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미지근한 너를 토해 내겠다.한 이유는?

하나님아들 2012. 8. 31. 19:12

미지근한 너를 토해 내겠다.한 이유는?

요한 계시록 3:14-22

글/하원식 목사

 

 오늘은 계시록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말씀을 듣기를 바란다.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에서 동남쪽으로 43마일, 에베소에서는 100마일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전253년에 안디오쿠스 2세가 도시를 세우고 아내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아라고 불렀다고 한다. 신약 성경에서는 부르기아(Phrygia)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지역(행16:6)의 수도였던 라오디게아는 교통의 요지였고 상업도시로 발달한 곳이다. 이곳으로부터 6.5KM 떨어진 히에라볼리에서 흘러 내려오는 온천물을 수로를 통해 받아 사용하였는데 이 온천물이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었고, [부르기아 가루]라고 불리는 눈병 치료의 특효 안약 생산지로 유명하여 의료도시로 알려졌다고 한다.


 거기다가 양털과 목화 생산으로 섬유산업이 유명한 곳이었으니 활발한 무역을 통해 도시 전체가 재정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렸다. 소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라오디게아 역시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을 때 로마제국이 복구작업에 비용을 후원하겠다고 했지만 이 도시 사람들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재건할 정도로 재정적인 능력과 자부심이 강한 도시였다. 이런 배경을 가진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주님의 책망과 권고와 경고 그리고 약속의 말씀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다.


 라오디게아가 이렇게 부(富)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직물(織物)과 의류산업이었다. 특히 이 지역의 특산물인 양모(羊毛)는 까마귀 같이 검은 색의 양털로 유명하였다. 이 양모로 만든 겉옷은 전 세계로 수출되었다. 이 겉옷을 트리미타 라고 했는데 이 겉옷은 너무나 유명하여 라오디게아 라고 하면 이 <트리미타>를 연상하게 되었다. 그래서 18절에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한 것도 이것을 두고 한 말이라고 본다.


 또한  라오디게아는 두 가지 유명한 약품을 생산하였는데 하나는 나-드로 제조된 연고로 귀앓이 치료용이었고, 또 하나는 정제로 만들어진 안약이었다. 정제로 된 이 안약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18절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한 것도 이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이렇게 한마디로 라오디게아는 아시아에서 금융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매우 부유한 가운데 여유롭게 살고 있었던 곳이었다. 이런 곳에 세워진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였다.

 

 풍요 속에서 저들의 신앙의 열도는 식어갔고, 그래서 주님은 저들의 신앙을 다시 촉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라오디게아는 히에라볼리로부터 흘러오는 온천물이 있다고 했다. 땅에서 처음 나온 물은 뜨거운 온도였을텐데 6.5KM 노천 수로를 따라 흘러오는 도중에 물이 식어 라오디게아에 도착했을 때는 뜨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가 되었다.


 라오디게아 지방이 공급받던 또 하나의 물은 골로새 지방에서 오는 물인데 이 물은 차갑고 신선한 물이었다고 한다.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온천수는 치료의 효과가 있어 유익하고 골로새 지방의 차고 신선한 물 역시 사람들에게 유익한 생수가 되지만 라오디게아로 흘러온 미지근한 물은 마시기에 역겨운 물이었으니 주님은 이 지역의 물을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신앙생활과 비유하여 책망하신다.

 

 그리고 주후 60년 경에 대지진이 났을 때 로마 정부가 복구를 도와주겠다고 제의를 했지만 거절할 정도로 부자도시였다. 당시에 활동하던 역사가들은 라오디게아를 가리켜서 지상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라고 일컬을 정도로 물질적으로 풍요한 도시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교회도 재정적으로 넉넉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도 없었다. 열심히 기도해야 할 일도 없고, 자신들의 재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말투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다. 나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큰소리치고 있었다.


 자신들의 영적 상태가 이처럼 미지근함을 깨닫지 못했던 라오디게아 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자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는 넉넉한 생활을 자랑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영적으로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었으며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고 있는 교회였다.

 

 우리는 오늘날 영국 교회를 비롯하여 서방교회들의 영적 침체를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 영적으로 침체되고 있으니 눈에 보이는 교회의 모습 역시 허약한 모습이다. 불과 반세기 전에만 해도 동네마다 세워진 교회들이 교인들로 가득하고 전 세계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하던 나라가 영국이다. 그러나 영국 교회가 이제는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 2000년 고난주일에 더 인디펜던트 신문에 소개된 “(영국)교회, 40년 내 사라진다”는 충격적인 연구보고가 현실화 될까 봐 걱정이다.

 

영국교회가 전 세계 교회들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오늘날 이런 모양으로 침체될 것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부자요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어 보이던 영국교회가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선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예배당 건물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낡아지고 주일예배 드리러 모인 성도들로 가득 찼던 예배당은 날이 갈수록 텅 비어가고 있다. 수많은 영국 교회들은 더 이상 큰 건물을 유지할 재정적인 능력도 인적 자원도 없어 예배당을 부동산 시장에 매물로 내놓는 현실이다. 예배당이 어느 날 공동주택으로 바뀌고 극장이나 스포츠 센터, 식당과 펍(pub)으로 바뀌며 심지어 힌두 사원이나 모슬램 사원으로 팔려가고 있다. http://cafe.daum.net/ilmak


 이런 영국교회를 보면서 한국교회를 본다. 한국교회가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교회가 주목하고 놀랄 만큼 양적으로 성장하였으며 현재는 세계에서 미국교회 다음으로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내는 교회가 된 것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만일 우리도 정신차려 깨어있지 않는다면 언제 영국교회와 유럽 교회의 약한 모습을 따라갈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부자요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는 자랑은 겉으로 보이는 건물의 화려함이나 교인 숫자 많음과 물량적 풍요함이 아니어야 한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행위를 아신 주님은 엄하게 책망하신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상관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살도록 그대로 둔다. 그러나 주님은 이 교회를 사랑하시기에 책망하여 징계하신다. 주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하신 말씀처럼 미지근한 태도를 버리고 열심을 내자. 뜨겁든지 시원하든지 살아있는 우리의 믿음을 보여야 한다. 산 것 같지만 죽은 듯 미지근하여 역겨운 태도를 벗어 던지고 회개하자. 이것만이 살길이라고 촉구하신다.


1. 적극적인 행위를 요구한다.
15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16절에는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하였다.


1) 미지근한 사람들
라오디게아교회 사람들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사람들이었다. 원래 라오디게아의 북쪽에는 히에라볼리라는 도시가 있는데 그곳에서 섭씨 90도나 되는 뜨거운 온천물이 솟아난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뜨거운 온천물이 10Km 떨어진 라오디게아까지 흘러온다. 그런데 문제는 뜨거운 물이 식어져서 나중에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해진 상태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미지근해진 물은 뜨거웠을 때와 달리, 온천수에 들어있는 유황냄새가 심하게 나기 때문에 누구나 다 토하여 뱉어 낼 수밖에 없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라오디게아 지역 상황을 비유로 들며 그들을 심하게 책망하셨다.

 

 15절과 16절을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미지근하지 말라, 차든지 덥든지 하라,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너희들을 내가 토하여 내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2) 자만에 빠진 사람들
라오디게아교회 사람들은 자만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했다. 그들 자신과 교회가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부했다. 이만하면 자기들을 따라올 자가 없고 모든 면에서 넉넉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라오디게아의 사회적 상황을 살펴보면 그들이 그렇게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선 당시의 라오디게아는 은행이 많아 경제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재력이 풍부한 사람들이 많았다.

 

본문에 나오는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현대 교회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외형적인 것이나 물량적인 잣대로 교회를 평가한다. 교회 시스템이 잘 세워져 있으면 “이 교회는 21세기에 맞는 훌륭한 교회야”라고 생각하며, 멋지고 웅장한 교회당 건물을 가지고 있으면 “저 교회는 일류 교회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교인들 스스로도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하고 있으니 스스로 “잘 믿는 사람”이고, 큰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스스로 “큰 믿음의 소유자”며, 매 주일마다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때문에, 스스로 “좋은 신자”라고 착각한다.   http://cafe.daum.net/ilmak


집사, 권사, 안수집사 등의 직분을 맡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믿음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아니다. 너는 네가 가난하고 눈멀고 발가벗은 것을 모르는구나? 너는 다 되었다고 하지만, 너 스스로 곤고하고 가련한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구나?“라고 책망하실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실 물질이 많은 것과 신앙의 부요는 상관이 없다. 성경 지식이 많은 것과 은혜가 충만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한 것과 믿음이 성숙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처럼 착각에 빠져, 스스로 교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됐다󰡑고 생각하는데 주님께서는 󰡐아직 아니야󰡑라고 말씀하지 않으실까요? 우리는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데 나 혼자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데 나 혼자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저는 이 자리에 자기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장님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말씀의 검을 가지고 영적으로 잘못된 부분을 수술하여 건강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주님께 진정으로 인정받는 믿음의 부자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3) 영적으로 둔감해 있었다.
라오디게아 성도들의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한 상태의 신앙은 주님의 성향이 아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신앙의 세계에 중립지대는 있을 수 없다.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지 않으면 멸망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요 3:16) 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을 지칭할 때“깨어 있는 사람”(마 25:43)또는 “빛의 아들”(살전 5:5)이라고 표현한다. 깨어 있는 사람은 시대와 상황을 정확하게 분별하고 민감하게 대처하지만 잠든 상태에 있는 사람은 영적인 분별력을 잃고 만다. 또 빛의 세계는 어둠을 용납하지 않는다(고후 6:14). 진리와 비 진리가 혼돈되고 하나님의 성전이 우상과 똑같은 개념으로 취급된다면 이는 영적으로 암흑시대의 상황이 되고 만다(삼상 3:1). 엊그제 우리 방송에서 행복 전도사로 자처하던 최윤희씨가 신랑과 함께 자살을 했다.


2. 신앙의 재정비를 요구한다.
17절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고 하였다.


1) 연단된 믿음을 가져야 된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육신 적인 삶이 윤택한 반면 영적으로는 매우 가난하고 헐벗은 상태였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 비유에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였다(눅 12:21). 하나님께서는 믿음에 부요한 자를 부자로 인정하신다(약 2:5). 여기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셨는데(18절), 금은 부요의 상징이다. 곧 믿음에 부요하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은 환난과 역경을 통과하면서 연단된 믿음이다. 베드로전서 1:7에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하였다.

 

2) 경건한 삶을 실천해야 된다.

 18절에 또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라오디게아는 의류 제조업의 중심지였다. 특히 라오디게아에서 생산되는 양모는 부드럽고 매끄럽기로 유명해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양모로 만든 옷을 입고, 몸치장하는 것을 좋아했다. “흰옷”은 세마포 예복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도의 합당한 행실을 뜻한다. 계시록 19:8에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고 하였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수치를 드러내었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보실 때 물질의 부요로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외모를 단장하였지만 그들의 내면적 삶은 경건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였다(레 11:45). 베드로후서 3:11-12에는“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하였다.  http://cafe.daum.net/ilmak


3) 영적인 안목을 가져야 된다.
17절에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을 “눈먼 자”로 진단했고 18절에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처방을 하였다. 라오디게아는 의학이 매우 발달해서 특히 눈에 관한 전문의들이 많았고, 안질과 눈병에 좋은 안약들이 많이 개발되었다. 얼마나 유명했든지 다른 도시에서도 환자들이 몰려올 정도였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지역은 물자가 풍부하고 의학이 발달한 부요한 도시였다. 주님께서 “눈 먼 자”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영적인 소경이 되어 신령한 세계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신의 눈이 밝아 사물은 볼 수 있어도 영적인 눈이 밝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눈먼 소경”이라고 하였다(마 23:16).

 

 영적 가치관이 혼미된 사람은 매사를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생각한다(마 23:17-22).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심은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의도를 분별하라는 뜻이다. 고린도전서 2:10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였다. 17절“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주님께서는 그들을 심하게 책망하셨다. 그들이 스스로 부자라고 떠들고 다니지만,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 먼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 벌거벗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가운데 어린이 동화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읽어보았거나, 아니면 들어보신 분들이 계실 것이다. 옛날 사치를 일삼으며 좋은 옷 입기를 대단히 좋아하는 임금님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임금님은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옷을 만든다는 재단사를 고용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그 재단사가 공들여 만들어 바친, 소위 투명한 비단옷을 입고 자랑하듯이 온 백성들 앞을 활보하고 다녔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아무도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구동성으로 임금님의 아름다운 옷을 칭찬하였다. 그 때 한 명의 어린아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임금님은~ 벌거숭이다! 임금님은~ 벌거숭이다!"


 저는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뽐 잡고 다니는 임금님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아니 안타깝다 못해 불쌍한 생각이 든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성도들이 바로 발가벗은 임금님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자가 아니라, 오히려 곤고하고 가련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사물을 잘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눈 먼 자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옷을 잘 차려입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발가벗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3. 임마누엘의 삶을 요구한다.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다. 마음에 담을 쌓고 예수님과 교통이 두절된 생활에서 온전한 신앙으로 회복하라는 뜻이다. 사랑하는 자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주님의 심정을 본문 20절에 말씀한다.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분은 자신을 불태워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시다.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주시기까지 하신 그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십시오. 굳게 닫힌 마음의 문, 빛을 잃은 마음, 세상의 온갖 잡스러운 죄악과 욕심과 교만의 잡초들로 우거진 내 마음의 문을 열고 빛으로 오신 주님을 맞아들이자. 그 길만이 내가 참으로 사는 길이다.


Holman Hunt라는 화가가 그린“세상의 빛”이라는 명화가 있다. 아마 보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 그림에 보면, 예수는 왼손에 초롱을 가지시고, 오른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문의 손잡이는 안에만 달려 있을 뿐, 문 바깥쪽에는 없다. 하나님은 강압적인 힘으로 그 문을 열려고 하지 않고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문 안쪽에서 열기를 기다리시고 계신다.

 

 문에는 담쟁이 넝쿨이 휘감겨 있어서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이 오랫동안 문을 꼭 걸어 잠근 채 그 누구와도 교제를 하지 않고 독선적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늦은 밤인데도 주님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시며,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시고 계시는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부터 22절까지의 말씀을 주제로 삼아 그린 그림이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문의 손잡이가 없다. 이것을 알아차린 어떤 사람은 이 그림이 미완성 작품이거나 화가의 실수라고 비평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화가의 의도적인 상징기법이었다.


 Holman Hunt는 문 밖에 손잡이가 없음은 안에서 문을 열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이고 주님이 강압적으로 열고 들어가지 않으신다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집이 없어 길거리를 헤매는 노숙자가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하루 머물 곳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집의 본래 주인이신 분이 그 집의 문이 열리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신다. 하인인 내가 주인 노릇하며 주인을 문 밖에 세워두고 문전박대하고 있으니 상황이 거꾸로 되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 문을 열면 주께서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마실 것이다. 주님과 더불어 먹는다는 말씀은 식탁에서의 교제이며 천국잔치 초대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겉으로 화려하지만 실상은 능력을 잃은 상태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명령하신다.


1) 음성을 들어야 된다.
예수님께서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시면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하였다(22절). 여기 “귀 있는 자”란 성령의 소리를 듣고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는 복이 있다. 엘리야는 호렙산 굴속에서 세미한 소리 가운데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였다(왕상 19:13). 성령으로 거듭 난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분별한다. 예수님께서는 목자가 우리의 문을 열고 양의 이름을 부를 때 자기의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라간다고 하였다(요 10:4). 말씀의 가치를 알고 사모하는 사람이 쉽게 받아들인다(시 1:2).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그 말씀이 마음 속에서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된다(살전 2:13).


2) 마음 문을 열어야 된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 죄와 죽음 아래 얽매여 신음하는 인간들이 스스로 주님 앞으로 찾아 나아가야 마땅하지만 사람들은 자기의 분수를 모르고 찾아오시는 주님을 거부하고 있다. 옛날 솔로몬 왕은 술람미를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으나 술람미는 그 소리를 듣고도 옷을 벗었다, 발을 씻었다는 핑계로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그가 문을 열었을 때 솔로몬은 가고 없었다. 솔로몬을 잃어버린 술람미는 낭패를 보았고 병이 났다(아 5:2-8). 마음의 문을 닫고 빗장을 풀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교만함과 고정관념의 벽을 쌓고 그것을 허물지 못하는 사람도 주님을 모실 수 없다. 아이처럼 겸손한 사람이 주님을 모시게 된다.


3) 신령한 교제의 행복을 누려야 된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극치다. 또한 이것은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이기도 하다. 오순절 이후 설립된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하였다(행 2:46-47). 삭막한 세상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의 생활은 영혼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된다. 미지근하고 감각을 잃은 영적 상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기만 하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여자가 예쁜 꽃을 아주 싼값에 사고나서 너무 좋아하자, 옆에 있던 친구가 “야, 너는 꽃을 다 사니? 나는 꽃은 받는 것인 줄 알았어.”라고 말하더란다. 그 여자는 하도 기가 막혀서 “야, 너 공주병에 걸렸구나?”하고 하자, 이번에는 한술 더 떠서 “아니 공주도 공주병에 걸리니?”라고 하더란다. 이처럼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거나, 잘못 생각하는 것을 가리켜 '착각'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의 모습과,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자기의 모습이 다를 때, '착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요즘 소위 말하는 "왕자 병"이나 "공주병"이 다 착각의 산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아무리 조언을 하고 충고를 해도 듣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오만하여 자기들의 가난하고 부족함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다는 책망을 받은 것이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모셔들이시기 바란다. 또 이미 주님을 영접하기는 했지만, 마음의 중심에 주님 대신, 여러분이 앉아 있다면 다시 한번 주님께 여러분들의 중심을 드리시기 바란다. 그리하여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누리시기 바란다.ⓗ

 

영상설교보기=풍요속의 빈곤*하원식 목사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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