결코 선교에 무관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주적 하나님과 창조주와 구속주의 하나님을 동시에 믿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불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자칭 고전적 칼빈주의는 아니라고 베이커는 말하기를 “이 체계는 세상이 시작된 이래 인간을 거룩한 것으로 만들어 내거나 인간의 가공할 죄를 송두리채 없애버린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저들은 우리에게 말하되 칼빈주의는 함마와 정으로 인간을 부셔서 새롭게 만든다고 했다. 그 결과가 영원한 것을 견디는 초석이 됐다.”하였다.
(8) 설교의 역사와 칼빈주의
역사를
자세히 보면 위대한 설교가는 모두 칼빈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진리를 위한 영웅들 이란 책을 보면 각 세대별로 가장 우수한 작품32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26편은 칼빈주의자였다. 또한 과거 대복음 설교가라는 책은 24명의 대설교가를 선택하였는데 그 중에 15명은
칼빈주의자들이었고 나머지 5명도 일찌기 칼빈주의적 훈련의 덕이라고 생각된다.
(9) 성경해석의 역사와 칼빈주의
칼빈주의자는 대체로 성경강해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다 아는 사실이다. 칼빈주의 주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매튜 헨리, 존 브라운, 죠성 카릴, 토마스 찰머,찰스 하지, 토마스 만튼 구두원,오원 몰간, 패드락, 풀, 레이놀드거날, 릴, 답, 할렌, 스펄전, 스코트 등 수 없이 많다.
(10) 칼빈주의 운동의 인물고
(A)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
칼빈은 1509년 7월 19일 파리 삐칼텐주 노용이라는 곳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본래 노동자였으나 부지런하고 조직적이고 독립정신이 강해서 노용 감독구 의 서기가 됐다. 그의 어머니는 그 성내에서 신앙의 인물로 존경받는 부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칼빈을 교직자로 만들고 싶어서 12세 때 벌써 그 곳 교회의 신부를 보조하는 목사보에 임명되어 장학금을 받았고 14세 때는 부친의 뜻을 따라 파리대학교내의 말쇄 대학으로 전학했다. 그 이후 몬태이구 대학으로 옮겼다. 이 대학에서 칼빈은 신부가 되기 위해 성경과 스콜라주의를 배우게 되었다.
19세 때 그의 아버지는 신학을 단념하고 법학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다시 이레온 대학에 입학하고 다시 부느제 대학에 전학하였다.
1531년 칼빈은 세네카의 관용론에 관한 주석을 출판하여 학계에 데뷰하였다.
1532년 그는 갑작스런 회개를 경험하였다. 칼빈 자신의 말에 의하면 “너무나 완고하게 이 로마교의 미신에 몸과 몸과 마음을 바쳤기 때문에 그 깊은 수렁에서 빠져 나오기란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갑작스런 회개를 통하여 마음이 완악하기로 누구보다도 더 강하였던 나의 모든 생애를 정복하여 복음을 가르치는 마음으로 불붙게 하였다”고 했다.
1533년 그는 완전히 개혁을 위해서 개혁사상가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1535년 불란서 남부에 있는 스트라스버그로 가서 스위스의 바젤로 가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경건한 호구라인 부인댁에서 투숙하게 되었고 그 집에서 1536년 그의 불후의 걸작인 “기독교강요 제1판”을 라틴말로 출판하였다. 칼빈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불란서의 신교도에게 큰 박해가 일어났음으로 그 박해자들의 잘못을 시정하도록 하자는 뜻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래서 국왕 프랜시스1세에게 보내는 글로 썼던 것이다. 그 때 칼빈의 나이는 26세의 청년이었다. 사실 기독교강요는 사도신겨을 줄거리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기독교 강요”가 오늘날도 개혁교회의 큰 이정표가 된 것은 그 책의 성경에 대한 충실성 때문이다. 성경이 영원히 인간에게 감동과 새로운 빛을 주듯이 성경에 의존하고 성경으로 말미암아 쓰여진 기독교 강요는 우리 프로테스탄트의 영원한 기념비적 저서가 아닐 수 없다.
(B) 요한 낙스(Jhon Knox)
요한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칼빈주의 교회가(장로교회)가 세워진 반석과 같은 인물이다. 브라운에 의하면 요한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역사가요 개혁사상을 가졌던 죠지 부카난과 같은 해인 1505년에 탄생하였으며 두 가정은 상당히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낙스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농부의 아들이다.” 고 그는 말하였다. 그가 태어난 곳은 모르함이란 곳인데 지금의 헤딩톤이라고 한다. 헤딩톤에서 그는 개혁운동의 꿈을 키우고 당시의 구교의식에 대한 비판의식을 기르며 그의 생의 방향을 서서히 결정지어 갔던 것이다. 헤딩톤 소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성, 안드류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거기를 그만 두고 글라스고 대학으로 전학했다. 1522-1545까지는 낙스의 준비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때까지 그의 존재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1544년 그의 직업은 개인교수가 되었다. 1547년 그는 성 안드류성의 수비병들에게 설교하는 설교자가 되었다. 이 성이 1547년 7월에 블란서군에 함락되자 그는 포로가 되어 불란서군의 노예선속에 갇히게 되었으나 영국 정부의 주선으로 말미암아 석방되었다. 그로부터 약 5년간은 에드어드 6세가 그를 로체스타의 감독으로 명하고 궁정목사가 되어 개혁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일이 여의치 않아 거기를 떠나 제네바로 가서 신앙의 망명생활을 하였다. 거기서 요한 칼빈을 만나게 되어 로마 카톨릭의 부패성과 오류를 깨닫고 성경에 근거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훈련을 받았다.
그 후 메리 튜롤이 즉위하자 칼빈의 권고를 받아 독일 푸랑크푸르트에 망명와 있던 영국인들을 위한 목사가 되었다. 그 해가 1554년 11월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에 기도서와 예배문제로 사면하고 다시 제네바로 그곳에 있는 영국인 망명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 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개혁운동을 격려하였다. 영국의 개혁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식의 개혁이라면 스코틀랜드의 개혁은 시민 각자가 칼비주의로 무장한 든든한 것이었다. 낙스는 칼비주의에 근거한 신앙문답서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질 때까지 사용되었다. 낙스는 칼비주의 교리만 작성한 것이 아니고 실제 생활과 부합되도록 만들었다. 1572년 11월에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온 국민은 애도의 정을 표하였다.
(C) 흐룬 봔 프린스터(Groon Van Prinsterer)
흐룬의 생애와 사상은 화란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한마디로 근대 칼비주의 운동의 아버지격이다. 흐룬은 1801년에 화란의 해이그의 귀족가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불란서군의 점령 당시에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스 왕의 주치의로 일했고 후일에는 보건부 장관을 역임하기까지 했다. 그 자신은 라이덴 대학에서 역사와 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거기서 칼빈주의 시인이며 사상가인 빌더다익을 만나고 칼비주의 변증가인 아이삭 다코스타의 향 아래서 칼비주의 사상 체계를 배우게 되었다. 흐룬이 살던 당시의 세계의 상황은 1789년의 불란서 혁명, 나폴레옹의 제국주의, 1812년의 러시아원정, 1812년의 영국과 미국의 전쟁, 1815년 비엔나에서 발생한 불안, 1861-1865년의 미국의 시민전쟁, 1870년 보불전쟁 등으로 충격을 받아 유럽은 정신적 방황기에 있었다. 근대 칼빈주의의 이정표가 되는 흐룬은 벌써 22세에 법학박사와 문학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그는 뛰어난 역사가요 법률가였으며(1823-18227) 빌렘 1세 왕이 다스릴 때 내각의 고문과 내각총무, 그리고 후에는 왕가의 비서를 지냈다. 1828년에 엘리자벳 반델호프와 결혼하였는데 그의 부인은 헌신적인 기도와 봉사로 그가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기틀이 잡혀가고 있었다. 그는 정통교회를 옹호하고 개혁교회에 악영향을 기치는 현대주의를 공격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학교 운동과 교육제도를 확립하였다. 흐룬의 주저인 “불신앙과 혁명”이란 책은 1847년에 쓰여졌는데 이 책은 19세기의 불신앙 배교운동, 유물주의 사상에 쇄기를 박고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갈파하였다. 그 저서에 칼빈의 신학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철저히 가르치고 배울 것을 주장하였다.
(D) 아브라함 카이퍼 (Abraham Kuyoer 1837-1920)
우리가 흔히 세계 3대 칼빈주의 학자를 생각하면 아브라함 카이퍼와 헬만 바빙크 그리고 벤자민 월필드를 손꼽게 되는 데 그 중에서고 카이퍼의 역할과 공신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다재다능한 카이퍼는 한평생 칼비주의 문화관을 확립하는데 몸바쳤다. 그는 1837년 10월 29일 화란 마이루이스에서 아버지 안 헨드릭 카이퍼 목사와 어머니 헨리트 휴버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미들버그의 분법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에 라이덴 대학으로 와서 고전어학과 신학을 6년간 공부하였다. 24세 때 요한 칼빈과 요한 라스코에 대한 연구로 국립학술원의 최고상을 받았다. 그는 개혁주의의 확신에 넘치는 목사로 장성하여 1867년에 우트레이트 대교회의 목사로 취임하여 12년간 목회를 하였다. 그 후에 다시 암스텔담의 왕궁 옆에 있는 대교회를 역임하였다. 그는 신학자와 정치인이기 이전에 20년간을 성실히 강단을 지킨 대목회자이자 설교가였다. 1874년에는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1876년에는 칼빈주의 대학을 창설하고 교수로 취임했으며 교회 개혁의 주도권을 잡았다. 카이퍼는 강력한 지도자, 철저한 개혁자, 불을 튀기는 설교가, 유능한 조직자, 200권이 넘는 책을 저작한 다작가로 정서적이고 행정에 밝은 목회자였고 천재적인 학자, 능통한 언어학자였다. 그는 교의학자인 동시에 정치가였으며 신학교수이자 수상이기도 하였다.
(E) 헬만 바빙크(Herman Bavink1854-1921)
1854년 12월 31일 화란의 호그벤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1921년 6월 29일 세상을 떠난 칼비주의 신학의 거장이자 화란 국민의 사표가 되었던 것이다.
1876년
2년동안 라이덴에서 고전과 문학을 공부하고 다시 캄펜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졸업하였다.그 후 다시 라이덴으로 돌아가 신학공부를
마쳤다.
1880년
약관 26세의 나이로 “쯔윙글리에 있어서의 윤리”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얻었다. 18883년 캄펜 신학교에 조직신학교수로 취임하였다.
바빙크는 역사적인 개혁신학을 전수하기위해 한 평생을 바쳤으며 복음의 빛 안에서 현대문명과 과학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용기를 준 개혁신학자이다.
(F) 끄라스 스킬더(Klaas Schider1890-1952)
1890년 로델담에서 출생한 스킬더 박사는 카이퍼 이후에 개혁주의 노선에 있어서 가장 큰 문화 신학자이며 가장 큰 변증가일 뿐만 아니라 대설교가이자 교회 신문인이며 문필가였다. 그는 신학자이기 이전에 휼룡한 목회자였다.
1919년 29세 되던 해에 프라딩언에 목회할 때 “무엇이 지옥인가” 라는 저서를 저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 책은 개혁파 신학에 대한 변증서였다. 그는 칼빈주의적 신학과 신앙에 대한 변증가로서의 생애였다. 1933년에 그는 캄펨 신학교 교의학교수가 되었다. 1938년 미국으로 가서 강연을 하는가 하면 당시에 나누어져 있던 개혁파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와의 연합을 위하여 힘썼다. 1944년 개혁파 교회에서 나와 자유교회를 세우고 캄펜 신학교를 따로이 세워 노선을 달리하였다. 카이퍼 이후에 칼빈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서 각 분야에 걸친 신학의 가장 위대한 변증가였다.
(G) 요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1703-1758)
요나단 에드워드는 미국의 칼빈주의자요 목사요 신학자요 철학자이기도 하였다. 24세에 목사가 되어 23년간 목회에 전념하였다.
그는 미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지성적인 영향을 끼쳤던 사람이다. 그는 학식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유명한 설교가였다. 그의 사상에 흐르는 사상은 퍽이나 오묘하고 이론적이고 깊었으나 실제로는 누구든지 알아 듣기 쉬운 것이었으며 사람의 심령을 꿰뚫는 강한 메세지가 이었던 것이다. 그의 업적은 뭐니뭐니 해도 대부흥 운동이었다. 이런 대부흥 운동은 마치 영국에 있어서의 복음주의 운동이나 독일에 있어서의 경건주의와 견줄만한 사건이었다.
(H) 찰스 핫지 (Charles Hodgge1797-1878)
미국의 칼빈주의 대 신학자 찰스 핫지는 1815-1819년 사이에 프린스톤 대학과 프린스톤 신학교를 마치었다. 프린스톤의 수재 하지는 그 후 독일로 건너가서 롤룩, 헹스턴벍과 네안덜 등의 당시의 독일 신학의 거목들에게서 신학을 연구하고 그들과 깊이 사귀었을 뿐 아니라 파리, 할례, 베를린 대학 등에서 연구하였다. 그 후 1822년 약관 25세의 나이로 모교의 성경 및 근동문학 교수가 되었다. 28년 동안 한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1840년부터 조직신학 및 신약주해를 가르쳤다. 그는 칼빈주의 신학을 변증하고 성경의 무오를 옹호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의 신학적인 작업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그의 신학적인 틀로 정하고 특히 17세기에 있어서 화란과 스위스에 있어서 칼빈주의 사상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의 필생의 대작은 “조직신학 전3권”이 아닐 수 없다.
구 프린스톤의 초창기부터 반세기 동안을 교수하던 하지는 사상가요 조직신학자요 역사적 칼빈주의 사상을 옹호한 사람이었다.
(I)비.비.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1851-1921)
미국의 위대한 칼빈주의 신학자로 1851년 11월 5일 켄터키주의 렉싱톤에서 출생하여였다. 그는 프린스톤대학과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친뒤 독일로 건너가 라이프취히 대학에서 연구하였다. 그 후 1879년 약관 28세로 웨스턴신학교에서 약 8년동안 신학교 교수로 봉직하였다. 그러다가 1887년부터 1921년까지 모교인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설교학, 변증학, 조직신학을 34년간이나 가르쳤다. 월필드는 그의 선배인 찰스 하지와 더불어 구 프린스턴신학의 대표적인 인물이요 변증가였다. 그는 인상적인 강의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정통적 칼빈주의의 기수며 옹호자였다.
(J) 그레샴 메첸(G. Machen1881-1937)
18881년 7월 28일 발티모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경문답과 요리문답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였으며 천로역정과 초기 프린스턴의 칼빈주의 학자 알렉산더의 책들을 탐독하였다. 1902년에 프린스톤대학에 입학하였고 졸업하고 나서는 마벍대학과 게팅겐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1906년에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신약학 전임강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1913년 메첸은 32세의 나이로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1929년 메첸이 정교수로 취임을 보았으나 총회가 이미 자유주의를 표방하므로 프린스톤을 떠나 동지인 윌슨과 함께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우고 신약교수가 되었으며 교수회 의장을 맡았다. 정통기독교운동의 투사 메첸은 1937년 1월 1일 7시 30분 임종하였다.
4. 칼빈주의 세계관
칼빈주의는 성경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성경적 우주관이다. 또한 그것은 성경적 인생관이기도 한 것이다.
먼저 칼빈주의 우주관을 규정하는 몇 가지 원칙에 대해 생각하고자 한다.
① 우주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원칙이다.
② 하나님의 피조물중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들을 사용하지만 땅은 사람의 아들들에게 주셨다.
③ 인간이 땅위에서 하나님이 될 수 없다.
④ 마귀의 책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인간은 통치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⑥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승리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시작되었으나 인간의 심령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칼빈주의 우주관을 형성하는 적극적인 면을 생각하고자 한다.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중생한 사람은 천국 시민권을 가진 자이다. 이 새로운 삶은 전체적이고 근본적이고 완전하며 충족하다는 단어밖에는 어떤 것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그는 새로이 태어난 사람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사실 이런 사건은 완전히 개인적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중생한 사람은 옛것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존재로 설뿐만 아니라 그의 새로운 생활은 인간사회에 참여하는 생활이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이 명시하는 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새 사람이 새로운 사회를 이룬다고 확신한다.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질서, 새로운 문화,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역사를 이룩하는데 앞장서는 소명과 책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칼빈주의가 어떻게 통일된 사상체계를 제공하는가에 대한 적극적인 대담이 필요할 때가 됐다. 칼빈주의가 국부적 혹은 잠정적인 현상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할 수 있는 포괄적인 원리체계이며 세계관이라는 사실을 말해야 할 것이다.
1)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섬김을 받을 자이며 인간은 피조물이며 섬겨야 할 사람이다. 삶의 출발도 종국도 하나님 앞에서만이 참된 의미가 있다.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은 피조물을 초월하여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인간과 교통하는 것이다. 모든 킬빈주의자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생활의 전체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는 확신이 칼빈주의 근본 사상이 되어 왔다. 세계관으로서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설정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라는 것이다.
2)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다. 이간은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하였다. 인간은 의지도, 감정도, 지성도 죄로 어두워지고 타락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이런 이유로써 칼빈주의는 생활에 대한 민주주의적 해석을 했고 거기서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상으로 칼빈주의는 사회를 변화시켰다.
3)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
세계(세상)를 필요 이상으로 확대시켜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는 잘못된 세계관 때문이다.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은 취소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문화적 사명을 감당해야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세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인간이 땅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땅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처럼 인간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바울이 “만물은 너희 것”이라 한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서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땅을 정복할 문화적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4) 하나님의 통치하는 세계에 있어서의 인간
하나님의 세계 안에 있는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리스도로부터 교회는 능력을 받아야 하고 참된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하나님의 세계 안에 있는 우리는 근신하며 경성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교적 사명과 문화적 사명을 완수하는 충실해야 한다.
5. 칼빈주의와 嶺域主權
흐룬 봔 프린터는 인생의 모든 영역에 있어 서 하나님의 법칙이 있음을 명백히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법칙은 모든 인간의 영역을 그의 주권으로 지배한다고 했다. 영역 주권 사상은 정치, 경제, 종교교육, 예술등 모든 영역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서만 존재하고 그에게 소속되어 있으므로 각 영역은 다른 영역의 권리나 자유를 간섭 또는 침해하지 아니하고 자주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6. 칼빈주의와 휴매니즘(인본주의)사이
인본주의는 바로 인간이 신격화되어진 종교 형태라고 보고 있다. 휴매니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간에 사람을 해방하며 또는 인간성의 존엄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휴매니즘의 사상을 가진 자는 여러 형태가 있지만 스트라우센에 의하면 다음의 공통된 네 가지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① 인간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느 누구에게든 도움을 요청할만한초자연적능력은없다
② 땅위에 사는 이 삶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전부이고 인간이 부단히 흥미를 갖고 있고 도전하는 것은 현실 생활에서 그의 존재의 의미를 갖는 것이지 미래는 없다.
③ 인간이 그의 행동을 지도할 수 있는 어떤 규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자 기 신이다. 즉 그것은 사랑의 규칙인데 이는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④ 인간은 초자연적인 능력의 도움이 없이도 선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인간 자신은 자연과학을 응용하고 경제나 사회적 문제를 통해서 세계의 모든 자원을 발전시킬 책임을 스스로 지고 있다.
이상은 오늘날 휴매니스트들이 갖는 공통된 견해들이다. 이에 반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 성경은 휴매니즘의 사상을 일축하여 버렸다. 칼빈주의는 이교신앙과 진화론 철학의 하루살이 같은 낙관론을 강력히 거부한다. 잘못된 신앙과 신학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휴매니즘에서 나온다.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휴매니스트들도 적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인간의 부패성과 죄를 모르고, 인간을 모르면 결국 이간을 신격화하고 인간 자신을 믿음의 대상으로 하고 하나님을 거부하게 된다. 휴매니즘은 하나님을 거부하므로 그들의 사상의 기초를 삼는다. 휴매니즘의 결과를 단적으로 말하면 ① 절망 ② 인간의 변질 ③ 전체주의적 잔학성 ④ 불결실 등이다.
칼빈주의자들은
휴매니스트들이 버린 그 하나님을 찾아 삶에 대한 의미와 그 목적을 깨닫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휴매니스트들이
캄캄한 혼돈 속에서 구원을 찾는 대신에 칼빈주의자들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 찾는다.
7. 칼빈주의와 선교
칼빈주의는 성경의 포괄적인 사상 체계와 신학 사상을 발견한 요한 칼빈에게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영혼의 구원과, 죄인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시며, 은혜로 구원하며,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그의 뜻에 완전히 복종할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혹자들은 말하기를 칼빈은 하나님이 주권과 영광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칼빈은 구원론에 약한 듯이 말하는 자도 있으나 실제로 영혼의 구원을 강조하는 구원론은 루터나 칼빈에 있어서 다같이 중요한 것이다.
선교의 임무는 교회의 확장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주님의 명령이다. 모든 선교 업무는 구원론적 성격을 가진다. 그것의 주된 목적은 인간을 그리스도와 교통하게 하는 것이다. 칼빈은 오직 성경에 의한 참된 교회관을 수립했고 이런 교회관의 결과로서 선교 사상은 새로운 발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칼빈의 선교 사상은 두 가지 요소를 주축으로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학적인 면과 영혼들을 구원해서 구원의 대열로 인도하려는 구원론적인 면이 있다. 금세기 선교 신학의 대가인 헨드릭 크레머 박사는 신교의 선교 사상은 결코 로마의 카톨릭 교회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고 칼빈과 그 밖의 개혁자들에 의해서 불붙여진 것이라고 못박았다.
선교의
열심은 깊은 경건이 있는 곳에서 일어난다. 구원의 뜨거운 감격이 있는 곳에서 선교 운동은 움트기 시작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운동은
구원의 은혜를 맛 본 사람들에 의해서만 찾아진다.
칼빈주의
선교사상사의 고찰에 대한 결론으로서 칼빈주의 선교 활동은 신학적인 면과
실제로 구원론적인 면의 조화와 통일 속에서 그 정점을 이루게 된 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신학과 선교는 하나에 속해 있으며 이 진리는
우리 시대에 크게 부각되고 있다. 참된 신학이 선행되고야 참된 선교가 가능하다.
8. 칼빈주의와 사회
칼빈주의 의 사회적 역할은 퍽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다. 칼빈주의 원리로 세운 나라치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높이 보지 않는 나라가 없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사회 경제적 문화적 수준이 매우 급속히 발전하고 있음은 매우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1) 칼빈주의와 생명의 존엄성
창세기 9장에 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지시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을 인간의 창조주인 동시에 인간을 존속하며 보호하시는 분으로 믿는다. 왜 생명이 존엄해야 하는가?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 대로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존엄은 하나님에 의해서 보증된 존엄인데 세상끝날까지 그는 우리를 존귀케하고 존엄하도록 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2) 칼빈주의와 법
칼빈주의자들은 시편 기자와 같이 율법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규와 율례로부터 이루어진 정부의 법도 역시 좋아한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가 되었다는 것은 아무 질서나 규율없이 방종해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질서와 법 속에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법도 하나님의 율법의 조명 아래서만 참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세상의 법은 결국 무질서와 방탕과 죄를 낳게 된다.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는 가장 좋은 체제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법을 표준으로 하고 움직일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3) 칼빈주의와 가족 관계
성경에 보면 결혼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으로 정하였는데 결혼의 목적으로 다음의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① 상호 부조하기 위함(창2:18) ② 땅을 정복하고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함(창1:28) ③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자녀를 양육할 것(신6:7) ④ 부도덕을 방지하기 위함(고전7:29) 등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언제나 결혼의 순결을 가르치기를 옹호하기를 힘써 왔다.
가정의 무질서는 바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깨어짐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참된 칼빈주의로 돌아 갈 때 가정도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서게 되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가정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가정에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4) 칼빈주의와 노동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에게 선한 노동을 하도록 만들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행하므로 언제나 선한 노동을 하도록 하였다. 그 노동을 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즐거운 마음을 갖고 하도록 하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참된 일은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엡4:7)하는 일을 가치 있는 일로 간주한다. 참된 예술이나 문화나 생산은 주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야 한다. 참된 노동이 되려면, 노동이 그 본래적 의미를 얻으려면 그 노동이 누가 억지로 억압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기쁜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게 되려면 또는 그 노동이 노동하는 사람에게 만족을 주려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므로 인격적으로 자신을 새롭게 하는 길밖에 없다.
9. 칼빈주의의 교육관
(1)칼빈주의 교육운동의 계보
칼빈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기 전(1538)에 한 초등학교 발기 취지문에서 말하기를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일로 하고 살아갈지라도 좋은 훈련을 거부해서는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배움의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 칼빈에 앞서 쯔윙글리는 “청소년들의 기독교 교육”(1523)이라는 작은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신교의 입장에서 쓰여진 최초의 기독교 교육론이다.
역사가요 정치가인 흐룬 봔 프린스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와 인생의 어두운 부분을 비추이게 하자고 외쳤다. 당시 계몽주의 사상에 있어서 주인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운동에 쐐기를 박고 생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모시는 운동, 기독교인의 소명 영역주권 사상을 강조하므로 기독교 교육을 통한 칼빈주의 운동의 조상이 되었다.
(2) 칼빈주의 교육의 특색과 원리
⒜전체교육 칼빈주의 사상 체계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포괄적이다. 철학적 논리로 생각해 볼 때 이것이냐 혹은 저것이냐가 아니고 이것과 저것이다. 다시 말하면 칼빈주의 교육 이념은 전 우주적이요 삶의 전체성을 강조하게 된다.
⒝ 소명
칼빈주의 교육 이념은 피조물로서 또는 청지기로서 인간의 소명을 강조한다. 칼빈주의 교육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주신 문화적 소명을 강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 안에서 알도록 가르치며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 적용되도록 하며 하나님의 법과 사랑을 실천케 하는 것이다.
⒞ 하나님 중심 사상
칼빈주의
교육 원리는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그 하나님은 아버지시요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자이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가르칠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
안에서 가르침이 가능하고 세계의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Marchel)
⒟ 종교적 존재로서의 인간
칼빈주의 교육은 인간 존재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봐텔 잉크는 인간의 내부에 있는 “종교적 자아”가 육체적 삶을 지배한다고 하였다. 인간의 종교성은 기독교 교육 운동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성경적인 인간론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에도 종교적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과 새 피조물이 됨을 보여 준다.
이상에서와 본 바와 같이 우리는 칼빈주의 입장에서 본 교육 이론의 정립이 시급하며 양보다는 질에, 형식보다는 내용이 앞서 강조되어야 하겠다.
10. 칼빈주의의 전망
오늘날 우리 세대는 과거 로마 시대보다 더 심한 우준에 빠져서 우준한 것을 현명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역사는 현대 지성인들에게 적대시된다. 왜냐하면 역사적 현실은 인류가 점점 선해지거나 낙관주의적인 사상의 어리석음을 그대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하나님을 배제시킨 낙관주의를 배격하게 된다. 오늘날의 청년들과 물질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구호를 신시대와 신질서의 시작이라고 좋아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 스스로는 세워질 수 업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사상이나 철학도 세울 수가 없다.
개혁을 위한 소망
칼빈주의는 교회와 국가, 사회와 가정에 대한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철학적 개념을 설명하였다. 카이퍼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칼빈주의 전망을 내다보았다. 첫째로 칼빈주의는 그것이 존재하는 한 무시되어서는 안되고 그 영향력이 존속하는 한 오히려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칼빈주의는 다른 사람과 다른 세계에 이해되기 위해서 새로이 연구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로 칼빈주의 원리는 시대에 따라 다시 개발되고 인생의 모든 영역에 대하여 철저하게 적용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며, 넷째로 칼빈주주의적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는 용기 있게 그 복음 증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사색에서 나온 논리가 아니고 성경적인 삶의 행동이다. 생명적인 칼빈주의 사상은 이제부터 철저하게 탐구되고 고찰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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