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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회 안에서의 여성

하나님아들 2014. 10. 29. 22:30

교회 안에서의 여성

 

 

 

권동희

 


Ⅰ. 서 론

 


고대의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남성들에 비하여 가정생활에서나 사회적 활동에서 많은 제한과 차별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물론 아직도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엄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다른 시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향상되어진 것도 사실이다. 우리들의 주위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고, 또한 "남녀평등"이나 "여성해방"과 같은 슬로건들이 이젠 그렇게 낳선 것으로 들리지 않는다. 고대 사회에 비하여 여성의 위치가 부상하였고,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달라진 현재, 교회에서도 시대의 역동적인 변화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와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여성의 위치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진보주의적인 교회들은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과제와 위치에 관해서 많은 고려를 해왔고 여성들에게 목사직을 포함하여 공적인 직무를 개방하여야 한다고 결론 짓는다. 반면에 보수주의적인 교회는 여자들에게는 목사직을 포함하여 어떤 공적인 직무들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대립적인 상황에서 어떤 입장이 더 타당한가?라는 문제에 우리가 접근함에 있어 역사적인 접근이나, 사회적인 접근을 시도하기 보다는 성경에 대한 바르고 진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즉 교회 안에서의 여성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이야기 하며, 그 구절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바른 주석적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해답은 성경 안에 있기 때문이다.?

본 고는 이런 필요성에 따라 성경에 나타난 여성에 관한 구절들을 해석함에 그 목적이 있다. 특히 바울의 서신들에 있어 여성의 위치에 대해 긍정적인 구절들과 부정적인 구절들에 대한 바른해석을 시도하려 한다. 이런 목적을 위해 필자는 먼저 고대사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살펴보고, 구약과 예수님의 가르침에서의 여성의 위치, 그리고 바울 서신들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끝으로 이 모든 것 위에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재 정립하고자 한다.

 


Ⅱ. 본 론

 


1. 고대 사회에서의 여성

 


고대 사회에서는 여성에 대하여 매우 비하적인 입장에 서있었다.?

플라톤은 "악한 남성의 환생"이 여성이라고 암시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을 근본적으로 "본성이 결핍된 존재"로 보았다. 그래서 여자는 잘 웃고 쉽게 성내고 질투하고 또 불평이 잦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리스 철인들의 여자에 관한 이러한 생각은 초대 교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터툴리안은 여성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문"이라하여 여자의 사악하고 나쁜 점을 극명하게 묘사하였다. 어거스틴은 여자는 남자와 함께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형상을 발휘할 수 있고 남자없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질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은 여자는 남자가 있어야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존재가치를 가진다는 말이다.?

6세기의 보에티우스는 여자를 "시궁창 위에 세워진 성전"으로 비유했다. 바깥의 외모는 성전같이 깨끗이 단장되어 있으나 속은 시궁창과 같다는 말일 것이다. 중세에는 여성이 육체만의 존재가 아니라 불멸의 영혼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부들이 남성과 여성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이원론적인 개념을 극복하려 노력하였으나 그도 역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파악한 데 있어서는 별다른 점이 없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대로 고대 사회에서의 여성들은 많은 남성들에의해 멸시와 천대로 대하여져왔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여성들은 단지 갖고 노는 노리개나 또는 섹스의 상대, 급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요리사, 주부, 보모, 아니면 이성적 토론 같은 것에는 끼어들 만한 능력도 없고 두뇌도 없는 멍청이 쯤으로 흔히 대접을 받아왔던 것이다. 여성의 재능들은 평가를 받아보지 못했고, 그녀들의 개성은 질식되었으며, 그녀들의 자유는 축소를 거듭해 왔고, 어떤 분야들에서의 여성들의 직업은 착취를 받아왔으며, 기타 분야에서는 거부를 당했다.?

 


2. 성경에서의 여성

 


2.1. 구약에서의 여성

 


고대 사회와는 달리 구약성경 안에서의 여성들에 대한 언급은 매우 변호적이고 호의적이었다.?

구약성경은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언급하며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존재임을 설명한다. 남자와 여자는 성의 구분은 있지만,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동일하게 하나님의 복을 받았고 동일한 책임을 위임받은 존재이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 라.

 


뿐만 아니라 여성은 남자와 결혼하여 한 몸을 이루는 동등한 존재이다.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외에도 여성들은 언약 공동체의 일부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남자와 아이들과 함께 공적으로 읽는 토라를 들었으며 예배에도 참석하였다.?

 


(신31:12) 곧 백성의 남녀와 유치와 네 성 안에 우거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로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선한 아내들에 대한 능력은 칭송되었으며, 한나,룻,에스더처럼 경건한 여인들은 칭찬을 받았다. 사사시대에는 여 선지 드보라가 활동하였으며,(삿4장) 요시아왕 때에는 여선지자 훌다가 있었으며, 모세의 누이 미리암 역시 여선지로 불리워졌다.?

이처럼 동등성을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창2장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의 창조 기사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는 창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남성과 여성 즉 아담과 하와를 동시에 창조하지 않으시고, 먼저 아담을 만드신후 아담의 돕는 배필이라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나중에 하와를 창조하셨다.?

 


(창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 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요컨대 하와는 아담과 동등한 인격을 가졌지만 아담에게 복종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아주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배필"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돕는 자이심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했지만, 서로를 섬기는 관계를 묘사할 때도 사용되었다.

이와같이 성경은 여성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남녀의 동등성 그리고 아내로서의 돕는 역할등에 대해 먼저 언급한다. 많은 구약 성경 구절들이 동등성과 여성의 복종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지지하고 있다.

 


2.2. 예수의 가르침에서의 여성

 


이 주제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할 때, 우리는 먼저 예수께서 여성들과 함께 보내신 시간과 또 그분께서 분명히 당시의 남성들과는 현저하게 대조가 되는 친교를 여성들과 나누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성을 소유물의 하나로 보았던 헬라와 로마, 유대의 문화 속에서 여성들을 사랑하셨고 존중히 대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청중들 속에 여자를 포함시키셨고 뿐만 아니라 가르침 가운데에 그들이 친밀함을 느낄 수 있는 예화들과 이미지들을 사용하셨다(마13:33/ 22:1,2/ 24:41/ 눅15:8-10). 또한 예수께서는 특별히 자신의 가르침을 여자들에게 적용시키셨다(마10:34-42). 예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으로도 간음한 것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여성은 단순한 성적인 대상이 아님을 보여 주셨다(마5:28). 또한 창조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둘의 동등성을 인정하셨다(마19:4). 부활 때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고 말씀하셔서 미래적 종말론의 현재적 측면에서 적용할 때에 그 동등성을 강하게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마22:28). 유대인들은 자기의 아내나 딸, 혹은 자매일지라도 길거리에서 여자와 말을 주고 받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상종하려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여인과도 대화하셨다(요4장). 또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친절하게 대하셨다(요8장). 부활하신 후 먼저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고 자신의 승리의 복음을 맡기신 것이 바로 여인들이었다(요20:1-18)

여성들을 대하신 이와같은 예수님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셨고, 그들이 알지 못했던 방법으로 긍휼을 베푸시고 존중하셨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도 남성을 지배하는 위치에까지 여성들을 올려 놓지는 않으셨다. 그분이 선택하신 열두 제자 중에 여자는 한 명도 없었으며, 심지어 십자가 사건 때 대부분의 제자들이 도망치고 여자들은 신실하게 남아 있었지만, 예님은 남성들을 쫓아버리고 그 자리를 여성으로 채우시는 일은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그릇된 가치관이나 사고 방식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셨으며 여성들의 동등성과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셨지만 그들을 남성을 지배하는 위치로까지 부상시키지는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

 


2.3. 바울 서신에서의 여성

 


바울의 서신들에 나타난 여성에 관한 주제에 대한 접근방법으로는 바울 사역을 도왔던 여성들에 대해 살펴보는 것과 여성들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구절들에 대한 주석적 접근이다.?

 


2.3.1. 바울 사역에 동참했던 여성들

 


바울 사역에 동참했던 여성들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은 아굴라의 아내 "브리스길라"가 대표적인 예이다. 브리스길라는 남편과 함께 바울의 전도 사역에 계속 동참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린도와 에베소, 그리고 로마에 있는 그의 가정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유니아"는 바울보다 먼저 기독교인이 되어 바울과 더불어 일했으며, 바울과 함께 옥중에 갇힌 동료 죄수였다. 바울은 유니아와 안드로니고를 가리켜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는 자"라고 부르는데(롬16:7) 이에 대해 벵겔과 다른 학자들은 유니아도 넓은 의미의 "사도" 라고 불리울 수 있다고 주장하며 박윤선 박사나 찰스 핫지도 이 해석을 지지한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여인에 대하여 바울은 "복음에 함께 힘쓰던 자들" 이라고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여인들이 "글레멘드와 그외에 나의 동역자들"과 함께 일하였다고 언급하였는데(빌4:2-3),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여성들이 빌립보 교회 안에서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로에"는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안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바울에게 전해 준 사람으로(고전1:11) 그녀는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중간에서 협력했던 크리스챤 여성들 중에 하나였다.

"뵈뵈"에 대해 바울은 그녀가 겐그리아 교회의 제직 중에 하나였으며, 또한 그녀가 "여러사람과 나의 보호자"였다고 언급한다(롬16:1-2). "보호자"라는 헬라어 낱말은" ...앞에 서 있는 자"를 뜻한다. 고대 헬라 문헌에서 이 낱말은 종종 "투표장 감독관"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이 낱말은 또한 "보호자", 또는 "후원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낱말이 "종교 단체의 직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즉 이 낱말은 대제사장, 서기관, 관리인들, 그리고 "수탁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명사를 여성형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선례를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고있는 용어를 해석함에 있어서 뵈뵈가 교회와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롬16:2절에서 바울은 뵈뵈가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했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녀를 "보호자" 또는 "후원자"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바울 서신에서 바울의 복음전도 사역과 목회 사역을 도운 많은 여성들이 존재하지만, 필자는 그들 중에서 대표적인 여성들만 살펴보았다. 위에서 살핀 점들을 미루어 볼 때 바울의 주변에는 그와 더불어 복음전도 사역에 힘써 협력하던 여성 "동력자"들이 많이 있었고 바울은 그들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협력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단순히 물질적 지원이나 봉사에 국한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위에서 살핀대로 그들은 바울의 전도와 복음 사역에 협력하는 "동역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초대 교회의 실제 역사를 통해 밝혀진 이런 자료들 속에서는 여성들의 신분과 역할을 부정적으로 평가절하하거나 제한하려고 하는 어떤 암시들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남자와 여성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음을 선언한다.

 


2.3.2. 여성에 대한 바울의 본문들

 


여성에 대한 바울의 본문들을 다룸에 있어 우리는 먼저 자료에 대한 결정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학자에 따라 그 자료의 저자에 대해 이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필요상 필자는 몇가지의 구절들(딤전2:11-15/ 엡5:22-24; 골3:19/ 고전 14:34-36/ 갈3:27-28/ 고전 11:2-16)을 선택해서 다루려고 한다.?

 


⑴ 딤전 2:11-15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1-15)

 


이 구절은 교회 내에서 여성의 역할과 활동을 제한하는 것으로 보이는 바울의 가장 결정적인 구절들이며 또한 역사적으로 그 해석도 다양하다.?

Furnish는 여자에 관한 이 구절에는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은 없으며, 이와같은 내용은 헬라파 유대인에 의해서, 또는 아담과 이브에 관한 언급을 빼고는, 바울 당시의 세속적인 도덕가에 의하여 쓰여질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 구절은 헬라 가치관 관습과 유대인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그것이 남편과 아내라는 특정한 관계보다는 남자와 여자의 일반적 관계를 문제를 삼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일반적인 남자들과 여자들에 관계가 있기 보다는 남편과 아내에게 특별히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바울 서신에서 "남자"( )와 "여자"( )가 각각 50회 이상 사용되는데, 이들 대부분이 남편과 아내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이 구절과 평행을 이루는 딛2:45, 벧전 3:1-7절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명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복종"은-"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일반적인 여자들에 관계되기 보다는 특별히 아내들에게 관계된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아내가 어떤 사람에게도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금지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어머니가 자녀들을 가르치고(딤후3:14-15), 나이 많은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을(딛2:34) 허용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여기에서 여성들에게 금지하려는 것은 아내로서 마땅히 복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우월한 복음의 지식을 가지고 남편들을 가르치고 주관하려는 태도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⑵ 엡5:22-24, 골3:18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5:22-24)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3:18)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쌍둥이 서신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그 내용과 순서, 그리고 구조에 있어서 유사하다. 본문은 앞선 교리적인 진술들에 이어서 나오는 권면들의 한 부분으로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반드시 작용해야만 하는 상호책임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일반적인 여자들이 일반적인 남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아내들이 그들의 남편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을 교훈한다.

 


⑶ 고전 14:34-36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전14:34-36)

 


이 본문의 바울의 저작성을 부인하는 견해들이 있어 왔지만 이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논점들은 여자가 누구이며, 34, 35절의 "말하는 것"은 무엇이며, 본문의 상황은 어떤 것인가?라는 것들이다.

본문의 고린도에서의 문맥은 고린도 교회 내의 문제들을 다루는 중에 공예배의 무질서를 지적하며 영적 은사들의 정상적인 사용 방법을 지시하는 구절이다. 특히 고전 14장은 방언의 은사보다 예언의 은사가 탁월하다는 것을 제시하며(1절), 교회의 예배 가운데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할 것을 지시하며(26절), 질서가 있어야 할 것을 지시한다(40절). 그러면서 여자는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명령을 하고 있다. 이 여자는 35절에서 남편에게 물어야 하는 여자, 즉 아내로 나타나며, 아내들이 남편이 있는 교회에서 나서서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지시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여자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한 것은 교회 내에서 어떤 일에나 침묵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명령이 아니다. 이 일이 금지된 것은 단지 그 일들이 품위아 건덕 상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며, 그가 의도한 것은 남편들이 예언의 메시지를 토론하거나 평가하는데 그런 일에 가타부타 끼어드는 태도나 논쟁적인 태도를 보이지 말고 집에 가서 조용히 남편에게 문의하고 배우라는 것이다.

더욱이 본문의 바울의 명령은 교회 내의 일반적인 상황에서 적용되는 명령이기보다는 공중 예배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 공중 예배에서 신령한 부인은 남편에게 복종하는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고 공중 예배 석상에서 예언의 말씀에 대한 남편의 판단이나 평가를 뒤집거나 부정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남편들 위에서 "심판자"처럼 행동하는 일을 하지 말고, 예언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거나 물을 것이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들에게 배우라는 것이다. 35절에서 바울의 목적은 아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편들을 향해 권위를 잘못 행사하는 일을 방지하는 것이다.?

 


⑷ 갈3:27-28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7-28)

 


바울의 서신 중에서 갈라디아서는 당시 팽배하던 인간의 노력에 의한 구원이론 들에 대한 기독교의 자유 헌장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교회 안에서는 모든 자들이 일체이며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위대한 선언이다. 본문은 그러한 위대한 선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퍼니쉬는 본문에서 바울이 교회가 세례식에서 사용하던 전통적 증언을 인용하거나 또는 암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같은 신앙고백문이 롬 10:12, 고전 12:13, 골 3:11에도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은 모든 세상적인 차별의 장벽이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즉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이 구절에 나타난 구절들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는 마지막 네 번째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이미 26절에서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또 이어서 2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선언한다. 이어지는 본문은 모든 형태의 차별이 폐지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28절은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 그결과 우리 모두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그리스도로 옷입거나 아브라함의 씨가 되는데에는 구별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본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등하게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아브라함의 씨로서 상속자들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 안에서 남녀의 구별이나 차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본문의 욧점이다.

 


⑸ 고전 11:2-16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에 대한 본문에 대해 이제까지 다양한 해석이 주장되어 왔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여성이 모자나 수건을 쓰는 것이 참된 신앙을 나타내주는 표시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는 고린도 교회 여성들의 행습은 당대의 문화적 패턴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여성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같은 주장에 대해 성경 본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필자는 ①여성그룹의 성격 ②머리됨의 의미 ③머리에 무엇을 쓴다는 의미등으로 나누어 본문을 해석하고자 한다.?

① 여성그룹의 성격: 본문에서 바울이 예배시에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한다고 권면할 때, 그는 도대체 어떤 여자들을 염두에 두고 교훈하는가? 그는 남자와 여자의 일반적인 관계를 토론하는가,아니면 남편과 아내의 특정한 관계를 토론하는가? 본문에서의 여자란 일반적인 관계를 염두해 둔 용어라기보다는 남편과 관계를 맺고있는 아내로서의 여성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용어상 본문의 남자와 여자는 바울 서신에서 각각 50회와 54회 정도 사용되었는데, 대부분이 일반적인 남자와 여자를 지칭하기 보다는 남편과 아내를 가리킨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하여 "머리"라는 말을 쓸 때 일반적인 남녀 관계에 적용하기 보다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자주 적용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문제는 바로 예배시에(14:23,26 참조)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역할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② 머리됨의 의미: 바울 당대에 있어 "머리"라는 용어는 사람의 육신적인 머리, 권위를 지닌 사람, 또는 어떤 것의 기원을 의미할 수 있었다. 바레트와 부르스,죤 스타트 등은 본문의 머리됨은 권위라기 보다는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에 "기원"의 의미를 적용하기 보다는 "권위"를 적용함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다는 뜻의 문장으로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본문이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바울의 평행구적 표현은 아주 어색해 질 뿐만 아니라, 1세기적 상황에서 머리에 베일을 쓰는 문제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된다는 사상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리고 11장의 전후 문맥에서도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권위 문제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10절)

③ 머리에 무엇을 쓴다는 의미: 본문은 흔히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머리에 다른 것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고, 때로 다른 학자들은 여자의 긴 머리가 얼굴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그녀의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머리에 쓰는 것이 어떤 형태로 실해외었든지 간에 바울의 여성관을 살펴볼 때, 주목할 수 있는 것은 7절과 11-12절일 것이다. 7절에서 바울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 말한다. 창세기에서의 형상과 모양이 여기에서 형상과 영광이란 말로 대치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에 대해서는 형상이라는 말을 반복하지 아니하고 영광이라는 말만 되풀이 한다. 더 나아가 바울은 11절에서 여자의 창조 양식이 남자에게서 났고(8절), 여자의 목적이 남자를 위한 것이지만(9절), 남자와 여자 두 성은 상호 의존적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질서가 "주님 안에서"의 질서임을 지적하여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며 상호 의존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바울은 남성이나 여성의 우월성이나 권위를 말하기 보다는 상호 의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Ⅲ. 결 론

 


필자는 이제까지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고대사회에서의 입장에서와 성경, 특히 구약과 예수님,바울 등의 입장들을 살펴보았다. 이 모든 것을 다룸에 있어 그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없다"(갈3:28)는 것이다. 남녀는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남녀 모두다 존귀한 가치를 지닌다. 여기에는 열등과 우등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맡은 바 직임을 감당함에 있어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이미 구약성경 전체와 예수님의 교훈, 그리고 바울의 교훈에서나, 그의 사역에 동참했던 여성들의 역할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교회는 아직도 여성의 교회의 위치에 있어 개방적이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 여성을 동역자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참 고 도 서>?

 


Bengel, J. A. Bengel's New Testament Com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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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교회에서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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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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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교회론(New Testament ecclesiology)을 다룰 때 주로 에베소서에 나타난 교회의 메타포인 머리이신 예수님과 몸인 성도를 중심으로 자주 논의되어 왔다. 혹은 투영(transparency)의 원리를 적용하여, 예를 들어 ‘마태교회’(혹은 마태공동체, the Matthean community)와 같은 특정 공동체의 모습을 찾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 여기서는 바울 서신을 중심으로 여성의 교회에서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논의를 좁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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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와 2세기의 속사도 시대와 변증가들의 시대에 복음이 광범위하게 전파된 것은 여성의 공헌에 힘입은 바가 컸다. 현대에도 교회에서 여성의 사역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활발하고, 사실 이런 능동성이 요청되는 시대다. 여성의 교회에서의 역할은 네 가지 견해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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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적인 견해(traditional view)로서 여성의 목회활동 즉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권위를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으로 교회와 가정 안에서 하나님은 원래부터 기능적인 위계질서(functional hierarchy)를 부여해 놓았다는 것이다. 즉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받았기에 존재론적으로는 평등하나 기능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다. (하나님에서 기인하는)기능적인 불평등은 열등성을 필연적으로 의미하지 않는다(고전 11:3: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구절이 성자가 성부보다 열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325년의 니케아신경이 밝히듯이 동일본체 [homoousios]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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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성지도적 견해(male leadership view)는 전통적인 견해와 비슷하나 적용에서 약간 다른데, 여성의 부분적인 목회 참여 즉 공중 예배 때 기도나 성경봉독, 집사직분 혹은 교회 사무직을 남자 담임 목사의 관할 하에 허용하는 입장이다. 대부분의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의 입장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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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원적 목회 견해(plural ministry view)에 따르면 모든 성도는 어떤 면에서는 모두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데 목사 안수제도 때문에 이것이 실현되지 않았기에 목회 안수제도를 없애버리면 여성의 목회 참여는 아무 문제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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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등주의적 견해(egalitarian view)는 다원적 목회 견해와 비슷한데, 여성의 전반적인 목회 활동 권리를 주장한다. 성별에 따른 리더쉽이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이 제한 받을 직분은 없다. 남녀는 상호 복종(mutual submission)해야 한다. 혹자는 전통적인 입장에 서있는 (1)과 (2)를 지지하면서 주장하기를, 위의 (3)과 (4)의 입장은 성경의 영감성에 대해 잘못된 자세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자세한 것은 석기현, 1996:370-372를 보라). 이 평가는 과연 정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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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여성신학을 잠시 살펴보자. Elizabeth Sch?ssler-Fiorenza로 대변되는 여성신학적 해석이 중요시하는 이념은 그 동안 여성이 부당하게 억압되었던 사회구조나 관념을 극복하고 여성의 지위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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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한다: (1) 여성의 특수성과 주체성을 인정하여 여성을 독립된 존재로 이해하고 존중한다. (2) 여성의 인간적 존엄성과 권리를 왜곡하는 문화적 편견과 오류를 배격한다. (3) 여성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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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학적 성경 해석이 성경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인다: (1) 성경 자체는 그렇지 않은데 성경해석자가 성경을 여성의 존엄성과 권리를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의미로 해석하였다고 보는 입장. (2) 성경 자체가 여성 억압적이라고 보아 여성해방적 기반은 성경에서 나올 수 없다고 보는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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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학적 해석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포함한다: (1) 성경본문의 가부장적 (patriarchal)이고 억압적인 요소를 발견하여 비판하면서 새롭게 해석한다. (2) 여성 긍정적인 본문을 찾아서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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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급진적인) 페미니즘(radical feminism)이 교회와 신학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계하고 우려해야 할 형편이다. 그리고 이들이 주장하듯이 성경에 마치 오류가 있다는 식의 주장은 수용할 수 없다. 그리고 여성 안수와 같은 예민한 문제가 한국 교회에 이슈가 되고 있고, 앞으로 보수교단에서는 이 문제를 계속해서 덮어둘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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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나 이슈의 중심에는 교회가 성경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주석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전통이 성경을 지배할 것인가, 아니면 성경이 바른 전통을 세우도록 할 것인가? 이것을 염두에 두고 몇몇 논쟁적인 본문을 다루고자 한다. 이것은 앞으로 진지하게 다루어져야만 할 중요하고도 민감한 이슈이기에, 어떤 특정 결론을 도출하는데 초점을 두기보다는, 주석에 근거한 논의만 개략적으로 시도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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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딤전 2:9-15절에 나타난 교회에서의 여성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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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2,000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이 성경주석에 미치는 영향을 실감한다. 딤전 2:9-15절은 성경 전체에서 여성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금지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이것은 또한 창조 질서 즉 남자가 먼저 되었고 여자는 그 후에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호소하여 어느 정도 여성의 ‘종속성’을 명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본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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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의 본문은 여성이 머리에 무언가를 써야 한다는 것을 명령하는 고전 11:5절이다. 만일 성경 66권 중에서 단지 딤전 2:9-15절에만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가르치는 사역을 금지하는 주장이 의존해 있다면,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며, 여성의 사역을 권하고 있는 바울의 다른 구절과 상충되기도 한다. 이 이유로 딤전 2:9-15절의 1세기 당시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상황을 조사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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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 2:9-15절은 고전 11장처럼 공중기도를 할 수 있는 여성들의 권리에 대해 언급하는 것 같다. 이 사실은 딤전 2장 1-8절이 남자들의 기도를 언급하고 있는 사실로부터 분명해 진다. 딤전 2:1-2절은 통치자들을 위해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도시 안에서의) 공적 기도를 할 것을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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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AD 66년까지 성전에서 로마황제의 건강을 위한 기도가 드려졌다. 그 해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하자 이 기도는 중단되었다. 이런 종류의 기도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중요했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해로운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며, 더 나아가 평안한 가운데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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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은 ‘또 이와 같이’'라고 말함으로, 바울은 이제 여자에게도 공적인 기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고전 11장과는 달리 딤전 2장에서는 여성이 교회에서 침묵할 것을 명령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여성의 공적인 기도에 대해 권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해 볼 것은 남자들의 기도 보다 여자들의 기도에 바울이 더 세밀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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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은 에베소에서 행해진 여자들의 공중 기도에 무언가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이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복장과 관련된 것이고(딤전 2:9), 다른 하나는 가르침과 관련된 것이다(딤전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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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여성의 복장에 관해 먼저 살펴보자. 여기서 바울은 최신의 유행하는 옷을 금하고 있다기보다는, 이성의 눈길을 끌기 위한 (야릇한) 옷이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사치스럽게 치장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 같다. 2세기 이후의 유대 선생들은 특정한 장식품을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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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비 아키바(Rabbi Akiba)는 남편이 아내 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했을 경우 이혼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 말은 아내는 ‘남편만’을 위해 화장과 치장을 할 수 있다 혹은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유대인 중후기 선생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에게 데려가기 전에 하와의 머리를 땋아 주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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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는 고귀한 인격뿐만 아니라, 육체의 아름다움을 미덕으로 여겼다. 헬라 작품들 속에는 키가 크고, 진하고 굵은 눈썹, 그리고 하얀 피부에 금발을 미인으로 보았다. 때로는 통통한 볼을 첨가한다. 여성의 아름다움이 미덕이기는 하지만,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름다움 때문에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성적 범죄의 도구가 될 수 있던 금이나 다른 장식으로 남자를 유혹하여 타락으로 인도한 경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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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바울 역시 과도한 사치와 장식의 문제점을 성적인 부정과 연관시켜 지적하고 있다. 아마도 디모데가 목회를 하고 있었던 에베소의 교회는 일부 부자들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시대의 말로 한다면 야하고 값비싼 사치-명품을 주렁 주렁 걸치고 BMW를 타고 교회에 오는 여자들을 가리킨다(참고. 벧전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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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참된 장식으로 선행을 딤전 2:10절에서 제시한다. 아름다움은 인격과 삶에서 나오기에, 복장은 정숙해야 한다. 옷은 단정하고 유혹적이지 않아야 하지만, 영혼은 풍성해야 한다. 바울은 복장 문제로 여성이 남성보다 문제를 더 일으켰기에 여성을 대상으로 권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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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장의 문제를 넘어, ‘여성이 가르치는 것에 대한 문제’는(딤전 2:12)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 바울은 여자가 종용히 배울 것을 부탁한다. 남자들을 주관하는 것 즉 남자들에 대해 권세를 취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이 권면도 바울 당시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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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침묵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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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당시 일부 회당에서는 여자가 회당장과 같이 지도적인 역할을 한 곳이 있기에 모든 경우에 여성이 침묵을 요청 받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공중 예배 중에 여성의 침묵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갖기 전에 일단 침묵으로 배워야 했음을 말한다(비교. 고전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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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당시 어떤 선생은 제자들에게 도덕적인 훈련의 한 형태로 침묵 훈련을 시킨 적 있다. 바울이 의도한 것은 여성이 배워야 하지만, 부적당하고 어리석은 질문으로 전체 회중에게 방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종용히 배우라는 말은 먼저 경솔히 말하지 말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라는 경고일 수 있다(참고. 행 15:12; 21:40;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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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여성이 예배 중에 무조건 그리고 영원히 조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침묵에 대한 권면은 딤전 5:13절에 암시된 에베소의 특수한 상황과 연관된 듯하다. 그 당시 많은 젊은 여성들이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 어리석은 말을 하고 가르치는 일을 일삼고 있었다. 사실 ‘침묵’이란 용어는 정중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나 조용한 행동을 언급한다 (참고. 딤전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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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바울이 남자를 다스리려는 권세를 여성에게서 빼앗으려고 하는가? 여기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딤전 2:12). 바울은 여성이 남성에 대해 권세를 부리는 방법으로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타락한 후 창 3:16절 (“...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자들이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권세를 횡포하여 지배하고자 하는 사실에 바울이 호소하고 있다. 여성이 교회에서 남자들을 주관하는 것을 금지하는 바울의 권면은 디모데가 목회를 하고 있던 1세기의 에베소 교회에만 제한되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교회,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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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에베소 교회에게만 특정적으로(ad hoc) 적용되는 권면이 아닐까? 이런 잠정적인 결론은 아주 민감한 부분이다. 마치 여성의 목사안수를 지지하는 결론처럼 보일 수도 있고, 여성주의자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신학적 검토는 더 있어야 하고, 최종 결정은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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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 남자가 가장으로 다스리듯이 교회에서도 그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남자가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아마 교회 밖의 사람들은 여성이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일을 수행하고자 했던 여성들로 인해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아마 여성의 가르침을 금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에베소의 많은 잘못된 가르침이 여성을 통해서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거짓 선생들(주로 남자)이 거짓 교훈을 퍼트리는 통로 역할을 했는데, 이것은 여성의 교육이 미비했던 점을 악용한 결과이다. 바울은 먼저 여성이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먼저 배우기를 원했던 것 같다. 여성이 충분히 배운 후라면 가르침을 허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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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 2:13-15절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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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남자를 주관하여 가르칠 수 없는 이유는 아담이 하와보다 먼저 지음 받았고, 아담이 아니라 하와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기 때문이다. 유대 랍비들은 하와의 최초의 범죄를 신랄하게 비난한다. 딤전 2:13절에서 말하는 이브는 하와를 가리키지 여자 전체를 가리키지 않는다. 창세기에서 하와가 아담의 갈빗대에서 나중에 창조되었다고 하여 아담에게 종속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아담의 갈빗대 즉 동등성을 강조한다. 바울은 창세기의 문맥을 그대로 사용하여, 여자의 종속성을 말하지 않을뿐더러, 여자 전체가 남자보다 더욱더 유혹에 잘 넘어가고 범죄를 잘할 것이라고 보편화시켜 말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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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가 범죄했을 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경고를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남편 아담에게서 받은 후 였다. 하와는 가르침을 아담에게 의존했다. 여기서 유비가 있는데, 에베소교회의 여성들도 남자에게 성경 지식을 의존했다. 또한 하와가 쉽게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에베소 여성들도 거짓교리에 쉽게 넘어갔다.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하와처럼 유혹에 빠져 범죄할 수 있기에 에베소교회 여자들은 조심하고 가르치지 말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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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구절인 15절의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무슨 의미인가? 여성이 정절, 믿음, 사랑, 거룩으로 산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 중 일부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유는 이것이 행위구원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출산을 겪어 내는 여성들을 언급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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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구원함을 받는다”는 말은 문맥상으로 볼 때 죄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키기보다는 “아이를 낳는다” 혹은 “안전하게 극복하다”라는 의미로 쓰였다(출 14:13, 30; 1 마카비 4:25; 솔로몬의 시편 16:5 등). 하지만 바울은 그 어디서도 “구원함을 받는다”를 출산(아이를 낳는다)을 통해 구원함을 받는다는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세상에 누가 출산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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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과 창세기의 하와 사건에 호소한다. 먼저 바울 당시의 문화적 배경에 호소하는 것을 살펴보면, 사실 바울의 독자가 출산과 관련하여 구원을 이해하는 가장 자연스런 방식은 ‘안전한 분만’을 연상하는 것이다. 고대에는 출산 과정에서 산모가 죽은 경우가 지금 보다 더 허다했기에 출산을 관장하는 아데미 여신을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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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우리는 바울이 암시하는 창세기의 하와 사건에 주의해 보아야 한다. 하와의 범죄는 ‘고통스런 출산’이라는 ‘저주’와 직접 연결된다(창 3:16). 바울이 출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저주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도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혹은 우리(여자)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저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에베소교회의 여성들이 구원을 얻을 길은 정절, 믿음, 사랑, 그리고 거룩으로 사는 길이다. 물론 이것은 ‘아직 아니’ (not yet)의 측면을 가지기에 저주로부터 온(완)전한 구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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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출산’의 이미지를 통한 구원의 설명과 ‘종용히 배우라’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여성은 가르치기 전에 경건한 삶을 통해서 말씀을 먼저 배워야한다는 말씀인가? 아니면 에베소 여성도가 하와가 받았던 저주로부터 경건한 삶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가르칠 자격을 갖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말씀을 배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탁상공론이 아닌 삶임을 강조하는가? 에베소의 여자 성도가 출산의 고통스런 저주로부터 구원받는 길은 그들의 정절과 믿음 그리고 거룩과 사랑의 삶이다. 이런 경건한 삶을 통해서 먼저 말씀을 배우라는 말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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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에베소교회의 여성이 침묵과 가르침을 삼가야 했던 이유는 여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재대로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우리시대에 적용해 본다면, 설령 남자라 할지라도 제대로 말씀을 분별할 수 없다면 가르치기 전에 먼저 종용히 배워야 함을 교훈한다(딤후 2:15).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행 2:18절을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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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정규례 (House Codes): 엡 5장 21-22절의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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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5:18절-6장에는 에베소 교회를 구성하고 있던 아내, 남편, 주인, 종, 자녀를 향한 바울의 권면이 나오는데 이것을 가정 규례 (the house code)라고 부른다. 로마제국의 사회체제와 도덕을 위협한다고 비난을 받았던 단체들은 자신들만의 가정 규례를 만들어서 자신들은 로마제국에 해로운 단체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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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당시의 기독교는 사랑과 자유 그리고 황제 대신에 그리스도를 섬기고 따른다고 가르쳐왔기에 마치 로마 제국을 파괴하고 사회에 해로운 집단으로 비쳐졌다. 따라서 바울은 이것은 오해이며, 에베소 교인들이 사회관계 속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야 했다. 엡 5:18-33절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성도의 가정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교훈한다. 21-22절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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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씀의 문맥을 살펴보자. 엡 5:18절의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으로부터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주는 가정에 관한 권면이 출발한다. 더 직접적으로는 21절의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명령에 기초해서 남편과 아내에게 주어진 권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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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당시 1세기 여성의 위치를 살펴보자. 남편과 아내의 상호복종을 강조하는 바울은, 왜 남편의 복종보다 아내의 복종을 더욱 분명하게 다루는가? 바울 당시의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예수님 중심으로 바르게 잡기 위해서이다. 바울 당시까지만 해도 많은 남자들은 여자들이 도덕적으로 남자들보다 더 연약하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는 “남자들의 용기는 명령할 때 나타나지만, 여자들의 용기는 순종할 때 나타난다”라고 말했다. 유대인들은 여성에 대해 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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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대 선생은 “옷에서 생기는 좀 (moth)처럼 악이 여자들로부터 생겨나므로 남자는 여자들 사이에 앉지 말라”고 했다. 더 나아가 “남자의 악은 여자의 선보다 낫다”고 했다. 랍비 유다는 “이방인, 촌뜨기, 그리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라고 기도했다. 바울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했으며 아내의 수입은 모두 남편에게 넘겨주어야 할 법적 책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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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가정을 너머 가게에서 일할 수 있었다. 필로는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거의 지각이 없이 태어난다”라고 했다. 남편은 단지 음식과 집을 제공해 줄 의무만 지니고 있었고, 아내는 집안 일과 남편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할 의무가 있었다. 여성을 낮추어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참고로 이스라엘에서는 남아선호 사상이, 헬라 세계에서는 여자 아기를 버리는 관습(the practice of exposing baby girls)이 있었다(참고. Kroeger, 2000: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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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로마제국의 이상적인 여성상은 헌신적이고, 온순하고 남자들 앞에서 수줍어하면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었다. 여성의 임무와 수행은 남편에 의해서 충실한 가정 노예로 인정받을 뿐이다. BC 1-2세기의 이집트의 결혼 계약서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한다는 특별 조항을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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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조항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조항보다 선명하지 않았다. 로마의 가정 규례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방법에 초점을 두지 않고 아내를 다스리는 방법에 초점을 둔다. 이런 일방적인 남편 중심의 사회와 관습에 바울은 피차복종을 기치로 내걸고 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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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남편과 아내가 피차 복종해야 한다는 문맥에서 아내들을 향하여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말한다. ‘복종하다’라는 말은 군대 용어인데 부하가 상관에게 순종하는 것이며 자신의 의지나 권리를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바울의 상호복종은 아내의 복종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그 당시의 유대인의 상황이나 로마제국의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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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예수님의 교회를 향한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근거로 해서 부부의 상호 복종을 언급한다. 따라서 남편의 지나친 권위주의적인 자세와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 남편의 아내를 향한 사랑은 기독론적인 사랑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교회를 향한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아내는 가장으로서의 남편의 권위와 책임성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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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이므로 한 몸이 되었기에 공통의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협력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의 삶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권세 때문에 상호 복종해야 하고, 상호복종을 위해서 먼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 충만한 남편, 아내에게 복종하는 남편은 권위 있는 남편이요, 아내에게 복종을 받는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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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주님께 복종하고 주님과 바른 관계가 유지되고, 성령 충만한 아내는 남편의 복종을 받게 된다. 남편과 아내의 피차 복종은 주님을 향한 복종의 한 부분이다. 24절에 아내는 ‘범사엷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범사엷라는 말은 주님을 섬기는데 일치되는 모든 생활의 영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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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적용해 보자. 바울의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은 더 이상 여성이 '방콕'하고 조용히 있는 것을 이상적이거나 미덕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현대는 교회와 직장, 사회에서 특정한 역할을 감당하는 아내의 활동을 인정한다. 하지만 성경은 아내의 우선적인 활동의 장은 가정이라고 한다. 아내가 아무리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직장이 자녀의 신앙교육과 남편에게 복종하는데 지장이 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이 사실을 딛 2:4-5절에서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함이니라.” 성령 충만한 피차복종으로 가정 천국을 이루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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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전 11:2-16절의 여자가 교회에서 머리에 쓰는 것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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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과 관련된 본문을 다루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여성의 교회에서의 역할을 장려하기 위해서 이고, 두 번째는, 1세기와 21세기의 상황의 차이를 정당하게 다루어야만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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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의 여성도가 공적인 예배 모임 중 특히 기도나 예언을 할 때 머리에 무엇을 쓰는 외적인 품행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현대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대개 예배 중에 모자를 쓰는 것을 예의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최고 어른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이기 때문이다. 이미 로마제국 시대에도 이런 관습이 있었다. 하지만 개혁교회의 전통은 오히려 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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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여성도는 아름다운 테가 있는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렸다. 1세기의 바울은 고린도 교회 여성도에게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예배드릴 것을 권면한다. 요즘도 유대인 남자들과 천주교의 여자들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기도하고 미사를 드린다. 이처럼 복음은 하나이되 복음이 표현되는 방식에 있어서는 다양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고전 11:2절 이하에 나타난 여성도의 머리에 무언가를 쓰는 것을 알려면 바울 당시의 관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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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말하는 머리에 쓰는 것은 얼굴전체를 가리는 베일(face-veil)이라기보다는 머리카락만 덮는 숄(Shawl)이다. 15절의 ‘peribolaion’은 베일(veil)이라기보다는 망투 (cloak)나 숄을 끌어 당겨 머리 위에 덮어씌우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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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대중 앞에서 머리에 숄을 덮어 쓰는 이유에 관한 몇몇 설명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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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 당시의 여성의 활동의 場은 주로 가정에 제한되었기에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했다. 유대인의 한 지혜문서에는 “처녀는 자물쇠를 꼭 채운 방안에 두고 지켜라. 그렇게 하여야 결혼식까지 집 앞의 어느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라고 기록한다. 사실 로마제국에서 어떤 남편은 아내가 베일을 가리지 않은 채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는 것을 이유로 아내와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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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망 있는 여성은 대개 남편과 함께 있을 때에만 자신을 드러내 보여야 했으며, 남편이 없을 때에는 자신을 숨기고 집안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다. 이렇게 여성의 활동을 주로 가정에 제한한 이유는 여성이 다른 남성에게 너무 매력적으로 보일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 이유로 어떤 유대 랍비는 여성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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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대의 창녀들은 주로 머리를 풀어 다녔고, 기혼 여성들은 머리에 무언가 쓰고 다녔다. 때때로 유대인들에게 풀어헤친 머리는 여자 귀신들의 특징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고전 11장에서 여성도가 머리에 무언가를 써야 한다고 말한 이유를 창녀나 음란한 여자와 구별되는 정숙한 몸가짐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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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리스의 여성들은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은 채로 예배에 참석했다. 반대로 로마 (남자 사제들과) 여성들은 희생제물을 드릴 때 머리에 무언가를 쓰야 했다. 그러므로 고전 11장을 기록한 바울은 로마의 관습을 염두에 두고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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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반적으로 몸이 노출되는 것은 머리가 노출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여자들이 머리를 풀어놓는 것은 헬라와 유대 전통에서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임과 동시에 남자의 정욕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머리를 늘어뜨린 채 대중 앞에 나서 자신을 드러내거나 남자와 시시덕거리는 행동으로 비난을 받았던 유대 여자는 결혼 계약에 명시된 위자료도 받지 못한 채 이혼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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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1994:22)은 고전 11장을 설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만일 여자들이 자기들의 머리를 드러내고 머리카락을 보이는 일을 허락받게 된다면, 그들은 결국 자기들의 젖가슴을 드러내도록 허락받게 될 것이고 마치 그것이 선술집의 쇼나 되는 것처럼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말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무감각해져서 어떤 겸손이나 부끄러움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가정 밖에서 수로보니게 여인과 대화를 나누신 예수님의 모습은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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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주장들이 있어왔지만 고린도 교회에서 여자들이 머리에 쓰는 것에 대해 확실하게 설명해주는 주장은 없는 것 같다. 따라서 고전 11:2절 이하의 바울의 논증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성도가 기도나 예언을 공중 예배 중에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섬김이나 예배 중에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말이다. 롬 16:7절에서도 바울은 여자 성도를 하나님을 섬기는 동료요 심지어 사도들과 같이 귀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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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전 11:3절 이하에서 4가지 이유를 들면서 여자가 머리에 숄을 쓰야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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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기엷 숄을 쓰야만 한다(11:3-6). 3절에 보면,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 이 머리가 가리키는 바는 ‘근원’, ‘영광’, ‘존귀’, 혹은 ‘리더’(leader)라고 볼 수 있다. 남자와 여자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8절은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고 한다. 사실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만들어 졌다. 바울 당시의 고린도 교회에서는 여자가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거나 머리를 미는 것은 자신의 육체적인 머리뿐 아니라, 자신의 머리인 남편에게도 치욕을 가져다주었다. 좀 더 확대해서 설명해 보면, 가정의 명예 특히 가장의 명예를 세워주기 위해서는 대중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아내의 옷차림이 남편을 불편하게 한다면 그 옷차림을 그만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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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조금 다르게 설명해 보자. 바울은 11:7-12절에서 여자가 머리에 무언가를 써야 할 이유를 ‘창조질서’에 호소한다. 창 2장에 보면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기에 남자의 형상을 반영한다. 물론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 옷차림이 정숙한 아내는 남편의 명예를 잘 드러내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아내는 영광을 훼손한다. 그리고 아내는 예배 시에 남자의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면 안 된다. 여자가 머리에 씀으로써 예배 중에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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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전 11:10절에 보니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두어야 한다. 여자의 옷차림 특히 머리에 쓰는 것은 천사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창조 질서의 수호자인 천사도 예배에 참여한다는 사상이 바울 당시에 있었고, 천사도 남자처럼 여자들에 의해 성적인 유혹을 받았다는 유대문헌의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은데 바울이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설명은 추론에 불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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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전 11:14절은 ‘본성에 호소하면서’ 여자들이 머리에 써야 한다고 설명한다. 여자가 긴 머리를 가지고 있고 머리에 써는 것을 덮고 있다면 본성에 맞다는 것이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 반대로 성전환 수술을 받거나 옷차림을 통해 성구별을 무시하는 것은 본성을 거슬리는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남자들의 복장 역시 예배를 방해 할 수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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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는 남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거나 여자가 머리를 짧게 깎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즉 바울은 인간의 본성을 사회적 관습과 연결시켜서 여자들의 합당한 옷차림을 언급한다. 고린도의 여성도는 여성으로서 합당한 옷차림을 준수해야 했다. 남자의 남성다움과 여자의 여성다움은 예배 가운데서도 지켜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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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전 11:16절에서 바울은 그 당시의 교회의 일치된 ‘관습과 규례에 호소함’으로 여자의 머리에 써는 것을 주장한다. 즉 고린도교회가 일치되게 따르고 있는 바를 존중하면서 여자는 기도나 예언을 할 때 머리에 써야 한다고 한다. 바울은 그 당시의 체제를 지킬 의사가 없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본성,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상호 의존성에 호소하면서 예배 중에도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 지켜져야 할 것을 가르친다. 즉 바울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는 것을 논하면서 여성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제한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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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의 적용: 현대 교회의 예배에 여자가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온다면 남자들뿐 아니라 동료 여성도에게도 피해를 줄 것이다. 남자 성도가 비키니나 여자 치마를 입고 온다면 역시 문제다. 이것은 우리의 교회의 관습과 창조질서에 맞지 않다. 그리고 아내가 비키니를 입고 교회에 온다면 머리인 남편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 되고 만다. 여성은 교회에서 머리에 쓰는 것뿐 아니라, 지나친 몸치장을 통해서 자신을 과시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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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든 여자든 예배시의 성적 호소를 하는 복장을 통해 남의 시선을 끌어서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의 모든 신앙의 방식은 남을 고려할 줄 알아야 한다. 너무 진리 안에서 자유함으로써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어서는 곤란하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신앙의 자세가 필요하다. 실족케 하는 튀는 신앙 습관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외적인 복장 문제로 본질인 예배와 섬김이 손상을 입어서는 안 된다. 본질인 예배와 섬김은 정숙한 외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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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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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여성이 목회자로 안수받는 것에 찬성하지 않지만 우리 모두는 여성의 교회에서의 역할 문제는 전통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해석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주로 핵심 이슈는 바울 서신의 교훈이 바울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영구적인 진리인가의 문제다. 이것은 속단할 사항이 아니기에, 앞으로 정당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더 세밀하게 본문의 문맥과 역사적인 상황을 먼저 고려한 후 우리 시대의 상황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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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신학. 2004년 5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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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하며 목회하기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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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역할이 과거에 비해 괄목할 만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기업을 이끄는 여성뿐만 아니라 여성 국회의원, 장관, 총리, 대통령도 이제 낯설지 않다. 교회 안에서도 여선교회의 적극적인 활동이 남선교회를 압도하고 있으며, 남성들과 비교할 때 여성들은 조금도 미흡하지 않은 지도력을 보이고 있다. 또한 연합감리교는 여성을 성직자로서 남성과 동등하게 안수하며, 여성의 영적 지도력을 잘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교단들은 여성목사안수가? 성경적이지 않다 며 거부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으며? 성경적이다 라는 한마디로 그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여성의 동등한 지도력을 인정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일부 교회가 여성의 영적 지도력을 쉽게 용인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지극히 현실적인 성경해석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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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표적인 구절이 고린도전서 14장 35절,?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한 대로 여자들은 복종해야 합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십시오. (표준새번역성경, 2001) 또한 고린도전서 11장 5절에서 여자가 공적인 자리에서 예언하고 기도하기 위해서 머리에 너울(수건)을 써야 한다는 기록이 근거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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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두 구절을 읽어보면 여성들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느낌이 든다. 과연 그러한가? 먼저 11장의 너울 쓰는 단락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 여성의 지도력을 교회 안에서 금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바울의 의도는 여성이 교회의 공적인 자리에서 예언하고 기도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린도교회에 여성의 영적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불만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반대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여성의 영적 은사를 인정하도록 권면하는 내용이 이것이다. 견해가 다른 두 그룹을 어떻게 화해시켜 제3의 길을 열어낼 것인가? 여기서 바울은 여성이 머리에 너울을 쓰고 영적 은사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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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여성의 발언권(지도력)을 막는 고린도전서 14장의 구절과 전혀 상반된다는 결론이 그것이다. 바울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성서본문 비평(다양한 성경 사본에 대한 비교연구)에 의하면, 14장 34-35절은 사본에 따라서 현재의 위치에 있기도 하고, 14장 40절 뒤에 오기도 한다. 많은 학자들은 11장과 상반되는 입장을 근거로, 또 구절의 위치가 사본에 따라 다르다는 점, 그리고 루디아와 같은 여성이 바울의 전도과정에서 적극적인 지도력을 발휘했음을 들어, 34-35절이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여자들이 잠잠해야 한다는 것은 바울의 공식적인 견해라기 보다는, 교회가 가정교회의 영역을 넘어 그리스-로마 사회의 공식적인 종교로 자리잡아 가는 과정에서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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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설사? 여자가 잠잠해야 한다 는 말이 바울의 것이 아니라 해도 우리가 신앙의 규범으로 삼고 있는? 성경(정경) 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므로 여성이 교회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전히 성경적이라고 하는 주장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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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성서신학 전반의 문제로 확대되는데, 신앙의 근거로서 신약과 구약이 포함된 정경(canon)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선, 성경 안의 많은 규범이 제시되고 있는데, 크게 보면 구약의 것과 신약의 것이 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은 우리들이 즐겨 먹는 돼지 삼겹살이나 오징어 볶음은 절대 먹어서 안 되는 부정한 음식(레위기 11장)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게 먹고 있다. 이유는 고린도전서 8장과 10장(10장 25-26절)에서 바울이? 마음이 약한 자 들의 양심을 위해 우리 자신의 자유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어떤 음식이든 부정한 것은 없다(8장 8절, 10장 25-26절)고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태복음 15장 11절, 마가복음 7장 15-16절)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 (마가복음 7장 19절)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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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지침으로, 삶의 중요한 전거로 사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의 본문이 직접적으로 상호 충돌하는 교훈을 줄 때, 성서전체를 통해 그 교훈을 찾아야 한다. 또한 신, 구약의 갈등지점에서는 일반적으로 구약을 신약의 빛으로 조명하게 된다. 가끔 한국 기독인들은? 동방의 유대인 으로서 자부심을 말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즉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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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위의 경우처럼 신약 안의 구절들이 상충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자는 잠잠해야 한다 는 구절은 고린도전서에 있고, 이것은 신약에 속한다. 신약 안의 구절을 임의로 취사선택하여 버릴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이런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말씀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본문을 둘러싼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이 최종적인 신앙의 지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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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여성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으셨는가? 어린이들이 그에게 가까이 오도록 허락되었듯이, 예수님의 사역 현장에서 여성의 역할은 간과될 수 없다.? 마리아 란 이름이 대표적인 예이다.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 허락되었고(누가복음 10장 38-42절), 베다니에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막달라 마리아를 두고 주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억되어야 할 것(마가복음 14장 9절)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예수께서 체포된 후, 남자 제자들이 다 도망갔을 때, 부활을 첫 번째로 목격한 여성의 이야기가 더욱 중요한 깃점을 이룬다. 그들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등 세 여인이었다. 이 세 여인은 천사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직접 듣고, 숨어있는 남자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는 명령을 받았다.(마가복음 16장 7절) 여성의 지도적인 역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복음서의 기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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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잠잠해야 한다 는 구절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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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성경적 이지는 않다는 것을 이렇게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초대교회가 성장하면서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문화에 순응하고, 사회구조 속에서 채택되고 재생산된 주장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주신 영적 은사가 남자들의 것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여성의 영적 지도력은 적극적으로 긍정되어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세워 가는 데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고린도전서 12장 12-13절)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은사를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 쓰신다. 서로을 위한 존경과 겸손은 그래서 교회를, 그리고 가정을 풍성하게 건강하게 세워 가는 귀한 덕목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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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덕 목사, 언약교회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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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변천에 따라 부과되는 여교역자의 역할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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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21세기를 수년 앞둔 지금 시대는 한마디로 혼란 속에 있다고 하겠다. 종교 다원주의와 뉴에지 운동로 한때 가치관의 혼돈을 야기시키더니 요즘은 교회일치 운동과 페러다임이라는 이슈로 떠들석하다. 이렇게 급변하는 사회 및 변화에 교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하는 문제는 계속되어왔다. 그러나 벼화되는 사회만큼 교회는 실질적으로 대응하지 못한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아직도 구시대적인 것만을 최고인 만양 고수하려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로 남자와 여자의 성차별이다. 남성우월주의나 가부장적인 전통에 익숙한 한국교회는 여자의 역할을 제한할 뿐 아니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러한 실태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특히 여교역자로서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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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본론

1. 설교

목회활동에 있어서 어느 특정분야의 중요성을 특별히 부각시킬 수는 없으나 현 교회의 상황을 볼때 주일예배가 전체 교인들의 공동체 인식을 확인하는 기회이므로 여교역자가 전체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라면 주일 낮 예배시 설교하는 기회가 주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교역자는 공동인 위치에서 교인과의 연계성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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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심방

교회내에서 심방의 기능이나 그 역할의 중요성은 인정되지만 남성들도 해내야만하는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감성적인 여인에게 더 적합한" "조금은 구질구질한 일" 롤 간주하며 부목에게는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심방다니는 일' 자체가 별 중요한 일로 인식되지 않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심방은 참으로 중요하다. 특히 여교역자의 역할은 교회 내에서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본다. 자애로운 어머니가 자녀를 희생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처럼 교회 안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목회자의 사역 가운데출생, 회심, 직업, 결혼, 질병, 죽음 등의 긴급한 사역에 여교역자의 역할은 남교역자의 역할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한 가정에서 어린아이를 출산하는 일은 교인과 다정하게 친교해 오는 목회자라면 의당히 관심을 집중시키는 하나의 위기적인 체험인 것이다. 격렬한 회심은 설교나 부흥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나 원만한 회심의 경우 여교역자의 사랑스런 돌봄 안에서 결정적인 회심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자를 돌보는 경우와 죽음 등에 여교역자의 역할에서 보다 효과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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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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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전하느 전도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생활속에서의 전도의 시대이다. 주일예배에서 선포되어진 말씀이 실제 생활에서 한 주간 동안 신자들을 통하여 구현되고 있는가를 직접 현장에 뛰어 들어가 지도, 감독자가 되어 확인하는 책임이 여교역자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전도의 필요성이 강단에서 설교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하고 저도의 기술을 교육시키며 결과를 확인하는 일은 여교역자가 더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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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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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일반적인 경향은 신자들이 목회자를 찾아와 괴로운 개인문제를 가지고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가 적다. 좋은 일이 있으면 감사헌금을 내며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바라고 있지만 좋지 못한 일이나 괴로운 일은 자기 자신이 조용히 해결하기를 원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또한 상담을 하더라도 신앙문제가 대부분이다. 이는 교인들이 교회내 상담은 신앙문제만 국한하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의 가정이나 개인 생활에서 겪는 문제를 쉽게 목회자들에게 털어 놓지 않는데, 그원인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교인들이나 교역자들은 신앙생활과 실제생활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함께 연결된 총체적인 신앙생활을 보고 상담함으로 제반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교역자들의 전문적인 상담기술의 습득이 필요하며 이롤 위해 시간을 할애하여야 할 것이다. 여교역자들의 상담 내용에 있어서 신앙상담 문제가 과반수를 차지한다는 것은 여교역자도 신앙의 길잡이로 생각한다고 간주할 수 있다. 또한 특히 여교역자들은 입을 무겁게 함으로 내담자와 나눈 대화를 절대 비밀이 보장되어야 함을 명심해야 그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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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회행정

교회는 하나의 조직체로서 효과적으로 구성되지 않으면 교회의 중요한 임무인 예배, 교육, 선교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없다. 모이는 교회에서 성공한 한국교회가 나아가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교회행정이다. 현대 사회가 전문화, 기능화되면서 교회의 여러가지 직능이 다양해 지고 있다. 목회자, 전도자, 교육자가 교회의 행정까지 직접 관여하기에는 시간적인 제약이 있을 뿐 아니라 기능상의 문제도 있는 것이다. 교회행정에 대한 교육이 없는 사람이 맡겨진 일만 수행하는 소극적인 임무 수행을 넘어 신학과 교회행정을 맡아 주는 것은 목회와 선교를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여러가지 성도에 관한 자료를 토대로 하여 성도 신앙의 성장을 확인하고 효과적인 지도를 가능케 하는 기초자료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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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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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살펴본 대로 급변하는 사회에 여교역자의 역할이 다양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국여교역자의 바람직한 위치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복음서에 나타난 여자에 대한 예수의 태도에서 찾게된다. 초기교회의 선교적 사업에서 여성의 위치를 보면은 예수가 사도로서 남성을 택하였다는 언급이나, 예수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력은 남성만의 자격이 있다는 등의 언급은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복음서에 나타난 여성사역에 대한 고난의 제자직을 수행한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어떠한 근거로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여 여교역자의 역할을 제한하는지 알 수 없다. 이제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여교역자의 바람직한 역할로서 목회자, 전도자, 상담자, 교육자, 목회행정가로서 통전성 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개교회에서나 여교역자 스스로 노력하고 배려함으로 효과적인 사여을 담당하여 변화하는 사회에 대응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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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교회는 여성의 역할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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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여성의 역할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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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굴종’이 복음에 유익한가 남자의 독점적 리더십 옹호 위해 성경 가르침 왜곡 해석 이어져 성경은 ‘남녀 동등성’ 강조…공동체 해치는 ‘차별언어’ 사라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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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교수(미국 풀러신학교 신약학)는 ‘목회와 신학’이 ‘여성. 그 복음적 이해와 목회적 적용’을 주제로 엮은 5월호 특집의 글로 ‘성경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를 발표했다. 이어 김 교수는 지난 7월 5일에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여동문회가 연 세미나에서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했다. 우리 교단 안팎에서 여성 안수에 대한 견해들이 파열음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익히 알려진 신학자가 그리고 신학교에서 이 문제를 두고 공개적으로 제기된 논의여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김 교수의 여성 동등권에 대한 포괄적인 견해를 사실상 여성안수에 대한 허용 주장으로 간주한 서창원 목사가 기독신문에 반론의 글을 보내왔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김 교수의 글과 서 목사의 글을 줄여 싣는다(두 필자의 전문은 기독신문 인터넷 판 볼 것).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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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교수는 구약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창조된 남녀의 동등성을 설명했다. 김 교수는 신약에서는 부활의 첫 증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를 들어 예수께서 여자들을 “복음의 첫 설교자들 세웠다”며 예수의 남녀 동등성의 원리를 제시하고, 열두 제자 가운데 여성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는 남여관계를 바로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구원이었다”며 “구원의 본질적인 메시지가 신뢰를 얻고 설득력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는 문화적인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교수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 고린도전서 7장 2-16절,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에베소서 5장 21-33절에 대한 주해를 통해 남녀 동등성의 원리를 주장하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고린도전서 14장에 대한 해석학적 견해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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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교회서 잠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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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철저하게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남녀 관계를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원칙에 따라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은 이것과 정반대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 구절이 우리의 교회들에서 여성의 설교나 리더십 행사를 부인하는 성경적 근거로 많이 사용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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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구절은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 이 34-35절과 어휘나 사상이 같은 본문이 디모데전서 2장 11-15절에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구절들이 디모데전서가 쓰일 1세기 말 무렵의 영지주의 여자들이 교회에서 상당한 물의를 일으키는 상황에서 질서를 잡기 위해서 씌어졌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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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구절들이 고린도전서 14장의 맥락에만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남녀관계에 대한 전체적인 가르침, 특히 고린도전서 11장 12-16절의 가르침과도 완전히 모순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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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바울은 남녀관계에 있어 일관되게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동등성의 원칙에 따라 가르치고 있다. 더구나 고린도전서 14장의 조금 전, 즉 11장에서 바울은 공예배에서 여자들도 기도도 하고 예언도 하는데 다만 머리에 수건만 쓰고 하라고 한다. 만약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을 썼다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자신이 쓴 말을 곧바로 완전히 뒤집어 버리고 자기모순을 범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바울은 한 편지 안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들을 주는 종잡을 수 없는 사도인 셈인데, 그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신학적인 문제를 안겨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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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생활에서 남자의 독점적 리더십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을 디모데전서 2장 11-15절과 함께 계속 바울의 진짜 가르침으로 보고 금과옥조로 삼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한 편지에서도 상호모순되는 가르침들을 하는 사도로 만들며, 성경을 한 책에서도 상호모순되는 가르침들을 담고 있는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심히 훼손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신학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을 보수한다는 사람들이 도리어 성경을 훼손하고 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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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또 하나의 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은 남녀 동등성과 상호주의의 원칙을 천명하는 바울의 말씀들(갈 3:28; 고전 7:2-16; 11:2-11; 엡 5:21-31, 등)과 그들과 정 반대되는 말씀(고전 14:34-35) 중 후자를 골라잡고 전자를 배격하는 결정을 하는 것이다. 수량적으로도 전자가 월등히 우세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보다 중요한 것은 전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을 잘 표현하는 반면에 후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에 배치되어 겨우 구약의 율법에 호소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이 또한 심각한 해석학적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근본주의자의 율법주의의 경향은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롬10:4)의 복음을 저버리고 무엇이나 율법적인 것을 선호하게 하여 심히 불확실한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과 같은 율법주의적 언명을 가장 중요한 금과옥조로 삼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근본주의자들은 주 예수와 사도 바울이 율법의 핵심으로 가르친 사랑의 이중계명과 전혀 무관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등의 말을 주 예수와 사도 바울이 그렇게 정죄한 율법주의적 태도로 고수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결국 복음의 첫 설교자들이었던 막달라 마리아 등 여자들을 범법자들로 만들고 그들이 설교한 복음을 무효화하며, 심지어 그들을 복음의 첫 설교자들로 내세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까지 자신들의 귀중한 법(“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을 어기도록 교사한 분으로 만들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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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해석학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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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문제들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그렇지만, 남녀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해석할 때, 해석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몇몇 구절만 인용해서 그들을 율법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살펴야 한다. 특히 원칙적이고 중심적인 가르침과 문화적이고 주변적인 요소들을 구분하여 해석해야 하며, 성경 말씀의 문자보다는 그 정신을 따라야 한다(고후 3:6). 그러므로 예컨대 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 중 어느 구절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더 정확한 표현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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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의 동등성과 상호주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구절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과 새 창조의 복음을 더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 반면,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14장 34-35절,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등은 여성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은 자유를 너무 지나치게 행사하여 옷차림이 너무 야해지는 것이나 너무 시끄러워지는 것을 막으려는 다분히 비본질적이고 상황적인 권면들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해석학적이고 신학적인 판단을 못한 채 사본학적으로도 불안하고 내용적으로도 이차적임에 틀림없는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 또는 후대의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등의 본문들만을 율법적으로 고집하는 근본주의적인 태도는 극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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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근본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심지어 완성된 계시인 신약을 저버리고 예비 계시였던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가서 성전 예배 의식에서 여성을 완전히 차별하는 규정들을 들이대며 오늘의 교회에서도 여성들의 역할을 억제하려 하기도 한다. 그들 중 상당수는 칼빈주의자들로 자처하는데, 남자의 권위를 세우고 여성을 굴종시키는 일을 위해서라면 구약의 의식법에 호소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구약의 의식법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는 칼빈의 가르침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만인사제론을 편 개혁자들의 후예들이 남편/아버지만의 제사장론을 펼치듯이 말이다. 여기에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의 씁쓸한 역설이 있다. 성경의 진리와 권위를 보수한다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고 그 진리를 왜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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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을 굴종시켜 얻는 것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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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굴종시켜 하나님 나라나 가정에 무슨 유익을 얻을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여성들에게도 많은 은사들을 주셨고, 신약시대 이래 기독교 역사에서 여성 사역자들의 역할은 막대한 것이었다. 19세기 이후 근세 선교역사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생각해보라. 만일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을 문자적으로 엄격히 적용하여 여성들로 하여금 사역하지 못하게 했다면 근세 선교역사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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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일방적으로 굴종시키는 것은 앞에서 본바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려니와, 그들에게도 그의 교회를 세워 올리도록 주신 은사들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그 많고 큰 성령의 은사들을 낭비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신약성경의 남녀 동등성에 관한 가르침과 여성 리더십 행사의 모범들을 적극적으로 음미해서 오늘 우리의 교회 안에서 여성의 리더십 참여를 공식화해서 허용하면 건전한 교회 공동체를 세워 올리는 일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가? 가정에서도 남편이 아내를 굴종시키려고 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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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복음을 올바로 선포할 때는 항상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실화로 노예해방과 여성해방을 가져왔고, 약자를 보호하였으며, 만민의 인권을 증진하였다. 한국에서도 반상 철폐, 여성 해방, 인권 증진, 민주화 등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이 영광스러운 역사만 자랑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유교의 족쇄를 풀고 여성의 해방을 가져온 교회가 이제는 남자의 가부장적 리더십과 여자의 순종을 강조하여 사실상 유교 윤리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버렸다. 각급 학교들에서 활약하는 여자 선생들이며, 여자 국회의원들이며, 여자 장관들이며, 여자 판검사들이며, 신문사들의 여자 논설위원들이며, 기업체들의 여자 사장들이며,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여성 리더십이 약진하고 있다. 사회의 다방면에서 여성 리더십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유독 교회 안에서만 여성 리더십이 거부되고 있다. 여성 해방의 복음을 가지고 있는 교회 안에서만, 한 때 이 땅에서 여성 해방을 주도한 교회 안에서만, 여자들이 잠잠하라고 억눌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또 얼마나 씁쓸한 역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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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문명사적으로 중요한 시점에 놓여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여성을 굴종시키는 이슬람교와 약자들을 노예화하는 힌두교의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적 차별, 신분적 차별, 그리고 성적 차별을 철폐하고 만민에게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확대해야 하는 구원사적 소명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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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잘 표현한 갈라디아서 3장 28절 대로 복음의 사회적 실현을 가져옴은 가정을 살리기 위해서도 중요하고,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도 중요하고, 위협받고 있는 우리 기독교 문명을 살리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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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신문 1501호 지면을 통해 전문을 인터넷 판에 올려드린다고 공지했으나, 저작권 관계상 독자들께 약속을 지켜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김세윤 교수의 전문은 <하나님이 만드신 여성>(두란노)에, 서창원 목사의 전문은 10월호 <목회와신학>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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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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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

김세윤 미국 풀러 신학교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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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 창세기에 나타난 남녀 관계

? 창세기1:26~3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천명하는데 남자와 여자라고 부연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차별화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형상의 기본적인 의미는 인간이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대표자 혹은 대리자로 세워졌다는 뜻이다. 창2:18~25절은 아담이 주가 되고 여자가 아담에게 종속되는 것으로 보지만 돕는 배필이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돕는 배필이라고 성경은 언급하기도 한다(전4:9~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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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어도 창세기3:16절부터는 타락의 질서 속에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남자 우월적이고 여성 종속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구약은 남자의 우월성과 주권을 천명하고 여자들은 남자보다 열등하고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로 설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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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복음

? 그런데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질서에서는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고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상전도 없고 노예도 없다. 모두 하나다.”라는 것이다. 첫 창조에서 하나님께서 남녀를 공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우셔서 자기의 통치권을 대행하게 하셨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를 통해 옛 세상의 대표적인 구분들, 인종적 구분, 성적 구분, 신분적 구분을 극복하게 하셨다. 첫 창조(창1장)와 새 창조의 위대한 천명(갈3:28)은 그리스도인들의 남녀 관계 이해에 있어 원칙이요, 열쇠로 작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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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을 통해 본 남녀의 위치

? 여성에 대한 보호는 예수의 가르침에서부터 시작된다. 여자를 인격체로 보지 않았던 유대 사회에 혁명적인 일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을 복음의 첫 설교자들로 세우셨다. 유대교에서는 여자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면 안 되었고 어떤 랍비는 아침에 일어나서 이방인, 노예, 그리고 여자로 창조되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여성에게도 토라를 가르쳤고 부활하신 후에는 첫 증인으로 마리아를 세웠으며 복음서도 당시의 문화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마리아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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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이혼 금지에 담긴 남녀 동등성의 원리

? 예수의 이혼 금지에 대한 가르침은 일부일처제를 확립하여 여자를 보호하는 뜻도 함축되어 있다(막10:11~12; 마5:31~32; 마19:8~9; 눅16:18). 일부일처제를 창조의 원리로 삼음으로써 일부다처제가 가져오는 여성의 종속과 여성의 재산화, 남편의 소유물로 변질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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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원리로 남편과 아내를 동등한 상황 속에서 짝지어 준 것이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성적으로 소유하듯이 아내도 남편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아내를 버리면 아내의 남편에 대한 성적 소유를 박탈하는 것이므로 간음하는 것이다(고전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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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는 왜 열둘 속에 여자를 끼워 넣지 않았는가?

? 12명의 제자를 남자로 세운 것은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12족장들에게 상응하는 새 언약에 의한 새 하나님의 백성의 12기둥들을 상징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다 본질적인 구원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 본질적인 메시지가 신뢰를 얻고 설득력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는 이런 문화적인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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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을 통해 본 남녀의 위치

? 갈라디아서3:28 새 창조 질서의 원칙 : 남녀의 동등성

??? 이 구절은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으며, 종도 없고 자유자도 없으며,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 왜냐하면 너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과 새 창조의 질서 속에서는 불평등과 불의를 가져오는 이 세상의 모든 차별들이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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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7:2~16 부부 생활 그리고 이혼 : 부부의 동등성과 상호주의

???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갈라디아서3:28의 원칙을 부부관계에 적용하고 있다. “... 이와 같이 남편도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아내가 한다. 서로의 (성적)권리를 빼앗지 말라(고전7:2~5).” 바울은 이어서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서 성관계를 중단할 수 도 있는데 그때는 서로 합의해서 하라고 말하고 있다. 남편과 아내의 철저한 동등성과 상호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고린도전서7:10~16에서 이혼에 관한 가르침도 남녀동등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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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11:2~16 여자들도 교회에서 설교를 하되 복장을 단정히 하고 하라

??? 바울은 갈라디아서3:28의 원칙을 교회 생활에서도 적용했다(고전11:2~16). 바울은 회당예배와 달리 남녀 구분 없이 같은 방에서 예배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공 예배에서 여자들도 대표기도와 예언(성령의 영감에 호소하며 구약을 해석하면서 성도들을 권면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 설교)을 하도록 했다. 갑자기 자유를 얻은 고린도 교회의 여자들은 남자들과 평등하게 예배에 참여하면서 공적인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하면서 굉장히 시끄럽게 했으며 머리에 쓰던 너울조차 벗어 던지고 떠들어 대니 예배의 분위기가 아주 어지럽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질서를 잡아야 했으며 여자들에게 설교하지 말라고 명령하기보다 계속하되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하라고 명한 것이다. 그는 교회가 헬라인, 유대인 어느 누구에게나 거침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고전10:32; 14:23; 고후8:21; 살전4:12). 여기서 바울이 “머리”론을 펴다 중단하는 것 (고전11:11~12)은 어디까지나 여자들에게 머리에 수건 쓰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이를 일반화 하여 남편이 아내의 권위노릇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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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5:21~33 가정생활-동등성과 상호주의

? 바울은 갈라디아서3:28의 원칙을 가족 윤리 또는 가족 간의 상호 의무 조항을 규정하는 것에도 적용한다(엡5:21~33). 그런데 이 문맥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사람들은 22절 즉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라는 말씀부터 읽었다. 그러나 사실 바울이 의도한 것은 21절 즉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이다. 이 부분이 부부관계에 대한 가르침 전체에 대한 큰 제목이다. 그 원칙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22절에서 “아내들이여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라고 하고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23~24절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25절에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하고 26~33절에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데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을 두 번 더 되풀이 한다. 당시 남편 우위의 고대 사회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보편적이었기에 두어 마디로 끝낼 수 있었지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데는 특별한 설득이 필요했으므로 거듭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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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여자에 대해서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동사를 썼고 남편에 대해서는 아내를 “사랑하라”는 동사를 썼으니까 남편은 위고 아내는 아래로 보고 있다. 그러면 본문은 갈라디아서3:28의 말씀과 근본적으로 모순을 일으킨다. 기능적 차이만을 인정하는 어떤 이들은 남녀는 본질적으로나 구원론적으로 동등하나 5:21절의 “서로 복종하라”는 기본 논지를 무시한다. 복종은 일종의 자기희생이지만 사랑은 복종을 포함하는 더 총체적 자기희생(자기를 내어줌: 자아포기의 삶)이다. “머리”, “복종”이라는 표현을 붙들고 자신의 아내에게 복종을 강요한다면 그는 그 행위로 자신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5:21~31의 말씀을 더 이상 가부장적 부부관계를 지탱하는데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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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함으로 모든 것을 아내와 상의하여 결정하되 의견이 상충할 때는 최종 결정권은 남편이 가져야 하고 아내는 거기에 순복해야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아내가 더 많은 지혜를 받을 수 있는데 말이다. 율법주의적으로 남편의 “머리됨” 또는 “대표권”을 내세우는 것이 과연 예수와 사도 바울의 정신에 합당한 것이며 가정에 유익한 것인가?

고린도전서14:34~35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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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4:34~35(개역성경)는 갈라디아서3:28과 정반대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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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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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 두 구절은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 어떤 사본들에는 이 절들이 40절 이후에 놓여 있다. 또 그들은 문맥을 끊고 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예배 도중 중구난방으로 방언하고 예언하여 무질서한 상황이 이루어진 것을 바로잡고 있는 중이다.

? 고린도전서14:32~38을 보면, 34~35절이 나중에 선지자들에 대한 바울의 타이름의 문맥을 끊고 삽입된 것임이 드러난다. 34~35절을 제쳐놓고 32~33절에서 36~38절로 직접 이어 읽어 보라. 스스로 선지자라고 주장하면서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에게 영감하므로 자신들은 예배 질서에 아랑곳없이 계속 예언해야겠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타이르는 내용으로 일관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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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35절과 어휘나 사상이 같은 본문이 디모데전서2:11~15에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구절들은 디모데전서가 쓰일 1세기 말 무렵의 영지주의 여자들이 교회에서 상당한 물의를 일으키는 상황에서 질서를 잡기 위해서 쓰여 졌다고 본다. 고린도전서14:34~35도 그 무렵 영지주의의 여자들이 교회의 공 예배 때 성경 해석이나 교리에 대해 질문하고 논쟁을 벌이는 시끄러운 상황(고전14:35)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록되어 고린도전서14장에 삽입되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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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바울의 남녀관계에 대한 전체적인 가르침, 특히 바로 앞에서 썼던 고린도전서11:2~16의 가르침과도 완전히 모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생활에서 남자의 독점적 리더십을 옹호하려는 사람이 고린도전서14:34~35과 디모데전서2:11~15을 바울의 진짜 가르침으로 받아들인다면 성경의 권위는 실추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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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말 : 올바른 해석학의 중요성

? 교회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복음을 왜곡하여 선포할 때는 해방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억압을 가져오는 것이다. 해석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몇몇 구절만 인용해서 그들을 율법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살펴야 한다. 특히 원칙적이고 중심적인 가르침과 문화적이고 주변적인 요소들을 구분하여 해석해야 하며 성경 말씀의 문자보다는 그 정신을 따라야 한다(고후3:6). 따라서 갈라디아서3:28과 고린도전서14:34~35 중 어느 구절이 그리스도 복음에 더 정확한 표현인지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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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된 계시인 신약을 저버리고 예비 계시였던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가서 성전 예배 의식에서 여성을 완전히 차별하는 규정들을 들이대며 오늘의 교회에서도 여성들의 역할을 억제하려 하기도 한다. 이는 가정으로 연계되어 성경과 거리가 먼 유교주의에 빠져 있다. 가정에서 가부장적 권위를 행사하며 자기 명령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가정을 화평한 가정이라고 생각하고 순종 잘하는 아내로부터 대접받고 사는 남편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단견이다. 사실상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착취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무지에서 나오는 주장은 심히 우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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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교의 족쇄를 풀고 여성의 해방을 가져온 한국교회가 이제는 남자의 가부장적 리더십과 여자의 순종을 강조하여 사실상 유교 윤리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버린 셈이다. 여자들이 잠잠하라고 억눌림을 받고 있다니 이 얼마나 씁쓸한 역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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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안수 문제와 여성의 교회 내 역할에 관하여 자신의 입장을 논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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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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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앙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만큼 행동하고 따라가야 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여성 안수를 금하고 있다(고전 14:34-36; 딤전 2:11-15). 그러나 성경은 여성의 교회 내의 역할 자체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러 가지 면에서 여성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여성 안수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으며, 교회 내에서 여성이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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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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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을 금지한다(딤전 2:12). 이것은 창조 질서의 원리와 연결된다. 남자가 먼저 지음받았다는 사실은 남자의 머리됨을 말해준다. 여자는 돕는 배필로 지어졌다. 즉 여자는 남자의 주관 아래서 돕는 자로서 기능하도록 지어졌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말씀(고전 11:3)에서도 남자가 여자를 주관해야 한다는 원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고 주관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창조 질서의 원리에 어긋난다. 우리는 이러한 여성의 가르침과 주관함의 금지를 여성 안수 불가라는 입장과 연결시킨다. 성경에는 여성 안수라는 용어 자체가 없지만, 남자의 머리됨이라는 원리에 비추어볼 때 여성 안수는 불가하다.

일부 여권주의자들은 비평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경 해석법을 동원하여 여성 안수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여자의 가르침과 다스림을 금지하는 성경 말씀은 바울 당시의 사회문화적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특수한 경우였다고도 하며, 심지어 그러한 성경 말씀은 바울 자신의 글이 아니라 바울을 가장한 다른 사람의 글이므로 사도적 권위가 없다고 하면서 성경의 권위와 영감 자체를 부인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여권주의자들의 주장은 단순히 여성 안수 문제의 차원이 아니라 개혁주의 신앙의 근본인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반기를 들고 도전하는 것이므로 결코 용납되어서는 아니된다. 여성 안수 문제의 근원에는 성경 해석의 문제와 성경의 권위의 문제가 걸려있음을 직시하고, 우리는 이 문제에 결코 양보나 타협 없이 성경의 명령을 굳게 잡고 서야 한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교회 내에서의 역할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여기서 여성의 가르침에 대한 금지의 범위가 문제가 된다. 여자는 일체 교회 안에서 가르칠 수 없는가 아니면 남자를 주관하고 가르칠 수 없는가? 후자의 의미로 보아야 한다.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고 주관함은 창조의 질서의 원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허용될 수 없지만, 그 원리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는 여자가 교회 안에서 가르칠 수 있다. 바울도 여자가 공적 모임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지한 것이지 모든 곳에서 일체의 가르침을 금지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전도사, 교육사, 상담사, 그리고 복지사 등의 사역을 담당할 수 있다. 담임 목사의 헤드쉽의 범위 안에서 전도사로서 그리고 교육사로서 여자 성도들과 어린이들에게 설교할 수 있고 교육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상담이나 사회복지 등의 학문을 전공한 이후, 교회 안에서 상담사와 복지사로서 담임 목사의 목회적 동역자로서도 사역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다원화되어가기 때문에, 담임 목사 일인이 모든 것을 담당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더욱 더 여성 사역자들의 역할이 필요하고 또 중요해진다. 여성 사역자들은 남성의 헤드쉽을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전문 영역 안에서 얼마든지 섬기고 봉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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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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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고 주관하는 것을 분명하게 금지한다. 이러한 성경의 기본 원리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 영구적인 것이다. 성경의 확고부동한 증언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왜곡시키지 않고서는 여자의 남자에 대한 창조 질서 차원의 종속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하지만 성경이 여성의 사역 자체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는다. 성경에는 많은 여성 사역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언제나 남성의 헤드쉽을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사역을 감당했다. 오늘날에도 남성의 헤드쉽의 범위 안에서 여성들은 여러 가지 사역들을 담당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담당하고 있다. 여성의 사역이 제한적이긴 하지만 그 중요성은 과소평가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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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은 의견의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언급하신 구절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나름대로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온 구절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여자들에게 침묵을 요구한 대표적인 구절은 (고전 14:34-36)과 (딤전 2:11-12)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173번에서 설명한 것은 주로 목회 서신인(딤전 2:11-12)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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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딤전 2:11-12)

바울은 (딤전 2:11-12)에서 목회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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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11),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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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원문을 따라 보다 쉽게 번역하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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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모든 일에 순종하며 조용히 배우십시오!(11) 또 나는 여인이 가르치는 일(to teach)이나, 남자를 다스리는 일(to exercise authority)을 허락하지(permit, 또는 위임하지) 않으니, 조용히 계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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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바울이 여성에게서 금지한 것은 "가르치는 일"과, 남자를 "다스리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은 교회의 지도자들(목사와 장로)의 역할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교회의 장로를 두 가지, 즉 "다스리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로 구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르치는 장로는 오늘날의 목사를 의미하고, 다스리는 장로는 오늘날의 장로를 의미합니다. 목사는 설교와 행정을 겸했고, 장로는 행정을 주로 맡아 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 서신인 (딤전 2:11)에서 여성에게 순종하며 조용히 배우라는 말은, 여성이 나서서 목사와 장로가 하는 일에 참견하는 일을 금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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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은 여성 목사와 장로 제도에 대해 각 교단마다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2000년 전의 문화 속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다스리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바울 역시 이러한 일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던 100여년 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 나라는 교회에서 남자가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교회를 "ㄱ"로 지어 남자 방과 여자 방을 분리하기도 했습니다. 만일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인들이 나서서 교회를 다스리고 가르쳤다면 아마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할 때에 갑자기 문화나 제도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으로 개인을 변화시켜서 오랜 시간을 두고 근본적으로 기독교 문화를 만드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는 이러한 원칙을 잘 따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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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전 12-14장)

그러나 이러한 원칙을 따르지 않아서 문제가 된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바로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에서 크게 문제가 된 것은 "기독교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선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율법의 의무에서 해방되었으며, 모든 일을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자유의 남용으로 흘러서,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무질서와 방종을 낳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주장만 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는 점에 부족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교회 안에는 우상제물을 먹어도 된다고 하는 사람과,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서로 갈등하고 있었고, 심지어 계모와 간통한 사람을 교회가 허용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으며, 성령의 은사를 무분별하게 사용하여 교회의 예배 질서가 매우 어지럽게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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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2-14장)에서 바울은 특히 영적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무분별한 행동을 절제하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 은사에서 문제가 된 것은 주로 "방언"의 은사였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공적예배에서까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교회에는 여러 가지 덕스럽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방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방언의 은사를 공 예배에서사용하는 일에 절제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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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바울은 고전 13장을 통해서 이러한 은사를 "사랑"으로 사용하도록 부탁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방언"의 은사가 크게 강조된 반면, "예언"의 은사는 상대적으로 경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특히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언"도 무질서하게 행해서는 안되며, 순서대로(질서를 지켜서)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예언을 할 때에는 다른 사람이 그 예언을 분별하라고 부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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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전 14:34-36)

바울은 여기까지 말한 후에 주제를 약간 돌려서 그 동안 참아왔던 말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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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인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여인이 나서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린도 교회에서만은 이러한 일로 인해 교회질서가 어지럽게 되었습니다. 특히 영적은사를 받은 여성도들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공예배 중에 나서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대개 영적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여인들을 향해서 다른 교회처럼" "너희들도 교회에서(공예배에서) 잠잠하라"고 정중히 부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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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여인이 공예배 시에 나서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하고..."율법에도 이와 같이 명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4:34).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서 크게 문제가 된 것은 교회의 지도자(목사, 또는 장로)가 말씀을 가르치거나 설교 할 때에 여성도들이 중간에 끼어 들어서 자기가 원하는 말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문맥을 보면 어떤 여인들은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도중에 갑자기 끼어 들어서 그 말을 보충하거나 지적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당연히 교회의 공예배를 혼란케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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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문맥의 내용을 보면 여성도들 중에서 교회 지도자가 가르치거나 설교할 때에 갑자기 일어나서 궁금한 것에 대해서 질문하는 여인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일은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예배의 흐름을 방해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여인들이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조용히 물으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일이 당시 문화와 상황 속에서 "부끄러운 일"이어었다고 말합니다(11:35). 아마도 당시의 사회에서 여인들이 공적인 장소에서 나서서 말하거나 묻는 일이 수치스럽게 여겨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우리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에 감히 여인들이 공 예배에 나서서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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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바울은 다시 자신만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11:35)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특히 은사를 받은 사람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를 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편지 내용을 보면 이러한 일은 주로 은사를 받은 여성도들로 인해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여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과 성령을 통해서 12사도와 바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교회에 그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다른 교회처럼 사도들의 권위와 가르침을 인정하고 그 말씀과 가르침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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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 책망했습니다. 당시 은사를 받은 고린도 교회 여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만 주어진 것처럼 다소 독선적으로 행동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한 몇 사람에게 배타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서 모든 교회에 똑같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의 몇몇 은사주의 여성도들은 자신만이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우월감을 갖거나, 다른 성도들을 무시하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를 버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모든 교회에서 했던 것처럼 당시의 교회의 원칙을 따를 필요가 있었습니다(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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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와 같이 여인에게 침묵을 금한 것은 고린도 교회의 당시의 특별한 상황과 은사를 받은 소수의 여성도들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 일은 공 예배 시간에 나서서 설교를 가로막는 일이나, 갑자기 일어나서 질문을 함으로 예배의 흐름을 깨고, 또 교회를 다스리는 일에 나서는 일 등을 모두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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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바울 당시에 고린도 교회 여인들이 덕스럽게 행동을 했다면 여인들의 문제에 대해서 바울이 언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문제를 언급한 것은 여인들이 지혜롭지 못한 무분별한 행동으로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혼란스럽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로 인해 당황한 고린도 교인들은 대표를 뽑아서 바울에게 보내서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요청을 받고 혼란해진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 이러한 특별한 조치를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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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서신을 보면 여인들이 복음을 전하거나 가르치고, 바울의 편지를 가지고 로마에 가는 전달자 역할을 하며, 또 자기 집을 교회 처소로 내놓는 등 매우 탁월한 활동을 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여인의 권한을 경시하던 당시 상황에서 보면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여인들의 재능이 복음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금한 것은 여인의 은사가 무분별하게 사용되어 교회에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했을 때였습니다. 아마 바울은 이러한 혼란을 초래한 사람이 남자였다고 해도 그 남자에게 발언을 금하도록 명했을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에 보낸 편지를 보면 대부분의 내용들이 여인이 아니라 무질서를 초래한 수많은 남자와 남자 지도자들에 관한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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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은 여성의 권한이 강조되고 있는 현실 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절하고 절서있게 사용되면 여성의 재능과 은사는 얼마든지 복음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여인의 유능한 재능을 복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놀려 두는 것은 큰 낭비이며,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재능과 은사가 지혜롭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사용되어 교회질서를 무너뜨리거나 혼란스럽게 하면 지금도 교회지도자는 이에 대해 절제를 요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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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여성도 목사나 설교자로 섬겨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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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아마 여성 사역자 주제 만큼 오늘날 교회에서 더 많은 논쟁거리를 불러일으키는 주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성 대 여성 이렇게 대립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여성들은 여자는 목사로 섬겨서는 안 된다고 믿고, 성경도 또한 여성의 사역에 대해 제한하고 있습니다. 반면 여성 설교자의 섬김과 여성들의 사역에 제한을 두지 아니하는 남성들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성차별대우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해석의 문제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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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2:11-12 는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각각 달리하셨습니다. 이는 남녀가 창조된 원리에 부합되는 것이고 (디모데전서 2:13), 또 죄가 세상에 들어 오게 된 연유때문이기도 합니다 (디모데후서 2:14).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글을 통해 여성들이 영적인 가르침으로 섬기는 데 있어서 남성 보다 높은 권위를 갖는 것에 제재를 가하십니다. 이는 여성이 목사로서의 섬김 즉 설교하고, 가르치고, 영적인 권위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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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사역 제한을 반대하는 많은 의견들이 있습니다. 첫째, 바울이 여성의 가르침을 막는 이유는 1세기의 여성들은 교육받은 자가 특별히 적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2:11-14어디에서도 고육적 지위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습니다. 만약에 교육이 사역을 위한 자격조건이었다면 대다수 예수의 제자들은 자격미달입니다. 둘째, 바울이 단지 에베소의 여성들만 가르치는 사역에서 제외시켰다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는 에베소 교회의 목사였던 디모데에게 쓰여진 글입니다). 에베소 도시는 그리스 로마가 섬겼던 신, 아르테미스의 성전으로 유명했습니다. 아르테미스에 대한 예배는 여성이 주도권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어디에서도 아르테미스를 언급한 적이 없으며, 바울도 아르테미스 숭배문제를 가지고 디모데전서 2:11-12을 통해 제한시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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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바울이 단지 남편과 아내를 상대로 여성의 활동을 제한시키는 것이지 일반적으로 남성 대 여성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2:11-14의 그리스어는 남편과 아내만 뜻할 수 있습닌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남자와 여자를 뜻합니다. 더군다나 같은 그리스어가 8절에서 10절에서도 쓰입니다. 예로 8절은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은 결혼한 남편들에게만 얘기하는 것입니까? 아담한 옷을 입으며 오직 선행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오직 결혼한 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9절-10절). 물론 아닙니다. 8절에서 10절은 분명히 일반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상대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14절에서도 대상이 갑자기 남편과 아내들로 전환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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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여성 목사나 설교자를 해석할 때 성경에서 리더쉽의 자리에 있었던 미리암, 데보라, 훌다, 프리실라, 뵈뵈를 예로 듭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중요한 사실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데보라의 경우, 그녀는 13명의 사사중에 유일한 여성 사사였습니다. 훌다의 경우, 그녀는 12명의 남성 선지자 중에 유일한 여성 선지자 였습니다. 미리암의 리더쉽은 그녀가 모세와 아론의 혈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왕조 시대에 가장 눈에 띄는 여성은 아달리아와 이세벨이나 그들은 거룩한 여성 리더쉽을 거의 보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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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8장에 프리실라와 아퀼라는 그리스도의 충성된 사역자로 묘사됩니다. 프리실라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어서 그녀가 남편보다 사역을 훨씬 뛰어나게 감당한 한 것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프리실라가 디모데전서 2:11-14절에 대립되는 사역활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즉 프리실라와 아퀼라는 아볼로를 그들의 집으로 데리고 와 하나님의 말씀을 더 효과있게 전달함으로 그를 제자 양육합니다 (사도행전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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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6:1에서 뵈뵈를 “종”보다는 여집사로 여겼지만 그녀가 교회의 교사였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르침은 집사들이 아닌 장로들에게 주어진 자격이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3:1-13; 디도서 1:6-9). 장로/주교/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 “믿음이 좋은 자녀를 둔 남자” 그리고 “존경할 만한 남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3:1-13와 디도서 1:6-9에서는 남성 대명사가 특별히 장로/주교/집사들을 언급하는 데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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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2:11-14의 구조는 아주 확실한 이유를 제공합니다. 13절은 “왜냐하면”의 접속사로 시작하여 바울이 11절과 12절에 언급한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해줍니다. 왜 여성의 가르침은 금지되었고 남성에게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고 그 후에 여성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속임을 당한 것은 여자였지 아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먼저 창조하셨고, 이브를 아담의 조력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창조 질서는 지구상의 모든 가정과 교회에 적용됩니다 (에베소서 5:22-33). 이브가 속임을 받았다는 사실은 여성의 목회자 사역과 남성에게 영적 권위 사용의 부적합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여성은 쉽게 속기 때문에 가르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개념은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자가 더 쉽게 속임을 당한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잘 속아 넘어가는) 가르치고 또 다른 여성(더 잘 속는다고 가정된) 들을 지도할 수 있습니까? 이는 본문이 뜻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브가 속임을 받았기 때문에 가르칠 수 없고, 남성에게 영적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남자에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권위를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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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동정, 긍휼, 돕는 은사에 강합니다. 교회 내의 많은 사역이 여성들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남성에게 영적 권위를 사용하는 것을 빼놓고는 여성이 기도나 예언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1:5). 성경 어디에서도 여성들이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 제한 두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이 다른 지체들을 섬기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갈라디아서 5:22-23),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18-20; 사도행전 1:8; 베드로전서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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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교회에서 오직 남자만 영적 지도자의 위치에서 섬기도록 정하셨습니다. 이는 남자가 더 수준 높은 교사이거나 여성이 남자보다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교회를 이렇게 디자인하신 것입니다. 남성이 그들의 삶과 언어사용을 통해서 영적 리더쉽의 모범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여성은 조금 덜 권위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여성은 다른 여성을 가르치라고 되어있습니다 (디도서 2:3-5). 성경은 또한 여성의 아이들 교육에 제재를 가하지 않습니다. 여성의 활동이 제한된 경우는 남자를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영적 권위를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자연히 목사나 설교자로 활동하는 여성들을 포함합니다. 이는 여성이 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성에게 더 유리하게 만드신 은사들에 전력하는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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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적인 교회들 안에서 여자들의 존재는 자칫 소외당하기 쉽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직분(목사, 장로, 집사..)도 주어지지 않으며, 또한 예배를 비롯한 공적인 모임에서 회중 앞에 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성경 안에서 많은 믿음의 여인들을 볼 수가 있고, 또한 그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져 가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기 때문에 과연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역할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어져야 하는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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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성경은 여자들의 위치를 어디에 두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에 대한 답은 매우 명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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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 없고, 매인 자나 자유한 자가 없고, 남자나 여자가 없으니,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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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의 의미는 남자나 여자가 교회 안에서 서로 높고 낮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남녀에 대한 차별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왜곡된 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교회는 세상의 어느 종교보다도 가장 분명하게 여자를 존귀한 위치에 올려놓았습니다. 복음이 세상에 전해지기 전에는 여자가 사람으로서의 대우를 받기 보다는 마치 물건과 같이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사고팔 수 있는 존재로서 전쟁이 나면 포로로 끌려가서 남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으며, 그들은 한 가정의 재산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잇는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능력이 있는 자는 많은 여자를 데려다가 종이나 첩으로 여자들을 대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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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복음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한 아내에 한 남편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으며, 이것은 여자의 위치를 높여주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심지어 성경이 아내가 연약한 존재로서 보호받아야 할 자라는 사실을 가르치면서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 된 여자를 재산의 가치로 여기거나 최소한 함부로 대하는 것들에 대하여 방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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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날 교회가 우려하는 것은 여자의 존재가 교회 안에서 소외되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창조의 질서를 위협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여자들이 남자들을 지배하여, 사회적인 혼란을 가져오고, 많은 가정들이 남자의 권위를 무시함으로서 가정의 질서를 파괴시키는 결과들을 낳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급증하고 있는 이혼율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오늘날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무관하게 운영되어 지고 있고, 많은 혼란을 가져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자들이 신약교회 안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성경을 통해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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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 안에서 잠잠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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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는 이 명령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교회는 여자들이 많고, 또한 매우 지혜롭고 능력 있는 여자들도 많은데, 여자들이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이 남자와 여자를 평등하게 보지 않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 안에서는 여자들에 대하여 이러한 의심을 품기에 충분한 구절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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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잠잠할지니 이는 주께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고 또 율법도 말하는 바와 같이 여자들은 순종하도록 명령을 받았음이라. 만일 여자들이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이는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이 수치스런 일이기 때문이니라(고전14: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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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온전히 순종하며 조용히 배울지니라. 오직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이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그 뒤에 이브가 지음을 받았으며 또한 아담이 속지 아니하고 여자가 속아 범죄 가운데 있었음이라(딤전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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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명령은 결코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자를 차별하여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서 취급하기 위한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여자들의 존재를 통하여 영적 질서를 말씀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섬기는 것은 곧 주님을 섬기는 삶의 모본을 보이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의 질서를 세움으로서 건전하고 건강한 가정을 이루고, 또한 교회 안에서도 건강한 교회를 이루는 기초가 되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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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이브(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벌로 남자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여자가 남자를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는 맞는 것 같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하고, 교회 안에서도 질서에 따라서 잠잠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하는 간증의 자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자의 순종과 질서에 따른 행위는 곧 믿음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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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들아, 너희 자신을 낮추어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과 같기 때문이니 그분은 그 몸의 구원자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아내들도 모든 일에서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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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의 간증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삶의 간증이 없이 바른 믿음의 생활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자가 주님의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자세는 바로 남편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남편에게 불순종하고, 무례하게 대했다면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반드시 해명해야 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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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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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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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교회 안에서의 여성"에 대한 퍼니쉬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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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료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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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모데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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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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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린도전서14: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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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갈라디아서 3: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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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린도전서 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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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의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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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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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오디아와 순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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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브리스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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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뵈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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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른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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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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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논의할 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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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퍼니쉬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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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회 안에서의 여성"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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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교회 안에서의 여성"에 대한 퍼니쉬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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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니쉬는 이 글에서 "교회 안에서의 여성"에 관한 논쟁에서 자주 인용되며, 다양하게 해석되는 바울의 본문들과 바울의 사역을 도왔던 여인들의 역할을 살펴봄으로써, 바울이 교회의 사역과 생활에 있어서 남녀가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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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료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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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니쉬는 "교회 안에서의 여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바울의 본문들을 검토함에 있어 먼저 이 구절들이 진짜 바울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바울을 해석한 후대의 것인지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비평학자들의 견해를 따라 에베소서, 골로새서, 목회서신(딤전.후, 딛)은 바울에 관한 "주석서"로,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등은 바울의 서신으로, 고전14:33b-36는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전제하고 본문들을 검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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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모데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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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제를 위한 중요한 본문은 2: 8-15이다. 바로 앞에 나오는 2: 1-7절에는 공중 기도에 관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으며, 8절에서는 남자들에게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권고한다. 본문은 계속해서 여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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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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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 관한 이 코멘트에는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은 없으며, 이와같은 내용은 헬라파 유대인에 의해서, 또는 아담과 이브에 관한 언급을 빼고는, 바울 당시의 세속적인 도덕가에 의하여 쓰여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가르침은 헬라와 로마세계의 윤리 교사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는데, 그 예로는, 신 피타고라스 학파(Neo Pythagoreanism)의 윤리적 논문(ethical treatise)과 플루타크(Plutarch)의 "신랑과 신부에게 준 충고"(Adivice to Bride and Groom) 제2장등이다. 뿐만아니라 이와 유사한 가르침은 유대교의 랍비의 전승등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딤전 2: 8-15에 나오는 여성에 대한 코멘트는 헬라 가치관 관습과 유대인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디모데전서를 쓴 크리스챤 저자는 바울 당시의 고린도 교회의 크리스챤들의 해이한 윤리와 같은 기독교의 상도를 벗어난 형태의 윤리를 거부할 목적을 갖고 크리스챤의 행위를 위한 엄격한 금욕주의 사상을 권장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가 여자들에게 자녀를 낳으라고 권고한 내용의 요지는 여자의 유일한 고유의 역할은 남편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자녀를 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찬 공동체 안에서의 결혼, 성, 그리고 가족의 합법성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결혼과 성과 가족의 합법성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여성을 보호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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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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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5:22-24과 골3:18은 성서학자들이 "가정의 의무의 목록"(tables of household duties)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본문들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책임뿐만 아니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책임(엡5:25-33; 골3:19),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책임(엡6:1-3; 골3:20),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책임(엡6:4; 골3:21), 주인에 대한 노예들의 책임(엡6:5-8; 골3:22-25), 노예에 대한 주인의 책임(엡6:9; 골4:1)을 기술하고 있다. 바울이(고전 7장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반드시 작용해야만 하는 것으로 강조한 상호책임의 원리(the principle of mutal responsibility)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는 다른 종류의 관계에 까지 적용하기 위하여 확대되어졌다. 이 두편지들 속에서 이 상호간의 관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가족의 구성원들의 공통적인 신분의 지위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최종적으로 하나님께만 책임이 있다. 에베소서 안에 나오는 가족의의무들의 전체 목록 앞에는 다음과 같은 명령이 나온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 이것은 바울 자신의 가르침을 법전화(codification)하고 확대(expansion)한 것이다. 법전화는 바울의 가르침을 체계화하고 있고 또 일반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음으로 좀더 많은 경우를 다룰 수 있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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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와 골로새서와 베드로전서와 같은 편지들 안에 있는 윤리적 법전과 목회서신 속에 있는 도덕적 규율에서 우리는 바울 자신의 편지들을 능가하는 사회적 제도와 구조와 정치적인 것과 교회와 가정에 대한 관심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 후대의 문서들을 우리 기독교 유산의 중요한 부분으로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가르침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혼돈해서는 안된다. 이들은 바울의 도덕적 교훈을 해석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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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린도전서 14:34b-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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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고전14: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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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성서 주석가들은 이 본문은(적어도 34-35절)은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그 이유는, 이 본문은 여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해야 하며 또 여자는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배워야 한다는 딤전 2:11-12절의 가르침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고린도전서 다른 곳에서 이 본문과 비교해 볼 수 있는 유사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없었던 어떤 후대의 서기관의 크리스찬 예배에 대한 바울의 논의 끝 부분에 첨가한 것에서 비롯된 하나의 난외 주(the marginal notation)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의견에 따라 살펴볼 때, 이 본문은 후대의 자료가 성서 안에 삽입되는 "개찬"(interpolation)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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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들이 바울의 글이 아니라 후대에 삽입된 하나의 개찬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 "허락함이 없나니"라는 표현은 전에 제정된 어떤 규정을 돌아보는 듯이 보인다.(예를 들면, 딤전2:12). 바울은 그의 윤리적 가르침을 이런 방법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복종할 것이요"라는 표현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윤리적 법전에서 볼 수 있는 판에 박힌 듯한 형식의 표현을 반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구절들은 고전 11:2-16절의 말씀의 내용과 모순된다. 바울은 여기서 여자도 공적 예배에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자는 남자와 똑 같이 기도와 예언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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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갈라디아서 3장 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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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여성이 갖는 지위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찾아보기 위하여 갈3:27-28을 다루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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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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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여기서 바울은 교회가 세례식에서 사용하던 전통적 증언을 인용하거나 또는 암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같은 신앙고백문이 롬 10:12, 고전 12:13, 골 3:11에도 반영되어 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은 모든 세상적인 차별의 장벽이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즉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구별이 없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크리스챤도 민족적 특성과 성적 특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이미지를 발전 시킬 때에 동일한 세례식에서 사용되던 신앙고백적 증언이 고전12:13절에 반영된 것은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전 12:13절에서 세례식에서 신앙 고백문을 사용할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는 언급을 생략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도 여자도 없다"는 원리에 대한 오류(고린도 교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온전히 헌신하기 위하여는 결혼 생활과 성생활을 전혀 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를 바로잡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에서 였다. 바울의 이 원리는 성의 부정을 요구한다고 해석한 것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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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고전 12장에서의 은사와 기능의 다양성에 관한 논의 중에는 인종의 기원과 계급 구조에 있어 개인의 지위와 남녀의 차별은 암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갈 3:27-28절에서 세례시의 신앙고백문을 인정하면서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밝혀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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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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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 속에서의 바울의 논의는 교회 좀더 구체적으로 고린도 교회 안에서의 여자들이 갖는 역할과 기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바울의 논의는 좀더 구체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었지 결코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이론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바로 이 문맥 속에서도 그리스도 안에는 "여자도 없고 남자도 없다"는 원리를 분명히 볼 수 있다. 이런 결론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다음과 같이 네가지를 검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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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은 그가 고린도 교회에서 직면하고 있었던 좀더 근본적인 신학적 문제 때문에 교회 안의 여인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로 걱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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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써야한다는 생각은 바울이 창안해 낸 것이 아니라 당시 문화의 일부분이었다. 유대교에서와 로마의 관습("The Roman Questions", 267A)에서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었으며, 이런 관습은 바울에게 있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전 11:14-15). 고린도 교회 안의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외출하는 것은 그 여자들이 자기들의 성의 정체성(sexual identity)을 부정하려는 하나의 시도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는"남자도 여자도 없다"는 원리에 대한 오해를 보여주는 또 다른 징표라고 바울은 생각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 속에서 말하고 있는 바울의 가르침은 당시의 전통적인 교훈이었고 혹시 한 도시 안에 있는 회준들 안에서 야기되는 특별한 신학적 혼란에 대한 관심을 반영해 주고 있는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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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기서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은 남녀의 성을 구별짓는 것이지 결코 한 성을 다른 성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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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울이 "하나님-그리스도-남편-여자"를 하나의 계층적 순서로 배열하면서 우월한 존재로부터 열등한 존재의 순서로 기술하면서 열등한 존재는 자기 보다 우월한 존재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 쉬우나, 권위-복종 주제(the authority-subordination theme)는 바울이 생각한 것이 아니라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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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고린도전서 첫부분에도 같은 내용의 말씀이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3:23)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또 완성하기 위하여 사용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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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머리"를 의미하는 헬라어는 영어에서와 마찬가지로 "관리하는 자 또는 보호자"를 의미하기 위하여 은유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낱말은 또한 "근원" 또는 "기원"을 뜻하는 은유로 사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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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우리는 7절에서 "머리"라는 낱말 대신에 "형상"과 "영광"이라는 낱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고 말하고,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분명히 여기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할 것을 원하고 있다. 그의 이런 바램은 고린도 교인들이 너무 지나친 종교적 열정 때문에 남녀를 구별하는 것을 무시하고 있는 것에 대한 그의 관심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는 여자는 반드시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최종적 결론을 내리는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여자 신도들이 교회의 예배에 참석할 때에는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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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울은 그의 논의 가운데서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는 원리를 다시 단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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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2-16절 안에 나오는 바울의 논의는 복잡하다. 그러나 그 모든 논의 속에서도 중요한 요점은 남녀간의 상호 의존성과 남녀가 모두 하나님의 주권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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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 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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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본문안에서의 바울의 전체 논의는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공예배를 인도하는데 참여할 수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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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속에 있는 이런 전제는 4-5절안에 명백히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바울은 남자와 여자가 꼭같이 예배를 인도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고전11:4-5) 바울이 여기서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여자가 공예배시에 기도하거나 예언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여자가 공예배시에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에 머리에 수건을 썼느냐 아니냐이다. 사실 바울의 전체 논의의 핵심은 여자도 공예배를 인도함에 있어 온전히 참여할 수 있다는 전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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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의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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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의 편지들 속에 언급되어 있는 여인들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는 원리를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원리를 그의 삶 속에서 실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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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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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전 1: 11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안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글로에를 통해서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고전1:11) 글로에 집 사람을 통해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보고를 들은 것을 보면 글로에는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중간에 서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불신자라기 보다는 크리스찬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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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오디아와 순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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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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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경 구절들은 바울의 사역 속에 나오는 여성들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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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의 불화가 상당 중요한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단지 말다툼하는 두여인의 경우"로 가볍게 넘겨버릴 수 없다. 바울은 이 불화를 중대한 사건으로 다룬다. 이것을 보면 여성들이 그들의 교회 안에서 특별히 중요한 책임을 수행하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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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바울이 이 두여인이 자기와 "복음에 함께 힘쓰던 자들"이었다고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여인들이 "그레멘드와 그외에 나의 동역자들과"함께 일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두 여인들이 빌립보 교회 안에서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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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로, 비록 우리는 이 두 여인들에 관하여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들의 이름이 "생명책 안에"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빌립보 교회에서 중요한 지도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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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브리스가(브리스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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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전서 끝 부분에서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 16:19)라고 언급한다. 여기에서 바울이 복수형 소유겨인 "그들의"(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를 사용한 것은 바울의 결혼관을 반영해줄 뿐만 아니라 브리스가가 교회 안에서 지도자로서 중요하다는 그의 이해를 반영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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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6:3-5절에서 바울은 이들에 대해 아무런 주저함이나 차별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역자들"이라고 언급한다. 더욱이 이들 부부의 이름이 모두 언급되어 있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세 경우중 두 경우에 있어서 브리스가의 이름이 더 먼저 나온다. 이들 부부 중에서 아내인 브리스가가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바울뿐만 아니라 후대 교회까지도 인정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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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8장 26절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당대에 유명한 설교가였던 아굴라에게 신학을 가르쳤는데, 이 때에도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앞서 언급되며, 이런 광경은 딤전2:12절의 규율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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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뵈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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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롬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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뵈뵈는 겐그리아 교회의 제직 중에 하나였는데, RSB는 그녀를 "여집사(deaconess)"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그녀가 "여러사람과 나의 보호자"였다고 언급한다. "보호자"라는 헬라어 낱말은" ...앞에 서 있는 자"를 뜻한다. 고대 헬라 문헌에서 이 낱말은 종종 "투표장 감독관"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이 낱말은 또한 "보호자", 또는 "후원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낱말이 "종교 단체의 직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즉 이 낱말은 대제사장, 서기관, 관리인들, 그리고 "수탁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명사를 여성형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선례를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고있는 용어를 해석함에 있어서 뵈뵈가 교회와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롬16:2절에서 바울은 뵈뵈가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했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녀를 "보호자" 또는 "후원자"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뵈뵈의 기능을 "여자 보호자"의 개념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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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른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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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6장에서 바울이 뵈뵈를 칭찬하면서 그와 같은 부류 속에 속하는 몇 명의 다른 여자들이 있다. 마리아(6절), 드루배나와 드루보사는 아마 쌍둥이 자매였을 것이다(12절). 사랑하는 버시(12절). 이름을 알 수 없는 루포의 어머니(13절). 율리아와 또 네리오와 그 자매(15절). 압비아(몬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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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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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는 원리를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으며 또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되었으므로 신자들 간에도 서로 긴밀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확신에 이 원리는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의 새로운 정체성 그리고 참으로 궁국적으로 중요한 정체성인 그들의 정체성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신자들의 인종적, 민족적, 법적, 그리고 성의 정체성은 파괴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 안에서 계속되는 크리스찬의 존재와 삶은 "그리스도 안에"있는 새로운 존재에 의하여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제한을 받고 또 변형될 수 있다고 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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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성에 관한 문제에 대한 바울의 구체적인 가르침 속에는 그가 확증하고 있는 원리와 모순되는 것이 없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검토해보아야할 가장 중요한 본문은 고린도전서 11장2-16절이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모든 면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종종 인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바울이 이 본문을 기록해야했는가 그 상황을 참작해야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자는 모든 면에서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에 그의 논의를 적용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그가 의도하는 것은 여성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그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 본문의 본래의 의도는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는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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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 원리가 말뿐만 아니라 실천면에 있어서도 바울에 의하여 확증되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바울이 그의 사역에서 만났던 가까운 동료들 가운데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의 교회들 안에서 활동하던 탁월한 지도자들 가운데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은사와 기능과 성취한 업적들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에서 과소평가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몸안에는 남녀차별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성차별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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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논의할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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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퍼니쉬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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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퍼니쉬는 바울의 "교회 안에서의 여자"에 대한 논의의 핵심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라는 모든 세상적인 차별의 장벽이 무너지지만은, 민족적 특성과 성적 특성의 구별까지도 없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는데 이것은 바른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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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퍼니쉬는 바울의 여성에 관한 구체적인 가르침은 그가 선포한 원리와 부합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지적하면서, 많은 경우에 있어 남녀의 지위에 관하여 말한 것으로 오해되어 왔었던 고전 11:2-16절의 본래 의도는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는 원리를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옳은 해석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배경이나 전체 내용에 흐르고 있는 주제를 무시하고 문자나 단어에 얽매이는 것은 옳은 해석 방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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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퍼니쉬는 바울이 말뿐만 아니라 실천면에 있어서도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는 원리를 확증하였다고 지적하면서, 그 증거로 바울의 사역에 동참했던 여성들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좋은 지적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의 여성"에 관한 직접적인 바울의 언급에서뿐 만 아니라, 그의 사역을 도왔던 여인들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뚜렷하고 확실하게 바울의 주장과 실제적인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알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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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퍼니쉬는 본 주제를 다룸에 있어 먼저 자료의 문제를 다루는데, 에베소서, 골로새서, 목회서신을 바울 후대의 기록으로 돌린다. 그런데 이것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이 구절들을 후대의 기록으로 돌려 바울의 가르침과 무관한 것으로, 또는 모순되는 것으로 보기 보다는 전체적인 정경의 내용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더 깊이 살폈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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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퍼니쉬가 고전14:34-36절은 딤전 2:11-12절의 가르침을 상기하고 있고, 이 구절들은 여자도 공적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고전11:2-3절의 말씀의 내용과 모순된다고 했는데, 이같은 주장은 바울의 견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바울이 고전 14장에서 여자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한 것은 교회 내에서 어떤 일이나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일반적 명령이 아니다. 그가 의도한 것은 남편들이 예언의 메시지를 토론하거나 평가하는데 그런 일에 끼어드는 태도나 논쟁적인 태도를 보이지 말고 집에 가서 조용히 남편에게 문의하고 배우라는 것이다. 35절에서 바울의 목적은 아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편들을 향해 권위를 잘못 행사하는 일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교회 내에서는 여성들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자의 공적 예배 참석에 대해 언급하는 고전 11:2-3절과 결코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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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회 안에서의 여성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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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우리는 바울의 "교회 안에서의 여성"에 관한 교훈에 대한 퍼니쉬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퍼니쉬가 지적한대로 바울의 핵심적인 원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갈3:28)는 것이다. 남녀는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남녀 모두다 존귀한 가치를 지닌다. 여기에는 열등과 우등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맡은 바 직임을 감당함에 있어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이미 바울의 교훈에서나, 그의 사역에 동참했던 여성들의 역할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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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우리의 교회는 아직도 여성의 교회의 위치에 있어 개방적이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 여성을 동역자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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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가 말씀 전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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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고린도 전서 14장 34절의 말씀과 디모데 전서 2장 12절에서 바울은 모두 여자의 교회 중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한다고 말했다. 여자가 교회 중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마땅한지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만약 모든 여자들이 말씀전하는 것이 불가하다면 감히 묻는 것은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18절, 21장 9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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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고린도전서 14장 34절의 첫 구절은 『모든 성도들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같이」라는 말은 모든 각지에 있는 교회들이 동일한 실행 안에 있어야 함을 가리킨다. 고린도전서 1장 2절과 10장 32절은 하나님의 교회를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온 성도들의 교회를 본다. 『하나님의 교회』는 교회를 조성하는 성분을 가리킨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요소로 조성된 것이다. 『성도들의 교회』는 교회들의 구성요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교회는 성도들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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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절은 『여자들은 교회들 안에서 잠잠하라 이는 저희의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아니하였나니 오직 복종할 것이요』라고 말한다. 「교회들 안에서」라는 구(句)는 교회의 집회들을 가리킨다. 11장 5절에 의하면 여자들도 그들의 머리를 덮은 채 예언할 수 있다(물론 공중 앞에서). 그리고 사도행전 2장 17절과 18절, 21장 9절은 예언하는 여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확증한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서는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 즉 권위로써(여기 가르침은 권위의 사용에 관계된다) 가르치고 교리를 정의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원칙에 의하면 교회 집회 안에서 여자들이 말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것은 여자들이 권위를 가지고서 교리를 정의한 것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교회 집회 안에서 잠잠해야 한다. 그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것은 그분의 통치 안에 있는 하나님이 정하신 권위의 문제에 관계된다. 하나님의 통치적인 규정 안에서 여자들은 남자 위에 권위를 가지고서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기도하고 예언할 수 있다. 즉 주로 주님을 위해 말하고 주님 자신을 말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형제들의 덮음(the covering) 아래에서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기에서 복종하도록 권고 받기 때문이다.

34절에 있는 「율법」은 모세가 쓴 책을 가리킨다(마 5:17, 7:12, 11:13).모세의 글 중 창세기 3장 16절은 여자에게 남자의 다스림에 복종할 것을 권고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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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장 34절을 성경에서 독립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우리는 성경은 성경으로 성경에 의해서 해석해야 한다. 신약전체의 가르침에 의하면 자매들이 예언은 할 수 있으나 교리를 정의할 수 있는 권위는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형제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더욱이 어떤 심각한 이단들이 여자들을 통해 들어온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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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나는 주님을 전시간으로 봉사하기 위해 직업을 포기하고서 상해(上海)에 있는 니(Nee) 형제님을 방문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내게 형제회 실행의 영향으로 그들은 자매들이 집회에서 말하는 것은 물론 기도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십 일년 동안이나 그러한 실행을 따랐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니 형제님은 만일 자매들이 집회에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반쪽은 중풍병에 걸려 기능이 끝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집회에 손상과 손실을 가져왔으며 그로 인해 니 형제님은 이 상황을 어떻게 교정해 나갈 것인가를 고려하게 되었다. 그는 이 문제를 내게 언급하고 나서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자매들이 집회에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교리에 관계된 것을 결정하는 한 예이다. 그와 같은 결정은 권위와 관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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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있는 이 같은 결정이 바울이 33절에서 언급한 말하는 것과 같은 종류이다. 그는 교회 집회에서 자매들이 형제들 위에서 권위를 사용하여 말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이 구절을 이렇게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것을 자매들이 머리를 덮고 기도나 예언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11장과 조화시킬 수 없다. 이것은 자매들이 그들의 머리를 가리는 한 집회에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고린도전서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6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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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2장 11절에서 바울은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고 말한다. 종용함은 조용함을 의미한다. 어떤 자매가 조용함과 일절 순종함 안에서 배우는 것은 여자로서의 그녀의 위치를 깨닫는 것이다. 이것은 지방의 모임 안에서 자매들을 그들의 위치를 벗어나는 주제넘음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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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은 계속해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가르치는 것은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는 것 또는 거룩한 진리에 관한 교리의 의미를 정의하거나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자가 이러한 방법으로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그녀의 위치를 떠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남자는 머리로 정해졌으며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도록 되어 있다(고전 11:3). 이러한 정함이 교회 안에서 지켜져야 한다. 12절에 있는 종용함이라는 말은 말하는 것에서 조용히 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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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에서 바울은 설명의 말을 제공한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이것은 우리를 시작으로 이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그분의 시작으로 되돌리기를 원하신다(마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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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에서 바울은 이어서 『아담이 속지 아니하였고 여자가 먼저 속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말한다. 13절은 여자가 남자에게 자신을 복종시켜야 하는 첫 번째 이유를 말한다. 두 번째 이유는 이것이다. 이와는 아담의 머리됨 아래의 복종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녀의 머리를 덮지 않은 채 악한 미혹자를 직접 접촉함으로 그녀의 위치를 벗어났기 때문에 뱀에게 속았다(창 3:1-6). 이것이 사도가 지방의 모임 안에서 자매들이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나 또는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조용함 안에서 배우고 일절 복종함 안에 머무르라고 말하는 강한 근거이다. 남자의 머리됨이 여자의 보호이다.(디모데 전서 라이프스타디 메시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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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워치만 니)는 한 자매가 나를 위하여 수년간 기도했고, 또 다른 나이 많은 자매를 통하여 인도되어 주님께로 돌이켰습니다. 나의 영적인 생명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것은 바로 두 명의 서양 자매였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중요한 것은 결코 개인의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여자는 형제에게나 혹은 형제들이 있는 집회 중에서 가르칠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는 감히 응답할 수 없습니다. 무릇 이러한 문제의 발생에 대하여 자신이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면 마땅히 스스로 성경을 고찰하여야 합니다. 친애하는 자매들이여, 나는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여러분을 득죄하게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요 3:11). 만약 주님이 참으로 여러분들이 이렇게 (교회 중에서 가르치는 것) 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면, 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감히 여러분의 말을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성공하기를 원하고 또한 주님께서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여러분에게 기름부으시기를 원하며, 또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충심으로 고하는 말은, 바로 알지 못하면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뒷자리에 앉아 한 자매의 말씀 전하는 것을 듣기를 원하며, 그녀의 가르침을 받으며 또한 기도로써 그녀를 돕고 그녀의 사역에 효과가 있기를 원합니다. 나 자신은 다만 성령의 강령과 원칙을 알 뿐입니다. 개인에 대해서는 어떠합니까? 나는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시길 원합니다. 형제들이여, 만약 당신들이 성경에서 여자들이 집회 중에서 말씀 가르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한 것으로 여기고 당신들이 또한 여자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만나게 되면, 청컨대 조심하여 즉시 반대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개인에 대하여 항상 마음에 둘 뿐,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는 태도를 취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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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4장 4절의 가르침은 마땅히 전부 실제적으로 준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성경의 원칙에 대하여 우리는 마땅히 가르쳐야 하고, 개인의 행함에 있어서 (당신이 만약 이 가르침을 안다면) 우리는 결코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매들로 교회 중에서 말씀을 가르치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녀자가 교회 중에서 말씀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늘 사람들이, 주님은 그분의 예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남자들이 실패한 연고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에서 드보라를 일으키셨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역시 이러한 예외가 있습니다. 드보라의 사사로서의 시비를 우리는 지금 말할 수 없습니다. 간단하게 말하기 위해 그것을 옳다고 해봅시다. 그러나 드보라는 결국 몇 명입니까? 참으로 오늘날 형제들이 실패한 것은 가장 비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마 특별히 새로운 드보라를 일으켜 세워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여자들이여, 여러분 개개인이 드보라라고 말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권리가 있으시나 우리는 결코 그분의 이러한 예외적인 것을 자신의 행동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권위를 행사하신 적이 있는지 없는지 여러분은 마땅히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권위를 행사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로 특별히 형제들이 있는 집회 중에서 말씀을 가르치게 하셨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사역을 축복하시기 원합니다.(워치만니전집 제1집 제7권제16장,164-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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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2:11-15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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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내면과 일치하는 겉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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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중심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만 그런 것처럼 꾸미는 것을 위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보시지 않으십니다. 때문에 외모로만 그 자신을 꾸미려는 것은 분명히 문제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속 중심에 주님을 모셨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모신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 역시 문제입니다. 주님을 모시기만 하면 되었지 생활이야 어떻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그래서 무엇을 보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즐기든지, 어떤 옷을 입든지 큰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위험한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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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요,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믿는다면 우리는 함부로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서 한 행동이지만,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한 행동이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며 다른 사람의 지각을 흐리는 것이 된다면 한번쯤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이 문제는 많은 고민을 하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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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저는 여자가 입어야 할 옷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 디모데 전서 2장 9절이 말하는 "단정한 옷으로 자기를 꾸미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타스톨레라고 해서 "아래까지 길게 흐르듯이 드리워진 옷"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꼭 죄이는 청바지라면 그것은 카타스톨레가 아닙니다. 또 하체의 곡선을 그대로 부각시키는 스판이라면 역시 카타스톨레가 아닙니다. 미니스커트는 어떻습니까? 그것도 역시 카타스톨레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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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는 이미 여자들이 치마를 입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시대의 남자들이 입는 옷을 스톨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브리치라고 하는 바지와 함께 위에 걸치는 스톨, 거들이라고 하는 벨트로 구성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허리를 동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여러분에게 설명 드렸습니다. 물론 오늘날 그 같은 형태로 옷을 입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남자가 여자에게 속한 옷을 입지 말고 여자가 남자에게 속한 옷을 입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신22:5).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옷에 구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화장실 안내 표지판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고, 우리 조상들의 옷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성경에서도 치마가 여성을 위한 옷이며 바지가 남성을 위한 옷이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분위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디모데를 향해서 어떻게 여자가 그 자신을 꾸며야 하는지를 일러 준 것입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 혹은 라틴어로 "다이아나"라는 여신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신전을 중심으로 많은 창녀들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장식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금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 그 자신을 꾸몄습니다. 그리고 신전에 숭배하러 온 많은 여행자들을 유혹하며 몸파는 일로 하루하루를 지냈습니다.

만일 교회에 안에 있는 여자들에게 옷차림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고 그녀들이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한다면 그 에베소 교회는 당장 그 곳에서 유행하는 여자들, 곧 창녀들이 즐겨하는 복장이라도 거침없이 들어올 판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으며 "이 세상과 동화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상 자체가 죄는 아니더라도 죄를 장려하는 요소들이 많기 때문에 주의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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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옷을 고르는 것에 대해 한번쯤 고민이 되었다면 그래도 소망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여자의 처신에 관한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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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교회 안에 있는 여자에게 금해진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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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공중예배를 드리게 될 경우, 여자에게 금해진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가르치는 것(to teach)이며 또 다른 하나는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to usurp authority over the ma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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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남자들을 가르치는 것이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어떠한 경우에도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어떤 교사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런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여자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여권신장을 부르짖는데, 교회라고 그렇게 못하란 법있냐?"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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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들은 성경의 여기저기서 여자들이 활동했었던 예를 들어 말합니다. 특히 여자들도 대언자였다는 것입니다. 대언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님의 감동하심 아래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안에는 경고, 책망, 위로, 예언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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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전도자였던 빌립에게는 처녀 딸 넷이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대언을 하였습니다(행21:9).

예수님께서 나실 즈음에 활동했던 아셀지파에 속한 바누엘의 딸 안나도 역시 대언자였습니다. 그녀는 구속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대언하였습니다(눅2:36).

그런 관습으로 인해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대언하는 여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고전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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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에는 델피라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신전에는 여자 사제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교도를 숭배하는 그 자리에서 여자들은 사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또한 음란한 일들의 주범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영향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여자들이 대언을 한다고 설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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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자가 대언을 하는 것은 주님의 교회 안에서 결코 권장되거나 칭찬 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고 기도하거나 대언하는 것 자체가 자기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11:5). 여자의 머리는 남자(고전11:3)라고 했습니다. 머리를 덮는다는 것은 남자의 권위에 순복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자는 자기들의 머리에 권능을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고전11:10). 만일 여자가 남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교회 안에서 함부로 대언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 남편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더 정확하게 고린도 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써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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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잠잠할지니 이는 주께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고 또 율법도 말하는 바와 같이 여자들은 순종하도록 명령을 받았음이라. 여자들이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이는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이 수치스런 일이기 때문이니라."(고전14: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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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여자들을 향해 벙어리가 되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교제를 위한 대화는 충분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나서서 이러쿵 저러쿵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르면 자기 남편을 통해서 배워야 하지, 자기의 모르는 것을 정당화시키면서 교회 안을 어지럽히는 말들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율법에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교회에게 주는 명령이기도 했습니다.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주님께서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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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여자가 교회 안에서 가르칠 수 있도록 허락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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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자는 교회 안에서 전혀 가르칠 수가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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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로한 여자는 젊은 여자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연로한 여자들도 이와 같이 거룩함에 합당하게 처신하도록 하며 거짓으로 비난하지 말고 자기를 많은 술에 내어주지 말며 선한 것들을 가르치는 자가 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젊은 여자들을 가르쳐서 맑은 정신을 가지며 자기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신중하며 정숙하고 가정을 지키며 선하고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독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딛2:3-5)

이 말씀에서 보듯이 연로한 여자는 젊은 여자를 가르칠 수가 있었습니다. 젊은 여자로 하여금 가정에 충실하도록 가르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연로한 자매님들이 가정이나 삶에 대해 가르칠 때, 젊으신 자매님들은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같은 자매라 하여 연로한 분들에 대해 함부로 행동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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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리스도인 여자는 그녀의 자녀들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여자가 가르칠 수 있는 경우는 자기의 어린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녀의 가정에서 자녀들을 신앙으로 바르게 가르치는 역할이 여자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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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 속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이 있음을 회상하노니 이 믿음은 먼저 네 할머니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었으며 이제 네 속에도 있는 줄을 내가 확신하노라"(딤후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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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가 에베소 교회의 감독으로 세우심을 입기까지 그는 그의 가정에서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던 것입니다. 이 훌륭한 신앙 가르침이 있었기에 디모데라는 훌륭한 사역자가 생겨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디모데가 어린 아이 때부터 성경을 가르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딤후3:14,15).

나는 자매님들이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자녀들을 바르게 인도해줄 수 있는 성경교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자녀를 양육하는 경험이 있는 자매님들이 교회 안에서 어린이 주일학교나 중고등부의 교사로는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바랍니다. 그것은 전혀 틀린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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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그리스도인 여자는 아직 회심하지 않는 남자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남자를 주관하려는 식의 가르침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면 예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아직 제대로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면 여자라도 그들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복음을 전하는 차원으로 이해해야 할 일입니다. 요한의 침례만 받았던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길을 더욱 완전하게 풀어 설명해준 사람은 아굴라와 그 아내 브리스 길라였습니다(행18: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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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들 외에 여자는 항상 교회 안에서 조용해야 했으며 교회가 요청하는 어떤 일들을 지키거나 돕는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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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러면 왜 이같은 일들이 여자에게는 금해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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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창조의 질서 때문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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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그 뒤에 이브가 지음을 받았으며"(딤전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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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그 다음은 이브였습니다. 처음 여자를 이브라고 부른 것도 아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브의 이름을 지어준 것도 아담이란 뜻입니다(창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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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시대에 아담과 이브 말고도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들 중에 아담의 후예가 아닌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아담이 첫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창3:20)을 자세히 보십시오. 이브는 모든 살아있는 자의 어머니(the mother of all living)였습니다. 그 당시의 모든 사람은 이브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브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브의 머리는 확실히 아담이었습니다. 창조의 질서에 의해서 그렇게 정해진 것입니다.

그 이후로, 지금껏 모든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복해야만 하는 위치를 갖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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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고통과 수태를 크게 더하리니 네가 고통 중에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의 욕망이 네 남편에게 있으리니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he shall rule over thee)"(창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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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브에게 그 남편의 다스림 아래 들어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온당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교회 안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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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들아, 너희 자신을 낮추어 남편에게 복종하기(submit yourselves unto your husbands)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아내들아, 너희 자신을 낮추어 남편에게 복종하라(submit yourselves unto your husbands). 이것이 주 안에서 합당하니라"(골3:18)

"옛적에 하나님을 신뢰한 거룩한 여자들도 이런 방식으로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여(being in subjection unto their husbands) 자기를 단장하였음이라"(벧전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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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관계에 있어서 남편이 권위자로 세움을 입게 된 것입니다. 권위란 그것이 계급은 아니라 하더라도 존중되어야 하며 또한 권위자를 향해 복종이 요구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권위자는 그에게 주어진 권위로 권위에 순복하는 자들을 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옛적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한 자매들은 자기 남편을 권위자로 알고 존중했었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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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창조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었음이라"(고전1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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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이브를 만드실 때, 아담을 돕는 자로 만드셨습니다(창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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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형상이기 때문에 기도를 할 때에 라든지 대언을 할 때에 그 머리를 덮지 않습니다(고전11:7). 모든 남자들이 간혹 모자를 쓴다 하더라도 기도할 때는 벗어야 합니다. 그 자신의 머리를 덮는 것은 자기 머리인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고전11:4).

여자는 남자의 영광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머리로 하고 그 남자를 드러내는 것이 주된 삶의 자세입니다. 머리를 덮지 않고 기도하거나 대언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녀는 그 머리인 남편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고전11:5). 그러나 만일 여자에게 긴머리가 있다면 그것은 그 머리를 덮는 것 대신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남자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고전11:15). 만일 여자의 머리가 짧다면 그것은 그 자신에게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고전11:6). 남자의 권위를 무시하고 스스로 남자와 같게 되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 머리를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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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질서에 의해서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며 권위 행사자입니다. 다른 사람의 권위 아래 있는 여자가 다른 권위자들, 곧 다른 여자들의 남편들을 주관하며 그들을 가르치거나 그들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무질서입니다. 오직 여자는 자기 남편에게 배우며 조용하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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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했습니다(딤전3:2). 그는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남자이어야 합니다(딤전3:5). 집안을 다스리는 권한이 그 남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집안을 잘 다스린 남자가 주님의 교회도 돌아볼 수 있다고 권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선명하게 있는데 여자가 한 교회에서 권위자와 머리역할을 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대한 무지이며 무질서를 조장하는 지름길입니다. 분명히 처음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에서 남자는 권위자로 설정되었고 여자는 돕는 자로서 설정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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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위치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가 생각해보고자 하는 문제는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자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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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아담이 속지 아니하고 여자가 속아 범죄 가운데 있었음이라."(딤전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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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자가 속아 범죄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 아담이었기 때문입니다. 뱀이 여자를 유혹했던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동산 나무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어느 정도 대답은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가 아담으로부터 전해들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단지 이것이 추측이 아닌 것이, 그녀는 뱀이 물었을 때, 몇 가지에 대해 대답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에 관한 금령은 아담이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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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하나님께서 그 남자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동산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은 네가 마음대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반드시 죽을 것임이라, 하시니라."(창2: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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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하나님은 처음에 그 말씀을 남자에게 주셨고 그 남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하도록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이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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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여자는 더 약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여자는 마귀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마귀가 유혹할 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뱀이 남자를 유혹하지 않고 여자를 유혹한 것을 보십시오. 그것은 여자가 더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여자가 다 약하다고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잔다르크도 있고, 엘리자베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때, 여자로 하여금 남자의 보호아래 있게 했습니다. 여자는 그래서 약한 존재, 보호가 필요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공급이 남편으로부터 필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때문에 어떻게 다른 이들를 지키며 그들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특히 다른 사람의 아내인 여자가 그래서 한 남자의 보호 아래 있는 여자가 어떻게 다른 남자들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목양자는 성도들의 보호자와도 같은 것입니다. 물론 서로 돕는 역할은 할 수 있다하더라도 책임과 보호를 하는 권위자의 위치에는 설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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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들아, 이와 같이 너희도 지식에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그녀를 더 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자로 여기고 존중하라. 그리하여야 너희 기도가 방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벧전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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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알고 있습니다. 여자가 유혹받기 쉽다는 것을...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여도 자기 생각이나 어떤 의견들을 가감하므로 넘어지기 쉽다는 것을...그러한 연약한 그릇이 다른 남자들의 권위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교회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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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속아 범죄한 것이 누구입니까? 여자입니다. 비록 여자가 이렇게 약하고 범죄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그들이 맑은 정신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과 거룩함 가운데 거한다면 그녀들이 구원받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딤전3:15). 그러나 어쨌든 주님의 교회 안에서 여자는 남자의 권위 아래 있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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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여자 목사들에 대한 평가

그러므로 모든 여자 목사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종"이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 되어진 종"이 분명합니다. 모든 여자 목사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권위에 대해서 하나도 알지 못합니다. 모든 여자 목사들은 가정의 질서와 교회의 질서도 잘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여자 목사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중적인 자와 같습니다. 모든 여자 목사들은 그들 스스로 상받을 수 없는 허망함 속에 빠져 있으면서 성도들에게 보상을 위해 달리라고 말하는 공허한 자들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 스스로 법대로 경주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법대로 경주하라고 주문할 수 있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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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바울은 왜 이런 권고를 디모데에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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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나는 젊은 여자들이 결혼해서 자녀들을 낳고 가정을 지키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딤전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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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해서, 자녀를 낳는 것, 그리고 그 가정의 안주인으로서 가정을 지켜가는 것,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처럼 여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며, 다른 남자들을 가르치거나 주관하려 들어서도 안되며, 조용히 자기 남편에게 배우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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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바울이 왜 이것을 에베소 교회에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것은 에베소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여자들에게 그들의 단정함과 교회 안에서의 처신에 대해 가르칠 필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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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님의 교회인 우리 교회가 성경이 가르쳐주는 원리들을 무시하지 않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 바랍니다. 구약에 드보라가 여자 사사였고, 이따금씩 여 대언자들이 등장한다하더라도, 또 어떤 교회에서 대언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여자가 말하는 것이나 가르치는 것, 권위를 행사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전에 활동하던 여대언자들은 특별한 경우였거나 아니면 스스로 그렇게 행동한 것으로밖에 보여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2002년 8월 4일 주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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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의 여성

권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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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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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남성들에 비하여 가정생활에서나 사회적 활동에서 많은 제한과 차별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물론 아직도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엄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다른 시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향상되어진 것도 사실이다. 우리들의 주위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고, 또한 "남녀평등"이나 "여성해방"과 같은 슬로건들이 이젠 그렇게 낳선 것으로 들리지 않는다. 고대 사회에 비하여 여성의 위치가 부상하였고,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달라진 현재, 교회에서도 시대의 역동적인 변화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와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여성의 위치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진보주의적인 교회들은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과제와 위치에 관해서 많은 고려를 해왔고 여성들에게 목사직을 포함하여 공적인 직무를 개방하여야 한다고 결론 짓는다. 반면에 보수주의적인 교회는 여자들에게는 목사직을 포함하여 어떤 공적인 직무들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대립적인 상황에서 어떤 입장이 더 타당한가?라는 문제에 우리가 접근함에 있어 역사적인 접근이나, 사회적인 접근을 시도하기 보다는 성경에 대한 바르고 진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즉 교회 안에서의 여성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이야기 하며, 그 구절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바른 주석적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해답은 성경 안에 있기 때문이다.

본 고는 이런 필요성에 따라 성경에 나타난 여성에 관한 구절들을 해석함에 그 목적이 있다. 특히 바울의 서신들에 있어 여성의 위치에 대해 긍정적인 구절들과 부정적인 구절들에 대한 바른해석을 시도하려 한다. 이런 목적을 위해 필자는 먼저 고대사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살펴보고, 구약과 예수님의 가르침에서의 여성의 위치, 그리고 바울 서신들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끝으로 이 모든 것 위에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재 정립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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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본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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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사회에서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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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회에서는 여성에 대하여 매우 비하적인 입장에 서있었다.

플라톤은 "악한 남성의 환생"이 여성이라고 암시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을 근본적으로 "본성이 결핍된 존재"로 보았다. 그래서 여자는 잘 웃고 쉽게 성내고 질투하고 또 불평이 잦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리스 철인들의 여자에 관한 이러한 생각은 초대 교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터툴리안은 여성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문"이라하여 여자의 사악하고 나쁜 점을 극명하게 묘사하였다. 어거스틴은 여자는 남자와 함께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형상을 발휘할 수 있고 남자없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질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은 여자는 남자가 있어야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존재가치를 가진다는 말이다.

6세기의 보에티우스는 여자를 "시궁창 위에 세워진 성전"으로 비유했다. 바깥의 외모는 성전같이 깨끗이 단장되어 있으나 속은 시궁창과 같다는 말일 것이다. 중세에는 여성이 육체만의 존재가 아니라 불멸의 영혼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부들이 남성과 여성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이원론적인 개념을 극복하려 노력하였으나 그도 역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파악한 데 있어서는 별다른 점이 없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대로 고대 사회에서의 여성들은 많은 남성들에의해 멸시와 천대로 대하여져왔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여성들은 단지 갖고 노는 노리개나 또는 섹스의 상대, 급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요리사, 주부, 보모, 아니면 이성적 토론 같은 것에는 끼어들 만한 능력도 없고 두뇌도 없는 멍청이 쯤으로 흔히 대접을 받아왔던 것이다. 여성의 재능들은 평가를 받아보지 못했고, 그녀들의 개성은 질식되었으며, 그녀들의 자유는 축소를 거듭해 왔고, 어떤 분야들에서의 여성들의 직업은 착취를 받아왔으며, 기타 분야에서는 거부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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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경에서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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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구약에서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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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회와는 달리 구약성경 안에서의 여성들에 대한 언급은 매우 변호적이고 호의적이었다.

구약성경은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언급하며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존재임을 설명한다. 남자와 여자는 성의 구분은 있지만,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동일하게 하나님의 복을 받았고 동일한 책임을 위임받은 존재이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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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여성은 남자와 결혼하여 한 몸을 이루는 동등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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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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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여성들은 언약 공동체의 일부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남자와 아이들과 함께 공적으로 읽는 토라를 들었으며 예배에도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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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31:12) 곧 백성의 남녀와 유치와 네 성 안에 우거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로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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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아내들에 대한 능력은 칭송되었으며, 한나,룻,에스더처럼 경건한 여인들은 칭찬을 받았다. 사사시대에는 여 선지 드보라가 활동하였으며,(삿4장) 요시아왕 때에는 여선지자 훌다가 있었으며, 모세의 누이 미리암 역시 여선지로 불리워졌다.

이처럼 동등성을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창2장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의 창조 기사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는 창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남성과 여성 즉 아담과 하와를 동시에 창조하지 않으시고, 먼저 아담을 만드신후 아담의 돕는 배필이라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나중에 하와를 창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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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 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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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하와는 아담과 동등한 인격을 가졌지만 아담에게 복종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아주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배필"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돕는 자이심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했지만, 서로를 섬기는 관계를 묘사할 때도 사용되었다.

이와같이 성경은 여성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남녀의 동등성 그리고 아내로서의 돕는 역할등에 대해 먼저 언급한다. 많은 구약 성경 구절들이 동등성과 여성의 복종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지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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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예수의 가르침에서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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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할 때, 우리는 먼저 예수께서 여성들과 함께 보내신 시간과 또 그분께서 분명히 당시의 남성들과는 현저하게 대조가 되는 친교를 여성들과 나누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성을 소유물의 하나로 보았던 헬라와 로마, 유대의 문화 속에서 여성들을 사랑하셨고 존중히 대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청중들 속에 여자를 포함시키셨고 뿐만 아니라 가르침 가운데에 그들이 친밀함을 느낄 수 있는 예화들과 이미지들을 사용하셨다(마13:33/ 22:1,2/ 24:41/ 눅15:8-10). 또한 예수께서는 특별히 자신의 가르침을 여자들에게 적용시키셨다(마10:34-42). 예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으로도 간음한 것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여성은 단순한 성적인 대상이 아님을 보여 주셨다(마5:28). 또한 창조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둘의 동등성을 인정하셨다(마19:4). 부활 때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고 말씀하셔서 미래적 종말론의 현재적 측면에서 적용할 때에 그 동등성을 강하게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마22:28). 유대인들은 자기의 아내나 딸, 혹은 자매일지라도 길거리에서 여자와 말을 주고 받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상종하려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여인과도 대화하셨다(요4장). 또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친절하게 대하셨다(요8장). 부활하신 후 먼저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고 자신의 승리의 복음을 맡기신 것이 바로 여인들이었다(요20:1-18)

여성들을 대하신 이와같은 예수님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셨고, 그들이 알지 못했던 방법으로 긍휼을 베푸시고 존중하셨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도 남성을 지배하는 위치에까지 여성들을 올려 놓지는 않으셨다. 그분이 선택하신 열두 제자 중에 여자는 한 명도 없었으며, 심지어 십자가 사건 때 대부분의 제자들이 도망치고 여자들은 신실하게 남아 있었지만, 예님은 남성들을 쫓아버리고 그 자리를 여성으로 채우시는 일은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그릇된 가치관이나 사고 방식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셨으며 여성들의 동등성과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셨지만 그들을 남성을 지배하는 위치로까지 부상시키지는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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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바울 서신에서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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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서신들에 나타난 여성에 관한 주제에 대한 접근방법으로는 바울 사역을 도왔던 여성들에 대해 살펴보는 것과 여성들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구절들에 대한 주석적 접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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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바울 사역에 동참했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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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역에 동참했던 여성들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은 아굴라의 아내 "브리스길라"가 대표적인 예이다. 브리스길라는 남편과 함께 바울의 전도 사역에 계속 동참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린도와 에베소, 그리고 로마에 있는 그의 가정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유니아"는 바울보다 먼저 기독교인이 되어 바울과 더불어 일했으며, 바울과 함께 옥중에 갇힌 동료 죄수였다. 바울은 유니아와 안드로니고를 가리켜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는 자"라고 부르는데(롬16:7) 이에 대해 벵겔과 다른 학자들은 유니아도 넓은 의미의 "사도" 라고 불리울 수 있다고 주장하며 박윤선 박사나 찰스 핫지도 이 해석을 지지한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여인에 대하여 바울은 "복음에 함께 힘쓰던 자들" 이라고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여인들이 "글레멘드와 그외에 나의 동역자들"과 함께 일하였다고 언급하였는데(빌4:2-3),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여성들이 빌립보 교회 안에서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로에"는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안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바울에게 전해 준 사람으로(고전1:11) 그녀는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중간에서 협력했던 크리스챤 여성들 중에 하나였다.

"뵈뵈"에 대해 바울은 그녀가 겐그리아 교회의 제직 중에 하나였으며, 또한 그녀가 "여러사람과 나의 보호자"였다고 언급한다(롬16:1-2). "보호자"라는 헬라어 낱말은" ...앞에 서 있는 자"를 뜻한다. 고대 헬라 문헌에서 이 낱말은 종종 "투표장 감독관"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이 낱말은 또한 "보호자", 또는 "후원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낱말이 "종교 단체의 직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즉 이 낱말은 대제사장, 서기관, 관리인들, 그리고 "수탁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명사를 여성형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선례를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고있는 용어를 해석함에 있어서 뵈뵈가 교회와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롬16:2절에서 바울은 뵈뵈가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했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녀를 "보호자" 또는 "후원자"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바울 서신에서 바울의 복음전도 사역과 목회 사역을 도운 많은 여성들이 존재하지만, 필자는 그들 중에서 대표적인 여성들만 살펴보았다. 위에서 살핀 점들을 미루어 볼 때 바울의 주변에는 그와 더불어 복음전도 사역에 힘써 협력하던 여성 "동력자"들이 많이 있었고 바울은 그들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협력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단순히 물질적 지원이나 봉사에 국한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위에서 살핀대로 그들은 바울의 전도와 복음 사역에 협력하는 "동역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초대 교회의 실제 역사를 통해 밝혀진 이런 자료들 속에서는 여성들의 신분과 역할을 부정적으로 평가절하하거나 제한하려고 하는 어떤 암시들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남자와 여성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음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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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여성에 대한 바울의 본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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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대한 바울의 본문들을 다룸에 있어 우리는 먼저 자료에 대한 결정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학자에 따라 그 자료의 저자에 대해 이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필요상 필자는 몇가지의 구절들(딤전2:11-15/ 엡5:22-24; 골3:19/ 고전 14:34-36/ 갈3:27-28/ 고전 11:2-16)을 선택해서 다루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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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딤전 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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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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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교회 내에서 여성의 역할과 활동을 제한하는 것으로 보이는 바울의 가장 결정적인 구절들이며 또한 역사적으로 그 해석도 다양하다.

Furnish는 여자에 관한 이 구절에는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은 없으며, 이와같은 내용은 헬라파 유대인에 의해서, 또는 아담과 이브에 관한 언급을 빼고는, 바울 당시의 세속적인 도덕가에 의하여 쓰여질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 구절은 헬라 가치관 관습과 유대인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그것이 남편과 아내라는 특정한 관계보다는 남자와 여자의 일반적 관계를 문제를 삼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일반적인 남자들과 여자들에 관계가 있기 보다는 남편과 아내에게 특별히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바울 서신에서 "남자"( )와 "여자"( )가 각각 50회 이상 사용되는데, 이들 대부분이 남편과 아내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이 구절과 평행을 이루는 딛2:45, 벧전 3:1-7절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명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복종"은-"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일반적인 여자들에 관계되기 보다는 특별히 아내들에게 관계된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아내가 어떤 사람에게도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금지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어머니가 자녀들을 가르치고(딤후3:14-15), 나이 많은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을(딛2:34) 허용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여기에서 여성들에게 금지하려는 것은 아내로서 마땅히 복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우월한 복음의 지식을 가지고 남편들을 가르치고 주관하려는 태도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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⑵ 엡5:22-24, 골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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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5: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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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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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쌍둥이 서신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그 내용과 순서, 그리고 구조에 있어서 유사하다. 본문은 앞선 교리적인 진술들에 이어서 나오는 권면들의 한 부분으로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반드시 작용해야만 하는 상호책임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일반적인 여자들이 일반적인 남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아내들이 그들의 남편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을 교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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⑶ 고전 14: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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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전14: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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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의 바울의 저작성을 부인하는 견해들이 있어 왔지만 이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논점들은 여자가 누구이며, 34, 35절의 "말하는 것"은 무엇이며, 본문의 상황은 어떤 것인가?라는 것들이다.

본문의 고린도에서의 문맥은 고린도 교회 내의 문제들을 다루는 중에 공예배의 무질서를 지적하며 영적 은사들의 정상적인 사용 방법을 지시하는 구절이다. 특히 고전 14장은 방언의 은사보다 예언의 은사가 탁월하다는 것을 제시하며(1절), 교회의 예배 가운데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할 것을 지시하며(26절), 질서가 있어야 할 것을 지시한다(40절). 그러면서 여자는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명령을 하고 있다. 이 여자는 35절에서 남편에게 물어야 하는 여자, 즉 아내로 나타나며, 아내들이 남편이 있는 교회에서 나서서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지시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여자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한 것은 교회 내에서 어떤 일에나 침묵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명령이 아니다. 이 일이 금지된 것은 단지 그 일들이 품위아 건덕 상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며, 그가 의도한 것은 남편들이 예언의 메시지를 토론하거나 평가하는데 그런 일에 가타부타 끼어드는 태도나 논쟁적인 태도를 보이지 말고 집에 가서 조용히 남편에게 문의하고 배우라는 것이다.

더욱이 본문의 바울의 명령은 교회 내의 일반적인 상황에서 적용되는 명령이기보다는 공중 예배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 공중 예배에서 신령한 부인은 남편에게 복종하는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고 공중 예배 석상에서 예언의 말씀에 대한 남편의 판단이나 평가를 뒤집거나 부정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남편들 위에서 "심판자"처럼 행동하는 일을 하지 말고, 예언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거나 물을 것이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들에게 배우라는 것이다. 35절에서 바울의 목적은 아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편들을 향해 권위를 잘못 행사하는 일을 방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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⑷ 갈3: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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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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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서신 중에서 갈라디아서는 당시 팽배하던 인간의 노력에 의한 구원이론 들에 대한 기독교의 자유 헌장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교회 안에서는 모든 자들이 일체이며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위대한 선언이다. 본문은 그러한 위대한 선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퍼니쉬는 본문에서 바울이 교회가 세례식에서 사용하던 전통적 증언을 인용하거나 또는 암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같은 신앙고백문이 롬 10:12, 고전 12:13, 골 3:11에도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은 모든 세상적인 차별의 장벽이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즉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이 구절에 나타난 구절들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는 마지막 네 번째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이미 26절에서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또 이어서 2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선언한다. 이어지는 본문은 모든 형태의 차별이 폐지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28절은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 그결과 우리 모두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그리스도로 옷입거나 아브라함의 씨가 되는데에는 구별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본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등하게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아브라함의 씨로서 상속자들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 안에서 남녀의 구별이나 차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본문의 욧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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⑸ 고전 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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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에 대한 본문에 대해 이제까지 다양한 해석이 주장되어 왔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여성이 모자나 수건을 쓰는 것이 참된 신앙을 나타내주는 표시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는 고린도 교회 여성들의 행습은 당대의 문화적 패턴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여성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같은 주장에 대해 성경 본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필자는 ①여성그룹의 성격 ②머리됨의 의미 ③머리에 무엇을 쓴다는 의미등으로 나누어 본문을 해석하고자 한다.

① 여성그룹의 성격: 본문에서 바울이 예배시에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한다고 권면할 때, 그는 도대체 어떤 여자들을 염두에 두고 교훈하는가? 그는 남자와 여자의 일반적인 관계를 토론하는가,아니면 남편과 아내의 특정한 관계를 토론하는가? 본문에서의 여자란 일반적인 관계를 염두해 둔 용어라기보다는 남편과 관계를 맺고있는 아내로서의 여성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용어상 본문의 남자와 여자는 바울 서신에서 각각 50회와 54회 정도 사용되었는데, 대부분이 일반적인 남자와 여자를 지칭하기 보다는 남편과 아내를 가리킨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하여 "머리"라는 말을 쓸 때 일반적인 남녀 관계에 적용하기 보다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자주 적용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문제는 바로 예배시에(14:23,26 참조)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역할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② 머리됨의 의미: 바울 당대에 있어 "머리"라는 용어는 사람의 육신적인 머리, 권위를 지닌 사람, 또는 어떤 것의 기원을 의미할 수 있었다. 바레트와 부르스,죤 스타트 등은 본문의 머리됨은 권위라기 보다는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에 "기원"의 의미를 적용하기 보다는 "권위"를 적용함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다는 뜻의 문장으로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본문이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바울의 평행구적 표현은 아주 어색해 질 뿐만 아니라, 1세기적 상황에서 머리에 베일을 쓰는 문제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된다는 사상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리고 11장의 전후 문맥에서도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권위 문제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10절)

③ 머리에 무엇을 쓴다는 의미: 본문은 흔히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머리에 다른 것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고, 때로 다른 학자들은 여자의 긴 머리가 얼굴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그녀의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머리에 쓰는 것이 어떤 형태로 실해외었든지 간에 바울의 여성관을 살펴볼 때, 주목할 수 있는 것은 7절과 11-12절일 것이다. 7절에서 바울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 말한다. 창세기에서의 형상과 모양이 여기에서 형상과 영광이란 말로 대치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에 대해서는 형상이라는 말을 반복하지 아니하고 영광이라는 말만 되풀이 한다. 더 나아가 바울은 11절에서 여자의 창조 양식이 남자에게서 났고(8절), 여자의 목적이 남자를 위한 것이지만(9절), 남자와 여자 두 성은 상호 의존적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질서가 "주님 안에서"의 질서임을 지적하여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며 상호 의존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바울은 남성이나 여성의 우월성이나 권위를 말하기 보다는 상호 의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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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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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고대사회에서의 입장에서와 성경, 특히 구약과 예수님,바울 등의 입장들을 살펴보았다. 이 모든 것을 다룸에 있어 그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없다"(갈3:28)는 것이다. 남녀는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남녀 모두다 존귀한 가치를 지닌다. 여기에는 열등과 우등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맡은 바 직임을 감당함에 있어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이미 구약성경 전체와 예수님의 교훈, 그리고 바울의 교훈에서나, 그의 사역에 동참했던 여성들의 역할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교회는 아직도 여성의 교회의 위치에 있어 개방적이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 여성을 동역자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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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고 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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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gel, J. A. Bengel's New Testament Commentary.

Bruce, F.F.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The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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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rnish, Victor Paul. The Moral Teaching of Paul. Nashville: Abingdon,1980

Kittel G. and Friedrich G.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Ⅰ, Ⅱ, Ⅴ. trans. by Bromiley G. W.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4.

건드리, 로버트. {신약개론} 김일우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3.

바레트,C. K. {고린도전서} 국제성서주석 시리이즈. 한국신학 연구소 번역실 역. 서울: 한국신 학 연구소.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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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창섭, {새롭게 조명해본 종교개혁자들의 여성관} 목회와신학 통권45호. 서울: 두란노서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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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메릴 C. , {신약개설} 김근수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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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안수에 대한 총회의 입장 ???

? 글쓴이 : 진병곤 (211.♡.73.46)???? 날짜 : 05-09-23 07:07???? 조회 : 399??? ???????

제83회 총회보고서 pp.406 ~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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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안수 조사위원회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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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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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994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제79회 총회에서 여성 안수가 가결되면서 한국교회는 여성 안수에 대한 새로운 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통합측 총회 의 결정은 그동안 여성 안수 불가를 견지해온 합동측 입장에 대해 은근한 압력을 가하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합동측 총회의 확실한 입장 표명을 요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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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대해 1997년 9월에 모인 합동측 총회에서는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한 교단적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총회 산하 신학부에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한 연구를 위임하여 보고토록 하였다.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차례 학문적 논의는 있었지만 교단적인 공식적인 입장표명은 1935년 제24차 장로교 총회의 결의 외에는 없었던 차에 이같은 결정은 시의적절하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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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성 안수 문제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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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대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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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안수 문제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점점 중요한 논쟁이 되고 있는 배경을 먼저 생각해 보자. 여성의 안수 문제는 교회안의 여성의 지위 문제와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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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의 여성이 어떤 위치를 가져야 하는가는 l세기 초대교회 시대부터 이미 중요한 신학적 논쟁거리였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이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 하면서 목회의 중요한 원리를 다루고 있는 디모데전서에서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해 장차 교회가 오랫동안 따르게 될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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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지적하면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 하는 것을 허락치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고 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비록 남성과 여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은 없지만 역할은 분명히 다른 것을 암시하고 있다.즉 하나님이 교회안의 여성에게 남자를 주관하는 위치를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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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대 교회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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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이 같은 원리를 그의 서신서에 제시한 이후 근 2000년 동안 이러한 여성의 지위 혹은 여성의 교권 문제는 교회 안에서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즉 그 문제는 교회 역사에 깊이 묻혀버려 전혀 쟁점화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오면서 사회가 개방되고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 같은 사회적 배경 속에서 여성 문제는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 여성의 교권 혹은 안수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크게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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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오늘날 현대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교회 안에서의 여성 사역에 대한 문제이다. 즉 여성 사역의 성격과 범위의 문제가 20세기 교회의 커다란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교회에서 시작되어 점점 복음주의적 교회 안에서도 크게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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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에 들어와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이 여성의 안수 문제에 대해 전향적 인 입장을 취하게 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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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원인은 성경해석학상의 문제로 일부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해석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동동하게 지음을 받은 남자와 여자는 구원뿐 아니라 성직에 있어서도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전개하여 여성 안수의 길을 터주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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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원인으로는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이 세속적인 여권 운동의 압력에 굴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미국의 개혁 주의적 성향의 교단인 크리스천 개혁교단 (Christian Reformed Church)이 20년에 걸친 논쟁 끝에 여성 안수 문제를 허락하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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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장로교회 역사에 나타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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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장로교회 역사는 여성의 교권 문제에 대해 어떤 논쟁의 과정을 거쳐 왔다고 말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말하면 한국장로교회 내부에서는 장로교회의 보수적 신학의 영향으로 사실상 여성의 안수 문제가 거의 논쟁거리가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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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l920년대에 약간의 논쟁이 있었고, l930년대에 이르러 한국교회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감리교에서는 이미 1930년에 14명의 여성 목사를 배출하여 여성 안수를 공식화했지만, 장로교는 이 문제에 대해 여전히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여성 안수를 배제한 헌법 정치 제5장 제3조를 계속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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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1934년 장로교 내부에서도 자유주의 신학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였다. 당시 김재준 목사의 창세기의 모세 저작권 부인설과 함께 김춘배 목사(19001986)는 교회 안에서의 여권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 신학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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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배 목사는 자신이 시무하는 성진중앙교회를 비롯 함남노회 22개 교회 여성 신도들이 여장로직 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였을 때 이들을 지지하는 글을 기독신보에 기고하게 되었다. 김춘배 목사는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말씀”을 기고하여 교회 내에서의 여권 문제를 공식으로 제기하면서 그 문제를 긍정적 시각에서 다루게 되었다. 그는 정치 제5장 제3조를 차별적인 법으로 판단하여 이 법조항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교회 발전을 막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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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배 목사는 교회 안에서의 여권 문제를 다룰 때마다 주로 인용되는 “여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는 내용의 고린도전서 14장 34절의 사도 바울의 말씀을 지금까지 다루었던 것과는 달리 문화적인 측면에서 해석하면서 그런 관행은 “2000년 전의 일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라”는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주장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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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1934년 평양에서 열렸던 제23회 장로교 총회에서는 이 사건을 신중하게 다루고 이 문제를 다룰 연구위원을 선정하여 조사보고케 하였다. 1년이 지난 후에 24회 장로교 총회에서는 연구위원의 보고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는데, 여자들의 교회 안에서의 교권 문제에 대해 당시 연구위원중 한 사람이었던 박형룡 목사는 아래 와 같이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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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중앙교회 목사 검춘배 씨가 바울이 ‘여자는 조용하여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 고 한 것은 ‘2천년 전의 한 지방교회의 풍습’ 이요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의 성경해석을 술한 것은 큰 오류라고 인정하나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에서 여자의 교회의 교권을 불허한 말씀은 2천년전의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속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웨다. 이렇게 성경을 경멸히 여기는 인물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본 분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ale는 우리 장로교회의 교역자로 용납할 수 없나이다. 그런 인물들은 우리교회 신조 제일조를 위반하는 자임으로 우리교회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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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장로교 총회는 김춘배 목사를 각성을 인식하고 성명서를 제출하여 면직시키려 했으나 김춘배 목사는 사태의 자기주장을 철회하여 면직은 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성의 교권에 대한 한국장로교회의 본격적인 논쟁은 보수적 견해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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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성 안수 문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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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성 안수 문제는 너무 복잡하고 미묘해서 쉽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민감한 사안에 우리는 진지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연구를 통해 성경적인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그러나 몇 가지 결론적인 제안을 시도한다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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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여성에게 안수를 주는 것은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을 위배하고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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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여성 안수는 안수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이 라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신구약 성경이 여성의 교회 안에서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기는 하나 보조적인 의미가 강하고, 제한성을 명백히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의 머리됨”을 강조하는 고전 11:2-10과 “남자의 가르치는 것 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고 말한 딤전2:12-14은 그 대표적인 성경의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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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심할 것은 이러한 바울의 언급은 여성의 차등성이나 열등성을 말하는 종속주의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되고 창조 질서의 원리 혹은 대표성의 원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남자가 여자를 대표하는 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모든 면에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남자를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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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있어서 차이는 단순히 문화의 문제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여성의 문제는 상대적인 문제로 변하게 된다. 즉 문화나 시대가 달라지면 여성의 위치는 당연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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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교회안의 여성의 위치 문제는 문화적 개념이 아니라 계시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계시적 관점에서 볼 때, 여성 역할 문제는 대표성의 원리와 창조의 원리에 의해 남성의 지도력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대표하게 된 것은 남자 창조의 우선성과 여성을 지으실 때 남성을 ‘돕는 자’로서 창조 하셨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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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남녀의 본체론적 동등성을 부인하거나 남성 우월주의를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성 지도력에 대한 여성의 순종은 열등의식을 전제로 한 종속적 태도가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순종으로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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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교회가 여성의 안수 문제를 허락할 수 없으나 여성의 사역은 전문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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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학교에서 상담학을 가르치는 정정숙 교수는 “한국교회에서의 여교역자의 역할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먼저 한국교회사를 회고하면서 한국교회 여교역자의 효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교수는 여교역자의 기원은 “전도부인(Bible Women)”으로 남자 선교사들이 한국의 문화적인 이유로 여성에게 접근하여 전도하는 것이 어려웠을 때 보다 효과적으로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도부인”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도부인”의 열심과 역할은 기대한 것 보다 커서 개인전도 뿐 아니라 매서 활동을 통해 선교사들의 사역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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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여교역자 양성이 시급하게 떠오르면서 6개월 훈련과정인 단기 성경학원, 3년 과정의 여자고등성경학교, 고둥학교 졸업자를 입학시켜 훈련하는 여자신학원 등으로 발전하면서 당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전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교육을 통해 여교역자를 양성해 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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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국교회 내에서 여성 사역자는 다양하게 일해 왔으면서도 그 지위는 보잘것 없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첫째 문화적인 이유가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 내부에서는 유교적 가치관에 따른 남성우월주의가 크게 작용하여 여교역자의 위치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두 번째, 교회 제도적인 이유가 있다. 한국 교회의 제도나 법은 여성 사역자의 역할을 많은 부분 제한하고 있다. 여교역자는 교단 헌법상 철저한 임시직이며, 기능면에서도 심방 중심의 보조적인 역할로 끝나게 되어 여성 사역의 전문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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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날 심방 중심의 전통적인 여성 사역자의 역할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남성위주의 사역에 머물렀던 점을 개선하고, 여성 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활성화, 극대화를 추진해야 한다. 주지하는 대로 현대 교회는 심방 외에도 교육, 상담 동 다양하고도 전문적인 사역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을 직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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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사역자도 이제는 교육의 전문가, 상담의 전문가, 선교의 전문가가 되어 시대적인 변화에 맞는 사역을 수행할 때가 왔다. 한국교회 여성 사역자도 전통적인 저학력, 중년층 이미지의 모습을 벗어나 ‘교육사’ ‘상담사’ ‘선교사’ 등 전문적인 사역으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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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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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의 목사직이나 장로직에 대해서는 성경이 보여주는 대표성의 원리와 창조 질서의 원리의 측면에서 허락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대신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이때 여성의 역할을 새롭게 이해할 필요는 있다. 특히 한국장로교회는 여성 지도력의 개발이 낙후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장로교회는 21세기를 내다보면서 성경적이면서도 창의력 있는 여성 지도력을 적극 개발하여 교회 안의 여성들이 보다 전문화된 사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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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성 안 수 연 구 위 원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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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원 장 원 희 천

서 기 송 귀 옥

회 계 박 경 완

위 원 서 욱 환 이 영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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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안수 성경적인가? 비성경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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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태 개신대학원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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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석태 박사

뉴욕대학교대학원 철학 박사

개신대학원대학교 총장

한국개혁신학회 자문위원

한국성서고고학회 부회장

한국개혁신학회 회장

여자에게 안수하여 성직을 허락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요사이처럼 여성들의 교회내에서 역할과 그 영향력의 비중이 커감에 따라 여기저기에서 제기되고 있으며, 특히 보수적인 교회 내에서는 향후 그 결정을 놓고 격론이 벌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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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현실적인 필요를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교회 내에 여성이 숫자적으로 많다. 따라서 여성들이 당회, 노회, 총회 등의 치리회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여야 한다. 여성들이 설교나 교육을 남성들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여성들이 분쟁하는 교회에 조정 역할을 더 잘 할 수 있다 등의 이유를 든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논의할 때는 항상 성경과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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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류에 따라 성경의 원리에 반한 정치 조례를 만들고 헌법을 뜯어 고친다면, 그것은 성경을 배격하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을 배격한다면 그러한 교회는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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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창조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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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성들에게 성직을 부여하는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가장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성경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의 원리와 여성의 지위이다. 교회 내에서 여성의 성직 수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남녀는 평등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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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는 하나님-사람-만물의 질서가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만물의 통치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사람에게 위임하시고, 대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서 그를 섬기고 살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복을 주셨다. 바로 이러한 뜻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남자로부터 여자를 지으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셨고, 이 때 여자는 남자의 돕는 배필이다(딤전 2:13-14; 고전 1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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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먼저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관계의 권위와 순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 같은 사실을 살펴볼 때, 이 세상에 권위 체계의 질서가 있듯이 가정에도 같은 질서가 있고,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대표자이듯이, 언약으로 맺어진 가정에도 남자가 언약적 대표자이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은 책임을 하나님께서는 먼저 따먹은 여자에게서 먼저 묻지 않고, 가정의 머리인 남자에게 물으셨다. 이 같은 해석을 신약에서는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니,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기를 원한다”(고전 11:3)라고 가르친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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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가정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질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딤전 2:12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사도적 권위로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직 여자는 조용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즉 교회 안의 모든 치리와 선포하는 장로의 직분에서 여자를 제외시키는 것은 명백하고 확고한 성경적 가르침이라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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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직자의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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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우리가 여성에게 성직을 부여하는 안수 문제를 논할 때 생각해야 할 점은 성경에서 말하는 성직자의 범위이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 다양하다. 제사장, 레위인, 선지자, 사사, 나실인, 느다님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을 다 성직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성직자라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정한 절차를 밟아 위임식을 하고, 전 생애를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종사하며, 이를 위하여 백성들이 바친 예물과 제물과 십일조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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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실인이나 느담님은 성직자가 아니며, 선지자도 성직자라고 볼 수 없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항존직이라면 선지자는 임시직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선지자가 없었던 시기가 있던 시기보다 훨씬 많았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필요한 경우에 선지자들을 보내어 백성들을 일깨우는 일을 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였으므로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입”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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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은 세습제였으므로 성직자로서의 검증이 까다롭지 않았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선지자는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 스스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해야 했고, 사람들로부터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이라는 것을 인정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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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이었다. 그 선지자들 가운데 여성의 경우는 구약 1500여년 역사 가운데 불과 몇 사람뿐이다. 출애굽 시대의 마리아(출 15:20), 사사시대의 드보라(삿 4:4)나 요시야 시대의 훌다 (왕상 22:14: 대하 34:22), 노야다 (느 6: 14), 이사야의 아내 (사 8:3) 등이 전부이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비상시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임무를 주어 실행케 한 자들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본질적으로 제사장과 그 직무가 다르며, 여선지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들을 가리켜 성직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오늘날 여성들의 목사 안수의 근거를 구약성경의 여선지자에게서 찾는 것은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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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약의 제사장직과 신약의 제사장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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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네 아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제사장으로 정하셨다(출 28:1). 아론은 모세의 입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며,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전쟁할 때에는 훌과 함께 기도하는 모세의 팔을 떠받쳐 내려오지 않도록 하여 여호수아의 승리를 뒷받침한 사람이다.

여호와께서 그를 제사장으로 임명하기 전에 그는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제사장의 할 일은 백성들을 대표하여 여호와께 나아가 제사 드리는 일과 백성들을 가르치는 일과 질병의 진단과 처방은 물론 각 종 범죄에 대한 수사와 판결의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일정한 절차를 따라 위임식을 했으며, 특별히 디자인한 제사장 복과 모자를 썼으며, 제사장복 앞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각 종 보석으로 만든 가슴패를 달고, 하나님을 뜻을 분변하는 데 사용하는 우림과 둠밈도 지니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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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들은 여호와께 일 년된 어린 수양을 아침저녁으로 회막 문에서 번제로 바치는 일을 대대로 해야 했으며, 이때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겠다고 하였다(출 29:34). 레위인들에게는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를 생활비로 주어진 반면, 제사장들에게는 백성들이 여호와께 바친 제물이 그들의 몫이 되었다. 이러한 제사장직은 세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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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선지자는 여자가 가끔 있지만 제사장은 여자가 없다. 제사장직이 세습되었기 때문에 후기 유대 사회에서 제사장의 아내는 엄선되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후손들에게 “소금언약”과 “평화의 언약”을 주셔서 영영토록 그들의 제사장직을 보장해주셨다(민 18:19; 2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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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제사장과 대제사장직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모형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스스로 성전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시고,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께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제사와 제사장직을 완성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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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영원히 계시고 영구적인 제사장? 직을 가지고 계시므로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수 있으니, 그분은 항상 살아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히 7:23-25)?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히 계시고 영구적인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백성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단번에 드려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희생 제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히 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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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아론의 후손들처럼 불완전한 제사를 드리는 제한적인 제사장들과는 다른 영원한 대제사장이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론과 그 후손들과 같이 매일 짐승의 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하는 제사장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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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제사장과 목사 사이에는 포괄적인 직무상의 연속성이 있다. 예수께서는 붙잡하시기 전날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드시며,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며, 새 언약을 맺으시고,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명하셨다(눅 22:14-23).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것을 시행하며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재림할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고전 11: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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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부활하시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우리의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는? 흩어졌던 열 두 사도를 부르시고, 이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세례를 베풀며, 그가 가르치신 것을 지키도록 하라는 명령을 주셨다(마 28:16-20; 행 1:8). 이 명령을 받들어 제자들은 나아가서 말씀을 선포하고, 제자들에게 안수하여 세례를 베풀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고 성만찬을 집전하는 이 예식은 분명 선지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사장적 직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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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똑같은 대제사장적 직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영적인 제사장직을 위임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바울 사도는 자신의 직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하고, 그리하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 일이 성령 안 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롬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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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분명 사도 바울은 이방인으로 예수를 믿게 하여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이 일을 마치 구약성경에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의 직무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사 61:6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를 “여호와의 제사장,” 그리고 말씀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러 나오는 이방인들을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들”이라고 말하는 말씀에 대한 성취로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직무가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이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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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구약의 제사장직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위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여성들이 많았지만 제사장적 직무를 위하여 여자들을 사도로 세우시지 않으셨다.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그의 사도로 세우실 때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자라는 것을 염두에 두신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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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약성경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한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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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신약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이 문제에 대하여 딤전 2:11-15, 고전 14:33하, 34, 38, 그리고 고전 11:1-16에서 사도 바울이 잘 다루고 있다. 바울은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오직 여자는 조용해야 한다.”(딤전 2:11)고 말한다. 그는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이 말은 여자가 어떤 사람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고 교회 내에서 남자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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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에 대하여 “이는 아담이 먼저 창조되고 그 다음에 하와가 창조되었으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임을 당하여 죄에 빠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창조의 질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 권위의 체계를 정하셨으며, 이 권위 체계의 파괴가 결과적으로 이 세상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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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세우신 권위 체계는 남자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여자는 그의 돕는 배필이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시기 전에 아담은 생물들의 이름을 짓고 있었고(창 2:19), 모든 가축과 하늘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의 이름을 불렀다(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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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창조주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이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아담에게 돕는 자가 필요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만물에게 이름을 짓고 있는 아담을 위하여, 아담으로부터 여자를 만드셨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영광이기 때문에 머리에 쓰면 안 된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다.”(고전 11:7)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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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만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남자의 언약적 대표성을 염두에 둔 말이다. 반면에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여자를 통하여 남자의 영광이 들어난다는 의미이다. 고전 11:7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권위 체계 가운데 여자는 결코 남자와 동등하지 않다. 예수께서 복음 사역을 하실 때 예수께 가장 충성했던 사람들이 여자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당대의 가장 급진적인 개혁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여자를 그의 사도로 세우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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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5에서 바울 사도는 여자의 예언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하거나 예언을 하면, 자기의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자기의 머리를 밀어버린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씀을 유추해보면 여자도 예언을 할 수 있는 데 그때는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것이다. 흔히들 갈 3:28의 말씀을 인용하여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여자에게도 성직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여자도 설교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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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3:28의 인접본문은 성직이나 설교에 대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에게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양자됨에 대한 무차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설교에 있어서 남녀 차별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예언을 설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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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것이 설교이든지 가르침이든지 황홀경 속에서 하는 방언이든지 간에 이것은 본질적으로 선지자적 행동이다. 이들이 세례를 주고, 성례를 베푸는 제사장적 활동은 아니다. 따라서 고전 11:4-5의 여자들에게 예언을 허용하는 말을 확대 해석하여 여성들에게 목사 안수를 하고 강단에서의 설교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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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고전 14:34에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여라. 여자들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으니 율법이 말하는 것같이 여자들은 복종하여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예 입을 다물고 살으라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공적인 의사 전달을 의미하며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예언이나 교육활동과 다른 차원의 의사표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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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과 관련된 것이라면 교회 내의 공식적인 회의라고 보아야 한다. 바로 이점이 당회나 노회와 같은 치리회의 구성에 있어서 여성의 참여를 제한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집사의 직무와 가르치는 직책에 대하여 여성들을 포함시키는 명백한 구절들이 성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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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든 참과부들을 교회의 명부에 올려 교회에서 봉사하게 하고 이들을 구제했다(딤전 5:9-16). 딤전 3:11에는 집사들의 자격을 열거하는 가운데 “여자들도 존경할만하고 ... 신실한 자라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여기서 여자들을 “아내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여자 집사들"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뵈뵈는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인 우리 자매 뵈뵈”라고 지칭하고 있다. 일꾼이라는 말을 “집사”와 의미가 같은 "디아코노스"(dia,kono?)가 사용되고 있다. 행 18:18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부부로서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개인지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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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기록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집사의 직분 및 여자들과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에서 초대 집사들처럼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안수하여 세웠는지는(행 6:6)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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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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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살펴볼 때, 여성에게 성직을 맡기는 문제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창조 세계에 계시하신 질서 안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남자를 그가 창조한 피조 세계를 다스릴 언약적 대표자로 세우시고, 이를 돕는 배필로써 여자를 창조하셨다. 따라서 언약적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에서는 남자가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대표성을 가지며, 또한 언약적 연대성 때문에 여자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축복과 저주가 남자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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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신구약 성경에서 성직의 연속성을 논할 때, 목사의 경우 그 직무는 제사장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여성의 안수나 성직에 관해 말할 때 구약 성경의 여선지자나 신약성경의 예언 활동을 했던 여성들로부터 그 정당성을 찾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제사장으로부터 직무의 연속성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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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여성들은 제사장적 직무를 행하거나 치리회의 주관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 여자들에게 교회 내에서 예언 활동을 허락하고 있다. 그러나 이 때는 반드시 머리를 덮도록 명하고 있으며, 교회 내에서 각종의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허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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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과 복종의 원리에서 본 여성안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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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

<크리스찬연합신문사>(9월 2일자 신문)에서 연속기획특집 이슈논단으로 여성안수 문제를 취급했다. 여성안수를 찬성한 조동호 목사와 이종윤 목사, 여성안수를 반대한 손석태 목사와 소재열 목사의 글이 연재됐다. 본 글은 여성안수 반대의 글을 제기한 소재열 목사의 글을 <크리스찬연합신문>의 양해를 받아 싣게 되었다(리폼드뉴스 편집부).

여성안수를 둘러싼 논쟁은 복음주의자 안에서도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사안으로 화해가 불가능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제 여성안수의 문제는 신학자의 개개인의 차이와 논쟁을 뛰어넘어 교단별로 뚜렷한 양자택일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지금까지 교단을 구분했던 교리적인 차이보다 여성안수의 문제가 다른 어떤 교리보다 더욱 상징성을 가진 교단의 구분을 위한 범주가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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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성안수를 지지해 준다면 어느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다는 태도가 교회 내의 여권주의주의들과 이 운동을 지지하는 그룹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제 성경의 권위와 보수적인 성경해석을 추구하는 개혁파 교단들끼리도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진영과 찬성하는 진영으로 나누어지는 이런 경향은 어느 정도 전 세계적인 흐름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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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로회 각 교단의 여성안수에 대한 역사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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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장로교 안에서 고신측과 합동측은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지만 기장측과 통합측은 여성안수를 허용하고 있다. 기장측에서는 1956년 제41회 총회에서 여장로제를 통과시키고 그 다음해인 1957년에 3명의 여 장로가 탄생하였다. 여 목사제는 1974년 제59회 기장총회에서 받아들여졌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에서는 여성안수 청원은 제46회, 제47회, 제49회, 제50회, 제52회 총회 등 거의 매년 총회에 여성안수를 청원하였으니 총회는 번번이 이를 반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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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제53회 총회 때는 여 장로 제도만을 청원하였으니 다음해 총회에서 반려되었고, 1971년 제56회 총회에서는 투표에 부쳐져 94:194로 부결되었다(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제56회 총회, 총회록, 98-99). 제56회 총회 이후로 여성안수 문제는 여성들의 청원으로 거의 매해 투표에 붙여지기는 하나 부결을 거듭할 뿐이었다. 1991년 제76회 총회는 여성안수 부결에 대하여 “향후 3년간은 이 문제에 대하여 헌의도 할 수 없도록 하는 안”까지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 3년의 기간이 지난 후인 1994년 제79회 총회여성안수의 건이 통과되고 노회 수의를 거쳐 1995년 5월 27일 여성안수에 대한 헌법 개정안이 공고된 이후 1996년 4월 28일 첫 여장로로 안수를 받았고 그해 첫 여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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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제79회 통합측 총회에서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하여 허용하는 결의를 하자, 그 여파가 합동측에까지 확대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논의의 필요성 때문에 <신학지남>, 1996년 가을호(통권 248호)에서 특집으로 “교회와 여성”이라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들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김의환 박사,“교회내 여성의 기능과 성직의 자격”, 박아론 박사,“여성의 목사안수에 관한 여권주의자들의 주장과 우리의 견해”, 권성수 박사,“딤전 2:11-15에 관한 주석적 고찰”, 김길성 박사,“여성임직에 대한 성경의 교훈”, 다음해인 1997년 가을호(제252호)에서도 심창섭 박사의 “여성안수에 대한 소고”와 정훈택 박사의 “존재론적 평등성, 기능적 종속성”, 이관직 박사의 “성경 속에 나타난 여성안수에 대한 이해”라는 논문이 발표됨으로 합동교단의 신학적 입장은 여성안수가 신학적으로 불가함을 발표하게 되었다. 또한 제83회(1998) 예장합동 총회는 신학적으로 여성안수를 허락할 수 없다고 이를 확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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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성안수 문제에 대한 신학적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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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여권문제는 함경북도 성진 중앙교회 김춘배 목사는 1934년 8월 22일자 「기독신보」에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그는 이 글에서 지난 해 총회시 함남노회에서 여자에게 장로 자격을 주자고 헌의한 건을 부결한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남녀 차별적 헌법에 근거하여 여자에게 치리권을 부여하지 않은 것은 성경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김춘배 목사는 “여자는 조용하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바울이 기록한 것은, 2천 년 전의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말함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선언한 것이 총회에서 문제로 제기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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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총회는 단호하게 “성경의 파괴적인 비평을 가르치는 교역자들과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을 우리 교회 교역계에 제외하기 위하여 총회는 각 노회에 명하여 교역자의 시취문답을 행할 때에 성경비평과 성경 해석 방법에 관한 문답을 엄밀히 하여 조금이라도 파괴적 비평이나 자유주의 해석 방법의 감화를 받은 자는 임직을 거절케 할 일이오며 이미 임직 받았던 교역자가 그런 교훈을 하거든 노회는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제6장 제42조, 제43조(면직조항)에 의하여 처리케 할 일이다.” 라는 입장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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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교단에 속했던 김세윤 교수는 여성안수를 고린도전서 14장이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점을 들어 후대에 남성우월주의자인 누군가에 의해서 바울의 이름으로 삽입ㆍ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성경해석은 여성 안수를 지지하기 위한 해석학적인 주요한 유형들 가운데 속하는 것으로서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그의 세미나에 참석한 합동교단의 여성도들 다수가 지지하였다. 이에 대해서 서철원 교수는 김세윤 교수의 신학적인 탈선을 중심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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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근 교수(칼빈대학교 조직신학교수)는 그의 논문 “‘평등 그러나 복종’의 성경적 이해”라는 논문에서 “1970년대를 기점으로 교회 안에서도 페미니스트 운동의 여파로 여성의 독립적인 가치와 남성과 동등한 성직 안수의 권리를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라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이 가진 해석의 지배적인 원리란 남성과 여성의 ‘동등’(equality) 혹은 남성으로부터 여성의 ‘해방’ (liberation)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이념”이었으며, “이들 이념적 가치야말로 교회 안과 밖이라는 구분을 떠나 역사적인 모든 유형의 페미니스트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공통된 목표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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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교회와 관련하여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관심사는 남성이 독점해 온 성직을 여성과 공평하게 나누어 갖자는 것이며, 그 첫 번째 실천적인 과제가 바로 성경을 그들이 가진 이념으로 재편하고 재해석 하는 일”이 문제점이었음을 지적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을 따라 성경을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결코 페미니즘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현재 여성 안수를 둘러싼 논쟁의 본질은 사실은 특정한 성경 본문을 둘러싼 단순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여성 안수의 이슈를 근본적으로 성경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교회의 고백적 전통에 대한 현대의 이데올로기의 도전이란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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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성경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전통적인 해석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인정하는 건전한 해석의 원칙을 고수하는 일일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교회가 일어서고 무너지는 일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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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더글라스 무(Douglas Moo)와 필립 페인(Philip B. Payne)은 여성 안수를 두고 트리니티 저널(the Trinity Journal)을 통해 논쟁의 글을 실었다. 무는 이 논쟁의 글의 결론으로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거나 남성을 다스리는 권위를 행사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 가지는 관계의 구조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페인은 “디모데전서 2:11-15은 교회에서 여성들을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지도자로서의 활동을 금하는 충분한 근거를 주고 있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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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특수한 국지적, 문화적 조건 하에 있는 에베소교회에게 그 같이 말하였으나 우주 보편적인 모든 교회에 적용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에까지 영속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함으로서 이러한 논리와 논쟁은 이미 한국교회 안에서 역사적으로 첨예하게 대립되는 내용으로 이 문제는 단순히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 차원이 아니라 성경 해석과 성경의 무오성이라는 측면에서 거론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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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쟁의 대립들은 역사적 정통신학을 결정짓는 신앙과 신학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으며, 특히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 권위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대립되었다. 그 대립의 한 중앙에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을 부인하고 성경의 신적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탈선적 해석방법들로 대한 전통적인 해석방법과 현대신학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이러한 대립과 충돌, 논쟁과 대결은 성경과 신학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나타내기 위한 필요한 조치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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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학적 근거에 의해 여성안수를 반대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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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란 곧 성경해석의 원리이자 성경해석에 근거한 사상적 체계이다. 따라서 신학이란 신앙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가 지금까지 교회를 양육해 온 바른 신학을 성경의 이정표로 삼는 일은 자유주의 현대주의적 폐해가 만연한 지금에 더욱 중요한 일이다. 즉 신학적 탈선은 언제나 병든 신앙의 문제로 이어진다. 신학의 내적 원리는 믿음이라면, 외적 원리는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 본문의 의미가 우리의 삶에 어떤 함축성을 갖는가 라는 질문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성경이 교회의 신앙과 모든 실천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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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안수의 문제 역시 성경을 정경으로 전제하는 건전한 성경해석의 원리를 채택하는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문제는 이 문제가 양성평등주의, 비성경적인 성차별주의에 편승한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출발해서는 안된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영성안수를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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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김세윤 교수는 여성안수를 고린도전서 14장이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점을 들어 후대에 남성우월주의자인 누군가에 의해서 바울의 이름으로 삽입ㆍ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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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든지 성경 권위를 훼손하는 비평적인 접근은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바울서신 중에서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성경의 본문에 대해서 바울의 저작을 부정하는 식의 주장이나 성경의 저자들이 틀렸다고 주장하거나, 성경도 문화나 환경의 영향을 받는 상대적인 문서일 뿐이라는 유형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으며 이를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니콜(Roger Nicole)은 다양한 성경해석의 입장을 소개하면서 여성안수를 긍정적으로 보면서 “성경의 본문이 항구적이고 우주적인 구속력을 갖는다는데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내용은 인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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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성경과 전통의 관계에서의 문제 때문이다. 개혁주의 교회는 특별히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있어서는 “규범적 원리”라고 불리는 독특한 해석적 원리를 발전시켜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Ⅰ:Ⅵ에 나타난 대로 성경의 절대성과 충분성, 충족성에 대한 신앙에 근거해서 성경에서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가르치지 않는 것은 교회론의 영역에 일체 도입하지 않았다. 반드시 성경으로부터 확정적인 지지를 받는 것만을 교회의 조직과 예배모범의 요소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규범적 원리는 종교개혁자 칼빈에 의해서 처음 제안되었다. 이러한 규범의 원리들은 성경의 권위를 보존하고자 하는 열정과 의도가 근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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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원리에 따르면 여성안수에 관한 한 여성의 안수를 위한 성경의 승인을 확보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성안수를 허용해야 할 것인지, 금해야 할 것인지는 전적인 성경적인 근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즉 여성안수 허용의 정당성은 성경의 근거와 함께 분명하게 증명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이같은 증명의 의무는 여성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이유를 반대하는 식으로 여성안수를 증명하여 성경적 권위의 근거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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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창조와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여성의 문제 때문이다. 남녀 창조의 기사에서 남자와 여자가 책임과 권한에서 동등하지 않다. 남녀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이라는 존재론적으로는 동등하다. 그러나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이브가 있기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았고 행위언약의 당사자가 되었다. 아담의 위치는 ‘먼저’로써 특징 지워진다. 먼저 됨은 존재의 순서를 말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다. 즉 아담이 언약의 대표자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아담은 이브를 포함한 모든 인류를 위한 언약의 머리가 됨으로써 단순히 시간적으로 먼저 지어진 존재 이상의 이부에 앞서는 권위를 가진 존재가 된 것이다. 남녀간의 권위와 복종의 이슈는 일반적으로, 근본적으로 창조시 언약적 질서에 속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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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관련하여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아무런 역할의 차별이나 구분이 없어야 한다고 해석하면서 이 구절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일정한 역할의 구분을 규정하는 다른 성경과 충돌하는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여성안수자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 보편적 교회에 영속적인 원리라고 믿었다고 보고, 표면적으로 이 성경과 충돌하는 모든 성경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믿는 입장이다. 브루스나 그 브루스의 입장을 취한 김세윤 교수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반대되는 주장을 담고 있는 다른 성경을 다룰 때 전자를 취하고 후자를 부정한다.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이러한 입장은 결코 지지를 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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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경은 아무런 내적인 모순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수용한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의 자유와 여자에 관한 제한규정이라는 상호 모순되는 것 같은 두 가지 언급을 설명하고자 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평등과 일체성의 선언은 교회 안에서의 역할의 구분과 차이에 대한 명령과 아무런 모순 없이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며 오늘날의 교회에도 여전히 권위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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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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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여성안수를 금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이 명확하게 가르치는 바라고 믿으며, 여성의 성직안수 금지는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라는 규범을 존중하는 해석적 노력의 결과로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이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로서는 동등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권위와 복종의 질서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러한 남녀의 언약적 권위와 복종의 질서를 무효화 하거나 소멸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며, 이는 이미 밝힌바 예장 합동교단의 신학적 입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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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목 / 고신대 대학교회(www.daehaak.org ) 담임, 부경성경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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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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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교회론(New Testament ecclesiology)을 다룰 때 주로 에베소서에 나타난 교회의 메타포인 머리이신 예수님과 몸인 성도를 중심으로 자주 논의되어 왔다. 혹은 투영(transparency)의 원리를 적용하여, 예를 들어 ‘마태교회’(혹은 마태공동체, the Matthean community)와 같은 특정 공동체의 모습을 찾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 여기서는 바울 서신을 중심으로 여성의 교회에서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논의를 좁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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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와 2세기의 속사도 시대와 변증가들의 시대에 복음이 광범위하게 전파된 것은 여성의 공헌에 힘입은 바가 컸다. 현대에도 교회에서 여성의 사역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활발하고, 사실 이런 능동성이 요청되는 시대다. 여성의 교회에서의 역할은 네 가지 견해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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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적인 견해(traditional view)로서 여성의 목회활동 즉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권위를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으로 교회와 가정 안에서 하나님은 원래부터 기능적인 위계질서(functional hierarchy)를 부여해 놓았다는 것이다. 즉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받았기에 존재론적으로는 평등하나 기능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다. (하나님에서 기인하는)기능적인 불평등은 열등성을 필연적으로 의미하지 않는다(고전 11:3: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구절이 성자가 성부보다 열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325년의 니케아신경이 밝히듯이 동일본체 [homoousios]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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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성지도적 견해(male leadership view)는 전통적인 견해와 비슷하나 적용에서 약간 다른데, 여성의 부분적인 목회 참여 즉 공중 예배 때 기도나 성경봉독, 집사직분 혹은 교회 사무직을 남자 담임 목사의 관할 하에 허용하는 입장이다. 대부분의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의 입장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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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원적 목회 견해(plural ministry view)에 따르면 모든 성도는 어떤 면에서는 모두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데 목사 안수제도 때문에 이것이 실현되지 않았기에 목회 안수제도를 없애버리면 여성의 목회 참여는 아무 문제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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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등주의적 견해(egalitarian view)는 다원적 목회 견해와 비슷한데, 여성의 전반적인 목회 활동 권리를 주장한다. 성별에 따른 리더쉽이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이 제한 받을 직분은 없다. 남녀는 상호 복종(mutual submission)해야 한다. 혹자는 전통적인 입장에 서있는 (1)과 (2)를 지지하면서 주장하기를, 위의 (3)과 (4)의 입장은 성경의 영감성에 대해 잘못된 자세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자세한 것은 석기현, 1996:370-372를 보라). 이 평가는 과연 정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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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여성신학을 잠시 살펴보자. Elizabeth Schussler-Fiorenza로 대변되는 여성신학적 해석이 중요시하는 이념은 그 동안 여성이 부당하게 억압되었던 사회구조나 관념을 극복하고 여성의 지위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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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한다: (1) 여성의 특수성과 주체성을 인정하여 여성을 독립된 존재로 이해하고 존중한다. (2) 여성의 인간적 존엄성과 권리를 왜곡하는 문화적 편견과 오류를 배격한다. (3) 여성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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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학적 성경 해석이 성경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인다: (1) 성경 자체는 그렇지 않은데 성경해석자가 성경을 여성의 존엄성과 권리를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의미로 해석하였다고 보는 입장. (2) 성경 자체가 여성 억압적이라고 보아 여성해방적 기반은 성경에서 나올 수 없다고 보는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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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학적 해석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포함한다: (1) 성경본문의 가부장적 (patriarchal)이고 억압적인 요소를 발견하여 비판하면서 새롭게 해석한다. (2) 여성 긍정적인 본문을 찾아서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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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급진적인) 페미니즘(radical feminism)이 교회와 신학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계하고 우려해야 할 형편이다. 그리고 이들이 주장하듯이 성경에 마치 오류가 있다는 식의 주장은 수용할 수 없다. 그리고 여성 안수와 같은 예민한 문제가 한국 교회에 이슈가 되고 있고, 앞으로 보수교단에서는 이 문제를 계속해서 덮어둘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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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나 이슈의 중심에는 교회가 성경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주석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전통이 성경을 지배할 것인가, 아니면 성경이 바른 전통을 세우도록 할 것인가? 이것을 염두에 두고 몇몇 논쟁적인 본문을 다루고자 한다. 이것은 앞으로 진지하게 다루어져야만 할 중요하고도 민감한 이슈이기에, 어떤 특정 결론을 도출하는데 초점을 두기보다는, 주석에 근거한 논의만 개략적으로 시도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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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딤전 2:9-15절에 나타난 교회에서의 여성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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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2,000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이 성경주석에 미치는 영향을 실감한다. 딤전 2:9-15절은 성경 전체에서 여성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금지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이것은 또한 창조 질서 즉 남자가 먼저 되었고 여자는 그 후에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호소하여 어느 정도 여성의 ‘종속성’을 명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본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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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의 본문은 여성이 머리에 무언가를 써야 한다는 것을 명령하는 고전 11:5절이다. 만일 성경 66권 중에서 단지 딤전 2:9-15절에만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가르치는 사역을 금지하는 주장이 의존해 있다면,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며, 여성의 사역을 권하고 있는 바울의 다른 구절과 상충되기도 한다. 이 이유로 딤전 2:9-15절의 1세기 당시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상황을 조사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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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 2:9-15절은 고전 11장처럼 공중기도를 할 수 있는 여성들의 권리에 대해 언급하는 것 같다. 이 사실은 딤전 2장 1-8절이 남자들의 기도를 언급하고 있는 사실로부터 분명해 진다. 딤전 2:1-2절은 통치자들을 위해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도시 안에서의) 공적 기도를 할 것을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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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AD 66년까지 성전에서 로마황제의 건강을 위한 기도가 드려졌다. 그 해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하자 이 기도는 중단되었다. 이런 종류의 기도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중요했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해로운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며, 더 나아가 평안한 가운데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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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은 ‘또 이와 같이’'라고 말함으로, 바울은 이제 여자에게도 공적인 기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고전 11장과는 달리 딤전 2장에서는 여성이 교회에서 침묵할 것을 명령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여성의 공적인 기도에 대해 권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해 볼 것은 남자들의 기도 보다 여자들의 기도에 바울이 더 세밀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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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은 에베소에서 행해진 여자들의 공중 기도에 무언가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이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복장과 관련된 것이고(딤전 2:9), 다른 하나는 가르침과 관련된 것이다(딤전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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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여성의 복장에 관해 먼저 살펴보자. 여기서 바울은 최신의 유행하는 옷을 금하고 있다기보다는, 이성의 눈길을 끌기 위한 (야릇한) 옷이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사치스럽게 치장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 같다. 2세기 이후의 유대 선생들은 특정한 장식품을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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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비 아키바(Rabbi Akiba)는 남편이 아내 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했을 경우 이혼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 말은 아내는 ‘남편만’을 위해 화장과 치장을 할 수 있다 혹은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유대인 중후기 선생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에게 데려가기 전에 하와의 머리를 땋아 주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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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는 고귀한 인격뿐만 아니라, 육체의 아름다움을 미덕으로 여겼다. 헬라 작품들 속에는 키가 크고, 진하고 굵은 눈썹, 그리고 하얀 피부에 금발을 미인으로 보았다. 때로는 통통한 볼을 첨가한다. 여성의 아름다움이 미덕이기는 하지만,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름다움 때문에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성적 범죄의 도구가 될 수 있던 금이나 다른 장식으로 남자를 유혹하여 타락으로 인도한 경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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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바울 역시 과도한 사치와 장식의 문제점을 성적인 부정과 연관시켜 지적하고 있다. 아마도 디모데가 목회를 하고 있었던 에베소의 교회는 일부 부자들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시대의 말로 한다면 야하고 값비싼 사치-명품을 주렁 주렁 걸치고 BMW를 타고 교회에 오는 여자들을 가리킨다(참고. 벧전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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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참된 장식으로 선행을 딤전 2:10절에서 제시한다. 아름다움은 인격과 삶에서 나오기에, 복장은 정숙해야 한다. 옷은 단정하고 유혹적이지 않아야 하지만, 영혼은 풍성해야 한다. 바울은 복장 문제로 여성이 남성보다 문제를 더 일으켰기에 여성을 대상으로 권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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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장의 문제를 넘어, ‘여성이 가르치는 것에 대한 문제’는(딤전 2:12)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 바울은 여자가 종용히 배울 것을 부탁한다. 남자들을 주관하는 것 즉 남자들에 대해 권세를 취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이 권면도 바울 당시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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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침묵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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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당시 일부 회당에서는 여자가 회당장과 같이 지도적인 역할을 한 곳이 있기에 모든 경우에 여성이 침묵을 요청 받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공중 예배 중에 여성의 침묵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갖기 전에 일단 침묵으로 배워야 했음을 말한다(비교. 고전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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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당시 어떤 선생은 제자들에게 도덕적인 훈련의 한 형태로 침묵 훈련을 시킨 적 있다. 바울이 의도한 것은 여성이 배워야 하지만, 부적당하고 어리석은 질문으로 전체 회중에게 방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종용히 배우라는 말은 먼저 경솔히 말하지 말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라는 경고일 수 있다(참고. 행 15:12; 21:40;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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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여성이 예배 중에 무조건 그리고 영원히 조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침묵에 대한 권면은 딤전 5:13절에 암시된 에베소의 특수한 상황과 연관된 듯하다. 그 당시 많은 젊은 여성들이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 어리석은 말을 하고 가르치는 일을 일삼고 있었다. 사실 ‘침묵’이란 용어는 정중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나 조용한 행동을 언급한다 (참고. 딤전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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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바울이 남자를 다스리려는 권세를 여성에게서 빼앗으려고 하는가? 여기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딤전 2:12). 바울은 여성이 남성에 대해 권세를 부리는 방법으로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타락한 후 창 3:16절 (“...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자들이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권세를 횡포하여 지배하고자 하는 사실에 바울이 호소하고 있다. 여성이 교회에서 남자들을 주관하는 것을 금지하는 바울의 권면은 디모데가 목회를 하고 있던 1세기의 에베소 교회에만 제한되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교회,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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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에베소 교회에게만 특정적으로(ad hoc) 적용되는 권면이 아닐까? 이런 잠정적인 결론은 아주 민감한 부분이다. 마치 여성의 목사안수를 지지하는 결론처럼 보일 수도 있고, 여성주의자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신학적 검토는 더 있어야 하고, 최종 결정은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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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 남자가 가장으로 다스리듯이 교회에서도 그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남자가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아마 교회 밖의 사람들은 여성이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일을 수행하고자 했던 여성들로 인해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아마 여성의 가르침을 금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에베소의 많은 잘못된 가르침이 여성을 통해서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거짓 선생들(주로 남자)이 거짓 교훈을 퍼트리는 통로 역할을 했는데, 이것은 여성의 교육이 미비했던 점을 악용한 결과이다. 바울은 먼저 여성이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먼저 배우기를 원했던 것 같다. 여성이 충분히 배운 후라면 가르침을 허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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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 2:13-15절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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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남자를 주관하여 가르칠 수 없는 이유는 아담이 하와보다 먼저 지음 받았고, 아담이 아니라 하와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기 때문이다. 유대 랍비들은 하와의 최초의 범죄를 신랄하게 비난한다. 딤전 2:13절에서 말하는 이브는 하와를 가리키지 여자 전체를 가리키지 않는다. 창세기에서 하와가 아담의 갈빗대에서 나중에 창조되었다고 하여 아담에게 종속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아담의 갈빗대 즉 동등성을 강조한다. 바울은 창세기의 문맥을 그대로 사용하여, 여자의 종속성을 말하지 않을뿐더러, 여자 전체가 남자보다 더욱더 유혹에 잘 넘어가고 범죄를 잘할 것이라고 보편화시켜 말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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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가 범죄했을 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경고를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남편 아담에게서 받은 후 였다. 하와는 가르침을 아담에게 의존했다. 여기서 유비가 있는데, 에베소교회의 여성들도 남자에게 성경 지식을 의존했다. 또한 하와가 쉽게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에베소 여성들도 거짓교리에 쉽게 넘어갔다.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하와처럼 유혹에 빠져 범죄할 수 있기에 에베소교회 여자들은 조심하고 가르치지 말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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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구절인 15절의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무슨 의미인가? 여성이 정절, 믿음, 사랑, 거룩으로 산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 중 일부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유는 이것이 행위구원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출산을 겪어 내는 여성들을 언급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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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구원함을 받는다”는 말은 문맥상으로 볼 때 죄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키기보다는 “아이를 낳는다” 혹은 “안전하게 극복하다”라는 의미로 쓰였다(출 14:13, 30; 1 마카비 4:25; 솔로몬의 시편 16:5 등). 하지만 바울은 그 어디서도 “구원함을 받는다”를 출산(아이를 낳는다)을 통해 구원함을 받는다는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세상에 누가 출산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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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과 창세기의 하와 사건에 호소한다. 먼저 바울 당시의 문화적 배경에 호소하는 것을 살펴보면, 사실 바울의 독자가 출산과 관련하여 구원을 이해하는 가장 자연스런 방식은 ‘안전한 분만’을 연상하는 것이다. 고대에는 출산 과정에서 산모가 죽은 경우가 지금 보다 더 허다했기에 출산을 관장하는 아데미 여신을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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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우리는 바울이 암시하는 창세기의 하와 사건에 주의해 보아야 한다. 하와의 범죄는 ‘고통스런 출산’이라는 ‘저주’와 직접 연결된다(창 3:16). 바울이 출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저주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도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혹은 우리(여자)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저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에베소교회의 여성들이 구원을 얻을 길은 정절, 믿음, 사랑, 그리고 거룩으로 사는 길이다. 물론 이것은 ‘아직 아니’ (not yet)의 측면을 가지기에 저주로부터 온(완)전한 구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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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출산’의 이미지를 통한 구원의 설명과 ‘종용히 배우라’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여성은 가르치기 전에 경건한 삶을 통해서 말씀을 먼저 배워야한다는 말씀인가? 아니면 에베소 여성도가 하와가 받았던 저주로부터 경건한 삶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가르칠 자격을 갖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말씀을 배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탁상공론이 아닌 삶임을 강조하는가? 에베소의 여자 성도가 출산의 고통스런 저주로부터 구원받는 길은 그들의 정절과 믿음 그리고 거룩과 사랑의 삶이다. 이런 경건한 삶을 통해서 먼저 말씀을 배우라는 말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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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에베소교회의 여성이 침묵과 가르침을 삼가야 했던 이유는 여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재대로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우리시대에 적용해 본다면, 설령 남자라 할지라도 제대로 말씀을 분별할 수 없다면 가르치기 전에 먼저 종용히 배워야 함을 교훈한다(딤후 2:15).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행 2:18절을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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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정규례 (House Codes): 엡 5장 21-22절의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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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5:18절-6장에는 에베소 교회를 구성하고 있던 아내, 남편, 주인, 종, 자녀를 향한 바울의 권면이 나오는데 이것을 가정 규례 (the house code)라고 부른다. 로마제국의 사회체제와 도덕을 위협한다고 비난을 받았던 단체들은 자신들만의 가정 규례를 만들어서 자신들은 로마제국에 해로운 단체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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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당시의 기독교는 사랑과 자유 그리고 황제 대신에 그리스도를 섬기고 따른다고 가르쳐왔기에 마치 로마 제국을 파괴하고 사회에 해로운 집단으로 비쳐졌다. 따라서 바울은 이것은 오해이며, 에베소 교인들이 사회관계 속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야 했다. 엡 5:18-33절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성도의 가정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교훈한다. 21-22절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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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씀의 문맥을 살펴보자. 엡 5:18절의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으로부터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주는 가정에 관한 권면이 출발한다. 더 직접적으로는 21절의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명령에 기초해서 남편과 아내에게 주어진 권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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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당시 1세기 여성의 위치를 살펴보자. 남편과 아내의 상호복종을 강조하는 바울은, 왜 남편의 복종보다 아내의 복종을 더욱 분명하게 다루는가? 바울 당시의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예수님 중심으로 바르게 잡기 위해서이다. 바울 당시까지만 해도 많은 남자들은 여자들이 도덕적으로 남자들보다 더 연약하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는 “남자들의 용기는 명령할 때 나타나지만, 여자들의 용기는 순종할 때 나타난다”라고 말했다. 유대인들은 여성에 대해 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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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대 선생은 “옷에서 생기는 좀 (moth)처럼 악이 여자들로부터 생겨나므로 남자는 여자들 사이에 앉지 말라”고 했다. 더 나아가 “남자의 악은 여자의 선보다 낫다”고 했다. 랍비 유다는 “이방인, 촌뜨기, 그리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라고 기도했다. 바울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했으며 아내의 수입은 모두 남편에게 넘겨주어야 할 법적 책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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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가정을 너머 가게에서 일할 수 있었다. 필로는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거의 지각이 없이 태어난다”라고 했다. 남편은 단지 음식과 집을 제공해 줄 의무만 지니고 있었고, 아내는 집안 일과 남편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할 의무가 있었다. 여성을 낮추어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참고로 이스라엘에서는 남아선호 사상이, 헬라 세계에서는 여자 아기를 버리는 관습(the practice of exposing baby girls)이 있었다(참고. Kroeger, 2000: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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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로마제국의 이상적인 여성상은 헌신적이고, 온순하고 남자들 앞에서 수줍어하면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었다. 여성의 임무와 수행은 남편에 의해서 충실한 가정 노예로 인정받을 뿐이다. BC 1-2세기의 이집트의 결혼 계약서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한다는 특별 조항을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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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조항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조항보다 선명하지 않았다. 로마의 가정 규례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방법에 초점을 두지 않고 아내를 다스리는 방법에 초점을 둔다. 이런 일방적인 남편 중심의 사회와 관습에 바울은 피차복종을 기치로 내걸고 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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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남편과 아내가 피차 복종해야 한다는 문맥에서 아내들을 향하여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말한다. ‘복종하다’라는 말은 군대 용어인데 부하가 상관에게 순종하는 것이며 자신의 의지나 권리를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바울의 상호복종은 아내의 복종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그 당시의 유대인의 상황이나 로마제국의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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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예수님의 교회를 향한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근거로 해서 부부의 상호 복종을 언급한다. 따라서 남편의 지나친 권위주의적인 자세와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 남편의 아내를 향한 사랑은 기독론적인 사랑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교회를 향한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아내는 가장으로서의 남편의 권위와 책임성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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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이므로 한 몸이 되었기에 공통의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협력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의 삶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권세 때문에 상호 복종해야 하고, 상호복종을 위해서 먼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 충만한 남편, 아내에게 복종하는 남편은 권위 있는 남편이요, 아내에게 복종을 받는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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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주님께 복종하고 주님과 바른 관계가 유지되고, 성령 충만한 아내는 남편의 복종을 받게 된다. 남편과 아내의 피차 복종은 주님을 향한 복종의 한 부분이다. 24절에 아내는 ‘범사엷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범사엷라는 말은 주님을 섬기는데 일치되는 모든 생활의 영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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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적용해 보자. 바울의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은 더 이상 여성이 '방콕'하고 조용히 있는 것을 이상적이거나 미덕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현대는 교회와 직장, 사회에서 특정한 역할을 감당하는 아내의 활동을 인정한다. 하지만 성경은 아내의 우선적인 활동의 장은 가정이라고 한다. 아내가 아무리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직장이 자녀의 신앙교육과 남편에게 복종하는데 지장이 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이 사실을 딛 2:4-5절에서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함이니라.” 성령 충만한 피차복종으로 가정 천국을 이루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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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전 11:2-16절의 여자가 교회에서 머리에 쓰는 것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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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과 관련된 본문을 다루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여성의 교회에서의 역할을 장려하기 위해서 이고, 두 번째는, 1세기와 21세기의 상황의 차이를 정당하게 다루어야만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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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의 여성도가 공적인 예배 모임 중 특히 기도나 예언을 할 때 머리에 무엇을 쓰는 외적인 품행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현대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대개 예배 중에 모자를 쓰는 것을 예의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최고 어른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이기 때문이다. 이미 로마제국 시대에도 이런 관습이 있었다. 하지만 개혁교회의 전통은 오히려 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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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여성도는 아름다운 테가 있는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렸다. 1세기의 바울은 고린도 교회 여성도에게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예배드릴 것을 권면한다. 요즘도 유대인 남자들과 천주교의 여자들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기도하고 미사를 드린다. 이처럼 복음은 하나이되 복음이 표현되는 방식에 있어서는 다양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고전 11:2절 이하에 나타난 여성도의 머리에 무언가를 쓰는 것을 알려면 바울 당시의 관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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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말하는 머리에 쓰는 것은 얼굴전체를 가리는 베일(face-veil)이라기보다는 머리카락만 덮는 숄(Shawl)이다. 15절의 ‘peribolaion’은 베일(veil)이라기보다는 망투 (cloak)나 숄을 끌어 당겨 머리 위에 덮어씌우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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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대중 앞에서 머리에 숄을 덮어 쓰는 이유에 관한 몇몇 설명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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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 당시의 여성의 활동의 場은 주로 가정에 제한되었기에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했다. 유대인의 한 지혜문서에는 “처녀는 자물쇠를 꼭 채운 방안에 두고 지켜라. 그렇게 하여야 결혼식까지 집 앞의 어느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라고 기록한다. 사실 로마제국에서 어떤 남편은 아내가 베일을 가리지 않은 채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는 것을 이유로 아내와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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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망 있는 여성은 대개 남편과 함께 있을 때에만 자신을 드러내 보여야 했으며, 남편이 없을 때에는 자신을 숨기고 집안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다. 이렇게 여성의 활동을 주로 가정에 제한한 이유는 여성이 다른 남성에게 너무 매력적으로 보일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 이유로 어떤 유대 랍비는 여성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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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대의 창녀들은 주로 머리를 풀어 다녔고, 기혼 여성들은 머리에 무언가 쓰고 다녔다. 때때로 유대인들에게 풀어헤친 머리는 여자 귀신들의 특징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고전 11장에서 여성도가 머리에 무언가를 써야 한다고 말한 이유를 창녀나 음란한 여자와 구별되는 정숙한 몸가짐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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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리스의 여성들은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은 채로 예배에 참석했다. 반대로 로마 (남자 사제들과) 여성들은 희생제물을 드릴 때 머리에 무언가를 쓰야 했다. 그러므로 고전 11장을 기록한 바울은 로마의 관습을 염두에 두고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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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반적으로 몸이 노출되는 것은 머리가 노출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여자들이 머리를 풀어놓는 것은 헬라와 유대 전통에서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임과 동시에 남자의 정욕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머리를 늘어뜨린 채 대중 앞에 나서 자신을 드러내거나 남자와 시시덕거리는 행동으로 비난을 받았던 유대 여자는 결혼 계약에 명시된 위자료도 받지 못한 채 이혼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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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1994:22)은 고전 11장을 설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만일 여자들이 자기들의 머리를 드러내고 머리카락을 보이는 일을 허락받게 된다면, 그들은 결국 자기들의 젖가슴을 드러내도록 허락받게 될 것이고 마치 그것이 선술집의 쇼나 되는 것처럼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말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무감각해져서 어떤 겸손이나 부끄러움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가정 밖에서 수로보니게 여인과 대화를 나누신 예수님의 모습은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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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주장들이 있어왔지만 고린도 교회에서 여자들이 머리에 쓰는 것에 대해 확실하게 설명해주는 주장은 없는 것 같다. 따라서 고전 11:2절 이하의 바울의 논증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성도가 기도나 예언을 공중 예배 중에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섬김이나 예배 중에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말이다. 롬 16:7절에서도 바울은 여자 성도를 하나님을 섬기는 동료요 심지어 사도들과 같이 귀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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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전 11:3절 이하에서 4가지 이유를 들면서 여자가 머리에 숄을 쓰야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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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기엷 숄을 쓰야만 한다(11:3-6). 3절에 보면,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 이 머리가 가리키는 바는 ‘근원’, ‘영광’, ‘존귀’, 혹은 ‘리더’(leader)라고 볼 수 있다. 남자와 여자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8절은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고 한다. 사실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만들어 졌다. 바울 당시의 고린도 교회에서는 여자가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거나 머리를 미는 것은 자신의 육체적인 머리뿐 아니라, 자신의 머리인 남편에게도 치욕을 가져다주었다. 좀 더 확대해서 설명해 보면, 가정의 명예 특히 가장의 명예를 세워주기 위해서는 대중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아내의 옷차림이 남편을 불편하게 한다면 그 옷차림을 그만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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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조금 다르게 설명해 보자. 바울은 11:7-12절에서 여자가 머리에 무언가를 써야 할 이유를 ‘창조질서’에 호소한다. 창 2장에 보면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기에 남자의 형상을 반영한다. 물론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 옷차림이 정숙한 아내는 남편의 명예를 잘 드러내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아내는 영광을 훼손한다. 그리고 아내는 예배 시에 남자의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면 안 된다. 여자가 머리에 씀으로써 예배 중에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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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전 11:10절에 보니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두어야 한다. 여자의 옷차림 특히 머리에 쓰는 것은 천사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창조 질서의 수호자인 천사도 예배에 참여한다는 사상이 바울 당시에 있었고, 천사도 남자처럼 여자들에 의해 성적인 유혹을 받았다는 유대문헌의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은데 바울이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설명은 추론에 불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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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전 11:14절은 ‘본성에 호소하면서’ 여자들이 머리에 써야 한다고 설명한다. 여자가 긴 머리를 가지고 있고 머리에 써는 것을 덮고 있다면 본성에 맞다는 것이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 반대로 성전환 수술을 받거나 옷차림을 통해 성구별을 무시하는 것은 본성을 거슬리는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남자들의 복장 역시 예배를 방해 할 수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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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는 남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거나 여자가 머리를 짧게 깎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즉 바울은 인간의 본성을 사회적 관습과 연결시켜서 여자들의 합당한 옷차림을 언급한다. 고린도의 여성도는 여성으로서 합당한 옷차림을 준수해야 했다. 남자의 남성다움과 여자의 여성다움은 예배 가운데서도 지켜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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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전 11:16절에서 바울은 그 당시의 교회의 일치된 ‘관습과 규례에 호소함’으로 여자의 머리에 써는 것을 주장한다. 즉 고린도교회가 일치되게 따르고 있는 바를 존중하면서 여자는 기도나 예언을 할 때 머리에 써야 한다고 한다. 바울은 그 당시의 체제를 지킬 의사가 없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본성,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상호 의존성에 호소하면서 예배 중에도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 지켜져야 할 것을 가르친다. 즉 바울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는 것을 논하면서 여성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제한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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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의 적용: 현대 교회의 예배에 여자가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온다면 남자들뿐 아니라 동료 여성도에게도 피해를 줄 것이다. 남자 성도가 비키니나 여자 치마를 입고 온다면 역시 문제다. 이것은 우리의 교회의 관습과 창조질서에 맞지 않다. 그리고 아내가 비키니를 입고 교회에 온다면 머리인 남편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 되고 만다. 여성은 교회에서 머리에 쓰는 것뿐 아니라, 지나친 몸치장을 통해서 자신을 과시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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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든 여자든 예배시의 성적 호소를 하는 복장을 통해 남의 시선을 끌어서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의 모든 신앙의 방식은 남을 고려할 줄 알아야 한다. 너무 진리 안에서 자유함으로써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어서는 곤란하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신앙의 자세가 필요하다. 실족케 하는 튀는 신앙 습관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외적인 복장 문제로 본질인 예배와 섬김이 손상을 입어서는 안 된다. 본질인 예배와 섬김은 정숙한 외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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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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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여성이 목회자로 안수받는 것에 찬성하지 않지만 우리 모두는 여성의 교회에서의 역할 문제는 전통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해석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주로 핵심 이슈는 바울 서신의 교훈이 바울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영구적인 진리인가의 문제다. 이것은 속단할 사항이 아니기에, 앞으로 정당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더 세밀하게 본문의 문맥과 역사적인 상황을 먼저 고려한 후 우리 시대의 상황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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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신학. 2004년 5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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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의 여성

권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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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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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남성들에 비하여 가정생활에서나 사회적 활동에서 많은 제한과 차별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물론 아직도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엄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다른 시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향상되어진 것도 사실이다. 우리들의 주위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고, 또한 "남녀평등"이나 "여성해방"과 같은 슬로건들이 이젠 그렇게 낳선 것으로 들리지 않는다. 고대 사회에 비하여 여성의 위치가 부상하였고,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달라진 현재, 교회에서도 시대의 역동적인 변화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와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여성의 위치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진보주의적인 교회들은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과제와 위치에 관해서 많은 고려를 해왔고 여성들에게 목사직을 포함하여 공적인 직무를 개방하여야 한다고 결론 짓는다. 반면에 보수주의적인 교회는 여자들에게는 목사직을 포함하여 어떤 공적인 직무들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대립적인 상황에서 어떤 입장이 더 타당한가?라는 문제에 우리가 접근함에 있어 역사적인 접근이나, 사회적인 접근을 시도하기 보다는 성경에 대한 바르고 진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즉 교회 안에서의 여성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이야기 하며, 그 구절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바른 주석적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해답은 성경 안에 있기 때문이다.

본 고는 이런 필요성에 따라 성경에 나타난 여성에 관한 구절들을 해석함에 그 목적이 있다. 특히 바울의 서신들에 있어 여성의 위치에 대해 긍정적인 구절들과 부정적인 구절들에 대한 바른해석을 시도하려 한다. 이런 목적을 위해 필자는 먼저 고대사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살펴보고, 구약과 예수님의 가르침에서의 여성의 위치, 그리고 바울 서신들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끝으로 이 모든 것 위에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재 정립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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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본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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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사회에서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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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회에서는 여성에 대하여 매우 비하적인 입장에 서있었다.

플라톤은 "악한 남성의 환생"이 여성이라고 암시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을 근본적으로 "본성이 결핍된 존재"로 보았다. 그래서 여자는 잘 웃고 쉽게 성내고 질투하고 또 불평이 잦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리스 철인들의 여자에 관한 이러한 생각은 초대 교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터툴리안은 여성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문"이라하여 여자의 사악하고 나쁜 점을 극명하게 묘사하였다. 어거스틴은 여자는 남자와 함께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형상을 발휘할 수 있고 남자없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질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은 여자는 남자가 있어야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존재가치를 가진다는 말이다.

6세기의 보에티우스는 여자를 "시궁창 위에 세워진 성전"으로 비유했다. 바깥의 외모는 성전같이 깨끗이 단장되어 있으나 속은 시궁창과 같다는 말일 것이다. 중세에는 여성이 육체만의 존재가 아니라 불멸의 영혼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부들이 남성과 여성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이원론적인 개념을 극복하려 노력하였으나 그도 역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파악한 데 있어서는 별다른 점이 없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대로 고대 사회에서의 여성들은 많은 남성들에의해 멸시와 천대로 대하여져왔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여성들은 단지 갖고 노는 노리개나 또는 섹스의 상대, 급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요리사, 주부, 보모, 아니면 이성적 토론 같은 것에는 끼어들 만한 능력도 없고 두뇌도 없는 멍청이 쯤으로 흔히 대접을 받아왔던 것이다. 여성의 재능들은 평가를 받아보지 못했고, 그녀들의 개성은 질식되었으며, 그녀들의 자유는 축소를 거듭해 왔고, 어떤 분야들에서의 여성들의 직업은 착취를 받아왔으며, 기타 분야에서는 거부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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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경에서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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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구약에서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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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회와는 달리 구약성경 안에서의 여성들에 대한 언급은 매우 변호적이고 호의적이었다.

구약성경은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언급하며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존재임을 설명한다. 남자와 여자는 성의 구분은 있지만,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동일하게 하나님의 복을 받았고 동일한 책임을 위임받은 존재이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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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여성은 남자와 결혼하여 한 몸을 이루는 동등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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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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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여성들은 언약 공동체의 일부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남자와 아이들과 함께 공적으로 읽는 토라를 들었으며 예배에도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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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31:12) 곧 백성의 남녀와 유치와 네 성 안에 우거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로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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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아내들에 대한 능력은 칭송되었으며, 한나,룻,에스더처럼 경건한 여인들은 칭찬을 받았다. 사사시대에는 여 선지 드보라가 활동하였으며,(삿4장) 요시아왕 때에는 여선지자 훌다가 있었으며, 모세의 누이 미리암 역시 여선지로 불리워졌다.

이처럼 동등성을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창2장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의 창조 기사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는 창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남성과 여성 즉 아담과 하와를 동시에 창조하지 않으시고, 먼저 아담을 만드신후 아담의 돕는 배필이라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나중에 하와를 창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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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 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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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하와는 아담과 동등한 인격을 가졌지만 아담에게 복종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아주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배필"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돕는 자이심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했지만, 서로를 섬기는 관계를 묘사할 때도 사용되었다.

이와같이 성경은 여성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남녀의 동등성 그리고 아내로서의 돕는 역할등에 대해 먼저 언급한다. 많은 구약 성경 구절들이 동등성과 여성의 복종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지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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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예수의 가르침에서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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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할 때, 우리는 먼저 예수께서 여성들과 함께 보내신 시간과 또 그분께서 분명히 당시의 남성들과는 현저하게 대조가 되는 친교를 여성들과 나누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성을 소유물의 하나로 보았던 헬라와 로마, 유대의 문화 속에서 여성들을 사랑하셨고 존중히 대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청중들 속에 여자를 포함시키셨고 뿐만 아니라 가르침 가운데에 그들이 친밀함을 느낄 수 있는 예화들과 이미지들을 사용하셨다(마13:33/ 22:1,2/ 24:41/ 눅15:8-10). 또한 예수께서는 특별히 자신의 가르침을 여자들에게 적용시키셨다(마10:34-42). 예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으로도 간음한 것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여성은 단순한 성적인 대상이 아님을 보여 주셨다(마5:28). 또한 창조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둘의 동등성을 인정하셨다(마19:4). 부활 때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고 말씀하셔서 미래적 종말론의 현재적 측면에서 적용할 때에 그 동등성을 강하게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마22:28). 유대인들은 자기의 아내나 딸, 혹은 자매일지라도 길거리에서 여자와 말을 주고 받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상종하려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여인과도 대화하셨다(요4장). 또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친절하게 대하셨다(요8장). 부활하신 후 먼저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고 자신의 승리의 복음을 맡기신 것이 바로 여인들이었다(요20:1-18)

여성들을 대하신 이와같은 예수님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셨고, 그들이 알지 못했던 방법으로 긍휼을 베푸시고 존중하셨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도 남성을 지배하는 위치에까지 여성들을 올려 놓지는 않으셨다. 그분이 선택하신 열두 제자 중에 여자는 한 명도 없었으며, 심지어 십자가 사건 때 대부분의 제자들이 도망치고 여자들은 신실하게 남아 있었지만, 예님은 남성들을 쫓아버리고 그 자리를 여성으로 채우시는 일은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그릇된 가치관이나 사고 방식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셨으며 여성들의 동등성과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셨지만 그들을 남성을 지배하는 위치로까지 부상시키지는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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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바울 서신에서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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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서신들에 나타난 여성에 관한 주제에 대한 접근방법으로는 바울 사역을 도왔던 여성들에 대해 살펴보는 것과 여성들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구절들에 대한 주석적 접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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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바울 사역에 동참했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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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역에 동참했던 여성들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은 아굴라의 아내 "브리스길라"가 대표적인 예이다. 브리스길라는 남편과 함께 바울의 전도 사역에 계속 동참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린도와 에베소, 그리고 로마에 있는 그의 가정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유니아"는 바울보다 먼저 기독교인이 되어 바울과 더불어 일했으며, 바울과 함께 옥중에 갇힌 동료 죄수였다. 바울은 유니아와 안드로니고를 가리켜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는 자"라고 부르는데(롬16:7) 이에 대해 벵겔과 다른 학자들은 유니아도 넓은 의미의 "사도" 라고 불리울 수 있다고 주장하며 박윤선 박사나 찰스 핫지도 이 해석을 지지한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여인에 대하여 바울은 "복음에 함께 힘쓰던 자들" 이라고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여인들이 "글레멘드와 그외에 나의 동역자들"과 함께 일하였다고 언급하였는데(빌4:2-3),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여성들이 빌립보 교회 안에서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로에"는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안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바울에게 전해 준 사람으로(고전1:11) 그녀는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중간에서 협력했던 크리스챤 여성들 중에 하나였다.

"뵈뵈"에 대해 바울은 그녀가 겐그리아 교회의 제직 중에 하나였으며, 또한 그녀가 "여러사람과 나의 보호자"였다고 언급한다(롬16:1-2). "보호자"라는 헬라어 낱말은" ...앞에 서 있는 자"를 뜻한다. 고대 헬라 문헌에서 이 낱말은 종종 "투표장 감독관"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이 낱말은 또한 "보호자", 또는 "후원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낱말이 "종교 단체의 직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즉 이 낱말은 대제사장, 서기관, 관리인들, 그리고 "수탁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명사를 여성형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선례를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고있는 용어를 해석함에 있어서 뵈뵈가 교회와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롬16:2절에서 바울은 뵈뵈가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했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녀를 "보호자" 또는 "후원자"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바울 서신에서 바울의 복음전도 사역과 목회 사역을 도운 많은 여성들이 존재하지만, 필자는 그들 중에서 대표적인 여성들만 살펴보았다. 위에서 살핀 점들을 미루어 볼 때 바울의 주변에는 그와 더불어 복음전도 사역에 힘써 협력하던 여성 "동력자"들이 많이 있었고 바울은 그들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협력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단순히 물질적 지원이나 봉사에 국한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위에서 살핀대로 그들은 바울의 전도와 복음 사역에 협력하는 "동역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초대 교회의 실제 역사를 통해 밝혀진 이런 자료들 속에서는 여성들의 신분과 역할을 부정적으로 평가절하하거나 제한하려고 하는 어떤 암시들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남자와 여성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음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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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여성에 대한 바울의 본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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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대한 바울의 본문들을 다룸에 있어 우리는 먼저 자료에 대한 결정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학자에 따라 그 자료의 저자에 대해 이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필요상 필자는 몇가지의 구절들(딤전2:11-15/ 엡5:22-24; 골3:19/ 고전 14:34-36/ 갈3:27-28/ 고전 11:2-16)을 선택해서 다루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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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딤전 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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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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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교회 내에서 여성의 역할과 활동을 제한하는 것으로 보이는 바울의 가장 결정적인 구절들이며 또한 역사적으로 그 해석도 다양하다.

Furnish는 여자에 관한 이 구절에는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은 없으며, 이와같은 내용은 헬라파 유대인에 의해서, 또는 아담과 이브에 관한 언급을 빼고는, 바울 당시의 세속적인 도덕가에 의하여 쓰여질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 구절은 헬라 가치관 관습과 유대인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그것이 남편과 아내라는 특정한 관계보다는 남자와 여자의 일반적 관계를 문제를 삼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일반적인 남자들과 여자들에 관계가 있기 보다는 남편과 아내에게 특별히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바울 서신에서 "남자"( )와 "여자"( )가 각각 50회 이상 사용되는데, 이들 대부분이 남편과 아내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이 구절과 평행을 이루는 딛2:45, 벧전 3:1-7절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명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복종"은-"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일반적인 여자들에 관계되기 보다는 특별히 아내들에게 관계된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아내가 어떤 사람에게도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금지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어머니가 자녀들을 가르치고(딤후3:14-15), 나이 많은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을(딛2:34) 허용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여기에서 여성들에게 금지하려는 것은 아내로서 마땅히 복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우월한 복음의 지식을 가지고 남편들을 가르치고 주관하려는 태도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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⑵ 엡5:22-24, 골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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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5: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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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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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쌍둥이 서신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그 내용과 순서, 그리고 구조에 있어서 유사하다. 본문은 앞선 교리적인 진술들에 이어서 나오는 권면들의 한 부분으로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반드시 작용해야만 하는 상호책임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일반적인 여자들이 일반적인 남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아내들이 그들의 남편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을 교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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⑶ 고전 14: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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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전14: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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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의 바울의 저작성을 부인하는 견해들이 있어 왔지만 이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논점들은 여자가 누구이며, 34, 35절의 "말하는 것"은 무엇이며, 본문의 상황은 어떤 것인가?라는 것들이다.

본문의 고린도에서의 문맥은 고린도 교회 내의 문제들을 다루는 중에 공예배의 무질서를 지적하며 영적 은사들의 정상적인 사용 방법을 지시하는 구절이다. 특히 고전 14장은 방언의 은사보다 예언의 은사가 탁월하다는 것을 제시하며(1절), 교회의 예배 가운데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할 것을 지시하며(26절), 질서가 있어야 할 것을 지시한다(40절). 그러면서 여자는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명령을 하고 있다. 이 여자는 35절에서 남편에게 물어야 하는 여자, 즉 아내로 나타나며, 아내들이 남편이 있는 교회에서 나서서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지시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여자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한 것은 교회 내에서 어떤 일에나 침묵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명령이 아니다. 이 일이 금지된 것은 단지 그 일들이 품위아 건덕 상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며, 그가 의도한 것은 남편들이 예언의 메시지를 토론하거나 평가하는데 그런 일에 가타부타 끼어드는 태도나 논쟁적인 태도를 보이지 말고 집에 가서 조용히 남편에게 문의하고 배우라는 것이다.

더욱이 본문의 바울의 명령은 교회 내의 일반적인 상황에서 적용되는 명령이기보다는 공중 예배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 공중 예배에서 신령한 부인은 남편에게 복종하는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고 공중 예배 석상에서 예언의 말씀에 대한 남편의 판단이나 평가를 뒤집거나 부정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남편들 위에서 "심판자"처럼 행동하는 일을 하지 말고, 예언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거나 물을 것이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들에게 배우라는 것이다. 35절에서 바울의 목적은 아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편들을 향해 권위를 잘못 행사하는 일을 방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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⑷ 갈3: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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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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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서신 중에서 갈라디아서는 당시 팽배하던 인간의 노력에 의한 구원이론 들에 대한 기독교의 자유 헌장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교회 안에서는 모든 자들이 일체이며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위대한 선언이다. 본문은 그러한 위대한 선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퍼니쉬는 본문에서 바울이 교회가 세례식에서 사용하던 전통적 증언을 인용하거나 또는 암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같은 신앙고백문이 롬 10:12, 고전 12:13, 골 3:11에도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은 모든 세상적인 차별의 장벽이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즉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이 구절에 나타난 구절들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는 마지막 네 번째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이미 26절에서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또 이어서 2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선언한다. 이어지는 본문은 모든 형태의 차별이 폐지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28절은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 그결과 우리 모두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그리스도로 옷입거나 아브라함의 씨가 되는데에는 구별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본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등하게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아브라함의 씨로서 상속자들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 안에서 남녀의 구별이나 차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본문의 욧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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⑸ 고전 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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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에 대한 본문에 대해 이제까지 다양한 해석이 주장되어 왔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여성이 모자나 수건을 쓰는 것이 참된 신앙을 나타내주는 표시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는 고린도 교회 여성들의 행습은 당대의 문화적 패턴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여성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같은 주장에 대해 성경 본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필자는 ①여성그룹의 성격 ②머리됨의 의미 ③머리에 무엇을 쓴다는 의미등으로 나누어 본문을 해석하고자 한다.

① 여성그룹의 성격: 본문에서 바울이 예배시에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한다고 권면할 때, 그는 도대체 어떤 여자들을 염두에 두고 교훈하는가? 그는 남자와 여자의 일반적인 관계를 토론하는가,아니면 남편과 아내의 특정한 관계를 토론하는가? 본문에서의 여자란 일반적인 관계를 염두해 둔 용어라기보다는 남편과 관계를 맺고있는 아내로서의 여성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용어상 본문의 남자와 여자는 바울 서신에서 각각 50회와 54회 정도 사용되었는데, 대부분이 일반적인 남자와 여자를 지칭하기 보다는 남편과 아내를 가리킨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하여 "머리"라는 말을 쓸 때 일반적인 남녀 관계에 적용하기 보다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자주 적용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문제는 바로 예배시에(14:23,26 참조)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역할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② 머리됨의 의미: 바울 당대에 있어 "머리"라는 용어는 사람의 육신적인 머리, 권위를 지닌 사람, 또는 어떤 것의 기원을 의미할 수 있었다. 바레트와 부르스,죤 스타트 등은 본문의 머리됨은 권위라기 보다는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에 "기원"의 의미를 적용하기 보다는 "권위"를 적용함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다는 뜻의 문장으로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본문이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바울의 평행구적 표현은 아주 어색해 질 뿐만 아니라, 1세기적 상황에서 머리에 베일을 쓰는 문제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된다는 사상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리고 11장의 전후 문맥에서도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권위 문제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10절)

③ 머리에 무엇을 쓴다는 의미: 본문은 흔히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머리에 다른 것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고, 때로 다른 학자들은 여자의 긴 머리가 얼굴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그녀의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머리에 쓰는 것이 어떤 형태로 실해외었든지 간에 바울의 여성관을 살펴볼 때, 주목할 수 있는 것은 7절과 11-12절일 것이다. 7절에서 바울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 말한다. 창세기에서의 형상과 모양이 여기에서 형상과 영광이란 말로 대치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에 대해서는 형상이라는 말을 반복하지 아니하고 영광이라는 말만 되풀이 한다. 더 나아가 바울은 11절에서 여자의 창조 양식이 남자에게서 났고(8절), 여자의 목적이 남자를 위한 것이지만(9절), 남자와 여자 두 성은 상호 의존적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질서가 "주님 안에서"의 질서임을 지적하여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며 상호 의존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바울은 남성이나 여성의 우월성이나 권위를 말하기 보다는 상호 의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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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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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고대사회에서의 입장에서와 성경, 특히 구약과 예수님,바울 등의 입장들을 살펴보았다. 이 모든 것을 다룸에 있어 그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없다"(갈3:28)는 것이다. 남녀는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남녀 모두다 존귀한 가치를 지닌다. 여기에는 열등과 우등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맡은 바 직임을 감당함에 있어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이미 구약성경 전체와 예수님의 교훈, 그리고 바울의 교훈에서나, 그의 사역에 동참했던 여성들의 역할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교회는 아직도 여성의 교회의 위치에 있어 개방적이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 여성을 동역자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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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고 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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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드리, 로버트. {신약개론} 김일우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3.

바레트,C. K. {고린도전서} 국제성서주석 시리이즈. 한국신학 연구소 번역실 역. 서울: 한국신 학 연구소.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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죤 스타트. {현대 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 박영호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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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메릴 C. , {신약개설} 김근수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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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변천에 따라 부과되는 여교역자의 역할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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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21세기를 수년 앞둔 지금 시대는 한마디로 혼란 속에 있다고 하겠다. 종교 다원주의와 뉴에지 운동로 한때 가치관의 혼돈을 야기시키더니 요즘은 교회일치 운동과 페러다임이라는 이슈로 떠들석하다. 이렇게 급변하는 사회 및 변화에 교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하는 문제는 계속되어왔다. 그러나 벼화되는 사회만큼 교회는 실질적으로 대응하지 못한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아직도 구시대적인 것만을 최고인 만양 고수하려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로 남자와 여자의 성차별이다. 남성우월주의나 가부장적인 전통에 익숙한 한국교회는 여자의 역할을 제한할 뿐 아니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러한 실태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특히 여교역자로서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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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본론

1. 설교

목회활동에 있어서 어느 특정분야의 중요성을 특별히 부각시킬 수는 없으나 현 교회의 상황을 볼때 주일예배가 전체 교인들의 공동체 인식을 확인하는 기회이므로 여교역자가 전체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라면 주일 낮 예배시 설교하는 기회가 주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교역자는 공동인 위치에서 교인과의 연계성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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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심방

교회내에서 심방의 기능이나 그 역할의 중요성은 인정되지만 남성들도 해내야만하는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감성적인 여인에게 더 적합한" "조금은 구질구질한 일" 롤 간주하며 부목에게는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심방다니는 일' 자체가 별 중요한 일로 인식되지 않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심방은 참으로 중요하다. 특히 여교역자의 역할은 교회 내에서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본다. 자애로운 어머니가 자녀를 희생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처럼 교회 안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목회자의 사역 가운데출생, 회심, 직업, 결혼, 질병, 죽음 등의 긴급한 사역에 여교역자의 역할은 남교역자의 역할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한 가정에서 어린아이를 출산하는 일은 교인과 다정하게 친교해 오는 목회자라면 의당히 관심을 집중시키는 하나의 위기적인 체험인 것이다. 격렬한 회심은 설교나 부흥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나 원만한 회심의 경우 여교역자의 사랑스런 돌봄 안에서 결정적인 회심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자를 돌보는 경우와 죽음 등에 여교역자의 역할에서 보다 효과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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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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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전하느 전도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생활속에서의 전도의 시대이다. 주일예배에서 선포되어진 말씀이 실제 생활에서 한 주간 동안 신자들을 통하여 구현되고 있는가를 직접 현장에 뛰어 들어가 지도, 감독자가 되어 확인하는 책임이 여교역자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전도의 필요성이 강단에서 설교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하고 저도의 기술을 교육시키며 결과를 확인하는 일은 여교역자가 더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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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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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일반적인 경향은 신자들이 목회자를 찾아와 괴로운 개인문제를 가지고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가 적다. 좋은 일이 있으면 감사헌금을 내며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바라고 있지만 좋지 못한 일이나 괴로운 일은 자기 자신이 조용히 해결하기를 원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또한 상담을 하더라도 신앙문제가 대부분이다. 이는 교인들이 교회내 상담은 신앙문제만 국한하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의 가정이나 개인 생활에서 겪는 문제를 쉽게 목회자들에게 털어 놓지 않는데, 그원인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교인들이나 교역자들은 신앙생활과 실제생활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함께 연결된 총체적인 신앙생활을 보고 상담함으로 제반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교역자들의 전문적인 상담기술의 습득이 필요하며 이롤 위해 시간을 할애하여야 할 것이다. 여교역자들의 상담 내용에 있어서 신앙상담 문제가 과반수를 차지한다는 것은 여교역자도 신앙의 길잡이로 생각한다고 간주할 수 있다. 또한 특히 여교역자들은 입을 무겁게 함으로 내담자와 나눈 대화를 절대 비밀이 보장되어야 함을 명심해야 그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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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회행정

교회는 하나의 조직체로서 효과적으로 구성되지 않으면 교회의 중요한 임무인 예배, 교육, 선교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없다. 모이는 교회에서 성공한 한국교회가 나아가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교회행정이다. 현대 사회가 전문화, 기능화되면서 교회의 여러가지 직능이 다양해 지고 있다. 목회자, 전도자, 교육자가 교회의 행정까지 직접 관여하기에는 시간적인 제약이 있을 뿐 아니라 기능상의 문제도 있는 것이다. 교회행정에 대한 교육이 없는 사람이 맡겨진 일만 수행하는 소극적인 임무 수행을 넘어 신학과 교회행정을 맡아 주는 것은 목회와 선교를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여러가지 성도에 관한 자료를 토대로 하여 성도 신앙의 성장을 확인하고 효과적인 지도를 가능케 하는 기초자료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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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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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살펴본 대로 급변하는 사회에 여교역자의 역할이 다양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국여교역자의 바람직한 위치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복음서에 나타난 여자에 대한 예수의 태도에서 찾게된다. 초기교회의 선교적 사업에서 여성의 위치를 보면은 예수가 사도로서 남성을 택하였다는 언급이나, 예수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력은 남성만의 자격이 있다는 등의 언급은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복음서에 나타난 여성사역에 대한 고난의 제자직을 수행한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어떠한 근거로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여 여교역자의 역할을 제한하는지 알 수 없다. 이제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여교역자의 바람직한 역할로서 목회자, 전도자, 상담자, 교육자, 목회행정가로서 통전성 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개교회에서나 여교역자 스스로 노력하고 배려함으로 효과적인 사여을 담당하여 변화하는 사회에 대응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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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하며 목회하기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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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역할이 과거에 비해 괄목할 만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기업을 이끄는 여성뿐만 아니라 여성 국회의원, 장관, 총리, 대통령도 이제 낯설지 않다. 교회 안에서도 여선교회의 적극적인 활동이 남선교회를 압도하고 있으며, 남성들과 비교할 때 여성들은 조금도 미흡하지 않은 지도력을 보이고 있다. 또한 연합감리교는 여성을 성직자로서 남성과 동등하게 안수하며, 여성의 영적 지도력을 잘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교단들은 여성목사안수가? 성경적이지 않다 며 거부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으며? 성경적이다 라는 한마디로 그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여성의 동등한 지도력을 인정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일부 교회가 여성의 영적 지도력을 쉽게 용인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지극히 현실적인 성경해석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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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표적인 구절이 고린도전서 14장 35절,?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한 대로 여자들은 복종해야 합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십시오. (표준새번역성경, 2001) 또한 고린도전서 11장 5절에서 여자가 공적인 자리에서 예언하고 기도하기 위해서 머리에 너울(수건)을 써야 한다는 기록이 근거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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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두 구절을 읽어보면 여성들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느낌이 든다. 과연 그러한가? 먼저 11장의 너울 쓰는 단락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 여성의 지도력을 교회 안에서 금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바울의 의도는 여성이 교회의 공적인 자리에서 예언하고 기도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린도교회에 여성의 영적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불만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반대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여성의 영적 은사를 인정하도록 권면하는 내용이 이것이다. 견해가 다른 두 그룹을 어떻게 화해시켜 제3의 길을 열어낼 것인가? 여기서 바울은 여성이 머리에 너울을 쓰고 영적 은사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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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여성의 발언권(지도력)을 막는 고린도전서 14장의 구절과 전혀 상반된다는 결론이 그것이다. 바울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성서본문 비평(다양한 성경 사본에 대한 비교연구)에 의하면, 14장 34-35절은 사본에 따라서 현재의 위치에 있기도 하고, 14장 40절 뒤에 오기도 한다. 많은 학자들은 11장과 상반되는 입장을 근거로, 또 구절의 위치가 사본에 따라 다르다는 점, 그리고 루디아와 같은 여성이 바울의 전도과정에서 적극적인 지도력을 발휘했음을 들어, 34-35절이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여자들이 잠잠해야 한다는 것은 바울의 공식적인 견해라기 보다는, 교회가 가정교회의 영역을 넘어 그리스-로마 사회의 공식적인 종교로 자리잡아 가는 과정에서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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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설사? 여자가 잠잠해야 한다 는 말이 바울의 것이 아니라 해도 우리가 신앙의 규범으로 삼고 있는? 성경(정경) 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므로 여성이 교회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전히 성경적이라고 하는 주장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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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성서신학 전반의 문제로 확대되는데, 신앙의 근거로서 신약과 구약이 포함된 정경(canon)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선, 성경 안의 많은 규범이 제시되고 있는데, 크게 보면 구약의 것과 신약의 것이 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은 우리들이 즐겨 먹는 돼지 삼겹살이나 오징어 볶음은 절대 먹어서 안 되는 부정한 음식(레위기 11장)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게 먹고 있다. 이유는 고린도전서 8장과 10장(10장 25-26절)에서 바울이? 마음이 약한 자 들의 양심을 위해 우리 자신의 자유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어떤 음식이든 부정한 것은 없다(8장 8절, 10장 25-26절)고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태복음 15장 11절, 마가복음 7장 15-16절)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 (마가복음 7장 19절)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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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지침으로, 삶의 중요한 전거로 사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의 본문이 직접적으로 상호 충돌하는 교훈을 줄 때, 성서전체를 통해 그 교훈을 찾아야 한다. 또한 신, 구약의 갈등지점에서는 일반적으로 구약을 신약의 빛으로 조명하게 된다. 가끔 한국 기독인들은? 동방의 유대인 으로서 자부심을 말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즉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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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위의 경우처럼 신약 안의 구절들이 상충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자는 잠잠해야 한다 는 구절은 고린도전서에 있고, 이것은 신약에 속한다. 신약 안의 구절을 임의로 취사선택하여 버릴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이런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말씀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본문을 둘러싼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이 최종적인 신앙의 지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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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여성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으셨는가? 어린이들이 그에게 가까이 오도록 허락되었듯이, 예수님의 사역 현장에서 여성의 역할은 간과될 수 없다.? 마리아 란 이름이 대표적인 예이다.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 허락되었고(누가복음 10장 38-42절), 베다니에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막달라 마리아를 두고 주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억되어야 할 것(마가복음 14장 9절)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예수께서 체포된 후, 남자 제자들이 다 도망갔을 때, 부활을 첫 번째로 목격한 여성의 이야기가 더욱 중요한 깃점을 이룬다. 그들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등 세 여인이었다. 이 세 여인은 천사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직접 듣고, 숨어있는 남자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는 명령을 받았다.(마가복음 16장 7절) 여성의 지도적인 역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복음서의 기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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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잠잠해야 한다 는 구절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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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성경적 이지는 않다는 것을 이렇게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초대교회가 성장하면서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문화에 순응하고, 사회구조 속에서 채택되고 재생산된 주장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주신 영적 은사가 남자들의 것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여성의 영적 지도력은 적극적으로 긍정되어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세워 가는 데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고린도전서 12장 12-13절)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은사를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 쓰신다. 서로을 위한 존경과 겸손은 그래서 교회를, 그리고 가정을 풍성하게 건강하게 세워 가는 귀한 덕목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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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덕 목사, 언약교회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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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바울의 이해

????????? 2006년 10월 10일 (화)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송영목 / 고신대 대학교회(www.daehaak.org ) 담임, 부경성경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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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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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교회론(New Testament ecclesiology)을 다룰 때 주로 에베소서에 나타난 교회의 메타포인 머리이신 예수님과 몸인 성도를 중심으로 자주 논의되어 왔다. 혹은 투영(transparency)의 원리를 적용하여, 예를 들어 ‘마태교회’(혹은 마태공동체, the Matthean community)와 같은 특정 공동체의 모습을 찾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 여기서는 바울 서신을 중심으로 여성의 교회에서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논의를 좁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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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와 2세기의 속사도 시대와 변증가들의 시대에 복음이 광범위하게 전파된 것은 여성의 공헌에 힘입은 바가 컸다. 현대에도 교회에서 여성의 사역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활발하고, 사실 이런 능동성이 요청되는 시대다. 여성의 교회에서의 역할은 네 가지 견해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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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적인 견해(traditional view)로서 여성의 목회활동 즉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권위를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으로 교회와 가정 안에서 하나님은 원래부터 기능적인 위계질서(functional hierarchy)를 부여해 놓았다는 것이다. 즉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받았기에 존재론적으로는 평등하나 기능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다. (하나님에서 기인하는)기능적인 불평등은 열등성을 필연적으로 의미하지 않는다(고전 11:3: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구절이 성자가 성부보다 열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325년의 니케아신경이 밝히듯이 동일본체 [homoousios]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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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성지도적 견해(male leadership view)는 전통적인 견해와 비슷하나 적용에서 약간 다른데, 여성의 부분적인 목회 참여 즉 공중 예배 때 기도나 성경봉독, 집사직분 혹은 교회 사무직을 남자 담임 목사의 관할 하에 허용하는 입장이다. 대부분의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의 입장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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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원적 목회 견해(plural ministry view)에 따르면 모든 성도는 어떤 면에서는 모두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데 목사 안수제도 때문에 이것이 실현되지 않았기에 목회 안수제도를 없애버리면 여성의 목회 참여는 아무 문제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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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등주의적 견해(egalitarian view)는 다원적 목회 견해와 비슷한데, 여성의 전반적인 목회 활동 권리를 주장한다. 성별에 따른 리더쉽이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이 제한 받을 직분은 없다. 남녀는 상호 복종(mutual submission)해야 한다. 혹자는 전통적인 입장에 서있는 (1)과 (2)를 지지하면서 주장하기를, 위의 (3)과 (4)의 입장은 성경의 영감성에 대해 잘못된 자세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자세한 것은 석기현, 1996:370-372를 보라). 이 평가는 과연 정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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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여성신학을 잠시 살펴보자. Elizabeth Sch?ssler-Fiorenza로 대변되는 여성신학적 해석이 중요시하는 이념은 그 동안 여성이 부당하게 억압되었던 사회구조나 관념을 극복하고 여성의 지위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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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한다: (1) 여성의 특수성과 주체성을 인정하여 여성을 독립된 존재로 이해하고 존중한다. (2) 여성의 인간적 존엄성과 권리를 왜곡하는 문화적 편견과 오류를 배격한다. (3) 여성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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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학적 성경 해석이 성경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인다: (1) 성경 자체는 그렇지 않은데 성경해석자가 성경을 여성의 존엄성과 권리를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의미로 해석하였다고 보는 입장. (2) 성경 자체가 여성 억압적이라고 보아 여성해방적 기반은 성경에서 나올 수 없다고 보는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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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학적 해석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포함한다: (1) 성경본문의 가부장적 (patriarchal)이고 억압적인 요소를 발견하여 비판하면서 새롭게 해석한다. (2) 여성 긍정적인 본문을 찾아서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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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급진적인) 페미니즘(radical feminism)이 교회와 신학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계하고 우려해야 할 형편이다. 그리고 이들이 주장하듯이 성경에 마치 오류가 있다는 식의 주장은 수용할 수 없다. 그리고 여성 안수와 같은 예민한 문제가 한국 교회에 이슈가 되고 있고, 앞으로 보수교단에서는 이 문제를 계속해서 덮어둘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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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나 이슈의 중심에는 교회가 성경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주석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전통이 성경을 지배할 것인가, 아니면 성경이 바른 전통을 세우도록 할 것인가? 이것을 염두에 두고 몇몇 논쟁적인 본문을 다루고자 한다. 이것은 앞으로 진지하게 다루어져야만 할 중요하고도 민감한 이슈이기에, 어떤 특정 결론을 도출하는데 초점을 두기보다는, 주석에 근거한 논의만 개략적으로 시도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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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딤전 2:9-15절에 나타난 교회에서의 여성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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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2,000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이 성경주석에 미치는 영향을 실감한다. 딤전 2:9-15절은 성경 전체에서 여성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금지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이것은 또한 창조 질서 즉 남자가 먼저 되었고 여자는 그 후에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호소하여 어느 정도 여성의 ‘종속성’을 명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본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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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의 본문은 여성이 머리에 무언가를 써야 한다는 것을 명령하는 고전 11:5절이다. 만일 성경 66권 중에서 단지 딤전 2:9-15절에만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가르치는 사역을 금지하는 주장이 의존해 있다면,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며, 여성의 사역을 권하고 있는 바울의 다른 구절과 상충되기도 한다. 이 이유로 딤전 2:9-15절의 1세기 당시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상황을 조사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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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 2:9-15절은 고전 11장처럼 공중기도를 할 수 있는 여성들의 권리에 대해 언급하는 것 같다. 이 사실은 딤전 2장 1-8절이 남자들의 기도를 언급하고 있는 사실로부터 분명해 진다. 딤전 2:1-2절은 통치자들을 위해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도시 안에서의) 공적 기도를 할 것을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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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AD 66년까지 성전에서 로마황제의 건강을 위한 기도가 드려졌다. 그 해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하자 이 기도는 중단되었다. 이런 종류의 기도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중요했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해로운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며, 더 나아가 평안한 가운데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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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은 ‘또 이와 같이’'라고 말함으로, 바울은 이제 여자에게도 공적인 기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고전 11장과는 달리 딤전 2장에서는 여성이 교회에서 침묵할 것을 명령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여성의 공적인 기도에 대해 권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해 볼 것은 남자들의 기도 보다 여자들의 기도에 바울이 더 세밀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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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은 에베소에서 행해진 여자들의 공중 기도에 무언가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이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복장과 관련된 것이고(딤전 2:9), 다른 하나는 가르침과 관련된 것이다(딤전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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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여성의 복장에 관해 먼저 살펴보자. 여기서 바울은 최신의 유행하는 옷을 금하고 있다기보다는, 이성의 눈길을 끌기 위한 (야릇한) 옷이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사치스럽게 치장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 같다. 2세기 이후의 유대 선생들은 특정한 장식품을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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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비 아키바(Rabbi Akiba)는 남편이 아내 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했을 경우 이혼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 말은 아내는 ‘남편만’을 위해 화장과 치장을 할 수 있다 혹은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유대인 중후기 선생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에게 데려가기 전에 하와의 머리를 땋아 주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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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는 고귀한 인격뿐만 아니라, 육체의 아름다움을 미덕으로 여겼다. 헬라 작품들 속에는 키가 크고, 진하고 굵은 눈썹, 그리고 하얀 피부에 금발을 미인으로 보았다. 때로는 통통한 볼을 첨가한다. 여성의 아름다움이 미덕이기는 하지만,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름다움 때문에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성적 범죄의 도구가 될 수 있던 금이나 다른 장식으로 남자를 유혹하여 타락으로 인도한 경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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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바울 역시 과도한 사치와 장식의 문제점을 성적인 부정과 연관시켜 지적하고 있다. 아마도 디모데가 목회를 하고 있었던 에베소의 교회는 일부 부자들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시대의 말로 한다면 야하고 값비싼 사치-명품을 주렁 주렁 걸치고 BMW를 타고 교회에 오는 여자들을 가리킨다(참고. 벧전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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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참된 장식으로 선행을 딤전 2:10절에서 제시한다. 아름다움은 인격과 삶에서 나오기에, 복장은 정숙해야 한다. 옷은 단정하고 유혹적이지 않아야 하지만, 영혼은 풍성해야 한다. 바울은 복장 문제로 여성이 남성보다 문제를 더 일으켰기에 여성을 대상으로 권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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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장의 문제를 넘어, ‘여성이 가르치는 것에 대한 문제’는(딤전 2:12)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 바울은 여자가 종용히 배울 것을 부탁한다. 남자들을 주관하는 것 즉 남자들에 대해 권세를 취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이 권면도 바울 당시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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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침묵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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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당시 일부 회당에서는 여자가 회당장과 같이 지도적인 역할을 한 곳이 있기에 모든 경우에 여성이 침묵을 요청 받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공중 예배 중에 여성의 침묵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갖기 전에 일단 침묵으로 배워야 했음을 말한다(비교. 고전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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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당시 어떤 선생은 제자들에게 도덕적인 훈련의 한 형태로 침묵 훈련을 시킨 적 있다. 바울이 의도한 것은 여성이 배워야 하지만, 부적당하고 어리석은 질문으로 전체 회중에게 방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종용히 배우라는 말은 먼저 경솔히 말하지 말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라는 경고일 수 있다(참고. 행 15:12; 21:40;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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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여성이 예배 중에 무조건 그리고 영원히 조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침묵에 대한 권면은 딤전 5:13절에 암시된 에베소의 특수한 상황과 연관된 듯하다. 그 당시 많은 젊은 여성들이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 어리석은 말을 하고 가르치는 일을 일삼고 있었다. 사실 ‘침묵’이란 용어는 정중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나 조용한 행동을 언급한다 (참고. 딤전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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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바울이 남자를 다스리려는 권세를 여성에게서 빼앗으려고 하는가? 여기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딤전 2:12). 바울은 여성이 남성에 대해 권세를 부리는 방법으로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타락한 후 창 3:16절 (“...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자들이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권세를 횡포하여 지배하고자 하는 사실에 바울이 호소하고 있다. 여성이 교회에서 남자들을 주관하는 것을 금지하는 바울의 권면은 디모데가 목회를 하고 있던 1세기의 에베소 교회에만 제한되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교회,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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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에베소 교회에게만 특정적으로(ad hoc) 적용되는 권면이 아닐까? 이런 잠정적인 결론은 아주 민감한 부분이다. 마치 여성의 목사안수를 지지하는 결론처럼 보일 수도 있고, 여성주의자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신학적 검토는 더 있어야 하고, 최종 결정은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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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 남자가 가장으로 다스리듯이 교회에서도 그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남자가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아마 교회 밖의 사람들은 여성이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일을 수행하고자 했던 여성들로 인해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아마 여성의 가르침을 금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에베소의 많은 잘못된 가르침이 여성을 통해서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거짓 선생들(주로 남자)이 거짓 교훈을 퍼트리는 통로 역할을 했는데, 이것은 여성의 교육이 미비했던 점을 악용한 결과이다. 바울은 먼저 여성이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먼저 배우기를 원했던 것 같다. 여성이 충분히 배운 후라면 가르침을 허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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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 2:13-15절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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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남자를 주관하여 가르칠 수 없는 이유는 아담이 하와보다 먼저 지음 받았고, 아담이 아니라 하와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기 때문이다. 유대 랍비들은 하와의 최초의 범죄를 신랄하게 비난한다. 딤전 2:13절에서 말하는 이브는 하와를 가리키지 여자 전체를 가리키지 않는다. 창세기에서 하와가 아담의 갈빗대에서 나중에 창조되었다고 하여 아담에게 종속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아담의 갈빗대 즉 동등성을 강조한다. 바울은 창세기의 문맥을 그대로 사용하여, 여자의 종속성을 말하지 않을뿐더러, 여자 전체가 남자보다 더욱더 유혹에 잘 넘어가고 범죄를 잘할 것이라고 보편화시켜 말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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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가 범죄했을 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경고를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남편 아담에게서 받은 후 였다. 하와는 가르침을 아담에게 의존했다. 여기서 유비가 있는데, 에베소교회의 여성들도 남자에게 성경 지식을 의존했다. 또한 하와가 쉽게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에베소 여성들도 거짓교리에 쉽게 넘어갔다.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하와처럼 유혹에 빠져 범죄할 수 있기에 에베소교회 여자들은 조심하고 가르치지 말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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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구절인 15절의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무슨 의미인가? 여성이 정절, 믿음, 사랑, 거룩으로 산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 중 일부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유는 이것이 행위구원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출산을 겪어 내는 여성들을 언급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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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구원함을 받는다”는 말은 문맥상으로 볼 때 죄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키기보다는 “아이를 낳는다” 혹은 “안전하게 극복하다”라는 의미로 쓰였다(출 14:13, 30; 1 마카비 4:25; 솔로몬의 시편 16:5 등). 하지만 바울은 그 어디서도 “구원함을 받는다”를 출산(아이를 낳는다)을 통해 구원함을 받는다는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세상에 누가 출산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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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과 창세기의 하와 사건에 호소한다. 먼저 바울 당시의 문화적 배경에 호소하는 것을 살펴보면, 사실 바울의 독자가 출산과 관련하여 구원을 이해하는 가장 자연스런 방식은 ‘안전한 분만’을 연상하는 것이다. 고대에는 출산 과정에서 산모가 죽은 경우가 지금 보다 더 허다했기에 출산을 관장하는 아데미 여신을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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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우리는 바울이 암시하는 창세기의 하와 사건에 주의해 보아야 한다. 하와의 범죄는 ‘고통스런 출산’이라는 ‘저주’와 직접 연결된다(창 3:16). 바울이 출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저주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도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혹은 우리(여자)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저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에베소교회의 여성들이 구원을 얻을 길은 정절, 믿음, 사랑, 그리고 거룩으로 사는 길이다. 물론 이것은 ‘아직 아니’ (not yet)의 측면을 가지기에 저주로부터 온(완)전한 구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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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출산’의 이미지를 통한 구원의 설명과 ‘종용히 배우라’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여성은 가르치기 전에 경건한 삶을 통해서 말씀을 먼저 배워야한다는 말씀인가? 아니면 에베소 여성도가 하와가 받았던 저주로부터 경건한 삶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가르칠 자격을 갖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말씀을 배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탁상공론이 아닌 삶임을 강조하는가? 에베소의 여자 성도가 출산의 고통스런 저주로부터 구원받는 길은 그들의 정절과 믿음 그리고 거룩과 사랑의 삶이다. 이런 경건한 삶을 통해서 먼저 말씀을 배우라는 말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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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에베소교회의 여성이 침묵과 가르침을 삼가야 했던 이유는 여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재대로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우리시대에 적용해 본다면, 설령 남자라 할지라도 제대로 말씀을 분별할 수 없다면 가르치기 전에 먼저 종용히 배워야 함을 교훈한다(딤후 2:15).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행 2:18절을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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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정규례 (House Codes): 엡 5장 21-22절의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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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5:18절-6장에는 에베소 교회를 구성하고 있던 아내, 남편, 주인, 종, 자녀를 향한 바울의 권면이 나오는데 이것을 가정 규례 (the house code)라고 부른다. 로마제국의 사회체제와 도덕을 위협한다고 비난을 받았던 단체들은 자신들만의 가정 규례를 만들어서 자신들은 로마제국에 해로운 단체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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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당시의 기독교는 사랑과 자유 그리고 황제 대신에 그리스도를 섬기고 따른다고 가르쳐왔기에 마치 로마 제국을 파괴하고 사회에 해로운 집단으로 비쳐졌다. 따라서 바울은 이것은 오해이며, 에베소 교인들이 사회관계 속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야 했다. 엡 5:18-33절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성도의 가정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교훈한다. 21-22절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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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씀의 문맥을 살펴보자. 엡 5:18절의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으로부터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주는 가정에 관한 권면이 출발한다. 더 직접적으로는 21절의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명령에 기초해서 남편과 아내에게 주어진 권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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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당시 1세기 여성의 위치를 살펴보자. 남편과 아내의 상호복종을 강조하는 바울은, 왜 남편의 복종보다 아내의 복종을 더욱 분명하게 다루는가? 바울 당시의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예수님 중심으로 바르게 잡기 위해서이다. 바울 당시까지만 해도 많은 남자들은 여자들이 도덕적으로 남자들보다 더 연약하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는 “남자들의 용기는 명령할 때 나타나지만, 여자들의 용기는 순종할 때 나타난다”라고 말했다. 유대인들은 여성에 대해 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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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대 선생은 “옷에서 생기는 좀 (moth)처럼 악이 여자들로부터 생겨나므로 남자는 여자들 사이에 앉지 말라”고 했다. 더 나아가 “남자의 악은 여자의 선보다 낫다”고 했다. 랍비 유다는 “이방인, 촌뜨기, 그리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라고 기도했다. 바울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했으며 아내의 수입은 모두 남편에게 넘겨주어야 할 법적 책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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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가정을 너머 가게에서 일할 수 있었다. 필로는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거의 지각이 없이 태어난다”라고 했다. 남편은 단지 음식과 집을 제공해 줄 의무만 지니고 있었고, 아내는 집안 일과 남편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할 의무가 있었다. 여성을 낮추어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참고로 이스라엘에서는 남아선호 사상이, 헬라 세계에서는 여자 아기를 버리는 관습(the practice of exposing baby girls)이 있었다(참고. Kroeger, 2000: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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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로마제국의 이상적인 여성상은 헌신적이고, 온순하고 남자들 앞에서 수줍어하면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었다. 여성의 임무와 수행은 남편에 의해서 충실한 가정 노예로 인정받을 뿐이다. BC 1-2세기의 이집트의 결혼 계약서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한다는 특별 조항을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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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조항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조항보다 선명하지 않았다. 로마의 가정 규례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방법에 초점을 두지 않고 아내를 다스리는 방법에 초점을 둔다. 이런 일방적인 남편 중심의 사회와 관습에 바울은 피차복종을 기치로 내걸고 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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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남편과 아내가 피차 복종해야 한다는 문맥에서 아내들을 향하여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말한다. ‘복종하다’라는 말은 군대 용어인데 부하가 상관에게 순종하는 것이며 자신의 의지나 권리를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바울의 상호복종은 아내의 복종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그 당시의 유대인의 상황이나 로마제국의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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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예수님의 교회를 향한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근거로 해서 부부의 상호 복종을 언급한다. 따라서 남편의 지나친 권위주의적인 자세와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 남편의 아내를 향한 사랑은 기독론적인 사랑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교회를 향한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아내는 가장으로서의 남편의 권위와 책임성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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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이므로 한 몸이 되었기에 공통의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협력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의 삶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권세 때문에 상호 복종해야 하고, 상호복종을 위해서 먼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 충만한 남편, 아내에게 복종하는 남편은 권위 있는 남편이요, 아내에게 복종을 받는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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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주님께 복종하고 주님과 바른 관계가 유지되고, 성령 충만한 아내는 남편의 복종을 받게 된다. 남편과 아내의 피차 복종은 주님을 향한 복종의 한 부분이다. 24절에 아내는 ‘범사엷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범사엷라는 말은 주님을 섬기는데 일치되는 모든 생활의 영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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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적용해 보자. 바울의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은 더 이상 여성이 '방콕'하고 조용히 있는 것을 이상적이거나 미덕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현대는 교회와 직장, 사회에서 특정한 역할을 감당하는 아내의 활동을 인정한다. 하지만 성경은 아내의 우선적인 활동의 장은 가정이라고 한다. 아내가 아무리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직장이 자녀의 신앙교육과 남편에게 복종하는데 지장이 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이 사실을 딛 2:4-5절에서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함이니라.” 성령 충만한 피차복종으로 가정 천국을 이루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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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전 11:2-16절의 여자가 교회에서 머리에 쓰는 것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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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과 관련된 본문을 다루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여성의 교회에서의 역할을 장려하기 위해서 이고, 두 번째는, 1세기와 21세기의 상황의 차이를 정당하게 다루어야만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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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의 여성도가 공적인 예배 모임 중 특히 기도나 예언을 할 때 머리에 무엇을 쓰는 외적인 품행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현대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대개 예배 중에 모자를 쓰는 것을 예의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최고 어른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이기 때문이다. 이미 로마제국 시대에도 이런 관습이 있었다. 하지만 개혁교회의 전통은 오히려 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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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여성도는 아름다운 테가 있는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렸다. 1세기의 바울은 고린도 교회 여성도에게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예배드릴 것을 권면한다. 요즘도 유대인 남자들과 천주교의 여자들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기도하고 미사를 드린다. 이처럼 복음은 하나이되 복음이 표현되는 방식에 있어서는 다양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고전 11:2절 이하에 나타난 여성도의 머리에 무언가를 쓰는 것을 알려면 바울 당시의 관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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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말하는 머리에 쓰는 것은 얼굴전체를 가리는 베일(face-veil)이라기보다는 머리카락만 덮는 숄(Shawl)이다. 15절의 ‘peribolaion’은 베일(veil)이라기보다는 망투 (cloak)나 숄을 끌어 당겨 머리 위에 덮어씌우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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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대중 앞에서 머리에 숄을 덮어 쓰는 이유에 관한 몇몇 설명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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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 당시의 여성의 활동의 場은 주로 가정에 제한되었기에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했다. 유대인의 한 지혜문서에는 “처녀는 자물쇠를 꼭 채운 방안에 두고 지켜라. 그렇게 하여야 결혼식까지 집 앞의 어느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라고 기록한다. 사실 로마제국에서 어떤 남편은 아내가 베일을 가리지 않은 채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는 것을 이유로 아내와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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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망 있는 여성은 대개 남편과 함께 있을 때에만 자신을 드러내 보여야 했으며, 남편이 없을 때에는 자신을 숨기고 집안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다. 이렇게 여성의 활동을 주로 가정에 제한한 이유는 여성이 다른 남성에게 너무 매력적으로 보일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 이유로 어떤 유대 랍비는 여성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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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대의 창녀들은 주로 머리를 풀어 다녔고, 기혼 여성들은 머리에 무언가 쓰고 다녔다. 때때로 유대인들에게 풀어헤친 머리는 여자 귀신들의 특징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고전 11장에서 여성도가 머리에 무언가를 써야 한다고 말한 이유를 창녀나 음란한 여자와 구별되는 정숙한 몸가짐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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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리스의 여성들은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은 채로 예배에 참석했다. 반대로 로마 (남자 사제들과) 여성들은 희생제물을 드릴 때 머리에 무언가를 쓰야 했다. 그러므로 고전 11장을 기록한 바울은 로마의 관습을 염두에 두고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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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반적으로 몸이 노출되는 것은 머리가 노출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여자들이 머리를 풀어놓는 것은 헬라와 유대 전통에서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임과 동시에 남자의 정욕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머리를 늘어뜨린 채 대중 앞에 나서 자신을 드러내거나 남자와 시시덕거리는 행동으로 비난을 받았던 유대 여자는 결혼 계약에 명시된 위자료도 받지 못한 채 이혼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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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1994:22)은 고전 11장을 설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만일 여자들이 자기들의 머리를 드러내고 머리카락을 보이는 일을 허락받게 된다면, 그들은 결국 자기들의 젖가슴을 드러내도록 허락받게 될 것이고 마치 그것이 선술집의 쇼나 되는 것처럼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말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무감각해져서 어떤 겸손이나 부끄러움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가정 밖에서 수로보니게 여인과 대화를 나누신 예수님의 모습은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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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주장들이 있어왔지만 고린도 교회에서 여자들이 머리에 쓰는 것에 대해 확실하게 설명해주는 주장은 없는 것 같다. 따라서 고전 11:2절 이하의 바울의 논증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성도가 기도나 예언을 공중 예배 중에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섬김이나 예배 중에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말이다. 롬 16:7절에서도 바울은 여자 성도를 하나님을 섬기는 동료요 심지어 사도들과 같이 귀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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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전 11:3절 이하에서 4가지 이유를 들면서 여자가 머리에 숄을 쓰야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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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기엷 숄을 쓰야만 한다(11:3-6). 3절에 보면,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 이 머리가 가리키는 바는 ‘근원’, ‘영광’, ‘존귀’, 혹은 ‘리더’(leader)라고 볼 수 있다. 남자와 여자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8절은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고 한다. 사실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만들어 졌다. 바울 당시의 고린도 교회에서는 여자가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거나 머리를 미는 것은 자신의 육체적인 머리뿐 아니라, 자신의 머리인 남편에게도 치욕을 가져다주었다. 좀 더 확대해서 설명해 보면, 가정의 명예 특히 가장의 명예를 세워주기 위해서는 대중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아내의 옷차림이 남편을 불편하게 한다면 그 옷차림을 그만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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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조금 다르게 설명해 보자. 바울은 11:7-12절에서 여자가 머리에 무언가를 써야 할 이유를 ‘창조질서’에 호소한다. 창 2장에 보면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기에 남자의 형상을 반영한다. 물론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 옷차림이 정숙한 아내는 남편의 명예를 잘 드러내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아내는 영광을 훼손한다. 그리고 아내는 예배 시에 남자의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면 안 된다. 여자가 머리에 씀으로써 예배 중에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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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전 11:10절에 보니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두어야 한다. 여자의 옷차림 특히 머리에 쓰는 것은 천사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창조 질서의 수호자인 천사도 예배에 참여한다는 사상이 바울 당시에 있었고, 천사도 남자처럼 여자들에 의해 성적인 유혹을 받았다는 유대문헌의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은데 바울이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설명은 추론에 불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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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전 11:14절은 ‘본성에 호소하면서’ 여자들이 머리에 써야 한다고 설명한다. 여자가 긴 머리를 가지고 있고 머리에 써는 것을 덮고 있다면 본성에 맞다는 것이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 반대로 성전환 수술을 받거나 옷차림을 통해 성구별을 무시하는 것은 본성을 거슬리는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남자들의 복장 역시 예배를 방해 할 수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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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는 남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거나 여자가 머리를 짧게 깎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즉 바울은 인간의 본성을 사회적 관습과 연결시켜서 여자들의 합당한 옷차림을 언급한다. 고린도의 여성도는 여성으로서 합당한 옷차림을 준수해야 했다. 남자의 남성다움과 여자의 여성다움은 예배 가운데서도 지켜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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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전 11:16절에서 바울은 그 당시의 교회의 일치된 ‘관습과 규례에 호소함’으로 여자의 머리에 써는 것을 주장한다. 즉 고린도교회가 일치되게 따르고 있는 바를 존중하면서 여자는 기도나 예언을 할 때 머리에 써야 한다고 한다. 바울은 그 당시의 체제를 지킬 의사가 없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본성,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상호 의존성에 호소하면서 예배 중에도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 지켜져야 할 것을 가르친다. 즉 바울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는 것을 논하면서 여성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제한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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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의 적용: 현대 교회의 예배에 여자가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온다면 남자들뿐 아니라 동료 여성도에게도 피해를 줄 것이다. 남자 성도가 비키니나 여자 치마를 입고 온다면 역시 문제다. 이것은 우리의 교회의 관습과 창조질서에 맞지 않다. 그리고 아내가 비키니를 입고 교회에 온다면 머리인 남편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 되고 만다. 여성은 교회에서 머리에 쓰는 것뿐 아니라, 지나친 몸치장을 통해서 자신을 과시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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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든 여자든 예배시의 성적 호소를 하는 복장을 통해 남의 시선을 끌어서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의 모든 신앙의 방식은 남을 고려할 줄 알아야 한다. 너무 진리 안에서 자유함으로써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어서는 곤란하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신앙의 자세가 필요하다. 실족케 하는 튀는 신앙 습관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외적인 복장 문제로 본질인 예배와 섬김이 손상을 입어서는 안 된다. 본질인 예배와 섬김은 정숙한 외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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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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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여성이 목회자로 안수받는 것에 찬성하지 않지만 우리 모두는 여성의 교회에서의 역할 문제는 전통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해석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주로 핵심 이슈는 바울 서신의 교훈이 바울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영구적인 진리인가의 문제다. 이것은 속단할 사항이 아니기에, 앞으로 정당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더 세밀하게 본문의 문맥과 역사적인 상황을 먼저 고려한 후 우리 시대의 상황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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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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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per, J. & Grudem, W. 1991. Recovering biblical manhood & womanhood: a response to evangelical feminism. Wheaton : Crossway Books.

목회와 신학. 2004년 5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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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교회는 여성의 역할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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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여성의 역할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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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굴종’이 복음에 유익한가 남자의 독점적 리더십 옹호 위해 성경 가르침 왜곡 해석 이어져 성경은 ‘남녀 동등성’ 강조…공동체 해치는 ‘차별언어’ 사라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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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교수(미국 풀러신학교 신약학)는 ‘목회와 신학’이 ‘여성. 그 복음적 이해와 목회적 적용’을 주제로 엮은 5월호 특집의 글로 ‘성경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를 발표했다. 이어 김 교수는 지난 7월 5일에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여동문회가 연 세미나에서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했다. 우리 교단 안팎에서 여성 안수에 대한 견해들이 파열음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익히 알려진 신학자가 그리고 신학교에서 이 문제를 두고 공개적으로 제기된 논의여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김 교수의 여성 동등권에 대한 포괄적인 견해를 사실상 여성안수에 대한 허용 주장으로 간주한 서창원 목사가 기독신문에 반론의 글을 보내왔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김 교수의 글과 서 목사의 글을 줄여 싣는다(두 필자의 전문은 기독신문 인터넷 판 볼 것).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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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교수는 구약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창조된 남녀의 동등성을 설명했다. 김 교수는 신약에서는 부활의 첫 증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를 들어 예수께서 여자들을 “복음의 첫 설교자들 세웠다”며 예수의 남녀 동등성의 원리를 제시하고, 열두 제자 가운데 여성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는 남여관계를 바로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구원이었다”며 “구원의 본질적인 메시지가 신뢰를 얻고 설득력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는 문화적인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교수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 고린도전서 7장 2-16절,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에베소서 5장 21-33절에 대한 주해를 통해 남녀 동등성의 원리를 주장하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고린도전서 14장에 대한 해석학적 견해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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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교회서 잠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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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철저하게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남녀 관계를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원칙에 따라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은 이것과 정반대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 구절이 우리의 교회들에서 여성의 설교나 리더십 행사를 부인하는 성경적 근거로 많이 사용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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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구절은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 이 34-35절과 어휘나 사상이 같은 본문이 디모데전서 2장 11-15절에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구절들이 디모데전서가 쓰일 1세기 말 무렵의 영지주의 여자들이 교회에서 상당한 물의를 일으키는 상황에서 질서를 잡기 위해서 씌어졌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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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구절들이 고린도전서 14장의 맥락에만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남녀관계에 대한 전체적인 가르침, 특히 고린도전서 11장 12-16절의 가르침과도 완전히 모순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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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바울은 남녀관계에 있어 일관되게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동등성의 원칙에 따라 가르치고 있다. 더구나 고린도전서 14장의 조금 전, 즉 11장에서 바울은 공예배에서 여자들도 기도도 하고 예언도 하는데 다만 머리에 수건만 쓰고 하라고 한다. 만약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을 썼다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자신이 쓴 말을 곧바로 완전히 뒤집어 버리고 자기모순을 범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바울은 한 편지 안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들을 주는 종잡을 수 없는 사도인 셈인데, 그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신학적인 문제를 안겨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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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생활에서 남자의 독점적 리더십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을 디모데전서 2장 11-15절과 함께 계속 바울의 진짜 가르침으로 보고 금과옥조로 삼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한 편지에서도 상호모순되는 가르침들을 하는 사도로 만들며, 성경을 한 책에서도 상호모순되는 가르침들을 담고 있는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심히 훼손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신학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을 보수한다는 사람들이 도리어 성경을 훼손하고 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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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또 하나의 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은 남녀 동등성과 상호주의의 원칙을 천명하는 바울의 말씀들(갈 3:28; 고전 7:2-16; 11:2-11; 엡 5:21-31, 등)과 그들과 정 반대되는 말씀(고전 14:34-35) 중 후자를 골라잡고 전자를 배격하는 결정을 하는 것이다. 수량적으로도 전자가 월등히 우세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보다 중요한 것은 전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을 잘 표현하는 반면에 후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에 배치되어 겨우 구약의 율법에 호소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이 또한 심각한 해석학적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근본주의자의 율법주의의 경향은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롬10:4)의 복음을 저버리고 무엇이나 율법적인 것을 선호하게 하여 심히 불확실한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과 같은 율법주의적 언명을 가장 중요한 금과옥조로 삼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근본주의자들은 주 예수와 사도 바울이 율법의 핵심으로 가르친 사랑의 이중계명과 전혀 무관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등의 말을 주 예수와 사도 바울이 그렇게 정죄한 율법주의적 태도로 고수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결국 복음의 첫 설교자들이었던 막달라 마리아 등 여자들을 범법자들로 만들고 그들이 설교한 복음을 무효화하며, 심지어 그들을 복음의 첫 설교자들로 내세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까지 자신들의 귀중한 법(“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을 어기도록 교사한 분으로 만들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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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해석학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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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문제들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그렇지만, 남녀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해석할 때, 해석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몇몇 구절만 인용해서 그들을 율법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살펴야 한다. 특히 원칙적이고 중심적인 가르침과 문화적이고 주변적인 요소들을 구분하여 해석해야 하며, 성경 말씀의 문자보다는 그 정신을 따라야 한다(고후 3:6). 그러므로 예컨대 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 중 어느 구절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더 정확한 표현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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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의 동등성과 상호주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구절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과 새 창조의 복음을 더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 반면,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14장 34-35절,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등은 여성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은 자유를 너무 지나치게 행사하여 옷차림이 너무 야해지는 것이나 너무 시끄러워지는 것을 막으려는 다분히 비본질적이고 상황적인 권면들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해석학적이고 신학적인 판단을 못한 채 사본학적으로도 불안하고 내용적으로도 이차적임에 틀림없는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 또는 후대의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등의 본문들만을 율법적으로 고집하는 근본주의적인 태도는 극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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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근본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심지어 완성된 계시인 신약을 저버리고 예비 계시였던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가서 성전 예배 의식에서 여성을 완전히 차별하는 규정들을 들이대며 오늘의 교회에서도 여성들의 역할을 억제하려 하기도 한다. 그들 중 상당수는 칼빈주의자들로 자처하는데, 남자의 권위를 세우고 여성을 굴종시키는 일을 위해서라면 구약의 의식법에 호소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구약의 의식법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는 칼빈의 가르침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만인사제론을 편 개혁자들의 후예들이 남편/아버지만의 제사장론을 펼치듯이 말이다. 여기에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의 씁쓸한 역설이 있다. 성경의 진리와 권위를 보수한다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고 그 진리를 왜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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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을 굴종시켜 얻는 것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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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굴종시켜 하나님 나라나 가정에 무슨 유익을 얻을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여성들에게도 많은 은사들을 주셨고, 신약시대 이래 기독교 역사에서 여성 사역자들의 역할은 막대한 것이었다. 19세기 이후 근세 선교역사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생각해보라. 만일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을 문자적으로 엄격히 적용하여 여성들로 하여금 사역하지 못하게 했다면 근세 선교역사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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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일방적으로 굴종시키는 것은 앞에서 본바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려니와, 그들에게도 그의 교회를 세워 올리도록 주신 은사들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그 많고 큰 성령의 은사들을 낭비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신약성경의 남녀 동등성에 관한 가르침과 여성 리더십 행사의 모범들을 적극적으로 음미해서 오늘 우리의 교회 안에서 여성의 리더십 참여를 공식화해서 허용하면 건전한 교회 공동체를 세워 올리는 일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가? 가정에서도 남편이 아내를 굴종시키려고 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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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복음을 올바로 선포할 때는 항상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실화로 노예해방과 여성해방을 가져왔고, 약자를 보호하였으며, 만민의 인권을 증진하였다. 한국에서도 반상 철폐, 여성 해방, 인권 증진, 민주화 등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이 영광스러운 역사만 자랑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유교의 족쇄를 풀고 여성의 해방을 가져온 교회가 이제는 남자의 가부장적 리더십과 여자의 순종을 강조하여 사실상 유교 윤리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버렸다. 각급 학교들에서 활약하는 여자 선생들이며, 여자 국회의원들이며, 여자 장관들이며, 여자 판검사들이며, 신문사들의 여자 논설위원들이며, 기업체들의 여자 사장들이며,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여성 리더십이 약진하고 있다. 사회의 다방면에서 여성 리더십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유독 교회 안에서만 여성 리더십이 거부되고 있다. 여성 해방의 복음을 가지고 있는 교회 안에서만, 한 때 이 땅에서 여성 해방을 주도한 교회 안에서만, 여자들이 잠잠하라고 억눌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또 얼마나 씁쓸한 역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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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문명사적으로 중요한 시점에 놓여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여성을 굴종시키는 이슬람교와 약자들을 노예화하는 힌두교의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적 차별, 신분적 차별, 그리고 성적 차별을 철폐하고 만민에게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확대해야 하는 구원사적 소명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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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잘 표현한 갈라디아서 3장 28절 대로 복음의 사회적 실현을 가져옴은 가정을 살리기 위해서도 중요하고,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도 중요하고, 위협받고 있는 우리 기독교 문명을 살리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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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신문 1501호 지면을 통해 전문을 인터넷 판에 올려드린다고 공지했으나, 저작권 관계상 독자들께 약속을 지켜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김세윤 교수의 전문은 <하나님이 만드신 여성>(두란노)에, 서창원 목사의 전문은 10월호 <목회와신학>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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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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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인보라? 조회 : 515?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

김세윤 미국 풀러 신학교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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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 창세기에 나타난 남녀 관계

? 창세기1:26~3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천명하는데 남자와 여자라고 부연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차별화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형상의 기본적인 의미는 인간이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대표자 혹은 대리자로 세워졌다는 뜻이다. 창2:18~25절은 아담이 주가 되고 여자가 아담에게 종속되는 것으로 보지만 돕는 배필이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돕는 배필이라고 성경은 언급하기도 한다(전4:9~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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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어도 창세기3:16절부터는 타락의 질서 속에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남자 우월적이고 여성 종속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구약은 남자의 우월성과 주권을 천명하고 여자들은 남자보다 열등하고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로 설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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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복음

? 그런데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질서에서는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고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상전도 없고 노예도 없다. 모두 하나다.”라는 것이다. 첫 창조에서 하나님께서 남녀를 공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우셔서 자기의 통치권을 대행하게 하셨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를 통해 옛 세상의 대표적인 구분들, 인종적 구분, 성적 구분, 신분적 구분을 극복하게 하셨다. 첫 창조(창1장)와 새 창조의 위대한 천명(갈3:28)은 그리스도인들의 남녀 관계 이해에 있어 원칙이요, 열쇠로 작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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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을 통해 본 남녀의 위치

? 여성에 대한 보호는 예수의 가르침에서부터 시작된다. 여자를 인격체로 보지 않았던 유대 사회에 혁명적인 일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을 복음의 첫 설교자들로 세우셨다. 유대교에서는 여자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면 안 되었고 어떤 랍비는 아침에 일어나서 이방인, 노예, 그리고 여자로 창조되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여성에게도 토라를 가르쳤고 부활하신 후에는 첫 증인으로 마리아를 세웠으며 복음서도 당시의 문화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마리아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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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이혼 금지에 담긴 남녀 동등성의 원리

? 예수의 이혼 금지에 대한 가르침은 일부일처제를 확립하여 여자를 보호하는 뜻도 함축되어 있다(막10:11~12; 마5:31~32; 마19:8~9; 눅16:18). 일부일처제를 창조의 원리로 삼음으로써 일부다처제가 가져오는 여성의 종속과 여성의 재산화, 남편의 소유물로 변질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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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원리로 남편과 아내를 동등한 상황 속에서 짝지어 준 것이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성적으로 소유하듯이 아내도 남편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아내를 버리면 아내의 남편에 대한 성적 소유를 박탈하는 것이므로 간음하는 것이다(고전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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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는 왜 열둘 속에 여자를 끼워 넣지 않았는가?

? 12명의 제자를 남자로 세운 것은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12족장들에게 상응하는 새 언약에 의한 새 하나님의 백성의 12기둥들을 상징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다 본질적인 구원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 본질적인 메시지가 신뢰를 얻고 설득력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는 이런 문화적인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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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을 통해 본 남녀의 위치

? 갈라디아서3:28 새 창조 질서의 원칙 : 남녀의 동등성

??? 이 구절은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으며, 종도 없고 자유자도 없으며,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 왜냐하면 너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과 새 창조의 질서 속에서는 불평등과 불의를 가져오는 이 세상의 모든 차별들이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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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7:2~16 부부 생활 그리고 이혼 : 부부의 동등성과 상호주의

???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갈라디아서3:28의 원칙을 부부관계에 적용하고 있다. “... 이와 같이 남편도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아내가 한다. 서로의 (성적)권리를 빼앗지 말라(고전7:2~5).” 바울은 이어서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서 성관계를 중단할 수 도 있는데 그때는 서로 합의해서 하라고 말하고 있다. 남편과 아내의 철저한 동등성과 상호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고린도전서7:10~16에서 이혼에 관한 가르침도 남녀동등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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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11:2~16 여자들도 교회에서 설교를 하되 복장을 단정히 하고 하라

??? 바울은 갈라디아서3:28의 원칙을 교회 생활에서도 적용했다(고전11:2~16). 바울은 회당예배와 달리 남녀 구분 없이 같은 방에서 예배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공 예배에서 여자들도 대표기도와 예언(성령의 영감에 호소하며 구약을 해석하면서 성도들을 권면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 설교)을 하도록 했다. 갑자기 자유를 얻은 고린도 교회의 여자들은 남자들과 평등하게 예배에 참여하면서 공적인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하면서 굉장히 시끄럽게 했으며 머리에 쓰던 너울조차 벗어 던지고 떠들어 대니 예배의 분위기가 아주 어지럽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질서를 잡아야 했으며 여자들에게 설교하지 말라고 명령하기보다 계속하되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하라고 명한 것이다. 그는 교회가 헬라인, 유대인 어느 누구에게나 거침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고전10:32; 14:23; 고후8:21; 살전4:12). 여기서 바울이 “머리”론을 펴다 중단하는 것 (고전11:11~12)은 어디까지나 여자들에게 머리에 수건 쓰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이를 일반화 하여 남편이 아내의 권위노릇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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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5:21~33 가정생활-동등성과 상호주의

? 바울은 갈라디아서3:28의 원칙을 가족 윤리 또는 가족 간의 상호 의무 조항을 규정하는 것에도 적용한다(엡5:21~33). 그런데 이 문맥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사람들은 22절 즉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라는 말씀부터 읽었다. 그러나 사실 바울이 의도한 것은 21절 즉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이다. 이 부분이 부부관계에 대한 가르침 전체에 대한 큰 제목이다. 그 원칙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22절에서 “아내들이여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라고 하고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23~24절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25절에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하고 26~33절에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데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을 두 번 더 되풀이 한다. 당시 남편 우위의 고대 사회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보편적이었기에 두어 마디로 끝낼 수 있었지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데는 특별한 설득이 필요했으므로 거듭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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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여자에 대해서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동사를 썼고 남편에 대해서는 아내를 “사랑하라”는 동사를 썼으니까 남편은 위고 아내는 아래로 보고 있다. 그러면 본문은 갈라디아서3:28의 말씀과 근본적으로 모순을 일으킨다. 기능적 차이만을 인정하는 어떤 이들은 남녀는 본질적으로나 구원론적으로 동등하나 5:21절의 “서로 복종하라”는 기본 논지를 무시한다. 복종은 일종의 자기희생이지만 사랑은 복종을 포함하는 더 총체적 자기희생(자기를 내어줌: 자아포기의 삶)이다. “머리”, “복종”이라는 표현을 붙들고 자신의 아내에게 복종을 강요한다면 그는 그 행위로 자신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5:21~31의 말씀을 더 이상 가부장적 부부관계를 지탱하는데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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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함으로 모든 것을 아내와 상의하여 결정하되 의견이 상충할 때는 최종 결정권은 남편이 가져야 하고 아내는 거기에 순복해야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아내가 더 많은 지혜를 받을 수 있는데 말이다. 율법주의적으로 남편의 “머리됨” 또는 “대표권”을 내세우는 것이 과연 예수와 사도 바울의 정신에 합당한 것이며 가정에 유익한 것인가?

고린도전서14:34~35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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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4:34~35(개역성경)는 갈라디아서3:28과 정반대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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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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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 두 구절은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 어떤 사본들에는 이 절들이 40절 이후에 놓여 있다. 또 그들은 문맥을 끊고 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예배 도중 중구난방으로 방언하고 예언하여 무질서한 상황이 이루어진 것을 바로잡고 있는 중이다.

? 고린도전서14:32~38을 보면, 34~35절이 나중에 선지자들에 대한 바울의 타이름의 문맥을 끊고 삽입된 것임이 드러난다. 34~35절을 제쳐놓고 32~33절에서 36~38절로 직접 이어 읽어 보라. 스스로 선지자라고 주장하면서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에게 영감하므로 자신들은 예배 질서에 아랑곳없이 계속 예언해야겠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타이르는 내용으로 일관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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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35절과 어휘나 사상이 같은 본문이 디모데전서2:11~15에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구절들은 디모데전서가 쓰일 1세기 말 무렵의 영지주의 여자들이 교회에서 상당한 물의를 일으키는 상황에서 질서를 잡기 위해서 쓰여 졌다고 본다. 고린도전서14:34~35도 그 무렵 영지주의의 여자들이 교회의 공 예배 때 성경 해석이나 교리에 대해 질문하고 논쟁을 벌이는 시끄러운 상황(고전14:35)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록되어 고린도전서14장에 삽입되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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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바울의 남녀관계에 대한 전체적인 가르침, 특히 바로 앞에서 썼던 고린도전서11:2~16의 가르침과도 완전히 모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생활에서 남자의 독점적 리더십을 옹호하려는 사람이 고린도전서14:34~35과 디모데전서2:11~15을 바울의 진짜 가르침으로 받아들인다면 성경의 권위는 실추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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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말 : 올바른 해석학의 중요성

? 교회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복음을 왜곡하여 선포할 때는 해방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억압을 가져오는 것이다. 해석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몇몇 구절만 인용해서 그들을 율법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살펴야 한다. 특히 원칙적이고 중심적인 가르침과 문화적이고 주변적인 요소들을 구분하여 해석해야 하며 성경 말씀의 문자보다는 그 정신을 따라야 한다(고후3:6). 따라서 갈라디아서3:28과 고린도전서14:34~35 중 어느 구절이 그리스도 복음에 더 정확한 표현인지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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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된 계시인 신약을 저버리고 예비 계시였던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가서 성전 예배 의식에서 여성을 완전히 차별하는 규정들을 들이대며 오늘의 교회에서도 여성들의 역할을 억제하려 하기도 한다. 이는 가정으로 연계되어 성경과 거리가 먼 유교주의에 빠져 있다. 가정에서 가부장적 권위를 행사하며 자기 명령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가정을 화평한 가정이라고 생각하고 순종 잘하는 아내로부터 대접받고 사는 남편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단견이다. 사실상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착취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무지에서 나오는 주장은 심히 우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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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교의 족쇄를 풀고 여성의 해방을 가져온 한국교회가 이제는 남자의 가부장적 리더십과 여자의 순종을 강조하여 사실상 유교 윤리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버린 셈이다. 여자들이 잠잠하라고 억눌림을 받고 있다니 이 얼마나 씁쓸한 역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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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해석을 둘러싼 여성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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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해석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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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책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의 책이기에 반듯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여과(濾過)된 이성(理性)이 아니고는 바르게 이해할수도 해석할수도 없다. 여과된 이성이란 곧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됨을 말한다. 편견과 아집과 고집으로 묶여 있는동안 말씀이 말씀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마치 중세기 교회들이 범한 우(禹)를 반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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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C.Berkouwer 가 지적 했듯이 "말씀은 두고 두고 교회를 재 형성하고 새로 만들도록 자유 하여야 한다. 교회가 말씀의 광맥을 찾는 노력을 잃는한,즉 볼 수 있는것은 다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 교회의 힘과 세상에서의 신뢰성도 함께 잃는다. 교회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놀라운 발견은 닫혀진다. 그러므로 교회는 미래의 전망도,빛도,그리고 일과 결실도 없이 그저 늙어만 간다."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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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할 때 「성경해석」(Hermeneutics)이란 문제를 먼저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해석」이란 단순히 「주석」(Exegesis)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본문」(Text)이 가지고 있는 말의 역사적 의미에 관한 해석과, 그 본문이 초대교회에서는 생각지도 아니했던 현대 문제들에게 어떻게 「적용」(Application)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것 까지 해석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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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양면적인 설득력(본문의 역사성과 현재의 적용)은 옛 시대의 본문들을 현재 상황에다 확실성 있게, 그리고 유효하게 적용시킬 수 있도록 입증하는 것이 주석가들의 전문적인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 본문의역사적 의미를 같이 이해하고 모든 것을 동일하게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문제에서는 입장을 달리 할수가 있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주석상의 문제라기 보다 「해석상」의 문제이다. 즉 그것은 현재 논의되고 여론화되고 있는 문제들에 관한 진리의 차이가 아니고 바로「적용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해석이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못 박을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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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면에서 여성에 대한 성서적 해석도 어느 특정한 해석이 유일무이의 법칙이 될수는 없다. 진리로서의 말씀은 영원불변이지만 그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함에 있어는 항상 재 해석되어져 한다. 그러므로 말씀의 진리는 영원 불변이지만, 그 말씀을 토대로한 신학과 교리는 항상 변하게 된다. 로마 카토릭 교회가 갈릴레오의 주장에 대하여 오류를 인정한 사실에서도 입증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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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에 대한 성경해석에서 문제되는 구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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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린도전서 11:2-16 에 대한 오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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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경우 여성의 교회안에서의 역활을 제한하는 사람들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다. 여기에서 보면 분명히 여성의 지위와 역활을 남성에게 종속시키는 것으로 표현 하고있다.1) 일반적으로 이 구절에서는 누구나 바울의 생각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러면 이 구절에서 말 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에 관하여 말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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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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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장-14장에서 취급한 사항은 「공중예배」에서 취하여야 할? 품위를 가르치려는 것이었다. 즉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다같이 외모의 구별을 단정히 하고 공중예배에서의 지켜야 할 품위를 말 하고 있다. 바울은 여자들이 기도나 예언할 때 반듯이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한다. 그가 여기서 말 하려는것이 무엇이었는가?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참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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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1세기 동안의 당시 유대인의 남자들은 기도할 때 머리를 싸매지 아니했다. 그러나 여자들은 집을 나설 때 마다 어디를 가나 머리에 수건을 써야 했으며, 만일 이것을 지키지 않을 때는 거리에 여자들과 같이 취급 되었다. 그러나 보다 높은 헬라 사람들의 제사 의식에서는 남자나 여자가 머리를 가리우지 않고 예배하는 경우도 있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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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의 새 신자들 중에는 특히 복음을 받아들인 여자들 중에는 모든 얽매이는 굴레로 부터 자유 해방을 믿음에다 결부시켜서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본다. 이것은 당시 고린도에서 일어나고 있던 사회적인 상황을 참작해 보면 쉽게 알수 있는 문제이다. 주후 1세기 동안의 고린도는 부유한 도시로 알려졌고, 타락한 도시로서 주신(酒神)을 섬기는 그러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발견한 자유를 실행하는 교인들을 볼때, 저들의 옛 생활을 알고 있던 고린도의 옛 사제들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을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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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린도 지방이나 예베소 지방에서의 이교 문화권 속에서 정숙한 여인들의 관습이었던 「머리에 수건을 쓰는일」은 교회의 일원이된 여자들이라 해서 당장에 벗어 버린다면 저들 눈에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 하는, 즉 교회의 성결과 질서를 도모하려는 것이었음을 쉽게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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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동양 사회에서 여자들의 수건은 뼈대있는 집안의 권위와 명예와 힘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여자에게 수건을 쓰라고 말할 때,그것을 가지고 차별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즉 여성 자체를 열등하게 보아서 수건을 쓰라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치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기에 교회안에서도 수건을 쓰라고 하지 아니했는가 한다면 매두 편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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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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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여자의 머리는 남자요,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이 말로 인하여 남자는 여자위에 온다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태반이다. <머리>라고 할때 그것을 권위의 상징으로 만 이해 하려고 한다. 「우두머리」 「두목」 하는 식으로 생각하여 무조건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기에 남자는 여자위에 온다고 생각한다. 머리인 남자에게 여자들은 절대 복종하고 순종하여야 한다는 그러한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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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린도전서 11:3절에 바울이 <머리>라고 말 할때 쓰여진 개념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것 처럼 머리가 「으뜸」이거나 「위에것」「상전」등으로 이해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만일 그런 개념으로 이해 한다면 벌써 삼위일체인 하나님에 대한 모순을 낳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라고 그런식으로 이해 한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여자의 머리가 남자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여자가 남자보다 하위(下位)나 종속(從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바울 시대의 일상으로 사용했던 헬라어 "케활레"(??????)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 말은 은유적으로 "강의 원천"(source of river)이나 "근본"(origin),또는 "때의 시작"(point of beginning of period of time)등의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었다.3) Kittel은 이 "머리"란 말을 존재론적인 뜻에서 한 인간이 그가 존재할수 있는 근거(the ground of his being)로 이해 하였다.4)?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머리"란 말은 「남성지배」를 주장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창조의 질서(order of creation)에 속하는 것임을 알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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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남자로 부터 지음 받았다는 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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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창세기 2장의 사실을 말 하고 있다. 여자는 남자로 부터 지음을 받았으니 이것은 「남자의 영광」(glory),혹은 「남자의 현시」(manifestation)라고 하였다. 이것은 반듯이 남자의 몸에서(갈비) 여자를 지으셨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고, 남자를 재료(source)로 삼아서 여자를 지었기에 여자는 남자들 편에서는 "영광"이란 것이다. 더욱이 유의할 점은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인것 같이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논리적으로 보아 「여자는 남자의 형상」이라고 하여야겠는데 그렇지 아니하였다는 점이다.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남자는 흙에서 재료를 삼았다면 여자는 남자의 뼈를 재료로 삼았다는 말일 뿐이다. 그런데 만일 이것을 가지고 남자가 여자보다 상위라고 한다면 흙은 남자의 상위란 말이 됨으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남자이건 여자이건 흙에서 온 존재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흙에서 남자를 지었거나, 그 흙에서 지은 남자의 갈비뼈로? 지었거나, 그 원천(original source)은 모두 동일한 흙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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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8-9절은 보다 명백하게 7절과 연관시켜서 말하고 있다.그러나 이 구절 전체의 논리적 이론은 매우 애매하다.즉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면 왜 그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아야 하는지? 여자가 수건을 쓰지 않는것이 무엇이 남자에 대한 불명예인 이유가 되는지 여기에 대한 논리적 설명은 없다. 더욱이 고린도전서 11:10절은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즉 "천사들로 인해"(because of the angeles)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한 설명을 할수 없다는 것이 더욱 정직한 말이다. 11:10절과 12절을 볼 때 바울의 본래적인 생각으로 되돌아 온다.그는 창세기 2장의 해석에서 자신도 너무 전통적인 해석으로 들어간 것을 깨닫고 "그러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그러나 주 안에서는 남자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여자가 남자에게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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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우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중심 사상인 이러한 구절은 아예 접어 놓고 전반부의 다른 구절들만 인용하는 데 문제가 있다. 문맥상으로 보아서 설사 첫 부분에서는 바울이 전통적인 유대 사회의 관습대로 교회안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질서를 말 했다고 치더라도 "그러나 주 안에서는..." 라는 말로 시작되는 그의 강조하는 결론 부분을 더욱 바르게 이해 하여야 한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그랬어도 지금 부터 「주 안에서는...」 그러한 것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참 자유가 지배하는 새로운 피조물로 서의 종말론적 신앙공동체(교회) 안에서는 이제 남자나 여자가 더 이상 타락한 후 나타난 형벌로 주어졌던 질서로서의 종속적인 역활의 사슬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이다. 즉 더 이상 타락한 후 나타난 종속적인 사슬에 묶여 있지 않고 「사랑의 법」(새계약), 본래 에덴동산에서의 지위와 역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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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린도전서 14:33-36 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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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 남성우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강조하여 인용하는 것이 바로 이 구절이다. "성경이 그렇게 말 하고 있지 않느냐?" "성경을 바꾼후에 여자 안수문제를 다루라"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은 만고 불변의 진리이다" 등등 많은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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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성경에서는?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 되어 있다. 이구절을 현재 우리의 번역되로 읽으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원문대로 보면 우리말 성경의 34절 첫 부분인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라는 말이 33절에 연결시켜야 한다. 즉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그러하니라"고 해야 바른 해석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우리말 성경에서 처럼 그렇게 읽는다면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한걸음 양보하고 설사 그렇게 읽더라도 「율법에 이른것 같이 오직 복종하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 하는것이 복음적인가??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제 완성되었다.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런데 어떻게 아직도 율법을 고수하라고 하느냐?? 다른 성경의 말들중에 왜 여자에게만 율법을 고수하여야 하느냐? 등 많은 문제에 대하여는 침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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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구절은 14장에 계속되는 <공중예배의 질서>에 관한 교훈이다. 주의깊게 살펴 보면 위 구절은 고린도전서 11:2-16 에서 바울이 한 말과 서로 모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11:2-16 에서는 교회 안에서 여자들이 예언하고 기도하는 것을 금하지 않은것을 여기서는 금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문제에 관하여 학자들 중에는 34절-35절은 디모데전서 2:11-12절에 근거하여 삽입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다른 한편에서는 이것은 바울 자신에 의한 난외주(欄外註)라는 주장도 있다.6) 또다른 한 편에서는 이 두 구절은 각기 다른 상황에서 된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11장에서는 조그마한 가정교회를 상대한 것이었다면 14장에서는 많이 모이는 공중회중을 상대로한 것이라고 보고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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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Blum 같은 이는 이 구절이 모두 바울 자신의 것이라고 보고 있다.그는 고린도전서 14장 전장이 모두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선물의 질서를 말 하고 있기 때문에 33절 하반절에서 36절은 이 질서의 일부를 말한 것이고,또한 공중예배 중에서 방언을 말하는 여자들에게 한 말이라고 보고 있다. 그 이유로서 그는 다음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로,문화적 관습의 차이나 모순이 없이 교회의 일치를 위한 하나의 공동체 형성을 이루어야 하겠기에 그러 하였고, 둘째로,율법(창3:16)에 남편이 여자를 주관하리라 하는것이 있기에 그러 하였다고 본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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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m 은 "여자는 잠잠하라"는 명령을 이유와 동기로 구분하여 생각한다. 고린도 교회의 여자들의 배경에는 남녀 평등 원리를 위한 투쟁이 깔려 있었는데 이것은 노스틱주의 사상을 실천하려는 것으로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바로 이 나쁜 습관을 대항 하려는 태도에서 이렇게 말 했다고 보고 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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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사실 노스틱 사상의 남녀 동등권에 대하여 대항하였고 또한 그러한 노스틱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창세기의 남녀 동등권도 거절 하였다.바로 이러한 거절이 위 구절에서 나타났다고 Blum은 주장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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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밖에 문제되는 구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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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차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은 ① 예베소서 5:21-23, ② 디모데전서 2:8-15,5:3-16, ③ 디도서 2:3-5 등이다. 우리가 이 구절들을 좀더 주의 깊게 살펴 보면 적어도 주후 80-125년 사이에 기록들이라고 볼수 있다. 즉, 바울의 고린도전서 기록에서 보다 모두 후기에 기록된 것들이다. 현대 학자들 간에는 2세기 후반에 특히 목회서신의 경우 사도의 비중과 권위를 밑바침 받기 위하여 바울의 이름으로 삽입된 경우들을 든다. 그 이유는 바울이 사용했던 용어나 문체의 형식이나, 그리고 그 서신속에 담긴 상황(context)을 참작해 볼 때 바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주장한다. 특히 예베소서는 더욱 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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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2:8-15절은 고린도전서 14:34-35절과 얼핏보면 비슷한 것 같으나 그 상황은 판이하게 다른 것을 알아야 한다. 디모데가 살았던 예베소는 거대한 이방의 Diana 사원이 있는 곳으로써 아직까지 교회 내의 어떤 여자들 중에는 저들의 신앙의 토대가 약하여 변질될 위험에 있었던 상황이었다. 저들 가운데는 집사의 직과 교회직원된 과부들도 있었지만,누구의 말도 경청하지 않고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고(딤후3:6-7)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며 망녕된 폄론(貶論)을 하는(딤전5:13) 그런 여자들도 있었다. 이러한 젊은 과부들에게 고린도에서는 결혼을 금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나(고전7:40) 여기서는(딤전5:14) 결혼을 권장한 것만 보아도 그 상황이 분명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 2:11-12절에 나오는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는 것은 고린도전서 14:34-35절에서 "조용하라"는 것과 같은 뜻으로 볼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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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조용하라」는 것은 규범없이 떠드는 말들을 그치라는 것이고, 보다 고상하고 예의바른 행동을 권하는 의미이다. 그것이 곧 디모데전서 2:2절에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는데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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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2절에 「가르친다」는 말은 초대교회에서 여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행했던 그런 특별한 성령의 선물로서의 실천을 뜻 하는 것으로서 여자는 그릇된 거짓 가르침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것이 아니고, 벌써 디모데의 교구에서 교리의 오해자들이 생기고(딤후3:6-7)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딤전5:15) 주는 교훈이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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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는 말은 여기서 남자란 남편을 가르키는 것으로서 「주관」이란 헬라어 동사 ????????? 는 신약중 여기에서만 나오는 말이다. 이 ????????? 은 interrupt 또는 domineer over 등의 말로 번역 할 수 있는 것으로써 이것이 명사로 사용될 때 suicide 혹은?? family-murder 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것이 후에 Lord 혹은 Autocrat 으로 되었는데 주후 1세기에 동안 이 말은 속어로서, suicide 즉 자살은 「자기 자신의 결정」으로 자신의 생명을 취하는 것으로써 그렇게 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지령자(dictator)가 되는 것을 의미 했다. 그래서 이 말은 「자의적」(self-willed),혹은 「멋대로」(arbitrary)의 간섭을 뜻하는 말로 되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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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볼 때 당시 사회 문화적 배경에서 부부의 역활에서 이탈되지 않기 위한 위함이었음을 분명히 볼수 있다. 이 구절은 일반적인 원리로 기술한 말이라기 보다 하나의 특수한 상황에서 한 말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한 특수한 상황에서 말 하려는 바울의 근본 의도를 알아야지 문자적인 어귀에 얽매어 그것을 일반적으로 적용할 때 그것은 본 뜻과 거리가 멀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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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구절들은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나타난 그대로 현실 교회에서 적용할수는 없다. 이 모든 글들이 다 가정 주부들에게 주는 당시 사회윤리적 교훈이었다. 이것들은 당시 기독교 공동체 생활에서도 예외가 될수 없었다. 교회 밖의 세상적 윤리가 교회를 위하여 인용된 것 뿐이다. 이 구절들은 이단과 박해에 직면한 초대교회가 이 세상 안에서 온전하게 질서있게 서 있기 위하여 당연히 쓰여졌던 말들이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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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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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차별을 주장 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대략 지적해 보았다. 성경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하나님이 본래 우리들에게 나타 내시려는 본뜻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지만 그것을 본뜻에 가깝도록 해석 하는 작업과 노력은 항상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교회를 이끌어 가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사명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편견을 가지고 아직도 형벌로 주어졌던 남녀의 차별의식을 새로운 피조물이된 그리스도 안에서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성경을 자기 본위에서 해석하는 것이지 하나님 편에서 해석한 것이라고는 볼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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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위의 구절들을 생각하면서 이 구절들이 기록된 사도 시대의 교회는 종말론적 소망이 주류를 이루었던 때 인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소망은 수정 되어야 했고 그래서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재 형성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교회가 계속적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가 중요하게 대두 되었다. 특히 이단들과의 싸움에서 정통의 형태는 그때 그때 마다 재 확인되고 발전되어 왔고, 한편 교회 밖으로 부터의 사회적 위험은 보다 사회생활의 공적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최선의 사회규범과 덕행이 요청 되었음을 쉽게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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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대적인 상황를 고려할 때 바울 서신에 나타난 여성에 대한 말은 문자적인 구절들로서 교회의 원리를 삼는것 보다는 그 뜻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에서 결론을 얻어야 할 것이다. 바울의 모든 서신중에 결론적 부분이 되는 것은 갈라디아 3:28절에 나타난다."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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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이란 신학적 명제는 바울에게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 안"이란 언제나 "율법 안"과 대조 되는 말이다. 율법안에 있었을 때의 모든 제도,차별,편견,등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 졌다는 적극적인 의미이다. 즉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질서 속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아직도 남성우위의 편견으로 해석되는 여성차별은 없어져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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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도교회 목사/ 김? 이? 봉, Th.M., M.Ed.,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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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와 신학」 논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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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문제에 관하여 좀더 연구할 분은,Wayn A.Meek, The Writings St.Paul:A Norton Critical Edition (New York:Norton,1972),p.38.

?2) Don Williams,The Apostle Paul and Woman in the Church(LosAngeles: BIM Publishing Co.,1977)p.64.??

3)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Nasvhille:Abingdon,1976),p.967.

영어 성경에는 이 머리라는 말을 beginning으로 번역하고 있다.

4) G.Kittel & G.Friedrich,ed.,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Grand Rapid:Eerdmans,Vol.III,1965),p.679.

5) Robin Scroggs,"Paul and the Eschatological Woman,"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Vol.40,Spring,1972,Revised in Vol.42.

6)삽입된 이유로 Walker,Jr.는 다음 5가지를 든다.영문으로 소개한다.

(a) The passage appears to contradict I Cor.11:2-16,where it is clear? that women do have the right to speak in Christian Assemblies;

(b) The verses break the contex of ch.14,which deals with the regulation of glossolalia and prophetic activity in

assemblies;

(c) Codex Claromontanus (D) and certain related Western MSS have vss. 34-35 at the close of ch.14 which suggests that they may have originated as a marginal gloss and been inserted later into the text at different places;

(d) the appeal to the law as authority in vs.34 sounds an Pauline;

(e) the idea is very similar to that of I Tim.2:11-12,which suggests that the verses are a gloss originating from a circle such as that which produced the pastorals.

7) George Buttrick,ed.,The Interpreter's Bible(Nashville:Abingdon, Vol.10,1943),p.231.

8) George Gunter Blum,"The Office of Women in the N.T.",The Churchman,? A Quarterly Journal of Anglican

Theology(Berkshive,U.K.:Sutton Courternay,Vol.85,No.3,Autumn 1971),p.180.

9) George Gunter Blum, Ibid.,p.181.

10) Ibid.,p.182.

11) George Johsson,ed.,Ephesians;Philippians,Colossians and Philemon (Nelson:England,1967),pp.5-6.

12) Letha Seanzoni & Nancy Hardesty, All We're Meant To Be(Texas:Word Books,Publisher Waco,1974),p.71.

13) Babara Hall,"Church in the World,Paul and Women",Theology Today (Princeton:N.J.,Vol.XXXI,No.1,April 1974),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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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안수 문제와 여성의 교회 내 역할에 관하여 자신의 입장을 논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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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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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앙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만큼 행동하고 따라가야 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여성 안수를 금하고 있다(고전 14:34-36; 딤전 2:11-15). 그러나 성경은 여성의 교회 내의 역할 자체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러 가지 면에서 여성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여성 안수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으며, 교회 내에서 여성이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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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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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을 금지한다(딤전 2:12). 이것은 창조 질서의 원리와 연결된다. 남자가 먼저 지음받았다는 사실은 남자의 머리됨을 말해준다. 여자는 돕는 배필로 지어졌다. 즉 여자는 남자의 주관 아래서 돕는 자로서 기능하도록 지어졌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말씀(고전 11:3)에서도 남자가 여자를 주관해야 한다는 원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고 주관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창조 질서의 원리에 어긋난다. 우리는 이러한 여성의 가르침과 주관함의 금지를 여성 안수 불가라는 입장과 연결시킨다. 성경에는 여성 안수라는 용어 자체가 없지만, 남자의 머리됨이라는 원리에 비추어볼 때 여성 안수는 불가하다.

일부 여권주의자들은 비평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경 해석법을 동원하여 여성 안수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여자의 가르침과 다스림을 금지하는 성경 말씀은 바울 당시의 사회문화적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특수한 경우였다고도 하며, 심지어 그러한 성경 말씀은 바울 자신의 글이 아니라 바울을 가장한 다른 사람의 글이므로 사도적 권위가 없다고 하면서 성경의 권위와 영감 자체를 부인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여권주의자들의 주장은 단순히 여성 안수 문제의 차원이 아니라 개혁주의 신앙의 근본인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반기를 들고 도전하는 것이므로 결코 용납되어서는 아니된다. 여성 안수 문제의 근원에는 성경 해석의 문제와 성경의 권위의 문제가 걸려있음을 직시하고, 우리는 이 문제에 결코 양보나 타협 없이 성경의 명령을 굳게 잡고 서야 한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교회 내에서의 역할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여기서 여성의 가르침에 대한 금지의 범위가 문제가 된다. 여자는 일체 교회 안에서 가르칠 수 없는가 아니면 남자를 주관하고 가르칠 수 없는가? 후자의 의미로 보아야 한다.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고 주관함은 창조의 질서의 원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허용될 수 없지만, 그 원리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는 여자가 교회 안에서 가르칠 수 있다. 바울도 여자가 공적 모임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지한 것이지 모든 곳에서 일체의 가르침을 금지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전도사, 교육사, 상담사, 그리고 복지사 등의 사역을 담당할 수 있다. 담임 목사의 헤드쉽의 범위 안에서 전도사로서 그리고 교육사로서 여자 성도들과 어린이들에게 설교할 수 있고 교육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상담이나 사회복지 등의 학문을 전공한 이후, 교회 안에서 상담사와 복지사로서 담임 목사의 목회적 동역자로서도 사역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다원화되어가기 때문에, 담임 목사 일인이 모든 것을 담당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더욱 더 여성 사역자들의 역할이 필요하고 또 중요해진다. 여성 사역자들은 남성의 헤드쉽을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전문 영역 안에서 얼마든지 섬기고 봉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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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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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고 주관하는 것을 분명하게 금지한다. 이러한 성경의 기본 원리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 영구적인 것이다. 성경의 확고부동한 증언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왜곡시키지 않고서는 여자의 남자에 대한 창조 질서 차원의 종속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성 안수를 찬성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하지만 성경이 여성의 사역 자체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는다. 성경에는 많은 여성 사역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언제나 남성의 헤드쉽을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사역을 감당했다. 오늘날에도 남성의 헤드쉽의 범위 안에서 여성들은 여러 가지 사역들을 담당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담당하고 있다. 여성의 사역이 제한적이긴 하지만 그 중요성은 과소평가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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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은 의견의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언급하신 구절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나름대로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온 구절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여자들에게 침묵을 요구한 대표적인 구절은 (고전 14:34-36)과 (딤전 2:11-12)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173번에서 설명한 것은 주로 목회 서신인(딤전 2:11-12)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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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딤전 2:11-12)

바울은 (딤전 2:11-12)에서 목회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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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11),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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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원문을 따라 보다 쉽게 번역하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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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모든 일에 순종하며 조용히 배우십시오!(11) 또 나는 여인이 가르치는 일(to teach)이나, 남자를 다스리는 일(to exercise authority)을 허락하지(permit, 또는 위임하지) 않으니, 조용히 계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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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바울이 여성에게서 금지한 것은 "가르치는 일"과, 남자를 "다스리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은 교회의 지도자들(목사와 장로)의 역할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교회의 장로를 두 가지, 즉 "다스리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로 구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르치는 장로는 오늘날의 목사를 의미하고, 다스리는 장로는 오늘날의 장로를 의미합니다. 목사는 설교와 행정을 겸했고, 장로는 행정을 주로 맡아 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 서신인 (딤전 2:11)에서 여성에게 순종하며 조용히 배우라는 말은, 여성이 나서서 목사와 장로가 하는 일에 참견하는 일을 금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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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은 여성 목사와 장로 제도에 대해 각 교단마다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2000년 전의 문화 속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다스리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바울 역시 이러한 일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던 100여년 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 나라는 교회에서 남자가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교회를 "ㄱ"로 지어 남자 방과 여자 방을 분리하기도 했습니다. 만일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인들이 나서서 교회를 다스리고 가르쳤다면 아마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할 때에 갑자기 문화나 제도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으로 개인을 변화시켜서 오랜 시간을 두고 근본적으로 기독교 문화를 만드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는 이러한 원칙을 잘 따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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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전 12-14장)

그러나 이러한 원칙을 따르지 않아서 문제가 된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바로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에서 크게 문제가 된 것은 "기독교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선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율법의 의무에서 해방되었으며, 모든 일을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자유의 남용으로 흘러서,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무질서와 방종을 낳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주장만 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는 점에 부족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교회 안에는 우상제물을 먹어도 된다고 하는 사람과,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서로 갈등하고 있었고, 심지어 계모와 간통한 사람을 교회가 허용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으며, 성령의 은사를 무분별하게 사용하여 교회의 예배 질서가 매우 어지럽게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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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2-14장)에서 바울은 특히 영적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무분별한 행동을 절제하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 은사에서 문제가 된 것은 주로 "방언"의 은사였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공적예배에서까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교회에는 여러 가지 덕스럽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방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방언의 은사를 공 예배에서사용하는 일에 절제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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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바울은 고전 13장을 통해서 이러한 은사를 "사랑"으로 사용하도록 부탁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방언"의 은사가 크게 강조된 반면, "예언"의 은사는 상대적으로 경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특히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언"도 무질서하게 행해서는 안되며, 순서대로(질서를 지켜서)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예언을 할 때에는 다른 사람이 그 예언을 분별하라고 부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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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전 14:34-36)

바울은 여기까지 말한 후에 주제를 약간 돌려서 그 동안 참아왔던 말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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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인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여인이 나서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린도 교회에서만은 이러한 일로 인해 교회질서가 어지럽게 되었습니다. 특히 영적은사를 받은 여성도들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공예배 중에 나서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대개 영적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여인들을 향해서 다른 교회처럼" "너희들도 교회에서(공예배에서) 잠잠하라"고 정중히 부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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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여인이 공예배 시에 나서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하고..."율법에도 이와 같이 명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4:34).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서 크게 문제가 된 것은 교회의 지도자(목사, 또는 장로)가 말씀을 가르치거나 설교 할 때에 여성도들이 중간에 끼어 들어서 자기가 원하는 말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문맥을 보면 어떤 여인들은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도중에 갑자기 끼어 들어서 그 말을 보충하거나 지적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당연히 교회의 공예배를 혼란케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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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문맥의 내용을 보면 여성도들 중에서 교회 지도자가 가르치거나 설교할 때에 갑자기 일어나서 궁금한 것에 대해서 질문하는 여인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일은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예배의 흐름을 방해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여인들이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조용히 물으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일이 당시 문화와 상황 속에서 "부끄러운 일"이어었다고 말합니다(11:35). 아마도 당시의 사회에서 여인들이 공적인 장소에서 나서서 말하거나 묻는 일이 수치스럽게 여겨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우리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에 감히 여인들이 공 예배에 나서서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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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바울은 다시 자신만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11:35)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특히 은사를 받은 사람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를 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편지 내용을 보면 이러한 일은 주로 은사를 받은 여성도들로 인해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여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과 성령을 통해서 12사도와 바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교회에 그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다른 교회처럼 사도들의 권위와 가르침을 인정하고 그 말씀과 가르침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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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 책망했습니다. 당시 은사를 받은 고린도 교회 여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만 주어진 것처럼 다소 독선적으로 행동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한 몇 사람에게 배타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서 모든 교회에 똑같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의 몇몇 은사주의 여성도들은 자신만이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우월감을 갖거나, 다른 성도들을 무시하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를 버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모든 교회에서 했던 것처럼 당시의 교회의 원칙을 따를 필요가 있었습니다(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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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와 같이 여인에게 침묵을 금한 것은 고린도 교회의 당시의 특별한 상황과 은사를 받은 소수의 여성도들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 일은 공 예배 시간에 나서서 설교를 가로막는 일이나, 갑자기 일어나서 질문을 함으로 예배의 흐름을 깨고, 또 교회를 다스리는 일에 나서는 일 등을 모두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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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바울 당시에 고린도 교회 여인들이 덕스럽게 행동을 했다면 여인들의 문제에 대해서 바울이 언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문제를 언급한 것은 여인들이 지혜롭지 못한 무분별한 행동으로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혼란스럽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로 인해 당황한 고린도 교인들은 대표를 뽑아서 바울에게 보내서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요청을 받고 혼란해진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 이러한 특별한 조치를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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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서신을 보면 여인들이 복음을 전하거나 가르치고, 바울의 편지를 가지고 로마에 가는 전달자 역할을 하며, 또 자기 집을 교회 처소로 내놓는 등 매우 탁월한 활동을 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여인의 권한을 경시하던 당시 상황에서 보면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여인들의 재능이 복음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금한 것은 여인의 은사가 무분별하게 사용되어 교회에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했을 때였습니다. 아마 바울은 이러한 혼란을 초래한 사람이 남자였다고 해도 그 남자에게 발언을 금하도록 명했을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에 보낸 편지를 보면 대부분의 내용들이 여인이 아니라 무질서를 초래한 수많은 남자와 남자 지도자들에 관한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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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은 여성의 권한이 강조되고 있는 현실 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절하고 절서있게 사용되면 여성의 재능과 은사는 얼마든지 복음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여인의 유능한 재능을 복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놀려 두는 것은 큰 낭비이며,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재능과 은사가 지혜롭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사용되어 교회질서를 무너뜨리거나 혼란스럽게 하면 지금도 교회지도자는 이에 대해 절제를 요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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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도 목사나 설교자로 섬겨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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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여성도 목사나 설교자로 섬겨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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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아마 여성 사역자 주제 만큼 오늘날 교회에서 더 많은 논쟁거리를 불러일으키는 주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성 대 여성 이렇게 대립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여성들은 여자는 목사로 섬겨서는 안 된다고 믿고, 성경도 또한 여성의 사역에 대해 제한하고 있습니다. 반면 여성 설교자의 섬김과 여성들의 사역에 제한을 두지 아니하는 남성들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성차별대우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해석의 문제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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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2:11-12 는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각각 달리하셨습니다. 이는 남녀가 창조된 원리에 부합되는 것이고 (디모데전서 2:13), 또 죄가 세상에 들어 오게 된 연유때문이기도 합니다 (디모데후서 2:14).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글을 통해 여성들이 영적인 가르침으로 섬기는 데 있어서 남성 보다 높은 권위를 갖는 것에 제재를 가하십니다. 이는 여성이 목사로서의 섬김 즉 설교하고, 가르치고, 영적인 권위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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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사역 제한을 반대하는 많은 의견들이 있습니다. 첫째, 바울이 여성의 가르침을 막는 이유는 1세기의 여성들은 교육받은 자가 특별히 적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2:11-14어디에서도 고육적 지위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습니다. 만약에 교육이 사역을 위한 자격조건이었다면 대다수 예수의 제자들은 자격미달입니다. 둘째, 바울이 단지 에베소의 여성들만 가르치는 사역에서 제외시켰다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는 에베소 교회의 목사였던 디모데에게 쓰여진 글입니다). 에베소 도시는 그리스 로마가 섬겼던 신, 아르테미스의 성전으로 유명했습니다. 아르테미스에 대한 예배는 여성이 주도권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어디에서도 아르테미스를 언급한 적이 없으며, 바울도 아르테미스 숭배문제를 가지고 디모데전서 2:11-12을 통해 제한시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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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바울이 단지 남편과 아내를 상대로 여성의 활동을 제한시키는 것이지 일반적으로 남성 대 여성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2:11-14의 그리스어는 남편과 아내만 뜻할 수 있습닌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남자와 여자를 뜻합니다. 더군다나 같은 그리스어가 8절에서 10절에서도 쓰입니다. 예로 8절은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은 결혼한 남편들에게만 얘기하는 것입니까? 아담한 옷을 입으며 오직 선행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오직 결혼한 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9절-10절). 물론 아닙니다. 8절에서 10절은 분명히 일반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상대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14절에서도 대상이 갑자기 남편과 아내들로 전환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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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여성 목사나 설교자를 해석할 때 성경에서 리더쉽의 자리에 있었던 미리암, 데보라, 훌다, 프리실라, 뵈뵈를 예로 듭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중요한 사실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데보라의 경우, 그녀는 13명의 사사중에 유일한 여성 사사였습니다. 훌다의 경우, 그녀는 12명의 남성 선지자 중에 유일한 여성 선지자 였습니다. 미리암의 리더쉽은 그녀가 모세와 아론의 혈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왕조 시대에 가장 눈에 띄는 여성은 아달리아와 이세벨이나 그들은 거룩한 여성 리더쉽을 거의 보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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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8장에 프리실라와 아퀼라는 그리스도의 충성된 사역자로 묘사됩니다. 프리실라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어서 그녀가 남편보다 사역을 훨씬 뛰어나게 감당한 한 것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프리실라가 디모데전서 2:11-14절에 대립되는 사역활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즉 프리실라와 아퀼라는 아볼로를 그들의 집으로 데리고 와 하나님의 말씀을 더 효과있게 전달함으로 그를 제자 양육합니다 (사도행전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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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6:1에서 뵈뵈를 “종”보다는 여집사로 여겼지만 그녀가 교회의 교사였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르침은 집사들이 아닌 장로들에게 주어진 자격이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3:1-13; 디도서 1:6-9). 장로/주교/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 “믿음이 좋은 자녀를 둔 남자” 그리고 “존경할 만한 남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3:1-13와 디도서 1:6-9에서는 남성 대명사가 특별히 장로/주교/집사들을 언급하는 데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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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2:11-14의 구조는 아주 확실한 이유를 제공합니다. 13절은 “왜냐하면”의 접속사로 시작하여 바울이 11절과 12절에 언급한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해줍니다. 왜 여성의 가르침은 금지되었고 남성에게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고 그 후에 여성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속임을 당한 것은 여자였지 아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먼저 창조하셨고, 이브를 아담의 조력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창조 질서는 지구상의 모든 가정과 교회에 적용됩니다 (에베소서 5:22-33). 이브가 속임을 받았다는 사실은 여성의 목회자 사역과 남성에게 영적 권위 사용의 부적합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여성은 쉽게 속기 때문에 가르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개념은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자가 더 쉽게 속임을 당한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잘 속아 넘어가는) 가르치고 또 다른 여성(더 잘 속는다고 가정된) 들을 지도할 수 있습니까? 이는 본문이 뜻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브가 속임을 받았기 때문에 가르칠 수 없고, 남성에게 영적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남자에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권위를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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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동정, 긍휼, 돕는 은사에 강합니다. 교회 내의 많은 사역이 여성들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남성에게 영적 권위를 사용하는 것을 빼놓고는 여성이 기도나 예언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1:5). 성경 어디에서도 여성들이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 제한 두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이 다른 지체들을 섬기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갈라디아서 5:22-23),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18-20; 사도행전 1:8; 베드로전서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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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교회에서 오직 남자만 영적 지도자의 위치에서 섬기도록 정하셨습니다. 이는 남자가 더 수준 높은 교사이거나 여성이 남자보다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교회를 이렇게 디자인하신 것입니다. 남성이 그들의 삶과 언어사용을 통해서 영적 리더쉽의 모범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여성은 조금 덜 권위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여성은 다른 여성을 가르치라고 되어있습니다 (디도서 2:3-5). 성경은 또한 여성의 아이들 교육에 제재를 가하지 않습니다. 여성의 활동이 제한된 경우는 남자를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영적 권위를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자연히 목사나 설교자로 활동하는 여성들을 포함합니다. 이는 여성이 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성에게 더 유리하게 만드신 은사들에 전력하는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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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해야 하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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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admin? 조회 : 137?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역할이 과거에 비해 괄목할 만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기업을 이끄는 여성뿐만 아니라 여성 국회의원, 장관, 총리, 대통령도 이제 낯설지 않다. 교회 안에서도 여선교회의 적극적인 활동이 남선교회를 압도하고 있으며, 남성들과 비교할 때 여성들은 조금도 미흡하지 않은 지도력을 보이고 있다. 또한 연합감리교는 여성을 성직자로서 남성과 동등하게 안수하며, 여성의 영적 지도력을 잘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교단들은 여성목사안수가? 성경적이지 않다 며 거부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으며? 성경적이다 라는 한마디로 그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여성의 동등한 지도력을 인정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일부 교회가 여성의 영적 지도력을 쉽게 용인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지극히 현실적인 성경해석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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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표적인 구절이 고린도전서 14장 35절,?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한 대로 여자들은 복종해야 합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십시오. (표준새번역성경, 2001) 또한 고린도전서 11장 5절에서 여자가 공적인 자리에서 예언하고 기도하기 위해서 머리에 너울(수건)을 써야 한다는 기록이 근거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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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두 구절을 읽어보면 여성들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느낌이 든다. 과연 그러한가? 먼저 11장의 너울 쓰는 단락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 여성의 지도력을 교회 안에서 금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바울의 의도는 여성이 교회의 공적인 자리에서 예언하고 기도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린도교회에 여성의 영적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불만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반대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여성의 영적 은사를 인정하도록 권면하는 내용이 이것이다. 견해가 다른 두 그룹을 어떻게 화해시켜 제3의 길을 열어낼 것인가? 여기서 바울은 여성이 머리에 너울을 쓰고 영적 은사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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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여성의 발언권(지도력)을 막는 고린도전서 14장의 구절과 전혀 상반된다는 결론이 그것이다. 바울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성서본문 비평(다양한 성경 사본에 대한 비교연구)에 의하면, 14장 34-35절은 사본에 따라서 현재의 위치에 있기도 하고, 14장 40절 뒤에 오기도 한다. 많은 학자들은 11장과 상반되는 입장을 근거로, 또 구절의 위치가 사본에 따라 다르다는 점, 그리고 루디아와 같은 여성이 바울의 전도과정에서 적극적인 지도력을 발휘했음을 들어, 34-35절이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여자들이 잠잠해야 한다는 것은 바울의 공식적인 견해라기 보다는, 교회가 가정교회의 영역을 넘어 그리스-로마 사회의 공식적인 종교로 자리잡아 가는 과정에서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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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설사? 여자가 잠잠해야 한다 는 말이 바울의 것이 아니라 해도 우리가 신앙의 규범으로 삼고 있는? 성경(정경) 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므로 여성이 교회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전히 성경적이라고 하는 주장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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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성서신학 전반의 문제로 확대되는데, 신앙의 근거로서 신약과 구약이 포함된 정경(canon)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선, 성경 안의 많은 규범이 제시되고 있는데, 크게 보면 구약의 것과 신약의 것이 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은 우리들이 즐겨 먹는 돼지 삼겹살이나 오징어 볶음은 절대 먹어서 안 되는 부정한 음식(레위기 11장)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게 먹고 있다. 이유는 고린도전서 8장과 10장(10장 25-26절)에서 바울이? 마음이 약한 자 들의 양심을 위해 우리 자신의 자유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어떤 음식이든 부정한 것은 없다(8장 8절, 10장 25-26절)고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태복음 15장 11절, 마가복음 7장 15-16절)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 (마가복음 7장 19절)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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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지침으로, 삶의 중요한 전거로 사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의 본문이 직접적으로 상호 충돌하는 교훈을 줄 때, 성서전체를 통해 그 교훈을 찾아야 한다. 또한 신, 구약의 갈등지점에서는 일반적으로 구약을 신약의 빛으로 조명하게 된다. 가끔 한국 기독인들은? 동방의 유대인 으로서 자부심을 말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즉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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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위의 경우처럼 신약 안의 구절들이 상충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자는 잠잠해야 한다 는 구절은 고린도전서에 있고, 이것은 신약에 속한다. 신약 안의 구절을 임의로 취사선택하여 버릴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이런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말씀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본문을 둘러싼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이 최종적인 신앙의 지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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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여성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으셨는가? 어린이들이 그에게 가까이 오도록 허락되었듯이, 예수님의 사역 현장에서 여성의 역할은 간과될 수 없다.? 마리아 란 이름이 대표적인 예이다.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 허락되었고(누가복음 10장 38-42절), 베다니에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막달라 마리아를 두고 주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억되어야 할 것(마가복음 14장 9절)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예수께서 체포된 후, 남자 제자들이 다 도망갔을 때, 부활을 첫 번째로 목격한 여성의 이야기가 더욱 중요한 깃점을 이룬다. 그들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등 세 여인이었다. 이 세 여인은 천사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직접 듣고, 숨어있는 남자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는 명령을 받았다.(마가복음 16장 7절) 여성의 지도적인 역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복음서의 기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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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잠잠해야 한다 는 구절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그다지? 성경적 이지는 않다는 것을 이렇게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초대교회가 성장하면서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문화에 순응하고, 사회구조 속에서 채택되고 재생산된 주장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주신 영적 은사가 남자들의 것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여성의 영적 지도력은 적극적으로 긍정되어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세워 가는 데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고린도전서 12장 12-13절)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은사를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 쓰신다. 서로을 위한 존경과 겸손은 그래서 교회를, 그리고 가정을 풍성하게 건강하게 세워 가는 귀한 덕목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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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덕 목사, 언약교회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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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11140 에서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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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안수 성경적인가? 비성경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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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태 개신대학원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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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석태 박사

뉴욕대학교대학원 철학 박사

개신대학원대학교 총장

한국개혁신학회 자문위원

한국성서고고학회 부회장

한국개혁신학회 회장

여자에게 안수하여 성직을 허락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요사이처럼 여성들의 교회내에서 역할과 그 영향력의 비중이 커감에 따라 여기저기에서 제기되고 있으며, 특히 보수적인 교회 내에서는 향후 그 결정을 놓고 격론이 벌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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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현실적인 필요를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교회 내에 여성이 숫자적으로 많다. 따라서 여성들이 당회, 노회, 총회 등의 치리회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여야 한다. 여성들이 설교나 교육을 남성들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여성들이 분쟁하는 교회에 조정 역할을 더 잘 할 수 있다 등의 이유를 든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논의할 때는 항상 성경과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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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류에 따라 성경의 원리에 반한 정치 조례를 만들고 헌법을 뜯어 고친다면, 그것은 성경을 배격하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을 배격한다면 그러한 교회는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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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창조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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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성들에게 성직을 부여하는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가장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성경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의 원리와 여성의 지위이다. 교회 내에서 여성의 성직 수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남녀는 평등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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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는 하나님-사람-만물의 질서가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만물의 통치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사람에게 위임하시고, 대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서 그를 섬기고 살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복을 주셨다. 바로 이러한 뜻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남자로부터 여자를 지으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셨고, 이 때 여자는 남자의 돕는 배필이다(딤전 2:13-14; 고전 1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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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먼저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관계의 권위와 순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 같은 사실을 살펴볼 때, 이 세상에 권위 체계의 질서가 있듯이 가정에도 같은 질서가 있고,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대표자이듯이, 언약으로 맺어진 가정에도 남자가 언약적 대표자이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은 책임을 하나님께서는 먼저 따먹은 여자에게서 먼저 묻지 않고, 가정의 머리인 남자에게 물으셨다. 이 같은 해석을 신약에서는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니,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기를 원한다”(고전 11:3)라고 가르친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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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가정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질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딤전 2:12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사도적 권위로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직 여자는 조용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즉 교회 안의 모든 치리와 선포하는 장로의 직분에서 여자를 제외시키는 것은 명백하고 확고한 성경적 가르침이라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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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직자의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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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우리가 여성에게 성직을 부여하는 안수 문제를 논할 때 생각해야 할 점은 성경에서 말하는 성직자의 범위이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 다양하다. 제사장, 레위인, 선지자, 사사, 나실인, 느다님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을 다 성직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성직자라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정한 절차를 밟아 위임식을 하고, 전 생애를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종사하며, 이를 위하여 백성들이 바친 예물과 제물과 십일조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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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실인이나 느담님은 성직자가 아니며, 선지자도 성직자라고 볼 수 없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항존직이라면 선지자는 임시직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선지자가 없었던 시기가 있던 시기보다 훨씬 많았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필요한 경우에 선지자들을 보내어 백성들을 일깨우는 일을 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였으므로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입”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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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은 세습제였으므로 성직자로서의 검증이 까다롭지 않았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선지자는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 스스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해야 했고, 사람들로부터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이라는 것을 인정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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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이었다. 그 선지자들 가운데 여성의 경우는 구약 1500여년 역사 가운데 불과 몇 사람뿐이다. 출애굽 시대의 마리아(출 15:20), 사사시대의 드보라(삿 4:4)나 요시야 시대의 훌다 (왕상 22:14: 대하 34:22), 노야다 (느 6: 14), 이사야의 아내 (사 8:3) 등이 전부이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비상시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임무를 주어 실행케 한 자들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본질적으로 제사장과 그 직무가 다르며, 여선지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들을 가리켜 성직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오늘날 여성들의 목사 안수의 근거를 구약성경의 여선지자에게서 찾는 것은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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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약의 제사장직과 신약의 제사장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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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네 아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제사장으로 정하셨다(출 28:1). 아론은 모세의 입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며,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전쟁할 때에는 훌과 함께 기도하는 모세의 팔을 떠받쳐 내려오지 않도록 하여 여호수아의 승리를 뒷받침한 사람이다.

여호와께서 그를 제사장으로 임명하기 전에 그는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제사장의 할 일은 백성들을 대표하여 여호와께 나아가 제사 드리는 일과 백성들을 가르치는 일과 질병의 진단과 처방은 물론 각 종 범죄에 대한 수사와 판결의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일정한 절차를 따라 위임식을 했으며, 특별히 디자인한 제사장 복과 모자를 썼으며, 제사장복 앞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각 종 보석으로 만든 가슴패를 달고, 하나님을 뜻을 분변하는 데 사용하는 우림과 둠밈도 지니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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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들은 여호와께 일 년된 어린 수양을 아침저녁으로 회막 문에서 번제로 바치는 일을 대대로 해야 했으며, 이때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겠다고 하였다(출 29:34). 레위인들에게는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를 생활비로 주어진 반면, 제사장들에게는 백성들이 여호와께 바친 제물이 그들의 몫이 되었다. 이러한 제사장직은 세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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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선지자는 여자가 가끔 있지만 제사장은 여자가 없다. 제사장직이 세습되었기 때문에 후기 유대 사회에서 제사장의 아내는 엄선되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후손들에게 “소금언약”과 “평화의 언약”을 주셔서 영영토록 그들의 제사장직을 보장해주셨다(민 18:19; 2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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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제사장과 대제사장직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모형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스스로 성전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시고,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께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제사와 제사장직을 완성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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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영원히 계시고 영구적인 제사장? 직을 가지고 계시므로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수 있으니, 그분은 항상 살아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히 7:23-25)?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히 계시고 영구적인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백성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단번에 드려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희생 제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히 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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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아론의 후손들처럼 불완전한 제사를 드리는 제한적인 제사장들과는 다른 영원한 대제사장이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론과 그 후손들과 같이 매일 짐승의 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하는 제사장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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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제사장과 목사 사이에는 포괄적인 직무상의 연속성이 있다. 예수께서는 붙잡하시기 전날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드시며,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며, 새 언약을 맺으시고,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명하셨다(눅 22:14-23).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것을 시행하며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재림할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고전 11: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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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부활하시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우리의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는? 흩어졌던 열 두 사도를 부르시고, 이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세례를 베풀며, 그가 가르치신 것을 지키도록 하라는 명령을 주셨다(마 28:16-20; 행 1:8). 이 명령을 받들어 제자들은 나아가서 말씀을 선포하고, 제자들에게 안수하여 세례를 베풀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고 성만찬을 집전하는 이 예식은 분명 선지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사장적 직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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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똑같은 대제사장적 직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영적인 제사장직을 위임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바울 사도는 자신의 직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하고, 그리하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 일이 성령 안 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롬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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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분명 사도 바울은 이방인으로 예수를 믿게 하여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이 일을 마치 구약성경에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의 직무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사 61:6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를 “여호와의 제사장,” 그리고 말씀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러 나오는 이방인들을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들”이라고 말하는 말씀에 대한 성취로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직무가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이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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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구약의 제사장직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위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여성들이 많았지만 제사장적 직무를 위하여 여자들을 사도로 세우시지 않으셨다.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그의 사도로 세우실 때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자라는 것을 염두에 두신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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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약성경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한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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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신약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이 문제에 대하여 딤전 2:11-15, 고전 14:33하, 34, 38, 그리고 고전 11:1-16에서 사도 바울이 잘 다루고 있다. 바울은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오직 여자는 조용해야 한다.”(딤전 2:11)고 말한다. 그는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이 말은 여자가 어떤 사람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고 교회 내에서 남자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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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에 대하여 “이는 아담이 먼저 창조되고 그 다음에 하와가 창조되었으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임을 당하여 죄에 빠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창조의 질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 권위의 체계를 정하셨으며, 이 권위 체계의 파괴가 결과적으로 이 세상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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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세우신 권위 체계는 남자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여자는 그의 돕는 배필이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시기 전에 아담은 생물들의 이름을 짓고 있었고(창 2:19), 모든 가축과 하늘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의 이름을 불렀다(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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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창조주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이다.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아담에게 돕는 자가 필요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만물에게 이름을 짓고 있는 아담을 위하여, 아담으로부터 여자를 만드셨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영광이기 때문에 머리에 쓰면 안 된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다.”(고전 11:7)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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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만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남자의 언약적 대표성을 염두에 둔 말이다. 반면에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여자를 통하여 남자의 영광이 들어난다는 의미이다. 고전 11:7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권위 체계 가운데 여자는 결코 남자와 동등하지 않다. 예수께서 복음 사역을 하실 때 예수께 가장 충성했던 사람들이 여자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당대의 가장 급진적인 개혁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여자를 그의 사도로 세우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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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5에서 바울 사도는 여자의 예언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하거나 예언을 하면, 자기의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자기의 머리를 밀어버린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씀을 유추해보면 여자도 예언을 할 수 있는 데 그때는 머리에 수건을 쓰라는 것이다. 흔히들 갈 3:28의 말씀을 인용하여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여자에게도 성직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여자도 설교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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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3:28의 인접본문은 성직이나 설교에 대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에게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양자됨에 대한 무차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설교에 있어서 남녀 차별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예언을 설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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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것이 설교이든지 가르침이든지 황홀경 속에서 하는 방언이든지 간에 이것은 본질적으로 선지자적 행동이다. 이들이 세례를 주고, 성례를 베푸는 제사장적 활동은 아니다. 따라서 고전 11:4-5의 여자들에게 예언을 허용하는 말을 확대 해석하여 여성들에게 목사 안수를 하고 강단에서의 설교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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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고전 14:34에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여라. 여자들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으니 율법이 말하는 것같이 여자들은 복종하여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예 입을 다물고 살으라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공적인 의사 전달을 의미하며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예언이나 교육활동과 다른 차원의 의사표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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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과 관련된 것이라면 교회 내의 공식적인 회의라고 보아야 한다. 바로 이점이 당회나 노회와 같은 치리회의 구성에 있어서 여성의 참여를 제한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집사의 직무와 가르치는 직책에 대하여 여성들을 포함시키는 명백한 구절들이 성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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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든 참과부들을 교회의 명부에 올려 교회에서 봉사하게 하고 이들을 구제했다(딤전 5:9-16). 딤전 3:11에는 집사들의 자격을 열거하는 가운데 “여자들도 존경할만하고 ... 신실한 자라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여기서 여자들을 “아내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여자 집사들"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뵈뵈는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인 우리 자매 뵈뵈”라고 지칭하고 있다. 일꾼이라는 말을 “집사”와 의미가 같은 "디아코노스"(dia,kono?)가 사용되고 있다. 행 18:18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부부로서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개인지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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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기록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집사의 직분 및 여자들과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에서 초대 집사들처럼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안수하여 세웠는지는(행 6:6)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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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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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살펴볼 때, 여성에게 성직을 맡기는 문제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창조 세계에 계시하신 질서 안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남자를 그가 창조한 피조 세계를 다스릴 언약적 대표자로 세우시고, 이를 돕는 배필로써 여자를 창조하셨다. 따라서 언약적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에서는 남자가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대표성을 가지며, 또한 언약적 연대성 때문에 여자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축복과 저주가 남자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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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신구약 성경에서 성직의 연속성을 논할 때, 목사의 경우 그 직무는 제사장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여성의 안수나 성직에 관해 말할 때 구약 성경의 여선지자나 신약성경의 예언 활동을 했던 여성들로부터 그 정당성을 찾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제사장으로부터 직무의 연속성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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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여성들은 제사장적 직무를 행하거나 치리회의 주관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 여자들에게 교회 내에서 예언 활동을 허락하고 있다. 그러나 이 때는 반드시 머리를 덮도록 명하고 있으며, 교회 내에서 각종의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허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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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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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과 복종의 원리에서 본 여성안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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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

<크리스찬연합신문사>(9월 2일자 신문)에서 연속기획특집 이슈논단으로 여성안수 문제를 취급했다. 여성안수를 찬성한 조동호 목사와 이종윤 목사, 여성안수를 반대한 손석태 목사와 소재열 목사의 글이 연재됐다. 본 글은 여성안수 반대의 글을 제기한 소재열 목사의 글을 <크리스찬연합신문>의 양해를 받아 싣게 되었다(리폼드뉴스 편집부).

여성안수를 둘러싼 논쟁은 복음주의자 안에서도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사안으로 화해가 불가능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제 여성안수의 문제는 신학자의 개개인의 차이와 논쟁을 뛰어넘어 교단별로 뚜렷한 양자택일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지금까지 교단을 구분했던 교리적인 차이보다 여성안수의 문제가 다른 어떤 교리보다 더욱 상징성을 가진 교단의 구분을 위한 범주가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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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성안수를 지지해 준다면 어느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다는 태도가 교회 내의 여권주의주의들과 이 운동을 지지하는 그룹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제 성경의 권위와 보수적인 성경해석을 추구하는 개혁파 교단들끼리도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진영과 찬성하는 진영으로 나누어지는 이런 경향은 어느 정도 전 세계적인 흐름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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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로회 각 교단의 여성안수에 대한 역사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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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장로교 안에서 고신측과 합동측은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지만 기장측과 통합측은 여성안수를 허용하고 있다. 기장측에서는 1956년 제41회 총회에서 여장로제를 통과시키고 그 다음해인 1957년에 3명의 여 장로가 탄생하였다. 여 목사제는 1974년 제59회 기장총회에서 받아들여졌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에서는 여성안수 청원은 제46회, 제47회, 제49회, 제50회, 제52회 총회 등 거의 매년 총회에 여성안수를 청원하였으니 총회는 번번이 이를 반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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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제53회 총회 때는 여 장로 제도만을 청원하였으니 다음해 총회에서 반려되었고, 1971년 제56회 총회에서는 투표에 부쳐져 94:194로 부결되었다(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제56회 총회, 총회록, 98-99). 제56회 총회 이후로 여성안수 문제는 여성들의 청원으로 거의 매해 투표에 붙여지기는 하나 부결을 거듭할 뿐이었다. 1991년 제76회 총회는 여성안수 부결에 대하여 “향후 3년간은 이 문제에 대하여 헌의도 할 수 없도록 하는 안”까지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 3년의 기간이 지난 후인 1994년 제79회 총회여성안수의 건이 통과되고 노회 수의를 거쳐 1995년 5월 27일 여성안수에 대한 헌법 개정안이 공고된 이후 1996년 4월 28일 첫 여장로로 안수를 받았고 그해 첫 여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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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제79회 통합측 총회에서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하여 허용하는 결의를 하자, 그 여파가 합동측에까지 확대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논의의 필요성 때문에 <신학지남>, 1996년 가을호(통권 248호)에서 특집으로 “교회와 여성”이라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들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김의환 박사,“교회내 여성의 기능과 성직의 자격”, 박아론 박사,“여성의 목사안수에 관한 여권주의자들의 주장과 우리의 견해”, 권성수 박사,“딤전 2:11-15에 관한 주석적 고찰”, 김길성 박사,“여성임직에 대한 성경의 교훈”, 다음해인 1997년 가을호(제252호)에서도 심창섭 박사의 “여성안수에 대한 소고”와 정훈택 박사의 “존재론적 평등성, 기능적 종속성”, 이관직 박사의 “성경 속에 나타난 여성안수에 대한 이해”라는 논문이 발표됨으로 합동교단의 신학적 입장은 여성안수가 신학적으로 불가함을 발표하게 되었다. 또한 제83회(1998) 예장합동 총회는 신학적으로 여성안수를 허락할 수 없다고 이를 확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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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성안수 문제에 대한 신학적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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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는 역사적으로 여권문제는 함경북도 성진 중앙교회 김춘배 목사는 1934년 8월 22일자 「기독신보」에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그는 이 글에서 지난 해 총회시 함남노회에서 여자에게 장로 자격을 주자고 헌의한 건을 부결한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남녀 차별적 헌법에 근거하여 여자에게 치리권을 부여하지 않은 것은 성경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김춘배 목사는 “여자는 조용하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바울이 기록한 것은, 2천 년 전의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말함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선언한 것이 총회에서 문제로 제기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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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총회는 단호하게 “성경의 파괴적인 비평을 가르치는 교역자들과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을 우리 교회 교역계에 제외하기 위하여 총회는 각 노회에 명하여 교역자의 시취문답을 행할 때에 성경비평과 성경 해석 방법에 관한 문답을 엄밀히 하여 조금이라도 파괴적 비평이나 자유주의 해석 방법의 감화를 받은 자는 임직을 거절케 할 일이오며 이미 임직 받았던 교역자가 그런 교훈을 하거든 노회는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제6장 제42조, 제43조(면직조항)에 의하여 처리케 할 일이다.” 라는 입장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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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교단에 속했던 김세윤 교수는 여성안수를 고린도전서 14장이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점을 들어 후대에 남성우월주의자인 누군가에 의해서 바울의 이름으로 삽입ㆍ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성경해석은 여성 안수를 지지하기 위한 해석학적인 주요한 유형들 가운데 속하는 것으로서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그의 세미나에 참석한 합동교단의 여성도들 다수가 지지하였다. 이에 대해서 서철원 교수는 김세윤 교수의 신학적인 탈선을 중심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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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근 교수(칼빈대학교 조직신학교수)는 그의 논문 “‘평등 그러나 복종’의 성경적 이해”라는 논문에서 “1970년대를 기점으로 교회 안에서도 페미니스트 운동의 여파로 여성의 독립적인 가치와 남성과 동등한 성직 안수의 권리를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라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이 가진 해석의 지배적인 원리란 남성과 여성의 ‘동등’(equality) 혹은 남성으로부터 여성의 ‘해방’ (liberation)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이념”이었으며, “이들 이념적 가치야말로 교회 안과 밖이라는 구분을 떠나 역사적인 모든 유형의 페미니스트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공통된 목표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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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교회와 관련하여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관심사는 남성이 독점해 온 성직을 여성과 공평하게 나누어 갖자는 것이며, 그 첫 번째 실천적인 과제가 바로 성경을 그들이 가진 이념으로 재편하고 재해석 하는 일”이 문제점이었음을 지적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을 따라 성경을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결코 페미니즘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현재 여성 안수를 둘러싼 논쟁의 본질은 사실은 특정한 성경 본문을 둘러싼 단순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여성 안수의 이슈를 근본적으로 성경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교회의 고백적 전통에 대한 현대의 이데올로기의 도전이란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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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성경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전통적인 해석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인정하는 건전한 해석의 원칙을 고수하는 일일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교회가 일어서고 무너지는 일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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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더글라스 무(Douglas Moo)와 필립 페인(Philip B. Payne)은 여성 안수를 두고 트리니티 저널(the Trinity Journal)을 통해 논쟁의 글을 실었다. 무는 이 논쟁의 글의 결론으로 “여성이 남성을 가르치거나 남성을 다스리는 권위를 행사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 가지는 관계의 구조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페인은 “디모데전서 2:11-15은 교회에서 여성들을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지도자로서의 활동을 금하는 충분한 근거를 주고 있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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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특수한 국지적, 문화적 조건 하에 있는 에베소교회에게 그 같이 말하였으나 우주 보편적인 모든 교회에 적용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에까지 영속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함으로서 이러한 논리와 논쟁은 이미 한국교회 안에서 역사적으로 첨예하게 대립되는 내용으로 이 문제는 단순히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 차원이 아니라 성경 해석과 성경의 무오성이라는 측면에서 거론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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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쟁의 대립들은 역사적 정통신학을 결정짓는 신앙과 신학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으며, 특히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 권위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대립되었다. 그 대립의 한 중앙에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을 부인하고 성경의 신적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탈선적 해석방법들로 대한 전통적인 해석방법과 현대신학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이러한 대립과 충돌, 논쟁과 대결은 성경과 신학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나타내기 위한 필요한 조치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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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학적 근거에 의해 여성안수를 반대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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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란 곧 성경해석의 원리이자 성경해석에 근거한 사상적 체계이다. 따라서 신학이란 신앙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가 지금까지 교회를 양육해 온 바른 신학을 성경의 이정표로 삼는 일은 자유주의 현대주의적 폐해가 만연한 지금에 더욱 중요한 일이다. 즉 신학적 탈선은 언제나 병든 신앙의 문제로 이어진다. 신학의 내적 원리는 믿음이라면, 외적 원리는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 본문의 의미가 우리의 삶에 어떤 함축성을 갖는가 라는 질문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성경이 교회의 신앙과 모든 실천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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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안수의 문제 역시 성경을 정경으로 전제하는 건전한 성경해석의 원리를 채택하는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문제는 이 문제가 양성평등주의, 비성경적인 성차별주의에 편승한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출발해서는 안된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영성안수를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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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김세윤 교수는 여성안수를 고린도전서 14장이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점을 들어 후대에 남성우월주의자인 누군가에 의해서 바울의 이름으로 삽입ㆍ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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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든지 성경 권위를 훼손하는 비평적인 접근은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바울서신 중에서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성경의 본문에 대해서 바울의 저작을 부정하는 식의 주장이나 성경의 저자들이 틀렸다고 주장하거나, 성경도 문화나 환경의 영향을 받는 상대적인 문서일 뿐이라는 유형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으며 이를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니콜(Roger Nicole)은 다양한 성경해석의 입장을 소개하면서 여성안수를 긍정적으로 보면서 “성경의 본문이 항구적이고 우주적인 구속력을 갖는다는데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내용은 인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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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성경과 전통의 관계에서의 문제 때문이다. 개혁주의 교회는 특별히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있어서는 “규범적 원리”라고 불리는 독특한 해석적 원리를 발전시켜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Ⅰ:Ⅵ에 나타난 대로 성경의 절대성과 충분성, 충족성에 대한 신앙에 근거해서 성경에서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가르치지 않는 것은 교회론의 영역에 일체 도입하지 않았다. 반드시 성경으로부터 확정적인 지지를 받는 것만을 교회의 조직과 예배모범의 요소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규범적 원리는 종교개혁자 칼빈에 의해서 처음 제안되었다. 이러한 규범의 원리들은 성경의 권위를 보존하고자 하는 열정과 의도가 근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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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원리에 따르면 여성안수에 관한 한 여성의 안수를 위한 성경의 승인을 확보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성안수를 허용해야 할 것인지, 금해야 할 것인지는 전적인 성경적인 근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즉 여성안수 허용의 정당성은 성경의 근거와 함께 분명하게 증명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이같은 증명의 의무는 여성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이유를 반대하는 식으로 여성안수를 증명하여 성경적 권위의 근거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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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창조와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여성의 문제 때문이다. 남녀 창조의 기사에서 남자와 여자가 책임과 권한에서 동등하지 않다. 남녀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이라는 존재론적으로는 동등하다. 그러나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이브가 있기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았고 행위언약의 당사자가 되었다. 아담의 위치는 ‘먼저’로써 특징 지워진다. 먼저 됨은 존재의 순서를 말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다. 즉 아담이 언약의 대표자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아담은 이브를 포함한 모든 인류를 위한 언약의 머리가 됨으로써 단순히 시간적으로 먼저 지어진 존재 이상의 이부에 앞서는 권위를 가진 존재가 된 것이다. 남녀간의 권위와 복종의 이슈는 일반적으로, 근본적으로 창조시 언약적 질서에 속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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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관련하여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아무런 역할의 차별이나 구분이 없어야 한다고 해석하면서 이 구절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일정한 역할의 구분을 규정하는 다른 성경과 충돌하는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여성안수자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 보편적 교회에 영속적인 원리라고 믿었다고 보고, 표면적으로 이 성경과 충돌하는 모든 성경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믿는 입장이다. 브루스나 그 브루스의 입장을 취한 김세윤 교수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반대되는 주장을 담고 있는 다른 성경을 다룰 때 전자를 취하고 후자를 부정한다.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이러한 입장은 결코 지지를 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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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경은 아무런 내적인 모순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수용한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의 자유와 여자에 관한 제한규정이라는 상호 모순되는 것 같은 두 가지 언급을 설명하고자 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평등과 일체성의 선언은 교회 안에서의 역할의 구분과 차이에 대한 명령과 아무런 모순 없이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며 오늘날의 교회에도 여전히 권위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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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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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여성안수를 금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이 명확하게 가르치는 바라고 믿으며, 여성의 성직안수 금지는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라는 규범을 존중하는 해석적 노력의 결과로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이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로서는 동등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권위와 복종의 질서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러한 남녀의 언약적 권위와 복종의 질서를 무효화 하거나 소멸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며, 이는 이미 밝힌바 예장 합동교단의 신학적 입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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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WEEK | 설교목록 | 새벽말씀 |

14:26-40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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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현 목사

[20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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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 가운데 행해지는 은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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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은사는 질서를 따라 행해져야 합니다. 질서 있는 모습인지 아닌지 알려면 방언이든 예언이든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분변(分辨)되고 있는지 여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어지러움과 싸움이 필연적인 결과로 따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성품과 같이 어지러움이 없고 화평이 다스리는 곳이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은사를 지닌 두 세 사람’에 의해 제재를 받아야 합니다. 특히 예언의 경우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철저히 질서 가운데 행해져야 합니다. 여기서 질서란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 것입니다. 제재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기 식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시대나 사람의 필요를 향해 말씀을 성경대로 해석하고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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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설교는 예언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아무개 목사가 말했다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여러 사람들을 통해 말씀의 메시지를 완전하게 드러내십니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항상 보완될 여지를 가지며, 또 발전될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의 권위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데에서 나오지만 더불어 그 권위는 다른 목사들과 신학자들의 가르침으로 제재를 받아야 합니다. 하물며 일반 성도들의 가르침이야 더 많은 검증이 필요치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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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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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 활용에 있어 바울은 여자들의 경우를 언급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말하는 것과 관련하여 여자들의 문제를 꺼낸 것은 ‘가르치는(=예언) 문제’를 다룬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문제가 고린도의 상황에 국한되어 있다고 말하며 우리 시대에는 맞지 않다고 젖혀둡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라고 말하며, 더욱이 “율법에 이른 것 같이”(창 3:16)라는 말을 덧붙여서 이 문제가 모든 시대에 적용됨을 분명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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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여자가 교회 안에서 잠잠해야 함을 여자가 남편과 가지는 관계에서 풀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하와에게 이런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 3:16). 오해하지 말 것은 범죄 이후 여자가 비로소 남자에게 복종하게 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11,7-9). 이 형벌은 본래 하와가 아담에게 순종해야 했음을 상기시켜줍니다. 하나님은 이 형벌을 통해 아담을 떠나 스스로 권위를 행사한 하와를 제자리로 돌리셨습니다. 그럼으로써 하와가 ‘다시’ 본래의 권위 질서로 돌아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두 사람의 바른 권위 질서만이 죄를 막는 길임을 아시고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제까지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자율에 맡기셨는데 이제부터는 그 관계 질서가 율법이 되게 하시어 ‘타율로도 지켜지게 하셨고’, 이로써 그들로 죄를 멀리하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형벌 안에 ‘살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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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여자는 남편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한 가정에서 ‘남편의 권위 아래 있는 여자’가 다른 가정에서 ‘다른 여자의 머리가 되는 남자’를 가르치는 것은 모순입니다. 가정의 영적인 질서는 남편이 우선이요 그 다음이 아내이며, 그 둘은 한 몸으로 움직이기에 교회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 상황이면 그 말하는 자는 우선 남편이어야 합니다. 남편이 교회를 나오지 않는 상황이면 더욱이 여자의 우선순위는 남편의 구원이지 다른 남자를 가르치는 일이 아닙니다. 다른 남자들이라고 할 때 모든 남자는 아닙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들은 여전히 부모의 권위 아래 있으며, 가정의 머리가 아닙니다. 또 무엇을 알지 못하면서 남편의 생각을 제쳐두고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여인에게 부끄럼입니다. 반드시 그 여인은 무엇을 배우려 할 때 남편에게 먼저 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초대 교회 상황에서 여인들이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에게 먼저 물어야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교육 여하를 떠나 창조 질서에 기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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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오늘날 여자는 일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합니까? 이 문제에서 칼빈은 고린도 교회가 잘 확립되어 있어서 모든 일이 규칙적으로 돌아갈 수 있던 상황이었으며,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이런 상황에 제한시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여인이 말할 수 있는 일이 생겨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예외적 상황은 ‘선교지’나 미조직 교회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외일 뿐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고 조직이 갖추어진 후에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는 교회로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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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권리는 교회에서 발언권을 가진다고 신장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교회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교회 질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갑니다. 그 말씀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분열이 생깁니다. 복음이 여자의 속박을 풀어주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게 해 주었기에 여인들이 할 일은 그 자유로 가장 여성다울 수 있는 모습과 역할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굳이 성경이 여성의 역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복음을 믿는 여인들이면 교회에 세워진 하나님 질서를 누구보다 존중해야 합니다. 그 질서 너머의 권위를 행사하여 자기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고(갈 5:13), 약한 사람들에게 거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고전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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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피해 의식은 세상의 왜곡된 풍토로 인한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질서대로 세워진 교회의 법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또 교회가 세상의 세태를 따라 여자들에게 복종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 피해 의식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이런 식의 억압은 교회 안이든 밖이든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인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몰아 부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의 명령입니다(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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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교회는 하나님의 성품이 다스려 가는 곳입니다. 교회는 어지러움과 싸움이 다스리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이 주의 말씀 앞에 굴복하길 소망합니다. 여자의 위치에 대해서 교회에 세워진 질서가 있는데, 요즈음 움직임은 뭐든지 투쟁으로 권위를 쟁취하려 합니다. 그래서 얻는 것이 무엇인지… . 하나님이 세우신 것을 세상의 풍토에 맞게 바꾼다 하여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세상은 자기식대로 하다지만 교회 질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워져야하지 않습니까? 주께서 세우신 가정의 기초 위에 교회가 질서 있게 운행될 있도록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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