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1. 5. 추수감사 주일낮예배
설교제목 : 신자의 은혜
성경본문 : 사무엘하 9 :1-8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아무리 귀한 선물을 준다해도 늘 불만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받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된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철저하게 은혜를 입은 자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를 핍박하였던 바울이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까?
이러한 변화는 은혜라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자기의 자기 됨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주의 일을 하는 것이나 주의 사도로 하나님의 일을할 때 종의 모습을 감당치 못하겠다는 겸손한 자세로 일을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가장 고통스러운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했던 기도 중에서도 바울이 깨달은 것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후12:9)고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사는 자임을 확인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주의 은혜라고 하는 철저한 은혜 의 사상에 젖어 있었든 것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신자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어떻게 죄로부터 구원받음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매일 매일의 삶에 대한 축복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우리가 가진 것이 없어도 기쁘고, 매를 맞으면서도 웃을 수 있고, 욕을 먹으면서도 감사 할수 있는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신자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주권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진행되며, 하나님의 은혜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가 바로 신자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신자들이 자꾸 넘어지는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드러나고 자기 주장이 나오고 자기편을 만듭니다.
교회에 와서 무엇 때문에 큰소리가 나오고 싸웁니까?
계파니 지역이니 기득권이니 하는 것이 왜 나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왜 큰 소리가 나오고 기분이 나쁘니 상처를 받았니하는 표현이 거침없이 나와서 교회의 분위기를 흔들어 놓습니까? 내안에 은혜가 메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누구에 의해서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가를 깨닫게되면 큰소리를 칠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고 누구에 의해서 이교회가 오늘까지 지탱하고 있는가를 바르게 안다면 교회 안이 냉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피값으로 세운 주님의 몸으로 구원을 얻은자들이 모여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장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은총, 은혜라는 말이 세 번 거둡 나옵니다. 은혜란 말의 뜻은 낮은 자에 대한 높은 자의 대가없는 혜택과 특별한 사랑을 말합니다. 이 사랑을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이 사랑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랑입니다. 되풀이 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세상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 헤세드의 사랑을 구약의 호세아 3:1-3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 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부정하고 음란한 여인고멜, 세상 남자와 입맞추며 살다가 버림받은 여인 고멜을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무조건 사랑하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바로 이때 사용되었던 단어가 '헤세드'입니다. 비록 타락하고 더럽게 살아서 요즘 같으면 모든 여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며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여인이였지만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일방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헤세드 즉 은혜입니다. 이것은 값없는 사랑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잘하고 잘못한 것을 따지고 분별하여 재판해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더러운 것이라도 무조건 이유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남자와 입맞추던 여자를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라는 말이 얼마나 깊이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예수께 명령한 것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인간이란 고멜 과 같습니다. 죄의 목록은 다를지 모르지만, 아니 그런 여인보다 더 더러울 수도 있습니다.
자존심 상하게 고멜에 비교하느냐고 화가 나십니까?
주님의 말씀을 상기해 보십시오.
마태복음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런 모습이 신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헤세드입니다. 사랑할수 없는 사람들을 무조건 사랑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사울 왕의 신하였습니다. 다윗은 왕에게 인정을 받아서 딸 미갈과 결혼을 하여 사울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윗이 백성들로부터 점차 인기를 얻고 왕보다 더 높임을 받게되자 사울 왕이 질투를 하며 악을 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사위며 신하인 아들과 같은 다윗을 죽이려고 계획을 합니다. 그것도 간접적으로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고 다윗이 조용히 수금을 타고 있을 때 정면에서 창을 던집니다. 공교롭게도 두 번이나 창을 던졌지만 빗나갔습니다. 하는수 없이 다윗은 궁궐에서 도망을 나와 광야를 헤매는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자신의 충성된 신하며 사위인 다윗이 백성들에게 칭찬을 듣는다는 이유때문에 죽이겠다니 말이나 됩니까? 이것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이제 다윗에게 사울은 왕도 아니며 장인도 아니고 원수입니다.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패륜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생각하면 원수이지만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는 둘도 없는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사랑했습니다. 성경에서 아름다운 우정을 들라면 단연코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말할 만큼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요나단도 다윗을 사랑했는데 사무엘상 18:3에 보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관계에 또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므비보셋입니다. 사울 가문의 마지막 핏줄이며 요나단의 아들이었습니다. 다윗에 입장에서 본다면 그 역시 악의 씨앗이며 원수인 사울 왕의 핏줄입니다. 원수 사울왕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기에 제거해 버려야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윗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사랑했기에 그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사랑합니다.
사울의 손자로 보지 않고 요나단의 아들로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 신앙적으로 보느냐, 불신앙적으로 보느냐 에서 다윗은 언제나 긍정적인 쪽이었고 신앙적인 쪽에서 보았습니다.
다윗 자신이 사울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줄줄이 원수를 갚겠다고 칼을 뽑고 휘두를 수 있습니다. 옛일들을 기억하며 공개처형을 해도 많은 사람들의 당연한 호응을 이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릅니다.
악을 품기 전에 은혜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칼을 뽑기 전에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원한에 대한 복수를 하기보다 은혜에 이끌리어 관용으로 처리를 합니다.
시편116:1-8을 다같이 함께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 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 하리로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 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그래서 12 절에가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하고 받은 은혜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런 신앙을 '은혜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지옥의 고통이나 슬픔을 만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 입은 사실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꾸 원망이 앞서고 사소한 것들도 지우지 못하며 왜 용서를 못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더 진한 예를 든다면 사울과 다윗의 숨박꼭질 같은 살인 전쟁을 추적하면 은혜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다니는 중에 얼마든지 대항해서 싸울 기회가 많았습니다.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있었고 충분히 저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윗은 신앙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울 왕이 비록 지금은 타락하고 분별력이 없어 살인과 학살을 위하여 눈을 부라리고 있지만 그도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주신 종으로 하나님께서 손을 대시고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실지언정 내가 기름부은 종을 손 댈 수 없고, 미워할 수도 없다는 믿음 때문에 오히려 싸우는 것이 아니라 피해 다니면서 끝까지 대항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해석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본문에 등장하는 므비보셋을 다윗은 사랑하고 왕자같이 대접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왕의 상에서 매일 식사를 함께하고 옛날 사울의 밭을 모두 다 넘겨주고 재산을 찾아주었으니 이것이 은총이며 은혜인 것입니다.
좋을 때 사랑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결혼식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응급실에서 사랑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나보다 약자를 사랑하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는 그 사람을 받아들이며 용서하며 사랑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다시 본문 1절, 3절, 7절에 의하면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은총을 경험한 사람만이 은총을 베풀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베들레헴의 목동에 불과한 그가 유대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고통이 있었고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왕의 보좌에까지 앉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왕위에 오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으로 믿었습니다.
지난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그는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받은 은혜를 이제 므비보셋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므비보셋 개인만을 보면 그는 원수의 혈통이며, 악의 씨앗이고, 절뚝발이입니다. 전혀 쓸모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오늘 우리는 아무 쓸모없는 죽은 개같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고귀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피값으로 모든죄에서 속량함을 입고 하나님에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자 들입니다. 그러므로 다윗같이 이 은혜를 내 형제와 우리 이웃들에게 나누고 베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헷세드요 은혜입니다. 이은혜를 가슴속에 항상 간직하여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다윗같이 노래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사는 성도는 복받은 성도이고 승리하는 성도입니다.
옛날 중종조의 명신으로 성격이 온건 겸허한 반석평(潘碩枰1540)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남의 집 종으로 태어난 사람이였습니다. 종의 신분이기 때문에 인간이로되 인간 취급을 받지못하고 살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멸시하고 짓밟는다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노력을 해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을하고 어려서부터 악착스럽게 자신의 인격적인 성장과 학문적인 성장을 위하여 남모르게 자신을 다듬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주경야독으로 모든 것을 극복해 가면서 열심히 익힌 그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된 주인 이참판은 아무 조건도 없이 그의 신분인 종의 문서를 불태워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면서 아들이 없는 어느 양반집 수양아들이 되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예전엔 감히 엄두조차 낼 수도 없었던 과거에 응시할 수가 있었고 그 결과 그는 당당하게 급제하여 출세를 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형조판서로까지 승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이었습니다. 그가 한양 거리를 지나다가 옛 주인 이 참판의 아들 이오성(李五成)이 거지같이 남루한 옷을입고 길을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그 사람에게 뛰어가 큰 절을 하며 "어르신 저를 몰라모시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종 반석평이라는 놈이올시다"라고 했습니다. 백주 대낮 한양 대로에서 형조판서 대감이 거지같은 사람앞에 넙죽 엎드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예사로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그당시 관레에 의하면 자기의 옛 신분을 밝힌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피 눈물로 쌓아올린 자기의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잘못하면 신분을 감추었다는 죄명으로 온갖 수모와 고초를 겪고 다시 옛날의 신분으로 환원될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찌 그만한 사리를 모를 사람입니까? 그러나 그는 모든 것 이전에 은혜를 입었으니 은혜를 갚아야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결국 뒷날에 이 엄청난 반 대감의 인격에 감동한 고관들의 주선으로 임금님의 특별 명령으로 그의 사표는 반려되었고 오히려 그가 추천한 이참판의 아들 이 오성이 사옹원 별좌라는 벼슬을 얻게 되었다는 아름다운 미담이 우리 역사 속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받은바 은혜를 기억하고 은헤를 보답하기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감사하는 신앙은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그래서 다윗같이 내가 무엇으로 하나님께 감사할까? 생각하며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알고 가슴 깊이에서 울어나오는 뜨거운 감사가 내 가슴속에서 넘쳐나는 우이제일교회 교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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