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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의 경륜과 그리스도의 재림

하나님아들 2014. 7. 19. 00:05

 

하나님의 경륜과  그리스도의 재림

 

- 도너반 -

 

                                                 


행16:30   "선생님들이여,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이까?"

 

여기서 어떤 사람이 “내가 오늘 구원을 받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고 대답할 것이다.  이 대답은 사도 바울이 대답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다른 구절을 보자.

 


마19:16   "선한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하리이까?"

  여기에서 동일한 질문이 나온다.  이 때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이 사람에게도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겠는가? 아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네가 생명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19:17)
고 하신다.  그렇다고 오늘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갈이 “영생을 얻으려면 계명을 지키십시요”로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1.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라

  만일 우리가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못한다면 굉장히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아마 위의 동일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몇가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바울이 틀리게 말했든지, 예수님이 틀리게 말씀하셨든지, 아니면 둘 다 틀린지, 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지 않은 목회자들이나 교사들은 자신의 의견이나 추측, 생각 등(예를들어 예수님이 여기서 계명을 지키라는 것은 “믿으라”는 뜻이다 라는 등등)을 말씀위에 자신의 생각이나 은유적 해석으로  덧붙이고 있다.   이런 모순되는 성경 구절들을 읽을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황하여 그들의 목회자들이나 교사들에게 찾아가지만 그들은 이상한 설명들을 덧붙여 더욱 혼란스럽게 하거나, 사사로운 해석을 함으로써 정답을 얻지 못하게 하고 있다.

  위의 두 구절은 같은 질문이지만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대답이 나온 것임을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한다.  문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피의 속죄를 이루시기 이전에는 “계명(율법)을 지킴으로써 영생을 얻고”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  이처럼 구원받는 방법은 항상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19;16-22절의 영생을 얻고자 질문했던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내가 너희 죄를 위하여 피를 흘리니 그  보혈을 믿으라 라고 말할수 없으셨다 왜냐면 피를 흘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십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청년은 다 지켰다고 말햇지만 실은 그렇지 못했다. 내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했다고 말하는 청년에게 그렇다면 너희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라며 증명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청년은 실행하지 옳기지 못했고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비슷한 경우를 로마서와 야고보서에서 더 찾아보자.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약2:24    사람이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니라.

엡2:8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약2:20,26 오 허황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인 줄 네가 알고자 하느냐?...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니라.

  이 두 개의 상반된 주장 가운데 어떤 것이 옳은가?  많은 교사들이 바울이 기록한 믿음은 행위를 포함한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 성경을 잘 모르는 목사들은 야고보서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함으로써 구원을 얻기 위한 행위를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혼동시켜 구원의 확신마저 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그대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즉 약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널리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누구에게 문안하고 있는가?  읽는 그대로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이다.  여기서 “열 두 지파”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의 주석서에서는 이 구절을 그리스도인에게 교리적으로 적용하곤 하는데, 우리가 이 구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계14:12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인 이들은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그 믿음에다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행위가 있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은혜시대에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지만 대환란 기간주에는 믿음과 이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

  또 레위기 11장에서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구분하고 있으나, 디모데전서 4:3-4에서는 음식을 믿음으로 먹으면 괜찮다고 한다.

  우리는 “시대”와 “대상”(‘유대인’과 ‘이방인’과 ‘하나님의 교회’)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아무도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전10:31,32)  우리가 믿음 없이 사람의 교리나 사상을 바탕으로 두고 성경을 읽는다면 억지로 풀거나 모순을 접할 때 당황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믿지 않는다면 “셩경은 왜 이리 모순이 되는 구절이 많은가?” 하고 혼동스럽게 되어 성경은 하나의 도덕 교과서 외에는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게 될 것이며, 그 결과 사사로이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사탄의 편에 서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된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사탄은 아주 영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사람을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이다.  사탄은 이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켜 제시했고, 심지어는 예수님께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시험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할 때 시편 91편을 인용하면서 두 가지 잘못을 범했는데, 첫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킨 것이고, 둘째로는 그 말씀을 엉뚱한 곳에다 잘못 적용시킨 것이다.
  마태복음 4:6에서 사탄이 기록되었으되 '... 너를 받들어서 어느 때라도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고 하였느니라."
하며 말한 이 구절은 시편 91:11,12의 인용이다.  시편 91편의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련된 구절이다.  이러한 잘못된 적용은 그가 말씀을 변개한 것을기반으로 삼는데, 시편91:11,12의  이는 그가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시어 너의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임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요라는 말씀에서 "모든 길을" "어느 때라도"라고 바꾸어, 이 일이 모든 때에 해당되는 것처럼 말한 것이다.  이런 방법, 즉 성경을 변개시키거나 성경의 모든 구절을 맘대로 적용하는 것은 사탄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사탄의 이러한 잘못된 성경 구절을 통한 시험에 예수님은 적확한 성경 말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라고 이기셨다.  만약에 이런 사탄의 시험에 예수님이 응하셔서 사탄이 첨가한 "어느 때라도 "라는 구절을 믿고 예수님이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졌더라면 어떻게 되셨을까? 물론 추측이지만 인성을 지니셨던 예수님은 인류의 대속을 위한 예언을 성취하지 못하시고 죽으셨을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때 ..


2.  하나님께서는 나누셨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2:15)
킹제임스 성경 이외의 어떤 다른 한글성경에도 “공부하라”(study), “나누라”(divide)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른 변개된 성경들에는 “읽어라, 애쓰라”,“분별하라, 옳게 사용해라”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인 올바른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혼동스럽게 되어 전혀 알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어떻게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는가?”를 배워서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모순이 없다는 것을 알고자 한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기 원한다면 공부해야 한다.  부끄러움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올바로 나누어야 한다.  아주 경건한 설교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약과 구약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히7:12    제사장 직분이 바뀌었다면 율법도 반드시 바뀌어야 하리니
히7:22    예수는 이처럼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고후3:6-16 또한 그 분은 우리로 새 언약의 능력있는 일꾼이 되게 하셨는데, 이는 법문으로 한 것이 아니고 영으로 한 것이니, 법문은 죽이고 영은 살리기 때문이라. 그러나 돌판에 기록되고 새겨진 죽음의 직분이 영광스러워서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용모의 영광, 즉 없어져 버릴 영광 때문에 그의 얼굴을 주목할 수 없었거늘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스럽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에 영광이 있다면 의의 직분에는 영광이 더욱 많으리라. 이전에는 영광스러운 것이었을지라도 그것을 앞지르는 영광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영광스럽지 못한 것이라. 없어져 버린 것도 영광스럽다면 영속할 것은 영광이 훨씬 더 많으리라. 정녕 우리가 그러한 소망을 가진 것을 담대하게 말하노니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이 없어질 것의 종말을 지켜 보지 못하게 하려고 자기 얼굴에 수건을 가리는 것같이는 아니하노라.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옛 언약을 읽을 때에 그와 같은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남아 있으나,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지는 것이라. 그러나 오늘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덮는도다. 그렇지만 주께로 돌아서면 그 수건은 벗겨지리라.

  이 구절들에서 불 수 있듯이, 지나간 “옛 언약”이 있고 오게 될 영광스러운 “새 언약”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두 언약은 다르지 않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예를 들면 “구약의 모든 성도들은 신약의 십자가, 즉 오실 예수님을 앞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며, 신약의 성도들은 갈보리의 십자가, 즉 오신 예수님을 뒤로 바라봄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런 주장을 증명할 만한 구절이 하나도 없다.  단지 구약에서는 신약적 구원의 “모형” 만을 볼 수 있다.  모형이 있다고 해서 그 모형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대상에 따라 각 시대마다 사람을 다루시는 방법을 바꾸신다.  만약 성경에서 한 구절 취하여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은 아무도 없느니라.는 구절을 잘못 해석하여 “구약이나 신약이나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똑같다”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무시하고 한 쪽에 치워놓는 일도 서슴없이 할 것이다.  예를들어 골로새서 1:14의 개역 한글판 성경과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을 비교해 보라.)

1.  히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고 두려움으로 행하여 방주를 예비함으로 자기 집안을 구원하였으니, 그것을 통하여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에 의한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을 미리 내다봄으로써 구원받았는가?  노아가 십자가로 구원받았다는 구절은 한 구절도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노아가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2.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카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의로운 자라고 증거를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을 인정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 아직 말하고 있느니라.
  아벨이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구절이 있는가?  그는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바쳐야만 했다.  그가 믿음으로 한 것은 사실이고, 노아도 믿음으로 행하였으며,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즉 “이렇게 하라”는 말씀을 믿는 믿음이었다.  노아는 방주를 지었고 아벨은 짐승을 잡아 바쳤다.


3.  베드로전서 1:9-12을 보자. 이는 너희 믿음의 결과, 곧 너희 혼들의 구원을 받음이니라. 이 구원에 관해서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에 관하여 예언한 선지자들이 열심히 조사하고 살펴보던 것이며, 그들 안에 계셨던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다가올 영광을 미리 증거하실 때, 그 영이 어느 때, 어떤 시기를 지시하시는지 탐구하던 것이니라. 그들이 행한 사역들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임이 그들에게 계시되었고, 이것이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으로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이제 전해졌으며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들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선지자들의 안에 있어서 십자가의 사건을 예언하도록 하셨는 데 여기서 보면 이 예언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 십자가 사건은 그들이 예언하고 알았지만 이 사건이 그들에게 적용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앞으로 누군가가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미리 예언을 했지만, 그 선물이 그 자신에게 주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바울이 계시한 “이방인이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이 된다”는 내용을 열 두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알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엡 3:1-6).

  롬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이는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소망을 지니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되어 있다.  즉 구약의 모든 내용은 우리에게 “교훈”은 줄 수 있으나, 그것들이 모두 지켜야 하는 “교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

1. 구약과 신약에서의 성령의 역사

  언약신학자들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구원받는 방법은 똑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을 올바로 알게 된다면 이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구약과 신약에서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이 틀리다.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성도 안에 내주하시고 그 성령이 우리를 인치셨다(엡 4:30).  교회시대의 성도들은 몸이 구속되는 그 날까지 인침을 받은 것이다.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는 것은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면 성령이 떠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완전히 구속을 받을 때까지 죄로 인해 성령이 떠나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롬 8:21, 빌 3:21).
  하지만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임하기도 하고 떠나기도 한다.

삼상10:10 그들이 그쪽 산에 이르렀을 때, 보라,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만났는데, 하나님의 영이 그(사울)에게 임하니 그가 그들 가운데서 예언하더라.
삼상16:14  주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주로부터 온 악령이 그를 괴롭히더라.
  사울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떠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시편 51편의 다윗의 회개의 기도에서도 성령께서 떠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의 임재로부터 나를 내어쫓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어 가지 마소서.(시51:11)이와 같이 다윗은 성령을 거두지 말아달라고 기도했다.  우리는 섯경 어디에서도 바울이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바울은 성령이 구 속의 날까지 인치셨으며, 자신은 오직 상을 위해 다려갈 뿐이라고만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성령이 똑같이 역사할 수 있겠는가?  구약에서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  환란 때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믿음 이외에도 행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교회시대는 선행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진다고 했다.  이처럼 신약과 구약은 성령의 역사하심이 다르다.

성령이 여러 경우로 함께 하시는 예
성령이 계셨다가 죄 때문에 떠나가는 경우
사울, 환란성도
성령이 계셨다가 죄 때문에 떠났다가 돌아오신 경우
삼손
성령이 들어와  죄를 지어도 더나지 않는 경우
다윗, 신약성도

  이와 같이 우리는 각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멧세지가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아담에게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
● 노아에게 : “방주를 지어라.”
● 아브라함에게 : “고향을 떠나라.”
● 모세에게 : “모든 율법과 계명을 지켜라.”
● 오늘날 우리에게 : “너희의 모든 행위(율법)를 버리고 오직 믿으라.”
● 환란때 : “끝까지 견뎌내라.”
● 천년왕국에서 : “모든 사람이 주를 알고 있으므로 복음을 증거하지 말라.”

2. 안식일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반드시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으니까 우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는데,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다 지켜야 성경을 잘 믿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을 가장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구약의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없으면서도 지킨다고 하나, 사실은 자신의 편리한 구절들만을 지키고 그것을 의로 삼아 남을 판단하며, 자신이 지키지 못하는 구절은 무시하거나 영적으로 해석한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킨다.  여기서 안식일은 일요일이 아님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가끔 유대인의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킨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토요일이다.
또 나는 그들(유대인)에게 내 안식일들도 주었으니 나와 그들 사이에 표적이 되게 하고 그들로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는 것이라.(겔20:12)
  여기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을 위한 “표적”으로, 이방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다.  사도행전 20:7과 고린도 전서 16:2에서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첫 날”을 지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부활하심을 기념하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일주일이 시작되는 첫째 날에 모인다.  이때 주의 첫째 날을 지키고 안지키는 것은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지만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을 안지키면 구원을 잃어버렸다.  민수기 15:32-35에는 안식일에 장작을 주웠던 사람이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는 심판을 받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일주일의 첫 날을 지키는 것은 그 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나 바울이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적은 한 번도 없다.
  로마서 13장을 보면 명확하게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9절과 10절에서 율법을 나열하는 가운데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이 빠진다 그것은 "너는 간음하지 말지니라, 너는 살인하지 말지니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너는 탐내지 말지니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가운데 다 들어 있음이니라.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안식일에 관한 계명이 빠져있다.  성령님께서 실수로 빼셨다고 생각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율법에 집약되는 것이 아니며 “사랑하라”는 계명도 구원을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안식교인들은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어째서 안식일을 언급하지 않았는가를 깨들아야 한다.

3. 예배

  구약에서와 신약에서는 예배드리는 장소도 틀리다.  구약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몇 명만 모여도 아무 곳에서나 아무 상관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이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은 특정한 장소의 건물에서만 예배를 드렸다.
  신약과 구약은 예배드리는 방식도 다르다.  구약에서는 그 규례방식절기도 지켜야 하나,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자유스럽게 예배를 드린다.  예물을 끝날 때 드려도 되고 먼저 드려도 되며, 찬송을 시작할 때 불러도 되고 끝날 때 불러도 된다.  우리는 율법대신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희생제물 대신에 단 하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모세와 같은 인간 중보자(제사장)도 필요없다.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중보하신다.  이제는 레위지파를 따른 제사장들이 없어졌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이 되었다.
  이처럼 신약과 구약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다르고 받은 멧세지도 다르면 예배 방법도 다른데 어떻게 구원받는 방법이 같을 수 있겠는가?  성경을 올바로 나누는 것만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
구약
신약
예배장소
예루살렘
아무곳이나
하나님이 계신 곳
성전 건물
그리스도인
예배의식
율법에 의거
자유스럽게
예배방식
의식에 따라
영과 진리로(요 4:24)
제물
짐승의 피
그리스도의 피(히 9:12)
제사장직
레위지파
모든 그리스도인(마 27:51)

4. 구약에 있는 혼들과 신약에 있는 혼들이 가는 곳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 중에 특히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를 알아보면 구약과 신약은 구원받는 방법 외에도 다른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십자가 이전에 죽은 사람이나 이후에 죽은 사람이나 육신은 모두 무덤으로 가는 것을 안다.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아무리 영적으로 성숙되었어도 우리의 욕신에는 선한 것이 없기 따문에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몸은 무덤으로 간다.

  구약에서 혼은 몸에 붙어있었다.
  또한 어떤 혼이 불결한 짐승의 시체나, 불결한 가축의 시체나, 불결한 기어다니는 것들의 시체나, 어떤 불결한 것을 만지고 그것이 그로부터 감추어져 있을지라도 그는 불결하게 되며 죄가 있느니라.(레5:2)
  구약에서는 사람의 혼과 몸이 붙어있었기 때문에 육이 더러워지면 혼이 피의 속죄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구약에서 악한 사람이 죽게되면 몸은 무덤으로 가고 혼은 지옥으로 갔다(시 9편).  십자가 이전이나 이후나, 악한 자나 속죄함을 받지 못한 자의 혼은 지옥으로 가고 몸은 무덤으로 간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몸은 무덤으로 갔지만 혼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것을 본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신들의 성경에 지옥을 “음부”나 “무덤”으로 변개시켜 무덤과 지옥이 같다고 가르친다.  즉 혼과 몸은 모두 무덤으로 가서 소멸된다고 가르친다.
  그녀의 혼이 떠나려 할 때 (이는 그녀가 죽었음이라.) 그녀가 그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창35:18)
  라헬이 아이를 낳다가 산고로 죽게 되었는데 라헬의 혼이 그녀의 몸에서 “떠나려 할 때”(depart)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라헬의 몸 안에 혼이 있었기 때문에 몸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혼이 떠나는 것이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사람을 혼이라고 부른다.  아담은 처음 지어졌을 때 “살아있는 혼”(living soul, 개역성경에는 “생령”이라고 변개시킴)이었다(창 2:7).  그런데 아담이 범죄한 이후 혼과 몸은 붙어버려 몸이나 혼은 둘 다 사람을 지칭하게 된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는 않으리니, 이는 그도 육체임이라. 그래도 그의 날들이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6:3)  그래서 모든 사람은 그의 인격을 나타내는 혼(자아)이 몸에 붙어버렸기 때문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대체로 육신적인 것(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생의 자랑)을 추구한다.

  구약에서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한 의인의 혼은 육신을 떠나서 안식하는 곳으로 간다.
  사울이 그녀에게 말하기를 "그가 어떤 모양이냐?" 하니 그녀가 말하기를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외투를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은 그것이 사무엘인 줄 깨닫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그러자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네가 나를 불러 올려 나를 어지럽히느냐?" 하니 ...(삼상28:14,15)
  이 말씀에 보면 사울은 사무엘이 죽자 그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신접한 여자를 통해서 죽은 사무엘의 혼을 만나려고 하는데, 이 때 사무엘의 혼을 위에서 “내려오게”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올라오게”(bring up) 해달라고 청한다(삼상 28:11).  특히 15절에서 사무엘은 "어찌하여 네가 나를 불러 올려 나를 어지럽히느냐?"라고 하며 자신의 안식이 불편해졌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누가복음 16장에서는 구약의 의로운 혼들이 쉬는 안식처를 지하의 “아브라함의 품”(낙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다가 그 거지가 죽었는데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겼고 그 부자도 죽어서 장사되었더라(육신이 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에(혼의 느낌이 있다) 눈을 들어(혼의 눈이 있다) 저 멀리 아브라함을 보았더니 나사로가 그의 품에 있는지라.  그가 소리질러 말하기를(혼의 입이 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사로를(혼은 기억하고 있다) 보내시어 그가 자기 손가락 끝에(혼의 손가락이 있다) 물을 적셔 내 혀(혼의 혀가 있다)를 식히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라고 하니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아이야, 너는 네 생전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나쁜 것을 받았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제 그는 위로를 받고(낙원에서) 너는 고통을 받느니라(지옥에서). 이 모든 것 외에도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커다란 구렁이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하여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오고자 하여도 올 수 없느니라.'고 하더라.(눅16:22-26)
  따라서 이 지하에는 “아브라함의 품” 또는 사무엘상 28장에서 “안식하는 곳”이라고 불리는 곳과 “지옥”을 사이에 두고 “커다란 구렁”이 있다.  구약에서는 의로운 자가 죽으면 그 혼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기다리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 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의 구원받은 혼은 지하 안식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고 위로 올라간다.
내가 십사 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고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시느니라.) 그 사람이 셋째 하늘로 끌려올라 갔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끌려올라 가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허락되지 않은 것이로다.(고후12:2-4)
  이 구절에서 한 사람이 “낙원”에 갔는데, 그 곳은 “셋째 하늘”에 있는 낙원이다.  2절과 4절에 “끌려 올라 간다”라는 말에 유의하라.  또한 그곳은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곳으로, 바울은 그곳에 가기를 아주 갈망하고 있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내가 육신으로 산다면 이것은 내 수고의 열매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으니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갖는 그것이 훨씬 좋으나(빌1:21-23)
  이 말은 바울이 얼마나 주님을 보고 싶어 했던지 형제들을 위해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과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사이에서갈등하고 있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만일 그가 죽어 그리스도가 없는 아래로 내려간다면 이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성도들은 반드시 새 육신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하여 이 썩을 몸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반드시 죽지 아니할 몸을 입으리라.(고전15:51-53)  또 데살로니가전서 4:15-17을 보라.  이 일은 휴거 때에 일어나게 되며, 이 몸은 그리스도의 몸(빌 3:21)과 같은 영적인 몸으로서 죄를 짓지도 않고, 가장 완전한 육체로서 원하는 곳은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먹기도 하며 벽을 통과하기도 한다(요 20:14,17,19,25).
우리가 아는 것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큰 집, 즉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이라.. 우리가 자신에 차 있고 정녕 몸에서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것이라.(고후5:1-8)
  예수님께서 왜 니코데모에게 거듭나유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는지 아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고 용서받고 거듭나지 않는다면 그가 아무리 착하다 해도 죄를 지으면 혼이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앞에서 구약의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죽어야만 몸과 혼이 분리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분리”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을 때 아담은 즉시 죽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가 분리된 것이었다.  그 후 약 900년 후에 그의 육신이 죽었는데, 이것은 육체와의 분리, 즉 둘째 사망이다(계 20:14). 죄는 모든 것들을 분리시키고 단절시킨다.  하나님, 사람들, 성도들, 친구들, 그리고 육신과도(죽음으로) 단절시킨다.

구약과 신약의 죽은 혼들이 가는 곳
약한자
의로운자
구약
무덤
지옥
무덤
아브라함의 품(지하)
신약
무덤
지옥
무덤
낙원(셋째 하늘)


5. 영과 혼과 몸의 차이점

  또한 너희가 그의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그리스도의 할례로 육신의 죄들의 몸을 벗어버린 것이라. 너희가 침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도 그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너희의 죄들과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살리셔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셨으니(골2:11-13)
  이 구절에서 보면 이미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할례로 육신의 죄들의 몸을 벗어버린 것이라고 하였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영과 혼과 몸을 가르는 영적인 수술을 받은 것이다.  이때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모든 사실들이 나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화평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살전5:23)
  그런데 변개된 성서에는 “영혼” 혹은 “심령”, “마음”등으로 임의로 번역하여 이분법을 말하고 있는데, 올바른 성경에는 어디를 보아도 영과 혼과 몸으로 정확하게 구분되어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양 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히4:12)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니라...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19,23)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에 의하지 않고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딛3:5)

  다음은 영과 혼과 몸에 대한 구분이다.

1. 영
  거듭나기 이전에 영은 죽어 있다(엡 2:1-3).  거듭날 때 영은 살아난다(요 3:6).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요3:6)
... 이는 법문으로 한 것이 아니고 영으로 한 것이니, 법문은 죽이고 영은 살리기 때문이라.(고후3:6)
2. 혼
  혼은 “자아”이다.  그러나 혼은 추상적인 의미의 자아가 아니라 실제적인 인격체이며, 구원받는 것은 혼이다.  구원받지 못한 혼이 죽으면 지옥에 간다(눅 16:19-31)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벗어 버리고, 너희 혼들을 구원할 수 있는, 심겨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1:21)
3. 몸
  몸(육신)은 온갖 죄의 정욕을 일으킨다(갈 5:16-22).  몸은 썩을 것이며(고전 15:42-54), 그 안에는 선한 것이 없다(롬 7:18).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것을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노라.(롬7:18)

  하나님의 말씀이 한 사람에게 들어가면 그는 먼저 자신이 지옥에 가야만 하는 죄인임을 깨듣는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다가 부활하여 이미 그의 죄를 다 용서해 놓은 사실을 알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된다.  이때 영은 살아나고 혼은 몸으로부터 분리된다.  이것을 영적수술이라 한다(영적 할례).  다시 말하면 영은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시게 되며, 혼은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육신은 개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육신의 구속을 기다린다(롬 8:20). 
  고린도전서 2:12에 보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거하신 것은 “값없이 주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한다.  즉 구원은 자신의 노력이나 교회에 다니는 등의 열심으로 되지 안음을 명확히 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이것이 칼(검, 히 4:12)이 되어 영적 수술을 하는데, 이것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느끼든지 느끼지 못하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의 육신은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육신은 한갖 냄새나는 시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 그 죽은 육신을 살리고 개수하여 만족시키려고 한다.  이 육신은 전혀 개수할 수 없고 오직  죽는 것 뿐이다.  어떤 사람의 삶에 그리스도가 들어오면 그는 더욱 착해지고 죄도 짓지 않으며 항상 만족과 기쁨과 능력으로만 충만하며 만사형통하게 되는가?  은사주의자들은 적극적 사고방식까지 동원하여, 기도하면 만사가 해결되는 것으로 가르친다.  인간의 뜻대로 기도하면 인간의 뜻대로 이룩된다고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가?  기도하면 돈도 생기고, 병도 낫고 교회도 커지고, 교인도 늘고, 사고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왜 하나님이 필요한 것인가?  성경은 그들의 주장과 반대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들이니 하나님의 상속자들이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 상속자들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리라.(롬8:17)
  사람들은 미혹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인 죄, 다툼, 마음, 시기, 궁핍 등은 주님이 오셔야만 해결이 된다.  우라가 이 땅에서 누리는 주님의 나라의 기쁨과 만족은 약간의 맛은 볼 수 있겠지만, 주님만이 우리의 기쁨이 되시고 만족이 되시기 때문에 그 분이 오셔야만 한다.  바울은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다고 고백했다.  그가 육신의 죄와 구원을 연관지었다면 그는 지옥에도 여전히 육신은 변회되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는 이유는 구원받으면 죄도 짓지 않고 항상 기쁘게 살며 육신의 성품까지도 변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육신에서 난 것은 육이다(요 3:6),  그렇다고 육신에게 져서 죄를 마구 지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죄가 나의 구원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은 욕신의 지배를 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고 있다.

  이에 대해 고린도전서 2:14-3:1은 세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고 있다.
1. 자연인(거듭나지 못한 사람)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고전 2:14)
2. 육신전인 그리스도인(거듭난 사람)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말할 수 없어서 육신적인 사람, 즉 그리스도 안에서 아기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3:1)
3. 영적인 사람(거듭난 사람)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

  이와 같이 현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복음을 어리석다고 거부하여 거듭나지 못하고 지옥으로 갈 “자연인”이 있는가 하면,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은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며 성경의 기준에 따라 살지도 않고,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며 자기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어린 아이와 같이 성장하지 못한 채 남아 있어 무엇이나 자기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불평 가운데 산다.  이렇게 세월의 흐름에 상관없이 성장하지 못한 사람을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 한다.  또한 부류는 구원받고 하나님께 헌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알아 스스로 성장하며 성도들을 세워주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은 베드로전서 2:2에 있다.
갓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한글 개역성경은 “신령한 젖”으로 변개시켜 삭제나 첨가가 없는 “순수한 말씀”으로 자라나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한글 개역성경은 “구원에 이르도록”을 첨가하여 사탄의 거짓 교리를 제공하고 있다)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



6. 당신은 구원받은 후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는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이는 마귀가 처음부터 죄를 짓기 때문이라. 이 목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셨으니, 곧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거함이요, 또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라.(요일3:8,9)

  여기서 “하니님의 씨”는 베드로후서 1:23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며, 사람은 이 말씀으로 거듭나게 된다.  우리는 베드로전서 1:25을 통해 이 말씀이 “복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젠가 오순절 계통의 한 친구가 “나는 6년 동안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그래서 그가 화낼 때까지 계속 괴롭혔더니 결국 그의 입에서는 욕이 나오고 저주가 나왔다.  그렇다면 그는 결국 그는 인내하지 못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 “마귀의 자녀”가 된 것인가?
  이 구절은 교리적으로 하나님의 씨가 거함으로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혼과 몸은 분리되었기 때문에 육의 죄는 혼의 구원에는 영향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의 삯은 이미 2,000년 전에 지불되었고, 또한 옛 사람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죽었고 하나님은 새 사람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이룩하신 역사 때문이다.  혹 그리스도인이 많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는 죽어서 하늘로 올라간다.  구약에는 몸이 죄를 지으면 혼이 몸에 붙어 있기 때문에 결국 혼이 죄를 지은 것과 같다.  그러나 신약의 거듭난 사람은 혼과 몸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몸의 죄가 혼에게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이럿게 실제적인 체험(죄를 지음)과 성경 말씀(죄를 지을 수 없음)과의 차이를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영적인 할례”이다.

7. 구약의 성도들은 왜 셋째하늘에 올라가지 못했는가?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예수님이 피흘리시기를 낙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죄용서의 근거가 되었던 양과 염소의 피는 죄를 덮어주었을 뿐 제거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비를 수천 대까지 간직하며, 행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나 죄악이 결코 깨끗케 되지는(clear of guilty) 아니하리라. 아비들의 죄는 그 자손과 그 자손의 자손들 삼사 대까지 미치게 하리라." 하시니라.(출34:7,이 구절은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완전히 변개되어 정확한 교리를 전해 주지 못한다.)
  구약에서는 사람의 죄에 대해 짐승의 피를 흘려 죄를 용서는 해 주셨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혈을 흘리기 전까지는 죄를 깨끗케 할 수 는 없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히10:4)  짐승의 피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는 그 효능에 차이가 크다.  짐승의 피로는 그들의 죄를 덮어 줄 수는 있어도 제거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황소와 염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도 불결한 자들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함으로써 거룩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에서 너희 양심을 정결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뇨? 이런 연유로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죄한 것들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심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영원한 유업의 그 약속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히9:13-15)
  구약 성도들은 짐승의 피로 인해 용서는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봄으로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서 지옥에 가지 않았던 이들을 완저히 구속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했으며, 이 피를 통하여 안식처(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사람들의 죄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 한가지의 희생만을 받으시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을 때 땅의 심장에 삼일 낮과 삼일 밤 동안 계셨다(마 12:40). 그가 미리 앞을 내다봄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말하되 '주의 혼이 지옥에 내버려지지 않았으며, 또 주의 육신도 부패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도다.' 하였느니라.(행 2:31)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후 사망과 지옥의 열쇠(계 1:18)를 사탄에게서 빼앗아 남원으로 가셔서 구약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피를 적용시켜 그들의 죄를 완전히 씻기신 후, 그들을 셋째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셨다.
  이것은 마태복음 27:52-53에 기록된 것과 같다. 무덤들이 열리며 잠들었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으며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더라.(마27:52,53)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 갔고 사람들에게는 은사들을 주셨다."고 하셨느니라. (따라서 그가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가 땅의 낮은 부분으로 먼저 내려가셨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내려가셨던 그가 모든 하늘들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 분이니 그가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려 함이니라.)(엡4:8-10)
  먼저 설명한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지옥에 가셨다가 낙원(아브라함의 품)으로 가서 구약 성도들을 데리고 올라 가셨다.  회개했던 강도에게 약속했던 낙원이 바로 이 장소이다.  그러나 구속을 이루신 이후(눅 23:43) 낙원이란 장소는 셋째 하늘로 옮겨졌다.
  정녕 자랑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하지 못하나 내가 주의 환상들과 계시들을 말하리라. 내가 십사 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고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시느니라.) 그 사람이 셋째 하늘로 끌려올라 갔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끌려올라 가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허락되지 않은 것이로다.(고후12:1-4)
3절에는 “셋째 하늘”로, 4절에는 “낙원”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낙원이 셋째 하늘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하늘인 대기권에는 악한 영들이 산재해 있으며, 둘째 하늘은 별과 은하수 등이 있는 우주의 공간으로, 과학자들은 아직도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지 못한다.  시편에 보면 “북쪽” 방면에 낮과 밤이 끝이 오는 경계가 있다고 한다.  욥기에는 “북쪽” 하늘에 허공이 있다고 하며, 루시퍼는 북편에 있는 회중의 산에 앉으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사 14:13).
  바울이 셋째 하늘로 갔다고 하는데, 이곳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곳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좌 밑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욥 37:18, 계 4:6, 15:2).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지만 유리를 통해 보기 때문에 희미하게 보인다고 말했다(고전 13:12).  하지만 주님이 오실 때에는, 우리는 올라갈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하나님을 볼 것이다.  사탄이 욥을 고소하러 올라갔을 때, 이 유리바다 앞에서 고소한 것으로 추측된다(욥 1:6)
  현재는 사탄이 둘째 하늘과 첫째 하늘을 장악하고 있으며, 환란 마지막 때에야 비로서 하늘에서 쫓겨나게 된다(계 12:12), 왜냐하면 사탄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 때에 목베임을 당해 순교한 환란 성도들은 하늘에 있는 제단 아래, 즉 셋째 하늘로 올라 간다(계 6:9).
  구약에서는 영적인 할례를 받은 거듭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오직 그들은 예수님의 보혈이 흘려지기를 지하 낙원에서 기다렸다.  오직 그들은 예수님의 보혈이 흘려지기를 지하 낙원에서 기다렸다.  피에 의한 제사는 아벨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아담에게도 가죽옷을 입히신 것으로 보아, 아담도 양의 피로 융서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약과 구약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으며 구원을 받는 방법과 죽은 후에 가는 곳마저 틀리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라고 했을 때 “하늘”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장소를 말한다.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가 같다고 아는 사람들이 있으나, 성경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가 같다면 왜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기록하셨겠는가? 하늘은 장소이지만 하나님은 장소가 아니라 영이시다. 하늘과 하나님이 같다면 창세기 1:1에서 “하늘이 하나님과 땅을 창소하셨느니라”라고 해도 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 분이 창조하신 하늘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 계신다.
1. 천국
천국이라고 했을때의 천 하늘은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장소로서의 하늘이다. 성경에서 이 하늘은 세 개가 있다.
가. 첫째 하늘 :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대기권으로서의 하늘
나. 둘째 하늘 : 해와 달과 별등 성단과 성운이 있는 우주
다. 셋째 하늘 : 우주 바깥의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 [고후12:2]

우리는 시편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본다.
148:1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너희는 하늘들에서부터 주를 찬양하며 높은 곳들에서 그를 찬양하라.
148:2 그의 모든 천사들아, 너희는 그를 찬양하라. 그의 모든 군대들아, 너희는 그를 찬양하라.
148:3 해와 달아, 너희는 그를 찬양하라. 너희 모든 빛나는 별들아, 그를 찬양하라.
148:4 너희 하늘들의 하늘들과, 하늘들 위에 있는 너희 물들아, 그를 찬양하라.
여기서 1,2절은 천사들이 있는 셋째하늘을 묘사하는데, 우리는 계시록4장에서 이 하늘이 장관을 이루며 네 생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3,4절은 해와 달이 있는 둘째 하늘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잠시 "하늘들 위에 있는 물들“ 관해서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들 가운데 창공이 있으라. 창공으로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게 하라” 하시니라. (창1:6)
창공이 가운데 있고 그 위 아래로 물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7 하나님께서 창공을 만드시고 창공 위에 있는 물들에서 창공 아래 있는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7)
이 창공을 하늘이라고 부르며 이 창공은 창세기 1:2절에서 사탄의 타락으로 물로 잠긴 우주에서 나온 시편 148:3,4절의 하늘 즉 둘째 하늘이며, 7,8,9절을 다시 보면 땅에서부터 찬양하라고 나오고, 첫째 하늘을 언급한다.이처럼 하늘은 셋으로 나누어진다.

또 천국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으니, 어떤 사람이 그것을 찾으면 다시 숨겨 두고 그 기쁨으로 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룻에 담고 나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
(마태복음 13:44-48)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천국에는 악한 자도 선한 자도 있음을 알 수있다.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지상에 세우실 천국(천년왕국)에는 악한 자도 있기에 1000년이 끝나고 사탄이 잠시 풀려나면 곡과 마곡을 중심으로 반역을 일으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천년왕국 기간중 악을 행하면 청장으로 다스리시는 왕되신 그리스도로부터 심판을 받아 산 채로 지옥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보통 “나는 그리스도인이니까 죽으면 천국(Kingdom of Heaven)에 간다.”라고 말하는데, 천국에는 악한 자도 있기 때문에 이 말은 교리적으로 틀리다. 셋째 하늘에는 구원받은자만 있으므로
구원받은자가 죽으면 “셋째 하늘에 있는 낙원”,또는 디모데후서 4:18에 따라서 “하늘나라(heavenly kingdom)에 간다.”라고 하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 전파하기 시작하여 말씀하시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시더라.(마 4:17)
그 무렵에 침례인 요한이 와서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니(마 3:1,2)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처음에 요한과 예수님께서 전한 복음은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복음은 천국복음인데,이것은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통치한다는 메시지이다. 그 대상은 유대인이며,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여기서 회개란 죄에서 완전히 돌이킨다는 말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 와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마 2:6)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뛰어나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20)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보혈”을 믿고 “천국”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롬 14:17). 즉 우리는 회개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천국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다른 복음”을 전함으로 인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갈 1:8,9). 지금 천국에 들어갈 만큼 선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보혈이 필요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수 없다. 


2.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하나님은 영”(요 4:24)이시라는 사실을 염두해 두기 바란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를 말한다. 다음 몇 구절은 하나님의 나라를 정의하고 있는 구절들이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으며,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상속받을 수 없느니라.(고전 15:50)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이라.(롬 14:17)
여기서 먹고 마시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이다.

또 사람들이 '보라, 여기 있다!' 또는 '보라, 저기 있다!'고도 말하지 못하리니, 보라,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라."(눅 17:21)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으나 하늘은 우리 안에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우리의 전쟁 무기는 육신적인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을 통하여 견고한 요새들을 무너뜨리는 능력이라.(고후 10:4).
우리는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으므로 영적인 무기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무기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같은 내용이라 생각하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을 비교하면서 좀 더 깊이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의 차이점을 살펴보자.
1) 계보
마태복음의 기록 목적은 “유대인들의 왕”을 계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첫 장부터 유대인의 왕의 계보가 나오며(마1장) 반면에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을 위한 메시지이기에 그 계보가 마태복음과 다르다(눅1:1-4).
   대상
  제시되는 나라
 마태복음
  유대인
     천국
 누가복음
  이방인
  하나님의 나라
    
2) 달란트와 므나
많은 사람들은 이 두 비유를 보통 같은 것으로 알고 있다.

가. 그러나 두 비유에는 지시되는 나라가 서로 다르다
-> 천국은 마치 어떤 사람이 먼 나라로 떠나면서 자기의 종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으니라.(마 25:14)
->...이는 주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계시므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눅 19:11)



나. 따라서 단위도 틀리며 나누어주는 양도 다르다.
-> 그가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유대인의 단위)를,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곧 여행을 떠났더라.(마 25:15)
-> 그리하여 자기의 종 열 명을 불러 그들에게 열므나(이방인들의 단위)를 주며 말하기를 '내가 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하였더니(눅 19:13)

다. 보여주는 보상도 서로 다르다.
->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기를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내가 너로 많은 것들을 다스리도록 하리라. 네 주인의 기쁨에 동참하라.'고 하더라.(마 25:21)
-> 그에게 말하기를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라.'고 하더라.(눅 19:17)

라. 심판이 다르다.
-> 너희는 그 쓸모없는 종을 바깥 흑암에 내어던져라. 거기서 울며 이를 갈고 있으리라.(마 25:30)
-> '내가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가진 사람은 받을 것이지만 갖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도 빼앗기리라.(눅 19:26)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실하게 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심판석(고전 3:12-15)에서 상은 잃을 지언정, 천국과 관계되는 유대인같이 바깥 흑암에 던져지지는 않는다.
복음서는 서로 다른 관점으로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영접하여 왕으로 받아들였더라면 실제적인“천국”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는 영적인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신다.
즉 천국은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직접 통치하시는 나라”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믿는 사람들이 거듭나서 들어가는 영적인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영적인 왕국과 실제적 왕국이 어떻게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자.



3.성경의 주제는 왕국이다

성경의 주제는 무엇인가? 많은 기독교인들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성경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정도면 충분할 것이고, 어쩌면 잘 만들어진 전도지 한 장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2:4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고 말씀하신다.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구원을 위해 할 일이 없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할 일은 “진리의 지식”에 이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최종 목적지로 생각하고 교회를 다니는 경우가 있다. 그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믿음의 경주에 선수로 참가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상을 받기 위해 경주하는 선수이지,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딤후 4:7)
 
 성경의 주제는 “이 우주에서 누가 왕이고 누가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이며, 지금도 “누가 한 나라의 대통령인가?”,“누가 교회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가 최대의 이슈이다. 바로 권위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많은 교회가 분열되는 원인들 중 가장 큰 원인은 권위를 잘못 사용하는 것과, 바른 권위에 대항하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누가 권위를 가지고 살림을 꾸려 나가는 것인가가 중요하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가정의 권위를 가지고 자신이 한 번 꾸려 나가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성경의 핵심 주제는 “누가 권위를 가지고 행사 할 수 있는 ‘왕국’을 가지고 있느냐? 의 문제이다. 만일 성경의 주제가 ”구속“이라면 성경이 그리 두꺼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영생을 약속하셨는데(딛 1:2),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약속하신 것이었다. 이 약속은 인류의 타락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엡 1:4,10, 벧전 1:20). 이 창조의 주체와 목적과 중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였다(골 1:16, 계 4:11). 즉 모든 것들로부터 영광과 높임을 받으실 분은 어떤 다른 피조물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분께 모든 권세가 위임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살펴보면 먼저 그 분을 위해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해서 그 분이 우리를 위해 계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 분을 위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하셔서 “시간”이라는 것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하나님 한 분만이 계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품이 사랑이시고, 또 그 사랑을 나타내실 때 이 사랑에 반응할 피조물이 필요하셨기에 창조를 시작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첫 구절은 “태초에”(In the beginning)로 시작되고 그때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과학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기에 이제껏 뒤쳐져 있다가 아주 최근에야 시간과 공간의 첫번째 시작이 있었다는 것을 겨우 밝혀냈다.

1)루시퍼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이를 다스릴 자로 루시퍼를 세우시어 그에게 권위를 위임하셨다. 에스겔서 28장에서 우리는 루시퍼가 아주 아름다운 피조물임을
알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 모든 귀한 돌인 홍보석과 황옥과 금강석과 녹보석과 얼룩마노와 벽옥과 사파이어와 에메랄드와 홍옥과 황금으로 덮여 있었고, 네 북들과 관악기들이 만들어짐이 네가 창조되던 날에 네 안에 예비되었도다.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라. 내가 너를 그렇게 세웠더니 네가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 있었고 네가 불의 돌들 가운데를 위아래로 걸었도다.(겔 28:13-14).
여기에서 루시퍼는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었고, 하나님게서 창조하신 것들을 보고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기름 부음을 받은(그리스도) 덮는 그룹”이라고 불렸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예수님이 아니라 사탄인 그리스도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적 그리스도를 잘 구분해야 한다. 그리스도란 말은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이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많은 천사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을 하실 때, 내가 이 세상의 기초들을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언제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했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두 기뻐서 소리쳤느냐?(욥 38:4,7)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 이 땅을 만들기 이전에 “루시퍼”와 “하나님의 아들들”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수있다. 즉 하나님께서 너무나 아름다운 우주를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의 아들들은 찬양을 올렸는데, 여기서 루시퍼는 총지휘자가 된것이다.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민족들을 연약하게 하였던 네가 어찌 땅으로 끊어져 내렸느냐!이는 네가 네 마음 속에 말하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가서 내 보좌를 하나님의 별들보다 높일 것이요, 내가 또한 북편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내가 구름들의 높은 곳들 위로 올라가서 지극히 높으신 분같이 되리라." 하였음이라.그러나 너는 지옥까지 끌어내려질 것이요, 구렁의 사면에까지 끌어내려지리라.(사 14:12-15).[여기서 한글 개역성경은 “루시퍼”를“계명성”이라고 변개시켰는데, 계명성은 “새벽별”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결과적으로 한글 개역성경은 사탄인 루시퍼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여 준 것이다.(계 22:16).]
그런데 여기서 우주의 역사상 최초의 교만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루시퍼는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보좌 위까지 올라가고자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 전에 계획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높이시고자 했던 계획에 대한 반란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땅으로, 지옥까지 끌어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바로 이때가 루시퍼의 교만을 심판하시기 위해 전 우주를 물로 심판 하신 때이다.
그래서 이 심판으로 인하여 다음과 같이 되었다.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창 1:2)
창세기 1:1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는데, 2절에서는 땅이 형체가 없고 공허하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창세기 1장1절과2절 사이에 알 수 없는 긴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성경적 근거도 없이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온 세상은 물에 잠겨 심판을 받고 다시 창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성경으로 이 사실을 확인해 보도록 하자.
먼저 알 것은 이것이니 마지막 날들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그들의 정욕대로 행하며, 말하기를 "그가 온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의 시작부터 그대로 있다." 하니, 이는 그들이 이것을 고의로 잊으려 함이라.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다는 것과, 땅도 물에서 나왔고 물 안에 있었다는 것이니, 이로써 이전에 있던 세상은 물이 범람해서 멸망하였느니라.
그러나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어 있으되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려고 간수되어진 것이니라.(벧후 3:3-7).
 여기에 “홍수”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홍수를 노아의 홍수라고생각하는데, 자세히 보면 이것은 노아의 홍수와 관계가 없다. 성경은 땅이 물에서 나와 생성되었다고 하는데, 노아 때는 단지 물로 뒤덮여 있었을 뿐이다. 또 이전의 세상은 홍수로 멸망당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의 세상은 노아 이전의 세상과 같은 땅과 하늘이지 새로운 세상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노아의 홍수가 아니라 루시퍼의
반란에 대한 심판이었다. 그래서 창세기 1:2-27은 하나님께서 재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권위를 가지신, 최고의 권위를 가지신 왕이다. 그래서 자신의 권위를 다른 사람이나 인격에게 위임하여 주시는데, 맡긴 권위를 하나님에 뜻에 따라 제대로 사용하지 않게 되면 그를 심판하고 그권위를 빼앗으실 수 있다.
2) 아담
 창세기 1:28에서 아담은 “다시 채우라”(replenish, 한글 개역성경에는 “다시”라는 말을 삭제했음.)는 명령을 받는다. 노아 역시 창세기 9:1에서 같은 명령을 받는다. 이 땅에 누군가 가득 살고 있었으므로 “다시 채우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들은 바로 타락한 천사들, 즉 구약의 “하나님의 아들들”이었다. 이전에 있던 자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은 심판을 받았고 그 권위는 아담에게 주어졌다. 노아도 홍수 이전에 사람들이 가득 살고 있었으므로 “다시 채우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눈에 보이는 왕국, 즉 동물과 식물과 땅을 다스리는 왕권을 주셨다. 아담은 눈에 보이는 왕국, 즉 천국을 받았고(창 1:28), 또한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다(눅 3:38). 하지만 아담은 이브가 뱀에게 속아 죽자 그도 따라서 고의로 말씀을 어기고 죽는다(딤전 2:14, 엡 5:25).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즉시 죽지 않고 약900년을 더 살았으나 영적으로는 죽어 있었다. 아담 안에 죄가 들어오자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죄성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단절된다.
 사탄은 결국 아담을 타락시켜 승리한다. 또한 하나님께 행할 경배를 자기에게 하도록 만들고 아주 기뻐하는 것을 본다. 이때부터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가져가셔서 이 땅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없게 되었다. 또한 아담은 영적으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사탄에게 패배 했기 때문에 이 땅에 왕국도 빼앗겼다.
 이때부터 사탄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천국에 대해서 끊임없이 방해한다. 그는 선악과를 따먹게 하여 범죄하게 하더니, 아담에게 여자의“씨”를 통해 사탄을 이길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무너뜨리려고 또 다시 방해를 하는데, 그것은 약속의 씨가 나오지 못하도록 카인 으로 하여금 아벨을 죽이게 하는 것이다.

3)노아  
 이제 사람은 두 왕국을 모두 잃어버렸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더욱더 악해지는것을 보시고 후회하시며 심판하시기로 결정하신다(창6:5-7).
 하지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노아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시고 노아를 통해 사람들에게 경고하셨다.(벧후 2:5, 유 1:14-15). 그러나 그 경고는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8명만이 살아남았을 뿐 이 당의 모든 사람은 멸망당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 너희를 두려워함과 너희를 무서워함이 땅의 모든 짐승들과 공중의 모든 새들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과 바다의 모든 고기들에게 미치리니, 그들이 너희 손에 넘겨졌음이라.(창 9:1,2)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빼앗긴 천국의 왕권을 노아에게 주신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 아담에게 주었던 동일한 명령을 주신것이다.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  이때 사람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다시 채우라고 말씀하신 것인데, 이는 이전에 아담이 받은 명령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노아도 술에 취해 벌거벗으므로 죄를 지어 노아에게서도 그왕국은 다시 떠나 버린다. 사탄이 천국에 대하여 또 다시 방해를 한것이다. 그 후 사탄은 적그리스도의 모형인 님롯을 통하여 바벨탑을 쌓는다.
 사람들은 더욱더 악해져서 바벨탑을 쌓기에 이르렀고, 하나님께서는 님롯의 왕국(사탄의 왕국)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인류를 흩으신다.
  그가 주 앞에서 힘센 사냥꾼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주 앞에 님롯 같은 힘센 사냥꾼이라." 하더라. 그의 왕국의 시작은 시날 땅에 있는 바벨과 에렉과 악캇과 칼네에서였으며 (창 10:9-10)



4) 아브라함
 하나님의 계획은 바뀌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세상 전체를 다루시지 않고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이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실제의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처럼 왕국은 실제적인 땅과 관련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 땅
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며 네게 복을 주고 네 이름을 위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되리라.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네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 하셨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켐 땅 모레의 평지에 이르니, 그때에 카나안인들이 그 땅에 있더라.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시니, 그가 그곳에다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께 제단을 쌓았더라.
(창 12:2-3,6-7).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와 마찬가지로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또한 땅과 큰 민족을 이룰 것과 “씨”를 약속하신다.
 이때 사탄은 다시 방해를 하는데, 이집트에서 아비멜렉 왕으로 하여금  그의 아내를 취하도록 하여 “씨”를 혼잡시켜 약속의 씨가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창 20: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씨를 보호하시기 위해 꿈에 아비멜렉에게 나타나 그 일을 막으셨다(창 20:6).

5)이삭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과 동일한 약속을 주신다.
내가 네 씨를 하늘의 별들처럼 번성하게 할 것이며 이 모든 지역들을 네 씨에게 주리라.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라.(창 26:4)

6)야곱
야곱에게도 동일한 약속이 이어진다.
백성이 너를 섬기고 민족들이 네게 절하며, 네 형제들 위에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절하며 너를 저주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모든 자는 복을 받을지어다." 하더라.(창 27:29)




 7)유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죽기 전에 예언을 통해 유다에게서 홀(왕권)이 떠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다. (계시록 5:5의 유다 지파의 사자인 다윗의 뿌리, 그리스도를 보라.)
유다는 사자의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네가 먹이를 놓고 올라갔구나. 그는 몸을 구부리고 웅크림이 사자 같고 늙은 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성나게 하리요? 홀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며 실로가 올 때까지 입법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니 그에게 백성의 모임이 있을지어다.(창 49:9-10)

8) 모세와 이스라엘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령하였으니, 곧 야곱의 회중의 유업이라.
백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다 함께 모였을 때 그는 여수룬에서 왕이었도다.(신 33:4,5)
여기서 모세를 왕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에 유의하고, 또한 다음 구절에서 이스라엘이 제사장의 왕국으로서 구별된 민족임을 말하고 있음을 유의하라.
너희는 나에게 제사장들의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고할 말이니라." 하시니라.(출 19:6)
그러나 여기서도 사탄의 방해는 여전하니, 즉 광야에서의 계속적인 시험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겠다고 불평하게 하여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다.

9) 여호수아
여호수아가 모세를 이어 새 지도자가 되어, 마침내 모세의 권위를 계승하여 약속의 땅을 이어 받게 된다. 사탄은 이때 카나안 땅에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알을 숭배하도록 만들고 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대신 왕을 구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백성이 사무엘의 음성에 복종하기를 거절하며 말하기를 "아니니이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를 다스릴 왕을 두어, 우리 또한 모든 민족들과 같이 될 것이요, 우리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우도록 할 것이니이다." 하더라.(삼상 8:19,20)
 이들은 자신들의 성별된 민족임을 잊고, 민족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왕을 구하여 적그리스도의 모형인 사울을 왕으로 뽑는다. 하지만 사울은 “베냐민 지파”이지 약속된 “유다 지파”가 아니었다.


10) 다윗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인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신다.
주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사울을 거절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못하게 함을 보고 네가 언제까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하겠느냐? 네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 보내리라. 이는 내가 그의 아들들 중에서 한 왕을 내게 예비하였음이라." 하시더라.(삼상 16:1)
시편 등을 통해 볼 때 다윗이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것은 매우 명확하다.
 그러나 이 때에도 사탄의 방해는 여전하다. 사탄은 사울과 또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을 통해 다윗을 죽이려 하고(삼상 19), 궁전에서 목욕하는 여인을 바라보게 해서 살인과 간음죄를 저지르게 하여 다윗의 아들을 죽게 한다. 또한 다윗을 교만하게 하여 인구조사를 하게 한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특별한 은혜가 있었기에 그는 버림을 받지 않았다.

11) 솔로몬
그의 약속은 솔로몬에게 이어진다(왕상 1:30). 그러나 솔로몬의 불순종으로 왕국이 둘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래도 약속대로 왕은 유다 왕국을 통하여 이어진다.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계속해서 주님께서는 한 사람에게 왕국을 다스리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왕국은 “천국”이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 있기까지 “하나님의 나라”는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구약 성도들은 거듭나야 들어가는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드디어 유다 왕국은 죄를 짓고(렘 11장)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왕국을 바빌론에 내어 주신다. 그리고 여코냐에게는 자식이 없을 것이며 그의 씨에서는 다윗의 보좌에 앉을 자가 없을 것이라고 예언을 하신다(렘 22:24). 예언대로 유다 왕국은 느부캇넷살왕이 차지하고 백성들은 바빌론으로 잡혀간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에 번성치 못할 사람이라고 쓰라. 이는 그의 씨에서는 아무도 번성치 못하며 다윗의 보좌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자가 더이상 없을 것임이라.(렘 22:30)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대로 B.C. 606년에 바빌론에 의해 유다지파 여코냐도 왕권을 빼앗기게 된다(예레미야 애가 5:16에서 “면류관이 우리의 머리에서 떨어졌다.”라고 한다.)
데드 암스트롱이라는 사람은 이 구절만 인용하여 유다의 홀(왕권)은 영국으로 건너와 계승되었다는 이단적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만일 우리가 이 구절만 읽으면 데드 암스트롱의 주장을 따라 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 구절을 보자.
내가 그 날들, 그리고 그 때에 의로운 가지를 다윗에게 자라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심판과 의를 실행하리라. 그 날들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은 안전하게 거하리라. 이것이 그 이름이니 성읍은 '주, 우리의 의'라 불리리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 집의 보좌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는 한 사람도 부족하지 아니할 것이요. (렘 33:15-17)
이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서로 모순이 되는가? 이와 같이 말씀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때 데드 암스트롱이 나타나 “아, 그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그 홀은 영국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여 어떤 사람들은 그의 거짓 주장에 넘어가기도 한다.
여기서 여코냐에게는 자식이 없고 도한 그의 씨에서는 아무도 다윗의 보좌에 앉을 자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코냐의 씨가 아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요셉이 실제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주의 부모”가 아니라 “요셉과 모친”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성경들은 (한국 개역성경 포함)“그의 부모”라고 성경을 변개시켜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인 것처럼 암시하고 있다(눅 2:33).
이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려는 저의에서 나온 것이다.
요셉이 예수님께 법적인 아버지는 될 수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혈연 관계는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처녀에게서 잉태하실 것이기 때문에 여코냐의 씨가 왕위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 에게서 이어온 왕권은 혈연과 관계없이 이어졌고, 육신은 마리아의 계보를 통하여 오신 것이다.

<표 5>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계보의 차이점
  마태복음의 왕(Royal)의 계보(1:1-17)
  누가복음의 왕(Legal)의 계보(3:23-38)
다윗->솔로몬->...여코냐(왕이 없음)->요셉
         다윗->나단->...->마리아
    왕권만 예수 그리스도께 이어진다.
성육하신 하나님이 마리아를 통해 육신을입고 태어나셨다.

암스트롱은 문맥에 맞지 않게 한 구절만 취하여 자기 주장에 짜맞추어 왕권이 영국으로 이어졌다고 거짓말 했던것이다.
“다윗에게는 한 사람도 부족하지 않으리라”는 앞의 구절을 읽어 보면 이대는 어느 특정한 날과 때, 이 땅을 심판하고 유다를 구원하는 날, 즉 “재림”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왕은 “유다 지파의 사자”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이 보좌에 앉으시면 어느 누구도 그의 보좌에서 쫒아낼 자가 없다.

다시 정리하면 아담은 영적으로 죽어 하나님의 나라를 잃었고, 그이후 노아, 아브라함,모세,다윗,솔로몬 등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는 왕국, 즉 천국이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결국 B.C. 606년에 이 왕국도 끝이 나고, 그 이후로 이 땅은 이방인들의 차지가 되어 “이방인들의 때”가 시작되고, 이방인들은 “왕국”을 빼앗기 위해 서로 전쟁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메데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을 보라.) 그래서 이때부터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왕국, 즉 “천국”은 사라져 버렸다.
그때부터 약 40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어떤 선지자도 일으키지 않으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는 통로를 얻지 못한 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400여 년의 긴 침묵을 깨고 침례인 요한이 기적적으로 출생하였고 예수님도 그보다 6개월 뒤에 육신으로 태어나신다. 예수님은 분명히 왕으로 통치하려고 오셨고,
침례인 요한은 왕이 오신다는 전령 으로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왔던 것이다. 침례인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역에 임하시어 첫 번째 전파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가이 왔느니라.”였다. 그때에 세상의 왕국을 통치하고 관장하는 자는 바로 “공중 권세의 통치자”인 사탄이었다(엡 2:2, 마 4:8,9). 사탄이 가지고 있는 권세는 천국에 대한 권세가 아니라 세상 나라일 뿐이다. 성경에서는 동일하지 않은 것은 다른 것이다. 예를 들면 “주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같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이고, 공중에서 주님과 만나는 것과 지사에서 주님과 만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들이 너를 사람들로부터 쫓아내리니, 너의 거처가 들의 짐승들과 함께 있게 되리라. 또 그들이 너를 소처럼 풀을 먹게 할 것이요, 일곱 때가 너에게 지나고 나서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인간들의 왕국을 다스리시며 그 분께서 원하시는 자에게 그것을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하였느니라.(단 4:32) 이 구절을 들어 사탄이 이 세상을 관장한다는 말은 틀리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우주를
통치하시는 최고의 권위자는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원함에 따라서 왕국을 치리하도록 허락하신다. 이 구절에서 잘못 이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성경 구절을 들어 하나님께서는 원하는 자만 구원하신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분명히 “왕국”을 언급하고 있지 “구원”을 다루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딤전 2:4).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피조물에게 자유 의지를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도록 허락하시거나 사탄에게 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허락하시는 것 등으로 알 수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사탄조차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수없다. 그래서 욥을 공격할 때 사탄은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는다.
혹 어떤 사람이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해 주셔서 타락하게 하시며, 또 사탄을 창조하셨는가?” 하고 따진다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그 책임을 지셨다.”고 답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으나 선택할 것이 없이 한 가지만 있다면 자유의지를 주신 명분이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창조하셨고, 그때에 인간이 악을 선택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인간은 선 대신 악을 택하였던 것이다. 악을 만드신 하나님의 책임이 곧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의 예언대로 유다 왕국이 B.C. 606년에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 정확히 70년이 끝나갈 때에 그들은  다시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온다(렘 25:12, 39:1-10)
"페르시아의 코레스왕이 이같이 말하노라. 하늘의 주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내게 주시고 내게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있는 전을 그를 위하여 건축하라 하셨도다.(스 1:2)
여기서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페르시아의 왕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 수있다. 이 왕국들은 우리가 학교에서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바빌론의 느부캇넷살, 그리스의 알렉산더, 로마제국 등으로 이어지는 “세상의 왕국들”과 동일하다.

12) 예수 그리스도
많은 세월이 흘러 드디어 예언된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으며, 그 분은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야, 즉 “유대의 왕”이 통치하는 천국을 외치셨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셨기 때문에 많은 신학교에서는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같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두 왕국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성경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 분은 왕으로 오셨기에 “땅”과 “백성”만 준비되면 천국이 시작될 수 있었다. 또한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아담이 타락함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나라”도 가지고 오셨다(고전 15:22,45,50).
처음 아담이 두 왕국을 받았던 것과 같이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도 두 왕국(영적인 나라와 물질적인 나라)을 가지고 오셨던 것이다. 그 분은 한 처녀의 잉태를
통하여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보이는 실제적인 나라”를 가질수 있었으며, 죄가 없었기 때문에 “영적인 나라”도 가지실 수 있었다. 이 점을 간과하게 되면 성경의
핵심을 배우지 못하게 된다.
사탄은 역사상 거의 모든 사람들을 시험하여 왕권을 빼앗았듯이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한다.
마귀는 다시 주를 아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주께 보여 주며, 말하기를 "네가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너에게 주리라."고 하니.(마 4:8,9)
여기에서 사탄은 “천국”을 주겠다고 하지 않고, 경배하면 “세상의 나라들”을 주겠다고 한다. 왜냐하면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고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아담은 첫 아담과는 대조적으로 육신의 약함과 시험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다.

당시 나라를 빼앗긴 유대인들은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가 와서 자신들을 구원하여 세상에서 군림할 것을 기다리고 잇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고 “아, 저분이 나의 죄를 위해 피흘려 죽으실 분이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아, 드디어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아 우리가 최고의 나라가 되겠구나.”라고만 생각했다.
 수많은 설교자들이 마태복음 5,6,7장의 산상설교와 이후의 내용을 혼동하여 올바로 적용하지 못하는데, 산상설교는 예수님께서 문자적으로 통치하시는 천국에서 이루어질 일들이다. 만일 이것들을 교리적으로 교회시대에 적용하면 대단히 엄청난 혼동을 가져올 것이다. 죄를 짓지 않기위해 눈을 빼고, 손과 다리를 자르고, 욕을 하면 지옥불에 던져지는 천국 메시지를 가지고 오늘날 교회시대에 교리적으로 적용하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또 교리적으로 적용하다 보면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되어 교리가 엉망이 되기도 한다. 선교라는 미명하에 교단 선교사들이 나가서 지금도 천국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갈 1:8,9)사실을 알고 있을까? 
간단한 예로 마태복음 5:2,3,5에는 주께서 입을 열어 그들을 가르치며 말씀하시기를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영이 가난한 자는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하지 않고 천국을 준다고 하며,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유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하지만 이들은 그 분의 말씀을 거절하였으며,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그를 죽이려 한다(마 12:14). 이때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들에게로 돌이키시며, 구약에 예언된 것처럼 이방인들이 예수그리스도께로 돌이킨다는 것을 말씀하신다(마 12:17-21). 천국복음은 이방인 들과는 상관이 없는데, 왜냐하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천국복음을 위임 하실 때 이방인들에게는 가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0:5-7에서 볼수 있듯이 천국복음은 이스라엘에게만 전파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내용은 이방인 들에게도 전파된다.
결국 예수님은 천국이 이스라엘에 의해 거절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될 것을 아시고, 이방인에게 회개를 전했던 요나를 언급하신다.(마 12:40-41)
즉 이방인들은 요나의 전도로 회개했는데, 요나보다 큰 자가 유대인들에게 전파했을 때 받아들이지 않음을 꾸짖으시는 것이다. 또한 남방의 여왕도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건만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왔는데 너희는 왜 듣지 않느냐는 내용을 말씀 하신다(마 12:42).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천국이 30번이나 나오는 반면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5번만 나온다.
그 중 하나를 읽어보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내면 그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한 것이라.(마 12:28)이다.
여기서 마귀들은 영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천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겠다고 경고하신다!!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죄를 찾을수 없었으나(요 19:5-6), 유대인들은 그들의 왕인 그리스도를 거절한다.
그들이 소리지르기를 "처단하소서. 처단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소서."라고 하더라.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왕을 내가 십자가에 처형하랴?"고 하니 대제사장들이 대답하기를 "카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하더라.
(요 19:15)
이들은 또 마태복음 27:25에서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는 끔찍한 말을 한다. 이 교만은 세상에서 유대인들을 배척당하게 만들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600만의 유대인 대학살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일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고난”인 7년 대환란으로 이어질 것이다.
결국 유대인들에게 제시되었던 그리스도는 거부되어 천국은 연기 되었고, 교회시대는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로만 시작된다. 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 시대의 싸우는 무기는 영적인 무기이지 육적인 무기가 아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모든 시선이 쓰여진 이후
A.D 90년에 쓰여 졌기 때문에 “거듭나야만 한다”라는 말이 명확하게 제시된다.
그리하여 신비로운 시대가 시작되는데, 이 시대는 바울에게만 언급된다.
그는 천국을 한번도 전한 적이 없다. 그는 오직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 와 거듭나는 것만을 전했다. 이 사실은 사도행전의 마지막에서도 확인 된다.

바울이 만 이 년을 자기 셋집에서 지내며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여,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이 담대함으로 하였더라.(행 28:30,31)
따라서 이 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천국복음을 전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신 후 자신이 살아계심을 그들에게 여러 가지 무오한 증거들로 보여 주시고,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들을 말씀하셨노라.(행 1:3)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신 이후에는 유대인들에게 천국에 대해 이야기하시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나라만 언급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천국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주여, 이 때에 이스라엘에 그 왕국을 다시 회복하시겠나이까?"(행 1:6)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천국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런 왕국은 없다. 그런 것은 잊어버려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다만 "너희에게는 그 때나 시기를 알게 하신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한에 두셨느니라.고만 말씀하시므로 이 왕국이 연기될 것을 암시하신다(행 1:7).

그런데 지금 베도한 교회들에는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천국은 교회가 차지했다.”라고 주장하며 아브라함의 혈연적 씨에게 약속한 모든 축복이 자신들에게로 옮겨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신하교에서는 무천년주의나 후천년주의를 가르치며 성겨의 진리를 올바로 나누지 못하고 있다. 성경을 올바로 나누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칭찬받지 못하는 수치스런 일꾼으로 전락되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딤후 2:15).

[간단히 무천년주의와 후천년주의를 언급하면, 무천년주의는 예수님께서 이 땅을 통치하시는 천년왕국은 따로 없고 다만 이 땅에 교회가 확장되어 살기 좋은 천국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졸말론 이론이며, 후천년주의는 이 땅에 복음이 확장되어 세상이 살기 좋게 만들어진 천년왕국 이후에 예수님이 오시며 그런 후에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이론으로, 이 둘은 모두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이며, 결국은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천년주의는 성겨을 문자적으로 래석한 것으로, 세상은 점점 약해져 배도하여(딤후 4:3,4) 결국 그리스도인은 들림을 받고(살전 4:17) 그후에 땅에서는 7년 대환란이 시작되며, 환란의 마지막에 그리스도께서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여 이 땅을
문자적으로 1000년 동안 통치하신다는 믿음이다. 그 후에 사탄이 잠시 풀려나오고 마지막 베도가 있은 후 백보좌 심판으로 마지막 심판을 하신다. 그 후에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 이것이 성경적 종말론 이다.
스스로 전천년주의자라 하면서도 교회가 대환란을 통과한다고 믿는 자들도 있으나,
하나님의 교회가 환란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없다. 만일 교회가 환란을 통과한다면 성경은 틀린 것이다. “야곱의 고난”은 곧 이스라엘의 환란을 말한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같기 때문이다. 만약에 교회가 환란을 통과한다면 그것은 구원받지 않은 무리들을 모아 놓은 거짓 교회가 들림받지 못하고 이 땅에 남아 환란을 겪는 것일 뿐이다.]

결국 천국은 연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모조품을 만드는데 그것이 거짓 교회이다. 사탄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하여 “유대인들이 잃어버렸던 왕국이 우리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베드로가 받았던 천국의 열쇠는 교황을 통하여 물려받았으므로 카톨릭만이 참된 교회다.”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노선을 함께 한 사람들은 콘스탄틴, 교황 그레고리, 클로비스, 샤를마뉴 대제 등등... 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이제 “종교적인 왕권”과 “정치적인 왕권”이 모두 자신들의 것이기 때문에 이 “카톨릭 왕국”을 확장해야 함을 가르친다. 실제적인 약속을 소유한 유대인들이 그들에게는 아주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이유가 되었다. 또한 이로 말미암아 중세 암흑시대가 왔으며 모든 왕들이 교황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그들 카톨릭 선교사들이 선교를 할 때는 항상 군대를 뒤에 데리고 가서 그들의 복음(고해성사,유아세례, 마리아숭배, 연옥, 십자가, 미사, 종교적 의식 등...)을 강요했는데, “받아들여라. 안 받아들이면 죽이겠다.”라는 것이 소위 말하는 카톨릭 선교였다. 미국에 갔던 한 카톨릭 선교사는 땅에다 십자가를 꽉 꽂더니, “이 땅은 교황의 것이다.”라고 선언한 일도 있었다. 교황은 그가 방문하는 나라에 도착하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 땅에다 키스한다. 그것은 “이 나라의 영토는 카톨릭의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왕이 계시지 않는 상태에서 “왕국”을 이 땅에 만들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렇게 사탄은 이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물질적인 “천국”을 뒤섞어 버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사탄의 나라에 있는 사람들(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을 구령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는 것이지, 천국복음인 “산상설교” 등의 교훈을 가져다가 이 땅에 천국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13) 적그리스도와 대환란
교회시대가 끝나면(롬 11:25)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올라가고 적그리스도의 실제적인 통치가 이루어지는데, 처음 3년 반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지만 3년 반 후에는 그 협정을 파기한다.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서는 그날이 오지 아니함이라. 그리고 나서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리라. 그는 대적하는 자이며 또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모든 것과 숭배받는 대상 위에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하나님처럼 보여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느니라.(살후 2:3-4)
이 적그리스도는 한 사람으로 나타나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여러 가지 거짓 표적을 보여 줄 덕이며, 이것으로 많은 유대인들은 “아, 저사람이 우리의 메시야다!”라며 믿게 될 것이다.
 그 불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역사에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이적과(살후 2:9) 또 큰 표적들을 행하는데, 심지어는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에서 땅 위로 내려오게까지 한다(계 13:13).
 초림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해서 주님께 선의로운 표적을 보여주셨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영적으로 배도한 상태였기 때문에 영적인 나라보다는 눈에 보이는 자신의 것들을 중요시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권력을 로마인들이 와서 차지할까 걱정했던 것이다(요 11:48).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과 사악함을 꾸짖으셨고, 그들에게 천국문을 닫아버린 위선자들이라고 하시며 그들에게 더 큰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을 저주하셨다(마 23:13-39).
 결국 이들은 자신의 마음에 잘못된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자신들의 영광을 얻지 못했다(겔 14:30). 결국 지금도 세상의 명예와 재물을 주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속여 버리실 것이다.

결국 사탄이 가장 바라던 것은 “경배 받는 것”(마 4:9)과 “왕국을 얻는것”이지만 그 기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때를 더 연장하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을 없애려고 박해하는데, 유대인은 3년 반을 광야로 피해 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계 12:12-14).요한계시록 12장의 여인은 이스라엘이다(창 37:6-10, 계 12:1을 참조). 어떤 선학자들은 이 여인을 마리아라고 하기도 하고 교회라고 하기도 하나, 이 여인은 마리아도 교회도 아닌 이스라엘이다. 이 이스라엘은 환란을 겪은 후 구원을 받을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 환란 기간을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가. 이사야 13:6-13 -> 주의 분노의 날
나. 예례미아 30:4-9 -> 야곱의 고난의 때
다. 에스겔 20:33-38 -> 분노의 날
하나님의 분노의 날은 주님게서 돌아오시기 바로 직전에 일어나는 최종적인 경험이다.
 환란 시대의 전후로 성도의 휴거와 나라들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심이 있을 것이다(단 12:1-4). 이 환란의 마지막에는 동방으로부터 2억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치러 올 것이며, 이때 주님께선 이스라엘을 구하시기 위해 주의 용사들(앞서 들림받았던 거듭난 성도들)을 데리고 오실것 이다(욜 3:9-11). 이것이 환란 기간의 끝에 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슼 14:1-4).
 이때 또 하나의 휴거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교회시대의 성도들의 휴거가 아니라 환란 성도의 휴거이다(마 24:31-31). 이들은 계시록 11장의 두 증인과 함께 전하여질 왕국 복음을 듣고 개종한 사람들이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계명과 믿음을 지킨 이스라엘의 남은 자(롬 11:26)를 구원하시기 위해 진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말을 타시고 셋째 하늘의 물을 통과하여(합 3:15)이스라엘의 올리브 산으로 재림하실 것이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흰 말이 보이더라. 그 위에 앉으신 분은 신실과 진실이라 불리며 의로 심판하고 싸우시더라. 그의 눈은 불꽃 같고 머리에는 많은 왕관이 있고 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르며,  피에 적신 옷을 입었는데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더라. 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정결한 세마포를 입고 흰 말을 탄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는 예리한 칼이 나와서 그것으로 민족들을 칠 것이요 또 철장으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며,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즙틀을 밟으실 것이라. 또 그의 옷과 넓적다리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계 19:11-16)
이 전쟁으로 군대들은 모두 죽어 그 피가 말고삐까지 차게 되며(계 14:20),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는 산채로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계 19:20).





14) 천국의 도래(천년왕국과 영원세계)
유대인의 남은 자들은 짐승의 표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믿음을 지켜 구원받게 되며(계 12:17),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 과 함께 이 땅에서 통치한다.
 그 후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큰 음성들이 있어 말하기를 "이 세상의 나라들이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어서 그 분이 영원 무궁토록 통치하시리라."고 하더라.(계 11:15)
이때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세상 나라들을 통치하시므로 천국이 임하는 것이다.
그는 위대하게 될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리울 것이요, 또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를 주실 것이며, 그는 야곱의 집안을 영원히 통치할 것이요 그의 왕국은 무궁하리라."고 하니라.(눅 1:32,33)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이 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나 이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절이다. 이 구절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성취 될 것이다.
이때 천년왕국이 시작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실제적인 천국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마태복음 5,6,7장은 바로 이 시대에 교리적으로 적용될 것이다.

 천년왕국이 끝나면 사탄이 잠시 풀려나 반란을 일으키지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할 것이고, 구원받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지옥에서 나와 육신을 입고 부활하여 큰 백보좌 심판에서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불못으로 던져진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은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불못에 던져지는 자신의 친구나 가족들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눈물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더 이상 죽음이나 슬픔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내시며 다시는 사망이나 슬픔이나 울부짖음이 없고 고통 또한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은 다 사라져 버렸음이라."고 하더라.(계 21:4)


1994년 도너반 형제 강의





출처 : 하나님의 경륜
글쓴이 : 나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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